문화&사상

三神山

醉月 2013. 8. 13. 01:30

삼신산

주1) 전북 부안의 변산, 정읍의 두승산, 고창의 방장산을 민간에서는 옛부터 전설상의 세 신산인 봉래, 영주, 방장의 삼신산으로 불렀다.

주2) 중국 전설에 나오는 상상의 세 신산(神山)으로 신선이 산다는 전설이 있어 선경을 상징하게 되었다.

 

변산팔경가(邊山八景歌)

아동방 금수강산

 


두루돌아 구경할제
춘변산(春邊山) 돌아드니
반도명산 일봉래(一蓬萊)라
동남에는 영주방장(瀛洲方丈)
삼각으로 벌려있고
서북에는 만리해도(萬里海島)
십이무산 통하였다.
해상의 삼신산을
오늘에야 알리로다. (생략)
(1972년도에 채록한 작자 연대 미상의 부안지방 구전민요)

 

참고문헌
◈『오오, 변산이여』(김민성, , 고글, 1995, p 38)

◈ 두산세계대백과

삼신산 : 중국 전설에 나오는 상상의 세 신산(神山). 즉 봉래산(蓬萊山)·방장산(方丈山)·영주산(瀛洲山)의 세산이다. 《사기(史記)》 《열자(列子)》에서 비롯된 이야기로, 《열자》에 의하면, 발해(渤海)의 동쪽 수억만 리 저쪽에 오신산(五神山)이 있는데, 그 높이는 각각 3만 리, 금과 옥으로 지은 누각(樓閣)이 늘어서 있고, 주옥(珠玉)으로 된 나무가 우거져 있다. 그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불로불사(不老不死)한다고 한다. 그곳에 사는 사람은 모두 선인(仙人)들로서 하늘을 날아다니며 살아간다. 오신산은 본래 큰 거북의 등에 업혀 있었는데, 뒤에 두 산은 흘러가 버리고 삼신산만 남았다고 한다.


《사기》에 의하면, BC 3세기의 전국시대 말, 발해 연안의 제왕 가운데 삼신산을 찾는 사람이 많았는데 그 중에서도 진(秦)나라 시황제(始皇帝)는 가장 신선설(神仙說)에 열을 올려 자주 삼신산을 탐험시켰다. 한번은 방사(方士:仙術을 행하는 사람) 서불(徐市)이 소년과 소녀 수천 명을 이끌고 배에 올랐는데, 결국 행방불명이 되었다는 사건은 특히 유명하다. 한국에서도 중국의 삼신산을 본떠 금강산을 봉래산, 지리산을 방장산, 한라산을 영주산으로 불러 이 산들을 한국의 삼신산으로 일컬었다고 한다.


 

1.『史記』 「秦始皇本紀」
旣已, 齊人徐市等上書言, 海中有三神山, 名曰蓬萊方丈瀛洲, 僊人居之. 請得齋戒, 與童男女求之. 於是遣徐市 發童男女數千人, 入海求僊人.

진시황 본기


서시(徐市 : 일설에는 徐福이라고 한다. 方士로서 琅邪 사람) 등이 상서하여 말하기를 “바다 가운데 세 개의 신산(神山)이 있는데, 봉래산(蓬萊山), 방장산(方丈山), 영주산(瀛洲山)이라 하며 거기에는 신선들이 살고 있습니다. 청하건대 재계하고 나서 동남동녀(童男童女)를 데리고 신선을 찾아 나서게 하옵소서”라고 하자, 서시를 보내서 수천 명의 동남동녀를 선발하여 바다로 들어가서 신선을 찾도록 하였다.

 

2.「封禪書」
自威宣燕昭, 使人入海, 求蓬萊方丈瀛州. 此三神山者, 其傳在渤海中, 去人不遠, 患且至, 則船風引而去. 盖嘗有至者 諸僊人及不死之藥皆在焉. 其物禽獸盡白而黃金銀爲宮闕. 未至望之如雲, 及到三神山反居水下. 臨之風輒引去, 終莫能至云. 世主莫不甘心焉. 及至秦始皇幷天下, 至海上, 則方士言之不可勝數. 始皇自以爲至海上而恐不及矣, 使人乃齎童男女入海求之. 船交海中, 皆以風爲解, 曰未能至, 望見之焉. 其明年, 始皇復游海上, 至琅邪, 過恒山, 從上黨歸. 後三年, 游碣石, 考人海方士, 從上郡歸. 後五年, 始皇南至湘山, 遂登會稽, 並海上, 冀遇海中三神山之奇藥. 不得, 還至沙丘崩.

 

봉선서
제나라의 위왕과 선왕, 연나라의 소왕(昭王) 이래로 사람을 바다로 파견하여 봉래, 방장, 영주(蓬萊, 方丈, 瀛洲 : 고대 전설에 따르면 東海에 이 세 산이 있었는데, 이 산들에는 모두 신선이 살기 때문에 ‘三神山’이라고 불렀다.)를 찾도록 하는 일이 잦아졌다.

 

전설에 의하면, 이 삼신산(三神山)은 발해(渤海) 중에 있어 그 길이 멀지 않았으나, 선인(仙人)들은 배가 도착하는 것을 걱정하여 곧 바람을 일으켜 배를 멀리 보냈다고 전해진다. 이미 그곳에 가본 적이 있는 사람들은 선인들과 장생불사의 약이 모두 거기에 있으며, 산 위의 물체, 새, 짐승 등의 색깔은 모두 흰색이며, 궁전은 모두 황금과 백은(白銀)으로 건축하였다고 전한다. 아직 거기에 도달하지 않았었을 때 멀리서 바다라 보면, 삼신산은 천상의 백운과 같으며, 거기에 도달하여 보면 삼신산은 오히려 수면 아래에 처해 있는 듯하다.

 

배가 막 다다르려고 하면 바람이 배를 밀쳐내어 시종 거기에 도달할 수 없었다. 속세의 제왕 중 그곳을 흠모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진 시황이 천하를 통일한 이후, 방사들이 해상 신선전설에 관하여 말하는 횟수는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진시황은 친히 해상으로 나아갔다가 삼신산에 도달하지 못할까 두려워, 동남동녀(童男童女)를 데리고 해상으로 나아가 이 삼신산을 찾도록 사람들을 파견하였다.

 

배가 해상에서 돌아와서 바람을 만나 도달할 수 없었다고 변명하고서, 비록 도달하지는 못했지만 삼신산을 확실히 보았다고 말하였다. 2년째, 진시황은 다시 해상을 순유하며 낭야산(琅邪山)에 도달하고, 항산(恒山)을 거쳐 상당(上党 : 군 이름, 관할구역은 지금의 山西省 동남부에 해당한다.)으로부터 되돌아왔다. 그로부터 5년 후, 진시황은 남쪽으로는 상산(湘山 : 일명 ‘君山’ 또는 ‘洞庭山’이라고도 칭하며, 湖南省 嶽陽縣 西洞庭湖에 위치한다.)까지 순유하고, 회계산(會稽山)에 올라 해상으로 가서 삼신산의 장생불사약을 얻기를 희망하였다. 그러나 얻지 못하고 귀경하는 도중에 사구(沙丘 : 지금의 河北省 廣宗縣 서북쪽으 大平臺에 위치한다.)에서 죽었다.


 少君言上曰, “祠竈則致物, 致物而丹沙可化爲黃金, 黃金成以爲飮食器則益壽, 益壽而海中蓬萊僊者乃可見, 見之以封禪則不死, 黃帝是也. 臣嘗游海上, 見安期生, 安期生食巨棗, 大如瓜. 安期生僊者, 通蓬萊中, 合則見人, 不合則隱.” 於是天子始親祠竈, 遣方士入海求蓬萊安期生之屬, 而事化丹沙諸藥齊爲黃金矣.


이소군이 천자에게 “부엌신에게 제사 지내면, 기이한 물건을 얻을 수 있습니다. 기이한 물건을 얻으면, 단사(丹沙 : 광물 이름, 즉 朱砂, 약용과 안료로 쓰인다. 옛날 方士들은 이것으로 장생불로약과 황금을 만들 수 있다고 믿었다.)를 이용하여 황금을 제조할 수 있으며, 황금으로써 음식 담는 용기를 만들어 사용하면 장수하게 됩니다. 장수하게 되면 바다에 떠 있는 봉래도(蓬萊島 : 동해에 떠 있는 전설상의 세 개 仙山 중 하나, 전설상의 세 산은 蓬萊, 方丈, 瀛洲 인데, 외형은 주전자같이 생겼으며, 산 위에는 금과 은으로 지어진 궁전과 불사약이 있고 신선이 사는 곳이라고 전해진다.) 선인을 볼 수 있으며, 이를 본 이후에 천지에 제사를 지내면, 불로장생할 수 있습니다.


황제(黃帝)께서도 바로 이와 같이 하셨습니다. 이전에 신은 바다에서 노닐다가, 안기생(安期生 : 고대 전설상의 선인. 琅邪 사람으로 東海 해변에서 약을 팔며 살았는데, 당시 사람들은 그의 나이가 1,000살이라고 하였다.)을 만났는데, 안기생은 호박처럼 큰 거대한 대추를 먹고 있었습니다. 안기생은 선인이러서, 봉래(蓬萊)의 선경을 왕래할 수 있었는데, 만약 천자께서 그와 마음이 통하면 그가 나타날 것이지만, 통하지 않으면 숨어버릴 것입니다”라고 아뢰었다. 그러자 천자께서는 부엌신에게 제사 지내고, 방사를 바다로 파견하여 봉래의 안기생과 같은 선인을 찾게 하는 동시에, 단사 등 각종 약물을 사용하여 황금을 제조하는 일에 착수하였다.


上還, 以栢梁災故, 朝受計甘泉. 公孫卿曰 “黃帝就靑靈臺, 十二日燒, 黃帝乃治明廷. 明廷, 甘泉也.” 方士多言古帝王有都甘泉자. 其後天子又朝諸侯甘泉, 甘泉作諸侯邸. 勇之乃曰 “越俗有火災, 復起屋必以大, 用勝服之.” 於是作建章宮, 度爲千門萬戶. 前殿度高未央. 其東則鳳闕, 高二十餘丈. 其西則唐中, 數十里虎圈. 其北治大池, 漸臺高二十餘丈, 命曰太液池, 中有蓬萊, 方丈, 瀛洲, 壺梁, 象海中神山龜魚之屬. 其南有玉堂, 璧門, 大鳥之屬. 乃立神明臺, 井幹樓, 度五十丈, 輦道相屬焉.


천자는 장안으로 돌아와 백량대에서 화재가 났기 때문에, 감천궁에서 각 군현의 총결산 보고서를 받았다. 공손경이 “황제(皇帝)께서는 청령대(靑靈臺)를 지으신 지 12일 만에 화재를 당해서 즉시 명정(明庭)을 지으셨는데, 명정이란 바로 감천궁이옵니다”라고 아뢰었다. 방사들도 고대의 제왕 가운데 감천에 도읍을 정한 사람이 있었다고 아첨하였다.

 

그 후 천자는 감천궁에서 제후들의 조현을 받고, 감천산에 제후들의 부제(副祭)를 지었다. 용지(勇之)는 “월(越)나라의 풍속에 따르면 화재가 발생한 후에 다시 집을 지을 때는 반드시 월래의 것보다 크게 지어, 집의 크기로 재앙의 기운 제압해야 합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규모가 천문(千門) 만호(萬戶)인 건장궁(建章宮)을 지었다. 전전(前殿)의 규모는 미앙궁(未央宮)보다 높고 웅대하였다.

 

그 동쪽에는 높이가 20여 장(丈)이나 되는 봉궐(鳳闕)이 있었으며, 그 서쪽에는 주위 수십 리의 호권(虎圈)이 있는 당중지(唐中池)가 있었다. 당중지 북쪽에는 태액지(太液地)라고 불리는 큰 연못을 팠는데, 연못 안의 누대, 즉 점대(漸臺)의 높이는 20여 장이나 될 정도로 높았으며, 그 속에는 바다의 신선, 바다거북, 어류를 본떠 만든 봉래(蓬萊), 방장(方丈), 영주(瀛洲), 호량(壺梁)이라고 불리는 가짜 선산(仙山)이 있었다. 그 남쪽에는 옥당(玉堂) 벽문(璧門), 대조(大鳥)등을 만들어 놓았다. 또한 높이가 50장이나 되는 신명대(神明臺), 정간루(井幹樓)를 세웠는데, 연도(輦道)를 서로 연결해놓았다.


3.『列子』「湯問篇」
渤海之東不知幾億萬里, 有大壑焉, 實惟無底之谷, 其下無底, 名曰歸墟. 八紘九野之水, 天漢之流, 莫不注之, 而無增無減焉. 其中有五山焉, 一曰岱輿, 二曰員嶠, 三曰方壺, 四曰瀛洲, 五曰蓬萊. 其山高下周旋三萬里, 其頂平處九千里. 山之中閒相去七萬里, 以爲鄰居焉. 其上臺觀皆金玉, 其上禽獸皆純縞. 珠玕之樹皆叢生, 華實皆有滋味, 食之皆不老不死. 所居之人皆仙聖之種, 一日一夕飛相往來者, 不可數焉. 而五山之根無所連箸, 常隨潮波上下往還, 不得蹔峙焉. 仙聖毒之, 訴之於帝. 帝恐流於西極, 失羣仙聖之居, 乃命禺疆使巨鼇十五擧首而戴之. 迭爲三番, 六萬歲一交焉. 五山始峙而不動. 而龍伯之國有大人, 擧足不盈數步而曁五山之所, 一釣而連六鼇, 合負而趣歸其國, 灼其骨以數焉. 於是岱輿員嶠二山流於北極, 沈於大海, 仙聖之播遷者巨億計. 帝憑怒, 侵減龍伯之國使阨, 侵小龍伯之民使短. 至伏羲神農時, 其國人猶數十丈.

 

발해(渤海)의 동쪽 몇 억만 리가 되는지 알 수 없는 곳에 큰 계곡이 있다. 실로 끝이 없는 계곡으로 더 이상의 밑이 없어 ‘귀허(歸墟)’라고 한다. 팔굉(八紘) ․ 구야(九野)의 물이 은하수로 흐르는데 그 흐름이 멈추지 않고 증감(增減)이 없다. 그 가운데에 오산(五山)이 있는데 대여(岱輿)․원교(員嶠)․방호(方壺)․영주(瀛洲)․봉래(蓬萊)이다.

 

그 산의 높낮이는 두루 돌아 3만 리이고, 그 정상(頂上)의 편평한 곳은 9천리다. 산의 중간간의 거리는 7만 리로 이웃이 거주하고 있다. 그 위에 있는 집의 모습은 모두 금(金)과 옥(玉)으로 되어있으며, 그 곳의 금수(禽獸)들은 모두 순백색이다. 옥과 구슬로 된 나무가 모두 무리지어 살고, 그 아름다운 열매는 모두 맛이 좋아, 먹으면 모두 불로불사(不老不死)한다. 그 곳에 거주하는 사람은 모두 신선(神仙)과 성인(聖人)들로서 하루 낮과 하루 저녁을 날아 서로 왕래하는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그리고 오산(五山)의 밑은 큰 대나무 통(箸)에 연결되어있는데 항상 조수(潮水)와 파도를 따라 상하(上下)로 왕복하고 돌아 잠시도 우뚝 솟아나지 않는다. 선성(仙聖)이 이것을 한(恨)하여 상제(上帝)께 호소하였다. 상제가 산이 서쪽 끝으로 흘러가서 선성(仙聖)의 무리가 거주할 곳을 잃을까 두려워하여, 마침내 우강(禺疆)에게 명하여 거대한 자라 15마리로 하여금 머리를 들어 그것을 받치게 했다. 돌아 흐르기를 세 번 하니, 6만년에 한 번 교차한다. 오산(五山)은 처음에는 우뚝 솟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용백지국(龍伯之國)에 거인(大人)이 발을 들어서 몇 보 걷지도 않고 오산(五山)이 있는 곳에 이르러, 한 번의 낚시로 자라 다섯을 잡아서 모두 등에 지고 그 나라로 돌아가서, 점치는 용도로 자라의 뼈를 태웠다. 이에 대여(岱輿)와 원교(員嶠) 두 산은 북극(北極)으로 흘러가 대해(大海)에 가라앉았다.

 

선성(仙聖)이 흩어져 옮긴 자가 많아 억(億)을 헤아린다. 이에 상제가 크게 노하여 용백지국을 점점 협소하게 만들고 그 백성의 키를 작게 만들었다. 그런데도 복희씨와 신농씨의 시대에 이르러 그 나라의 사람들의 키가 오히려 수십 장이었다.

 

4.『後漢書』卷八十五「東夷列傳」第七十五
會稽海外有東鯷人, 分爲二十餘國. 又有夷洲及澶洲. 傳言秦始皇遣方士徐福將童男女數千人入海, 求蓬萊神仙不得, 徐福畏誅不敢還, 遂止此洲, 世世相承, 有數萬家.

 

회계(會稽)의 바다 밖에 동제인(東鯷人)이 있는데, 나뉘어 20여 나라가 되었다. 또 회계의 바다 밖에는 이주(夷洲) 및 단주(澶洲)가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진시황(秦始皇)이 방사(方士) 서복(徐福)을 보내어 동남동녀(童男童女) 수천 명을 데리고 바다에 들어가 봉래(蓬萊)의 신선(神仙)을 구하게 하였으나, 얻지 못하였다. 서복은 참형(斬刑)을 두려워하여 감히 돌아오지 못하고 결국 이 곳에 정착하였는데, 세세(世世)로 서로 계승하여 수만 가구가 되었다.

 

5.『星湖僿說』「經史門」
<徐市>
三山之說昉於燕齊之君史記封禪書云鄒衍以陰陽主運顯於諸侯而燕齊海上之放士傳其術不能通自齊威宣燕昭使人入海求蓬萊方丈瀛州此三神山者其傳在勃海中去人不遠及至始皇乃齎童男女入海求之衍是齊人而燕昭王師事之則燕齊迂怪之說衍爲之作俑而三山非起於始皇矣
旣云去人不遠而射魚于之罘山下之罘在萊州文登縣東北始皇嘗登臨刻石若遠入東洋何必道由萊海耶 由此而直抵者惟朝鮮在耳 其間雖島嶼羅絡曷嘗有仙居如方士所言此其所指可以彷彿識取矣 倭人言三山在其國以熱田熊野富士當之徐市之後爲秦氏
括地志云市居亶州晉時異人來貿易此孫權之欲俘其民而不能達者也又安知亶非檀君之國耶句麗而亦稱驪何以異是朝鮮人云三山在國中以金剛智異漢拏當之杜詩方丈三韓外註云在帶方國南此詩此註未知何據果必有考而非的證也
通典云百濟海中有三島出黃漆樹六月取汁柒器物若黃金此乃今之黃漆而惟濟州産此物則三島者卽濟州之稱又或島中有三座山而云爾也
高麗趙彝傳云有金裕者叛入元紿云海東三山有藥物遣我可得於是齎元丞相安童書來曰聞王國土産可備藥用其品三山液藥方大嶺山香栢子智靈洞全蜜有體人蔘南海島失母松金剛山石茸觀音松上水風眠松葉不盡錄盖或有或無後徐市而同套者也且置三山之有無市之東浮則非訛五百童船果何處止泊而不還倻
惟我太平之邦爰自 ? 古箕子遜荒則來居孔聖浮海則欲居自是海外樂地之首如倭者不過一咮 ? 島夷風氣俗尙無足言者
市旣避秦入海必不捨朝鮮而救倭也其所謂三山仙藥特讏言瞞人也按東史辰韓者秦之避亂者通考云其言語有類秦人故或謂秦韓秦與辰音同左傳辰嬴可證也夫朝鮮之於秦卽風馬牛也齊民流移之徒豈有越萬里度夷貊得至東國之理又豈有過遼瀋四郡之墟而窮到我東南之一角耶想其勢非浮海則不能達也
關中之於東海旣東西厓角秦人而浮海非流民所辨必將賴國之資送者也當其時徐市浮海而東邦果有自秦來泊者辰韓之爲徐市國可知史云馬韓割東界與辰韓箕準者立國於漢初者也然杜佑通典云準攻馬韓破之自立爲韓王則準之前已有馬韓矣意者童船直指三山來泊馬韓之界馬韓割其東與之爲辰韓而未幾馬韓爲箕準所逐也
通典只云弁辰而不謂之辰韓又弁辰二國之所統小國二十四而以弁辰稱者十一然則弁國亦必秦人同時來者矣東人不能深考謂三韓之號起自箕準誤矣
其以楓嶽當蓬萊者無所據佛書有一萬二千曇無竭住在東海金剛之語於是以楓嶽當之而又以峯峀之多當一萬二千之目不但曇無竭之非峯峀亦何曾有許多峯耶
又因徐市三山之語乃據杜詩指智異爲方丈而蓬萊無所故臆以爲三山之一其不根如此史記淮南王傳秦皇帝遣振男女三千人資之三穀種百工而行徐福得平原廣澤山王不來語有不同當攻

 

삼산(三山)이란 말은 연․제(燕齊)의 임금에서 시작되었다. 「사기」(史記) 봉선서(封禪書)에 “추연(鄒衍)이 음양주운(陰陽主運)이란 술법으로 제후(諸侯)에게 나타나게 되자, 연 나라․제 나라 지방 해상(海上)에 있는 방사(方士)들이 그의 술법을 전했으나 능히 통한 자가 없었다.

 

그리고 제 위왕(齊威王)․연 소왕(燕昭王) 때부터 사람을 시켜 바다로 들어가 봉래(蓬萊)․방장(方丈)․영주(瀛洲)를 찾도록 하였으니, 이 삼신산(三神山)이란 산은 전설에 따르면 발해(渤海) 속에 있어서 인간세상과 거리가 멀지 않다는 것이다. 또 나중 시황(始皇) 때에 이르러 시황은 방사들에게 어린 남녀를 주어 바다로 들어가 불사약(不死藥)을 구해 오도록 하였다.”고 했다. 추연(鄒衍)이란 자는 연 나라 사람이었는데, 연 소왕이 스승으로 섬겼었다. 그런즉 연 나라와 제 나라에서 전해진 이 오괴(迂怪)한 이야기는 추연에게서 시작되었던 것이요, 삼신산이란 전설도 시황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이미, “인간 세상과 거리가 멀지 않다.” 하였고 또, “물고기를 지부산(之罘山) 밑에서 활로 쏘아 잡았다.” 하였으니, 이 지부산은 내주(萊州) 문등현(文登縣) 동북쪽에 있는데, 시황이 일찍이 이 산에 올라 돌에가 글까지 새겼었다. 만약 멀리 동쪽 바다로 들어갔으면 길이 꼭 내주 바다를 거쳐야 할 필요가 있었겠는가?


여기로 말미암아 바로 닿는 곳은 오직 조선(朝鮮)이 있을 뿐이다. 그 사이에 비록 섬들이 여기저기 벌여 있으나 어찌 일찍이 신선이 있어서 살았겠는가? 방사가 이야기했다는 것도 이런 곳을 가리켜서 신선이 있는 듯이 속여 넘긴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왜인(倭人)은, “삼산은 우리나라에 있는데, 열전(熱田)․웅야(熊野)․부사(富士) 이 세 산이 해당된다. 서시(徐市)의 자손이 진씨(秦氏)로 되었다.”는 것이다.


「괄지지」(括地志)에는, “서시는 단주(亶州)에 살았고, 진(晉)나라 때 이상한 사람이 무역하러 오기도 했는데, 손권(孫權)이 그의 백성을 사로잡으려고 했으나 거기까지 들어가지 못하였다.”고 했으니, 이 단주란 지대가 또한 단군(檀君)의 나라는 아니었는지를 어찌 알겠는가? 구려(句麗)도 또한 여(驪)라고 일컬었으니, 이와 뭐 다르겠는가?


조선 사람은, “삼산이 나라 안에 있는데 금강(金剛)․지리(智異)․한라(漢拏) 이 세 산이 해당된다.”고 한다. 두시에 “방장산(方丈山)은 삼한 밖이로구나.(方丈三韓外)라.” 하고, 그 주에 ‘대방국(帶方國) 남쪽에 있다.’고 하였으니, 이 시와 이 주는 어디에 근거한 것인지 알 수 없다. 저도 반드시 상고한 바가 있었을 것이나 정확한 증거는 아니다.


「통전」(通典)에, “백제(百濟)는 바다 가운데 삼도(三島)가 있는데 황칠(黃漆)나무가 저절로 생겨난다. 6월에 그 즙을 내어서 그릇에다 칠하면 황금빛처럼 된다.”고 하였다. 이는 지금의 황칠(黃漆)이란 것인데, 오직 제주(濟州)에서만 생산된다. 이 삼도는 바로 제주의 칭호이고, 또 어떤 이는, “섬 가운데 삼좌산(三座山)이 있기 때문에 삼도라고 한다.” 하기도 한다.


고려 조이전(趙彛傳)에, “김유(金裕)란 자가 반란을 일으키다가 도망쳐 원(元)나라로 들어가서 속이기를, ‘바다 동쪽 삼산에 약물(藥物)이 있는데, 나를 돌려보내주면 구해 올 수 있다.’고 하였다. 원나라는 그의 말을 믿고 원나라 승상(丞相) 안동(安童)의 편지를 주어 고려로 돌려보냈는데, 그 편지에, ‘듣건대, 왕(王)의 나라에는 생산되는 약품(藥品)이 많다고 하므로 그것을 조금 준비하려고 한다. 삼신산에서 나는 액약(液藥), 방대령산(方大嶺山)에서 나는 향백자(香栢子), 지령동(智靈洞)에서나는 전밀(全蜜), 또 유체 인삼(有體人蔘), 남해도(南海島)에서 나는 실모송(失母松), 금강산(金剛山)에서 나는 석용(石茸)․관음송(觀音松)․상수풍(上水風)․면송엽(眠松葉)이다.’고 하였다.” 딴 것은 다 기록할 수 없다. 대기 이는 혹 있는 것이기도 하고 혹 없는 것이기도 한 약품인데, 서시 이후로부터 남을 속이는 같은 투식이었다. 또 이 삼신산이 있느니 없느니 하는 말은 그만두고, 서시가 동쪽 바다로 떠 나왔다는 것이 거짓이 아니라면 5백 명 어린이가 탄 배가 과연 어느 곳에 닿아서 끝내 돌아가지 않았을까?


오직 우리 태평한 나라는 아주 옛날부터 기자(箕子)가 ‘난을 피하여’(遜荒), 와서 살았었고, 공자(孔子)도 ‘바다로 떠 나가겠다’ 한 것은 이 곳에 살려는 것이었으니, 본래부터 우리나라는 바다 밖에서 첫째로 치는 낙지(樂地)이다. 저 왜인(倭人)같은 것은 한 섬 오랑캐에 불과했기 때문에 그들의 풍기와 습관이란 족히 말할 것이 없다.


서시가 진(秦)나라를 피해서 바다로 들어왔으면, 반드시 이 조선을 버리고 왜국(倭國)으로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이른바 “삼신산에 선약(仙藥)을 구하러 갔다.”라는 전설은 다만 거짓말로 남을 속이는 데에 불과했던 것이다. 동사(東史)에 상고하니, “진한(辰韓)은 진(秦)나라 때 피난한 자가 와서 살던 나라이다.”하였고, 「통고」(通考)에는 “그들의 언어가 진(秦)나라 사람과 비슷한 까닭에 혹 진한(秦韓)이라고도 한다.”하였으니, 이 진(辰)과 진(秦)의 음이 같음은, 「좌전」(左傳) 진영(辰嬴)이란 말에 보아도 증명할 수 있다.


대저 조선에서 진나라까지의 거리를 따지면 풍마우(風馬牛)처럼 동떨어지게 먼 곳이다. 백성 중에 떠돌아다니는 무리로서 어찌 먼 바다를 건너고 오랑캐 지대를 거쳐서 동국(東國)까지 올 이치가 있겠으며, 또 어찌 요심(遼瀋)과 사군(四郡)의 터를 지나서 우리나라 동남쪽 한구석까지 올 수 있었겠는가? 그 당시 형편은 추상해 보아도 바다로 떠서 오지 않으면 능히 도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 관중(關中)에서 동해(東海)까지 거리를 따지면 동쪽과 서쪽이 천애(天涯)와 지각(地角)처럼 동떨어지게 먼데, 진 나라 사람으로서 바다를 건넌다는 것은 떠돌아다니는 백성의 처지로는 판단할 수 없었을 것이고, 반드시 나라 힘으로 보내는 방침이 있어야 했을 것이다. 그 때 마침 서시가 바다에 떠 나왔고 우리나라에도 과연 진 나라로부터 떠돌아온 자가 있었다면, 진한(辰韓)이 서시의 나라로 되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동사(東史)에 이르기를, “마한(馬韓)이 동쪽 지대를 베어 진한(辰韓)에 주었다.”했고, 또 “기준(箕準)이란 자는 한(漢)나라 초기에 나라를 세웠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두우(杜佑)의 「통전」(通典)에는 “기준을 쳐서 깨뜨리고 스스로 마한의 임금 노릇을 하였으니, 기준의 전에도 이미 마한이 있었다.”고 하였다. 추측컨대 진(秦)나라 때 아이들이 탄 배가 바로 삼산을 가리키면서 마한 접계에 와서 멈추자, 마한에서 그 동쪽 지대를 갈라 진한(辰韓)에 주었던 것인데, 얼마 안 되어 마한이 기준에게 쫓긴 바가 되었던 것인 듯하다.


그런데 「통전」에는 다만 변․진(弁辰)이라고만 하고 진한이라고는 하지 않았다. 또 변․진 두 나라가 거느린 작은 국가의 수효가 스물넷이나 되었는데, 변진으로 칭호한 자가 열 한 나라나 되었다고 하였다. 이로 본다면 변국(弁國)도 역시 진 나라 때 같이 온 사람이 살았던 것인 듯하다. 우리나라 사람은 깊이 상고하지 않고 삼한(三韓)이란 칭호가 기준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니 이는 잘못이다.


그리고 풍악(楓嶽)으로써 봉래(蓬萊)라고 하는 것도 근거한 바가 없는 말이었다. 불서(佛書)에 “1만 2천 담무갈(曇無竭)이 동해(東海) 금강(金剛)에 머물러 있다”는 이유로 이 풍악을 봉래로 인증하게 되고, 또는 이 풍악의 많은 봉우리가 “1만 2천이란 수효와 똑같게 되었다.”고들 한다. 하나 ‘담무갈’이란 것이 봉우리가 아닐 뿐 아니라 어찌 일찍이 이렇게 많은 봉우리가 있었던 것이겠는가?


또 서시의 삼산이라는 말을 그대로 따르고, 두주(杜註)에 이른 ‘지리(智異)가 방장(方丈)이다.’ 한 것도 그대로 따른다 할지라도, 봉래는 있는 곳이 없는 까닭에 억측으로 이 풍악을 삼산의 하나라고 들 하니, 그 근거가 없다는 것이 이와 같다. 「사기」(史記) 회남왕전(淮南王傳)에, “진황제(秦皇帝)가 어린 남녀 3천 명을 보내고 오곡(五穀) 종자와 백공(百工)의 기구도 빠짐없이 대주었는데, 서복(徐福)은 평원과 광택(廣澤)을 얻어 거기에 머물러서 왕노릇을 하면서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 말이 위와 같이 않은 점이 있으니, 마땅히 상고해 보아야 하겠다.

 

6.『芝峯類說』卷二「地理部」
<山>
拾遺記曰扶桑五萬里, 有磅磄山, 上有桃樹百圍萬歲一實, 欝水在磅磄山東, 生碧藕長千常, 故有萬歲氷桃, 千常碧藕之說, 余意磅磄, 與方丈音相, 近俗謂智異山爲方丈山, 又世傳昔有人於高城海邊, 見水中臥石, 題曰方丈山碑, 以此或疑金剛亦號方丈山云, 所謂鬱水, 恐指鬱陵島而言, 按八尺爲尋, 倍尋爲常, 一云七尺爲常.
拾遺記曰蓬萊山高二萬里, 水淺有細石如金玉, 不加陶冶, 自然光淨, 東有鬱夷國云, 所謂細石, 似今碁子之類而鬱夷與鬱陵島音相近, 鬱陵亦古國名, 王維送日本晁監序曰扶桑若薺, 鬱島如萍, 此也, 又曰圓嶠山上有方湖, 周廻千里, 今漢拏山上有深池, 世謂漢拏爲圓嶠者, 盖有據矣.

 

『拾遺記』에 말하기를, “부상(扶桑)은 오만 리, 거기에 방당산(磅磄山)이 있고, 산 위에 복숭아나무가 있으니 나무의 둘레가 백 아름이나 되며, 만 년에 한 번씩 열매를 맺는다. 울수(鬱水)는 방당산의 동쪽에 있는데, 거기에는 푸른 연(蓮)이 있어 길이가 천상(千常)이나 된다.

 

그런 까닭에 만세빙도(萬歲氷桃)니, 천상벽우(千常碧藕)니 하는 설이 있다.”고 하였다. 내 생각에는 방당(磅磄)과 방장(方丈)은 발음이 서로 비슷하다. 세속(世俗)에서 지리산(智離山)을 방장산(方丈山)이라고 한다. 또 세상에 전하기를, 옛날 고성(固城)의 바닷가에 살고 있던 한 사람이 물가운데 누워 있는 돌을 보고 거기에 방장산비(方丈山碑)라고 제자(題字)하였다 한다. 이 때문에 혹은 금강산(金剛山)도 방장산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닐까 의심된다. 소위 울수(鬱水)라는 것은 아마 울릉도(鬱陵島)를 가리킨 것일 것이다. 고찰하여 보니 팔 척(八尺)을 심(尋: 한 길)이라 하고, 심의 배(倍)를 상(常)이라고 한다. 일설에는 칠 척(七尺)을 상(常)이라고 하였다.


『拾遺記』에 말하기를 “봉래산(蓬萊山)의 높이는 이만 리, 물은 얕고, 잔 돌(細石)들이 있는데, 금 같고 옥 같아서 갈고 다듬지 않아도 자연히 광채가 나고 깨끗하며, 그 동쪽에는 울이국(鬱夷國)이 있다.”고 하였다. 소위 잔 돌이라고 한 것은 지금의 바둑돌 같은 따위일 것이고, 울이(鬱夷)는 울릉도와 발음이 서로 비슷한 것이다. 울릉도 또한 옛날 나라의 이름이었다. 왕유(王維)가 일본의 조감(晁監)을 송별하는 서문(序文)에 말한, “부상(扶桑)은 납가세풀 같고 울도(鬱島)는 마름 같다.”고 한 것이 이것이다. 또 말하기를, “원교산(圓嶠山) 위에 네모진 호수가 있으니 주위가 천리다.”고 하였다. 지금 한라산 위에 깊은 못이 있다.

세상에서 한라산(漢拏山)을 원교(圓嶠)라고 하는 것은 대체로 근거가 있는 것이다.

 

7.『擇里志』
「山水」
智異山在南海上, 是爲白頭之大盡脉, 故一名頭流山, 世以金剛爲蓬萊, 以智異爲方丈, 以漢拏爲瀛注, 所謂三神山也. 地志 以智異山爲太乙所居, 羣仙所會.

 

지리산은 남해(南海)가에 있다. 이곳은 백두산 산맥이 크게 끝난 곳으로 산의 다른 명칭은 두류산(頭流山)이다. 세간에서는 금강산을 봉래산(蓬萊山), 지리산은 방장산(方丈山), 한라산을 영주산(瀛州山)이라 하는데 소위 삼신산(三神山)이다. 『지지(地誌)』에는 지리산을 태을선인(太乙仙人)이 사는 곳이며, 뭇 신선이 모이는 곳이라 하였다.

 

8. 삼신산 관련 사적

◈『新增東國與地勝覽』卷三十九
廣寒樓
黃守身記府南二里許地勢高平敵闊有小樓曰廣通歲夊頹廢歲甲寅府使閔君恭改起新樓丁巳柳君之禮繼加丹√甲子河東鄭相國麟趾易名以廣寒噫湖南勝景莫勝於吾鄕而吾鄕勝賞尤莫勝於斯樓云云姜希孟詩知名南國廣寒樓六月登欲秋挂影忽來天宇逼朱欄曲豦過牽牛○李石亨詩方丈山前百尺樓丹梯高架碧山頭水連平野烟光合雲棬遼岑雨色收臨水却疑天上坐倚風還似月中遊人間自有淸虛府何用區區世外求○成任詩爽氣侵人近水樓廣寒仙境蓼溪頭風生南陌炎塵隔簾捲西山莫雨水桂魄正當淸夜滿銀橋誰繼昔人遊天光上下明知鏡身入淸虛不待求

 

황수신(黃守身)의 기문에, “부의 남쪽 2리쯤 되는 곳에 지세가 높고 평평하며 넓게 틔어 있는데 거기에 작은 누각이 있으니, 그 이름이 광통(廣通)이다. 세월이 오래되어 퇴폐하매 갑인(甲寅)년에 부사 민공(閔恭)이 고쳐 새 누각을 세웠고, 정사(丁巳)년에 유지례(柳之禮)가 계속 이어 단청을 가하였다. 갑자(甲子)년에 하동(河東) 정상국(鄭相國) 인지(麟趾)가 광한루라고 이름을 고쳤다.

 

아, 호남의 경치가 우리 고을보다 나은 곳이 없고, 내 고장 경치 좋은 곳에 광한루보다 나은 것이 없다.” 하였다. 강 희맹(姜希孟)의 시에, “남국의 이름난 광한루에 6월에 올라오니 가을처럼 서늘하네. 달그림자가 홀연히 비치니 하늘이 가깝고, 붉은 난간이 굽은 곳에 견우성이 지나누나.” 하였다. 이 석형(李石亨)의 시에, “방장산(方丈山) 앞에 백척루(百尺樓), 푸른 산머리에 붉은 사다리가 높직이 걸렸네. 물은 들판에 연하여 연기빛이 어울렸고, 구름 걷힌 먼 산봉우리엔 비 기운이 걷히었네. 물가에 임하니 천상에 앉은 듯, 바람 앞에 섯으니 달 가운데 노는 듯, 인간에 스스로 달세계(淸虛府)가 있는데, 하필 구구하게 세상밖에 구하리요.” 하였다.

 

성임(成任)의 시에, “상쾌한 기운이 물가 누각에 스며드니, 요천(蓼川) 머리에 광한(廣寒)의 선경(仙境)이로다. 남쪽 언덕에 바람이 일어나니 더위에 멀어졌고, 서산에 주렴 걷히니 저녁 비가 걷히었네. 달은 때마침 맑은 밤에 둥근데, 은하수 다리에는 누가 옛사람 놀던 것을 이을꼬. 하늘빛은 상하에 명경처럼 밝으니, 몸이 청허부(淸虛府)에 바로 드달리네.” 하였다.

 

 

◈ 광한루 廣寒樓
전라북도 남원시 천거동에 있는 조선 중기의 목조누각.
조선시대의 재상 황희(黃喜)가 남원에 유배가서 1418년 현재보다 규모가 작은 누를 지어 광통루(廣通樓)라 했는데, 1434년 남원부사 민여공(閔汝恭)이 증축했고, 1444년(세종 26) 전라관찰사 정인지(鄭麟趾)에 의해서 광한루라 불리게 되었다. 광한루란 말은 달 속의 선녀가 사는 월궁의 이름인 광한전(廣寒殿)의 "광한청허루"(廣寒淸虛樓)에서 따온 것이다. 1461년 신임부사인 장의국(張義國)이 요천강(蓼川江) 물을 끌어다 연못을 조성하고 4개의 홍예로 구성된 오작교를 화강암과 강돌로 축조하여 월궁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1584년 송강 정철에 의해 수리될 때 봉래(蓬萊)·방장(方丈)·영주(瀛州)의 삼신산(三神山)을 연못 속에 축조하므로 광한루, 오작교와 더불어 월궁과 같은 선경을 상징하게 되었다.

 


◈ 광한루원
전라북도 남원시 천거동에 있는 조선시대의 누원. 사적 제303호. 지정면적 69,796㎡. 누원에는 호수와 오작교·삼신산(三神山)·춘향사(春香祠)·충혼각·남원국악원, 수중누각인 완월정(玩月亭)과 광한루(보물 제281호) 등이 펼쳐져 있다.


누원의 북쪽으로는 교룡산(蛟龍山)이 우뚝 서 있고, 남쪽에는 금괴같이 보배롭다는 금암봉(金巖峰)이 있으며 멀리 지리산이 보인다.
지금의 광한루는 1170년(문종 24) 전중감(殿中監)이었던 황공유(黃公有)가 무신의 난으로 벼슬을 버리고 남원으로 내려온 뒤, 그의 후손 감평이 이곳에 일재(逸齋)라는 조그마한 서실(書室)을 지은 때부터 유래된다.


그 뒤 그의 아들 희(喜)는 한때 남원에 유배되었는데, 일재의 옛터에 광통루(廣通樓)라는 누각을 지은 것이 광한루의 시초이다. 1444년(세종 26) 전라도관찰사 정인지(鄭麟趾)가 광통루의 아름다움을 월궁(月宮)에 비유하여 광한청허부(廣寒淸虛府)라 칭한 것에서 광한루라 부르게 되었다.


1461년(세조 7) 부사 장의국(張義國)은 누원 일원에 요천강의 맑은 물을 끌어다가 은하수를 상징하는 호수를 만들었다.
호수에는 지상의 낙원을 상징하는 연꽃을 심고 은하수에 가로막힌 견우성과 직녀성이 칠월칠석에 만난다는 오작교를 가설하였으며, 배를 띄워 상한사(上漢笑)라 이름하고 베틀바위를 호수에 넣어 지기석(支機石)이라 불렀다. 오작교에는 4개의 궁륭식 무지개 구멍이 있어 양쪽 호수의 물이 통하고 있다.


그 뒤 1582년 정철(鄭澈)이 전라도관찰사로 부임하여 또다시 은하의 못 가운데 신선이 살고 있다는 전설의 삼신산을 상징하는 봉래(蓬萊)·방장(方丈)·영주(瀛洲)섬을 만들어, 봉래섬에는 백일홍을 심고 방장섬에는 녹죽(綠竹)을 심었는데, 영주섬만은 영주각을 건립하였으며 섬과 섬 사이에는 사다리꼴 다리로 연결하였다.


이로써 광한루원은 천체와 우주를 상징하는 누원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정유재란 때 왜적들의 방화로 모두 소실되었다. 현재의 광한루는 1638년(인조 16) 부사 신감(申鑑)에 의해 재건되었으며, 영주각은 1794년(정조 18) 부사 이만길(李萬吉)이 재건하였다.


광한루의 전·후면에는 호남제일루(湖南第一樓)·계관(桂觀)·광한루의 현판이 걸려 있으며, 새로 마련한 남쪽 정문 문루에는 청허부(淸虛府)의 현판이 걸려 있다. ‘광한’과 ‘청허부’는 하늘나라 옥경(玉京 : 달나라의 서울)에 들어서면 ‘광한 청허부’의 현판이 걸려 있다는 신화적 전설을 상징하고 있으며, ‘계관’은 달나라의 계수나무를 상징한다.


광한루 현판은 신익성(申翊聖)이, 호남제일루·계관·영주각의 현판은 1855년(철종 6) 부사 이상억(李象億)이 본관을 중수하면서 손수 써 걸었으며, 이 중 ‘계관’ 현판은 동학운동 때에 강대형(姜大炯)이 다시 써 걸었다.
1869년(고종 6) 무렵 광한루 본관이 차츰 북쪽으로 기울어져 이를 방지하기 위해 누의 북쪽에 다락을 세워 층층대를 만들어놓았다. 1925년 수리공사 때에 누의 동쪽 구석에 직실(直室)을 마련하였다.
이 누원은 천체와 우주의 상징요소가 충만한 특징적 누원으로 꼽을 수 있으며, 아름다운 풍취와 풍류는 유명하여 강희맹·김시습·김종직·정철 등 당대문호의 시문이 수두룩하다.


1963년 주변의 토지를 매입하고 호수 주위를 정비하여 국악원, 월매(月梅)의 집과 방장섬에 육모정을 세웠으며, 1965년 영주각을 단청하고, 1969년에는 호수를 확장하고 수중누각 완월정을 세우는 한편, 지금까지 북쪽을 정문으로 써 오던 것을 후문으로 삼고 따로이 남쪽에 정문을 신축, ‘廣寒淸虛府(광한청허부)’라는 현판을 써 걸었다. 1983년 다시 경역을 확장하여 누원 주변을 정비, 사적으로 지정하였다.
이 광한루는 이몽룡과 성춘향의 〈춘향전〉으로 더욱 유명하여졌는데, 1931년에 지어진 춘향사에는 ‘萬古烈女春香祠(만고열녀춘향사)’라는 현판이 걸리고 김은호(金殷鎬)가 그린 춘향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사월초파일 춘향의 생일에는 춘향제를 올리며, 그네뛰기 · 시조백일장 · 씨름대회 · 궁술대회 · 춘향뽑기 등 각종 군민행사가 행해진다. ≪참고문헌≫ 南原邑誌, 南原誌, 古都 南原의 얼(남원군,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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