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臨濟의 ‘참사람’ 연구

醉月 2013. 8. 9. 01:30

臨濟의 ‘참사람’ 연구

차례

1. 사람을 구해내는 길

2. 참다운 見解
3. 참사람의 특징
4. 참사람이 되는 길
5. 작용할 뿐

 

1. 사람을 구해내는 길

부처와 조사의 가르침은 사람을 구해내는 길을 보여주는 것이다. 사람을 구해낸다는 것은, 경계에 미혹되어서 자기를 잃어버리고 번뇌에 싸여 있는 사람에게 바른 안목을 가지게 하여 번뇌로부터 구해낸다는 것이다. 부처의 가르침은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이것을 목적으로 할 뿐이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고 또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사실이다. 불교의 어떠한 경전과 논서도 이 목적을 벗어난다고 할 수 없다. 그것이 복잡하고 정교한 이론으로 되어 있건 간명하고 직접적인 가르침으로 되어 있건, 그것들은 모두 처음부터 끝까지 이러한 목적을 위한 방편이다. 중국선은 그중에서도 간명하고 직접적인 방식으로 사람을 구해내는 길을 보여주는 것이다.


임제의 가르침 역시 사람을 구해내는 길로서 제시된 것이다. 임제는, “불법을 배우는 이는 모름지기 참다운 견해를 구해야 한다. 이러한 참다운 견해를 얻으면 나고 죽음에 물들지 않고 가고 머무름에 자유로워서 수승함을 구하려 하지 않아도 수승함이 저절로 온다”고 한다. 참다운 견해를 얻는다는 것은 깨달음의 지혜를 얻는다는 것이다. 깨달음의 지혜는 왜 얻어야 하는가. 나고 죽음에 물들지 않고 가고 머무름에 자유롭기 위해서이다. 이것이 불교공부의 최종 목적이고, 부처가 출가하여 깨달음을 얻고 가르침을 편 유일한 이유이다. 임제의 말을 빌면 결국 사람을 구해낸다는 것은 삶과 죽음에 물들지 않고 자유자재하게 가고 머무르는 경지를 얻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業 지어 輪廻하는 삶으로부터의 解脫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 해탈이야말로 불교의 궁극목표이다.


이러한 해탈을 얻기 위하여 임제가 무엇보다 강조하는 것은, “남에게 속지 마라”, “밖으로 구하지 마라”, “스스로를 믿으라”는 것이다. 그러면 무슨 근거로 이렇게 경계에 끌려가지 말고 스스로를 믿으라고 외치는가? 임제는, “도 닦는 이들이여! 나의 見處로 말하면 석가와 다를 바 없으니, 오늘 이 많은 작용들에 무슨 모자람이 있는가?”라고 묻는다. 스스로의 현재의 이 작용이 완전하여 이 작용 이외에 어떠한 다른 것에도 의지할 것이 없다는 사실을 자신에 대한 믿음의 근거로 내세우는 것이다. 임제는 자신의 스스로에 대한 이러한 믿음을 석가와 다름없다고 확신에 차서 말하고 있다. 그는 또 이와 같은 모자람 없는 자재한 作用을 하는 주체를 사람〔人〕이라 하며, 이 사람을 ‘자리 없는 참사람〔無位眞人〕’․‘의존하지 않는 道人〔無依道人〕’․‘일 없는 사람〔無事人〕’ 등 다양하게 부르고 있다. 이러한 ‘자리 없는 참사람’․‘의존하지 않는 道人’․‘일 없는 사람’ 등이야말로 임제가 구해낸 사람이며 부처와 다름없는 사람이며 참다운 견해를 얻은 사람이다.
이 글은"임제록"의 示衆을 중심으로 하여, 임제가 이와같이 사람을 구해내기 위하여 어떻게 가르침을 폈는가를 살펴보려는 것이다.

 

2. 참다운 견해

이미 언급했듯이 임제는, 佛法을 배우는 이들은 모름지기 참다운 견해를 구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대덕들이여! 착각하지 마라. 나는 그대들이 경론을 이해했느냐를 보는 것도 아니고, 그대들이 국왕․대신인 것을 인정하지도 않는다. 또한 그대들의 폭포수처럼 유창한 말솜씨를 보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대들의 총명함과 지혜로움을 받아들이는 것도 아니다. 오로지 그대들의 참다운 견해만을 바랄 뿐이다.


임제의 말은 간절하다. 깨달음을 얻어 해탈하고 부처가 되고 조사가 되는 길은 오로지 참다운 견해를 얻는 것일 뿐이다. 높은 사회적 지위는 말할 것도 없고 총명함과 지혜로움으로 불교를 공부하여 경전과 논서에 통달하여도 그것으로 부처가 되고 조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즉 경전과 논서에 대한 이론적인 공부를 통하여는 삶과 죽음을 되풀이하는 이 윤회하는 중생을 벗어날 수 없다. 오로지 참다운 견해를 얻어야 삶과 죽음으로부터 해탈한다. 그러면 참다운 견해란 어떤 것인가?


무엇이 참다운 견해이냐〔如何是眞正見解〕는 질문에 대하여 임제는 다음과 같이 답하고 있다.
그대들은 凡에 들어가고 聖에 들어가며, 물듦에 들어가고 깨끗함에 들어가며, 모든 佛國土에 들어가고 미륵의 누각에 들어가며 비로자나불의 법계에 들어가는데, 그때마다 국토를 나툼에 만들고 머물고 부수고 사라진다. 부처가 세상에 나와 큰 법륜을 굴리고 열반에 들지만 가고 오는 모양이 있음을 보지 못하니 태어나고 죽음을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다. 문득 생겨남 없는 법계에 들어가니 밟고 다니는 국토마다 모두 화장세계에 들어감이라, 모든 법이 다 빈 모양이고 어디에도 實法은 없음을 본다. 오직 어디에도 의존하지 않는 道人만이 있을 뿐이니 이것이 모든 부처의 어머니이다. 이렇게 부처는 의존하지 않는 것에서 생겨나니, 만약 의존하지 않는 것을 깨달으면 부처 또한 없다. 만약 이와같이 볼 수 있다면 이것이 참다운 견해이다.


이로써 보면 참다운 견해〔眞正見解〕란, 凡이나 聖이나 모든 법은 다 빈 모양이고 오직 의존하지 않는 道人만이 있어서, 이 도인이 모든 法의 어머니 즉 이 도인에게서 모든 법은 생겨난다는 것이다. 이것을 단적으로 말하면, 첫째, 모든 법은 텅 빈 모양〔空相〕일 뿐이고 實이 아니다. 따라서 진실로 생겨나거나 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단지 공허한 모양만이 생겨나고 사라진다. 둘째, 이 공허한 모양의 근거가 되는 것을 임제는 의존하지 않는 도인이라고 부른다. 즉 이 도인만이 홀로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살아 활동하고 있고, 다른 모든 형상들은 이 도인의 활동에 근거하여 생겨나고 사라진다는 것이다. 임제의 말을 들어보자.


도 배우는 이들이여! 착각하지 마라. 세간․출세간의 모든 법은 다 自性이 없으며, 또 생겨나는 성품(生性)도 없다. 그저 빈 이름뿐이며 그 이름 또한 비었는데, 그대들은 이처럼 저 부질없는 이름을 진실하다고 잘못 알고 있으니 매우 잘못되었다. 설사 있다 하더라도 모두가 의지해서 변한 경계들이다.


세간․출세간의 모든 법은 스스로 생겨나지도 않고 스스로 법이 될 수도 없다. 모두가 의존하지 않는 도인 즉 사람에 근거하여 생겨나고 법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임제는, “그때마다 국토를 나툼에 만들고 머물고 부수고 사라진다”고 하고, “무대 위의 꼭두각시를 보아라. 당겼다 놓았다 함이 모두 속에 있는 사람에게 달려 있다”고 한다.


요컨대 참다운 견해란, 세계 즉 경험하는 모든 것들은 모두 텅 빈 모양일 뿐이며, 그 모양들은 모두 사람 즉 의존하지 않는 도인에게 근거하여 나타나고 사라지며, 이 의존하지 않는 도인만이 홀로 만법의 근원으로서 진실하다는 것이다. 참다운 견해가 이러함을 안다면 마땅히 텅 빈 모양을 버리고 진실한 근원을 지키게 될 것이다. 이렇게 허망한 것을 떠나서 진실한 근원을 지키게 될 때 깨달음을 얻어서 삶과 죽음으로부터 해탈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참다운 견해를 얻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여기에 대한 임제의 가르침은 단순 명쾌하다. 즉 ‘남에게 속지 마라’는 것이다.


도 배우는 이들이여! 법다운 견해를 터득하려 한다면 남에게 끄달리지 않기만 하면 된다. 안에서나 바깥에서나 마주치는 대로 죽여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며, 나한을 만나면 나한을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이며, 친척 권속을 만나면 친척 권속을 죽여야만 비로소 해탈하여 사물에 구애되지 않고 투철히 벗어나 자유자재해진다.


진정으로 도를 배우는 사람은 부처에도 집착하지 않고, 보살․나한에도 집착하지 않으며, 三界의 뛰어난 경계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멀리 홀로 벗어나 사물에 전혀 구속되지 않으므로 하늘 땅이 뒤집힌다 해도 나는 더 이상 의심하지 않고, 또한 시방세계 모든 부처가 앞에 나타난다 하여도 한 생각 마음에 기뻐함이 없으며, 三塗地獄이 갑자기 나타난다 하여도 한 생각 마음에 두려움이 없다. 왜 그러한가? 모든 법이 빈 모양일 뿐이어서 변화하면 있고 변화하지 않으면 없으니, 삼계는 오직 마음이요, 만법은 識일 뿐임을 나는 알기 때문이다.


삼계, 지옥, 범, 성, 안, 밖의 모든 법에서 멀리 홀로 벗어나 전혀 구속되지 않고 자유자재하게 될 때가 해탈이다. 무엇이 무엇으로부터 해탈하는가? 해탈하고자 하는 사람 스스로가 스스로 아닌 모든 다른 것들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스스로의 正體는 무엇이고 스스로 아닌 다른 모든 것들의 정체는 무엇인가? 스스로란 스스로 아닌 다른 모든 것들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바로 그것이다. 스스로 아닌 다른 모든 것들이란 삼계, 지옥, 범, 성, 안, 밖의 모든 법이다.


三界는 스스로 내가 삼계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들의 눈앞에서 신령스럽게 빛나며 만물을 밝히고 세계를 가늠하는 사람이 곧 삼계에다 이름을 붙이는 것이다.


스스로가 이와같이 만법의 근원인데 근원인 스스로를 떠나서 무엇에 끌려서 어디로 가겠느냐는 말이다. 만법은 스스로에 근거하여 생겨나고 사라지는 빈 모양이다. 그러므로 근원인 스스로를 떠난다는 말은 스스로 아닌 다른 실재하는 무엇이 있어서 그것에 끌려간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에 근거하여 생겨난 빈 모양에 스스로가 속고 있는 것일 뿐이다. 임제는, “그대들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면 바쁘게 경계 따라 전변하여 온갖 경계에 휩쓸려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고, 스스로를 믿을 것을 역설한다. 스스로가 스스로일 수 있을 때 근원을 떠나지 않고 만법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임제는, “그대들이 조사나 부처와 다름이 없고자 한다면 밖으로 구하지 않기만 하면 된다”라고 하고, “지금 바로 눈앞에 법문을 듣는 의지함이 없는 도인은 너무도 분명하여 결코 부족한 적이 없었다. 그대들이 만약 조사나 부처와 다름없기를 바란다면 이렇게 알면 될 뿐이다”라고 한다. 여기서 임제는 한층 철저해져서 조사나 부처조차도 그 근원은 의존하지 않는 道人 즉 스스로에게 있다고 하고, 오로지 모든 법의 근원인 이 의존하지 않는 道人으로 돌아가 모든 대상세계에서 벗어날 것을 요구한다. 이렇게 완전히 벗어날 때에야 비로소 해탈하여 삼계에 살아도 業 짓는 일이 없다고 한다.


결국 임제의 가르침은, 境界 즉 客觀이란 공허한 것으로서 主觀에 의하여 건립되고 파괴된다고 알아서, 생명력의 근원인 주관을 떠나서 공허한 객관에 따라가 근원으로부터 소외되어 生滅의 괴로움을 받지 말라는 것이다. 즉 생명력의 근원인 주관을 떠나지 않아서 생멸의 괴로움을 받지 않는 것이 바로 해탈이다. 이러한 경계의 근원인 주관을 임제는 사람〔人〕이라고 하고 있다. 따라서 해탈은 근원적 주관 즉 임제가 말하는, 사람을 알고 바로 그 사람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말한다.


그대들이 만약 나고 죽음과 가고 머무름을 벗어나 자유롭기를 바란다면, 지금 당장 법문을 듣는 그 사람을 알도록 하라.
임제가 이 근원으로서의 사람을 표현하는 어구는 문맥에 따라 다양하지만, 여기서는 편의상 참사람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이제 이 참사람에 관하여 더 자세히 살펴보자.

 

3. 참사람의 특징

 "임제록" 示衆에서 임제가 말하는 근원으로서의 사람 즉 참사람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다.

 

(1) 참사람은 作用한다

참사람의 무엇보다도 중요한 특징은 作用한다는 것이다."임제록" 전반을 통하여 임제가 끊임없이 말하고 있는 것은 작용이다. 임제가 말하는 참사람의 작용이 어떤 것인가를 보자.

 

붉은 살덩이 위에 자리 없는 참사람 하나가 있어서 끊임없이 그대들 모두의 얼굴로 드나드니 아직 확증을 잡지 못한 사람은 살펴보아라.

 "임제록" 上堂에 나오는 임제의 이 말은, 참사람의 존재를 끊임없는 작용을 통하여 드러내고 있다. 또 임제는 자신이 얻은 깨달음을 드러냄에도 작용을 말하고 있다.

 

나의 見處로 말한다면 釋迦와 다름이 없으니, 오늘 이 많은 작용들에 무슨 모자람이 있는가?

내가 오늘 작용하는 곳에서는 참으로 이루기도 하고 부수기도 하면서 신통변화를 부린다.

 

임제는 자신의 깨달음이 석가와 다름없이 궁극적이고 확고하다고 말하고, 그 근거로서 모자람 없는 작용을 말한다. 오늘 이 순간 이루기도 하고 부수기도 하는 이 많은 작용들에 아무런 모자람이 없다는 것이다. 이 순간 내가 인식하는 이 세계는 나의 인식작용의 산물이다. 즉 이 세계는 작용의 산물인 것이다. 만약 작용이 멈춘다면 인식도 있을 수 없을 것이고, 따라서 세계는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다. 나의 존재건 세계의 존재건 모두 작용의 산물일 뿐이다. 즉 모든 존재하는 것의 존재근거는 작용이다. 따라서 작용이야말로 존재의 가장 근원적인 토대이다.

그러나 이 작용이 세계의 운동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대덕들이여! 움직임과 움직이지 않음은 두 가지 경계이니, 의존하지 않는 도인이라야 움직임으로도 작용하고 움직이지 않음으로도 작용하는 것이다.

 

세계가 움직이고 있거나 정지해 있거나 세계(境界)로서 존재하는 한은 모두 의존하지 않는 道人 즉 사람의 작용에 근거하여 존재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결국 세계의 존재근거는 사람의 인식작용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세계는 사람에 의지하여 존재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이때 인식작용을 하는 사람은 어떤 것에도 의지함이 없이 스스로 존재〔自在〕한다. 임제는 이 사람을 의존하지 않는 도인〔無依道人〕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면 여기서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존재한다는 것은 어떤 뜻인가? 여기에 답하기 전에 먼저 세계가 작용에 의존하여 존재한다는 것의 의미부터 살펴보자. ‘의존한다’는 말은 두 가지 뜻으로 해석 가능하다. 하나는 두 요소가 서로 상대편에 의지하여 존재의의를 가지는 경우이다. 또 하나는 한 요소는 다른 요소에 의존하고 있지만 다른 한 요소는 다른 요소에 의존함이 없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경우이다. 첫째 경우에서는 두 요소 모두가 독립적인 자기존재성(自在性)을 가지지 못하므로 두 요소는 개별적으로 분리가 불가능하다. 둘째 경우에는 한 요소는 독립적인 자기존재성을 가지고 있지 못하지만 다른 한 요소는 가지고 있다.

 

의존한다는 말이 이러한 의미라면, 작용과 세계의 관계는 어떠한가? 작용과 세계의 관계는 인식작용과 인식결과의 관계 즉 주관과 객관의 관계이다. 주관과 객관의 관계는 보는 視點에 따라서 그 의존관계가 달라진다. 만약 제3의 시점에서 주관과 객관을 동등하게 놓고 본다면, 주관과 객관은 상호 의존적 관계가 될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고찰할 경우에는 사실은 제3의 시점이야말로 참된 주관이고, 주관과 객관은 똑같이 모두 객관화되어 있다. 즉 주관과 객관이라는 두 대상의 관계를 제3의 시점이라는 주관이 상호 의존적 관계라고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지금 제3의 시점이라는 주관의 인식작용과, 주관과 객관이 상호 의존적 관계라는 인식결과를 말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이미 주관은 제3의 시점이 아니라 말하고 있는 (즉 작용하고 있는) 사람인 나(1인칭)가 되고, 제3의 시점이니 주관이니 객관이니 하는 것은 모두 객관이 되어 있다. 즉 주관을 주관이라고 말하면 모두 대상화되고 객관으로 변해버리는 것이다. 다시 말해 주관은 사고작용이나 인식작용의 결과로서 대상화될 수가 없다. 대상화되면 이미 주관이 아닌 것이다. 주관은 이 순간 주관으로서 작용하고 있을 뿐이다. 작용은 다만 현재 이 순간 진행되고 있을 뿐이지 어떠한 형태로도 고정되어 대상화될 수 없다. 왜냐하면 어떤 무엇이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은 그것을 대상으로 보는 주관은 따로 있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임제는 開堂說法에서 입을 열면 佛法을 얻지 못한다고 한 것이다. 한편 객관은 인식작용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므로 일정한 형태나 개념으로 대상화되어 있다.

 

요컨대 인식주관은 사람 즉 나(1인칭)이고 나는 어떠한 고정된 형태도 없는 지금 이 순간의 작용이고 나 이외의 모든 대상은 나 즉 인식작용에서 나타나는 것이므로, 대상은 모두 나에게 의존하지만 주관인 나는 어디에도 의존하지 않는 것이다. 만약 인식작용인 내가 의존하는 그 무엇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무엇은 역시 나의 인식작용에서 나타난 대상일 뿐이므로, 그 존재성은 인식작용인 나에게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엄밀히 말하면 이러한 의존하지 않는 도인 즉 인식작용은 어떠한 말로도 표현되지 않고 개념화되지도 않는다. 표현되거나 개념화되면 벌써 객관화되어서 주관은 아닌 것이다. 주관이란 지금 이 순간 바로 이렇게 생각하고 말하고 글쓰고 있는 이 작용이다. 임제는 이러한 주관을, “지금 눈앞에서 법을 듣는 사람”, “지금 눈앞에서 홀로 밝고 뚜렷하게 듣는 것”, “눈앞에서 지금 법을 듣는 사람”, “세계를 헤아리는 사람” 등으로 표현하여, 지금 여기서의 작용성을 드러내려 하고 있다.

 

(2) 참사람은 모양도 뿌리도 머무는 곳도 없이 활발하게 작용한다

지금 여기서의 이 작용을 참사람이라고 부르지만, 이 참사람 즉 작용은 모양도 근거하고 있는 뿌리도 머무는 일정한 장소도 없다. 따라서 이 작용은 인식될 수 있는 대상은 아니다. 그렇긴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말하고 듣는 작용은 너무나 명백한 진실이다.

그대들 눈앞에 뚜렷하면서 아무 형체도 없이 홀로 밝은 이것이 法을 말하고 들을 줄 아는 것이다.

 

그대들이 만약 나고 죽음과 가고 머무름을 벗어나 자유롭기를 바란다면, 지금 당장 법문을 듣는 그 사람을 알도록 하라. 모양도 없고 뿌리도 없으며 머무는 곳도 없다. 활발하게 작용하여 수만 가지로 펼쳐지지만 그 작용하는 곳은 정해진 자리〔處〕가 없다. 그러므로 찾을수록 더욱 멀어지고 구할수록 더욱 어긋나니 그것을 비밀이라고 한다.

 

지금 이 순간의 이 작용이 너무나도 명백한 진실이긴 하지만, 이 작용의 주체가 무엇인가 하고 찾아봐야 찾을 수 없다. 이 작용은 모양도 정해진 자리도 없이 그저 작용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3) 참사람의 작용은 지금 여기서 진행되고 있다

지금 여기 이 순간 작용이 있으므로 글쓰는 일이 이루어지고 있다. 주관의 작용은 늘 지금 이 순간 여기에서 일어난다.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늘 현재 여기일 뿐이다.

 

조사와 부처를 알고자 하는가? 바로 그대들 앞에서 법문을 듣고 있는 그것이다.

그대들 눈앞에 뚜렷하면서 아무 형체도 없이 홀로 밝은 이것이 바로 법을 말하고 들을 줄 아는 것이다.

도 배우는 이들이여! 지금 바로 눈앞에서 호젓이 밝고 역력하게 듣고 있는 것이 이 사람이니, 어디를 가나 걸림이 없고 시방법계를 꿰뚫어 三界에 자유자재하니, 온갖 차별된 경계에 들어가도 휘말리지 않는다.

 

(4) 참사람은 모자람 없이 작용한다

지금 여기 이 작용은 완전하여 아무런 부족함이 없다는 것이다. 경험할 수 있거나 경험할 수 없는 일, 즉 현실에서 경험되거나 상상되거나 심지어 상상할 수 없는 일조차도, 그 모든 일은 모두 지금 여기의 이 작용에서 나오는 것이다. 세간이건 출세간이건 범인이건 부처건 모두 지금 여기의 이 작용에 근거하여 성립된다. 모자람이 있느니 없느니 하는 그것조차도 이 작용에 의하여 성립된다. 요컨대 이 작용만이 모든 것의 유일한 근거이다.

 

오늘 이 많은 작용에 무슨 모자람이 있는가? 여섯 갈래의 신령스런 빛이 한순간도 끊어진 적이 없다.

대덕들이여, 무엇을 찾느냐? 지금 바로 눈앞에 법문을 듣는 의지함이 없는 도인은 너무도 분명하여, 결코 부족한 적이 없었다. 그대들이 만약 조사나 부처와 다름없기를 바란다면 이렇게 보면 될 뿐이니, 의심하여 잘못되지 마라.

모두들 닦을 도가 있고 깨달을 법이 있다고 하는데, 그대들은 무슨 법을 깨닫고 무슨 도를 닦는다고 말하는가? 그대들이 지금 작용하는 곳에 무슨 모자라는 것이 있으며, 어느 곳을 닦아 보완한다는 말인가?

 

(5) 참사람은 어디에도 의존하지 않는다

지금 여기의 이 작용이 완전하여 아무런 모자람이 없으므로 이 작용이 다른 무엇에 의존하여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작용 스스로가 모자람 없이 완전한데 다른 것에 의존할 까닭이 없는 것이고, 모양과 일정한 처소가 없으므로 의존한다는 말이 해당되지도 않는다. 오히려 모든 존재하는 것〔萬法〕은 이 작용에 의하여 생겨나므로 존재하는 모든 것이 이 작용에 의존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모든 존재하는 것들과 모양과 처소가 없는 이 작용은 서로 떨어질 수 있는 다른 것이 아니다. 작용하므로 존재한다. 작용하므로 존재한다는 것은, 존재 역시 일정불변한 실체가 아니라 작용에 따라서 나타나는 假相(임제는 空相이라고 한다.-아래 인용문 참조)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작용이 곧 존재요 존재가 곧 작용이다. 이렇게 본다면 존재와 작용이 둘 아닌 하나여서 서로 의존하느냐 아니냐를 말할 수 없다. 그렇긴 하나, 존재라는 가상이 있기 때문에 작용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작용이 있기 때문에 존재라는 가상이 생긴다고 봄이 타당하므로(왜냐하면 假相으로서의 존재는 끊임없이 生滅하지만 작용 그 자체는 영원히 불변하기 때문이다), 작용은 아무것에도 의존하는 것이 아니지만 존재는 작용에 의존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임제는 이러한 작용을 의존하지 않는 道人이요, 모든 부처의 어머니라고 하고 있다.

문득 생겨남 없는 법계에 들어가니 밟고 다니는 국토마다 모두 화장세계에 들어감이라, 모든 법이 다 빈 모양이고 어디에도 實法은 없음을 본다. 오직 어디에도 의존하지 않는 道人만이 있을 뿐이니 이것이 모든 부처의 어머니이다.

 

(6) 참사람은 온갖 경계를 主管하는 주인이다

참사람의 작용에 의하여 온갖 경계가 성립되므로 참사람은 온갖 경계를 主管하는 주인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온갖 경계는 참사람 즉 작용에 의하여 이루어지고 파괴된다. 이것은 참사람이 인식작용의 主觀이라는 말이다.

三界는 스스로 내가 삼계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들의 눈앞에서 신령스럽게 빛나며 만물을 밝히고 세계를 가늠하는 사람이 곧 삼계에다 이름을 붙이는 것이다.

 

대덕들이여! 그대들은 옷을 잘못 알지 말아라. 옷이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옷을 입을 수 있는 것이다. 청정한 옷도 있고, 생겨남 없는 옷과 보리의 옷과 열반의 옷도 있으며, 조사의 옷도 있고 부처의 옷도 있다. 대덕들이여! 다만 소리와 명칭 개념 따위만 있을 뿐인데 이 모두는 옷의 변화이다.

 

본래 온갖 경계는 참사람의 작용에 의하여 만들어지므로 능동성이나 주관성이 있을 수 없다. 즉 오직 참사람만이 능동적으로 작용하며 주관으로 기능한다. 임제는 이것을, “무대 위의 꼭두각시를 보아라. 당겼다 놓았다 함이 모두 속에 있는 사람에게 달려 있다”라고 비유적으로 말하고 있다. 따라서 지금 여기에 경계는 허망하게 나타나고 사라지지만 주관인 참사람만은 변함없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임제는 주관인 사람이 주관으로서의 자기 본래의 자리에 있을 때, 생멸하는 경계와는 달리 항상하며, 어디에도 묶이지 않고 해탈하여 자유자재한 주인공이 된다고 한다.

 

큰 그릇이라면 남에게 홀리지 않고 어딜 가나 주인공이 되어, 선 자리 그대로가 모두 참이어야 한다.

만약 이렇게 알아낼 수 있다면 경계에 끄달리지 않고 가는 곳마다 경계를 작용할 것이다. …… 지금 법문을 듣고 있는 것은 그대들의 四大가 아니라 그 사대를 능숙하게 작용하는 그것이다. 이렇게 볼 수만 있다면 가고 머물고에 자유자재할 것이다.

(7) 참사람은 밖(경계)으로 향하여 찾지 않는다

 

참사람만이 의존하지 않는 자재한 주인공이고 경계는 참사람의 작용에서 생겨나고 사라지는 텅 빈 모습이므로, 참사람이 진실한 자신을 놓아두고 허망한 경계를 좇아갈 까닭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임제는, “그대들이 조사나 부처와 다름이 없고자 한다면 다만 밖으로 향하여 찾지 않으면 된다”고 한다.

 

(8) 참사람은 찾을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참사람은 작용할 뿐 어떠한 모양도 없고 자리도 없으므로 찾을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또 참사람은 늘 대상을 찾는 主觀이지 결코 客觀은 될 수 없다. 주관은 언제나 주관일 뿐이고 객관은 아닌 것이다. 즉 주관이 항상 주관이기 때문에 주관이니 객관이니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주관이 찾는 대상은 항상 객관이지 주관이 아니다. 따라서 참사람을 객관적 대상으로서 찾을 수는 없는 것이다. 참사람을 대상으로서 찾은 순간 이미 그것은 주관인 참사람이 아니라 객관인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히려 주관인 참사람을 객관화시켜 찾지 않을 때, 즉 주관이 스스로를 객관화시키지 않을 때 주관의 작용은 저절로 드러난다. 주관은 늘 주관으로서 작용하고 있을 뿐이지 객관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임제는 참사람 즉 주관을 함께 있는 것도 아니고 떠나 있는 것도 아니어서 찾으려 하면 찾지 못하지만 찾지 않으면 늘 눈앞에 있다고 하고, 참사람을 찾은 사람 즉 해탈한 사람을 찾지 않는 사람 즉 일 없는 사람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구할 부처도 없고, 이룰 도도 없으며, 얻을 법도 없다. 밖으로 모양 있는 부처를 구한다면 그대들과는 닮지 않은 것이다. 그대들의 본래 마음을 알고자 하는가? 함께 있는 것도 아니고 떠나 있는 것도 아니다. 도 배우는 이들이여! 참 부처는 형상이 없고, 참 도는 바탕이 없으며, 참 법은 모양이 없다.

 

그대들이 부처를 찾으면 부처라는 마구니에 붙잡히고, 조사를 찾으면 조사라는 마구니에 묶인다. 그대들이 찾는다면 모두 고통일 뿐이니, 아무 일 없느니만 못하다.

 

(9) 경계는 수만 가지로 차별되나 참사람에는 차별이 없다

경계는 참사람인 주관의 인식작용에 의하여 만들어지므로 항상 변화하며 수만 가지로 달라지고 분별되지만, 이러한 인식작용과 분별작용을 하는 주관 즉 참사람은 항상 주관일 뿐으로서 달라질 수가 없다. 주관은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어떻게도 규정될 수가 없다. 모든 시공간적인 규정을 주관이 하고 있으므로, 주관 자신은 시공간적 규정에 속하지 않는 것이다.

경계는 수만 가지로 차별되나 사람에는 차별이 없다.

 

(10) 참사람은 온갖 차별 경계에 들어가지만 경계에 물들지 않는다

주관은 온갖 차별 경계 즉 객관을 드러내지만 항상 주관일 뿐이다. 주관이 항상 주관이므로 온갖 차별 경계가 있는 것이다. 객관적으로 온갖 차별 경계가 있을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오직 이 참사람 즉 주관의 작용이다. 주관 작용의 이러한 무제한성을 임제는,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않고 물에 들어가도 빠지지 않고 아귀․축생에 들어가도 어떠한 업보도 받지 않는다고 하는데, 불에 들어가고 물에 들어가고 아귀․축생에 들어가는 일은 주관의 작용에서 나타나는 것이고 주관의 작용이 없다면 이러한 일은 없기 때문이다. 임제는 참사람 즉 주관의 이러한 작용을 神通이라고 하고 있다.

 

도 배우는 이들이여! 지금 바로 눈앞에서 호젓이 밝고 역력하게 듣고 있는 것은 이 사람이니, 어디를 가나 걸림이 없고 시방법계를 꿰뚫어 三界에 자유자재하니, 온갖 차별된 경계에 들어가도 휘말리지 않는다.

 

도 배우는 이들이여! 눈앞에 지금 법문을 듣고 있는 이 사람만은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않고, 물에 들어가도 빠지지 않으며, 지옥에 들어가도 마치 정원을 구경하며 노니는 듯하고, 아귀․축생에 들어가도 그 업보를 받지 않는다. 왜 그런가? 아무 꺼려 할 법이 없기 때문이다.

색․성․향․미․촉․법의 여섯 가지가 다 빈 모양들뿐임을 통달한 까닭에 이 의존하지 않는 도인을 얽어매지 못한 것이니, 비록 오온으로 된 번뇌의 몸이나, 바로 이것이 땅 위를 걷는 신통이다.

 

(11) 참사람은 인연 따라 묵은 業을 녹여낼 뿐 새 업을 짓지 않는다

참사람 스스로가 완전하고 자재한 작용을 하므로 일부러 밖으로 찾지 않아야 스스로가 드러남을 잊고, 다시 말해 객관의 相을 세워서 주관 스스로의 눈앞을 가리지 말아야 스스로가 드러남을 잊고, 자기를 객관화하고 相을 세워서 자신의 본래 모습을 구한다면, 이것은 모두 자기를 떠나 대상에 집착하는 것이니 그 果報를 받아야 할 業 짓는 일이다. 즉 참사람은 조작에 의하여 새롭게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 여기에서 원만구족하여 있으므로 모든 조작을 쉴 때 순수한 참사람이 저절로 드러난다. 그리하여 임제는 참사람을 찾으려면, 묵은 業 곧 기왕에 가지고 있는 모든 잘못된 견해를 버리고 새로운 조작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얻어진 참사람은 업을 지어 남기는 일이 없으므로 임제는, “지금 법문을 듣는 이 도인이 작용하는 곳에는 아무 자취도 없다”라고 한 것이다.

 

그대들 諸方에서는 ‘道에는 닦을 것도 있고 깨달을 것도 있다’고 하는데, 착각하지 마라. 설령 닦아 깨닫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모두가 생사의 業이다. 그대들은 六度萬行을 빠짐없이 닦는다고 말하나 내가 보기에는 모두가 업을 짓는 것이다. 부처를 찾고 법을 찾는 것은 지옥의 업을 짓는 것이고, 보살을 찾는 것도 업을 짓는 것이며, 經을 보고 論을 보는 것 역시 업을 짓는 것이다.

 

진정한 道人이라면 결코 그렇지 않아서 그저 인연 따라 묵은 業을 녹여 낼 뿐이다. 자재하게 옷을 걸치고서 가려면 가고 앉으려면 앉을 뿐, 한 생각이라도 부처의 果를 바라지 않는다. 어째서 그런가? 옛사람이 이르기를, ‘만약 업을 지어 부처를 얻고자 한다면 부처가 오히려 生死의 큰 兆朕이다’라고 하였다.

 

(12) 참사람은 凡과 聖을 구분할 줄 알지만, 이 둘을 함께 버린다

출가한 자라면 마땅히 부처와 마구니를 구분하여 부처를 취하고 마구니를 버리며, 凡과 聖을 구분하여 성을 취하고 범을 버려야 할 것이다. 부처와 성은 경계에 속지 않고 스스로를 믿는 것이요, 마구니와 범은 경계에 속아 스스로를 의심하는 것이다. 따라서 참된 출가자라면 이 둘을 잘 구분하여 경계에 속지 말고 스스로를 믿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진실로 참사람을 회복한 사람은 이렇게 구분하여 취하고 버리는 일이 없다. 왜냐하면 부처와 마구니, 참과 거짓, 범과 성, 물듦과 깨끗함 등은 모두 참사람 곧 主觀의 인식작용에 의하여 드러난 경계이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경계는 주관의 인식작용에서 생겨나 텅 빈 모습이요, 실없는 이름일 뿐이어서, 주관의 작용과 경계인 가상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주관의 작용에 의하여 경계는 생기고 경계에 의하여 주관의 작용은 드러나므로, 주관의 작용이 곧 경계요 경계가 곧 주관의 작용이다. 따라서 이렇게 아는 참사람의 입장에서는 자타를 구분하여 취하고 버릴 것이 없는 것이다.

 

출가한 사람은 모름지기 항상 참다운 견해를 가져서, 부처와 마구니를 구분하고 참됨과 거짓을 구분하며, 凡과 聖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가려낼 수 있다면 참된 출가라고 할 것이다. …… 눈 밝은 道人이라면 부처와 마구니를 함께 버린다. …… 부처와 마구니란 깨끗함과 물듦의 두 가지 境界이다. 내가 보기에는 부처도 중생도 없으며 옛날도 지금도 없어서 깨닫는 자는 바로 깨닫는 것이지 시간이 걸리지 않으며, 닦음도 깨달음도 없고 얻음도 잃음도 없으며, 언제라도 또 다른 무엇이 있는 것도 아니다.

 

(13) 임제는 참사람을 마음이라고도 한다

모자람 없는 작용으로 경계를 건립하기도 하고 부수기도 하나 스스로는 모양도 없고 머무는 곳도 없는 것, 부처와 조사와 다름없는 이것을 임제는 사람〔人〕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편의상 이 사람을 참사람〔眞人〕으로 부르기로 약속하고 지금까지 그렇게 불러 왔다. 그런데 임제 이전의 禪家에서는 일반적으로 이렇게 작용하는 것을 마음〔心〕이라고 부른다. 임제도 참사람을 마음〔心〕, 마음법〔心法〕, 마음자리법〔心地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그 이름을 사람이라고 부르거나 마음이라고 부르거나 또는 다른 어떤 것으로 부르거나 상관없이, 그 가리키는 것은 같다. 어쨌든 이름은 만들기 나름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볼 때 임제가 마음이라는 명칭에 구애되지 않는 것에서 임제의 견처가 그만큼 확고하고 자재함을 엿볼 수도 있을 것이다.

 

다음에 보듯이 마음에 관한 임제의 언급에서 마음은 곧 이제까지 살펴본 바와 같은 참사람의 특징들을 모두 가지고 있다.

그대들의 한 생각 마음〔一念心〕이 三界를 만들고 인연 따라 경계에 들어가 나누어져 六塵境界로 되니, 그대들이 지금 응용하는 곳에 무슨 모자람이 있느냐?

 

도 배우는 이들이여! 마음법〔心法〕은 모양이 없어서 온 시방세계를 꿰뚫는다. 그것이 눈에 있을 때에는 본다 하고, 귀에 있을 때에는 듣는다 하며, 코에 있을 때에는 냄새 맡는다 하고, 입에 있을 때에는 이야기한다고 하며, 손에 있을 때에는 잡는다 하고, 발에 있을 때에는 다닌다고 한다. 본래 하나의 정묘한 밝음〔一精明〕이 나뉘어서 六和合(六識․六根․六境)이 되는 것이니, 한 마음이 없으면 가는 곳마다 해탈이다.

 

무엇을 일러 법이라 하는가? 법이란 마음법을 말한다. 마음법은 모양이 없어서 온 시방세계를 꿰뚫고 눈앞에 드러나 작용한다. 하지만 사람이 믿음이 부족하면 곧 명칭과 개념만을 알 뿐이어서, 문자 속에서 부처다 법이다 하며 알음알이로 찾고 헤아리니, 천지차이로 어긋나는 것이다.

도 배우는 이들이여! 내가 법을 말할 때 무슨 법을 말하는가? 마음자리법을 말한다. 그것은 凡에도 들어가도 聖에도 들어가며, 깨끗한 곳에도 들어가고 더러운 곳에도 들어가며, 진리에도 들어가고 세속에도 들어간다. 그러나 너희는 진․속․범․성이 아니기에 모든 진․속․범․성에게 이름을 붙여 줄 수 있는 것이지, 진․속․범․성이 이 사람에게 이름을 붙이는 것은 아니다.

 

임제가 들고 있는 참사람의 특징들은 이와 같다. 이로써 보면 참사람이란, 모양도 뿌리도 머무는 곳도 없이 지금 여기서 어디에도 의존하지 않고 모자람 없이 활발하게 작용하고 있다. 이러한 참사람의 작용에 의하여 온갖 경계는 건립되고 파괴되므로 참사람은 온갖 경계를 主管하는 주인이다. 또 참사람은 스스로 모자람 없는 완전한 작용을 하므로 스스로 아닌 밖의 다른 경계를 필요로 하지 않고, 따라서 밖으로 구하여 찾지 않는다. 그런데 이와같이 완전하고 자족하게 작용하는 참사람은 모양도 없고 머무는 곳도 없으므로 대상으로서 인식될 수는 없다.

 

다시 말하여 참사람은 항상 주관으로서 작용하고 있으므로 스스로가 객관화될 수는 없는 것이다. 객관화하면 이미 그것은 주관으로서의 현재 이 순간 여기에 살아 움직이고 있는 참사람은 아닌 것이다. 참사람이 경계를 건립하고 파괴하는 주인이고 경계는 참사람에 의존하여 생멸하므로 경계는 수없이 바뀌더라도 참사람은 그대로 달라짐이 없다. 즉 시간적으로 변화하거나 공간적으로 차별되는 것이 모두 참사람이 하는 작용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일이므로, 참사람 스스로에게는 시공간적인 제약이란 의미 없는 말인 것이다. 어떠한 의미나 개념도 참사람의 작용에 의하여 나타나는 것이므로 참사람 스스로가 그런 의미나 개념의 제약을 받을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참사람은 대상세계에 의하여 제약되지 않는 것이다. 또 참사람은 스스로 완전하므로 작용을 하더라도 대상세계를 조작해 내어 그것에 의하여 어떤 결과를 얻으려 하지 않는다. 즉 참사람은 과보가 따르는 업은 짓지 않는다. 이것은 참사람이 대상에 의하여 제약을 받지 않으므로 그러한 것이다.

 

그런데 이와같이 주인과 손님, 주관과 객관, 참사람과 경계를 구분해서 말하면 마치 이 둘이 별개로 존재하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사실은 이 둘은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 하나이다. 왜냐하면 참사람이니 경계니 둘이니 하나니 하는 것은 사실 모두 이 순간 작용에 의하여 나타나는 경계이고, 이 경계는 작용에서 나오고 작용은 경계에 의하여 드러나므로 작용과 경계는 둘이 아니라 하나이기 때문이다. 즉 작용과 경계는 각각 개별적인 실체를 가지고 서로 의존하는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고, 하나의 다른 두 측면이다. 그러나 이 하나는 작용을 통하여 알 수 있을 뿐, 어떤 개념으로도 나타낼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입을 열면 얻지 못한다”라 하고, “한 물건이라 하여도 맞지 않다”라 한 것이다.

임제는 또 禪의 전통을 따라 이 하나를 마음〔心〕이라고도 표현한다. 따라서 세계는 실체 없는 마음의 작용이요, 假相으로서 識일 뿐이니, 한 마음 작용하여 假相을 조작하고 스스로가 조작한 가상에 끌려가지 않는다면, 그것이 바로 해탈인 것이다.

 

4. 참사람이 되는 길

그러면 이와같이 참사람이 되어 해탈하려면 어떻게 하여야 한다고 임제는 가르치는가? 이제 임제가 제시한 참사람이 되는 길을 살펴보자.

 

(1) 참다운 견해를 가져야 한다

佛法을 배우는 자는 반드시 참다운 견해를 찾아야 한다. 세속적인 결과를 구할 것이 아니라 참다운 견해를 찾는 일이 시급하다. 경론을 열심히 익히거나 계율을 엄격히 지키거나 육바라밀을 행하는 일 등은 모두 세속적인 결과를 구하는 것이지 佛法은 아니다. 불법은 오직 참다운 見解를 가짐으로써 온다. 참다운 견해란 지금 여기서 의지함 없고 모자람 없이 작용하여 萬法의 주인되는 모양 없는 참사람을 아는 것이다.

 

(2) 남에게 속지 말라

스스로가 만법의 주인 되는 참사람이고 스스로에게 만법이 갖추어져 있음을 믿어서 밖으로 남에게 끌려가 속지 말라. 그리하면 어딜 가나 주인공이 되어 선 자리 그대로가 모두 참인 것이다.

 

(3) 의심하여 주저하지 말고 스스로를 믿어라

스스로가 만법의 주인 되는 참사람이고 스스로에게 만법이 갖추어져 있음을 믿지 못하면, 쉴 틈 없이 경계 따라 轉變하여 온갖 경계에 휩쓸려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나 지금 바로 작용하는 이것을 믿기만 하면 아무 일이 없다. 그대들의 한 생각 마음이 삼계를 만들고 인연 따라 경계에 들어가 나누어지면 육진경계가 되니, 그대들이 지금 작용하는 곳에 무슨 모자람이 있는가? 다만 이 작용은 모양도 없고 머무는 곳도 없어서 알음알이의 대상이 아니니, 믿음으로써 확신할 수밖에 없다.

 

(4) 바깥으로 치달려 찾지 말고 스스로를 돌이켜보아라

스스로가 모자람 없이 작용하고 있음을 믿는다면 밖으로 치달려 찾는 일은 없을 것이다. 모든 것은 스스로에게 이미 다 갖추어져 있고 모자람 없이 완벽하다. 그래서 “연야달다가 머리를 잃어버려 찾다가 그 찾는 마음이 쉰 찰나에 아무 일이 없어졌다”고 한 것이다. 머리는 본래 갖추어져 있다. 다만 스스로 어리석어 밖으로 머리를 찾는 것이다. 사실 자기에게 머리가 갖추어져 있어야 자기의 머리를 찾는 어리석은 일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자기의 머리를 자기가 볼 수는 없다는 데서 발생한다. 따라서 스스로를 돌이켜보아 찾고 있는 스스로가 찾고자 하는 그것임을 자각하고 믿을 때 찾는 일은 끝나는 것이다.

 

(5) 모양을 짓지 말라

모양을 짓는 일은 자기의 머리를 가지고 밖에다 또 하나의 자기 머리를 만드는 일이다. 이렇게 되면 당연히 밖에 만든 머리는 거짓인데, 참 머리를 가지고 거짓 머리를 믿는다면 顚倒된 衆生이다.

 

(6) 명칭과 글귀와 의미로 헤아려 알음알이를 내지 말라

명칭과 글귀와 의미로 헤아려 알음알이를 내는 것은 모양을 짓는 일이다. 명칭과 글귀와 의미로 헤아려 알음알이를 내는 것이야말로 불법 공부하는 이들이 가장 빠지기 쉬운 함정이다. 따라서 임제는 많은 곳에서 이것을 경계하고 있다.

 

(7) 일부러 조작하지 말고 쉬며 평상시대로 하라

일부러 조작하지 않고 쉬면 마음 즉 참사람의 작용이 저절로 드러나서 따로 부처를 찾을 일도 없다. 일부러 조작하지 않으면 평상시의 모든 일이 다 佛法의 드러남 즉 참사람의 작용이다. 평상시 일거수 일투족 한생각의 일어남이 모두 참사람의 작용 아님이 없기 때문이다.

 

(8) 어디를 가나 주인공이 되라

평상시 일거수 일투족 한 생각의 일어남이 모두 참사람의 작용 아님이 없기 때문에 스스로가 참사람임을 믿으면 어디를 가나 주인공인 것이다.

 

(9) 지금 법을 듣는 이 사람을 알아라

지금 이 순간 법을 듣는 작용은 누가 하고 있는가? 바로 참사람의 작용에 의하여 법을 듣고 있는 것이다. 즉 지금 법을 듣고 있다는 너무도 분명한 일은 참사람이 살아 움직이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임제는, “지금 법문을 듣고 있는 것은 그대들의 四大(肉身)가 아니라 그 사대를 능숙하게 활용하는 그것이다”라 하고 있다.

 

(10) 내달려 찾는 바로 그것을 알아라

부처는 지금 여기서 작용하며 온갖 경계를 세웠다가 부수는 이것이다. 부처 즉 참사람이 항상 主觀으로서 작용하며 세계를 인식한다. 따라서 부처란 달리 있는 것이 아니라 부처를 찾고 있는 바로 이것 즉 부처를 찾는 작용을 하는 바로 이것이 부처이다. 그러므로 밖에서 따로 부처를 찾을 수는 없고 내달려 부처를 찾는 스스로를 돌이켜보아야 부처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스스로는 스스로일 뿐이지 대상이 아니므로, 스스로를 찾는 길은 안에서건 밖에서건 따로 찾지 않는 것이다. 찾지 않으면서 부처를 어떻게 얻는가? 스스로가 본래 부처이니 새로 얻을 것은 없다. 단지 스스로가 스스로를 보지는 못하므로 인식할 수는 없고 믿음으로써 본래 자기 즉 참사람을 회복하는 것이다.

 

(11) 경계를 잘 알아서 경계에 속지 말라

스스로가 참사람임을 믿는다면, 거짓된 경계에 휘말리지 않을 것이다.

 

(12) 바깥으로 찾지 말고 사물이 다가오는 대로 관조하라

한생각 의심하여 밖으로 찾으면 곧 경계에 휘말린다. 다만 한생각 쉬면 될 뿐, 다시 바깥으로 구하지 말고 사물이 다가오면 오는 대로 관조하라. 관조한다는 것은 조작하여 찾지 않는다는 것이다.

 

(13) 坐禪하여 觀法을 닦지 말라

좌선을 하고 관법을 닦는 것은 모두 일부러 조작하여 법을 구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평상시 모든 일 그대로가 모두 道(참사람, 佛法)임을 알지 못한 어리석음의 소치이다. 임제는 특히 이러한 조작에 경종을 울리고 있다.

도 배우는 이들이여! 諸方에서는 닦을 도가 있고 깨달을 법이 있다고 하는데, 그대들은 무슨 법을 깨달으며 무슨 도를 닦는다고 하는가? 그대들이 지금 작용하는 곳에 무슨 모자람이 있으며, 어떤 점을 보완한다는 것인가?

어떤 눈 먼 중들은 배불리 먹고는 좌선하여 관법을 닦는다고 한다. 그들은 생각이 새나가는 것을 꽉 붙들어 달아나지 못하게 하고, 시끄러운 것을 싫어하고 조용한 것만을 찾는데, 그것은 外道法이다. 조사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만약 마음에 머물러 고요함을 보고, 마음을 일으켜 밖으로 관조하며, 마음을 가다듬어 안으로 맑히며, 마음을 한곳으로 모아 定에 든다면 이러한 무리들은 모두가 조작을 하는 것이다’고 하셨다.

 

(14) 경론과 계율에서 道를 찾지 말고 선지식을 찾아가 도를 배워라

이것은 임제가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서 경론의 공부와 계율의 수지로써는 깨달음을 얻을 수 없고, 선지식을 찾아가 배워야 함을 말한 것이다.

道 배우는 이들이여! 출가한 사람은 무엇보다도 道(佛道, 佛法)를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 내 경우 지난날 계율에 마음을 두기도 하였고, 경론을 연구하기도 하다가, 나중에서야 그것들이 세간을 구제하는 약이며 설명하는 말인 줄 알고, 마침내 모두 버리고 도인을 찾아가 참선을 하였다. 그런 뒤에 큰 선지식을 만나 보고 나서야 도를 보는 안목이 분명해졌다.

 

(15) 부처를 완전한 경지라고 여기지 말라

완전한 경지(究竟)건 무엇이건 相을 세워서 부처를 대상화한다면, 그것은 스스로를 속이고 밖으로 끌려서 顚倒衆生이 되는 것이다.

 

(16) 모든 가르침은 방편설임을 알라

대상으로서 따로 얻을 부처는 없는 것이다. 모든 대상은 참사람의 작용에 의하여 나타나는 빈 모습〔空相〕일 뿐이다. 어떠한 經論을 막론하고 부처의 가르침은 전부 그때그때 병에 따라 약을 주는 方便說들일 뿐이다.

이와같이 참사람이 되는 길은, 우선 참다운 견해를 가지고, 밖으로 치달려 찾지 말고 스스로를 돌이켜보아, 의심하지 말고 스스로를 믿는 것이다. 또 경론을 읽어 알음알이로 이해하고 계율을 엄격히 지키고 고요히 앉아 좌선하여 觀法에 몰두하는 것은 모두 밖으로 相을 짓고 조작하는 것이라서 業 짓는 일일 뿐이지 참사람을 찾는 길은 아니다. 이와는 달리 밖으로건 안으로건 찾기를 그치고 조작하지 않을 때 참사람은 바로 지금 여기에서 명백하게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눈〔眼〕은 눈 자신을 알려고 해도 눈 자신을 볼 수가 없다. 또 보이는 영상을 자신이라고 할 수도 없다. 단지 지금 여기에서 보고 있는 작용을 깨달으면 스스로가 눈임을 믿는 것이다.

 

5. 작용할 뿐

이처럼 참사람이 되는 길은 무엇보다도 참다운 견해 즉 바른 안목을 가지는 것이다. 바른 안목을 가져야 밖으로 구하여 경계에 속아 業 짓는 일이 없게 되고, 스스로를 의심치 않고 믿어 어딜 가나 주인공이 된다. 참다운 견해를 가지려면, 경론을 해석하고 그 의미를 따져 알음알이를 내거나 계율을 지키고 좌선을 하는 등의 격식을 만들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일들은 모두 밖으로 치달려 일부러 모양을 조작하는 것이니, 모두 스스로를 속이는 짓이고 과보를 받을 업을 짓는 일이다.

 

부처의 가르침은 모두가 병 따라 약을 쓰는 방편설임을 알아서, 그 가르침을 문자 그대로 믿고 그 가르침이라는 相에 머무르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된다. 바깥으로 佛法을 구하면 말에 속고 모양에 속고 사람에게 속아서 스스로에게 갖추어져 있는 완전한 佛法을 볼 수가 없다. 따라서 밖으로 치달려 찾지 말고 치달려 찾는 그것 즉 스스로를 돌이켜보아야 한다. 안팎의 모든 것은 모두 스스로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스스로는 대상이 아니므로 스스로가 스스로를 볼 수는 없다. 다만 이러한 이치를 바로 알아서 스스로를 의심 없이 믿고 밖으로 아무런 조작을 하지 않을 때, 스스로는 이 모든 현상 즉 작용에서 저절로 드러난다. 따라서 평상 그대로의 모든 일이 스스로 즉 참사람의 작용으로서 모두가 스스로(참사람)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평상 그대로의 모든 일이 스스로(참사람)의 나타남이니 어딜 가나 늘 주인공이다.

 

이치로 따지면 참사람이 작용하여 萬法이 나타나며, 깨달아 들어가기로 따지면 만법을 보고 작용을 알며 작용을 보고 참사람을 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참사람이 곧 작용이요, 작용이 곧 만법이니, 佛法이라 하여 새롭게 얻을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이것이 참다운 견해이지만 이 참다운 견해도 하나의 경계이니 속아서는 안된다. 여기에 이르러서야 진정 참다운 견해를 가졌다고 할 것이다. 여기에 이르면 온갖 경계로 작용하여 나타나지만 조금도 경계에 미혹당하지 않고 항상 자유자재하여, 업 짓는 일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옛사람은, “부처님은 항상 세간에 계시면서도 세간법에 물들지 않는다”라 하고, 임제는, “나는 12년 동안 業의 성품을 찾았는데도 겨자씨만큼도 찾을 수 없었다”라고 한다.

 

이와같이 참사람은 일상의 모든 행위와 생각과 느낌 등 모든 일에서 작용하지만 항상 스스로의 본래자리를 벗어나지 않아서 늘 자유자재하게 작용하는 것이다. 말로는 본래자리라고 하지만 형태도 없고 머무름도 없으니 벗어날래야 벗어날 수도 없고, 구속될래야 구속될 수도 없다. 그런데 이러한 자재하고 원만한 본래자리를 회복하는 길은, 경론의 연구나 계율의 수지나 좌선법의 實修로써가 아니라, 뛰어난 선지식을 찾아서 그의 자재한 작용을 통하여 바로 자신의 본래자리로 깨달아 들어가는 것이 최상이라고 임제는 말한다.

 

善知識이 學人을 점검하고 깨우치는 것은 모두 자신의 자재한 작용을 통하여, 학인이 밖으로 드러난 대상에 따라가는가 아니면 대상에 속지 않고 자기의 본래자리에서 거리낌 없이 작용하는가를 알아보고, 대상에 속지 말고 스스로의 본래자리 즉 참사람을 찾을 것을 깨우쳐 주는 것이다. 그래서 임제는, “그대는 나의 옷 입는 그 사람을 아느냐?”라 묻는다. 일단 참사람을 찾으면 다시는 대상에 속거나 조작함 없이 한평생 아무 일 없는 사람으로서 그저 작용하고자 하면 작용할 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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