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 폐기는 大과오… 국한 혼용으로 ‘東 아시아성’ 살려내자
김정강 이데올로기 비평가 gumgun@naver.com
한글 창제 이전까지 한반도의 문자이던 한자. 위만조선과 삼한시대에 최초로 한자를 도입한 이래 국자(國字)로 자리매김했다. 고대 동아시아 지역의 ‘소중화(小中華)’ 또한 한자를 중심으로 구축됐다. 그러나 한자가 소중한 것은 비단 과거와의 연결고리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필연적으로 도래할 동아시아 공동체의 근간이라는 이유도 있다. |
‘베트남’이라는 국명은 한자 ‘越南(월남)’의 베트남어 음독(音讀)이다. 베트남어에서는 수식 형용사가 명사의 뒤에 오므로 越南은 한국 어순으로 南越이 된다. 남월이라는, 중국을 본위로 한 지역 명칭에서도 드러나는 바와 같이 베트남은 기원전 112년 한무제(漢武帝)에 의해 정복된 뒤로부터 서기 939년 오권(吳權)이 베트남 독립왕조를 수립할 때까지 약 1000년간 중국에 예속돼 있었다. 한무제는 그 시기 고대 한반도 북반부에도 낙랑·진번·임둔·현도의 한사군(漢四郡)을 세운 바 있다.
베트남을 지배하던 기간에 중국은 베트남을 한 개의 군(郡) 또는 주(州)로 복속시키고 중앙에서 직접 관리를 파견해 통치해왔다. 즉 고대부터 베트남은 한국보다 더 직접적으로, 더 오랫동안 중국의 통치를 받아온 것이다. 939년 오권의 투쟁으로 독립한 후에도 계속 중국의 영향권에 있다가 11세기 초 이조(李朝)에 이르러서야 중국의 지배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베트남은 완전히 독립한 이후에도 중국식 통치방법의 봉건적 합리성을 높이 평가해 중국의 간섭 없이 스스로 중국의 과거제도를 그대로 도입했다. 결국 이조는 과거제뿐 아니라 각종 중국 법률과 제도를 도입해 중국식 중앙집권형 전제 관료봉건 국가 형태를 구성하고, 중국의 위성국인 상태에서 조선과 같이 소중화(小中華)를 자처하면서 독립을 견지해왔다.
이런 역사를 가진 베트남은 유사 이래 한자를 문어(文語)로 사용해왔으며, 베트남어 낱말의 60%가 베트남식 독음으로 발음되는 한자 단어다. 베트남 한자음은 프랑스의 동양학자 앙리 마스페로(Henri Maspero·1883~1945)에 의하면 10세기 당(唐)대 장안(長安) 방언을 기초로 한 북방 독서음이라고 한다.
이런 베트남이, 혁명적으로 한자를 전폐하고 문자 생활을 일시에 로마자 표기방법으로 전환했는데, 이는 베트남인의 민족의식을 말살하고 중국의 문화적 영향력을 차단하려 한 프랑스 식민주의자의 한자 폐기 책동이 성공한 결과였다.
과거와 단절 부른 한자 폐기
1882년 프랑스 식민주의 군대가 하노이를 점령하고 베트남 식민화에 착수하자 프랑스는 베트남 지식인의 전통사상을 뿌리뽑고 베트남을 중국의 영향으로부터 분리하기 위한 정책을 단행한다. 당시 지배계급을 제외한 대부분의 베트남인이 문맹이었는데, 누구나 쉽게 깨칠 수 있는 문자를 쓰게 한다는 명목 아래 한자 폐기와 알파벳 전용에 나서 이를 성공시킨 것이다.
1885년 프랑스의 지배하에 있던 베트남에서는 당국이 베트남어의 표기를 한자 대신에 로마자로 한다고 선언하면서 그 로마자 표기방법을 ‘베트남어 정서법(正書法)’이라고 명명했다. 이 정서법은 17세기 프랑스 선교사 알렉산드 드 로드(Alexandre de Rhodes)가 이탈리아 로마에서 편찬한 ‘베트남·포르투갈·라틴어 사전’(1651)이라는 저술에서 쓴 표기법을 기본으로 제정된 것이다.
한국어와 마찬가지로 베트남어도 중국어와는 언어구조가 크게 달라, 정서법 이전에 이미 한자와 베트남어를 혼용하는 ‘추놈’이라는 고유문자가 있었다. 추놈은 13세기에 만들어졌는데, 처음 제정할 때의 한글과 마찬가지로 널리 보급되지 못하다가 프랑스 당국이 강권하는 정서법에 밀려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그 결과 오늘날의 베트남인은 고등교육을 받은 지식인조차 최다수 종교인 불교 사원에 씌어진 한자 현판도 읽지 못하며, 선조들이 지은 시가(詩歌)나 민족 전통의 고전도 읽지 못한다. 심지어 호치민(胡志明), 시에트리쾅(釋智光), 리인탕(連勝)과 같은 동포 지도자 이름의 뜻도 모른다. 그저 Ho Chi Min, Sie Tree Kuang, Lien Tang과 같이 로마자로 기록하는 이른바 정서법으로 읽고 발음할 뿐이다.
이와 같이 한자를 폐기하고 정서법을 채택함으로써 베트남은 민족의 고전적 전통으로부터 유리됐는데, 베트남이 프랑스·미국과 싸워 이겨 독립과 통일을 쟁취한 주체성을 보면 그들은 결국 어떤 형태로건 민족의 전통이 녹아 있는 한자의 부활과 사용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서세동점(西勢東漸) 시기에 한국이 알파벳 전용으로 가지 않고 한글 전용에 머물러 있는 것은 베트남에 비하면 다행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이미 우수한 한글이 발명되어 있었고, 한민족의 문화적 주체성이 베트남보다는 강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한반도에 등장한 한자
한반도에 한자가 들어온 것은 서북지방에서는 위만조선(衛滿朝鮮) 이전의 시대였는데, ‘기자조선’을 찬탈해 위만조선을 세운 위만에 관한 기록은 ‘한서(漢書)’에 정확히 남아 있다. 한서에 따르면 위만은 연(燕)나라의 장수였는데, 연왕으로 봉해진 한고조(漢高祖)의 건국공신 노관(盧琯)의 부하였다가, 노관이 궁정 권력투쟁에서 실각해 흉노로 도망하자 기자조선의 마지막 왕이던 준왕(準王)에게 투항해 신임을 얻어 정착한 후, 세력을 길러 준왕을 쫓아내고 위만조선을 세웠다고 한다.
또한 한서는 위만조선이 멸망할 때의 마지막 왕은, 위만의 손자인 위우거(衛右渠)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로써 위만가(衛滿家)의 성씨가 위씨였음을 알 수 있는데, 위씨는 당시 한나라에 실제로 있었던 장군의 가문이었으므로 위만 일파는 한인이었으며, 필연적으로 한어와 한자를 사용했을 수밖에 없다. 이때 위만이 지배하던 한반도 서북지방의 지배계층은 한자 교양을 습득했을 것이다.
한반도 남부지방에서는 삼한(三韓)시대부터 한자가 유입되었다. 한민족(韓民族)의 연원인 삼한에 한자가 유입될 당시 삼한에는 고유의 문자가 없었다.
신라의 지증 마립간(智證麻立干·500~514)이 처음으로 중국식 주군현제(州郡縣制)를 받아들임과 동시에, 그때까지 쓰고 있던 니사금(尼師今), 거서간(居西干), 마립간(麻立干) 등의 고유어 수령 칭호를 버리고, 중국식의 왕(王)으로 칭하게 했다. 신라는 8세기에 이르러 당률(唐律)을 완전히 받아들이고, 나라 안의 모든 고유 지명까지 한자 지명으로 고쳤다.
신라가 초기에는 그 수령을 니사금, 거서간, 마립간으로 호칭했는데, 이 니사금이나 마립간은 모두 흉노(匈奴, Huns)를 비롯한 북방 기마민족의 군장(君長)을 이르는 명칭이다. 니사금이나 마립간, 거서간은 모두 카간(可汗, Khaghan) 또는 칸(汗)이라는 말과 같은 것이다. 이런 호칭을 쓴 족속은 원래 금산(金山, 알타이 산) 부근에서 수렵과 유목에 종사했으나, 뒤에 동진·서진·남진해 다른 종족을 정복하거나, 그 이동 과정에서 스스로 다른 종족에 정복되거나 동화·흡수됐다.
신라가 그 군장의 칭호를 고유한 호칭에서 중국식의 호칭인 왕으로 고친 지증왕 때에는, 이미 신라의 지배계급은 중국 문화의 영향을 깊이 받은 뒤였다. 신라의 지배계급이 이렇게 중국 문화의 영향을 받기 위해서는 그보다 훨씬 먼저 중국 문화의 운반 매체인 한자를 도입해야 했다. 그러므로 당시 동아시아의 유일한 문자이던 한자는 삼한시대에 이미 한반도 남부에 들어와 있었다.
즉 기록상으로 한반도 서북지방에는 위만조선 이전에 이미 한자가 들어왔는데, 그와 거의 동시적으로 한반도 남부의 삼한지방에도 한자가 전래된 것이 확실하다. 근대 부르주아 혁명을 계기로 민족이 형성된 서구와는 달리 한민족은 신라의 삼국통일을 계기로 민족을 형성했는데, 신라 삼국통일의 문자적 계기는 한자의 국자화(國字化)였다.
동아시아의 공통문자
오늘날 한국, 일본, 베트남은 미국으로부터 압도적인 문화적 영향을 받고 있다. 그러나 문화 맹아기인 고대에는 현재 미국으로부터 받고 있는 문화적 영향보다 훨씬 큰 영향을 중국으로부터 받았다. 오늘날 이 민족들은 영문을 나라 문어로 채택하지 않지만, 당시에는 한문을 공통의 문어로 채택해 1000년이 훨씬 넘게 사용해왔다. 또 한국인이 지금 아무리 친미(親美)적이라고 해도 과거 스스로를 ‘소중화’로 자부한 것처럼 오늘날 스스로를 ‘소아메리카’로 자처하진 않는다.
한자는 고대 중국의 선진 문화와 더불어 동아시아 각국으로 전파돼 그 나라의 국자가 됐고, 동아시아 각국이 모두 한문을 자기 나라의 문어로 사용함으로써, 결국 동아시아의 공통국자(共通國字)로 자리매김했다. 한자는 그 천수백년 전부터, 당시 문자가 없던 한국, 일본, 베트남 등의 주변으로 전파돼 토착화했다.
서세동점이 거의 수습된 오늘날, 중국과 일본은 모두 한자를 상용하고 있다. 일본뿐 아니라 대만, 홍콩, 싱가포르도 모두 한자를 상용하는 것으로 결론지었다. 최근에는 말레이시아에도 한자와 중국어 열풍이 불고 있다. 베트남도 결국 한자를 부활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그런데 전세계 인구 약 60억 중에서, 동아시아의 한자 사용권 인구는 약 15억인 데 비해 한글 사용권 인구는 약 7000만에 불과하다. 세계적 안목에서 보면 한글 사용인구는 일점(一點)에 불과하다고 표현할 수 있다. 이 일점에서 폐쇄적으로 한글을 전용하면서 한글이 세계 최고의 우수한 문자임을 자랑하고만 있다면, 그게 사실은 사실이지만, 한글의 그러한 우수성과는 별개로 그 사용 면적이라는 측면에서 객관적으로는 문제가 있다.
더욱이 한반도를 생존공간으로 장악한 한민족은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을 다 같이 교류할 수 있는 천혜(天惠)의 입지를 획득해놓았는데, 이 유리한 입지를 살리려면 동아시아 15억 인구가 상용하는 한자를 상용해 그들과 상용문자를 공유함으로써 정보교류와 정서적 공동체 감정을 높여야 할 것이다.
한중일 미래공동체의 밑거름, 한자
한자 상용을 공유한다는 것은 서양에서 알파벳 상용을 공유하는 것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정보교류의 이점이나 정서적 공동체 감정의 고양 수준이 높아진다. 알파벳은 단순한 표음기호이므로 표기된 임의의 문자를 발음할 수는 있지만, 표기된 단어의 의미를 해석할 수는 없는 데 반해, 한자는 사실상 글자 한 자 한 자가 바로 의미를 가진 단어이므로 글자를 알면 그 뜻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서세동점으로 인해 동아시아가 분해되기 이전에는 비록 쇄국의 장벽 안에서였지만, 한국·중국·일본은 문화적·사회적·경제적인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것이 서세동점 이후 해체되어 근 100년 동안 암중모색 속에 있다가, 악전고투 끝에 서서히 자주와 번영의 공동체로 향하는 추세다.
한국은행 금융경제연구원이 지난해 9월26일 내놓은 보고서 ‘아시아 경제의 장래’는 2040년 아시아의 경제규모가 전세계 GDP(국내총생산)의 40% 이상을 차지하고 한국 경제는 전세계 GDP의 2%를 차지할 것으로 전망한다. 또한 중국의 경제규모는 2020년경 일본을 추월하기 시작해 2040년경에는 미국과 대등해지며, 전세계 GDP의 5분의 1 정도를 차지할 것이라고 한다. 1인당 GDP에서는 중국은 2040년쯤 1만5000달러로 10배 이상 증가할 것으로 예상됐다. 한국의 1인당 GDP는 현재 미국, 일본의 3분의 1 수준에 그치고 있으나, 2040년경에는 약 4만5000달러에 달해 미국, 일본의 3분의2 수준에 이를 것으로 전망됐다.
블룸버그 칼럼니스트 윌리엄 페섹은 지난해 10월13일 ‘중국은 일본도 구소련도 아니다’라는 제목의 평론에서, 미국이 중국과 경쟁하는 일은 비생산적이라고 지적하며 이렇게 설명했다.
“오늘날 중국은 일본과 유사점이 많다. 중국은 과거 일본이 그랬던 것처럼 수출 성장전략과 전자 및 자동차 산업의 경쟁이익 개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중국이 미국으로부터 환율 절하 압력에 처해 있다는 점도 1980년대 일본 상황과 유사하다. 이러한 유사점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일본을 따라 하지 않고 있다. 일본 기업들은 미국 부동산에 투자한 반면 중국 기업들은 미국 기업 인수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중국은 일본만큼 빠르게 정상에 오를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중국 경제 규모는 30~40년 후 미국을 능가할 것으로 보인다.…중국과 구소련을 비교하는 것 또한 옳지 않다. 중국은 구소련과는 달리 세계 경제와 하나가 되고 있고 자본주의를 수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경제의 안정성과 성장 속도 면에서도 마찬가지다. 중국이 미국 재무부 채권을 사들이고 미국과 경제외교를 활발히 펼치고 있다는 점에서도 소련과는 다르다.”
특히 페섹은 부시 정부의 반중(反中) 정서를 우려하면서 미국 관리들에게 중국과 체제경쟁을 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아시아 공동통화 창출 문제도 현실적인 논의의 탁상에 올랐다. ‘아사히신문’은 지난해 10월23일, EU(유럽연합)의 공통통화인 유로화와 같은 아시아 공통통화의 싹이 트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 신문은 ADB(아시아개발은행)가 2006년부터 아시아 통화의 가중평균치를 보여주는 ACU(아시아통화단위)를 공표할 방침이라며 이같이 전했다.
ACU는 한국과 중국, 일본을 비롯해 ASEAN(동남아국가연합) 10개국 등 모두 13개국의 통화를 조합한 통화단위다. 대만과 홍콩 통화의 참여도 검토되고 있다. ACU는 바스켓통화 방식으로 참가국의 국내총생산과 무역액 등을 반영해 조합비율이 결정되나 일본의 엔화와 중국 위안화, 한국의 원화 비중이 크게 반영될 것으로 보인다. 당장은 참가국의 환율 안정을 목표로 내걸었으나, 결국은 유로화와 같이 공통통화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고 이 신문은 내다봤다.
이러한 전망 속에서 동아시아 공동체의 형성은, 그 형식에서는 편차가 있겠지만 점차 필연성을 갖추게 될 것이다. 동아시아 공동체가 전개되는 데 문화의 도구적 관건은 한자다. 중국과 일본의 문자생활 기본은 한자로, 한자를 알면 중국과 일본의 서적이나 문서의 내용을 30% 정도는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일본어나 중국어를 배우려 할 때 한자 2000자 이상을 알고 있으면 30% 정도 학습 완료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의 간자(簡字)나 일본의 약자(略字)는 그리 큰 문제가 안 된다. 한자는 동아시아 미래공동체의 문화적 밑거름인 것이다.
상용한자 2000자만 익혀도…
3000년 전 한자의 자종은 3500자가량이었는데, 2000년 전에는 약 1만자, 한자가 한반도에 전래되던 1500년 전 삼한시대에는 약 2만6000자가 됐고, 오늘날 큰 자전에는 약 5만자가 실려 있다. 그러나 학술연구를 포함한 일반적인 문자생활에 있어 5만자의 한자 자종이 모두 필요한 것은 아니다. 유학(儒學)의 대표 고전인 ‘논어(論語)’의 총 글자 수는 대략 1만자인데, 자종은 1500자 정도다. 일본에서 상용한자로 쓰고 있는 것이 현재 1945자다. 일본은 한국보다 한자를 훨씬 많이 혼용하고 있음에도 1945자의 상용한자를 사용하면서 아무런 불편이 없다.
한글이나 가나와 같은 표음문자 없이 순 한자로만 문자생활을 하기 때문에 한국이나 일본보다 훨씬 많은 한자를 사용하는 중국의 경우 현대의 각종 출판물에 쓰이는 한자를 사용빈도가 높은 순서대로 통계를 낸 결과 950자가 90%, 2400자가 99%, 3800자가 99.9%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따라 1988년 중국 국가교육위원회와 국가어언문자공작위원회(國家語言文字工作委員會)가 공동으로 ‘현대한어상용자표(現代漢語常用字表)’를 발표했는데, 상용자 2500자와 차상용자 1000자 등 합계 3500자였다. 이 3500자만 알면, 중국 모든 출판물의 99.48%를 커버한다고 한다. 논어의 자종이 1500자이고, 일본의 상용한자가 1945자임을 감안하면 한국은 1800∼2000자의 상용한자로 충분할 것이다. 이 정도의 한자는 학습에 큰 어려움도 없고 오히려 청소년의 뇌력(腦力) 강화 훈련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이 최근 과학적으로 입증됐다.
우리말은 어휘의 70% 이상이 한자로서만 그 의미를 정확히 표기할 수 있는 한자조어(漢字造語)다. 그러므로 한글 전용으로 표기해도 읽는 사람이 머릿속에 해당 한자를 떠올리지 않으면 정확한 의미를 모르게 되고 만다.
유럽이 표음문자 생활을 한다고 하나, 그들의 표음문자는 라틴 문자를 기반으로 한 것으로 수천년에 걸친 지적 활동을 통해 그 내부에 일정한 표의성도 구비하고 있다. 한자로 지적 활동을 해온 한민족은 한글 전용으로서는 한국어 한자 단어 내부에 표의성을 구축할 수 없다.
개체·구체·개별, 일반·추상·보편
한글 전용만으로는 서구의 학술용어를 번역할 때 극복하기 힘든 어려움에 부딪히는데, 이는 고유의 한국어만으로는 해당 단어 자체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한민족의 문화와 문명이 원시적이던 단계, 즉 삼한시대에 단층적으로 높은 문화와 문명의 산물인 한자가 들어와 이후 한국 고유어의 발전이 저해되고 그 공간을 한자가 메워버린 탓이다.
그 결과 순수한 한국어에는 문화와 문명이 원시적인 단계에서도 창출 가능했던 개체·구체(具體)·개별(個別)을 가리키는 단어는 있지만, 문화와 문명이 더욱 높은 단계에서 필요한 일반·추상(抽象)·보편(普遍)을 표상하는 단어는 결핍되어 있다. 일반·추상·보편을 표상하는 단어는 발전된 한자 단어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예컨대 한국 고유어에는 얼음, 돌, 모래 같은 개체는 있으나, 고체(固體)라는 일반은 없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따위의 개별은 있으나, 계절(季節)이라는 보편은 없다. 또 한국 고유어에서는 짧다, 길다, 슬프다 등의 구체를 가리키는 단어는 있으나 덕(德), 의(義), 인(仁)과 같은 추상을 표현하는 단어는 없다.
한국 고유어로 개체는 있으나 일반이 없으므로, 한글 전용으로 일반을 만든 경우도 있다. 예컨대 올챙이 개구리 등을 양서류(兩棲類)라고 하는 대신 ‘물뭍동물’이라고 바꾼 것이다. 물뭍동물을 더욱 고유어화해 ‘물뭍 옮살이’ 또는 ‘물뭍 두살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노력의 결과는 용어의 개념을 더욱 혼란시키고, 공통용어를 잃어버림으로써 일본이나 중국과의 학술 교류에서 장애만 초래할 뿐이다.
한어(漢語)와 한국어의 이질성
한자가 동아시아의 공통국자이지만, 한어(漢語)와 한국어·일본어가 동일한 어족계통은 아니다. 한어와 한국어·일본어는 계통이 다른 언어에 속한다. 한어는 중화-티베트 어족에 속하고 한국어·일본어는 우랄-알타이 어족에 속한다.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 계열이 현존 인류로 진화한 시기는 제4차 빙하기라고 한다. 제4차 빙하기는 최후의 빙하기였다. 그때까지의 간빙기에는 온화하던 중국 허베이(河北) 지방의 기후가 급변해 혹한이 내습해왔다. 미국의 인류학자 쿤에 따르면, 이 혹한의 내습이야말로 몽골로이드(Mongoloid) 인종 탄생의 환경적 모태였다고 한다.
즉 제4차 빙하기에 몽골·허베이·서시베리아는 영하 60~70℃로 기온이 내려갔는데, 문명의 힘으로 이런 악조건에 대항할 수 없었던 야만 단계의 구인류는, 다른 동물과 마찬가지로 신체를 환경에 맞게 진화시킴으로써, 자연도태의 선택에서 잔존해 나가야만 할 상황이었다.
인간의 체중이 일정한 상태에서는 키가 작을수록 방열면적(放熱面積)인 피부면적이 줄어든다. 혹한 속에서 전신을 모피로 감싼다고 해도, 야외 작업에서는 어쩔 수 없이 눈과 코를 중심으로 하는 안면만은 내어놓을 수밖에 없다. 이런 환경에서 눈과 코, 얼굴 표면은 동상에 걸린다. 호흡에서 나오는 수증기가 응축돼 수염에는 항상 고드름이 붙어 있었고, 이 또한 동상의 원인이 됐다. 이런 조건에서 안구(眼球)를 보호하기 위해 눈꺼풀이 두꺼워지고 눈은 가늘어졌으며, 코는 납작해지고 얼굴에는 방한용 지방이 쌓여 얼굴 전체가 두루뭉술하고 편평해졌다.
얼굴에 방한용 지방이 쌓여 혹한으로부터의 단열(斷熱)이 가능케 되면서, 호흡시 수증기의 응축으로 인한 고드름의 접착 요인인 수염도 말끔히 제거됐다. 그러자 얼굴의 기름기는 더욱 두드러지게 됐다. 키는 작아졌고, 손과 다리는 짧아졌다. 이것이 혹한에 적응하기 위해서 진화된 몽골로이드 특유의 내한(耐寒) 체형이다.
이러한 특유의 강인한 체형을 구비한 몽골로이드 인종은, 빙하기가 끝나 기후가 온화해지기 시작하자 마침내 몽골 고원에서 사방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중의 한 무리가 남하해 중국 대륙으로 들어가 한어를 사용하는 한족이 됐다. 예컨대 중국 허난(河南) 지방에서는 원(原) 몽골로이드 인종의 특징을 가진 현존 인류의 유골과 유적이 발굴됐는데, 이들은 구석기시대 말기의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이들도 북쪽의 몽골 고원에서 남하해 중국 대륙에 정착한 원 몽골로이드 인종의 한 갈래였던 것이다. 몽골로이드 인종이 빙하기를 지내고 사방으로 이주한 시기는 동시적인 것이 아니라 무리에 따라서 순차적으로 이뤄졌다.
인류의 언어는 구석기시대 초기부터 개별적인 단어가 발생하기 시작해 구석기시대 말기 또는 신석기시대의 초엽에 이르러 언어 구조 전반이 창출됐다고 보는 게 일반적인데, 이 언어의 창출기에 한족(漢族)은 몽골 고원에 있던 몽골로이드의 원 무리로부터 먼저 떠났던 것으로 보인다.
그에 비해 몽골족은 그후에도 계속 잔류해 지금까지 몽골 고원에 그대로 머물러 있고, 한족(韓族)이나 왜족(倭族)의 주류는 언어의 창출기 이후에 순차적으로 몽골 고원을 떠난 것이다. 그 결과 한국인·중국인·티베트인·몽골인·일본인 이 모두 몽골로이드 인종임에도 불구하고, 몽골어·한국어·일본어가 우랄-알타이 어족에 속하는 데 반해, 한어·티베트어 등은 중화-티베트 어족에 속하는 언어 구조상의 이질성을 갖게 된 것이다.
알다시피 조선 세종 28년(1446)에 반포한 훈민정음(訓民正音)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인데, 세종은 그 창제 동기를 ‘훈민정음 서문’에서 “우리나라의 말이 중국말과 달라서, 중국말을 적는 한자와는 서로 잘 통하지 아니한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려고 하는 일이 있어도 마침내 자기 생각을 나타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가 이 사정을 딱하게 여겨, 새로 스물여덟 자를 만드니, 누구나 쉽게 익혀서 날로 씀에 편안하게 하고자 함이니라”고 밝혔다.
국한 혼용의 완전성
이 지적이 바로 우랄-알타이 어족에 속하는 한어(韓語)와, 중화-티베트 어족에 속하는 한어(漢語)의 구조적 차이를 말한 것이며, 그 구조적 차이의 결과로 인해 한민족이 한문(漢文)을 전용할 때 발생하는 비합리를 밝힌 것이다.
천수백년 동안 한자 전용에 의한 한문을 사용해왔을 뿐만 아니라, 그 한자·한문이 선진적 중화 문명을 수용하고 있었던 데에 대한 존숭(尊崇)이 거의 미신적일 정도였던 당시에 세종이 이와 같은 과학적 어문이론(語文理論)을 천명했다는 것은 천재적 통찰력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세종은 한글을 창제한 뒤 스스로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지어 국한 혼용의 모범 응용사례를 보였다. 용비어천가에서 드러난 국한 혼용의 조화로운 용법은 지금도 그대로 한국어 글쓰기의 모범이 될 만하다.
그런데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할 때 세종 자신은 정음으로 한자를 대체하려는 것이 전혀 아니었고, 어디까지나 정음으로 한자를 보완하려는 생각으로 한자를 ‘진서(眞書)’, 정음을 ‘언문(諺文)’이라고 호칭하며 공문서는 반드시 한문으로만 작성하게 했다.
이 방침은 조선의 어문정책으로 정식화됐는데,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사채(私債)의 증서를 언문으로 썼거나, 증인과 필자가 없으면 청송(請訟)하지 아니한다”는 조항이 있다. 청송은 재판을 청구한다는 것. 언문으로 작성한 문건은 재판에서 증거자료로 활용될 수 없다는 의미다.
그런데 한어(韓語)와 한어(漢語)는 문장 구성에서 어순이 근본적으로 다르므로 문장 안에서 개별 단어의 운동 양식도 다르다. 그러므로 한자 전용, 즉 한문으로는 한어(韓語)가 내포한 의미와 기분을 정확히 기록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한자는 논리어를 중심으로 단어를 기록하는 용도로 사용하고, 한글은 문장 전체를 구성하는 근본 뼈대로 사용해 국한 혼용을 실시하면, 한국어의 어문 생활이 완전하게 되는 것이다.
북한의 한자교육
광복 후 북한에서 한자 폐기를 주장한 주력은 주시경의 직계 제자들로 광복 전 중국 옌안(延安)에서 조선독립동맹 주석을 지내고, 광복 후 귀국해 신민당 위원장으로 재직한 김두봉도 혁신적인 한글 전용론자였다. 이에 따라 북한은 즉각 한자를 폐기하고 한글 전용을 전면적으로 단행했다.
급진적인 한글 전용파의 공세로 이처럼 무조건 한자를 폐기한 북한에서, 비록 문제제기에 그친 것이라고 할 수 있기는 하나 무시할 수 없는 목소리가 등장했다. 즉 1964년 김일성 주석이 “지금 남조선 사람들이 우리 글자와 함께 한자를 계속 쓰고 있는 이상 한자 문제는 반드시 우리나라의 통일 문제와 관련시켜서 생각하여야 합니다. 그러니 일정한 기간 우리는 한자를 배워야 하며 그것을 써야 합니다”라고 교시(敎示)함으로써 한자가 전면 폐기된 북한에 한자교육 문제가 다시 대두됐다.
김일성은 1966년 다시 “남조선 혁명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한자교육이 필요하다”고 교시했다. 이 교시에 따라 1968년부터 북한에서 한자교육이 재개됐고, 중학 1학년(한국의 초등 5학년)부터 고등중학(고등학교)까지 1500자를 가르치고, 대학까지 3000자를 가르치게 됐다. 대학까지 3000자를 가르치게 된 것도 1970년 김일성의 세 번째 교시에 따른 것이다.
1970년 교시에서 김일성은 “지금 한자 기초가 약합니다. 그렇다고 너무 많이 배울 필요는 없습니다. 3000자 정도면 충분합니다. 초등·중등학교에서 기술학교까지 2000자 정도, 대학에서 1000자 정도 배우면 될 것입니다”라고 했다.
이에 따르면 한국의 학제로 환산해 초등학교 5~6학년까지 500자, 중학교 2학년까지 1500자, 이렇게 고등학교 졸업까지 2000자를 습득하게 되고, 대학을 졸업할 때에는 3000자를 끝내게 되어 있다. 사실 한자 3000자를 습득하면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향가(鄕歌) 등 민족의 고전도 읽을 수 있다.
김정일 “남한 드라마 이해 어려워”
1980년대에 들어서서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한자교육 강화를 지시하기도 했다. 1997년 4월 평양에서 발행된 ‘문화어 학습’은 “학생들이 한자어의 뜻을 모르고 방탕하게(되는 대로 마구) 쓰는 현상이 있다. 한자 교원들은 말을 바르게 쓰는 기풍을 세우기 위해 한자를 깊이 있게 잘 가르쳐야 한다”고 강조해 한자를 알아야 조선어 생활을 제대로 할 수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최근에도 김정일이 직접 한자 교육에 깊은 주의를 기울이고 있음을 엿볼 수 있는 기사가 있었다. 연합뉴스 2005년 6월18일자 ‘김정일 위원장, 깔보면 화나지 않겠느냐’는 제목의 기사는 “김 국방위원장은 ‘남북이 언어순화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불멸의 이순신’ 등 남쪽 드라마와 영화를 많이 보고 있다’는 김 국방위원장은 ‘하지만 (TV드라마 등을 통해 방영되는) 남쪽 젊은이들의 언어가 악센트 차이 등으로 인해 이해에 어려움이 있다’면서 ‘남북 언어 이질화를 막기 위해 한문 공부를 많이 시키고 있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북한의 이데올로기 문제에 대한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김정일의 이런 공개 발언을 보면, 북한이 김일성의 교시 이후 계속해서 2005년 현재까지 한자교육에 꾸준히 힘을 쏟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서도 2000년 8월11일 베이징(北京)에서 열린 ‘조선어 학술 토론회’에서 북측 대표는 “언어의 민족성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국문 전용 정책이 관철되어야 한다”고 했다. 즉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공식의 어문정책으로는 한글 전용이라는 이데올로기적 관점을 탈피하지 못하고 명분론적인 ‘국문(한글) 전용’을 고집하고 있는 것이다.
학교 교과에서만 한자를 가르치고 일상생활에서 국한 혼용을 시행하지 않으면 배운 한자를 잊을 뿐만 아니라 한자의 적절한 실용방법을 모르게 되어 모처럼의 한자교육도 빛을 잃게 된다. 북한의 이데올로기 분야에서 김정일은 절대적인 권한을 소유하고 있는 만큼 그 강력한 권력으로 국한 혼용을 단행한다면 민족문화의 장래에 이바지하는 결단이 될 것이다.
박정희의 독단
1948년 10월9일, ‘한글 전용에 관한 법률’이 공포됐으나, 동아시아의 고전을 비롯한 인문적 교양이 풍부했던 이승만 대통령은 ‘한글 간소화’를 언급할 정도였으므로 한자 폐기와 한글 전용을 시행할 의사가 없었다. 그후 시일이 지남에 따라 한글 전용의 많은 문제점이 드러나 남한 사회에서는 한글 전용 주장에 대한 반성이 일어났다.
그 결과 각급 학교에서 현실에 맞는 한자 교육을 실시해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됐고, 그 방향으로 국어교육 정책의 방향도 바뀌어갔다. 마침내 1963년에 공포된 교육과정에서는, 1965년부터 개편되는 각급 교과서에 초등학교 600자, 중학교 400자, 고등학교 300자 범위에서 한자를 배정하기로 결정했다. 이 방침에 의해 실제로는 1965년 개편 초등학교 교과서에 602자, 1966년 개편 중학교 교과서에 1000자, 1968년 개편 고등학교 교과서에는 1330자의 한자를 넣었다.
그러나 1968년 5월 박정희 당시 대통령은 갑자기 내각에 1973년을 목표로 한 ‘한글 전용 5개년 계획’을 수립하라고 지시했다. 같은 해 10월에는 목표년도를 1970년으로 3년 앞당기게 하는 등, 7개항의 강력한 한글 전용 지시를 다시 내렸다. 이 7개항 중 제6항이 각급 학교 교과서에서 한자를 없애는 것이었다. 박정희의 독단에 따라, 그 직전까지 진행되고 있던 국어 교과서 한자 넣기 작업이 모두 중단됐다.
박정희 자신은 사적 메모 등에서 국한 혼용을 일상으로 하면서, 전시행정(展示行政)으로는 길가의 한자 간판까지 경찰관으로 하여금 강제철거하게 하는 독재적인 한글 전용 단행으로, 문화 국수주의적 군중심리에 정치적으로 편승했다.
또한 박정희는 쉬운 것을 선호하는 대중의 우중주의(愚衆主義)까지 정치의 다수 확보 조작에 이용했다. 반면 ‘국민교육헌장’을 만들어 학생을 비롯한 전 국민으로 하여금 외우게 했다. 그런데 기실 한자 폐기는 이 국민교육헌장의 이념, 즉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 안으로 자주독립의 자세를 확립하고 밖으로 인류 공영에 이바지할 때다’라는 것에 정면으로 역행하는 것이었다.
무릇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리려면, 오늘의 국가이데올로기를 민족의 유구한 전통과 연결시켜 변증법적 통일을 창출해야 하는데, 한민족의 전통은 향가, 삼국사기, 삼국유사와 같은 고전 속에 있기 때문이다. 전통 정서를 모를 뿐만 아니라, 김구 선생의 ‘백범일지’는 말할 것도 없고, 불과 20~30년 전에 쓴 동포 선배들의 국한 혼용 논문이나 저작도 읽지 못한다면 어떻게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리겠는가.
‘한글 전용법’ 폐기해야
광복의 감격 속에서 제정된 ‘한글 전용법’은, 서구 문화의 압도적인 영향 아래서 수구(守舊)의 잔재를 모조리 쓸어버리고자 했던 당시의 격렬한 혁신의지를 반영한 산물이었다. 당시에는 보수건 혁신이건, 서양 문화에 대한 압도적인 존숭과 맹목적인 굴종이라고 할 수도 있는 상태가 동아시아 각국의 일반적인 추세였다.
‘한자 폐기·표음문자 채택’ 운동은 광복 직후의 한국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서구의 근대 기술력에 제압당한 동아시아 각국의 일반적인 조류였다. 그러나 반세기가 지난 지금 동아시아 각국은 격심한 시행착오를 거쳐 각자의 위치로 회귀했다.
그 정착(定着) 위치는 중국의 간자화(簡字化)와 일본의 상용한자(常用漢字) 채택이다. 한국도 상용한자 2000자의 국한 혼용으로 돌아와야 한다. 그러려면 ‘한글 전용법’을 폐기하고, 어문 문제에 대한 전면적인 재토론을 거쳐 국한 혼용의 정확한 어문 생활을 발전시킬 수 있는 새로운 ‘국어 발전법’을 제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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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급 학교의 교과서, 방송·신문·잡지 및 전문서적에 상용한자를 노출시키고, 한자교육이 실효를 나타낼 때까지 과도기적으로는 괄호 안에 한글로 토를 달아 한자의 이해와 학습을 도와줘야 할 것이다.
특히 뜻있는 문인은 시와 소설을 국한혼용으로 저술해, 전통과 연결되는 심오(深奧)한 한국적 정서의 새롭고 높은 경지를 개척해야 할 것이다. 시나 소설이 국한 혼용으로 제작되면, 그 내용이 정서면에서나 논리면에서나 매우 풍부해질 것이며, 중국이나 일본의 독자가 읽기도 쉬워질 것이다. 또한 작품이 중국어나 일본어로 쉽게 번역될 수 있고, 번역이 정확해질 것이므로 작품의 세계성을 확장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노벨 문학상을 위한 작품의 세계성 확장을 위해서는, 먼저 작품의 동아시아성으로의 확장이 그 전제가 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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