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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에서 티베트 라싸까지 48시간, ‘칭짱철도’ 탑승기

醉月 2008. 7. 30. 09:04

13억 꿈 실어나를 철마… 고공 인해전술은 시작됐다!

‘세계의 지붕’으로 부르는 티베트 고원에 철마가 달리기 시작했다. 7월1일 개통된 ‘칭짱철도’는 평균 해발고도 4500m, 최고 5072m 고지까지 올라간다. 총 구간 4064㎞, 베이징에서 티베트의 중심도시 라싸까지 시원하게 뚫렸다. 이 철길은 중국과, 중국으로부터 독립을 주장해온 티베트 양쪽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올 듯하다.

“워샹취라싸(我想去拉薩·라싸에 가고 싶어요)! 커이마(可以?·가능한가요)? 플리즈(Please), 아 제발….”
“잠시만 기다려보세요. 자리가 없을 것 같은데….”
“롼쭤(軟座·일반좌석), 잉와(硬臥·2등 침대칸)? 에브리싱 아임 오케이!”

7월18일 오전 8시. 아침 햇살이 커튼 사이를 헤집고 들어와 1등석 침대칸을 비췄다. 잠에서 깨어보니 공장에서 갓 출시된 호사스러운 기계 덩어리가 레일 위를 부드럽게 내달리는 게 느껴졌다. 창 밖으로는 한창 자란 옥수수 사이로 듬성듬성 옛 도시의 상징인 시뻘건 벽돌이 보이기 시작한다. 목적지에 가까워지고 있다.

1시간 뒤면 실크로드의 출발점인 산시성(陝西省) 시안(西安)역에 도착한다. 전날 밤 9시30분에 베이징 서역에서 출발한 티베트 라싸행 T27열차는 중간에 단 한 번 정차했을 뿐 무려 12시간을 내리 달려왔다. 하지만 침대칸이 주는 안락함 때문인지 그보다는 짧게 느껴졌다.

물론 겨우(?) 시안을 목표로 중국에 온 것은 아니다. 궁극적인 종착역은 모든 여행자의 꿈인 티베트, 중국명으로 시짱(西藏)성의 수도인 라싸(拉薩)다. 그것도 비행기가 아닌 열차로 가야 한다.

 

7월1일, 5년여의 난공사 끝에 거얼무(格爾木)에서 라싸를 잇는 1142km ‘칭짱철로’가 개통됐다. 이 소식이 전세계에 퍼졌을 때 가장 기뻐한 이는 중국 대도시의 여행사였던 것 같다. 중산층으로 격상한 중국의 대도시 주민들은 이상적인 여행지로 티베트를 꼽으며 철길이 열리기만을 기렸다고 한다. 올여름 중국에선 티베트 여행이 대유행이다.

 

 

중국인 모두가 가고 싶어하는 곳

베이징에서 라싸행 열차표를 구하는 일은, 조금 과장하면 ‘후진타오 주석을 만나는 일’보다 어렵게 느껴졌다. 베이징의 여행사마다 주말에 당도한 기자를 향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번주에 라싸에 가겠다고요? 허허. 7월 말까지는 ‘절대’ 표를 못 구합니다. 13억 중국인이 모두 가고 싶어하는 곳이 티베트예요. 무모하군요. 칭짱철도 타겠다고 무작정 베이징에 오다니.”

물론 준비가 전혀 없지는 않았다. 여행업에 종사하는 한 선배는 “가능성은 50% 미만이지만 직접 부딪치면 ‘한 장’쯤 웃돈을 얹어 구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귀띔했다. 그 말을 듣고 한달음에 베이징까지 온 것이다. 그러나 라싸는커녕 시안행 열차표마저 휴가철 수요로 매진된 현장과 맞닥뜨려야 했다.

 

베이징 서역에서 지루한 줄서기를 반복한 끝에 월요일인 7월17일 밤에 출발하는 T27 시안행 표(417위안, 약 5만4000원)를 손에 쥐고 기차에 올랐다. 마침 이 열차의 종착역이 라싸다. 중국까지 와서 티베트행을 포기할 수는 없어 우선 시안까지 가서 여행허가증을 만들고, 칭짱철도의 마지막 탑승지점인 시닝(西寧)으로 이동해 승부를 걸어볼 작정이었다.

7월18일 오전 9시20분, 시안 도착 10분 전이다. 승무원은 보이지 않는다. 잠자코 내릴 생각이던 내게 일말의 희망을 안긴 건 옆 좌석의 이름 모를 중국인이었다. 새 열차를 타고 고향으로 가는 길이라는 그는, 다행스럽게 영어를 할 줄 알았다. 내 사정을 듣더니 뜻밖에도 “차장에게 목적지를 연장할 수 있는지 물어봐주겠다”고 호의를 베푼다. 아무리 만석(滿席)이라고 해도 한 좌석쯤 여유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설명이었는데, 그 말을 듣자마자 무슨 주문을 외듯 마냥 “워샹취라싸(라싸에 가고 싶어요)∼”를 읊조렸다.

   

라싸행 T27열차 침대칸 내부. 거센 바람과 잦은 소나기에 철로 주변 토양이 유실되는 것을 막으려고 바둑판 무늬 형태로 돌을 쌓아놓은 모습이 이채롭다. 칭짱선 마지막 탑승지점인 시닝역(위에서부터).

극적인 대반전을 눈앞에 뒀지만 맘은 편치 못했다. 티베트 입경을 위한 ‘여행허가증’을 미처 준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곧장 라싸까지 갈 기회를 예상했다면 베이징에서 미리 준비했을 텐데…. 후회막급이다.

기차가 시안역 플랫폼에 다가갈 때쯤 승무원이 다가와 복음을 전한다.

“커이(可以·가능해요), 커이. 시안에서 하차하지 말고 기다리세요.”

승무원을 와락 껴안았다. 드디어 라싸에 갈 수 있는 걸까. 기차는 시안에서 10분을 정차하고 곧장 다음 역인 란저우(蘭州)로 향했다. 여행허가증이 없다는 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데, 다른 승무원이 다른 객실로 안내한다. 여권을 슬쩍 확인하더니, 1등석 침대칸이 남아 있다는 말과 함께 라싸까지의 추가비용 1013위안(약 13만원)을 부과했다(베이징에서 라싸까지 1등칸은 1262위안(약 16만4000원)).

 

걱정하던 여행허가증 얘기는 나오지 않았다. 철도 개통 후 지난 3주간 이 열차를 이용한 10여 명의 한국인이 여행허가증 제시를 요구받지 않았고 한다. 한국인은 중국 사람과 닮아서 승무원이 모르고 넘어간 건지도 모를 일이지만 어쨌든 ‘칭짱철도 탑승시 여행허가증이 필요없다’는 소문이 적어도 내 경우엔 사실로 확인됐다. 그러나 베이징 서역의 공고문은 여전히 외국인의 경우 티베트 여행허가서를 지참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또한 비행기를 타고 라싸에 가려면 반드시 여행허가증을 지참해야 한다.

 

티베트의 정치상황이 불안하다보니 중국은 여행허가증제를 엄격하게 실시해 티베트를 국제사회와 격리해왔다. 그렇다면 이제 중국은 티베트를 ‘완전한 중국 영토’로 자신하게 된 걸까. 칭짱철도가 갖는 의미는 이토록 중차대하다.

1등 침대칸을 차지하다니 운이 좋다. 앞으로 35시간 가까이를 기차에서 지내야 하는데, 일반좌석이었다면 바닥에 누워 잠을 청할 뻔했다. 베이징에서 라싸까지 총 4065km 가운데 이제 겨우 4분의 1을 지나왔을 뿐이다.

 

 

현대 중국의 역사적 승리

칭짱철도는 ‘벼락스타’다. 18세기에 발명된 기차가 보급기(19세기)와 전성기(20세기)를 지나 21세기에도 화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바로 티베트라는, 인류문명의 마지막 원시대륙을 가로지르는 철로이기 때문이고, 보다 정확하게는 티베트가 지닌 ‘분쟁지역’이라는 특수성 때문이다.

 

실제 공사는 2005년 10월에 끝났다고 알려졌지만 그간 ‘기술결함설’이 나돌며 실제 운행을 확신하지 못해왔다. 그런데 7월1일, 중국은 영원히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프로젝트를 전세계인에게 깜짝 공개했다. 중국의 철저한 언론통제가 진가를 발휘한 셈인데, 고지대 구간 공사 중 얼마나 많은 노동자가 희생됐는지는 여전히 베일에 싸여 있다.

공식 명칭이 칭짱선(靑藏線)인 이 철도를 해외 언론에서는 ‘라싸 익스프레스’라고 부르는데, 중국인은 최고 높이 5072m인 기찻길의 이름을 ‘티엔루(天路)’, 즉 ‘하늘길’이라 부르고 있다. 드넓은 중국대륙에 불과 1142km의 철로가 연장된 것에 불과하지만, 중국인들은 이를 ‘21세기의 만리장성’이니 ‘신(新)실크로드의 완성’이니 하면서 뜨거운 관심을 내비친다.

   

 

이 프로젝트는 2001년 처음 공개됐다. 무려 330억위안(약 4조3000억원)을 투입한다는 거얼무-라싸 철도공사는 초기부터 ‘과대망상적 광기’라는 비판이 따라붙었다. 스위스의 세계 최고 터널을 건설한 업자조차 얼음산 때문에 공사가 불가능하다고 입을 모았다. 공사의 5분의 4 이상이 해발 4000m가 넘는 원시고원에서 진행돼야 했다. 이 정도 높이면 산소량이 지표면의 60%에 불과하기 때문에 공사인부는 산소 마스크를 착용해야 한다.

사실 이 정도만 해도 공사가 절대 불가능한 환경은 아닐지 모른다. 문제는 철로가 놓이는 지반이다. 티베트고원은 얼어붙은 땅일 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 단 한 번도 치산치수(治山治水)가 이뤄진 적이 없었다. 급작스러운 폭우나 폭설로 인해 새로이 물길이 생기고, 순식간에 지형이 바뀌는 곳이다. ‘세계의 지붕’이라 부르는 땅에 철길이라니…. 항구적이고 안정적인 근대문명의 상징인 철로에는 말 그대로 치명적인 여건이다.

 

육중한 기차가 레일 위를 통과하면 철로를 받치는 지반이 녹아들 수 있다. 이 경우 레일이 뒤틀리는 최악의 상황이 발생할지 모른다. 중국 언론의 보도에 따르면 이를 극복하기 위해 노선의 상당 부분이 땅 위에 설치되지 않고, 노반에 통풍용 관로를 묻고 그 위에 자갈과 흙으로 새 길을 만들어 선로를 얹는 첨단 건설기법이 동원됐다고 한다. 아예 새롭게 길을 만든 셈인데, 칭짱선 사진을 보면 교량이 눈에 많이 띄는 것도 이런 사정 때문이다.

 

천문학적인 공사비, 지형을 바꾸는 공사, 그리고 티베트인들의 심정적 저항. 그럼에도 중국은 1958년 이후 50여 년에 걸쳐 흔들리지 않고, 이 프로젝트를 지속적으로 추진해왔다. 1984년 시닝-거얼무 (814km) 구간을 개통한 데 이어 2005년에 라싸까지 역사적인 철길이 완성됐다. 중국은 이에 그치지 않고 히말라야 고원을 넘는 친디아(Chindia) 철도를 계획하고 있다. 중국 인민들이 칭짱철도에 열광하는 이유는 티베트를 비롯한 서방 이민족에 억눌려온 과거를 잊게 할 현대 중국의 역사적 승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중국대륙을 기차로 횡단하는 여정은 매력적이다. 50여 년간 ‘죽의 장막’에 가려 있던 중국은 현대 한국인에게 어쩌면 아메리카 대륙보다도 낯설다. 대륙적인 풍광을 구경하는 것 외에 철도여행의 또 다른 장점이란 좀처럼 접근하기 힘든 중국인민들과 친해질 수 있다는 점이다.

표가 없는 불안한 신분에서 벗어난 만큼 기차의 맨 앞부터 뒤까지 차근차근 순례했다. T27열차(중국인들은 ‘칭1호’라 부른다)는 2량의 1등칸, 8량의 2등칸, 3량의 3등칸, 그리고 1량의 식당칸으로 구성됐다. 800명에 달하는 승객 가운데 서구인은 4~5명에 불과하다. 한국인과 일본인도 몇 명은 있을 텐데 중국인과 닮아서인지 분간할 수 없다. 중국인들은 긴 기차여행을 위해 가방 가득 음식을 싸왔고, 3등칸에선 언제나 그랬다는 듯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누워 있는 승객들도 있다.

 

 

중국인의 ‘서부개척시대’

꼬박 48시간을 좁은 기차에서, 그것도 말동무 없이 지낸다는 것은 만만한 일이 아니다. 그러니 한시라도 빨리 옆 좌석의 중국인들과 친해질 필요가 있었다. 4인 1실의 침대칸에는 두 가족이 탑승했는데, 양쪽 모두 어머니와 아들인 점이 특이했다. 모두 칭짱철도와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었다.

먼저 대학에서 회계학을 전공했다는 황위(黃羽·21)씨. 베이징 인근의 자그만 도시가 고향이라는 그는 50대의 어머니와 함께 티베트로 가는 중이다.

 

“아버지가 칭짱철도 공사 일을 하셔서 티베트에 계세요. 그래서 오랜만에 아버지를 뵈러 가는 길이에요.”

두 번째 가족은 칭짱철도의 후폭풍을 짐작하게 했다. 중국 남부의 우한(武漢)에서 베이징을 거쳐 왔다는 40대 여성과 아들 유웨이팅(尤偉廷·20)씨. 이들은 커다란 가방을 무려 3개나 안고 있어 한눈에도 평범한 관광객으로 보이지 않았다.

“티베트에서 장사를 해볼까 해요. 사실은 한국에 가서 일하고 싶었는데, 신천지인 티베트로 방향을 돌렸어요. 혹시 티베트가 맘에 들지 않으면 한국에 갈지도 모르니까, 연락처를 좀 주세요. 호호…”

젊은 모자는 필자에게 연락처를 집요하게 요구했다. 한창 혈기왕성한 아들은 끊임없이 대화를 원했는데, 자신의 영어가 부족하다고 느끼자 급기야 우한에 살고 있다는 여자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통역을 부탁하는 투지까지 보였다. 그의 여자친구가 통역해준 내용은 이렇다.

   

관광객으로 북적대는 조캉 사원 앞(왼쪽).포탈라궁을 배경으로 한 길 이름이 ‘베이징 중루’라니 티베트의 중국화는 이미 진행 중인 모양이다.

“한국은 내게 꿈의 신천지예요. 제 휴대전화는 삼성 제품이고, 음악은 한국가수 것만 들어요. 특히 이효리와 장나라가 좋아요. 이번 월드컵에서도 한국을 응원했다니까요. 나중에 한국에서 살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가능할까요?”

이 두 모자와의 대화에서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중국인의 티베트 이주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는 것. 티베트는 중국인에게 거대한 기회의 땅으로 부상했다. 막대한 지하자원의 존재는 차치하더라도 사시사철 엄청난 수의 관광객이 몰리고 있다. 특히 중국인에게 티베트는 값싼 노동력을 활용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이제 중국은 칭짱철도를 활용해 본격적인 ‘식민경영’에 들어가는 것으로 비친다. 마치 1930년대 부산에서 신의주까지 철로가 놓일 때처럼.

 

 

“56년간 중국 땅이었지만…”

유웨이팅 모자의 집요한 등쌀에 잠시 식당칸으로 몸을 피했다. 한 젊은 미국인 관광객이 중국인과 함께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티베트에 대한 서구인의 생각이 궁금해 말을 걸어봤다. 그런데 조금은 귀찮다는 표정이다. 그는 히말라야 트레킹을 위해 중국인 친구와 함께 티베트로 가는 길이라고 했다.

“글쎄…중국인들이 심혈을 기울여 건설했다고 하는데 아직까진 별 차이를 못 느끼겠다. 비행기의 반값이긴 한데 지겹다. 앞으로 또 티베트에 갈 기회가 있다면 비행기로 가야 할 것 같다.”

미국인과 동행한 중국인 여성에게 “어째서 중국인들이 칭짱철도에 이처럼 열광하고 티베트로 몰리느냐”고 물었더니 재미있는 예를 들어 답한다.

“만약 북한으로 철길이 뚫려 자유롭게 오갈 수 있다면 한국인들은 북한으로 안 갈 건가? 중국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티베트는 56년간 중국 땅이었지만 접근하기 힘든 곳이었다.”

유사 이래 단 한 번도 역사와 문화가 겹치지 않은 티베트를 자연스럽게 중국 영토라고 말하는 중국인의 대담함이 무섭게 다가왔다.

   

중국의 장기 프로젝트, ‘칭짱철도’.
시닝-거얼무 1차 구간을 1979년 완공, 1984년 개통한 데 이어 2005년 2기 공정을 마무리 지었다.

간쑤(甘肅)성 란저우에 닿은 것은 오후 4시. 바깥 풍광은 점차 대륙적으로 변하고 있었다. 산세가 험해지는 것은 물론, 하천 또한 깊은 침식작용으로 위협적인 협곡의 형상을 드러냈다.

기차 여행을 하면 매순간 허기를 느낀다. 그런데 같은 도시락을 여러 번 사먹고 보니 또다시 식당칸으로 향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자연스럽게 정차역에서 파는 과일과 옥수수에 손이 갔다.

이 기차는 48시간 동안 6번 정차하는데, 란저우는 거리나 시간상으로 꼭 중간쯤에 위치한다. 란저우는 시안보다 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바로 철길 실크로드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간쑤성의 수도인 란저우에서 서북쪽으로 향하면 우루무치가 나오고 곧장 서쪽으로 향하면 칭하이(靑海)성의 시닝에 도달한다. 언론에 크게 보도되진 않았지만 2001년에도 칭짱선의 개통과 비슷한 의미를 지닌 사건이 있었다. 신장(新疆)성의 수도인 우루무치와 최서단 국경도시인 카슈가르를 잇는 1500㎞의 남신강철도가 완공된 것이다. 신장 지역 또한 독립운동이 활발했기 때문에 이때도 중국은 떠들썩하게 승리를 자축하는 분위기였다.

열차는 말 그대로 최신형에 최신식 시설을 자랑한다. 특기할 만한 점은 내부의 모든 시설에 친절하게도 중국어 외에 티베트어로 된 설명서가 있다는 것. 티베트인이 단 한 명도 보이지 않는 라싸행 열차에 조금은 어색하게 비쳤다. 1등석 객실에는 4개의 개인용 LCD-TV가 부착돼 있다. 채널은 여러 개지만 단 한 채널에서 영화를 방영할 뿐 나머지는 칭짱철도에 대한 홍보물로 도배가 돼 있다시피 하다.

 

 

티베트 제2의 도시, 시닝

란저우에서 다음 정차역인 시닝까지는 3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흔히 칭짱철도의 시작점을 거얼무라고 한다. 그러나 이는 새로 개통된 출발점이지, 티베트땅을 지나는 칭짱선의 의미를 생각한다면 그 시발점은 시닝역이라고 해야 옳다. 시닝은 티베트 제2의 도시로 대륙으로 뻗어나가는 관문 구실을 해왔다. 그러나 1950년 인민해방군이 티베트를 점령한 이후 한반도 면적의 세 배가 넘는(72만㎢) 북부 지역이 티베트에서 분리됐고, 중국식으로 칭하이성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지금은 누구도 이 땅이 티베트 영토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몽골로 따지면 내몽골 지역과 비슷한 셈이다.

교통의 요지라는 점말고도 시닝이 중요한 점은 또 있다. 시닝시 남서쪽에 타얼사(塔爾寺)라는 라마교 절이 있는데, 이곳이 바로 황마오파이(黃帽派)의 시조인 쫑커파(宗喀巴)의 탄생지다. 노란 모자를 썼다는 의미의 황마오파이는 밀교의 전통을 지닌 동시에 승려의 도덕과 절제를 강조하는 라마교의 한 종파인데, 현재 티베트와 몽골의 라마교는 절대 다수가 이 황마오파이의 후예다. 시닝이 티베트 땅이라는 일종의 증거인 셈이다.

 

 

티베트의 지정학적 중요성

칭짱철도의 개통일인 7월1일은 중국 공산당 창당 85주년 기념일이다. 후진타오 주석은 이날 시닝을 거쳐 거얼무로 이동했는데, 시닝에는 지금도 개통식의 자취가 남아 있다. 화려한 꽃과 곳곳에 내걸린 찬양 구호들. 거얼무에서 열린 개통식에서 후 주석이 내뱉은 일성은 “칭짱철도 건설정신을 이어받자, 서부 대개발의 새로운 진전을 이룩하자!”였다고 한다.

후 주석이 칭짱선에 애착을 갖는 이유는 그의 이력을 통해 널리 알려진 바 있다. 후 주석은 자신이 정치적으로 급박하던 시기인 1989∼92년에 티베트장족자치구 당서기라는 한직으로 내몰렸다. 그는 이 자리를 반등의 기회로 삼고자 했는데, 때마침 불어닥친 1989년 3월의 티베트 독립운동이 계기가 됐다. 베이징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후 주석은 당시 계엄령을 선포하며 철저한 무력진압에 나서 공산당 내 차세대 지도자로 부상했다. 한때 티베트를 지도한 적이 있는 그가, 이제는 중국의 최고 지도자로 성공해 마오쩌둥 이래 중국 지도자들의 꿈이었다는 칭짱선 개통을 선포했으니 그 감격이야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후 주석이 티베트를 중시하는 이유를 개인적인 인연 혹은 티베트 자체의 막대한 지하자원에서 찾지 않는다. 그 대신 인도와의 직접통로라는 지정학적 이유를 거론한다. 2003년 후 주석이 취임 직후 가장 먼저 시작한 외교작업은 바로 인도와의 국경분쟁을 마무리하는 일이었다. 1962년 인도와 중국의 국경분쟁 이후 40여 년간 중국과 인도를 잇는 실크로드인 나투라 고개는 폐쇄됐다. 인도 역시 티베트의 독립을 은근히 지원하며 중국을 견제했다.

그런데 2003년 6월23일 체결된 새로운 중-인 합의는 두 나라 역사를 새로 쓰게 했다. 이 같은 변화는 티베트의 희생 위에 가능했다. 당시 아탈 비하리 바지파이 인도 총리의 방중기간에 체결된 9개 합의문 가운데 ‘인도는 시짱(西藏·티베트)을 중국 영토로 간주한다’는 내용을 포함시킨 것이다. 그간 티베트인들의 정신적, 실질적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가 인도에서 망명생활을 할 정도로 인도는 티베트인의 든든한 후원자였지만, 냉엄한 국제질서는 약소국인 티베트에 기회를 더는 주지 않았다. 중국이 티베트를 양보할 수 없는 것은 티베트를 소유하지 않고는 인도와의 통로가 막혀 대륙에 고립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시닝에 들어서자 기차는 눈에 띄게 천천히 움직였다. 시닝의 고도는 약 2000m. 이제부터 본격적인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내일 새벽에는 거얼무에 도착해 있을 텐데. 아침 6시경에 잠에서 깨서 거얼무를 볼 수 있을지 미지수다.

 

 

한여름의 만년설

번쩍이는 햇빛에 눈을 떠보니 아침 8시. 이미 거얼무를 한참 지나 있었다. 창밖을 보니 모든 환경이 바뀌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끝 간 데 모를 푸른 초원이 펼쳐지고, 저 멀리 험준한 산맥들이 병풍처럼 칭짱철도를 호위하고 있는데, 그 산 위를 하얀 만년설이 덮고 있다는 사실이 여행객을 흥분시켰다.

기차의 속도는 시간이 갈수록 더뎌졌다. 밤새 고지를 올라왔는데도 아직 올라갈 길이 멀어 보인다. 일정표에 따르면 오후 4시에 나취(那曲) 지역을 통과하는데, 그곳이 바로 해발 5000m에 이르는 이 지역 최고 고도다. 앞으로도 반나절 가까이 오르막길을 올라야 한다는 얘기다.

점심시간 전에 승무원들이 승객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건강확인서 제출을 요구했다. 고산지대에 적응할 수 있다는 일종의 각서였다. 구체적으로는 ‘1. 나는 고원지대 여행의 주의점을 알고 있다 2. 나의 신체상황은 3000m 이상의 고지대를 여행하기에 충분하다’. 두 문장 옆에 확인 표시를 그려넣어야 했다.

 

오전 10시경. 양떼와 목동들이 눈에 들어온다. 드디어 칭짱고원의 설산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다가왔다. 승객들이 일제히 통로로 집결해 카메라를 꺼내들었다. 이 지역은 1년 중 8개월은 온통 하얀 눈밭이라고 한다.

오전 11시가 되니, 귀가 멍해지고 뒷골이 땅긴다. 말로만 듣던 고산증이 바로 이런 것인가. ‘신체 건장한 젊은이’라 별 문제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힘에 겨운 증상이 나타나니 당황스럽다. 산소가 부족하다는 것은 몇 발짝만 걸봐도 금세 느낄 수 있다. 숨이 가빠져 호흡을 바삐 해야 안정이 된다. 앉았다 일어서는 데도 잠시 숨고르기가 필요할 정도다. 이 증세는 갈수록 심해졌다.

중국 당국은 산소가 희박한 고산지대를 승객이 안전하게 여행할 수 있도록 특수열차를 제작했는데, 우선 객차마다 농축산소 공급장치를 갖췄다. 또 평지에 비해 1.6배 강력한 자외선을 차단하기 위해 창문을 특수 코팅했다고 한다. 객실에서 바삐 숨을 쉬고 있으니 옆 좌석의 중국인들이 웃는다. 결국엔 탑승할 때 건네받은 산소호흡기에 의존해야 했다. 좌석 옆에는 산소연결구가 마련돼 있다. 산소호흡기까지 착용하니 정말 칭짱고원에 왔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2년의 오체투지 끝에 닿는 라싸

오후 3시, 시짱성의 첫 번째 정차역인 안둬(安多)에 도착했다. 정식 정차역은 아니고, 잠시 쉬어가는 역이다. 아직도 햇볕이 머리 위에서 내리쬔다. 티베트는 경도상으로 보면 베이징보다 3시간쯤 늦어야 하지만 ‘중국 영토’이기 때문에 베이징 시간을 적용한다. 파란 하늘, 푸른 초원 너머 도시가 그림처럼 펼쳐졌다. 티베트인들은 기차가 신기한지, 기차역 가득 모여들어 승객들과 손 인사를 나눈다. 이곳에 사는 티베트인들의 얼굴은 까맣다. 고산지대라 강한 자외선에 피부가 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오후 5시, 라싸에 도착하기 전 마지막 정차역인 나취역을 지났다. 이제 곧장 라싸로 직행한다. 중국인들도 긴장되나 보다. 연신 티베트 땅을 둘러보며 경계심을 드러낸다. 산세가 험해지니 중국인의 휴대전화가 간간이 먹통이 됐다. 이런 오지에까지 중국의 이동통신 네트워크가 뻗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우리 휴대전화가 터지니까 독도는 우리땅이다”라는 이동통신 광고 카피가 떠올랐다.

   

 

젊은 티베트인 인터뷰
“우리의 지도자는 달라이 라마… 민중의 마음은 중국도 어쩔 수 없다”


2006년 여름의 라싸는 새로운 활력으로 충만했다. 세계 유명 브랜드 매장이 중심가에 진출해 있고, 유리로 치장된 최첨단 건물들이 하루가 다르게 올라갔다. 히말라야 트레킹족의 거점도시 혹은 티베트 불교를 접하기 위해 찾아오는 단순 관광지 같은 과거의 이미지에서 탈피해 새로운 경제 중심지로 발돋움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 같은 변화를 중국인이 아닌 티베트인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라싸의 전통 찻집에는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젊은이들로 넘쳐났지만 자신의 속내를 낯선 이방인에게 드러낼 사람은 흔치 않았다. 식민지 젊은이들의 삶은 이토록 간단치 않다. 우연치 않게 친해진 한 티베트인은 자신의 신변보호를 요구했다. 혹시나 가족에게 해가 미칠까 두려워서다. 그의 이름과 나이는 밝히지 않기로 한다.
▼ 티베트의 인구통계가 다 제각각이다.
“누구도 정확한 수치를 알 수 없다. 중국 당국은 소수민족 인구를 제대로 조사해 발표하지 않는다. 티베트에 거주하는 중국인 인구를 합치는 경우도 있어 혼란스럽다. 티베트 내의 순수 티베트인은 300만명 내외라고 보면 된다. 1000만이라는 통계는 인도와 네팔 등 해외에서 유입된 인구를 합친 숫자이다.”
▼ 소수민족에겐 ‘1가구 2자녀’가 허용되니 티베트인의 수가 늘어날 수 있을 듯한데.
“하하.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많다. 그런데 이곳 사람들도 자녀의 양육비와 교육비 때문에 많이 낳지 않는다. 게다가 중국인이 저렇게 몰려드는데….”
▼ 조선족은 50년 이상 중국 국민으로 살다보니 정체성이 중국인화했다. 티베트 젊은이들도 마찬가지인가.
“아직은 아니다. 자신을 티베트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여전히 많다. 그런데 점차 동화되는 사람이 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간 여러 모로 변화가 있었다. 예를 들어 지금의 20대만 해도 초등학교 4학년부터 중국어를 배웠지만, 지금은 2학년부터 배우기 시작하는 식이다.”
▼ 티베트의 문명이 4000년을 헤아리는데, 100년을 점령당한다고 바뀌겠나.
“서서히 바뀌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청나라를 세운 만주족도 이미 다 없어지다시피했다. 하지만 우리는 불교를 중심으로 단결돼 있기 때문에 그 기간이 조금 더 지속되리라 생각한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다 불법이다.”
▼ 달라이 라마를 존경하는가.
“(한참을 주저하며) 솔직하게 말하면 국가지도자라고 생각한다. 티베트인이라면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사실이다. 부모님으로부터 친구들로부터 그렇게 배운다. 민중의 마음속에 있는 것은 중국 당국도 어찌할 방법이 없다.”
▼ 한국도 일본에 36년간 점령당한 적이 있다. 티베트의 상황도 앞으로 어떻게 바뀔지 아무도 모르는 것 아닌가.
“인도에 있는 티베트 망명정부에서 그러한 고민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그런데 티베트인들에게는 방법이 없다는 게 문제다. 우리 언어로 된 언론도 존재하지 않고…. 100년 정도는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 200년 이상 걸릴 수도 있겠다.”
▼ 자녀들에게 티베트의 독립을 교육시킬 의지는 있나.
“나로서는 당연히 그래야 한다.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 티베트 역사는 어디서 배웠나.
“물론 학교에서 배웠다. 정규교육보다 어떤 선생님을 만나는가가 중요하다. 그러나 지금도 그런 교육이 이뤄지는지는 모르겠다.”
▼ 티베트의 근대화 전략이 궁금하다. 티베트 지식인들은 국가의 장래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나.
“능력 있는 이들은 다 국외로 나갔고, 안에는 능력 있는 사람이 별로 없다. 1980년대 무장투쟁을 하다가 감옥에도 많이 갔고, 싸울 준비를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잘 모르겠다. 하지만 젊은이들에겐 문제가 좀 많다. 차나 마시고 도박이나 하고 있다.”
▼ 칭짱철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일단 관광객이 부쩍 늘었다. 장사도 잘 되고 사람들 생각도 많이 트일 것 같다는 점에서는 기회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나쁜 점도 많다. 중국인이 대거 유입되면서 티베트 내 중국인 비중이 높아진다는 점이 그렇다.”
▼ ‘자원 수탈용’이라는 지적도 있는데.
“그건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지난 50여 년간 계속된 과정이다. 철도가 개통되기 전에도 하루 수백여 대의 트럭이 티베트의 자원을 실어 날랐다. 티베트인들도 변하지 않고는 살아남기 힘들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런 점에서 절망보다는 희망을 보고 싶다.”

   

티베트 전통 건축양식과 현대 양식이 조화를 이룬 라싸역.

라싸로 향하는 길에는 놓쳐서는 안 될 풍경이 많다. 칭짱선이 쿤룬산맥의 옆구리를 감거나 뚫고 지나가기 때문이다. 티베트인들이 가장 신성시한다는 카일라스 산이 기차에서 보인다고 하는데, 정보가 없으니 어느 산이 카일라스 산인지 통 구별할 수가 없어 아쉬웠다. 티베트의 명승지 가운데 하나인 남쵸(納木錯) 호수는 멀리 스쳐지나갔다. 그 길 옆으로 오체투지(五體投地)를 해서 라싸로 향하는 라마 승려도 보인다. 모든 라마교 신자는 일평생 한 번은 라싸에 가야 한다. 더욱이 오체투지로 간다는 것은 엄청난 영광일 뿐 아니라, 높은 승려가 되기 위한 필수조건이라고 한다. 단 한 번의 기회를 기다려온 라마승이 온몸으로 땅과 싸워가며 2년이란 시간을 들여 라싸에 가는 반면, 이 기차는 단번에 중국인 800명을 실어나른다.

 

 

 

 

칭짱철도의 후폭풍

밤 9시. 기차가 천천히 라싸역 플랫폼에 들어섰다. 애당초 깜깜한 밤일 것으로 예상했으나 시차 때문에 아직도 태양의 빛이 남아 있다. 티베트 전통 건축양식과 현대 양식이 조화를 이룬 라싸역은 마치 신공항처럼 크고 멋지다. 이제 동승했던 중국인들과 헤어질 시간이다. 악수를 하고 서로 티베트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길 기원했다. 마지막으로 중국인의 휴대전화를 빌려 호텔을 예약했다.

라싸역에서 도시 중심부까지는 버스로 30여 분이 소요됐다. 네온사인에 겹쳐 저 멀리 포탈라궁(布達拉宮)이 보이자 관광객들은 탄성을 질렀다. 지리부도에서 봤던 포탈라궁. 모두 ‘드디어 라싸에 도착했다’는 감격을 숨기려 하지 않았다.

 

칭짱철도의 개통으로 티베트의 변화를 예측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달라이 라마는 일찍이 이 철도가 티베트의 중국화를 초래할 것이라며 반대했다. 3박4일에 걸쳐 중국 대륙을 횡단해 라싸에 당도하며 목격한 티베트의 변화는 이렇다.

인구 20만의 도시에 하루 5000명의 외지인이 밀려들어온다. 4편의 기차와 10여 편의 비행기가 실어나르는 외지인 중 중국인 비중이 하루가 다르게 높아지고 있다. 라싸의 대표적 관광지인 포탈라궁은 하루에 1000여 명이 입장할 수 있는데, 이미 수용인원을 5배나 초과하고 있는 상황이다. 조캉 사원 앞에는 참배하는 신도보다 사진 찍는 관광객 숫자가 훨씬 더 많다. 그러나 관광객이 뿌리는 돈의 90% 이상은 중국인의 수중에 들어간다고 한다.

 

티베트는 중국 문명과 전혀 다른 독자적인 문명을 일궈왔다. 예외가 있다면 몽골족이 세계를 지배하던 원나라 때인데, 이때조차 티베트는 몽골인에게 종교와 문자를 전수하며 오히려 문화적 스승 노릇을 했을 정도다. 강대국 청나라가 멸망한 1911년 티베트는 사실상의 독립을 획득했다. 잠시 영국의 간섭을 받긴 했어도 줄곧 독자성을 유지했는데, 1950년 갑작스럽게 밀어닥친 중공군으로 말미암아 식민지가 된다.

이제 라싸의 인구비중에서 중국인의 숫자가 티베트인을 넘어서기 시작했다고 한다. 몇 년 전만 해도 인력거와 택시 기사 가운데 상당수가 티베트인이었지만 이제는 중국인이 다수를 차지한다. 젊은이들은 티베트어보다 중국어를 편하게 느낀다. 1989년의 시위를 끝으로 티베트의 독립 논의는 이 땅에서 완전히 사그라진 것처럼 보인다. 중국의 값싼 곡물이 철도를 타고 들어오고, 티베트의 지하자원이 이 철도를 타고 중국으로 반출될 것이라고 우려하지만 누구에게도 이 변화를 막을 힘은 없어 보인다.

 

칭짱철도의 개통, 그리고 중국과 인도의 관계 복원으로 인해 티베트의 독립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분석이다. 제2차 세계대전 때보다 더한 국제정세 변화, 혹은 중국의 대분열이 오더라도 독립을 얻기 어렵다는 것이다. 과연 달라이 라마를 중심으로 한 ‘프리티베트(Free Tibet)’ 진영은 기적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돌아오는 길은 중국 남부의 광둥(廣東)성 광저우(廣州)를 목적지로 택했다. 비행기에서 쓰고 남은 중국 돈을 정리하다보니 50위안짜리 지폐가 눈에 들어온다. 뒷면에는 포탈라궁이 아로새겨져 있다. 티베트는 이미 중국의 새로운 식민지이면서 정신적 고향이 된 것일까. 머지않은 미래에 서울에서부터 라싸까지 기차로 여행할 생각에 설레면서도 인류의 고결한 마지막 보루가 무너진다는 생각에 침울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