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에겐 '한데 버무려' 이질(異質)을 동질(同質)로 만드는 독특한 문화적 소화 효소가 있다. 휴대전화에 MP3와 디지털 카메라를 섞고, 위성방송 수신 기능까지 얹어 세계 최초 제품을 잇따라 내놓는 것은 하이브리드(hybrid·혼합)형 '비빔밥 DNA'가 한국인의 핏속에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인의 하이브리드 속성은 염색체부터 시작된다. 김욱 단국대 교수가 한국인의 미토콘드리아(모계로 유전되는 세포조직)를 분석해본 결과 70~80%는 북방계이고, 20~30%는 남방계였다. 김 교수는 "미국은 시간이 흘러도 백인종·흑인종이 따로 살지만, 우리는 같은 지역 안에서 완전히 섞였다는 방증"이라고 말했다. 미국 뒷골목 문화의 원조인 비보이(브레이크댄서)는 한국에서 국악 타악기 리듬과 농악의 몸짓을 받아들였고, 외래문화인 사우나는 한국에서 온돌과 만나 찜질방 문화를 창조해냈다. 작년 베이징올림픽에서 따낸 야구 금메달은 한국식 하이브리드 야구의 성과다. 파워로는 미국에, 정교함으로는 일본에 못 당하지만, 이승엽 같은 파워 타자와 이종욱(두산) 같은 정교한 타자의 유기적인 화합이 세계 최강 신화를 만들었다. 미국식 심층면접 입사제도는 한국에 들어와 1박2일씩 합숙하며 팀워크를 판단하는 도구로 바뀌었다. 일본에서 실패한 연봉제가 한국에서 정착됐고, 일본에선 사라진 회식 문화가 한국엔 살아있다. 성과를 높이면서도 조직의 단합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이다. 비빔밥 DNA는 우리 기업의 해외 개척 전략의 핵심이다. 브랜드와 자본력이 약했던 현대차가 불모지 인도에 진출해 승승장구하는 비결은 부품의 90%를 현지 조달하는 등 과감한 현지화를 통한 한국식+인도식의 혼합 전략에 있다. 밥(공동체)만 있으면 종교조차 비빌 수 있다. 대한민국은 불교(23%·2005년), 기독교(18%), 천주교(11%)의 3대 종교에다 원불교·통일교, 이슬람 신도까지 섞여 사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다(多)종교 국가다.
중동서 횃불 켜고 공사… 한번 불 붙으면 아무도 못 말려 신바람·光速 문화 일주일에 두 개꼴이다. 삼성전자 애니콜의 신제품 수다. 작년 한 해 동안 전 세계 휴대폰 시장에 100개 이상의 신제품을 내놨다. 시시각각 바뀌는 소비자 기호를 살펴 음악 기능도 확대하고, 스크린의 크기도 바꿔 넣었다. 수백 개 부품이 들어가는 데다 제품 수명도 6개월 안팎이니, 개발자 입장에선 숨이 턱턱 막히는 속도와의 싸움이다.
덕분에 삼성전자는 작년 50여 개국에 2억 대 이상을 팔아 휴대폰 세계 2위를 지켰다. 2006년만 해도 3위권에 머물면서 2위인 모토로라에 큰 차이로 밀렸던 위기를 탈출한 데는 광속(光速)의 스피드가 큰 몫을 했다. 지금도 삼성전자 휴대폰 부문엔 10개가 넘는 신제품 개발팀이 가동 중이다. 삼성경제연구소 이용화 수석연구원은 "후발주자로 산업화에 성공한 우리는 스피드엔 강박증이 생길 정도로 익숙해져 있다"고 말했다. 위기 때마다 기회를 만들어 낸 대한민국의 압축성장에는 신바람과 광속(光速)의 유전자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한번 신바람이 붙으면 광속으로 질주하는 우리를 누구도 막지 못했다. 기술력 없다던 기업들이 마음 먹고 나서자 단번에 세계 4위의 특허국에 올랐다. 국제특허출원 건수는 1984년 10건에서 2007년 7061건으로 700배 넘게 성장했고, 2007년엔 과학강국이라는 프랑스도 제쳤다. 우리 앞엔 미국·일본·독일뿐이다. 신바람과 광속의 유전자는 근대화 과정에서 입증됐었다. 1974년 6월 28일, 울산의 허허벌판에 현대조선소가 들어선 것은 세계 기업사(史)에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60만평 부지에 불과 2년3개월 만에 조선소 준공식과 26만t짜리 유조선 2척의 진수식이 동시에 열린 것이다. 당시 현대는 조선소도 없이 배부터 주문받았고, 크레인도 없이 독(dock)을 만들어 냈다. 1974년 사우디아라비아의 수도 제다에서 공사 중이던 삼환기업의 근로자들은 공기(工期) 단축을 한다며 횃불을 켜고 철야작업을 했다. 지나가던 파이잘 국왕이 "저렇게 부지런한 사람들에게는 공사를 더 주라"고 지시했다는 일화는 너무도 유명하다. 우리의 신바람 문화는 속도만 빠른 게 아니다.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건설적 활기를 수반한다. 그래서 '빨리빨리'가 아니라 '쌩쌩(활력있게 질주하는 것)' 문화로 불린다. |
대한민국, 위기 때마다 성장했다
위기의 한복판에서 최후의 카드가 던져졌다. '10년간 10만 마일 무상보증'. 경쟁업체의 보증기간이 '3년간 3만 마일'이었으니, 무모한 도박처럼 보였다. 하지만 현대차 직원들에겐 배수진을 친 셈이 됐다. 10만 마일 보증을 뒷받침하지 못하면 회사는 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믿어지지 않는 일이 벌어졌다. 그렇게도 힘들었던 '품질의 벽'을 돌파한 것이다. 지금 현대차의 각종 경영 지표는 세계 톱 클래스다. 부채비율·영업이익률에선 세계 최강이라는 일본 도요타마저 능가한다. 위기가 아니었으면 현대차는 아직도 그저 그런 싸구려 메이커에 머물렀을지도 모른다.
- ▲ ‘취업 전쟁’을 뚫고 입사한 IBK기업은행 신입사원 200여명이 새해를 하루 앞둔 31일 경기도 기흥 연수원에서 새해 소망을 담아 함성을 외치고 있다. 이들의 밝고 희망찬 얼굴에 11년 전 IMF외환위기를 성장의 기회로 만든 우리 국민의 저력과 자신감이 담겨 있는 듯하다. 오종찬 기자 ojc1979@chosun.com
2000년 8월 4일 미얀마 수도 양곤. 트레이더스 호텔 대회의실에서 계약서에 사인을 마친 ㈜대우(현 대우인터내셔널) 임채문 이사(현재 부사장)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미얀마 서해안 가스전 공구의 독점 탐사권을 따낸 순간이었다. 하지만 기쁨보다 긴장감이 더했다.
당시 대우는 존폐의 기로에 서 있었다. 외환위기 후폭풍으로 그룹 전체가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에 들어가 있었고, 자금난에 시달렸다. 수백억원이 소요될 탐사에 실패하면 회사가 무너질 수도 있었다.
대우에게 주어진 시추 기회는 사실상 한 번뿐이었다. 제주도만한 바다에서 지름 1m짜리 시추공을 내려 단번에 가스전을 찾아야 했다. 해저 3200m까지 내려가는 시추공 하나 뚫는 데 1500만 달러가 들었다. 하나 뚫다 실패하면 끝이었다. 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기회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고민 끝에 "고(Go)!" 사인이 떨어졌다.
그 후 3년5개월이 지난 2004년 1월 7일. 서울 본사의 임 이사에게 미얀마에서 국제전화가 걸려왔다. "(가스층을) 확인했습니다." 3년간 마음 졸이던 임 이사 입에서 그제서야 환성이 터졌다. 이 가스전에선 우리 국민이 3년 쓸 양이 발견됐고, 대우인터내셔널도 회생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한국의 경제성장 자체가 위기 극복의 역사였다. 한국 경제의 도약은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위기 국면에서 이뤄졌다. 70년대 오일쇼크 때 경공업에서 중화학공업으로, 80년대 후반 임금 폭등 때는 OEM(주문자 생산방식)에서 ODM (생산자 개발방식)으로 산업구조를 전환했다. 2000년대 중국의 추격에 쫓기자 글로벌 브랜드 전략으로 또 한 차례 도약했다.
한국 경제는 공격수 스타일이다. 위기일수록 공격에 나선다. 70년대 오일쇼크를 맞은 우리는 적진 깊숙이 파고드는 전략을 펼쳤다. 오일 달러가 넘쳐나는 중동에 해외건설과 노동자를 수출해 기름 사올 달러를 벌어들였다.
포스코는 위기 때일수록 더 많이 투자를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2차 오일쇼크 직후인 80년대 초에 광양제철소를 세웠고, 선진국 저성장으로 촉발된 91년 위기 때는 당시 국내 제조업 총 투자액의 10%를 혼자 투자했다. IT버블 붕괴로 미국에서 34개 철강사가 파산했던 2000년대 초에도 매년 1조8000억원씩 투자했다. 덕분에 남보다 많은 과실을 누릴 수 있었다.
한창수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한국인에겐 위기에 강력히 반응하는 유전자가 있다"고 말한다. 역사적으로 삼국시대-고려-조선을 거치면서 국난(國難) 때면 항상 민족적 에너지가 분출돼 놀라운 저력을 보여주곤 했다는 것이다.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에 따르면, 우리는 위기에 강한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다. 좁은 국토에 경쟁밀도가 높아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이노베이션이 일어나기 쉽다는 것이다.
지난 세밑 희소식이 하나 더 들려왔다. 지수 산출 기관인 MSCI(모건스탠리캐피탈인터내셔널)는 새해 한국 기업들의 주당 순이익 증가율이 10.5%를 기록할 것으로 예상했다. 대만(-38.1%)·홍콩(-10.7%) 등 다른 아시아 국가들을 모두 앞지르는 수치다. 한국 경제가 그만큼 위기에 강하다는 얘기였다.
교육열 세계 최고… 미국내 유학생 수 한국이 1위
글로벌 컨설팅회사 '딜로이트'는 국가경쟁력지수(2006년)에서 한국을 총 25개국 중 인적 자본 경쟁력 5위로 꼽았다. 같은 해 OECD(경제협력개발기구)의 학력평가 조사(15세 이상)에서 한국은 핀란드에 이은 종합 2위와 읽기 1위, 수학 2위, 과학 3위를 기록했다. 2003년 OECD의 학업성취도 조사에선 문제해결 능력 부문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위기 극복에는 인재가 필수조건이다. 지난 10여 년간 우리의 인재 파워는 한국이란 울타리를 뛰어넘어 방대한 글로벌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지난해 현재 네팔·가나·탄자니아에 이르기까지 세계 95개국에 뻗어 있는 한국 유학생은 무려 21만명(대학생 이상)에 달한다.
미국에 유학 간 한국인 학생은 10만3000명으로, 인도(8만8000명)·중국(7만2000명)·일본(4만1000명) 보다 월등히 많다. 미국 하버드대학에 재학하는 한국 학생 수는 캐나다·중국에 이어 3위다. 한국인 기술자들은 미국 실리콘밸리에서도 파워그룹으로 떠올랐다. 실리콘밸리에 있는 한국인 공동체 가입인원은 750여 명에 달한다, 실리콘밸리 IT분야에 일하는 엔지니어 3~4명 중 한 명은 한국인이란 얘기가 나올 정도다.
인재의 성장이 곧 한국의 성장이었다. 1948년 3900여 개였던 초·중·고교 수는 2007년 1만947개로, 34개였던 일반대학은 200개로 급증했다. 사흘에 하나꼴로 학교를 짓고, 석 달에 하나씩 대학을 만들었다. 지금은 고교졸업자의 80%가 대학을 가는 대학진학률 1위 국가다.
교육열이 최고의 인력을 낳았다. 외국 제품을 구해 분해해서 재조립하며 기술을 터득하는 '역행적(逆行的) 엔지니어링'은 뛰어난 문제 해결력을 지닌 한국의 인재만이 가능한 선진국 따라잡기 비결이었다. 경영학의 대가 피터 드러커는 생전 "한국은 '지식이 현대경제의 유일한 자원'이라는 명제를 실현한 최고의 모범국가"라고 극찬했었다.
공동체 에너지 ,강렬한 운명공동체 의식, 불가능을 기적으로 만들어
글로벌 경제 위기는 대한민국의 저력이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로 일컬어진다. 대표 기업들의 경쟁력은 경쟁자를 앞서고 있고, 인재 경쟁력과 공동체 에너지는 강렬한 빛을 발하고 있다. 우리가 몰랐던 저력, 위기를 기회로 만들 수 있는 대한민국의 잠재력은 무엇인가.
태안 바닷가가 기름 범벅이 된 지 16일 만인 2007년 12월 22일. 기름을 닦기 위해 모여든 자원봉사자가 30만명을 넘어섰다. 일본이 자랑하던 후쿠이현 미쿠니(三國) 유조선 사고 때의 '3개월간 자원봉사자 30만명'(1997년) 기록은 그렇게 깨졌다.
태안에선 3개월 동안 미쿠니의 4배인 123만명이 모여들었다. 울릉도에서 온 부녀회 회원이며 시각장애인, 그리고 48일 동안 현장을 떠나지 않으며 묵묵히 기름을 닦은 탈북자 등이 함께 '태안의 기적'을 만들어 냈다.
10년 전 외환위기 때는 2개월 동안 349만명이 장롱 속 금붙이를 꺼내 225t(21억7000만달러 상당)을 모았다. 전체 가구 중 23%가 동참한 것이었다. 1년 뒤 신용평가회사 S&P는 한국의 신용등급을 '투자적격'으로 올리며 '금 모으기 운동' 때문이라고 이유를 밝혔다.
대한민국 국민들의 잠재 의식 속엔 세계 어느 나라보다 강렬한 운명 공동체 의식이 깔려 있다. 위기가 찾아올 때마다 예외 없이 공동체를 생각하는 집단 에너지가 분출됐고, 그 힘으로 위기를 극복하곤 했다.
1973년 오일쇼크, 기름값이 5개월 사이 네 배까지 뛰었다. 사람들은 기름값 시위를 벌이는 대신 악착같이 기름 소비를 졸라 맸다. 그 이듬해 세계 경제 성장률은 73년(6.4%)의 5분의 1 수준(1.3%)으로 주저앉았다. 하지만 한국 경제는 7.2%의 성장률을 유지했고, 수출은 무려 38%나 늘렸다.
한 발 더 나갔다. 기름 살 때 쓸 돈을 기름 파는 나라에서 벌어들인 것이다. 1978년 한 해만 해도 14만명의 건설 노동자가 중동에서 땀을 흘렸다. 이렇게 해서 5년간 중동에서 205억달러를 빨아들였다. 수출의 40%를 담당한 셈이다.
1960~70년대 경제개발에 필요한 달러가 필요하자 광부와 간호사들이 독일에 가서 달러를 벌어 보냈다. 독일로 파견된 광부들은 지하 1000m 막장에서 탄가루 묻은 검은 빵을 먹었고, 광부·간호사 1만8659명이 연간 1000만달러를 한국에 부쳤다. 1964년 12월, 독일 함보른 탄광을 방문한 모국의 대통령 앞에서 이들은 참고 참았던 눈물을 한없이 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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