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화시대 수출 황금기 주도 … 한국의 실리콘밸리로 미래 질주
九老區 서울 구로구는 ‘땀’의 도시다. 구로공단의 소금땀, 비지땀이 한국을 키웠다.
가리봉 시장에 밤이 익으면
박노해 시인이 1984년 지은 노래 ‘가리봉시장’의 한 대목이다. 구로구 가리봉동에선 지금도 땀 냄새가 난다. 수은주가 뚝 떨어진 12월5일 저녁 가리봉시장. 가게마다 내걸어놓은 백열등 불빛 아래 오가는 사람들의 상기된 얼굴마다 따스한 열기가 오른다. 가리봉시장의 밤이 익어가면 몸 부벼 밥을 버는 사람들도 열이 오른다. 골목에선 고운 색깔 티셔츠 하나만 걸쳐도 단연 귀티가 난다. 금단반점의 30대 웨이트리스는 예쁘다. 옷소매로 땀을 훔치면서 양꼬치, 돼지심장꼬치, 쇠심줄꼬치를 굽는 솜씨가 날렵하다. 그는 중국 한족이다. 숙주나물볶음을 내오면서 수줍게 웃는다. 6개월 넘게 금단반점에서 꼬치를 구웠다. 가리봉시장은 ‘중국인 거리’다. 한국에 온 중국인, 중국동포가 가장 먼저 찾는 곳. ‘中國食品’ ‘菊花館’ ‘國際電話房’이 둥지 튼 골목엔 중국 양념 냄새가 코를 찌른다. 금단반점은 가리봉동에서도 중국 동북요리를 잘 내기로 소문났다. 양복쟁이 손님도 많다. 여의도 국회에서 일하는 변준혁(32) 씨가 동료들과 깔깔거렸다. 고량주와 하얼빈맥주로 폭탄주를 만들어 들이켠다. 걸게 놓인 꼬치 한 입 베어물면 술이 절로 익는다. 중국에서 수입한 커우베이주(컵술)는 정말 독했다. “이제 옛 ‘구로공단’의 흔적은 찾을 수 없게 됐지. 세월이 참 많이 변했어요.” ‘금룡상사’(구로구 구로동) 김용만 사장이 구로동을 처음 찾은 때는 30년 전. 영등포구 영등포동에서 공구를 팔다가 치솟는 임대료를 버티지 못하고 이곳으로 옮겨 터를 잡았다. 새로운 공구상가를 만들어보리라 마음먹고 동료 7명과 함께 구로동의 문을 두드린 것. “동료들과 ‘내 점포 갖기 운동’을 벌였을 때만 해도 이 근처는 허허벌판에다 냄새나는 늪지로 가득 차 있었어.” 그와 동료들은 ‘구로기계공구상가’ 회원을 모으면서 밀가루를 뽑고 건빵을 굽던 공장을 사들였다. 이들이 흘린 땀 덕분에 수백 명의 회원이 동참했고 기계공구상가는 1981년부터 지금의 윤곽을 갖췄다. 이제 7개 대형상가에 점포 수가 1만개에 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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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념 냄새 코 찌르는 ‘중국인 거리’ 1964년 발족한 구로공단의 공식명칭은 ‘한국수출산업공단’. 1970~80년대 이 공단이 ‘수출 한국의 꽃’으로 불릴 때 그의 공구가게는 끼니때 요릿집 같았다. 구로동의 ‘황금기’는 80년대 후반부터 내리막길로 접어든다. 공장 굴뚝의 연기와 쿵쾅거리던 기계음도 스러졌다. 종근당·삼영화학·조흥화학·한국타이어 공장 터는 아파트, 고층건물 숲으로 변했다. 김용만 사장은 “구로동의 산증인으로 벤처단지가 들어서고 거리가 바뀌는 것을 보니 뿌듯해. 허허벌판이 변화의 중심에 선 것 자체가 자랑스러운 일이지…”라고 말했다. 12월17일 오전 ‘G밸리’의 출근길은 분주했다. 구로디지털단지역은 양복쟁이 남자들, 그리고 잡지에서 막 걸어나온 듯한 여자들로 붐볐다. 서울메트로는 이 역의 하루 승하차 인원이 11만명이 넘는다고 밝힌다. 2000년 ‘서울디지털산업단지’로 이름을 바꾼 구로공단. 굴뚝공장 터에 올라선 포스트모던한 빌딩엔 이동통신, 디지털콘텐츠, 전자장비 같은 첨단업종이 둥지를 텄다.
첨단업종 둥지 튼 G밸리 G밸리는 서울디지털산업단지의 별칭이다. 구로동과 가리봉동에서 알파벳 머리글자 ‘G’를 따온 것. 우림e-biz센터 3층에 자리잡은 가평테크는 자동천공제본기, 자동천공기를 제작하는 곳이다. 눈을 벼리며 기계를 다듬는 근로자의 표정이 진지하다. G밸리는 “첨단기술의 메카, 한국의 실리콘밸리가 되겠다”면서 구슬땀을 흘린다. 구로구는 ‘가난’ ‘낙후’라는 옛 옷을 벗고 ‘첨단’ ‘지식’이라는 새 옷을 입었다. 구로역과 신도림역을 잇는 경인로변의 180m 높이의 테크노마트(옛 기아특수강 터), 110m의 대우푸르지오(옛 한국타이어 공장 터), 190m의 대성 디큐브시티(2011년 완공. 옛 대성연탄 터)는 구로구의 랜드마크다. 60층 넘는 초고층빌딩, 컨벤션센터, 호텔도 올라선다. 구로구 구로1동에 사는 회사원 이나희(30) 씨는 고등학교 다닐 적, 이제는 사라진 신도림역 앞의 대일학원에서 수학능력시험 강좌를 들었다.
“난 구로동이 싫어. 가난이 싫어. 못 배운 게 싫어….” 2006년 지방선거 때 열린우리당 구로구청장 후보로 나선 남승우(47) 씨는 당선되면 ‘구로구’를 버리고 새 이름을 찾겠다고 공약했다. “구로구의 명칭 변경은 필연”이라고 외치고 다닌 그의 낙선으로 ‘구로구’는 살아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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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가리봉동 재개발 완료 한나라당 소속의 양대웅 구로구청장은 ‘가리봉동’이라는 명칭을 ‘쿨’하게 바꾸려 한다. 구로구는 지난해 가리봉동의 새 이름을 공모했다. 당선작은 없었고 우수작으로 ‘첨단동’이 뽑혔다. 첨단동은 광주광역시 광산구에 같은 이름의 동이 있는 데다 받침이 많아 발음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우수작에 만족해야 했다. 구로구는 2013년 가리봉동 재개발이 완료되는 시점에 새 이름을 결정해 동명을 바꿀 거란다. 가리봉동은 구로구에서 옛 자취가 가장 많이 남은 곳이다. 1970년대, 지금은 정치인이 된 손학규(61) 씨가 고단한 몸을 뉘었으며, 1980년대엔 소설가 신경숙(45) 씨가 동남전기에서 일하며 사춘기를 보냈고, 오늘 금단반점의 중국인 웨이트리스가 향수를 달래는 가리봉동 쪽방은 수년 뒤 역사의 뒤안길로 스러진다. “산업체 야간학교/ 뒤늦은 에이 비이 씨이/ 배우던 옹골찬 누이들”(정세훈 시 ‘물새’ 중에서)은 “겨레의 슬기와 땀방울을 하나로 모아 수출산업의 터전을 닦고 한강의 기적을 일으킨”(서울디지털산업단지 선포기념 표지석 비문) 이곳에서 소금땀, 비지땀을 흘렸다. 구로구는 지금도 구슬땀을 흘리면서 ‘악착같이’ 미래로 달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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