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한국의 명풍경을 찾아서_ 정선 동강

醉月 2011. 5. 9. 08:59

이제는 동강의 노래를 불러라

돌을 집어던지면 깨금알 같이 오도독 깨어질 듯한 맑은 하늘, 물고기 등 같이 푸르다.’(이효석 '산'에서)

나는 하늘의 푸르름을 이 글처럼 실감나게 표현한 글을 알지 못한다. 고등학교 국어시간에 읽은 글이지만 3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내 기억 속에 남아있다.

제주 우도의 산호 해변을 날름날름 핥아대던 작은 파도 저 너머로 하늘을 보았을 때도 나는 이 글을 떠올렸다. 오후의 상승기류를 타고 높이 피어오르던 뭉게구름이 코발트 블루의 오키나와 바다 위를 덮고 있던 그 하늘을 보았을 때에도 이 글을 마음속으로 읽고 있었다. 문학의 감수성을 빌어 풍경을 풍요롭게 체험하고 있었던 것이다.

▲ 강변 절벽 위에서 내려다본 동강과 백운산 남서릉 꼬리. 금강산이 바위산에서 천하의 절경이 된 것은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시와 그림으로 그곳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노래를 불렀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동강이 생물의 보고(寶庫)에서 절승(絶勝)의 풍경으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우리가 동강의 노래를 불러야 한다.《사진=정정현 차장》

그러나 내가 지금까지 본 것이 이효석이 말한 그것이 아니었다는 걸 구름 한 점 없는 10월의 동강 하늘을 보고 알았다. 동강의 가을하늘은 손을 뻗으면 손끝에 닿은 그 푸른 색이 온몸을 물들일 것 같았다. 마악 잡아 올린 물고기의 등비늘이 햇빛에 반사될 때 보이는 칼날처럼 번득이는 푸르름이다. 여울 턱에 숨어 있다가 먹이를 낚아채려고 물위로 튀어 오르는 물고기가 언뜻 보여주는 찬란한 푸르름이다. 얕은 잔 여울 위로 직사하는 태양에 반사되는 꽃피래미의 싱싱한 푸르름이다.

이 하늘의 푸르름을 코발트 블루니 에메랄드 블루라고 표현하는 것은 격이 맞지 않는다. 이렇게 푸른 하늘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동강을 나는 정선의 백운산 끄트머리에서 내려다보고 있다.

물굽이가 산모롱이를 돌아가는

동강의 물은 거울처럼 차갑고 조용하다. 너른 자갈 둔덕과 급하게 솟은 석회암 직벽 사이를 새기듯이 파고들며 고요하게 흐르고 있었다. 수면 위에는 쪽빛 하늘과 솟아오른 산 능선이 서리어 있었다.

▲ 흑회색과 적갈색의 석회암 절벽 아래로 흐르는 강이 산모롱이를 잡고 돌아가는 광경은 동강을 비경으로서 절찬하게 한다. 계림산수에 비견하고 그랜드 캐년과도 견주는 것도 이 풍경 때문이다.

동강은 오대산에서 발원한 조양강이 동남천과 합해지는 합수머리인 정선읍 가수리에서 영월읍까지 약 50km 길이의 강이다. 영월읍에서는 평창군에서 흘러든 서강과 만나 남한강이 된다.

가수리에서는 절벽을 끼고 느릿하게 흐르다가 계봉(닭이봉) 기슭의 기탄 마을에 와서는 산자락을 휘감듯이 급하게 물굽이를 친다. 물돌이가 지는 곳에는 너른 자갈마당이 펼쳐지고 있지만, 물을 맞는 곳은 직벽으로 곧추서 있었다. 직벽과 너른 자갈마당 그 사이로 동강은 물굽이를 치면서 흐르고 있었다. 산은 산으로 서 있고 물은 물로서 낮게 협곡을 따라 흐르는 이 자명한 산수의 풍경이 좋다.

흑회색과 적갈색의 석회암 절벽 아래로 흐르는 강이 산모롱이를 잡고 돌아가는 이 광경이 동강을 비경으로서 절찬하게 한다. 계림산수에 비견하고 그랜드 캐년과도 견주는 것도 이 풍경 때문이다.

특히 고성리, 덕천리를 내려다보는 백운산을 도려내듯이 사행(蛇行)하는 그 광경을 누군가는 ‘강이 몸부림치는 듯이’ 흐른다고 표현했다. 동강 비경의 절정 부분이다. 나는 고성리 마을 앞으로 뻗어 내린 백운산 산자락 끄트머리에서 이 광경을 한눈에 보고 있다.

점재 마을로 들어와 마을 서쪽으로 난, 미끄러질 듯이 가파른 비탈을 타고 그곳으로 올랐다. 먼저 다녀간 사람들이 다람쥐도 오르다가 눈물을 흘릴 만큼 가파르다고 한 가풀막을 기듯이 오른다.

말안장처럼 능선이 한차례 가라앉은 안부에서 좌측으로 마치 담벼락 위를 걷듯이 조심조심 걸어나가면 동강의 물굽이가 한눈에 들어오는 조망처를 만난다. 동강에 바싹 다가서서 내려다볼 수 있는 최고의 조망처다.

▲ 동강을 수서곤충의 서식지나 민물고기의 삶터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점재나루, 소사나루, 절매나루, 진탄나루, 문산나루, 만지나루는 이제 더 이상 나루터가 아니라 물의 섭리와 사람의 삶이 절묘하게 어우러지는 천인합작(天人合作)의 풍경으로 기억되어야 한다.

방금 건너온 점재나루가 한눈에 들어온다. 작은 다리가 마을 왼쪽으로 걸려 있다. 초여름에 왔을 때만 해도 없었던 것이다. 마을 앞을 지나 협곡 사이를 이리저리 헤집듯이 빠져나가는 물길이 깊은 소와 여울을 지나 저쪽 산그늘 뒤로 숨어버리는 광경이 파노라믹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내가 서 있는 발아래 아득한 곳에 시퍼런 강물이 흐르고 있었다. 아찔한 풍경이다. 높은 곳에서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풍경을 부감경(俯瞰景)이라고 부른다. 자연스러운 상태에서 앞을 바라보고 있을 때 우리의 시선은 부각 8~10도 부근에 입사한다. 그러나 부각 30도를 넘는 곳에 있는 사물을 보려면 우리는 고개를 숙여야 한다. 그래서 절벽과 같은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볼 때는 유유히 풍경을 즐기기보다는 공포를 느끼게 된다.

동강에 바싹 다가선 백운산 절벽 위에서 보는 동강은 이미 부각 30도를 넘어서 있었다. 똥구멍이 스멀스멀하다. 그러나 강물은 고요하게 흐르고 있다. 강기슭의 도로에는 자동차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느릿하게 가고 있었다. 불안한 자기와 유유자적한 타자가 만나는 짜릿한 아름다움이라고나 할까. 그런 풍경을 보고 있었다.

인경(人境)의 동강

▲ 어라연의 상선암. 나리소, 바리소, 가마소, 어라연은 깊은 물웅덩이가 아니라 고요와 정적과 전설의 비경으로 자리매김 되고, 황새여울과 된꼬까리 여울은 뗏목잡이의 똥끝을 태우던 급류가 아니라 직벽 단애를 때리는 자연의 거문고 소리가 되어야 한다.

동강은 이렇게 고소(高所)에서 부감하는 것도 좋지만 물가로 내려서서 물을 만지듯이 걸어보는 것도 좋다. 산굽이가 채곡채곡 겹쳐져 있는 그 사이로 물안개가 꿈속처럼 드리워져 있는 강펄에 내려서서 소리내어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는 것도 좋다. 귀가 멍할 정도로 조용한 수면에 돌이라도 던져 그 정적의 깊이를 맛보는 것도 좋다.

나는 아침 안개가 자욱한 강변을 걸었다. 물안개가 걷히면서 강물 위로 석회암 절벽이 비치고 있었다. 철 이른 단풍이 칼로 자른 단면처럼 밋밋하고 거무스레한 석회암 절벽 위에 선홍색 점박이 무늬를 찍어 놓고 있었다. 절벽 아래의 물은 검은 빛을 띠고 있다.

그러나 아무래도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굽이쳐 흐르는 강,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높은 절벽과 절묘하게 어우러진 인경(人境)의 풍경이다. 강의 둔치에 펼쳐진 콩밭과 키 높은 옥수수밭, 그 뒤로 산자락에 야트막하게 붙어 있는 인가(人家)가 자아내는 풍경이 그것이다. 사람이 사는 삶터의 아늑함과 대비되는 가파른 산과 도려낸 듯한 절벽, 그리고 나룻배가 떠 있는 강물 위로 산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 이 모습이야말로 동강 제일의 풍경이다.

소리를 지르면 언제나 달려와 배를 가지고 건너오는 인정과 거친 산비탈처럼 투박한 사투리 속에 유유히 흐르는 동강의 물 속 같은 깊은 속내를 느끼는 것도 이곳의 풍경체험을 인상깊게 한다.

동강의 노래를 불러라

‘동강유역 자연휴식지 조례‘에 의하여 동강의 생태계는 보전될 것이다. 그러나 동강을 자갈돌 아래 돌집을 짓고 부화를 기다리는 수서곤충의 서식지나 민물고기의 삶터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석회암 지형의 생애를 관찰하는 자연학습의 장소로만 만족해서도 안 된다. 비오리가 한적하게 유영하도록 내버려두는 것만으로 우리의 할 일이 다 끝난 것은 아니다.

점재나루, 소사나루, 절매나루, 진탄나루, 문산나루, 만지나루는 이제 더 이상 나루터가 아니라 물의 섭리와 사람의 삶이 절묘하게 어우러지는 천인합작(天人合作)의 풍경으로 기억되어야 한다. 나리소, 바리소, 가마소, 어라연은 깊은 물웅덩이가 아니라 고요와 정적과 전설의 비경으로 자리매김 되고, 황새여울과 된꼬까리 여울은 뗏목잡이의 똥끝를 태우던 급류가 아니라 직벽 단애를 때리는 자연의 거문고 소리가 되어야 한다.

이제 동강은 생물의 보고(寶庫)에서 절승(絶勝)의 풍경으로 태어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동강의 노래를 불러야 한다.

자연은 풍경적 안목을 지닌 예술가의 예술적 세례를 받고서야 비로소 풍경으로 태어난다. 금강산이 바위산에서 천하의 절경이 된 것은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시와 그림으로 그곳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노래를 불렀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하늘색을 일깨워준 이효석처럼 풍경적 안목을 가진 예술가들이 동강의 풍경미를 발견해내고 이를 상찬(賞讚)해야 한다. 그래야 자연의 동강이 풍경으로 피어날 수 있다.

동강을 사랑하는 사람들아, 이제는 동강의 노래를 불러라.

ㆍ기고자:강영조 동아대학교 도시계획·조경학부 교수 yjkang@mail.donga.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