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뜻한 운치를 지닌 패랭이꽃
전해오는 노래 〈화편(花編)〉에서는 석죽화(石竹花), 즉 패랭이꽃을 소년에 견주었다. 이것이 과연 무엇을 두고 한 말인지는 알 수 없다. 석죽화의 속명이 패랭이꽃이라, 초립동이가 쓰는 모자인 ‘패랭이’와 비슷해, 이것이 한번 변해 소년으로 일컫게 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이는 아무 근거 없는 혼자 생각일 뿐이다.
어쨌든 석죽화가 일찍부터 사람에게 사랑을 받아 노래로 불리워진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석죽화는 바위틈이나 산중의 건조한 곳에 자생하는 평범한 꽃이다. 하지만 그윽한 운치가 있고, 심으면 잘 나고, 옮겨 심어도 잘 살기 때문에 원예가들이 즐겨 재배한다.
《산림경제》의 〈양화편〉에도 이러한 말이 적혀 있다.
기이한 풀꽃은 평범한 들 백성이 얻어 올 수도 없고, 설령 얻어 올 수 있다 해도 가꾸기가 어려워 도리어 누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잘 사는 꽃을 많이 심어 감상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석죽(石竹)과 사간(射干: 속사)의 종류는 평범한 품종이지만 그 꽃이 고와 그윽한 운치가 있다. 봄에 꽃이 반쯤 피었을 때 꺾어서 무를 거꾸로 달고 그 위에 꽂았다가 작은 화분에 옮기고 때때로 물을 주면 꽃이 진 뒤에 뿌리가 돋아난다. 이렇게 하여 꽃을 보고 씨를 받는다.
석죽화는 일명 구맥(瞿麥)이라고도 한다. 다산 정약용은 “우리나라의 석죽화는 다만 붉은 색 뿐이지만, 중국산은 5색의 꽃이 다 있다”고 했다. 중국산의 석죽화를 일찍부터 수입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가을에 씨를 받아 봄에 심으면 바로 그 해에 꽃을 보게 되는 1년초라서, 요즘도 꽃집에서 흔히 재배한다. 하지만 꽃집에서 재배하는 것은 우리나라 산이나 중국산의 석죽화가 아니라, 카네이션이라고 부르는 서양종의 석죽화다. 우리의 안목으론 꽃잎이 포개어진 카네이션이 홑잎으로 된 석죽화만큼 산뜻한 운치는 없어 보인다.
석죽화를 읊은 시인으로서는 고려의 이규보가 있다. 그는 고금을 통털어 모란시를 가장 많이 지었지만, 그래도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마음이 성에 차지 않아, 샅샅이 찾아가며 온갖 꽃을 다 읊고, 마침내 석죽화에까지 그 날카로운 시의 붓을 향하였다. 이규보의 〈석죽화〉시는 다음과 같다.
절개는 대나무의 높음 닮았고
꽃 피면 아녀자의 고움이 있네.
흩날려 가을철도 못 견디노니
대나무 되기엔 외람되도다.
節肖此君高 花開兒女艶
瓢零不耐秋 爲竹能無濫
이규보는 석죽화가 비록 곱기는 해도 가을이면 시들고 마니, 이름에 대 죽(竹)자를 넣어 대나무에 견준 것은 외랍되다고 풍자하였다. 하지만 석죽화를 노래한 시인으로 유명하기는 이규보 이전에 정습명(鄭襲明)이 있다. 그는 의종에게 바른 말로 직간한 충신인데, 후손 중에 정몽주 같은 위인이 난 것도 우연이 아니다. 석죽화가 이런 충신에게 사랑을 받은 것은 기이한 인연이라면 인연이다.
[부록] 석죽화를 노래한 시인 정습명
내가 아는 한, 석죽화의 아름다움을 예찬한 것은 고려 때 시인 정습명(鄭襲明)의 〈영석죽(咏石竹)〉 시가 처음이다. 그는 고려말의 충신인 정몽주의 선조다. 성격이 강직하고 고결하여, 한번 죽음으로써 의종(毅宗)에게 간하려 했던 절개 높은 선비였다. 이러한 그가 하고 많은 예쁜 꽃들 중에 유독 석죽화를 노래한 것은 그 취미가 세속 사람과는 다른 점이 있다.
설총이 지은 〈화왕계〉 중에는 할미꽃을 벼슬하지 않은 선비에 비겼고, 최치원의 한시에서는 촉규화(蜀葵花), 즉 접시꽃을 출신이 미천한 사람에 견주었다. 정습명은 석죽화를 두고 황량한 들판에 어여쁜 꽃떨기라 하여 그 아름다운 자태를 오로지 농부만이 차지한다고 하였다.
석죽화는 속어로 패랭이꽃이다. 우리나라 노래에서는 ‘화중소년(花中少年)’이라 일컫기도 한다. 근래 원예품으로 서양종 카네이션을 많이 기르지만, 우리나라 재래 품종으로는 단 한가지 붉은 색 뿐이었다. 《산림경제》〈양화편〉에는 “석죽화는 일명 구맥(瞿麥)이라고 하는데, 우리나라에서 이 꽃은 단지 붉은 색 뿐이다.”라고 했다. 그러나 옛날에는 오늘날처럼 여러 가지 빛깔과 다양한 종류의 서양종은 없었어도, 오히려 중국에서 옮겨온 여러 가지 빛깔의 다양한 종들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양화편〉의 ‘석죽화’ 조목에는 “중국에서 온 것은 꽃이 5색을 갖추었다”고 했다.
그러니 당시에는 중국에서 온 5색 석죽화가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7,8백년 전인 정습명의 시대에 이런 중국 품종의 석죽화가 이미 있었던지는 알 수 없다. 설령 중국 품종의 석죽화가 그때 벌써 수입되었다 하더라도 이것은 정원에 재배되는데 그쳤을 것이다. 정습명이 읊은 석죽화는 황량한 들판에 자생하는 것이었으니, 이는 재배하는 중국산이 아닌 우리나라 재래종이 분명하다.
석죽화가 아리따운 자태는 여름철에 사랑을 받는 봉선화만 못하고, 그윽한 운치는 겨울철에 맑게 피는 수선화에 미치지 못한다. 곱기로는 저 모란꽃의 발치에도 서지 못하고, 가녀린 것은 양귀비꽃을 바라보지도 못할 것이다. 또 순결한 자태는 숲 아래에서 고개를 숙이고 하얗게 피어 있는 백합에 비해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다 하겠다. 그런데도 어찌하여 정습명은 굳이 이런 평범한 꽃을 즐겨 예찬하였을까?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푸더분한 아내가 비록 자색이 빼어나지는 않아도 오히려 가정의 사랑과 기쁨을 돕는 것과 마찬가지로, 석죽화는 시골 사람에게 볼거리가 되기 때문이다. 정습명의 시는 이렇다.
세상사람 모란 붉음 사랑하여서
동산에 하나 가득 기르는구나.
뉘 알리 황량한 들판 위에도
또한 좋은 꽃떨기 숨어 있음을.
빛깔은 방죽 달빛 스미어들고
향기는 언덕 나무 바람에 오네.
땅이 후져 공자님 찾지 않으니
교태를 농부에게 맡기는구나.
世愛牧丹紅 栽培滿院中
誰知荒草野 亦有好花叢
色透村塘月 香傳隴樹風
地偏公子少 嬌態屬田翁
세상 사람들은 모란을 사랑해서 정원이 많이 재배한다. 하지만 황량한 들판에 저절로 자라는 석죽화는 그 고운 색채와 맑은 향기가 달 아래서나 바람 앞에서나 다 운치가 있다. 더구나 공자나 왕손 같은 부귀한 사람들이 찾지 않는 궁벽한 곳에 피어 있어, 오로지 농부와 촌사람들만 그 아름다운 자태를 독점하게 된다는 것이다.
정습명은 모란 같은 이름난 꽃의 아름다움을 노래하지 않고, 석죽화 같은 평범한 꽃의 아름다움을 예찬했다. 하나는 귀족적인 꽃이요, 다른 하나는 민중적인 꽃이기 때문이다.
아! 석죽화를 노래한 정습명은 시인으로서도 독특한 심미안을 가졌다고 할 것이다. 정습명으로 인해 시인들 사이에 널리 알려지게 된 이 석죽화는 후세에 한층 더 사랑을 받게 되었다. 《산림경제》 〈양화편〉에도 “석죽화는 사간(射干)의 종류다. 본디 평범한 풀이지만, 그 꽃이 또한 고와 그윽한 운치가 있다”고 했다. 또 계속해서 “봄꽃이 반쯤 피었을 때, 꺾어서 무우 위에 꽂고서, 화분에 흙을 채워 심어두고 이따금 물을 준다. 꽃이 지고 나면 뿌리가 생겨나 생기가 줄어들지 않는다. 또 씨도 얻을 수가 있으니 또한 기이한 방법이다.”라고 적혀 있다.
애끊는 사랑의 눈물, 추해당(秋海棠)
옛날 중국 서호에 살던 고산(孤山)처사 임포(林逋)는 매화를 사랑하여 아내로 삼았다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다. 인도의 한 승려는 바오렌스 꽃을 그림으로 그려 아내로 삼았을 뿐 아니라 자녀까지 낳았다는 전설도 있다. 추해당도 매화나 바오렌스 꽃과는 조금 다른 로맨틱한 사랑 이야기를 지니고 있다. 그 이야기는 이렇다.
옛날에 어떤 처녀가 사랑하는 사람과 어느 으슥한 곳에서 만나기로 굳게 약속을 했다. 눈이 빠져라고 기다렸지만 소식이 묘연하자 너무도 안타까운 나머지 서성이며 하염없이 한숨과 함께 눈물을 떨구었다. 그녀의 눈물이 떨어진 곳에서 아주 고운 꽃이 생겨났는데, 그 꽃이 바로 추해당이라고 한다.
《군방보》에는 이 이야기를 그저 “예전 어떤 여자가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다 오지 않자 눈물을 땅에 떨구었는데, 마침내 이 꽃이 피어났다”고 간단하게 적고 있다.
추해당의 다른 이름에 팔월춘(八月春)이 있고, 달리 단장화(斷腸花)라고도 한다. 빛깔이 고운 새색시 같고, 얼굴이 몹시 어여뻐 그 이름을 단장화라 했으니, 단장화란 말은 애끊는 꽃이란 뜻이다.
추해당은 풀꽃이다. 꽃은 분홍빛이 야드르르하게 곱고, 잎사귀는 물총새의 깃털처럼 생겼다. 잎사귀도 두 가지 모양이 있다. 하나는 잎 아래 붉은 줄이 가고, 하나는 잎 아래 푸른 줄이 나 있다. 그러나 붉은 줄이 난 것은 흔하고, 푸른 줄이 간 것은 드물다. 꽃은 붉은 줄 같 것보다 붉은 줄 간 것이 더 아취가 있다고 한다.
추해당은 그 성질이 그늘지고 습기 많은 곳을 좋아한다. 햇빛을 보면 시들고, 깨끗한 것을 좋아한다. 절대로 더러운 비료를 주면 안 된다.
재배 방법은 9월에 씨를 받아 화분이나 땅에 뿌려두면 봄에 싹이 돋아 여름에 꽃이 피고, 이듬해 봄에는 꽃이 더욱 많이 피게 된다. 뿌리가 묵었기 때문이다. 혹은 서리가 내린 뒤에 그 뿌리를 캐서 얼지 않게 간직하였다가 2월에 심으면 더 좋다고 한다.
하지만 추해당은 꽃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잎사귀가 한층 더 곱고 아름다워 꽃과 잎의 자태가 모두 여리고 고운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그러므로 《초본화보》에는 추해당이 교태가 있고 매끄러워 미인이 새 단장 한 것 같다고 했다. 막상 추해당이란 이름만으로도 그 꽃의 아름다움은 어렴풋이 짐작되는 바가 있다.
꽃 빛 곱고 향기 좋은 매괴화(玫瑰花)
매괴화는 장미의 일종이다. 식물학상으로는 낙엽관목으로, 키가 2,3척이고, 줄기에 가시가 많이 돋았다. 잎사귀는 갸름하고, 날개 모양으로 되었다. 꽃은 황색과 백색, 또는 푸른 색도 있다고 한다. 대개는 자줏빛이고 꽃떨기는 푸르고 향기는 아주 맑고도 매워서 이것으로 향수를 만들고, 또 술과 차에 타기도 한다. 설탕에도 섞어 중국에서는 매괴주, 매괴차, 매괴당이란 것이 있다.
《양화소록(養花小錄)》에는 “시속에서는 매괴를 해당이라고 한다”고 했다. 이로 보면 매괴는 장미와도 같고 해당과도 비슷해서 구별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지봉유설(芝峯類說)》에서는 “중국에서 말하는 장미는 모두 붉은 색에다 덩굴져 난다”고 했으니, 중국에서 말하는 장미는 모두 홍색 꽃이 피는 덩굴 장미를 말한다.
정약용의 《아언각비(雅言覺非)》에는 “해당화는 그 나무의 높이가 2자 남짓 된다. 창주(昌州)의 해당은 그 나무가 아름드리가 되니 나무가 얼마나 높고 큰지 알 수 있다”고 했다.정약용은 또 “우리나라 사람들이 잘못알고 매괴화를 해당화로 여긴다”고 했다. 금강산 밖 동해 바닷가에 있는 해당도 진짜 해당이 아니라고 했다.
만일 이 말이 옳다면, 장미는 덩굴 식물이고, 해당은 큰 나무이며, 매괴는 덩굴식물도 아니고 큰 나무도 아닌 것으로, 구분이 쉬울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도 않다. 서유구의 《예원지(藝畹志)》에는 “우리나라에는 매괴화가 없으니, 마땅히 북경에서 구해와야 한다”고 했다.
또 매괴화는 월계화나 목향화와도 비슷하지만, 자세히 보면 같지 않다. 《군방보(群芳譜)》에는 매괴가 기이한 꽃은 아니나 꽃 빛이 곱고 향기가 아름다워 차나 술에 넣어 마시기도 하고, 향주머니에 넣어 차고 다닐 수도 있으므로, 동산에 많이 심는 것이 좋다고 했다. 예로부터 꽃 기르는 사람이 이 꽃을 흔히 재배하여 감상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조선 성종 때 김종직(金完直) 선생의 시구에 “매괴꽃 다 피도록 보주(甫州) 땅에 머물렀네. (開盡玟瑰滯甫州)”란 구절이 있다. 보주는 퇴계(退溪)선생 선대의 고향인 경북 진보(眞寶)의 옛 이름이다. 여기에도 매괴화가 있었던 것을 이 시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 고려 숙종이 시 짓는 신하와 더불어 옥매괴를 읊은 일이 《고려사》에 실린 것을 보면, 당시 궁궐 정원에 이미 이 매괴화가 재배되었던 형편도 알 수 있다.
아름답지만 향기가 없는 수구화(繡毬花)
수국꽃이 피어서 숲 창에 비치었네.
繡毬花發映林牕
이것은 근대 문학으로 이름 높던 재상 운양(雲養) 김윤식(金允植)의 시구다. 여름철에 피는 꽃 중에서 과연 수구(繡毬)는 시로 노래할 만한 꽃의 하나일까? 이 꽃은 식물학상으로 낙엽관목(落葉灌木)이다. 잎사귀는 둥글고 주름살이 잡혔으며 짙은 녹색이다. 꽃은 화판이 다섯 개로, 백화가 한 떨기를 이루어 둥글기가 공과 같으므로 수구(繡毬)라는 이름을 얻었다.
흰색 꽃이 흔하지만 자주색과 담홍색의 꽃도 있다. 이 꽃이 이상한 점은 처음 필 때는 푸르다가 점차 푸른 빛이 줄어들고 하얗게 된다는 것이다. 《증보도주공서(增補陶朱公書)》에는 이 꽃이 모란과 동시에 핀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모란보다 훨씬 뒤에 핀다.
《군방보》에는 수구가 다만 붉은 색과 흰 색의 두 종류가 있다고 했다. 또 《미공비급(眉公秘笈)》에는 촉중(蜀中)에 자수구(紫繡毬)가 있다고 하였으나, 오늘날에 와서는 이 자수구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꽃이다.
《예원지(藝畹志)》에는 “우리나라에는 수구가 두 종류 분이다. 줄거리는 모란과 비슷하고, 잎사귀는 겉은 짙은 푸른색이고 등은 옅으며, 잎의 아래쪽은 밑은 둥글고 끝은 뾰족하며, 잎의 가장자리는 가느다란 톱날과 같이 아삭아삭 하게 되었다. 한 여름에야 바야흐로 꽃이 핀다”고 하였다. 이것을 보면 150년 전에는 수구가 홍백 두 종류뿐이었고 오늘날과 같은 자색은 없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수구화는 그늘지고 습한 곳을 좋아하므로 햇볕이 내려쬐는 곳에 심어서는 안된다. 《금화경독기(金華耕讀記)》에는 수구화를 옮겨 심는 방법을 “여름철에 가지를 꺾어 화분 속에 꽂아, 볕이 들지 않는 음습한 곳에 두고 자주 물을 주면 산다”고 했고, 가꾸는 방법은 아침 저녁으로 맑은 물을 주어 항상 흙이 물기를 머금게 하라고 했다. 이런 것은 오늘날에는 상식이 되어 누구나 잘 알고 있으므로 따로 설명이 필요 없다. 《금화경독기》에는 꽃이 피면 작은 댓가지나 갈대로 붙들어 주라고 했는데, 이것도 요즘의 안목으로 보면 사족과 같이 쓸데없는 말이 되고 말았다.
수구가 꽃은 아름답지만 향기가 없는 것이 흠이다. 대저 꽃이 색과 미만 갖추고 향기가 없는 것은 마치 얼빠진 사람과 같아서 원만한 아름다움이라고는 말 할 수 없다.
근심을 잊게 하는 풀, 원추리
당 현종이 양귀비와 함께 청화궁(淸華宮)에 놀러가서 양귀비의 어깨에 기대 모란을 감상하다가, 한 가지를 꺾어 양귀비와 함께 번갈아 맡아 보며 이렇게 말했다.
훤초는 근심을 잊게 해주고, 모란은 술을 잘 깨게 해준다.
不惟萱草忘憂, 此花尢能醒酒.
훤초(萱草)는 우리말로는 원추리다. 《산림경제》에 훤초의 다른 이름은 망우초(忘憂草)니 사람이 이 꽃을 보면 곧 근심을 잊어버리게 된다고 하였다. 《초목기(草木記)》에는 훤초를 일명 의남초(宜男草)라 하는데, 부인이 임신했을 때 이 꽃을 차고 다니면 반드시 아들을 낳게 되므로 이런 이름을 얻었다 한다.
원추리는 네 계절을 통하여 봄꽃 여름꽃 가을꽃 겨울꽃이 있다. 화판도 겹잎과 홑잎이 있고, 꽃 색도 황색과 백색, 홍색과 자주색이 있다. 이 중에 황색이 가장 향기가 맑고 좋다. 원추리에는 3종이 있다. 홑꽃은 먹을 수 있고, 겹꽃은 먹으면 사람이 죽는다고 하며, 황색으로 꿀처럼 된 것은 향기가 맑고 연해서 채소로 만들어 먹을 수 있다고 한다.
꽃이 작고 짙은 노란 색을 띤 것은 금훤(金萱)이라고 하는데, 매우 향기로워 먹을 수가 있다. 바위 곁에 심으면 보기가 더욱 좋다. 《군방보》에 여름 원추리도 매우 아름답지만, 가을 원추리도 없을 수 없으니, 이 꽃이 가을빛을 장하게 할 수 있다고 했다.
원추리를 재배할 때 주의할 점은 비옥한 땅에 심은 것은 꽃잎도 두껍고 빛깔도 짙으며 꽃도 오래가지만, 척박한 땅에 심은 것은 꽃잎이 얇고 빛깔도 엷은데다 꽃도 오래 가지 못한다는 점이다.
성종 때 유학자로 연산군의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죽음을 당한 수헌(睡軒) 권오복(權五福)의 시에 이런 것이 있다.
집에는 늙지 않는 복숭아 심고
뜰에는 근심 잊자 원추리 기른다네.
堂栽不老桃 庭養忘憂萱
권오복 보다 훨씬 앞서 세종 때 집현전 학사인 신숙주도 〈비해당사십팔영〉 중에서 원추리를 노래한 바 있다.
비 갠 뒤 뜰 가에 초록 싹이 길더니만
한낮에 바람 솔솔 그림자가 서늘하다.
숱한 가지 얽힌 잎이 참으로 일 많으니
네 덕분에 다 잊어 아무 시름 없노라.
雨餘階畔綠芽長 日午風輕翠影凉
繁枝亂葉眞多事 我正無憂賴爾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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