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한국의 명풍경을 찾아서-담양 소쇄원

醉月 2011. 7. 6. 07:55

담양 소쇄원 무이산 아홉 물굽이를 여기서 보다

 
담 아래로 맑고 차가운 물이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작은 바위틈으로 이리저리 몇 차례 물굽이가 졌다. 그 때마다 오후의 햇살이 수면에 부딪혀 반짝였다. 느티나무 이파리가 철 이른 단풍낙엽이 되어 물위에 낙하한다. 외나무다리 아래를 지나 너럭바위 위에 작게 패인 웅덩이에 잠시 머문다. 이파리는 서성거리는 듯이 잠시 제자리에서 원을 그리며 회전하는가 했더니 이내 빠르게 홈을 타고 내려와 떨어진다.

굵은 동아줄 정도의 물줄기는 폭호에 떨어지면서 물보라로 다시 일어섰다. 그 높이를 열 길이나 된다고 해서 십장폭포(十丈瀑布)라고 부른다. 나는 이 과장된 비유에 관대하다. 폭포의 물줄기가 계곡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물소리는 좁은 골의 바위벽을 때리면서 하늘 높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이 물소리에서 거문고 퉁기는 소리를 연상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나는 소쇄원(瀟灑園)의 광풍각(光風閣) 앞에서 그 아래로 깊게 패인 계곡을 바라보고 있었다. 광풍각은 계곡의 급한 비탈에 반듯하게 쌓은 높은 석단 위에 서 있다. 계곡을 넘쳐흐르는 물살이 이 석단에 부딪혀 물보라라도 일으킬 듯이 계곡에 바싹 다가서 있다. 이곳을 찾은 고경명(高敬命·1533-1592)은 “폭포수 서쪽 작은 집은 마치 배를 그린 듯”이라고 노래했다.

물위에 떠 있는 한 척의 배와 같이 보이는 시점은 계곡 바닥이다. 거기서 위로 올려다보면 계류에 바싹 다가선 석단은 푸른 물을 헤치며 앞으로 나아가는 뱃머리이며, 그 위에 서 있는 건물은 선실로도 보인다. 광풍각이라는 이름은 “가슴에 품은 뜻의 맑고 맑음이 마치 비 갠 뒤 해가 뜨며 부는 청량한 바람과도 같고 맑은 날의 달빛과 같다”라고 하는 인물평에서 얻어와 이 정원의 주인인 양산보(梁山甫·1503-1557)가 명명했다.

 

무이산 아홉 물굽이


▲ 광풍각은 방이 한가운데 있고 마루가 3면에 붙어 있다.한 사람이 책상을 펴고 앉으면 적당한 크기의 방안에서 정원을 둘러보면 담과 대봉대,소정,오곡류와 오곡문,그리고 대숲이 광풍각의 기둥과 누마루 사이로 스며 들어와 마치 병풍 속의 그림을 보는 듯하다.

‘맑고 깨끗한 뜰‘이란 의미의 소쇄원을 만든 양산보는 아버지 창암공을 따라 서울로 가서 조광조(1482-1519)의 문하생이 되었으나 스승은 유배지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그것을 본 그는 다시는 세상에 나가지 않으리라고 작정하고는 낙향했다. 그리고는 어렸을 때 놀던 그 계곡에 서재를 짓고 글읽기와 은둔 생활에 들어갔다.

낙향한 유학자들이 경치 좋은 곳에 정자를 짓고 은둔 생활을 즐겨 한 것은 주자학의 원조 주자의 생활 행동을 본받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주자는 벼슬길이 좌절된 후 그의 고향 근처인 무이산 아홉 물굽이가 아름다운 무이구곡(武夷九曲)에 은병정사(隱屛精舍)를 짓고 제자들을 가르치며 다시는 정계로 나서지 않았다.

유학자인 양산보가 주자의 낙향 행동을 동경하여 계곡 깊숙한 곳에 정자와 서재를 짓고 은둔 생활에 들어간 것은 그 당시에는 자연스런 일이었다. 퇴계 이황(李滉·1501-1570)의 도산서원이 그렇고, 송순(宋純·1510-1560)의 면앙정(仰亭)과 김인후(金麟厚·1510-1560)의 평천장(平泉莊)도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유학자들에게는 주자가 은둔한 ‘무이구곡(武夷九曲)’은 성스럽고 아름다운 곳이었고, 동경과 목표의 승경이기도 했다. 그들은 무이산을 직접 가볼 수 없음을 안타까워했다. 그 대신 그림으로 그려 집안에 걸어 놓고 그 속을 와유(臥遊)했다. 양산보도 그랬을 것이다. 낙향 후 은둔을 위해서 소쇄원을 건설할 때 무이구곡을 본보기로 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보면 입구에 있는 다리는 무이구곡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무이도가(武夷櫂歌)의 제1곡에 나오는 끊어진 무지개다리와 겹쳐진다. 물론 현재 우리가 보는 다리는 무지개다리도 아니고 더구나 끊어진 것도 아니다. 오히려 주변 풍경과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넓고 단단한 나무다리로 보수해 놓았다.

제3곡은 ‘삼곡에 그대 가학선(架壑船)을 보라 / 돛대를 멈출지 모름이 몇 해인가’(이민홍 역)로 시작한다. 가학선은 무이구곡의 절벽에 살았던 원주민들의 주거지이자 죽은 사람을 모셔놓은 일종의 묘(墓)였다. 절벽 위에 사는 그들은 가족이 죽으면 배 모양의 관을 만들어 그 속에 시신을 안치한 후 다른 곳으로 주거지를 옮겼다. 다시 말해서 가학선은 관을 싣고 절벽 위에 걸려 있는 배를 가리킨다. 광풍각이 가학선을 재현한 것이라면 석단은 그 배가 걸려 있는 절벽인 셈이다.

동쪽과 서쪽의 두 바위를 노래한 제4곡은 담 밑을 흘러든 물이 모여드는 너럭바위와 겹쳐진다. 광풍각 건너편에 있는 작은 정자와 그 북쪽에 있는 너른 마당인 애양단을 둘러싸고 있는 담장이 끝나는 곳에 있는 오곡문(五曲門)은 무이구곡의 제5곡을 연상하게 한다. 그 담은 계류를 건너면서 멈춰 선다. 계류는 정원 바깥에서 담 아래를 흘러들고 있었다. 다섯 구비로 휘감아지다가 너럭바위로 흘러든다. 그래서 이 계류를 오곡류(五曲流)라고 한다.

▲ 한겨울 광풍각.광풍각이라는 이름은

오곡문과 오곡류, 그리고 바위산 또 가학선을 모사(模寫)한 광풍각, 계곡에 걸린 다리. 계곡을 중심으로 한 소쇄원의 경물은 그림 속에서 본 무이산 아홉 물굽이의 풍경을 연상하게끔 하는 데에는 손색이 없었다. 물론 이곳을 찾은 유학자들은 그림 속의 무이구곡을 와유하다가 소쇄원에서는 실제의 무이구곡 속에 있는 듯한 즐거움을 맛보았을 것이다.

만약 소쇄원이 주자가 은신한 무이구곡 가운데 제5곡까지를 재현한 곳이라면 제6곡에서 제9곡까지는 어디란 말인가. 조경학자 정기호는 오곡문을 나와 뒷산의 정상 부위에 있는 고암동굴로 이어지는 그 산길에서 나머지 4곡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는 지금의 소쇄원을 소쇄원 내원(內園), 오곡문 너머 고암동굴 언저리까지를 소쇄원 외원(外園)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나도 그 생각에는 동의한다.

돌다리 담

나는 광풍각 안으로 들어갔다. 광풍각은 방이 한가운데 있고 마루가 3면에 붙어 있다. 한 사람이 책상을 펴고 앉으면 적당할 크기의 방안에서 정원을 둘러보았다. 담과 대봉대, 소정, 오곡류와 오곡문, 그리고 대숲이 광풍각의 기둥과 누마루 사이로 스며 들어와 마치 병풍 속의 그림을 보는 듯했다.

너럭바위를 지나 급하게 떨어지는 폭포의 물소리가 처마 끝을 때리고 있었다. 또 맞은편에 대봉대 위에 서 있는 소정 아래로 흘러내린 작은 물줄기가 돌 홈통을 따라 급한 경사를 타고 계곡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돌 홈통은 물레방아를 달았던 곳이다. 여기는 언제나 물소리가 크게 들리는 곳이다.

다시 시선을 오곡문 옆의 돌다리 담으로 돌렸다. 개울 위에 다리를 놓아 그 위에 담을 쌓은 것이 돌다리 담이다. 나는 오곡류로 흘러드는 개울 위에 걸린 돌다리 담을 소쇄원에서 가장 훌륭한 조경 설계라고 생각한다. 바로 개울물을 담 아래로 관류(貫流)시킨 부분이다.

정원과 주변과를 구분하는 담장이 개울을 만나면 거기서 그 연속성은 중단된다. 그러나 그곳을 개방해두면 소정이나 광풍각에서 바깥 세상이 대책 없이 다 보이게 되어 둘러싸여진 낙원으로서의 소쇄원의 장소적 가치는 덜하게 된다. 그 뿐 아니다. 새로운 경지로 접어드는 오곡문의 극적인 공간연출을 위해서는 바깥이 보일 듯 말 듯이 열어두어야 하지만 그렇게 되면 의도대로 되지 않는다.

그러나 양산보는 해결방법을 찾아냈다. 개울은 집안으로 흘러들게 하면서 담은 연속적으로 이어지게 하는 방법으로 그는 개울에 걸린 다리를 생각했다. 개울 위에 돌다리를 놓으면 그 다리 위는 땅의 연장이 된다. 바로 그 위에 담을 이어 붙였다. 돌다리 위에 담을 세우는 것으로 개울물의 유입과 둘러쌈이라는 갈등을 해결한 것이다. 이 자연의 순리와 인간의 작의가 절묘하게 조화하고 있는 풍경을 나는 소쇄원에서 제일로 친다.

소쇄한 마음

정원을 나오면서 소쇄, 하고 나직이 불러본다. 시옷소리가 혀와 입천장 사이를 마찰하면서 뾰족한 입술을 빠져나갈 때 일순 바람소리가 났다. 그 소리의 느낌은 대빗자루로 너른 마당을 쓸 때 각란되는 새벽공기의 청량함이기도 하고, 혹은 계류에 기대선 낙엽수들 가지 사이로 새어나가는 골바람의 싱그러움이기도 했다. 눈을 들어 하늘을 본다.

‘싸아, 싸아’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곧게 뻗은 대나무가 서로 살을 비비며 소리를 내고 있었다. 맑고 깨끗한 바람이 수죽(脩竹) 사이를 지나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ㆍ기고자:강영조 동아대학교 도시계획·조경학부 교수 yjkang@mail.donga.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