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황교익의 味食生活_06

醉月 2011. 7. 5. 13:14

한번 버린 입맛이 쉽게 돌아올 수 있나

트루맛쇼 후폭풍

다큐영화 ‘트루맛쇼’는 한국의 많은 맛집이 조작됐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영화를 보고도 자신의 미각을 의심하는 관객은 많지 않을 것이다.

 

요즘 다큐영화가 ‘트루맛쇼’ 화제다. MBC PD 출신 김재환 감독의 작품으로 ‘방송에 나오는 맛집이 조작됐다’는 것을 몰래카메라에 담았다. 맛집 방송에 돈이 오가고 엉터리 음식이 특별난 음식으로 소개된다. 나는 이 다큐영화에 등장해 “그런 방송이 가능하게 된 것은 시청자의 수준에도 일부 책임이 있다”고 말했다. 특히 ‘출연자가 온갖 호들갑을 떨면서 맛있어 죽을 것처럼 액션을 취하는 저급한 영상을 보고 즐거워하고, 또 그 방송에 소개된 음식점에 길게 줄을 서는 시청자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현했다. 다큐영화에서는 이런 말로 압축돼 나온다. “미식이 아니라 탐식이죠.”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이 다큐영화가 공개됐을 때 관객과의 대화에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한국 시청자 수준이 그러니 저런 방송을 보는 것이고, 한국 소비자 입맛 수준이 그러니 저 쓰레기 같은 음식을 맛있다고 줄서서 먹는 것입니다.”

 

트루맛쇼가 아니어도 나는 이 말을 입에 달고 다녔으며 틈나는 대로 글로 쓰곤 했다. 그러나 자신의 수준이 낮다 하면 기분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라 늘 조심스러웠다. 트루맛쇼를 보며 말의 강도를 조금 올려도 되겠다 싶었다. 마침내 요즘엔 속내를 다 드러낸다. “한국인의 미각 수준은 미개하다. 맛있는 음식을 먹어본 적도 없으니 미개한 것이다.”

 

많은 한국인은 6·25전쟁 이후 피폐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950~70년대에는 끼니를 때우는 데 급급했다. 맛있는 무엇을 챙겨 먹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먹을거리 생산과 유통 여건도 열악했다. 1980년대 경제가 급속히 성장 했지만 먹을거리 양을 늘렸을 뿐 질을 올릴 수 있는 여건은 아니었다. 당시 유행했던 고기 뷔페를 떠올리면 한국인의 미식 수준을 짐작할 수 있다. 그즈음 한국의 식품산업도 급성장했는데, 도시 노동자의 경제 수준에 맞춘 저급한 식재료가 시장을 점령했다. 산분해 간장과 대두박 된장, 빙초산 등이 이를 상징하는 식재료다. 1990년대 들어 비로소 질 좋은 음식에 대한 기호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질 낮은 식재료에 길들여진 입맛은 쉽게 ‘세탁’되는 것이 아니었다. 한국음식, 특히 외식업소 음식이 지금까지 짜고 맵고 달고 신 양념 맛에 기대는 이유는 개발 시대의 그 입맛 ‘전통’(?)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한국인이 맛을 모르니 약삭빠른 사람들이 음식을 갖고 온갖 장난을 친다. 트루맛쇼에서는 대표적 인물로 방송 제작자와 브로커를 보여준다. 이 다큐영화에 캐비아 삼겹살이 나온다. 차게 먹어야 할 캐비아를 삼겹살에 발라 구워 먹으며 최고의 맛이라고 엄지를 치켜세운다. 화면에 이런 자막이 뜬다. ‘한식 세계화 가능성 확인’ 물론 그 캐비아는 싸구려 가짜다. 떡볶이에 푸아그라를 올리면 10만 원에도 팔 수 있는 고급 떡볶이가 된다고 강변하는 요리사가 한식 세계화의 전도사라며 설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음식을 두고 벌이는 장난은 방송에만 있지 않다. 음식 앞에 사회적 권위가 느껴지는 누군가를 세우기만 하면 대단한 음식으로 변한다. 그 권위 입히기에 연예인, 대학교수, 문필가, 정치인, 경제인, 요리사 등이 동원된다. 그들이 무엇을 먹었다 하면 뭔가 다를 것이라고 생각해 그 식당으로 득달같이 달려간다. 서울에서 제일 잘나가는 식당들은 입구에 ‘대통령의 맛집’이라는 간판을 달아놨다. 한국의 으뜸 권위자는 대통령일 테니 그들이 다녀간 식당이 대박을 터뜨린 것이다.

트루맛쇼가 개봉하면 맛집 지형이 많이 바뀔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한번 버린 입맛은 쉽게 되돌려지지 않는다. 특히 한국인 열에 아홉은 자신의 입맛이 절대미각 수준인 듯 착각한다.

 

아릿하고 쿰쿰해야 진짜 감자 음식이지

썩은 감자

조금 삭힌 감자옹심이. 감자 특유의 냄새가 없다.

 

예전엔 강원도에 가야 먹을 수 있던 감자떡이 고속도로 휴게소에서도 팔린다. 웬만한 시장 좌판에도 있고 분식집에도 있다. 그런데 그 감자떡 맛이 요상하다. 쫀득하면서 약간 서걱거리는 식감이 있었는데 요즘의 그 감자떡은 고무 씹는 것처럼 질기다. 공장에서 제조한 감자 전분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여기에 타피오카 전분을 섞기도 한다. 엄격히 말하면 감자떡 비슷한 전분떡이다.

 

(여기서 잠깐, 쌀떡 문제도 언급해보자. 쌀떡도 쌀로 한 것보다 쌀가루로 한 떡이 더 많다. 쌀이 남아돌자 저가의 쌀을 분말로 만드는 회사가 번창하는데, 이들이 쌀가루를 떡가게에 팔고 있다. 이 쌀가루 떡은 질기다. 폭신한 느낌도 없고 쌀의 구수한 향도 없다. 분말을 내면서 무엇을 첨가하는지 무척 달고 짜다. 쌀떡 비슷한 쌀가루떡이다.)

 

소설가 황석영이 북한에 갔을 때 김일성과 개인적으로 여러 번 만났다고 한다. 황석영의 글에 따르면 김일성의 입담이 대단했던 것 같다. 남한의 황구라와 북한의 김구라가 만났으니 서로 영웅담이 오갔을 것이다. 그 만남의 자리에서 김일성은 감자 이야기를 꺼냈다. 감자 음식은 언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면서 빨치산 시절 민가에서 얻어먹던 그 언 감자 음식을 추억했던 것이다. 김일성에게 언 감자는 혁명을 상징하는 음식이었을 것이다.

 

서울 구로구에는 옌변 조선족이 운영하는 식당이 많다. 그 식당의 주요 음식 중 하나가 감자만두로, 감자를 갈아 만든 피로 빚은 만두다. 그 속에는 채소도 들고 돼지고기도 들었다. 그들이 맛있다 여기는 것은 언 감자로 빚은 감자만두다. 언 감자로 빚어 색깔이 거무스레하다. 언 감자 음식은 강원도에도 있었다. 언 감자를 떡으로 빚고 그 안에 팥소를 넣어 언감자송편이라 했다. 옌변의 언감자만두나 강원도의 언감자송편이나 같은 음식이라 해도 과히 틀리지 않다.

 

감자는 흔히 썩혀야 맛있다고 말한다. 언 감자란 곧 썩은 감자다. 이런 감자를 갈아서 음식을 하면 거무스레한 색에 아릿하고 쿰쿰한 냄새가 난다. 이 묘한 냄새가 없으면 감자는 그냥 찐득한 식감만 있고 아무 맛이 없다. 언 감자가 없어도 이 향을 보탤 수 있다. 감자를 갈아서 삭히면 된다. 상온에 두면 갈아놓은 감자는 서서히 갈변을 하면서 아릿하고 쿰쿰한 냄새가 진해진다. 오래 삭힐수록 색은 짙어지고 냄새는 진해진다.

강원도에는 감자 전분이 아닌, 감자를 직접 갈아 음식을 만드는 식당들이 여전히 있다. 전통적인 방식을 유지한다고 해서 관광객들이 자주 찾는다. 감자전, 감자옹심이, 감자떡 등이 그런 음식이다. 그런데 요즘 강원도 감자 음식이 바뀌었다. 감자를 갈아 만들기는 하나 감자를 간 즉시 요리를 해 하얀색을 내는, 감자의 아릿한 향을 죽인 음식이 나온다. 감자 전분으로 만든 음식보다야 식감이 낫지만 그 특유의 냄새가 없으니 이걸 왜 먹나 싶다. 식감만 살릴 것이면 감자 전분에 여러 채소를 채쳐서 함께 반죽해 음식을 내는 것이 나을 것이다.

 

나는 강원도 식당에서 감자를 갓 갈아 만든 하얀 감자떡과 감자전, 감자옹심이를 먹으면서 강원도 토박이로 보이는 식당 주인에게 감자를 왜 삭히지 않는지 묻지 않았다. 물어봤자 돌아오는 답은 ‘요즘 손님은 삭힌 감자의 향과 때깔을 알지 못해요’ 하고 잘라 말할 것이기 때문이다.

 

쌀밥에 ‘성게소 젓갈’ 진짜 끝내줍니다

성게소

성게의 생식소인 ‘성게소’로, 암수 모두 이 소를 갖고 있다. 성게는 지금이 제철이다.

 

성게는 한반도 연안에서 흔히 잡힌다. 그 ‘성게 알’이 예전에는 귀했다. 고급 일식집에나 가야 나무상자에 모셔진 성게 알을 볼 수 있었다. 국내산 대부분이 일본으로 수출돼 우리나라 사람은 먹을 몫이 없었다. 요즘은 사정이 달라졌다. 웬만한 횟집에서도 이를 낸다. 한국도 많이 부유해진 것이다.

 

고급 일식집 분위기를 내는 식당에서는 이 성게 알을 ‘우니’라 말한다. 요리사가 우니라 하니 손님도 덩달아 우니라고 한다. 일본어다. 한자로는 운단(雲丹)이라 쓴다. 성게를 많이 다루는 바닷가의 사람들은 우니, 운단, 은단이라 부른다. 일제강점기 때부터 일본으로 많이 수출해 일본어가 번진 것이다. 성게 알이라 하면 뭔가 격이 떨어지는 듯 여기는 분위기다. 한국인의 일본어 애용은 횟집에서 유독 심하다. 거의 모든 해산물 이름을 일본어로 부를 줄 알아야 ‘한 미식’ 하는 것으로 착각한다. 독도나 정신대 문제가 나오면 독립투사에 견줄 만한 민족정신을 보이면서도, 생선회 앞에서는 일본인이 되지 못해 야단난 듯하다. 우리말이 있으면 우리말을 쓰는 것이 맞다. 익혀둔 일본어는 일본에 가서 쓰면 된다.

 

성게 알은 생물학적으로 바른 말이 아니다. 성게에서 우리가 먹는 부분은 생식소다. 성게는 암수딴몸으로 암수 생식소에 따라 각각 난소(알을 만드는 장소)와 정소(정자를 만드는 장소)를 품고 있다. 이 난소와 정소는 색깔만 약간 차이 날 뿐 맛은 같다. 전문가도 성게나 생식소만 보고 암수를 구별할 수 없다. 우니, 운단이라는 말을 피하려고 성게 알이라 하면 생물학적으로 틀리게 된다. 그렇다고 ‘성게 생식소’라 하면 먹을거리처럼 여겨지지 않는다.

 

문화란 사물이나 현상에 대해 개념을 정립하고 그에 합당한 이름을 붙이는 일이라 할 수 있다. 문화가 미개할수록 그 개념은 허약하고 단어의 분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음식문화가 발달했다는 것은 ‘맛있는 음식을 많이 먹는다’는 것이 아니라 ‘음식에 어울리는 적절한 개념어를 많이 가지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성게 알만 놓고 보자면 한국 음식문화는 그렇게 발달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성게 생식소를 두고 이에 어울릴 만한 개념어를 생각해보았는데 ‘성게소’라는 단어가 어떨까 싶다. 한국 음식문화에서 ‘-소’라는 접미어는 ‘안을 채우는 내용물’을 뜻한다. 만두-소, 송편-소가 그 활용 예다. 이 ‘-소’는 인위적으로 넣은 내용물이라는 느낌이 들어 성게 안에서 저절로 생긴 생식소를 이르기에는 적절하지 않을 수도 있으나, ‘-소’ 외에 마땅히 붙일 만한 한국어가 없다. 쓰다 보면 익숙해질 것이다.

 

성게소가 가장 맛있는 철은 6~8월이다. 여름 산란기 직전 성게소가 꽉 차고 맛있는 것이다. 성게소를 대량으로 가공하는 곳도 드물다. 대부분 물질을 해 따온 성게를 부둣가에 앉아서 깐 뒤 성게소를 조그만 숟가락으로 떠낸다. 이를 바닷물에 씻어 포장해 중간상인에게 넘기면 여기서 다시 일본 수출상이나 공판장에 넘긴다. 그러니 싱싱한 성게소를 싸게 사자면 부두로 나가야 한다. 성게는 동해안 전역에서 나며 요즘 같은 제철에는 어느 포구에서나 성게 까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성게소는 싱싱한 것을 그냥 먹어도 맛있지만 젓갈로 담가도 좋다. 일본에서는 젓갈 담글 때 청주를 더하는 등 여러 방법을 쓰지만 소금만 넣어 숙성해도 충분히 맛있다. 성게소를 물에 씻지 말고 중량 대비 5% 정도의 소금을 넣고 냉장고에 한 달 정도 두면 된다. 싱싱한 성게소보다 이렇게 젓갈로 담근 것이 향이 훨씬 좋다. 따끈한 밥에 올려 먹으면 여름 반찬으로 이만한 것이 없다.

 

욕먹을 각오로 묻는다 조미료 쓰십니까?

식당과 화학조미료

화학조미료를 넣었을까, 안 넣었을까. 오래된 유명 식당들이 궁금한가. 가서 직접 물어보라.

 

최근 기획한 일이 있어 서울의 오래된 음식점을 돌고 있다. 음식점 주인이나 그곳에서 오랫동안 일한 분들을 인터뷰하고, 가능하면 주방도 살펴본다. 오래된 유명 음식점은 섭외하기가 쉽지 않다. 주인과 통화하기도 어렵다. 전화받은 직원이 자기 선에서 차단한다. “저희는 취재에 응하지 않는 게 원칙입니다.” 내가 음식점 주인이어도 그럴 것이다. 수십 년 장사 잘하고 있는데 어디에 어떤 소개 글이 나간들 이득 될 것이 없기 때문이다. 현명한 판단이다. 그래도 취재 내용에 대한 설명을 듣고 쾌히 승낙해주신 분들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취재하면서 빠뜨리지 않는 질문이 하나 있다. “화학조미료를 넣으시나요?” 듣기에 따라 매우 불쾌할 수 있다. 유명 음식점인 데다 이미 여러 곳에서 화학조미료와는 거리가 먼 음식점이라는 평가를 받은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 평가를 믿을 수 없다. 내가 먹어보니 화학조미료가 들어갔다고 짐작할 수 있는 맛인데, 안 넣었다고 하니 의심하는 것이다.

 

화학조미료를 넣었는지 안 넣었는지 판단하기는 매우 어렵다. 자연의 감칠맛도 화학의 감칠맛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러니 화학조미료 첨가 여부는 질문을 하고 답을 듣는 것이 올바른 일이다. 절대 짐작으로 알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질문을 받은 그들은 대체로 솔직하다. 또 그 대답은 비슷하다. “넣습니다. 넣지 않으면 손님이 맛없다 하니 넣습니다.” 즉답을 피하기도 하는데, 그렇다고 속일 수 없는 일이니 스스로 짐작하라는 뜻의 답변을 하기도 한다. “저는 잘 모릅니다, 주방에서 하는 일이라.”

 

음식점을 다니면서 지금처럼 화학조미료 첨가 여부를 질문한 적이 없었다. 음식점 요리 대부분에 화학조미료가 들어간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간혹 벽면에 “저희는 화학조미료를 쓰지 않습니다”라고 적어놓았어도 그 집 음식이 ‘화학조미료 제로’가 아닐 수 있다. 여러 식재료에 이미 화학조미료가 첨가된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필자가 이름난 음식점에 가서 다소 불쾌한 질문을 굳이 할 수밖에 없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자신의 짐작만 믿고 화학조미료가 안 들었다고 써놓는 일이 너무 흔하게 일어난다.

 

그러나 이런 일 때문에 그 음식점이 나중에 큰 곤란을 겪을 수도 있다. 음식점 종사자 누구도 화학조미료 첨가에 대해 말한 적이 없는데도 화학조미료를 안 넣었다고 기정사실화될 수 있다. 그러나 이후 어떤 식으로든 그 음식점이 화학조미료를 넣는 것이 알려지면 거짓말쟁이가 될 수도 있다. 오랜 명성이 한순간에 무너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필자라도 대놓고 질문해 그 답을 적는 중이다.

 

음식점 주인은 화학조미료를 쓰는지 안 쓰는지 손님에게 고지할 의무가 없다. 음식점은 식품제조업 분야와는 다르다. 그럼에도 소비자는 자신이 먹는 음식에 화학조미료가 들었는지 안 들었는지 궁금할 수 있다. 또 화학조미료 첨가 여부에 따라 그 음식점에 대한 평판을 달리할 수 있다. 만약 그것이 궁금하면 손님은 주인이나 지배인, 요리사 등 그 음식점 요리에 책임을 질 만한 위치의 사람을 불러 물어볼 수 있다. 만약 음식점 요리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글을 남기는 사람이라면 이를 물어보고 그 대답을 그대로 옮기는 것이 그 음식점 사람들에 대한 예의다. 대충 짐작으로 “화학조미료 안 넣은 듯한 맛이다”라고 쓰는 것은 결과적으로 그 음식점을 거짓말쟁이로 만들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