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한국의 山神을 찾아서

醉月 2010. 12. 1. 08:44
山神畵(산신화)는 한국 모든 전통문화의 집결체

불교·유교·도교·샤머니즘과 연결…정체성·행운의 원천으로 존재
20세기 들어 쇠퇴한 산 숭배, 한국서만 전통으로 남아

 

한국인들은 한국의 아름다운 산을 다니면서 산신에 있는 사당들과 탱화를 볼 수 있는 기회를 자주 가진다. 동시에 산을 오르내리는 등산객들은 그들의 종교적 믿음이 무엇이건, 지위가 어떻든 간에 산신에 대해 누구나 친밀함을 느낀다.

그러나 산신이 정말 무엇인지, 한국 문화의 강한 모태나 근간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그냥 보고, 느끼고 지나칠 뿐이다. 한국의 산신에 대해서 체계적으로 정리된 책이나 문헌이 있다고 들어본 적이 없다. 한국인들이 체계적으로 정리하지 않으니 외국 관광객들도 한국의 산신 문화에 대해서 모를 수밖에 없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어떤 사람은 그냥 과거에 유행했던 미신의 일부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조심스럽게 살펴보면 그것보다 훨씬 더 흥미롭고, 기복(祈福)신앙을 가진 보상적인 측면을 발견할 수 있다.


▲ 1 춘천 대령산에 있는 산신 탱화. 2 지리산 화엄사에 있는 아주 우수하고 고풍스러운 산신 탱화. 3 속리산 적련암에 있는 우수하고 고풍스러운 산신 탱화. 4 주왕산에 있는 산신각의 또 다른 표지판. 5 주왕산에 있는 산신각의 표지판.

한국 역사에 있어 2,000년보다 훨씬 전부터 산악지형인 한반도에 살았던 사람들은 각각의 산봉우리나 경사면마다 산신이 있다고 믿고 있었다. 산신이 남자이건 여자이건, 하나이건 그 이상이건, 눈에 보이는 존재로 나타나든지 마음으로만 믿든지, 그것은 상관없었다. 산신은 마을마다 주요한 수호신으로 존재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오랜 동안 국가의 통합기능으로도 작용했다. 고대로부터 한국의 국왕들은 권력의 정당성에 대한 상징으로 거대한 산신단 위에서 성대하게 즉위식을 올렸다. 반면 서민들은 그들 마을에 있는 조그만 산신단에서 좋은 날씨, 풍부한 수확, 건강한 아기, 악운으로부터 보호를 위해 제사를 지냈다.

산신은 마을 수호신으로 존재

산에 대한 숭배사상은 고대로부터 전 세계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학자들에 따르면 산업화되지 않은 사회의 문화에서나 많이 찾아볼 수 있다고 보고했다. 대부분 산 숭배 사상은 20세기 접어들어 급격히 쇠퇴했다. 현대 산업사회의 문명은 과거의 비조직적이고 농업적인 문화와 유일신을 무너뜨렸고, 지역에 기반을 둔 전통적인 종교들도 현대 사회의 보편적인 종교로 대체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어느 사회에서나 점점 더 견고하게 이루어졌다.

그러나 산 숭배에 대한 다양한 전통은 한국사회에서 여전히 아주 많이, 현대적인 삶의  형태의 일부로 남아 있다. 21세기 문화와 정치 사회의 한 형태로서, 새로운 역할로 발전하고 있기까지 한다. 이러한 현상은 고도산업사회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한국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것이다.

산신은 한국의 많은 신들 중에서 으뜸으로 꼽힌다. 아마 한반도가 70% 가까이 산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인지 모른다. 한국의 신화 설립자인 단군도 사후에 산신이 된 걸로 여겨진다. 유교, 불교, 도교 등 한국에 수입된 다양한 종교적 전통을 지닌 인물들은 산신의 중요한 인물로 즉각 떠올랐다. 토속신앙을 가진 인물들도 산신 탱화의 대상이었다.

이와 관련된 인물들은 산신의 중요성을 바로 인식했고, 모든 다른 신들 앞에서 산신을 숭배하는 제사를 먼저 지냈다. 그것은 전통 한국문화에 있어 형상화되는 신의 한 축으로 여겨졌다. 왜냐하면 한국의 토속신앙과 외래 종교가 서로 융화되면서 산신이 서로 다양한 전통과 연결 짓는 중심적인 역할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 2007년 지리산에서 답사하고 있는 메이슨 교수.
지난 20여 년간 산신에 대해서 연구하기 위해 전국의 산 모든 곳을 조사했다. 전국 어디서나 산신을 중요하게 모시는 모습을 발견했다. 산신의 그림과 지위를 연구하면서, 사진을 찍으며, 때로는 존경을 표시하면서 나의 취미활동이자 연구활동은 매우 흥미롭게 진행됐다. 산신의 그림들은 매우 화려한 색깔을 지녔으며, 대단히 생동적으로 표시된다.

지금까지 약 1,500점 이상 되는 사진을 찍고 분석해왔으며, 여전히 한국의 산을 여행하듯 열심히 다니고 있다. 모든 사람은 산신에 대해서 각각 다른 느낌을 가지고 있다. 공통적인 동기를 보여주는 듯하면서도 여전히 제각각 매우 독특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 바로 이것이 내가 산신에 대해서 실제적인 관심을 가지는 것이고, 대단히 흥미로운 연구 초점이 되는 것이다.
 

산신의 아이콘 역할을 하는 그림과 동상들은 한국의 대부분 산에 있는 수천 개 불교의 사찰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으며, 또한 매우 일반적이다. 수세기에 걸쳐 한반도라는 산악지역에 기반을 둔 한국의 산신은 중국에서 수입된 대승불교(Mahayana Buddhism)와 친숙하면서 복잡하고, 광범위한 관계를 맺으며 유지 발전해왔다. 산신은 사찰과 불교의 가르침 그 자체를 수호할 뿐 아니라 스님과 불교신자를 위한 정체성 확립과 힘, 행운의 원천으로서 존재해 왔다.

▲ 1 춘천 삼악산 흥국사에 있는 1970년대 그린 탱화. 산신이 인삼 뿌리를 들고 있어 흥미롭다. 2 영덕의 산 사찰에 있는 현대에 그린 아주 우수한 산신 탱화. 3 백두대간 태백산과 소백산 사이 고치령에 있는 산신각 암자. 4 전라도 내장산 출입구에서. 5 백두대간 상 고치령에 있는 현대의 산신 탱화.

90% 이상의 절에 산신 그림·상 있어

한국 불교 사찰의 90% 이상에 산신의 그림 또는 동상이 세워져 있다. 어떤 곳에서는 두 가지 모두 보존된 곳도 있다. 그것들 대부분 산신각이라 불리는 독립된 공간에 도교를 주제로 한 그림들과 함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그림과 산신각은 한국 산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샤머니즘 신들과 함께 발견된다.

수천 개의 그림들은 모두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똑 같은 그림이 두 개 있는 곳은 어디에도 없다. 산신을 그린 화가들은 그들이 표현하려고 의도한 산의 특징들에 따라서 산신을 의인화하기 위해 영감을 불어넣곤 했다. 그림은 때로는 산신에 대한 꿈과 비전에 대한 결과로서 나타났다. 산신에 대한 그림을 그리려는 화가들이 갖고 있는 종교적 심성과 예술가적인 기질의 특징을 포함해서 나타난 것이다.

많은 사찰의 산신 그림들은 수백 년 이상 된 것들로서, 소중한 문화적 가치를 지닌 유산들이다. 또한 한국의 민속문화를 가장 잘 표현해 내고 있기도 하다. 산신화 중에 많은 부분들이 문화재 절도범들에 의해 도난당하기도 했다. 이 그림들은 암시장에서 수백만 달러에 거래된다. 상당수 산신화는 박물관 등지에 안전하게 보존돼 있다.

이러한 산신화와 동상들은 매우 환상적이다. 그것들은 단군 전설과 같은 한국 국가 정체성과 불교와 유교, 샤머니즘, 도교, 그리고 전통 한방 약초문화와도 복합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 때문에 최상급에 속하는 산신화는 한국의 모든 전통문화를 한꺼번에 보여주는 예술품이 되는 것이다.

산신화는 세계화 시대에 지구촌 곳곳에서 많은 관심과 흥미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산신화는 세계화 과정에서 한국의 독특한 문화적 상징이 된다고 볼 수 있다. 산신과 산신화, 그리고 산신상은 한국인들의 산에 대한 사랑과 산과 관련된 유대성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것들이 내가 한국에 20년 이상 생활해오며, 역동적인 한국 문화 에너지의 뿌리를 찾기 위해 전국의 산을 오르내린 이유다. 산신은 한국인들에게뿐 아니라 나에게도 좋은 친구며, 나의 산행 안내자였다. 내가 산신을 매우 고맙게 생각하는 이유다.

 

결코 사라지지 않고 새 모습으로 탈바꿈하는 산신

남인천 청룡산 호불사에 10년 전 5m 산신 동상 건립
요즘에도 절에서 삼신각·삼성각·칠성각 안치하기도

 

서울 도심에서 한국의 수도 서울을 600여 년 동안 정신적으로 보호해 온 남북의 산, 즉 북악산과 남산을 볼 수 있다. 두 산 모두 가파르면서 높지 않은 특징 있는 봉우리를 지니고 있다. 도심을 감싸고 있으면서 나름대로 음과 양의 보완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동아시아 국가에서와 마찬가지로 한반도에서도 전통적 수도 위치는 풍수지리설에 입각해서 남북으로 혹은 동서로, 도시를 보호하는 듯한 역할을 하며 신성시되는 음양적 모습을 띤 산들이 많다.

 

서울이 국가의 수도가 된 이유는 이러한 음양의 조화가 잘 이루어진 산들 사이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밀집한 빌딩 사이로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중에 이러한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서울을 감싸고 있는 음양의 산들은 풍수지리적으로는 커플이 결혼하는 것으로 인식된다.

 

여성 성향의 산신은 인근 봉우리에 있는 남성 성향의 산신과 결혼하게 되는 것으로 전해진다. 서울의 주요 궁전은 북쪽의 백악산 바로 앞 오른쪽에 자리 잡고 있다. 하얀 바위산이라고 하는데, 오늘날 종종 북악산 북바위산이라고 부른다. 그 꼭대기에 정녀부인을 추앙하는 백악사 사원이 있다.

 

정녀는 알려진 바와 같이 성실하고 정조를 지키는 바람직한 여성상을 의미하며, 부인은 그러한 특징을 가진 아내들을 지칭해서 존경의 의미로 부르는 개념이다. 정녀부인은 매년 지금 남산으로 부르는 남쪽 산인 목멱산에 안치된 남성 산신인 국토신과 영혼결혼한다고 여겨져 왔다. 이들이 합세해서 서울과 조선왕조를 재앙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들이 어떠한 방식이든지 모욕을 당했을 경우 즉시 보호를 철회해 재앙이 찾아왔다.


 

산신 모욕 땐 즉시 재앙으로 보복당해

 

그 구체적 전설이 있다. 1591년 젊은 성리학자 권필이 전통적 민속신앙을 광적이라고 비난했다. 당시는 성리학이 지배 이데올로기였던 조선시대였다. 그는 여성 산신을 모시는 북쪽 사원에 올라가 산신 그림을 헐뜯고 경멸하면서 뜯어버리는 모욕을 가했다. 정녀부인이 그 날 밤 권필의 꿈에 나타났다. 그녀는 분노를 표하면서 권필과 조선이 꼭 벌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 다음해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전 국토가 일본에 의해 유린 점령당하고 초토화됐다. 권필도 한반도 최북단 함경도로 유배 갔다. 그는 유배생활 중에 정녀부인의 꿈을 다시 한번 더 꾸고, 꿈에서 깨는 동안 심장병으로 죽는 비극을 맞았다.

 

현재도 이러한 교훈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을까? 아마 대부분 반신반의할 것이지만, 더욱 더 강력하게 산신숭배가 활성화 되고 있음을 쉽게 찾을 수 있다. 20년 이상 이 땅에서 산신을 조사하고 연구했다. 또 모든 지역을 찾아 헤맸다. 어느 때보다도 더 크고 많은 절에서 더 화려한 산신과 관련된 그림과 사원을 볼 수 있다. 지역 차원에서의 보호가 점점 요구되는 시점이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사회 지도자들과 일부 종교지도자들은 산신을 무시하고 파괴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문화관광부에 있는 정부 관료들조차 신성시되는 한국의 전통을 부정하고 무시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많은 한국인들은 현대화된 사회에서 막연하게 산신 숭배는 이미 사라졌으며, 고대 유물 외에는 어떤 것도 발견할 수 없다고 한다. 과연 그럴까? 해가 갈수록 점점 더 많이 발견되고 있으며, 산신에 대한 숭배는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점점 증가하는 추세다.


▲ 1. 북촌 한옥마을에서 빌딩 숲 사이로 바라 본 남성 수호신으로서의 남산. 2. 강화도 석모도 보문사에서 발견된 현대적 산신 그림. 크고 웅장한 성격을 띠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3. 5년 전 진도에서 발견한 가장 현대적인 모습을 띤 산신 그림. 넓이가 3m나 되며, 네 명의 동자가 산신의 시중을 들고 있다. 배경은 십장생도의 화려한 도색을 바탕으로 색감이 풍부하고 세세하게 그려져 있다. 이러한 그림은 지금은 유명한 큰 절에서 찾아볼 수 있다. 4. 인왕산에서 청와대가 바로 앞에 보이는 강한 여성 수호신 역할을 하는 북악산. 5. 남인천 청량산 호불사에 있는 약 5m 크기의 웅장한 산신 동상. 바로 앞에 77개의 조그만 산신상이 안치돼 있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의 산신 숭배가 현재까지 얼마나 대중적인지를 잘 설명해주고 있다.

 

한국의 아름다운 산을 찾는 사람들은 새로운 산신 그림과 동상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더 크고 상세하게 그려졌고, 세세하게 묘사돼 있다. 예전보다 새로운 주제가 등장하며, 예술적 가치가 높은 난해한 탱화들도 선보인다.

 

또 굉장히 도상화적인 요소와 예술가적 스타일의 다양성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작품들은 예전 골동품에서 발견된 것 보다 훨씬 섬세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띠고 있다. 또 십장생도와 같은 다른 전통 종교까지 확대되는 상징적 요소까지 발견되고 있다.

 

최근 들어서 불상만큼 큰 산신상이 나오고 있다. 한국에서 동상은 약 1,000년쯤 전에 종교가 최고의 가치로 평가받을 때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반대로 산신상은 20세기 전에는 드물었지만 한국전쟁 이후에 샤머니즘 사원과 불교사원의 산신각에서 종종 찾아볼 수 있게 됐다. 최근의 동상들은 좀더 커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과거 10년 동안 한국의 유명한 절에서도 산신각 바로 옆에 대형 동상을 건립하기도 했다.

그 가장 좋은 사례가 지난 10년 전 남인천 청룡산 호불사에 봉안된 5m 짜리 동상이다. 아마 오늘날 한국에서 가장 큰 산신 동상이지 않을까 싶다. 남인천은 산신 사원 발견을 기대할 만한 지역이 아니다. 그럼에도 거대한 동상이 세워졌다는 사실은 산신이 얼마나 대중적인가를 보여주는 증거다.

 

미륵불 같은 상징적 의미로 위상 강화

 

새롭게 만들어지는 현대주의적 산신 작품은 매우 비싸다. 현대주의적이란 용어는 복고풍(retor-folk) 또는 신전통주의적(neo-traditionalist)이라고 부를 수 있다.

많은 작품들이 나오는 것은 현대 한국문화에서 산신숭배가 점점 더 강해지고 중요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산신 그림을 기부하기도 하고, 매매시장이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이러한 점도 산신이 증가할 수밖에 없는 사례로 꼽힌다.

예전에는 산신각이 사찰 뒤쪽 숲으로 둘러싸인 산 사면에 조그맣게 자리 잡고 있었다. 때로는 찾기 힘들 정도로 전통 불교 양식을 보이고 있었다. 요즘엔 절도 점점 더 많이 개건축하고 있다. 그 와중에 3개의 산신을 뜻하는 삼신각과 3명의 성인 산신을 뜻하는 삼성각이 불교 숭배 지역에 들어서서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산신 외에 북두칠성을 뜻하는 칠성각과 외로운 성자를 의미하는 덕성각도 함께 모셔져 있다. 또 어떤 산신각에서는 3개의 제단 중앙에 용왕을 안치하고 있기도 하다.

몇몇 조그만 절에서는 새로운 삼성각을 법당보다 더 크고 웅장하게 만들고 있다. 불상이 안치된 법당 앞에 놓여 있어야 할 석등과 불탑이 새로 건립되는 절에서는 삼성각 앞에 설치되기도 한다. 이러한 사실도 산신의 높아진 위상과 이를 모시는 민속신앙이 늘고 있는 현상을 설명한다.


▲ 1. 경주 토함산 기림사 북암에 있는 도교적 형태를 유지하며 화려하고 복잡한 산신형태를 띤 두 가지 현대적 특징을 띤 산신. 2. 춘천시 삼악산 대원사에 있는 불탑과 석등 형식을 가지며 산신의 특징을 띤 삼성각. 3. 전주 천호산에서 발견한 독특한 형태의 산신. 이 산신은 용과 호랑이가 싸우는 동안 중재자의 자리를 묵묵히 지키고 있다. 4. 청주 우암산 용호사의 미륵불 산신상. 산신과 미래의 불상이라는 혼합된 이미지로 나타나고 있다.
 
 

산신의 위상이 불상이나 지위가 더 높은 신적인 존재의 특징과 혼용되는 경우가 있다. 그것도 한국 문화에 있어 산신의 중요성이나 탁월한 능력에 대한 믿음으로 표출되고 있는 현상이다. 충북 청주에 있는 우암산 용호사의 미륵불 산신 동상이 대표적인 경우에 해당한다.

 

산신에게 미륵불과 같은 종교적 지위가 부여되고, 인간의 미래를 구원해줄 신적인 존재로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상징적 의미는 더욱 강화되고 있으며, 그들의 지위도 더 확대되고 있다.

 

산신각 건립에 드는 돈과 에너지를 포함해서 위에서 설명한 모든 현상이 산신이 한국에서 죽어가는 종교의 모습이거나 사라져가는 문화적 현상이 아니라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실제로도 아주 확산되고 있다. 한국을 방문하는 외국인들에게는 한국의 특이한 문화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도시화된 한국은 끊임없이 고도의 문명화된 모습으로 발전하고 있다. 그러나 산신 숭배와 산신 존경에 대한 전통은 결코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지방을 여행하거나 산에 오르는 누구나 산신에 대한 전통적인 것과 새롭게 변모된 모습을 동시에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노고단·계룡산·마이산서도 매년 열어

과거 10년 동안 태백산·오대산·치악산 등서 수차례 지켜봐
군수와 관리들 참여해 의식 주관하기도…통합에 긍정 효과

 

한국의 산신에 대한 전통이 영속적인 고대 문화의 핵심이었고, 결코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강력하게 존속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난 달에 이미 살펴봤다. 새롭게 만들어지는 산신 탱화와 동상들은 더욱 더 커지고, 상세하면서 복잡해지며, 더 화려해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등산객들에게는 더 많은 지역에서 발견할 수 있으며, 더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됐다.

산신숭배에 관한 공식적 인정과 지원은 정부 차원에서보다는 대부분 지방자치단체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한국 문화와 관광을 촉진하기 위해 책임을 진 정부 관리들과 공립공원과 휴양림과 같은 산악지역을 관리하는 기관조차도 산신을 모시는 봉우리의 신성한 고대전통을 무시하거나 부정하고 있다. 그러나 일부 변화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 주요 대도시에서 훨씬 떨어진 지역에서 특별히 그런 모습을 나타낸다.

▲ 1. 노고단의 두 번째 정상에 있는 현대적 돌탑. 고대 제사를 지내던 돌탑 제단이 있는 곳은 제한한 반면 이곳은 등산객들에게 개방돼 있다. 2. 2004년 구례 남악제. 전통 무용복을 입고 산신제를 알리는 춤을 추고 있다. 3. 2004년 지리산 남악제에 참여한 관리와 군중. 4. 민족 번영과 통합을 기원하면서 남악제에서 참석자들과 일부 군중까지 제사를 올리고 있다. 5. 지리산 남악제를 지내면서 다양한 형태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웃간 통합과 지역공동체 자긍심 강화 등을 기원한다. 6. 천은사 대웅전 뒤쪽에 있는 고대 자연석에 한자로 산왕대신이라고 새겨져 있다.

 

민족 정체성 확립을 위한 산신축제와 악운을 막고 부와 통일을 기원하는 산신축제는 불과 과거 몇 년에 걸쳐 개최되기 시작했다. 이는 한국의 유명한 산자락에 있는 소도시나 마을에서 지역문화의 중요한 상징이 됐으며, 지역주민의 역사적 정체성과 통합에 영향을 미쳤다.

과거 10년 동안 새로운 형태의 주요한 산신축제가 열리는 장면을 직접 목격했다. 충남의 계룡산, 서울의 삼각산, 대구의 팔공산, 전남의 무등산, 전북의 마이산, 태백산, 강원도의 오대산과 치악산, 그리고 지리산의 동서 양쪽에서 대규모의 산신제가 많은 사람이 모인 가운데 열렸다.

시장을 비롯해 군수와 지방 관리 등이 산신축제에 참여해서 의식을 직접 집전하기도 했다. 그들은 지역 공동체의 통합과 주민들에게 자긍심을 불어넣는 주요한 수단으로 참여했고, 그 가치는 매우 크다고 강조했다. 또한 지역관광산업을 육성시키고, 독특한 지방문화와 지역 전통을 재창조하거나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중요시되고 있다.

기복과 통일기원 산신축제 활발히 열려

지역의 산신제는 고대로부터 내려온 전통 관습에 따라 열렸지만 형식은 상당히 현대화된 모습을 띠고 있다. 산신제 의식 스타일은 유교와 불교, 샤머니즘 요소까지 다 포함하고 있다. 종교적 갈등이나 마찰도 없이 복장을 갖추고 연속적으로 교대해 가면서 열린다.

산신숭배에 대한 지방자치단체 차원에서의 공개적 승인과 지원은 사실상 현대 한국사회에서 혁명적인 것이다. 샤머니즘적 문화의 대중적 표출에 상당히 반대하는 입장을 견지해온 관리들이 지배적인 한국의 관료주의에서는 더욱 그렇다. 지역 공동체의 권한 상승과 그 지역에서 신성시되는 산을 가지고 있다는 자부심의 증가는 한국 관료 성향을 계속 더 변화시킬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현대적 현상은 지리산의 다양한 지역에서 볼 수 있듯이 고대로부터 그 뿌리를 가지고 있다. 최소한 5세기 삼국시대 이래로, 지리산은 한반도 남쪽지역에 신성시되는 많은 봉우리와 경사지를 가지고 있다. 신라왕은 지리산을 외부에 있는 오악 중 하나로 간주하거나, 왕국을 보호하는 다섯 개의 산으로 삼았다. 그래서 산신을 모시는 최초의 사원을 건립했다. 그들은 지리산에서 국가의 번영과 국민의 안위를 위해 다양한 지역에서 많은 의식을 열었다. 심지어 악천후에도 불구하고 가장 높은 봉우리에서 열기도 했다. 

고려 시대에도 유교, 도교, 불교 등이 혼합돼서 행운과 보호를 간청하는 의식이 왕실 지원 하에 개최됐다. 노고단 정상에서 산신제가 처음으로 열렸다. 이후에는 조금 아래로 내려와 지속됐다. 노고단은 지리산에서 세 번째로 높은 봉우리며, 거대한 지리산의 서쪽 끝에 자리 잡고 있다. 노고단의 이름은 강력한 힘을 가질 수 있다고 믿는 샤머니즘의 대모격인 할머니를 상징하는 데서 유래됐다. 그것은 현명한 늙은 여자를 위한 제단이었다.

오늘날까지 여전히 고대 의식을 지내는 노고단 제단자리에 거대한 돌탑이 있다.  그 돌탑이 선 자리에는 나무가 없는 벌거벗은 봉우리다. 많은 등산객들이 이 곳에서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하며 사진을 찍던 곳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실제 노고단 정상은 국립공원 관리공단의 생태보존 프로젝트에 의해 거의 15년간 펜스로 막아 접근을 통제해왔다. 등산객들은 노고단의 두 번째 정상으로 이어진 탐방로를 따라 올라갔다. 그곳에는 많은 돌탑들이 쌓여 있고, 등산객들은 그 옆에서 사진을 찍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매년 이곳을 방문하고 있으며, 여전히 신성한 장소로 여기고 있다.

조선왕조는 정책적으로 왕실의 보호 하에 유교 형식으로 연 2회 산신제를 지내는 신성한 3개 산을 정했다. 북쪽의 묘향산, 중부의 계룡산, 남쪽의 지리산 등 세 봉우리가 그곳이다. 농지와 농부들의 노동력으로 사당을 유지 보수시키고, 최소 1년에 두 차례 거대한 제사를 지냈다.

 

조선 땐 묘향·계룡·지리산서 연2회 산신제 지내

서쪽 정상에 있는 고려시대 사원을 대체하기 위해 대규모 사원을 노고단 서쪽에 건립했다. 갈뫼봉, 지금의 고리봉 아래 산동면 좌사리에 있는 당동 사원마을에 지은 것이다. 1737년에 남원 고을 원님은 서민들이 접근하기 쉽게 화엄사 정문 인근으로 다시 옮겼다. 그것은 남악단, 즉 남쪽 봉우리의 제단(South Peak Altar)이란 이름으로 붙여졌다. 지금은 낮은 봉우리의 제단으로 알려져 있는 하악단이다.

계룡산 신원사에 있는 산신단과 같이 왕궁 건축물 형식으로 지은 드물게 큰 산신사원이다. 그곳에서 열리는 공식적 제례의식은 지리산 남악제(Southern Peak Ceremony)라고 부른다.

▲ 1. 2000년 현대적 형태로 새롭게 지은 천은사 삼성각의 뛰어난 산신화. 머리 주위에 강력하고 흰 후광이 그려져 있으며, 갈고리 모양의 나무지팡이를 가진 것이 특징이다. 전형적인 유럽스타일 지도자 같이 보인다. 2 2. 가파른 경사면에 있는 상선암. 스님들이 수련하기에 좋은 장소다. 3 세 그루의 노송이 자라는 상선암 뒤 암벽. 이곳은 절에서 자연 산신제를 지내는 장소이기도 하다. 4 상선암은 노고단 아래 해발 800m 정도에 위치해 있다. 풍수지리적으로 강력한 에너지를 가진 혈이 있는 곳으로 여겨진다. 5 절벽 위에서 내려다본 상선암. 이것을 촬영하기 위해 큰 모험을 겪어야 했다. 6 상선암 주지와 친구와 함께 지리산 녹차를 마시며.

 

당동에 있던 대규모 사원과 애초의 사원 유물은 20세기 초 일제의 한민족 정신 말살이라는 식민정책에 의해 완전 철거되었다. 남악단에는 18세기 조선왕조 사원의 크고 오래된 모습을 여전히 찾아볼 있지만 역사성은 사라지고 없다. 계단은 시멘트로 수리되어 있고, 더 이상 아무 흔적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한국전의 비극적 폐허 이후 지리산 산신제 개최는 서서히 다시 복원되고 있다. 사진에서 볼 수 있는 남악사의 조그만 산신 건물은 1964년 구례 주민의 협력으로 지었다. 유교 스타일로 고대 왕의 후원으로 열렸던 남악제가 현대적으로 재생한 것이다.

이 제사는 1년에 한 번씩, 음력 세 번째 보름 기간 중이거나 직후인 24절기의 하나인
곡우에 열린다. 곡우는 지리산에서 녹차를 수확하는 시기와 관련된 중요한 날이다. 그 날 전에 수확하는 찻잎은 우전차로 불리는 가장 좋은 품질의 차로 여겨진다. 반면 그 날 이후 따는 찻잎은 세작차로 불리며, 조금 품질이 떨어진다. 지금 남악제는 약수제(Celebration of Medicinal Water)라 불리는 구례 축제와 함께 열린다.

매년 산신제를 지내는 관습과 축제는 점점 더 세련되어져 왔고, 더 많은 사람들이 참석해왔다. 지난 15년 동안 이 의식을 보기 위해 노력했지만 제대로 시간과 날짜를 맞춘 적은 한번도 없다. 하지만 새로이 만들어진 고속도로로 인해 접근하기는 더욱 쉬워지고 빨라졌다. 마침내 2004년과 2006년 그것을 제대로 관찰하고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거의 2시간 정도 걸리는 제사였고, 장엄하면서 심오한 듯, 아름답기까지 한 그런 의식이었다. 그 지역에서 농부들의 사물놀이를 곁들인 춤 행사가 먼저 진행된 뒤 오전 중에 시작됐다. 모든 사람이 유교 전통 복장을 갖춰 입고, 전문 풍악대에 의해 공식적으로 열렸음은 물론이다. 구례 군수와 다른 지방 관리들도 관심을 가지고 참석했다. 화엄사 주지와 천은사 승려들도 VIP로서 자리를 같이 했지만 공식 행사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관객 중  많은 이들이 등산복을 입고 있었으며, 의식이 끝나자 등산하러 떠났다. 모든 공식 참가자들이 절을 하고 끝나는 모습을 보여, 이 의식이 지역주민에게 그들의 전통문화와 가치 면에 있어서 굉장히 큰 자부심을 보여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왕의 후원을 받은 옛날 산신제의 현대적 형태로의 부활과는 대조적으로 남서쪽의 지리산은 가장 오래된 한국의 산신숭배 전통이 남아있는 곳이다. 산신에 대한 동상과 그림은 실질적으로 1700년대 후반부터 나오기 시작했다. 그 이전에는 자연석이 산신각 역할을 해왔다.

샘이 숨겨진 절(Hidden Spring Temple)이란 뜻의 천은사 대웅전 뒤쪽에 한국 고대 전통을 대표하는 굉장히 흥미로운 산신각이 하나 있다. 천은사는 828년에 세워졌다. 오랜 기간동안 산신을 나타내는 아이콘이 천은사 벽 뒤쪽에 있는 자연석의 형태로 전해왔다. 조각된 한자로 ‘山王大臣之碑(산왕대신지비)’ 라고 적혀있다. 이 지역에 2개의 다른 원시적인 형태의 산신을 나타내는 아이콘이 있는데, 전국적으로 그리 흔한 예는 아니다.

2001년 그곳을 방문했을 때 새로운 현대적 형태의 삼성각(3명의 성자를 모신 사원)이 세워져 있었다. 아주 뛰어난 현대적 산신화가 지금 그곳에 전시돼 있다. 동시에 이전의 원시적 형태의 산신각도 공존하고 있다.

구례 남악제가 대표적 현대 산신제

많은 광관객들이 좋아하는 드라이브 코스인 노고단 도로로 조금 내려가면 삼일암이란 암자를 발견할 수 있다. 삼일암은 아마 1919년 독립운동일인 3월1일을 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종교적으로는 성부, 성자, 성령을 뜻하는 삼위가 하나로 되는 삼위일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삼일암에는 천은사의 오래된 바위와 비슷한 산왕대신이라 새겨진 자연석이 세워져 있다. 어느 누구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아주 오래된 것만은 분명하다.

조금 더 올라가면 지도에 표시되어 있지 않은 가파르고 위험한 길이 나온다.  20분 정도 가파른 돌길로 올라가면 전설적으로 전해지는 상선암이 있다. 거의 사람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다. 산과 절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만 알려진 유명한 곳이다. 그 이유는 이곳의 우아하면서도 단순한 모양과 풍수지리설에 따르면 기하학적으로 에너지가 모인 곳인 혈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 절의 원래 이름이 상선암이었다. 상선은 원래 도교에서 장수와 깨달음의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선은 20세기에 명상을 의미하는 선(禪)으로 변했으며, 더한층 불교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상선암은 매우 가파르고 경사진 곳으로 둘러싸여 있는 매우 조그만 건물이다. 방문하기도 매우 까다롭다. 해발 800m 정도 되는 지역이라 겨울엔 매우 황량하고 춥다. 다른 계절에는 지낼 만하다. 3명의 스님이 상주하며 수련하고 있다.

이처럼 깊은 산골의 멋진 절이 화려한 산신화와 동상이 있을 법하지만 실제로 인공적으로 만든 어떠한 산신 형상도 없다. 세 그루의 노송이 자라고 있는 암봉 끝에 있으며, 마치 3개의 조그만 건물 같아 그 자체가 일종의 산신각이다. 스님들과 차를 마시며 대화하던 중 주지 스님 설명이 암벽을 향해 직접 제사를 지내며, 이곳 전 지역이 일종의 천연 산신각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한국인들의 가장 오래되고 자연적인 형태의 산신숭배의 대표적 형태다.

 

고대 한국은 할매산신이 주도

여산신이 대부분…수락·계룡·지리산 동쪽에 보여
조선조 이후 유교 영향으로 남산신이 전체의 97%

 

가장 영험하기로 소문난 지리산 산신에 관한 고찰에 이어 이번 호에서는 산봉우리에 존재한다는 여자 산신령에 주목해 보고자 한다. 산신령의 성별(性別)에 대한 쟁점은 단순하게 설명되기 어려운 부분이어서 20여 년간 계속되어온 나의 연구에도 불구하고 아직 그 의문점은 풀리지 않았다.

▲ 현대적인 산신탱화에서 불멸의 여산신으로서 천왕봉을 묘사하고 있다. 한국에서 신성한 색깔인 흰 색의 엄청난 호랑이가 그녀를 호위하고, 양쪽 끝에는 원래의 호랑이가 지키고 있다. 그녀 뒤에는 팔도의 산을 대표하는 8명의 산신이 있는 것과 같은 형상을 띠고 있다. 그들은 각각 인삼이나 다른 신성한 상징을 들고 있다.

지리산은 둥그렇게 둘러싸인 형세의 영향으로 지기(地氣)의 음(陰)에 해당하는 산이라 여겨지고 있다. 이와는 반대로 설악산은 바위가 많아 험준하고 굳센 형상을 띤 양(陽)의 산이다.

그러나 산의 형세가 산신의 성별을 구분 짓는 건 아니다. 계룡산의 경우만 보더라도, 다른 많은 산들처럼 날카로우면서 굳센 형세를 지녔음에도 여신이 깃들여 있다고 본다. 대부분의 산신이 고대로부터 여신이었고, 소수의 몇몇 산신만이 남자라는 것에 대해 많은 학자들이 동의하고 있는 듯하다.

▲ 성스러운 어머니 상을 나타내는 천황사 산신 탱화. 남성 특징을 보여주고 있으며, 남녀 산신이 각각 한 마리씩의 호랑이를 타고 있지만 절대적인 역할은 나타내지 않고 있다. 이 탱화를 그린 화가는 불교와 샤머니즘의 혼합된 형태로 특징을 나타내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는 남편으로서 천황산신과 부인으로서 성모산신을 보여주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여산신(女山神)은 산각시, 산마수라, 산신할머니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 300여 년간 만들어진 산신의 회화, 입상, 조각 등을 보면, 고령(高齡)의 남자로 묘사되어 있다. 사원이나 박물관에 소장 전시된 작품 중 97%가 할아버지 이미지를 풍기는 남자로 묘사되어 있다. 이는 조선 500년을 지배한 유교와 권위주의 문화의 영향인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수집해온 1,500장의 사진 중 여신이거나 남자와 여자가 같이 있는 것은 50점도 채 안 되는 3%일 뿐이다. 이들은 3개 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서울 수락산, 대전 계룡산, 지리산 천왕봉 산자락이 바로 그곳이다.

▲ 내대천 중앙 부근 조그만 샤머니즘 암자인 청천암의 산신그림은 상대적으로 젊은 여산신을 보여주고 있다.

주민들에게 산신은 마치 수호신과 같은 존재로 여긴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산신을 여자로 간주해 매년 열리는 제사 의식에 앞서 일정기간 아내와 잠을 자지 않고 산신을 위해 밥을 짓는 선발된 남자가 모시는 것이 관례였다. 이것은 한국 샤머니즘의 성(性)의 상호보완성에 관한 통념이나 고대의 가부장적 문화에 대한 반향일지도 모른다. 영국 교수 제임스 그레이슨(James Grayson)은 한국 산신에 대해서 여산신이 명백하다고 주장했다.

한국의 김회우 교수는 산신에 관해 몇 가지 특징을 개념화하려고 했다. 대부분의 남자 산신은 실제 존재하던 사람이 사후에 특별한 이유나 득도에 의해 산신이 된 경우라는 것이다. 반면에 여산신은 대부분이 본래 산신이었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다시 한번 제시된 옛날 이야기는 내가 그동안 연구한 이론에 적용해 보면 사실과 다름을 알 수 있다.

 

음양 기운으로 한반도 영적 에너지 제공

여산신 이론에 대한 다른 이론은 계룡산 신원사의 묘봉 스님(조계종)이 제기한 것이다. 백두산에서 칠봉산, 금강산, 설악산, 오대산, 태백산, 주왕산, 단석산, 그리고 가지산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동쪽 가장자리를 따라 뻗어내린 백두대간의 장엄하고 아름다운 산들엔 남성산신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반면 묘향산, 송악산, 삼각산, 수락산, 치악산, 계룡산, 속리산, 모악산, 지리산 등과 같이 한반도 중앙과 서쪽에 위치한 산들엔 여산신이 살고 있다는 것이다.

▲ 지난 2월 아침 남쪽에서 바라본 지리산 천왕봉. 1,915m로 남한에서 가장 높으며, 리더격 여성의 한 형태로서 여산신화 된 과정으로 보고 있다.(왼쪽) / 몇 십 년 전에 잃어버렸던 지리산 성모할매 산신의 고대 원래 동상이 지금은 법계사 입구 근처 천왕사에 안전하게 모셔져 있다.(오른쪽)

이 산들을 사이에 두고 지기(地氣)의 양극인 음양이 존재한다. 이는 한반도 전체를 조화롭고 더 발전하도록 기운을 북돋아 준다. 음양의 상호작용으로, 남산신과 여산신은 한반도의 영적이면서도 역동적인 모태가 되고 있다. 묘봉 스님의 이론은 세련되고,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도 있다. 하지만 반론의 예들도 역시 제기되고 있다. 산을 예찬하는 이들의 이론과 주장들이 얼마나 다양하고 폭넓게 퍼져 있는가를 가늠하기 힘들 정도다.

적어도 지금까지 연구답사를 통해, 그리고 예술작품을 통해 다양하고 난해하게 묘사된 산신을 살펴봄으로써 특정 산에 존재하는 산신의 성별이 무엇인지 정의해 보았다. 지형학적인 특성에 따라, 풍수지리 전문가들에 의해, 혹은 무당이나 예술가를 통해, 시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형상에 의해 산신의 성별을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연구에 있어 모든 요인들은 시간에 따라 변화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총체적인 의미로서 산신과 일반적인 수호신으로서 산신의 역할은 남자와 여자, 혹은 둘 다이거나 둘 다 아닌 무엇으로 구분 짓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산신을 신뢰하고 섬기는 한국인들에게 산신의 역할은 중요한 모순적 문제가 아니다. 아마도 자연신은 초월적이고 고정된 성 역할 이상이며, 언제든지 그 의지를 보여줄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 내대천 계곡 북쪽의 길상암 산신그림은 표준적인 불교 산신 모습을 띠고 있다. 이 산신은 마나님 같은 위엄을 보여준다. 불로초를 들고 있고, 동자와 화난 호랑이의 모습은 전형적인 한국의 산신 그림이다.

남한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이며, 백두대간의 남단 종착지인 지리산 천왕봉(1,915m)의 산신령은 가장 중요하고도 영향력 있는 여산신이라 할 수 있다. 이 여산신의 이름은 지리산 천왕봉 성모할매 산신이고, 한국의 몇 안 되는 전통 수호신으로 손꼽힌다.

어떤 이들은 큰 봉우리를 한 명의 여산신으로 여기지만, 다른 학자들은 한 쌍, 즉 두 명의 산신이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천왕은 남편, 성모할매는 그의 아내라고 하는 식이다. 어떤 절에는 한 쌍의 남녀산신의 탱화와 입상이 특색을 이루고 있다. 이것은 남녀 한 쌍으로 이뤄진 지신을 조상대대로 믿고 있는 고대 중국의 도교 전통을 따른 것으로 볼 수 있다.

산신령을 숭배하는 사람들은 지리산 동쪽에 위치한 천왕봉과 서쪽에 위치한 노고단이 가장 영험한 여산신이 존재한다고 믿는 것 같다. 반면 세 번째로 높은 봉우리이면서 중앙 가까이 있는 반야봉은 남산신으로 여긴다. 이러한 여-남-여의 산신구조는 음-양-음의 조화를 이룬다. 이러한 음양 조화의 개념은 몇 가지로 확대해 적용됐다. 북쪽에 있는 삼정봉은 여산신, 남쪽 봉우리인 삼신봉에는 남삼신을 가지고 있다.

 

지리산 천왕봉은 가장 영향력 있는 女산신

지리산 천왕봉의 산신은 신라시대 초기부터 오늘날까지 평민부터 양반, 그리고 왕에게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로부터 존경괴 숭배의 대상이 되어왔다. 또한 산신에게 여덟 명의 딸이 있었다. 이들이 한반도 팔도의 최초 산신이 되었고, 한반도 전체 토착문화를 발전시키는 데 일조하고 있다. 이러한 모티프는 하늘의 왕인 옥황상제나 물의 제왕인 용왕과 땅의 신인 도교 수호신과 공유되고 있다.

▲ 지리산 천황봉 성모할매 산신 그림이 한국에서 여산신 아이콘으로 가장 유명한 쌍계사 삼신각에 안치돼 있다. 비록 왕관이나 금관은 쓰고 있지 않지만 아주 당당한 모습이며, 시중들이 제왕의 상징으로 모시고 있다.

아주 오래 전 천왕봉에 사당이 지어졌을 때 작은 성모할매 산신의 화강암 좌상이 세워졌다. 1m도 채 안 되는 높이에 얼굴이 넓적하며, 다리를 포개고, 한국식으로 마치 기도할 때나 존경을 표시할 때처럼 가슴 앞에 두 손을 모은 모습이었다. 연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외관으로 보면 1천 년은 더 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 사당은 약 90년 전 일제에 의해 훼손된 것으로 전해진다. 좌상은 완전히 부서져  황량한 계곡 사이로 굴러 떨어졌다. 천왕봉 남쪽 끝부분에 자리한 천왕사의 애버트 스님에 따르면, 1970년대에 나쁜 인간들에 의해 일제가 박살한 좌상을 계곡으로 버렸다고 전했다. 애버트 스님은 좌상의 잔해물을 찾기 위해 험난하고 빽빽한 숲으로 뒤덮인 협곡을 수차례 뒤졌고, 10년 이상 시간이 걸려 마침내 1987년에 복구했다.

▲ 아주 우수한 고대 산신 그림이 항상 여산신의 모습만 띠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면서 쌍계사 성보박물관에 전시된 산신 그림이다. 단군 시조의 모습과 도교적 상징인 구름 모자와 대머리에 어깨 위에 새를 앉혀 여러 가지 흥미로운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는 좌상의 보안을 위해 사찰 안에 큰 바위들로 보호하고 있으며, 그 앞에 기도드리는 장소를 마련했다. 경남도에서는 조사를 통해 이 복구된 좌상이 진품임을 확인했고, 도민속문화재 제14호로 지정한 뒤 ‘지리산 성모’라 명명했다.

고대로부터 민속신앙은 천국과 지상의 통신수단으로 여겨졌다. 여산신에 대해 참고할 역사적 자료는 많다. 예를 들어 15세기에 한국의 지리를 조사한 동국여지승람과 20세기 초반에 쓴 불교역사, 15세기 후반 조선 시문학의 대가인 서거정의 시 전집 등이 그것이다.

2000년에 산청군청에서 지리산 천왕봉 성모할매 산신 조각상을 마련했고, 이것을 법계사 식당과 주요 주차장에 모셔 놨다. 시민들은 그들의 복을 얻기 위해 기도했고, 평화와 번창, 조국의 통일을 기원했다. 2001년 5월에 산신예배를 처음으로 열었을 때 이것들을 봤다. 아주 큰 비석이 동상 옆에 있었다. 여기에 조선일보 이규태 고문이 ‘여산신에 대한 동상’이란 제목으로 ‘삼국시대부터 우리 조상들은 지리산 여산신을 만들고 모셨다‘는 매우 흥미로운 내용의 비문을 새겼다.

▲ (1)2000년 산청군에 의해 새롭게 안치된 지리산 성모할매 산신상. 월간山에 소개됨으로서 아주 중요해질 것이다. /(2)지리산 내대천 동쪽 석천사 깊은 대나무숲에 샤머니즘 산신이 모셔져 있다. 작고 단순한 건물이지만 종종 놀라운 산신 작품들이 발견된다. /(3)긴 내대천 계곡 정상 부근에 산신 기도도량인 지림골 산신할매당이 있다.

또 다음과 같은 내용도 포함돼 있다. ‘한국 샤머니즘의 전설은 이 성모가 한국 전통 민속의 조상이라고 말한다. 그녀는 여덟 명의 딸들에게 군사기술을 가르쳤고, 그녀들을 8개 지방에 보냈다. 또한 모든 이들의 평안을 위해 기도하는 성스러운 이미지를 가지고 있기도 한다. 한일합병 동안 이 성모상은 일본의 여신들을 물리치는 역할을 감당했다. 천왕사는 경상남도 민속문화재 14호로 지정되어있다. 2006년 8월6일에 기존의 그것보다 더 큰 동상을 만들어 국가의 번영과 안녕을 기원하고 있다.’

우리는 한국의 크고 웅장한 산봉우리를 국가의 선조 어머니라고 여기는 것을 볼 수 있다. 단군 왕검의 어머니라 여기기도 한다. 나와 같이 등산을 즐기는 많은 사람들이 한반도 통일을 기원하는 한 방법으로 여산신을 존경하는 마음을 가졌을 거라고 생각해본다.

 

가장 신성시하는 태백산 토착 샤머니즘서도 최고

오랫동안 불교·유교 이념 띤 지배권력에 억압받아

 

한국에서 신성시 되고 있는 산 정상 봉우리들은 다른 전통적 종교에서도 성지로 간주되는 경향이 있다. 가장 좋은 예가 지리산이다. 이는 지난 3월과 4월호 원고에서 이미 자세히 설명했다. 충남 계룡산과 서울 삼각산 역시 좋은 사례다. 하지만 한국에서 신성시 되는 몇몇 산은 한국의 전통적인 종교, 특히 토착 샤머니즘이나 한반도에 전래된 지 1636년의 역사를 가진 불교 등에 의해서도 그 신성함이 존중받고 있다. 

태백산이 그 대표적인 경우다. 태백산은 역사가 기록된 이래 가장 신성시되는 산 중의 하나로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이곳에서의 종교적 행위는 민족 지향적인 샤머니즘 활동들에 기반을 둔 것이 대부분이다. 불교 사찰들과 유교 성지도 다른 산에서보다 상대적으로 적다.  이렇게 유명한 산에 주요 사찰은 없고, 있다 하더라도 작은 절뿐이다. 아주 중요한 두 사찰은 멀리 떨어진 지역에 자리하고 있다.

▲ 지난 93년 10월3일 개천절에 천제단에서 성대한 천제의식을 행하고 있다.

한국 사람에게 흰 색은 신성한 빛의 색으로 여겨왔다.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빛줄기가 구름 사이로 비추며 생명의 비를 뿌리게 해주는 것과 같은 개념이다. 고대 사람들이 하늘에 기도를 올리던 산을 ‘백판’ 이나, ‘백산’이라 불렀다. 밝은(하얀) 산이라는 의미다. 그리고 가장 크고 밝은 산을 태백산(太白山)이라 불렀다. 이런 특정한 지역을 애초에는 ‘한배달’ 또는 ‘행박모에’라 불렀다고 한다. ‘밝음이 넘치는(excessive brightness)’이란 의미를 담고 있다. 태백산의 이름과 특징은 신라 초기부터 신성시 되어왔다.

오랜 세월 동안 한국의 토착 샤머니즘 문화는 불교나 유교를 국가의 지배이념으로 이용한 권력에 의해 억압받아왔다. 그래서 태백산은 별로 소개되지 않았고, 등산 애호가들에게도 인지도가 높지 않았다. 그러나 샤머니즘과 산신 문화의 대중 ‘커밍아웃’과 공식적, 법적 인정을 통해 대중적 관심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장엄한 태백산은 현대에 들어서야 한국의 가장 중요한 산의 위상을 되찾았다.

▲ 무쇠봉 근처에서 아주 오래됐지만 여전히 녹색을 띠며 건강하게 자라고 있는 주목 옆에서 메이슨 교수와 학생들이 함께 했다.
오늘날 태백산은 강원도 남쪽 경계선까지 중간 정도만 도립공원으로 지정돼 있다. 1989년에 지정된 면적은 전체의 3분의 1밖에 안된다. 경상북도로 뻗어있는 산림지역은 내버려두었다. 지정된 지역은 원시종교, 문화유산을 포함하고 있으며, 대부분 31번 국도를 따라 북쪽으로부터 내려오는 계곡과 산등성이에 자리 잡고 있다. 산의 서쪽 부분에 자리한 긴 협곡에는 한국의 군기지가 주둔하고 있어 여전히 대중 접근이 차단되고 있다.

이번 호에서 태백산에 관해 언급하고자 하는 지역은 태백시와 정선군 고한읍, 영월의 동쪽, 삼척의 북쪽, 봉화군의 북쪽 절반 가량이다. 이 지역은 태백산의 신성한 평판 아래 있는 대략 1,600㎢에 이르는 지역이다.

 

역사·민족 문화의 명소로 자리 잡아

태백산은 도립공원 경계선 안쪽으로 해발 1,500m에 달하는 네 개의 중심 봉우리를 가지고 있다. 이들은 특정한 신화와 성지, 사원과 관련돼 있으며, 각각의 종교적 특징과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해발 900m 주변까지 더 넓게 보자면 20여 개 다른 봉우리를 더 포함하고 있다. 태백산 정상인 장군봉(1,566.7m)은 한국에서 일곱 번째로 높은 산이다. 1,500m에 있는 망경사라 불리는 절이 남한에서 가장 높이 있는 사찰이다.
산등성이와 산봉우리 주변에 20세기 이전에 발견된 작지만 전통적 가치가 있는 불교 사찰이 두 채 있고, 열두 곳에 암자와 샤머니즘적이면서도 한국 토속문화가 배어 있는 역사적인 민속 문화의 명소가 자리하고 있다. 매우 깨끗하고 질 좋은 1급수 샘물이 열 개의 골짜기와 협곡으로 흘러내리며, 가장 잘 알려진 당골 샘물은 낙동강의 수원(水源)이 된다.

▲ 망경사 삼성각에 단군 왕검과 태백산신을 차례로 모지고 있다. 흰 의복과 두가지 다른 종류의 나뭇잎을 가진 단군왕검과 길고 특징적인 흰 수염을 가진 산신은 아주 표준적인 형태를 띠고 있다.

전 세계 어디서나 큰 강의 분수령은 그 주위 산을 신성하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요소 중에 하나로 꼽힌다. 태백산은 두 큰 강의 수원지다. 한국에서 두번째로 길며, 강원, 충북, 경기, 서울 일대에 매우 중요한 물 공급원인 남한강은 태백산의 북쪽에 있는 함백산의 검봉 북쪽 사면에 있는 검룡소(Golden Dragon Source)에 원천을 두고 있다.
남한에서 가장 길며, 경상도 일대의 중요한 상수원 역할을 하는 낙동강도 태백산으로부터 시작된다. 이 물줄기를 두고 두 개의 신성한 불교 사찰이 있는데, 하나는 용지(Dragon Pond·용의 샘)와 관련된 청원사이고, 다른 하나는 앞서 언급했던, 용정(Dragon Well·용의 우물)과 관계있는 망경사다. 한국의 가장 큰 강 두 물의 원천이라는 측면으로 봤을 때 다른 산 하나를 더 말하자면, 가장 영험하고 신성한 백두산이라 하겠다. 백두산은 북한과 중국 사이에 자리하고 있으며, 한국의 문명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태백산은 광활하고 다양한 문화와 역사를 담고 있는 대한민국의 보배이지만, 이에 대해서 자세히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어떠한 범주나 영역에서 보더라도 태백산은 최고의 산이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명산 중에도 단연 손꼽힌다. 어떤 이들은 영산 혹은 신성한 산, 신령산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한국 사람들에게 가장 신성한 산 서너 곳을 꼽아 보라면 태백산은 항상 그 중 하나로 꼽힌다. 한국의 유명한 웹사이트에서 ‘한국의 4대 영산(靈山)’을 찾으면 지리산, 한라산, 백두산과 함께 올라있다. 국립공원관리공단 사이트에도 ‘한국의 3대 신령한 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태백시의 웹사이트에도 ‘민족의 정기를 담고 있는 산, 한반도의 남쪽에 있는 모든 산의 근거가 되는 산…. 한국의 어머니 산이라 여겨지는 태백산은 숭고한 아름다움과 인내를 담고 있다’고 묘사돼 있다.

▲ 당골 청원사의 샘 인근에 용왕을 모신 암자가 있다. 이곳이 낙동강 수원이 되고 있다.

고대 종교 · 문화유산 영문 정보 전혀 없어

하지만 안타깝게도, 고대 종교 역사나 현대 정신적 유산 등에 관한 정보를 담고 있는 영문사이트나 자료를 찾아보기 어렵다. 특히 영어로 된 국제적인 사이트나 기관은 전무하다. 이러한 현실이 매우 불행한 일이며, 한편으로는 불공평한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지난 20년간 태백산의 가치와 아름다움에 대해 세계에 알리려 애쓰고 있다.

태백산은 압도적인 규모로 영토를 지역별로 나누는 데 결정적인 지리적 위치에 있다. 신성한 기운을 품고 있다는 사실이 더욱 힘을 실어준다. 태백산맥은 한반도의 동쪽 해안선을 타고 뻗어있고, 소백산맥은 한반도의 남부 중앙을 가로지르면서 경상도 지방의 북쪽과 서쪽 경계를 지어준다. 이 산맥을 따라 신라시대에는 북방 군대가 주둔했고 영적인 수호산로 여겨왔다. 이 지역이 지금의 경상도 일대다.


▲ 문수봉 정상에 세워져 있는 5개의 거대한 돌탑 중의 하나.

신라시대 승려였던 도선국사가 제시했던 풍수지리설에 따르면 태백산은 ‘한국의 가장 영험하고 신성한 지리적 위치’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풍수지리설은 오늘날에도 백두대간의 지력과 수원을 바탕으로 한반도의 척추라 여기는 가장 핵심적인 이론적 근거라 할 수 있다. 백두대간은 백두산부터 거의 일직선 상으로 한반도의 남쪽을 향해 뻗고 있으며, 소백산의 서부지역을 지나기 때문이다.

태백산의 지형학적 특성은 하이킹을 즐기는 이들 사이에서는 참으로 감동적이고 인상적이다. 한국의 가장 높은 산봉우리들이 접근하기 쉽고 정상까지 다다르는 데 몇 시간밖에 안 걸리지만 말이다. 이곳은 한국의 가장 높은 산악지대에서만 발견된다는 주목나무와 같은 아주 독특하면서 희귀한 식물군을 가지고 있다. 특히 등산을 즐기는 사람이나 사진작가에게도 인기가 좋다. 전통적으로 한국 사람들은 항상 녹색 빛을 띠는 주목나무를 불행과 악귀에 맞서 싸우는 강력하고도 신성한 기운을 만들어내는 나무로 여겨왔다. 또한 무당들은 이 나무를 조상의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여긴다.

▲ 당골에서 문수봉까지 등산로 숲길을 따라 태백산신을 위한 공식적 유교행사가 치러진다.

고대 신라의 왕들은 태백산을 통일된 왕국을 보호하는 외부의 오악(다섯 개의 봉우리)이나 5대 큰 산으로 여겼다. 그래서 산신 숭배 사원과 천제단 봉우리(1,563m)에 하늘의 신에게 제사를 지낼 제단을 만들었다. 영봉(Spirit Peak)은 국가와 민족의 안녕을 지키며 날씨에도 관여한다고 믿었다. 한국은 근대 이전에 두 가지 통치방식을 보였다. 불교적 스타일과 왕권에 기반을 둔 유교적 의식이 그것이다. 이는 이후 국가의 정체성을 성립하는 과정에 큰 영향을 미쳤음을 삼국유사나 역사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 만덕사에 있는 풍부하게 채색된 산신. 태백산 왕은 범상치 않은 턱수염과 도교적 스카프를 두르고 왕관에 노란 후광을 띤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소녀 동자는 왕에게 불멸의 복숭아 3개를 제공하고 있다.

태백산의 산신은 한국의 가장 중요하고 강력한 신령으로 오랫동안 그 명성을 누려왔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라의 경덕왕은 산신이 그의 궁전에서 춤을 추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태백산 주변의 지역주민들은 여전히 천산신이라는 산신을 위해 일 년에 두 번씩 특별의식을 수행한다.

초기 한국 불교의 창시자 중 한 명인 자장율사(590~658)는 그의 말년을 함백산 정암사에서 보내며 인근 지역을 오르곤 했다. 정암사는 그가 생활한 지역과 걸어서 하루 정도의 거리에 있다. 그는 그곳에서 태백산 정상 바로 아래 낙동강의 기원이 되는 용정샘에 나타난 문수보살(불교 지혜의 보살)의 석상을 발견했다. 그는 문수보살을 안치하기 위해 망경사라는 절을 지었다. 석상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지만 신도들은 대웅전 아래 묻혀있다고 믿고 있다.

등산로에서 몇 킬로 내에서 ‘문수보살의 어머니’가 산신으로 있었던 것으로 발견됐다. 그 세번째 높은 봉이 오늘날 문수봉이다. 한국 불교에서 신성한 지역으로 간주되는 지역이다.

그 외에 장군봉이나 가장 넓은 계곡인 당골, 백단사(White Altar Temple)와 같이 신성한 신령의 특성을 본 따 이름 지은 곳도 있다. 오래된 망경사는 '모든 것을 망라해서 볼 수 있는 절' 이란 의미처럼 당골계곡과 문수봉 너머까지 장관을 이루는 멋진 풍경을 볼 수 있다. 또한 이 이름은 불교 경전으로부터 온 용어이기도 하다. 현세의 모든 것을 망라해서 볼 수 있다는 의미다. 불교 수행자는 문수보살의 지혜를 얻고자 한다.

그 지혜는 모든 것 위에 있으면서 정제되어있고, 아주 귀중하고 희귀한 것이다. 한국 사찰 중 높이 평가되는 망경사는 신성하고 위엄있는 산신이 깃들어있는 신성한 산과 깊은 유대 관계를 맺고 있다. 신성한 영에 대한 숭배와 그에 따른 전통 문화와 산신의 역할 때문에 한국문화와 산은 불가분의 관계라 하겠다.


단군신화는 백두산 아닌 태백산

1950년대 들어 천제의식…93년부터 공식 축제로 열려

 

한국에서 가장 영험한 산이자 한국 토착 샤머니즘에서 가장 신성한 산인 태백산에 대해서 5월호에서 살펴보았다. 태백산의 지리적 중요성과 지형적 위치, 상서로운 이름, 고대의 명성, 특히 신라시대에 막강했던 산신과 함께 신라를 수호하는 영험한 산의 역할, 그리고 6세기경에 자장율사가 창건한 망경사 등과 같은 성스러운 장소 등은 모두 태백산을 상징하는 요소들이다.

함백산은 태백산의 북쪽 자락에 자리한 큰 산이다. 사실 이 산이 태백산보다 조금 더 높고 넓은 지역에 자리하고 있다. 함백산은 백두대간의 한 줄기로서 등산객들에게 널리 사랑을 받고 있으며, 1,573m에 달하는 정상 부근까지 운전해서 올라갈 수 있는 길도 잘 마련되어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바로 옆에 자리한 태백산과는 달리 함백산의 신성함에 대해서는 그 명성이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 단종의 무덤과 매우 가까운 곳에 있는 영월 보덕사의 산신각./ 데이비드 메이슨 교수가 1999년 10월3일 개천절 행사에 주최자와 함께 간단한 소개 인사를 하고 있다.
 

한국의 유서 깊은 사찰 중 하나인 정암사는 643년에 자장율사에 의해 함백산의 북서쪽 부근에서 발견됐다. 이는 자장율사가 문수보살로부터 받은 계시에 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절 위 높은 절벽에 살고 있는 음험한 인간을 내쫓을 수 있는 종을 발견할 것이라는 계시를 받았다. 자장율사는 이를 발견하고, 바로 그 자리에 적멸보궁탑을 세우고 그가 중국에서 가져온 석가모니의 유품을 그 탑 안에 안치해 두었다.

이 탑 옆에 서있는 고목나무가 선장단(禪杖壇)이라 불리는 나무다. 이 나무는 자장율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아 둔 것이 발아가 되어 거목으로 자랐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정암사 위에 자리한 적조암은 함백산 서쪽에 있는 현대적 불교 유적으로, 한국에서 높은 자리에 위치한 7대 사찰 중 하나다.

이처럼 유명한 정암사는 함백산에 위치해 있음에도 정문 현판에는 ‘태백산 정암사’라 돼 있다. 태백산의 유명세가 주변 산을 압도하는 격이다. 그 외에 몇몇 사찰도 태백산에 위치한 것으로 되어 있다. 동해안에서 30km 가량 떨어진 덕구골에 위치한 불성사 역시 태백산과는 멀리 떨어져 있지만, 이 산의 위상를 정확히 대변하고 있는 듯하다.

태백산은 신성한 명성에도 불구하고, 고려나 조선조 때 오악(5개의 수호산)이나 삼악(3개의 수호산) 시스템에서 제외됐다. 태백산이 아마도 불교나 유교적인 산이 아니고 원시적 샤머니즘의 색깔을 지녔기 때문에 그들의 통치이념에서 벗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까지도 태백산은 불교적 성격이나 대규모의 불교사찰이 없지만 한국의 명산 중 하나로 꼽히는 틀림없는 산으로 여겨지고 있다. 다양한 지리적 요건과 역사적인 요소들이 입증해 주듯 샤머니즘적인 고유의 특성을 잘 이어가고 있다. 재미있는 사실은 실제로 태백산에 위치하지 않은 작은 규모의 불교 사찰들이 태백산의 이름을 빌어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태백산에는 또한 제2의 산신이라 여기는, 한국에서 드문 역사적 인물의 영혼이 있다. 조선의 여섯 번째 왕이었던 단종은 삼촌인 세조에 의해 폐위되고 남한강 밖으로 쫓겨나 멀리 태백지역으로 망명길에 올랐다. 단종은 영월에서 머무르다 세조가 보낸 사약을 받고 짧은 생을 마감하게 된다.

그 해 어느 날 영월의 지방행정관이 업무를 보고 돌아오는 길에 백마를 타고 숲속의 동쪽으로 가던 단종의 영혼을 만나게 된다. 군수가 그에게 어디 가는 길이냐고 묻자, 단종이 대답하기를 산신이 되기 위해 태백산 가는 길이라고 했다. 그 이후로 영월군과 정선군, 그리고 태백시의 사찰마다 백마를 타고 있는 그의 초상화를 산신의 초상 옆에 모셔두고 있다.

▲ 태백산 북쪽 사면에 있는 많은 새로운 샤머니즘 절들의 좋은 사례에 속하는 팔보암의 팬시 같은 현대적 감각의 산신 그림. 흰 색은 한국의 전통적인 색이며, 하늘에 기원하는 행운을 상징하기도 한다.

단종을 산신으로 모신 사원도 있어
불과 수십 년 전에 산신령으로 단종의 영혼을 모신 태백산의 천제단 50m 아래 사원이 세워졌다. 이는 이 지역에 살던 한 여인의 꿈에 의해 세워진 것이다. 단종은 김씨 부인이라 불리는 그녀의 꿈에 나타나 태백산에 오래 머물렀으나 그를 위한 어떤 기념물도 없다고 계속 불평했다. 그녀는 그 기이한 꿈을 무시했지만 계속 반복됐다. 그녀는 평범한 여인네가 감당하기엔 너무 큰 일이라며 저항했지만, 단종의 영혼은 일단 시작만 하면 모든 것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했다.

놀랍게도 곧 엄청난 액수의 기부를 받게 되고, 제대로 된 길도 없는 그곳에 무거운 자재들을 싣고 산비탈을 오를 수 있는 길이 만들어졌다. 32명의 남자가 15일에 걸쳐 무거운 비석을 날랐고, 결국 단종비석이 완공되었다. 그 여인도 유명해지게 됐다.

태백산은 대한민국의 건국설화에 등장하는 환인, 환웅, 그리고 단군 왕검의 근거지로 현대적 국가정체성에 큰 역할을 해왔다. 이는 삼국유사나 고대 문헌에서 그 증거를 찾을 수 있다. 한국의 정치이론과 문화적 통합에 주요한 상징이 된 정체성은 천제단에서 하늘에 기도를 올리는 고대 석축 사원을 새롭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둥근 벽의 사각 제단은 돌로 세워져 있다. 이는 일찍이 신라 왕조부터 시작됐다. 언제 처음으로 지어졌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찾을 수 없다. 웅녀의 아들로서 한국인의 상징적 조상으로 언급되는 한배검이라 부르는 비석이 중앙에 있다.

그곳에는 유사한 또 다른 사원이 걸어서 15분 걸리는 장군봉에 위치에 있다. 여러 무당들이 굿을 하고 제사를 올리는 장소다. 그 주변에 마치 플랫폼이나 제단같이 보이는 또 다른 제사를 지내는 낮은 돌이 보인다.

1950년대에 이 제단의 재정비 이후 양력 혹은 음력의 개천절에 천제를 올리는 의식이 부활했다. 제사에 참여하고 구경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은 한국 특유의 문화를 발견하고, 한국의 아름다운 자연경관에 둘러싸여 신화와 영혼의 매력에 빠진다. 이러한 축제 행사는 지역 기반으로 주최되고 태백시와 태종계의 후원으로 열린다.

 

태백천제축제라는 이름의 공식적인 행사로 열리게 된 1993년 이래로, 태백시의 시장이나 행정 관료들이 때때로 직접 참여하기도 했다. 주변 사찰의 주지 스님이나 문화적 저명인사들도 함께 하면서 이 행사가 국가의 평안과 안녕에 크게 기여할 것이라 믿고, 또 그것을 널리 보여준다. 제례의식은 지역주민들에게도 고유문화의 가치를 알고 계승, 발전시키는 데 자부심을 불어 넣어준다. 이 행사는 여러 단체와 사람들의 노력, 그리고 지원금이 한국의 가장 영험한 산인 태백산의 오랜 전통을 오늘날까지 잘 이어오는 데 기여하고 있다.

태백천제축제는 아침에 열려 1시간 이상 계속된다. 유교와 도교, 샤머니즘의 상징물을 차례로 세워놓는다. 날씨에 따라 최대 500명 정도 수용한다. 전통 복장을 갖춘 사람도 많다. 가끔 몇몇 외국인도 참여한다. 의식은 다채로운 색채가 돋보이고 흥미로운 구성으로 진행된다. 의식의 분위기가 주위를 압도하고, 청중들도 진행되는 의식에 깊이 빠져들어 경외하는 마음으로 지켜본다. 국가적이면서 민족적인 단합을 재확인하고, 전통 문화는 새롭게 거듭난다. 그리고 가장 높은 신에게 행운을 간청한다. 홍보책자에 이 행사의 목적과 정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지금 우리는 우리의 전통을 이어나간다. 이것이 남북통일의 구심점이 될 것이고, 우리의 영역을 확장하는 기반이 될 것이다. 또 우리는 세계의 지도적 국가가 될 것이다.’


▲ (왼쪽)백마를 타고 태백산 산신이 된 단종 영혼의 또 다른 그림. 태백산 근처 절에 있으며, 3개 지역에 걸쳐 이 그림이 나타난다. /(위)태백산 당골 계곡에 있는 단군성전의 동상. 이것은 1980년대 말에 지어졌다./(아래)태백산 당골 계곡 단군성전에서 2005년 개천절에 열린 의식 수행자들.
 

왕실기록 보관장소로 활용
태백산이 신화에 나오는 바로 그 산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많은 한국인이 중국과의 경계에 있는 북한의 백두산을 환웅의 후손과 단군의 출생지로 알고 있다. 하지만 일연이 쓴 삼국유사엔 북한에 있는 묘향산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신화에서 동일한 이름, 명성, 평판을 가지고 있는 태백산은 많은 한국의 민족주의자들로부터 외경의 대상이 되고, 상징적으로 아주 신성한 곳으로 여겨지고 있다.

석탄박물관 바로 위쪽 당골계곡의 꼭대기에 단군성전이라 불리는 단군사원이 있다. 이곳은 1980년대 후반에 한 민족문화단체가 지었다. 번쩍이는 청동좌상이 앞에 있고 거대한 그림이 전시되어 있다. 방문자나 순례자는 일년 내내 국가의 번영과 안녕을 위해 기도한다. 이 사원은 개천절에 대규모 행사를 갖는다. 불과 얼마 전인 2006년부터는 음력 개천절에도 의식을 갖기 시작했다. 산자락을 따라 십수 개의 토착 샤머니즘 사원은 한국 토속문화와 샤머니즘의 부활을 위해 지난 20년간 노력하고 있다.

태백산 백단사골의 서부 아래지역에 6년 전에 세워진 또 다른 단군성전이 있다. 여기에는 한국의 건국시조인 단군 왕검을 산신령의 모습과 융합한 그림이 걸려 있다. 무당이 굿을 한 뒤, 영감을 받아 단군의 모습을 묘사한 것으로 전해진다. 아주 정교하게 배경의 경관까지 표현되어있다. 산과 소나무, 안개와 물이 흐르는 배경은 일반적인 산신령의 그림에 나타나는 기법이다. 한국에 있는 어떠한 단군의 그림도 배경을 담고 있지는 않다. 이 그림이 단지 독특한 예술품 혹은 두 신을 융합하는 새로운 형태의 예술로 나아가는 시발점이 될지는 앞으로 20여 년쯤 지나보면 알 일이다.

백단사는 천제단 봉우리로 오르는 등산객들에게 아주 인기 있는 코스가 되기도 한다. 31번 국도를 따라 서쪽 지역에 넓은 주차장과 백두대간 오른쪽을 따라 태백산과 함백산을 이어 달리는 철로가 있다. 기차가 달리는 중간 지점쯤 태백산의 북서쪽 줄기를 타고 비구니 절인 유일사가 있다. 유일사는 백두대간의 기차여행 코스 중에서 한 번에 찾아 갈 수 있는 절이다. 가장 방문이 적으면서 또한 걸어서만 찾아 갈 수 있다는 점이 너무 흥미롭다.


▲ 한국의 시조인 단군 왕검의 새로운 그림. 태백산 백단사골 단군성전이라 부르는 곳에서 4년 전 필자가 발견했다./ 산동 불정암 산신각에 있는 그림. 모든 신성한 상징물들이 등장하고 있으며, 숫사슴이 불로초를 물고 산신에게 바치고 있다.

태백산의 다른 중요한 사찰은 봉화군 주요 봉우리에서 남동쪽으로 9km 떨어진 각화사다. 이 절은 676년 원효대사가 신라를 위해 명상의 시간을 가질 당시 창건했다. 조선시대에도 그 중요성을 인정받은 곳이다. 임진왜란과 같은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왕실을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 조선시대에 귀중한 문서를 보관하는 네 곳 중 한 곳으로 지정되면서 왕실의 기록이 외딴 곳에 수호 역할을 하는 산으로 옮겨졌다.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사고지의 주춧돌만이 남았지만 사찰은 재건됐고 번성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태백산의 더 넓은 지역이 고대로부터 매우 신성시되는 장소로 계속 모셔지기를 기대한다. 또 장기 계획으로 등산로와 같이 종교적 순례코스도 개발되기를 바란다. 지역 특산물을 맛볼 장소와 마을, 절에서 하룻밤을 지낼 장소를 외국어로 소개하는 서비스와 함께 개발됐으면 좋겠다. 태백산 순례코스는 정신적으로 개방된 국제 관광객들에게 주요한 특징이 될 것이며, 한국의 세계화 수준도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킬 것이다.



/ 글·사진 데이비드 메이슨 경희대 호텔관광학 교수·www.san-shin.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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