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 갬블러 이태혁의 ‘포커와 인생’
“질 수 있다는 걸 인정하고 때가 왔다 싶으면 모든 걸 걸어라”
● 관찰하고 정보 수집하고 정확히 예측하라
● 도박과 주식의 원리는 같다
● 불교의 도와 도박의 도는 통한다
● 인생게임의 불공정성과 불평등성을 인정하라
● 불교 수도승과 가톨릭 성직자 체험하고 책 내겠다
그의 도박인생은 열네 살 때 당구장에서 시작됐다. 서울 종로구 효자동의 효자시장 뒷골목은 미로처럼 복잡했다. 시장 뒷골목에 있는 한 당구장 주인이 그의 스승이었다. 산초라 불리는, 손가락이 하나 없는 사내였다. 그는 흔히 말하는 타짜였다. 산초는 이제 중학교 1학년밖에 안 된 소년에게 고스톱과 포커를 가르쳤다. 경찰관, 동네 유지 등 여러 부류의 사람이 당구장 골방에서 어울렸다. 산초는 천재성이 엿보이는 소년을 무척이나 귀여워했다. 소년은 스승을 따라 삼송리(경기도 고양시 삼송동)에 있는 비닐하우스촌에도 가봤다. 거기선 매일같이 피 튀기는 실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로부터 약 20년의 세월이 흘렀다. 프로 갬블러 이태혁씨는 서울 강남의 한 호텔 레스토랑 테라스에서 우아한 자세로 ‘신동아’ 기자를 맞이했다.
“인터넷 고스톱 쳐보셨습니까. 저도 가끔 치는데 30만원으로 시작해 2억원 만드는 데 정확히 1시간20분 걸립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돈은 사이버머니다.
“계속 더블 업, 더블 업 하면 더 큰 판으로 이동하죠. 고스톱에는 기술도 필요하고 집중력도 엄청 필요해요. 정확히 1시간20분 지나면 새로운 상대에게 한 번에 다 잃어요. 집중력이 떨어졌다는 얘기죠. 저는 인간이 최고의 집중력을 발휘하는 시간이 한 시간 전후라고 봅니다. 한 시간 동안 쏟아내고 나서 다시 채우려면 시간이 필요하지요. 집중이 집착으로 바뀌면 (게임을) 못 끝내요. 감정이 개입되는 거죠.”
그의 첫인상은 생각보다 부드러웠다. 순한 눈매와 쌍꺼풀, 둥글둥글한 얼굴, 곱슬한 머리카락 따위가 어우러져 미소년의 이미지를 풍기고 있었다. 안경 너머 작은 눈은 초점을 잃은 듯 멍해 보이면서도 기지가 번뜩이고 강한 기가 느껴지는 묘한 매력을 갖고 있었다.
세계포커대회 우승
그는 20대 후반인 2004년 영국에서 열린 세계포커대회(RCT BRITISH TOURNAMENT)에서 우승을 차지한 후 카지노업계 유명인사가 됐다. 2008년엔 WPC (월드포커챔피언십) 아시아대회의 디렉터(경기운영자)로 활약했다. 방송(SBS-TV ‘스타킹’)에 출연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지난해 ‘천재포커 이태혁 52장의 심리게임’이라는 책도 펴냈다.
외국에서 오래 살다온 사람들이 흔히 그렇듯 그의 발음은 조금 샜다. 바람처럼 해외에서 떠돌던 그는 2년 전 귀국했다. 오늘 그와 나눌 대화의 주제는 포커와 인생. 그는 도박사의 이미지를 벗고 싶다며 포커 자체에 대한 얘기보다는 정신적이고 지적인 얘기를 많이 나누고 싶다고 했다. 그는 요즘 저술활동과 기업체 강연을 하고 있다. 포커의 심리전을 비즈니스전략에 응용하는 강의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예술과 도박은 학습의 영역이 아니라 경험의 영역입니다. 경험에서 얻어지는 섬세한 무의식이 작용하는 거죠. 아무리 이론을 잘 알아도 소용없습니다. 물론 이론은 필요하죠. 우리나라 사람들은 원 페어, 스트레이트, 플러시 이런 것만 알면 바로 게임을 시작합니다. 게임의 속성이나 원리, 마인드는 배우지 않고요. 주식도 마찬가지입니다. 매도, 매수만 배우고 바로 시작합니다. 그러니 잃을 수밖에요. 돈을 따려면 굉장한 준비가 필요합니다. 관찰도 많이 해야 하고 축적된 경험도 있어야 해요.”
10년 동안 30여 개국을 둘러봤다는 그는 지난해 강원랜드에 초청받아 가보곤 깜짝 놀랐다고 털어놓았다.
“카지노에는 인구수 대비 면적이란 게 있어요. 객장에서 고객 한 사람이 차지하는 공간의 크기죠. 그 점에서 강원랜드는 게임장 환경을 갖추지 못했어요. 카지노라기보다는 사람 많은 박물관 같았어요. 집중해서 게임할 수 있는 여건이 안 돼요. 사람이 너무 많으니 테이블 뒤에 서서 베팅하잖아요. 한국에서만 볼 수 있는 광경이에요. 한국에서는 잘못된 카지노 문화가 자리 잡았어요. 도박으로만 생각하지 게임으로 즐기는 사람이 없어요.”
그에 따르면 슬롯머신 승률은 120% 안팎이다. 이론적으로는 딴다는 얘기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기계 하나가 아닌 전체 기계의 승률이 그렇기 때문이란다. 뜻밖에도 그는 도박게임 중 가장 잘하는 것이 슬롯머신이라고 말했다. 내가 깊은 관심을 보이자 그는 “그런데 오늘 주제가 도박이냐”며 웃었다.
“저는 사람보다 기계와 싸우는 게 낫다고 생각해요. 지난 4월에 마카오 출장을 다녀왔는데 슬롯머신으로만 2만달러를 땄어요. 30~40분 만에. 저만의 비법이 있어요.”
카지노에 관심 가진 사람들, 특히 죽자사자 슬롯머신에만 매달리는 사람들에게는 귀가 번쩍 뜨이는 얘기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슬롯머신에서 따는 것은 운이 아닌가.
“운이 아니에요. 운이라면 따기도 하고 잃기도 해야 하는데 저는 거의 진 적이 없어요. 포커 쳐서는 많이 잃어봤지만. 포커로 100원 잃으면 슬롯머신으로 50~70원 복구하는 식이었어요. 최근 (필리핀) 세부를 다녀왔는데 거기서도 그랬고.”
슬롯머신 기계 고르는 법
“따는 비법이 뭔가요?”
“얘기하면 깁니다. 도박사 이미지를 벗기 위해 책까지 내는데.(웃음)”
그의 새 책은 6월18일께 출간될 예정이다. 제목은 ‘사람을 읽는 기술’이다.
“일단 그 나라의 환율을 알아야 해요. 1000원 수준으로 베팅하되 항상 맥시멈(최대) 베팅을 해야 합니다. 400달러나 500달러쯤 한꺼번에 돈을 넣고 (상금이) 터지면 그만해야 해요. 더 하지 말고. 다 잃어도 일어나야 하고. 한 번 터지면 일어나라. 절대 두 번, 세 번 바라지 말라. 이게 원칙이에요.”
“(상금이) 적게 터지면 더 하고 싶잖아요?”
“더 하고 싶죠. 그래서 대부분 잃는 거죠. 그만둘 줄 알아야 하는데.”
그의 조언대로라면 슬롯머신의 경우 먼저 기계를 잘 골라야 한다. 사람이 많이 몰리는 테이블 쪽이나 사람이 없는 외진 곳에 있는 기계는 피하는 게 좋다.
“가장 좋은 방법은 매일같이 드나드는 아주머니들, 안경 끼고 책자 들고 다니는 분들, 속된 말로 죽순이라 부르는 분들을 따라 앉는 거예요. 이 분들은 전문가들이에요. 지난 몇 년간의 데이터를 갖고 있어요. 어떤 기계에서 언제 얼마가 터졌다는. 그 통계를 토대로 자리를 선정하는 겁니다. 일본에 있을 때 이런 분들을 많이 봤어요. 이들의 수입은 평범한 회사원 월급의 두 배가량 됩니다. 한 번에 크게 버는 게 아니라. 사람들은 잭팟만 생각하는데, 잭팟은 안 나온다고 보면 됩니다.”
“설명을 들으니 맥 빠지네요.”
내가 실망한 표정을 짓자 그가 “왜요?”라고 되물었다.
“특별한 방법이 아니잖아요?”
“아, 특별한 방법이 있어요. 슬롯머신은 회전이 중요해요. 버튼 컨트롤로 세븐(7)을 잡아낼 줄 알아야 해요. 세 칸 중에 어디에 서는지 잡아낼 줄 아는 감각. 스타트 버튼을 한 번 더 누르면 서요. 숫자가 서는 타이밍을 맞춰 레일을 정리해야 합니다. 기계는 다 똑같아요.”
2004년 우승 이후 더는 세계대회에 출전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유를 묻자 “솔직하게 말씀드려야 하죠?”라고 사족을 단다. 계산을 해서 말하거나 말 포장에 능하거나, 아니면 수줍음을 타는 것이라고 나는 짐작했다.
“우승 이후 심각한 우울증에 빠졌어요. 사람들은 행운이 따르고 돈 많이 벌면 행복할 거라 생각하잖아요. 그렇게 행복하지 않았어요. 한 번에 맨 밑에서 맨 위로 올라간 게 아니라 차츰 쌓아서 올라간 것이기에. 당시 이쯤 되면 내가 한 번은 (우승)하겠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허탈감인가요? 정상에 선 이후 찾아오는.”
“허탈감도 있고. 인간에 대해 너무 많이 공부했던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하면. 알지 말아야 할 것까지 알았던 거죠. 보이는 세계만 보고 살아야 하는데, 보이지 않는 세계를 자꾸 보려고 하니까 무척 혼란스러웠어요. 도박사나 수학자, 물리학자는 감성보다 이성적 계산이 앞서야 합니다. 모든 상황을 비관적으로 봐야 좋은 결과를 낼 수 있어요. 내 카드가 좋다고 생각해 까보면 상대가 더 좋은 카드를 들고 있는 경우가 많아요. 모든 걸 의심하고 부정적으로 생각해야 하지요. 뇌가 많이 피곤했던 것 같아요.”
우울증
우울증에 빠진 그는 사람을 아예 안 만났다고 한다. 귀국하기 전 마지막 3년을 태국에서 보냈다. 태국과 미얀마 국경 지역이었다. 목재로 지은 집에는 전기도 안 들어왔다. 해 지면 잠자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다. 죽는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그만 살아야겠다고.
그럴 수도 있겠다 싶지만, 절실히 다가오지는 않는다. 왜 그 지경까지 갔는지.
“우울증은 예전부터 조금씩 있었어요. 사람들이 너무 지겨웠던 것 같아요. 돈 많은 사람들끼리 큰 도박판을 벌이면 우아하고 화려할 것 같지만, 그만큼 지저분하고 처절한 게 없어요. 말이 좋아 카지노이고 프로지, 뒷골목 양아치나 타짜와 다를 게 없어요. 그런 환상을 갖고 생활하다가 회의를 품게 된 거죠. 남을 속이지 않고 살 방법이 뭐가 있을까 하고.”
구스타페라는 이탈리아계 영국인이 있었다. 그의 포커 수준을 높은 경지로 이끌어준 사람이다. 구스타페의 집에서 그는 ‘젠 부디즘’(Zen Buddhism·선불교)이라는 책을 접했다. 구스타페는 포커를 잘하려면 불교의 도를 알아야 한다고 했다. 도의 중심축도, 도박의 중심축도 인내라며. 그때부터 그도 불교에 관심을 갖게 됐다. 인내하고, 존중하고, 관찰하고, 마지막에는 초연한 것. 불교의 도와 도박의 도는 통하는 데가 있었다. 불교에 심취하면서 정체성의 문제에 부딪혔다. 나는 왜 이렇게 살아야 하나. 이렇게 살아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그는 절규했다. 이제 그만해야겠다고. 지저분한 삶을 떠나 아름답게 살고 싶다고.
2007년 말 그는 의사 친구의 도움을 받아 약물치료를 하고 이듬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기분이었다. 도박사의 이미지를 버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책을 쓰기 시작했다.
그는 내 앞에서 간단한 카드 기술을 선보였다. 패를 섞고 돌릴 때 자신이 원하는 카드가 자신에게 떨어지도록 하는 기술이었다. 눈속임이 아니라 감각에 의한 손기술이라 했다. 카드를 섞을 때 한 번에 몇 장씩 집히는지 알기 때문에 몇 번째 카드가 자신이 원하는 카드인지 간파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어 손바닥에서 카드 한 장을 내보였다. 잠시 후 그 카드는 다른 카드로 바뀌었다. 알고 보니, 두 장을 한 장으로 보이게끔 교묘히 포개놓았던 것이다. 마술의 원리라고 했다. 내가 “거 참” 하고 신기해하자 “기자님은 어디 가서 절대로 도박하면 안 될 것 같다”며 웃었다.
그는 “도박을 잘하려면 야수성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1등과 2등은, 실력은 비슷해요. 그런데 1등에게는 2등에게 없는 광기가 있어요. 마지막에 자신의 광기를 다 쏟아 붓는 능력이 있어요. 제게는 그런 야수성이 있어요. 몰아붙일 때 폭풍같이 몰아붙이는. 상대가 누구든 안 가려요. 지금은 좀 부드러워졌지만.”
야쿠자 선배를 따라
곱상해 보이는 외모와 달리 그는 어릴 적에 싸움을 많이 했다. 종로바닥에서 싸움 잘하는 아이로 제법 유명했다. 싸우다 칼에 찔린 적도 있었다. 부모와 사이가 안 좋아 열세 살 때 집에서 나왔다. 시내 월세방에서 혼자 생활했다. 중학생 때 그는 이미 성인이었다. 주중엔 포커를 치고 주말엔 경마장에 드나들었다. 술 담배도 그때부터 했다. 열다섯 살 생일 때 할머니가 준 선물이 말버러 담배 한 보루였다. 키도 큰 편이었다. 중학생 때의 키가 지금의 키다. 고등학생 때는 내기당구와 포커에 심취했다. 자신보다 대여섯 살 많은 동네 건달들과 중년 아저씨들, 노인들과 어울렸다. 타고난 승부사인 그의 당구실력은 500. 골프도 싱글 수준이다.
그는 대한민국 남아의 표준인 육군 병장 출신이다. 대학 재학 중 군에 갔다. 육군 8사단에 배치됐는데 선임하사를 팬 게 문제가 돼 다른 부대로 옮겨갔다. 해군과 해병대 및 육군이 공동으로 작전하는 인천 부근의 103여단이었다. 부대에서도 틈틈이 포커를 쳐 돈을 땄다. 전역 후 일본으로 건너갔다. 제대하기 한 달쯤 전 일본에서 야쿠자 생활을 하는 그의 선배가 사람을 보내 일본행을 권유한 것이 계기였다. 복학은 포기했다. 그의 선배는 일본에서 조그만 가게 몇 개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 선배를 통해 파친코와 같은 슬롯머신게임을 배웠다. 그렇게 외국생활이 시작돼 유럽, 미국, 동남아 등지를 떠돌았다.
그는 인복이 많았다. 곳곳에 후원자들이 있었던 것이다. 2008년 빈털터리로 귀국해 새로운 삶을 모색할 때도 그들의 도움이 컸다. 후원자들은 “너는 주인을 잘 만나면 꽃피는 인생”이라며 그의 재능을 높이 평가했다. 지금 사는 집도, 타고 다니는 차도 후원받은 것이다. 심지어 헬스클럽에 나가 운동하는 것까지. 후원자들은 그에게서 무엇을 얻는 걸까.
“그분들이 하는 일을 도와드리고 정신적인 친구가 돼 드려요. 깡패 두목도 혼자 있으면 외롭거든요. 세상에 공짜는 절대 없어요. 어떤 걸로든 보답합니다. 기업체 사장은 술 마시러 갈 때 꼭 나를 데려가요. 자랑하고 싶은 거지요.”
해외로 나간 지 5년 만인 2004년 그는 세계포커대회에서 우승했다. 이에 대해 그는 “사람들이 생각한 만큼 큰 성취는 아니었다”라고 겸손해했다. 포커공부의 핵심은 예측과 상상의 이미지였다.
“작은 형태의 단서들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큰 증거로 결과를 예측하는 게 포커입니다. CNN방송을 틀어놓고 훈련을 했어요. 진행자의 입 모양과 표정을 보면서 어떤 뉴스를 전달하고 싶은지, 뭘 표현하고 싶은지 알아맞히는 겁니다. 사물과 풍경을 눈에 저장하는 기술도 익혔고요. 테이블에 놓인 카드와 컵, 사람들의 모습을 눈으로 한번에 찍어 단시간에 기억하는 훈련이죠. 주로 심리연구를 많이 했어요. 사람의 표정과 동작을 보면서 성격과 패턴을 파악하는 거죠. 저 사람은 카드 칠 때 수비적일까, 공격적일까.”
주식 갬블링 마인드
그는 최근 현대해상보험 영업사원들에게 ‘이기는 방법’이라는 주제로 강연했다. 한마디로 상대를 간파하는 방법이다.
“보험 하는 분들에게 잘 맞는 주제였지요. 상대가 이런 반응을 보일 때 어떻게 대응하느냐는 것이니까. 그런데 한 30분 강연 듣고 나서는 어떻게 하면 고스톱이나 포커에서 돈 따는지 가르쳐달라는 겁니다.(웃음)”
강연 중 30대 후반의 여성이 울어버리는 ‘사고’가 발생했다.
“사람의 마음을 간파하는 법을 설명한 후 시범을 했어요. 강의실 뒤쪽에 앉은 여성을 지목해 ‘머리를 한 번도 길러본 적이 없다’ ‘딸이 두 명 있다’ ‘남편은 이런 사람이다’ ‘영업은 이런 식으로 할 것 같다’… 내가 관찰한 대로 죽 얘기했어요. 그러자 그 여성이 놀라서 울더라고요. 벌거벗겨졌다는 수치심 때문인 것 같았어요. 분위기가 이상해졌지요.”
7월 초에는 주식 관련 책을 펴낼 예정이다. 가제는 ‘주식 갬블링 마인드’. 주식과 도박의 원리가 똑같다는 것이다. 주식도 도박과 마찬가지로 학습의 영역이 아닌 경험의 영역이므로 먼저 주식투자의 마인드를 바꾸고 시간을 갖고 투자해야 한다는 게 그의 조언이다.
“어떤 것이든 돈이 투자되는 순간 도박이 됩니다. 주식 하는 사람들은 어떤 종목을 찍어야 돈을 따느냐, 그것만 생각합니다. 마인드를 어떻게 가져야 할지에 대해선 궁금해하지 않아요. 아마추어인 거죠. 도박과 주식은 잠재된 불확실성을 인정하고 나의 리스크를 이용해 이윤을 얻는다는 점에서 같아요. 주식 애널리스트나 강원랜드에 있는 친구들이나 같은 원리로 움직여요. 주식시장 승리자가 프로 갬블러와 비교되는 건 마인드가 같기 때문입니다. 내가 남의 돈을 먹기 위해 단 1원이라도 투자하면 도박입니다. 불확실성이 내재된 모든 게임은 도박입니다.”
그는 포커의 원리와 인생의 원리가 같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잖아요. 그 불확실성이라는 리스크를 안고 일을 하고 먹고 자고 소비하잖아요. 이것 자체가 도박이지요.”
그에 따르면 게임에서 이기려면 먼저 불공정성과 불평등성을 인정해야 한다. 셋이 앉아 고스톱을 치면 같은 조건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선(先)을 누가 하고 어떤 자리에 앉느냐에 따라 평등이 깨진다는 것. 포커나 도박도 마찬가지다. 이 점을 인식해야 비로소 냉정한 분석이 이뤄진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은 분석수치가 아닌 판정수치를 갖고 게임에 응한다. 나의 미래는 항상 밝을 것이라며. 물론 이는 생각의 오류다.
포커에서도 이기고 인생에서도 이기려면 무엇보다도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다. 지속적인 관찰로 정보를 수집하고 그 정보를 바탕으로 정확한 예측을 해야 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정보를 자신의 필터로 거르지 말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점이다. 그는 “준비가 잘돼 있으면 어떤 변수가 나타나도 두렵지 않다”고 말했다. 데이터가 있기 때문이다.
“포커에서 가장 중요한 건 사전에 상대방을 파악하는 겁니다. 누가 어떤 성격인지, 누구에게 운이 따르는지, 누가 강하게 베팅하는지, 누가 못하는지. 게임에 합류하기 전 뒤에서 지켜보면서 그들의 성격과 행동패턴을 분석하는 거죠. 다 잘하는 사람들만 있는데 뛰어드는 건 현명하지 않아요. 만만한 상대를 골라야죠. 그래서 충분한 관찰이 필요한 겁니다. 그 다음에는 순응을 배워야 해요. 일단 지는 걸 전제로 게임에 응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난 늘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결과에 집착하지 않을 수 있어요.”
‘본전 인생’은 마이너스섬게임
“승부욕과는 다른 얘기인가요?”
“세 번째 요소가 승부욕입니다. 아까 말한 광기죠. 승부수를 띄울 상황에서는 다 쏟아 부어야 합니다. 처음부터 승부욕을 발휘해 쏟아 붓지 말고.”
“인생에 그대로 적용하는 건 위험하겠는데요.”
“글쎄요.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죠. 리스크가 적으면 돌아오는 것도 적어요. 리스크가 두려운 사람은 성공을 바라지 않으면 되죠. 꾸준히 단타로 가겠다면 이렇게 할 필요가 없죠. 그런데 인생은 제로섬게임이 아니에요. 내가 지면 당연히 마이너스이고 비겨도 마이너스입니다. 이겨야 섬씽입니다. 왜 그러냐. 시간과 리스크는 비례하거든요. 인건비도 들고. 주식을 예로 들면, 본전치기를 하면 제로섬게임이라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아요. 수수료가 나가지 않습니까. 결국 마이너스섬게임인 거죠. 내가 들인 비용과 시간, 하다못해 전기료, 전화료까지 계산하면. 잔잔하게 길게 가면서 본전 언저리에서 맴도는 인생은 마이너스섬게임이라는 얘기죠.”
“많은 사람이 마음속으로 환상에 가까운 성공을 꿈꾸지요.”
“꼭 돈을 버는 것만이 성공은 아니죠. 다른 성격의 성공도 있습니다. 물질적 성공의 욕망을 충족시켜줄 다른 무언가가 있다면 괜찮죠. 사상이든 뭐든. 오로지 돈이라면 제가 제시한 방법이 맞을 테고. 파도가 밀려올 때 승부수를 띄워야 할 순간이 있을 겁니다. 저한테는 지금 책 쓰는 게 승부수입니다.”
그의 새 책 ‘사람을 읽는 기술’에는 삶의 지혜가 가득 담겨 있다. 기자들에게 유익한 내용도 적지 않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증거가 늘어날수록 거짓일 확률도 커진다.’ ‘고급 정보는 때로 등 뒤에 있다.’ ‘인간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고 싶은 것을 본다.’ ‘표정의 지속성으로 진위를 간파한다.’ ‘고학력자일수록 고정관념이 강하다.’
“고학력자라고 삶의 원리를 잘 알고 유연한 것 같지는 않아요. 많이 배운 사람은 자신이 갖춘 지적인 세계를 보호하려는 데 따른 노출불안, 방어불안이 심해요. 자기가 쌓은 지적 영역이 남한테 손상을 받거나 이미지가 저하되는 걸 굉장히 두려워하죠. 그러니 허점이 많을 수밖에요.”
“‘인내심이 직관을 이긴다’라는 내용도 있더군요.”
“정확히는 ‘인내가 직관을 방어한다’입니다. 직관이나 통찰은 수많은 경험에서 나오는 섬세한 무의식이죠. 포커판에서 베팅을 할 때 일정한 패턴이 나타나요. 사람마다 베팅을 하는 속도나 강도가 다릅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콜(Call)을 하거나 레이즈(Raise)를 할 때 패턴대로 하죠. 다른 방식으로 베팅하거나 변칙 플레이를 할 때는 표정이 바뀝니다. 아주 짧은 시간에. 그걸 간파해야 해요. 그런 게 직관이죠.”
그는 “이 책이 대박 나면 다음엔 태국으로 건너가 수도승 체험을 하거나 이탈리아에 가서 성직자 체험을 하겠다”고 밝혔다. 구도(求道)와 관련된 책을 내겠다는 계획이다.
“뭔가 큰 사건이 있었는데 숨기는 건 아닙니까?”
“그런 건 아니고요. 예전엔 삶의 진정한 가치를 몰랐던 것 같아요. 좋은 차 타고, 좋은 집 갖고, 좋은 옷 입고, 고급 와인 마시면 인생이 점점 더 좋아질 거라 생각했던 거죠. 그런데 아니었어요.”
“그런 생각을 언제부터 했지요?”
“우울증을 겪으면서요. 2008년 귀국 후 돈 버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시간에 머릿속에 새로운 사상을 채우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와이 거주 여성의 스토킹
포커로 돈을 벌던 당시의 생활수준을 묻자 그는 “호텔에서 7년간 생활했다”고 에둘러 답했다. 그가 오래 머물렀던 도시는 런던, 뉴욕, 홍콕, 방콕 등지다. 생활비는 대회 상금이나 포커 쳐서 딴 돈으로 충당했다. 우승상금으로 한 번에 18억원을 벌어들인 적도 있다.
나는 그에게 아마도 여자문제가 있었을 거라고 짐작했다. 그는 부인하지 않았다. 하지만 삶의 진로를 바꾸는 데 영향을 끼칠 정도는 아니었다고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여자를 오래 사귀지 못하는 스타일이죠?”
“여자들이 나를 오래 봐주지 않아요. 그게 싫더라고요. 내가 어디론가 떠나면 여자들은 그걸 끝이라고, 이별이라고 여겨요. 내가 돌아오는데도. 진짜 심한 스토킹을 네다섯 번 당했어요. TV 예능프로에 출연한 다음에 하와이에서 어떤 여자가 내 애를 임신했다고 주장하는 거예요. 나는 하와이에 가본 적도 없는데. 차를 부순 여자도 있고. 보고 싶은데 연락이 안 되니 그렇게 한 거죠.”
“여러 여자와 사귀다 보면 상처도 받죠?”
“어린 시절에 받았죠.”
그는 미혼이다.
“가장 길게 사귄 게 얼마나 되죠?”
“1년 안 돼요.”
“그럴 줄 알았어요.(웃음)”
고등학교 2학년 때 9개월, 성인이 된 후로는 8개월이 가장 길게 사귄 기간이라는 것이다. “사랑이 뭐라 생각하느냐”고 묻자 “잘 모르고 잘 못하는 것 같다”며 수줍게 웃었다. 타고난 승부사도 사랑만큼은 뜻대로 안 되는 모양이다.
“어린 시절의 가족관계가 영향을 끼친 건 아닌가요.”
“당연히 그렇죠. 가정이 화목하고 부모의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은 성인이 돼서 남한테 사랑을 많이 주죠. 저는 그게 없어요. 가족애라는 걸 몰랐으니까.”
그는 그간 같이 잔 여자가 몇백명이라고 털어놓았다.
“남보다 쉽게 이성을 만나고 그만큼 쉽게 헤어진 것 같아요.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여자를 만나고 싶은데 별로 없더라고요.”
“사람의 심리를 간파하는 훈련을 했으니, 맘에 드는 여자를 끌어당기는 데 귀신같은 재주가 있겠군요.”
“고를 줄 알아야죠. 나랑 맞는 사람인지 아닌지. 포커판에서 포커 잘 치고 못 치는 사람 고르듯. 저는 한 번에 골라내요. 안 맞을 것 같으면 아예 시도도 안 해요. 표정과 자세만 봐도 알 수 있어요. 역학하는 사람한테 들은 건데 남녀 간에는 서로 끌리는 체질이 따로 있대요. 저는 그걸 본능적으로 아는 것 같아요.”
농부와 요리사
그는 아직 결혼계획이 없다. “안정을 취하고 싶지 않으냐”는 질문에 고개를 흔든다. 자신과 결혼하는 여자는 불쌍해지고 그 인생이 망하기 때문이란다. 나는 그가 위악적이거나 비겁하다고 생각했다.
“세상에서 가장 진실한 직업은 농부와 요리사예요. 농부는 천재지변이 없는 한 가꾼 만큼 수확합니다. 요리도 얼마나 노력을 기울였느냐에 따라 맛이 달라져요. 한 10년 더 이런 생활을 하고 시골에 내려가 농사를 지을까 싶습니다.”
“프로 갬블러의 극적인 인생전환이 되겠군요.”
“사람들은 프로 갬블러의 화려하고 멋있는 모습만 떠올려요. 다 영화가 만들어낸 허구입니다.”
“도박인생을 살아온 걸 후회하십니까.”
“그렇진 않아요. 그 세계에서 많은 걸 배웠으니까. 그걸로 돈을 벌었다는 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도박으로 돈 번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단기적으로 돈을 버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번 게 아니에요. 투기로 돈 벌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그는 앞으로 집필활동에 전념하겠다고 밝혔다. 더는 글을 못 쓴다는 생각이 들 때까지 쓰겠다고 했다. 할 얘기도 많고 해줄 얘기도 많단다. 기회가 닿는 대로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싶다고도 했다.
삶의 부질없음과 허망함을 너무 일찍 알아버린 탓일까. 육체적 나이보다 정신적 나이가 더 많아 보이는 이 30대 중반의 사내는 오래전에 인생의 비밀을 엿보기라도 한 듯 줄곧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조금 위태로운 면도 보였지만, 지혜로워 보이는 사고방식과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은 내 머릿속에 잔잔한 여운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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