方外之士

대한민국 석공예 명장 백남정

醉月 2010. 6. 5. 08:29

최고 석공의 비결은? 돌을 볼 때 황금 보듯이 하라

공종식│동아일보 산업부 기자 kong@donga.com

 

목재로 만든 문화재는 세월과 함께 사그라진다. 불에 타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도 한다. 반면 돌로 만든 작품은 장구한 세월을 견뎌낸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석탑인 미륵사지석탑은 백제 말기 무왕 재위 때인 600~640년에 건립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름 모를 백제 석공의 땀방울이 1400년을 버틴 것이다. 지금도 우리 사회에는 돌을 쪼는 석공들이 있다. 지난해 대한민국 석공예 명장으로 지정된 백남정 미술석재 대표도 그중 한 명이다.

정부는 현재 명장(名匠)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명장제도는 해당분야에서 최고의 기능을 갖추고 산업현장에서 장기간 종사해 기술 발전에 크게 공헌하고 맡은 분야에서 부가가치를 창출해 생산성 향상에 기여한 기능인을 선정해 포상하는 제도다. 정부는 지난해의 경우 12명의 기능인을 ‘대한민국 명장’으로 선정해 발표했다.

백남정 미술석재 대표는 당시 석공예부문 명장으로 선정됐다. 그를 만난 것은 3월3일이었다. 장소는 경기도 포천에 있는 그의 작업실. 서울에서 자동차로 두 시간 걸리는 곳에 자리 잡은 그의 작업실은 개장을 준비 중이어서 아직 간판도 걸리지 않은 상태였다. 간판작업을 하고 있는 그를 만날 수 있었다.

석공예 명장이라면 나이는 60이 넘고, 전통의상을 입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기자의 편견은 그를 보는 순간 깨졌다. 그의 나이는 49세였다. 석공예 경력이 34년이 넘는다는데…. 그를 만나자마자 명장인데 왜 이렇게 나이가 젊은 편인지를 물었다.

“지금까지 배출된 석공예 명장 중에서 제가 가장 젊은 편입니다. 별다른 이유는 없어요. 다만 다른 사람보다 훨씬 일찍 석공예 일을 시작했고, 평생 한눈 팔지 않고 석공예 일만 해왔을 뿐입니다.”

충남 보령 출신인 그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서 석공예 일을 시작했다고 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나이에 힘든 석공예 일을 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요즘 제3세계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아동 노동’을 한 셈이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상급학교에 진학을 해야 하는데 그때 저희 가정형편이 너무나 어려웠습니다. 1년을 집에서 쉬고 있었는데 집안 형님 중에서 두 분이나 돌질을 했어요. 그때만 해도 석공예 제품에 대해 국내 소비는 거의 없어서 대부분 일본 수출을 겨냥해서 석공예 제품을 만들었습니다. 저는 일본 수출용 석공예 제품을 만드는 회사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리 집안이 어렵다고 해도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돌 다루는 일을 한다는 것이 조금 이상한 것 아니냐”고 묻자, 그는 “당시는 특별한 일도 아니었어요. 저 같은 사람이 많았어요”라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답했다.

 

▼ 일반인 중에는 석공예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석공예는 정확히 어떤 일을 하는 것인가요.

“쉽게 말하면 전에는 석공예가 절구 다듬이돌 맷돌 등 집에서 쓰는, 돌로 된 제품을 가리켰어요. 그런데 지금은 범위가 넓어졌습니다. 돌을 다루고 돌로 조각하는 것을 모두 석공예라고 합니다. 요즘 들어 아파트 조형물에도 석공예를 많이 사용하는 추세입니다. 그리고 돌로 된 조각 제품도 석공예로 분류합니다.”

 

초등학교 졸업 후 시작한 석공예

그는 고향을 떠나 석공예 기술을 배운 날짜를 지금도 정확히 기억했다.

“제가 학교를 아홉 살에 들어가서 열여섯 살(만 나이로는 15세)이 되던 해 음력 2월16일이었습니다. 보름 다음날 올라왔어요. 당시 옷 한 벌을 가지고 버텼는데, 한 달이 되자 옷이 다 해어졌어요. 고생을 좀 하긴 했지요. 그래도 견딜 만했어요.”

백씨가 말하는 방식이 항상 이랬다. 남 보기에는 분명히 큰 고생을 하고, 어려움을 겪었어도, “어려운 시절, 다른 사람도 했던 일이며, 항상 만족하며, 행복해하고 있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그래서 인터뷰 도중에 기자가 고생한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끌어내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아예 “기사에 필요하다, 고생한 이야기 좀 해달라”고 대놓고 요청했다.

“고생요? 그때는 모두가 힘들었어요. 저는 선생님 집에서 숙식을 하며 일을 배웠어요. 그런데 저에게 석공예를 가르쳐주던 선생님도 단칸방에 살고 있었는데 아이가 있었어요. 그래서 저는 다락방에서 잤어요. 얼마나 추웠던지, 밤마다 방 안에 성에가 끼었어요. 매일 12시간 이상씩 일을 했습니다. 한 달에 두 번 정도 쉬었는데 월급이 500원인가, 아니면 1000원쯤 됐을 겁니다. 그 돈을 가지고 영화 한 편 보고 목욕탕에 갔다 오면 100원 정도 남았습니다.”

그는 그런 생활을 2년 했다고 했다. 만 15세가 되던 시절부터.

▼ 집에 돈을 부쳐줄 형편은 되지 않았겠군요.

“그럴 생각도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2년 동안은 공부하는 기간이었거든요. 정질만 해도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에요. 몇 개월을 해도 터득하지 못해 망치로 손을 잘못 쳐 피가 나는 일이 허다합니다.”

   

▼ 친구들은 상급학교에 진학했는데 백 선생님은 정으로 돌만 치는 생활이 슬프지 않았나요.

“사실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 공부를 잘했습니다. 상장도 많이 받았어요. 그래서 공부를 계속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지만 제 밑으로 동생이 세 명이나 있었어요. 이러니 공부하고 싶다는 말을 꺼낼 수가 없었어요. 장날에는 저는 동생을 돌보기 위해 학교도 갈 수 없었어요. 제가 사실은 꿈이 대학교수였는데…. 그런데 요즘 대학에서 강의도 하니깐 다른 방식으로 꿈은 이룬 셈이네요.”

그는 2년 동안 석공예 기술을 배운 뒤 독립을 했다. 1980년대 초반의 일이었다. 당시 국내 석공예 회사들은 일본 수출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었다. 큰 회사들이 수출계약을 따오면 계약 물량 중 일부를 석공들에게 도급 주는 방식이었다. 그는 일종의 하도급업체였던 셈이다.

“지금이야 좋은 기계가 많이 나왔지만, 당시는 거의 수작업에 의존했어요. 지게차도 없어 석공예에 쓰일 돌을 손수레로 밀어야 할 정도였습니다. 일본 수출용으로 일본 석등을 많이 만들었습니다. 기술이 있었고, 다른 사람보다 성실했기 때문에 인정을 받았습니다. 돈벌이도 괜찮았습니다. 그래서 고향집에도 돈을 부쳐드릴 수 있었고, 가정도 꾸릴 수가 있었습니다.”

위기를 기회로

그런데 1995년에 큰 위기가 왔다. 석공제품 주 소비처였던 일본이 그때부터 거래선을 인건비가 저렴한 중국으로 돌리면서 주문이 뚝 끊긴 것이다.

“정말 막막했습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게 돌 일인데 이 일을 할 수 없게 되나 하는 생각까지 했어요.”

그런데 이 위기는 뜻밖에도 그에게 기대하지 않았던 기회를 제공했다. 창덕궁 복원공사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선배 석공예 명장인 임동조 명장이 창덕궁 복원공사에 참여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그래서 창덕궁 복원공사에 참여하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복원공사에 참여하면서 주초와 기단석을 깎았지요. 2002년까지 그 작업에 참여했습니다.”

그는 이 일을 계기로 경희궁과 경복궁 복원공사에도 참여하면서 석공예 분야에서 전문성이 훨씬 깊어지게 됐다.

▼ 창덕궁 등의 복원사업에 참여하면서 조선시대 석공예기술을 좀 더 자세하게 볼 수 있었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당시 석공의 수준은 어떤가요.

“그때 석공이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지금처럼 기계가 없어서 일일이 수작업으로 쪼아서 만들어야 했거든요. 오히려 지금 석공은 쉽게 일을 한다고 봐야 합니다. 지금은 기계를 사용하면서 복원을 하고 있지만 조선시대에는 일일이 손으로 작업했기 때문에 당시 주춧돌을 보면 때로는 석공이 실수한 부분이 그대로 남아 있는 모습을 볼 수도 있어요. 앞으로 숭례문 복원에도 참여할 가능성이 높은데, 숭례문 복원에서는 아예 공구까지 전통적인 것과 똑같은 방식의 공구를 사용하려고 합니다.”

▼ 시대가 바뀌면서 석공기술도 발전하나요.

“그럼요. 옛날 방식으로 하면 지금처럼 작품을 많이 만들 수 없지요. 시간이 오래걸리거든요. 석조각품이나 석공예품을 보면 사람이 옷 입은 것과 똑같습니다. 사람에 따라, 정다듬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돌 옷’이 달라집니다.”

▼ 국내에 석공이 많나요. 몇백명이 되나요.

“훨씬 넘지요. 아마 몇천명은 될 겁니다. 돌을 다루는 사람은 5가지 종류로 나눌 수 있어요. 석공, 조각, 석재시공, 쌓기, 드잡이로 나눌 수 있어요.”

▼ 석공예가 산업적으로는 어떤가요. 수요가 많나요.

“사실 수요가 별로 없어요. 사찰에서 석등이나 석탑 수요가 약간 있어요. 그런데 그마저 중국산이 들어오니깐…. 쟁이들이 어렵습니다. 중국산만 덜 들어와도 국내에서 하는 사람들이 그래도 할 만하지만 중국 쪽 가격이 너무 싸서, 우리로선 매우 힘들어요.”

   

▼ 백 선생님도 힘든 것 아닌가요.

“저는 명장입니다. 상업적인 것만을 계속해서는 안 되고 전통을 이어가야 해요. 작품 활동을 계속하면서 석공의 길을 걸어 가야 하지요.”

▼ 상업적인 성공은 그만하신다는 말씀인가요.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작품 활동만 해서는 먹고사는 데 어려움이 있습니다. 건축도 병행해야 합니다. 건축 작업을 하면서 거기에서 나온 이익금을 투자해 작품 활동도 하고 개인전도 합니다.”

실제로 그는 지난해 예술의전당 양쪽 도로 석공사를 하기도 했다. 그러는 한편 지난해에는 그동안 해온 작품을 모아서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돌과 사랑에 빠진 석공

▼ 선생님은 지난해 대한민국 명장 12명에 뽑히는 영예를 안았습니다. 1등의 비결은 뭔가요. 타고난 손재주가 필요한가요.

“절대로 그렇지 않아요. 쉬지 않고 자기 작업을 해야 합니다. 돌 일을 쉬지 않고 계속해야 합니다. 저는 34년째 돌 일을 해왔습니다. 다른 것은 해본 적이 없어요. 저는 다른 이야기를 하면 말을 잘하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돌 이야기라면 쉬지 않고 할 수 있어요.”

▼ 아무리 돌 일을 오래 해도 모두가 선생님처럼 명장이 될 수는 없는 것 아닌가요.

“저는 돌 일을 할 때부터 생각이 달랐습니다. 예를 들어 같은 작품을 만들더라도 어떤 사람은 적당히 해서 돈을 받는 쪽으로 했지만 저는 바보스럽게도 고집을 부려 ‘저 사람보다 잘해야지. 저 사람보다는 더 곱게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일을 했어요. 그리고 돈과 작품 사이에서 선택해야 할 때 저는 항상 작품을 택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선배와 동료들 사이에 입소문이 난 거지요. 그러다보니 조금 발전할 수 있었고, 공부 같은 것도 생각하게 됐습니다. 마감을 할 때에도 ‘백남정이 한 작품은 어디에서는 다른 사람과 다른 게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열심히 일한 것도 발전의 원동력이 됐습니다.”

그는 석공예를 하면서 새로운 공구를 많이 개발했다. 그가 새로 개발한 공구만도 6가지에 달한다. 오랜 세월 돌 일을 하면서 스스로 ‘공정 개선’을 해온 것이다. 이를테면 깊은 곳을 파기 위해 필요한 긴 정, 둥그런 모양으로 팔 수 있는 정 등이 그가 개발한 대표적인 공구다.

그는 명장이 된 뒤 유럽을 처음으로 방문해 돌로 된 서양의 고전작품을 직접 감상한 것도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영국, 프랑스, 독일 등을 가서 작품을 봤습니다. 사실 지금에도 기술적으로는 재현이 가능합니다. 그렇지만 시대적으로 그렇게 오래된 시점에 그런 작품을 만들었다는 게 대단하다고 느꼈습니다. 특히 미켈란젤로의 작품은 대단했습니다.”

▼ 석공예와 조각의 차이는 뭔가요. 조각전을 열기도 했다고 들었습니다.

“사실 기법은 같습니다. 조각품도 사실은 석공예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전시회에 출품하는 작품은 생활용품이 아닌, 뭔가 제가 스스로 구상해서 표현한 것입니다.”

그는 이 말을 마친 뒤 전시회에서 선보였던 작품들을 기자에게 보여줬다. 기자는 전문가는 아니지만 언뜻 봐도 소유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길 정도로 괜찮은 작품이 눈에 뜨였다. 그런데 갑자기 그에게 곤란한 질문을 하고 싶다는 장난기가 발동했다.

▼ 죄송한 이야기지만 만약에 선생님의 작품 활동에 대해 ‘석공예 기술에서는 국내 최고일지 모르지만 미대에서 정식 조각교육을 받지 않은 분이 심오한 주제를 표현하는 작품 활동을 하는 것이 이상하다’는 비판이 제기된다면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대학에서 정식 미술교육은 받지 않았지만 스케치 등 작품을 만드는 공부를 많이 했어요. 그리고 조각가 선생님들의 작품도 많이 만들어봤습니다. 그리고 제가 돌을 깎으면서 나름대로 깊이 고민한 결과가 제 작품입니다. 이것에 대해 돌 깎는 기술만 갖고 작품을 만들었다고 비판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제 작품이 현대미술대전에서 문화관광부장관상, 즉 대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 전에는 기능경기대회, 기능올림픽 하면 주목을 받았는데, 요즘은 관심이 덜한 것 같습니다. 기능인을 바라보는 한국 사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그래서 안타깝지요. 한국은 작년에 국제기능올림픽에서 우승하면서 16번이나 우승하는 기록을 세웠습니다. 기능인을 우대하려는 움직임이 있어요. 그런데 한 번에 양이 다 찰 수는 없지요. 다른 분야보다 대우는 낮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어느 한순간에 모든 것이 이뤄질 수는 없어요. 점차적으로 나아지겠지요. 요즘 기능인들이 살기가 상당히 어려워요.”

그의 회사 직원은 현재 4명이다. 일감이 많을 때에는 외부에서 임시로 인력을 들여와 30명까지 늘어나기도 한다고 했다. 아들이 두 명 있는데 둘 다 가업을 잇는 데는 관심이 없다고 했다.

▼ 백 선생님은 평생 돌과 함께 살아왔습니다. 다른 재질에 비해 돌을 다루기는 힘들다는 게 일반적인 인식입니다. 돌에는 어떤 매력이 있나요.

“나무보다는 다루기가 힘들지요. 그런데 기술을 익히면 그렇게 힘들지만은 않습니다. 같은 돌이라도 방향을 어떻게 치느냐에 따라 힘이 들 수도 있고, 힘이 별로 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한국 돌의 매력

▼ 한국 돌의 품질은 어떤가요.

“대체로 좋은 편입니다. 한국에서도 대리석이 조금 나지만 활성화되지 않아 대리석은 대체로 수입에 의존하는 편입니다. 한국 돌은 화강암이 주류인데 생산 지역에 따라 이름을 붙였습니다. 예를 들어 포천화강암은 포천석, 익산 황등에서 나는 화강암은 황등석이라고 이름을 붙여놓았습니다. 포천석은 건축자재로선 최고입니다. 그 명성 때문에 중국에서 나오는 돌 중에 ‘중국 포천석’이라는 돌이 있을 정도입니다. 용도에 따라 선호하는 돌이 다릅니다. 까만 돌로는 마천석을 알아줍니다. 비석에 쓰이는 오석(烏石)으로는 보령석이 유명합니다.”

▼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돌 중에서 어떤 돌을 가장 좋아하나요.

“제 개인적인 의견이 담긴 편파적인 생각인데 말해도 되는지 모르겠네요. 큰 작품을 할 때에는 황등석이 좋습니다. 물론 포천석도 좋고요.”

좋은 돌을 찾아 전국을 돌아다니기도 한다는 그에게 돌은 어떤 의미냐고 물었더니 그는 자신이 평생 돌을 ‘짝사랑’ 했다며 자신이 지은 시를 소개했다.

‘짝사랑’이라고 이름을 붙인 그의 시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모습이 아름다워 존재하게 하고

미소는 마음을 움직여 찾아오게 하며

보고 있으면 어느새 하나가 되어 있네

만지고 있으면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고

꿈을 이루도록 용기와 힘을 채워주며

행복을 그리고 기쁨을 나누라 하고

참음과 들음을 깨달아 전하게 하며

벗과 함께하는 것을 더하게 하고

넓고 깊고 높은 세상으로

나오라 하네…”

그는 이 시를 돌 위에 새겨 작품을 만들기도 했다며 작품 사진을 보여주기도 했다. 시의 의미를 한 줄 한 줄 설명해가는 그의 모습은 시의 제목처럼 정말로 돌과 사랑에 빠진 석공 그 자체였다.

▼ 그렇게 돌이 좋은가요.

“저는 평생 돌과 함께 살아왔습니다. 좋은 돌이 있다면 어디든지 가지요. 가끔 왕릉을 찾아갑니다. 거기에 가면 요즘 찾아보기 힘든 석물이 많아요. 그런 것들을 보고, 연구하고, 재현해보는 것은 큰 기쁨입니다. 저는 돌쟁이가 된 것을 한번도 후회한 적이 없습니다. 지금 제가 큰돈은 없지만 누구보다 행복해요. 돌쟁이들이 대부분 순수하고 착해요. 사람들이 모두 곧아요. 그래서 악하게 살 수가 없어요. 그리고 정확해야 합니다. 조금만 엇나가도 작품이 기울어집니다.”

▼ 돌은 또 견고하지요

“나무는 불타서 없어질 수 있지만 돌은 몇천년이 지나가도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만든 작품 흔적이 앞으로 어디에선가 남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 더욱 작품에 정성을 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아직도 전세 살지만 행복한 이유

▼ 후진 양성에도 힘을 쓰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배우려는 사람은 많나요.

“2002년부터 시작해서 의정부공고에 다니던 학생 3명을 받아들여 가르쳤습니다. 그중에 한 명은 전국대회에서 은메달을 땄고, 두 명은 세계대회에서 각각 금메달과 은메달을 땄습니다. 보람이 있는 일이지요. 그런데 최근 들어서는 제자를 더 이상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도 의정부공고에 제안을 했는데 애들을 뽑을 수가 없었어요. 재료대, 기계 등 예산이 많이 들어가거든요.”

▼ 이러다가 석공예 맥이 끊기는 것 아닌가요.

“문제입니다. 2009년까지만 해도 광물자원공사가 익산사업소에서 석공예를 가르치는 교육생제도가 있었는데, 이것도 없어졌거든요.”

▼ 언제 가장 행복했나요.

“명장이 됐을 때에도 행복했어요. 그리고 제 개인전을 열 때도 행복했습니다. 제가 돌 일을 평생 해왔지만 미술대학을 나온 것도 아니고 독학을 했는데 개인전을 열 수 있다니, 너무나 행복했어요. 그리고 전시회에 나온 제 작품을 사줄 때 행복했어요. 기자님도 제 작품을 하나 소장해주세요. 앞으로 멀지 않은 시간에 발표회를 열 예정이거든요.”

▼ 살아오면서 위기의 순간은 없었나요.

“일이 없을 때, 내가 이제 돌 일을 그만 둬야 하는 것 아니냐 하는 생각이 들 때 그렇습니다. 제가 비록 돈은 없어도 돌 일은 버리고 싶지 않아요. 돌을 다룰 수 있는 기술이 내 몸에서 흐르고 있어요. 옛날 일을 생각하면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전에도 참 어려웠지만, 지금도 어렵다고 봐야 해요. 전에는 그래도 석공 일을 배우려는 사람이 있었지만 지금은 미대에서도 석공예를 공부하려는 학생이 거의 없어요. 그래도 돌과 있으면 행복합니다. 아무 잡념이 없어요. 돌만 보면 예쁘고 사랑스럽습니다. 돌과의 만남이 제 생애 최고의 만남이었어요. 제 좌우명이 뭔지 아세요. ‘돌을 보기를 황금 보듯이 하라’입니다.”

▼ 혹시 아파트를 소유하고 있나요.

“아뇨, 아직 못 갖고 있습니다. 전세를 살고 있어요.”

▼ 아니 명장이 아직도 전세를 산다는 게 말이 되나요.

“그동안 먹고살아야 했고, 자식들도 가르쳐야 했고. 워낙 우리 집안이 어려웠습니다. 돈 관리를 잘못 했는지도 모르지요. 그리고 석공예를 한다고 돈이 왕창 생기지는 않습니다.”

▼ 우리 사회에서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은 좋은 그림을 사기도 하고 고급가구를 구입하기도 합니다. 혹시 석공예품을 사는 사람은 없나요.

“점점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인사동에서 가끔 전시회를 하는데 작품을 사가는 사람들이 제법 있습니다. 많이 응원해주세요.”

그는 이번에 새로 마련한 600평(1980㎡) 규모의 작업장도 월세 80만원에 얻었다고 밝혔다. 그는 이번 작업실은 일반에도 공개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석공예가 활성화돼야 일반인 중에서도 배우려는 사람이 많을 텐데…. 여기에 작업실을 낸 것도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여기에 와서 배울 수 있도록 하려는 취지입니다.”

▼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없나요.

“우리 석공예인들이 많은 작품을 만들고 좋은 문화를 이끌어갈 수 있는 길이 열렸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다보면 석공예를 배우는 후배도 많이 생기겠지요. 여러 사람이 어울려서 함께 돌 문화를 만들어갔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