方外之士

묵방산 ‘산지기’ 이우원

醉月 2010. 9. 6. 08:48

서산에 해 지면 동산에 달 뜨니 ‘건달’이 일낼 때가 됐다!

 

대학시절 요트를 타고 놀 만큼 부유하던 남자가 30여 년 후 남의 종중산 재실에서 산지기로 살아간다? 사람들은 어떤 우여곡절이 있었기에 인생이 그토록 ‘망가졌는지’, 동정의 시선을 보낼 것이다. 하지만 변산반도 묵방산 재실에 사는 일포 이우원 선생은 “화려하지만 실속 없는 세속에서 떠난 지금이
진정한 삶”이라고 했다. 서산에 지는 해와 동산에 떠오르는 달, 시누대 빽빽한 능선과 조개 펄떡이는 갯벌이 바로 그의 삶터다.

 

 10여 년간 변산반도 묵방산 재실에서 산지기로 살아온 이우원 선생은 “따뜻한 구들방에서 지인에게 차를 대접할 수 있는 시골 생활은 전혀 외롭지 않다”고 말했다.

예술품이란 무엇인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자연의 대용품’ 같다. 문명이란 무엇인가. 자연과 멀리 떨어져 사는 것이다. 도시도 마찬가지다. 자연과 유리된 삶이다. 예술이란 자연을 접할 수 없는 문명과 도시의 산물이다.

많은 돈을 투자해 예술품을 구입할 필요가 없다. 진짜 예술품은 대자연이다. 대자연의 모조품이 예술품인 것이다. 진품은 자연이고 ‘짝퉁’은 예술품 아니겠는가. 자연에서 살면 그게 곧 예술이다. 자연에서 못 사는 사람에게나 예술품이 필요하다. 명산대천을 노니는 것이 멋진 삶이다. 어떻게 하면 산에서 살 수 있는가. 산에서 사는 건 쉽지 않다. 산에서의 삶을 정리해보니 몇 가지 노선이 있다.

첫째는 출가해 승려로 사는 삶이다. 사찰은 명산에 자리잡고 있어 승려가 되면 자연스럽게 산에서 살게 된다. 그렇지만 세속을 포기하고 승려가 되는 결단을 내리기는 쉽지 않다.

둘째는 깊은 산속에서 불을 질러 농사를 짓는 화전민이다. 그야말로 변두리 인생이다. 하지만 요즘에는 없어졌다. 요즘 산에서 불 지르면 대번에 산림법 위반으로 잡혀간다.

셋째는 산지기 생활이다. 산을 지키는 직업이 산지기다. 문중의 선산(先山)이나 또는 재각(齋閣)을 지키며 사는 것이다. 고전적인 직업이라 할 수 있으나 아직 명맥을 유지한다.

넷째는 수목원 직원이 되는 길이다. 꿩 대신 닭, 최선책이 없으면 차선책을 강구하라 했던가. 산 대신 수목원에서 생활하는 것도 바람직한 삶의 노선이 된다. 월급도 받으며 수목 가운데서 살면 아무래도 인간사 스트레스에 덜 시달릴 게 아닌가. 봉급은 약간 적어도 상관없다. 독일에서는 수목원에 종사하는 것을 아주 좋은 직업으로 여긴다고 한다. 하지만 수목원에 취직하기도 쉽지 않다. 수목에 대한 전문지식을 갖춰야 할 게 아닌가.

 

태인 허씨 재실에 사는 부부

이 중 세 번째 노선, 산지기의 삶을 택한 사람이 있다. 변산반도의 묵방산(墨房山) 재실(齋室)에 사는 일포(一布) 이우원(李宇源·55) 선생과 부인 변주원(卞柱元·47)씨의 삶이 바로 그것이다. 전국에 비어 있는 재실이나 재각은 매우 많다. 한국에 존재하는 수백개 성씨 중 대부분이 종중산(宗中山)을 관리하는 재실을 두고 있는데,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거의 비게 됐기 때문이다. 경쟁자가 별로 없으니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이러한 재각, 재실에 들어가 살 수 있다. 완전히 땅 짚고 헤엄치기다. 전국의 재실, 재각, 고택, 서원 등을 어림잡아 보면 3만여 곳에 이른다. 살아줄 사람이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우원 선생은 전북 부안군 보안면 월천리 묵방산 자락에 있는 태인(泰仁) 허씨(許氏) 재실에 살고 있다. 변산반도 가운데쯤 되는 위치다. 변산은 수천개의 산봉우리로 이뤄졌는데, 봉우리 높이가 모두 고만고만하다. 보통 해발 300∼400m다. 우뚝 솟은 산, 말하자면 주산이 따로 없다. 변산반도는 이런 봉우리 수천개로 둘러싸인 지역이다. 이 봉우리 중 하나가 묵방산이다. 야산에 가까운 산이라 이렇다 할 볼거리는 없다. 변산의 다른 봉우리들이 대부분 바위로 이뤄진 암산인데 비해, 흙이 덮여 있는 묵방산은 토산에 가까워 묘를 쓰기에 적합하다. 바위산은 살기(殺氣)로 보기 때문에 묏자리를 쓰기에 좋지 않다.

재실로 들어가는 능선 모퉁이에 푸른색 시누대(山竹의 일종)가 빽빽하게 늘어서 있어 초행길의 나그네를 반긴다. 역시 집 주위에는 소나무와 대나무가 있어야 품격이 느껴진다. 야생 시누대밭은 방문객으로 하여금 청림(靑林)의 유현(幽玄)함을 실감케 한다. 이것이 시누대가 풍기는 매력이다.

밭을 지나니 산자락에 대략 4칸 규모의 와가(瓦家)가 있다. 걸려 있는 편액에 ‘추원재(追遠齋)’라고 씌어 있다. ‘조상을 추모하는 재실’이라는 뜻이다. 오른쪽 백호에서 갈라져 나간 지맥이 안산을 이룬다. 이른바 백호본신(白虎本身)이 안산인 형국이다. 이럴 경우 장남보다는 차남이, 남자보다는 여자가 먼저 발복(發福)한다는 설이 있다. 또 주변엔 인가가 보이지 않는다. 독립가옥이라 산지기가 살 만한 격을 갖췄다.

   

계약서도, 전세금도 필요없다

-언제부터 변산에 들어와 살았나.

“1994년 12월 말 변산에 처음 들어왔다. 이곳에는 천도교에서 운영하는 호암(壺岩)수도원이 있다. 거기에 수행하러 왔다가 변산과 인연을 맺었다. 이곳 태인 허씨 재실에 들어온 것은 지난 1995년 3월26일이다. 올해로 벌써 10년째다. 세월이 참 빠르다.”

-태인 허씨 재실이 비어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나. 이곳과 인연을 맺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호암수도원에 ‘개암(開巖)장’이라고 불리던 천도교의 원로가 계셨는데, 그 어른이 이곳을 소개해주셨다. 내가 빈집을 구하러 다닌다고 하니까 ‘수도인은 소유해서는 안 된다. 언제든지 쉽게 떠날 수 있어야 한다’고 조언하셨다. 그런 곳이 어디 있는지 물으니 여기를 추천하신 것이다.”

-남의 문중 재실을 지키는 ‘산지기’ 또는 ‘재실지기’의 장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첫째, 계약서가 필요없다. 언제라도 나가면 끝이다. 복잡하게 계약서를 작성하거나 공증을 받을 필요도 없다.

둘째, 계약금도 전세금도 필요없다. 돈을 내지 않는다는 점이 매력이다.

셋째, 딸린 논밭이 있다. 재실마다 제사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논밭이 딸려 있게 마련이다. 최소한의 호구지책은 된다. 추원재에는 논과 밭이 각각 6마지기씩 있다.

넷째, 명당이다. 대체적으로 재실은 조상 제사를 지내는 곳에 있다. 터를 볼 줄 아는 지관들이 자리를 잡은 곳이라서 명당인 경우가 많다. 여기도 풍수가 괜찮다.

다섯째, 문중행사에 일절 관여하지 않는다. 허씨 집안에서 1년에 한두 차례 제사를 지낼 때 나는 전혀 관여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음식 장만하는 것도 도와줄 의무가 없다. 대신 문중 제사가 있을 때에는 1박2일 정도 재실을 비워 준다. 그때에는 다른 곳으로 여행을 다녀온다. 산지기로 산다는 열등감만 없애면 된다. 자존심만 죽이면 만사가 편안하다.”

-산지기를 직업이라고 생각하나. 요즘도 산지기를 하려는 사람이 있나.

“처음 보안면 면사무소에 전입신고를 하러 갔던 일이 생각난다. 전입전출 담당 면사무소 직원이 물었다. ‘직업이 뭡니까?’ ‘산지기입니다’ ‘산지기요?’ ‘내 직업이 산지기입니다’ ‘그렇다면 돈을 받습니까?’ ‘돈은 받지 않습니다’ ‘돈을 받아야지 직업 아닙니까?’ ‘돈을 받지 않아도 나는 산지기입니다. 남의 집 산을 지키면서 사니 산지기 아닙니까? 내가 산에서 살아주니 산 주인이 좋아하고, 나는 살 곳이 있어 좋고. 그러니까 산지기 아닙니까?’ 하고 문답을 주고받았다. 전국에 산지기로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정확한 수는 모른다.”

-산지기를 해서 먹고살 수 있다고 생각했나. 아무것도 없이 산에 들어와 살려고 했다니 배짱이 대단하다.

“변산에 들어올 무렵 모든 것을 놓아버린 상태였다. 그저 수도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수도라는 것이 천도교의 마음공부와 이에 따른 주문(呪文)의 수행이었다. 집사람과 가진 돈을 합해보니 총 300만원이었다. 이것만 가지고 재실에 들어왔다.

-마음을 놓는다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집착을 놓는다는 뜻인데, 인간사 사는 일이 매사가 집착이다. 집착을 놓는 건 한번 죽었다 살아나야 가능한 일이라 한다. 마음을 놓기까지 특별한 계기가 있었을 것 같다.

“동학(천도교)의 주문이었다. 21자로 된 ‘지기금지 원위대강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의 주문이다. 보통 ‘시천주(侍天主)’라 부른다. 동학의 창시자인 수운 선생이 외우던 것이다. 처음 이 주문을 접한 건 1991년, 내 나이 마흔한 살 때였다. 당시 나는 가정에서도 쫓겨나고 친구들에게도 쫓겨나고 세상으로부터도 쫓겨난 상태였다. 무슨 일을 해도 실패만 거듭했다. 내 인생에서 가장 밑바닥에 떨어진 시기였다.

이런 절망 상태에서 천도교 종학대학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고, 거기서 집중적인 수도를 하려면 서울 우이동에 있던 의창수도원에 몇 달 동안 머물러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곳에서 수행하면서 주문을 암송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종교체험을 하게 됐고, 이후 세상사와 약간 거리를 둘 수 있었다. 주문수행에 재미를 붙여 이곳저곳 수행처를 찾아다니던 중 지금의 아내를 만나 재혼했다. 생각해보니 집사람도 겁이 없는 사람이다. 먹고사는 문제에 대한 공포가 적었다고 한다. 하늘에서 어떻게든 도와주겠지 생각했단다. 집사람이 그러니 나도 큰 걱정을 하지 않았다. 어디 가서라도 먹고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해서 재실에 들어왔다.”

   

쇠똥 치우고, 조개 캐고

산지기를 하면서 광목에 천연물감 들이는 기술을 배웠다. 제법 돈벌이가 된다.

이 선생은 서울의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연세대 신학과를 졸업했다. 집안이 넉넉해 대학 다닐 때는 요트를 즐겨 탔다. 집에서 요트사업을 했는데, 대략 4m 크기의 쌍돛을 단 요트를 22척이나 갖고 있었다고 한다. 1971년 대한요트클럽을 창설하는 데도 열심히 참여했다. 군대를 다녀와서는 요트선수 생활도 했다. 신학과를 졸업했지만 목사가 되지 않으면 다른 직장에 취업하기가 쉽지 않았다. 결국 1983년 무렵부터 대한청소년 요트학교를 운영했다.

이후 그는 파란만장한 인생길을 걷는다. 회사를 다니다 그만둔 것도 여러 차례였고, 서울 종로2가 관철동에서 ‘학사주점’을 운영하기도 했다. 대학생들이 두부파티를 많이 하던 곳이었다. 당시 데모하다가 잡혀 감옥에 갇혔다가 풀려 나오면 친구들이 두부를 먹이는 일이 관례였는데, 그들의 단골집이었던 것. 그가 학사주점을 운영하면서 벽에 붙여놓은 구호가 있었다. ‘마셔도 취하지 말자. 취해도 흔들리지 말자. 흔들려도 외상 긋지 말자!’ 이처럼 외상이 많았으니 장사가 잘됐을 리 만무하다.

그야말로 좌충우돌 인생이었다. 이 선생은 전형적인 소양인 스타일이다. 대체로 소양인은 조직과 규율에 구속받는 것을 싫어하고 돌아다니는 일을 좋아할 뿐 아니라 감정을 쉽게 드러낸다. 자기 마음에 안 드는 일이 있으면 그 자리에서 직언을 한다. 상사가 좋아할 리 없다. 한마디로 유목민 기질이 강한 체질이다. 그러니 현실적인 스타일은 아니다. 이 선생 같은 소양인들은 장사를 잘 못한다. 실속 없는 낭만주의자가 많다. 그의 얼굴에서 전형적인 소양인에 가깝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소양인은 비판적인 편이라 종교에 입문하기 쉽지 않다. 차분하고 내성적인 소음인이 종교에 쉽게 입문한다. 하지만 그는 입문하지 않으면 안 될 만큼 절박한 상황에 직면했던 것 같다. 모든 종교의 입문이 그렇듯 그와 동학과의 인연도 밑바닥 상황에서 맺어졌다. 그렇게 입문이 어려울수록 폭발하면 파괴력이 멀리까지 미친다. 대학 다닐 때 요트를 타던 그가 40대 중반에 아무도 찾지 않는, 변산의 궁벽진 재실까지 오는 과정에 어찌 사연이 없겠는가. 요트클럽 멤버에서 산지기로의 변신. 인생은 이런 대전환이 이뤄지는 곳인가.

-하루 종일 집에서 주문만 외우지는 않을 테고, 여기서 주로 어떤 일을 하나.

“농사짓는 게 주업이다. 재실에 딸린 논과 밭을 짓는다. 각각 6마지기니 2400평에 이른다. 첫해에는 허씨 종중에서 이 전답을 내주지 않았다. 1년쯤 겪고 나니 농사를 지어도 좋다고 허락했다. 도시에서 태어나서 농사일을 해본 적이 없었지만 차츰 익숙해졌다. 논에는 주로 쌀농사를 지었고, 밭에는 배추 고추 시금치 파 당근 고구마 감자 등을 심었다.

동네에 나가서는 걸리는 일은 무엇이든 했다. 쇠똥 치우는 일도 했다. 변산 일대에는 젖소를 키우는 농장이 많다. 젖소농장의 큰 일이 쇠똥 치우는 것이다. 쇠똥은 양도 많고 냄새도 지독하다. 시골 사람들도 이 일은 꺼린다. 하지만 나는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그때 받은 일당이 3만원이다. 다른 사람은 5만원을 받았지만 나는 ‘초짜’라 3만원밖에 못 받았다. 하지만 이것도 감사하게 생각했다.

정미소에서 왕겨 담는 일도 했다. 꺼끌꺼끌한 왕겨 먼지가 몸에 달라붙어 무척 힘들었다. 이 일도 일당이 3만원이었다. 절간 짓는 일 보조도 했다. 기술이 없으니 보조밖에 할 일이 없었다. 주로 목수들이 먹을 라면을 끓이고 잡일, 심부름 등을 하는 것이다. 한번은 2층에서 10kg이 넘는 망치가 떨어지면서 내 어깨를 스친 적이 있다. 머리 위로 떨어졌다면 아마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한달 보름 정도 일하고 150만원을 받았다. 남의 집에 가서 품앗이한 적도 있다. 주로 농약을 칠 때 줄을 잡아주는 것이었다. 이 일이 가장 힘들었다. 농약의 독성이 지독해 견딜 수 없었다. 이 일은 한번 하고 그만뒀다. 뱀 잡는 그물을 치는 일도 도와준 적이 있다. 갯벌에 나가 조개 채취하는 일도 했다.

변산은 농사와 바닷일을 모두 할 수 있는 ‘수륙양용’ 지역이다. 부지런하면 절대 굶어 죽지 않는다. 이 지역 사람들이 하는 말이 있다. ‘갈고리만 하나 있으면 굶어 죽지 않는다’고. 조개 같은 해산물을 채취할 수 있는 갈고리 하나 달랑 들고 갯벌에 나가면 무엇이든 손에 걸리게 마련이다. 초보자도 쉽게 캘 수 있는 모시조개를 비롯해 맛조개, 개불 등을 잡는다. 개불은 삽질을 제대로 해야 잡을 수 있다. 삽질을 잘하는 숙련자의 하루 일당은 10만원이다. 또 저수지가 많아 민물낚시도 잘 된다. 이렇듯 먹을 것이 많은 동네다. 또 문화공연이 있을 때 이를 기획하고 연출하는 일도 했다. 서울에서 문화운동 하는 친구와 인연이 있어 종종 도움을 받곤 했다.”

   

흙내음을 맡으며 솟아나는 새싹을 볼 때마다 생명의 위대함을 느낀다.

이우원 선생 부부는 산지기를 하면서 몇 가지 기술을 배웠다. 우선 광목에 여러 가지 천연물감을 들이는 기술이다. 광목은 파스에 주로 사용돼 ‘파스천’이라 불린다. 가격은 한 발에 2000원이라 저렴한 편이다. 파스천에다 감물, 황톳물, 먹물을 들인다. 가장 많이 사용하는 것은 황톳물인데, 황토의 재질이 좋아야 좋은 작품이 나온다. 따라서 농약에 오염되지 않은 진홍빛의 황토를 구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 지하 1m 깊이의 황토를 파서 1년 동안 쌓아놓아 숙성시킨다. 황토도 누룩처럼 숙성 과정이 필요하다.

그 다음 요건은 물이 좋아야 한다는 것이다. 석간수가 좋다. 수돗물을 사용하면 색이 바랜다. 그 다음이 정성이다. 세 번을 물들이느냐, 아홉 번을 물들이느냐는 정성이 좌우한다. 이렇게 천연물감을 들인 광목으로 작설차를 마실 때 찻상(茶床)에 까는 다포(茶布)와 베개를 만든다. 약간의 수입이 된다.

 

‘묵방산 들국화차’ ‘야초 식초’ 개발

또한 부부는 ‘묵방산 들국화차’를 개발했다. 묵방산 일대에 자생하는 들국화(구절초)를 따서 말려 만든 차인데, 독특한 향이 일품이다. 일명 ‘구절초차’다. 그 품질과 향기를 인정받아 지난해 12월부터 서울 신세계백화점에 납품하고 있다.

들국화차를 개발한 것도 우연한 계기를 통해서다. 5년 전쯤 부인 변씨가 재실이 있는 묵방산 뒷길을 걸어오다가 묘지 옆에 피어 있는 구절초를 보게 됐다. 꽃이 너무도 아름다워 코를 대보니 향기도 좋았다. 이곳에서만 자생하는 구절초였다. 옛날에는 구절초가 변산 일대에 널리 퍼져 있었으나 농약과 제초기가 등장하면서 다른 잡풀과 함께 잘려나가 버렸다. 사람의 발길이 드문 재실 근처에만 일부 살아남아 있었던 것.

구절초 향기에 반한 변씨는 이를 마실 수 있는 차로 만들어볼 생각을 했다. 차로 만들어 먹어보니 독특한 맛이 났다. 또 여성 건강에 효과가 좋다는 소문이 나면서 차츰 찾는 사람도 늘었다. 지금은 농사보다 들국화차 재배에서 나오는 소득이 더 많다고 한다. 예전에는 생각지도 못한 길이 열린 셈이다. 이런 변수가 생기리라고 어찌 예측이나 했겠는가. 인생은 이처럼 알 수 없는 ‘스리 쿠션’이 무수히 널려 있으니 미리 걱정할 필요가 없다. ‘궁즉변(窮卽變)이요 변즉통(變卽通)’이라 했던가. 이 세상에 죽으라는 법은 없는 것 같다.

부부는 ‘야초 식초’도 개발했다. 공정을 살펴보면 이렇다. 단오 전후 새순이 돋아나는 들풀을 딴다. 오만 가지 풀을 가리지 않고 모두 따 항아리에 넣고 흑설탕을 넣는다. 흑설탕과 풀의 비율은 1대 1이다. 그리고 21일간 발효시키고 3개월 동안 숙성시킨다. 발효 과정에서 흑설탕과 풀을 매일 한 번씩 뒤집어준다. 보통 뒤집어주면 뜨뜻해지는데, 어느 날 차갑게 변한다. 발효가 끝났다는 신호다. 다음에 이걸 걸러서 액체(원액)를 모아놓는다. 그 원액을 통풍이 잘 되는 그늘에서 좀 더 숙성시킨다. 그런 후 원액에 물을 부으면 ‘야초 식초’가 완성된다.

부부는 친구나 친척들이 오면 야초 식초를 선물로 준다. 또 야초 식초에 물을 더 부어서 밭에다 거름으로 주면 병충해가 사라질 뿐 아니라 토양도 좋아진다. 야초 식초는 시골에 살면서 터득한 제품이다. 대지(大地)와 살을 붙이며 살다보면 터득되는 게 여러 가지다.

부부는 맨발로 밭고랑에 가서 풀을 맨다. 운동이 따로 없다. 맨발로 밭고랑을 밟으려면 땅에 독성이 없어야 한다. 그래서 밭에 절대로 농약을 치지 않았다. 내 땅을 믿는다는 신뢰가 깔려 있다. 농약을 치지 않아도 작물은 잘 자란다. 소출이 적으면 어떤가. 적으면 적은 대로 사는 것이다. 이 선생은 맨발로 밭고랑을 밟고 다니는 것이 수도요, 일이라고 생각한다. ‘수도 따로 일 따로’가 아니다. 맨발로 땅을 밟으면서 동학의 주문을 외운다. 주문과 맨발 그리고 밭고랑이 하나가 되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흡족해진다고 한다.

-시골에 사는 즐거움은 무엇인가. 변산은 서해안이라 석양이 좋은 것으로 알고 있다.

“몸과 마음이 좋아하는 것을 실컷 누릴 수 있다. 물과 공기가 좋지 않은가. 서울의 공기와 변산의 공기를 어떻게 비교할 수 있겠는가. 인생의 엄청난 보상이다. 변산은 바다와 산이 어우러져 있다. 내변산으로 들어오면 깊은 산속 같은 분위기지만, 차를 타고 20∼30분만 나가면 서해안의 갯벌과 바다가 눈앞에 들어온다. 어디서나 푸른 산과 바다가 나를 반긴다.

변산은 일출과 일몰을 동시에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특히 석양이 일품이다. 석양도 계절에 따라 관찰하는 위치가 달라진다. 봄과 여름에는 변산 앞의 섬인 위도 북쪽 방향으로 해가 진다. 이때는 고사포와 격포 사이의 해안도로에서 바라보는 것이 가장 전망이 좋다. 해가 짧아지는 가을과 겨울에는 위도 남쪽으로 해가 진다. 이때는 궁항이나 모항 등 변산의 남쪽에서 바라보는 일몰이 가장 아름답다.”

   

먹고사는 문제에 얽매이지 않고 자연이 주는 풍요로움을 만끽하며 사는 부부. 두 사람은 무척 닮아있었다.

먹고사는 문제의 고달픔을 위로해주는 것이 자연경관을 바라보는 즐거움이다. 자연경관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옛 사람들은 ‘연하벽(煙霞癖)’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했다. 이는 산에서 피어오르는 안개와 노을을 말한다. 아침저녁으로 안개와 노을에 싸여 있는 심산(深山)의 풍경은 문사를 흡인하는 매력이 있다. 오죽하면 괴팍한 집착의 의미를 지닌 ‘벽(癖)’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을까. 연하벽이 있는 조선 선비들은 벼슬을 헌신짝같이 버리고 산에 들어가서 구곡(九曲)이나 누정(樓亭), 또는 정사(精舍)를 짓고 살았다. 인생의 의미와 보람을 연하에 뒀음을 알 수 있다. 어찌 보면 조선시대 선비들의 삶이 현대인의 것보다 훨씬 고품질이었을 수도 있다.

해와 달도 인생의 피로를 씻어주는 청량제다. ‘서일락 동월출(西日落 東月出)’이란 말이 있다. 서산으로 해가 떨어지면 동산에서 다시 달이 떠오른다는 뜻이다. 서산으로 지는 붉은 해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장엄함을 선사한다. 석양을 보면서 악심을 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동해안의 일출이 한 수 시라면, 서해안의 일몰은 한 편의 산문이다. 동해의 일출은 의욕을 주지만 서해의 일몰은 삶의 피로를 풀어준다.

불교에서는 서방에 아미타불이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아미타불을 본존으로 모신 절의 방향이 서쪽을 향하는 것이다. 즉 서쪽을 숭배하는 것이다. 왜 아미타불이 서방에 있다고 여겼을까. 필자는 이 문제를 오랫동안 생각했는데, 서해안의 석양을 보면서 그 의문이 풀렸다. 석양은 평화와 안식을 주기 때문이다. 인간이 태양의 온전한 모습을 바라보기는 어렵다. 한낮의 태양은 눈이 부셔 제대로 바라볼 수 없다. 하지만 노을은 온전히 바라볼 수 있다. 태양은 서방에 이르러야 비로소 자신의 모습을 모두 보여준다. 이게 자비다. 아미타불은 자비이고, 석양이 아닐까. 서쪽을 향해 지은 아미타불 도량은 예불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석양을 볼 수 있게 한다.

 

동산에서 달을 희롱한다

그러면 달은 어떤가. 해가 지평선 너머로 넘어가서 깜깜해지면 왠지 허무하다. 이때 동쪽에서 다시 쟁반 같은 보름달이 서서히 올라온다. 동산에 훤한 달이 올라오는 모습도 장관이다. 달을 보면서 육신이 쇠퇴하면서 찾아오는 외로움과 서러움을 위로받는다. 해가 지면 다시 달이 뜬다. 여기에는 깊은 이치가 담겨 있다. 전반전이 끝난다고 모든 것이 끝나는 게 아니라 후반전이 기다리고 있구나.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죽음 이후에 환생이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달을 바라보는 것은 후반전에 대한 기대를 품는 것과 같다. 달은 희망이다.

옛 어른들은 농월정(弄月亭), 망월정(望月亭), 소월정(笑月亭)을 지어놓고 보름달이 뜰 때 달을 바라보고 즐겼다. ‘달을 희롱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겠는가. 인생의 무상을 절절하게 느껴본 사람만이 달을 볼 수 있다. 달을 희롱할 수 있다. 그렇다면 달을 희롱할 정도의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필자가 이 선생 부부가 사는 재실을 방문한 날도 마침 보름날이었다. 저녁 8시쯤 되니 좌측 하늘에서 둥그런 보름달이 얼굴을 쑥 내민다. 남향집이라 왼쪽에서 달이 떠오른다. 한 시간만 달을 보고 있어도 그 흡족함은 이루 표현할 수 없다.

-한 달 생활비는 얼마나 들어가나.

“보통 50만원 미만이다. 전화요금, 전기요금, 건강보험료, 기름값이 지출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 외에는 별로 돈 들어갈 일이 없다.”

-시골생활이 심심하거나 외롭진 않나.

“사실 서울보다도 여기에서의 삶이 덜 외롭다. 서울에서는 무척 외로웠다. 친구와 만나도 할 것이 없었다. 그저 술집에 가는 것이 전부였다. 또 한번 얻어먹으면 반드시 사줘야 했다. 그러다 보니 돈이 없으면 놀 수도 없었다.

하지만 이곳에는 텃밭이 있고, 산이 있고, 장작을 때는 구들방이 있다. 돈이 없는 사람에게도 구들방에서 차를 대접할 수 있다. 불을 때놓고 1박2일 동안 친구들과 놀다보면 무척 가까워진다. 속에 있는 이야기도 쉽게 터놓게 된다. 서울 친구가 여기 와서 제일 먼저 묻는 게 ‘뭘 먹고 사냐’다. 나는 ‘잘 먹고 산다’고 대답한다. 이어서 묻는 게 ‘외롭지 않냐’다. 나는 ‘외로울 시간이 없다’고 대답한다.

그런 문답이 오간 다음에 친구들은 뜨듯한 구들방에 반해버린다. 장작으로 벌겋게 지져놓은 구들방에 발을 들여놓으면 다음 질문은 잊어버린다. 그러고는 ‘고향에 온 것 같다’ ‘어머니 품속 같다’고 말한다. 서울 생활은 주로 아파트에서 이뤄진다. 아파트에는 남자의 공간이 없다. 거실 텔레비전 앞이 고작이다. 하지만 시골에는 남자의 공간이 있다. 그러니 친구들이 오면 꼭 자고 가려 한다.

   

심산과 창해가 맞물려 있는 변산. 이곳이 그를 한 단계 성숙시켰다.

서울 생활이 겉으로는 화려하게 보이지만 실속이 없다. 동학에 보면 ‘수자여허이유실(修者如虛而有實)이요, 문자여실이유허(聞者如實而有虛)’라는 말이 있다. 수도하는 사람은 겉으로 볼 때 허전한 것 같지만 따져보면 실속 있게 살고 있고, 밖에서 듣기만 하는 사람은 실속 있는 것 같아도 막상 따져보면 허전한 삶이라는 뜻이다. 도시와 시골 생활을 여기에 비교할 수 있다.”

 

어머니 품 같은 시골생활

이우원 선생은 요즘 배 띄우는 사업에 골몰하고 있다. 변산은 삼면이 바다라 배를 띄우기에 천혜의 조건을 갖췄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실제로 옛 문헌들에는 격포 앞바다에 수많은 돛단배가 있었다고 나온다. 격포 앞바다에 배가 뜨는 것이 부안과 변산반도의 살길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전통 배를 복원해 띄우면 엄청난 관광자원이 되리라는 것. 부안은 핵 폐기장 유치 문제를 놓고 1년 넘게 주민들 사이에 대립과 갈등이 있었다. 아직도 서로 상처를 안고 있다. 이를 치유하는 방안, 상생하는 방안이 필요하다. 이 선생은 그 방안이 조선시대에 왕래하던 전통 돛단배를 만들어 변산 앞바다에 띄우는 일이라고 결론 내렸다.

그는 대학 다닐 때부터 배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지난 30년 가까이 배에 대한 문헌과 배 운용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추적해왔다. 그 결과 우리 전통 배는 참 좋은 볼거리가 될 거라고 확신한다.

특히 사신선(使臣船)이 그렇다. 조선에서 통신사를 싣고 일본으로 가던 배가 사신선이다. 1607년부터 1811년까지 약 200년 동안 12회에 걸쳐 일본에 통신사가 파견됐다. 선단은 정사(正使)가 타던 정사배 1척, 부사배 1척, 첨사배 1척 그리고 병참선 3척으로 구성됐다. 이는 평화의 배였다. 군사적인 목적이 아니었다. 아울러 크기와 시설 면에서 무척 화려한 배였다고 한다. 나라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뱃전을 아름답게 꾸미고 여러 가지 깃발을 꽂았다. 배의 길이는 대략 50m이고, 탑승인원은 정사배가 200명, 부사배가 150명, 첨사배가 100명 정도였다. 이 선생은 이 배들을 부안군과 함께 복원해 격포 앞바다에 띄우고 싶다고 한다.

원래 변산반도는 고려 때부터 배를 만드는 곳이었다. 고려 때 문인 이규보(李奎報)가 변산을 다녀간 후 ‘남행월일기(南行月日記)’를 남겼다. 당시 변산에서는 몽골 황제의 명령으로 여몽연합군이 일본을 정벌할 때 타고 갈 군선 900척을 제작했다. 변산에는 재질이 우수한 목재가 산마다 가득했기 때문이다. 이규보가 변산에 온 이유도 벌목감독 격인 벌목사(伐木使) 일을 수행하기 위해서였다. 조선시대에도 변산은 궁궐에서 사용하는 나무를 생산하던 곳이었다. 이처럼 좋은 소나무가 많은 변산은 목선을 만들기에 적합한 조건을 갖췄다. 변산은 광경(廣經) 80리에 목재가 꽉 들어차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전통을 계승해야 한다. 그것이 ‘사신선 복원’이라고 이 선생은 주장한다. 대학 시절에 요트를 타던 경험이 사신선까지 연결된 셈이다.

배 띄우려는 산지기

방외지사 이우원 선생의 삶은 수륙양용이다. 산을 지키는 산지기에서 시작해 배를 띄우는 해상 사업에까지 몰두하고 있으니 말이다. 단돈 300만원을 들고 아무도 살지 않는 재실에 들어온 그가 이젠 수백억원 규모의 사신선 프로젝트를 꿈꾸고 있다.

변산은 이런 곳이다. 심산(深山)과 창해(滄海)가 안팎으로 맞물려 있는 영지(靈地). 인간사는 결국 생각의 크기, 즉 상상력에 의해 좌우되는데, 그 상상력은 해와 달, 별을 바라보는 삶에서 나온다. 건달이 일낸다. 한가한 사람이 아니면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겠는가. 도시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숨가쁘게 사는 생활에서는 이런 상상력이 나올 수 없다. 10년 산지기 생활이라는 내공이 내놓은 아이디어가 바로 사신선 복원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