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단체&요결

풍류도 역사자료

醉月 2009. 12. 6. 08:23

I. 태고(太古)의 빛

 

1. 풍류의 기초개념

1) 간추림
풍류는 최소한 2000년 정도는 묻혀 있다가 1980년대에 들어서야 세상에 드러난, 아득한 고대의 진리이다. 그것도 그냥 묻혀 있었던 것이 아니라, 풍류가 아예 부활할 수 없도록 발본색원(拔本塞源)하려고 작정한 제왕(帝王)들에 의해, 지속적인 탄압을 받으면서 숨어있어야 했다.
그 기나긴 세월동안 풍류의 주역(主役)들은 대부분의 영토와 백성을 잃어야 했고, 그 영토와 백성들이 지니고 있던 유물 . 유적과, 그 유물 . 유적들에 담겨있던 진리들을 상실해야 했다. 그 결과 지금 남아있는 풍류의 유산은 동아시아 끝자락의 [한반도]와, 그 나라에 사는 세계인구의 1% 정도를 차지하는 [한겨레] 뿐이다.
그러나 영토가 좁고 인구가 작다고하여 절망할 이유는 없다. 왜냐하면 그 작은 [한나라]의 [한겨레]가 [하늘나라]의 [하느님들]이기 때문이다. 즉 [한나라]는 [하늘나라]요, [한겨레]는 [하늘겨레]인 것이다.

그리고 이 사실은 이 책에서 무수히 많은 증거자료를 이용하여 증명될 것이다.


이 하늘나라에는 하늘겨레가 지켜온 하늘의 진리가 있으니, 그것이 <천부경>에 담긴 풍류대도(風流大道)이다. 풍류대도가 <천부경>에 담겨있기 때문에, <천부경>을 모르고서는 풍류에 대해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 그 대신 <천부경>을 알면 풍류를 중심으로 인류의 모든 문화를 종합할 수 있고, 잘못된 진리들을 추려낼 수 있음은 물론 바로잡을 수도 있다.


그래서 어려운 내용인 줄은 알지만, 이 책 전반에 걸쳐 활용되어야 할 내용을 간추려 첫머리에 소개한다. 여기에 소개되는 [<천부경> 약해]는 풍류대도의 제2편인 <천부경>해설의 내용 중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제2편과 중복되는 단점이 있지만, 이 내용을 모르면 이 책의 내용을 이해하기 어려우므로 어쩔수 없이 핵심내용만 소개하는 것이다.
그리고 [풍류의 통치제도]는, 풍류대도의 내용이 너무나 방대하다보니 아무리 체계적으로 설명을 하여도 혼란을 피할수 없기 때문에, 전체적인 윤곽을 미리 소개해 둔 것이다. 처음 이런 내용을 읽는 사람이라면 황당하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겠지만, 이 내용들은 분명히 문헌적 근거가 있는 사실들이요, 우리말 속에 지금도 그 흔적이 생생히 남아있다.
우리나라의 국력이 세계를 무대로 삼을 수 있을 정도에 이르른 지금, 여기에 설명된 역사적 사실만 외워 두어도 그 어떤 나라의 어떤 민족에게도 멸시받지 않을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이 숭배하고 신앙하는 신(神)들이 모두 우리들의 직계 조상이기 때문이다.

 

2) 풍류의 통치제도

① 삼한 . 삼신 . 삼계
한겨레의 종족 칭호로 널리 알려진 동이족(東夷族)의 나라, 즉 환인(桓因)의 환국(桓國), 환웅(桓雄)의 배달국(倍達國), 환검(桓儉; 단군왕검)의 고조선(古朝鮮)은 고대에 전세계를 다스리던 세계정부였다.
그 세계정부의 통치계급인 동이족은 [이인(異人)]으로 불리던 신(神)들이었으며, 그들은 세계를 세 부분으로 나누어 다스렸으니, 그것이 지금 우리들이 한반도의 남쪽 구석에 있었다고 잘못 알고있는 삼한(三韓)인 것이다.
이 삼한의 규모는 지금 사람들이 상상할 수 있는 한계를 벗어난 고대의 세계정부였다. 5,000여년 전에 유라시아 대륙 전체를 영토로 하던 세계정부의 존재를 인정할 수 있는 사람들이 지금 얼마나 되겠는가!
그래서 이 책은 들머리에서부터 학교에서 가르치는 고대사의 학설이나 상식같은 것은 거의 무시하다시피 해설해 나가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를 많이 배운 사람일수록 더 심한 혼란을 일으키게 된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이 책에서 자주 사용되는 중요한 용어들을 미리 정리해 두는 것이다.


삼한은 본래 환인을 천황(天皇)으로, 환웅을 지황(地皇)으로, 단군을 인황(人皇)으로 하는 삼환신(三桓神)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고조선의 성립과 함께 인황이 천황과 지황을 통합한 절대제왕이 되면서 인황이 최고신이 되고, 천황과 지황은 상징적인 지위로 밀려난 것으로 보인다.


고조선의 중앙정부는 진한(辰韓)이었고, 진한은 인계(人界)로서 단군이 바로 진한왕인 인황이다. 그런데 단군은 인황이면서 천황을 겸하고 있었다. 그 속사정은 상당히 복잡하므로 본문에서 해설하기로 하자. 이 단군을 대신하여 영토권을 행사하던 지황(地皇)이 마한왕(馬韓王)이며, 이 마한왕은 중국의 고대신화에 서왕모(西王母)로 알려진 태음신이다.


서왕모가 다스린 영토가 지계(地界)라고 불리던 우물(井)이었다. 즉 우물은 상고시대에 지황의 궁전을 부르는 이름이었던 것이다. 지황(서왕모)의 역할은 여신(女神)을 거느리고 천자(天子)를 생산하는 것이었다. 고대국가의 시조들은 하나같이 아버지가 분명하지 않고 신(神)의 아들이라고 미화되어 있는데, 이는 미화된 것이 아니라 사실을 사실대로 기록한 역사이다.
즉 그들은 실제로 신의 아들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신은 헛깨비가 아니라 인신(人神)인 동이족의 우두머리인 단군이었다. 지황에 의해 여신전에서 교육받은 신녀(神女)들은 단군의 씨를 받아 속세로 내려가 나라를 세우고 태후(太后)가 되었다. 태후가 낳은 임금들, 그들이 바로 천자이다. 이 천자를 달리 부르는 이름이 변한(弁韓) 또는 번한(番韓)인 것이다.

 

천황이면서 인황인 단군은 태양신에 해당한다. 지황인 서왕모는 태음신이라고 하였다. 본래는 인황이어야 하지만 皇(태양신)일 수 없는 사람들이 천자들이다. 그들은 햇님(태양신)과 달님(태음신)의 사이에서 태어난 별님으로 불리웠다. 결국 동이족은 하늘의 신들이었고, 그래서 그들이 살던 곳을 [하늘나라]라고 불렀던 것이다.

 

② 삼신산
삼신산(三神山)은 지금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산이다. 봉래산(금강산) . 영주산(한라산) . 방장산(지리산)으로 알려져 있는 삼신산은 [세 곳의 신령스런 산]이라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다.
그러나 본래의 삼신산은 이런 뜻이 아니라 삼신(三神)이 사는 곳이었다. 삼신이란 국조삼신이신 환인 . 환웅 . 단군, 즉 천황(햇님) . 지황(달님) . 인황(별님)이 사는 산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삼신산은 달리 [바다]라고도 부른다.


[바다]는 곧 [밝달]이다. [달]은 [땅(地)]의 고대어이기도 하고, [산(山)]의 고대어이기도 하다. [밝]은 고대어에서는 해와 달과 별을 통털어 부르던 이름이었다. 결국 [바다]는 [하늘]의 다른 이름인 것이다.
이 삼신산은 삼신이 사는 곳이므로, 요즘 말로 바꾸면 신전(神殿)이다. 삼신산은 신전이므로 특정한 땅이 될 수 없다. 삼신의 궁전이 있는 곳이면 그곳이 바로 삼신산이 되는 것이다. 고대에 삼신산이 여러 곳을 옮겨 다니는 이유는 여기서 해명되는 것이다.
이 삼신산이 바로 고분(古墳), 그 중에서도 피라밋과 지구랏이다. 이 고분에는 햇님집(天宮)인 산(山)과, 달님집(月宮)인 우물(井.泉)과, 별님집(별당)인 용궁(龍宮)이 삼층으로 나뉘어 있었다. 이 삼신산의 다른 이름이 곤륜산이었으며, 곤륜산이 삼층이라는 말은 여기서 나온 것이다.
이렇게 지어진 집은 그 생김새가 수정(水晶)과 같다. 그래서 용궁을 달리 수정궁이라고도 불렀던 것이다. 이 수정궁의 주인은 천황(햇님)의 큰아들로서 천황의 자리를 이어받는 별님인 인황(人皇), 즉 단군이다. 즉 단군이 바로 조선왕으로서 용왕이었던 것이다.

단군은 환인과 환웅으로 이어지는 태양신의 혈통인 천손(天孫)을 산에다 모셔놓고, 천하에서 선발하여 우물에서 교육시킨 신녀(神女)들과 동침시켜 하느님의 씨를 세상에 퍼뜨리는 것이다. 그런데 단군 자신이 태양신의 직계혈통이므로, 실제로는 자신이 동침하게 된다.


이 여신들은 하느님(단군)의 씨를 받은 다음, 삼신산의 조정에 조회(朝會)하는 제후들의 왕비로 시집 보내졌다. 그녀들은 천국을 친정으로 두고 있으므로, 왕들도 그들의 지시를 따르지 않을 수 없다. 그 여신들이 낳은 아이가 왕이 되었을 때, 우리가 중국의 고대사에서 보는 [이해되지 않을 만큼 막강한 태후의 권위]를 행사하게 된 것이다.
이 삼신산은 지금도 그 흔적이 인왕산에 남아있다. 인왕산에 있는 국사당(國師堂)의 원형은 왕손을 낳아주고 왕실을 뒤에서 지배하던 동이족 신들의 신전이었다. 물론 조선 시대에는 동이족의 거주가 불가능했지만, 그 원형을 거슬러 살펴보면 그렇다는 말이다. 배산임수의 명당자리는 이와같은 삼신산의 특수한 성격 때문에 개발된 것이다.
위 그림의 오른쪽이 배산임수의 도읍을 간단히 나타낸 것인데, 이 형식을 축소하면 그대로 왼쪽에 그려진 피라밋과 같은 형식이 됨을 볼 수 있다. 즉 두 양식은 기본적인 발상이 같은 셈이다.


이 제도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삼신산이 왕실의 상부구조라는 점이다. 고조선의 통치제도 아래에서는, 하나의 나라가 설 때 먼저 신전이 세워진다. 나라를 세우는 목적이 풍류의 혈통을 통해 세계를 다스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조선의 중심신전 또는 변한이나 마한 중의 하나가 반드시 중국에 세워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의 중국은 지금의 중화인민공화국이 아니라 구주(九州)의 중심나라인 천자가 있는 나라를 말하는 것이다. 나라를 아홉 지역으로 나누어 다스린 구주의 통치제도도 동이족이 만든 것이요, 그래서 구이(九夷)라는 말이 생겨났다.
아무튼 이 사실은 우리 역사의 가장 골치아픈 문제를 해결해 준다. 즉 중국의 수도에서 동이족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이 지극히 정상이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 고대사의 중요한 지명들은 모두 중국 제실(帝室)이 있던 곳에서 찾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③ 신화와 토템
신화는 신들에 대한 기록이다. 토템은 특정한 동물을 신으로 숭배하는 것이다. 그래서 신화는 토템들을 주인공으로 묘사하는 경우가 많다.
이 신화와 토템도 모두 동이족의 통치제도에서 유래한 것이다. 따라서 신화는 바로 동이족의 역사이다. 또한 토테미즘은 원시인의 미개한 신앙이 아니라, 지금의 고등종교들의 뿌리인 위대한 종교였던 풍류의 일부분인 것이다.


그리이스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은 곧잘 동물로 둔갑한다. 둔갑한 신을 한자로 쓰면 이신(異神)이 된다. [異]란 탈(가면)을 쓴 사람을 가리킨다. 이 [異神]들은 동이족 천신들이 탈을 쓰고 사람들 앞에 나서던 풍습에서 생긴 말이다.
우리나라에 특별히 발달한 것이 탈문화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탈들이 대부분 사람얼굴이라는 사실에 주의를 기울인 사람은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이 사실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사람탈을 쓸 수 있었던 신들이 인신(人神)이고, 그들이 곧 동이족 조선인이었기 때문이다.


중심신전인 삼신산의 주인들과 그 혈통을 이은 왕들만 사람탈을 쓰고, 지부신전의 소신(小神)들은 짐승탈을 쓴다. 그래서 서양의 가장무도회에서 짐승들이 판치는 것이다. 가장무도회에 참석한 짐승탈들은 그 자체가 그 신의 신분과 지위와 역할을 표시하는 사물문자(事物文字)이다. <산해경>에 등장하는 괴물들도 이런 이신(異神)들인 것이다.

 

④ 우리말
우리말, 우리가 쓰는 조선말은 그 옛날 하늘나라에서 쓰던 하늘말이다. 그래서 우리말은 세계 모든 나라 말의 뿌리를 이룬다.
세계 각지의 옛날 도시 이름은, 우리말로 그냥 읽어도 그대로 그곳에서 쓰는 의미와 통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지역은 예외없이 옛날에 용들이 살던 곳, 고조선에서 잉태하여 연못(신전)을 만들어 독립시킨 새끼용들이 살던 곳이다.


중세의 기사들이 천년동안 사냥하던 용들은, 조선왕인 단군의 아들 딸들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용의 전설이 있는 모든 지역은 옛날 조선의 강역이었다. 그런 지역에 조선말이 쓰였던 것은 당연하다. 결국 세계문화의 뿌리는 지금의 한국어로 접근해야만 밝혀지는 것이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가장 중요한 우리말은 본토에서 토박이가 쓰는 우리말이다. 우리말이 우리의 생활문화와 어우러져 갈무리한 엄청난 진리들이 밝혀지는 날, 세계각국의 석학들이 우리나라에 유학와서 우리말을 배워가게 된다.


사대주의에 중독된 지금 우리나라의 사람들이 보면 황당무계하게 보일 수도 있는 우리말 풀이를 이 책에서 자주 사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말은 그 뿌리를 깊이 파고들면 단 몇마디 말만 가지고도 우주와 인간을 모두 설명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우리 조상들이 '한'이라는 단 한 낱말로 우주와 인간을 묶어 놓은데서 유래할 것이다.
참된 진리는 어차피 말로 표현될 수가 없다. 그렇다면 말이 적을수록 본질에 가깝게 접근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그리고 언젠가 그 말조차 뛰어넘어야 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우리 조상들이 적은 수의 낱말을 다양한 뜻으로 썼던 것이 얼마나 지혜로운 일인지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을 볼줄 아는 사람이라면 외국어 조기교육을 시킬 일이 아니라, 우리말 조기교육을 확실히 해야 한다는 사실을 지금이라도 깨달아야 한다. 우리말을 제대로 모르는 한국인은 인두껍을 쓴 짐승으로 취급받을 날도 멀지 않았다.


아이들을 바다 건너 내보내서 영어공부를 시키는 것이 세계화가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서구화(西歐化)이다. 진짜 세계화는 아이들을 할머니 품으로 되돌려 주어, 지금은 잊혀져 가는 우리말을 배우게 하는 것이다.
여신들의 후예인 우리네 할머니들은 세계에 자랑할 하늘나라의 문화를 치마폭 가득 담고 있다. 한복을 짓는 법, 간장이나 김치 담그는 법, 막걸리 빚는 법 등은 지금 단절되기에는 너무 아까운 전통문화들이다. 그런 고유문화를 하나라도 더 이어받는 것, 그것이야말로 가장 수준높고 실속있는 세계화인 것이다.

 

2. 풍류(風流)의 참뜻

1) 전통문화의 뿌리

'한'풀이의 여러 분야 중에서 [궁극적 진리로서의 '한']에 대한 풀이를 빼고나면 [햇님풀이]로서의 '한'풀이, 즉 궁극적 진리의 인격화된 칭호인 하느님과 그 상징으로서의 태양신에 대한 해설인 [환(桓)풀이]의 비중이 가장 크다고 할 수 있다.
이 [환풀이]는 현대문명사회에서도 그 절대적 지위를 양보하지 않고 있는 종교와, 그런 종교가 세속화된 형태인 정치가 보유한 권위의 근거를 밝히는 작업이기도 하다. 따라서 환풀이는 문명의 [본풀이]이기도 하며, 나아가 현 문명의 뿌리를 밝히는 이 작업은 현대문명의 이해와 문제점 진단 및 해결책 모색의 출발점이 되는 것이기도 하다.


이 환풀이는 특히 우리 한겨레에게 큰 비중을 차지하는 분야이다. 왜냐하면 [환(桓)]은 우리 민족의 시조인 국조삼신의 칭호에 공통적으로 들어 있는 글자로서, 우리 민족명칭의 유래가 되는 말이기 때문이다.
우리겨레의 이름인 한민족(韓民族), 우리나라의 국호인 대한민국(大韓民國)에서의 한(韓)은 그 뿌리가 국조삼신의 칭호인 '한임(桓因)', '한울님(桓雄님)', '한검님(桓儉님: 王儉님)'의 백성과 나라에서 유래한 것이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환인(桓因), 환웅(桓雄), 단군왕검(檀君王儉)등은 한님, 한울님, 한 님(임검님)의 향찰식 표기로 보아야 한다. 이런 견해는 민족사학을 연구하는 여러 선생들이 공통적으로 주장하고 있는 내용이다.


이 [환풀이]는 [환(桓)], 즉 하늘 천(天)자의 본래 의미인 태양을 매개로하여 우리 전통문화의 핵심인 풍류대도와 연결된다. [햇님풀이]는 국조삼신과 풍류도를 연결해 주는 핵심개념이라는 말이다.
[환(桓)]이 태양의 여러 이름 중의 하나요, 특히 한겨레가 태양을 부르는 이름이라는 사실은 쉽게 확인할 수 있다. [桓]은 나무(木)로 상징되는 동방(東方)의 하늘과 땅 사이(二)에 솟아 오르는 태양(日)의 뜻을 담은 모양이다. 또 우리말의 [햇님]과 [환인(桓因)]은 거의 같은 발음이다. 바로 이 [햇님]으로부터 풍류의 찬란한 태고문명(太古文明)이 시작되는 것이다.


'한'풀이 중에서 민족사와 관련되는 [환풀이], 즉 [햇님풀이]를 풍류대도(風流大道)라고 한다. 이 풍류대도의 유래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정사서(正史書)로 공인된 <삼국사기>에 등장한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선생이 지었다는 [난랑비서(鸞郞碑序)]는 풍류도의 문헌적 근거로 잘 알려져 있다.

"나라에 깊고 오묘한 도가 있으니 가로대 풍류라 한다. 그 가르침을 세운 내력은 선사에 상세히 실려 있으며, 실로 삼교를 포함한 것으로 뭇 백성과 접촉하며 교화하는 것이다. 또한(더 자세히) 말하자면, 들어와서는 집안에 효도하고 나아가서는 나라에 충성하는 것은 노나라 사구의 으뜸 가르침과 같은 것이요, 함이 없이 일하고 말없이 가르침은 주나라 주사의 으뜸 가르침이며, 악한 일을 하지 않고 선한 일을 받들어 행함은 축건태자의 가르침과도 같은 것이다.

 

國有 玄妙之道 曰 風流 設敎之源 備詳仙史 實乃包含三敎
국유 현묘지도 왈 풍류 설교지원 비상선사 실내포함삼교
接化群生. 且如入卽孝於家 出卽忠於國 魯司寇之旨也
접화군생. 차여입즉효어가 출즉충어국 노사구지지야
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周柱史之宗也
처무위지사 행불언지교 주주사지종야
諸惡莫作 諸善奉行 竺乾太子之化也"
제악막작 제선봉행 축건태자지화야

 

지금까지 이 기록은 우리나라에도 유교 . 불교 . 도교 등 외래종교의 핵심진리를 망라한 고유의 정신문화가 있었다는 자부심 고취의 근거자료 정도로만 사용되었을 뿐, 제대로 된 연구는 별로 없었다.
따라서 풍류의 실제 모습에 대해서도 기껏해야 [화랑(花郞)들이 무리지어 산천을 돌아다니며 심신을 단련하고 친목을 도모한 단체활동] 이상의 의미부여는 없었던 실정이다.
그러나 풍류의 참모습을 몇몇 민족사학자들의 깊이있는 연구성과를 통해 재구성해 보면, 풍류는 귀족자제들의 한가한 여가활동에만 그치는 것이 결코 아님을 알 수 있다.
풍류의 실체는 상고시대에 전 세계를 지배하던 동이족의 제정일치 종교제국의 지도이념이었고, 지금 전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국가와 종교의 뿌리이다. 그런만큼 그 실체를 밝히는 작업은 어렵고 복잡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아무리 힘들어도 이 작업은 반드시 추진되어야 한다. 이미 몇 분 선배님들이 그 힘든 작업의 물꼬를 터 두었으니, 뜻있는 사람들이 그 맥을 이어 나가야 할 것이다. 지금부터 서두르지 말고 풍류의 깊고 깊은 숲속을 더듬어 보자.

 

2) 풍류의 어의(語義) 분석

풍류(風流)의 한자 뜻은 [風]이 [바람(wind)]이고, [流]가 [흐름(flow)]이다. 그리고 이 두 글자를 묶어 만들어진 [風流]라는 낱말뜻은 ①유풍(遺風), ②풍아(風雅), ③인품(人品) . 품격(品格)의 세가지로 새겨진다.
이 세가지 뜻은 오랜 세월에 걸쳐 쓰여지는 동안 정치적 . 사회적 이유로 본래의 의미가 이면으로 잠복되고, 곁가지를 이루던 의미만 남아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그 말들은 본래의 뜻을 부분적으로나마 담고 있기 때문에, 조금만 추적해 보면 본래의 의미를 되찾아 낼 수 있다. 그리고 그런 간단한 작업만 거쳐도 풍류의 위대성은 백일하에 드러난다. 먼저 [風]과 [流]의 글자뜻부터 살펴보자.
[風]의 가장 오래된 뜻은 [새(鳥)]이다. 오늘날에는 [風]이 [바람], 즉 [공기가 압력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러가는 자연현상]을 나타내는 뜻으로 쓰이지만, 옛날에는 [風]이 신(神)의 이름이었고 그 모양도 봉(鳳) 또는 붕(鵬)이라는 새의 모습으로 쓰여졌다. 즉 지금 쓰이는 바람 풍자는 원래 [봉황새] 또는 구만리 장천을 난다는 [붕새]를 나타내는 글자였던 것이다.


[風]의 두 번째 뜻은 [가르침], 즉 교화(敎化)의 뜻이다. 가르침 중에서도 [風]이 가리키는 가르침은 뛰어난 가르침이다. 이 뜻은 풍교(風敎)라는 별도의 낱말로 분화되었는데, 그 풀이는 [덕행으로 사람을 가르치고 인도하는 일]로 되어있다. 이 말은 풍류가 덕행의 상징으로 쓰였음을 보여주는 말이며, 이런 사실은 계속되는 낱말풀이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風]의 세 번째 뜻은 [습속(習俗)], 또는 [모습]의 뜻이다. 이 또한 [풍속(風俗)]과 [풍채(風采)]라는 낱말로 분화되었고, 풍속은 [옛적부터 사회에 행하여 온 의식주(衣食住) 등의 습관]으로 풀이되며, 풍채는 [뛰어난 생김새]라는 뜻이다.
[風]의 넷째 뜻은 [바람난다]는 뜻이며, 이는 풍류의 음양교합에서 유래한 말이다. 이 뜻의 낱말로는 마우기풍(馬牛其風)이 있는데, <주역> 계사전에 건마곤우(乾馬坤牛; 하늘은 말이고 땅은 소이다)라는 말이 있으니, 이 말은 천지화합(天地和合)과 같은 뜻이 된다. 말과 소가 바람 피운다는 말은 곧 하느님과 따님이 씹한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風]의 다섯째 뜻은 [노래]인데, 풍류에서 노래의 중요성은 지대하다. 이 뜻의 낱말로는 [국풍(國風)]이 있는 바, 국풍은 [고대에 조정에서 습속의 양부(良否), 정치의 선악을 보기 위하여 각지의 노래를 수집한 것]으로서 이것을 수록한 것들이 그 유명한 <시경(詩經)>이다.
[風]에는 이 외에도 경치(景致), 감기(感氣), 중풍 등의 뜻이 있는데, 우선 위에 정리한 다섯가지 뜻을 기억해 두고, 다음에는 [류(流)]의 뜻을 살펴보자.


[流]는 [흐름]이다. 우리말의 [흐름]이 가지는 모든 뜻이 [流]의 뜻이다. 이 글자뜻도 몇가지가 있다.
[流]의 첫째 뜻은 글자의 상형(象形)이 의미하는 것으로, [아이가 양수(養水)와 함께 태어나는 모습을 본뜬 것]이다. 즉 [流]의 첫째 뜻은 [아이낳기]이다. 아이낳기는 동이족의 세계지배의 핵심수단으로서, 여기서 모두 설명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다.
우선 급한대로 여기서 말하는 [아이]가 하느님의 아들을 가리키는 말이며, 중국역사가 가장 존귀한 인간으로 묘사하고 있는 [천자(天子)]라는 사실만 밝혀두기로 하자. 따라서 [流]의 첫째 뜻은 [천자를 낳는 것]이고, 고대사회에서 천자는 나라와 그 나라의 백성들과 동일시되므로 [나라와 백성을 낳는 것], 즉 [천지창조]이다.


[流]의 둘째 뜻은 핏줄, 갈래 등이다. 이는 첫째 뜻에서 파생된 것이라 할 수 있다.
[流]의 셋째 뜻은 가장 널리 알려진 뜻으로, [흐름]이다. [물의 흐름], [세월의 지나감], [번져 퍼짐] 등의 뜻이 그것으로서, 이 뜻은 풍류의 실상을 알고나서 생각해 보면 둘째 뜻에서 갈라져 나온 것임을 알 수 있게된다.
[流]의 넷째 뜻은 [귀양보냄(流配)], [도주함(流民)]이다. 이 말은 한겨레의 영화와 고난을 동시에 담고있는 말이다. 유배(流配)는 본래 [아이를 낳기 위해 짝지워 보낸다]는 뜻으로, 동이조선의 세계지배 방법이었다. 그러다가 동이조선이 붕괴하면서 신관(神官)들을 귀양보낸 역사가 이 말에 반영된 것이다.


유민(流民) 또한 글자들의 뜻을 보면 [아이낳는 백성]이란 뜻이 되어, 동이신전의 역할을 나타낸다. 그러나 이 또한 동이조선의 붕괴 후, 본래의 터전을 떠나 [산을 짊어지고 떠돌아 다니던 동이족]의 신세를 나타낸 말인 것이다.
고대신화에는 움직이는 산(山)에 대한 기록이 많다. 박용숙 선생은 <삼국유사>나 <수신기(搜神記)>에 나오는 움직이는 산이 바로 동이들이 신전을 이동한 사실을 나타낸 것이라고 한다.


이제 위에서 찾아진 두 글자를 묶은 [風流]의 낱말뜻을 생각해 보자.
첫째, 풍류는 [풍족(風族)의 혈통과 문화습속(文化習俗)의 퍼져나감]이다.

그렇다면 풍족(風族)이 어떤 종족인지를 밝혀야 하는데, 이 풍족은 뒤에 설명되는바와 같이 태양신족(太陽神族)이고, 다른 이름으로는 천신족(天神族)이다. 아무튼 이 측면은 대종교(大倧敎)에서 말하는 조화주(造化主)와 일치한다.


둘째, 풍류는 [풍교(風敎)의 유포(流布)]이다. 덕행으로 사람을 인도하는 가르침인 풍교를 널리 펴는 일이 바로 풍류인 것이며, 이는 대종교에서 말하는 교화주(敎化主)의 측면이다.


셋째, 풍류는 [음악의 유행]이다. 동이족의 전통인 가무음곡이 전세계에 퍼져나가도록 하는 것이 풍류인 것이다. 그렇지만 이 음악의 유행이 오늘날의 유행가와 같은 뜻에 국한되지는 않는다.
고대사회에서의 음악은 유교에서 강조하는 예악교화(禮樂敎化)의 뜻이 핵심이다. 그리고 유교에서 말하는 예악교화는 곧 도덕정치와 직결된다. 여기서 우리는 앞에서 살펴본 국풍(國風)이 바로 사서삼경 중의 첫머리에 거론되는 <시경>과 연결됨을 주목하게 된다. 사서삼경이 과거(科擧)의 필수과목이었음을 생각하면, 풍류가 바로 정치(政治)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측면은 대종교에서 말하는 치화주(治化主)에 해당하는 것이다.


결국 이렇게 정리된 뜻은 풍류의 낱말풀이인 [유풍], [인품], [풍아]와 연결됨을 알 수 있다. [인품]은 [혈통]에, [유풍]은 [풍교]에, [풍아]는 [예악]에 해당하므로서, 풍류의 참모습을 복원할 수 있는 길잡이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상의 세가지 내용을 상세히 살펴보면 풍류의 실상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3) 태양신 태호복희
① 풍족(風族)과 풍신(風神)
풍류의 뜻 중에서 풍족(風族)의 혈통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풍(風)]의 본래 글자인 봉(鳳) 또는 붕(鵬)의 정체를 밝혀야 한다.
먼저 봉(鳳)에 대해서 하신(何新)의 <신의 기원(諸神的 起源)>은 여러 가지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 준다.

그 중에서 몇가지 내용을 간추려 보자.

가) 봉의 소재지는 풍혈(風穴)이다. <설문(說文)>
나) 봉조(鳳鳥)는 풍신(風神)이다. <복사통찬(卜辭通纂)>
다) 봉(鳳)은 황(凰)과 짝을 이루는 신조(神鳥)인데, 황(凰)은 광조(光鳥)로서 태양조(太陽鳥)이다.
라) 곽말약(郭末若)은 갑골문 중에 "봉은 상제의 사자"라는 말이 기록되어 있다고 했다. 이 말은 바람의 신(風神)은 태양신인 상제(上帝)의 사자(使者)라는 말이다.

 

위 내용들을 요약하면, 봉(鳳)은 [태양신의 사자] 또는 [태양신의 짝]이 된다. 이 뜻이 곧 풍(風)의 뜻이기도 하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봉이 태양신인 황의 짝이 되기도 하고, 또 태양신인 상제의 심부름꾼이 되기도 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또 우리는 황의 짝인 봉이 황의 앞에 붙어 지금 쓰이는 봉황(鳳凰)이란 말을 만든 사실도 눈여겨 보아야 할 것 같다. 보통 두 사물을 하나로 묶어 낱말을 만들 때, 지위가 높은 쪽을 앞에 두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이다. 자웅(雌雄)은 암컷을 수컷보다 중히 여기는 것이요, 남녀(男女)는 남자를 여자보다 더 높이는 입장이다. 그렇다면 봉이 황보다 더 숭배된 흔적이 봉황이란 말에 남아있다는 뜻이 된다.
여기서 고대사회의 왕비족(王妃族)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고대국가에서는 두 부족이 혼인을 통해 연합하는 경우가 많았고, <삼국사기>의 고구려에 대한 기록에서 왕족과 왕비족이 신분을 세습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도 있다.


뒤에 설명되지만 풍류의 주도세력은 이 왕비족들이었고, 그 왕비족의 뿌리는 삼신할머니까지 소급된다. 다시말해 봉조(鳳鳥)를 토템으로 삼았던 봉족(鳳族)은 왕비족이었고, 그 왕비족은 고대에 영토권을 장악했던 지황(地皇)의 종족이었다. 이 봉족이 단군신화에 웅녀(熊女)라는 [곰]으로 등장하는 [ ]이고, 이 [ ]에서 우리 고대어에서 신을 나타내던 [가마]와 일본어에서 신을 뜻하는 [가미]가 나왔다. 따라서 봉족(鳳族)을 지금 말로 바꾸면 신족(神族)이 된다.


앞에서 풍(風)이 봉(鳳)이라고 하였다. 이 봉(鳳)의 또 다른 이름이 붕(鵬)이다. 그렇다면 이 붕(鵬)의 뜻을 밝히면 풍류의 실상에 좀 더 가까이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붕에 대해서는 김용옥 선생이 아주 중요한 사실을 밝혀두고 있다.

여기에 우리의 관심을 끄는 고유명사는 "禹"이다. 禹에 대한 사적은 꾸씨가 지적한 대로 이미 {詩經}에 山河(물만 아니라 땅도 다스렸다)를 다스린 어떤 존재로 부각되고 있으므로 중국인의 가슴 속에 3000년 이상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禹의 아버지 이름이  (곤)이라는 사실이다. 이  은 鯤(곤)과 통하는 글자이며, 또  (현, 똑같이 ㄴ으로 끝난다)으로도 쓰며 확정된 자형이 없다.
老莊철학의 전문가인 나는 禹임금의 아버지의 이름을 생각할 때 제일 먼저 {壯者}의 첫 구절을 머리에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희대의 상상의 천재인 莊선생이 해방된 인간의 자유를 표방하는 소요(逍遙)의 상징으로 九萬里 장천을 날으는 대붕(大鵬)이 바로 北冥에 사는 물고기의 화신이라는 사실이다.

 

"북쪽 연못에 고기가 살고 있었다. 그 이름을 곤(鯤)이라 하였는데, 곤의 크기가 몇 천리나 되는지 알 수 없다. 그것이 化하여 새가 되었는데, 그 이름을 붕(鵬)이라 하였다. 붕의 등길이가 몇 천리나 되는지 알 수 없다."

禹나 禹의 아버지  (鯤,  )이나 모두 물고기를 상징한다.  은 원래 우리가 흔히 상 위에서 먹는 물고기 알의 명사다. <莊子>의 [소요유]에서는 그 구슬보다 작은 알이 변하여, 일약 등허리가 수천리나 되고, 단 한번 날개로 물을 치고 펄럭이는데 3천리를 나는 거대한 대붕으로 化한다. ... ... <莊子>의 [盜 (도척)]篇에 "禹偏枯(우편고)"라는 말이 있는데, 이를 여태까지는 禹임금이 치산치수사업에 너무 철저한 육체노동을하여 몸이 말라 비틀어진 것으로 해석하여 왔으나, 실은 "偏枯"라는 것은 그 문장에 있어서 禹를 수식하는 형용사적 술부가 아니라, 禹와 동격인 고유명사로서, 偏枯란 단순히 그 음을 따서 만든 이름으로 홍수신을 나타낸다.


<山海經>의 [大荒西經]에 "偏枯라는 물고기가 있는데 이름하여 魚婦라고 한다" 했는데, 偏枯와 魚婦(어부)는 같은 것이다. 魚婦란 갑골문상의 뜻으로 보아도 어떠한 水神을 나타내는 것이다. <莊子> [逍遙遊(소요유)]의 첫 고사가 무의식적으로 중국인이 깔고 있는 신화적 의식, 칼 융의 표현을 빌리면 중국인의 집단무의식의 멋있는 표현이라는 것은 쉽게 이해가 간다.
大鵬은 또 九萬里장천을 나르는 大風(큰 바람)을 상징하고 있는데, 우리가 鵬과 더불어 쓰고 있는 鳳이라는 글자는 바로 이러한 "바람" 風속에 새가 들어있는 형상이다. 요즈음 우리나라 유행가에 "바람"이란 말이 유행하고 있지만, "바람"이야말로 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신의 靈(신령)이며 신의 소리(<詩經>에서는 노래를 風이라고 한다)이니, 鵬이나 鳳은 또한 신의 전령인 것이다.


이 인용문이 중요한 이유는 첫째, 붕(鵬)이 물고기와 새를 합친 상징임을 밝힌 점이다. 밥상에 오르는 명태알이 부화하여, 보이지 않는 곳에서 등의 길이가 몇천리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자라나서, 급기야 온 세상을 뒤덮는 어마어마한 새가 되어 구만리 장천을 날아 오르는 것이 바로 붕인 것이다.


이 신화는 [곤]이라는 물고기가 붕족이라는 종족이 세운 나라의 이름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붕족이 처음에는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서 물고기를 상징으로 삼는 거대한 세력을 이루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성장한 물고기인 곤의 정체는무엇인가?
우리는 복희팔괘에서 바로 이 물고기를 상징하는 괘(卦)를 발견하게 된다. 복희팔괘의 북쪽에는 곤괘(坤卦)가 배치되어 있다. 역학에서는 복희팔괘가 하도의 이치를 바탕으로 그려졌다고 말한다. 하도는 오행을 표시한 그림이며, 오행에서 북쪽은 물(水)이다. [水]는 음성의 대표이며, 어둠 . 검은 색 . 신(神) . 겨울 . 지혜 등을 상징한다.


복희팔괘의 북방 곤괘는 이 [水]의 의미를 그대로 이어받고 있다. <주역 . 설괘전>에서 곤괘는 어머니와 땅으로 상징된다. 이때의 땅은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데, 그것은 태음신의 신전인 우물(井)이다. 그 증명은 뒤로 미루기로 하자. [보이지 않는 땅 속에서 만물을 낳는 모체인 어둠의 신], 그것이 바로 복희팔괘의 북방 곤괘인 것이다. 그리고 이 곤괘는 그 성질과 이름까지도 북명(北溟; 북방의 어두운 물속)에 산다는 물고기인 곤과 발음이 같다.


그것이 물고기로 상징된다는 것은, 인류의 역사를 새로 써야 한다는 엄청난 의미를 담고있다. 고대신화에서 물고기와 함께 표현되는 모든 인물들이 바로 이 [곤에서 나온 사람들]임을 나태내고 있기 때문이다.
물고기와 함께 등장하는 사람들 중에 누가 그렇게 대단한가? 물고기와 함께 등장하는 사람들 중에 가장 중요한 인물은 여기에 등장하는 우(禹)임금이다. 우임금이 중국인들이 자기들의 첫 국가라고 주장하는 하(夏)나라의 시조임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 사람을 인류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람이라고 말하면, 민족사학자들이 길길이 뛸 것이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우리들, 동이족 후예들의 비극이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우임금이 민족사학자들이 몽매에도 그리워하는 단군왕검이시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도입부에서 다루기에는 너무 복잡한 주제이니, 관련되는 내용과 함께 다루기로 하고 미루어 두자.
물고기와 관련된 두 번째 중요인물이 포세이돈이다. 포세이돈은 그리이스 신화에 나오는 바다의 신이다. 바다의 신은 우리말로 바꾸면 바로 용왕이다. 암포라 벽화에 그려진 포세이돈의 모습은 한손에 삼지창을 들고 소(牛) 등에 올라앉아 있는데, 그의 왼손에는 버들가지에 꿴 물고기들이 들려있다.


이 사람이 중요한 이유도 우임금과 마찬가지이다. 즉 포세이돈이 바로 단군왕검이기 때문에 역사상 두 번째(?)로 중요한 인물이라고 말한 것이다. 포세이돈이 용왕이므로 우리말로 바꾸면 [바다임금]이 된다. 이는 단군(檀君)의 [박달임금]과 직결된다. 이 내용도 뒤에 자세히 다루어지니 여기서는 이정도로 만족하자.


동서양의 태고시대는 이렇게 물고기를 매개로하여 하나로 묶어지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 두 인물이 물고기와 관련된 첫 인물은 아니다. 우임금 이전에는 염제 신농씨가 물고기 모양의 모자를 쓰고 나타나며, 포세이돈 이전에는 수메르인에게 문명을 전해 주었다는 오안네스가 물고기 모양을 한 이상한 생물이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우임금 이후에는 용왕이 역사의 주도권을 행사한다. 용상(龍床)에 앉아 곤룡포(袞龍袍)를 입고, 용안(龍顔)을 빛내며 용음(龍音)을 굴리던 천자(天子)가 용(龍)으로 상징되었기 때문이다. 왕이 용(龍)으로 상징되었다는 것은 그 나라가 물고기의 나라였음을 암시한다. 실제로 동이족들이 세운 나라는 물고기 나라임을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다. 그 이름이란 바로 [바다]이다.
그 [바다]가 우리가 지금 자랑하는 [배달국]이요, [바다]를 한자로 바꾸어 부른 이름이 [해(海)나라]이다. 고대에 한겨레가 세운 나라는 하늘과 바다가 나누어지지 않고 통일되어 있었던 지구 전체를 영토로 하였음이 여기서도 밝혀지는 셈이다.
이 [바다나라]를 <장자>에서는 [북쪽 연못의 물고기인 곤]이라고 부른 것이다. [곤이 사는 연못]은 한자로 바꾸어주면 [곤지( 池)]가 된다. 이 [곤지]가 복희팔괘에서는 [곤지(坤地)]로 나타나는 것일 뿐이다.
지금 이 글을 읽고있는 당신이 말도 배우기 전에 어머니에게 배운 [곤지곤지 잼잼]은 그 유래가 여기에 있다. 그 옛날 세계제국의 모후(母后)의 자리에서 쫒겨난 여신들의 후예인 우리들의 어머니들은, 햇님 . 달님 . 별님을 얼굴에 붙인 모습으로 연지곤지(淵池坤地) 찍고 시집가서, 자식을 낳으면 맨 먼저 [도리도리]를 시켜 사방을 둘러보게 하고,

그 땅이 모두 [곤지곤지]이니 반드시 그 영토를 돌이켜야 한다고 가르쳤던 것이다.


이 과정을 증명해 주는 말이 이 인용문에 등장하는 편고(偏枯)이다. [편고]는 곧 [반고(盤古)이다. [偏]은 죽간(冊)을 쌓아둔 집(戶)을 나타내는 扁(편) 옆에 있는 사람( )을 나타낸다. 고대에 책은 신전과 왕실에만 있었으니, 이 글자는 분명히 신전이다. [枯]는 태양신(十)의 신전(口)으로 사용되던 나무(木)이니, 성황목인 솟대를 나타내는 글자이다.
[반고(盤古)]는 뒤에 설명되듯이 하도(河圖)로 그려지는 삼신산, 즉 피라밋으로서 고대에 태양신을 모시던 신전이다. [반고]가 [하도]라는 사실을 알면 [편고]와 [반고]는 쉽게 연결될수 있다. 위의 인용문에서 [편고]가 [어부(漁婦)]요 [어부]가 [수신(水神)]이라는 말은, [편고]가 곧 [하도]로 그려지는 신전인 동시에 그 신전의 주인임을 증명해 준다. [河圖]가 글자 뜻 그대로 [물그림]이기 때문이다.
[편고]가 어부(魚婦)이며 수신(水神)이라는 설명은 우(禹)임금이 용왕(龍王)이라는 말과 같으며, 용왕은 곧 [못왕]으로서 [무당]이므로 결국 우임금은 삼신 중의 하나이며 우물을 관장하여 물고기(여신의 상징이다)들을 다스리던 지황(地皇)이었던 것이다(여기에 설명되는 내용들은 뒤의 <삼한과 삼신>에서 자세히 설명된다). 우임금의 아버지가 곤( )이라는 사실은, 우임금이 곤지(坤地)의 왕인 지황(모후)의 정통을 계승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소요유의 비유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분명히 알 수 있다. 소요유에 등장하는 붕(鵬)은 바람의 신으로서 호흡인 것이다. 복희팔괘도에서 북방에 자리한 곤괘에서 나온 바람을 상징하는 손괘가 서남방에 배치된 모습을 대붕의 날아감으로 묘사한 것이 소요유의 내용인 것이다. 그리고 이 비유는 머리에서 출발한 숨(호흡)이 건괘(乾卦)에 해당하는 아랫배에까지 깊이 들어가서 단(丹)을 이루어야 한다는 수련법으로 연결되기도 한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은, 곤(坤)이 바로 단군신화에 [웅녀(熊女)]로 기록된 [ (神)]이라는 사실이다. [ ]은 특히 지황의 별칭이며, 지황이 천황(天皇)인 태양신을 낳았다는 고대 풍류의 역사적 사실이 이 신화에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뒤에 다시 설명되지만, 지황이 천황과 짝을 이루어 고궁(古宮), 즉 삼신산을 다스린 사실을 말한 것이 [황(凰)의 짝인 봉(鳳)]이며, 봉이 될 후보 여인들을 선발하기 위해 속세를 돌아다니던 지황의 사자들을 묘사한 것이 [상제의 사자인 봉]인 것이다.
이제 위의 내용들을 뭉뚱그려 결론을 내리면, 봉이나 붕은 동이신전에 소속된 신족(神族)이었다는 것이다. 뒤에 다시 설명되지만 이 신들이 이신(異神)들이었고, 그들이 주로 새(鳥)의 탈을 쓰고 나타났기 때문에 그들을 새로 묘사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들을 총칭하여 풍족(風族)또는 봉족(鳳族)이라 하는 것이며, 이 풍족은 역사기록에 풍이(風夷)로 등장하고 있다.

 

② 복희씨
복희씨(伏羲氏)는 고대 동양의 전설적인 제왕이다. 복희씨에 대해서는 여러 기록이 있는데, 그 내용들을 정리하면 복희씨가 어떤 인물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먼저 검토되어야 할 의미는 [복희]가 바로 [태양]이라는 것이다.

<한서(漢書)> [고금인표(古今人表)]는 복희를 상상성인(上上聖人)이라 부르면서 고금의 모든 인물 중에서 첫 번째로 나열하고 있어, 고대인의 마음속에 그 지위가 매우 높았음을 알 수 있다.

태호제 포희씨는 풍성(風姓)이다. ...... 어떤 거인이 뇌택(雷澤)에서 나온 자취가 있었다. 화서(華胥)가 이 발자국을 밟고 포희를 낳았다

 (<易> [繫辭正義]에서 <제왕세기>인용).

 

복희의 이름은 여러 가지이나 기본적으로는 아래의 두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1. 복희(伏羲)형 - 복희(伏犧, 伏戱), 혁서(赫胥), 포희(包羲, 疱羲), 복희(宓羲, 宓犧), 희황(羲皇) 등으로 쓰여진다.
2. 대호(大昊)형 - 태호(太昊, 泰昊), 대호(大皓, 大白皐), 태호(太皓, 太白皐) 등으로 쓴다.

복희란 이름 중의 복(伏)과 포(包)가 여러 형체로 쓰여질 수 있는 까닭은 그들이 모두 실질적인 의미가 없는 표음자(表音字)이기 때문이다. 음(音)으로 이를 찾아보면 복(伏)과 포(包) 모두가 부(溥)자의 동음통가자(同音通假字)라고 생각한다(이 자는 fu로 읽을 수도 있고, bou라고 읽을 수도 있다. <설문(說文)>에 "부(溥)는 크다는 뜻이다" 하였으니, 부(溥)는 바로 위대하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복희(伏羲)와 포희(包羲)는 바로 [위대한 희(羲)]이다.

 

원래 이 [위대한 희], 혹은 더 정확히 말하면 고음(古音)에 따라서 [위대한 희아(羲俄)]라고 읽어야 하는 이 인물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선진(先秦)의 전적 중에 혁혁한 이름을 지닌 태양신 - [희화(羲和)이다.

복희의 제2형의 이름은 태호(太昊)이다. 호(昊)는 한대(漢代) <위서(緯書)>에 천제의 이름으로 해석했으며(昊天上帝), <설문>과 <이아(爾雅)>에는 봄의 신 혹은 여름의 신 이름으로 해석했다. 봄의 신의 이름은 析(가를 석; 중국음으로는 x ), 즉 羲(숨 희; 중국음으로는 x )이다. 그러므로 태희(太羲 즉 伏羲)는 당연히 태호(太昊)라고 부를 수 있다.
정산(丁山)의 <중국고대종교와 신화고>에 따르면 호(昊)는 정자가 없으므로 호(皓, 顥, 白皐, 浩)로 쓸 수도 있고, 이런 자들은 모두 [광명이 성대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태호는 큰 밝음이다] ...... 이것으로 상고시대 사람들이 숭배한 신명(神明) 복희(伏羲) - 태호(太昊)가 실은 태양신임을 확증할 수 있다.

 

위의 내용들을 통하여 우리는 복희씨가 태양신이며, 풍씨(風氏) 또한 태양신을 나타내는 봉황씨(鳳凰氏)의 다른 표기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풍씨는 복희씨를 시조로 하는 태양신의 자녀들로 이루어진 씨족명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③ 태양신족과 환국
결국 풍류는 태양신족으로서의 봉황족의 혈통을 뜻한다. 고대에 이 태양신족은 다른 종족들과 뚜렷이 구별되는 고도의 문명을 이룩하고, 독자적인 주거공간인 [하늘바다(天海)]를 만들어 거주하면서, 혈통에 따른 봉토입국(封土立國)제도를 통해 세계를 지배하였으니, 그 세계국가가 바로 환국(桓國)이요, 조선(朝鮮)이었던 것이다.
이 봉토입국제도, 후대에 봉건제도(封建制度)라 일컬어지는 풍류는 고대에 전세계에 걸쳐 나타나는 통치체제인데, 이 봉건제도의 근거가 혈통(血統)이었음을 나타내는 글자가 바로 류(流)인 것이다.


[流]는 삼수변(水)과 아이가 태어나는 모습을 합친 글자인데, 이 삼수변이 상징하는 물은 고대의 여신전(女神殿)이었던 [우물(泉; 샘)]이었고, 그 우물에서 태어나는 아이가 태자(太子) 또는 동자(童子)라고 불리웠던 천자(天子), 즉 [하늘 아이]였던 것이다. 따라서 [流]는 본래의 글자뜻이 [신전의 아들]이 되어야 옳다.
오늘날에도 쓰이는 '바람둥이'라는 말은 태양신족인 동이족의 씨뿌리기에서 유래한 말이다. 동이족은 봉토입국을 통한 세계지배를 위해, 여러 족속의 여성들을 선발하여 여신전인 '우물'에서 부덕(婦德)을 교육시켜 왕비감으로 키웠다. 이렇게 교육받은 왕비감은 환국에 조공을 바치기로 약속한 씨족의 추장에게 시집보내는데, 신혼 첫날밤에 초야권(初夜權)을 행사하여 풍족의 씨를 퍼뜨렸던 것이고, 비람둥이라는 말은 이 풍속에서 나왔던 것이다.


또 여자가 바람피우는 일을 사당질이라고 하는 것도 그 유래가 이 풍류에 있는 것이니, 태양신족의 씨를 받기 위해 각처에서 선발된 여성들이 사당(신전)에서 부덕(婦德)을 익히고, 신들과 동침하여 [신의 씨]를 받던 풍속에서 나온 말이다. 아마도 이 사당질이 사랑이라는 말의 어원일 것이다.


환국에는 삼신산(三神山)이 있었는데, 삼신산은 특정한 산이름이 아니라 삼황(三皇)이 살던 신전의 이름이었다. 그 신전의 다른 이름 중 하나가 앞에 소개된 [반고]인 것이다. 삼황은 천황 . 지황 . 인황인데, 그 중에서 지황이 관장하던 여신전을 사당(社堂)이라고 불렀으니, 옛 왕실에서 종묘와 짝을 이루던 사직(社稷)은 사당이 변한 것이다.


종묘는 천황의 신전인 조산(祖山)이 변한 것으로, 풍신(風神)이 거주하던 곳이다. 사직에서 왕비를 길러 풍신과 초야를 치르게하여 태양신족의 혈통이 왕위를 잇게 하였던 것이니, 사당질은 왕비들이나 할 수 있었던 [신성한 씹(sex)]이었던 것이다.
이런 풍류가 가능했던 이유는 환국의 지배력이 절대적이었고, 풍족(태양신족)의 혈통이 너무나 우수했기 때문이다. 고대사회에서 환국의 지배력이 절대적이었다는 사실은 환국의 지배에 반발하여 일어난 국가와 종교들이 지금도 풍류의 부활을 결사적으로 저지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고, 풍족의 혈통이 우수하다는 사실은 앞에서 설명한 대로 풍채가 대인의 형상으로, 풍교가 도덕교화로, 풍속이 의식주 전반의 미풍양속으로, 풍악이 음악의 대명사로 쓰여진 언어관습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④ 화랑과 풍류
풍류의 실상에 대해 알려주는 귀중한 기록이 바로 <삼국사기> [진흥왕조]의 화랑(花郞)에 대한 기사(記事)이다. 즉 풍류는 바로 화랑을 통해 우리 한겨레의 역사와 연결되는 것이다.

 

"...... 그 뒤에 다시 미모의 남자를 택하여 곱게 꾸며서 화랑이라 일컫고 떠받들게 하니, 도중이 구름과 같이 모여들어 혹은 도의로써 서로 연마하고, 혹은 가악으로서 서로 즐기며, 산수를 유람하여 먼 지방도 아니 가는데가 없었다. 이로 인하여 그 사람의 간사하고 바름을 알 수가 있어, 착한 자를 뽑아 조정에 천거하였다. 그래서 김대문의 <화랑세기(花郞世紀)>에 [어진 재상, 충성된 신하가 이에서 솟아나고, 좋은 장수, 날랜 군사도 이에서 생겨났다]고 하였고, 최치원의 <난랑비서>에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그것은 풍류다 ......]".
(其後 更取 美貌男子 粧飾之 名花郞以奉之, 徒衆雲集或相磨爾義 或相悅以歌樂 遊娛山水 無遠不至 因此 知其人邪正 擇其善者 薦之於朝. 故 金大文 花郞世紀曰 賢佐忠臣 從此以秀 良將勇卒 由是而生 崔致遠 鸞郞碑序曰 國有玄妙之道 曰風流 ......)

이 기록은 화랑이 바로 풍류의 전통을 이어받은 사람들임을 암시하고 있다. [鸞(난)]이란 봉황의 다른 이름인데 화랑과 난랑(鸞郞)이 같은 자리에서 다루어지고, 그것을 바로 풍류라고 한 것이다. 따라서 화랑제도의 창설은 실제로는 화랑제도의 창설이 아니라 풍류의 부활로 보아야 할 것이다.


꽃은 풍류의 핵심상징 중의 하나이고, [사내(郞)]는 [산해], 즉 [신전(山)의 해(日)]로 풀 수 있으니, 이런 추측이 잘못된 것이라고 볼 수만은 없을 것이다. 또 화랑에 [활랑]의 뜻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는 [이랑(夷郞)]이 되어 동이(東夷)와 곧바로 연결될 수 있기도 하다.
이런 이름들은 뒤에 구체적으로 설명되는 바와 같이 풍류, 즉 동이족 햇님(환인)의 씨뿌리기와 관련된다. [사나이]는 우리말에서 [산아이]와 구별되지 않는다. 삼신산(山)에서 햇님(日)의 혈통을 받은 아이가 [사나이]인 것이다.


화랑제도가 풍류의 부활임은 위 인용문에도 암시되어 있다. "어진 재상, 충성된 선비가 이에서 솟아나고, 좋은 장수, 날랜 군사도 이에서 생겨났다"고 한 것이 그것이다. 이것이 풍류의 교육적 효과를 말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풍류의 본질을 알고나서 생각해보면 그것이 태교(胎敎)와 관련될 가능성이 새롭게 부각되는 것이다.
화랑제도는 지금 인정되는 부분만 하더라도 가무음곡을 통한 인격도야와 현실적 정치참여라는 풍류의 두 요소를 보존한 일종의 종교결사로서, 풍류의 정통맥을 이은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이 사실은 풍류의 맥이 한겨레를 통해 전해지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라는 점에서 중대한 비중이 있는 것이다.
그러면 풍류에서 가무음곡이 중요한 이유를 고대의 신앙행위를 통해 살펴보므로서, 화랑과 풍류의 밀접한 관계를 증명해 보자.

 

⑤ 봉황과 가무음곡
풍류에서 음악이 어떤 비중을 차지하는지는 이미 밝힌 바 있다. 그렇다면 가무음곡(歌舞音曲)이 무엇 때문에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되었는지를 알아보자.
풍류가 고대의 신앙체계였다는 사실이 이 의문을 풀어나갈 실마리가 된다. 상고시대에 가무음곡이 그때의 신앙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알면 풍류와 가무음곡의 관계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상고시대에 세계 각지에 널리 신앙된 대상이 태양신임은 이미 밝힌 대로이다. 그리고 태양신의 상징이 봉조(鳳鳥)와 황조(凰鳥), 즉 봉황이라는 주장을 좀더 살펴 보고, 봉황과 가무음곡의 관계를 중심으로 풍류와 가무음곡의 관계를 설명하고자 한다.
하신은 [신의 기원]에서 봉황과 태양신의 관계를 상세히 고증하고 있다.

 

1. 봉(鳳)은 풍조(風鳥)이다. 그렇다면 황(凰)은 무엇인가? 凰의 본자는 皇이다(鳳凰의 본자는 鳳皇으로 쓴다). 皇(황)과 光(광)은

    고음(古音)에서 서로 통한다. 그러므로 황조(凰鳥)는 실제로 광조(光鳥)이며, 또한 태양조(太陽鳥)이다.


2. 위에서 봉과 황이 본래는 두 종류의 신조(神鳥)였다고 했다. 그들의 분별은 두 종의 자연사물이 생명화된 의상이다. 봉은 풍신이다.

    황은 태양조이며, 또한 불의 정화이며 태양이 생명화된 의상이다. 태양은 새와 마찬가지로 매일 쉬지않고 운행하고 있으므로,

     고대인은 그것을 생명이 있는 신령스런 새로 보았다.


3. 실제로 <산해경>중에서 묘사하고 있는 봉황의 형상은 태양에 대한 낭만적 상상이다. 이것으로 우리는 <설문> 등의 책속에서 봉황이

    조류의 왕이며, '봉황이 날으면 뭇 새가 그 뒤를 따르는데 수만을 헤아린다'고 말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은 바로 일출시에 흔히

     볼 수 있는 자연스런 풍경이다. 여기에서도 일종의 신화적인 의상으로 전화되었다. 즉 일출 후에 태양조의 비상을 따라서 수천의 조류들

     이 한밤의 휴식에서 깨어나 노래하면서 분분히 날아 오른다. 이것으로 우리는 또 봉새가 왜 <역정(曆政)의 관(官)>으로 간주되어 왔는지

     알 수 있다. 태양은 고인들이 역법을 제정할 때 사용하는 주요한 참조물이다.

 

계속하여 이 태양조인 봉황과 음악의 관계에 대한 설명을 들어보자.

1. 중국의 옛 신화 속에서 봉황은 계속하여 일종의 음악조로 간주되어 왔다. 그 원인은 봉새가 바람의 신이라는데 있다. 바람은 또 천연음악

    의 창시자이다.
2. 위의 (3번) 인용문 내용을 참고 바람.
3. 그러므로 풍신(風神)은 봉신(鳳神)이며, 또한 중국 고대의 음악의 신이다. 대략 이러한 이유 때문에 풍(風)이 중국 고대 악가(樂歌)의 총명

    (總名)이 되었다.
4. 곽말약은 상술한 복사(卜辭) 자료에 근거하여, 은상인(殷商人)들이 매일 아침 저녁으로 해를 맞이하고 보내는 예배의식을 행하였다고

    단정했다(<殷契粹編>, 과학출판사, 1965. P. 354 - 355.).
5. 만일 문화인류학자들이 기술한 미주지역 인디언의 오랜 제일례(祭日禮)를 참고한다면, 우리는 중국 상고시대에 이러한 오랜 배일풍속

   (拜日風俗)이 있을 수 있다는 명확한 인상을 받을 수 있다. 기록에 의하면 인디언은 일출을 맞이하기 위한 제사를 밤이 되면서부터

   시작한다. 소나무로 둘러싸여 있는 공터의 정중앙에 나무를 세운 거대한 기둥에 불을 붙여 여명때까지 줄곧 태운다.


이른 새벽이 가까워 오면 일출을 경축하는 사람이 등장한다. 그들은 얼굴과 전신에 모두 백색의 점토를 발라 태양의 백색을 상징한다(문헌의 기록에 의하면 은상인과 고대에 태양을 숭배했던 동이민족(지금의 일본과 한국을 포함)은 모두 흰색을 존귀한 복색으로 여기는 습속이 있다). 그들은 손에 깃털을 사용하여 장식한 무봉(舞棒)을 들고, 불을 둘러싸고 바짝 열을 지어 춤을 춘다(깃털은 새의 상징이며, 고대인의 눈에 태양은 빛을내는 한 마리의 신조였다 ......). 그들은 태양의 운행을 본떠 동쪽에서 서쪽으로 움직인다. 비록 불더미가 살을 태울 정도로 뜨겁지만 춤추는 사람들은 용감하게 최대한 접근하여, 불로 그들이 들고있는 깃털을 태워 새로운 태양의 탄생을 상징한다.


춤과 함께 환락에 찬 노래와 함성이 멀리 들판을 가로지른다. 의식이 고조에 오르면 일출을 모방한 상징적 의식이 행하여진다. 열여섯 명의 남자가 태양의 화상(畵像)을 받쳐들고, 그것을 천천히 장엄하게 올리면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른다. 여명을 맞이하여 동이 터오면 의식도 끝머리에 들어간다(J. E. Lips의 <사물의 기원>에서 발췌).

 

여기에 소개된 인용문들은 그 유명한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의 기록 중에서 "무리지어 모여 노래하고 춤춘다(群聚歌舞)"는 기록의 유래가 어떤 것인지를 알게 해주는 내용들이다. 이 기록들이야말로 거메디언(卍)으로 두 마리 봉황을 상징하여 세운 솟터에서 가무음곡으로 태양신을 모시던 동이풍속을 정확히 묘사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며, 그 유래를 대신 설명해 주는 것이나 같다.
단지 봉황이 햇님과 달님의 상징, 즉 일월(日月)이 강림하여 사람으로 왔다고 주장한 동이인(東夷人)이었다는 사실과, 인디언의 제의가 그 햇님과 달님을 맞이하던 풍습을 재현한 것이라는 사실은 이 설명에서 빠져있다.


그 이유는 그런 사실을 고증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동이족이 고대에 세계를 지배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한 전통을 답습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진시황이 풍류의 기록들을 불태운 혜택을, 바빌론과 이집트에 보관되어 있던 풍류의 기록들을 불태운 로마인들의 후예가 만든 실증사학의 도움을 받아, 지금 중국인들이 입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동이족의 지배가 부활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그래서 서양의 교황청은 마녀사냥이라는 비인도적 종교탄압을 자행하였고, 중국의 역사가들은 동이문화를 평가절하하기에 급급한 것이다. 최근에는 중국학계가 또다시 동이문화를 자기네 문화로 둔갑시키려는 시도도 일부에서 발견된다. 결국 풍류의 실상을 밝히는 숙제는 오직 삼신의 후예인 우리 한겨레가 해야 할 일인 것이다.
그리고 가무음곡은 단순한 제례예악으로 그치지 않고, 풍류의 수련법에 그대로 활용된다. 즉 <삼일신고>에 나오는 성기원도(聲氣願禱; 소리와 김으로 바라고 빔)에서의 소리(聲)는 노래가 주문으로 변한 것이요, 기(氣)는 호흡(바람=風=鳳)과 심장(태양=凰)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생명의 박동인 것이다.


이를 달리 표현하자면 태양의 규칙적인 운행에서 발견되는 박자(拍子)가 우리 몸 속에도 심장의 붉은 색과 규칙적인 박동에 반영되어 있고, 계절의 변화에 따라 바람의 방향과 힘(성질)이 다르며 그 차이가 초목을 낳고 죽이는 것에 착안하여 호흡법과 주문이 만들어진 것이다. 요즘 유행하는 단전호흡이 호흡의 특수한 형태임은 물론이요, 노래나 주문등이 모두 그 본질은 호흡을 변형시킨 것이다. 이 심장박동(리듬)과 호흡을 보완하는 여러 악기가 개발되면서 음악이 성립하고 발전한 것이다.
지금까지 설명된 내용을 종합하여 한마디로 결론을 내리면, 풍류는 태양신을 숭배하는 특별한 종족이 스스로 태양신의 후예임을 자처하면서 세계를 지배하되, 그들이 개발한 고도의 문화를 여러 이민족에게 가르치던 도덕정치였고, 그 도덕정치의 양대 기본요소가 봉토입국(封土立國)과 예악교화(禮樂敎化)였다는 것이다.
지금부터 풍류의 주요 내용을 몇가지 분야로 나누어서 상세히 살펴보자. 이 작업이 제대로 완수된다면 한겨레가 세계의 종주국으로 복귀하는 토대가 확립될 수 있겠지만, 이는 어느 한사람이나 단체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가 아니다. 여기서는 그 연구의 물꼬를 튼다는 심정으로 가장 기본적인 내용들을 개괄하는 수준임을 미리 밝혀, 여기 소개된 것이 풍류의 모든 것이라고 오해하는 불상사를 예방하고자 한다.


3. 태고(太古)

1) 태양문화
인류문화의 공통된 근원, 즉 그 이전의 문화형식을 찾을 수 없고, 전세계에 걸쳐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문화가 있다면 그것은 어떤 것일까?
우리 고대사에서는 환국(桓國)을 말하고, 중국 문헌에서는 상고시대(上古時代)를 말하며, 히브리인들은 에덴동산을 전하고 있으며, 그리이스인들은 신들의 세계인 올림포스를 묘사하고, 또 플라톤은 전설의 고향인 아틀란티스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이들은 같은 세계를 다르게 부른 이름일까, 아니면 각기 다른 문명의 각기 다른 역사인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이 모두는 같은 것이다. 아득한 옛적에 인류는 하나의 뿌리문명에서 출발하였으니, 그 시원문명이 바로 하느님 나라이다. 이 하느님 나라는 여러 민족의 신화속에 남아있지만, 그 내용은 결코 허구가 아니라 실존했던 이상세계와 그 주민들인 신들에 대한 기록들이다.
그 세계는 한마디로 태양의 나라로 표현할 수 있다. 태양의 나라는 태양을 진리의 상징으로 숭배하고, 태양의 성품을 본받으려 노력하며, 태양의 영토인 하늘에서 자연과 인생의 법칙을 발견하여 세상을 이롭게 하려던 초인들의 세상이다.
다른 여러 나라와 민족들도 그 문명을 이어받아 발전해 왔으나, 그 문명의 최고진리와 직계혈통은 바로 한겨레가 이어받았다. 이 사실은 그동안 몇몇 종교인들에 의해 주장되었지만, 그 사실을 입증할 이론을 갖추는 수준에는 이르지 못하였고, 결국 민족주의자들의 구호 이상의 의미는 부여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새로운 근거자료를 발굴할 필요도 없이, 이미 있는 자료들을 관점만 약간 바꾸어 생각하면 고대의 모든 역사와 종교기록들이 풍류의 증빙자료로 둔갑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고대의 제정일치사회를 지배하던 집단이 풍류의 주체세력인 동이족이었고, 그들이 개척한 진리체계와 사회제도를 이어받지 않고서는 그 어떤 집단도 살아남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세월이 수천년간 지속되었고, 그 기간동안 풍류의 정치문화는 세계 모든 나라의 기본제도로 자리잡았던 것이다. 그 결과 풍류의 통치체제는 붕괴했지만 그 문화는 주체세력만 바뀐 상태로 살아남은 것이다.
그런데 풍류의 주체세력의 후예를 판정하는 문제는 풍류의 해설과는 다른 문제이다. 풍류의 흔적을 지니고 있는 모든 나라들이 풍류의 정통맥을 이었다고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몇가지 전제조건을 충족시켜야 하는데, 그 전제조건들을 검토하는 것도 이책의 주제 중 하나이다.
그 맨 첫 번째 출발점으로 잡은 것이 바로 '환(桓)풀이'로서의 태양문화의 유습인 것이다. 그리고 태양문화의 흔적을 찾아가는 나침판으로 십자도상(十字圖象)을 선택하여 보자.

 

2) 십자도상
우리 주위에서 가장 흔한 문양을 찾는다면, 첫째가 원상(圓相)이요 둘째가 십자도상(十字圖象)일 것이다. 이 둘은 모두 태양신의 상징에서 출발한 것이지만, 오늘날 그것들이 태양의 모습에서 유래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고, 특히 십자도상이 태양의 형상을 본뜬 것이라고 말하면 쉽게 믿기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부분에 대한 하신의 연구는 십자도상과 태양신과의 관계를 뚜렷이 드러내고 있다. 하신은 [신의 기원]에서 신석기 시대부터 사용되었던 여러 장식도안 중에서 빈번히 나타나는 십자도형을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그는 달비엘라(D'Alviella)가 지은 <부호의 전파(Micration of symbols)>라는 책을 인용하여, "여러 십자도형들이 공통된 모체인 태양을 의미하고 있다"고 단언한다. 그리고 이 십자도형의 두가지 기본적인 도안으로 십자(十字) 모양과 거메디언(Gammadian) 즉 만자(卍字) 모양을 소개하고, 고대의 도안들을 총결하여 논리적으로 대체적인 변천순서를 나열하고 있다.

하신은 이 두가지 도안, 즉 십자와 만자 도안을 모두 태양빛이 사방으로 방사하는 모습을 상징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런 견해는 탁월하고 우수한 견해이다. 여기에 덧붙일 내용이 있다면, 이 부호들이 후대에 오면서 태양신 뿐만 아니라 태음신(달님)과 태자신(별님)까지를 합친 삼황신(三皇神), 이책에서 삼한신(三韓神)으로 부르는 삼신(三神)의 표상으로 사용되었다는 사실 정도일 것이다.
아무튼 이 십자와 만자는 신석기시대로부터 철기시대의 초기에 이르는 수천년 동안에 걸치는 유적지에서 전세계적인 분포를 보이고 있으며, 이 사실은 고대에 전세계적으로 태양신을 숭배하는 태양신 신앙이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그리고 이 부호들은 지금 인류가 신앙하는 대부분의 고등종교들의 중요한 상징도안으로 사용되고 있으니, 유교의 하도(河圖)와 낙서(洛書), 불교의 만자(卍字; 부처의 가슴에 있는 길상의 표시), 기독교의 십자가(十字架), 밀교의 만다라(曼茶羅; Mantra), 도교의 팔괘도형 등이 모두 이 부호들이거나 그 변형이다. 또 이런 종교들이 국교로 신봉되었던 나라들이 이 부호들을 변형시켜 자기네 나라를 상징하는 국기의 도안으로 삼음으로써, 이 부호들은 불멸의 생명력을 과시하고 있다.
이 부호들은 태양문화의 유물 중에 아직도 살아남은 가장 두드러진 것인만큼, 이 도상들로 상징된 태양신 신앙이 풍류와 어떻게 연관되는지를 몇 개 항목으로 나누어 살펴보면, 풍류와 다른 종교들간의 관계는 저절로 밝혀진다.

 

3) 고대(古代)와 태고(太古)

① 고대(古代)
오늘날 우리는 고대(古代)라는 말을 많이 쓴다. 이 말의 현대적 의미는 현대나 근대에 대비되는 시간적 개념으로서, 지금(A.D 1990년대)으로부터 500여년 전인 문예부흥(르네상스) 이전을 주로 가리키는 말이다. 따라서 고대는 중세 봉건국가 시대까지도 포함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수백년 전의 시절은 자동적으로 고대에 포함되는 것으로 생각들을 하게 된다.
그러나 박용숙 선생은 고대가 단순히 [오래된 시대]를 뜻하는 말이 아니라, [古]라는 글자가 지닌 고유의 의미가 통하던 시대를 나타낸다는 사실을 밝혀 내었다. 이에 대한 선생의 논문인 <[古]와 古墳의 역사>에 주장된 주요 내용들을 간추려 보자.

 

1. 시대적으로 [고대]에는 세가지 시대구분이 있다. <강희자전(康熙字典)>에서 "伏羲上古 文王中古 孔子下古"라고 되어있는 바, 복희의 시대가 상고요, 문왕의 시대가 중고요, 공자의 시대가 하고라는 뜻이다.
2. [古]는 처음에는 신전을 나타내는 말이었다가 후세에는 신상(神像)으로 의미가 축소되었다. <강희자전>에서 "先古謂先祖也(선고를 선조라 한다)"라고 하여, 古와 祖가 같은 뜻이라하였고, 또 "祖狀尸也(祖는 尸의 모습이다)"라 하였는데, 다시 尸(시)를 "又神像也 古者祭祀皆有尸以依神(또 신상이다. 옛날에 제사에는 신을 의탁시키는(대신케하는) 시(尸)가 있는데 그것이 신상이다)"라고 한다.
3. 古의 옛글자는 덮개(지붕같은 것)가 있는 건조물 속에 휘장을 치고, 성직자가 신상에 예배하는 모습이라고 했다.

위 내용에 따르면 [古]는 신상이다. 첫 번째 인용문에서 고대는 춘추전국시대까지이고, 진시황의 분서갱유(焚書坑儒)라는 만행이 저질러진 다음에는 고대라는 말이 쓰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이 사실은 매우 중대한 의미가 있는 것이니, 진시황의 분서갱유는 단순히 유교를 박해한 것이 아니라 그 이전의 종교형식 자체를 파괴한 것으로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 파괴된 종교형식은 말할 것도 없이 [신상을 모시던 종교]이다.


[신상을 모시던 종교]는 모든 종교의 뿌리인 [종교(宗敎)]이다. 이 [종교]라는 말은 원래 일반명사가 아니라 고유명사였다. 그 [종교]가 가리키는 대상은 지금 [무속(巫俗)] 또는 [샤마니즘]이라고 불리는 신앙이다. 그리고 그 본래의 뜻도 [왕도(王道)]로서, [성인이 덕으로서 세상을 다스림]을 나타내는 말이었다. 이 [종교]의 실상은 종교를 주제로 다루는 [무인도]에서 설명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풍류]가 바로 신상을 모시던 [종교]였음을 알아두자.
[古]가 신상이라면, <강희자전>의 원문은 "복희는 윗 신상이요, 문왕은 가운뎃 신상이요, 공자는 아랫 신상이다"로도 해석할 수 있다. 이렇게 보는 경우에는 세 사람이 각기 다른 종교형식의 개조(開祖)로 이해되며, 복희와 문왕과 공자 사이에 시대적으로나 권위상으로 등급을 매길 수 있다는 뜻을 찾아낼 수 있게 된다.


이 뜻을 취한다면 유교(공자)의 뿌리는 문왕에 있고 문왕의 뿌리는 복희에 있게 되어, 복희에서 유래한 종교가 가장 오래되고 권위있는 종교가 되는 것이다.
박용숙 선생은 다루지 않은 내용이지만, 代(대)에도 신상이란 뜻이 있다. [代]의 본래 뜻은 [표적이 되는 말뚝 옆에 기대선 사람]이라는 뜻인데, 이를 [말뚝으로 만든 사람]의 뜻으로도 생각할 수 있다. 즉 [尸]의 다른 표기가 [代]일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古代(고대)]는 [신(神)을 대신하던 상(像)]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대]가 대신하던 신앙대상은 구체적으로 누구(무엇)였던지가 궁금해진다. 그리고 그 대답은 앞에서 다루어왔던 주제에 이미 밝혀져 있다. 즉 [古]라는 글자는 [十]과 [口]로 쪼개지는데, 십자도상은 태양신의 상징이요 입구(口)자는 신전이거나 또는 지신(地神)의 상징인 것이다. 이 중에서 [口]를 어떤 쪽으로 해석해도 옳은 뜻이 되도록 하는 매개체가 바로 [태고(太古)] 또는 [반고(盤古)]이다.

 

② 태고(太古)와 반고(盤古)
고대가 태양신의 신상이라면, 우리가 아득히 오래된 옛날의 뜻으로 사용하는 태고(太古)는 무엇일까? [古]가 신상임이 이미 밝혀졌으므로 [太]의 뜻만 알면 태고의 뜻은 저절로 드러나므로, 그다지 어렵지않게 태고의 정체를 밝힐 수 있다.
먼저 [太]는 본래 옆의 그림에서 보듯이 클 대(大)자 두 개를 세로로 겹쳐썼던 것을 생략한 것이다. 지금은 이 글자를 [아주 크다]라고 풀이하지만, 이 글자가 상징하던 것은 [사람을 낳는 사람], 즉 어미(母)를 나타낸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즉, 위의 大가 어미이고, 아래의 大가 아기인 것이다.


둘째로 [大]가 사람을 나타내는 글자였으므로 뒤에 신분제가 생겨나면서 [사람 위에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 추가되었을 것으로 추측 된다. [太]라는 글자 모습이 사람(大) 위에 사람(大)이 있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여기서의 신분제는 풍류의 신분제도를 말하는 것이니, 신전에 살던 동이인들을 천신(天神) 또는 천인(天人)이라고 부른데서 [太]가 동이들의 별칭이 되었을 것이다.
[太]가 동이의 별칭이 된 유래도 또한 태호복희에서 찾을 수 있다. 태호복희의 이름은 앞에서 살펴본 대로 태양의 밝음이며, 동이인들이 스스로를 태양신(太의 윗 大)을 모신 사람(太의 아랫 大)으로 자처했던 데서, 太가 동이의 별칭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셋째로 [太]는 [삼한(三一)]의 뜻이다. 이 뜻은 풍류에 고유한 뜻이라고 할 수 있는 바, [음양의 시원이 되는 통일체]라는 의미와 [삼재합일의 근원]이라는 의미가 바로 [삼한(三一)]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의미를 부각시키기 위해 <천부경>을 앞머리에 소개해야 했던 것이다. 풍류에서 이 [삼한]의 뜻은 모든 분야에 적용되는 핵심개념인 것이다.
이 [태(太)]의 세가지 뜻을 [古]의 뜻과 합치면 [태고]의 뜻이 된다.


태고의 첫째 뜻은 [고모(古母)], 즉 어머니 신상이다. 고대인의 유물로 자주 발견되는 풍요의 여신상이 바로 이 고모인 것이다. 이 고모는 <강희자전>에서 말하는 삼고(三古)인 복희 . 문왕 . 공자보다 더 오래된 삼고미분(三古未分)의 태고이기도 한 셈이다. 이 [고모]가 바로 [곤모(坤母)]로서, 앞에서 설명한 바 있는 우임금의 아버지인 곤(鯤)의 정체이다.
태고의 둘째 뜻은 천신상(天神像)이다. 사람 위의 사람을 뜻하는 [太]의 신상이 태고이며, <강희자전>의 삼고(三古)는 여기에 해당한다. 이 삼고가 오랜 시일에 걸쳐 선정되었음은 복희와 공자까지의 기간이 수천년인 점만 보더라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공자를 하고에 집어넣은 것이 그 이전에 있었던 어떤 제도를 모방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 이전에 복희 . 여와 . 황제를 함께 모신 삼황상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결국 그 제도는 삼신을 모시던 풍류임이 분명하다.
태고의 셋째 뜻은 삼황상(三皇像)이다. 삼황이란 천황 . 지황 . 인황을 일컫는데, 이 삼황을 하나로 묶어 그린 신상(神像)이 삼황상이다. 고대로부터 전해지는 삼황상의 전형적인 것으로 산동반도(山東半島)의 마왕퇴(馬王堆) 고분에서 출토된 복희 . 여와 . 황제의 삼신일체상(三身一體像)이 있다. 이 삼황상은 삼신일체(三神一體) 사상이 한대(漢代) 이전에 이미 형성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며, 이때 쯤에는 풍류의 체계가 완성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 태고의 다른 이름이 [반고(盤古)]이다. 이 반고를 전설 속의 거인 이름 정도로 생각하고 만족할 것이 아니라, 그 글자 자체가 가지는 뜻을 풀어보면 전혀 이외의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먼저 반고에 대해 전해지는 내용부터 살펴 보기로 하자.
반고는 천지를 창조하였다는 전설 속의 거인이다. 천지가 아직 나누어지기 전에 혼돈하여 계란과 같았을 때 그 속에서 반고가 태어났고, 그 후 18,000년이 지나 천지가 개벽되었으며, 천지개벽 후에 하늘과 땅과 반고가 함께 날마다 일장씩 자랐다고 한다.
반고가 죽어 그의 호흡은 바람과 구름이 되고, 목소리는 우뢰와 번개가 되었으며, 두 눈은 해와 달이 되었고, 팔다리는 산맥이 되었으며 피부와 살은 논밭이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하신은 <신의 기원>에서, 반고에 대한 기록이 삼국시대 오(吳)나라의 서정(徐整)이 지은 <삼오역기(三五歷記)>에 처음으로 나온다는 사실과, 이 시대에 불교가 인도로부터 중국으로 전파되었다는 사실을 들어, 반고가 인도 브라만교의 최고신인 브라흐마(Brahma)의 한자 음역인 반(盤)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뿐만아니라 다시 브라흐마의 근원을 바빌론의 천지개벽에 관한 서사시에 나오는 천지개벽 이전의 혼돈신인 [바우(Bau)]에서 찾는다.
그런데 그의 이같은 주장은 풍류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여 핵심을 꿰뚫지 못한 견해이다. 왜냐하면 반고가 인도와 바빌론의 고대신통(古代神統)과 연결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당시 중국에 반고의 또다른 음역인 편고(偏枯)가 있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편고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살펴본 바 있다.


반고는 태고나 삼고의 다른 이름인데, 이 반고가 바로 역(易)의 시초인 하도(河圖)라는 사실을 알면 상고(上古)가 복희(伏羲)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가 저절로 밝혀진다. 왜냐하면 복희씨가 하도를 보고 팔괘를 그린 것이 역의 시초가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복희씨가 보았다는 하도는 이책 [천부역]에서 밝히는 바와 같이 천문현상(天文現象)이고, 또 천문현상을 본떠 만든 신전이기도 하다.
그 반고는 하늘과 땅보다 먼저 있었고, 죽어서 이 세상을 만들었다. 따라서 반고에 대한 전설이 기록되던 시대에는 이미 없어졌던 어떤 것이다. 그러면서도 복희씨가 그 모습을 보고 팔괘를 그릴수 있었으니, 복희씨의 시대까지는 천신(天神)이나 지신(地神)보다 우위에 있었던 인격신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런 조건들을 충족시키는 인신(人神)은 오직 고모(古母), 이미 말한 태고가 있을 뿐이다. 그러면 반고가 어떻게 하도가 되는지를 살펴보자.


이 그림이 하도이다. 하도는 하나(一)부터 열(十)까지의 자연수로 이루어져 있고, 그 중에서 홀수는 하얗게 표시되어 볕(陽)을 상징하고 짝수는 까맣게 표시되어 그늘(陰)을 상징한다.
이 음양이 서로 안고 안기어 서로 밀고 당기는 힘으로 만물을 낳아 기른다는 것이 하도가 담고 있는 핵심사상이다. 하도의 자세한 설명은 천부역 해설로 미루고, 여기서는 반고에 대해 설명을 계속하기로 하자.
하도가 낙서와 함께 역(易)의 원조인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으나, 이 그림이 삼신산(三神山)이라는 사실은 아직까지 알려져 있지 않다. 삼신산은 우리민족의 발상지로 알려진 태백산(太白山)이요, <삼국유사>에 궁홀산(弓忽山), 백악산(白岳山)으로도 표기된 바로 그 산이요, <삼성기(三聖記)>에서는 사백력(斯白力)과 파나류산(波奈留山)으로 기록된 산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부르는 백두산(白頭山)이나 장백산(長白山), 중국사서에 자주 등장하는 곤륜산(崑崙山), 천산(天山), 태산(泰山)등이 실제로는 모두 이 삼신산의 별칭이다.

삼신산에 대해서는 조금 후에 설명되거니와, 이렇게 여러 이름으로 불리는 삼신산의 실체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바로 피라밋(Pyramid)이다. 피라밋이 삼신산이라고 생각하고 하도를 보게되면, 하도가 피라밋의 평면도인 것을 쉽게 알아볼 수 있다.
가운데 다섯 개의 흰점을 모아 만들어진 십자는 정확히 동서남북을 가리키고 있어 피라밋의 네 모서리가 동서남북을 가리키고 있는 점과 일치하며, 또 이 십자에 의해 만들어지는 네 개의 삼각형은 피라밋의 네 비탈의 세모꼴과 일치한다.
십자를 둘러싼 세겹의 네모꼴은 피라밋의 삼층 기단(基壇)을 나타낸다. 또 그 네모꼴의 사방에 희고 검은 점으로 표시된 숫자가 방위를 상징하고 있음은 역학(易學)의 상식이다. 이 세겹의 네모 위에 피라밋이 있다는 뜻을 나타내기 위해, 중앙의 십자를 네모 위로 뽑아올린 것이 [古]자이다.


피라밋에 삼층기단이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피라밋의 내부가 삼층으로 나뉘어 있으니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 삼신산은 삼층으로 되어 있고, 우리나라의 성산(聖山)인 백두산도 삼층으로 되어 있다. 삼신산은 환단산(桓檀山)을 거쳐 혼돈산(混沌山)이 된 후 다시 곤륜산(昆崙山)이 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수경주(水經注)>에서는 곤륜에 대하여 "삼층으로 이루어진 산을 곤륜(崑崙)의 언덕이라 한다. <곤륜기>에는 곤륜산은 삼급으로 이루어졌으며, 밑을 번동(樊桐) 혹은 판동(板洞), 그 다음을 현포(玄圃) 혹은 한풍(한風), 제일 위를 층성(層城) 혹은 천정(天庭)이라 한다. 이 천정이 태제(太帝)가 거하는 곳이다"라고 한다.
의심스럽겠지만 피라밋의 분포지역을 살펴보면 [아프리카 - 아랍 - 중앙아시아(시베리아) - 몽고 - 만주 - 남북아메리카]로 이어지는데, 이 지역들은 아프리카를 제외하면 모두 몽고족, 달리 말하면 옛 흉노족의 후예들의 활동무대이다(아랍이 동이족의 활동무대임은 뒤에 자세히 설명된다). 그 [흉노(凶奴)]가 바로 [하나]를 비하시켜 음역한 이름인 것이니, 중국인들이 한겨레의 위력을 두려워하여 전전긍긍하면서 지은 이름이다.


따라서 피라밋과 삼신산을 연관시켜 생각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더욱이 피라밋에 모셔진 신앙대상이 일신(日神) 오시리스(Osiris), 월신(月神) 이시스(Isis), 성신(星神) 호루스(Horus)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그 가능성은 거의 100%라 할수있다.
반고가 피라밋이라는 또하나의 증거가 반(盤)자의 뜻에 들어있다. [盤]은 [받침]이라는 뜻과 함께 [돈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는 피라밋과 같은 기능을 가지면서 옆면을 나사모양으로 처리한 지그랏(Ziggurtu)을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盤]에서 그릇 명(皿)받침을 뺀 般(반)의 뜻을 찾아보면 [배를 타고 삿대짓을 하면서 돌아다니다]는 뜻이 되는데, 이 뜻과 하도의 이름에 들어있는 강 하(河)자와 결부시키면 모든 의문이 사라지게 된다. 풍류의 신전이 바다였으므로 신전내부를 돌아다닐 때 배라고 불리는 가마를 타고 다녔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반고가 동해 바닷속에 있다는 삼신산임을 더 이상 의심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하신이 주장한 반(盤)이 브라만의 음역이라는 주장도, 브라만의 또다른 한자표기인 범(梵)을 풀이해 볼 때 타당성이 있고, 다시 그 이전 형태가 혼돈의 신인 바우(bau)라면 우리말 [바위]와 연결된다. [梵]은 무덤 위에 두그루의 나무를 심은 모습으로서 풍류신전인 고분의 모습이요, [바우]는 [바위(岩)]로서 피라밋의 재료이기 때문이다.
이제 결론을 내릴 때가 되었다. 태고는 반고이며, 반고는 피라밋 형식으로 지어진 풍류도의 신전이었다. 신전의 중점은 그 신앙대상에 놓여지므로, 반고는 삼황상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삼황상은 인류의 첫 조상들을 신격화시켜 모신 것이고, 따라서 삼황상과 신전은 혼연일체로 인식되었다는 말이다.


뿐만아니라 그 속에서 생활하는 사람(神官)들까지도 천인으로 숭배되었고, 그들을 부르는 이름이 천사(天使)였던 것이며, 이들이 고대 기록에 풍신(風神)으로 나타나는 신들의 정체이다.
신전과 신상과 신관을 모두 한덩어리로 보았기 때문에 후대에 신이 죽어 나라와 종족이 생겼다는 반고신화가 형성될 수 있었다. 반고가 죽어서 신체부위가 우주의 구성요소가 되었다는 전설은, 풍류의 신전(삼신산)이 붕괴된 후 그곳에 살던 사람들이 속세로 나와서 신체부위가 상징하는 계급제도를 만들었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인체부위와 계급제도와의 관계는 박용숙 선생이 <한국의 시원사상(pp. 39-72)>에서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설명된 내용들은 뒤에 다시 설명되므로, 여기서 모두 이해하려고 애 쓸 것이 아니라 해당부분에서 확인하도록 하고, 지금부터는 태고(삼신산)의 주인인 [삼한], 즉 [삼신(三神)]을 살펴보도록 하자.

 

4. 삼한과 삼신

1) 간추림
삼한(三一)은 풍류의 최고 핵심개념이다. 삼한의 설명에 들어가기 전에 가장 먼저 지적할 사실은 [삼한]이 상고시대에 동이족이 쓰던 순우리말이라는 사실이다. 이 우리말을 주변문화권에서 빌려다 쓰고, 빌려 쓴 문화권에서 새 의미를 첨가하고 그 첨가된 새 의미를 우리가 재수입하는 과정이 반복되면서, 무수한 갈래로 분화된 말이 [삼한]이다.


그 삼한의 원초적 의미는 삼일(三一)이니, 셋이 합쳐져 하나가 된다는 뜻이다. 따라서 우리 민족의 시원경전 중 두 번째로 거론되는 <삼일신고(三一神誥)>는 [삼한신고]가 본명임을 알 수 있다. 이 삼한의 다른 표기는 여럿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한검(桓儉)]이다. 박용숙 선생은 삼(三)과 태(太)와 검(儉)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삼.일신고>는 檀君(단군)의 이름을 桓儉(환검)이라 기록하고, 桓儉을 桓因(환인), 桓雄(환웅)에 이어 세 번째 자리에다 배열하고 있다. 즉, 이들 三神 중에서 桓儉을 세 번째의 신으로 모셨다는 사실이다. ...... <사기>의 봉선서(封禪書)에는 삼.일신(三.一神)은 천일(天一), 지일(地一), 태일(太一)인데, 그 셋 중에 태일(太一)이 가장 귀하다고 한 것이다. 그렇다면 太가 곧 삼(三; sam)이며, 이때의 太는 우리말의 [클, 큼]이 된다. 즉, 큼은 다시 kum, gum(儉)이 되는 것이므로 퉁구스어의 saman이라는 말이 터어키 . 몽고어의 kam, gam(監)과 같은 뜻의 말이 된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즉, sam과 gam은 모두가 三을 뜻한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桓儉은 saman이며, 이때의 桓儉은 saman 중에서도 가장 높은 자리의 saman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儉 앞에 桓, han이 붙기 때문이다. 이때의 桓은 곧 天을 뜻하며, 天은 또한 신들이 사는 곳이므로 檀이 된다.

 

우리는 이미 [桓]이 [하늘]로서 [햇님]과 [신(神)]과 [으뜸]의 뜻을 가진 글자임을 알고 있다. 따라서 삼한이나 한검이 모두 삼신의 뜻이 된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아래와 같은 <태백일사>의 기록이 사실을 정확히 기록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표훈천사>에서 말한다. "대시에 위. 아래. 사방은 일찍이 아직 암흑으로 덮여 보이지 않더니 옛것은 가고 지금은 오니 오직 한 빛이 있어 밝더라. 상계로부터 또 삼신이 계셨으니 곧 한분의 상제시라. 주체는 곧 일신이니 각각 신이 따로 있음이 아니나, 쓰임은 곧 삼신이시라(表訓天詞云 大始 上下四方 曾未見暗黑 古往今來只一光明矣 自上界 却有三神卽一上帝. 主體卽爲一神 非各有神也 作用卽三神也 ......). <태백일사(太白逸史) . 삼신오제본기>

 

생각컨대 저 삼신을 [천일]이라하고,[지일]이라하고, [태일]이라한다. 천일은 조화를 주관하고, 지일은 교화를 주관하며, 태일은 교화를 주관하느니라 ...... 크도다. 삼신일체의 원리됨이여! 만물원리의 덕이여, 지혜여, 힘이 됨이여!(稽夫三神 曰天一 曰地一 曰太一. 天一主造化 地一主敎化 太一主治化 ...... 大矣裁 三神一體之 爲庶物原理而 庶物原理之 爲德 爲慧 爲力也 ......)

위의 인용문을 볼 때, 삼한이나 삼일의 본래 의미가 삼신(三神)임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이 책에서는 삼신의 뜻 중에서 "셋이 합쳐 하나가 된다"는 뜻을 분리시켜, 모든 분야에 적용할 수 있는 기본원리인 서물원리(庶物原理)로 정착시키려 한 것이다.
이 삼일의 본맥은 수운 선생의 동학에 의해 삼교합일사상으로 되살아나고, 삼일 독립운동으로 새시대의 지평을 열었으며,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으로 역사의 주인공으로 재등장한 것이다. 대한(大韓)의 대(大)는 하늘과 땅과 사람을 상징하는 세 개의 획으로 구성되었고, 앞에 소개된 검(儉: gum)을 통해 삼(三)과 연결되는 것이다.


삼한의 본래 의미는 이미 말한대로 삼신(三神)이다. 삼한의 [한]을 절대자이며 으뜸가는 초월존재를 뜻하는 신(God)으로 이해한 것이 삼신이다. 이 삼신과 삼한의 어느 쪽이 먼저 생겨난 말인지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생각된다. 고대에 우리민족이 신(神)을 [한]으로 읽지 않았다는 증거를 제시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신라의 왕호(王號)였던 마립간(麻立干)이나 거서간(居西干)의 [간(干)]이나 몽고의 왕호인 칸(징기스칸) 등을 고려할 때, 고대에 신의 칭호로 [한]이 사용되었을 가능성은 매우 크다.
삼한을 조상신의 이름으로 쓰고있는 민족은 아마도 한겨레 뿐일 것이다. 그리고 삼한의 소리를 딴 샤만(shaman)이 무당이라는 사실이 널리 알려진 현실정을 생각할 때, 이미 외래종교를 받아들여 뇌수술을 끝낸 사람들로서는 용납하기 힘든 사실일 것이다.
그렇지만 현실을 부정할 수는 없는 일이니, 한겨레의 국조삼신은 분명히 환인 . 환웅 . 단군왕검, 달리 부르는 이름으로는 한님 . 한울님 . 단군한검으로서 삼한(샤만)이 분명하다. 그러나 외래종교인들도 절망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이 삼한이 모든 외래종교에서 절대자로 모셔지는 바로 그분이시기 때문이다.


삼한의 셋째 뜻은 삼신이 다스리던 강역을 표현하던 말로서, 역사기록에 진한(辰韓) . 마한(馬韓) . 변한(弁韓)으로 나타나는 바로 그 삼한(三韓)이다. 이때의 한(韓)은 우리말 [한]을 가장 비슷한 뜻을 가진 한자로 옮긴 것으로서 조(朝)와 꼭같은 뜻이며, 환(桓)과 함께 인(人)을 이루던 두 나라 중의 하나였다(이 내용은 별도로 설명하자).
이 삼한은 오늘날의 얼치기 사학계(史學界)에서 말하는 것과같이, 한반도의 한쪽 구석에 몇몇 미개종족들이 모여 사방 백리 정도의 영토를 확보하고 나라라고 일컬으면서, 해마다 봄 가을로 술을 질펀하게 마시고 고성방가나 일삼던 그런 시시한 나라가 결코 아니다.
그 당시에는 지금의 한반도와 기후조건이 비슷하였던 세계의 지붕 파미르 고원에 천국을 건설하여 호천금궐을 짓고, 주위 사방에 사대평원(동쪽의 중국평원 . 남쪽의 인도평원 . 서쪽의 서남아시아 평원 . 북쪽의 시베리아 평원)을 봉토지로 관할하면서, 열국의 조공을 받으며 만방(萬邦)을 교화하던 초강대국이었다.


바둑을 둘 때, 90집(혹은 100집) 이상을 이기면 [만방]이라고 하는데, 이정도 집차이가 나려면 [사귀생 통어복(네 모퉁이와 중앙을 모두 차지하는 것)]을 해야 한다. 즉 이긴 사람의 집모양이 만(卍)자를 그려야 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몇몇 오지(奧地)를 제외한 모든 지역을 다스리던 삼한의 영토를 상징하는 상징물이다.
삼한의 넷째 뜻은 이 삼한을 통치하던 세명의 군주(君主)였던 삼황(三皇)이다. 중국 고대사에 등장하는 정체불명의 천황 . 지황 . 인황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을 정체불명이라 하는 이유는 국어 사전에서 찾아보면 삼황을 복희 . 여와 . 황제라고도 하고, 복희 . 염제 . 황제라고도 하고, 황제 대신에 수인씨(燧人氏)를 일컫기도 하는 등 정설이 없기 때문이다.
이들 삼황의 정체는 한국(삼한)을 나누어 다스리던 풍백(風伯) . 우사(雨師) . 운사(雲師)이다. 풍백은 진한왕(辰韓王)인 천황이 되어 제사장과 씨내리를 겸하고, 우사는 마한왕(馬韓王)인 지황이 되어 영토권과 씨받이를 관장하고, 운사는 변한왕(弁韓王)인 인황이 되어 봉토권과 조공권을 관장하였던 것이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환인 . 환웅 . 단군의 삼신은 삼한의 체계가 자리잡히기 이전의 성인들을, 상계의 주신(主神)인 삼신이 강림하시어 나라의 기틀을 열어주신 것으로 보고, 숭배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단군성조 이전에는 환국(桓國)이나 한국(韓國)이었다가 고조선에 이르러 비로소 삼한의 체계가 완비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그리고 고조선은 환국(또는 한국)의 제도를 자국의 체제에 흡수하므로써 제정일치의 완성된 국가형태를 갖출 수 있었던 것이다.
삼한의 다섯째 뜻은 삼황의 대리인으로서 그 칭호가 아직도 살아있는 샤만(shaman), 즉 무당이다. 우리 역사에서 무당은 그 옛날 삼황의 역할을 그대로 이어받아 왔기 때문에, 이 이름만큼은 무당맥의 전승과 함께 아직도 만주벌판의 오지에서나마 살아남았을 것이다.
이 다섯가지의 뜻 중에서 어느 하나를 삼한의 뜻으로 내세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따라서 앞으로는 이 뜻들을 모두 나타내는 [삼한]이라는 우리말을 대표어로 확정하여 쓰고, 어느 특정분야에 해당하는 뜻임을 밝힐 필요가 있는 경우에는 한자를 괄호속에 넣어 표기하도록 하겠다.
이제 지금까지 요약 정리된 내용들을 하나씩 상설(詳說)하여, 고대사 최고의 수수께끼인 삼신산의 정체를 밝히고, 삼신산의 주인들의 홍익인간 도술인 풍류의 실상을 파헤쳐 보자.

 

2) 삼신산과 고분
'삼한'의 개념을 분석하면 '삼'과 '한'이 된다. '한'에 대해서는 '한'의 자연론에서 별도로 해설하겠거니와, '삼'이라는 말에도 풍류의 핵심내용을 이루는 많은 뜻이 있고, 이 뜻들을 살펴보므로써 삼신산의 유래와 실체를 알 수 있다.


우선 '삼'은 숫자로서 기수 [셋]과 서수 [세째]의 뜻이 있고, 이 뜻은 다른 모든 의미에 우선하는 가장 기본적인 의미이다.
둘째, '삼'은 상수학, 즉 음양오행설에서 동방(東方)과 관련된 모든 의미를 대표한다. 봄 . 창조 . 생명 . 해뜸 등이 그것이다. 이 중에서 [생명]의 뜻은 지금 쓰고있는 [삶] . [사람] 등의 말과 통하고, [해뜸]의 뜻은 아래의 여섯째 뜻인 샘(泉)과 통한다.


셋째, '삼'은 삼극(천.지.인)에서 승계한 음양지중(陰陽之中)의 상징성을 가진다. 중(中) . 인(人) . 왕(王)등이 그것이다. 이 중에서 [왕]은 [큼(大)]이라는 말을 매개로 [군(君)] . [감(監)] . [금(金)] 등의 글자와 연결된다. 신(神)을 뜻하는 우리말의 [ ]과 일본말 [gami]도 이 계열에 속한다.
넷째, '삼'은 셋에서 유래한 삼각(三角), 즉 [세모] 또는 [세 뿔]의 의미가 있다. 이 중에서 [세뿔]은 여린소리로 발음하면 [세 불]이 된다.

이 [세 뿔]과 [세 불]은 우리말에서 수도(首都)를 나타내는 말인 [서울]의 역사적 근거가 무엇인지를 밝히는 중요한 낱말이 된다.


다섯째, '삼'은 [쇠(金)]의 뜻이 있다. 땅속에서 파낸 금속광물을 뜻하는 쇠는 이 '삼'에서 유래한 것으로, [셋 - 세 - 쇠]의 변천과정을 거친다는 주장이 있다.


여섯째, '삼'은 샘물의 뜻이 있다. 풍류에서는 이 뜻이 '삼'의 가장 원초적인 뜻이라고 생각된다. 박용숙 선생은 샘(泉)이 샤만이라는 말의 뿌리가 되는 말임을 전세계의 여러 언어들과 비교하여 밝혀내고 있다.


[泉]은 [白水]로 나누어지는데, [白]은 해나 달과 같이 밝은 것을 뜻하며, [水]는  리(머리, 무리) .  (言, 馬) . 물이(海神. 河神. 澤神 즉 龍王) 등의 어근이 된다. 白水는 우리말로 [흰물]이 되는데, [흰물]을 [해 리]로 바꾸어도 된다면 [해가 처음 뜨는 곳]이라는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이다.


이 [해 리]의 뜻을 찾아볼 수 있는 다른 글자들이 [海(바다)] . [湖(호수)] . [河(큰강물)] 등이다. 이 글자들이 모두 소리는 [??] 계통으로 나면서 물을 뜻하는 삼수변이 붙어있음을 볼 때, 그 본래뜻이 [해 리 신전]을 나타낸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일곱째, '삼'은 [시립(始立)], 즉 [처음으로 서다]는 뜻이 있다. 우리말에서 [셋]의 다른 꼴인 [섣]이 그것으로, 세모뿔이나 삼발이의 곧추선 모습에서 확장된 뜻이라 하겠다.


여덟째, '삼'은 위의 둘째와 다섯째 뜻의 다른 표현인 [새롭다]의 뜻이 있다.
아홉째, '삼'은 '산(山)'의 뜻으로도 쓰인다. 그리고 이 뜻이 위의 여덟가지 뜻을 종합해야 나오는 개념이면서, 위의 모든 뜻을 유기적으로 조직화시켜 삼신산과 연결시켜 주는 뜻이기도 하다.


위에 설명한 '삼'의 뜻 중에서 넷째 뜻인 [세모]와 일곱째 뜻인 [서다]가 합해서 [산]이 되고, 여기에 둘째 뜻인 [동방의 일출]이 더해지면서 [해돋는 산]의 의미가 형성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또 하나의 의미가 끼어드는데, 그것이 바로 [불(火)]이다.

고대 갑골문의 불 화(火)자는 왼쪽 그림처럼 썼었고, 불을 뿜는 화산의 모양으로 생각된다고 한다. 청동기의 명문(銘文)에 나타나는 火자는(오른쪽), 좌우에 점이 찍혀 있을 뿐 오늘날의 산(山)과 글자모양이 거의 같다. 뫼 산(山)자의 고대 모습은 오른쪽 그림과 같아서, 옛사람들이 산과 불이 깊은 관계가 있는 것으로 생각했음을 보여준다고 한다. 이런 관점의 밑바닥에 깔린 것이 바로 삼신산인 것이니, 삼신산은 '삼(물)'과 '불'과 '산'의 개념이 하나로 종합된 표상인 것이다.
이 사실을 수긍하려면 다시 샘(泉)을 알아야 한다. 샘은 물줄기(하천)의 출발점이면서 그 물줄기의 가장 위쪽에 있게된다. 따라서 샘의 다른 이름이 우물(웃물; 윗물)이 되는 것이다. 물은 사람의 생존에 필요한 으뜸가는 요소이기 때문에 예로부터 신성시되었고, 그 때문에 샘물은 그 자체가 신전이 되는 풍습이 있다. 지금도 무당들은 산마루 가까이에 있는 폭포와 소(沼)를 찾아가 용왕제를 지내는데, 그 풍습의 뿌리도 여기서 찾아진다.


그런데 이 우물이 또 연금술과 직결된다. 금속을 제련하기 위해서는 광석을 채취해야 하고, 광석을 얻으려면 땅을 파야한다. 광맥을 따라 땅을 파면 우물이 생기게 되므로, 연금술과 우물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게되고, 고대에 야금(冶金)은 신전(왕실)에서 관장하였으니, 신전은 물과 불이 하나로 묶어진 장소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불과 산을 묶어주는 일이다. 그리고 이 둘을 묶어줄 동앗줄은 태양이다. [해돋는 산]에서의 태양은, 산위에 불덩이가 얹힌 모습이므로 화산의 모습과 비슷하다. 그리고 이 태양과 가장 가까운 곳이 땅에서는 산이다. 그래서 태양신을 모시는 신전을 산마루에 짓고, 그곳을 [밝터(明堂)]라고 불렀던 것이다. 우리말에서 [산]의 고대어가 [받(박)] . [달(닥)] 등으로 나타나는 유래도 여기서 찾아진다.
그 중에서도 신성시 되었던 곳이 화산이다. 화산은 산꼭대기에 불이 있으니 태양의 집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는 장소인 것이다. 고대의 신전이 산악지대 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화산대 주위에 분포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또 신전의 건축양식이 지진에 잘 견딜 수 있는 구조로 되어있는 이유도 이런 관점을 수용하면 쉽게 해명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풍류의 발상지 중에서 많은 지역이 화산활동에 의해 매몰되었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


이제 삼신산은 완전히 해설된 셈이다. 신(神)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해설은 없었지만, 앞에서 태양신이 신(神)의 원초적 개념임을 밝혀 두었으니, 여기서 몇가지 설명을 덧붙인 정도로 만족하기로 하자. 다음의 과제는 삼신산과 고분의 관계이다.
오늘날 주로 쓰이는 [고분(古墳)]이라는 말의 뜻은 [오래된 무덤] 특히 [옛날의 왕들을 매장한 큰 무덤]이다. 그러나 박용숙 선생은 [고분]이 단순히 오래된 무덤이 아니라 풍류의 중심무대인 신전으로서, 삼신산의 별칭이라는 사실을 논증하고 있다.
고분이라는 단어 중에서 [고(古)]는 이미 소개하였고, 남은 것은 [분(墳)]인데, 선생의 논문을 발췌하여 요약해 보자.

 

1) ㉠ 古者 墓而不墳 (註)土之高者曰墳 <禮記 檀弓>(옛날에는 무덤을 분이라 하지 않았다. 분은 높은 땅이다. <예기 단궁>)
㉡ 三墳分也 論三才之分 天地人之始也 <白虎通>(분은 세가지가 있으니 삼재의 구분이라 논하는 것으로 천지인의 시초이다. <백호통>)
㉢ 伏羲 神農 黃帝之書謂 三墳言大道也 <孔安國 商書序>(복희, 신농, 황제의 글에 이르기를 삼분의 말이 대도라 한다<공안국 상서서문>)
2) 예문 ㉠에서 높은 땅이 분이며, ㉡에서 분이 세 개로 나뉘며 그것이 각기 천지인 삼재의 시원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3) 예문 ㉠의 주(註)에서 높은 땅이 분이라 하였으니, 이때의 분을 산과 동일한 모양으로 볼 수 있다. <수경주>에 있는 "①진(秦)에서는 천자(天子)의 총(塚)을 가리켜 산(山)이라고 말하는 까닭으로 ....../ ② 한(漢)에서는 능(陵)을 산릉(山陵)이라고 하는 것이다 ......" 라는 구절로 보아 산이 분의 특수한 명칭임을 알게된다.
4) 山에 대한 은대(殷代) 문자는 앞에서 소개한 불 화(火)자 그림과 비슷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 은대적(殷代的) 표현에서 두드러지는 특징은 山을 나타내는 삼각형이 세 개라는 점이고, 산의 모양이 완만한 곡선으로 표현되지 않고 거의 기하학적인 의지를 보인다는 점이다.
5) 세 개의 삼각형은 각기 삼신(天地人)의 상징이며, 동시에 그것이 곧 삼신산의 모델임을 말해주고 있다. 분의 모양을 삼각형으로 표현하고 있는 사례는 이집트의 피라밋을 비롯하여, 고아시아(古 Asia)문명권에서 발굴되는 지그랏트, 마야(Maya). 잉카(Inca) 문명지, 심지어는 고구려 시대의 광개토대왕묘에서도 발견된다.


6) 중요한 점은 山의 은대적 표현이 그대로 이집트의 피라밋을 본뜨고 있다는 점이다. 이점은 은대문명이 이집트나 바빌로니아 문명과 관련되고 있음을 말해주며, 한국의 고대문명이 수메르(Sumer) 문명과 관련있다는 학설에도 유리한 증언이 된다.
7) 고분의 어원과 역사를 통하여 확인되는 사실은 [古]가 종교적인 숭배물이며, 그 종교가 유교나 불교와는 다른 종교이고, 적어도 공자시대 이전 까지는 중국쪽에 존속되었다는 점이다. 그러던 [古]가 어떤 이유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지금의 한반도 쪽으로 이동되었다. 일연(一然)의 표현법에 따르면 이 [古]의 종교는 [紀異(기이)]에 속하며, 오늘날 우리가 접하고 있는 고대의 신화, 전설이 모두 이 [紀異]의 풍속으로 통한다.


8) <고조선> 기사에서 일연은 단군이 도읍한 [아사달(阿斯達)]에 주를 달고 여러 가지 자료들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 아사달을 [無葉山(무엽산)], [弓忽山(궁홀산)], [方忽山(방홀산)]이라고 한 부분은 특별히 주목된다. 무엽산은 글자 그대로 [잎사귀가 없는 산]이므로 피라밋이나 지그랏을 연상하기에 알맞다. 궁홀산의 [弓]은 [세모꼴]의 뜻이고, 방홀산의 [方]이 [네모꼴]의 뜻이다. 이는 피라밋의 형태가 네모 바닥에 세모꼴인 것과 일치한다.


9) 또 <한단고기>에 "환인의 나라가 파나류산(波奈留山) 밑에 있었고 ......"라는 기록이 있는데, 파나류의 글자 뜻이 [태양신의 눈에서 나오는 영혼의 빛이 머무르다]라는 뜻으로서, [지구를 비추는 태양빛]이라는 뜻의 피라밋(Pyramid)과 같은 뜻이 된다.

이 인용부분들의 내용들과 앞에서 설명된 풍류의 뜻을 합쳐보면, 고대의 태양신 숭배문화의 전체 유적이 풍류와 연결됨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고분을 삼신산으로 보는 것이 아무런 무리가 없으며, 오히려 고대의 고분들이 모두 삼신산이고 그 삼신산들이 태양신을 숭배하던 고대종교의 신전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면, 인류문화의 기원을 올바로 설명할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이다.


이 고분이 지상으로 솟아나오면 한옥이 된다. 한옥의 기와지붕은 피라밋을 양쪽 옆으로 길게 늘여, 사각뿔의 형태가 가지는 여러 가지 제약들을 극복한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제약이란 산기슭에 터를 닦을 때, 가로로 길고 세로로 짧은 터가 생기게 되므로 정사각형의 피라밋을 지으면 면적이 작아진다는 결점이다. 피라밋의 지상부는 지붕에 다락방을 넣어 해결하였고, 지층부는 그대로 썼으며, 지하부는 지하실을 넣어 삼층으로 만들었다.

 

3) 삼한과 삼황

① 삼한(三桓)
일연의 <삼국유사>는 환인(桓因)의 혈통을 이어받은 단군왕검이 세운 고조선을 한겨레의 첫나라로 기록하고 있다. 김부식(金富軾)도 <삼국사기>[신라본기 시조 혁거세 거서간조(新羅本紀 始祖 赫居世 居西干條)]에서 "...... 이보다 앞서 조선의 유민이 산곡사이에 나누어 살아 여섯 마을을 이루었으니 ......(先是 朝鮮遺民 分居山谷之間 爲六村)"라고 하여, 한겨레의 뿌리를 조선으로 기술하고 있는 점은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우리민족의 뿌리가 고조선인 점은 확실하다.


그런데 <환단고기>에서는 [환인(桓因)]과 함께 [환국(桓國)]을 명기하고 있고, 삼국유사의 [환인(桓因)]을 [환국(桓國)]으로 표기해도 전혀 문제가 되지않을 뿐 아니라 [인(因)]이 [국(國)]보다 더 큰개념인 세계국가를 말한다는 주장도 있으므로, 조선의 뿌리는 다시 [환국]에 가서 닿는다.


아무튼 이 환국과 관련하여 우리 국조삼신인 환인 . 환웅 . 환검(단군왕검)의 호칭이 등장하는데, 이 세분을 앞으로는 [삼한]이라 부르기로 한다. 임승국 선생은 환인 . 환웅 . 환검도 모두 하늘을 나타내는 [한]으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글쓴이의 입장도 이와 같다. 특히 [환검]이라는 표기는 <제왕운기>에 단군의 칭호로 명기되어 있고, 박용숙 선생도 그 이름이 원칙이라고 한다. 다만 [환]이라는 글자도 그 자체의 고유한 의미가 있고, 한자가 우리 조상들이 만들어 쓰던 글자인만큼 고유명사는 그대로 쓰고, 대명사로 쓰이는 경우에는 가능한한 [한]으로 표기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때에도 다른 뜻과 혼동될 여지가 있는 때에는 한자표기를 함께 쓸 것이다.


<삼국유사>에서는 "<고기>에 이르기를 옛날 환인의 서자 환웅이 자주 천하에 뜻을 두고 ......(古記云 昔有桓因(謂帝釋也) 庶子桓雄 數意天下)"라고 하여, 환인과 환웅을 소개하고 있다. 지금부터 해설하려는 주제는 바로 이 두분(환인 . 환웅)에 단군왕검을 합친 삼한과, 중국의 고대문헌에 인류의 시조로 일컬어지는 삼황과의 관계를 규명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먼저 삼황의 뜻을 명확히 해둘 필요가 있다.

 

② 삼황
삼황(三皇)에 대하여 사전에서는 "중국 고대의 천자로서 복희씨 . 신농씨 . 황제 또는 수인씨. 일설에는 포희씨 . 여와씨 . 인황씨. 또 일설에는 천황씨 . 지황씨 . 인황씨라 한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이와같은 사전의 설명은 중국의 역대 왕조와 삼황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었으나, 삼황의 위업이 너무나 혁혁하여 중국의 역대 제왕들이 자신들을 삼황의 후예로 자처하였을 가능성을 암시한다.


실제로 중국인들이 자랑하는 가장 오래된 정통 사서(史書)인 <서경(書經); 상서(商書)>에는 위의 어느 한 인물도 자신들의 선조(先祖)로 거론하지 않고 있다. 이들의 칭호가 중국 사서에 최초로 등장하는 것은 전한(前漢)의 사마천(司馬遷)이 쓴 <사기(史記)>에 이르러서라고 한다.
따라서 사마천이 참고하였을 삼황에 대한 기록은 모두 <고기(古記)>였다고 생각해야 한다. 이때의 <고기>는 단순히 오래된 서적이라는 뜻이 아니라, [태고(太古; 盤古)]나 [삼고(三古)]의 기록이라는 뜻이다. 다시말해 그 이전에는 신전에만 감추어져 있었던 기록을 한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자기들의 역사에 포함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사실은 한제국(漢帝國)의 건국시기와 무관하지 않다. 역사상 최고의 폭군 중의 하나로 일컬어지는 진시황의 분서갱유가 한제국이 성립하기 직전에 일어났고, 이때 진시황이 대대적으로 동이를 정벌했다는 사실은 <고기>들의 유출경로에 대한 해명이 되는 것이다.
진시황이 불태운 자료들은 동이의 세계지배를 기록한 서적들이요, 남겨둔 실용적인 자료들이란 역사기록과는 무관한 책들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역사기록들은 동이족의 중심신전이 동쪽으로 옮겨가서 고구려를 비롯한 삼국을 세운 뒤에, 지부(支部) 신전에 거주하던 동이족들이 세간에 유포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중국의 왕조들과 삼황과는 실제로 직접적인 관계가 없었고, 삼황은 동이족의 통치자들이었다는 추론이 성립한다. 실제로 태호복희를 비롯한 삼황으로 지칭되는 인물들이 모두 동이족이었다는 사실은 이제 사학계의 정설이 되어가고 있다. 그렇다면 동이문화, 즉 풍류에서의 삼황은 어떤 존재였을까?
풍류에서의 삼황을 밝히려면 먼저 동이와 조선에 대해 해설해야 한다. 그러니 이 부분은 뒤로 미루고, 여기서는 초점을 바꾸어 삼황이 천황 . 지황 . 인황이고, 이 삼황이 본래는 환인 . 환웅 . 단군이었지만 삼한(三韓)의 체계가 완성된 후에는 풍백 . 운사 . 우사가 된다는 사실과, 이 삼황이 바로 중국사에 등장하는 복희 . 신농 . 황제헌원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설명하기로 하자.

 

③ 삼황(三皇)과 삼한
먼저 삼황과 삼한(三桓), 즉 국조삼신과의 관계를 살펴보자. 삼황은 천황(天皇) . 지황(地皇) . 인황(人皇)이며, 이때의 황(皇)은 광(光)과 같은 뜻이 된다. 빛나는 세명의 신이 삼황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그 이름이 천 . 지 . 인으로 되어있는 것은 <천부경>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보여진다. <천부경>에서는 역학의 원리가 나오는데, 그 역학의 원리를 압축한 그림이 하도이다. 하도가 고분의 설계도와 같은 것이므로,

삼황은 앞에서 설명된 고분에 거주하는 신들이다.


그렇다면 삼황은 각기 햇님 . 달님 . 별님에 해당하는데, 이렇게 되는 이유는 삼황의 거주지 자체가 고궁(古宮), 즉 하늘 집인 신전이기 때문이다. 결국 삼황은 국조삼신이라는 말이 되므로, 여기서부터는 삼황과 삼한을 같이 설명하는 것이 편리할 것 같다.
이 삼황은 고대사회의 중심업무를 셋으로 나누어 관할하였으니, 천황은 제의(祭儀), 지황은 태교(胎敎), 인황은 조공(朝貢)이었다. 즉 천황은 종교적 업무를, 지황은 영토권을, 인황은 통치권을 각각 관장하였다.


영토권과 통치권을 분리한 것이 의외로 생각될지도 모르나, 고대사회에서 영토권을 가진 부족장들이 왕을 선출하여 정치를 맡기되, 나라에 재앙이 닥치면 왕이 덕이 없는 탓이라 하여 잡아죽인데서 알 수 있듯이 영토권과 통치권이 처음에는 분리되어 있었다.
이런 업무분담은 어느 정도는 역사적 변천과정을 반영하는 것이다. 즉 국가형성의 순서가 처음에는 종교집단이 사회를 지도하였고, 종교가 사회를 어느정도 발전시킨 후에는 생산활동에 필요한 토지를 관리할 필요가 있어 무사(武士)집단이 질서를 유지하였다. 사회의 규모가 커지자 무사집단이 늘어나고 그들 사이의 분쟁을 조정해야할 필요에 의해 합의기구가 생기고, 무사집단들의 권한 일부를 위임한 조정자(調整者)를 선출하여 통치권을 부여하였을 것이다.


이런 역사적 과정을 거치는 동안 각 집단의 역학관계가 반영되어, 여러 가지 제도가 고안되기도 하고 폐지되기도 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는 와중에서도 종교 - 무사 - 조정집단의 기본골격은 변함없이 유지되었을 것이며, 그 골격이 통일된 체제로 제도화된 것이 <삼국유사>에 나오는 [고조선(古朝鮮)]이라고 볼 수 있겠다.


<삼국유사>나 <한단고기>에 나오는 조선 전사(前史)인 환국과 배달국(倍達國)은 각기 종교집단과 무사집단을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고, 조선국이 환국과 배달국의 체계를 그대로 이어 받았음을 중층적 삼한개념에서 확인할 수 있다.
중층적 삼한개념이란 우리 역사에서 [삼한]이 삼한(三桓)과 삼한(三韓)의 두가지로 나타난다는 뜻이다. 먼저 삼한(三桓)은 조선의 유래를 신통(神統)에 입각하여 밝힌 것으로서 [윗삼한]으로 부를 수 있으니, 곧 삼신일체의 신앙체계이다.
다음으로 삼한(三韓)은 조선의 통치체제이니, [아랫삼한]이라 할 수 있다. 이 아랫삼한을 다스리던 사람들이 바로 삼황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고, 그들이 바로 풍백 . 운사 . 우사인 것이다.


따라서 삼황을 태양신과 그 식솔(달님과 별님)의 뜻으로 사용하는 특수한 경우에는 삼황이 곧 삼한(三桓)이 된다. 그러나 삼황을 조선국의 세 통치자로 보는 경우에는 삼황이 삼한(三韓)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같은 구별에서 [韓]의 핵심개념은 아무래도 우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韓]은 우물구덩이를 뜻하는 [간(乾의 '乙'이 없는 글자)]에다가 에워싼다는 뜻의 [圍(위)]의 생략형인 [韋(위)]를 더한 글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글자의 본 글자는 [ (위)]라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의 대상에 중점이 놓여지는 윗삼한은 신전의 빛을 뜻하는 [桓]으로 쓰는 것이 옳고, 풍류의 봉건제도(神政)에 중점이 두어지는 아랫삼한의 경우에는 이 [韓]을 쓰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말이다.


이제 삼한(三桓)은 삼신으로, 삼한(三韓)은 삼왕으로 칭호를 바꾸어 [삼한 = 삼신 + 삼왕]으로 용어를 정립하도록 하자. 지금까지 이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우리 역사의 이해에 많은 혼란이 있었으나, 이렇게 정리해 두면 혼란을 크게 줄일 수 있을 것이다.

 

④ 삼신과 삼황
여기서 다룰 주제는 삼신의 뜻풀이에 해당한다. 삼신이 햇님 . 달님 . 별님으로 이해될 때, 우리 고대사가 세계사의 시원에 대한 기록으로 재평가 될 수 있음을 박용숙 선생은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는 고대사의 상징과 사회제도와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삼신을 재조명 하므로써, 삼신의 여러 칭호를 이해해 보려는 것이다.


먼저 환인(桓因)은 [햇님] . [하느님]을 뜻하는 순우리말로서, 태양신의 이름이다. 상고시대의 각 종족들은 태양신을 시조신으로 숭배했는데, 그 풍습이 우리 역사에도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삼국유사>가 환인에 대해 [제석천왕(帝釋天王)]이라고 주(註)를 달고 있는 것도 같은 뜻이다. 이 주에 대하여, 일연이 승려였기 때문에 조상들까지 인도의 신으로 둔갑시켰다고 나무라는 사람도 있는데, 이는 제석천왕이 인도 브라만교의 최고신인 [인드라(Indra)]로만 생각한데서 생긴 오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Indra(인드라)를 한자로 옮길 때 새로운 글자를 만든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말 중에서 뜻이 비슷한 말을 골라 썼다는 사실을 생각못한 것이기 때문이다.
[帝釋天王]이라는 네 글자는 모두 태양신을 나타내는 칭호이다. 먼저 [帝]는 태양신을 제사하는 제단(祭壇)의 모습이다. [天]은 본래 태양을 나타내는 글자였다. [王]은 [皇]과 같은 글자로 쓰였으니 이 또한 태양신의 뜻이다. 그렇다면 [釋]자만 풀어내면 제석천왕의 정체도 드러나는 셈이다.


[釋]은 [ (변)]과 [目(목)]과 [幸(행)]을 합친 글자이다. [ ]은 [씨를 뿌리다]는 뜻이고, [目]은 [눈]이며, [幸]은 본래 뜻이 [일찍 죽는 것을 면하다]는 뜻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그 뜻을 한단계 더 추구해 보면, [ ]의 씨를 뿌린다는 뜻은 변한(弁韓)의 다른 표기인 [번한(番韓)]의 [番]과 같은 글자이다. 즉 풍류의 씨뿌리기를 나타내는 글자로서, 동이족의 혈통을 뜻한다. 다음으로 [눈(目)]이 나타내는 뜻은 군왕(君王)이다. <천부경> 수리에서 눈이 군왕을 상징함은 박용숙 선생이 밝힌 바이다.


마지막 [幸]은 풍류도의 중요한 목표인 장생불사와도 연결되지만, 글자 자체가 [천자]의 뜻이 있음을 [총행(寵幸; 제왕이 여자를 사랑하여 침석에 들게 함)], [행행(行幸; 천자의 행차)] 등의 말을 통해 알 수 있다. 결국 [釋]은 고대 임금의 별칭 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이 사실은 [석전(釋奠)]이라는 말에서도 확인된다. 비슷한 글자인 [석존(釋尊)]과 혼동하지 말기 바란다. [석전]은 "선성선사(先聖先師)의 제사. 한(漢)나라 이후에는 공자의 제사만을 이름"으로 풀이되어 있는 말이다. 이 해석과 "복희가 上古요, 문왕이 中古요, 공자가 下古이다"라는 三古의 해석을 연결해 보면 모든 의문이 풀린다. [釋]은 [三古]의 다른 표현인 것이다. 소리는 [석]이 되어 [석 삼(三)]을 나타내고, 뜻은 선성선사(先聖先師)가 되어 태양신(삼신)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불교가 전래되면서 샤카 무니(Sakya muni)의 샤카(Sakya)를 그 많은 글자 중에 [釋]으로 옮긴 데에는 풍류의 후광을 빌리려는 뜻이 있었던 것이며, 그 의도는 성공하여 석가모니가 환웅전(大雄殿)을 차지하고 앉을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제석천왕]은 지금도 무당들이 목메게 부르는 [삼신제석(三神帝釋)]의 다른 이름이다.


[제석천왕]에 [태양신]의 뜻이 있어 브라만교의 태양신인 [인드라]와 뜻이 같기 때문에 죄없는 일연이 욕을 먹었던 것은, 순전히 족보를 간수못한 한겨레의 책임일 뿐이다. 더구나 브라만교가 삼한의 하나인 마한의 후신(後身)으로서, 인드라가 곧 제석천왕이므로 <삼국유사>의 기록은 한치도 어긋남이 없이 진실만을 기록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환인이 태양신이라는 학설에 대하여 최인(崔仁)씨는, "민족사의 출발이나 민족의 본질을 철학적으로 논할 일이지, 해가 뜨고 날이 밝고 어둡고 하는 미물 짐승들의 오관이나 본능에 의존한다고 하는 것은 민족사의 모독에 지나지 않는다"고 역설하였다 하는데, 이는 철학의 본질을 오해한 것이다.


철학이란 자연현상의 인간적 의미를 언어를 사용한 논리로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그시대 그사람들에게 필요한 철학은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철학이 아니다. 오늘날에는 정령신앙이 미개인의 소박한 신앙형태라고 평가되지만, 근대 이후의 철학자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들을 선발하여 환인이 정령신앙을 만들던 시대로 데려갔을 때, 그들이 어떤 철학을 만들 수 있었을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지금 살아있는 후손들의 민족적 자부심을 높이기 위해 조상들의 위업을 모독할 수는 없는 일이다.


불의 발견과 농경의 시작(신석기 혁명), 그리고 태양을 비롯한 천체들과 자연현상과의 관계규명 등은 뉴턴 물리학이나 상대성이론 등과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업적인 것이다. 그런 업적을 이룬 주체가 바로 우리의 직계조상인 국조삼신이라는 사실, 그것을 밝혀주는 문화유산이 풍류인 것이며, 그 풍류의 최초형태가 [햇님]이라는 낱말로 지금도 남아있는 것이다.


환인은 또한 인류 최초로 철학을 창시한 철학자이기도 하다. 태양이 생명력의 근원이며, 또 지구에서 일어나는 모든 자연현상의 유발자(誘發者)요 주재자라는 사상은 지금 행세하는 모든 철학의 근원이며, 아직도 그 뜻을 모두 밝혀내지 못한 심오한 진리체계이다. 이책도 그 진리의 한 단면이라도 더 개척하려는 몸부림이기도 하다.


환인이 한 자연인으로서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고대사회에서 중요한 사항이 아니었을 것이고, 환인의 이런 업적을 기리는 뜻으로 태양신이 지상에 강림한 신인으로 숭배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가르침을 계승한 그의 후손들에 의해 태양신의 칭호는 세습되었을 것이며, 이런 과정을 거쳐 환인이 우리민족의 조상신으로 정착한 것으로 보여진다.


환웅은 우리말 [하늘(天)], [큰 불(大火)], [한울(大城冊)]등을 한자로 나타낸 것이다. 이때의 하늘이나 큰불이 태양신의 상징임은 [桓雄]이라는 글자에서 확인할 수 있다. [桓]이 태양의 뜻임은 여러번 강조되었고, [雄]은 [클 굉(宏)]자와 [새  (추)]자를 합친 글자로서 [큰 새(大鳥)]라는 뜻이 된다. 그리고 이 [큰새]가 바로 태양을 가리키던 대붕(大鵬) 또는 봉황이라는 사실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고, 이 사실을 통해 환웅이 환인의 권위를 계승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환웅에 대한 역사적 사실 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웅녀(熊女)]에 대한 부분이다. 웅녀는 단군신화에 기록된 대로, 환웅과 동침하여 단군을 낳은 우리민족의 대성모(大聖母)가 되는 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웅녀에 대한 연구는 웅녀가 곰이었는지 아닌지를 따지는 수준을 간신히 넘어선 실정이다.


웅녀가 곰을 토템으로 하던 부족의 여인이었다는 주장이 한때 널리 믿어지기도 하였으나, 최근의 연구는 이 곰(熊)이 신(神)을 뜻하는 순우리말인 [ ]의 한자표기라는 쪽으로 기울고 있으며, 이렇게 볼 때 웅녀는 [여신]이 된다. 또 [ ]이 [큼(大)]에서 갈라져 나온 말이라는 주장을 채택한다면, 웅녀는 [큰 여자]가 되어 [큰 남자]를 뜻하는 환웅과 짝을 이루게 된다(雄의 글자 뜻은 [수컷 웅]으로 되어 있다).
우리는 [웅녀]가 [ 녀]로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을 중시해야 한다. 그리고 단군신화에서 웅녀의 위상은, 환웅의 아내가 아니라 단군의 어머니라는 사실에 중점이 있다는 사실도 간과할 수 없다. 이 사실은 [ 녀]의 속뜻이 [ 모], 다시말해 [큰어머니]일 가능성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 모]를 [곤모(坤母)] 또는 [고모(古母)]로 바꾸어도 문제가 없게된다. 이렇게 추적하는 이유는 앞의 [태고와 반고]에서 설명된 [곤모]와 한겨레의 대성모인 [웅녀]를 연결시키기 위해서이다. 풍신(風神)의 본래 뜻인 대붕이나, 봉황의 어릴 때 모습인 북명(北冥)의 물고기 곤(鯤)이 우리민족의 첫어머니인 웅녀의 다른 이름이라는 것이 글쓴이의 최종결론이다.


웅녀를 이렇게 이해하자면 단군신화에 곰과 함께 등장하는 호랑이에 대해서도 설명해야 하는데, 이 호랑이는 바로 중국 고대전설에 자주 등장하는 [서왕모(西王母)]의 상징이다. 하신은 <신의 기원>에서 서왕모가 태음신(太陰神)으로서 곧 월신(月神)이며, 복희와 한몸으로 그려지는 여와(女蝸)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한대(漢代)의 전화( 畵)에서는 서왕모의 몸 아래에 항시 호랑이가 그려진다고 한다.
보다 중요한 사실은 이 호신(虎神)의 이름이 [우토(于兎)]로 발음된다는 사실이다. [우토]는 한자어로는 아무런 뜻을 찾을 수 없고, 그 때문에 여러 가지 다른 표기가 있다. 그렇다면 이 말의 뿌리를 우리말에서 찾아야 옳고, 우리말에서는 태음신이나 지신의 뜻을 대표하는 후토(后土)를 쉽게 연상시키는 [웃터(上土)]라는 말이 있다. 즉 단군신화에 등장하는 호랑이의 실체는 당시 영토권을 행사하던 여신족(女神族)의 여인이었던 것이다.


결국 단군신화의 "곰 한 마리와 범 한 마리(一熊一虎)"는 박용숙 선생의 주장대로 "곰은 검은머리 검은 눈의 황인종이고, 범은 노랑머리 파란 눈의 백인종으로 이해된다."
이 해석은 아주 중요하다. 왜냐하면 태백산 신시가 이 두 인종이 뒤섞여 살면서 영토분쟁을 일으키던 그런 지역에 세워졌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지역은 르네상스 이전에는 지중해 연안의 서남아시아와 동북아프리카 외에는 없었다.
결국 신시의 위치가 지금의 중동지방이라는 선생의 주장은 한편으로는 정확한 것이다. 여기서 [한편으로는] 이라고 단서를 붙인데에는 이유가 있으니, <한단고기>의 기록을 참고할 경우 이 간단한 구절에 1,500년이라는 시간공백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이점은 삼계(三界)에 대한 설명에서 다루기로 한다.


단군신화를 통해 알아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사실은 환웅이 바로 지황이라는 것이다. 환웅에 대한 기록에 범과 곰이 같이 나타나고, 그들이 아이 낳을 자격을 얻기위해 수행하는 여자들이며, 환웅이 그들에게 자격을 갖추는 방법을 지도하는 사람이라는 사실 등은 환웅이 여신전을 관장하던 지황이라는 사실을 뜻하는 것이다.


환웅과 웅녀의 [웅]은 우리말로 읽으면 같은 소리가 된다. 이는 환웅(桓雄)을 환웅(桓熊)으로 써도 된다는 뜻이다. 즉 웅녀는 본래  녀의 뜻도 되지만, 환웅의 여인이라는 의미로도 이해된다는 뜻이다.


이 사실은 웅(熊)의 본래뜻을 찾아보면 더 확실해진다. 곰은 옛날에 능(能)으로 썼으며, 웅(熊)은 본래 [활활 타오르는 불빛이 곱게 빛난다]는 뜻이었다고 한다. 이는 바로 대화신(大火神)인 태양신의 이미지인 동시에, 지황의 또다른 직무인 야금장(冶金匠)과 관계되는 상징인 것이다. 이 점을 지원해 주는 말이 바로 [서자(庶子)]이다.


단군신화의 [서자(庶子) 환웅]에 대해서 여러 가지 해석이 있으나, [서(庶)]의 글자뜻은 [불을 켜 둔 집] 또는 [불씨를 모시는 집]이다. 따라서 박용숙 선생이 다음과 같이 설파한 것은 참으로 탁월한 견해라 하겠다.

 

환웅이 서자라는 것은 바로 그가 월궁 출신임을 뜻하는 것인데 ...... 이 월궁은 물론 선천도(先天圖)의 곤(坤)에 해당하는 곳으로 흔히 북천(北川) 가에 있는 곳으로 되어 있다 ...... 서자들은 모두가 한울의 서쪽에서부터 북쪽 사이에 펼쳐져 있었을 신시(神市)에 살았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그러한 신시에 살면서 온갖 잡사(雜事), 이를테면 각종 공예, 그림, 건축, 야장업 등에 종사하였는데 이러한 일은 물론 신정시대에 있어선 모두가 신성한 것이다. 고문헌(古文獻)들에 보이는 호(胡)라든지 월씨(月氏), 숙신(肅愼), 말갈(靺鞨), 백잔(百殘)등은 모두가 신정시대의 신시에서 이러한 역할을 담당했던 신들이다 ...... 고대 그리이스의 가이아(Gaia) 신화는 이러한 서자들이 지귀(地鬼)가 되었다는 것을 암시해 주고 있다 ...... 이때의 지귀라는 것은 곧 생산에 종사하는 신들을 말한다 ...... 환웅이 거느렸다는 3천의 무리는 대부분 이런 지귀들이었다. 우리는 이들을 앞에서 도깨비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서자란 곧 도깨비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능화(李能和)가 수자리(水尺)라고 지칭한 것도 바로 이들을 뜻한다.

 

지금 쓰이는 문왕역 이전에 쓰였던 선천역도(先天易圖)는 복희팔괘도이다. 복희팔괘에서 곤괘는 북쪽에 배치된다. 그리고 남방은 한낮에, 북방은 한밤에 배당되므로, 곤(坤)은 태양이 땅밑으로 들어간 밤에 하늘을 지배하던 신이었다. 그리고 그 신의 상징이 북두칠성이고, 북두칠성을 서양 천문학에서는 대웅좌(大熊座; 큰곰자리)라고 부르므로, 곤모신인 지황이 바로 환웅이라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삼신의 마지막은 단군, 즉 환검이다. <삼국유사>는 단군에 대하여 환검이라는 칭호를 붙이지 않고, 독특하게 왕검(王儉)을 사용하고 있다. 여기에는 분명히 이유가 있을 것이다.


[왕검(王儉)]은 태양신을 뜻하는 [황(皇)]의 변형체인 [왕(王)]과, 앞에서 살펴본 곤모신을 뜻하는 [ (儉)]을 합친 글자로 생각된다. 여기서 눈여겨 보아야 할 글자가 [왕(王)]이다. 왜냐하면 황(皇)에서 흰 백(白)이 떨어져 나가고 왕(王)이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떨어져 나간 백(白)에 대해서는 두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첫째는 [白]이 독립하여 단군(檀君)이 되었다는 것이다. 나머지 하나는 [白]이 상징하는 태양신의 비중이 그만큼 약해졌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

이는 제사장으로서의 기능보다 통치자로서의 기능이 강조된 것이 된다.


[검(儉)]은 [사람(人)]과 [첨(僉)]을 합한 글자인데, [僉]은 [뾰족하다(尖)]는 뜻과 [조사하다]는 두가지 뜻을 가진다고 한다. 이 뜻들을 모두 합하면 [검(儉)]은 [뾰족한 곳에서 살피는 사람]이라는 뜻이 되며, 이는 곧 상감(上監)이라는 임금의 칭호와 같다. 이런 칭호의 유래가 삼신산(古) 꼭대기에서 삼계의 정사를 살피던 태양신(皇)에서 비롯됨은 자명하다.
임승국 선생이 땅의 신을 [ ]이라 하고, 일본말의 [가미(カミ)]가 [꼭대기, 머리, 황(皇), 신(神)을 나타내는 것과, 우리말 검줄(神索), 검토(神土) 등을 예로 들면서 "[검]이 곧 [신(神)]"이라고 주장한 것은 옳은 풀이이다.
따라서 단군왕검은 [단군]이 [박달임금]이 되어 [배달]의 뜻을 나타내므로, [배달을 이어 천신과 지신을 겸한 임금]이라는 최고의 신칭(神稱)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단군왕검이라는 칭호 자체가 [천지를 이어받아 천지를 합하였다]는 의미를 가진 [인(人)]의 뜻을 담고 있으므로, 단군왕검이 곧 인황(人皇)이 되는 것이다.

 

⑤ 복희 . 신농 . 헌원
삼신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 반드시 살펴보아야 할 역사적 인물들이 중국 고대사의 성왕들인 태호복희(太昊伏羲) . 염제신농(炎帝神農) . 황제헌원(黃帝軒轅)이다.
이들에 대한 국내 민족사학자들의 일반적인 견해는, 이들이 동이족의 혈통에 속하지만 배달국이나 조선의 방계 제후에 불과한 사람들로서, 한족(漢族)의 시조가 되는 인물들이라는 것이며, 이는 <한단고기>의 기록에 충실한 입장이다.


이와 의견을 달리하는 학자로 박용숙 선생이 있는데, 선생은 "우리는 해님이 창조주이며 입법의 신이며 교육의 신임을 말하였다 ...... 복희라는 이름은 개인의 이름이 아니라 직칭(職稱)이라고 볼수 있다. 이를테면 해님이라는 신의 직능을 표상한 명칭이라고 할 수 있다. 복희라는 말이 결국 해님이라는 말의 표상이라면, 환인과 복희는 같은 직명이거나 같은 계열의 인물일 수도 있다. 그들은 다 같이 태양신이다. 그러나 하늘의 태양이 두 개가 있을 수 없듯이, 한울에 있어서 최상의 자리를 대표하는 태양신이 이 지상에 두 개가 있을 수 없다. 이러한 신정적 이념으로 보면, 결국 복희와 환인은 동일 신통(神統)일 가능성이 크다."고 하여, 환인이 곧 복희라고 한다.
이 주장은 이책에서 복희와 환인을 모두 태양신의 칭호로 본 사실과 일치하는 것이다. 여기서 일단 환인을 중국에서 자신들의 시조로 빌려 쓸 때 붙인 이름이 복희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다음으로 살펴볼 인물이 염제신농이다. 박용숙 선생은 환웅에 대한 설명에서 "<삼일신고>는 환웅을 두 번째 자리에다 모시고 그를 교화주라고 하였다. 교화란 물론 가르치는 일을 말한다. 엄밀하게 말해서, 가르친다는 것은 재창조의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이미 만들어진 것 혹은 이루어진 법칙을 다시 전하는 행위이다. 그러나, 그 전하는 방법은 반드시 매개물을 통하는 것이므로 그는 재창조를 하게된다. 해님이 창조의 신으로서 입법을 상징한다면, 달님은 재창조의 신으로서 생산을 상징한다. 이러한 관계는, 가령 복희와 신농의 관계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신농은 복희가 만든 팔괘를 늘여서 모두 64괘로 하였으며, 그는 그러한 괘를 가지고 농사짓는 법, 약초를 구별하는 법을 만들어 내었다. 이는 곧 복희가 첫 자리로서 해님인 것을, 그리고 신농이 두 번째 자리로서 달님인 것을 뜻한다"라고 하여 , 환웅과 신농이 동일 신통이라는 뜻을 나타내고 있다. 물론 이때의 신통은 동일인물이라는 뜻이 아니라 동일직능이라는 뜻으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염제신농은 경농(耕農)과 의약(醫藥)의 시조로 일컬어지고 있으며, 불(火)을 종족의 표지로 삼고 관직을 만들었으며, 강(姜)씨로 성을 삼았고, 호를 고신씨(高辛氏)라 하였다고 한다. 이 중에서 환웅과 염제가 동일인이거나 동일 신통이라는 결정적인 증거는 염제의 호(號)가 고신씨(高辛氏)라는 것이다.


고(高)는 입구가 있는 높은 건물의 모양을 본뜬 글자(A)이며, 이는 의심의 여지없이 신전의 모습이다. 신(辛)은 본래의 글자 모양이 도끼로 나무를 쪼개는 모양(B)이며, [섶(장작)]을 뜻한다.
장작은 불을 피우는데 쓰므로 염제(炎帝)라는 칭호와 부합된다. 이 종족의 민요가 바로 <동경대전>에 나오는 [파부지가(破斧之歌)]인 것은 이런 사정을 반영한다. 환웅이 서자(庶子)라는 단군신화의 기록은 바로 이 섶과 연결된다. 섶을 아궁이에 넣어 불을 피우면 [서(庶)]의 뜻인 [불이 있는 집]이 되기 때문이다.


환웅과 신농을 연결시켜 주는 두 번째 근거는 경농과 의약이다. 여기서의 경농은 곡식을 재배한다는 뜻과 태양신족의 씨를 퍼뜨린다는 두가지 뜻이 있는데, 이미 살펴본대로 이는 지황인 환웅의 역할이며, 또 단군신화에 환웅이 곡식을 주관하였다는 기록과도 연결된다.
환웅과 신농의 유사점은 환웅의 강세신화(降世神話)에서도 발견된다. 환웅이 땅에 내려온 태양신의 아들이라는 기록은, 장작을 쌓아올려 화톳불을 피우면서 태양신을 맞이하였다는 신농씨족의 풍습을 연상시킨다. 즉 화톳불은 땅에 내려온 태양의 상징이요, 집 안에 모셔진 불은 땅속에 들어간 태양신의 상징인 것이다.


환웅과 신농을 동일신으로 볼 때, 반드시 밝히고 넘어가야 할 대상이 웅녀와 여와이다. 웅녀와 여와는 모두 고대의 대성모(大聖母)로 묘사되면서도, 그 위상이 아주 애매한 여신들이기 때문이다. 위상이 애매하다는 것은, 두 여신이 모두 지황이 되어야 옳음에도 불구하고, 지황의 자리를 환웅과 신농에게 양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웅녀에 대해서는 이미 자세히 설명하였으니, 여기서는 여와에 대한 하신의 고증과 주장을간단히 소개하고, 웅녀와 여와의 관련성을 찾아보기로 하자.

 

㉠ 한묘(漢墓)에서 출토한 벽돌그림에서 여와는 항상 복희와 몸이 이어져 교미하고 있으며, 양자는 모두 인수사신(人首巳身)의 형상을 하고 있다. 다만 복희의 손에는 태양을 받들고 있고, 여와의 손에는 달을 받들고 있다. 이로서 볼 때 여와는 달의 신이다. 그리고 고대전설 속에서 여와는 인류의 어머니로 받들어지고 있다.
㉡ 여와는 음제(陰帝)로 복희를 보필하여 통치하는 자이다. <회남자; 남명훈>


㉢ 달의 신 여와는 고대종교 중에서 가뭄과 홍수를 주관하는 신이었다. <논형; 순고편>에는 "오랫동안 비가 내리면서 개지 않으면 사(社)를 공격하고 여와에게 제사지냈다"는 한대의 풍속이 기록되어 있다.
㉣ 천지는 처음에 완전하지 않았으므로 여와씨가 오색돌을 단련하여 빠진 곳을 보충하고, 거북의 다리를 잘라 사극을 세웠다. <박물지>

이 중에서 웅녀와 연결가능한 부분은 첫째, 복희와 몸이 이어져 교미하는 모습이다. 이는 환웅을 신농과 연관시킨 바로 앞의 설명과 상치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환웅이 환인의 아들이었고, 고대에 각 부족은 태양신을 시조로 삼고 그 추장은 태양신으로 자기 이름을 지었던 풍속이 있었던 사실을 생각하면, 여와와 교미하고 있는 복희는 실제로는 환웅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이 견해를 지원해 주는 기록도 있다. "태호제 포희씨는 ...... 호를 황웅씨(皇雄氏)라고도 한다(<주역; 계사하정의>)", "호를 황웅씨(黃熊氏)라 한다(<예기; 월령정의>)" 등이 그것들이다.


이런 기록들이 삼신일체의 관념이 형성된 이후의 기록인 점을 감안한다면, 복희와 환웅을 동일한 태양신으로 보고 태음신과 태양신의 결합 자체에 보다 큰 의미를 부여하는 생각이 이런 기록들에 반영되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여와와 웅녀의 두 번째 관련성은 곤모(坤母)에서 찾아진다. 인류의 어머니로서 음제(陰帝)이며 만물을 화육하는 존재는 지덕(地德)을 지닌 곤모이며, 여와와 웅녀는 곤모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발견된다.


두 여신의 셋째 관련성은 거북에서 찾아진다. 곤모가 위치한 북방은 고분에 그려진 사신도(四神圖)에서 현무(玄武)의 자리이며, 이 현무는 신령스런 거북이다. 이 거북은 또한 북두칠성으로 상징되는바, 거북의 형상은 몸통과 머리 . 꼬리 . 앞뒷다리의 일곱 부위로 나눌 수 있고, 이는 북두칠성의 일곱 별에 대응된다. 북두칠성은 큰곰자리이고, 이는 웅녀의 칭호에 붙은 [곰]의 참뜻인 것이다.
결국 환웅과 웅녀를 일체로 묶으면 지황에 배정되는 두 인물인 신농과 여와를 하나로 묶은 것과 같아지는 것이다. 이는 태양신의 신전과 고모신의 신전이 하나로 합해지면서 환국보다 강력한 통치체제인 배달국이 성립되었던 역사기록이, 오랜 세월을 거치는 동안 중국과 한국에서 각기 다른 신화의 형태로 전해지게 되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남은 황제헌원은 단군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황제는 하신의 고증에 따르면 태양신이며, 복희와 여와와의 사이에서 난 아들로 되어있다. 그리고 이 전설이 태양신과 고모신의 결합을 뜻한다는 점에서 단군신화와 다를바 없다.
또 단군왕검의 칭호 중에서 왕검은 태양신과 고모신의 결합을 나타내며, 단군의 단(檀)은 丹(붉을 단; 붉다 =  다), 旦(아침 단; 아침은 밝다), 東(동녘 동; 해돋는 땅의 나무 = 박달나무) 등으로 바꿀수 있다. 이 글자들이 모두 태양의 뜻이 있으므로, 황제(黃帝)가 태양신을 나타낸다는 사실과 일치한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중국역사에 나타나는 삼황의 전설은 단군신화에 등장하는 삼신의 신화가 같은 뜻의 다른말로 전해지는 것에 불과하다. 이렇게 되면 남은 문제는 과연 한족(韓族)과 한족(漢族)의 어느쪽이 삼신의 정통을 이은 종족인가라는 것으로 압축된다.
이 문제를 밝히기 위해 살펴볼 내용이 삼한의 절반을 차지하는 삼왕(三王), 즉 동이와 조선의 삼한관경이다.

 

 II. 동이와 조선

 

1. 동이와 기이(紀異)

1) 동이의 뜻
인류문화는 환국의 풍류에서 시작된다. 그 풍류의 주체, 즉 풍류를 창안하여 주관하고 전수한 집단을 동이(東夷)라고 불렀다. 이 풍류의 주체인 동이의 진정한 면모는 어떤 것일까?
박용숙 선생은 불후의 명저인 <한국의 시원사상>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근거로 "[동이(東夷)]는 고대의 종교결사(宗敎結社)였다"고 결론짓고 있다.

 

① 간보(干寶)의 수신기(搜神記)가 동이에 대해 특별히 신들과 관련된 부분만을 골라서 기록하고 있다.
② 후한서(後漢書)에 "한(漢)이 부여왕의 장례를 위해 늘 옥갑(玉匣)으로 만든 관(棺)을 바쳤다"고 한 대목이 있다.
③ 같은 책에 "고을마다 천신에게 제사지내는 천군(天君)이 있어 제사를 주관하게 되며, 또 소도(蘇塗)라는 것이 있다. 그 소도에 큰 나무를 세우고 방울과 북을 매달아 놓고 귀신을 섬긴다"는 기록이 있다.
④ <강희자전>에 [夷]를 "제왕이 되는 수업이 능이이다(帝王之道 曰以陵夷)"라고 한 것을, <수신기>에서 "만이(彎夷)들이 석실에 산다"고 풀이한 기록이 있다.
⑤ <동이전>에 "소도가 불교의 부도(浮屠)와 같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 종교결사는 유교나 불교와 구별되는 어떤 독자적인 종교이념과 체계를 가졌으며, 바로 그 때문에 고대문명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세력이었으면서도 유교나 불교를 신봉하던 기록자들에 의해 실상이 은폐되고, 결국 정체가 모호해졌다"는 것이다. 동이에 대한 연구결과로서 이보다 더 명쾌하고 합리적인 것은 지금까지 없었다고 보여지며, 모름지기 고대사를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이 문헌을 참고할 것을 권하는 바이다.


아무튼 이 동이의 정체를 규명하기 위한 선결과제는 이 특수한 종교집단의 신앙대상이 무엇이었으며, 어떤 방식으로 믿어졌는가 하는 점이라고 하겠다. 이점을 알기위한 방편으로 동이의 글자뜻을 먼저 분석해 보자. [東]과 [夷]의 원래 글자모양 다음과 같다.

[東]자의 3000년전 모습이 자루의 모습이다. 이 사실은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중대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니, 고대인들이 혼돈신(混沌神)의 모습을 붉은 자루모양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기록을 근거로, [東]이 태양의 뜻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또 서쪽으로 일백오십리에 있는 산을 천산(天山)이라고 한다 ...... 여기에 신이 있는데, 그 모습이 누런 자루와 같으며 빨간 불처럼 붉고, 다리가 여섯에 날개가 넷이 있다. 혼돈은 얼굴이 없으나 가무를 알고 있으니, 실은 제강(帝江)이다. <산해경 . 서산경>

하신은 이 혼돈신이 바로 태양신이라는 것을 여러 가지 근거를 들어 해명하고 있다. 그리고 [혼돈]과 [환단]은 우리말에서 모두 [?阪?]으로 표기될 수 있다. 또 [東]이 태양신 혼돈을 나타내는 글자라면, 우리는 [東]이 방향에서 파생된 개념이 아니라, [東]에서 방위개념이 파생되었다고 보아도 된다.


그리고 이때의 [東]이 하늘에 떠있는 태양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땅에 내려온 태양이 머무는 곳, 즉 태양신의 신전일 가능성도 강력하게 대두된다. 즉 태양신전이 있는 곳이 동쪽이 된다는 것이다. [東]이 방향이 아닌 태양신을 나타낸다는 사실은, 태자의 처소를 부르는 동궁(東宮)이라는 이름이 동양의 역대 왕실에서 쓰인 점을 보아도 알수있다.


이런 가능성은 방위를 나타내는 글자들의 유래를 살펴볼 때 더욱 신빙성이 커진다. 남(南)은 옛날 남방 사람들이 쓰던 타악기(打樂器)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즉 [南]이라는 타악기를 쓰는 사람들이 거주하던 방향이 남쪽이었던 데서 남방을 나타내는 글자가 확정되었던 것이다.
북(北)은 사람이 서로 등지고 선 모습이다. 한자를 만든 우리 조상들이 북쪽을 등지고 남하한 흔적이 여기에 남아있다고 한다. <훈몽자회(訓蒙字會)>에 의하면 [ 뒤 북(北)], [앞 남(南)]으로 되어 있는데, 북방민족이 남하하면서 남쪽이 앞이 되고, 북쪽이 뒤가 되었다는 것이다.
서(西)는 어떤 모양인지 확실하지 않은데, 새의 둥지로 생각하고, 옛음이 사(死)나 천(遷)과 비슷하여 해가지는 방향을 나타내는데 쓰였다고 한다. 저녁에 해가 지면 새들이 둥지를 찾아가는 것과 연관시킨 것이라 한다.


방위를 나타내는 글자의 유래가 어떤 방향에 살던 종족이 쓰던 특징적인 도구나 생활과 관계된다면, [東]의 옛모양이 자루모양이라는 사실은 한겨레의 전통문화와 직결된다. 왜냐하면 김상일 선생이 "자루가 동이족이 사차원입체를 재단하여 만든 교재(敎材)"라고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동이족들이 태양신의 진리를 자루로 상징하였기 때문에 자루가 태양신의 상징이 되고, 동이족들이 살던 방향이 동쪽으로 설정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東]의 원래 뜻은 자루였지만, 2,500년전 부터는 태양(日)과 나무(木)의 두가지 의미를 결합한 형태로 정착된다. 여기서의 나무는 단군신화에 등장하는 신단수(神檀樹)요, 지금도 시골마을을 지키는 성황목으로서, 탑파(塔婆: 인도어 stupa의 음역)와 같은 성지이며, 태양신을 모시던 신전을 상징하고 있다. 이 성지가 동이전에 나오는 [소도]라고 불리던 별읍(別邑)이었고, 소도에 세웠다는 큰 나무가 바로 이 신단수인 것이다.


이 나무에 걸린 해(日)는 태양신을 나타낸다. 이 태양신은 신앙대상으로서의 태양신이기도 하지만, 보다 직접적인 상징대상은 솟터(소도)에서 도를 닦는 낭도들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솟터에서 공부하는 사람들이 낭도이며, 이들은 일정한 시험을 통과하면 부명(符命)과 도록(圖錄)을 받고속세에 내려가 나라를 세우고 왕이 되는데, 이 낭도들이 바로 십간(十干)이다. 이렇게 보면 [십간]은 [열(十)명의 태양신(日)이 될 사람(人)]이 되고 이 세글자를 묶어도 [東]이라는 글자가 됨을 볼 수 있다. 이 [東]이 바로 신수(神樹) 부상목(扶桑木)이다.

 

① 탕곡(湯谷)은 열 개의 태양이 목욕하는 곳이며, 그 가운데에는 부상(扶桑)이라는 나무가 있다. 그곳은 흑치국(黑齒國)의 북쪽에 있다. 물 속에는 커다란 나무가 있는데, 아홉 개의 태양은 아랫가지에 살고, 한 개의 태양은 윗가지에 산다. <산해경 . 해외동경>
② 전욱이 약수에서 와 공상(空桑)에 거주하면서 제왕의 자리에 올랐다. <여람 . 고악>
③ 부상은 푸른 바다 속에서 자라며, 나무의 높이는 수천장에 일천여 아름이나 된다. <십주기>
④ 동방의 끝은 갈석산(碣石山) 동에서 해가 뜨는 부상의 들에까지 이른다. 제태호(帝太昊)와 신구망(神勾芒)이 이곳을 관장한다. <상서>

 

여기서의 탕곡이나 약수, 푸른 바다 등이 모두 뒤에 설명될 동해(東海)이며, 부상이나 공상이 바로 나무(木)로 상징된 신전인 솟터인 것이다.
그러면 [이(夷)]는 무엇인가? [夷]는 글자 그대로 [대궁(大弓)]이다. [大]는 [사람 . 태양 . 임금]의 뜻임을 이미 밝혔다. [弓]은 [활]이며, 이 활은 신의 지혜를 상징하는 신물(信物)이다. 이 [활]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활]의 첫째 뜻은 [원(圓)의 기하학]이다. <후한서>에서 "동이인들은 활을 호(弧)라 한다"는 기록이 있는데, <구장산술(九章算術)>에서 "弧(호)는 반원, 弦(현)은 반지름, 矢(시)는 지름"이라고 되어 있는 점을 볼 때, 활은 원을 분석한 기하학이다. 활의 구성요소인 몸통(弧), 시위(弦), 화살(矢)이 그대로 원의 구성요소로 쓰이고 있는 것이다. 이 활이야말로 <천부경>이 가르치려는 삼각(三角)의 진리를 상징하는 상징물이요, <천부경>해설의 지침이 되는 것이다.
활의 둘째 의미는 이 첫째 의미에서 파생되는 것으로, 각술(角術)의 상징이다. 각술이란 문자 그대로 [뿔의 셈]으로 풀이되는데, 이 각술의 산꼭대기에 올라서면 고대사의 새로운 지평선이 열리게 된다.
뿔은 첫째 삼각형이다. 실제로 삼각형을 우리말로 바꾸면 바로 [세뿔]이 된다. 이 세뿔의 음이 바뀌어 [서울]이 된다. 서울의 옛말이 [셔 ]인 것과 지금의 서울에 삼각산이 있는 것은 그 훌륭한 증거이다.
이 세뿔은 쇠뿔과 소리가 비슷하고, 삼각형이 소머리의 모양을 이루기 때문에 흔히 소(牛)로 상징된다. 소는 복희 시대부터 희생에 바쳐진 동물이다. 소를 숭배하는 풍습은 전 세계의 고대신화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데, 그러면서도 소의 상징에 대한 제대로 된 학설은 거의 없었다가 박용숙 선생에 의해 제대로 규명되었다.


선생은 종교에서의 도상(圖象)의 기능을 규명하여 고대종교에서 두 축을 이루는 동물상징인 [소와 뱀]을 찾아내고, 이 두 동물의 형상을 <천부경>과 관련시키므로써 인류역사상 최고의 수수께끼를 밝혀내었다. 즉 소의 모습은 두 뿔과 턱을 잇는 윗변삼각형으로, 뱀의 모습은 혀와 턱이 이루는 밑변삼각형의 모습으로 푼 것이다.
고대로부터 소는 삼각형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한다. 수메르 문자는 소를 역삼각형(▽) 의 모습으로 나타내었고, 힌두교의 만다라에서도 삼각형과 숫소와 신(神)이 같은 의미로 쓰인다고 한다. 또 동이들은 소머리를 [소시머리]라고 했는데 그 뜻이 [삼각형으로 솟은 모습]이라는 것이다.


암포라 벽화에서 소 등에 탄 사람이 소의 뿔과 꼬리를 함께 붙잡고 있는 그림이 있는데, 이 그림이 바로 <천부경>의 핵심사상인 삼위일체 사상, 즉 삼각형 머리의 [삼(三)]이 꼬리의 [일(一)]로 되돌아감으로써 무한의 상징인 원으로 회귀함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뱀과 삼각형의 관계는, 고대의 여러 그림에서 발견되는 [우루보로스(Urobors)]에서 찾아지는데, 뱀이 자기 꼬리를 물고 있는 그림은 소의 경우와 같은 상징적 의미를 나타낸다는 것이다. 이 뱀은 한편으로는 화살의 상징이 되는 것이니, 머리(△)는 화살촉이 되고 몸은 화살대(↑)에 해당한다. 뱀이 지혜의 상징으로 신성시 되어온 이유는 뱀이 <천부경>의 진리인 삼위일체를 상징하는 동물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뱀과 소는 활을 통해서 하나가 된다. 활을 만드는 재료가 소뿔이요, 화살은 뱀의 형상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윗변삼각형과 밑변삼각형을 겹치면 육각형 별이 되는데, 이 별이 이스라엘의 국기에 그려진 소위 [다윗의 별]과 같은 형태이다. 이 다윗의 별의 형상에 플라톤의 기하학까지 흡수되어 들어오는 것이니, 정20면체의 정면도가 육각형이 되기 때문이다.
이 기하학을 응용한 고대의 도술이 바로 각술(角術)이며, 그 도술이란 바로 <천부경>의 진리에서 유래한 기하학을 응용한 천문역술(天文曆術)이다. 다음 인용문은 각술로서의 동이의 뜻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자전>이 <설문>을 인용하여 [弓]을 "가까운 것을 궁구하여 먼 형상을 헤아리는 것"이라 하여, 활에 기하학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은 당연하다. 또 <사기 . 역서(曆書)>에는 역(曆)을 담당한 사람을 주인(疇人)이라 썼고, 이 주인을 이적(夷狄)으로, 주(疇)를 풀이하여 "역법에 밝은 사람" 또는 "옛날의 천문을 아는 사람"이라고 쓰고 있다. 궁시(弓矢)의 참뜻이 무엇인지를 암시해 주는 예이다 ...... 결국 동이는 천문, 풍수지리, 풍각(風角)쟁이, 노래하는 활량들이다.

 

이 인용문만 보더라도 우리가 알고있는 [동이(東夷)]의 뜻이 얼마나 부분적인 것인지를 알수 있다. 우리는 [화랑]이 [동이]의 다른 이름이라는 사실도 알지 못하고 있으며, 그 화랑이 [풍각쟁이]라는 사실은 더더욱 알지 못하고 있다.


이 풍각쟁이(風角匠夷)가 바로 [각설이]이 조상이다. 풍각장이를 한문으로 이렇게 나타낸 것은 지금까지 설명된 내용을 이해하면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각설이는 각설이 타령을 부르고 돌아다니며 걸식하던 사람들이다. 이를 한자로 나타내면 [角術夷]가 된다.
각설이타령을 보면 "일자나 한자나 들고나 보니 ......"로 시작하여, 숫자를 소재로 한 비유와 풍자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각술이 고대의 수학이요 기하학이었던 사정과, 이신(異神)들이 노래와 춤으로 사람들에게 앞일을 예고했던 사정을 모두 반영한다.
원효대사가 파계한 후, 박을 두드리고 춤추며 불렀다는 노래는 분명히 이 각설이 타령이었을 것이다. 이 사실을 여기서 소개하는 이유는 우리 문화의 가장 비천한 부분까지도 동이의 위대한 흔적이 배어있음을 알리기 위한 것이다. 우리가 밝혀야할 역사의 진실은 무궁무진한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東]과 [夷]의 뜻을 합치면, 태양신의 신전인 [천국]에 거주하면서 고대의 정치와 종교는 물론이요,학문(지식)과 산업(농경), 군사에까지 이르는 전권을 장악했던 초인집단으로서의 [천민(天民)]인 [동이]의 실상이 드러나는 것이다. 이 동이들이 역사기록에 등장할 때에는 이신(異神)이 된다.

 

2) 기이(紀異)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환인(桓因)으로부터 시작되는 우리민족의 역사기록, 특히 역대 왕(王)들의 사적을 <기이(紀異)>라고 표제(標題)하여, <흥법(興法)>이란 표제를 붙인 불교사적과 구별하고 있다. 그렇다면 기이(紀異)란 과연 무슨 뜻일까?
우선 글자뜻을 보면, [기(紀)]는 [뒤얽힌 실을 풀어서 정리하다]는 본래뜻과 [계통을 세워 적은 기록]이라는 뜻 및 [법도 . 도덕 . 규율]의 뜻이 있다. [이(異)]는 [귀신의 탈을 쓴 사람의 모습], 또는 [바구니를 머리에 인 사람]의 뜻이 본래 뜻이고, 이 뜻에서 유래한 뜻으로 [다르다 . 괴이하다 . 이상히 여기다 . 재앙] 등이 있다.


[이(異)]의 뜻 중에서 풍류와 연결되는 부분은 고대의 신상으로 이해될 수 있는 [귀신의 탈을 쓴 사람의 모습]이다. 이 뜻을 앞의 [기(紀)]와 결합시키면, [신들의 역사기록]이 바로 [기이(紀異)]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일연은 왜 [왕(王)들의 역사기록]을 [신(神)들의 역사기록]이라고 표현하였을까?


이점에 대해 그는 <삼국유사>의 서문에서, 중국의 고사에 나오는 성왕들이 모두 기이한 일로 태어났음을 열거한 후에 "그러므로 우리나라 삼국(三國)의 시조들이 모두 신기한 일로 태어났음이 어찌 이상하겠는가! 이 신이(神異)를 다른 편보다 먼저 세우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라고 하여, 삼국의 시조들이 신기한 일로 태어났음이 당연한 일임을 밝히기 위해 [기이편]을 편찬하였음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지금까지 이책에서 살펴본 많은 내용들은 <삼국유사> 기이편에 기록된 여러 일들이 실제로 일어났던 역사적 사실임을 여러 각도에서 증명해주는 내용들이다. 즉 삼국의 시조들은 하늘에서 내려왔거나 그 혈통을 이었다는 말이다.


또한 서문에 나오는 여러 인물들이 모두 중국인들의 조상이 아니라 우리 한겨레의 조상들이며, 하도와 낙서 등의 부명과 도록들이 우리 조상들의 유물임을 강조하기 위해, 그들을 민족사의 서두에 소개한 것으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아무튼 기이가 왕들의 사적(事績)을 나타내는 말로 쓰인데에는 [이(異)]에 왕들과 관련된 특별한 뜻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먼저 [이(異)]에 대한 박용숙 선생의 주장을 들어보자.

 

일연의 <유사>에서 이들을 紀異라는 말로 표현하여 불교적인 것과 구별하는 것도 그런 이유이다. [異]는 갑골문자에 머리에다 물병이나 술 항아리를 이고있는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 있다. 그런데 이 [異]는 금문(金文)으로 옮겨지면서 점차 두팔을 치켜든 모습으로 바뀌어 마치 새가 날개를 쳐든 것처럼 보이게 된다. 금문에서 [異]를 [翼(익)]으로 해석함도 그런 까닭이다.
또 <설문>을 참고하여 [異]를 [鬼(귀)]로 해석하면서, 은대(殷代)의 신화적인 인물들이 모두 가면을 쓰고 나타나는 조령(祖靈)들이었다는 주장도 유의하게 된다. [異]가 머리 위에 물병과 항아리를 인 것은 이집트의 벽화나 그리이스의 도자기 그림에서처럼 그들이 연금술사라는 뜻이고, 또 날개를 가진 것은 그들이 신이거나 천사였음을 암시해 준다.


중국의 문일다(聞一多)도 그의 <爾雅新義(이아신의)>에서 [翼(익)]을 [敬(경)]의 뜻으로 해석하고 있다. 결국 [異]가 [鬼]이고 그 [鬼]가 가면이었다면, 귀신을 섬긴다는 말은 곧 가면을 쓴 사람을 섬긴다는 뜻이 된다. 그리이스의 올림포스 신들도 인간세계에 나타날 때에는 가면을 썼으며, 기원 1세기 전후의 가다꼼바에는 오르페우스가 가면을 착용하고 있다. (중략)
<유사>의 [처용가와 망해사]에 관한 부분만을 보더라도 동이들이 인간계에 나타날 때에는 반드시 탈을 썼음을 알 수 있으며, 이때 바쳐진 신녀(神女)들과 태교적인 교접이 행해졌음을 알수 있다 ...... 이런 풍속은 탈을 쓴다거나, 동물의 머리가죽을 뒤집어쓰고 특별한 희생제(犧牲祭)에 군림하는 고대 지중해의 종교나 이집트의 신속(神俗)과도 닮은 데가 있다. 아무튼 이들 산신들은 사람의 신분이 아니므로 거기서 태어난 아이는 사람의 성씨를 가질 수 없다.


탄생설화가 신비롭게 수식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들은 모두 하늘에서 내린 아이로 기록되거나 전해진다. ...... 중국이 왕을 천자(天子)라고 한것도 바로 그 아이가 [하늘의 아이], 이른바 성혼(聖婚)에 의해 태어난 아이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 일연이 <유사>의 [기이]에서 "제왕이 일어날 때에는 부명과 도록을 받고 필히 다름이 있음으로 해서 인자(人者)가 된다"고 쓴것도 이런 분위기에서 실감된다. 왜냐하면 동이에게 있어서 인간이란 말은 특별한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인용문이 길어진 것은 인용된 내용이 모두 연관되어 하나의 논리를 구성하고 있고, 하나하나가 중요한 사실들이기 때문이다. 인용문을 이렇게 길게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소개된 것들 못지않게 중요한 여러 내용을 소개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정도의 내용만 가지고도 이신(異神)의 정체와 역할은 거의 밝혀진 것이다.


요약해서 말하면, <삼국유사 . 기이편>에 등장하는 무지개 . 용 . 신동 . 알 . 거인등이 모두 천신(天神)이었던 동이들의 화신(化身)이며, 이 동이들은 고대신화의 중요한 주제인 성스러운 결혼을 통해 세상을 다스리는 왕을 낳는데, 제사와 가면은 그 혼례의식과 관련된다는 것이다.
중국의 여러 제왕, 그리이스 신화와 바빌론 신화에서 나타나는 가면 쓴 신들과 신녀들의 동침 등이 모두 동이족 천신들이 세상을 다스리던 특이(特異)한 풍속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특이(特異)]란 글자에도 동이의 흔적이 남아있으니, [特]은 [소(牛) 절(寺)]로서 바로 솟터(牛土)신전이요, [異]는 동이들이다. 따라서 동이들이 다른 종족들과 확연히 구별되는 생활방식과 통치제도를 지니고 있었음을 알 수 있기도 하다.


아무튼 <삼국유사 . 기이편>은 우리 한겨레가 환국에서부터 시작되는 천신들인 동이(東夷), 다른말로는 신이(神異)들의 혈통을 이어온 겨레라는 사실을 강조한 기록이다. 그 증거들이 지금도 우리들이 일상생활에서 자주 접하고 있는 말들과 풍습에서 발견되고 있다. 이 사실들은 이어지는 설명에서 하나씩 밝혀지게 된다.

 

3) 동이의 성격
동이의 실상을 제대로 밝히려면 끝이 없다. 서력기원 전의 세계사는 신화와 전설까지도 모두 동이의 역사이다. 따라서 이책이 다루는 '한'풀이 전체가 동이들의 문화유산을 장님 코끼리 더듬듯 훑어보는 것에 불과하기도 하다. 그러나 동이의 성격에 초점을 맞춘다면, 동이의 몇가지 특징을 추려낼 수는 있다.


그 특징들은 천상천(天上天) . 선민(選民) . 초인집단 . 고급군사조직 . 예술가 및 기술자 집단이라는 것이며, 이 특징들을 총칭한다면 전인(全人)집단이라고 부를 수 있다.
아무리 <노자>가 "상사(上士)는 도를 들으면 실천하기에 바쁘고, 중사는 의심하고, 하사는 크게 웃는 법이니, 하사가 듣고도 웃지 않으면 어찌 도(道)라고 할 수 있으랴!" 라고 했다지만, 이런 말을 듣고서 웃거나 의심하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한 사람일 것이다. 그러니 간단하게라도 그 근거를 제시하고 넘어가기로 하자.

 

① 천상천(天上天)
동이들은 하늘 위의 하늘에 사는 천신들이었다. 동이의 이신(異神)들이 가면을 쓰고 나타나면, 하늘의 아들임을 자처하는 천자는 천주(天主)를 대하는 극진한 예로 이들을 맞이한다. 좌우의 사람을 물리치고, 병풍을 둘러친 장막안에서 천자가 옛날 동이신전에서 배운 동이족의 언어로 대화를 나눈다.
주위 사람들은 동이들이 나타나는 것만 볼 뿐, 그들이 황궁에 들어가고 난 후의 행적은 모른다. 그들이 떠날 때는 가면과 옷을 벗고 떠나기 때문에 일반인과 다를바가 없어지므로, 그들이 떠나는 모습은 아무도 보지 못한다. 그래서 이인(異人)들이 흔적없이 사라진다는 전설이 생기게 된 것이다.


후대에 천자(황제)는 스스로를 하늘이라 자처하였으니, 동이들은 그 하늘을 만들어 주고 사람들의 눈길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하늘을 다스리는 [하늘 위의 하늘]이 된다. 동시에 이 천상천이라는 말은 천자를 포함한 신들의 계급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하다.
앞에서 환인이 바로 제석천왕(帝釋天王)이라는 사실을 밝힌바 있고, 제석천왕이 여러 계층의 하위신을 거느린 최고신이었던 사실을 생각해보자. 환인(桓因)은 동이의 주신(主神)이고, 동이의 후예임을 자타가 공인하는 우리 한겨레의 첫 조상임을 생각한다면 천상천이 동이임은 자명해진다. 그렇다면 하늘의 여러 층은 무엇인가?


우리는 신정(神政)이 최근까지 남아있었던 인도의 카스트 제도를 생각해 보므로써 이에대한 해답을 얻을 수 있다. 카스트 제도에서는 왕족인 크샤트리아가 승려인 브라만의 아랫계급으로 되어 있다. 즉 황제라도 브라만의 일개 승려보다 지위가 낮은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동이의 제도에서 유래했다는 것, 여기서 동이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그 위에 동이의 신전인 [솟터], <동이전>에 [소도(蘇塗)]로 기록된 것을 단재가 [수두]로 해석하였고, 그 수두가 지방의 수두와 중앙의 신수두(臣蘇塗)로 계층화 되어 있었다고 밝힌 사실도 생각하면 [하늘 위의 하늘]은 확실히 드러난다.
고대사의 황제라는 사람들도 모두 동이의 지방신전의 지배하에 있었고, 그 지방신전들은 하늘 위의 하늘인 중앙신전(신수두)의 지배를 받은 것이다. 그 중앙신전이 중앙아시아로 추정되는 환국(桓國)임은 말할것도 없다.
동이가 천상천임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이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역사이해에 많은 오해가 생겼기 때문이다. 즉 동이의 치세(治世)에서 하나의 왕조가 생길 때에는, 반드시 그 왕조의 상부구조인 신전이 함께 생겨나므로 왕조와 신전의 위치가 중복되게 된다.
그런데 이 사실을 모르면, 동이의 영역에 중국의 왕조가 있거나 중국의 영역에 동이의 신전이 있었다는 기록을 의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정을 알면 동이족의 역사가 세계 어떤 왕조와 함께 나타나도 문제가 되지 않음을 알수 있게된다.

 

② 선민(選民)
동이들은 모두가 선택된 사람들이다. 단군신화에서 곰과 범이 통과의례로 마늘과 쑥을 먹으며 수행케 하는 장면이 나오며, 시험에 통과한 곰만이 [사람]이 된다.


그런데 범이 백수(百獸)의 왕이요, 또 곰도 군(君)과 뜻이 통하는 동물이름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범과 곰으로 상징된 인물들도 귀족계급이었음이 틀림없다. 그런데도 수행에 통과하지 못하면 그들을 [사람]축에 끼워주지 않았던 자부심 강한 집단이 동이였던 것이다.
귀족계급 중에서도 고르고 골라서 충원되는 초상류사회가 동이였고, 그렇기 때문에 동이의 비전을 전수받은 사람들이 속세로 내려가면 어떤 대접을 받았을지는 충분히 짐작이 가는 일이다.
공자와 같은 시대에 활약하였던 추연이 동이의 무사(巫士)였다는 설도 있는데, 그가 육국을 돌아다니면서 육국의 왕들로부터 천자에 준하는 예우를 받은 일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 동이들에게 베풀어지는 당연한 예우였던 것이다. 선민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뒤의 [조선]을 참고하기로 하고, 다음 해설로 넘어가자.

 

③ 초인집단
동이들은 또한 초인집단이었다. 그들의 다른 칭호가 성현(聖賢)이었으니, 그들은 하느님인 환웅의 말을 정확하게 듣고 세상에 전하는 임무를 주로 맡았다. 그래서 동이들이 최초의 글자를 창제하였던 것이고, 고대 신전에 남아있는 고기(古記)들이 대부분 우리말로 바로 옮겨도 뜻이 통하게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聖]은 [귀(耳)를 기울여 말(口)을 잘 듣고 아랫( ) 선비(士)들에게 전한다(口)]는 뜻을 담고 있다. 여기에 나오는 선비(士)의 뜻도 또한 위에서 설명된 천상천의 의미를 그대로 담고 있다. [士]는 [도끼(斧)]를 머리가 땅으로 가게하여 세운 모습을 본떳다고 한다. 그리고 이 글자는 대대로 중국 황실의 제권(帝權)을 상징하는 글자였다고 한다.


따라서 [聖]은 황제보다 존귀한 신분이었다. 실제로 중국의 역사를 살펴보면 황제들이 공자의 사당에 정기적으로 제사를 지내고 있는데, 공자가 [하늘(天)]과 황제를 연결시키는 [聖]이라는 생각이 반영된 것이다.
[賢]은 [많은 재화(조개貝)를 가지고 여러 사람을 구휼하다]는 뜻이다. 조개는 뒤에 설명되지만 풍류의 중요한 도구 중의 하나이고, 또 동이의 우수한 문물을 상징하기도 한다. 결국 [성현]은 하느님의 심부름꾼인 [풍신(風神)]이 된다.


도덕적으로 완성된 사람을 성현이라 하고, 그들은 일반인이 상상도 못하는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고 믿어진다. 이런 믿음들은 동이들의 행적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실제로 동이들은 일반인의 능력을 아득히 초월한 사람들이었다. 이런 사실들은 그들이 남긴 거석건조물들이 아직도 세계의 불가사의로 일컬어지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진인들이요, 초인들인 것이다.

 

④ 고급 군사조직
동이는 오늘의 유엔군과 같이 세계평화를 담당한 군사조직이었다. 동이와 유엔군의 차이점이 있다면, 유엔군은 다른 나라의 군대에 대해 절대적 우위를 확보하지 못하지만 동이의 군대는 맞설 상대가 없는 절대적 우위를 점유하고 있었고, 자체의 내분이 아니고서는 동이의 신전이 침범당하는 일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김용옥 선생은 <동이전>의 다음 구절에서 동이의 군사적 성격을 찾아내고 있다.

' ...... 이들은 따님과 하느님에 대한 매우 깊은 신앙심이 있어서, 나라의 읍(邑; 도시, 모종의 행정구역센타)마다 제각기 하느님(天神)을 예배드리는 것을 주관하는 사제 한사람을 뽑게 되는데 이 사람을 이름지어 天君(당굴, 무당, 단군 : 六堂님 說)이라고 부른다. 또한 뭇나라들이 제각기 특수한 특별시(別邑)를 가지고 있는데, 이 특별시를 이름지어 蘇塗(소도, 솟터 : 斗溪님 說)라고 한다. 그 특별시에는 큰 작대기(大木, 솟대)를 세워놓고 그 위에 방울과 북을 걸어 놓았는데, 이로써 따님(鬼)과 하느님(神)을 예배한다. 뭇 피해 망명해온 사람들이 그 특별시에 들어오게 되면 그 망명해온 사람들을 돌려 보내지 않는다. 그 특별시의 사람들은 특수한 단체의식을 가지고 살면서 매우 호전적이다. 그 특별시 솟터를 이러한 형태로 만들어 놓는 사회적 의미는 불교의 단체와 매우 유사한 점이 있다. 그러나 이 두 단체가 좋고 나쁜 것(善惡)을 행하는 바의 가치관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동이전>을 번역한 것이다 - 글쓴이 주)


사실 이 전체의 설명은 매우 자세하며 정확하다 ...... 상기의 나의 번역에 있어서 국사학자들이 거의 정확하게 지적하지 않은 부분은 아마도 "諸亡逃(제망도)"로부터 "善惡有異(선악유이)"에 이르는 문맥일 것이다. 이 부분이 매우 애매하지만 우리는 맥락적 분석(contextual analysis)에 의존하여 그 뜻을 재구해야 할 것이다. 우선 "好作賊(호작적)"이라는 구문인데, 이 "好作賊"은 문자 그대로 풀면 "賊을 作하기를 好한다"이며 ...... "好作賊"의 주어는 "솟터에 사는 사람들"이 될 수밖에 없다 ...... 많은 학자들이 이 부분을 "죄수들이 이 솟터로 도망들어 오면 그들을 내주지 않는다. 그래서 나라에는 도적이 많이 들끓었다" 라는 식으로 해석을 하는데, 나는 이러한 해석에 반대다 ...... 여기서 "賊"이라는 것이 반드시 "도적질"로서 해석될 필요는 없다. "해친다"라는 일반동사의 용례가 선진 중국고전에 더 두드러진 것이다. 그래서 나는 "好作賊"을 "그 특별시의 사람들은 특수한 단체의식을 가지고 살면서 매우 호전적이다"라고 번역하였다. 망명객들을 보호해 주면서 그들을 한 단체의 구성원으로 만들고 또 대외적으로 군사행동도 하는 어떠한 신성한 결사조직의 속성을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 즉 조선사람들이 솟터라는 특별시 구역을 설정하여 그 속에서 배타적인 단체생활을 영위했는데 이 호전적인 종교집단이 당시의 중국사람들의 인상으로는 "요새 중국에서 설치기 시작하고 있는 불교라는 운동"집단의 행위와 그 행태가 비슷하다는 뜻이다. 이것은 매우 정확한 기술이다. 즉 솟터의 성격이 자기들의 유교적 관념이나 재래적 전통으로 파악되기 힘든 매우 새로운 종교양태를 띠고 있고, 어떠한 신과의 교섭생활을 하는 특수집단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而) 양자는 선악의 가치관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浮屠之徒(부도지도)는 "선을 닦고 마음을 자비롭게 하는 것을 주로하고, 살생하지 않고 청정한 것을 오로지 힘쓰는"데 반하여, 이 蘇塗之徒(소도지도)는 살생을 하여 天神에게 희생을 바치고 음주 . 가무를 심하게 하며, 그리고 망명인들을 보호해 주고, 또 군사행위까지도 하는 배타적인 결사단체라는 것이다.(한문에 붙인 한글독음은 글쓴이가 붙인 것임)

 

이어서 박용숙 선생의 견해를 살펴보자.

샤아머니즘 전성시대에 있어서 샤아먼승(僧)들이 전쟁에 참가했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샤아먼은 곧 과학자였기 때문이다. 앞에서 이미 보아온 바와같이 샤아먼은 본질적으로 만능이었다 ...... 三品彰英씨에 의하면 일반적으로 무속집단이었던 花郞徒는 가무로써 전쟁에 참가했다고 말하며, 또 이능화에 의하면 고려나 근조(近朝)에 모두 무병(巫兵)이 있었다고 한다.


花郞徒가 별님들의 모임, 이른바 종교적 결사라는 것은 일반적인 견해이다. 그러나 화랑도가 구체적으로 어디서 무엇을 하는 結社인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그럴듯한 언급이 없다. 기록상으로는 화랑들이 왕가나 귀족들의 자제들로서 풍류를 즐겼으며 국가의 비상시에 괄목할만한 활동을 벌였던 것으로 되어있다. 실제로 통일신라시대의 화랑들은 전사(戰士)로서도 명성을 떨쳤지만 행정관으로서도 비상한 수완을 발휘하였다. 이러한 사실들을 토대로 보면 화랑들이란 하나의 선택받은 사람들임에 틀림없다. 즉 한울님으로부터 선택받은 신(神)들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이러한 신들을 별님들이라고 부르고 싶다 ...... 화랑을 선랑(仙郞)이라고도 하고, 삼랑(三郞) 또는 풍류랑이라고도 한다 ...... 결론부터 말하자면 화랑은 햇님의 아들이라고 하겠으며 선랑(仙郞)은 달님의 아들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때의 아들이란 말은 별님이란 뜻으로서 종교적인 혈통을 나타내는 것이다. 즉 태양계를 상징하는 화랑은 문신(文神)들이며, 월계(月界)를 상징하는 선랑들은 무신(武神)들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 삼랑(三郞)이라는 말이 처음으로 쓰여진 기록은 <단기고사>의 강화도에 삼랑성을 쌓으매 전등산(傳燈山)에 제천단(祭天壇)을 모시고 제사했다는 기록에서 보인다.


이 기록을 토대로 해서 말하면 삼랑성이란 곧 천단에 관계된다는 것을 알수 있다 ...... 천단이란 곧 신단수로서 한울의 중심봉이며 알맹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신정시대에 있어서는 이 천단을 지키는 일이야말로 최대의 과업이라 할 수 있다. 천단이 무너지면 곧 한울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삼랑의 지위는 신성하다. 그들은 곧 천단과 함께 운명을 같이해야 한다 ...... 여기서 분명히 지적될 것은 삼랑이 곧 천단과 그 천단을 주관하는 제관을 지키는 무사들이라는 사실이다.

 

이 인용문은 화랑에 대한 해설이지만, 화랑이 삼랑이며 동이의 핵심세력이라는 사실은 삼랑이 천단의 수호신들이라는 설명에서 밝혀진다. 그리고 <삼국사기>의 화랑에 대한 기사에서 최치원의 풍류에 대한 기록을 인용한 것이 정당한 것임도 알수 있다.
아무튼 이 동이군사의 무력이 어느 정도였으며, 그 성격이 어떤 것인지는 임승국 선생의 주장을 들어보자.

탕왕벌걸(湯王伐桀)이라는 말은 <설원(說苑)>의 기록과 흡사하다. <설원>의 기사를 옮긴다. (원문생략)


"은나라 탕왕이 하나라 걸왕을치고자 하니 이윤이 가로대 '치지 마십시오. 조공의 양을 줄여 그의 거동을 보고 치십시오' 하였다. 걸왕이 노하여 구이(九夷)의 군사를 일으키니 이윤이 가로대 '정벌할 때가 아닙니다. 저쪽이 아직도 구이의 군사를 움직일 수 있으니, 이는 잘못이 우리에게 있음이로소이다.' 하매 탕임금이 마침내 걸임금께 사죄하고 다시 조공을 바치니라. 이듬해에 다시 조공을 바치지 않으니 걸왕이 구이의 군사를 동원하려 했으나, 구이의 군사가 움직이지 않으므로 이윤은 '됐습니다. 치십시오' 하매 탕왕은 걸왕을 쳐 남쪽으로 도망가게 하다."
이 <설원>의 기사에서 알 수 있는 것은 고대에 있어서의 동이무력의 막강함을 입증하는 것이다. 구이의 군사가 움직이는 것이 곧 죄가 있고 없음의 기준이 되고, 잘잘못의 기준이 되었다 함은 당시 동이무력의 성격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였다. 무단 일변도가 아니라 의(義)에 입각한 움직임이 곧 동이무력의 정수였다는 사실이다.

 

결론적으로 동이는 보통의 군사조직이 아니라, 화랑과 같이 귀족자제로 이루어졌고, 하늘을 수호하는 중책을 맡았으며, 전능의 능력자인 샤만들로 구성된 고급 군사조직이었다. 뿐만아니라 그들은 자질구레한 영토분쟁 같은 곳에는 개입하지 않고, 천하에 대의가 실행되는지 아닌지만을 감시하는 고결한 전사들이었다. 동이에 대한 온갖 찬사의 근거가 여기서도 발견되는 것이다.

 

⑤ 예술가 및 기술자 집단
동이가 예술가인 동시에 기술자라는 사실은 박용숙 선생의 샤만에 대한 방대한 연구에서 지나칠 정도로 상세히 밝혀져 있다. 그러나 이 내용은 여기서 다루지 않는다. 샤만의 별칭인 무당과 백정에 대한 해설을 따로 두고있으므로 해당부분을 참고하도록 하자.

 

2. 천국과 신시

1). 환국과 천국
<환단고기; 삼성기 상편>은 "우리 환(桓)의 건국은 가장 오랜 옛날이었다(吾桓建國 最古)"라는 구절로 시작한다.
지금까지 발굴된 고대유적 중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이라고 말해지는 수메르 문명을 <한단고기>가 환국의 제후국 중의 하나인 [수밀이국(須密爾國)]으로 기록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 이 기록은 신빙성이 아주 높다.
어떤 사람들은 수밀이국과 수메르를 연관시키는 것이 아전인수격인 해석이라고 반박하는데, 이 문제는 중요한 문제이니 본론을 잠시 미루고라도 확정을 짓고 넘어가도록 하자.

 

<삼성밀기(三聖密記)>에서 말한다. [파나류산(波奈留山)밑에 환인씨의 나라가 있나니 천해(天海) 동쪽의 땅을 역시 파나류국이라 한다. 그 땅의 넓이는 남북 5만리, 동서 2만리이다. 통털어 말하면 환국이요, 갈라서 말하면 곧 비리국 . 양운국 . 구막한국 . 구다천국 . 일군국 . 우루국(또는 필나국) . 객현환국 . 구모액국 . 매구여국(또는 직구다국) . 사납아국 . 선비이국(또는 시위국 . 통고사국이라 함) . 수밀이국이니 합쳐서 12국이라. 천해는 지금은 북해라 한다.


三聖密記云 波奈留山之下 有桓因氏之國 天海印之地 亦稱波奈留國也. 其地廣南北五萬里 東西二萬餘里 總言桓國 分言則 卑離國 養雲國 寇莫汗國 勾茶川國 一群國 虞婁國(一云 畢那國) 客賢汗國 勾牟額國 賣勾餘國(一云 稷臼多國). 斯納阿國. 鮮卑爾國(一云 豕韋國. 一云 通古斯國). 須密爾國 合十二國是也 天海今曰北海 .

박용숙 선생은 <태백일사 . 환국본기 제2>에 나오는 열두 나라(다른 이름이거나 다른 나라로 대치된 이름으로 보이는 나라이름까지 합하면 열여섯나라) 중에서 여섯 나라를 밝혀내고 있다. [비리국]은 오늘의 터어키의 중서부에 있는 프리기아(Phrygia)로서 피리(笛)의 본고장이라고 한다.


[우루국]은 수메르 유적지 중의 하나인 우르(Ur)이고, [선비국]은 우리쪽 역사책에 자주 등장하는 선비족의 나라이다. [통고사국]은 퉁구스족으로 그 종족이 아직도 카스피해 연안에 살고 있으며, [필나국]은 오늘날 그리스의 동쪽에 있는 고대도시 펠라(Pella)라고 한다.
이 나라들의 분포된 지역이 바로 천해(天海) 또는 북해(北海)의 동쪽인데, 북해는 흑수(黑水), 북명(北冥), 곤지(坤池)등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는 흑해(黑海)라고 하며, 흑해 주변에서 위 유적들이 포함되는 지역의 크기가 동서 2만리 . 남북 5만리 정도가 된다는 것이다.
김상일 선생도 수메르와 우리겨레의 관련성을 여러 가지 근거를 제시하며 역설하고 있다. 그 중요한 것만 소개해 보자.

 

① 수메르인의 언어가 교착어이고, 고산족이다. 그들이 고산족인 증거는 수메르의 신들이 항상 높은 산위에 내리고, 평야에 내려와서는 지구랏이라는 인조산을 쌓아 신들을 예배하면서 [하느님의 산] 또는 [하늘의 언덕]이라고 불렀다.
② 최남선 선생은 세계의 지붕인 파미르 고원에서 몽고계 인종이 퍼져나갔다고 하는데, 이정기씨는 그 중에서 한갈래가 수메르 인종이라고 주장한다.
③ 몽고계 안에 있는 산악들의 이름에는 [박(白)]이 들어가는 것이 많다. 최남선 선생은 이를 [불함문화]라고 불렀는데, 이 불함문화와 수메르 문화가 유사점이 많다.
④ 수메르인이 B. C. 3500년경에 티그리스 . 유프라테스강 유역에 내려왔을 때, 이미 그들의 고유한 문자인 설형문자를 가지고 왔다. 이 설형문자가 복희가 창제했다는 설형문자와 너무나 유사하다. 그런데 복희는 물론, 중국 한자의 기원이 된 은대의 갑골문자를 만든 은나라 종족이 동이족임은 임혜상 같은 중국학자들이 고고학적으로 입증하고 있는 사실이다.
⑤ 중국 한자음보다 우리 한글음이 더 오래되고 고유한 것임은 수메르어와 중국어, 수메르어와 한국어를 비교해보면 쉽게 밝혀진다. 수메르어는 기원 전후하여 사라져 버렸지만, 셈어 .아랍어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아직까지 우리 한국어에서 그 흔적이 생생하게 남아 보호되고 있다.
⑥ 그 실례로는 구지(仇知; Gush, Cush; 구리, 금), 숨(Sum; 수메르, 속말리; 聖水), 우르(아루, 아리; 신, 어른, 알), 안(An; '한', 天神), 딩그르(dingir; 신, 단군), 키(ki; 地神, 氣, 여기. 저기. 거기) 등이다.
⑦ 문정창(文定昌)은 소호금천씨(小昊金天氏)가 동방계열의 이족(夷族)의 최초 군장(君長)이었고, 혈연적 . 문화적으로 우리 한겨레의 직계라고 한다(가락국왕 김수로가 소호의 후예라고 한다. 소호씨의 본고장은 남만주의 봉천. 요동반도 지방이었는데 일찍이 산동반도 회대(淮代)지방에 진출하여 중국사의 발전에 기여했다. 산동성 곡부에 도읍하고 있던 이 문명의 유적으로 보이는 대문구문명(大汶口文明)이 산동반도에서 발견되었다. 그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5,785년 전으로 보이는데, 태음력 . 농업 . 수산 . 목축 . 음악 등의 찬란한 문명을 이루고 있었다. 수메르 문명은 이 문명권이 서쪽으로 이동해 간 것이라고 한다.

 

이제 여기에 아래의 몇가지 내용을 보충해 보면, 수메르와 환국의 관련성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① 수메르인들이 메소포타미아에 문자체계와 집대성된 법률과 함께 이주해 왔다는 사실.
② 그들 자체의 문헌 속에서 자신들을 [검은머리 사람들]이라고 부르고 있고, 구환(九桓)의 종족들이 스스로를 구이(九夷) 또는 구려(九黎)로 불렀는데, 여기서의 [黎]가 바로 [검은머리]라는 사실.
③ <산해경>의 [과보추일( 父追日)]이라는 전설에, 북해를 다스리는 신인 후토(后土)의 자손 과보가 해를 쫓아 서쪽으로 갔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 [과보( 父)]의 글자가 둘다 동이족과 관련된다. 과보( 父)의 부(父)는 도끼를 나타내는 글자로서, 염제신농씨 족의 종족문양이었고, 소호금천씨가 염제신농의 근거지였던 산동지방에 도읍한 사실은 둘의 밀접한 관계를 암시한다. <산해경 . 대황북경>에는 "과보와 치우는 함께 염제의 후예가 된다( 父與蚩尤同爲炎帝之裔)"라는 기록도 있다 . [과( )]는 이(夷)의 다른 글자형인 대궁(大弓)을 세로로 붙여쓴 모습과 흡사할 뿐만 아니라, 그 뜻에서도 [크다]는 뜻으로 같다.


특기할 사실은 한복바지를 [과(袴)]라 하는데, 이 옷이 클라인 원통을 재단하여 만든 옷으로서, 옛부터 천황과 지황의 혼인예물로 쓰였던 옷이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과보족은 분명히 동이족의 한 갈래요, 해를 따라 서쪽으로 갔으니 민족이동을 상징한다.
④ 수메르어와 우리말 중에서 유사한 말이 길-기르(GIR; 道路), 밭-바드(BAD; 田), 님-니므(NIM; 윗사람), 아빠-압바(AB-BA; 아버지), 엄마-움마(UM-MA; 엄마), 아비-아비(ABI; 나의 아버지), 나-나(NA; 我), 너-네(NE; 汝), 그-게(GE; 그사람)등으로 거의 같다는 사실.

본론으로 돌아가서, 이 수메르 문명의 모체인 환국이 모든 고대신화와 전설에 등장하는 천국이다. [환(桓)]은 분명히 [하늘]의 뜻이며, 이 환국에서 모든 나라와 종교가 퍼져나갔으니 환국이 천국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문제는 이 환국이 오늘날의 우리들과 어떻게 연결되는가 하는 점이지, 환국이 천국이라는 사실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 환국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생각해 보면 [파미르 고원]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 [파미르]는 [해마리]와 고대음이 쉽게 통할수 있는 말이기도 하거니와, 지구상에서 전세계의 산맥들이 모여드는 한 지점을 지도에서 찾아보면 파미르 고원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산맥을 따라 동쪽에 황하문명, 남쪽에 인더스문명, 서쪽에 메소포타미아문명이 자라났으니 세계문명의 발상지로서의 조건이 충분할 뿐 아니라, 피라밋의 원형이라고 볼 수 있는 네줄기 산맥이 동서남북의 네 방향으로 뻗어 나가고 있다. 동쪽으로 텐산(天山)산맥, 서쪽으로 힌두쿠시산맥, 남쪽으로 히말라야산맥이 있고, 북쪽으로는 우랄산맥이 있다.
이곳을 환국의 자리로 볼 경우에는 또 하나의 가능성을 고려해야 한다. 그것은 오늘날의 과학으로 간신히 항공촬영을 해서 만든 지도에서나 나타나는 지형을 고대에 이미 알았을 뿐 아니라, 그곳을 나타내는 삼위태백(세(三)곳이 가파른(危) 해마리(太白) 산)을 내려다 보았다는 말의 의미이다.


즉 삼위태백이 삼신산이요, 삼신산이 파미르고원이라면 그곳을 내려다 보기 위해서는 공중에 떠있어야 한다는 뜻이 되므로, 지구문명의 외계유입설이나 고대에 지금보다 더 고도로 발전한 문명이 있었다는 주장들이 옳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 부분은 외계문명과의 교류가 실제로 일어날 경우에 진위여부를 가려야 할 사항으로서, 여기서 논의할 대상은 아닌 것 같다. 여기서 밝힐 사실은 고대에 환국이 분명히 있었으며, 그곳이 인류문명의 뿌리인 풍류의 발원지라는 사실이다.
그러면 지금부터는 이 환국에서 갈라져 나온 나라로 기록되고 있는 환웅의 배달국을 살펴보자.

 

2) 신시와 삼계

① 환국과 신시
<삼국유사>에 "환인의 아들 환웅이 태백산에 신시(神市)를 열어 인사(人事)를 주관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삼성기>에서는 "환웅이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배달(倍達)]이라 했다고 하였다. 두 기록을 합치면, 환웅이 열었다는 신시가 배달국이라는 뜻이된다.
여러 기록은 환인과 환웅이 시대적으로는 선후관계에 있고, 지리적으로는 서로 다른 곳에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삼국유사>도 환웅이 환인의 아들이라하여 선후관계를 밝히고 있고, 무리 삼천을 거느리고 (환국을) 떠났다고 하여 두 나라가 서로 다른 곳에 있음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 먼저 환국과 배달국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 고대의 문명형성과정을 반영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즉 환국이 가장 먼저 형성되었는데, 이는 정치적 국가조직이 아니라 태양신을 모시던 종교조직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때에는 이유가 무엇이었던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정치조직이 성립될만한 여건이 되지 않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 이유는 환국인들이 미개수준에서 벗어난 최초의 종족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고, 그 이전에 번성하던 문명이 멸망했기 때문일 수도 있으며, 환국인이 지구밖의 외계에서 이주한 최초의 지적생물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런 문제는 시간이나 전문가가 해결하기를 기다리기로 하자.
아무튼 다스릴 대상이 없고 싸울 상대도 없었으므로, 인구가 늘어나면 이웃의 좋은 땅을 골라잡아 집단이주를 하면 되었을 것이다. <삼성기>의 한국에 대한 기록은 그때 이주하여 퍼져나간 사람들의 분포를 후대에 찾아보니 동서 2만리, 남북 5만리의 영역에 걸쳐 나라를 이루고 살고 있었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그때 퍼져나간 사람들의 분포지가 주로 서남아시아에서 나타나는 것은 환국의 자리로 여겨지는 파미르 고원에서 동쪽은 험준한 산맥과 사막으로 막혀 있지만, 서쪽은 비교적 트여있기 때문으로 이해된다.
이런 종교조직으로서의 환국은 처음에는 속세의 일에 간섭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간섭할 대상도 없었거니와, 간섭할 이유도 없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환국의 말기에 이르러 환국에서 퍼져나간 백성들이 온 땅을 뒤덮은 뒤에도, 환국의 중심세력은 세속과 단절된 곳에 성역을 만들어 폐쇄적으로 생활하면서, 비밀신전에서 수도생활과 연금술(기술개발)에 전념했을 것이다.
환웅에 이르러 환국의 기술수준이 도깨비[서자(庶子) . 지귀(地鬼); 기술자] 삼천명을 파견할 수 있을 정도로 발달하자 동쪽과 서쪽의 백성들을 통합할 능력이 된데다가, 기상이변 등의 이유로 조공을 받아야 할 필요성도 생겨 삼경(三京)을 두게 되었고, 이것이 삼한의 시초가 되었을 것으로 보여진다.
이렇게 보는 이유는 환웅과 같은 시기에 "반고가 십간 . 십이지 신장을 이끌고 공공(共工), 유소(有巢), 유묘(有苗), 유수(有燧)와 함께 삼위산(三危山)의 라림동굴(拉林洞窟)에 이르러 군주가 되니 이를 제견(諸 )이라 하고 그를 반고가한(盤固可汗)이라 했다" 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반고]는 이미 밝힌대로 피라밋의 다른 이름이다. [제견]은 [제융(帝戎)]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제융(帝戎)은 서방 융족(戎族)의 신이다. 중국 고대지도에 견융( 戎)으로 표현된 이들은 견이( 夷)라는 이름이 보여주듯이 동이족의 한 갈래이다.
이 제융이 내려간 곳이 라림(拉林)동굴인데, [拉林]을 우리 발음으로 읽으면 [납림]이 되고, 이는 <성서>에 나오는 [네피림]을 연상시킨다. 또 견( )은 피라밋의 모양(田)과 개(犬)를 합한 모습인데, 신기하게도 영어의 신(GOD)은 개(DOG)를 뒤집어 놓은 단어이다.
이런 추리가 말이 된다면, 환웅은 동방 몽고족의 시조가 되고 반고는 서방 황인종의 시조가 되는 셈이다. 이렇게 볼 때 단군신화에서 단군의 출생과정에 대한 기록은, 배달국의 말기에 있었던 동방과 서방의 동이족들 끼리의 세력다툼에서 동방족이 승리하여 환국의 정통맥을 계승한 조선국을 세웠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이렇게 보는 근거는 곰족(동방족)과 범족(서방족) 중에서 곰족이 정통을 계승한 것으로 되어있기 때문이다. 결국 최초의 정치조직은 환웅과 반고의 두 집단으로 나타나며, 그 중에서 동이족의 정통으로 기록된 것은 환웅의 신시인 것이다.
이 두 집단의 충돌을 이해하려면 서방으로 진출한 동이족들이, 서방역사에서 어떤 신들에 해당하는지를 먼저 밝혀야 할 것이다. 그리고 지금 세상에서는 이 반고의 정체를 밝히는 것이 세계사의 핵심을 꿰뚫을 수 있는 지름길이라고 하겠다. 왜냐하면 반고가 바로 <성경 . 창세기>에 등장하는 [하느님]이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잠시 후에 살펴보고, 먼저 환웅의 신시부터 간단히 살펴보자.

 

② 환웅의 신시
환국이 정치의 필요성이 없었기 때문에 종교만으로 세상을 다스리던 신전국가(神殿國家)였다면, 신시는 환국에서 창안된 지식과 기술을 이용하여 세상을 지배한 최초의 정치조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삼국유사>는 환웅이 환국을 떠나 속세에 내려온 사실을 [신시(神市)]라고 말한다. [신시]는 [태백산 꼭대기의 신단수 아래(太白山頂 神檀樹下)]인 동시에, [환웅이 강세한 역사적 사실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市]는 지금은 사람이 많이 모인 곳을 나타내는 말이지만, 그 본래뜻은 [경계 있는 곳으로 나아가다]라는 뜻이다. 이 경계란 바로 환웅이 강세하던 시기에 환국의 백성들이 거주하던 씨족 부락들인 것이다.


아무튼 환웅이 세운 배달국의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는데, 크게 나누면 백두산설과 서남아시아설이다. 백두산설은 많은 학자들이 주장하고 있는데 안창범 선생의 경우, 신선도(풍류도)의 발생유래를 백두산 산삼에서 찾고 있다. 서남아시아설은 박용숙 선생이 대표적인 학자로서, 여러 가지 역사문헌과 지명(地名)을 토대로 한국의 고대사와 소아시아와의 관계를 밝히고 있다.
그러면 우리는 이 둘 중에서 하나만을 선택해야 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두 곳 모두가 우리 역사의 발원지가 되지 못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이 두가지 학설들이 모두 간과하고 있는 내용이 있기 때문이며, 그것은 바로 신시개천의 연대이다.
백두산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대문구문명을 비롯한 발해만 유역의 문화를 환국이나 신시로 보고, 서남아시아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수메르문명의 뒤를 잇는 지중해 연안지역의 유적이 우리 고대사의 흔적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 두 입장은 모두환웅의 신시개천 연대가 두가지로 나뉘어 있다는 사실을 밝히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안창범 선생의 지적대로 삼성기와 단군세기의 기록을 따르면, 초대 환웅과 단군왕검 사이에는 역년 1,565년의 차이가 있다. 그런데 박용숙 선생은 이 차이를 고려하지 않고 환웅의 신시개천과 단군의 조선건국을 같은 시기의 일로 보고 있다. 여기에서 고대사의 연결고리 하나가 끊어져 나간 것이다.


문정창 선생은 앞에 소개한 것과 같이, 동이족이 세운 소호금천씨의 후예가 서쪽으로 이동해 가서 수메르 문명을 세웠다고 주장했는데, 여기서도 이 두 문명과 환웅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이제 글쓴이가 생각하는 두 문명의 관계를 제시해 본다면, 신시개천의 자리는 발해만 연안이요, 반고개천의 장소는 서남아시아라는 것이다.
신시개천의 연대는 B.C. 3,898(2,333+1,565)년으로 대문구문명의 B.C. 3,800년경과 맞아떨어지고, 이 시기는 B.C. 3,000년 이전의 수메르문명의 개창시기와 맞물린다. 수메르 문명의 가장 오래된 도시 [에리두]는 기원전 3,000년에서 5,000년에 이르는 유적이라고 한다. 그 중에서 [기슈]에서 발견된 점토판은 기원전 3,500년의 것이라고 하는데, 글자의 형태는 갑골문자와 같은 종류의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참고할 사실은 환인이 다스리던 환국의 영토가 서남아시아에도 여럿 있었다는 사실이다. 즉 에리두의 유적은 환국의 것으로, 기슈의 유적은 반고의 것으로 볼수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수메르 문명은 소호금천씨의 후예들의 것일 수도 있지만, 반고의 후예들이 세웠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생각된다. 여기서 반고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③ 반고와 여호와
앞에서 반고가 <성경>의 하느님이라고 말한 것은 하느님의 천지창조 과정을 근거로 말하는 것이다. <성경>의 천지창조 과정은 박용숙 선생이 밝힌 동이족의 천지창조 과정과 꼭 같을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천지창조에 뒤이어 여호와의 인간창조가 나오는 사실만 보더라도 <성경>의 하느님은 틀림없이 반고이다.


여기서는 <창세기>의 천지창조 과정에 나타나는 동이족의 천지창조 원리를 대입하는 방법으로, 두 천지창조 과정이 같은 것임을 밝히기로 하겠다. 이 둘이 같은 역사적 사실을 가리키는 비유와 상징임이 밝혀진다면, 반고가 하느님이라는 사실은 저절로 밝혀지는 셈이다.
<성경>의 하느님은 먼저 천지를 창조한다. 그런데 이 "하느님이 창조한 천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논의가 되어있지 않다. 옛날부터 이 [천지]가 [우주]와 동일시되고 있을 뿐이고, 그것이 특별한 역사적 . 종교적 실체일 것이라는 가능성은 거의 고려된 적이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천지는 동이족에게서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즉 동이족에게서 하늘은 신들이 사는 성스러운 공간인 신전이고, 땅은 일반인이 사는 세속적인 공간이기 때문이다. 동이족은 이 하늘과 땅을 인체(人體)를 닮도록 구조화 하였다고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하느님의 천지창조 행위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의미가 부여될 수도 있다. 그리고 <창세기>의 이어지는 부분은 그 사실을 확인해 준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黑暗)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神)은 수면위를 운행하시니라.

여기서 유의할 사실은 천지가 창조되기 전에 이미 땅이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느님이 창조한 천지는 시간과 공간도 아니고, 지구와 대기권도 아닌 것이 분명하다. 그런 것을 제외하고 천지라고 불리웠던 것은 동이족이 세운 나라밖에 없다. 그리고 그 사실을 증명해주는 말이 [수면(水面)]이다. 왜냐하면 이 수면이 바로 하도(河圖)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샤아머니즘 정치란 인간사회를 우주적 질서와 동일하게 만들려는 실천행위라고 할 수 있으며, 이때의 실천적 원리가 하도와 낙서이다. 따라서 정치의 시작은 먼저 우주의 뿌리(頭)에 해당하는 가람(伽藍)을 창설하는 일이다. 물론 이때의 가람은 하도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하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모든 창세신화나 건국의 전설은 대체로 하도와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하도는 그 이름 자체가 [물그림]이다. 이 하도는 우주의 운행법도가 담겨있다. 이것을 "하느님의 신이 수면을 운행했다"고 표현한 것이다. 여기서 이어지는 내용과 <창세기>의 내용은 놀랍도록 일치한다. 여기에 반고의 이름이 하도를 상징한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창세기의 출발점이 어디인지는 자명해지는 것이다.

 

하도의 출발은 삼극의 원리, 즉 변증법적 인식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먼저 뜻을 지닌 자(者), 즉 창조자가 나타난다. 이때의 창조자는 대체로 신화적인 왕손으로서, 그는 변증법적 원리를 터득한 자다. 그러므로 하도에는 맨 먼저 백지(白紙) 위에 단 한 점인 건(乾)이 생겨난다. 그러나 이때의 乾은 <일석삼극>의 원리에 따라 내용적으로는 삼극을 이루고 있다. 즉 창조자는 즉자(卽自) . 대자(對自) . 즉대자(卽對自)의 존재론적 구조를 요해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창세기>의 빛은 곧 [乾(건)]이다. 乾은 괘상이 하늘인 동시에 빛이다. 그리고 괘의 형상이 세 개의 효(爻)로 되어 있어서 삼극합일의 모습을 갖추고 있으며, 이는 가운데를 중심으로 양쪽으로 나눌수 있다는 뜻이 된다. 실제로 <창세기>에서는 빛과 어둠을 나누고 있다.
그리고 이 乾이 바로 피라밋이다. 반고가 내려갔다는 삼위산이 아사달의 다른 이름이며, 그것이 태양신의 신전인 피라밋인 것이다. 이 피라밋은 삼층으로 되어있고, 윗층은 빛의 신인 햇님을 모시고, 아래층은 어둠의 신인 달님(땅님)을 모신다. 이제 천지창조는 두 번째 단계로 들어간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가운데 궁창(穹蒼)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게 하리라 하시고,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칭하시니라.

이 부분은 신학자들과 과학자들을 무척 애먹이는 구절이다. 물을 쪼개어 그 사이에 하늘을 두었다는 뜻이니, 신학적으로도 과학적으로도 그 의미가 확실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구절은 동이족의 입장에서는 아주 당연한 일을 말한 것이다.
여기서의 물은 하도가 상징하는 땅을 말한 것이다. 즉 여기에 등장하는 [물]은 [Water]가 아니라, 동이족들이 사해(四海)로 표현했던 [사람들이 사는 세상]인 것이다. 그리고 이때의 [사람]도 창조과정의 이 단계까지는 동이족을 가리킨다. 그 당시에는 오직 동이족만이 사람이라고 불리웠기 때문이다.


즉 하늘과 땅의 경계를 처음으로 정한 것이니, 신성한 곳을 골라 속세와 경계를 짓고 경계의 윗쪽을 하늘이라고 부르게 한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동이족 [사람]들에게 하늘과 땅을 다스릴 직책을 부여한 것이 된다. 이런 풍습은 다음의 인용문에서 그 의미가 확정되는 셈이다.

우리는 이미 인체(人體)가 삼분화 됨을 말한바 있다. 즉 머리(頭) . 몸(體) . 팔다리(四肢)가 그것인데, 이때의 머리가 天(양성) . 몸이 地(음성) . 팔다리가 人(중성)이 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원칙을 적용하자면 공간도 결국 천 . 지 . 인으로 삼분화 될 수밖에 없다. 세계의 모든 신화는 공통적으로, 산은 성스러운 곳으로서 신계(神界)이며, 넓은 평야는 사람이 사는 곳으로서 속계(俗界)가 되고, 바다나 강물은 신계와 속계를 갈라놓는 경계가 되는 것이다.

 

여기에 궁창으로 둔 것은 두가지로 해석되고, 둘 다 뜻이 통한다. 그 하나는 신전과 속세의 경계가 되는 곳에 활모양의 물길, 즉 해자(垓字)를 팠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피라밋의 내부에 커다란 방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 방은 신들과 사람들이 만날 공간으로 예비된 것이다. 그리고 창조는 계속된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천하의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칭하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칭하시니라.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과목을 내라 하시매 그대로 되어 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의 보기에 좋았더라.

이 부분 또한 신학자들을 곤혹스럽게 하는 구절이다. 아무리 과학지식에 대항하여 창조론을 내세우려 하여도, 태양빛이 없는 땅에서 식물이 자라고 꽃피고 열매까지 맺는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이족의 천지창조는 이 부분이 반드시 들어가게 된다. 동이족은 최초로 농경을 실시하고, 그 농경을 정치에 적용한 국가제도를 만들었으니, 그것이 바로 풍류의 씨뿌리기인 봉건제도이다.

 

그러므로 고기(古記)에는 항상 나라를 건설하는 일을 밭을 갈고 우물을 판다고 하였다. 밭은 곧 윷놀이 판이며, 우물은 중심이다. 이를테면 밭은 사악(四嶽)이며 우물은 주산(主山) 즉,  뫼를 말한다. 따라서 밭갈고 우물을 판다 함은 곧 샤아먼가람(天界)을 일으킨다는 뜻이다.
예를 들자면 <삼국유사 . 가락국기>에 처음 나라가 일어나는 풍경을 "우물을 파서 마시고, 밭을 갈아 먹었다"라고 쓰고 있다. 물론 이런 기록은 자주 보인다. 그러나 이 말이 하나의 비유라는 사실로 가령 <제왕운기>에 조선에 대해서 "耕田鑿井禮義家(경전착정예의가)"라고 쓴 문장이 나온다. 즉 밭갈고 우물파는 예의의 나라라는 뜻인데, 이때의 밭갈고 우물판다가 비유로 해석되지 않고서는 그 문장의 진정한 의미는 결코 알수 없게된다. 즉 예의의 나라라는 것은 곧 가람(伽藍)의 나라라는 뜻이되는 것이다.

 

따라서 새로운 신전을 건설하게 되면, 그 신전에 복역할 사람들이 한 곳에 모여 거주할 수 있도록 농경지를 확보하게 된다. 따라서 물 중에서 뭍이 드러나게 한 것은, 농경지를 확보하기 위해 주변의 주민들을 강제이주 시킨 것을 말한다.
그리고 그 땅에 밭을 만들고, 그 밭을 경작할 종족들을 지정해 주고 그 종족들에게 농작물로 이름을 지어준다. 이것이 <창세기>의 풀과 나무이다. 그리고 그 풀과 나무가 나라와 종족을 나타냄은 다음 인용문을 통해 알수 있다.

우주목은 천계(天界)의 중심봉(中心棒)이다. 그 중심봉이 있으므로 해서 천계는 회전운동을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때의 회전운동은 물론 인재(龍)를 간지법(干支法)에 따라 지상에 파견 내지는 이동시키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천계의 중심봉은 샤아먼신(三皇)의 지팡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창세신화에 창조주가 지팡이로 바다를 휘젓는다는 것도 그런 뜻으로 쓰이는 비유이다. ...... 그런데 이때의 중심봉이 한그루의 나무로 비유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것은 곧 나무가 삼극(三極)의 원리, 이른바 삼분법으로 비유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즉, 뿌리가 天, 줄기가 人(중성), 가지 . 잎사귀가 地로 비유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그루의 나무가 천계의 중심에서 자라나서 온 대지(大地)를 뒤덮는다는 것은, 곧 샤아머니즘의 신정(神政) 정치가 천체(天體)의 법칙대로 인간사회에 적용되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창조의 그 다음날은 다시 하늘로 되돌아와서 해와 달과 별들을 짓는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이 있어 주야를 나뉘게 하라. 또 그 광명으로하여 징조와 사시(四時)와 일자와 연한(年限)이 이루라. 또 그 광명이 하늘의 창궁에 있어 땅에 비취라 하시고(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두 큰 광명을 만드사 큰 광명으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으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창궁에 두어 땅에 비취게 하시며 주야를 주관하게 하시며 빛과 어두움을 나뉘게 하시니라.

 

여기에 등장하는 해와 달과 별이 지구의 밖에 있는 태양(sun)과 달(moon)과 별(star)이 아님은 이 구절 자체가 증명한다. 즉 궁창에 있는 광명(光明)이 주야와 일자와 사시와 연한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두 큰 광명을 만들어 밤과 낮을 주관하게 한다. 따라서 이 두 광명도 천체(天體)는 아니다.


이 광명의 정체는 신관(神官)들이다. 즉 역법(曆法)을 관장하는 신들인 것이다. 그리고 이때의 역법은 단순한 천체의 운행법칙이 아니라, 신전(하늘)에 속한 모든 신들의 출입진퇴 까지도 규율하는 간지법인 것이다. 따라서 이 구절이 <창세기>가 신전의 창설을 기록한 것이라는 직접적인 증거가 된다.


<창세기>가 신전의 창설에 대한 기록이라는 사실은 이어지는 천지창조의 기록이 계속하여 보여주고 있다. 다섯째 날에는 물고기와 새와 짐승을 만들었는데, 이날 창조된 피조물들은 동물이 아니라 백성들이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들은 생물로 번성케 하라. 땅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하나님이 큰 물고기와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어 가라사대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다 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니라.

 

그렇다면 (성년식을 치르는) 당(堂)집의 기둥은 곧 대지가 되고, 당집의 지붕이 하늘을 뜻하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 깃들게 되는 신(神)이 곧 중성이 될 것이다. 이와같은 풍경을 좀더 구체적으로 기술하자면, 우리는 필연코 동물도상에 대해서 말하지 않으면 안된다.
즉 동물도상(動物圖象)에 있어서 네 발로 땅바닥을 기어 다니는 동물은 원칙적으로 대지를, 그리고 날개를 가지고 날아 다니는 조류(鳥類)를 하늘로, 그리고 두가지 기능을 다 갖춘 어류(魚類)를 중성으로 추정한다. 즉 조류가 원(圓)을, 獸(수)가 방(方)을, 어류가 각(角)을 각각 표상한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와같은 법칙은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러한 구분을 다시 세분화 시킴으로써 매우 복잡미묘한 도상(圖象)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산해경> 삽도(揷圖)는 모두 144종의 동물도상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이 곧 샤아머니즘의 도상언어(圖象言語)가 된다는 것은 물론이다.

이제 여기서 창조된 것이 나라와 백성들이란 말의 의미를 알수 있을 것이다. 즉 하느님은 모든 정복된 지역의 주민들에게 짐승의 이름을 딴 종족의 표지를 부여한 것이다. 그들에게 직접 이름을 지어준 것은 뒤에 등장하는 사람이다. 아무튼 이렇게하여 반고는 파미르 고원 서쪽의 지배권을 완벽하게 행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작업이 끝나고 난 다음에 여호와 하느님의 일이 시작된다. 여호와 하느님은 바로 태호복희의 아내인 여와이다. 그러면 반고는 태호복희인가? 그렇다. 고대에는 신통을 이어 독립하면 그 아버지나 어머니의 칭호를 그대로 쓰는 풍속이 있었다.
이런 현상은 신의 칭호가 고유명사가 아니라 일반명사라는 사실을 알면 쉽게 이해된다. 아버지의 아들이 자라서 아들을 낳으면 아버지로 불리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따라서 반고와 여호와는 그 부모의 칭호를 그대로 물려받아 복희(하느님)와 여와(땅님)가 된 것이다.
아무튼 반고의 작업이 끝나고 여호와의 작업이 시작되는 이유는, 하늘의 지배권은 반고에게 있었지만 땅의 지배권은 그 아내인 여호와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지배권은 풍류의 다른 이름인 [태교(胎敎)]를 통해 행사된다. 그래서 여호와 하느님의 첫 번째 작업이 [아이낳기]로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때에 천지의 창조된 대략이 이러하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경작할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生氣)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生靈)이 된지라.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도 있더라. ......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의 각종 나무의 실과(實果)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논의가 길어졌으니 이 부분은 단도직입적으로 풀이하자. 우선 여기서 비를 내리지 않았다는 것은 하느님의 씨를 뿌리지 않았다는 뜻이다. 따라서 직계혈손이 없었다는 뜻이다. 그 다음에 흙으로 사람을 빚었다는 것은 지계에서 사람을 선발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에게 신전의 예절을 가르친 것이 사람의 모양을 빚은 것이다. 그러나 아직 그에게는 하느님의 영혼에 해당하는 초월적 정신이 없다. 여호와 하느님은 그에게 호흡법을 가르쳐 영생의 뜻을 알게 한다. 이것이 코를 통해 숨을 불어넣었다는 말의 본뜻이다.
그런 다음 태자궁(太子宮)인 동궁(東宮)을 건설하여 그곳에서 공부하게 한다. 이것이 에덴동산의 정체이다. 생명나무와 선악(지혜)나무는 그를 가르치기 위한 두곳의 부속신전이다. 아담은 그곳에서 영생의 능력을 얻은 다음에 지혜를 배우기로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선악과를 먹으면 죽는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동이의 지식을 배워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동이의 지식이란 바로 [각술(角術)]이다. 이는 음양비례인 황금률을 뜻하므로 성(性)도 여기에 포함된다. 통일교에서 성(性)이 인간타락의 원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확실히 근거가 있는 말인 것이다.


그러나 선악과는 씹의 뜻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더 근원적이고 궁극적인 의미는 그 앞 부분에 여러번 반복된 말 속에서 찾아진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 지으신 것들을 보시니 모두가 보기에 좋았더라"라는 말이다.
이 말은 오직 초월의 상태, 불교식으로 말하면 견성(見性)의 상태에서 자연을 볼 때 나오는 말이다. 여기에는 시비선악의 분별이 생기지 않기 때문에, 천지창조 과정에 반영된 황금율의 비례가 왜곡되지 않고 그대로 느껴진다. 그러니 존재하는 모든 것이 존재 그 자체로 아름다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 상태는 지식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그 즉시 깨어진다. 기억이라는 것이 생성되는 순간, 영생은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생을 얻은 신들은 시비선악을 가리는 존재가 아니라 끝없는 사랑의 화신으로 묘사된다. 기독교에서 그 대표적인 예를 찾으라면 예수 그리스도가 된다.


이것 말고도 이 인용문에는 한가지 비밀이 더 있으니, 그것은 태자와 관련된다.
남자를 선발한 다음에는 여자를 선발한다. 아담의 태자궁이 다스리기로 되어있는 나라에서 여자를 선발한 것을 "아담의 갈빗대로 여자를 만들었다"고 표현한 것이다. 이 말이 믿기지 않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와 꼭같은 표현이 삼국유사에도 나온다. 박혁거세의 아내인 [알영(閼英)부인]이 계룡의 왼쪽 겨드랑이 밑에서 나온 것이 그것이다.
아무튼 이 여자, 이브(Eve)는 히브리 민족을 통해 서양의 여자들에게 엄청난 시련을 안겨주는 사건을 저지른다. 그것이 바로 선악과를 따먹은 사건인 것이다.

 

여호와 하느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대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맑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 지라.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 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아담의 나라에도 여러 토템종족이 있었고, 그들은 반고의 위세에 굴복하여 천국의 백성으로 복종하고 있었다. 그들 중에 뱀을 토템으로 삼은 종족의 추장이 이브를 유혹하여, 호흡공부 보다는 지식공부가 더 실속이 있다고 꼬드긴다.
그 지식이 동이인에게만 허용된 [인도(人道)]이다. 즉 음양묘합의 진리인 것이다. 그것이 음양묘합의 진리였기 때문에, 거기에는 통일교의 해석처럼 씹이 포함된다. 그러나 하느님이 사람들이 씹하는 것까지 시시콜콜하게 따질 리가 없으며, 씹 좀 한다고 해서 세상이 뒤집어질 리도 없을 것이다.


따라서 하느님이 금지한 것은 앞에서 말한바와 같은 지식의 습득임이 확실하다. 그러나 여기에 씹이 개입되지 않은 것도 아니다. 즉 통일교의 해석은 그 절반이었던 것이다. 그 나머지 절반은 동이의 씨뿌리기와 관계된다.
아담과 이브가 했던 씹은 한가지 절차를 생략한 씹이었던 것이다. 그 씹은 하느님과의 씹이다. 그 자세한 내용은 다음 장의 주제로서 상세히 다루어진다. 아무튼 동이족의 통치제도는 천자는 반드시 하느님의 아들이어야 한다는 제한이 있는데, 이브는 하느님과 씹하기 전에 뱀족의 추장과 씹하고, 다시 그 남편과 씹하므로써 하느님의 아들이 아닌 다른 씨를 받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 다음 아담과 이브가 맨 먼저 한 일은 치마를 만들어 입은 것이다. 바로 이 사실이 동이족의 씨뿌리기와 깊이 관련된다. 왜냐하면 동이족의 문화 중에서 가장 비중이 큰 것은 [옷]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자문화권에서는 [의(衣) . 식(食) . 주(住)]라고 하여, 먹는 것 보다 입는 것을 앞세우는 것이다. 그러면 옷이 왜 그렇게 중요한가?


그것은 이 옷이 보통 옷이 아니라 조복(朝服), 즉 조선옷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옷이 뭐 그리 중요한 옷이냐고 비웃을 독자도 있겠지만, 이 조선옷이야말로 고대에 천자만이 입을 수 있는 옷이었던 것이다.
<진서(晋書) . 사이전(四夷傳) . 동이숙신씨조(東夷肅愼氏條)>에 "그곳에 낙상이라는 나무가 있다. 중국에서 만일 성제(聖帝)가 서서 임금이 되는 일이 있으면 그 나무 껍질을 벗겨 옷을 해 입는다(有樹明 常 若中國有聖帝代位 則其木生皮可衣)"는 기록이 있는데, 여기서의 [숙신]이 바로 조선이요, [낙상( 常)]은 <한단고기>에 나오는 [웅상(雄常)]으로서 성황목이다.
즉 중국의 천자라야 성황목에 걸어놓은 천(베)을 걷어 만든 옷을 입을 수 있었다는 말이 된다. 우리네 마을 입구에 있는 성황목은 그렇게 위대한 나무인 것이니, 성황목에 걸어놓은 물색(베폭)을 걷어다가 한복바지를 지어 입으면 중국의 천자가 될 수 있었던 진짜 성황목(聖皇木)이었던 것이다.


이브는 여신전에 들어가 바로 이 옷을 만드는 법을 훔쳐배운 것이다. 이는 결국 몰래 나라를 세웠다는 말과 같다. 하느님의 지시에 따라 하느님의 나라를 세운 것이 아니라, 일개 추장의 말을 듣고, 하느님이 허락하지 않은 나라를 세운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한 이유는 하느님의 씨를 받지 못했기 때문임은 말할 것도 없다.


이는 동이족의 입장에서는 용서할 수 없는 반역이다. 그래서 하느님은 아담과 이브에게 하느님의 영토로부터 영구히 추방하는 징벌을 가한 것이다. 그래서 히브리 민족은 하느님 나라에 참여하지 못하고, 다음의 인용문에서 보는바와 같이 서남아시아의 변두리를 떠돌아 다녔던 것이다.

 

설형문자의 문서에 '히브리'(Hebrew)와 동일시 될 수 있는 '하비루'(Habiru)란 종족 이름이 B.C. 1,700 - B.C. 1,300년 사이에 끊임없이 나타난다. 이들 수메르 자료에 의하면, 히브리인들은 떠돌아 다니는 유목민이나 무법의 산적들로서 바빌론, 앗시리아, 힛티, 허리안 들에게 용병으로 팔려다니곤 했다.

 

한편 반고와 여호와가 건설한 하늘나라는 [바알]신앙으로 정착되게 된다. 이 [바알]은 말할 것도 없이 단군이다. 즉 하느님(日)과 땅님(月)을 합친 [ ]이 아담과 이브가 떠난 이후에 하느님의 씨를 받아 정식으로 나라를 세운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가 동쪽으로 길을 잡은 환웅의 아들과 마찬가지로 [ ]을 이름으로 삼은 것은, 고대에 동쪽과 서쪽의 하느님이 같은 분이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왕 말이 나온 김에 히브리 민족의 계보를 좀 더 더듬어 보자. [바알]의 왕국에 편입되지 못하고 변두리로 떠돌던 히브리 민족은 그 유명한 바빌론의 유수를 거치는 동안 수메르 문화의 영향을 받아 문자와 언어를 익혔다고 한다.


그 히브리인들 중에서 후에 걸출한 종교가인 모세가 나타나 여호와를 유일신으로 모시는 신앙을 확립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후예 중에서 처음으로 동이족의 신전에 들어가 정식으로 졸업장을 받고 천자가 되기 위해 환속한 사람이 바로 예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여호와만을 인정하는 동족들로부터 배척받아 나라를 세우지 못한 것이다. 그 사이의 사정은 뒤에 다른 부분과 관련되는 곳에서 살펴보기로 하자. <창세기>의 비중을 고려하여 자세히 설명하다보니 본래의 주제에서 너무 멀리까지 벗어났으니 말이다.

 

 

④ 탁록의 대전
지금까지 설명된 환국과 배달국 및 서방의 [바알국]의 후예들이 동양 상고사에 등장하는 치우(환국) . 염제(환웅) . 황제(반고)들이며, 그들은 환국의 주도권을 놓고 동이 역사의 한 분수령을 이루는 초유의 세계대전을 벌이게 된다.


상고사는 이 전쟁을 탁록대전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 싸움의 무대가 [탁록]이기 때문이다. 이 [탁록]에 대해 임승국 선생은 "하북성 탁록현에 있다"고 말하는데, 글쓴이의 생각에는 이 장소가 [타클라마칸(Takla Makan) 사막]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치우가 환국의 정통맥임은 <삼성기>에 "탁록( 鹿)의 북쪽에 대효가 있었고, 동쪽에 창힐이 있었으며, 서쪽에 황제헌원이 있었다 ...... 처음 황제헌원은 치우보다 일어남이 조금 늦더니, 싸움마다 이로움이 없자 대효에 의존코자 했으나 이룰수 없었고, 또 창힐에게 의존코자 했으나 그것도 뜻대로 안되었으니, 두 나라가 모두 치우의 무리였기 때문이다."라는 구절을 근거로 추정한 것이다. 이 구절을 그림으로 나타내어 보자.

 

이 그림은 피라밋의 사신도에다가 여기에 등장하는 네사람을 배치해 본 것이다. 치우가 환국의 정통맥임은, 치우가 있는 곳인 탁록을 중심으로 다른 세력들의 자리가 설명되고 있는 점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중앙은 본래 태양신의 자리이다. 남방이 비어 있는데, 이는 남방이 태양의 활동영역으로서, 태양신의 직할영지임을 의미한다. 결국 치우가 태양신 환인의 정통 후계자가 된다.


창힐은 문신(文臣), 헌원은 무신(武臣)이 된다. 이 전통은 동양의 조정에서 문관이 동쪽에, 무관이 서쪽에 서는 형식으로 불과 100년 전까지만 해도 남아 있었다. 결국 치우가 있던 탁록이 세계의 중심인 환국의 중심신전이 있었던 곳이 된다.


그렇다면 탁록의 주변에 동이족의 성지가 모여 있어야 한다. 실제로 타클라마칸 사막 부근의 지명은 동이족의 성지를 나타내는 이름으로 뒤덮여 있다. 다음 지도는 지금의 이름을 중심으로 그 부근의 지명을 살펴본 것이다.

 

탁록을 타클라마칸 사막으로 볼 경우, 북쪽은 트루판 분지요 동쪽은 돈황으로서, 모두 우리 고대사와 관계가 깊다. 이 주변은 트루판 분지 . 곤륜산맥 . 천산산맥 . 티벳고원 . 쿠차(구지) . 돈황 등 고대사에서 자주 등장하는 이름의 지명으로 둘러싸여 있다.
먼저 트루판 분지는 [트루]가 [셋]을 뜻하므로, 우리말로 바꾸면 지금도 쓰이는 [삼세판]이란 말과 연결된다. 이 삼세판은 [삼(sam)]이 아이낳는 우물(샘)이라는 사실을 이미 설명했고, [판]은 [한]으로 변하기 쉬우니 곧 [삼한]중에서도 [삼신할머니]란 말로 이해된다. 여기서는 대효가 북쪽에 있다고 했으니, 대효가 탁록의 북쪽 트루판에 있었던 곤(坤)의 자리인 우물신전 사람임을 알 수 있다.


동쪽에는 [돈황(敦煌)]이 있는데, 이는 [단황(旦皇 또는 檀皇)]과 쉽게 연결될 수 있는 말이다. 동쪽은 곧 동궁(東宮)의 자리로서 태자궁이니, 나라를 세우고자 하는 사람들이 천자가 되기위한 수업을 받는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으로 문자를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창힐이 관장하고 있었다고 한 것이다.


남쪽은 [티벳고원]이니, 이는 [태백산]과 너무나 쉽게 연결된다. 태백산은 환웅천왕이 처음 강세한 곳이며, 남쪽은 태양신의 직할지이니 태백산이 티벳고원일 가능성은 심각하게 연구해 보아야 할 것이다. 지금도 티벳고원은 라마교의 통치강역이다.
[라마]는 [라]가 고대에 태양신(하느님)을 지칭하던 순우리말이고 [마]는 [靈(영)]이니, 곧 태양신의 다른 이름이된다. 더구나 라마교는 제정일치사회를 아직도 유지하고 있고, 그 우두머리는[달라이 라마]라 부른다. 여기서 [달]이 [땅]과 [산]과 [들(野)] 모두의 고대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라마]가 바로 환웅이거나 단군일 가능성이 아주 높아진다.


쿠차는 여러 학자들이 가야국의 시조인 수로왕이 내려왔다는 구지봉(龜知峰)이라고 말하고 있다. 더욱이 중가리아 분지의 좌우로는 지도에 표시하지 못했지만, 알타이 산맥과 한가이 산맥이 뻗어내리고 있다.
그리고 또 타클라마칸 사막은 비단길의 최대 고비로서, 북쪽은 천산산맥, 남쪽은 곤륜산맥이 둘러싸고 있다. 여기서 서쪽으로 파미르 고원만 넘으면 바로 서남아시아로 넘어가서, [박달]로 옮겨도 문제삼을 수 없는 [바그다드]가 나온다. 이 바그다드 부근에서 수메르 문명의 유적지가 발견되었음은 위 지도에도 표시되어 있다.


결국 탁록의 대전은 환국(배달국)의 종주권을 두고, 동변한인 동아시아의 모든 종족과 서변한인 서아시아의 모든 종족들이 참가한 세계대전이었으며,지금도 아시아는 그때 부르던 [아사달]이라는 이름 그대로 [아사(Asia)의 땅]으로 불리고 있는 것이다.
이 탁록의 대전에 참여한 신농이 [과보추일( 父追日)]의 고사에 나오는 [과보]가 아닌가 한다. 과보는 서쪽으로 태양을 따라가서 태양을 잡기는 하였으나, 그 열기를 이기지 못하여 북쪽으로 옮겨가던 도중에 지쳐서 쓰러져 죽었다고 한다.
이는 염제를 자칭하던 과보가 태양신(환인)의 정통을 이었음을 자부하던 황제를 정벌하였으나 그 휘하세력을 모두 평정하지 못하고 죽었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과보가 죽은 자리에는 큰 산이 생겨났다고 하는데, 이는 그 후예들이 수메르 또는 바빌론이라는 나라를 건설했다는 뜻일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문제는 따로있다.


염제를 자처하던 과보는 왜 황제를 정벌하였을까? 역사는 이긴자를 정의로운 자로 기술하는 관례를 볼 때, 반고의 후예인 치우가 동두철액의 갑옷투구를 개발하여 환국의 중심신전을 무력으로 정복했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환국의 정통맥인 황제는 치우에게 죽임을 당하고, 치우가 결국 스스로 황제의 위를 찬탈한 것이다. 후대의 역사는 치우가 황제의 위에 올랐으므로, <환단고기>에서 보듯이 치우천황이란 이름을 썼고, 쫒겨난 황제의 후예가 신임 황제에게 저항한 사실을 치우의 반란으로 기술한 것이다.


이때 황제(환인의 정통맥)의 후예들로부터 지원요청을 받은 염제의 후예들이 반란을 진압하기 위하여 대대적으로 출정 하였다. 그러나 황제의 위를 찬탈한 치우의 대군을 감당하지 못하고 결국 두 세력이 연합하는 선에서 타협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때부터 동이역사의 주무대는 서남아시아로 옮겨간다.


이 시기에 대한 기록이 <태백일사>에는 [번한세가]에 기록되어 있다. <태백일사>의 마한과 진한에 대한 사적에는 전쟁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는데, 이는 고대 동아시아의 동이족 본고장은 평화로왔음을 반영한다. 즉 서남아시아로 이주하지 않고 남은 환웅의 후예들은 동아시아의 영토를 완전히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서남아시아로 이주한 환웅의 후예들(과보의 무리)은 반고의 후예(치우의 무리)들과 국경을 맞대고 싸움을 그치지 않았으니, 그 역사가 번한세가에 반영된 것이다. 치우천왕의 탁록대전, 요순의 전쟁과 구년홍수 및 우임금의 치수, 하와 은의 전쟁 등이 모두 번한세가에 나온다. 이 번한세가의 대권은 최종적으로 [해모수(解慕漱)]에게 넘어가고, 그때부터 지금 학계에서 우리 역사로 인정하는 부여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이다.


여기서 번한을 서남아시아라고 말했는데, 이 번한의 위치에 대해 참고할 사항이 진한의 위치이다. 여러 역사기록들이 진한의 서쪽에 번한(변한)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번한의 동쪽에 있었을 진한을 멸망시킨 사람이 진시황이었다는 기록이 또한 <태백일사 . 마한세가>에 간략하게 언급되어 있다.


이는 진(秦)의 수도가 함양(咸陽; 지금의 陝西省 西安부근)임을 생각할 때, 번한의 위치가 티벳고원보다 동쪽이 될 수 없음을 증명하는 것이다(위 지도의 서안 참조). 따라서 변한(번한)이 있었던 곳은 서남아시아, 즉 지금의 중동지역이 되는 것이다.
지금 우리 겨레의 고대사 중에서 다른 민족들과 관계되는 부분은, 대부분 번한세가의 기록들이다. 따라서 번한세가는 고대세계에서 한겨레의 위상을 연구할 때 가장 귀중한 자료가 된다. 특히 우리 역사기록이 많은 수난을 당했기 때문에 그 중요성은 더 커지는 것이다.
우리 겨레의 뿌리가 분명치 않은 이유도 이런 관점에서 설명될 수 있다. 환웅의 본고장인 진한과 마한의 사적은 대부분 진시황에 의해 소각되었고, 후대에 조선의 유민들이 편찬한 국사(國史)들(고구려의 국사 . 백제의 서기, 유집등)도 모두 실전되자, 일연이 참고할 수 있었던 자료는 선비(鮮卑)의 후예인 위(魏)의 역사에서 따오게 되었고, 그 역사가 바로 변한의 유민들이 가지고 온 변한의 역사였기 때문에 우리민족의 역사가 불분명해진 것이다.


이제 환웅이 개천한 신시의 위치는 발해만이라고 말할 수 있고, 환웅이 바로 염제신농이라는 연결도 가능해졌다. 그리고 그 중의 주도적 세력이 서남아시아로 건너가서 우리의 직계조상으로 알려진 단군조선을 건설한 사실도 밝혀진 셈이다.

 

⑤ 단군신화의 실상
탁록의 대전 후에 소아시아에 거주하고 있던 반고의 후예들은 과보족이 가져간 염제족(신시)의 발전한 문명에 자극받아, 그 제도를 배우려고 애썼던 것으로 보여진다. 이런 사정을 기록한 것이 단군의 탄생신화와 요순의 홍수설화일 것이다. 먼저 요순의 홍수설화부터 살펴보자.


요임금의 치세는 역사상 최고의 태평성대로 묘사되고 있다. 이는 과보족이 가져간 정치문화가 그만큼 뛰어났던 것을 상징한다. 요임금은 자신의 왕위를 아들에게 물려주지 않고 순임금에게 양위하였으며, 유교에서는 이것을 이상적인 정권계승으로 사모하고 있다.
그러나 <태백일사>는 "단군왕검은 제요도당과 나란히 군림했다. 요임금의 덕이 날로 쇠퇴하자 서로 땅을 다투는 일을 쉬지 않았다. 천왕은 마침내 우순에게 명하여 땅을 나누어 다스리도록 병력을 파견하여 주둔시키더니 함께 요임금의 당나라를 치도록 약속하니, 요임금이 마침내 힘이 딸려 순임금에게 의지하여 생명을 보전하고 나라를 양보하였다"라고 기록하여, 사정이 간단하지 않음을 암시하고 있다.


이 <태백일사>의 기록에 나오는 단군왕검의 계보는 상당히 복잡하다. 웅녀군의 후손으로서 단허에 책봉받아 왕검이 된 여(黎)라고 하는 사람의 나라에 비왕으로 책봉되었던 신인왕검이, 섭정한지 24년만에 웅씨왕이 전쟁중에 죽자 그 왕위를 대신하여, 구한을 통일하고 단군왕검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즉 [여(黎)왕검]의 비왕이 [신인왕검]이었고, 그가 [여(黎)왕검]의 왕위를 물려받아 단군왕검이 된 것이다. 이 과정은 순임금이 덕망으로 요임금의 섭정이 되었다가 30년만에 왕위를 물려받았다는 기록과 신기하도록 비슷하다. 따라서 이 단군왕검은 순임금일 가능성이 아주 큰 것이다.


순임금은 제위에 오른 후 구년홍수를 만났는데, 치수사업을 곤에게 맡겼으나 곤이 치수에 실패하자 곤을 죽이고, 그 아들 우에게 홍수를 다스리게하여 우가 성공하자 그에게 천하를 넘겨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순임금은 우임금의 부친인 곤을 목베인 일로하여 한족(韓族)의 미움을 사서, 창오의 들판에서 순시 도중 살해되고, 그의 두 아내는 소상강에 빠져 죽었다는 전설이 <단기고사>에 전한다. 결국 순임금이 우임금에게 왕위를 넘겨준 과정이 분명치 않은 것이다.
아무튼 우리는 순임금이 죽였다는 우임금의 부친 곤(鯤)이 북해의 물고기라는 김용옥 선생의 주장과, 그 곤을 곤모신이라고 해석했던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곤모신은 밤하늘을 지배하는 지황으로서 웅씨녀와 같은 의미가 된다.
즉 염제신농의 후예가 바로 곤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인정하고 싶지않은 역사의 진실을 만나게 된다. 요임금이 바로 곤이었고, 곤을 죽인 순임금은 요임금에게 양위를 받은 것이 아니라 요임금을 죽이거나 밀어내고 왕이 된 것이다. 그리고 순임금에게 왕위를 물려받았다는 우임금이 바로 요임금의 아들인 단주였고, 그 또한 순임금을 죽이고 왕이 된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요임금이 염제신농이요, 순임금이 황제헌원이라는 하신의 주장이 옳다는 결론이 된다. 이 경우 염제와 황제는 요임금과 순임금의 조상들이지만, 고대에는 조상의 이름을 세습하는 풍습이 있었다고 하니 이점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 비극적인 권력쟁탈 과정을 보다 상징적으로 묘사한 것이 단군신화이다. 단군신화의 웅녀는 요임금이요, 환웅은 황제이다. 여기서 태호복희의 호가 황웅씨 또는 유웅씨라고 말한 것이 바로 순임금을 가리킨다. 순임금이 태호복희의 혈통으로 이해되었다는 뜻이다. 순임금이 황웅씨라고도 불리웠다면 이는 단군신화의 환웅과 쉽게 결부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순임금의 두 황후가 실은 일웅일호(一熊一虎)임을 알 수 있고, 우임금인 단주가 황제족의 부족까지도 모두 복속시켜 조선을 세웠다는 사실도 알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은 단군이 순임금의 아들이라는 뜻이 아니다. 순임금에 의해 요임금의 영토가 정복당했던 사실을 "요임금의 두 딸을 순임금이 왕비로 삼았다"고 기록했다는 뜻을 말한 것이다.
요임금의 두 딸이란 동쪽과 서쪽의 두 우물을 동시에 가리킨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곰과 호랑이가 상징으로 등장한 것이다. 곰은 검은머리 검은 눈의 온순한 짐승이요, 호랑이는 노랑머리 파랑 눈의 거칠고 사나운 짐승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환웅이 몸을 바꾸어 웅녀와 동침했다는 것은, 순임금에게 요임금의 왕권이 일시 이양되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즉 반고족에 의해 한때 환웅족이 정복당했던 것이다. 동시에 단군은 이 두 세력이 연합한 시기에 신혼(神婚)에 의해 태어난 태자라고 할 것이다.
또 <태백일사>의 기록으로 미루어 볼 때, 이 과정에는 동이의 최고조직인 환국도 관여했다고 보여지며, 그 환국까지도 이때 우임금에 의해 정복되어 조선으로 개창되면서 삼한(三韓)이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유라시아 대륙 전체가 단군왕검인 우임금에 의해 완전히 통일되면서, 조선이라는 전무후무한 세계국가가 생겨난 것이다.


동이의 고대사는 여기서 보듯이, 유라시아 대륙 전체를 무대로 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무대를 발해만 부근의 좁은 땅에다 억지로 끼워맞추려 하다보니, 고대사의 실상이 왜곡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발해만 연안에 있었던 신농씨의 나라는 지배계급들이 모두 빠져나간 후에 급속히 쇠퇴하여, 오랫동안 침체상태를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고대의 동이문화는 비인부전의 원칙을 철저히 지켰고, 이인(異人)들은 엄격한 신분제도를 통해 혼혈을 방지하였으므로, 지배계급이 빠져나간 후에는 문화가 침체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다.
대문구문명보다 2,000년이나 뒤에 일어난 용산문화가 대문구문명보다 뒤떨어지고, 동이족이 철수한 이슬람 문화가 오랫동안 침체를 면치 못하는 이유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우임금(단군왕검)이 조선국을 개창한 이후의 역사는 주왕실이 멸망하는 춘추전국 시대까지가 동이족의 역사가 되고, 그 이후로는 동이의 정통이 부여를 거쳐 고구려로 넘어온 사실은 <환단고기>가 전하는 바와 같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고구려의 중심세력은 서남아시아의 천재지변을 피해 비단길을 따라 이주해온 변한인들과, 진시황에 의해 멸망한 후 돈황에 자리잡은 진한과 마한인들의 연합세력이다. 즉 규모가 축소되면서 종족통합을 이루어 생긴 나라가 고구려인 셈이다.
<산해경>에 수록된 이신(異神)들의 역사는 주로 이 시기의 동이들을 대상으로 하였기 때문에, 신들의 세계가 있는 곳이 주로 대황(大荒)으로 나타난다. [荒]은동이들이 떠난 본고장이 황폐해졌다는 뜻과, 동이들의 영역이 크다는 뜻과, 지금 동이들이 살고있는 곳이 초원의 황야라는 세가지 사실을 모두 나타내는 글자인 것이다([荒]은 거칠 황, 클 황, 황무지 황 등으로 새겨진다).

 

⑥ 천지조판
이제 고대사회를 어설프게나마 하나로 묶어 놓았다. 이렇게 엮어놓고 보면, 지금까지 역사가들이 중국(황하유역)과 한국(발해만과 만주벌판)의 고대역사로 생각했던 것들이 실제로는 동아시아와 서아시아의 고대사임을 알수 있다. 박용숙 선생이 우라노스로 시작되는 그리이스 신통기가 단군역사의 후속역사라고 밝힌 것은 역사의 진실이었던 것이다.


역사적 사실들은 이정도 해두고, 본론으로 되돌아가서 삼계의 개창시기를 살펴보자. 삼계는 동이의 신분제도인 동시에 배달국의 신전조직이고, 삼한관경의 원리적 근거이다. 이 삼계의 모형이 단군신화에 나타나 있다.
환웅이 신시를 열던 때, 즉 환웅과 반고가 환국을 떠나 최초의 나라를 세우기 이전에는, 환국에서 퍼져나간 백성들은 원시공산사회를 이루고 살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들은 원시시대부터 내려온 채집생활과 복희씨가 만들었다는 그물을 이용한 수렵생활을 병행하면서, 앞에서 소개된 태양숭배의 제의를 통해 문화를 전수했을 것이다.


여기에 환웅과 반고가 각기 동쪽과 서쪽으로 길을 나누어, 환국에서 발명한 도구를 이용한 농경법을 가지고 내려왔을 것이다. 산기슭을 벗어나지 못했던 사람들이 들판을 개척할 수 있는 힘을 얻게된 것이다. 이때부터 지황의 시대, 다른말로 하면 가이아의 시대가 열리는 것이다.
실제로 단군신화에는 이때의 사건과, 그로부터 1,500년 뒤에 일어난 인황의 천지통합 사적이 혼합되어 있음은 이미 살펴본 바와 같다. 단군신화에서 "환웅이 ...... 삼백육십여사를 주관하였다"는 시기로부터 "때에 곰 한 마리와 범 한 마리가 한 굴에 살면서 ...... 아들을 낳으니 이가 곧 단군왕검이다"까지에는 무려 1,500년 이상의 공백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시대적 공백을 나타내는 것이 단 두 개의 글자, 즉 [一虎(범 한 마리)]라는 것이다. 즉 호랑이를 곤모신의 상징으로 볼 때에는 신시개천의 시대가 되고, 노랑머리 여인으로 보게되면 조선건국 시기가 되는 것이다.


호랑이를 곤모신(지모신)으로 본다는 것은, 환웅이 강세할 당시에 영토권을 장악하고 있던 토착종족의 추장을 호랑이로 본다는 뜻이다. 이 경우에는 범이 서왕모의 상징으로 이해되며, 지신을 상징하는 곰과 의미가 같아진다. 따라서 발해만 연안에 환웅이 강세할 때, 환국의 정통임을 증명하는 천부인으로 두 종족을 복속시키고, 그 중에 곰족을 왕비족으로 선택했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천손강림이 동쪽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서쪽에도 있었다. 반고가한의 나라가 그것이니, 여기서는 이미 살펴본대로 사람이 되지 못하고 쫒겨난 사람들의 역사도 전해지고 있다. 아무튼 고대에 똑 같은 일이 동쪽과 서쪽 모두에 있었을 가능성도 높으니, 환국의 세력이 둘로 나뉘었다고 보기로 하자.


이 두 세력이 환국의 통치권을 둘러싸고 충돌하여, 결국 한자리에 모인 사건이 있었다고 가정한 것이 이 책의 탁록대전에 대한 해설이다. 그 때 노랑머리 파랑 눈의 범(반고의 후예)이 힘으로는 검은머리 검은 눈의 곰(환웅의 후예)을 압도하였지만, 문화적으로는 곰족이 우세하여 결국 지배권이 곰족에게 귀속되었다고 풀면, 단군왕검(우임금)의 조선건국 시기가 되는 것이다.
이 차이가 <환단고기>에서 강조되지 않은 이유는 첫째 반고가 <성경>의 하느님이 아니라 단군신화에 등장하는 [一虎(호랑이)]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


다른 하나의 가능성은 진한이 멸망한 뒤에 동아시아의 역사기록이 진시황의 분서갱유때 모두 없어져, 변한에서 가져온 단군신화가 환단의 시조신화 중에서 유일하게 남아 전해진 기록이었을 가능성이다. 결국 이책에서는 두 번째 가능성을 채택한 셈이다.
따라서 환웅의 시대 보다 수천년 앞선 환인시대에 삼계가 형성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왜냐하면 환웅이 환국을 떠날 때 천부인 세 개를 받고 풍백 . 운사 . 우사의 삼왕을 거느렸을 뿐 아니라, 무리 삼천을 이끌고 왔다는 기록에서 [3]이라는 숫자가 되풀이되기 때문이다. 다만, 환인의 시대에 대한 역사기록이 없기 때문에 환웅의 시대를 삼계의 시작으로 보자는 것이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때에 삼계라고 부를수 있는 삼한의 체계가 완성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천지인 삼황이 하나의 제도속에 완전히 통합된 체계를 삼계라고 말한다면, 환웅의 시대까지는 삼계라고 부르기에는 불완전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인황에 해당하는 태자가 있기는 하지만, 그는 제왕수업을 마친 즉시 신시를 떠나 새로운 지황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를 삼계형성의 전단계로 보고, 이를 천지조판시대라고 부르기로 한다. 여기서의 천지조판(天地肇判)이란 천계와 지계를 처음으로 나누었다는 뜻이다.
아무튼 환웅이 강세하여 천계와 지계가 처음으로 갈리던 시대는 지황이 영토권을 장악한 시대이다. 지황은 원칙적으로는 여신이지만 여자가 지황이 되고 안되고는 여기서 중요한 것이 아니다. 대지의 여신을 대리하는 지황이 영토를 매개로 세계를 지배했기 때문에 지황의 시대로 부르는 것이 옳다는 뜻이다. 이 지황이 <산해경>에 자주 등장하는 서왕모(西王母)의 실체이고, 우리 민속에서 산신(山神)으로 상징되는 호신(虎神)이다.


이 지황의 치세에 만들어진 것이 바로 고분이다. 즉 환웅과 반고가 만든 신전이 고분인 것이다. 그런데 이 두 신전의 양식은 서로 다르다. 환웅의 신전은 발해만을 둘러싼 산들을 의지해서 만들었는데, 돈황의 석굴과 같은 양식으로 산에다 굴을 뚫고 만들었다. 반고는 평원을 개척하였기 때문에 예배장소가 마땅치 않았고, 그 때문에 지그랏과 피라밋을 세웠던 것이다.


이 고분의 형식은 명당(明堂)이라는 글자가 의미하는 것처럼 태양(日)신전과 태음(月)신전을 하나로 합친 형식이다. 이때만 해도 인류의 주된 관심사는 황무지를 개간하는 것이었을 것이고, 그 때문에 천황과 지황 사이에서 태어나는 인황(별님)들을 서로 짝지워 새 땅으로 보내어, 새로운 명당을 만들도록 하였을 것이다. 그 때문에 산중(山中; 중심신전)은 일월신(부모신)이 직접 다스리고, 속세(俗世)는 별님들에게 개척하게 하였다.


그리고 별님들의 개척로를 일월신이 지정해 주었으니, 그 개척로는 하늘에 있는 큰 별들의 배치를 본떴던 것 같다. 사방신(四方神)과 이십팔숙(二十八宿)은 이런 필요성에 의해 만들어진 천문이었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하늘의 별자리를 보고 방향을 잡으면 자동적으로 다른 신전에 도착할 수 있도록 지국(支國)을 건설했다는 뜻이다. 고분이 하나같이 천문관측을 중요기능으로 삼도록 지어진 이유가 이렇게 볼 때 해명된다.
지황의 신전인 고분의 형태와 기능에 대한 암시도 단군신화에서 찾아진다. 환웅의 때에 곰과 호랑이가 [동혈이거(同穴而居)]하였다는 기록은, 이 글자들의 본래 모습을 찾아보면 고분의 기능과 밀접히 관련된다는 뜻이다.

 

이 그림은 순서대로 [同穴而居]의 옛 글자모습이다. 그림에서 [동(同)]과 [혈(穴)]은 모든 것을 통합하는 굴, 또는 움집의 모습이다. [이(而)]는 수염의 모습이라고 하는데, 고인돌과 같은 제단의 모습으로 보아도 되는 형상이다. [거(居)]는 [살다] 또는 [무덤]의 뜻이니, 그림에서 의자위에 앉은 모습으로 그려진 사람은 무덤에 사는 사람인 신상이나 신관을 나타낸다.


따라서 이 구절은 [범(虎)]이라고도 불리고 [ (熊)]이라고도 불리는 동굴신전이라는 뜻도 된다. 그리고 [동(同)]이나 [혈(穴)]에 신상이 표현되지 않은 것은 여신족들이 우물(구덩이) 그 자체를 신전으로 삼아 신성시하였음을 암시한다.


여기서 [동]이나 [혈]이 모두 땅이 깊이 꺼진 구덩이와 같은 곳에서 지신인 후토(后土)를 모시던 곳이었다는 사실은 또다른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이런 조건을 충족시키는 지형이 바로 세계에서 가장 깊은 땅인 해발 -170 미터의 트루판 분지이기 때문이다.
그 옆에는 앞에서 살펴본 대로 즁가리아분지, 띠화, 우루무치, 옥문관, 돈황, 알타이산맥, 한가이산맥, 곤륜산맥, 타글라마칸사막 등이 둘러싸고 있다. 이런 점을 근거로 환국이 티벳(Tibet)고원을 천황의 영토로, 트루판 분지를 지황의 영토로 삼았다고 추정했던것이다.
그 내용을 다시한번 살펴보면 트루판은 [트루]가 셋(트리플)의 뜻이있고, [판]은 [한]으로 이해되어 삼한이 된다. [즁가리아]는 우리말 [둥그리]와 비슷하다. 띠화(우루무치)는 지황(地皇;디황)의 변형으로 보이며, 이는 우루무치가 울뭍 → 운물 → 우물로 바뀔 수 있다는 점에서 가능성이 높다.


옥문관은 글자 그대로 여자의 성기를 뜻하니, 노자가 말한 곡신(谷神)의 뜻이다. 돈황(敦煌)은 단황(檀皇)과 싑게 연결된다. 알타이는 알터, 한가이는 한가리 - 한겨레와 비슷하고, 타글라마칸은 탁록으로 추정했던 곳이다.
단군신화의 [願化爲人(사람되기를 원하다)]은 이 신전에서 여신들이 남신에게 음양교합 하기를 요구했다는 뜻이 된다. 바로 이 음양교합의 장소, 우리말로 [씹자리]가 바로 고분의 기능인 것이다. 고인돌의 형상이 침대처럼 생긴것도 우연이 아닌 것이다.
결국 환웅의 강세는 지황의 영토권을 부정할 수 있는 권위와 실력을 겸비한 천황이 이 지황의 세상에 내려와, 지황의 우물을 정복하고 천지동덕의 세상을 열었던 역사적 사실을 상징하고 있다.


즉 산속에 폐쇄된 성역만을 고수하던 천황족이 속세로 내려선 것이다. 어쩌면 이는 지황들의 힘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었던 중대한 변고가 인간세계에 일어났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기원전 4,000년경은 <성경> 창세기의 때에 해당하는 시기로서, 세계각지의 전설에 홍수설화가 등장하는 바로 그때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이 고분이 단군신화에서는 [신단수]로 나타난다. 신단수는 환웅이 내려왔다는 곳이므로, 환웅이 처음으로 열었다는 신시의 딴 이름이 신단수라고 볼수 있다. 그리고 신단수라는 이름이 [신단이 곧 나무이다]라는 뜻으로도 이해될 수 있으므로, 신단의 뜻을 어느정도 밝혀낸 지금, 나무의 상징적 의미가 관심을 끌게 된다.


여기서 뒤에 설명될 '한'의 자연론 중 [자연상] 해설에서 나무의 형태가 세모와 네모와 동그라미의 결합이며, 절반은 뿌리로 땅속에 묻혀 드러나지 않고 나머지 절반은 산과 같은 모양으로 땅위에 솟아있어, 진리의 상징으로 적합하다는 점이 참고가 된다. 그리고 피라밋이나 지그랏이 모두 이와같이 지상부에 천신의 거처를 마련하고, 지하부에 지신의 거처인 우물을 두었음을 볼 때, 신단수가 고분이라는 확신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단군신화에서 웅녀가 사람이 되기 전에 거쳐야 했던 절차는, 왕이 될 인재를 낳기 위해서는 여신들도 엄격한 수행을 거쳐 자격요건을 갖추어야 함을 상징한다. 이 자격이 부덕(婦德)이다.
이 부덕에는 문자 . 의약 . 농사 . 요리 . 재봉 . 가무 등 새 문명을 건설할 수 있는 모든 지식은 말할 것도 없고, 남편을 치마폭에 휘어감을 수 있는 방중술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즉, 부덕은 황후의 자격을 말하는 것으로, 속세에 나가면 황제를 섭정하는 태후가 되기위해 공부하는 것이다.


이런 여인상은 유교문화에서 삼종지도(三從之道)에 찌들은 여인상이 아니라, "세상을 다스리는 것은 남자지만, 그 남자를 지배하는 것은 여자이다"라는 말의 유래가 되는 신모상(神母象)인 것이다. 그리고 이 속담은 뒤에 설명되는 바와 같이 고대 제왕들의 숨겨진 비극을 표현한 속담이기도 하다.


그리고 환웅이 이런 교육을 시켰고, 웅녀가 그 수행을 원했다는 것은 환웅의 문화가 그만큼 우수했다는 반증이라고 보아도 좋다.
결국 환웅의 시대는 고분의 시대였으며, 그 고분은 천황과 지황의 처소였다. 그 곳은 신혼(神婚) 또는 성혼(聖婚)을 통해 인황인 별님을 생산하던 [알터] 또는 [아이집터]였으며, 그 별님이 새로운 고분을 세워 독립하여 천자(天子)가 된다. 이것이 태양신의 혈통계승이며, 풍류의 핵심요소인 것이다.


이 지황의 시대에는 삼계가 중층구조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즉 환국은 환인의 주관하에 천황인 태양신과 지황인 고모신(태음신; 月神)을 제사지내는 성역으로 남아있었고, 하계에 동쪽과 서쪽의 두 고분이 생겨서 백성들을 다스리게 된 것이다.
하계에서는 환인의 혈통임을 자랑하는 남신(男神)이 지상에 강림한 태양신임을 자처하며 스스로 천황이 되고, 천황과 잠자리를 같이하여 태양빛을 세상에 흘려줄 여신들이 부덕(婦德)을 닦으며 우물을 관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하계의 천황은 상계의 인황인 환인과의 관계에서는 천황의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 즉 상하를 종합한 위계를 따진다면 환인(상계인황)이 천황이 되고, 환웅(하계천황)이 인황이 되는 것이다. 위 표에서 아래 그림의 화살표는 이 뜻을 나타낸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할 내용이 있으니, 이 지황의 고분에서 지옥이라는 관념이 생겨났다는 점이다. 지옥의 관념이 생긴 것은 이때보다 훨씬 후대의 일일지도 모르지만, 고분에서 공부하고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속세에 전해질 때 지옥이라는 끔찍한 세상이라고 묘사되었던 것이다.


이 사실을 이해하려면 지황이 지귀, 도깨비라고 불리웠던 기술자 집단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충분하다. 지귀, 즉 도깨비의 주업무는 야금(대장장이)과 폭약제조, 의료행위 등이다. 그 작업장은 밤낮으로 쇠를 녹이는 용광로의 불꽃이 타오르고, 온 몸에 고슴도치처럼 침을 꽂고 누워있는 환자들과, 수술을 받느라고 배를 가르고 뼈를 드러낸 사람들로 붐볐을 것이다. 고대사람들이 그들의 작업환경을 보고서 지옥이라는 표현보다 더 좋은 말을 만들어 내었다면 오히려 비정상이다.


더구나 도깨비들은 고급기술자로서 작업을 지도하고 감독하는 신분이었고, 직접 노동에 종사한 사람들은 주로 죄수들로 충당되었다고 한다. 이런 풍경은 염라대왕의 부하들에게 벌을 받고 있는 죄인들의 이미지와 꼭 맞아 떨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지황의 신전이 끔찍했던 만큼 천국(환국)은 이상적으로 묘사되었을 것이고, 그런 생각들이 후대에 [태초의 황금시대]라는 관념을 낳았다고 하겠다.
지금까지 살펴본 신시의 기본제도와 그 제도들이 상징하는 여러 의미는 신시의 뒤를 잇는 고조선에도 그대로 계승된다. 그러니 신시에 대해서는 그만 살펴보고, 지금의 문명과 직접 연결되는 고조선을 통해 풍류의 완성된 모습을 찾아보자.

 

3. 조선과 삼계

1) 단군과 고조선
단군의 고조선에 이르러 삼한은 삼계의 체제를 완성하게 된다. 단군이 건설한 고조선은 앞에서 살펴본대로 환국과 신시(배달국)를 모두 복속시켜 만든 진정한 세계국가요, 종교와 정치를 하나의 제도로 통합한 제정일치의 절대왕국이었다.
단군에 대해 가장 먼저 살펴볼 사항은 왕검이 바로 고(古)라는 사실이다. 단군의 정식명칭은 <삼국유사>에 나오듯이 [단군왕검]이다. 그리고 단군이 세운 나라의 이름이 [고조선(古朝鮮)]이다.


오늘날 우리들은 이성계가 건국한 근세의 조선을 이미 알고 있고, 고조선이 아주 오래된 나라 이름이기 때문에, 고조선에 붙은 [古]에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선입관 때문에 고조선에 대한 중요한 사실 하나가 드러나지 않고 있다.
일연은 고려시대 사람이었으므로 이씨조선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수가 없었던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조선 앞에 [古]를 붙여 기록하였다. 더욱이 이 고조선의 별칭을 [王儉朝鮮(왕검조선)]으로 부기해 두기까지 했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고조선에 이어지는 위만조선과 대비시키기 위해 고조선이라고 불렀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같은 책에 한(漢)을 고한(古漢)과 한(漢)으로 기록하지 않고 전한(前漢)과 후한(後漢)으로 쓴점을 볼 때,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볼수 있다.
우리는 앞에서 이미 [古]가 신전과 신상을 나타내는 글자임을 살펴 보았고, 이 사실을 생각하면 일연이 조선의 국호에 [古]를 붙인 것이 특수한 의미가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더욱이 [왕검(王儉)]도 천제(天帝)의 뜻이기 때문에 엄청나게 위대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古]를 앞에 내세우고 왕검을 부기한 것은 그가 [古]에 대단한 자부심을 가졌음을 뜻한다.


이미 말한대로 고조선을 왕검조선이라 쓴 것은 [古]가 [王儉]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왕검]의 뜻을 돌이켜 보면, [王]은 태양신의 칭호로서 [皇] 또는[凰]과 같은 뜻의 글자이다. 그리고 [儉]은 지모신인 [ ]을 나타내는 글자이다. 따라서 [王儉]은 천신과 지신을 통합한 절대제왕을 나타내는 최고의 신칭(神稱)이 되는 것이다.
고대의 신전인 피라밋이 바로 [古]였다는 사실은 이 절대제왕이 거처하던 곳이 피라밋과 같은 신전임을 뜻한다. 바로 이 [古]에서 오늘의 세계사와 바로 연결되는 고대의 타이탄(Titan)들, 다시말해 세계 여러 민족의 상고사에 천신(天神)으로 표현되는 신이(神異)들의 역사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 [古]의 딴이름이 [아사달(阿斯達), 무엽산(無葉山), 백악산(白岳山), 태백산(太白山), 신단수(神檀樹)]이다. 이 중에서 아사달의 해설에 해당하는 무엽산, 백악산, 궁홀산은 앞에서 설명된 내용들이고, [신단수]도 고분이라는 사실을 이미 설명하였으므로, 남은 것은 [아사달]이다.
[아사달(阿斯達)]의 뜻을 풀어보면, [阿]가 [언덕 . 물가 . 산기슭]의 뜻이고, [斯]가 [희다 . 도끼로 찍다]의 뜻이니, 둘을 묶으면 [물가의 도끼로 찍은듯한 흰 산기슭]이라는 뜻을 얻을 수 있다. 이런 모습을 지금까지 발굴된 유적에서 찾으면,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이집트의 피라밋과 지중해 연안의 그리이스 신전- 그 중에서도 파르테논 신전이다.


[達]은 [어린 양이 수월하게 태어나다]는 뜻인데, 양과 소의 옛 자형이 비슷하게 생겼으므로 어린 소로 보아도 되고 어린 양으로 보아도 된다. 아무튼 양과 소는 공통적으로 뿔과 턱을 이은 머리형태가 삼각형을 이루므로서 <천부경>의 진리를 형상화하고 있고, 고대에 희생의 제물로 중시되었다는 점에서 신전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그런데 여기서 유의할 점은 [達]이 양이나 소의 어미가 아니라 [새끼낳기]와 관련되는 글자라는 점이다. 이는 고대에 소나 양으로 상징된 군왕의 자식인 태자를 낳는 일과 관계가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達]의 우리말 발음인 [달]은 [땅(地)]과 [달(月)]의 뜻이 있다. 이는 곧 여신인 고모신(곤모신)을 상징한다. 고모신의 처소는 우물로 상징되는 지하였던 사실도 참고가 된다. [달]은 이 외에도 [돌(石)] . [산(山)] . [머리(頭)] . [들(野)] 등의 뜻으로 쓰였던 말이다.
이제 [아사]와 [달]을 지금까지 살펴본 풍류의 핵심제도와 결합시키면, [아사달]은 [신전 터]의 뜻과 [언덕 신전과 지하 신전의 결합체]라는 두가지 뜻을 가지게 된다. 이것이 진정한 [古]의 뜻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 고대어에서 [아시]는 [처음 . 새로운]의 뜻이고, 일본어에서는 아직도 [아사(アサ)]가 [아침]의 뜻으로 쓰이므로, 아사달은 [첫땅 . 새땅]의 뜻이 된다. 그리고 말은 다르지만 같은 뜻을 끌어낼 수 있는 말로 [초생달]이 있는데, 초생달의 모양이 한편으로는 뿔처럼 생기고 한편으로는 배(船)처럼 생긴 사실도 우리 역사와 연결된다.


탈해왕의 기사에 탈해가 용성국에서 태어나 배를 타고 신라에 닿았으며, 초생달처럼 생긴 언덕에 집을 짓고 살았다고 하는 기록이 그것으로, 이런 내용이 모두 아사달의 정통을 이었다는 의미로 해석되는 것들이다.
그런데 [아사]에는 [처음]의 뜻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앗]이 [아우(弟)]의 뜻으로도 쓰였는데, 이 뜻을 취한다면 [아사달]은 [두 번째 땅]의 뜻이 된다. 그리고 이 뜻도 아사달이 단군의 도읍이라는 점과 관련된다. 환웅이 첫째가 되기 때문이다. [앗]이 [처음]과 [둘째]의 뜻을 모두 담은 이유는 우리 역사에서 단군의 위상이 처음이면서 둘째이기 때문인 것이다.
아무튼 이 [아사달]이 변하여 [아시아]와 [아틀라스]가 될 수 있다는 점까지 생각한다면, 그 옛날 고조선의 위세가 어떠했는지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2) 삼계와 구정
단군왕검, 곧 하(夏)나라를 건국한 우(禹)임금은 동이 역사상 최초이자 최후의 통일국가를 건설하여, 삼계구정(三界九井)의 제도를 확립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 말은 글쓴이가 새로 만들어 쓰는 말인만큼, 그 뜻을 분명히 밝혀야 할 것 같다.


삼계구정이란 삼계(三界)와 구정(九井)을 합한 말이며, 삼계나 구정은 이미 역사에 나타나는 이름들이다. 그 중에서 삼계는 이미 여러번 설명된 내용이니 별도의 설명이 필요하지 않고, 단군왕검의 고조선에 이르러 그 체제가 완비되었다는 사실만 알아두면 된다.
구정(九井)이란 말은 신농씨의 전설에 최초로 등장하는 것 같다. "태양의 신이자 농업의 신이기도 한 염제가 막 탄생하였을 때, 그 주위의 대지에는 인간이라고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고 오직 아홉 개의 샘(九井)만이 그를 반겨주었을 뿐이었다. 이 아홉 개의 샘은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만일 샘 하나에서 물을 길어 올리면 나머지 여덟 개의 샘물도 함께 출렁거렸다"고 한다.


이 기록은 신농씨가 바로 환웅이며, 그가 처음으로 여신들의 우물신전을 정복하였다는 이책의 입장과 상통하는 부분이다. 왜냐하면 환웅이 태백산에 내려왔을 때, 동굴에 살고 있었다는 곰과 호랑이가 바로 여신들을 뜻하고, 그 여신들이 사는 곳이 우물이기 때문이다.
이 구정은 구천(九泉)으로 더 널리 알려져 있는데, 구천의 뜻은 [땅 . 대지(大地)], [구지(九地)의 밑에 있는 샘. 전하여 황천(黃泉) . 저승]이라고 한다. 즉 구천은 단순한 샘이 아니라 대지의 뜻과 관계된 우물이다.
그리고 여기서의 대지(大地)는 [大]가 [큼]으로 되고 다시 [ ]으로 바뀌는 것을 고려하면 곧 [ 터], 즉 [신토(神土)]의 뜻이 된다. 결국 영토권을 행사하던 여신들의 신전이 신화에 등장하는 구천(九泉) 또는 구정(九井)의 정체인 것이다. 그렇다면 왜 우물에 [아홉]이라는 숫자가 붙은 것일까?


이를 위해서 알아야 할 것이 바로 고조선의 [아사달]이라는 성역구조이다. [阿]는 이미 말한대로 [물 가(옆)의 언덕]이다. 여기에 물(水)이 있다는 사실을 새겨두자. [斯]는 [기(其)]와 [근(斤)]을 합한 글자이다. [斤]은 도끼로서 염제족의 종족표지이다.
[其]는 [키(箕)]를 나타내는 글자라고 말해지지만, 그 뜻은 [우물(井)]로 보인다. [其]의 본래 글자 모양은 왼쪽 그림과 같고, 그 변형이 오른쪽 그림과 같은데, [키]로 보기보다는 [물동이] 같은 것, 즉 신성한 우물로 보는 것이 더 옳을 듯하다. 글자 모양부터가 우물(井)속에 지신을 상징하는 [二]를 집어넣은 모습이며,우물 속에 사다리나 계단을 설치한 모습으로도 보여진다.


이 우물(井)에 테두리( )를 쳐 주면 바로 홍범구주(洪範九疇)의 낙서구궁(洛書九宮)이 나온다. 염제신농이 처음 탄생하였을 때 세상에 있었다는 아홉 우물이 바로 이것이요, 이 제도가 환웅의 배달국에 흡수되고, 다시 단군의 고조선에까지 전수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결국 동이족을 나타내는 구이(九夷)가 구정(九井)의 정체였던 것이다. 이 우물 옆에 염제 신농씨족의 종족표지인 도끼가 붙었으니, 신농씨와 여신들의 연맹제도가 출발하였다는 뜻이 [사(斯)]라는 글자에 들어있다고 볼수있다.


환웅의 배달국과 단군의 조선국의 차이는 별님인 인황에 있다. 배달국이 인황을 제도속에 포함시키지 않고 새로운 천지를 건설하도록 내보냈음에 비해, 조선국은 인황을 제도권의 중심축으로 삼아 천지를 개편하였다는 것이다. 이 체계는 아래의 그림으로 나타내었다.
왼쪽 그림은 배달국의 체계를 나타낸다. 먼저 왼쪽 그림은 고(高)의 옛자형으로서, 세모꼴은 환국이 산속에서 속세와 단절된 모습을 나타낸다. 그 밑에 네모꼴은 환웅이 연 신시로서, 속세와 환국을 연결해주고 있다. 나머지 부분은 속세로서, 별님들이 가서 새땅을 개척하고 왕비감을 신시로 공급하여 부덕을 쌓게한다.


이 삼계구정이 한 번 더 반복된 것, 다시말해 구주(구궁)에 중앙과 같은 신전을 세우고, 태양신의 사자인 풍신(봉황)을 보내어 거주케 한 것이 <환단고기>에 자주 등장하는 구환(九桓) 81민(民)인 것이다.
이 체제는 삼계가 따로 떨어져있고, 이미 설명되었듯이 신시에 환인의 대행자인 환웅이 신녀와 함께 거주하고 있어서 세계지배의 구심점이 된다.
이렇게 삼계가 수직으로 배치가 되고, 신녀들을 공급할 우물인 봉토가 아홉으로 나뉘어 구궁을 이룬 체제가 바로 삼계구정인 것이다. 그리고 이 체계가 <천부경> 81자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제 기본체계가 밝혀졌으니, 그 체계 속에서 일어났던 사건들을 추적해 보기로 하자. 그리고 그 사건들이 담고있는 풍류의 실상과 위대성을 발굴해 보자.

 

4. 조선과 삼한

1) 조선의 실체
조선에 대해서는 이미 민족사학계에서 충분히 연구가 진행되었고, 중요한 내용은 거의 밝혀져 있다. 조선의 실체에 대해서도 많은 연구가 나와있으며 학계의 정식 인정을 받지 못하는 부분도 있지만, 그것은 시간문제일 뿐 조만간 학계의 공인이 있을 것이다.
시중에 벌써 여러권의 책이 나와 있으므로 여기서 상세히 다룰 필요는 없으나, 그 내용을 소개하지 않고서는 풍류의 실상을 설명하기가 어려워지므로 간단히 요약, 소개하기로 한다.


조선은 그 이름 자체에 가장 중요한 의미는 모두 밝혀져 있다. 다만 조선이 한자로 표기되어 있다는 사실에 지나치게 집착하여 그 실상을 보지 못할 뿐이다.
먼저 [조선]은 [선조(先祖)]의 뜻이다. [先祖], 즉 조상을 나타내는 조(祖)의 옛 글자인 [且(차)]는 [조상의 위패의 모습]이라고 말해져 왔으나, 그 원래 모습이 [좇대가리]의 모습임은 김용옥 선생이 주지시킨바 있다. [발기한 남성성기]의 순우리말은 [선좇] 또는 [좇선]이니, 좇센 남자라야 씨내리의 임무를 다할수 있었을 것이다.


이 뜻이 풍류의 바람둥이가 나온 유래이거니와, 몽고족 남성들이 인삼 . 영지 . 음양곽등 식물성 보약에 만족하지 못하고, 해구신 . 보신탕 . 영양탕 까지 찾아다니면서 정력증진에 몰두하는 것은 그 유래가 아무리 적게 잡아도 4,300년을 넘어가는 것이다.
다음으로 [조선]은 [선민(選民)]이다. 옛날에 아사달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엄격한 공개경쟁 시험을 치러야 했으니, 이것이 [올림픽]과 [메이 퀸(미스 월드)]의 유래이다. [ 님뽑기( 님 픽업)]가 올림픽의 유래인 것이며, [ 리(頭) 군(群)], 즉 [월드(月土 또는  터)]의 [맏이]를 선발하는 행사가 미인선발대회의 유래인 것이다.


박용숙 선생은 고대의 놀이문화가 모두 거인족(동이족)의 씨뿌리기와 관련된다는 사실을 자세히 논증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사실임은 [선택된 사람]을 뜻하는 그리이스어가 [초우선(chosen)]이라는 점이 증명한다.
셋째로 [조선]은 지금까지 설명한 신전인 [삼신산]이며, 이 뜻은 [朝鮮]의 한자분해를 통해 얻어진다. [朝鮮]은 [十日丁月魚羊]으로 해체되는데, 이에 대한 박용숙 선생의 연구를 소개하고, 글쓴이의 견해를 보충하기로 한다.

 

[十] : [十]이라는 수는 조개(貝)이다. 옆으로 그은 [一]은 동쪽과 서쪽을, 아래로 내리그은 [ㅣ](곤)은 남쪽과 북쪽을 가리키며, 두 선의 결합은 네 방위와 중앙을 말하고, 또 역(易)의 수개념은 "하나에서 나와 열을 이루어 공(空)으로 돌아간다.<설문>". 이 [十]의 뜻을 하도(河圖)라고 한것도 같은 뜻임을 알 수 있다. 결국 하도가 <천부경>의 원리를 그림으로 나타낸 것이므로, [十]의 원형은 세모꼴(▽)이거나 삼지창(↑. )으로 볼 수 있다.


* [十]을 조개라 한 것은 보지(씹)를 말하는 것이며, 동시에 성교(씹)를 뜻한다. 그리고 [十]의 [ㅣ(곤)]은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는 천신하강의 의미이고, [一]은 땅위를 옆으로 퍼져나가는 영역확장의 의미이다. 즉, 제정(祭政)일치의 덕화가 씹(十)을 매개로 퍼져나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를 <중용>에서는 "군자의 도는 부부에서 비롯한다(君子之道 造端乎夫婦)"라고 하였다. [端]은 [立(립)]과 [山(산)]과 [而(이)]를 합한 글자이다. [且]가 선돌(돌멘)로서 좇의 상징이라면, 이 [立]은 고인돌로서 보지의 상징이다. [立]의 독음은 [립]으로서, 입(口)의 우리말과 영어(lip)의 발음을 모두 반영하고 있다. [山]은 [且]의 다른 표기로 이해되고, [而]의 본글자는 이미 살펴본대로 제단(祭壇)의 모습과도 비슷하고, 보지의 모습을 그려놓은 것으로 보아도 틀리지 않는다.


[日] : 태양(太陽)의 정(精)이며, 양정(陽精)의 으뜸이다. 동쪽에 떠오르는 광명이고, 군자의 상이다. 점을 치고 예언을 하는 사람이 일자(日者)이고, 태양숭배와 예언(기하학.수리학), 그리고 신성한 인물(神)이라는 이미지를 전달해 준다.

[丁] ; 하(夏)나라 때, 만물이 모두 [丁(정)]에 의해 결실되고 계승되며, 인심(人心)이 [丙(병)]의 모양이었다. [丙]은 <설문>이 "文明之象"이라고 했다. [丁]이 특수한 비유로 쓰여짐을 알수 있다. 또 <장자 . 양생편>은 "백정(白丁)이 소를 해체한다"고 쓰고, <천하편>에서는 [丁]이 꼬리가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 특별히 꼬리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이유는 그것이 형이하학이나 실학(實學)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十]이 형이상학, 이른바 머리의 이치를 나타내는 기호라면, [丁]은 꼬리로 비유되는 형이하학의 상징이다. [十]이 소(▽)이고, [丁]이 뱀(△)이다. 이점은 <자전>이 [丁]의 옛글자로 화살표(↑)를 제시하고 있는데서 알수 있다. 화살은 경우에 따라서는 창(矛)이나 뱀(또는 지팡이)으로 표시되어 의술(醫術)의 상징으로 통용된다.


* [丁]의 찌른다는 의미는 오늘날에도 그대로 쓰여지는 성교의 표현이다. 바로 앞의 [日]이 양정이므로, [丁]은 사정(射精)하여 정액을 주입하는 것이다. 그리고 씹(十)이 머리이고, 뱀(丁)이 꼬리라는 설명을 통해 고대의 지배권은 여자가 행사했음을 알 수 있다.

[月] : 달은 태음(太陰)의 정(精)이고, 땅과 수기(水氣)의 정이다.
* 달은 곤모의 상징이다. 따라서 여신이 지배하던 땅을 나타낸다.

 

[魚] : 물의 벌레이며 그 모양은 제비꼬리와 같다. 또 물고기는 찌르는 것(性器)이며, 다리와 날개가 없으며, 벌레가 숨겨진 모양이다. 왕이 진사시험에서 은어(銀魚)의 비단옷이나 패옥(佩玉)으로 된 고기(金魚 . 銀魚)를 내리기도 한다.
"고기가 찌르는 것이다"라고 한 것은 탄생의 의미를 나타낸 것이고, 다리와 날개가 없다고 한 것은 용(龍)에다 빗대어 말하는 것으로 용이 되지 못한 상태를 암시하고 있다. 또 "벌레가 감추어진 모양이다"라고 한 것은 생명의 원초형태(아메바 . 수정란)로, 탄생의 의미와 관련된다. "진사시험 때 왕이 품위에 따라 고기모양의 서품(패물)을 내렸다는 것은, 고기가 수도하는 학생이며 시험을 치러서 용(인재)이 되는 일을 뜻하기 때문이다.

 

[羊] : 양은 상(祥)이다. 그 모양은 뿔과 꽁지가 있는(+I+) 자형(字形)이고 공자는 소와 양의 글자가 닮은 것이라 했다. 양이 소의 모양과 닮았다는 것은, 고기가 용이 되지 못한 것이듯이 양은 소가 되지 못한 모양이다. 소가 형이상학적인 경전의 비유였다면, 양은 그것을 배우고 있는 과정의 비유이다.
* [羊]은 낚시질 하는 얼레(실감는 도구)의 모양이라고도 하는데, 이 견해를 취하면 물고기를 잡는곳이 선(鮮)이되어, 선민(選民)의 뜻이나 인재등용의 뜻이 명확해진다. 고기가 사는 곳은 [물]인데, 여기에는 두가지 물이 있다. 해중수(海中水)는 [신전 안의 물]로서 신전 내의 수도장이요, 외지수(外地水)는 [신전(달) 밖(外)의 물]로서 속세를 뜻한다. [물]은 우리말에서 [물(水)]과 [무리(衆)]의 양쪽에 모두 쓸수 있는 말이다. 신전의 안팎에서 인재를 선발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 고기는 모양은 좇과 같아 남자를 상징하고, 물속에서 사는 습성은 우물(여신전)에서 사는 여자를 상징한다. 따라서 인재의 선발에 남녀의 구별이 없었다는 뜻이 된다.

 

[朝鮮] :<강희자전>에서 얻은 이상의 자료들을 다시 정리해 보면, 삼지창( )과 해(日)가 태양이 되고 화살(↑)과 달(月)이 태음이 되고, 물고기(魚)가 소음(少陰), 그리고 양(+I+ . 羊)이 소양(少陽)의 의미가 된다. 이것을 괘도(卦圖)로 바꾸면 건곤감리(乾坤坎離)가 된다. 다시 그 자료들을 쌍(陰陽)으로 묶으면, 삼지창과 해가 하늘(天)이 되고, 화살과 달이 땅(地)이 되고, 고기와 양이 중성(人)이 되어, 삼재사상이 표현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필자(박용숙)는 다른 책에서 이를 햇님, 달님, 별님이라 했다.


다시 자료들을 그림으로 보게되면, 그 모두가 그리이스의 [암포라]에 그려진 우신(牛神) [포세이돈]의 모습에 들어있음을 알게된다. 삼지창은 포세이돈의 삼지창이고, 해와 달은 꽃(활짝 핀 꽃과 꽃봉오리)이고, 고기는 왼손에 쥐고있는 것이며 양은 그가 타고있는 소를 가리킨다. 또 화살은 왼쪽 겨드랑이에 보이는 지팡이에 해당한다. 해신(海神) [포세이돈]이 우리쪽 기록에서는 바다의 용왕(龍王)으로 나타나므로 [朝鮮]이라는 글자는 곧 동쪽 바다의 용궁이고, 동시에 용왕이라는 의미와 같다.


이런 표현이 종교적인 메카를 뜻하고 있다는 사실은 <산해경>이 조선을 "천독(天毒) . 천축(天竺)이다"라고 함으로써 분명해진다. 불교에 관한 기사에서 천축을 인도라고 말하게 되는 것도 인도가 불교의 메카가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산해경>이 조선을 천축이라고 한 것은 동이시대의 종교적 메카가 곧 [조선]임을 확인하는 것이다.

위의 인용문과 [*표]로 글쓴이가 보충한 부분을 종합하면 [음양교합과 수행이라는 두 요소를 핵심으로 하는 특수한 종교적 성지]가 조선의 원초적 의미임을 알수 있다.


[조선]의 넷째뜻은 영토를 다스린다는 의미, 즉 삼한관경(三韓管境)의 뜻이다. 일찍이 신채호 선생은 조선의 어원을 [숙신(肅愼)]이라 하였고,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에서는 숙신의 옛이름이 주신(珠申)이라 하였고 [주신]은 소속관경을 가리키는 만주말이라고 하였다.
<태백일사 . 삼한관경 본기>에 "마침내 삼한으로 나라를 나누어 거느리시니, 진한은 스스로 천왕께서 다스리시고 도읍을 아사달에 세우고 나라를 여시사 조선이라 하시니, 이를 일세(一世) 단군이라 한다. 아사달은 삼신을 제사지내는 곳인데, 후인들은 왕검의 옛집이 아직 남아있기 때문에 왕검성이라 했다(遂與 三韓分土而治, 辰韓天王自位也, 立都阿斯達開國號朝鮮, 是爲一世檀君. 阿斯達三神所祭之也, 後人稱王儉城以 王儉舊宅尙存故也)"는 구절이 있다. 이를 근거로 보면 조선이 나라를 삼한으로 나누어 다스렸기 때문에 조선에 소속관경의 뜻이 생겨났다고 볼 수 있다.


이제 조선의 뜻은 밝혔으니 조선의 뜻 중에서 삼신과 관계되는 [삼한(三韓)]을 살펴보기로 하자. 이 삼한은 지금도 풍류의 중심세력인 무당의 뿌리이고, 조선의 뜻풀이에서 찾아진 삼재(三才)의 정식명칭이기도 하므로 풍류의 모든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2) 삼한(삼왕)

① 삼한과 우물
조선의 뜻 중에 삼한관경의 뜻이 있음을 이미 설명하였다. 그리고 이 책에서는 [삼한]을 삼한(三桓)과 삼한(三韓)으로 나누고, [三桓]은 환인 . 환웅 . 단군의 국조삼신과 국조삼신의 상징인 햇님 . 달님 . 별님의 삼신으로 규정하고,[三韓]은 조선이 성립되고 난 이후에 조선을 셋으로 나누어 다스렸던 삼왕 - 진한왕 . 마한왕 . 변한왕으로 규정하였다.


지금 살펴볼 내용은 삼왕으로서의 삼한인 셈이다. 이 [한(韓)]이 배달국의 뒤를 이었음은 이름 자체에 나타난다. [韓]은 [우물구덩이]를 나타내는 [간(乾; 乙이 빠짐)]에다가 [주위를 돌아다니다(둘러싸다]라는 [위(韋)]를 붙인 글자이다. 이 뜻은 그대로 우물정(井)자에 테두리를 둘러쳐준 낙서구궁으로 이해된다.


즉 신시의 우물을 계승하여 풍류의 씨뿌리는 통치제도를 이은 것이다. 그리고 신전의 외벽에 나선형 계단을 설치하여 천문관측과 수비초소로 활용하였던 지그라트야말로 이 글자에 꼭 들어맞는 신전이라고 하겠다.
<삼계와 구정> 해설에서 설명한 조선국의 삼계구정 체계는 이 [韓]의 뜻을 제도화 한 것이 된다. 그리고 하도와 낙서 또는 복희팔괘와 문왕팔괘가 음부(陰部)와 양부(陽部)로 구별되어 있는데, 그 모습을 그대로 본떠서 통치제도로 삼은 것이 삼왕제(三王制)인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음부와 양부를 다스릴 보좌역으로 두 사람이 더 필요했던 것이다.


중앙신전(아사달)에는 실제로 두사람의 왕이 있게 되는데, 황(皇)과 후(后)가 각기 양부와 음부를 나누어 관장했던 것이다. 후대에 후(后)의 권한이 대폭 축소되면서 후(后)의 직능을 상(相)이 대행하게 되어 삼상(三相)제도가 자리잡게 된 것으로 보여진다.
아무튼 [삼한]은 처음에는 국조삼신(三桓)의 수직적 . 시대적 위계에서 유래하였고, 단군왕검에 이르러 신전 내부의 수직적 위계와 신전외부의 수평적 구주분장(九州分掌)의 통합제도로 개편되었다가, 단군 색불루(索弗婁)에 이르러 땅을 셋으로 나누어 다스리는 관경(管境)의 제도로 정착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삼신의 상하위계는 이미 설명하였으므로 단군의 수평위계인 구주분장 제도를 살펴보자.

단군왕검은 천하를 평정하시더니 삼한을 나누어 관경을 만드시고, 곧 웅백다(熊伯多)를 봉하여 마한으로 하고 도읍을 달지국이라 하니 또한 백아강이라고도 한다(檀君王儉旣定天下 分三韓而管境 乃封熊伯多爲馬韓 都於達支國亦名白牙江)<태백일사 . 삼한관경본기> [마한세가].

이에 단군왕검은 치우의 후손 가운데 지모가 뛰어나게 세상에 소문난 자를 골라 번한이라 하고 부(府)를 험독에 세우게 하였다. 지금도 역시 왕검성이라고 한다. 치두남은 치우천왕의 후손으로 지혜와 용기가 뛰어나게 세상에 알려졌다. 단군은 곧 불러보시더니 이를 기이하게 여기시고는 곧 그를 번한으로 임명하고 겸직하여 우(虞)의 정치를 감독케 하였다(檀君王儉 擇 蚩尤後孫中 有智謀勇力者 爲番韓 立府險瀆 今亦稱王儉城也 蚩頭男 蚩尤天王之後孫也 以勇智著聞於世 檀君乃召見而奇之卽 拜爲番韓兼帶監虞之政)"<태백일사 . 삼한관경본기> [번한세가].

여기서 먼저 [웅백다(熊伯多)]를 이두식으로 읽으면 [   ]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즉 일차적으로 [곰(熊) . 맏(伯) . 다(多)] 로 바꿀수 있고, 이렇게 바뀌어진 우리말은 다시 [坤母 地(곰→곤, 맏→모, 땅)] 또는 [君 明地(곰→군, 백→밝, 땅)]의 뜻을 포함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추정하는 이유는 [   ]의 다른 표기로 [현도(玄兎)]가 있기 때문이다. 이를 이두식으로 읽으면 [까만 토끼]가 되고, 이를 [   터]로 바꾸는 것은 쉽다.
두 경우가 모두 지황의 영토인 馬韓( 한)의 뜻이 된다. 그 도읍을 달지국(達支國)이라 하였는데, 이는 달가리(月支) 나라의 이두식 표현으로 보여진다. 그리고 이 달지국을 달리 [백아강(白牙江)]이라 하였는데, 이 기록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왜냐하면 [백아]를 이두식으로 생각하면 [바그]의 음사(音寫)로 볼 수 있기 때문이고, 이는 고대에 중동지역을 대월지국(大月支國)이라고 불렀고, 그 수도가 바그다드였던 사실과 관계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여기서는 이 마한과 달가리 나라가 모두 여신전으로 해석된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기로 하자. 이렇게 보면 이 기록은 여신전인 [ 맏터]를 높여 [맏한] 또는 [모한(母韓)]이라는 왕호를 부여했다는 의미가 된다.


다음으로 "단군왕검이 치두남을 번한으로 절하여 모셨다"는 구절, 즉 배위(拜爲)라는 말에 주목하자. [拜]는 절하여 모신다는 뜻이다. 이는 단군왕검이 치우의 후손을 천황으로 모셨다는 뜻으로 해석해야 옳다. 여기서 천황이란 [씨내리]이다. 그리고 이 뜻은 [번한(番韓)]의 뜻과 일치한다. 그리고 앞에서 쫒겨난 황제인 치우가 바로 환인의 직계혈통이었다는 사실도 이 기사의 내용과 맞아 떨어진다.
그러나 그 결정적인 증거는 "府를 험독(險瀆)에 세웠다"는 구절이다. [險瀆]은 지명이 아니라 [신전 내부의 물길]이라는 뜻이다. [險]은 [언덕( )]과 [피라밋(僉)]을 합한 글자이다. [瀆]은 [물이 통하는 곳] 즉 [물길]인데, 우리 역사에 [물길(勿吉)] . [말갈(靺鞨)]로 나타나는 국호가 바로 이것이기도 하다.


이 [물길]의 고대어가 [마라가라]이고, 이것은 진한(辰韓)의 고대어 [마라가라]와 같다. 따라서 진한이나 신전 내부의 여신전과 통하는 곳에 번한의 처소를 장만한 것이다.


이렇게 해석하면 고조선의 삼한관경은 환인으로부터 시작된 동이족의 혈통을 세상에 퍼뜨리기 위한 풍류의 제도적 정착을 의미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이로써 고조선은 상고시대 최고의 명분이라고 할 수 있는 환국의 정통성을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하겠다.
이 때에 임명된 마한과 번한의 두 왕에게 내린 봉토(封土)를 내려 다스리게 한 것을 삼한의 수평적 구주분장이라고 글쓴이가 수평적 구주 분장이라고 말한 것이다. 진한은

 

② 삼한과 진국(辰國)
마지막으로 살펴볼 삼한의 분역(分域), 즉 삼조선의 성립은 [마한세가] 하편에 나온다.

단군 색불루가 아버지가 이루어 놓은 힘을 계승하여 대병(大兵)을 장악하니, 진한은 스스로 무너졌고 나머지 두 한도 이길수 없어 패해버렸다. 전제(前帝)는 사람을 시켜 옥책(玉冊)과 국보를 전하여 제위(帝位)를 물려 주었다 ...... 병신 원년 정월, 마침내 녹산(鹿山)에서 즉위하니 이곳을 백악산 아사달이라고 한다 ...... 5월, 제도를 고쳐 삼한을 삼조선이라 하다. 조선이란 관경을 말한다. 진조선(眞朝鮮)은 천왕이 몸소 다스리고, 땅은 곧 옛날의 진한대로 하고, 정치는 천왕이 몸소 다스리도록 하니, 삼한이 모두 하나같이 명령에 복종하였다. 여원흥에게 명하여 마한이 되어 막조선(莫朝鮮)을 통치케하고, 서우여로 하여금 번한을 삼아 번조선을 통치케 하였다. 이를 통털어 이름하여 단군의 관경이라 한다. 이것이 곧 진국(辰國)으로 역사에서 단군조선이라 함은 이것이다. <태백일사 . 삼한관경본기>
.
[마한세가] 상편에서는 단군 색불루가 즉위하기까지의 과정을 위 인용문과 비슷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해에 고등이 모반을 일으켜 개성에 웅거하면서 천왕에게 항거했다. 마한이 드디어 군대를 일으켜 이를 토벌코자하여 홍석령의 경계지점에 이르렀을 때, 천왕께서 고등(高登)을 용서하고 우현왕으로 삼았다는 소문을 듣고 곧 토벌을 멈추었다. 을미년에 천왕은 해성에서 욕살 서우여(徐于餘)에게 선양하고자 하니, 마한은 이의 불가함을 주장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우현왕의 아들 색불루가 즉위하니, 마한은 군사를 정돈하여 몸소 이끌고 나아가 해성에서 싸웠는데, 싸움에 지고는 돌아오지 못하였다. <태백일사 . 삼한관경본기>

 

또 <단군세기>에는 이 시기에 은나라와 귀방(鬼方)의 싸움을 기록하고, "개사원(蓋斯原)의 욕살 고등이 몰래 군사를 이끌고 귀방을 습격하여 멸망시켰으며, 많은 군대를 손에 넣고 서북의 땅을 공격하여 차지하게 되니 그 세력이 매우 강하였다"라고 하며, 또 "이해에 백이(伯夷)와 숙제(宿題)도 역시 고죽군(孤竹君)의 자손들로서 나라를 버리고, 동해의 해변가에 와서 살며 밭갈기에 힘쓰며 홀로 살아갔다"라고 하여, 이 시기가 은나라와 주나라의 교체기임을 나타내고 있다.
이 시기(B. C. 1,200년경)의 지중해 연안으로 눈길을 돌려보면, 희랍인 이주와 그를 뒤이은 도리아인 이주, 이집트의 19왕조와 20왕조의 교체, 앗시리아 왕조의 흥성, 바빌로니아의 강성 등 굵직한 사건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즉 지중해에서도 극심한 혼란이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 시기에 동이의 신전도 이 분쟁에 휩쓸려 신전의 이동과 그에따른 동이의 민족이동이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런 사정이 반영된 것이 그리이스 신화의 하늘의 변란일 것이다.
그러나 이 혼란이 수습되었을 때, 동이들은 더 강력한 지배권을 확립하였거나 아니면 각기 독자적인 세력권을 형성하고 상호불간섭 주의를 채택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 체제는 고조선이 멸망하고 풍류에 반발하여 새로운 신앙체계가 성립하는 서력기원 전후까지 이어졌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삼한관경을 동북아시아 일대에서 있었던 일로 생각하거나, 한반도 주변의 역사로 생각하는 입장에서는 결코 삼한의 의미를 밝혀내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때의 조선을 <태백일사>가 [진국(辰國)]으로 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임승국 선생은 [진국]에 대한 주해에서 "진 . 번 . 마의 삼한을 통털어 진국이라 한다는 것이다. 왜일까? 상왕, 곧 천자를 진한이라 하니 진국이라는 말도 어울린다"라고 하고 있으나, 이는 조선을 기껏해야 동북아시아 일대에 걸쳐있던 지역패주 정도로 생각한 때문에 나온 해석이다.
[辰國]의 [辰]은 [미르], 곧 [龍(용)]이다. 이 [용]은 <성서> [요한계시록]에서 사탄의 상징으로 쓰인 이후 중세의 기독교 천년왕국 동안 기사들의 단골 사냥감이었던 무당들이요, 십자군 전쟁의 정복대상이었던 이교도(異敎徒)들이었던 것이다. 동시에 중국 제실(帝室)이 한 번도 포기하지 않은 황제의 상징인 바로 그 [용]이다.


비록 대접은 다르게 받아 왔지만 동서양 전체를 뒤덮고 있는 것이 [용]이요, 그런만큼 그 [용의 나라]는 전 세계를 다스리던 세계국가일 수밖에 없다. <태백일사>의 "이것이 곧 진국(辰國)으로 역사에서 단군조선이라 함은 이것이다"라는 짧은 한귀절에 담긴 뜻은 이렇게 엄청난 것이다.
그러면 삼한이 [진국]이라는 기록이 <태백일사>에만 나오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후한서>에도 똑같이 기록되어 있는 내용이다.

韓有三種하니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韓이니 皆古之辰國也. 辰韓吊하니 有十二國이다. 北與穢貊接하고, 弁韓在其南하니 亦十二國이다. 南與倭接하고 馬韓在西하니 有五十四國이다. 南與倭接하고 北與樂浪接이다.
([한]에는 세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마한이요, 둘째는 진한이요, 셋째는 변한이니 모두가 옛 진국이다. 진한은 동쪽에 있어 열두나라이며, 북으로 예맥을 접하고 있다. 변한은 그 남쪽에 있으며, 역시 열두나라로서 남쪽으로 왜와 접하고 있다. 마한은 서쪽에 있으니 쉬흔네 나라가 있으며, 남쪽으로는 왜를 접하고 북쪽으로는 낙랑과 접하고 있다. )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기록도 참고해 보자.

韓在帶方之南, 東西以海爲限, 南與倭接, 方可四千里. 有三種, 一曰馬韓, 二曰 辰韓, 三曰 弁韓. 辰韓者, 古之辰國也.
(한은 대방의 남쪽에 있어서 동쪽과 서쪽이 바다에 닿으며, 남쪽은 왜와 접해있다. 사방 4천리에 이른다. 종류가 셌이니 첫째가 마한이요 둘째는 진한이며 셋째는 변한이다. 진한은 옛 진국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사방 4천리라고 한 부분이다. <동이전>의 앞 부분에서 한(韓)의 북쪽에 예(濊)가 있고 그 북쪽에 고구려가 있는데 사방 2천리이며, 그 북쪽에 부여가 있는데 사방 2천리에 이른다고 기록되어 있다. 예의 크기는 나와있지 않지만 고구려가 3만호(戶), 예맥이 2만호(戶)라는 내용을 볼 때, 예의 크기도 고구려 못지 않았을 것이다. 한반도 어디에 이런 넓은 땅이 있었던 것일까?
뿐만아니라 고구려에 대한 기사에서 "高句麗在遼東之東千里, 南與朝鮮.濊貊, 東與沃沮, 北與夫餘接. 都於丸都之下, 方可二千里(고구려는 요동 동쪽 천리에 있는데, 남쪽으로 조선과 예맥을 접하고, 동쪽으로 옥저, 북으로 부여와 접한다. 환도 아래에 도읍하고 사방 2천리이다)라고 기록하므로써, 그 당시에 조선이라는 나라도 있었음을 명기하고 있다.


믿어지지 않는다면 다음 기록도 보자.

濊南與辰韓, 北與高句麗·沃沮接, 東窮大海, 今朝鮮之東皆其地也. 戶二萬...
(예는 남쪽으로 진한과 접하고 북으로 고구려와 옥저를 접하며, 동으로는 큰 바다에 이른다. 지금 조선의 동쪽은 모두 그 땅이다. 호수는 2만이며...)

고조선이 망한 후에 그 자리에 부여, 고구려, 예맥, 삼한 등의 나라가 섰다고 배운 사람들이, 저 유명한 조조의 위(魏), 손권의 오(吳), 유비의 촉(蜀)이 다투던 삼국시대가 끝난 진(晉)나라 때에 "지금의 조선 땅"이라고 부를 수 있는 조선국이 있었다는 이 기록을 대하면 어떤 생각이 들까? 고대사의 왜곡은 이렇게 심각하다.
이 책에 모두 소개하지는 못했지만, 글쓴이가 읽어 본 자료들만 가지고도 서기 300년 무렵에 조선과 그 제후국들(고구려, 신라, 백제, 왜, 삼한 등)의 강역은 유라시아 대륙 전체를 망라한다. 중국을 통일한 왕조라고 일컬어지는 진, 한, 수, 당, 위, 진, 남북조 등이 모두 조선에 조공했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기록도 무수히 많다.
따라서 진국, 다시말해 고조선이 전세계를 지배한 초강대국이었다는 말을 무시할 것이 아니라 증명해야할 과제라고 생각하는 것이 고대사 연구의 올바른 자세라고 생각된다.

 

3) 삼한의 직무분담
조선을 통일체제로 다스리던 시기나, 셋으로 나누어 다스리던 시기 모두에 삼한은 고유의 직능이 있었다. 조선이 셋으로 나뉘었던 [진국]의 시기에는 세 조선에 각기 삼한이 있었으므로 모두 합치면 구한이 있어, 삼한의 고유한 직능을 유지했을 것이다. 그 직능은 이미 여러차례에 걸쳐 설명되었던 내용이지만, 여기서 종합정리하는 뜻으로 삼한의 상호관계를 해설하기로 한다.


조선의 삼한관경의 기본모델은 삼계구정(三界九井)이다. 그리고 이것이 곧 풍류의 씨뿌리기이다. 즉, 번한왕은 천황이 되어 씨내리가 되고, 마한왕은 지황이 되어 씨받이를 선발하고 교육시키며, 진한왕은 인황이 되어 조선의 영토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한다. 이 인황의 지배시대를 <태백일사>가 그 이전의 천황의 지배시대와 구별하기 위해 특별히 [진국]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이 중에서 진한왕과 번한왕은 역사기록에서 자주 혼동이 된다. 혈통을 관장하는 사람과 봉토권을 행사하는 사람을 구별하기 어려웠던 때문이다. 그리고 단군왕검이 번한왕을 [배위(拜爲)]했다는 기록과 같이 실질적으로는 진한왕이 전권을 장악했지만, 형식적으로는 진한왕이 번한왕을 받들어 모셨기 때문에 최고 지배자를 혼동하게 된 것 같다.


그러나 진한왕은 봉토와 지배권을 모두 장악하고, 번한왕을 천황으로 삼아 씨내리의 역할을 담당하도록 신전의 상층부에 유폐시켰던 것이니, 변한(弁韓)으로 쓸때의 [弁]이 피라밋 위의 높은 방의 모습으로 보여지는 것은 이런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진한왕을 대부분의 역사서에서 [천왕(天王)]으로 기록하는 사정은 인황에 대한 관념의 변천에 따른 것이다. 조선에서는 인황을 최고신으로 모셔서 진한왕이 인황이 되고, 천황이 번한왕이 되고, 지황은 마한왕이 되었다.
그런데 후대에[人(인)]이라는 글자가 대중화 되면서, 역사가들이 인황이 최고신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최고신은 천황이라고만 생각하여 혼동하게 된 것으로 보여진다.


인황의 지위가 삼황중에서 으뜸이었던 사정은, 춘추전국시대 이후로 중국의 제왕들이 [인자]를 자칭하지 못하고 [천자]를 자칭했음을 보더라도 알수 있다. [인자]는 오로지 신전에 들어 동이의 도법을 이어받은 사람만이 쓸 수 있었던 칭호이며, 동이의 심법(心法)을 이어받지 못하고 씨만 받은 사람은 천황의 아들이므로 천자에 만족해야 했다. 여기서 <설문>이 [夷]를 [人]이라 하고, [人]을 [仁]이라 했던 뜻이 밝혀지는 것이다.


이 내용들은 삼한의 이름들을 검토해 보면 보다 확실해진다. 먼저 진한은 [용한(龍韓)], [신한(神韓)], [진한(眞韓)]이다. 먼저 진한이 [용한]이 되는 이유와 그 의미에 대해서는 이미 설명되었다. [용한]의 능력을 알 수 있는 우리말은 그대로 '용한'이다. 용한 재주, 용한 무당, 용한 의원 등은 진한의 직능과 능력을 보여주는 말들이다.


진한이 신한(神韓)이 되는 것은 용이 번개를 가진 것과 관련된다. 이 번개를 박용숙 선생은 폭약술이라고 말한다. 아무튼 제우스, 옥황상제 등 주신(主神)만이 쓸수 있는 번개를 보여주는 왕이 [神]이었으며, 번개는 용이 일으킨다는 풍운조화에서 나오므로 용한이 신한이 되고, 또 이 용이 본래 상계의 주신(主神)인 태양신이므로 신한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辰]은 [上] . [乙] . [匕(化)] . [한( )]을 합친 글자이다. [上乙]은 [태을]로서 태양의 별칭이다. [化]는 사람을 바꾸고 지어내는 것이다. [ ]은 [韓]의 소리인 동시에 언덕에 굴을 파고 지은 신전이다. 이 신전이 있던 곳이 참된(眞) 한(韓)이니 진한(眞韓)이 된다. 진한은 이정도로 만족하고, 다음은 마한을 살펴보자.


마한은 [모한(母韓 또는 牟韓)], [무한(巫韓 또는 无韓)]이다. [母韓]은 [어머니 태양]이니 곧 달님이 되어 지황이 된다. [牟韓]은 [牟]가 [소가 우는 소리]이니 [엄마]이다. 소(牛)는 열 십자의 상징이니 [씹]이요, 이는 음양교합이다. 이런 해석은 지황의 직능과도 일치한다.
또 소는 신농씨의 상징으로서 신농씨는 우경(牛耕)의 창시자요, 농경을 위해서는 울타리로 둘러싼 영토가 필요하다. 모(牟)의 [모(△)]는 [둥글게 에워싸서 자기 영토로 하다]는 뜻이니, 이런 역사적 사실도 함축하고 있다.


무한(巫韓)은 [巫]가 [구멍(工) 속에서 두사람(人人)이 만나는 모습]이니, 부부관계이다. 巫韓은 달리 무당(巫堂)이라고도 불리는데, 이 낱말은 [ 땅], [ 황]이 되어 [마한]과 연결된다. 지황이 마한(馬韓)이 됨은 [마땅(馬地)]한 일이다.
무한(无韓)은 태양신(天)이 땅밑으로 내려온 모습(无)을 상징한다. 태양신이 땅밑으로 내려갔으니 어두워지고, 밤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니 없을 무(無)의 뜻이 된다. 이 밤의 지배자는 만찬(晩餐)과 사회(社會)의 신인 지황인 것이다. 사회(社會)가 여신(지신)의 신전에서 행해진 난교(亂交)의 자리임은 여러 학자들이 이미 밝힌 바이다.


셋째로 번한은 [변한(弁韓)], [뿔한(角韓)], [별한(星韓)], [밝한(明韓)], [분봉한(分封韓)]이다. 변(弁)은 고깔(△)을 두손으로 받드는 모습을 나타낸 글자이다. 고깔은 삼각형이 상징하는 모든 진리의 표상이다. 그래서 변한은 [뿔한(角韓)]이 된다. 이 뿔한, 즉 각한(角韓)이 신라의 최고 관직인 [각간(角干)]이 된다는 사실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번한왕이 환인의 직계혈통에서 뽑혔다는 사실에서 알수 있듯이 동이의 정통은 이 뿔한에서 찾아지므로, 우리말과 역사에서도 이 뿔한의 변형이 가장 많다. 그 첫째 의미가 [밝한], 또는 [붉한]이다.


일월의 [밝음]과 불의 [붉음]이 이 말의 속뜻이며, 뿔처럼 생긴 신전에서 햇님(日)과 달님이 살고 있음을 나타낸다. 뿔난 . 불난 . 바른(발??>바 >바른) . 부른(불??>부 >부른) 등은 직접 연결가능한 말들이다. 그러므로 [뿔한]은[밝]과 [붉]을 모두 나타낼 수 있는 [ 한]으로 바꿀수 있다.


이 [ 한]에서 별님이 탄생하는 것이니, [ 한]은 자연스럽게 [별한(星韓)]으로 변할수 있다. 이 별님들이 [ 한](밝은) 세상을 넓혀가는 것이 [별한]으로서의 번한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글쓴이가 [발칸반도]와 [발해]를 [서변한]과 [동변한]으로 설정한 것이다.
이 별님들이 개척하는 신천지(神天地, 新天地)가 봉토(封土)이다. [封]은 [북돋우다]라는 뜻이므로, 이 또한 [박달터]로 옮겨지는 말이다. [封土]는 흙을 수북이 쌓고 그 위에 두그루 나무를 심은 형상이니, 본래의 신단수인 고분을 만들 수 없는 곳에 임시로 만들었던 간이 신전이라고 할수 있다. 이것이 바로 서낭당(성황당)의 원형인 것이다.

이제 삼한의 직무분담은 아쉬운대로 밝힌 셈이고, 이제부터는 삼왕의 별칭인 무당과 백정을 살펴보기로 하자.

 

5. 무당과 백정
1) 무당의 정체
무당은 인류문명의 주역이다. 무당의 기원과, 영욕이 교차한 역사적 위상들과는 상관없이, 문명은 무당에 의해 개창되었고, 전파되었으며, 지금도 유지되고 있다.


물론 이는 무당의 뜻을 본래의 의미로 사용했을 때 그렇다는 말이고, 오늘날 사용되는 뜻인 [직업적 영능력자]라는 의미가 될 때에는 무당의 공헌도가 많이 축소된다. 그러나 오늘날의 무당을 기준으로 보더라도, 최근세의 300년 정도의 기간동안 과학자들이 이룩한 물질문명의 건설만 제외한다면 무당의 지도적 위상은 달라지지 않는다.
무당의 세세한 학술적 정의는 무당의 위상을 격하시켜 무당을 모독하기 위한 목적 이외에는 쓸모가 없다. 그만큼 무당의 위상은 크고 높은 것이다. 그렇다고하여 무당의 뜻을 젖혀두고 무당을 말할 수도 없는 일인만큼,역사적. 어원적 측면에서 무당의 뜻을 찾아내어 개념을 정립하고자 한다.


지금까지 무당의 실체를 가장 정확히 밝힌 사람은 박용숙 선생이다. 선생의 연구는 무속에 대해 막연히 [국조삼신과 연결되는 원시적 신앙의 잔재]라고 생각해온 기존의 선입관을 부정하고, 무당이 고대에 세계를 지배하던 세계국가의 주역들이었음을 밝히므로서, 세계사는 동이를 중심으로 새로 써야한다는 사실을 밝혀내었다.


비록 아직은 이 주장이 일부 학자들에 의해서만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지만, 진실은 증명되는데 긴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 법이니, 고대 유적들의 발굴이 진행됨에 따라 급속히 인정을 받게될 것이다. 선생의 연구는 해당부분에서 소개하기로 하고, 우선 글쓴이가 지금 쓰이는 우리말과 한자사전의 뜻풀이를 토대로 재구성한 무당이란 말의 유래를 소개해 보자.


먼저 무당은 [무]와 [당]의 합성어로도 생각할 수도 있고, [묻]과 [앙]의 합성어로 생각할 수도 있다. 여기서 두 번째 가능성을 선택하기로 한다. 그 이유는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을 참고할 때, [묻]이 풍류와 더 가까운 말이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문제되는 것은 [묻앙]의 원형이 어떤 것인가 하는 점이다. 우리말의 모음(母音)은 [아래 아(.)]를 [알( )]로삼아 분화되었다고 가정하고, [  ]을 기본형으로 보기로 한다. 그리고 이 가정은 어학적인 확인은 거치지 않았지만, 이어지는 설명에서 보듯이 우리문화를 종합적으로 해명할 수 있다는 점에서 볼 때, 틀림이 없으리라고 생각된다.
이제 [ ]과 [ ]을 따로 떼어 지금 쓰이는 말들과 연결시켜 보고, 둘을 합쳐서 만들어질 수 있는 말들을 무당과 관계되는 것을 중심으로 찾아 보자.

 

① [ ]은
첫째로 [맏이(佰)]의 뜻이 있다. 첫째요 으뜸이다.
둘째로 [맞이(迎)]의 뜻이 있다. 맞남(對; 만남)과 받아들임(容納)의 뜻이다.
셋째로 [머리(頭)]의 뜻이 있다. 마르다(乾)도 이 뜻과 관계되고, 눈(目)의 어원인 [맏]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넷째로 [못(池 . 澤)]의 뜻이다. 물(水), 샘(泉), 우물(井) 등이 이뜻과 관계가 있다.
다섯째 [말뚝]이다. [막대]의 뜻이다.
여섯째 [뭍(陸)]이다.
일곱째 [물음(問)]이다. [말(言)]도 이와 관계된다.
여덟째 [무리(衆)]이다. 고기 한뭇은 열 마리이므로, 열(十; 모두)을 나타내기도 한다.
아홉째 [무덤(墳)]이다. 여기서 [묻음(藏)]이 나온다.
열째 [마디(節)]이다. 매듭이며, 마지막의 뜻과 관계된다.
열한번째 [맛(味)], [멋]이다.
열두째 [못(釘)]이다. 창(矛)과 모(角)도 이와 관련된다.
열세째 [말(斗)]이다. 척도의 뜻이다.
열네째 [산(山)]이다. 그 어근은 [맏]이며, [말] . [마루] . [뫼] 등의 변형이 있다.
더 있을지도 모르지만 이정도가 우선 생각난다. 이 모든 뜻이 [ ]에서 나왔다고 생각하기 힘들겠지만, 여기에 소개된 말들이 모두 동이의 신전인 [ ]과 관련된 말이다. 다음은 [ ]의 뜻을 살펴보자.

 

② [ ]
첫째로 [왕(王)]의 뜻이다.
둘째로 [구멍(工 . 孔 . 空)]의 뜻이다. [웅덩이]의 경우이다.
셋째 [형(兄)]의 뜻이다. 지금도 경상도에서는 형을 [엉아]라고 부르기도 한다.
넷째 [세다(强)]의 뜻이 있다. [옹이]나 [옹녀] 등으로 쓰인다.
다섯째 [가운데(央)]이다. [앙심을 품다]의 경우이다.
여섯째 [늙은이(翁)]의 뜻도 된다.
이 또한 동이의 신전과 관계되는 것들을 간단히 뽑은 것이다. '한'과 관계되는 말들은 포함시키지 않은 것인데도 이정도의 뜻이 나온다. 이제 둘을 합해서 무당의 뜻을 간추려 보도록 하자.

 

③ [  ](무당)은
첫째, [맏왕(伯王)]이다. [무당]의 중심의미는 이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 [맏왕]의 거처, 직능, 표상등이 신전을 무대로 덧붙여지고, 그러면서 같은 뜻의 다른 말이 생겨 났을 것이다. 이 맏왕은 [伯]을 취하여  한(태양신)과 연결된다.
머리왕(마립간)도 이 계열에 속한다. 이 [머리왕]은 [산왕(山王)]이요, [산왕]은 [산신(山神)]이고, [산신]은 순우리말을 취해 [닥 ]이 되는데, 이 [닥 ]은 우리 무속(巫俗)의 신들 중에서 아직도 그 유래가 불분명하다는 [대감신]의 정체이다.


둘째, [뭇왕(衆王)]이다. [무리의 왕]인 동시에 시왕(十王)이요, 시왕에서 일왕(日王)의 뜻이 나온다. [十]은 태양신의 상징부호요, 십간(十干)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셋째, [못왕(澤王)]이다. [샘(泉)왕]이 되어 삼한의 한 뜻이 되며, 물왕(水王), 우물왕(井王)도 되며, 용왕(龍王)으로 정착한다. 해왕(海王), 하백(河伯), 수신(水神)등도 모두 못(澤)을 통하여 무당과 맥이 통한다. 복희의 탄생전설인 [뇌택(雷澤)의 거인]도 이 용왕의 다른 표현이다. [구멍]과 [못(釘)]의 뜻이 모두 여기에 관계된다.


넷째, [뭍왕(陸王)]이다. [뭍]을 [육(陸)]으로 쓴 것은 [陸]이 언덕과 같이 지붕이 높은 건물을 나타낸 글자로서 신전의 뜻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뭍왕은 곧 지황이요, 토왕(土王)이다.
사시토왕(四時土王)이라는 말이 있는데, 시(時)가 태양신의 신전을 나타내는 말임을 알면, 이 말이 곧 사해용왕(四海龍王)과 같은 말임을 알게된다. [寺]는 흙(土)을 [ 운 것]이다. 마디(寸)는 [ ]의 뜻을 나타내며, [모아 두다]의 뜻이다.
이 뜻을 증명하는 글자가 [封(봉)]이다. 따라서 [封]의 생략형이 [寺]이며, [時]는 그 신전에서 태양신을 모시고 때(時)를 관측하고 알려준 데서 [때]를 뜻하게 되었다. 그 풍습이 지금도 남아 성당, 교회, 사찰등에서는 정해진 시간에 종을 울리는 것이다.


다섯째, [말왕(斗王)]이다. 북두칠성을 통해 [곰왕(熊王)]이 되어 칠성신이 된다. [뭍왕]과 관련되며, 환웅(웅녀)과 같은 뜻이 되어, 단군신화와 연결된다.


여섯째, [묻왕(藏王)]이다. 이때의 [왕]은 조상신으로 이해된다. 신전의 지하실에 선왕(先王)의 시체를 모셔놓던 풍습에서 유래한 말이 [묻왕]이요, 뒤에 [무덤]이 된다. 고분과 신전이 같은 장소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일곱째, [말뚝왕]이 되어 [솟터의 왕]인 천군이 된다. 솟터에 큰 나무를 세웠다고 하였는데, 솟터 자체가 큰나무로 상징된 신전이었다. [  ]의 모든 뜻은 이 뜻을 통해 하나로 묶어진다. 이 뜻은 [ 땅(伯地)]이 되어 지금도 올바르다는 뜻의 [마땅]으로 쓰인다.


여덟째, [묻왕(問王)]이 된다.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나 송사가 생기면, 모든 지혜의 근원인 왕에게 가서 물었다. 송사(訟事)는 오늘날 국가기관인 사법부로 정착되었으나,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는 지금도 무당에게 가서 묻는다.
무당은 사람이 해결 못하는 일을 해결해 주는 신이었고, 새끼무당들은 자기가 해결 못하는 일을 신에게 물어서 사람에게 가르쳤다. 무당의 이 역할은 아직도 그대로 존속되고 있다. 무당에게 가서 물을 때에는 임금을 대하는 마음으로 물을 일이다. 이런 자세가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는 도덕률로 정착한 것이 종교인 것이다.


아홉째, [마당(場)]의 뜻이다. 우리 문화에서 마당이 차지하는 비중과 그 의미는 지대하다. 마당은 일터인 동시에 놀이터다. 언제나 비어 있어서 무엇이나 받아들일 수 있고, 그래서 사람들이 자연스레 어울릴 수 있다.
마당놀이의 기원은 이 빈터에 세계 각지의 손님들이 모여서 화랑을 선발하던 것이라 한다. [빈]이 [손님(賓)]과 소리가 같고, [손님]이 [산(山)님], [선(仙 . 選)님], [스님(중; 衆)]과 비슷한 사실은 연구할만한 일이다.


이제 무당과 삼한은 같은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무당(삼왕)의 영토가 오늘날의 마당(場)이니, 전자기장 . 통일장이 모두 무당의 영토가 되는 것이요, 무당의 집이 신당(명당)이니, 예배당이나 교회당{종교(敎)의 모임(會)을 갖는 집(堂)}이 모두 무당의 집이다.
무당의 무리가 뭇 당(巫ㅅ黨)이 되는 것이니, 오늘날의 모든 정당(政黨)도 무당의 무리이다. 결국 인류문화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무당문화인 것이다. 이제 머리도 식힐겸, 우리 고대사에 몇 남아있지 않은 로맨스인 [서동요]를 통해 지금까지 설명한 내용들을 확인해 보자.

 

2) 서동과 무당
<삼국유사>에는 백제 30대 무왕(武王)과 신라의 선화공주 사이에 얽힌 낭만적인 사랑 이야기가 전해진다. 국문학사에서 귀중한 신라향가의 하나인 [서동요(薯童謠)]는, 무왕이 꾀를 써서 선화공주에게 [맛동]과 같이잤다(씹했다)는 누명을 씌운 노래로 알려져 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맛둥]이야말로 그 아버지 무왕과 함께, 삼국통일 당시까지 남자도 [무당]으로 불리웠고 또 무당이 바로 왕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증인이다. <삼국유사>의 해당 기록을 살펴보자.

 

제 30대 무왕의 이름은 장(璋)이다. 어머니가 홀로되어 집을 서울 남쪽 못가에 짓고 있었는데, 못에 있는 용과 통하여 그를 낳았다(池龍交通而生). 어릴때의 이름은 서동(薯童)인데, 도량이 한없이 넓었다. 항상 마(薯)를 캐다 팔아서 생업을 삼았으므로 사람들이 서동이라 한 것이다.
신라 진평왕의 셋째공주 선화가 아름답기 짝이 없다는 말을 듣고, 머리를 깎고 서울로 와서 동네 여러 아이들에게 마를 주니 여러 아이들이 가까이 따랐다. 이에 노래를 지어 여러 아이들을 꾀어 부르게 하였다고 한다.

선화 공주니믄( 선화공주님은 )
 그 지 얼어두고( 남모르게 사랑하면서 )
맛둥방  ( 맛둥(서동) 서방을 )
바  몰 안고 가다. ( 밤에 몰래 안고 잔다 )
(양주동 역) (현대식 해석)
(원문 : 善化公主主隱他密只嫁良置古薯童房乙夜矣卯乙包遺去如)

 

동요가 온 장안에 퍼져 궁중에까지 알려지니, 백관들이 극력 간하여 공주를 먼곳에 귀양보내게 되었다. 공주가 귀양가는 도중에 서동이 나와 절을 하고 모시고 가겠다 하니, 공주는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했지만, 어쩐지 미덥고 즐거웠다. 그래서 따라가다가 잠통하게 되었다. 그런 뒤에 서동의 이름을 알고서는 동요가 맞는다 하고 함께 백제로 가서, 어머니가 준 금을 내어놓으며 이것으로 생활을 해나가자 하였다.


서동이 크게 웃으며 "이것이 무엇이오? "하니, 공주는 "황금인데 백년동안은 부자로 살수 있을 것이오"하였다. 서동은 그 말을 듣고 "내가 어려서 마를 캐던 곳에는 이런 것이 진흙처럼 쌓여 있었소(吾自小掘薯之地 委積如泥土)"하니, 공주가 듣고 크게 놀라며 "이것은 천하의 보배이니, 당신이 금이 있는 곳을 안다면 이 보배를 우리 부모의 대궐로 보내는 것이 어떻겠소?" 하였다. 서동이 "좋소"하고 금을 모으니 구릉처럼 쌓였다.


용화산 사자사 지명 법사의 처소에 가서 금을 보낼 계책을 물으니 법사가 "내가 신력으로 보내 줄 것이니 금을 가져오라"하여, 공주가 편지를 써서 금과 함께 법사에게 가져다 주니, 법사가 신통력으로 하룻밤 사이에 신라 궁중으로 실어다 놓았다. 진평왕이 그 신통한 변화를 기이하게 여겨(異其神變) 더욱 존경하고, 항상 서신으로 안부를 물었고, 서동은 이로 인해 인심을 얻어 왕위에 올랐다.
하루는 무왕이 부인과 함께 사자사에 가려고 용화산 밑 큰 못가(大池邊)에 이르니 미륵삼존이 못에서 나타나는지라(彌勒三尊 出現池中), 수레를 멈추고 경의를 표하였다. (이하생략)

 

여기서 우리는 무당이란 이름이 왕의 계보에서 세습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먼저 무왕의 아버지인 백제 29대 법왕(法王)이 여기서는 지룡(池龍)으로 나온다. 이 [池龍]이 [못왕]으로서, 앞에서 설명된 무당의 이름 중 하나이다.
[薯童(서동)]은 양주동 선생의 해석대로 [맛둥]으로 번역된다. 薯는 [참마], [산약(山藥)]이므로 [마]가 된다. [마]는 [ ]이 어원일 것이다. 동(童)은 [아이]의 뜻인데, [늦동이 . 귀염둥이 . 막동이]등에서 보듯이 [둥이]와 [동이] 모두로 쓰인다. 이는 그 원형이 [ 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서동]은 [  ]이 된다. 이는 앞에서 본대로 [무당]이다.


이 기사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은 "큰 못가에 이르니, 미륵삼존이 못에서 나타났다"는 구절이다. [미륵(彌勒)]을 중국음으로 읽으면 [미르]가 된다. 이 [미르]는 용(龍)이다. [辰]을 [미르 진]으로 새기는데, 용이 곧 [미르]라는 뜻이다. 이 미륵삼존이 못속에 나타났으니, 틀림없이 용왕이다.
앞에서 단군이 용왕임을 이미 밝혔으니, 여기서 말하려는 뜻은 더 파고들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미륵삼존이 바로 국조삼신인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 민족사의 크나큰 비극을 발견하게 된다. 같은 동이족이면서 은나라의 유민들이 주나라를 용납하지 못했던 바로 그 이유를, 백제가 끝까지 신라를 용납하지 못했던 역사에서 보는 것이다.


백제의 유적에는 미륵사찰(彌勒寺刹)만 있고, 석가사찰(釋迦寺刹)은 거의 없다. 언제 만들었는지도 모르는 빈 들판에 집도 절도 없이 서있는 대부분의 석불들이 대부분 미륵상이다. 이는 백제가 삼신의 정통을 자처하였음을 보여주며, 그랬기에 석가불교로 개종한 신라인의 지배를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는 주나라가 건국하면서 홍범구주라는 전통적인 삼한관경제도를 멋대로 뜯어고쳤기 때문에, 은나라 유민들이 주나라의 지배를 거부하고 심지어 백이 . 숙제는 수양산에서 굶어죽기까지 했던 것과도 같은 맥락이다.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는 은나라의 벼슬아치가 아니라, 주나라에 멸망하기 이전의 삼신산을 다스리던 천황과 지황이었으니, 그것은 이름이 증명한다. [伯夷]는 [동이의 우두머리]라는 뜻이요, [叔齊]는 [齊]의 본글자가 그림과 같이 받들어 모신 세사람을 그린 것이고, 다시 막내의 뜻을 나타내는 叔이 붙었으니 막내의 뜻이된다.


은(殷)이 멸망하고 주(周)가 들어서던 시기에 색불루에 의해 스스로 무너졌다는 조선의 삼한왕이 바로 이 백이와 숙제의 정체인 것이다. 가운데 왕이 없는 것은 당연하다. 영토권을 관장하는 마한왕은 색불루의 대권찬탈을 용납하지 못해 싸우러 나갔다가 돌아오지 못했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주의 문왕이 했던 짓이 아사달의 해체이다. <주역>을 문왕이 유리에서 귀양살이 할 때 해석했다고 전해지는데, <주역 . 서괘전>의 정(井)괘를 보면 "우물의 법도는 고치지 않을 수 없는지라 혁(革)괘로 받는다(井道 不可不革故 受之而革)"는 구절이 있다.
이것은 기존의 신전제도를 부정하고 새로운 정치제도를 만들었다는 뜻이다. 유교인들이 숭상해마지않는 문왕의 정체는, 동이의 정통을 말살하고 제 가족을 중심으로 제도를 개편한, 한겨레의 대역죄인인 것이다.


물론 문왕이 이런 짓을 했던 데에는 이유가 있다. 동이의 제도가 꼬왔던 것이다. 왜 동이의 제도가 아니꼬왔는지는 처용가를 통해 밝혀진다. 처용가에서 발견되는 두 개의 곁다리가 고대왕들의 첫날밤 신세였고, 그 곁다리 신세를 면하려는 몸부림, 제 아내를 몸서리하는 이신(異神)에 대한 분노가 그런 모반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자. 무왕의 이름이 [무당]임을 일연은 분명히 밝힌 셈이다. 백제에서는 무당이 왕권을 계승하고 있었음을, 무왕의 어머니가 용왕과 동침하여 무왕을 낳았던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같은 시기에 신라에서는 무당에 대한 탄압이 호칭에 대한 비속화와 무력정벌까지 동원하여 자행되었음을 <삼국유사>의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런 사정은 [천축(天竺)]의 용례와 [독룡(毒龍)]의 기사에서 찾아진다.

 

3) 천축과 독룡
신라인들은 진시황에게 멸망당한 주나라 왕실의 왕족들, <태백일사>의 기록에 의한다면 단군 색불루의 후손들이다. 그들은 진시황이 주나라 왕실을 정벌하고 그 왕실의 모체인 동이신전까지 멸망시키자, 강을따라 유랑하여 반도의 동쪽에 정착하게 된다.
그들이 가까운 곳을 두고 먼곳까지 가야했던 이유는, 당시 대륙의 동부와 반도의 서부는 은나라의 후예들이 점거하고 있으면서, 주나라의 유민들을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여진다.


이들이 반도의 동부에 정착할 때에는 복희의 후손임을 내세워 큰 마찰을 빚지 않아도 되었다. 박혁거세(朴赫居世)는 [伏羲居世(복희거세)]와 음도 비슷하고 뜻도 같다. 즉 지상에 강림한 태양신이라는 뜻이다.
<삼국유사>에서는 혁거세왕에 주를 달기를, "대개 방언이다. 혹은 弗矩內王(불구내왕)이라고도 하였는데, 세상을 밝게 다스린다는 말이다"라고 하였다. [弗矩內王(불구내왕)]은 지금 말로 [붉은 해 왕]을 향찰식으로 표기하여 [불근(ㅎ)애왕]이 된 셈이다.


그러나 신라가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 불교를 받아들이고 부터는 한반도의 기존종교인 풍류와 치열한 생존경쟁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그 상황을 기록한 것이 독룡과 승려의 전쟁이다. 즉 독룡으로 표현된 것이 무당들이었던 것이다.
신라의 무당은 주로 여자들이었음을 독룡(毒龍)이라는 이름에서 확인할 수 있다. [毒]이 주모(主母)로 분해되기 때문이다. 본래 글자는 풀(草)과 [행실이 난잡한 사람]을 합친 글자라고 하는데, 이 또한 풍류신전의 상징이다. 따라서 독룡은 풍류신전의 여자무당이라는 뜻이된다.
[毒]이 풍류신전인 또하나의 근거는 [毒]의 우리말 발음이 [독]이라는데 있다. [독]은 [돌(石)]이요 [돌]은 [땅]이면서 [산]이다. 고분을 돌로 산처럼 지었고, 그곳에 달님이 살았으며, 달님들은 독(항아리 . 단지)을 도구로 사용하여 신을 모셨다.


항아리는 [?阪?]이요, 단지는 [檀地]이다. 따라서 독룡은 단군의 영토를 관리하던 지주(地主) 또는 봉건영주로서의 무당들이다. 박용숙 선생도 [毒]은 [主母(주모)]의 회의문자로서, 서왕모(皇母)라고 말하고 있다.
<삼국유사> [제 6 권 신주(神呪)]에는 [惠通降龍(혜통이 용을 항복시키다)]이라는 기사가 나온다. 어떤 독룡이 불교승려인 혜통과 싸워서 패하고 도망가서 웅신(곰신)이 되어 심술을 부리다가, 결국 혜통의 설득에 감화된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 설화의 의미에 대해서는 서윤길 선생이, "밀교와 무속신앙이 만나는 과정에서 일어난 충돌"이라고 하여 제대로 해석해내고 있다.


아무튼 신라는 중국의 문물을 받아들여 자신들의 선조가 중국에 있는 동안 발전시킨 강력한 봉건제도를 정착시켰고, 그 대가로 고구려와 백제로부터 끊임없는 침공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나 불교를 통해 내부적 사상통일까지 달성한 신라는, 풍류의 반(半) 독립적인 신전간의 협조체제보다 전쟁에 유리하였고, 거기에 중국과의 수교에 유리했던 역사를 이용하여 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때부터 풍류는 급속히 쇠퇴의 길을 걷게된다. 진시황에 의해 중국의 중심부를 상실한 후 시작된 동이의 흔적에 대한 의도적인 평가절하는, 당태종에 의해 풍류의 중심국가인 고구려가 멸망하면서 가속화된다. 당나라 군사는 고구려와 백제의 서고를 모조리 불살랐고, 풍류의 부흥이 달가울 리가 없었던 신라도 이에 보조를 맞추었다.


이제 동이의 직계후손이라고 자타가 공인하는 한겨레에게 풍류의 유형적 유산이 거의 없는 이유가 밝혀진 셈이다. 불교와 집권세력과의 천년에 이르는 밀월여행 동안, 풍류의 유산은 대부분 불교도에 의해 도둑맞았다. 사원을 빼앗겼고, 경전을 빼앗겼으며, 영토까지 약탈당했다.
앞의 두가지는 별도의 설명이 필요 없겠으나, 영토를 빼앗긴 사실은 보충설명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이 사실이 풍류의 마지막 자존심과 결부되기 때문이다. 마지막 자존심이란 신라인이 믿었던 불교도 결국은 풍류의 한 지파라는 것이고, 따라서 풍류는 멸망한 것이 아니라 다만 꼴바꿈을 통해 살아남았음을 확인하는 일이 이 사실의 규명에 달려있는 것이다.


풍류가 불교도에게 빼앗긴 영토는 [천축(天竺)]이다. 지금은 국어사전에서 조차도 천축을 "옛날 중국에서 인도를 부르던 이름"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풍류의 탄압이 얼마나 철저하게 장기적으로 진행되었는지를 보여주는 본보기라 하겠다.
[천축]은 결코 인도의 옛이름이 아니다. [竺]은 [篤(독)]으로 쓰기도 한다. [篤(두터울 독)은 毒(독 독)]과 같은 발음으로서 [du]로 소리난다. [축]의 소리는 [thu]이다. 우리말로 바꾸면 [  .   .  ]가 적합할 것이다(물론 고대음임을 고려하여 ' '로 나타내었다). 따라서 [天竺]은 [하늘 터], [하늘 땅]이다.


이 점은 <산해경>의 기록을 보면 확실해진다. [해내경]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東海 안, 北海의 구석에 나라가 있는데 이름은 朝鮮이며 天毒(天竺)에 해당된다. 이 나라의 사람들은 물 속에 사는데 거기에는 畏人, 愛人이 있다. 西海 안, 流沙의 가운데 나라가 있는데 이름은 壑市. 西海 안, 流沙의 서쪽에 나라가 있는데 이름은 氾葉. 流沙의 서쪽에 鳥山이라는 것이 있는데, 세 개의 냇물(川)이 여기에서 흘러내린다.

 

우선 책이름이 해내경(海內經)이니, 여기서 다루는 곳은 모두 바다속이어야 이치가 맞는다. 위 기록에 따르자면, [바다속(海內)에 다시 동해(東海)가 있고], [다시 동해 안에 북해(北海)가 있고], [그 북쪽 바다에 있는 나라 이름이 조선으로서, 천독(또는 천축)이 된다]는 뜻이다.
천축을 인도라고 보게되면 우선 인도가 바닷속에 있다는 말은 맞을 수도 있다. 인도는 삼각형으로 생겼고, 그 중에 두 변이 바다와 접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 바다 속에 다시 동해가 있고 다시 그 속에 북해가 있다는 말과, 인도의 지형적 조건은 어떻게도 연결시킬 수가 없다. 차라리 일본같은 섬나라라면 이런 조건에 억지로 꿰어 맞출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인도를 조선으로 불렀다는 기록은 그 어디서도 찾을 수 없다.


여기서 우리는 두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첫째는 산해경이 다루는 [바다(海)]는 지구표면의 3/4을 차지하고 있는 바다(sea)의 한 부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여기서의 海內(바닷속)는 그냥 그대로 [해내]로 읽어 [해나라]로 보아야 한다. 여기에 [海]의 새김인 [바다]가 [박달]이나 [배달(倍達)]을 중국인에게 읽힐 때 나오는 발음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문제는 의외로 간단하다. [바다]는 조선의 딴이름인 것이다.


둘째는 [바다(해)]가 [바다(sea)]가 아니므로, 천축이 인도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견해는 여러 학자들이 이미 밝힌 것이요, 박용숙 선생은 "이런 표현이 종교적인 메카를 뜻하고 있다는 사실은 <산해경>이 [朝鮮]을 [天毒, 天竺이다]라고 함으로써 분명해진다. 불교에 관한 기사에서 [天竺]을 인도라고 말하게 되는 것도 인도가 불교의 메카가 되기 때문이다" 라고 하여, 천축이 종교적 성지를 뜻하는 말이라고 단정짓고 있다. 위에서 [天竺]을 [하늘 터(햇터)]나 [하늘 땅]으로 본것과 일치하는 관점이다.
[竺]의 뜻이 우리말 [대]라는 사실, 즉[竺]이 두그루의 대나무를 뜻하는 글자라는 사실도 매우 중요하다. 옛날 동이신전은 고분을 만들고 그 위에 나무나 풀을 심었다고 한다.


<삼국유사 . 기이편>에는 사절유택(四節遊宅)이라는 것이 나오는데, [계절따라 돌아가며 노는 집]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그 비중이 아주 크다는 사실은 진한의 말미에, 즉 신라 시조 혁거세왕의 전기 바로 앞 부분에 실었다는 점만 보아도 알수 있다.
박용숙 선생은 이 사절유택이 동이의 삼산오악(三山五岳) 중에서 중악을 뺀 나머지 사방의 신전을 뜻하는 사악(四岳)이고, 사악을 관장하는 신을 사천왕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동이의 신전에는 나무를 심었으니, 그 신전에 심은 나무들이 사군자(四君子)이다. 사군자가 풍류에서 쓰이던 상징임은 박용숙 선생이 [신화체계로 본 한국미술론]에서 자세히 밝히고 있다. 선생이 한국미술 전문가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아래에 이어지는 추론은 정당하다.
사군자는 매(梅) . 난(蘭) . 국(菊) . 죽(竹), 즉 봄철의 매화, 여름철의 난초, 가을철의 국화와 겨울철의 대나무를 말한다. 그리고 이 사계절은 오행설에서 그대로 방위로 바꿀 수 있다. 즉 동쪽의 매화, 남쪽의 난초, 서쪽의 국화와 북쪽의 대나무이다.
결국 대나무는 겨울신전에 심은 나무이고, 오행은 겨울을 북방에 배정하므로 북쪽신전에는 대나무를 심었을 것이다. 북쪽은 이미 설명한대로 곤모 . 지황의 방위로서, 천일(天一) . 지이(地二) . 인삼(人三)의 원리에 따라 [二]로 상징되는데, 이것이 [竺]의 본뜻인 것이다. 동해의 안 북쪽구석에 있는 나라라는 말도 이런 맥락에서만 풀린다.


<산해경>은 이름에서부터 삼산사해(三山四海)에 대한 기록임을 보여주고 있다. 삼산(三山)은 삼신산이요, 사해(四海)는 사해용왕이 사는 용궁이다. 즉 고조선의 신전에 대한 기록이 <산해경>이다. 따라서 석가의 출생지인 인도의 마가다국과, 석가의 출신처인 천축은 분명히 구분되어야 하는 것이다. 석가의 출신은 천축, 즉 동이신전이고, 따라서 불교는 풍류의 한갈래인 것이다.
이정도로는 양이 차지 않으니, 내킨김에 인도가 옛적 마한이었을 가능성까지 살펴보자. 인도에서 발굴된 가장 오랜 문화유적은 [모헨조다로]이다. 이 이름의 본래뜻은 [죽은자의 언덕]이라는 뜻인데, 우리말로 [마한솟달]이라고 옮길수 있을 것 같다. 이는 [마한의 솟터가 있던 땅]이라는 뜻이다.


이미 설명한 적이 있듯이 솟터는 [갱생의 터]인데, 다시 살아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 실제로 동이인들은 신전에 들어가는 순간 이미 죽은 것으로 간주되었고, 그 때문에 그들이 공부를 마치고 속세로 되돌아 왔을 때에는 귀신으로 취급되어 경외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산해경>에 나오는 대황(大荒)이 [풀(艸) 밑에 있는 죽은자(亡)의 나라(川)]라는 의미가 되는 것도 이와 관계된다.
고조선의 중심신전이 중앙아시아에 있었다면, 마한 54국과 진한과 변한 각 12국 중에서 몇나라가 인도에 있었다고 하여 문제될 것은 없다. 더구나 인디아(India)는 殷地(인디; yindi)와 소리가 같고, 이는 모헨조다로 문명을 건설한 고조선인들이 흰땅, 흰들, 큰들의 뜻으로 부른 [흰따(흰땅)]가 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들이 인도에 남겨놓은 종교가 브라만교라고 생각하면, [브라만(Brahman)]은 [ (明 . 火) 아만(母)]으로 이해된다. 석가가 성도한 후 초창기에 받아들였다는 500명의 제자들이 믿었다는 배화교(拜火敎)의 정체도 이것일 것이다. 더구나 불경이 브라만교(힌두교)의 최고신인 인드라를 제석천왕으로 번역하고 있으니, 그 가능성은 더욱 커진다.
이런 가능성까지 생각할수 있다면, 한겨레가 도둑맞은 영토가 얼마나 방대한 것인지는 저절로 알게된다. 서남아시아와 지중해 연안의 주요 도시의 이름들이 풍류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여러 학자들의 주장까지 고려한다면, 반도사관을 극복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고조선의 실체를 밝히는 일에 국력을 기울여야 할 것임을 알게될 것이다.

 

4) 무당의 역할
지금까지 살펴본 풍류탄압의 일면만을 보더라도, 지금의 무당에 대한 일반인의 인식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알수 있다. 그렇다면 무당의 본래 위상은 어떤 것이며, 오늘날의 무당은 그 본래의 위상에 얼마나 충실한 것일까?


지금부터는 이점에 초점을 맞추어 해설을 해나가기로 하자. 그러려면 맨 먼저 무당의 본래 역할부터 알아야 할 것이다. 무당의 위상과 역할에 대해서는 박용숙 선생의 연구가 단연 독보적이므로, 그 내용을 발췌하여 소개해 보자.

 

요컨대 삼극의 원리로서 조직운행되는 음양오행의 법칙을 가지고, 신이 만사를 관통하고 해결하는 능력을 가짐으로써 샤마니즘의 신정(神政)은 성립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국 샤아머니즘에 대해서 연구하는 일은 삼극(三極), 이른바 <천부경>에 대해서 아는 일이 된다. 우리는 이미 앞에서 <천부경>에 대해서 논급하였다. 우리가 확인한 <천부경>이란 수상(數象)의 세계이며, 그 수상은 一 . 二 . 三, 이른바 양 . 음 . 중성의 세 원리에 의해서 만상(萬象)이 풀이되는 그러한 원리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삼극의 원리가 구체적으로 샤아머니즘의 여러 풍경과 어떻게 연결되는가를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 ...... 샤아먼을 박수(pack-soo)라고 했던 것은 바로 이와같은 샤아먼의 성격을 그대로 반영해주는 것이 된다. 즉, 박수라는 말은 곧 박사(博士)라는 말의 와전된 말이다. 신라중기(6-7세기)의 기록에는 박사의 이름이 자주 등장한다. 이를테면 천문박사 . 의(醫)박사 . 음양박사 . 산(算)박사 . 주종(鑄鐘)박사 . 사천대(司天大)박사와 같은 이름이 그것이다. 의심할 여지없이 이러한 박사무당들은 훌륭한 과학자였음이 분명하다. 그들은 모두가 만능의 [금척(金尺)]을 가진 자들로서, 그것으로 사람을 재면 병이 낫고, 또한 그것을 가지면 왕도 될 수 있는 것이므로, 고대에 있어서의 샤아먼의 지위란 신성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앞에서도 이미 지적했던 바이지만 삼국시대의 왕들은 대개 샤아먼의 신분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오늘날의 무당들을 통해서도 우리는 샤아먼의 본래적 지위가 어떠했던가를 알 수 있다. 이를테면 무당들이 걸친 의복이나 관(冠), 장신구 그 밖의 여러 소지품들은 모두가 특수한 신분을 나타내는 것들이다. 이를테면 신상의 장식법이 그대로 적용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아마 무당이 굿에서 사용하는 칼, 삼지창, 방울 같은 것이 그 대표적인 예에 속할 것이다. 이러한 소지품들은 우리가 사찰의 사천왕상에서도 보는 바와 같이 그것은 신기(神器)에 속하기 때문이다. 이미 필자는 전작(신화체계로 본 한국미술론)에서 이런 무구(巫具)가 삼부인(三符印)임을 밝힌 바 있지만, 어쨌든 무당이 샤아머니즘 시대에 있어선 신계(神界)에 속했던 것임이 분명하다. .......


이제 우리가 여기서 결론적으로 말할수 있는 것은 이러한 천계(天界)가 곧 샤아머니즘의 교황(敎皇)이 있는 거대한 승원(僧院)이었다는 사실이다. 이때의 승원은 물론 산성(山城)이며, 그 산성은 또한 자연적인 조건, 이를테면 산세, 지세, 수세, 이른바 풍수지리설에 합당한 그런 요건들로 이루어진 [대자연가람(大自然伽藍)] 이었다고 할수 있다. 따라서 샤아먼들이 옥황상제(玉皇上帝)라든가, 한울님이라고 했던 것은 바로 이러한 대가람(大伽藍) 속에 속하고 있는 삼황신(三皇神)과 그 수반신(隋伴神)들을 가리킨다. 이점에 대한 상세한 기술은 별항으로 넘기자.
사정이 그러하다면 이때의 교황성(敎皇城), 이른바 한울이 가지는 정치적인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신탁통치(神託統治)를 말하는 것이다(信託統治가 아니다). 필자는 전작에서 이를 삼황오제적(三皇五帝的) 신정(神政)이라고 하였다. 즉 천계에서 키워진 인재들을 발탁하여 이들을 지상(地上)의 군주(君主)로 임명하는 정치이다. 이때의 인재를 용(龍), 혹은 태자(太子), 미륵(彌勒)이라고 하며, 이러한 용들이 지상으로 부임하는 것을 출세(降神)라고 한다. 이를테면 오제(五帝)라는 것은 바로 그러한 절차에 의해 천계에서 지계(地界), 인계(人界)로 파견된 왕들을 뜻하는 것이다. .......


삼황오제에 의한 정치는 곧 샤아먼에 의한 정치이며, 이때의 샤아먼이란 과학적인 원리(천부경)를 믿는 승려들이므로, 결국 샤아머니즘의 정치는 엄격한 율법주의 정치라고 할수 있다. ...... 이때의 율법정치란, 인간사회를 천체(天體)의 질서와 동일한 구조원리로써 다스리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단군이 재위(在位)하는 천계(天界), 즉 조선에는 많은 과학자(龍)가 배출되지 않으면 안된다. 신화는 이때의 용을 태양의 아들, 즉 천자(天子), 일자(日子), 태자(太子)라고 표현한다. 단군이 오제가 다스리는 인계(中天)를 지배(支配)하는 일은 바로 이러한 용들을 천체의 운행법에 따라 배치하는 일이다. 따라서 지배한다는 말은 곧 지지(地支; 十二支)를 배당한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규원사화(揆園史話)>는 단씨지세(檀氏之世)에 대국(大國)을 아홉으로, 소국(小國)을 십이국(十二國)으로 나누어 천하의 제주(諸州)를 다스렸다고 쓰고 있다. 이것은 모두가 간지를 배당한다는 뜻이 된다. .......


또 <만주지>에는 (원문생략) 천계의 주신(主神)이 세계를 통치하는 한량없는 지혜와 능력을 가져서 그 모양은 보이지 않고 천계(산성)에 있으니, 지계에 있는 소신(小神)들은 모두 그 아래에서 심부름하는 귀신들이라 쓰고 있다. 또 <신단실기(神檀實記) . 단군세기>에는 (원문생략) 단군이 교황의 기능을 맡았음을 지적하고, 이때의 설교하던 장소가 곧 신시, 이른바 승원이며 그러한 장소를 전세계에 삼천곳을 두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와같은 기록에서 우리가 유의할 점은 샤아먼의 교회가 전세계에 분포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단기고사>의 기록은 이러한 교회를 삼신전이라 하였고, <만주지>의 기록은 또한 삼신전(소도)의 주신이 전세계를 지배하였다고 되어있다.

 

인용문이 너무 길어지긴 했지만, 글쓴이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중간에 생략한 부분이 아쉬울 뿐이다. 아무튼 이 내용을 보면 무당의 위상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를 알수 있고, 오늘날 무당이 얼마나 몰락해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무당의 어원이 맏왕이므로, 무당은 고조선의 제의(祭儀), 봉토(封土), 조회(朝會)의 전권을 행사하였다고 보아야 한다. 이는 오늘날의 입법, 사법, 행정의 삼권과는 차원이 틀린 개념이다.


오늘날의 국가권력은 무당이 행사하던 삼권 중에서 조회권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제의권은 정치와 종교의 분립원칙에 따라 치외법권의 영역으로 빠져나간지 오래이고, 봉토권은 선거제도의 채택과 동시에 무지개가 되었다.


이렇게 막강한 무당의 권세가 외부세력의 침범으로 무너졌다고 보기는 어려운 일이다. 특히 고대사회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면 왜 무당의 세력이 약해져서 결국 오늘날과 같은 상황이 초래되었을까?


역사를 살펴보면 무당의 권한축소는 정치와 종교의 분리에서부터 나타난다. 즉 제의와 봉토의 권한은 무당이 잡고있고 조회권만 이양되는데, 그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 환웅의 신시개천이다. 환웅이 처음에 관장하였던 일은 인간 360여사를 주관하는 것이었지, 아들딸 낳아서 나라를 세워준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 고대사회의 성격을 참작하면 이 권한이양이 무당의 권한축소를 목적으로 행해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무당의 권한을 축소시키려면 제의권이나 봉토권을 박탈해야 했기 때문이다. 고대사회에서 조회권이란 신(천왕)의 명령을 전달하고, 백성들의 호소를 신에게 아뢰는 역할 정도였을 것이다. 환웅의 역할 중에 첫째로 거론되는 것이 [명령을 주관하였다(主命)로 되어 있는 것은 이런 사정을 암시한다.
따라서 최초의 제정(祭政)분리는 무당의 일이 복잡해지자 그 일부를 보좌하는 사람에게 위임한 것이다. 환웅이 서자라는 표현에는 이런 의미도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이제 무당에게 남은 역할은 제의권과 봉토권이다. 그러나 고대사회에서 이 두 권한의 비중은 오늘날의 통치권 없는 종교단체의 예배권이나, 지주들의 토지소유권과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점을 이해하려면 고대사회의 제의내용에 대해 먼저 알아야 한다.
고대의 제의는 삼신산의 천제를 정점으로 하고, 동이(삼신산)를 에워싼 구이(九夷; 九桓)의 국중대회(國中大會)가 연결고리가 되며, 전세계에 퍼져있는 제후들의 사회(社會)가 말단조직이 되는 통치제도였다. 즉 축제를 통해 다스림(땅살림)이 행해졌던 것이다.
사회(社會)는 고대에 토지신의 사당인 사(社)에 사람들이 모여 풍년을 기원하며 희생의 제물을 바치고, 자유로운 음양교합을 하던 풍습이다. 이에 대해서는 김용옥 선생이 본질을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고, 나머지 절반의 숨겨진 의미를 박용숙 선생이 밝히고 있다.

이와같이 고도의 문명을 자랑하던 가나안 원주민들이 가지고 있었던 토속신앙을 우리는 대강 총칭하여 바알신앙(the worship of Baal)이라고 부른다. 이 바알이야말로 우리가 말하는 서낭이며 곧 따님(God of Eart-h)인 것이다.


바알 신앙에 관하여는 1929년부터 시리아의 북방에 있는 우가리트(Ugrait, 지금은 Ras Shamra)에서 발굴된 많은 타블렡으로부터 우리는 새로운 정보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이 우가리트의 타블렡에 의하면 생산성(fertility)은 7년 주기로 묘사되고 있다. 바알은 죽음과 불모의 신인 모트(Mot)와 생명을 건 투쟁을 하게된다. 바알이 승리하게 되면 풍요로운 생산이 7년 계속된다. 모트가 승리하게 되면 7년 동안의 가뭄과 기근이 잇따르게 된다. ...... 바알의 어원은 "소유주(owner)"란 뜻이며, 아무리 그 개념의 범위가 다양하지만 가장 명확한 그의 특징은 농경의 "생산"과 관련되는 것이다. 그는 "大地의 主"이며 "비와 이슬의 主"이다. 비와 이슬이라는 것은 가나안의 농경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두 종류의 습기이다. 그리고 "폭풍의 신"이며, 列子처럼 "구름을 타고 다니는 신(He Who Rides on the Clouds)"으로 그의 신주에는 쓰여져 있다. ...... 바알은 땅의 님이긴 하지만, 그 자신은 남성으로 더 묘사된다. 그리고 때때로 諸神들의 王(King of the Gods)으로도 나타난다. {구약성서}에는 바알은 보통복수로 나타나며 남성으로는 바알님(Baalim = Lords)이 되고, 그의 생산의 성교의 대상인 여성신들은 바알롵(Baalot = Ladies), 혹은 단수로 아쉐르(Asherah)라고도 부른다. 그리고 복수 고유명사인 아쉬토렡(Ashtolet)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이 바알림들과 바알롵이야말로 대지의 남신들이며 대지의 여신들이다. 그리고 이들은 농경이 의존하고 있는 자연의 힘을 되살려 낼수 있는 생명의 원천들이다. 이러한 자연의 힘의 회귀(revitalization)는 라오쯔가 말하는 "反者道之動"이라고 했을 때의 反(= 返, Returning)과 동일한 시간관을 나타내는 것인데 이러한 힘의 회귀는 농경문화에 특유한 생산, 즉 생식(씹)과정으로 나타나는데, 이것은 바알림과 바알롵의 "신성한 결혼"(생략)으로 상징된다. 그러나 이것은 신들의 단순한 상징적 행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지상에서의 인간들의 일상적 도덕규범으로부터의 해방, 즉 "술과 씹"의 난음의 축제(orgy)로 표현된다. 이 바알림과 바알롵의 히에로스가모스는 바알림을 상징하는 남자들이 바알롵을 상징하는 사원의 성녀(聖女)들과 어울려 진탕 성행위를 자행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 그리고 이러한 바카스 예배와 바알예배는 [東夷傳]의 迎鼓(맞이굿)나 東盟(동쪽의 맹서굿), 그리고 솟터의 제사속에 혼합되어 나타나고 있다. [東夷傳]의 기사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五月과 十月에 國中大會하여 飮酒歌舞하였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축제의 모습이다.

 

바알축제와 솟터축제가 비슷한 이유는 이 인용문 자체에서 찾을 수 있다. 바알신이 바로 밝신이요, 모트신이 맏신이다. 이 두 신이 단군신화에는 한단어로 나오니, 곧 풍백인 것이다. 바알신이 땅의 신으로서 동시에 폭풍과 비와 구름의 신이라는 묘사는 환웅이 거느렸던 풍백, 운사, 우사에 대한 묘사인 것이다.


솟터가 [샅터(가랑이터)]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도 사토(社土)에서 샅일을 하고 가랑이(가랄; 가리; 겨레)를 불리던 풍류(불루)의 유습과 관련시킬 때 이해된다. [샅일]은 소리나는대로 적으면 [산닐]이 되어 [산일(山役)]과 통한다. [山]은 신전이니 [산일]은 신전에서 하는 일이다.
그런데 바알축제에는 모트신은 나타나지 않는다. 모트신은 천상에서 바알신과 엎치락 뒤치락 운우지락을 나누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일반인들은 참여하지 못하고, 선발된 여신인 메이 퀸(오월의 여왕, 단오의 여왕)만이 참여한다. 여신을 나타내는 퀸(Queen)이 군(群; qun)과 소리가 비슷한 것도 흥미롭다. 아름다움은 큰양(美)의 뜻이기 때문이다. [메이 퀸]은 미군(美君)일 가능성이 아주 높다는 말이다.
아무튼 이 선발된 여신은 바알신의 대리인이 아닌 바알신 자신과 동침하거나, 바알신의 상전인 모트신 즉 무당에게 바쳐지고 무당과의 사이에서 땅을 다스릴 왕자를 낳는다.
이 축제의 의의에 대해서는 박용숙 선생이 자세히 밝히고 있다. 워낙 방대한 자료들을 동원하여 여러권의 책에 분산시켜 설명하였으므로 요지만 간략히 소개하기로 하자. 
  

5) 무당과 제의

① 통과의례
서양 여러나라에서 아직도 행해지고 있는 각종 카니발 또는 가면무도회가 바로 사회(社會)의 유풍이다. 그런 풍습의 절차는 먼저 일정한 준비기간이 있고, 행사가 시작되면 먼저 고사를 지낸 다음, 가무음곡의 축제가 있은 후 야합(野合)으로 끝을 맺는다.


이를 더 자세히 살펴보면, 먼저 준비단계는 제계(齊戒)와 제물준비로 나뉘는데, 이 두가지가 천신족을 탄생시키기 위한 정신적 . 물질적 준비과정이다. 즉 제계는 금욕과 고행으로 맑고 강한 심령을 기르는 것이며, 제물준비는 술을 위시하여 접신상태(황홀경 또는 도취경)에 쉽게 도달케 하는 특별음식의 장만이다. 흥분제나 환각제의 유래는 이것이라 할수 있다. 이 제계와 제물준비는 후대의 각 종교에서 의전례법이 되었음은 말할것도 없고, 수련법과 의약술로 정착하게 된다.


그리고 특히 중요한 사실은 이 준비과정에서 다루게 되는 각종 곡식과 채소 및 과일 등의 요리재료, 음식을 요리하고 익히기 위한 각종 요리그릇, 소 . 양 . 돼지 . 뱀 등 희생에 쓰이거나 제의에 등장하는 동물들을 사냥하거나 사육하는데 필요한창 . 칼 . 화살 등의 무기류, 가지가지 신상과 가건물의 제작에 소용되는 자재와 도구, 가무음곡에 쓰일 악기와 의상 등 모든 것들은 오늘날의 눈으로 볼때에는 대단치 않은 것일지 몰라도, 그당시의 사람들에게는 문화를 전파시키고 보존하는 소중한 경전이었다.


그리고 그런 준비물들은 모두 우주자연의 진리를 반영시켜 만들어진 것들로서, 그 도구들을 제대로 다루어 법도에 맞는 물건을 만들어내면 자연의 이치를 제대로 이해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즉 준비기간 자체가 신들의 세계에 입문할 자격을 얻기위한 학습과정이었던 것이다.
다음으로는 고사(告祀)이다. 고사는 축제에 참가할 자격을 얻기 위한 통과의례이다. 지금이야 나이만 되면 주민등록증 주고 어른대접을 해주지만, 고대사회에서는 성인식이 있어서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면 어른대접을 받지 못했다.


이것은 인류의 진화에 중요한 역할을 한 제도라고 볼수 있다. 성인식을 통과하지 못할 정도의 정신적 . 육체적 미숙아는 결혼하고 자식을 낳아 기를 기회를 박탈하므로서 자연도태 효과를 얻은 것이다. 무리생활을 하는 동물들의 최대약점일 수도 있는 열등한 유전인자의 유전을 이런 제도로 예방한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특히 신전에서 공부하는 사람들은 장차 사람들을 교육시켜야 할 왕(제후)이 될 인재들이니, 이들의 자질이 우수하지 못하면 장차 신전에서 받아갈 씨의 질이 떨어지게 되고, 그 결과는 그 지역의 침체나 멸망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 때문에 이 시험은 어렵고 엄격하였으며, 한가지 시험만 치르는 것이 아니라 사해(신전)를 돌아다니며 한 과목씩 배워서 해당신전의 용왕 앞에서 시험을 보고, 모든 과목에 합격한 사람은 최종적으로 삼신(삼왕) 앞에서 시험을 본다. 중도탈락자는 그때까지의 성적에 따라 신분과 역할이 결정되고, 삼신의 대과에 합격한 사람은 용이된다. 즉 중앙신전인 용궁의 왕족에 정식으로 편입되는 것이다.

 
이 시험의 종류와 절차는 천제(天祭) 등의 큰 제사의 절차와 비슷하다고 보면 될 것이다. 먼저 고사에 참석하는 사람의 복장과 태도(행동거지)를 본다. 고사절차를 제대로 따라하는지도 평가대상이 된다. 그런다음 각 응시자들이 준비한 제물에 대한 평가가 이어진다. 동물의 경우에는 야생동물일 경우에는 그 종류와 크기가 사냥기술의 숙련정도를 반영할 것이고, 가축이라면 사육자의 정성이 나타날 것이다.
음식일 경우에는 재료의 종류에 따라 농사솜씨를 먼저 알게되고, 그 맛과 향기를 보면 신전에서 가르치는 그릇의 용도와 사용법의 이해도가 드러난다. 공산품이나 무역품과 같은 진상품의 경우에도, 물건의 아름다움이나 희귀한 정도로 그 사람의 손재주와 장사솜씨를 알수 있다. 여기서 합격한 사람들이 다음단계인 축제에 참가한다.


축제는 일차시험에 통과한 학생들이 자신의 깨달음을 노래와 춤사위로 나타내는 것이다. 노래와 춤은 동이의 진리를 문장과 가락과 동작으로 압축해 둔 고급경전이었다. 판소리 열두마당 중의 대부분이 옛날 신전에서 가르친 윤리도덕을 주제로 삼은 점으로 볼 때, 바로 동이의 시험과목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일차시험이 절대평가라면, 이차시험은 상대평가이다. 어울려 노는 동안에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과 비교가 되는 것이다. 화랑제도의 뿌리가 바로 이것임은 쉽게 알 수 있다. 아무튼 이때의 노래는 문장실력과 웅변실력을 보여주게 되고, 춤사위는 운동(무예)실력을 저절로 드러내게 된다. 동이의 춤은 모두 실전무예로 응용할 수 있는 것들이었고, 동이의 음악은 군대의 통신수단으로 활용될 수 있는 것들이었다.
이 시험까지 통과하면 모종의 신체개조를 받게된다. 엘리아데의 저서 <샤마니즘>에는 무당이 되기 전에 신체를 완전히 해부하여 내장과 골까지도 바꾸어 넣는 대대적인 수술을 받는다는 전설이 많이 나오는데, 그것이 실제적인 것이든 상징적인 것이든 통과의례의 필수적인 절차였음은 확실하다.


그것이 최면상태에서 일어나는 일종의 정신현상이라고 생각하여, 그 과정을 재현하려는 노력이 후대에 각종 명상수련법으로 발전되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 것이야 어떻든 지금 문제삼을 주제는 아니고, 이 최종관문에 필요했던 것이 술과 간장, 된장을 비롯한 각종 소독약과 술, 커피, 담배 등의 흥분, 마취, 환각작용을 일으키는 약품들이었을 것이다. 지금도 원시적인 생활을 하는 부족들의 축제에 이런 약품성 기호품이 자주 등장하는 이유도 여기서 이해된다.


이 시험에서도 합격하면 마지막 과정은 야합(野合 . 夜合)이다. 야합이란 시험에 통과한 선남선녀(選男選女)들이 신전에 들어가서 동이의 구성원인 선남선녀(仙男仙女)로 편입되고, 밤에 [들]에서 합방하는 것이다. 여기서의 들은 아사달의 [달]이지, 결코 들판의 [들]이 아니다. 신전을 상실한 동이의 유민들이 유랑생활을 할 때에는 들판 나무밑을 야합장소로 사용했는지도 모르지만, 동이족이 씹에 부여한 신성성을 생각할 때 야합이 결코 소홀히 취급될 수 없는 대상이었음은 쉽게 알수 있다.


그런데 이 야합, 즉 선남선녀들의 결혼 과정에 인류사의 비극의 씨앗이 들어있다. 그것이 처용가에 담긴 비밀로서, 요즘 정치판에서 뒷꽁무니에서 남몰래 만나 정치적인 거래를 맺는 것을 비난하는 뜻으로 쓰이는 [야합]의 유래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것은 뒤에 설명될 [신정과 풍속]의 주제이므로 여기서는 일단 보류하기로 한다. 아쉽더라도 잠시만 참자.
아무튼 선남선녀는 다정하게 짝을 지어 기세도 당당하게 속세로 금의환향한다. 선녀는 뱃속에 태자를 잉태하고 남자는 시험과정에서 중도탈락한 낭도들을 신하로 거느린 임금이 되어 속세의 지정된 곳에 봉토를 받아 새나라를 세우는 것이다. 이것이 축제의 숨겨진 부분으로서 박용숙 선생이 학술적으로 밝혀낸 부분이다.


결국 오늘날 고등종교라고 불리는 유교 . 불교 . 기독교 등의 종교가 생기기도 전에, 인류의 모든 문화를 개발하고 전파하던 종합종교가 풍류였고, 그 풍류를 주도하던 사람이 바로 무당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들이 어떤 종교에나 붙이는 이름인 바로 그 [종교]가 실은 풍류의 본래 이름이었다. 이 사실도 잠시 뒤로 미루어 두고, 이 종교(풍류)의 지금 남아있는 이름은 무속도 샤마니즘도 아니고 천만뜻밖에도 밀교(密敎)이다.


[밀(密)]은 우선 이름이 진국(辰國)의 [辰]의 새김인 [미르]와 같다. [密]의 글자 뜻은 [산]과 [신전속 깊이 신이 모셔져 있다]는 뜻을 합친 글자이다. 또 그 [신전처럼 깊고 나무가 무성한 산]을 나타내는 글자라고도 한다. 따라서 밀(密)이 바로 고(古)와 같은 뜻임을 알 수 있다.
지금 밀교라 불리우는 종교는 티벳의 라마교가 유일하다고 할수 있는데, 라마교의 특징이 제정일치 사회로서 밀교승의 우두머리인 [달라이 라마]가 국가의 전권을 장악하고 있다는 것이다(지금은 그 전통도 중국 공산당에 의해 끊어지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들의 기본 교의는 남녀간의 성행위를 통해 득도할 수 있다는 것으로서 풍류의 교의와 같다.


제정일치사회의 통치를 담당한 라마승들과 같은 지고무상한 신분의 사람들이 바로 우리 무당들의 본래 모습인 것이고, 그들이 정치적 지배권을 상실하고 다시 신전까지 빼앗긴 다음 사회의 최하층 계급으로 개편당한 모습이 오늘날 우리들이 만나는 무당이다.
그들은 새로운 지배층과 타협하지 않은 벌로 최하층 계급으로 개편되었고, 사당패와 각설이, 기생과 광대, 고리백정과 여러 쟁이(대장장이 . 환쟁이 . 뚜쟁이)로 천년이 넘는 세월을 정권의 제도적인 탄압을 받으면서도 뿌리를 잃지 않았다. 따라서 그들이야말로 우리가 세계에 내놓을 수 있는 오직 하나뿐인 진정한 민족혼이다. 따라서 그 결론은 이렇다. "무당은 복권되어야 한다!"

 

② 희생과 강신
무당의 복권을 주장하기 위해서 살펴보아야 할 가장 중요한 내용은 무당의 능력의 원천인 강신의 원리에 대한 것이다. 강신이 왜 일어나며, 강신을 받은 후에 접하게 되는 신령의 세계란 무엇이며, 그 세계가 우리들의 삶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등을 밝히지 않으면 무당을 복권시켜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밝혀야 할 일은 무당의 치세에 행해졌다는 희생의 제의에 대한 올바른 의미부여이다. 고대에 실제로 행해졌던 인신공희(人身拱犧)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평가는 무당의 이해와 평가의 커다란 부분을 차지한다. 이 부분을 오해하게 되면, {바로 지금 일부 개인과 집단에 의해 저질러지고 있는 끔찍한 살륙행위}가, {고대에 저질러졌기 때문에 정당하다}는 어처구니없는 변명이 나올수도 있고, 실제로 일부 몰지각한 심리학자와 문화인류학자들은 인간의 살상충동은 본능의 하나라고 공공연히 주장하고 있기도 하다.


먼저 희생의 제의는 동이의 통과의례인 축제의 한 과정으로서 행해졌고, 그것이 일종의 시험과목이었음을 간단히 언급하였다. 그런데 이 희생의 제의가 후대에 고등종교들에 의해 집중적인 비난의 대상이 되었고, 그 이유는 그 잔인성에 있다기보다는 그 유래가 사람을 죽여 신에게 바치는 행위인 인신공희였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미개하고 잔혹한 원시신앙의 표본으로 여겨진 것이라 하겠다.


동이들의 신전에서 실제로 인신공희가 행해졌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인신공희가 고대사회에 보편적인 습속이었다는 점을 볼 때, 그 가능성을 부정한다는 것이 오히려 편견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고대 인신공희 습속의 유래에 대한 하나의 해석을 소개해 보자.

자연현상 가운데 원시인들이 가장 경탄스런 눈으로 바라본 건 아마도 다시 찾아온 봄이었으리라. 차갑게 식었던 태양이 다시 타오르기 시작하고, 하얀 눈으로 덮인 들판에 푸른 물결이 다시 찾아왔을 때, 그들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기쁨으로 이를 맞았으리라. 하지만 기나긴 겨우내 휘몰아치는 눈보라를 바라보며, 그들은 마음 한구석에 어떤 불길한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이 눈보라가 영원히 계속되는게 아닐까, 태양이 저대로 영원히 식어버리는 게 아닐까 ...... .


때문에 무언가를 해야했다. 그들은 사계절의 순조로운 운행을 위해 자연현상을 주술로 재현했다. 먼저 자연의 생장력을 상징하는 사람을 뽑는다. 물론 젊고 건강해야 한다. 그는 사제이고 왕이고 수목의 정령이자, 무엇보다도 신이다. 이제 원시인들 특유의 은유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신이 젊고 건강한 동안, 대지는 겨울의 차가운 힘을 몰아내고 들판에 푸른 물결을 가져온다. 그러나 신이 늙고 병들면, 대지는 봄을 부를수도, 풍요로운 결실을 보장할 수도 없다. 때문에 신과 동침한 아내가 남편의 몸이 전과 다르다고 보고하는 날엔, 즉시 그의 목을 베고, 젊고 튼튼한 사람을 새로이 신으로 선출했다. 흉작이나 재앙이 닥쳐도 마찬가지였다. 처음 신을 죽인 건 니체가 아니다.


원시인들의 이런 행위는 주술일 뿐이다. 하지만 어쨌든 이 주술을 행하는 동안 그들은 봄의 도래를 확인하고 풍요로운 수확을 기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아무리 영예로운 자리라 할지라도, 조만간 살해되어야 한다면 누가 신이되려 하겠는가! 때문에 이 야만적인 관습은 완화되기 시작한다. ...... 이야기는 계속된다. 그 뒤 사제의 권력이 증대하자, 이제 그를 대신하여 다른 사람(가령 그의 아들)이 죽어간다. 원시인들의 논리를 이용하면, 목숨을 내놓기 싫은 사제가, 자기 아들이 사실 자기랑 다를 바 없음을 사람들에게 증명하는 데엔 큰 어려움이 없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소년살해 이야기는 아마 이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헤라클레스는 술에 취해 자기 아들을 찢어 죽였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디오니소스 축제도 갈갈이 찢겨 죽은 디오니소스를 추모하는 행사였다.


왜 그들은 이 비극적인 사건을 그토록 흥청대는 [축제]로 기념해야 했을까? 거기엔 징그러운 이유가 있다. 신이 살해되면, 그 시체를 뜯어먹는게 당시의 관습이었다. 그들은 신의 육신을 먹으면 신의 영험함이 자신에게 옮아온다고 생각했다. 이 때문에 신 또는 그의 대리자의 목을 벤 날엔 흥겨운 축제가 벌어졌다. 디오니소스도 그렇게 뜯어먹혔을 게다. 유럽에서 초봄에 행해지는 [카니발](글자 그대로 하면 사람고기를 먹는다는 뜻이다)의 원형이 바로 이것이다. 호이징가에 따르면, 이와 유사한 관습이 중세까지, 그것도 기독교 신앙 아래 버젓이 행해졌다고 한다. 성자의 유골이 영험하다고 믿었던 당시 사람들은 가끔 성자를 죽여, 그 시체를 끓는 물에 푹 고아 뼈와 살을 분리시킨 다음, 그뼈를 몸에 지니고 다녔다 한다. 그 뒤로는 인간 대신 양이나 염소같은 짐승이 죽어 갔다. .......

 

여기에 소개된 것이 고대 희생의 습속에 대한 일반적인 견해이다. 그리고 오늘날 정력을 숭상하는 일부 인사들이 해구신에 영양탕을 찾아 헤메는 것도 그 유래가 여기에 있다 하겠다. 몸은 보신탕집에 앉아서 개고기를 뜯고 있지만, 그렇게 시키는 유전자는 먼 옛날 사람을 뜯어먹던 바로 그 기억을 담은 유전자라고 보아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한 면이 있다. 왜냐하면 보다 더 오랜 옛날에는 토템으로 삼은 짐승에게 사람을 죽여 바쳤다는 기록이 자주 발견되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김용옥 선생의 견해를 참고하자.

 

내가 중학교 다닐 때 본 영화로 안소니 퀸의 젊은 모습을 담은 [바렌]이라는 영화가 있다. 어떤 미친놈이 "바렌"(Barren?)이라고 뜻없이 번역했는지 모르지만 이 명화의 원제는 "죄없는 야만인"(The Savage Ino-cents)이며, 1960년에 니콜라스 레이감독이 만든 이탈리아의 명화이다. ...... 이것은 "상황윤리"(situationalethics)라는 매우 어려운 철학적 주제를 재치있게 표현한 명화인데, 그배경은 에스키모인들의 삶의 양식에 대한 인류학적 탐구의 성과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 영화의 주제는 여기서 언급을 회피하겠으나, 내가 주목한 하나의 장면을 소개한다. ...... [주인공이 장모와 같이 단란하게 살던 중, 장모가 너무 늙어 고기를 씹어 뱉어서 저장하는, 가장 기본적인 노동마저 할수 없게 된다] 인간적으로 헤어진다는 것은 슬픈 일인 줄도알면서 장모는 딸과 사위에게 자기를 장례지내라고 명령한다. 딸과 사위는 울면서 장모를 썰매에 태우고 빙판을 달린다. 소위 우리나라 풍속의 "고려장"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장모가 가는 곳은 흙무덤이 아닌 살아있는 백곰이 먹이를 찾아 울부짖는 그런 무서운 곳이다.


즉 살아있는 장모를 백곰앞에 바치는 것이다. 딸과 사위는 엄마가 백곰한테 산채로 뜯어 멕히도록 자리를 잘 마련해놓고 썰매를 타고 돌아온다. 왜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이렇게 끔찍한 불륜패도의 짓을 하는가? 이들은 과연 야만인인가? 이들을 야만인으로 보는 우리가 곧 야만인인 것이다. 그 엄마는 백곰한테 뜯어 먹힐 것을 생각하면서 행복한 명상에 잠긴다. 이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죽음을 해결하는 매우 고등한 종교양식이며, 그 나름대로 매우 합리적 이유가 있는 것이다.


에스키모의 삶의 환경에서는 "썩는 곳을 찾을 수"가 없다. 모두가 얼음이기 때문에 얼음 속에서는 "썩는" 현상이 눈에 보이게 일어나지 않는다. "썩음"이란 "존재의 순환"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썩는 곳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은 나의 존재의 순환하는 마당을 찾을 수 없다는 뜻이다. 즉 나의 존재는 유한하지만, 나의 존재가 타의 삶 속에서 썩음으로서 그 삶의 연속을 가능케하는 그러한 무한연쇄의 고리를 찾지 않으면 안된다. 한알의 밀알이 썩어야만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요한복음](12 : 24)의 말은 바로 이러한 불멸성의 확보라는 시간관과 관계된 것이다. 에스키모들이 찾은 존재의 썩음의 마당은 바로 백곰의 위장이었던 것이다. 나는 백곰에게 먹힌다. 백곰이라는 생명의 장 속에 나를 참여시킨다. 그리고 나의 자손들은 또 백곰을 잡아먹을 것이다. 그러면 나라는 존재는 나라는 유한성 속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자손들의 삶 속에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영원히 산다. 나는 불멸한다. 나의 개체적 삶은 유한하지만 백곰에 잡혀멕히는 행위를 통하여 우주적 삶의 무한성(infinitude of cosmic life)을 획득한다. 늙은이를 백곰에게 바치는 그들의 행위는 바티칸의 베드로사원에서 이루어지는 미사보다도 엄숙한 삶과 죽음의 예배인 것이다.

 

선생은 여기서의 백곰의 내장이 따님(地神)의 보지구멍(명당)으로 바뀐 것이 따님숭배의 본질이라고 역설한다. 모든 종교인들의 필수적인 기능이 이 불멸의 보장이라는 것, 그리고 그 의식이 장례절차라는 사실, "중이나 목사나 儒者(유자)나 죽음의 의식의 담당자로서의 사회기능은 떠날 수 없는 것" 이라는 사실은 고대종교로서의 토테미즘의 기능을 올바로 해명한 것이다. 그리고 이 불멸의 고리를 자기의 자식에게서 찾도록 가르친 최초의 종교가 바로 풍류였을 가능성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희생의 제의가 가지는 의미를 모두 파헤친 것은 아니다. 동이들이 사람이나 동물을 희생의 제물로 바친 데에는 아직도 두가지 의미가 더 있다. 그 중 하나는 인체에 숨겨진 우주의 진리를 알아내려는 학술적인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후대에 씨받이를 보쌈해다가 신방을 차리게 하고 살해 암매장하던 풍습과 같은 비밀유지의 목적이다. 두 번째 이유는 후대에 형성된 것이고, [신정과 풍속]을 별도의 주제로 설명하고 있으니 그때 설명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학술적 목적의 부분을 살펴보기로 하자.


박용숙 선생은 희생(犧牲)의 본질을 [신체경전의 연구]라고 보았다. 실제로 희생의 제의에 쓰여진 동물이 소(牛)였다는 사실은 선생의 "소가 곧 <천부경>의 상징이다"라는 주장과 일치하므로서, 희생의 제의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옳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선생에 따르면 고대에 행해진 희생의 제의에는 제물을 도살하여 해체하는 절차가 있었는데, 이는 생명체가 간직한 우주의 기본법도인 음양의 비례, 즉 2 : 3의 황금분할 원리를 분석하여 그 중심인 황금의 비밀을 찾아내기 위한 것이었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그 궁극은 인체(생명체)와 우주가 하나라는 신비한 원리를 확인하려는 엄숙한 제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해체된 제물의 피와 살은 소중히 다루어져, 여러 가지 그릇에 따로 담겨졌는데, 이 또한 그 용량과 무게 등을 측정하여 황금비례를 찾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결국 선생의 의례적 해체에 대한 해명은 다음의 인용문에 요약, 정리되어 있다.

 

<설문>이 [解(해)]를 풀이하여 [칼로 쇠뿔을 판별하는 것]이라 했다. 이 말은 백정이 소를 잡는 일을 암시하고, 또 소를 잡아 뿔을 자른다거나 태우는 일은 점(占)과 관련되기도 한다. 그러나 ([解]라는 글자의) 쇠뿔(牛角)을 삼각형으로 읽으면, 칼(刀)은 [一(일)]이 되어, 앞에서 본 활과 화살(弓矢)의 관계가 된다. 그러므로 <설문>은 다시 [解]를 [釋] . [悟] . [脫]과 같은 종교적인 개념으로 풀이하고, 기하학 . 수리 . 점성술 . 음악과 관련이 있음을 확인해 준다. <예기>와 <회남자>에서 볼수 있듯이 의례적인 도살행위가 동이의 특수한 학문적 행위임을 알 수 있다. ...... 의례적 해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대상은 인체이다. [<천부경> 해설]에서 본 바와 같이 인체는 만물의 척도이기 때문이다. 인체를 해체하는 의례는 아직도 티벳에 남아있다. 해마다 콤파 사원에서 벌어지는 축제에는 인형으로 대용되는 인간이 제물로 등장하며, 사제는 칼로 이 대용인간의 배를 가르고, 창자를 꺼내기도 한다. 엘리아데가 제시한 아프리카 .아시아 . 인도네시아의 의례적 해체도 그런 뜻으로 이해된다. 창이나 화살로 자신의 배꼽을 찌른다거나 요술사로 하여금 배를 절개하고 전신을 해체하게 하므로써 전혀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났다는 기록은 프레이저의 기록에서도 발견되지만, 그것은 결사에 가입한 샤먼 후보자를 최고의 능력자로 환생시키거나, 아니면 경전의 원리(神聖比例)를 확인하며 전달하는, 수도자들의 신성한 목적임에 틀림없다.


* [ ] 속의 내용은 글쓴이가 삽입함.

선생의 이 결론은 동이의 신앙풍습에 대한 올바른 해석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글쓴이는 선생이 동이종교의 핵심에 접근하고서도 그것을 천명하지 않은 부분이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수 없다. 그 핵심은 의례적 해체가 죽음과 함께 소멸되는 육신이나, 언어와 문자로 표현되면서 이미 생명력을 상실해버린 원리법칙들의 이해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의례적 해체의 본질은 영계(靈界) 또는 신계(神界)로 표현되는 사후세계와 교통하는 능력을 획득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죽음의 경험]이다. 이를 다른말로 표현하면 접신(接神) 또는 강신(降神)체험이며, 심리학자들이 무의식 상태라고 부르는 특수한 의식상태에서 체험하는 초현실적인 경험이다.


이 상태를 거친 사람은 실제로, 일반인들이 사후세계로만 알고있는 신령세계와의 교류가 가능하다. 그야말로 신(神)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실제로 신이 되는 것, 그것이 조선에 들기 위한 필수적인 자격요건이었다. 따라서 이 과정이 통과의례에 포함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것이 의례적 해체의 실상이다.


엘리아데가 쓴 '고대의 접신술'이라는 부제가 붙은 <샤마니즘>이라는 책에는, 세계 각지 무당들의 성무방법(成巫方法)이 자세히 조사되어 있다. 그 성무방법에는 샤먼(무당) 후보자의 목을 자르고, 배를 갈라 내장을 갈아끼우고, 뼈를 추려내어 물에 씻어 새살을 붙여 주는 등의 통과의례가 여럿 소개된다.

 

가령 야쿠트 샤만의 한사람인 소프로 자테이에프는 미래샤만(미래에 샤만이 될 사람)은 원칙적으로 사흘간 식음을 전폐하고 [죽은 채로] 유르트 안에 누워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 이전 시대의 미래샤만은 세차례에 걸쳐 이런 의례를 치러야 했는데, 이 기간 동안 미래샤만의 몸은 토막이 났다고 한다.


또 한사람의 샤만인 포트르 이바노프는 이때 일어나는 일을 보다 상세하게 증언하고 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이때 의례집행자들은 샤만 후보의 사지를 절단하고, 쇠갈고리로 사지의 살을 발라낸다. 그리고 뼈를 말끔히 정화하고 육신의 살을 모두 뜯어내며, 체액을 모두 비워내고 안와(眼窩)에서 눈알을 뽑아낸다. 이러한 해체작업이 끝나면, 집행자들은 뼈를 모두 모아 철사로 엮는다. 또 한사람의 샤만인 티모테이 로마노프에 따르면, 이 해체의 의례는 이레 동안이나 계속된다. 이동안 후보자는 죽은 사람처럼 숨도 거의 쉬지 않은채 외딴곳에 누워있게 된다.

야쿠트인 가브릴 알레세이예프의 말에 따르면, 모든 샤만에게는 그 샤만 몫의 맹금모(猛禽母 ; Bird - of - Prey - Mother)가 있다.이 맹금모라는 것은 부리가 쇠로 된 새 비슷한 것인데, 발톱은 갈고리처럼 꼬부라져 있고 꼬리는 길다. 이 신비스러운 새는 두 번, 그러니까 샤만이 영적으로 거듭날 때와 샤만이 죽을 때밖에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샤만이 영적으로 거듭날 때, 이 새는 샤만의 영혼을 수습하여 지하계로 내려가 소나무 가지에다 걸어놓고 이 영혼이 무르익기를 기다린다. 이윽고 영혼이 무르익으면 새는 이것을 다시 이승으로 수습해 온다. 무르익은 영혼을 수습해 온 새는 샤만의 육신을 토막내어, 이를 질병과 죽음의 악령들에게 나누어 준다. 악령들은 제 몫의 살을 맛있게 먹는데, 바로 이 의식을 통하여 거듭난 샤만은 병을 치료할 권능을 얻는다. 즉 자기의 살을 받아먹은 해당 질병의 악령들로부터 그 권능을 나누어 받는 것이다. 질병의 악령들은 샤만의 살을 모두 먹으면 그곳을 떠난다. 그러면 맹금모는 샤만의 뼈를 모두 원상복구 하는데, 이 원상복구가 끝나면 샤만은 깊은 잠에 들었던 사람이 깨어나듯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시베리아 민족들 사이에서도 이와 양식이 똑같은 입문의례가 발견된다. 퉁구스인 샤만 이반 출코가 진술한 바에 따르면, 샤만 후보자가 병들어 쓰러지면 악령들(saarg)이 달려들어 그의 육신을 토막내고는 그 피를 마신다. 이 악령들(죽은 샤만들의 영혼)은 이어서 샤만 후보자의머리를 가마솥에 넣고는 어떤 쇠붙이와 함께 녹이는데, 이 쇠붙이는 나중에 샤만이 입는 무복(巫服)의 장식품으로 만들어진다.


부리야트인에게는 샤만을 성별(聖別)하는 아주 복잡한 공개의식이 있다. 그러나 이들도 성무와 관계가 있는 [신병 - 접신몽]에 대해서는 알고 있다. 크세노폰테프는 미하일 스테파노프의 체험을 보고하고 있다. 스테파노프는 후보자가 진짜 샤만이 되려면 오랜 신병(神病)을 앓아야 한다는 것, 즉 조상무들의 영혼이 몰려와 후보자를 둘러싸고, 이 후보자를 고문하고 때리고 칼로 난도질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러한 의례가 베풀어질 동안 후보자는 죽은 듯이 누워있다. 후보자의 얼굴과 손은 파랗고, 심장의 박동은 거의 없다.

 

위의 몇가지 인용문에서 보이는 성무과정에서의 [죽어서 새로 남]이 바로 의례적 해체의 원형이요, 또한 현대의 고등종교들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초월적 재생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통과의례를 그림으로 남겨놓은 것들이 고대 신전들에 남아있는 벽화들이다. 그리고 그 비밀은 모르지만 그 신들의 위대함은 알고 있었던 사람들이 폐허가 된 신전에서 그 그림을 발견하고, 그림의 의미를 오해하게 되므로써 인신공희라는 끔찍한 예배의식이 생겨났다고 보는 것이 올바른 해석일 것이다.


그러나 이 의례적 해체에 대한 생각이 터무니없는 발상이라고 일축해서는 안된다. 성무과정에서 보는 환상들은 우리들 대부분이 기억하지 못하는 전생과 현생의 통로에서 실제로 있었던 과정을 자신의 영혼이 재구성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죽으면 육신은 완전히 해체된다. 죽은 여건에 따라 다르지만, 시체를 짐승이나 벌레들이 파먹고, 초목과 미생물은 썩어서 분해된 육신을 먹고 자란다. 우리는 시체를 먹은 그 짐승과 초목과 미생물도 포함된 음식을 먹으면서 살아간다. 이 생명순환의 무대를 우리는 생태계라고 부르며, 생태계는 또 무기물까지 포함하는 에너지 순환계통 위에 성립되어 있다.


우리들의 무의식은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물리현상인 심령현상의 세계를 통해, 이 에너지 순환계통의 전 과정을 파악하고 기억하면서 영적으로 성숙해 간다. 무당들은 바로 이 세계로 가는 길목을 찾아내고, 그 세계를 출입하면서, 사람들이 잊고 살거나 모르고 살아가는 그 세계의 힘과 법칙을 사용하여 인류를 지도해 나가는 것이다.
그 세계가 정말로 있는가? 있다. 그 세계는 과학자들이 그 구성성분을 발견하고서도 그 작용방식은 아직도 모르고 있는 [중성미자]의 세계이다. 그 내용은 이 부분의 주제와 너무 동떨어지므로, 관련되는 내용인 [신령학]해설에서 다루기로 하겠다.
의례적 해체가 가사상태와 비슷한 상태에서 일어난다는 사실, 그것이 실제로 몸을 토막내고 찢어발기는 과정이 아니라 깊은 명상상태에서 벌어지는 환영이라는 사실, 그리고 그 과정을 겪은 후에 생사를 초월하는 힘을 얻는다는 사실들은 바로 이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도 일부 지역의 종교인들에 의해 행해지는 의례적 해체는, 바로 자신의 영적 체험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개발된 고대식 강의의 일종으로 이해되어야 옳다.

 

6) 백정과 도깨비
이제 무당의 본질을 밝히기 위해 잠시 미루어 두었던 [축제와 동이문화와의 관계], 즉 축제의 각 단계가 무당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동이족들의 문화습속들은 오랜 기간에 걸친 집권계층의 지속적인 탄압을 받은 결과, 불과 얼마전까지만 해도 국가권력에 의해 제도적으로 억압받던 천민들의 직업으로 변모되었다. 즉 무당 . 백정 . 의원(醫員) . 장인(匠人) . 예인(藝人)등은 고대에 신전의 주인이었거나 신전에 소속되어 있던 신관(神官)들이었는데, 동이족의 부흥을 두려워한 왕조들의 오랜 탄압을 받아 천민이 된 사람들인 것이다. 이들의 직업, 정확히 말하자면 조상들로부터 대물림한 유업들이 고대의 동이문화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지위는 박용숙 선생의 여러 저서들을 읽어보면 쉽게 알수 있다.


그 내용들을 고증하고 증명하는 작업은 각 방면의 전문가들이 맡아야 할 일이지, 글쓴이 같은 아마추어의 능력으로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세상을 바꾸는 위대한 학문적 업적은 문외한의 기상천외한 착상과 전문가의 피땀어린 노력이 결합되어 탄생하는 법이다. 글쓴이는 이인(異人)이 되는 공부를 하는 사람으로서, 어느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될 생각은 별로 없는 [영원한 아마츄어]일 뿐이다.
본론으로 돌아가서, 동이의 통과의례 즉 국중대회에는 준비기간과 고사, 축제와 야합의 절차가 있다고 했었다. 그리고 그 각각의 내용을 간단히 소개한 바 있으며, 그 절차들이 뒤에 설명될 신정(神政)의 절차라고 설명하였다.


그런데 우리는 앞에서 동이의 첫 발생지를 산중 깊은 곳에서 수행생활을 하던 환인의 환국으로 설정했던 사실을 상기해야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환국에서 신정을 행하지 않았다면, 그들이 만든 통과의례가 과연 어떤 의미로 이해되어야 하는지가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동이의 통과의례가 꼭 환국에서 시작되었다는 근거는 없지만, 동이들이 봉토를 통해 세상을 다스리고 자신들이 직접 정치에 관여하지 않았던 사실은 브라만교의 풍습을 보더라도 충분히 알수 있다. 그리고 단군신화도 세상을 다스리는 일을 서자(庶子)에게 위임하고 있다.


동이가 정치에 직접 관여하지 않은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정치보다 더 가치있는 일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고, 그것은 초월과 영생에 관계된 것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통과의례가 환국에서 유래한 것이라면, 그 목적도 이와 관계시키는 것이 합리적이다. 이런 견해는 정치조직을 갖추지 않은 씨족집단에도 통과의례인 성인식이 있다는 점을 볼 때, 보다 가능성이 높아진다.
바로 이런 관점에서 희생의 제의를 무당의 접신체험으로 이해할 수 있고, 결국 환국의 구성원들은 초월적 생명형식인 신령과 교류할 수 있는 초인족이었다는 추정이 나오게 된다. 이는 결코 억지주장이 아니고, 거의 모든 종교경전이 신들과 교류할 수 있었던 사람들에 대한 기록으로 메꾸어진 사실이 증명하는 진실이다.


그런 초능력자들은 오늘날에도 우리 곁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되는데, 그 대표적인 부류가 무당과 영매(靈媒) 등이며, 여러 종교의 성직자들 중에서 일부도 그런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결론적으로 희생의 제의에서 나타나는 의례적 해체는, 무당이 소생(甦生)하는 수련과정에서 겪는 정신적 체험을 보여주는 하나의 방편이라고 보아야 한다. 여러 종교들의 수련법에서 이 의례적 해체와 유사한 정신적 체험을 기록하고 있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무당의 복권은 이 통과의례를 제대로 복원시켜, 영계(중성미자의 세계)와의 교통을 재개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객관적 학문으로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편견없는 관찰과 조사가 선행조건이다.


물질의 세계도 관찰자(실험자)의 주관이 결과를 결정한다는 사실이 이미 증명된 지금, 그럴 리가 없을 것이라는 부정적인 시각에서 심령현상을 연구하면서 긍정적인 결과를 바란다면 시셋말로 [또라이]다. 인류의 마지막 희망이요 축복인 초인시대는 바로 이런 또라이들이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6. 바다와 용궁

1) 바다와 명당
우리들 지구상에 사는 인류에게, 바다는 하늘과 땅을 빼면 가장 중요한 자연환경이다. 이와 같이 중요한 바다는 풍류의 진리체계에도 그대로 도입되었으니, 원리적으로는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중성적 존재가 바다라고 생각하였고, 이 중성을 통치구조에 적용하여 신전을 [바다]라고 불렀었다.


지금 우리가 쓰는 [바다]라는 말은 본래의 의미가 축소되어있는 대표적인 낱말이라 할수 있다. 지금 우리가 해역(海域; sea)의 뜻으로 쓰는 [바다]라는 말은 본래는 [하늘]을 가리키는 말이었었다. [하늘]의 뜻으로 쓰이는 [바다]는 [ ] + [라]로 분해될수 있다. 여기서 [라]는 지금의 말로 [땅(地)]이다. 그러면 [ ]은 무엇인가? [ ]은 [해 . 달 . 별]의 총칭이다.


[해(日)]는 햇님의 속성을 나타내는 말로 [밝음 . 붉음]등이 지금도 쓰이고 있는만큼, 본래 햇님을 나타내는 [ ]이라는 말이 있었음을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 [달(月)]은 [보름]이라는 말의 어근인 [볼]이 달님의 뜻으로 쓰였던 말이라는 학자들의 연구결과가 있다. [별(星)]은 지금 쓰이는 발음이 [ ]과 비숫하므로 더 설명할 것이 없다. 결국 [바다]는 본래 [하늘]의 뜻으로 쓰이던 말이었다.


하늘과 바다는 신기할 정도로 닮은 모습을 보여준다. 그 색깔이 낮에는 푸르고 밤에는 검다. 하늘에 구름이 떠있듯이 바다에는 섬들이 떠있다. 그리고 둘은 수평선에서 완벽하게 하나가 되어 구별할 수 없다. 하늘이 땅위의 울타리를 형성하듯이 바다는 땅아래의 울타리가 된다. 결국 하늘과 바다 모두가 [ 의 땅]으로 불릴 수 있었고, 한편으로는 [삼한의 울타리]라는 뜻의 [한울]로 불리웠을 것이다.
따라서 이 [바다]는 동이족 천신들의 활동근거지인 동시에, 뒤에 설명될 [신정과 풍속]의 무대로서 동이들의 정체를 밝히는 결정적인 단서가 되는 말이다. 풍류의 진리 중에서 핵심적인 내용들이 이 [바다]라는 말 속에 녹아들어 있으며, 바다의 풍류적 의미는 오대양(五大洋)과 마찬가지로 지구 전체를 감싼 상징영역을 형성하고 있다.


풍류에서는 하늘이 허공과 그 정화(精華)인 태양을 통털어 가리키고, 땅은 대지와 달(月)을 함께 지칭한다. 마찬가지로 바다는 그 정화인 별을 반드시 포함하게 된다. 바다와 별을 연결시키는 것이 아무 근거가 없는 것 같지만, 바닷가에 사는 사람들은 어두운 밤에 [시그리 불]이라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그 모양이 밤하늘의 별과 거의 똑같이 생겼으니, 별을 바다의 정기로 보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다.
바다를 하늘과 땅의 중간존재로 보는 관념을 대표하는 것이 수평선(水平線)이다. 이는 땅위에서 하늘과 땅이 만나는 곳이 산이기 때문에 산이 중성의 상징이 되었듯이, 바다에서는 수평선에서 산마루에서보다 더 완벽한 모습으로 하늘과 땅이 만나고 있다.


풍류에서는 이런 바다의 중성적 성격을 따서, 하늘과 땅이 만나는 곳을 [바다]라는 이름으로 불렀으니, 그 이름이 <삼국유사>에 나오는 [檀君(단군)]의 칭호에 등장하는 [박달]이다. 근래에 민족사학계에서는 단군의 의미 중에서 선군(禪君)의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박달]의 의미를 제거하려는 경향이 발견되기도 하지만, 글쓴이가 보기로는 신시를 도읍으로 한 환웅의 나라이름이 [배달(倍達)]이었으므로 [박달]로서 [배달]의 뜻을 이었다고 생각된다.


[박달]은 [밝 달]이다. [밝]은 [밝음 . 불음(부풀음 . 바람) . 붉음 . 푸름 . 바람(望)] 등의 의미와 연결되며, [달]은 [달(月) . 땅 . 들 . 돌] 등의 의미와 연결된다. [밝]의 뜻은 태양의 여러 속성들을 반영하고, [달]의 뜻은 주로 땅의 속성들을 반영하고 있다.
이 [밝달]은 풍류의 중심신전인 [아사달]의 다른 이름이니, [밝은 땅 . 아침 땅 . 새 땅]의 의미가 된다. 그리고 우리 고대어에서 [박(받)]과 [달(닫)]은 모두 산(山)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 [밝달]의 가장 널리 알려진 이름이 [명당(明堂)]이다.


[명당]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첫째 천자가 제후를 인견하는 궁전, 둘째 천자가 정사(政事)를 보는 궁전, 셋째 썩 좋은 묏자리 로 되어있다. 이 외에 우리나라의 일부지역에서 무당들이 신당(神堂)을 명당이라 부른다.
이런 뜻들은 지금까지 설명한 풍류의 중심신전인 [밝달]의 뜻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으로서, 더 보충설명할 필요도 없다. 특히 묏자리를 명당이라고 부르는 풍습은, 고분이 신전인 동시에 조상의 무덤이기도 했던 사실을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가 된다. 따라서 [밝달]은 곧 [일월신전(日月神殿)]이요, [삼신산(三神山)]인 것이다.


이런 생각을 지원해 주는 증거자료가 바로 [바다]의 한자음인 [해; hai]이다. [海]는 [每]의 [물(水)]이라는 뜻이되는 바, [每(매)]는 [아이를 낳는 어미]의 뜻으로서 [사람이 불어난다]는 뜻으로 쓰였던 글자이다. 즉 [햇님의 아이를 낳아 부풀리는 것]이 [每]라는 글자의 속뜻인 것이다. 여기에 다시 물을 뜻하는 삼수변을 덧붙인 것은 [해(日) 무리(衆)]의 뜻을 강조하기 위한 것일 뿐이다. 결국 [바다]는 [햇 달], 즉 [햇님 땅님]이라는 뜻이다.


[바다]가 해와 달의 합일체라는 사실은 [白]에 대한 <강희자전>의 풀이에서도 찾을 수 있다. <자전>에서 [白道謂明道也(백도는 명도라 한다)]라고 하여, [바다]와 연결가능한 [백도]와 [밝도]의 두 가지 발음을 제시하고 있다.
<자전>이 제시하는 이 [백도]의 뜻을 정리해보면, [백도]는 그림을 그리는 일, 혹은 백정(白丁)과 같이 실제로 동물을 해체하거나 술을 빚는 일 등과 관련되며, 이런 일을 담당하는 사람들은 흰옷을 걸치고 띠(茅)로 덮은 초가에서 살았으며, 이들을 가리켜 [백민(白民)] . [백도(白徒)]라 했다고 한다. 이 모든 일들이 동이들이 직능에 포함된다.


바다의 뜻을 [햇 달]까지만 추적해내면, 그 다음에는 [바다]와 보다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단어를 찾아낼수 있으니, 그 단어가 바로 [밭(田)]이다. 글자 모양을 보면 알수 있듯이 [田(전)]은 곧 [피라밋]을 나타내는 [古]의 변형이다.
[밭]의 고어는 [받]이 되는데, 이 말은 수메르어 [바드(BAD)]와 곧바로 연결된다. 즉 5,0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말인 것이다. [받]은 동이들의 터전이다. [받]에 살던 [이(夷)]는 [받이]이다. 이 말은 그대로 영어에서 [몸]을 뜻하는 [바디(body)]와 연결된다. 이 사실은 동이들의 중심 역할이 [몸받이]였던 사실과 직결된다. [씨내리]와 [씨받이]가 동이들의 역할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이런 견해가 올바른 것임을 쉽게 알수 있다.


여기서의 [씨받이]가 바로 바다와 연결되는 것은 [씨]가 [sea(바다)]와 [seed(씨)]의 두가지 단어와 연결되는 점만 보더라도 확실하다. [씨]는 [알]과 함께 쓰여 [씨알]이 되는데, 이 말을 고상한 쪽으로 풀면 씨실(가로 줄)과 날실(세로 줄)이 되어, 베(布)나 그물(網)을 짜내게 된다.
여기서 날실은 일(日)줄로서 해실(日絲)이 되고, 씨실은 지실(祇絲)로서 [달(月.地) 줄(絲)]의 뜻이 된다. [祇]는 중국음이 [지(zhi)]이고, 땅귀신의 뜻으로 귀(鬼)나 제(帝)와 같은 뜻이며, 여기서 보일시변(示)이 떨어져 나가면 씨(氏)가 되어 혈통을 나타낸다.
그런데 풍류의 실상을 밝히려면 여기서 한단계 더 들어가서 육두문자를 구사해야 한다. 육두문자(肉頭文字)란 골머리(骨頭)에 대응하는 말인 살머리(肉頭) 또는 샅머리, 즉 좇대가리에 대한 말을 일컫는다.


해는 남성을 상징하고, 땅은 여성을 상징한다. [날] . [일(日)] . [알]은 남성의 상징으로서 육두문자에서는 [불알], 유식한 말로는 [고환(睾丸)]이 된다. 이것이 [씨알]에서의 [알]의 정체이다. 그러면 [씨]의 정체는 저절로 드러난다. [씨입(씹 . 씨집)]속에 숨어서 [불알]을 키워 아이로 만들어내는 땅귀신, <노자>에서 말하는 [곡신(谷神)]이 바로[씨(氏)]인 것이다.
이제 [바다]를 [받 . 밭 . 박달 . 밝땅 . 십토(十土; 씹터)] 등의 말로 나타내어도 된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박용숙 선생이 단군을 바다의 신 포세이돈으로 본 것이 결코 억지주장이 아님을 알게된다. 그리고 이 바다의 중심기능이 씨받이(씨밭)나 몸받이(body)인 사실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바다]는 우물이라 불리웠으니, 우물 정(井)자가 두 개의 열 십(十)자로 만들어진 사실도 또한 씨받이와 깊은 관련이 있다. 지금 쓰이는 열 십(十)자는 고대에는 일곱 칠(七)자 였다. 박용숙 선생의 인체수리에 따르면, 七(칠)은 성기의 부호이다. 두 개의 성기가 만나는 것은 바로 성교(性交)이고, [씹]은 뒤에서 설명될 신정(神政)의 핵심요소이기 때문이다.
[바다]는 우물이므로 당연히 물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바다]에서 파생되는 첫째 개념은 [바닷물]이다. 여기서 우리는 [바닷물]의 뜻을 밝혀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2) 삼성수(三聖水)
[바다]는 신전이라는 성격 때문에 외부세계와 격리되어 있었다. 여기서 바다의 새로운 개념이 파생되었으니, [밧 따] 즉 [바깥의 땅]이 그것이다. 동이의 신전인 삼신산은 지금도 풍수지리의 기본원칙으로 지켜지는 배산임수, 즉 앞은 물이 두르고 뒤에는 산이 감싸주는 지형조건을 선택하여 건설되었을 것이다.


이런 추측은 [아사달]이라는 이름이 [물가의 비탈 언덕]을 의미하는 것과, 아사달이 단순한 종교적 신전의 역할만 한 것이 아니라 정치적 도읍의 역할을 겸했기 때문에 반드시 군사적 수비문제를 고려해야 했던 사실에 근거를 둔 것이다.
이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원형은 바다나 호수 속의 섬이었을 수도 있다. 이와같은 생각은 신전의 주인인 용왕의 처소가 [못(澤)]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가능성이 아주 높아진다. 그러나 이런 부분들은 여기서 논의할 일이 아니라 고고학의 발굴성과를 기다릴 일이다.
여기서 배산임수를 끌어들인 이유는 이 산과 물에 의해 신전과 바깥 세상이 격리되었던 사실을 중시한 것이다. 신전의 사람들은 이 물의 바깥세상을 [밧따(밖땅)]라 불렀을 것이고, 속세의 사람들은 신전의 사람들을 [바닷] 사람들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바닷속]이라고 할 때에는 신전을 가리키는 말이 된다. [밧따] 사람들에게는 신전을 감싼 물은 자기들의 땅에의해 둘러싸여 있으므로 신전이 바닷속이 되고, [바닷] 사람들에게는 자기들의 신전이 [바다]의 원형이므로 안(內)에 있고, 속세인들은 [밧]에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 신전을 감싼 물을 [바닷물]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 바닷물은 처음에는 신전(바다)을 속세와 격리시키는 역할을 하는 물이었다. 땅은 바닷물에 의해 [안땅(內地)]과 [밧땅(外地)]으로 구별되었으며, 이 두 땅을 이어준 것이 [달 닛]으로서 지금 우리가 [다리(橋)]라고 부르는 것일 것이다.


이렇게 물로 에워싸인 바다는 또 세가지 종류의 물로 구성된다. 그런데 바다는 신전으로서 성지(聖地)이므로, 바다의 물은 성수(聖水)이다. 따라서 바닷물이 세가지라면[삼성수(三聖水)]라고 부를수 있다.
삼성수의 첫째는 [바다]와 [밧따(외부세계)]를 구별하는 바닷물이요, 둘째는 그 바닷물과 우물을 이어주는 시냇물(蓋川)이요, 셋째는 신전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지황의 거처인 우물물이다.


바닷물은 이미 설명하였으니 시냇물을 살펴보자면, 가장 먼저 [시내수(市內水)]의 뜻을 찾을 수 있다. [시(市)]는 물론 [신시(神市)]가 된다. 신시의 안을 흐르는 물이 시냇물인 것이다. 이 시냇물은 실제로는 물이 흐르는 길, 즉 [물길(水路)]이었다.
시냇물이나 물길이나 지금은 똑같은 말이지만, [물]이 [무리(衆)]와 [마리(머리)]를 뜻한다는 사실을 알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신전에 살던 신들이 다니는 [신도(神道)]가 바로 [물길]이었고, 삼한의 강역내에 있었다는 [물길(勿吉)]이나 [말갈(靺鞨)]은 바로 이 신의 길이었던 것이다.


이 물길은 신성한 권위를 보호하기 위해 일반인들의 눈길이 닿지 않도록 은폐되었는데, 고분이나 고대신전에서 자주 발견되는 비밀통로, 즉 [밀도(密道)]가 바로 이 물길이었다. 앞의 [천축]에 대한 해설에서 인용된 <산해경 . 해내경>을 다시한번 살펴보자.

東海 안, 北海의 구석에 나라가 있는데 이름은 朝鮮이며 天毒(天竺)에 해당된다. 이 나라의 사람들은 물 속에 사는데 거기에는 畏人, 愛人이 있다. 西海 안, 流沙의 가운데 나라가 있는데 이름은 壑市. 西海 안, 流沙의 서쪽에 나라가 있는데 이름은 氾葉. 流沙의 서쪽에 鳥山이라는 것이 있는데, 세개의 냇물(川)이 여기에서 흘러내린다.

 

여기에 나타나는 [세개의 냇물(三川)]을 박용숙 선생은 <삼국유사>의 내용과 관련시켜 살피고 있다.

그렇다면 경주(慶州)에 있어서 용궁은 구체적으로 어디일까. 물론 그것은 코에 해당하는 남산(南山)을 중심해서 찾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우선 남산의 남쪽에 있는 천룡사(天龍寺)에 주목하게 된다. <삼국유사 . 천룡사조>의 문장을 검토해 보자


"동도(東都)의 남산 남쪽에 한 봉우리가 우뚝 솟아 있는데, 향속(鄕俗)에서는 고위산(高位山)이라고 한다. 산의 남쪽에 절이 있으니, 향간 속칭에는 고사(高寺) 혹은 천룡사라고 한다. <토론삼한집(討論三韓集)>에 이르기를 '계림 땅에 객수(客水) 두줄기와 역수(逆水) 한줄기가 있는데, 그 역수와 객수의 두 근원이 천재(天災)를 진압하지 못하면 천룡사가 뒤집혀 가라앉는 재앙을 이루게 된다 ......."
여기에서 보이는 고위산이란 지금 남산 남쪽에 솟아있는 금오산(金鰲山)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점은 역수와 객수가 모두 천룡사에서 흘러나온다는 사실인데, 이점은 조금전에 <산해경 . 해내경>에서 인용했던 문장에도 보이는 구절이다. 즉 조산(鳥山)에서 세 개의 냇물이 흘러내린다는 구절이다. ...... 그렇다면 이때의 세줄기 물이란 무엇인가? 즉, 두줄기의 객수와 한줄기의 역수가 천룡사에서 흘러나온다는 것은 대체 무슨 의미를 지니는 것인가. 그것은 곧 코와 입 사이의 두줄기 인중(人中)을 뜻한다.


즉, 두줄기 인중은 코에서 음기와 양기가 흘러내려와 입으로 들어가는 길(통로)이다. 따라서 여기에서 말하는 역수란 곧 입에서 코로 올라가는 길, 즉 통로를 가리킨다. 이를테면 객수가 위에서 내려오는 강신(降神)의 통로라면, 역수는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천자의 통로인 것이다.
경주 남산은 양쪽 옆으로부터 북쪽을 향해 물이 흘러내린다. 동쪽에서 흘러내리는 문천(汶川)은 반월성(半月城) 앞을 통과하여, 서천(西川)인 모량천(毛良川)과 합류하여 서천의 본줄기를 이루고 있다. 뿐만아니라 경주 시내의 동북쪽에서 다시 북천이 흘러내려서, 문천과 수평선을 그으며 서천과 합류하게 된다. 따라서 입에 해당하는 지역은 반월성, 안압지(雁鴨池), 황룡사, 분황사, 첨성대, 석성지(石城祉), 계림(鷄林) 등의 고적지가 있는 구역인데, 이들은 모두 물 속에 갇혀있는 셈이다. 다시 말해서 이런 건축물들은 계획적으로 물가에 지었다는 결론을 얻게된다. ...... 그런데 경주의 문천에는 역수에 관한 전설이 전해져 있다. 이를테면 문천에는 물은 흘러내리지만, 반대로 모래는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이다. 이점은 <산해경 . 해내경>에서 인용된 문장 속의 유사(流沙)라는 문구와 일치하는 것이다. ...... 그렇다면 이때의 유사, 즉 역수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앞에서도 지적한 바지만, 그것은 천계에서 지계로 올라가는 길이다. 따라서 문천은 곧 통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천로(天路)의 상징이다. 실제로 옛날에 문천은 포항에까지 연결되어서 임금이 배를 타고 그곳으로 왕래했다는 전설이 있다. 물이 흘러내리는 것이므로 배를 타고 거슬러 올라가기는 힘들다. 이는 문천이 곧 통로가 아니라, 그러한 천로가 문천을 끼고 올라간다는 것을 뜻한다. 신라시대에는 안압지 일대에서 불국사로 가는 길은 비 한방울 맞지 않고 갈수 있었다고 한다. ...... <사기 . 진시황 본기>에는 시황(始皇)이 천하를 평정하고 조궁(朝宮)을 짓는데, 거기에 다음과 같은 문장이 보인다.


"조궁을 위수의 남쪽 상림원 속에 조영(造營)하였다. ...... 주위에는 건너는 낭하(廊下)로 둘러치고, 궁전 밑으로는 낭하 채로 남산으로 갈 수 있었다. ...... "
위 문장은 천로가 낭하로 이어졌음을 암시하고 있다.

 

이 낭하로 된 길인 천로가 복도(復道) 또는 갱도(坑道), 즉 지붕을 덮어 은폐한 도로임을 알수 있다. 그것을 시냇물이라 불렀으니, 이것이 바로 [강물(江水)] 또는 [개천(蓋川)]이 된다. 강물의 [江]은 물이 흐르는 구멍(工)을 나타내는 글자이다. 즉 구멍속을 흐르는 물을 뜻하는 [갱물(坑水)이 강(江)의 실제 뜻이 되는 셈인데, 이 [강]은 지붕을 덮어 외부에서 보이지 않게 만들었던 고대신전의 비밀통로였던 것이다.
미천한 신분의 사람이 갑자기 출세한 것을 묘사하는 속담인 "개천에서 용났다"는 말은 이 개천(蓋川)에서 용왕이 바깥 세상으로 나오던 풍습에서 유래한 말이다. 용왕이 밖에 나올때는 평복을 입고 변장하여 민정(民情)을 살폈던 것이니,암행어사의 유래도 이 [개천에서 용나기]에서 찾아진다.


바닷물에서 개천을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샘물에 닿게된다. 이 샘물이 삼성수의 세 번째이면서 가장 고귀한 물인 우물(井)이다. 우물은 웃물(上水), 안물(內水), 암물(雌水)로 풀이된다. 샘 천(泉)자는 달(月)의 모습을 나타내는 백(白)과 물(水)을 합친 글자로서, [泉(천)]은 달물(月水)의 뜻을 나타내는 글자이고, 이 [달물]이 지황의 상징임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다.


여기서 우리는 햇님과 달님이 [바다]를 통해 합일될 수 있는 근거를 발견한 셈이 된다. 달(月)의 옛말은 [볼]이었다고 한다. [보름달]에서의 <보름→볼>이 [달]의 뜻이었다고 하는데, 이 [볼]이 [白]을 통해 [밝], [해], [맏] 등의 뜻과 연결되는 다리 역할을 해 주므로서, 일월(日月)이 합쳐져서 [밝달]이 되는 원리를 해명해 주는 것이다.
삼성수의 또 다른 측면은 [바다]의 구성원들이 모두 [물이]로 불리웠던 점에 있으니, [성수(聖水)]가 성스러운 사람(聖人)의 뜻으로도 쓰였다는 것이다.


먼저 우물의 사람들은 [물이(水人 정확히는 水夷)]로 불린다. 다음으로 [바다]가 삼신산이었으므로, [산이(山人 또는 山夷)]라는 이름이 나온다. 산(山)의 순 우리말이 [뫼(메)]이므로 [뫼이]라는 이름이 있을 수 있는데, 이 이름이 [무리]가 된 것 같다.
무리 중(衆)자는 [해(日) 밑에 나란히 선 세사람]의 모습인데, 고대에 [산(山)]과 [화(火)]의 글자모양이 구별하기 어려웠던 사실을 생각하면 이들은 [산이], [뫼이], [불이]등으로 불리웠을 것이다. 그러다가 삼신산의 이름이 바다로 굳어진 후에는 [물이]라는 이름에 동화되어 [무리]가 되었을 것이다. 그것이 지금의 [무리 중(衆)]이라는 새김의 유래라고 생각된다.


[물이]의 마지막은 [머리]이다. [머리]는 [맏이(伯夷)]에서 바뀐 것으로 볼수 있다. [맏이(伯夷)]가 [밝이], [볼이(月夷)]등으로 바뀔 수 있음은 더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이 [머리]는 [맏이]의 뜻이 마지막으로 정착한 형태로 지금까지 쓰이는 것이라 하겠다.
이상의 세종류의 [물(水)]과 [무리(물이)]가 다른 특별한 도학적 . 역사적 의미가 없다고 할지라도, 한가지 사실은 분명히 증명해 준다. 그것은 동이족의 성지가 [바다]라는 이름으로 불리웠던 적이 있었고, 지금도 한겨레가 물을 신성시하는 심층의식은 그때 형성되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바다]에 대해 한가지 빠뜨릴수 없는 내용이 더 있으니, 그것은 삼신산이 바다로 불리던 당시까지만 해도, [물(水)]과 [뭍(陸)]이 같은 뜻으로 쓰였다는 점이다. 이 두 말이 언제 분화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땅(地)과 물(水)이 모두 음성(陰性)으로서 지황(地皇)의 관할에 속했었던 사실은 거의 확실하다. 그 시기는 [땅]과 [달(月; 물)]과 [딸]이 모두 [달]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때일 것이며, 고모(姑母; 坤母)가 모든 영토권을 장악하고 있던 환웅의 치세였을 것이다.


이때에 [무당]이란 이름의 원형이 나타났을 것이다. 물과 뭍을 동시에 다스리던 천제(天帝)의 칭호가 [물한(水王)]과 [뭍한(地王)]과 [뭇한(衆王)]을 모두 뜻하는 [물한]에서 나오고, 후세에 무당으로 변하게된 [말한(馬韓)], [모한(母韓 . 牟韓)], [무함(巫咸)] 등이 나왔을 가능성은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다고 보여진다.

 

3) 용과 뱀
용이나 뱀에 대한 동서양의 정서는 정반대의 양상으로 나타난다. 동양의 경우에는 태고시대 최초의 성인으로 추앙되는 복희씨가 뱀의 몸통을 지닌 사람으로 묘사되고, 신전이나 왕궁의 지붕에는 예외없이 용이 그려질 뿐만 아니라, 제왕은 반드시 용으로 자신의 상징을 삼았다.
또 동양의 삼대종교를 살펴보더라도, 불교에서는 일곱 개의 머리를 가진 뱀이 깨달음의 상징으로 신성시되었고, 도교의 경우에도 수련의 최종단계에 가면 적사귀신(赤蛇歸神)이라 하여, 단광(丹光)이 뱀이 몸을 사리고 있는 듯한 형태로 수련자에게 빛을 비추다가, 돌연 움직이기 시작하여 정수리에 이르면 붉은 뱀 형태로 변해 몸 속으로 들어가서, 몸 속의 이곳 저곳을 빠짐없이 돌아다닌다고 한다. 유교는 태호복희를 조종(祖宗)으로 하는가르침을 내세우는 만큼, 더 거론할 필요도 없다. 이런 사례들은 동양에서 용이나 뱀이 지혜와 권능의 상징으로 이해된 친근한 동물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서양에서는 용이나 뱀이 죄와 악 그 자체의 상징이다. 이스라엘의 민족종교인 유대교에서 갈라져나와 훗날 서양의 대표적 종교가 된 그리스도교의 <성서>에는 뱀이 모든 죄와 악의 시원인 사탄으로 묘사되어 있으며, 이런 전통을 이어받아 중세 교황청의 지배를 받게된 봉건영주의 기사들은 용을 죽이는 것을 최대 최고의 영예로 생각했었다. <그리이스 . 로마 신화>에는 많은 괴물이 나오지만 가장 끔찍한 괴물은 페르세우스에게 머리를 잘려 죽은 메두사인데, 메두사의 머리카락은 뱀으로 되어있다(이 뱀이 무당의 상징인 트레머리였음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이와 같이 상반된 정서의 밑바닥에는 어떤 역사적 사실이 숨어 원인을 제공하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특정사물에 대한 호감이나 혐오감이 형성되는 데에는, 장기간에 걸친 감정의 축적이나 의도적이고 집중적인 교육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서양이 뱀이나 용에대해 뿌리깊은 악감을 가지게 된데에는, 용이나 뱀을 상징으로 삼는 집단들과의 오랜 투쟁이 그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 집단들은 동양에서 건너간 무당들, 즉 동이족의 성직자들이었을 것이다. 그들이 상징으로 삼았던 용과 뱀은 우루보로스라고 불리는, <천부경>의 진리를 원과 세모꼴로 형상화한 것이었다.


이들의 엄청난 능력과 급속한 확산력은 당시 미개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던 서양세계를 급속도로 잠식하였고, 특히 일종의 혼혈정책인 동이족의 신정은 그들에게 혈통단절의 위기감을 느끼게 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지배세력들은 목숨을 건 전쟁을 통해 그들을 몰아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 후 동이족이 다시는 발붙일 수 없도록 내부적 결속을 강화하는 한편, 동이족의 후예인 마술사들을 색출하여 제거하기 위해 용사냥과 뱀(마녀)사냥에 열을 올렸던 것이다.


이와 반대로 동양에서 용이 천지조화를 통하여 사람들에게 이익을 주는 군왕의 상징으로 묘사되는 것은, 동이족들의 본고장이 동양의 고산지대에 속하는만큼 동이족의 지배에 거부감을 느낄 이유가 적었고, 그들의 지도를 받아들여 많은 혜택을 입었기 때문으로 보여진다.
지금까지는 용과 뱀을 구별하지 않고 동이족의 상징이라는 측면에서만 생각하였으나, 실제로는 용과 뱀 사이에는 엄연한 차이점이 있었다. 그 차이점은 여러 가지가 있으나,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뱀 중에서 특별한 종류가 용으로 구별되었다는 것이다.
뱀은 지혜와 의술의 상징이었다. <성서>에서도 뱀이 이브와 아담에게 해준 일은 지혜의 눈을 뜨게 한 것이었다. 그리고 <천부경>의 입장에서 볼때에도 뱀은 소와 대비되는 형이하학적 측면의 상징으로서 밑변삼각형(△)으로 표시된다. 그런데 뱀은 지구상의 어떤 곳에서나 흔히 볼수 있는 동물로서, 신비성을 부여받을 여지가 거의 없다.


그러나 용은 우선 생김새부터 뱀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용의 생김새는 "소머리(혹은 말머리 . 양자악 머리 . 물고기와 코끼리의 혼합된 머리 . 악어와 호랑이의 혼합형 . 뱀머리 등등) . 코끼리 코 . 사슴 뿔 . 말갈기 . 뱀 몸체(비늘달린 몸) . 악어가시 . 물고기 꼬리 . 매 발톱 . 악어 발의 형상을 골고루 가지고 있다.
용의 이와 같은 모습에 대해, 일반적으로는 우리의 국어사전에 나오는 것처럼, 여러 가지 상서로운 동물들의 신체적 특징을 혼합해서 만들어낸 상상의 동물이라고 생각한다.


이와같은 관점에 대해 중국의 왕대유는 <용봉문화원류>에서, 용의 정체가 당(唐)나라 이전까지 양자강 유역에 살았던 악어의 일종인 만악(灣鰐) 또는 만악과 비슷한 양자악(揚子鰐)이라고 한다. 이 두가지 악어류는 크고 깊은 연못이나 큰강, 바다 속에서 생활하며, 비가 오기전에 울부짖는 습성이 있었고, 그들의 습성을 신성시한 태호족에 의해 토템으로 숭배되었다는 것이다.


또 하신은 <신의 기원>에서 고대 문헌들에 묘사된 용의 여러 특성들이 자연현상을 활물화하여 만들어진 상징이라고 주장하면서, 용의 정체는 구름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어늘날의 위성사진에 찍혀 나오는 구름의 형상은 용의 모습으로 보기에 아무 문제가 없다. 그리고 이런 연구결과들은 용을 미개한 고대인들이 꾸며낸 괴물로 치부해버리는 주장들에 비해 학문적으로 우수하고 올바른 학설들이라 하겠다.
글쓴이는 이책의 <천부경> 역리해설에서, 용을 종족의 표지로 삼았던 복희족에 의해 역리법칙이 처음으로 체계화된 사실을 근거로 용을 천문(天文), 즉 은하수를 몸통으로 하고 별자리를 비늘로 하는 밤하늘의 모습으로 해석하였다.


위의 여러 내용들을 종합하면 용은 단순한 가공의 동물이 아니라, 일기예보를 해주므로써 고대인의 생활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던 실존동물이 모델이 되어 토템으로 신성시되고, 그 토템을 종족의 상징으로 삼은 복희족의 현인들이 찾아낸 자연법칙을 의상으로 걸친 일종의 그림경전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렇게 자라난 용은 [큰 물에 사는 신령스런 짐승으로서, 일월성신의 운행법도와 풍운우로의 변화양상을 알수 있을 뿐만 아니라, 천지조화의 능력까지 가지게된 종족의 표상]이라고 할수 있다. 이는 뱀이 표상하는 삼한의 진리와, 그 인체적용(人體適用)인 의술과 연금술을 터득한 것은 물론이요, 한걸음 더 나아가 천지조화 까지 행사할 수 있는 큰 무당(대도술가)들이 용으로 표현되었다는 뜻이다.
이 과정에서 또 한가지 빠뜨릴 수 없는 사실이 있으니, 용의 형상에는 소의 모습이 결합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용의 모습에서 소머리와 사슴뿔은 <천부경>의 형이상학적 측면을 나타내는 상징이라는 사실은 이미 소개된 바와 같다. 따라서 용은 소나 뱀이 각기 떨어져 있을 때에는 상징할 수 없었던 천지합덕의 상징이 되는 것이다.


이점은 또 완성된 진리 이상의 의미를 가지게 되는데, 고대의 신상이 신체의 각 부위가 고유의 상징적 의미를 가진다는 점과 관계된다. 고대의 신상은 단순한 예배대상이 아니라, 머리 . 몸통 . 수족이 각기 귀족 . 평민 . 노예의 신분을 상징하고, 머리의 눈 . 코 . 입 . 귀나 몸통의 오장육부, 수족의 손가락과 발가락등이 모두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등, 일종의 법전(法典)과 같은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용과 뱀의 가장 큰 차이는, 뱀에게는 뿔로 상징되는 중앙신전과 다리로 상징되는 지부(支部) 또는 속국(屬國)이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 용은 제왕의 상징으로 쓰였지만 뱀은 무당의 상징으로 쓰였던 것이다. 따라서 뱀이 오래 묵으면 용이 되는 것이 아니라, 뱀이 지부신전을 거느리게 되므로써 다리가 생긴 이룡이 되는 것이고, 뿔이 있는 규룡은 오직 하나밖에 없었으며 그곳이 [진한]이었던 셈이다.
따라서 박용숙 선생의 다음과 같은 주장은 고대사회의 핵심을 올바로 지적한 것이된다.

 

바다가 세계를 지배하는 심장부가 되고, 세계를 대리 통치하는 나라나 왕(소단위 신정구역과 신관)은 하천으로 비유된다. 동이들이 나라를 강에다 의존하여 세운다고 한 것도 그런 뜻이다. 산은 신전의 대명사이다. 세계를 지배하기 위한 대리자가 있는 나라에는 신전이 있게 되므로, 무당이 반드시 배치된다. 신채호에 따르면 그것은 [신소도(臣蘇塗)]와 [소도]의 관계가 된다. 신소도는 대신단(大神壇)(중심)이고 소도는 소신단이다. 대신단이 바다의 용궁 속에 있는 신전이고, 작은 소도가 소국을 지배하는 작은 왕국의 신전이며, 오늘날 무당의 당집(서낭당)이 그런 제도의 유물임을 알수 있다.


그런데 신채호는 [소도의 무당(日官)이 왕의 정사에 관여하고, 그 비위사실들을 상제께 보고한다]고 썼다. 이점은 티벳의 밀교제도나 중세 카톨릭의 신정체제에서도 볼 수 있으며, 결국 교황청에서 파견한 신부들이 그들의 교구에 나가 그랬던 것처럼, 바다에서 위임된 무당들은 열국으로 흩어져서 왕들의 정사를 감독하는 기능을 맡았음을 의미한다.


<규원사화>가 [상계에 일대 주신(환인)이 있어, 그가 형체를 드러내지 않고 슬하의 무수한 소신(小神)들을 시켜서 세계를 다스린다]고 했고, [단군시대에 천하를 다스림에 있어서 대국을 아홉, 소국을 열두나라로 나누어서 다스렸다]고 쓴 것은 이점을 암시하고 있다. 이때의 소신들이 무당들이라는 것은 오늘날의 무당이 걸치는 특이한 의상이나 신사(神事)의 여러 내용으로 미루어 알수 있고, 또 주목할 점이다.
오늘날의 무당은 교황청이 없는 카톨릭의 신부처럼 종교의 나라(용궁)를 잃어버린 성직자의 후예들로 이해되며, 따라서 그들은 체제를 상실한 성직자로서 품위와 그 본질적인 능력을 잃은 한낱 괴이한 기능공이 되었다. 이런 시각에서 본다면 샤만과 신부의 지위가 별반 다를 것이 없으며, 샤만을 폐쇄적인 성직자로 규정한다거나 또는 신부를 사회에 대한 책임을 지는 열려진 성직자로 특별하게 규정하는 따위의 견해는 잘못된 것이다.

 

4) 용궁과 용왕
옛부터 동서양 각지에는 용궁과 관계된 전설이 많이 전해지고 있다.
효녀 심청이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려고 선원들에게 몸을 팔아, 수신의 노여움을 달래기 위한 제물이 되어 인당수 깊은 물에 뛰어 들었으나, 그 효심에 감동한 용왕의 구조를 받아 극진한 예우를 받은 다음 연꽃을 타고 나와 왕궁으로 들어가서 왕비가 되고, 왕에게 청하여 맹인잔치를 열게하여 결국 아버지를 만나서 눈을 뜨게 한다는 <심청전>의 이야기, 용왕이 불치병에 걸려 뭍에 있는 토끼의 간을 구해 먹으면 낫는다는 의원의 말을 듣고 자라를 시켜 토끼를 꾀어 잡아왔으나, 간을 떼어서 깨끗이 씻어 나무에 걸어놓고 왔다는 토끼의 거짓말에 넘어가 살려주었다는 <별주부전>, 도술을 배운 돌원숭이 손오공이 용궁에 들어가서 여의봉을 훔쳐 하늘나라를 어지럽히다가 부처에게 벌을 받는 <서유기>의 이야기, 용왕의 딸인 인어공주가 땅위의 왕자를 사랑하여 자기의 아름다운 목소리를 마녀에게 주고 걸을때마다 고통을 주는 두 다리를 얻어 왕자를 만났으나 자기 마음을 전하지 못하여 사랑을 이루지 못한다는 <인어공주> 이야기 등은 누구나 어릴 때 한 번씩 듣고 자라는 용궁이야기 이다.


이런 이야기에 등장하는 용궁은 주로 강물이나 바닷물 속 깊은 곳에 있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따라서 용궁의 탐사는 물속에서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이 물이나 바다가 물분자(H2O)의 집단이 아니라, 앞에서 설명된 [바다]의 [물]임을 이제는 알수 있을 것이다.
요즘 사람들은 용궁이나 용왕을 전적으로 꾸며낸 이야기로만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용궁이나 용왕은, 정사(正史)는 아니지만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책인 <삼국유사>에 여러차례 등장하는 실존인물과 건축물의 이름이다. 서양의 경우에도 그 초상화가 벽화로 생생히 그려져 전하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이 바로 용왕이었다.


그러나 용왕과 용궁에 대한 직접적인 단서는 중국의 황궁과, 동양 여러나라의 사찰에서 찾아진다. 중국의 황제는 [용(龍)]으로 상징되어, 용상(龍床)에 앉아 용포(龍袍)를 입고 용안(龍顔)을 자랑하였다. 그리고 지금도 사찰에 가서 보면 대웅전의 용마루와 처마 끝에 조각된 용의 모습을 누구나 찾아볼 수 있다. 따라서 용궁은 절(寺)이나 왕궁이었고, 용왕은 황제나 부처였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용왕은 분명히 부처는 아니고, 불교에 우호적이기도 하고 적대적이기도 했던 독자적인 세력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그들이 토착적인 종교세력임은 박용숙 선생이나 서윤길 박사 등이 이미 밝힌 바 있고, 그 토착종교가 최치원 선생이 말한 풍류임은 대웅전이 환웅전이라는 사실만 보더라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중국의 황실도 앞에서 밝힌대로 편법이라 할지라도 환웅과 단군의 계보를 이은 정치세력인 만큼, 용궁이 풍류의 신전이란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겠다. 그리고 중국황실의 절대적 권위 아래에서 황제의 상징인 용이 사찰건축에 쓰일 수 있었던 것은 풍류신전의 권위가 제실(帝室)의 권위와 대등한 것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으로서, 앞에서 말한바 있는 동이의 [천상천]으로서의 위상을 증명해주는 근거가 된다.
이런 사실을 알면 용궁을 소재로 한 옛날 이야기들의 용도는 쉽게 알수 있다. 그 이야기들은 용왕(무당)이 다스리던 도덕정치 시대에 용궁에 들어가려는 사람이 갖추어야 할 덕목을 가르치기 위한 교과서인 동시에, 속세의 사람들을 교화하기 위한 경전이었던 것이다.
<심청전>은 효도와 신앙을, <별주부전>은 지모와 충성을, <세가지 소원>은 잉어같은 물고기까지도 사랑하는 생명존중의 덕목을 가르치고 있다. <인어공주>는 학업을 중도포기하고 세속의 사랑과 부귀에 눈이 멀었던 여학생의 비극적 종말을 다룬 것이니, 면학을 장려하기 위한 이야기이다.


이런 이야기들은 그 이면에 숨어있는 상징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면, 풍류의 실상을 밝히는데 큰 도움을 받을 수도 있는 소재들이다. <심청전>의 경우, 스토리의 전개과정이 도가에서 전해지는 운기행공법(運氣行功法)과 일치한다는 해설도 본적이 있다.

 

5) 망수행주와 가마
망수행주(罔水行舟)는 <서경 . 익직(益稷)편>에 나오는 말로서, 육지행주(陸地行舟)라고도 하는데, 물이 없는 곳에서 배를 밀고 돌아다닌다는 뜻이다.


이 말의 유래는 상고시대 최고의 성군(聖君)으로 알려진 요임금이 그 아들 단주에게 왕위를 전하지 않고, 순임금에게 왕위를 전할 수밖에 없는 이유로 거론되는, 단주의 방탕한 행적 중의 하나이다.


망수행주의 기록은 노아의 방주와 함께 배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의 하나이다. 노아의 홍수와 요순 시대의 홍수가 비슷한 시대의 것이라는 추측도 있는만큼, 어쩌면 이 둘 사이에는 모종의 관련성이 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해당 기록을 살펴보면, 요임금이 자신의 윤자(胤子)인 단주(丹朱)가 임금의 자리를 물려받을 수 없는 이유로서 "밤낮없이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만 하고, 물없는 곳에 배를 밀고 다니며, 집에서는 친구들과 함께 술만 마신다(罔晝夜額額 罔水行舟 朋飮于家)"는 행패를 내세운다.
그런데 우리는 앞에서 요순의 시대가 [삼한]의 상쟁시대였음을 살펴본 적이 있다. 그리고 이런 시대의 역사기록은 흔히 이긴 자를 옹호하는 논리를 내세우고 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 망수행주에 대한 평가도 그런 논리의 하나이다. 이점은 망수행주의 참뜻을 밝혀내면 알수 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여기서 나오는 배가 어떤 것인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


우리는 앞에서 동이의 신전이 바다로 불리웠고, 바닷물 . 강물 . 냇물 . 우물물 등이 실제로는 신전 속의 땅과 길과 건물 등을 상징하는 말임을 알아보았다. 그렇다면 망수행주에서의 물도 길이나 건물로 이해될 수 있다.
왜냐하면 망수행주의 시대배경과 무대가 삼한 정립시기의 동이신전인 바다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배(舟)에 대한 해석도 육지의 운송수단의 일종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배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을까? 박용숙 선생은 이 배가 바로 가마(乘轎)임을 <삼국유사 . 가락국기> 해설에서 주장한다.

 

그러므로 이 기사(記事)에서 주(舟)라 함은 곧 가마를 가리키며, 또 주사(舟師)라 함은 가마꾼을, 그리고 섬(島)은 정자(亭子)를 뜻하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해서 주(舟)는 신들만이 타는 날개(태양)이다. 왜냐하면 신은 걷는 것이 아니라, 새처럼 날거나 혹은 구름처럼 떠다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디온은 "신화시대의 배는 천상의 바다를, 그리고 마차(馬車)는 천상의 초지(草地)를 횡단하는 수단인 동시에 그 자체가 태양"이라 하였다. 미하일로브스키에 의하면 시베리아 . 몽고 일대의 샤만은 천상에 올라갔다가 내려올 때에는 반드시 작은 배(小舟)를 타고 작은 개천을 통해 내려오는 것이라 믿는다. 이때의 작은 개천이란 물론 천도(天道), 즉 신들이 하강할 때 다니는 길을 뜻한다.
또 엘리아데에 의하면, 폴리네시아 섬의 제의에서는 하나의 의례로서 보우트(小舟)를 수선하는데, 그것은 수리가 목적이 아니라 신을 맞이하는 종교적 행사(imitatio dei)라는 것이다. 우리들의 궁중무(宮中舞)에서도 유선악(遊船樂)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 춤은 한척의 배를 가운데 두고 돌아가면서 군무(群舞)를 벌인다. 또 용왕굿에서는 작은 모형선(模型船)을 만들어서 걸고 이에 절한다. 그러므로 배가 신(神)과 관계를 가진다는 것은 분명한 일이다.

 

(<삼국유사 . 가락국기> 중의 초반부가 소개되고) 이렇게 해서 구간(九干)들과 나라 사람들이 모두 즐겁게 춤을 추니까 급기야 천(天)에서 금상자(金合子)에 든 동자(童子)를 보내온다. 물론 그 금상자 속에는 여섯 개의 황금알이 들어있다. 그것이 곧 왕자의 신분이나 권위를 상징하는 신표, 이른바 천부인(天符印)이라는 것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 어쨌든 우리는 이 문장에서 강신제(降神祭)가 먼저 일자(日者)인 무당에 의해 시작됨을 확인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이때의 강신이 동명왕(東明王)의 경우에는 모체(유화부인)가 직접 내려오고, 금와(金蛙)의 경우에는 여승원(女僧院)에서 갓난아기로, 그리고 수로의 경우에는 젊은 승(僧 ;동자)이 직접 가마(금합자)를 타고 내려옴을 보게된다.

이제 망수행주에 등장하는 [배(舟)]가 실제로는 가마였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렇다면 이 망수행주라는 구절도 새롭게 해석되어야 하는데, 여기에도 두가지 해석이 있을 수 있다. 그 첫째는 기존의 해석대로 땅위로 배라고 불리우는 가마를 타고 돌아다녔다는 뜻이 된다. 둘째로는 물이 신전을 뜻하므로 [신전 밖에서 가마를 타고 돌아다녔다]는 뜻이다.


이 두 해석은 중대한 의미차이를 내포하고 있다. 첫 번째 해석을 취하는 경우에는 단주를 배제하고 통치권을 장악한 세력(순임금)이 풍류의 제도를 완전히 부정했다는 뜻이 된다. 신전에서 배를 타고 다니면서 공부하는 풍습이 악(惡)으로 간주되고 배척되었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신전에서 배를 타고 돌아 다니는 것은 삼신산인 바다가 다섯 구역으로 나뉘고, 중앙의 용궁을 제외한 네 구역을 사해(四海)로 불렀던 사실과 관계가 있으며, 이 사해유람(四海遊覽)을 거친 사람만이 사람(四覽)이라 할 수 있는 것으로서, 곧 왕이 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했던 수행인 것이다. 그런데 이런 사해유람(수학여행)을 삼대악행의 하나로 거론했다는 것은 풍류의 제도를 완전히 부정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두 번째 해석을 취한다면 처음의 경우와 이야기가 달라진다. 물이 없는 곳에서 배를 타고 다녔다는 것은 신전 밖으로 배를 타고 돌아다녔다는 말이 되고, 이는 신으로서의 품위를 지키지 않았다는 뜻이 된다. <성서>에 나오는 "하느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을 아내로 취했던 것과 같은 맥락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볼때에는 단주가 풍류의 제도에 반기를 든 셈이 된다.


그런데 <서경>의 기록은 "단주가 밤낮없이 친구들과 어울려 술마시고 놀기만 했다"고 했으니, 둘째 해석을 적용할 수 없게 한다. 단주가 했던 일은 동이들의 풍습에 충실했던 올바른 제왕수업(帝王修業)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경>의 기록은 풍류의 풍습을 부정하는 의미가 된다.
여기서 순임금이 중국 역사상 최초로 부계(父系) 왕권을 확립한 인물이었다는 하신의 주장을 고려하면, 중국의 역대왕실에서 단주를 매도하는 이유가 밝혀진다. 그들이 미워하는 것은 단주의 방탕함이 아니라, 동이족의 신정체제였던 것이다. 따라서 요순의 왕위선양은 동이족의 종주권을 부정당한 최초의 역사적 사건이었던 셈이다. 그들이 신정(神政)을 부정했던 이유는 다음장에서 밝혀질 것이다.

 

 
III. 신정과 풍속

1. 홍익인간과 이민족

1) 홍익인간의 뜻
홍익인간(弘益人間)이란 <삼국유사 . 고조선조>에 나오는 말로서, 환웅이 자주 천하에 뜻을 두므로 환인이 그 아들이 뜻을 펼수 있는 자리로 지정해 준 삼위태백의 입지여건을 나타낸 말이며, 그 뜻은 [널리 사람을 이롭게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국조 단군왕검의 건국이념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삼국유사>의 내용을 보면 누구나 알 수 있듯이 환웅의 개천이념이다. 환웅의 개천(開天)이란 환웅이 태백산 신단수에 내려와서 신시를 열었던 사실을 말하는 것인 바, 환인이 <삼국유사>에 [제석천왕]으로 기록된대로 [천국의 으뜸 왕]이니, 그 아들이 땅으로 내려온 사건은 하늘의 문을 땅을 향해 열었던 일대 사건인 것이다. 이때의 [하늘]은 앞에서 설명된 바와 같이 태양신을 모시던 동이족 천신들의 나라이다.


따라서 환웅이 내세운 [홍익인간]의 올바른 뜻은 [동이족의 혈통을 세계에 퍼뜨리는 것]이고, 동이의 초인문화로서 세계를 교화하여 이상사회를 이룩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동이의 혈통은 히틀러가 주장한 [게르만 우월주의]같은 것이 아니다. 동이들은 자신의 본래능력을 완전히 회복한 성인들의 집단이었지, 인종적으로 특별한 종족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동이족의 후예인 한겨레가 문화적으로나 혈통적으로 다른 종족에 비해 우수성을 보이는 것은, 본래능력을 회복한 인간은 유전자 속의 열악한 요소를 모두 제거하므로서, 그 시대의 환경조건에 완벽한 적응성을 갖춘 후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동이의 목적은 이런 전인(全人)을 얻어 완벽한 혈통을 널리 보급하려 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이 [홍익(弘益)]의 뜻을 형이상학적 이념의 측면에서 이해하는 것이 학계의 주된 입장이었고, 그러다보니 [환국]의 정체가 제대로 밝혀지지 못했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우리 상고사의 실상을 심하게 왜곡시킨 것으로 나타난 것이다.
민족의 뿌리를 밝히는 작업에서 가능하면 고상하고 아름답게 묘사하고 싶은 것은 후손들의 본능적인 효심의 발로라고 할수 있다. 그러나 우리 상고사의 연구에서 [홍익]의 참뜻이 왜곡된데에는 유교사회의 허례허식이 결정적 기여를 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성(性)과 관계된 부분을 죄악시하던 유교문화의 도덕관념이 [홍익]이 [동이의 씨뿌리기]였다는 사실을 은폐하는 근본적 동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근세에 민족사를 연구할 수 있었던 학자들의 대부분이 사서삼경으로 한자를 배운 유학자들이었고, 그들의 생각을 지배한 것은 유교적 도덕관념이었으니 말이다.


다시말해, 역사가 올바로 전해졌다면 홍익인간의 올바른 뜻이 같이 전해졌겠지만, 존화사상에 빠진 중국의 사가(史家)들과 모화사상에물든 유학자들에 의해 그 대부분이 삭제된 것이다. 일부 남아있는 자료들도 인멸을 모면하기 위해 상징과 은유로 고쳐졌기 때문에, 지금은 그 실상을 제대로 복원하기가 한층 더 어려워진 형편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유교를 정치이념으로 개발하여 동이의 풍류에 저항했던 중국 왕조들의 곡필(曲筆)도 한몫을 거들었다. 중국의 유학자들이 성(性)을 해석하면서 인간의 본능적인 육체적 교합은 죄악시 하고, 형이상학적, 철학적 부분은 신성시한 것은 그들의 주장대로 금욕적 생활을 통해 본성을 회복시키려는 목적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유교가 가정생활과 정치활동을 포기하지 않은 점만 보더라도 명확하다. 그들에게는 동이가 그들의 종주국이었다는 사실이 숨기고 싶은 과거였기 때문에, 풍류의 중심사상을 배제해야 했던 것이다. 결국 유교이념이 의도했던 것은 그들을 지배해 왔던 불가항력적인 거대세력인 이민족(異民族), 즉 동이족의 영향력을 벗어나려는 것이었던 것이다.


중국인이 벗어나려 했던 이민족이란 앞에서 설명된 [이(異)]의 뜻을 보면 알수 있듯이, [혈통이 다른 족속]이 아니라 [한겨레의 별칭인 동이족 이신(異神)들]이었다. 이런 사정은 고대로부터 중국인들이 여러 종족들을 포용하여 한족(漢族)으로 동화시켜 왔고, 근세 이후에 서양인들에게까지 폭넓은 포용력을 발휘한 사실만 보더라도 알수 있다.
그런 그들이 유독 동이족만을 이적(夷狄)이라 하여 금수(禽獸)와 동렬에 놓고 배척하면서 존화사상을 필사적으로 지켜온 이유는, 동이들의 부흥과 그에따른 풍류 신정의 부활을 두려워한 때문이었다고 보아야만 한다.


그런만큼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이 무당은 물론이요 심지어 자기들의 조상들까지도 마귀니 사탄이니 하면서 증오하는 자세나, 조선시대의 성리학자들이 소중화를 자처하며 사이(四夷)를 멸시하던 것이나 별반 다를바가 없는 짓이다.
[홍익인간]이 동이족의 씨뿌리기라는 사실은 단군신화의 이어지는 내용이 증명하고 있다. 홍익인간의 이념을 실현하는 방법으로 환웅이 시행한 다스림을 보면, 태백산 지역의 범과 곰을 선발하여 쑥과 마늘이라는 영약을 먹이고, 신전의 어둠속에서 내면을 성찰케하여 초월적 갱생을 이룬 사람(人)이 되게하여, 이 참사람과 동침(음양화합)하여 태자인 단군을 낳아 그로 하여금 나라를 세우게 한 것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쑥과 마늘은 거의 만병통치약이면서 체질개선약이다. 한겨레는 이 두 약초를 수천년 동안 먹어서 다른 종족들과 전혀 다른 체질로 변화할 수 있었다. 쑥뜸의 신비한 효과와, 마늘의 강력한 항균작용 및 항암작용은 이런 사실을 보여준다.


여기서의 [사람]이 생물학적인 인류가 아니라, 자전에서 어질 인(仁)으로 풀이한 바로 그 [人]이며, 그 어진 사람은 곧 이인(夷人)이기도 하다. 따라서 단군신화의 내용은 동이족에 편입되기 위한 통과의례와, 왕족을 낳기 위한 성스러운 결혼에 대한 기록인 것이다.
[홍익(弘益)]의 글자 뜻을 풀어보면 이런 사정은 더 확실해진다. [弘]은 활 궁(弓)자와 클 굉(宏)자를 합친 글자이다. 宏(굉)이 대(大)와 같이 [크다]는 뜻인만큼, [弘]과 [夷]는 같은 글자이다. [益]은 그릇에 물을 가득 채운 모양을 나타내는 글자이다. 이는 청수(淸水)를 모셔놓은 모습으로 이해되며, 신을 모시고 숭배하는 의미가 된다. 따라서 [弘益]의 일차적인 뜻은 동이족을 숭배한다는 뜻이 된다.


[홍익]의 이차적인 뜻은 청수그릇의 의미에서 찾아진다. 옛 동이의 신전은 산을 등지고 물을 내려다보는 언덕에 층층으로 굴을 파서 만들고, 그 굴 속에서 예배와 수련이 행해졌었다. 그리고 그 가장 깊은 지하는 복희팔괘에서 윗쪽으로 표시된 북방곤괘의 자리에 해당하는데, 그 자리가 바로 [우물(웃물)]로서 [샘(泉)]이었다. 이 우물에 소속된 신전은 웃물 . 강물 . 바닷물로 구획되었으니, 신전 전체가 물이었었다.


이 물 속에 용궁도 있었고 용왕도 있었으며, 물고기로 상징된 인어의 무리(물이)들도 있었던 것이다. [益]이라는 글자가 상징한 청수그릇은 바로 이 신전으로서의 바다였었고, 지금도 무당들이 청수그릇 앞에 밝히는 세 개의 촛대는 삼신산으로 상징된 세 개의 [묏불(山火)이], 즉 햇님 . 달님 . 별님의 상징이다. 여기에 [弘]이라는 글자의 반쪽인 [宏]이 빛 광(光)자와 같은 글자라는 사실을 추가하면 청수그릇과 촛대로 상징된 삼신산의 모습은 명확해진다.


결국 [홍익]은 삼신산의 빛과 물을 [바다(밧땅)]로 흘려 보내는 풍류의 딴이름인 것이고, 달리 표현하면 [삼한]의 봉토입국(封土立國)을 통한 다스림인 것이다. 세 개의 촛불이 상징하는 삼한(삼신)의 빛은 청수그릇에 담긴 물과 함께 인간세상으로 흘러나갔다. 이 청수그릇은 동이의 여신전에서 엄격한 부덕을 익힌 여신들의 몸 그 자체이기도 하다.


삼신산의 정기인 바닷물은 정액(精液; 좃물)의 형태로 여신의 자궁이라는 그릇에 담겨 세상으로 퍼져 나갔으니, 여자의 성기를 그릇으로 표현하는 습속은 그 뿌리가 참으로 오랜 것이며, 또 고대의 그릇들이 여인의 자궁 모습을 하고 있는 이유도 이런 관점에서 해명되는 것이다.
결국 [홍익인간]은 고대에 제왕들의 신혼 첫날밤에 왕후를 가로채어 초야권을 행사하던 동이족의 절대적 지배권을 나타내던 말이었고, 그와같은 동이족의 지배가 천하에 해독을 끼친 것이 아니라 천하를 크게 이롭게 하였음은 [益]이라는 글자가 지금도 [이롭다]는 뜻으로 쓰이는 사실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사정이 이러니 중국의 천자들이 동이족이라 하면 눈에 쌍심지를 켜고 배척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평생을 함께 살아야 하는 왕후의 첫남자가 동이족들이니, 이는 인간적으로 볼 때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정적(情敵)이기 때문이다.
서양의 경우에는 동이족에 대한 반발이 그 유명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남아있는 것이니, 서양의 왕들에게 있어서 자신의 아버지인 신(神)은 동시에 아내인 왕비의 순결을 앗아간 연적인 것이다. 이 정도만 설명해도 프로이드 심리학이 얼마나 잘못된 전제에서 출발한 것인지를 쉽게 간파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이 홍익인간의 풍습에서 생겨난 말이 바로 [이민족(異民族)]이다.

2) 이민족 . 저민족 . 우리민족
우리 민족은 유난히도 다른 나라의 침략을 많이 받아온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한겨레를 침략한 다른 민족들을 이민족(異民族)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한겨레가 [이민족의 침략]이라는 말을 쓰게되면 6 . 25 사변과 같은 동족상잔의 비극을 뜻하는 것임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다시말해 이민족은 동이족을 가리키는 고유명사이며, 핏줄이 다른 민족을 뜻하는 일반명사가 아니라는 사실은 망각되었다는 뜻이다.
한겨레의 구성종족, 달리 말해서 동이족의 기본 갈래는 바로 이민족(異民族) . 저민족( 民族)이며, 이 둘을 합해서 부르는 이름은 우이민족(偶夷民族; 우리민족)이다.


우리들이 일상생활에서 가장 자주 쓰는 말들에 속하는 [이쪽] . [저쪽] . [우리쪽]이 사실은 우리들의 뿌리를 일컫는 말인 것이라는 사실은 국어학자들도 잘 모르는 일일 것이다.


각설하고 본론으로 돌아가서 먼저 이민족(異民族)부터 설명하자면, 눈치빠른 독자는 이미 짐작했겠지만 탈을 쓰고 나타나는 이신(異神)들이 바로 이민족이다. 단군신화에서 환웅이 모습을 바꾸어 웅녀와 동침하였다고 한 기록에서, [모습바꿈]이 바로 [탈을 써서 바꿈(異化)]이었던 것이다.


신이 탈을 써서 모습을 바꾸고 신녀와 동침하는 것을 성혼(聖婚) 또는 신혼(神婚)이라고 하는 바, <삼국유사>의 처용가는 바로 이 탈쓴 귀신이 초야권을 행사하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지금 전해지는 처용의 탈은 실제로는 처용의 아내와 동침하던 역신이 썼던 탈인 것이다.


다음으로 저민족( 民族)은 신전의 지하 깊은 곳에 살던 여신족들이다. <동이전>에 나오는 여인국이라는 것이 바로 이 저족( 族)들의 신전인 것이다. 이들에 대해 <동이전 . 서문>에서는 "동방을 이(夷)라 한다. 이(夷)는 저( )이다. 말하되 어질어 살리기를 좋아하니 만물이 저땅( 地)에서 나온다(東方曰夷 夷者  也. 言仁而好生 萬物 地而出)"라고 기록하였으니, 이는 동이가 [저땅(젖땅)]에 사는 사람들로서, 부덕(婦德)을 갖춘 생산의 여신들임을 말한 것이다.


우리(偶夷)는 [우(偶)]가 [쌍], [짝]의 뜻이므로 [이(夷)]가 본래 [한켤레]였고, 이 [한켤레]가 [한겨레]라는 이름과 관계가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우(偶)]는 [우상(偶像)]을 뜻하는 글자이며, [우상]은 [남녀 한쌍으로 된 생식신의 신상]이다. 동이의 종교가 이 우상숭배의 종교였음은 이미 수차 설명한 사실인데, 이 우상의 정체가 바로 여기서 설명된 [이이(異夷)]와 [저이( 夷)]인 것이다.
지금도 여자들이 귀찮게 추근거리는 남자에게 야멸차게 쏘아붙이는 말인 "이이가 왜 이래? "라는 말은 오랜 옛날 [저이]들이 신전(古)에서 [이이]들에게 몸서리 당할 때부터 써내려온, 진짜 고사성어(古事性語)인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면 우리는 왜 우리들을 침략하는 다른 민족을 이민족이라고 표현했으며, 또 그들을 어떻게 불러야 옳은 것일까?


먼저 이민족이 다른 민족으로 둔갑하게 된 원인은 종주권과 역사기록의 상실에서 찾을 수 있다. 진시황이 진한을 멸망시킨 이후로, 진한의 용궁에 보관되어 있던 귀중한 서적들은 모두 약탈 당하였고, 중국인들에 의해 대대적으로 조작되었다. 그 이후 삼국시대의 수와 당의 침략을 거쳐, 요와 원 등 중국인들의 끈질긴 침략으로 거의 모든 역사기록을 소실당한 고려시대 이후로는 동이의 고유한 역사기록은 찾아보기 어려워졌고, 결국 중국인이 지은 역사기록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중국인들의 역사는 동이에 복종하는 역사였고, 동이에 복종하지 않으면 이족들은 동두철액(銅頭鐵額)의 신병(神兵)을 보내어 정벌하였다. 중국역사에 가장 흉악한 민족으로 묘사된 [흉노(凶奴)]가 바로 이 이족들이었으니, 자연히 그들에게 있어서 다른 민족의 대명사는 이민족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중국의 글자와 역사를 역수입해서 쓰다보니, 자연히 그들의 정서에 감염되어 이민족을 다른 민족으로 여기게 된 것이다.


따라서 [다른 민족]의 올바른 표기는 외족(外族) . 왜족(歪族)이거나 타족(他族)이다. 외(外)는 달(月)과 복(卜)을 합친 글자로서, [박달(바다)]을 거꾸로 한 [달박(신전 밖)]의 뜻을 담고 있으며, [卜]은 땅을 상징하는 거북의 등껍질이 갈라지는 소리에서 따온 글자로서, 땅의 경계 밖을 나타내기에 안성맞춤인 글자이다.


이 외족(外族)들이 이족(夷族)을 침범 하게되면 자식이 부모를 때리는 꼴이되니, 바르지 못한(不正한) 족속인 왜족(歪族)이 된다. 이 왜족의 딴이름이 타족(他族)이니, [他]는 [뱀을 짓밟는 발의 모습]을 본뜬 글자인 바, 뱀이 동이족의 지부신전이므로 타족은 변한을 침범하는 왜족들이다.


위에 설명된 [이쪽 . 저쪽]이 고대역사와 관계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또다른 근거가 [피차(彼此)]라는 말이다. [彼]는 [나무껍질이 줄기에서 떨어져 나간다]는 뜻인데, 이는 앞에서 설명한 한복과 관계가 있다.


<진서(晉書) . 사이전>에는 "숙신에는 낙상이라는 나무가 있으며, 중국에서 성제(聖帝)가 일어나 임금이 되는 때에는 그 나무의 가죽을 벗겨서 옷을 해입는다(有樹 命 常, 若中國有聖帝代位則 其木生皮可衣)"라는 글이 있다.


그런데 이 낙상(낙常)이 실은 [웅상(雄常)]을 잘못 쓴 것으로서, <산해경 . 해외서경>에는 이 나무의 이름이 웅상으로 되어있으니 "크게 거친 땅(만주) 가운데 산이 있으니, 이름을 불함산이라 한다. 숙신씨국에 있다. 숙신국은 백민의 나라에 있으며, 북쪽에 나무가 있는데 이름을 웅상이라 한다. 팔대제(삼황오제를 지칭)가 여기에서 그것을 취하였다(大荒之中 有山 名曰不咸 肅愼氏國 肅愼之國 在白民之國. 北有樹 名曰雄常. 先八代帝 於此取之)"고 한 것이 그것이다.


<단군세기 . 11세 단군 도해(道奚)조>에는 "경인 원년 단제께서는 오가에 명을 내려, 열두 명산의 가장 뛰어난 곳을 골라 국선의 소도를 설치케 하였다. 많은 박달나무를 둘러 심은 후, 가장 큰 나무를 골라 환웅의 상으로 모시고, 여기에 제사지내며 웅상이라고 이름했다(庚寅 元年 帝命五加 擇十二名山之最勝處 設國仙蘇塗 多環植檀樹 擇最大樹 封爲桓雄像而祭之 名雄常)."라고 하였으니, <산해경>의 웅상이 바로 환웅의 상(像)으로 모셔지던 신단수(神檀樹)임이 확실하다.


결국 [彼]는 중국의 삼황오제(三皇五帝) 이후의 모든 왕실이 조선의 분봉국임을 나타내는 글자이니, 이 웅상에 걸린 물색을 걷어다가 조복(朝服)을 만들어 입은 외족(外族)의 임금을 나타내는 글자가 되기 때문이다.
[此]는 [발자국이 줄을 잇다]라는 의미인데, 이 뜻이 [이쪽]의 뜻과 연결될 당위성은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이런 뜻은 시장마당(市場)의 뜻이 되어야 정상인 글자이다.


그러나 <동이전>에 묘사된 동이들이 천제를 지낼 때 줄을 지어 춤추는 모습을 생각하면, [이쪽]의 본래 뜻이 [이족(夷族)]임을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 따라서 이쪽(異族) . 저쪽( 族) . 우리쪽(偶夷族) 중의 어느 하나라도 타왜족(他外族)과 혼동하는 잘못을 범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위 인용문 중에 나타난 한가지 문제점을 지적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그것은 위의 인용문에서 [大荒]을 [만주]라고 주석한 것이다. [황(荒)]은 동이의 신전을 가리키는 말이지 거친 벌판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는 사실은 이미 밝힌 바 있다. 더더구나 고서에 나오는 대황은 보통 티벳고원 바로 옆에 붙어있는 고비사막을 가리킨다. 이곳이 본래 고구려가 있던 곳으로, 주(周), 진(秦), 한(漢), 당의 수도인 낙양, 함양, 장안 등에서 멀지않아서 중국을 완전히 통제할 수 있었다. 그 때문에 중국의 황제들이 백만대군을 동원해서까지 고구려와 전쟁을 벌였던 것이다.


지금의 글자뜻을 기준으로 함부로 고대의 고유명사들을 해석하는 것도 문제지만, 이렇게 단정적으로 지명을 적어넣는 버릇은 더 큰 문제이다. 우선 이책에서부터 잘못된 인용문을 함께 소개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그런 부작용의 하나이다.
일연이 <삼국유사>에서 함부로 지명을 추정하여, 후대에 동이의 실상을 파악하기 어렵게 했던 잘못을 주해자도 반복하고 있다. <한단고기>에는 이런 주해들이 많이 보이는데, 모두 삭제한 정정판을 발행해야 마땅할 것이다.

 

3) 원화위인
단군신화에 나오는 "범과 곰이 사람되기를 원하므로(願化爲人) ......"라는 기록의 [사람]은 앞에서 몇번 지적된 바와 같이 동이족 천신을 나타내는 말이다.


박용숙 선생은 동이가 말하는 [인(人)]은 본질적으로 초인적인 능력자를 가리키고, 그들은 신의 모습인 탈을 쓴 사람이므로 신인동형(神人同形)이며, 특별한 비법을 통하여 생물학적인 의미의 사람을 영적인 인간으로 변화시키는 능력을 가진 존재들이라고 한다.
또 [인(人)]에 대한 고대인의 주요개념으로서, [人]은 곧 어짐(仁)이며 만물의 영장이자 척도인 동시에, 중용(中庸)이면서 우주와 동질적인 완전함임을 제시하고 있다.


선생의 [人]에 대한 연구의 결론은 [人이라는 글자의 원시표상은 손의 모습이며, 보다 정확히 말하면 엄지손가락의 두마디와 집게손가락의 세마디에서 찾아지는 비례치, 즉 {3 : 2의 황금비례}라는 것]이다.


이 황금비례를 배워서 깨달은 사람을  (夫婁 . 仁)이라 부르며, 음양화합시에 일어나는 부풀음을 뜻하는 [ ]의 깨달음을 바탕으로, 황금비례를 사람과 사물에 응용할 줄 아는 특별한 영적 인간들이 바로 동이의 [人]이라는 것이다.
앞에서 동이(東夷)가 <천부경>의 진리를 체득하여 천문지리에 통달한 기술자(과학자) 집단이라 하였으니, 곧 [동이]가 [人]과 같은 말이 된다. 결국 [동이인(東夷人)]은 음양묘합한 중(中)의 초현상적 완전성을 본떠 문명의 새벽을 열고, 여러 가지 도구와 약품을 개발하여 세상에 널리 은혜를 입힌 신인(성인)들의 집단인 것이다.


이들은 인체를 경전으로 삼아 음양비례를 연구하였고, 그 인체경전(人體經典)은 그들이 신전에 모신 신상(神像)들인 우상(偶像)들이었고, 그들의 연구장소는 당연히 신전인 고분이라고 한다.


뿐만아니라 그들은 인체경전에서 찾아지는 황금비례(중용)의 법칙을 정치를 비롯한 생활 전반에 적용시켜 세계국가와 세계문화를 건설하였으니, 그 세계국가의 흔적이 [반고신화]로 대표되는 거인신화라는 것이다.


즉 인체가 머리 . 몸통 . 손발(팔다리)의 세 부위로 대별되듯이, 신전도 천계 . 지계 . 인계의 셋으로 나누고, 신분제도도 신인(神人) . 귀족 . 평민의 세 계급으로 나누었고, 세계도 동이 . 왕실 . 촌락의 세 계층으로 나누었던 것이다. 세계국가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한국의 시원사상]을 비롯한 선생의 여러 저서들을 직접 읽어 볼 것을 권한다.


아무튼 단군신화에 나오는 [원화위인]의 참뜻은 이와같은 [동이인]이 되어 세계국가 건설에 동참하고 싶다는 의미로서, 동이인이 되기 위한 첫째 관문인 통과의례인 수련에 참여하겠다는 입학원서 제출에 해당하는 셈이다.

4) 초야권과 천자
동이인들의 홍익인간, 즉 혈통을 통한 세계지배는 이신(異神)들의 초야권(初夜權) 행사를 통해 유지되었다고 한다. 이 초야권은 단군신화와 처용설화 등에 나타나 있는 고대의 풍습이다.


일단 동이의 세계지배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원화위인의 입학원서 제출과, 수행이라는 시험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세속을 버리고 동이의 구성원이 된 사람들은 본격적인 인도(人道)를 배우게 되는데, 그것을 사해유람이라 한다. 여기서 유람의 대상이 되는 사해(四海)는 신전의 네 영역으로서, 각 영역은 오행의 의미에 해당하는 진리를 가르치는 역할을 한다.
이 사해유람을 박용숙 선생은 [수도(修道)와 통과의례(通過儀禮)와 강신(降神)]으로 설명하고 있으며, 중국의 역대 천자들이 조선에 와서 천자의 자격을 획득하는 절차였다고 풀이한다.

 

중국의 천자가 숙신씨에게서 옷을 받아 입는다는 것은 또한 조선과 중국과의 관계사를 말해준다. 이를테면 중국의 천자란 곧 조선의 오악(五嶽)에서 수도를 마친 후, 통과의례를 치르고 나서 하강한 신이다. 따라서 그런 신이 북악신(北嶽神: 숙신씨)이 내린 서품을 받는다는 것은 능히 이해될만하다. 그러므로 <단기고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때에 자부선생(紫府先生)이라는 도고(道高)한 이가 있으니, 위로 천문을 통하며 아래로 지리를 살피매 도덕이 고상하므로, 중화의 헌원황제가 와서 수학한 후 내황문(內皇文)을 받아가지고 본국에 돌아가니라."
즉 자부선생이란 오악신(五嶽神)을 가리키는 것이며, 또 내황문은 음서(陰書) 즉 지계(地界)를 다스리는 정치서인 것이다. 그러므로 동 문장은 황제가 가람(伽藍)에 들어와 수도한 후 강신(降神)하는 장면을 간략하게 기록한 것으로 볼수 있다. 이와같은 기록은 <포박자(抱朴子) . 내편 지진(地眞)조>에도 나타나 있다.


이를테면 "황제가 동쪽으로 청구에 이르러 풍산을 지나 자부선생을 만나, 삼황내문을 받아 이로써 만신을 불렀다(黃帝東到靑丘 過風山 見紫府仙人 受三皇內文 以刻召萬神)" 이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동 문장에 보이는 [동도청구(東到靑丘)]가 곧 샤만가람인 조선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수경주 . 낙수(洛水)조>에는 "황제는 동순(東巡)하여 (황)하로부터 (낙)수를 지나고, 단(壇)을 닦아(修) 벽(璧)을 빠지게(沈) 하고, 용도(龍圖)를 河에서 그리고(劃) 구서(龜書)를 洛으로부터 받다"라는 문장이 있다. 이 문장은 물론 비유이다. 동순(東巡)이란 곧 동방에 있는 샤만가람에서 수도한다는 뜻이다. 이미 앞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 가람의 수도는 곧 윷판돌기(柶戱)와 같은 것이다. 따라서 황제가 황하에서 낙수를 지났다는 것은 가람의 사악(四嶽: 동서남북)을 통과했다는 뜻이다.


<수경주>에 따르면 하수(河水)가 양수(陽(東)水)이고 낙수(洛水)가 음수(陰(西)水)가 되므로 결국 황하는 동악과 남악의 사원을, 낙수는 서악과 북악의 사원을 가리키게 된다. 그리고 황제가 하수, 낙수를 지나 단(壇)을 닦는다는 것은곧 중악으로 들어왔음을 뜻하는 것이다. 壇(우주목 . 탑 . 용궁)은 곧 가람의 중심에 있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러하다면 황제가 다시 침벽(沈璧)하고 용도를 河에서, 그리고 구서를 낙에서 받는다고 한 것은 곧 [오월의 왕과 왕비]의 축제와 강신제를 통과했다는 사실을 뜻하는 것이다. ...... 요컨대 황제는 가람에서 수도를 마친 후 강신했는데, 그가 용도를 천신(河)에게서, 그리고 구서를 지신(洛)에게서 받았다는 것은 앞에서 인용한 <단기고사>의 문장에서 "황제가 자부선생에게서 내황문을 받았다는 기사와 일치하는 것이다. 그런데 <수경주>는 이러한 강신의 사례를 황제에만이 아니라 요 . 순 . 우 . 탕에 대해서도 같은 풍경으로 기록하고 있다.

 

동이의 신전에는 산(山)과 물(水)이 있었고, 산은 선군(仙君)이 다스리고 물은 무당(용왕)이 다스렸다. 선군이 다스린 사람들이 선이(仙夷)요, 무당이 다스린 사람들이 물이(巫夷) 또는 신이(神夷; 가미→ 이)들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선이와 신이가 앞에서 설명된바 있는 이이(異夷)와 저이( 夷)에 해당한다. 이 선이와 신이들이 짝을지어 나라를 세워 다스리도록 한 것이 동이의 신정인 것이다.
선이와 신이들은 사람이 되기위해 입학원서를 제출한 이(夷)들이다. 이들이 사해를 유람하여 사람이 되면, 이 둘을 결혼시켜 바다밖의 세상으로 내 보내서 나라를 세우게 하는데, 이것이 바로 지배(支配)라는 말의 유래인 것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천자(天子)를 낳기 위한 비밀의 예식인 신혼(神婚 . 新婚)이 개입한다.


우리들은 신혼(新婚)이 처음으로 결혼하는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나 新(신)을 해부해 보면 전혀 다른 의미가 나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新]은 [立 + 木 + 斤]합한 글자이다. [立]은 고인돌이고 [木]은 신단수로서 둘 다 신전을 나타내고 있으며, [斤]은 [도끼 근]으로서 옛날 임금의 상징으로 쓰이던 물건이며, 그 뿌리는 염제 신농의 종족표지임은 이미 살펴본 바와 같다. 따라서 [新]은 [동이족이 세우는 나라]라는 뜻이고, 결국 [신혼(新婚)]과 [신혼(神婚)]은 같은 말이다.


이 신혼의 풍습을 기록한 기사가 바로 <삼국유사>의 [처용랑과 망해사 조]로서, 우리들이 학교에서 배우는 [처용가]가 이 신혼에 얽힌 사연을 밝힌 것이다.


처용은 동해 용왕의 아들로서, 왕에게 아름다운 아내를 하사받는다. 그런데 아내의 미모에 혹한 역신(疫神)이 처용이 없는 틈을타서 처용의 모습으로 변장하여 그 아내와 동침한다. 그런데 밖에 나갔다가 들어와서 이 모습을 본 처용은 [처용가]를 부르며 물러나온다. 처용의 배포에 탄복한 역신은 다시는 처용의 형상만 보더라도 그곳을 침범하지 않겠다고 약속한다. 그래서 민간에서는 처용의 형상을 그려붙여 악귀를 쫓게 되었다. 이것이 처용랑과 망해사의 대략적인 내용이다.


처용 이야기에서 절정은 처용가이다. 처용가는 처용이 역신과 아내가 동침하는 광경을 보면서 불렀다는 노래로서, 몇 수 남지않은 신라 향가(鄕歌) 중의 하나로서 국문학사의 보물이기도 하다.

東京明期月良     기  래(서울 밝은 달밤에)
夜入伊遊行如可 밤드리 노니다가(밤늦도록 돌아다니다가)
入良沙寢矣見昆 드러  자리 보곤(들어와 자리를 보니)
脚烏伊四是良羅 가 리 네히어라(가랑이(다리)가 넷이구나)
二兮隱吾下於叱古 둘흔 내해엇고(둘은 내것인데)
二兮隱雖支下焉古 둘흔 뉘해언고(둘은 뉘것인가)
本矣吾下是如馬於隱 본  내 다마 (본디는 내것이지만)
奪叱良乙何如爲理古 아   엇디?糖눗?(빼앗긴 것을 어찌하겠는가).
* (번역 중 앞의 것은 양주동 역, 괄호 속의 것은 지금말로 옮김)


지금 세상이라면 주간잡지의 기사거리도 못되는 [불륜의 현장]에 대한 이 기사에, 첫날밤에 아내를 몸서리 당하고도 웃으며 물러서야 임금이 될 수 있었던 고대 왕들의 비애가 담겨있는 것이다. 왜 이런 노래가 생겼던 것일까? 이에 대해 박용숙 선생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요컨대 처용가(處容歌)는 안압지의 당집에서 탄생된 노래임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이점을 집중적으로 검토해 보자. 반월성(半月城)의 미녀(궁녀)와 결혼한 처용은 당집에서 초야(初夜)를 보내게 된다. 그런데 처용은 벗들의 짖궂은 권주에 시달리다가 늦게 신부가 있는 당집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이미 그 속에는 자기의 신부를 가로채고 있는 또 하나의 신이 있다. 그 신을 역신(疫神)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신부가 태연스럽게 그 역신과 동침하고 있다는 사실이며, 또 그런 장면을 목도하고도 신랑은 별다른 노여움 없이 태연스럽게 처용가를 부른다는 사실이다. 이런 풍경을 정당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샤마니즘에 있어서의 태교(胎敎)와 궁합이라는 측면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 아무튼 서로의 얼굴을 모르는 가운데 밤을 지새야 한다는 법칙은 처용의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볼수 있다.
이런 사정은 다음과 같은 가설을 가능케 한다. 즉 [長(太)子는 곧 천신의 아들이어야 한다]는 법률이다. 이러한 법률을 이행하기 위해서는 신혼초의 며칠 동안은 되도록 신랑을 놀이에 붙잡아 두고, 그 사이에 천신(天神)이 신부와 동침하는 것이다. 이런 풍경은 결국 메이 폴(May pole)의 축제와 동일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프레이저의 <황금지(黃金枝)>에 의하면 바빌로니아에서는 벨 신이 그의 팔층 피라밋(山) 꼭대기에 있는 신전의 침대에서 그해에 선발된 여자, 이른바 [오월의 여왕]과 동침했다고 하며, 또 이집트의 고서(古書)는 이른바 [신의 배우자] 로 알려진 여자가 테베 신전에서 암몬 신과 잠을 자서 모든 이집트의 왕자를 낳았다고 전했다. 다시 아테네에서는 포도의 신인 디오니소스가 매년 왕비와 결혼하며, 그 의식은 아클로 신전의 동북쪽에 있었던 프리테나움 광장 부근의 외양간(宮邸)에서 집행되었다고 한다. ...... 그런데 프레이저는 고대 라틴 부족의 왕국계승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풍경을 전하고 있다.


이를테면 로마의 왕들은 한결같이 아들이나 손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왕위가 직접 친자(親子)에 의해 계승되지 않았으며, 모친을 통해서 왕위를 계승하였다는 것이다. 뿐만아니라 타티우스, 타르퀸, 세르비우스툴리우스의 세 왕은 외국인이었거나 그 계열의 양자에 의해 계승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왕의 실부(實父)가 불확실하다는 것이다. 이점은 곧 당대에 있어서의 왕은 태자(太子)여야 하며, 이때의 태자는 곧 천신의 아들이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로마의 왕들이 외국인이었거나 그 계열의 양자였다는 것은 바로 그런 사정을 암시한 것이다.

여기에는 동이의 혈통을 천하의 지배자로 만드는 방법이 자세히 나타나 있다. 천신의 아들만이 천자가 되어야 하므로, 나라를 세우고자하여 조선에 와서 수도를 마친 신이(神異)와 선이를 결혼시키되, 신혼의 몇일 동안 같이 수도하던 친구들이 신랑을 납치하여 함께 술마시고 놀게 한다. 이런 풍습은 얼마전까지만 해도 우리 사회에 [신랑 달(리)기]라는 형태로 남아있었고, 지금의 피로연이라는 것도 그 변형으로 볼 수 있다.


신랑이 친구들과 어울려 술실력을 평가받는 동안, 천제(천신)는 신방에 들어가 혼자있는 신부와 동침하게 된다. 이 신전에서의 동침은 시간관측과 의술에 통달한 신관들이 택일한 날자에 올리게 되므로, 신부는 거의 틀림없이 천제와의 동침으로 임신하게 되고, 이 아이가 천제의 아들인지 아닌지는 그 유명한 사주팔자(四柱八字)에 의해 판정되게 된다. 즉 사주팔자는 운명을 예측하기 위해 개발된 것이 아니라, 천제의 아들이 예정된 날자에 태어났는지를 알기 위한 목적으로 개발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피로연 도중에 신부를 보고(?)싶어 친구들을 따돌리고 신방으로 달려온, 운수 사나운 신랑의 이야기가 바로 처용 이야기였던 셈이다.
그런데 처용은 이 초야권의 대가로 하나의 왕국을 건설할 권리를 얻고, 동이족이 제공하는 군사적 보호를 받게 된다. 이 때문에 처용은 자기 아내를 뺏긴 상태에서도 춤추며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고대왕조의 시조들이 모두 천제의 아들로 기록되고, 그들의 아버지(어머니의 남편)는 이름조차 남기지 못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처용의 아내와 동침하던 역신은 탈을 쓴 이신(異神)이었고, 본래의 모습을 드러내었다는 것은 그 탈을 벗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지금 전해지는 처용의 탈은 실제로는 처용의 형상이 아니라 역신의 형상이고, 그 역신이 천제였기 때문에 모든 귀신들의 횡포로부터 처용을 보호할 수 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귀신이 동이족의 신들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고대역사에서 여러 나라의 시조설화와 관련된 [알(卵)]의 문제에 도달하게 된 셈이다. 고구려의 동명왕과 신라의 혁거세왕 및 탈해왕의 기사에서 보듯이 삼국시대 초기까지도 난생설화가 남아있다는 것은, 우리나라에서 서기 전후까지도 신정이 행해지고 있었다는 증거가 된다. 그리고 신정의 핵심은 선이나 신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알이(卵夷)에 있다.

 

5) 아이와 새끼
우리(偶夷), 즉 이이와 저이가 어울리면 [알이(卵夷)]가 난다. 난이(卵夷)는 [난(生) 이(夷)]라는 뜻이되므로, 우리말에서 유래된 말이 거의 확실하다. 아무튼 알이 또는 난이가 모두 지금은 [아이]로 쓰이고 있다.


이 [아이]란 말도 우리 상고사에서 비중이 큰 말이면서 아직도 미개척 분야로 남아 있는 말 중의 하나이다. 이 아이의 원형은 [알난이(卵生兒)]로 볼수 있을 것이다. 이 알난이의 흔적은 지금도 못난이, 갓난이 등에서 발견된다.


[알이]는 가장 뛰어난 사람으로서, 장차 임금이 될 태자라는 뜻의 말이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우리 고대사에 나타나는 난생설화는 모두 이 알이에 대한 기록이요, 우리나라의 대표적 민요인 [아리랑]도 이 알이를 소재로 하였다고 생각된다.
알이의 유래가 난생설화라고 생각할 때, 난생설화가 모두 천신인 태양신의 지상강림과 관계되므로, 알이가 곧 신전의 아들이란 뜻이 된다는 것은 별다른 설명이 없어도 알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알이들이 어머니의 배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요, 알껍질을 깨뜨리고 태어나는 사람과 파충류의 잡종도 아님은 물론이고, 한술 더떠서 신생아도 아니라는 사실에 있다.


이 [알이]들은 삼신산에서 수도하여 갱생한 알이(知夷)들이며, 운이 나쁘면 노자처럼 어머니의 뱃속(坤母)에서 80년 동안 있다가 나오기도 하는 큰이(大夷)들이며, 장차 한 나라의 우두머리가 될 맏이(伯夷)들이며, 고도의 지식과 능력을 갖춘 장이(匠夷)들이며, 알처럼 생긴 수레를 끌고 돌아 다니는 알이(軋夷)들인 것이다.


다시말해 이 알이들은 신전에서 통과의례를 거쳐 사람이 되고나서 성인식을 마친 다음, 알처럼 생긴 수레를 타고 자기가 새 나라를 세울 새 땅을 찾아 다니던 동자(童子)들이었다.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수로나 탈해는 이런 동자였던 것이다.
이 동자들은, 이름이 보여주는 것처럼 마을(里)을 세우는(立) 아들(子)이다. [里(리)]는 다시 [田]과 [土]로 나뉜다. [土]는 흙이요, 터요, 땅이다. [田]은 밭이다. 둘을 합하면 [터전]인 동시에 [밭터 . 밭달]이 되어 [바다]와 무난히 연결된다. 따라서 [里]는 새로운 신전을 의미하고, 새로운 신전을 세워 동이의 영토를 확장하는 사람이 동자가 된다.


따라서 [아이], 즉 [알이]를 일반적인 신생아나 유아(幼兒)로 생각하면 안된다. 일반적인 신생아의 뜻으로는 [새끼]가 있다. [새끼]는 [삿(사타구니)]과 [끼다(사이에 들다)]의 합성어로 볼수 있다. [삿을 끼워] 잉태하고, [삿에 끼어] 태어나고, 부부의 [사이에 끼어] 성장하는 자식의 의미를 모두 담고 있는 말이 [새끼]이다. 따라서 이 말은 본래는 낮춤말이 아니라 예삿말이었으나, [한자로 표기되지 못하는 말이기 때문에 낮춤말로 전락한] 말이라 할 수 있다.


[새끼]는 두가닥의 짚을 꼬아 만들어지는 줄인 새끼(索)와 소리가 같고, 실제로 민간에서는 [새끼]를 낳으면 [새끼(索)]에 숯과 솔가지(고추)를 끼운 금줄을 쳐서 이웃에 알렸다. 이 풍습은 고대 과학의 수준을 말해주는 풍습이기도 하다. 오늘날 생명과학에서 찾아낸 유전자를 담고있는 핵산의 분자구조는 새끼처럼 꼬여있는 단백질구조인 이중나선의 형태이다.


따라서 "천지가 처음 열리자, 여와가 황토를 뭉쳐 사람을 만들었다. 아주 바쁘게 일을하여 잠시도 쉬지 않았으나 힘이 부치게 되었다. 이에 새끼줄을 진흙속에 담갔다가 들어올려 휘둘러서 사람을 만들었다." 라고 한 것은 <성서>의 "하나님이 진흙으로 사람을 만들었다"는 기록보다 더 정확한 기록이라고 볼수 있는 것이다.


본론으로 돌아가서, 우리나라 고대사의 건국신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알(卵)]들이 망치나 도끼로 내리쳐도 깨어지지 않을만큼 튼튼하게 만들어진 가마였고, 그 가마가 들판에 있을때에는 새나 짐승의 탈을 쓴 이신(異神)들이 보호해 주었던 이유는, 그 가마에 탄 [아이]가 신전에서 사람으로 승격한 [임금감]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제대로 이해될 수 있다.
따라서 우리겨레의 고대사가 비현실적인 신화(神話)로 가득차 있음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들이 동이의 전통을 이어받은 증거이기 때문이다. 부끄러운 것은 그 신화 속의 상징의미를 분석해내지 못하고, 그 결과 조상의 빛난 얼을 밝히지 못한 우리들의 무능함일 뿐이다.

 

2. 신정과 풍속

1) 역사와 풍속
우리들, 동이족의 후예인 한겨레는 세계에서도 독특한 여러 가지 생활습속들을 가지고 있으며, 이 생활습속들을 풍속(風俗)이라고 부른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이 풍속이 그옛날 동이족이 세계를 지배하던 시기에 형성된 문화라는 사실은 꿈에도 모르고, 좋게 말하는 사람들은 전통문화라고 부르고, [얼간 이(얼이 빠진 이)]나 [얼치기(얼이 치인 이)]들은 미신이니 인습(因襲)이니 하면서 배척하고 있다.


그런데 [풍속]이라는 말 자체가 [풍류의 습속(習俗)]이라는 뜻이니, 풍류의 주인공인 태양신족의 문화를 말하는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더 자세히 살펴보면 [風俗]이 바로 [仙俗]이 되는 것이니, [風]은 태양신으로서 [火人]이 되고, [불(火)]와 [산(山)]의 옛글자는 같은 모양으로 쓰였으므로 [仙]도 또한 [火人]으로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영어에서 좋다는 뜻을 나타내는 [fine(화인)]도 이 말과 연결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풍속]은 [신전의 습관]이 되는 것이니, [仙]은 [異夷]요 [俗]은 [ 夷]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풍속]의 올바른 평가는 [동이 조선의 천국문화]가 된다. 이렇게 의미를 부여하고 나서 우리 풍속을 재고해 보면, 우리들의 말과 생활습관들 중의 상당수가 세계각지의 고대신화와 직결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 민족사의 연구방향은 일제 식민사관이나 반도사관의 극복을 운운하면서 자승자박할 것이 아니라, 바로 이 분야에 초점을 맞추어 나가므로써 위대한 민족혼을 되살리는 방향으로 추진되어야 할 것이다.

 

2) 축제와 풍악
축제의 기원은 [영고(迎鼓)]이다. <삼국지 . 위지 . 부여전>에 따르면, [영고]는 부여에서 매년 은정월(殷正月), 지금의 역법으로는 음력 10월에 추수를 감사하며 하늘에 제사지내고 가무를 즐기던 의식이라고 한다(以殷正月 祭天國中大會 連日飮食歌舞 名曰迎鼓).


그런데 은(殷)나라가 동이족의 나라로서 동이의 역법을 따랐다는 것은 여기서 굳이 증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부여전>에서 [은정월]이라고 말한 것은 중국인들에게 잘 알려진 것이 은나라의 역법이었기 때문이지, 부여인들이 은나라의 역법을 빌려썼기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먼저 알아두어야 할 것이다(실제로는 부여인이 세운 나라가 은(殷)이므로, 구별할 실익이 없다).


여기서 이 사실을 지적해 두는 이유는, 부여인들이 은정월인 10월달에 영고를 지냈던 것이 아니라, 부여인들의 역법으로 정월달에 영고라는 국중대회를 지냈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기 위해서이다.


이 사실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니, 개천절이 10월 3일이 아니라 정월 초 사흘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왜 초사흘인가? 설날은 천신(天神)에게 고하고, 정월 초이틀에는 지신(地神)에게 고하고, 인간에 선포한 것이 초사흘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 역사는 이렇게 뿌리부터 왜곡되어 있는 것이다.


아무튼 이 영고가 20년 전까지만 해도 지켜지던, 설날에 시작하여 대보름까지 이어지는 15일간의 [설]이라고 할수 있다. 지금도 [설] 동안에 행해지는 풍물(風物)은 국중대회에서 행해지던 가무음곡과 일치하는 풍속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민속학계에서 조차 은정월이 우리의 정월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여, 영고나 동맹(東盟), 무천(舞天) 등을 10월에 행해진 추수감사제라고 말하고 있다.추수감사제에 해당하는 것은 한가위(추석)이지 은정월인 지금의 음력 10월에 행해진 국중대회가 아닌 것이다.


이제 축제의 기원을 영고라고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알수 있을 것이다. 영고가 행해진 기간이 [설]이라면, 영고의 뜻도 지금까지 알려진 것과 다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사실은 [영고(迎鼓)]라는 이름 자체만 풀어 보아도 확인할 수 있다.


[迎]은 [맞이]이고 이는 [맏이(伯)]와도 통할수 있다. [鼓]는 [북]이며, [북]은 심장의 박동을 재현해내는 악기로서, 태양의 상징인 [ ]으로 이해된다. 이 북을 솟터마당에서 피운 화톳불, 즉 지상에 강림한 태양을 둘러싼 무리가 두드리면 [북]과 [불]이 그 신전의 태양을 상징하게 된다.


따라서 영고는 앞에서 소개한 바 있는 뉴질랜드 원주민의 해맞이 제의(祭儀)와 같은 것이다. 결국 [鼓]는 [해(日)]이고, 따라서 [영고]는 [영일(迎日)]이며, 우리말로는 [해맞이]가 된다.


동이의 영토가 확장되면서 이 해맞이의 규모도 커지고, 지역에 따라 각 종족의 특색이 반영되면서 고대사회의 여러 축제가 만들어졌고, 그 축제들의 꼭대기에는 동이들의 국중대회가 있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국중대회의 원형은 오늘날의 차례풍속에서 찾아볼수 있다. 즉 모든 자손들이 종가에 모여 조상신(한아버지)에게 차례를 지내는 것, 세계 각지에 퍼져나간 천자들이 신전에 와서 아버지를 만나는 연중행사인 조회(朝會)가 그것이다.


다른 명절과 달리 [설]에는 많은 금기(禁忌)들이 있는데, 이 금기들은 신전 밖에서 천자들을 수행해 온 사람들 앞에서 일거일동을 조심해야 했던 신전 사람들의 수칙(守則)이 변형된 것으로 볼수 있다. 결국 영고와 다른 축제(명절)들은 그 성격이 달랐다고 생각된다.


영고의 특징은 해와 달을 동시에 맞이한다는 것이니, [  맞이]로 이름을 붙인 이유가 [ ]이 해(日)와 달(月)을 합한 밝음(明)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새날(햇날)]부터 [보름날(볼의 날)]까지를 [설]로 정하여 축제를 벌렸었다([볼]이 [달]의 옛말임은 설명되었다).
영고에 대한 기존의 연구가 너무도 미흡하여 서두가 길어졌는데, 영고를 머리로 삼는 축제는 연중 계속된다. 우리나라에는 세계의 종주국이었던 관계로 연중 축제가 끊이지 않았다. 설(정월 초하루에서 보름), 삭일(2월 초하루), 삼짇날(3월 3일), 초파일(4월 8일), 단오(5월 5일), 유두(6월 보름), 칠석(7월 7일), 한가위(추석; 8월 보름), 중양절(9월 9일), 안택일(10월 첫 午일), 동지(11월 중순), 납(臘; 동지후 세 번째 未일)등과 같이 달마다 축제가 있고, 이 외에도 여러 가지 세시풍속이 전해져 온다.


홀수 월에는 그달의 숫자와 같은 날에 축제를 지내게하여 밝음이 겹치도록 하고, 짝수 월에는 보름날을 축제일로하여 음(陰)의 빛인 달빛이 가장 왕성해지도록 배려하였다. 이는 이 행사들이 음양의 법칙과 깊은 관련이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즉 양월(陽月)에는 속세에 세워진 신전인 용궁에서, 음월(陰月)에는 산 위의 신전에서 축제를 거행하므로써 음양의 중화를 도모했던 것이다.


음양의 중화를 도모한 이유는 말할것도 없이 신혼과 관계가 있다. 왜냐하면 음양이 조화되어 중화를 이룰 때 천지음양의 정기인 사람이 태어날 수 있기 때문에, 이런 날들에 축제와 신혼이 있었던 것이다. 고대의 축제에서는 한결같이 그 나라의 신들이 그들의 신전에서, 그 축제에서선택된 여인들과 동침하였다고 전해진다. 바빌로니아의 벨 신, 이집트의 암몬 신, 아테네의 디오니소스 신 등이 그 예로서, 앞에서 이미 소개된바 있다.


이들 신의 배우자로 선택된 여자들은 왕비나 그에 못지않은 고귀한 신분이었으며, 그들의 성혼(聖婚)에서 태어난 아이가 미래의 왕자나 그에 준하는 인재가 되었다. 그러므로 태교(胎敎)의 비중이 컸던 것이고, 따라서 태교는 신동(神童)을 낳는 방법을 궁극적인 이상으로 삼는 신성한 행위였던 것이다. 결국 축제의 핵심은 다른 무엇보다도 이 성혼과 태교에 있다고 할것이며, 다른 요소들은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준비사항으로 이해된다.


이 축제를 통해 신들이 초야권을 행사하였으니, 서경에서 단주가 밤낮없이 친구들과 어울려 술마시고 놀기만 한다는 것은 이런 동이의 풍속을 말한 것이다. 지금도 서양의 귀족사회에서 행해지는 카니발(가장무도회)에서는, 가면을 쓴 귀족들이 서로의 얼굴을 모르는 상태에서 자유롭게 성관계를 맺는다고 하는데, 이것이 고대의 동이축제를 이어받은 것이라고 하겠다.


이 축제에서 행해진 가무음곡(歌舞音曲)이 음악의 기원이 될 것이다. 이 가무음곡은 단순히 흥을 돋우기 위한 수단만은 아니다. 앞의 통과의례에 대한 해설에서 이미 밝힌바와 같이, 가무음곡은 신전에서 수도한 내용을 평가받는 자리였다. 노래와 춤의 내용이 부덕(婦德)을 상징화한 것들이기 때문에, 가무에 능한 여성은 왕재(王材)를 올바로 교육시킬 수 있다고 생각되었다.


바로 이 때문에 유교에서 예악(禮樂)을 정치의 이상적인 교화수단으로 삼은 것이니, 그들 중에서 왕이 되려는 자는 천국(동이족)과의 관계가 원활해야 그 국가가 이상적으로 다스려졌고, 그러려면 동이의 풍속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축제에서 행해진 또 하나의 풍습이 인신공희이다. 고대의 축제에서 사람을 희생으로 바치는 풍습이 있었던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그 풍습이 행해진 이유 중에서 감추어진 사실이 있으니, 그때 죽음을 당한 사람들이 [이신(異神)]들이었다는 것이다. 이 내용은 앞에서 설명한 통과의례 중에서 생략했던 부분인데,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올림픽과 메이 퀸에 대해서 알아 보아야 한다.
올림픽이나 메이 퀸은 둘 다 인재를 선발하는 대회라는 면에서 공통된다. 그리고 둘의 차이점은 올림픽이 남자를, 메이 퀸이 여자를 선발대상으로 한다는 것이다.


이 둘 중에서 메이 퀸을 선발한 이유는 이미 밝혀진 셈이다. 축제에서 신의 배우자로 선택된 여자가 바로 메이 퀸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남자를 선발하는 올림픽은 어떤 목적에서 개최되었을까?
올림픽은 [꽃님]을 선발하기 위한 행사였다. [꽃님]이란 고대에 신전에서 씨받이를 위해 선발한 남자를 나타내기 위해 글쓴이가 임시로 붙인 이름이다.


올림픽의 우승자에게 월계수로 만든 왕관을 씌워주던 풍습은, 특히 그 월계관의 모양이 꽃잎이나 꽃받침처럼 생겼다는 점에서 꽃님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특히 꽃이 식물의 생식기관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씨받이에서 정액을 제공하는 씨내리를 꽃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문제될 것은 없다. 아래의 인용문은 이 꽃님의 비극적 성격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우리는 여기서 말을 타는 남성이 어떤 경기의 승리자라고 한다면, 그가 곧 우생학적으로 훌륭한 씨를 뿌리는 농사꾼(보습)의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으로 선발됨을 알게된다. 그러나 그 씨는 그 개인의 씨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나라를 통치하는 왕통의 씨가 되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그 행사는 밀의적인 방법에 의해 진행되어야 하고, 경우에 따라서 그 씨의 임자는 왕국의 일사불란한 번영을 위해서 제물로 바쳐져야 했다. 그러나 그것이 개인으로 볼 때 얼마나 비극적인 것이며, 인륜의 입장에서 볼 때도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라는 점을 실감하게 되면서, 그 인물의 처우는 다른 방식으로 행해지고 제의도 상징적인 것으로 바뀌게 된다. 결국 사람 대신에 말이 그 모든 것을 떠맡게 되는 엄청난 희생물이 된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이와같은 일은 꽃님에게만 일어난 것이 아니라, 그 이전 시대부터 있었던 메이 퀸에게도 일어났던 일이었다.

파우사니아스가 쓴 <그리스 이야기>에 의하면, 아프로디테신전 옆에는 에일레이티아(Eileithia) 신전이 있었는데, 그곳을 신들의 정원(神苑)이라고 불렀으며, 주로 그 신전은 여자아이의 출산을 관장하는 여신의 집으로 불렸다. 그때 아테네에서는 알레포리아제(祭)가 열렸는데, 신전에 근무하는 아레포로이(Arrephoroi)라 불리는 처녀들은 아테네 여신의 명으로, 이상한 그릇을 받아 머리에 이고 아크로폴리스의 지하로 들어가게 되어 있었다. 그 지하 내부에는 [신들의 정원]으로 통하는 비밀통로가 있었다. 처녀들은 그 통로를 지나 [신들의 정원]에 들어가게 되며, 그곳에서 가져왔던 그릇과 다른 그릇을 바꿔가지고 돌아가게 된다. 하지만 처녀 자신들을 포함하여 아무도 그 운반하고 있는 그릇 속에 무엇이 들었는지 모른다고 한다. 불행한 일은 그릇을 운반한 처녀들은 그길로 해직되고, 그 자리는 새로운 처녀들로 충당된다는 사실이다.


많은 학자들은 [아레포로이]를 해석하여, [비밀스런 성물(聖物)을 운반한다]는 말에서 나왔다고 하지만, 실제로 그 성스러운 물건이 무엇인지는 밝히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그 제사가 그리스의 생성과 풍요를 상징하는 데메테르 여신제와 같다는 사실과, 그리고 그 제사 때에 처녀들이 실제로 희생된다고 하는 점 등은 뒤에서 다시 거론되지만, 문제는 생성의 풍요로움은 단순히 곡식의 수확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훌륭한 아이를 많이 배출해야 사직이 무궁하게 발전한다는 고대의 태교의 원리가 함축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바로 이 이유들, 초야권의 행사와 인신공희들 때문에 풍류는 많은 타민족들의 원성을 사게 되었고, 서력기원 전후의 시기에 열국의 왕들과 결탁한 현대의 고등종교들로부터 배척을 받게 되었으며, 바로 그 경전들에 기록된 대대적인 신들의 전쟁을 거치면서 붕괴되었던 것이다. 이 문제는 풍류맥의 전승에서 해설하기로 하고, 신정과 풍속을 계속 살펴보자.

3) 바람둥이
이성교제가 활발한 사람들을 가리켜 [바람둥이]라고 한다. 그런데 바로 이 바람둥이라는 말이 풍류에서 유래한 이름이니, [바람]은 [風]이요, [둥이]란 [동이(東夷 . 童夷)]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전의 거주민인 동이족과, 신전에서 나와 새로 신전을 세우고 씨뿌리기를 집행할 동자를 동시에 나타내는 말이 [둥이]라고 할 것이다. 여기서 [동이(東夷)]는 아버지이고, [동이(童夷)]는 아들로서 천자가 되는 것이다.
이 동자(천자)들은 아버지의 바람기를 계승하여 궁전에 수많은 궁녀를 두고 씨뿌리기에 전념하였으니, 종친을 제후로 봉하여 천하를 다스린 중국의 봉건제도는 풍류의 하부구조인 것이다. 진시황의 삼천궁녀나, 낙화암에 투신자살한 의자왕의 삼천궁녀들은 정말로 황음무도(荒淫無道)를 위한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황음무도]를 사전에서는 [주색에 빠져 사람의 도리를 행하지 않음]이라고 풀이하한다. 그런데 [荒]이 동이신전이고 [淫]이 신전의 중심기능이며, [無]가 [자궁속에 있는 아이] 또는 [고분에서 수도중인 아이]로서 <예기>가 "역(易)의 도(道)"라고 말하는 최고의 진리이다. 따라서 황음무도는 풍류의 본질을 정확히 나타낸 말로서 본래는 나쁜 뜻이 될 수 없는 말인데, 고등종교들은 바로 그 황음무도를 배척하는 집단의 이익을 대변했기 때문에 나쁜 말로 만든 것이다.


이런 사실을 이해하면 화랑도를 세간에서 바람잽이라고 지칭했던 이유를 알수 있으며, 또 <삼국사기>에서 "그래서 김대문의 <화랑세기>에 어진 재상, 충성된 신하가 이에서 솟아나고, 좋은 장수, 날랜 군사도 이에서 생겨났다고 하였고 ......"라고 한 것이 바로 이 황음무도의 성과를 말한 것임도 알수 있다.
따라서 바람둥이는 본래 하느님(天帝)이나 제왕(天子)들을 일컫는 말이었고, 한겨레는 그 바람둥이의 정통을 이었기 때문에 유달리 정력에 대한 집착이 강하다. 우리나라 남자들이 국내의 인삼 . 녹용에 보신탕 . 뱀탕 . 토룡탕으로도 부족하여, 바다건너 외국까지 돌아다니면서 보신관광에 열을 올리고 있는 것은 이런 전통이 있는 것이다. 
  

 

4) 사당질과 용두질
풍류의 주역들은 많으나, 그 중에서도 두 개의 중심축은 무당과 사당이다. 무당이 신전의 주인으로서 제의를 주관하고 신탁을 전하던 천제(天帝) 또는 교황(敎皇)이었다는 점은 이미 밝혔으며, 이들의 별칭 중의 하나가 용왕이라는 사실도 설명되었다. 그러면 [사당]은 무엇인가?


사당은 [社堂] 또는 [寺黨]으로 쓰는데, [사당패(社堂牌)]라고도 한다. 이들은 여러 가지 흥행적 놀이를 가지고 유랑하는 연예인들의 특수조직으로서, 모갑 또는 꼭두쇠를 단장으로하여 밑에 한 두명의 여자인 사당과 칠 팔명의 남자인 거사가 부부관계를 맺고 돌아다니면서, 기능과 노래를 파는 집단이었다.


사당패는 처음에는 여자들이 떼지어 다니면서 술자리에서 가무를 하면서 한편으로는 매춘을 부업으로 삼았다. 그후 조선 말기에 남자들만으로 구성된 남사당패가 출현하였는데, 이들은 천민 중에서도 최하층 천민으로서, 남색(男色)사회를 이루고 유랑하면서 걸식과 매음을 하였다. 가는 곳마다 절을 집결장소로 삼았던 점에서 절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그런데 이들의 풍습이야말로 고대에 삼신산에서 행해지던 국중대회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음을 알수 있다. 따라서 그들은 불교도들이 아니라 불교도로부터도 버림받은 진정한 삼신의 후예이다.


그들이 천년에 이르는 기간동안 박해를 받으면서도 어느 한자리에 눌러앉아 농사짓는 평민으로 돌아가지 못한 이유는 사회제도가 가로막아서가 아니라, 그 이전의 3천년 이상을 신으로 군림했던 자존심 때문이라고 풀이해야 한다.


이들은 본래 토지신의 신전인 사(社)에 거주하던 여신들로서, 그 본래 역할은 노래와 춤에 우주의 진리를 담아 가르치던 예인(藝人)들이었다. 공자 이후로 중국의 유교가 인간의 기본 덕목으로 존중하던 육예(六藝)도 실제로는 이들의 기예(技藝)였을 것이다.
이들의 주요 직능 중의 하나가 신전의 지배를 받는 변한의 천자들에게 아이를 낳아주는 황후가 되는 것이었으니, 그들의 매춘은 고대 사회에서 성스러운 직업이었다. 그런만큼 그들의 자부심이 얼마나 대단했을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그들이 집결장소로 반드시 절을 이용했던 이유는 그들이 불교에서 갈라져 나온 부류라서가 아니라, 절이 본래 풍류의 신전이었음을 잊지 않은 때문이다. 다시말해 그들이 절의 본래 주인이었다. 그들이 중들에게 절을 빼앗기는 과정은 삼국유사에 고승과 독룡(毒龍)의 투쟁기록으로 남아있다.


그들이 절에서 했던 일이 사당질과 용두질이다. 사당질이 지금 우리가 목숨걸고 매달리는 [사랑(愛) 질]이라는 사실은 굳이 증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사랑도 고대에 풍류신전에서 하게되면 태자나 귀족을 낳는 성행위(聖行爲)가 되었으니, 이를 용두질이라고도 한다.
용두(龍頭)질은 자위행위를 말하는데, 영어로는 마스터베이션(Masturbation)이라고 한다. 박용숙 선생은 이 용두질이 고대에 여신전인 사당에서 행해지던 태교(胎敎)와 관계된다고 한다. 즉 임금이 될 태자는 직접적인 육체의 접촉이 아니라 인공수정에 의한 간접수태를 통해 잉태하였고, 간접수태를 위해 정액을 추출하는 일이 바로 용두질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당질의 특수성을 암시하는 것이 <동이전>에서 "옥저에는 여인국이 있고 그 나라에는 우물이 있어 들여다 보기만 해도 아이를 얻는다"라는 기록이라고 한다.


이 간접수태는 조개(貝)를 이용해서 행해졌는데 그 조개가 자안패(子安貝)라는 것으로서, 고고학계의 유물 중에서 아직도 수수께끼로 남아있는 것이라고 하며, 그 실제용도는 간접수태의 도구였다고 한다. 즉 고대에 이미 인공수정이 실시되었던 물적 증거품이 자안패라는 것이다.

 

고고학적인 유물로서 아직 수수께끼로 남아있는 소위 자안패도 이 태교의 전문적인 기능과 관련있는 것으로 추단할 수 있다. 자안패는 바다에서 채취된 꼬막 같은 조개도 있지만, 청동이나 골각기로 만들어진 것도 있다. 1920년대에 안데르손(J. Gunnar Andersson)이 얀소아(仰韶)에서 발굴한 자안패들은 기원전 1800년 경의 것으로 밝혀져, 태교의 역사가 얼마나 오랜가를 알게한다. 그는 자안패가 앗시리아 . 바빌로니아 . 이집트 . 그리고 그리스 . 로마에서 발견되었던 비너스 신상(生殖女神)과 관련된다고 보았으며, 이것들은 이집트의 분묘 . 누비아의 후기고분 . 크레타 . 흑해 . 키프로스 . 키에프(스키타이 분묘) . 우랄 산맥의 서쪽에 있었던 아나니노 문명 시대의 고분 . 그리고 프랑스 . 영국 . 독일 . 발틱 해안지대의 고대고분 등, 광범위한 지역에서 발굴되었다고 보고하고 있다. 특히 유라시아 대륙의 고분에서 시작된 이들 자안패는 그 분포도로 보아 구대륙과 미대륙을 연결하는 하나의 공통된 어떤 습관이 고대에 존재하였음을 알수 있게 했으며, 백인들이 건너가기 이전에 인디언 문화에서 그것들이 사용되었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우파니샤드에 의해 전수되고 있는 생식제의에서는 생식행위가 신들을 모두 동원하는 우주적 규모의 신혼(神婚)이 되고 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묘사되고 있다.


"비슈누(Visnu)로 하여금 자궁을 준비하게 하라! 트라슈트리(Tvashtri)로 하여금 온갖 형상을 빚게하라! 프라자파티(Prajapati), 그로 하여금 쏟아 넣게하라! 다트리(Dhatri)로 하여금 정액을 받아놓게 하라!" ...... 이들 인용문들에는 신들의 혼인에서 어떻게 아이가 탄생되는지 구체적인 언급이 없으나, 정액을 특별히 [쏟아 넣는다]라든가 [받아 놓는다]는 표현과, 여자가 [요(Yo)]의 명에 따라 땅위에 누웠던 원모(原母)의 행위를 모방한다는 점으로 미루어, 태교는 탈을 쓴 신들의 직접적인 행위 이외에도 어떤 간접적인 수태방법이 있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 어쨌든 이들 자안패에 공통되는 점은 모두 한쪽이나 양쪽으로 자그마하게 구멍이 나있다는 것이며, 그 용도는 알수 없으나 태교와 관련시켜 볼 때 그 속에 남성의 정액이 투입되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것은 무구(巫具)로 사용되는 남근 모양의 소위 [부근(付根)]의 존재와, 일본의 신도(神道)에서 무구로 쓰이는 [긴세이(金精)]가 모두 자안패와 연결되는 특수한 의례구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신혼이 이런 간접적 수태방법에 의해 진행된 이유는 직접수태의 경우에 탈을 쓴 것과 같이, 세계국가의 이념을 달성하기 위한 하나의 보안장치였다고 한다. 즉 사당질에 의해 태어나는 아기는 직접적인 경우이든 간접적인 경우이든 아버지가 없이 태어나게 되며, 이런 사실을 표현하는 것이 [아이를 낳는 우물]이라는 것이다. 아무튼 이 사당질에 의해 태어나는 아이는 새끼 용(龍)으로서, 자라서 왕이될 신분이다. 그래서 정액을 받는 자위행위가 용두질이며, 마스터(주인) 베이션인 것이다.


이렇게 중요한 기능을 담당했던 그들도 동이족의 세계국가가 무너진 후에 그 지위가 격하되어, 귀족이나 평민을 상대로 자식을 낳아주는 역할을 담당해야 했을 것이다. 그 후 불교와 유교의 세력이 팽창함에 따라 신전마저 빼앗기고 유랑의 길에 올랐을 것이다. 특히 무당과 사당의 역할을 혐오하던 유교적 도덕관념이 지배한 조선시대에 와서는, 마을에서 공연하는 행위마저도 금지되는 탄압에 시달렸던 것이다.
유교의 허례허식이 비판을 받으면서 사당패들의 업무였던 춤과 노래가 대중적 인기를 회복하고, 연예인들의 지위가 급격히 향상되었다. 이런 현상은 풍류의 실상을 올바로 밝혀내는 과업의 장애요소가 없어졌다는 면에서도 다행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5) 소도와 서울
이제는 홍익인간의 종합결론으로서 세계국가의 중심인 솟터와 서울에 대해서 설명할 때가 된 것 같다.
지금까지 설명된 동이문화의 성지인 삼신산 . 바다 . 신전 등의 정식 명칭은 [솟터]이다. 그리고 이 솟터는 순우리말이며, 전세계 고대종교에서 최고권위의 핵심에는 반드시 이 솟터와 관련된 이름이 발견된다. 이점을 밝히려면 먼저 솟터란 말에 담긴 뜻부터 밝혀야 할 것이다.


[솟터]는 첫째 [소(牛)의 터]이다. 소와 관련이 있는 신전은 모두 솟터이다. 신석기 시대에 소를 그린 동굴벽화로 유명한 알타미라 동굴, 소를 잡아 희생의 제사를 올리던 태호복희와 우두인신(牛頭人身)으로 기록된 염제신농씨, 우리식으로 발음하면 소임금이 되는 그리이스의 제우스(帝牛氏), 고대 그리이스의 미노스와 타우루스 신전, 소를 숭배하는 브라만교(힌두교)와 미도라교 등의 신전은 모두 솟터이다.


둘째로 [솟터]는 [솥(鼎) 터]이다. 솥을 모신 자리가 솥터이니, 희생의 제물인 소(牛)를 삶던 도구가 솥으로서 이것이 주(周)나라에서는 제권의 상징이 되기도 하였다. 솥이 제권의 상징이 된 이유는 주나라가 천하를 통일한 후 천하의 무기를 거두어들여, 아홉 제후국을 상징하는 아홉 개의 솥으로 만들어 황궁에 두었기 때문이라 한다. 그러나 주나라가 왜 하필이면 황제의 신상이 아닌 솥을 만들었는지에 대해서는 해명이 없다.


솥은 풍류에서 아주 중요한 그릇이다. 도깨비들이 문명이기를 만드는 용광로가 솥이요, 무당의 통과의례 시험에서 중요한 과목인 요리의 필수도구이다. 요리의 목적이 음양의 이상적인 배합상태를 찾아내는 것이므로, 솥은 수도에 있어서 본심의 태양인 단(丹)을 만드는 도구로도 표현된다. 따라서 솥은 이인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솥이 제권의 상징이 될 수 있었다.


셋째로 [솟터]는 [솟은 터], 즉 언덕이나 고원이다. 고지(高地) 또는 첨지(尖地)가 솟터이니, 고대의 신전은 모두 이런 솟터에 세워졌을 뿐만 아니라, 신전의 모습 자체도 아사달(피라밋)에서 보듯이 뿔처럼 뾰쪽하게 솟은 모습이다.
넷째로 [솟터]는 [못(澤) 터]이다. 연못과 관계되는 한자는 연(淵) . 호(湖) . 택(澤) . 소(沼) . 정(井) . 천(泉) 등 여러 가지가 있는데, 이 모두가 지금까지 설명한 풍류의 신전과 직접 . 간접적으로 연관된다. 특히 [소(沼)]는 물가( )의 네모진 땅(口) 위에 칼(刀)처럼 뾰족하게 세운 신전의 모습을 쉽게 떠올릴 수 있다. 이 글자는 솟터의 지하에 있던 여신전인 우물도 솟터로 불리웠음을 암시해 주는 근거라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다섯째로 [솟터]는 [좇(祖) 터]이다. 조상의 땅이 솟터인 것이며, 동시에 조상을 조상이게 한 [좇(腎) 터]가 솟터인 것이다. [신]으로 발음되는 한자 중에서 많은 글자들이 좇과 관계가 있음을 알수 있는데, 늘어나고(伸) . 신음하고(呻) . 아이배고(娠) . 모양이 길고(莘) . 음양화합 하는(神) 것 등이 그것이다. 이 뜻들이 모두 풍류의 씨뿌리기와 관련됨은 말할것도 없다.


마지막으로 [솟터]는 [좇]의 여성형인 [젖]과 관계되는 [젖터]이다. 젖(유방)의 모습은 불룩 솟은 모양이고, 아이가 젖을 먹지 못하면 죽는다. 풍류에서 아이낳기가 차지하는 비중을 볼 때, [솟터]와 [젖터]의 관계는 다른 어떤 의미보다도 밀접하다.
이상의 여러 뜻은 다른 의미와 결합되면서 여러 가지 이름들을 낳았고, 그 말들은 풍류의 실상을 밝혀주는 중요한 말들이다. 그런 말들로는 서울(京) . 소도(蘇塗) . 수도(首都) 등이 있다.

 

① 소도(蘇塗)
솟터를 한자음으로 옮겨적은 것이 [蘇塗]이다. 그런데 중국인들이 다른나라의 말을 한자로 옮길 때에는 그 낱말의 뜻을 고려해서 표기하는 것이 관례였다. 따라서 [蘇塗]에도 [솟터]의 의미가 상당부분 반영되어 있다.


먼저 [蘇(소)]는 [甦(소)]와 같은 글자로서 [되살아나다]라는 뜻이다. 이는 솟터가 죽어서 거듭나는 땅이라는 사실을 반영한다. [蘇]의 본래 뜻은 차조기(들깨)인데, 이는 우리민족이 예로부터 등불의 재료로 삼았던 식물이다.


이 글자가 [甦]와 같은 뜻으로 쓰인 이유는 [깨다]라는 말을 통해서만 이해된다. 따라서 [蘇]의 [되살아나다]라는 말이 [깨닫다] . [깨어 나다]는 뜻임을 확인하게 된다. 결국 [솟터]는 [깨닫는 땅]으로 풀이된다.
다음으로 [塗]는 [진흙 . 칠하다 . 지우다 . 괴로움] 등의 뜻을 가진다. [塗]의 중심글자는 [余(여)]인데, 이는 나무로 지붕을 받친 작은 집을 나타낸다고 한다.


그런데 이 글자모양은 삼지창을 넣어둔 모습으로 이해될 수 있다. 삼지창이 침술과 해부술의 상징인 화살(또는 뱀)을 나타내는 글자임을 생각하면, 물가에 지어진 동이신전을 [塗]라 하였음을 짐작할수 있다.
따라서 소도는 죽었다가 되살아나는 장소가 되고, 이는 의례적 해체에서 설명된 고대신전의 역할을 올바로 반영하고 있는 셈이다.

 

② 휴도(休屠)
<삼국유사 . 탑상(塔像)>의 [요동성 (아)육왕탑((阿)育王塔)]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나온다.

 

삼보감통록(三寶感通錄)에 실려있다. 고구려 요동성(遼東城) 옆에 있는 탑은 옛 노인들이 전하는 말에, 예날 고구려 성왕(聖王)이 국경을 살피는 길에 이 성에 이르자, 오색 구름이 땅에 덮인 것을 보고, 구름속을 찾아가 보니 어떤 중이 석장을 짚고 섰는데, 가까이 가면 사라지고 멀리서 보면 또 나타났다. 그 곁에는 3층 흙탑이 있었는데, 그 위는 솥을 엎어놓은 것 같은데 이것이 무엇인지 알수 없었다. 다시 중을 찾아가니, 다만 거친 풀이 있을 뿐이었다. 그곳을 한길이나 파니 석장과 신이 나오고, 또 파서 명(銘)을 얻었는데, 거기에는 범서(梵書)가 씌어 있었다.

 

범서를 아는 신하가 있어 이르되 "이것은 불탑입니다" 하였다. 왕이 자세히 따져 물으니 "이런 것이 한나라에 있었는데, 거기서는 이것을 포도왕(蒲圖王 - 본래는 休屠王이니 祭天하는 金人이다)이라 합니다" 하였다. 이로인해 왕은 믿음이 생겨 7층의 나무탑을 세웠다. 그 뒤로 불법이 전해 오고서야 비로소 그 시말을 상세히 알게 되었다고 하였다. 지금은 높이가 줄었는데 나무 탑이기 때문에 썩어 내린 것이다.


아육왕이 통일한 염부제주(閻浮提州)에는 방방곡곡에 탑을 세웠으니, (여기에 육왕탑이 있는 것이) 족히 괴이할 것이 없다.

일연은 여기서 여러 가지 잘못된 해석을 내리고 있는데, 이는 당시의 지식이 오늘날과 같지 못한 탓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 잘못된 부분은 이 단락의 주제와 깊은 관련이 없으니 설명을 생략하고, [휴도(休屠)]가 [소도]라는 사실만 밝히기로 하자. 단재 신채호 선생은 <조선상고사>에서 [휴도]가 바로 [소도]임을 밝히고 있다.

 

언제인가 필자가 <사기(史記)>의 [흉노전(凶奴傳)]을 보니, 삼성(三姓)의 귀족 있음이 신라와 같고, 좌우 현왕(賢王) 있음이 고려나 백제와 같으며, 5월의 제천(祭天)이 마한과 같고, 무기일(戊己日)을 숭상함이 고려와 같으며, 왕공(王公)을 한(汗)이라 함이 삼국의 간(干)과 같고, 벼슬이름 끝 글자에 치(치)라는 음이 있음이 신지(臣智)의 지(智)와 한지(旱支)의 지(支)와 같으며, 후(后)를 알씨(閼氏)라 함이 곧 [아씨]의 번역이 아닌가 하는 가설이 생겼다. 인축(人畜) . 회계(會計)하는 곳을 담림(담림) 혹은 대림(대림)이라 함이 [살림]의 뜻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나고, '휴도(休屠)는 소도(蘇塗)와 음이 같을 뿐 아니라, 나라 안에 대휴도를 둔 휴도국이 있고, 각처에 또 소휴도가 있어서 더욱 삼한의 소도와 틀림이 없었다'.

 

<사기>에 흉노들의 특수한 제도로 소개되어 있는 [휴도]를, 일연은 그 이름까지 알고 있으면서도 불교의 것으로 단정해버린 것이다. 그러나 [휴도]는 그 이름 자체에 동이신전임이 나타나 있다.
[휴(休)]는 나무에 기대선 사람을 나타내는 글자이다. 나무(木)가 우주목으로서 신전의 상징인만큼, [休]는 당연히 신전에 거주하는 신관(神官)들이다. [도(屠)]는 [시(尸)]와 [자(者)]를 합한 글자이다. [尸]는 신상(神像)임을 이미 자세히 설명한 바 있다. [者]는 [짐승을 잡아 배를 가른다]는 뜻인데, 이것이 동이의 풍속 중에서 의례적 해체를 나타낸 것임을 생각하면, [휴도]가 [솟터]를 다른 측면에 초점을 맞추어 이름붙인 것임을 알수 있다.


더욱이 제천금인(祭天金人)은 동이인의 또다른 표현이다. [제천]은 동이인들의 직능이니 더 설명할 것도 없고, [금인]은 [쇠 사람]으로서 앞에서 설명한 바 있는 [서자 환웅]과 연관된다. [쇠(金)]는 우리말로 [소의]를 줄이면 얻어지는 말이다. 이때의 [소]는 물론 [소(牛)]로서 염제신농의 표상이다. 이 책에서 염제씨가 환웅이라고 주장하였는데, 염제씨의 불꽃(炎)이나 환웅의 불(庶 . 雄)이 풀무의 불이라고 생각하면, 소(牛)터에서 쇠(金)가 최초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동이인을 금인(金人)이라고 불렀을 가능성을 얻게된다.


또 <삼국유사>의 기록에서 [요동(遼東)]과 [육왕(育王)]도 동이인의 뜻을 담고 있다. 관료(官僚)라는 말에서 [僚]는 [관리들이 사는 곳]인 [寮(료)]와 그곳에 사는 사람을 합친 글자이다. [遼]에도 이뜻이 적용된다고 생각하면, [遼東]은 [태양신전의 관리들]을 뜻하게 된다. 한편 [育王]은 [육(育)]이 [갓난아이를 기르다]는 뜻이므로, 이는 고모(古母)신전의 뜻이 되는 것이다.
결국 [요동성 육왕탑]은 아쇼카 왕의 불탑이 아니라, 풍류의 신전이었다는 것이 올바른 해석이다. 일연이 이런 이름들을 쓰면서 아쇼카 왕을 들먹인 것은 어쩌면 불교에 의지하여 풍류의 흔적을 보존하려는 고육책이었는지도 모른다.

 

③ 소울
[소울]이란 [소(牛)]의 울타리], 즉 외양간을 뜻한다. [솟터]를 다른말로 나타내면 소울이 되는 것이다. 이는 소(牛) 우리(牢)이기도 하다. 결국 이 [소울]은 환웅(신농)의 신전을 나타내는 말로 이해된다.


이 [소울]은 영어에 아직도 옛날의 뜻을 간직한 채로 쓰여지고 있다. 즉 영혼을 뜻하는 영어의 [soul]은 솟터가 영혼의 고향으로 여겨지던 시대에 만들어진 말로 추정된다. 예수가 외양간(마굿간)에서 태어났다는 <성서>의 기록은 이런 뜻을 나타낸다.


외양간과 마굿간의 차이는, 외양간이 중심신전을 나타내고 마굿간이 봉토권을 가진 지황의 신전을 나타내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소는 솟터의 왕을 상징하고, 말은 맏터(맏땅)의 왕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소울]과 영혼이 연결되는 근거는 동이의 신전이 수도를 통해 거듭나는 [蘇塗]라는 점에 있으니, <성서 . 창세기>에 하느님이 아담의 코를 통해 영혼(숨)을 불어넣었다는 기록은, 코처럼 뾰족한 언덕(산)에 굴을 뚫어 만든 동이의 신전에서 수도한 아담이 초월적 영혼을 얻었다는 뜻이된다.

 

④ 서울(京)
[서울]은 [소울]과 [세 뿔]이 결합된 낱말로 보여진다. 이렇게 보는 근거는 [서울]의 옛말이 [셔 ]이기 때문이다. 여기서의 [세 뿔]이란 천일원(天一圓), 지이방(地二方)을 종합한 인삼각(人三角)이다. 따라서 [서울]을 [소울]과 [세 뿔]의 결합으로 보면, [소울]이 바로 [세 뿔]의 자리라는 추론이 성립한다.


[세 뿔]은 [삼각(三角)]이고, [삼각]은 [삼각(三覺)]이 된다. 삼각(三覺)은 삼신의 가르침인 천부경과, 그 핵심진리인 [삼(三)으로 상징되는 인도(人道)]를 깨닫는 것이다. 앞에서 설명한 바와같이 동이(東夷)라는 이름의 [이(夷)]는 활을 상징하고, 그 활은 [각술(角術)]이라고 불린 천문역술(天文易術)이었다. 따라서 삼각(三覺)은 솟터의 유래와 완벽히 일치한다.


이와 동시에 [세 뿔]은 [세 불(火)]이 될 수있다. [불]과 [뿔]은 우선 발음이 비슷하고, 불꽃의 모양도 뿔과 비슷하게 끝이 뾰족하다. 실제로 3,000년 전에 쓰인 [角]의 상형문자는 불꽃의 모양과 구별하기 힘들다.


고대에 [뿔]과 [불(火)]이 통용될 수 있는 글자였다면, [세 뿔]은 [세 불(三火)]을 거쳐 [세 산(三山)]으로 바뀔수 있다. 이미 설명된대로 [불(火)]과 [산(山)]의 옛글자는 거의 같기 때문이다.


[세 불(三火)]은 [세 빛(三煌)]이 되고, 이는 다시 [삼황(三皇)]을 거쳐 [삼신(三神)]이 된다. 따라서 [삼각]과 [삼신]과 [삼산(三山)]은 같은 뿌리를 가지는 말이라고 보아도 좋다. 조선의 수도였던 지금의 서울에 있는 삼각산은 풍류의 흔적이 줄기차게 이어져 내려온 흔적이라 하겠다.


[서울], 즉 수도(首都)를 한자로는 [京(경)]으로 쓰는데, 그 옛모습은 신전의 모습을 본뜬 [高]와 거의 같은 모습으로 되어있다. 즉 [京]도 신전을 나타내는 글자였던 것이며, [京]은 [징(zing)]으로발음되는데 이는 [井(zing) . 鼎(ding)]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여진다. 이 글자들이 동이의 신전을 나타내는 글자라는 사실은 [솥터]에서 살펴본 바와 같다.


[서울]이란 뜻의 영어는 [capital(캐피탈)]이다. 이를 우리말로 바꾸자면 [갑(甲) 비탈]과 [깨비 탈]이 될 수 있다. [甲]은 [알을 깨고 나오는 모습]을 나타낸 글자로서 솟터와 관계되며, [비탈]은 [빛 땅(달)]이나 [비스듬한(빗) + 땅(달)]이 되므로 [아사달]과 뜻이 통한다.
[깨비 탈]은 또 [도깨비]의 [탈]이라는 말이 되기도 한다. [탈]과 [달]은 쉽게 바뀔 수 있는 말이며, 이는 솟터의 의미 중에서 금속을 제련하는 일과 깊이 관련된다.


[cap]이 모자라는 점도 솟터와 관계되는 것이니, 피라밋이 고깔처럼 생긴 것이나 왕들이 관(冠)을 썼던 것이 모두 이와 관계되기 때문이다. 박용숙 선생은 "금관(金冠)이 영어로는 'Crown'인데, 'r' 발음이 약화되면 그대로 [관]이 된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이와같이 솟터의 성격만 제대로 알고, 그와 관계된 한자들과 우리말의 관계를 알면 세계문화에서의 풍류의 위상을 알수 있게 된다. 우리나라의 모든 학문분야에서 이에 대한 관심이 너무 미흡한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⑤ 솟터와 세계국가
지금까지 살펴본 솟터의 여러 뜻은 지금의 국도(國都)가 가진 뜻을 거의 충족시키고 있다. 따라서 고대의 어느 시기까지 소급하면, 세계가 하나의 통치구조에 소속되어 있었을 가능성도 충분히 생각할 수 있다.


박용숙 선생은 그런 나라가 실제로 있었고, 그 나라의 이름이 거인국가인 타이탄(Titan)이요, 그 수도가 조선이었다고 주장한다. 고대역사의 결론은 박용숙 선생의 저서 <황금가지의 나라(pp.169-179)>에 제시되어 있는데, 중요한 내용들을 발췌하여 소개한다.

 

우리들은 여기서 환웅이 거인족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는 태양(불)이며, 힘센 하늘의 숫소 [미도라스(용)]이며, 그의 이름인 웅(雄)은 우리말의 숫(sut)이다. 거인족은 그가 거느린 무리(3천)을 가리키는 것이다. [타이탄]이라는 말은 그 어근이 크레타어의 [tan]에서 왔고, 그 뜻이 [임금]이라고 주장하는 학자가 있다. 이것이 우리가 익히 알고있는 단(檀 . 壇)과 같다는 것, 나아가 단군(檀君)이 바로 타이탄을 거느린 제왕임을 알게한다.


또 단군이 부여족을 다스리거나 부여족 출신이라는 사실에 유의해 보자. 우리는 앞에서 우리말과 그리스어에서 불(火)과 [부여]가 같은 발음과 같은 뜻을 지녔음을 보았다. 그렇게 보면 부여족이 곧 거인족이고, 이것이 호메로스가 역사상 가장 오래된 민족이라고 했던 [Hurri]임을 알수 있다. ...... <삼국유사>에서 단군이 아들을 낳으면 부루(夫婁)라고 했는데 이것이 신선(神仙)을 뜻한다고 했다. 필자는 이 부루가 [Hurri]이고, 그리스 말의 불을 뜻하는 [Pyr]와도 통하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중국의 신선에 관한 책에도 신선들은 불을 토하거나 불단지를 만드는 등, 불을 다루는 기술과 연관되어 있다. 불씨를 운반했던 프로메테우스를 불을 운반하는 자(Pyrphoros)라고 규정했던 것도, 거인족의 본질이 불씨로 상징되는 온갖 병기나 발명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 적어도 거인이 되려면 불을 다루는 능력이 있어야 하고, 그래야만이 자신의 몸을 불로장생케 하는 비법도 터득하게 된다. ......


거인족의 또다른 특징은 그들이 거대한 신전이나 탑을 설계하며, 거울(청동경)을 만들어 천문을 관측한다는 사실이다. 세계 10대 수수께끼의 하나인 영국의 월샤 지방에 있는 거대한 고인돌(Stone Henge)도 거인족이 만든 것이다. 그들은 돌기둥 하나가 덕수궁의 대들보 보다도 더 큰 돌들을 먼 바다건너에서 그곳으로 운반해 왔고, 그것들을 해가 뜨고 지는 방향에다 한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히 세우고 덮었다. 그것은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마찬가지로 정교한 수학과 기하학의 지식이 없이는 엄두도 못내는 공사다.


그들은 평범한 인간으로서는 상상조차 할수 없는 것들을 계획하고 만들어 낸다. 그리스 신화를 기록한 바 있는 헤시오도스가 [타이탄]을 [넓히다]의 뜻, 혹은 [대지에 넓게 살려는 자들]이라고 한것도 이런 점과 맥락을 같이한다. 거인들은 기하학과 천문학을 통하여 세계(공간)를 넓혀갔고, 연금술(불)을 통하여 그들의 우주국가의 계획을 가로막는 장애물들을 제거해 갔다.


거인 아트라스는 지구를 한손에 떠받들었다고 했고, <산해경>에 나오는 견해(堅亥)는 주판과 지남철을 들고 지구의 둘레를 걸어서 재었다고 했다. 동이는 새벽에 별을 보면서 인간사의 길흉을 헤아렸다고 했다. 이런 일들을 해내자면 당연히 척도가 있어야 한다. 이집트의 피라미드 속에서 큐피트의 자(尺)가 발견되었고, 중국 산동성의 무씨사당(武氏嗣堂)에서는 벽화에 컴퍼스나 기역자 모양의 자를 쥔 신상들이 발견되었으며, 복희와 여와의 신화에서도 자를 쥐고 있다. 신라의 금척릉(金尺陵)의 신화도 거인신화의 연장이다. ...... 이런 점은 거인을 나타내는 한자 [巨人]에서도 암시되고 있다. [巨人]은 재능이 뛰어난 사람이다. [巨]는 <설문해자>가 자(規(규))라고 했으며, [人]도 사람의 몸(손)을 기본으로 한 자(尺)라고 했다. 따라서 [巨人]이라는 말은 [큰 자] 혹은 금척릉의 전설에서처럼 태풍을 일으켜서 적을 물리치기도 하고, 또 병든 사람을 재면 낫기도 하는 [만능의 자]를 가진 사람이라는 뜻으로 이해된다.


무당을 가리키는 [巫]가 [巨人]이라는 말의 본래 글자가 된다는 것도 이치에 맞는다. [巫]는 짓는다는 [工]과 두 개의 [사람(尺)]을 결합한 글자로 [巫(Shaman)]가 신화시대의 과학자, 기술자임을 알게한다. 백제시대의 무당패를 무자리(巫玆伊)라고 했는데, 그들은 자긍심이 높아서 함부로 대할수도 없고, 굴복시킬 수도 없었다고 했다. [무자리]라는 말은 세가지 자(尺)의 이름에서 비롯되었는데, 그들은 공예품을 만들거나 약초를 캐거나 음악(악기)을 다룬다고 했다. 신라 사람들도 악공(樂工)을 [자(尺)]라고 불렀는데, 이것이 거인족의 성격을 보여주는 우리쪽의 확실한 기록이다. .......


거인의 또 다른 속성은 아이를 낳는 특별한 풍속을 지녔으며, 사람의 뼈와 육체를 분해하여 재결합하는 소위 환골탈태의 특별한 의술을 가졌다는 점이다. 제우스가 돌속에서 나왔다던가, 금와왕이 바위 속에서 나왔다던가, 수로왕이 알에서 나왔다는 것이 그것이고, 이난나 여신이 재생을 위해 명부의 어두컴컴한 방으로 들어갔다는 것도 그런 것이다.


이런 점들을 종합해보면 그리스 신화가 말하는 타이탄, 즉 거인족은 오늘날의 테크노크라트와 마찬가지로 고도의 지식과 기술을 지닌 박사(신선)들의 집단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들은 천계(올림푸스) 혹은 천당이라고 불리는 특별한 장소(神市)에 살면서, 그 대표가 되는 제우스(단군)에 의해 세계를 지배하고 있었다. ...... 거인시대의 세계지배는 철저히 근친혼(內婚)에 의해 권력이 계승되었으며, 그것을 보완하기 위해 뒤에서 설명되듯이 특별히 거인족의 종자를 공동으로 양육하거나 낳는 제도가 고안되었다 ....... .


이제 [거인]의 의미가 우주국가라는 사실을 구체화하기 위해 먼저 중국이 전하는 [반고]의 신화를 소개할 필요가 있다. "옛날 반고(盤古)라는 거인이 있었는데 그가 죽자 머리는 험준한 산이 되고, 눈은 해와 달이 되었다. 또 몸의 기름기는 강과 바다가 되었으며, 머리털은 나무와 풀이 되었다." 또 다른 전설에는 반고의 눈물이 강이 되고, 숨이 바람이 되고, 목소리가 우레가 되었으며, 눈동자는 번개가 되었다고 했다. 어느 쪽이든 거인의 몸이 산산조각나서 새로운 천지가 형성되었다는 논리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프로메테우스와 해모수의 이야기를 통해서, 이미 기원전 7세기 경에 우주국가를 상징하는 [거인]이 붕괴하면서 지상에 여러개의 작은 나라들이 생겨난 것을 보았다. 반고의 신화는 그 사정을 시적인 표현으로 요약한 것이다 ...... .


1991년에 소비에트 연방이 붕괴되었다. 적절한 예가 될지 모르지만, 그 사건이 기원전 7세기의 신화시대(거인)의 붕괴와 유사하다는 건 흥미로운 일이다. ...... 오늘날의 러시아는 연방시대의 영화를 누렸던 바로 그 고장이고, 또 그 시대의 역사를 자랑스럽게 후세에 전할 수 있는 입장이다. 비록 나라는 작아졌고, 그 국위에 있어서도 우크라이나와 같은 옛 속방국에 비해서 열세이긴 하더라도, 연방시대의 역사를 자랑할 수 있는 쪽은 우크라이나 보다는 러시아 쪽이다. 연방시대의 역사에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없는 우크라이나가 그들의 역사를 연방해체의 시점에서부터 시작하고, 연방해체 시기를 고대사의 기록자들 처럼 "태초에 혼돈이 있었다"고 기록한다는 사실을 상정할 수 있다. 옛날의 일을 자랑할 수 있는 입장에 있는 러시아는 다르다. 그들은 역사의 시작을 러시아의 탄생부터 기록하면서도, 그 러시아가 연방시대의 자랑스러운 올림포스(크렘린)의 역사를 계승한다고 쓸것이며, 따라서 연방시대의 일을 되도록 잊고 싶은 다른 나라들이 이미 깡그리 소멸시킨 연방의 역사를 편리하게 재생해 놓을 것이다.


신화시대의 역사인 [거인신화]를 오늘날 보존하고 있는 나라는 거의 없다. 그러나 그 흔적을 남겨놓은 나라들은 있다. 이집트 . 슈멜 . 중국 . 그리스 . 한국 . 일본이 그렇다. 그 중에서도 한국인인 우리가 가장 정확한 거인시대의 역사를 기록해놓고 있다는 건, [황금가지]의 신화와 함께 특기할 만한 사실이다. <삼국유사>의 [고조선]에 대한 기록을 비롯하여, <규원사화>, <단기고사>, <환단고기>, <신단실기> 등이 모두 거인시대의 역사를 기록해 놓은 귀중한 문서라는 것은 뒤에서 드러나게 된다.

 

[타이탄]은 [대단(大檀)]이다. [大]는 [太]와 같은 글자로 통용되었으므로, [태단(太檀)]으로 바꿀수 있다. 이 [太檀]을 중국발음으로 읽으면 [타이탄]이 된다. 우리들이 일상생활에서 흔히 쓰는 "대단한 사람이야"라는 말은 [타이탄 사람이다]라는 의미가 들어있는 것이다.
고대에 중국의 반고, 그리스의 타이탄과 함께 천지창조 신화에 등장하는 거인이 또 하나 있으니, 인도의 브라만이 그것이다. 이 브라만은 앞에서 [불 아만]으로 풀었던 말이다. 브라만을 한자로 옮긴 것이 [범(梵)]이다. [梵]의 중국 발음은 [환(fan)]이고, 우리말은 [범]이다. 이 [범(梵)]이 풍류에서 태양신인 천황과 쌍벽을 이루는 태음신인 지황 서왕모(西王母)이다. 서왕모의 상징은 호랑이이다. 호랑이의 우리말은 [범]이다. 여기서 이 내용을 다시 설명하는 이유는 모든 거인신화가 동이의 것임을 확인하는 뜻에서이다.
위 인용문의 마지막 단락에 주의를 기울여 보자. 거인국의 역사를 자랑할 수 있는 민족이 우리 한겨레라는 사실이 소비에트 연방에 빗대어 설명되어 있다. 지금부터는 이 사실에 초점을 맞추어, 풍류의 맥이 우리에게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IV. 풍류맥의 전승

1. 풍류의 정통맥
고대에 전세계를 망라하는 거대한 종교국가를 건설하여, 모든 민족을 다스리던 동이들의 풍류맥은 소멸되고 말았는가?
지금은 동이의 종교로 다스려지는 나라조차 발견할 수 없는 실정이니, 동이의 맥은 끊어진 것 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종교는 쉽게 소멸되지 않으며, 특히 세계적인 종교로 발전했던 종교는 정치적 . 사회적인 지배력을 상실하는 경우는 있어도, 완전히 소멸되는 경우는 없고 민간신앙의 형태로라도 살아남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다.


수메르인들이 남긴 뛰어난 문화는 오늘날 서구문명의 뿌리를 이루고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검은 고양이가 앞을 가로질러 가면 그 길로 가지않고 다른 길로 돌아가는 서양인들의 미신적인 행동방식에까지 살아남아 있다고 한다.


하물며 그들이 만든 건조물들이 아직도 들판에 우뚝 서 있는, 동이인들의 뛰어난 진리체계가 완전히 소멸될 수는 없는 이이다. 실제로 풍류의 영향은 전세계 대다수 국가와 민족의 생활 전반을 지배하는 저변문화로 아직도 생생히 살아있는 것이다.
이는 풍류의 위대성을 반증해주는 반가운 일이기는 하지만, 풍류의 정통맥을 추적하는 입장에서는 크나큰 장애가 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풍류의 정통맥은 관점을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다른 결론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들면 정치적으로는 법률에 따른 합의제 정치형태와, 군주를 정점으로 하고 제후들을 책봉하여 다스리는 봉건제가 모두 풍류에서 유래한 정치형태이다. 경제적으로는 화폐경제와 교역제도, 산업적으로는 농경(농업)과 금속제련(공업)이 모두 풍류의 유산이다.
종교적으로도 유일신 사상과 정령숭배의 범신론은 물론이요, 인간의 완전성을 신앙하는 인신(人神)숭배와 무신론까지도 풍류의 종교사상이다. 거의 모든 종교적 의례의 뿌리가 풍류에서 유래하였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므로 어느 특정한 요소를 기준으로 삼아 풍류의 정통을 주장하려면, 모든 민족과 모든 종교가 풍류의 정통임을 주장할 수 있게 된다. 지역적으로는 4대 문명의 발상지가 모두 풍류의 정통을 주장할 수 있고, 종교적으로는 바티칸 교황청과 아프리카 오지의 식인종이 꼭같은 자격으로 풍류의 정통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풍류의 정통을 논의하려면 풍류의 종합적 측면을 온전히 보존한 집단을 가려내어야 한다.


풍류의 원형은 지금까지 설명된 내용을 종합해서 기본이 되는 요소를 간추리면 얻을 수 있는데, 대표적인 요소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먼저 부각된다.

 

① 태양신 신앙 ② 삼한사상 ③ 삼신산 성지사상 ④ 우상(음양합일신) 숭배사상 ⑤ 혈통중시 및 조상숭배사상 ⑥ 신인동일시(神人同一視)사상 ⑦ 제정일치의 사회제도 ⑧ 거인국의 역사기록 보유 ⑨ 풍류의 진리체계 보유

 

이런 요소들을 모두 충족시키고 있는 지역 및 종족집단은 지금 세상에는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한겨레도 조선의 멸망과 함께 제정일치의 사회제도가 폐지되었기 때문이다. 제정일치를 유지하던 티벳도 얼마전에 중국(중화인민공화국)에 의해 정치권을 박탈당하였다. 그러므로 이제는 위의 요소들을 가장 많이 보유한 곳을 찾아야 하는데, 그곳은 멀리서 찾을 것도 없이 한겨레의 나라인 대한민국이다.


다른 지역과 민족들은 어느 한 부분씩은 고도로 발전되어 있으나 다른 요소들이 없어져서, 전체적으로는 자격이 미달됨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불교는 혈통중시나 조상숭배가 없고, 기독교는 우상숭배와 신인동일시 사상이 교리적으로 부정되고 있으며, 유교는 대부분의 요소를 갖추고 있으면서도 모든 요소가 부정되고 있는 양면성을 보이고 있다.


유교가 이와같은 양면성을 보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풍류를 동경하여 모방해 왔으면서도, 풍류를 부정하려고 애써온 그들의 자세가 여기서도 발견되기 때문이다. 유교가 풍류의 정통맥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많은 요소를 보유하고 있으면서도, 그 원천이 되는 동이족 자체를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 그들이 동이가 아님을 그들의 경전에 기록하므로써 스스로 동이의 정통맥을 포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이족의 혈통은, 그들이 세계국가를 목표로 적극적인 혼혈정책을 실시하면서도 내부적으로는 혼혈정책과 정반대되는 근친혼으로 지키려고 했던 그 위대한 혈통은, 지금 인류학자들이 몽고인종으로 분류하는 혈통이다. 즉 몽골인종(몽골리안)이 동이족의 혈통인 것이다.
이 사실은 옛 거인국의 자취를 따라 분포하고 있는 인종이 몽고족이라는 사실만 보더라도 확인된다. 발해 - 황하 - 중앙아시아 - 서남아시아(이스라엘) - 터키 - 이집트 까지가 옛 거인국의 중심무대였다.

 

이 지도에 표시된 모든 지역이 동이의 강역이었다. 이 지도는 중국의 한대(漢代)에 해당하는데, 먼저 흉노는 중국인들이 [하나]를 미워하여 붙인 이름이다. 월지(月 )나 대월지 등도 동이족의 지황을 가리키던 이름이었다. 서쪽의 파르티아도 [밝터]를 부르는 이름이다.


몽고족에서 퍼져나간 방계인종은 지나족, 아리안족, 아랍족이다. 지나족은 진한족(秦漢族)인데, 이 이름이 진한(辰韓)을 모방한 것임은 어렵지 않게 알수 있다. 그들이 진한을 모방한 이유는 그래야만 왕실의 정통성을 인정받아 민중의 반란을 예방할 수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리안족은 [알이난(卵生)족]이다. 히틀러가 그렇게 자부심을 가진 아리안 인종은 동이족의 피가 섞였음을 자랑하는 혈통이었던 것이다.


아랍족은 [알 아비 난(卵父生)족]이다. 아랍족과 피터지게 싸우던 히브리족은 해부루족과 소리가 같은 것으로 보아, 본래는 동이족이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모세가 이집트에서 탈출할 때 특별한 접신체험을 하면서 십계명을 만들기 이전의 히브리족은, 여와의 정통임을 자랑하던 동이족의 한 갈래였던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


그러면 동이족의 정통은 어떤 나라의 어떤 민족이 이어받았는가? 이 책에서는 동이의 정통을 한겨레가 이어받았다는 전제하에, 그 사실을 입증하는 사실들을 제시하는 방식으로 풍류맥의 전승을 검토해 보기로 한다. 이와같은 방식이 문제가 많은 것은 사실이나, 최소한 동이의 정통맥 중에 중심줄기가 한겨레라는 결론은 얻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한겨레가 풍류의 정통맥임을 밝힌다고 하여, 다른 민족이 풍류의 정통맥일 가능성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얻어지는 결론은 다른 결정적인 증거가 있으면 부정될수 있는 가설일 뿐이다.

 

2. 한겨레와 풍류맥

우리 한겨레가 풍류의 정통맥을 이었다는 사실은 민족의 이름부터가 한겨레이고, 전통문화에 붙은 이름들이 한글 . 한복 . 한옥 . 한식 등, [한]으로 통일되어 있는 점에서부터 나타난다.


[한]이 태양과 밝음을 나타낸다는 사실은 여러 선배들이 밝힌 내용으로 이 책에서도 이미 여러차례 설명되었다. 이는 곧 태양신 숭배사상이 한겨레의 기본 정서로 정착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한겨레는 풍류맥의 첫 번째 기준을 충족시킨다.
두 번째 기준인 삼한사상은 삼신일체, <삼일신고>, 삼한관경, 삼일운동 등으로 한겨레의 역사와 뗄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세 번째 요소인 삼신산 성지는 중국인이 쓴 우리역사에 명기되어 있는 [소도]로 나타나 있다.


네 번째 요소인 우상숭배는 장승(벅수)을 통해 확인된다. 지금 남아있는 다른 종교의 신상들은 남녀가 따로따로 있음에 반해, 장승은 반드시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이 한쌍을 이루고 있다.


다섯 번째 요소인 혈통중시와 조상숭배는 그 열성이 지나쳐 사회문제까지 되었던 요소이니, 더 거론할 필요도 없다. 여섯 번째 요소인 신인동일시 사상은 신에 대한 존칭인 [님]을 일상생활에서 사람에 대한 존칭으로 사용하고 있는 점만 보더라도 확인된다. 햇님 . 달님 . 별님은 신칭이고, 아버님 . 어머님 . 마님 . 아드님 . 따님은 곧 우리들 개개인이 하늘나라의 주민임을 증명해주는 언어습관들이다.


일곱 번째 기준인 제정일치의 사회제도는 백년전까지만 하더라도 우리 사회제도의 기본 골격이었다. 정치와 교화를 구별할수 없다고 생각했던 우리 조상들은, 비록 교화의 중점을 풍류 . 불교 . 유교로 바꾸어 오기는 했으나, 정치와 종교를 분리해야 한다는 미개한 발상은 한 번도 하지 않았었다. 이는 이승(異生)과 저승( 生)을 구별할수 없었던 풍류의 체제에서 유래한 것일 것이다.


여덟 번째 기준인 거인국의 역사기록 보유는 한겨레만이 충족시키고 있다. <삼국유사>는 말할것도 없고, <삼국사기>도 고조선과 삼한을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풍류에 대한 가장 오랜 기록인 [난랑비서]도 <삼국사기>에 기록된 것이다.


이런 기록들의 진실성이 의심받았던 적도 있으나, <환단고기>등 여러 고대역사 기록들이 발굴되면서 그 내용들이 실제 역사임이 밝혀져 가고 있다. 새로 발굴된 고대의 역사서들이 거인국의 역사기록이라는 사실은 앞의 인용문에서 밝힌 사실이며, 학계의 깊은 관심이 필요한 부분이다.


아홉 번째 기준인 거인국의 진리체계도 한겨레만의 자랑이다. 다른 어느 민족도 가지지 못한 풍류의 최고경전인 <천부경> . <삼일신고> . <참전계경>이 있기 때문이다. 이 책들이 풍류의 진리체계라는 사실이 인정받기 까지는 앞으로도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여러 학자들의 뛰어난 연구로 기본적인 내용은 모두 밝혀졌으니, 이 내용들을 다른 분야와 접목시키는 연구활동만 활발해 진다면 그 시간은 얼마든지 단축할 수 있다.

 

3. 삼신 할머니

풍류의 기원은 한겨레의 국조삼신에게서 찾아진다. 우리의 국조삼신은 우리에게는 조상신이지만, 한겨레 이외의 인류에게는 우주의 최고신으로 알려진 분들이다. 그리고 그들의 신으로서의 칭호는 앞에서 소개한 바 있다.


그런데 한겨레의 언어습관에서는 특이하게도 국조삼신과 대응하는 삼신 할머니가 있다. 이 삼신 할머니와 국조삼신의 관계를 밝히지 않고서는 풍류의 맥을 올바로 찾았다고 하기는 어렵다.


[삼신 할머니]라는 칭호는 두가지 칭호로 분할될 수 있으니, [삼신]과 [할머니]이다. 이 중에서 [삼신]에 대해서는 [삼신(三神)]으로 보는 입장과 [산신(産神)]으로 보는 입장이 있다.


[삼신 할머니]가 국조삼신에서 유래했다고 보는 것이 [삼신(三神)]으로 보는 입장이다. 둘째 관점에서의 [산신(産神)]이란 옥황상제의 명을 받아 인간세상에서 아기의 많고 적음과 있고 없음, 그리고 해산(解産)을 주관하는 신이라고 한다.
[산신]이 [삼신 할머니]로 불리게 된 것은 [태(胎)]의 우리말이 [삼]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편으로는 [산신(産神)]이 "인간제물을 받았던 무서운 엄마인 태모(太母)"라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관점들은 부분적으로는 맞는 면도 있지만, 핵심을 벗어난 느낌이 있다. 왜냐하면 이 [산신]도 또한 국조삼신의 한분인 지황(地皇)의 다른 칭호이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삼신]의 뒤에 붙은 [할머니]에서 밝혀진다.


[할머니]는 [한어머니]가 줄어서 된 말이다. [한어머니]는 [한]과 [어머니]의 합성어로서, [어머니 한]과 같은 말이다. 한자로 나타내면 [모한(母韓)]으로서, [마한(馬韓)]이나 [모한(牟韓)] 또는 [무한(巫韓)]과 같은 말인 것이다. 이점은 [할머니]의 한자인 [파(婆)]를 분석하면 보다 확실해진다.


[파(婆)]가 들어가는 말은 의외로 풍류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는데, [노파(老婆)] . [매파(媒婆)] . [산파(産婆)] . [탑파(塔婆)] . [바라문(婆羅門)] 등이 그것이다. 먼저 [노파(老婆)]는 지금은 단순히 [늙은 여자]라는 뜻으로 쓰이지만, [노(老)]의 본래 뜻을 생각하면 고대에는 [지황]이나 [곡신(谷神)]의 뜻으로 쓰였던 것으로 보인다.


[老]의 글자모습은 지금까지 [늙은 사람이 지팡이를 짚고 서있는 모습이라고 해석해 왔으나, 3,000년 전의 상형문자는 누가 보더라도 대지(大地)를 상징하는 평평한 관을 쓰고 무당의 상징인 지팡이를 든 임금의 모습이다.
따라서 [老]는 [지황]이며, 이는 이 글자의 중국음이 [라오]라는 사실에서도 짐작된다. [라(Ra)]는 태양신의 칭호로 널리 알려진 말이고, [老婆]를 거꾸로 쓰면 [婆老]가 되는데 이는 [파라오]로 읽힌다.


[파라오]는 태양신을 자처하던 이집트의 왕의 이름인데, [이집트(Eyzipt)]가 [이(夷) 집 터]나 [아이 집 터]로 읽힐 수 있다면 노파와 파라오와 지황이 동일한 신의 다른 이름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노파가 곧 산파이며, [산파(産婆)]는 [아이 낳는 것을 도와주던 사람]이니, 이는 누구도 침범하지 못했던 지황의 고유권한이다.


[매파(媒婆)]는 앞에서 설명된대로 인황의 직능이다. 그런데 인황은 천계(天界)와 지계(地界)를 이어주던 중매쟁이였고, 지황은 지계에서 결혼할 자격을 갖춘 신녀를 선발하고 천계에서 온 신랑감과 신부감인 신녀의 신방을 꾸며주던 매파이기도 하였다. [매파]에 [婆]가 붙은 이유는 이런 측면에서 이해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된다.


마지막으로 [탑파(塔婆)]는 인도의 신전인 [스투파(Stupa)]를 음역한 것으로서, 박용숙 선생이 [소도]와 같은 것이라고 밝힌바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용례들 중에서 실제로 [늙은 여자]를 나타내는 경우는 [노파] 뿐이고, 그나마 다른 뜻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그러므로 [婆]에는 어떤 다른 뜻이 있고, 그 뜻이 풍류와 관련이 있을 수 있다. 이제 그 뜻을 분석해 보자.


[婆]는 뜻을 나타내는 [계집 女]와 소리를 나타내는 [물결 波]로 분해되는데, 이 두 글자의 어디에도 [婆]가 할머니의 뜻을 가져야 할 근거가 없다. 그러나 이를 우리말로 옮겨놓으면 지황의 뜻과 곧바로 연결된다.


[물결]은 발음만을 생각하면 [물길]로 바꿀수 있는 말이다. [물길]은 [물길(勿吉)]로서 전한과 후한 시대에는 [읍루(邑婁)]로 불리고, 남북조 시대에는 [물길], 수 . 당 시대에는 [말갈]로 불리다가, 발해가 망한 후 말갈족의 중심세력인 흑수말갈(黑水靺鞨)이 거란에 복속하여 [여진(女眞)이라고 하였다. 즉 여진족의 뿌리가 [물길]인데 이는 [여신전과 통하는 신도(神道)]임을 이미 설명하였고, 결국 지황의 신전인 우물의 연장이라고 해석된다.


이렇게하여 [婆]가 지황과 연결되면, [산신(産神)]의 상반되는 이미지가 아무런 마찰을 일으키지 않는다. 지황은 땅의 지배권을 가지고 생산을 주관하던 달님인 서왕모로서, 서왕모는 저승(저生)을 다스리면서 동자(童子)생산을 담당하였고, 동자의 비밀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인신공희라는 살인멸구까지도 서슴지 않았던 무서운 어머니였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지황은 삼신의 한분이었고, 삼신의 은덕은 동이족의 지배를 통해 모든 종족에게 차별없이 베풀어졌으며, 지황이 통솔하던 선군(仙軍)들은 영토 내에서의 정의를 수호하던 천병(天兵)이었을 뿐 아니라, 지계에서 만든 여러 기물(器物)들은 사람들의 생활에 말할수 없이 큰 도움을 주었으니, 자비로운 어머니의 이미지도 함께 가지게 된 것이다.


이제는 [삼신 할머니]가 풍류의 맥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단군 할아버지]는 역사에 기록되어 있으면서 그 왕후는 역사에 나타나지 않는 이유도 이 [삼신 할머니]가 쥐고 있다. [단군]은 특정한 임금이 아니라 [신전의 주인]이라는 뜻이며, 이는 곧 천지인 삼계의 주인이란 뜻임을 이미 밝힌 바 있다. 그 배우자 또한 특정화된 여신이 아니라, [檀君(단군)]의 본래뜻인 [三神(삼신)]의 부인이란 뜻으로 불렀을 것이고, 그 이름이 [삼신 할머니]인 것이다. 따라서 [삼신 할머니]는 동이족의 시고(始姑)이다. 지금도 쓰이는 [시어머니]라는 말은 [첫(始) 어머니(母)]로서 이 [삼신 할머니]를 일컫는 이름인 것이다.


한겨레의 여인들, 우리들의 어머니들은 이 삼신 할머니를 끔직이도 섬겨왔다. 아이의 출생때부터 성장할 때까지 삼수(三數)가 드는 날에는 어김없이 삼신 할머니에게 고하는 풍습을 이어왔는데, 이는 그 옛날 신전에서 하던 풍습을 이은 것이라고 해석하지 않고서는 이해되지 않을 일이다.


이제 우리는 한겨레가 풍류의 중심신전인 삼신산의 두 주인인 단군 할아버지와 삼신 할머니를 시조신으로 모셔왔다는 사실을 확인한 셈이고, 이는 곧 한겨레가 풍류의 뿌리와 직결되는 혈통적 근거를 갖춘 민족이라는 유력한 증거가 되는 것이다.

 

4. 움직이는 산

풍류의 중심신전인 삼신산은 풍류맥의 전승을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그런데 이 삼신산은 어느 한 장소에 붙박혀 있던 산이 아니라, 여러 곳으로 옮겨 다니던 산이었음이 학자들의 연구결과 밝혀졌다.


박용숙 선생은 신화시대의 기록들을 조사하여, 고대에 산이 움직였다는 전설이 실제로는 신전의 이동이었음을 밝히고, 특히 간보(干寶)의 <수신기>에서 삼신산이 하(夏)나라 때로부터 진(秦)나라에 이르는 기간동안 네 번이나 자리를 옮겼으며, 그 옮긴 지명들이 모두 현재의 중국땅에 있는 지역들의 이름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런 연구결과들은 풍류의 발원지가 지금 동이족이 차지하고 있는 한반도나 요동 . 만주 . 몽고지역이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으며, 오히려 동이족의 이동경로를 되짚어 찾아내어야 할 장소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아무튼 삼신산의 이동은 곧 동이족의 이동이기도 한데, 동이족들은 이동하면서 풍류와 관련된 지명을 신전이 세워졌던 지역에 남겨왔다고 한다. 동이족이 남긴 지명 중에서 가장 쉽게 찾아낼 수 있는 것은 [한]과 [ ]이다. [한]은 [한]으로만 남아있는 것이 아니라 [한]과 같은 음의 다른 글자나, 뜻이 같은 다른 글자로 표기되는 경우도 많으므로 실제로는 세계전역에서 찾을 수 있다.


[한]에서 갈라져 나간 말은 [韓 . 漢 . 安 . 黃 . 凰 . 華 . 咸] 등과 [天 . 大 . 太 . 泰 . 台] 등으로서, 중국땅에서 이런 글자가 들어간 지명은 대부분 동이족의 신전이 있었던 땅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 ]은 [明 . 陽 . 白 . 海 . 靑 . 璞 . 北 . 福] 등으로 바뀔수 있으니, 이런 글자들이 있는 곳도 일단 풍류와 관계가 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지명들 중에서 이들 글자가 들어가는 산과 물과 도시는 헤아릴 수도 없을 정도이고, 세계적으로도 이런 소리들의 지명은 무수히 많다. 히말라야 산맥 . 티벳 고원 . 힌두쿠시 산맥 . 한가이 산맥 . 천산산맥 . 돈황 . 황하 . 함양 등은 [한] 계열에 포함될 수 있고, 바이칼 호 . 발하시 호 . 볼가강 . 바쿠 . 박트리아 . 발칸 반도 . 함부르크 . 볼고그라드 . 청해 . 청도 . 상해 . 북경 등은 [ ]계열에 포함시킬 수 있다. 이들 지명들의 분포지는 최남선 선생이 <불함문화론>에서 "발칸반도에서 일본열도까지가 불함문화( 문화)의 영역" 이라고 말한 사실과 일치하는 지명분포이다.


주장하는 초점은 다르지만 지중해 유역의 첫 문명인 수메르 문명이 한겨레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연구결과들은, 동이족의 활동영역에 대한 간접적인 지원자료들이 된다. 최남선 선생은 <아시조선>에서 "중앙아시아의 파미르 고지에서 아시아의 여러 종족들이 퍼져나갔다"고 했으며, 이정기 선생은 <민족정통사상과 연구>에서 현재의 중동지역에서 살고있는 종족들의 조상인 수메르인들이 파미르 고원에서 갈라져 나간 종족의 일부라고 하였다고 한다.


안창범 선생은 <한민족의 신선도와 불교>에서 수메르인과 우리민족의 동일성을, 15가지에 이르는 근거항목을 제시하면서 주장하고 있다.

1) 수메르인은 머리털이 검고 곧으며, 2) 키가 땅딸막하다. 3) 후두부가 평평하다. 4) 교착어를 쓴다. 5) 가야와 신라 황족의 원조인 소호금천씨의 문화와 동일하다. 6) 그들의 장례법은 순장인데, 이는 고조선인들과 동일하다. 7) 고조선인과 같은 회도를 사용하였다. 8) 고조선의 갑골문자와 같은 설형문자를 사용하였다. 9) 동방에 있는 어머니 나라, 즉 근국(根國; 天皇國)의 지시를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10) 고조선의 천제단의식(天祭壇儀式)과 수메르의 천제단의식이 같다. 11) 그들의 종교기록 중에는 우리의 <천부경>과 유사한 기도문들이 있다. 12) 고조선의 천부사상(天父思想)과 유사한 종교사상들이 있었다(점토명판). 13) 오행(五行)과 육갑(六甲)과 360도(度)의 개념으로 정치 . 종교 . 점성과학 등 사회문화가 발달되었다(고조선과 같음). 14) 수메르의 언어가 고대 조선계 언어와 동일한 경우가 많았다. 15) 고조선과 국가체제에서의 제도가 같다(김정권, [허상과 실상], 한배달, 1989. pp. 119-120).

 

수메르인들이 어디에선가 메소포타미아 지역으로 이동해왔고, 또 어디론지 이동해간 사실은 동이족의 이동을 말해주는 최초의 예이기도 하다. 아무튼 동이족의 중심신전인 삼신산이 수차례에 걸쳐 이동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고, 그 이동의 흔적이 지명에 반영되어 있는 것도 인정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 이동의 원인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확실히 밝혀진 바가 없다.


그 이유는 아마도 동이족의 이동원인을 일률적으로 이야기 할수 없기 때문인 듯 하다. 무슨말인가 하면, 동이족의 이동은 급격한 지각운동에 따른 황폐화, 번한세력(봉건군주)들의 세력강화에 따른 반발과 그로인한 갈등, 지부신전에서의 새로운 종교지도자에 의한 새 종교의 제창과 그 신흥종교의 급격한 세력팽창 등이 복잡하게 얽혀 신전의 이동이 일어났다고 보여진다는 뜻이다.


그러면 이 신전의 이동은 동이족의 강역 밖으로 단행된 것일까, 아니면 동이의 영토 안에서 옮겨다닌 것일까? 이 문제는 아직까지 논의의 대상이 되었던 적 조차도 없는 것 같다. 그런만큼 이 문제는 여기서 본격적으로 다룰 수 없는 문제이지만, 동이의 강역과 관련되는 문제이므로 하나의 가설을 세워 연구의 동기를 제공한다고 생각하고 글쓴이의 견해를 밝히자면, 동이의 중심신전은 동이의 강역 안에서 옮겨다녔다고 생각된다.


이렇게 본다면 동이의 강역은 최남선 선생이 밝힌 [발칸반도에서 일본열도까지]보다 더 넓은 유라시아 대륙 전체와 이집트까지라고 볼수 있다. 즉 박용숙 선생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지중해 연안의 고대문명까지도 거인국인 동이족의 영토였던 것이다.
그런데 지중해 연안의 고대문명은 풍류의 관점에서 본다면 변방문명이라고 할수 있는 것이니, 수메르 문명이 있었던 지금의 중동지역도 동이족의 중심이 아니라 주변문명권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박용숙 선생은 풍류의 발원지를 지중해를 비롯한 중동지역으로 설정하고 있지만, 이책에서 살펴본 바에 따르면 우리의 역사가 소아시아의 고대사와 연결되는 이유가, 동이의 중심신전인 진한의 기록이 소실되고 변한의 기록만이 남아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라고 볼수도 있는만큼, 동이족의 활동중심이 따로 있었을 가능성은 아직도 남아있고, 또 중동지역이 동이족의 변방지역일 가능성도 없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동이의 중심지역을 함부로 단정할 수 없게 만드는 또 하나의 이유는 사막의 위치와 관련이 있다. 동이족의 활동지역이었던 곳 중의 상당부분이 사막을 끼고 있다는 사실은, <천부경>의 진리가 시간을 포함한 4차원의 진리를 담고있을 뿐만 아니라, 최근에 밝혀진 핵물리학의 이론들과 너무나 흡사하다는 점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해 준다. 그 가능성은 동이족의 선대문명이 사막화 현상을 일으킬수 있는 파멸적인 무기의 사용으로 붕괴했을 가능성이다.

 

5. 사막과 동이강역

세계지도를 펼쳐놓고 사막의 분포상태를 살펴보자. 먼저 중동에서 아프리카 북부 전역을 뒤덮은 광활한 사막이 먼저 발견된다. 그리고 이 지역은 아득한 고대에 20세기 후반인 지금의 수준보다 더 높은 수준의 과학문명이 있었다고 해석할 수 있는 여러 가지 흔적들이 남아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동쪽으로 눈길을 돌리면 인더스 문명의 발상지인 인더스강의 동남쪽으로 원인을 알수 없는 타르사막이 발견된다. 그 북쪽에는 카스피해 - 아랄해 - 발하시호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이 카라쿰 사막과 키질쿰 사막으로 덮여있다. 거기서 다시 동쪽으로는 티벳고원의 북부지역 전체, 파미르 고원에서 발해만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이 타클라마칸 사막과 고비사막으로 불모지를 이루고 있다. 이와같은 사막의 분포가 단지 우연한 자연현상일까?


<환단고기>에 수록된<삼성기>는 "우리 환의 건국은 세상에서 가장 오래되었는데, 한 신이 있어시베리아의 하늘에서 홀로 변화한 신이되시니 밝은 빛은 온 우주를 비추고 큰 권화는 만물을 낳았다.(吾桓建國 最古 有一神在{斯白力}之天 爲獨化之神 光明照宇宙 權化生萬物)"라는 구절로 시작된다. 여기서 {斯白力}을 강조한 이유는 이 낱말이 [시베리아]가 아니라 [사하라]라는 주장이 있기 때문이다.


박병식 선생은 <한국상고사>에서 [斯白力(사백력)]을 [시베리아]가 아니라 [사하라]로 앍어야 하고, 그 뜻은 [아주 밝은 하늘]이라고 한다. 이 주장을 전혀 무시할 수 없는 이유는 [사하라]라는 지명이 실제로 있고, 그 지역의 하늘이 실제로 아주 밝으며, 그 주변지역에 풍류와 관련된 지명이 아주 많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그곳이 어디냐 하면, 바로 아프리카 대륙의 삼분의 이를 뒤덮고 있는 사하라(Sahara) 사막이다.


아프리카 대륙은 불경에 나오는 염부주(또는 섬부주)의 조건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다. 염부주(閻浮州)는 바다 가운데에 있고, 삼변이 비등한데 북은 넓고 남은 좁아 인면상(人面像)이며, 아뇩달지라는 못이 있어 거기서 4대하(四大河)가 사방으로 흐르고 있으며, 삼분의 이는 북쪽으로서 땅은 넓고 사람은 드물며 흉노가 사는데 도에 힘쓰지 않고, 남쪽은 삼분의 일인데 삼면이 바다에 닿았고, 사람은 많으나 마음이 맑고 성인의 교화를 잘 받은 대성도(大聖都)라고 하였다.


안창범 선생은 이 염부주가 백두산 천지라고 주장하는데, 그 주장도 일리가 있으나 백두산 보다는 아프리카의 입지조건에 더 들어맞는다. 아프리카 대륙은 특이하게도 사면이 모두 바다로 에워싸인 섬이 아닌 대륙이요, 아라비아 반도까지를 고려하면 삼변이 거의 같은 길이가 되는데다가, 생긴 모습이 해골과 거의 같아서 인면상이라는 설명에도 부합하고, 북쪽은 면적으로는 삼분의 이를 차지하나 대부분이 사막으로 사람이 드물고, 남쪽은 삼면이 바다에 둘러싸여 있고 사람이 많이 산다.


또 킬리만자로 산을 동쪽으로 우러러보는 자리에 있는 빅토리아 호수는 적도상에 있는 지중(地中)의 바다로서 모든 시름을 잊게하는 호수라는 아뇩달지의 이름이 썩 잘 어울리고, 킬리만자로 산은 설산이라는 이름이 아주 잘 어울리는 산으로서, 맨 아래쪽은 열대 밀림지역이고 중간은 온대 기후지역이며 꼭대기는 흰 눈으로 덮인 삼층구조를 이루고 있어, 설산의 삼층구조와 어울린다.


또 아뇩달지에서 사방으로 흐른다는 4대하는 북쪽으로 나일강, 서쪽으로 로이레 강, 남쪽으로 잼비지강의 지류, 동쪽으로 루아하 강이 있다. 더욱이 그 북쪽에 있다는 흉노는 원문에 훈윤(  )으로 되어 있는데, 글자로 미루어 볼 때 [검은 야만인]의 뜻이다. 실제로 아프리카 북부에는 바아바리(야만)라는 지역명이 있고, 그곳의 주민들은 흑인종이다. 이런 모든 점으로 볼 때 염부주는 아프리카일 가능성이 높다.
안창범 선생은 염부주가 진단(振旦) 또는 신주(神州)라는 사실을 근거로 이를 신시(神市)에 연관시키는데, 이런 관점을 수용하고 그 지역만 아프리카로 바꾸어 설정한다면, 동이족의 발원지는 아프리카의 빅토리아 호수에서 지중해에 이르는 지역이었으나, 사하라 지역이 사막화 하면서 다른 곳으로 이동해 갔는지도 모른다는 가설도 세울수 있을 것이다.


아프리카 지역은 이집트의 피라밋을 제외하면 고고학적 발굴실적이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는 지역으로서, 무한한 가능성을 간직한 대륙이라 할수 있다. 특히 이집트의 고문서들 중에는 기원전 3만년이나, 4만 8천년 부터 써온 고대 연대기가 있었다는 기록들도 있고 보면, 환인의 환국의 연대를 "7세(世)에 전하여 역년 3,301년, 혹은 63,182년이라고 하는데 어느것이 맞는지 알수 없다" 고 기록된 것이 전혀 근거없는 기록이 아닐 가능성도 발견된다.


사하라 사막 주변의 지명들 중에서 풍류와 연결가능한 지명으로는 아비시니아 고원(아버지 神異 고원), 소말리아(속말), 우간다(牛干의 땅), 나일강(나리(川) 강), 말리(머리), 모리타니(말탄 이 . 머리 딴 이), 모로코, 마라 산, 에미쿠시 산(어미 古示 산) 등 아주 많으나, 이는 글쓴이가 지금의 지명에 우리말을 억지로 갖다 붙여본 것이다. 그러나 이 이름들이 원주민들이 옛날부터 불러온 이름들이라면, 풍류와 연결될 가능성은 무시할 수 없이 커질 것이다.


아무튼 사하라 사막이 풍류와 연결될 가능성은 <태백일사 . 삼한관경본기>의 [왕검성]에서도 찾아진다. 즉 "아사달은 삼신을 제사지내는 곳인데, 후인들은 왕검의 옛집이 아직 남아있기 때문에 왕검성이라 했다(阿斯達 三神所祭之地 後人稱王儉城 以王儉舊宅尙存故也)" 는 구절이 그것이다.


<태백일사>는 발해의 대야발이 쓴 것을 바탕으로 조선조 연산군과 중종때의 학자인 이맥이 편찬한 것인데, 발해때까지 남아있었던 [왕검의 구택(舊宅)]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아무 설명이 없어 확실하지 않으나, 발해시대까지 전해질수 있는 단군의 유적은 석조유물이어야 하고, 삼천년 이상된 석조유물은 이집트의 피라밋밖에 없으니, 이를 단군의 유적으로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시아의 동쪽 끝에서, 서쪽 끝에있는 피라밋이 조상의 유적이라고 말하는 것이 망발처럼 보일 수도 있으나, 이는 동이족의 세계국가를 모르기 때문일 뿐이다. 한반도와 이집트를 연결하는 두 번째 종족명인 동호(東胡)와 서융(西戎)을 검토해 보면, 아시아의 동쪽 끝과 서쪽 끝의 거리가 그렇게 멀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들 지역도 사막을 따라 펼쳐져 있다는 점이 특징이기도 하다.

 

6. 동호와 서융

실증사학에 물든 일부 사대주의 사학자들이 우리 고대사의 강역을 축소하기 위해 몸부림쳐 왔음에도 불구하고, 객관적인 역사기록은 우리민족 고대사의 무대가 아시아 전체지역을 차지하였음을 증명해주고 있다. 그 증거가 되는 단어가 [흉노(凶奴)]이다.


한겨레의 삼국시대를 종식시킨 당(唐)왕조 이후로, 아시아 지역의 주류사관(主流史觀)으로 성장한 중화사상(中華思想)에 의해 [흉측한 오랑캐]의 대명사로 사용되는 [흉노(凶奴)는 [??] 또는 [하나]의 중국식 표기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凶]의 지금 중국식 발음은 [죵(xiong)]이지만, [凶奴]에서의 [凶]이 [??]의 표음이라는 사실은 흉노족의 서양식 표기가 [Hun(훈)]인데서 분명히 드러난다. 이 명칭의 유래는 동이족에 의해 당나라때까지 끊임없이 시달림을 받아온 중국인들이, 그들의 적개심을 호칭에 담아 표현한 것이라고 보여진다.


이 [흉노]의 또 다른 표기가 [동호(東胡)]이며, 동호와 같은 시기에 한(漢)나라의 서쪽에 있던 동이족의 이름이 서융(西戎)이다. 그런데 이 [서융]이란 이름이 [서쪽의 흉노]라는 의미임은 쉽게 추측할 수 있다. 따라서 중국인들이 흉노 일족(一族), 정확히 말해서 [한겨레]를 자기들의 영토를 기준으로 동서로 나누어 부르던 이름이 [동호]와 [서융]이 되는 셈이다.


이런 추측은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고, 흉노의 본거지로 알려진 몽고고원 지역의 중요한 지명들을 유력한 근거로 제시할 수 있는 추측이다. 몽고고원의 중심산맥은 [한가이 산맥]인데, 이는 [한겨레]의 고어인 [한가리]의 산맥이란 뜻으로 풀이된다. 그 동쪽에 있는 [바이칼 호]는 [밝 클 호]가 변해서 된 이름으로 보아도 무리가 없다.


[몽고(蒙古)]가 동이신전의 이름이라는 사실은 이미 밝힌바 있고, [투루판 분지]는 [두루 한], 다시말해 원둘레와 중심으로 상징되는 [세 한]분지로 바꾸어진다. [타림 분지]는 [태림(太臨 또는 太林) 분지]가 되어 [삼신이 임하는 숲]이라는 뜻을 담고있고, [돈황]은 [단황]으로 쉽게 바꾸어진다.


그리고 보다 결정적인 증거는 위 지도에서 나타나는 [유연]이 바로 조선의 다른 이름이라는 사실이다. 이 사실을 연구한 송동건 선생의 다음 인용문은 우리들이 알고있는 한겨레의 상고사가 얼마나 왜곡되어 있는지를 증명하고 있다.

 

미진한 채로 먼저번의 주제를 다시 보자. "샤릴", 즉 "아발스"에 관해서는 5-6세기에 중국사료에서 말하는 芮芮(예예; rui rui) 즉   (유유; ruan ruan)으로 간주하며, 뻬리오는 "몽골족인 芮芮"로 본다.   의 국명은 柔然(유연)이다. 무크리는 靺鞨(말갈) 혹은 勿吉(물길)로 봄은 이미 언급한 바와 같다. 그런데 이 희귀한 자료의 기록자 자신은 전후의 두 아발스를 구별하면서, 557년에 동로마에 나타난 것은 위굴족이라고 명백히 밝힌 바 있다. 따라서 두 개의 위굴족을 구별하는 것이 무리라면, 결국 이들은 모두 "위굴족"이란 뜻이다.


이렇게 갈래가 복잡하게 보이는 제(諸) 학설은 나름대로 일면의 진실을 갖고 있다. 소위 "芮芮" 또는 "  "으로 알려진 종족은 A. D. 300년 말경에 木骨閭(목골려)에서 시작하는, 그리고 그 음(音)이 변하여 郁久閭(욱구려)를 그들의 성(姓)으로 했다는 종족으로, "芮芮"등은 별칭인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들의 국호는 "柔然"이다. 그리고 "위굴"은 그들과 같이 있던 한 국가구성단위였다(<魏書>, <北史> 등). 따라서 "Muxri", "Mukuri", "Mug-lig"는 오히려 이 "木骨閭" 쪽이 더 가까운 음사(音瀉)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 그러나 보다 분명히 지적해야 할 것은 柔然의 표기이다.


유연(柔然)은 "JUJAN(DjOu-DjAN")이다. <蒙語類解(몽어류해)> 朝鮮의 몽고독음(蒙古讀音)은 "쵸오한"이다. 어쨌든 柔然은 바로 木骨閭國이다. Mukuri, 또는 Mukri(Mokri, Mokori로도 쓰임)는 고대의 고려(高麗) 또는 고구려가 중앙아세아에 알려진 국호이며, 朝鮮이나 柔然이 이렇게 음이 가까운 것이라면, 결국 이들 네가지 표기는 한자(漢字)에 의한 사실의 왜곡에 흔히 쓰이는 구체적인 한 예라고 봐야 할 것이다.
<說文建首字讀序(설문건수자독서)>는 모두에 이렇게 시작한다. "...... 先路가 늘 말하기를 高麗朝鮮(고려조선)에서 高와 朝는 疊韻(첩운)이요, 麗와 鮮도 첩운이다. 宋(송)의 吳才老(오재노)의 <韻補(운보)>에 鮮은 四紙(韻)에 收合(수합)되어 있는 것으로도 가히 증명이 된다." 두 쌍의 자는 가차(假借)가 가능하다는 뜻이며, 따라서 고려나 조선이나 같다는 뜻이다.


"東夷之國, 朝鮮爲大 ......(동이의 나라에서 조선이 가장 위대하니 ......)". 남조(南朝)인 <梁書(양서)> 동이전의 시작하는 文이다. A.D. 502 - 556년간의 梁의 존속시기에 조선국이 위대하기는커녕 존재조차 문제될 법 하건만, 이런 표현이 엄연히 가능함은 바로 고려, 즉 고구려를 의미할 수밖에 없다.

 

<魏書>   傳에는   族의 국호는 "柔然"이며, "漠北(막북)"에 위치했다. 그 판도는 지금의 내몽고와 산서성(山西省) 북부에서 감숙성(甘肅省) 북부와 신강성(新疆省)을 거쳐 쏘련의 키르키즈(Kyrghiz) 일대에 이르는 지역을 포함하고 있다. "柔然"의 독음은 "주젠(Jujen)" 즉 "朝鮮"이다. 내몽고 남부와 산서성 북부, 그리고 河套(하투) 일대가 지금은 사막지로 되어 있지만, 1844 - 46년에 이곳을 여행한 브랑스 신부(神父) 육(Huc)의 관찰과 현지인의 증언에 의하면, 17세기 중엽까지도 이곳은 "고려부족의 소유지"로 관개가 잘 되있어 지금과는 달리 비옥했으며, 그 폐허가 여행당시인 19세기 중엽에도 곳곳에서 볼수 있었다.

 

그리고 다음 지도에서 유연은 남 . 서 . 북 흉노의 한가운데에 있다. 이는 흉노의 중앙정부가 유연이라는 뜻이다. 이 유연이 조선이라는 뜻이니, 흉노가 한겨레의 별칭임은 말할 것도 없다. 더구나 이 지도가 중국의 남북조 시대를 그린 것이므로 이때의 조선은 고구려가 분명하고, 고구려가 조선이라는 위 인용문은 틀림없는 진실이다.


아무튼 중국인들이 동이족의 지배를 거부하기 시작한 것은 춘추시대 부터이다. 그러나 이때까지는 중국에 동이를 막기위한 장성이 축조되지 못했었다. 이는 동이의 지배가 중국 전역을 완전히 제압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전국시대에 오면서 연(燕) . 조(趙) . 위(魏) 등의 나라가 북방에 장성을 쌓는데, 이는 이때부터 중국이 풍류의 신정을 거부하고 자주독립을 외쳤다는 뜻이며, 처용이 당했던 것과 같은 곁다리 신세를 당하고 싶지 않다는 부권(夫權)선언이기도 한 셈이다. 그리고 이때까지는 중국인들이 동이의 강역에 대해서는 무관심하였고, 기껏해야 자기들의 사방을 에워싼 동이족의 명칭을 알고 있는 수준이었다.


그당시 중국인의 지리학이 어느정도 수준이었는지는 모르므로 그들의 기록이 얼마나 정확한지는 모르되, 동쪽의 산동반도에는 래이(萊夷), 그 남쪽으로 바닷가에는 회이(淮夷), 회이의 서쪽이면서 중국의 남쪽에는 초(楚), 서쪽에는 서융과 견융, 북쪽에는 적적과 백적등 동이족에 의해 완전히 둘러싸여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이 동이족이라는 사실을 하나씩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초(楚)는 도끼로 작은 나무를 베는 모양을 본뜬 글자로서, 염제신농 씨족의 파부지가(破斧之歌)와 연결되므로써 동시에 초나라가 동이족의 나라였음을 암시한다. 또 적(狄)도 동이의 한 갈래임은 사이(四夷)가 동이(東夷), 서융(西戎), 남만(南蠻), 북적(北狄)이라는 사실만 보아도 알수 있다. 만(蠻)은 뱀을 신성시한 종족의 이름이니 사만(巳蠻), 즉 삼한 중에서 무당인 지황을 일컫는 이름이다. 융(戎)은 병장기의 총칭이니, 서왕모가 담당하던 서해용궁의 장인(匠人)집단을 일컫는 이름이다. 적(狄)은 적(敵)으로도 부족하여 짐승으로 표현된 적(敵)이다.


그런데 이 적(敵)의 본래뜻을 찾아보면 뜻밖의 사실을 알게된다. [敵]의 본래 글자모양은 그림과 같은데, 이 글자가 임금 제(帝)자의 몸 아래에 그릇을 받쳐둔 모습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림에서 보듯이 적(敵)의 옛 자형은 두가지가 있는데, 제(帝) 앞에 그릇을 받쳐둔 A형과 제(帝) 옆에서 손으로 무엇인가를 하고있는 모습인 (B)형이 있다.


이 두 글자를 별개의 글자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용두질(Masterbation)을 나타내는 같은 글자로 이해해야 정확하다. 이점은 손 대신에 계집 녀(女)를 붙인 [적(嫡)]이 [본처 . 아내]의 뜻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서 증명된다.
이 사실은 중국인들이 그토록 혐오했던 북적(北狄)의 정체가 동이족 이신(異神)임을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이다. 결국 [사이(四夷)]라는 말 자체가 고대에 한겨레가 중국의 사방을 완전히 둘러싸고 있었다는 사실, 즉 지금의 한족(漢族)은 동이족의 작은 한 제후국에 불과했던 나라가 성장한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제 서융(西戎)을 살펴보자. 고대의 지도에서 서융의 영토는 흉노의 서쪽에서부터 시작하여, 파미르 고원의 서쪽까지 뻗어있고, 그 서쪽에는 대월지(大月支)국이 있는데 그 수도는 박트리아이며, 그 서쪽에는 파르티아가 있다. 지금까지 민족사학계에서 조차 이 나라들이 우리 고대사의 강역이라는 사실을 주장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이 세 나라는 거인국인 진국(辰國)의 삼한 중 지황(달님)의 영토인 것이 그 이름에서부터 나타나고 있다. 서융은 고대 지도에서 서역(西域), 저( ), 강( ), 월지(月 )의 자리에 해당하는데, 이는 고대 중국인들이 서융의 영토에 대해 확실히 알지 못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제 이 국호들의 뜻을 풀어보자. 먼저 [서역]은 [인도]가 아니라 티벳고원 북부의 타클라마칸 사막지역이다. 여기에는 돈황 . 옥문관 . 쿠차 . 투르판 분지등 앞에서 몇번 거론되었던 중요지엮들이 망라되는 지역이다. 이 서역에 비해 인도는 [석씨서역(釋氏西域)]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웠음을 박용숙 선생이 이미 <수경주>를 인용하여 밝히고 있다.


그런데 서역과 인도는 지도에서 남북으로 일직선상에 있고, 그 지역은 티벳고원의 서쪽사면을 포함한다. 이 사실은 쿠차에서 인도까지의 전 지역이 서역이었을 가능성도 제공한다. 아무튼 서역이 박용숙 선생의 지적대로 동이족의 서쪽지역을 다스리는 지황의 영토임은 확실하며, 글쓴이는 그 서역이 돈황에서 지중해에 이르는 지역 전부를 가리키는 것이 확실하다고 본다.


서역을 이렇게 볼수 있는 근거는 서역의 주변지역의 이름들이 풍류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먼저 저( )는 [이이]의 짝인 [저이( 夷)]의 이름일 것이다. 어차피 중국을 둘러싼 종족은 모두 사이(四夷)이니, [저이]나 [강이( 夷)]들의 국호에 [이(夷)]를 꼭 표기해야할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다음으로 옥문관 남쪽에는 [월지]가 있다. [월지(月支)]는 [달가지]요, 이는 [달가리]가 되어 [땅겨레]를 나타낸다. 즉 지황의 영역임을 나타내는 이름이 틀림없다. 이는 [대월지(大月支)]국도 마찬가지이다. 대월지국의 수도는 [박트리아]인데, 이 이름이 [박달] 또는 [ 터]임은 기본적인 상상력만 있어도 추리해 낼수 있다.


이같은 사정은 대월지국의 서쪽, 지금의 이란고원 지역을 차지하고 있는 [파르티아 왕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파르티아]의 [파르]를 약하게 발음하면 [바르]가 되는데 이는 [밝]의 의미이며, [티아]는 [ ]가 되어 [터(基)]나 [토(土)]로 이해된다.


이제는 지황의 통치영역인 [서역], 삼한의 체계로 말하면 [마한]이 옥문관에서 지중해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분명히 근거가 제시되어 있고 그 근거에 무리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내용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한국의 역사학은 일제 식민사관에 너무 깊이 중독되어 있고, 그래서 한국사는 아직도 한반도를 벗어나지 못한채 비틀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그 때문에 도학의 자세를 고대사 앞에 두어 [선입관의 배제]를 요구했던 것이다.


언어와 문자와 역사를 [근원적 의문]을 해결하는 자세로 뿌리까지 파헤치면 이런 사실들이 밝혀지는데, 어지간히 열린 마음으로는 이렇게 밝혀놓은 사실도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난데없이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아직도 놀랄 일이 더 많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 놀랄 일이란 [진한]의 영역이 바로 흉노의 영토로 표시된 지역이라는 점이다. <사기>에는 [동호]와 [흉노]가 다른 나라처럼 표기되어 있으나, 이는 [한겨레]와 [배달겨레]를 다른 민족이라고 억지쓰는 것이나 다름없는 짓이다. 사마천이 이렇게 흉노와 동호를 나누어 놓은 이유는 동족상잔을 일으켜 보려는 이이제이(以夷制夷)의 이간책이었을 뿐이다.


이 흉노(동호)의 강역은 동해에서부터 서역의 북부까지이다. 이와같은 흉노의 강역은 <후한서>에서 "[한]에는 세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마한이요, 둘째는 진한이요, 셋째는 변한이니 모두가 옛 진국이다. 진한은 동쪽에 있어 열두나라이며, 북으로 예맥을 접하고 있다. 변한은 그 남쪽에 있으며, 역시 열두나라로서 남쪽으로 왜와 접하고 있다. 마한은 서쪽에 있으니 쉬흔네 나라가 있으며, 남쪽으로는 왜를 접하고 북쪽으로는 낙랑과 접하고 있다(韓有三種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韓 皆古之辰國也. 辰韓吊 有十二國北與穢貊接. 弁韓在其南 亦十二國 南與倭接. 馬韓在西 有五十四國 南與倭接 北與樂浪接)."고 한 기록이 정확함을 확인하게 된다.


즉 진한은 흉노의 강역이요, 마한은 그 서남쪽에 있게 되는 서역이요, 변한은 흉노의 남쪽 . 서역의 동쪽에 위치하는 중국대륙 전체가 되는 것이다. 결국 중국의 여러 제후국들이 모두 동이족이 씨뿌려 세운 나라들이요, 곁다리 신세가 죽기보다 싫었던 봉건제후들이 아비를 부정하고 몰아낸 것이 중국의 역사이다.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군(唐軍)은 그런 사실을 기록한 동이족의 역사기록, 즉 그들의 수치스런 족보를 없애기 위해 고구려와 백제의 문서창고를 남김없이 불태웠던 것이다.

 


7. 부여와 부계왕권

변한은 중국대륙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변한의 딴이름인 [불한] 또는 [발한]의 변형은 세계 여러 곳에서 발견되며, 그 대표적인 곳이 발칸반도와 발해만이다.


발해만의 대문구 문명과 발칸반도의 그리이스 문명은 환국(고조선)이 대륙의 동쪽 끝과 서쪽 끝에 건설한 최초의 변한이었던 셈이다. 따라서 대문구 문명에서는 극동문화권의 변한들이 퍼져나갔고, 그리이스 문명에서는 지중해 문명권의 변한들이 퍼져나갔다고 볼수 있을 것이다.
이 둘은 중앙아시아를 기준으로 볼 때 동쪽 끝과 서쪽 끝에 해당하고, 이는 복희팔괘에서 태양을 상징하는 이괘(離卦)와 달을 상징하는 감괘(坎卦)에 해당한다. 그리고 이 두 문명을 잇는 선이 일월의 운행로에 해당하는 것이기도 하다.


아무튼 이 두 변한에서 퍼져나간 봉건제후들이 강성해지면서, 그 모체인 진한과 마한의 종주권에 반발하여 대항한 사건이 바로 춘추전국시대에 동서양을 뒤흔든 부계왕권의 반란이다. 동변한(중국)에서는 춘추전국시대(B.C. 770 - 221)의 기간동안 하극상이 유행병처럼 번졌고, 서변한(그리이스)에서는 로마의 건국(B.C 753)에서부터 로마제정이 성립되기까지(B.C 21)의 기간이 부계왕권의 반란기간이다.


이 두 사건은 그때까지의 사회를 유지해 주던 신전과 그 신전을 관리하면서 신탁을 전하던 신녀들의 권위가 부정되고, 군사력을 장악한 군왕의 신격화와 절대적 통치권 부여의 첫걸음으로 보는 것이 올바른 평가일 것이다.
이는 또한 삼신 할머니란 말에서 보이는 삼신산, 특히 지황(마한)의 절대적 영토권에 대한 변한의 남성제후들의 반란이었고, 결국 동이족의 축출을 위해 변한의 제후들이 벌린 결사항전이었다.


이 시기에 조선은 동서양을 연결하던 고리에 해당하는 지역에 세웠던 단황(檀煌), 즉 지금의 돈황(敦煌)의 신전을 상실하였다. 돈황이 동이의 신전이라는 사실은 그 신전양식이 석굴형식인데서도 알수 있다.


박용숙 선생에 의하면 샤마니즘은 동굴을 지성소(至聖所)로 여기지만, 불교는 창사봉법지사(創寺奉法之事), 즉 지상에다 건물(절)을 지어 그것을 성소로 받드는 것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정확한 지적으로서 오늘날의 고등종교는 모두 지상의 성전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돈황의 석굴사원은 동이의 신전에 불상을 모셔놓은 것이며, 결국 대웅전에 석가상을 모신 한국의 절들과 꼭 같은 운명을 겪은 신전인 것이다.
이 지역의 상실은 지금의 지리학적 사고방식으로는 이해할수 없는 중요성을 가진다. 고대에 동서변한을 관장하던 서역의 마한이 동변한을 관리하고 보호할 능력을 상실한 이유가 바로 이 돈황의 상실때문이었기 때문이다.


동변한의 군사력을 동원할 수 없게된 마한이 서변한을 제대로 관리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고, 결국 로마제국에 의해 지중해 문명권이 기독교의 세력아래 들어가는 과정을 강건너 불구경하듯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로마제국을 멸망시킨 흉노의 서방정벌은 서변한을 되찾으려는 동이족의 주권행사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흉노가 서방을 정벌한 시기는 동변한에서 동이의 종주권을 인정하므로써 세속적 지배권을 획득한 위(魏)가 삼국을 통일하고, 흉노족의 중국진출이 활발해진 5호 16국 시대와 일치하는데 이는 이런 추측을 뒷받침하는 것이기도 하다.


또 이 지역을 상실한 시기가 고조선의 멸망시기로 알려진 전한(前漢)의 시기와 일치한다는 사실도 이 지역이 동이족의 중심신전이 있던 곳이라는 유력한 증거가 된다. 한무제의 서역정벌도 실제로는 동이의 신전에 대한 정벌이었던 것이다.


아무튼 이 시기에 서변한이 폐지되면서 그리이스의 신들은 서역으로 철수하여 동변한의 반란진압에 주력하게되고, 동변한은 주(周)나라의 수도였던 낙양의 신전을 포기하고 발해만 일대까지 후퇴하므로서 황하유역에 대한 직접적인 지배권을 상실하였던 것이다.


동이족에게 있어서 이 시기는 고조선의 멸망과 함께 부여를 비롯한 부계왕조의 성립이라는 대변혁을 초래한 시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는 실질적으로는 거인족의 세계지배가 끝나고, 풍류가 동이족의 민족종교로 변모하게되는 질적변화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렇다고하여 이 시기에 진한과 마한의 강역인 만몽지역과 서역의 영토에 큰 변화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 지역은 서변한의 로마인들에게는 정벌이 불가능한 지역이었고, 동변한의 중국인들에게는 농경에 부적합한 황무지로서 관심밖의 지역이었던 것이다. 이는 조선초에 세종대왕이 만주지역에 4군6진을 개척하고도 수지가 맞지 않는다하여 되돌려준 것이나 비슷한 상황이다.


따라서 이 반란의 결과, 동이족은 중국대륙에 대한 상징적인 지배권을 보유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한편 중국의 왕실은 동이족의 정벌과 내정개입을 두려워하여 만리장성을 쌓아 자주독립을 보장받으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동이족은 5호 16국의 대혼란기가 보여 주듯이 중국의 왕실이 동이의 종주권을 인정하지 않을 때마다 가차없는 정벌을 행하였고, 당나라에 의한 고구려의 멸망까지 이 투쟁은 계속되었다. 결국 동이족의 세계지배가 완전히 끝난 시기는 고구려가 멸망한 시기와 일치하는 것이다.


아무튼 이는 훨씬 뒤의 일이고, 이 시기에는 조선의 해체와 함께 부여(夫餘)가 건국되는데, <단군세기>는 이 과정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계해(B. C 238년) 단제께서는 어질고 순하기만 하고 결단력이 없었으니, 명령을 내려도 시행되지 않는 일이 많았고, 여러 장수들은 용맹만을 믿고 쉽사리 난리를 피웠기 때문에 나라의 살림은 시행되지 않고 백성의 사기는 날로 떨어졌다. 3월, 하늘에 제사하던 날 저녁에 마침내 오가(五加)들과 의논하여 가로대 "옛 우리 선조 열성(列聖)들께서 나라를 여시고 대통을 이어가실 때에는 그 덕이 넓고 멀리까지 미쳤으며, 오랜 세월동안 잘 다스려졌거늘 이제 왕도는 쇠미하고 여러 왕들이 힘을 다투고 있도다. 짐은 덕없고 겁많아 능히 다스리지 못하니, 어진이를 불러 무마시킬 방책도 없고 백성들도 흩어지니, 생각건대 그대들 오가는 어질고 좋은 사람을 찾아 추대하도록 하라"고 하시고, 크게 옥문을 열어 사형수 이하의 모든 죄수들을 돌려보내도록 하였다. 이튿날 마침내 왕위를 버리고 입산수도하시어 신선이 되시니, 이에 오가가 나라일을 함께 다스리기를 6년이나 계속하였다. 이보다 앞서 종실(宗室)의 대해모수(大解慕漱)는 몰래 수유(須臾)와 약속하고, 옛 서울 백악산을 습격하여 점령하고는 천왕랑(天王郞)이라 칭했다. 수유후(須臾候) 기비를 권하여 번조선 왕으로 삼고, 나아가 상하의 운장을 지키게 하였다. 대저 북부여의 일어남이 이에서 시작되니, 고구려는 곧 해모수의 태어난 고향이기 때문에 역시 고구려라 칭하는 바이다.

 

여기서 우리는 부여가 조선의 옛 서울을 차지하고 정통을 이어받았다고 기록하고 있음을 볼수 있다. 그런데 이 [옛 서울]이 진시황의 지배하에 들어간 진한의 서울이 아니라, 색불루 이전의 단군이 다스리던 시대의 서울임을 알수 있다. 아무튼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이 다음에 이어지는 <북부여기>의 내용이다.

 

기사 8년(B. C 232년) 단제께서 무리를 이끌고 가서 옛 도읍의 오가들을 회유하시니, 마침내 공화의 정치를 철폐하게 되었다. 이에 만백성들이 추대하여 단군이 되었다. 겨울 10월, 공양태모(公養胎母)의 법을 세워 사람을 가르침에는 반드시 태교부터 실시하도록 하였다.

 

이 기록은 진시황에 의해 진한이 무너지기(B. C 221) 이전에 이미 신전이 옮겨갔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박용숙 선생이 <후한서 . 동이전>의 "진시황이 방사 서복을 보내어 동남동녀 수천인을 시켜 바다로 들어가 봉래신선을 구하게 했으나 얻지 못하므로, 서복이 두려워하여 돌아오지 못하였다"는 기록을 "가람의 샤만신(天君)이 진시황의 중국지배권을 인준하지 않았다는 것을 뜻한다"고 풀이한 것은 올바른 해석인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의 공양태모의 법이 바로 풍류의 씨뿌리기를 뜻하는 것도 명백하다. 따라서 한고조가 기원전 200년경에 흉노를 토벌하려 하다가 오히려 백등산(白登山; 밝달산?)에서 포위되기를 7일이 되어, 결국 자신의 딸을 흉노의 선우에게 시집보내는 조건으로 화해를 청했다는 것이, 실제로는 한고조 자신이 흉노(부여)의 부마국이 되어 공양태모의 제도를 받아들이기로 약속하였던 것을 거꾸로 썼다는 사실도 알수 있다.
나아가 <후한서 . 동이전>에 "한나라 조정이 동이(부여)의 임금이 죽으면 미리 옥갑(玉匣)을 만들어 두었다가 보내준다"고 한 기록이나 <삼국지 . 동이전>에 "한나라 때에 조복(朝服)과 두건(頭巾)을 동이(고구려)에 바쳤다"는 기록 등이 모두 올바른 기록임도 증명되는 것이다.
그러나 동이의 지배권은 흔들리지 않았을지라도, 이 시기에 동이족의 체계가 부계왕권으로 돌아선 것은 거의 확실하다고 생각된다. 조선(朝鮮)이 달(月)과 물고기(魚)로 상징되는 바와 같이 신녀들이 주도권을 잡고 있었기에 [삼신할머니]란 이름이 지금까지 전해온다고 생각하면, 부여(夫餘)의 국호가 [지아비(夫)]로 상징되는 것은 이런 사정을 나타낸다고 보여진다. 따라서 박병식 선생이 한국상고사에서 주장한 다음 내용은 다른 관점에서 해석해야 할 것이다.

 

고대의 부여에 대해서 진(秦)나라의 복생(伏生)은 <상서대전(尙書大傳) 속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해동제이 부여지속(海東諸夷 夫餘之屬)". 海東諸夷란 고대 한민족을 일컫는 것이기 때문에 그는 "한민족에게는 여러 족명(族名)이 있는데, 이것들은 원류를 찾자면 모두가 부여에 속하는 것이다"라는 것이다. ...... <상서대전>에 "해동제이 부여지속"이라고 나와있는 것은 조선(朝鮮)이라는 국호가 부여(夫餘)보다 늦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것은 <환단고기>에 나타나는 최초의 국호 환국(桓國)이 바로 부여라는 것이 된다. 즉 환(桓)라(國) ⇒ 하라 = 夫餘라는 것이 명백해진다.

 

이는 그가 같은 책의 64쪽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朝鮮, 高句麗, 百濟등 우리 고대사의 거의 모든 국호를 [하라]로 보았던 것과 일관성이 없는 주장이다. 朝鮮이 [아사하라]라면 夫餘의 [하라]보다 앞서는 것이 오히려 정상이다. [아사]라는 말이 [아침 . 먼저]의 뜻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 인용문의 "해동제이 부여지속"은 [동이의 여러 종족들이 부여에 귀속되었다"로 풀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일단 부계왕권이 성립된 후에는 동이족 자체 내에서도 치열한 투쟁이 있었을 것이며, 부여로부터 고구려에 이르는 기간동안 동부여가 서고, 주몽이 부여에서 탈출하고, 온조가 백제를 세우는 등 많은 사건이 일어났던 것이 그런 사정을 암시한다.
그 권력다툼은 삼국의 정립으로 모종의 체계를 갖추므로써 종식된다. 따라서 우리는 삼국의 정립을 투쟁의 결과 얻어진 세력균형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삼한의 체계가 부활한 것으로 이해해야 옳다는 새로운 관점을 얻게된다.


한편 이 기간동안에 중국의 변한들은 동이의 처절한 보복을 받게 되는데, 진시황이 동이의 신전을 파괴하고 뒤를이어 일어난 한(漢)의 무제가 서역을 침범한 대가로, 중국 전역이 5호 16국의 대전란을 겪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동이족의 내부에서 일어난 혼란이 변한으로 파급된 것으로 보아야 할것이니, 세력다툼에서 밀려난 지부신전 소속의 군사(선비)들이 중국에 들어가서 여러 왕조를 건설하여 주도권 쟁탈을 벌인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 혼란은 동이의 체계가 완전히 붕괴되는 고구려의 멸망과, 당에 의한 중국의 통일을 고비로하여 진정되었고, 이때부터 동이족의 풍류는 세계를 지도하는 종교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8. 삼국과 몽고

삼국의 정립과정은 본래의 삼한체계가 완전히 붕괴하고, 새로운 삼한체계가 형성된 과정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새로 형성된 삼한체계는 동서의 변한을 모두 상실한 축소 재형성이라는 점에서, 그 이후 계속된 한겨레의 쇠퇴과정의 시발점이기도 하다.


마한, 즉 서융의 주력으로 볼수 있는 고구려는 뛰어난 군사력으로 부여를 정복하므로써, 옛 진한과 마한 강역의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이는 당시 혼란한 중국을 제외한 아시아 전역을 지배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따라서 부여나 고구려를 동호나 흉노와 분리시켜 만주벌판 일대에 표시한 고대지도는 모두 왜곡된 것이다. 이런 사정은 흉노나 동호가 부여나 고구려와 투쟁한 기록이 중국이나 우리의 고대사에 한 번도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증명하는 바이기도 하다.


이 추정을 지원하는 또하나의 근거가 되는 것이 앞 단락에서 인용된 <단군세기>의 "대저 북부여의 일어남이 이에서 시작되니, 고구려는 곧 해모수의 태어난 고향이기 때문에 역시 고구려라 칭하는 바이다."라는 기록이다. [고구려(高句麗)]는 [고구이(古九夷)], [고가리(高 族)]의 변형으로 생각할 수 있는 이름이다.


해모수가 태어난 곳은 신전(古 . 高)이며, 이는 고대의 모든 왕들의 탄생처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인용문은 [고구려]라는 이름이 [신전]에서 유래하였다는 뜻으로 해석되는 것이다. 이 사실을 알면 고구려가 수(隋)나 당(唐)과 싸우던 지명에 대해서도 재고해야 할 여지가 많다는 점도 알수 있다.


한편 진한의 주민들은 진시황에게 쫒겨나 동쪽 바다 끝에 새로운 진한을 건설하였으나, 그들의 권위가 마한(고구려)에 의해 받아들여지지는 않은 것 같다. 대신 그들은 동이족이 제후를 임명할 때 쓰던 금관을 비롯한 각종 유물을 옮겨와 경주 부근의 여러 고분에 숨겨두었다고 보여진다.


그들이 당나라의 힘을 빌어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켰으나, 결국 그 땅들을 모두 당나라에 빼앗기고 두 번 다시 그 유물들을 사용할 기회를 얻지는 못했을 것이다.


변한의 이신(異神)들은 동쪽으로 계속 밀려나, 산동반도와 한반도 서해안 일대의 해안선을 따라 지중해에서의 도시국가와 같은 해상세력을 재건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그것이 백제였던 것으로 보인다. 백제의 해상세력은 일본에 속국을 건설하여 문화를 전파한 행적과, 장보고가 백제의 옛땅에 아시아의 제해권을 장악한 대 해상왕국을 세울수 있었던 사실을 통해 그 수준을 짐작할 수 있다.


고대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백제를 마한의 후신으로 보는 경향이 지배적인데, 이는 마한이 한반도의 서쪽에 있었다는 오해에서 도출해낸 결론일 뿐이고, 삼한의 제도하에서 영토권을 행사하던 마한은 고구려였다고 보아야 한다.

삼국시대 이전의 한반도는 고고학적인 발굴성과가 말해주듯이, 진한의 변방으로서 정치적으로는 거의 관심을 끌지못하던 곳이었을 것이며, 소규모 가람들이 띄엄띄엄 발전하고 있는 수준이었을 것이다. 여기에 춘추전국시대에 밀려난 변한의 백제인들이 서해안에 정착하여 후일 백제의 원주민이 되고, 진한의 유민들은 그때까지 방치되어 있던 동해안에 정착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백제를 마한의 후신으로 보는 입장이 전혀 틀린 것이라고는 할수 없으니, 백제가 국가형태를 갖출 때 그 주도세력이 고구려(마한)에서 갈라져나온 온조왕의 세력이었기 때문이다. 온조왕이 동이족의 전통을 따라 봉토입국의 절차를 거쳤다고 보더라도, 그 출신지가 고구려라면 당시의 영토권은 고구려가 행사하였다고 보아야 한다.


이래저래 백제는 마한의 정통을 이었다고는보기 어렵다. 어쩌면 지금까지의 모든 학설을 부정하는 추측이지만, 백제가 바로 서변한이 멸망할 때 해상으로 탈출하여 신농씨의 옛 고향을 찾아온 사람들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추측은 보다 많은 자료가 있어야 논의할 수 있는 일이고, 지금단계에서 속단할 수는 없는 사항이다.


삼국이 정립된 이후의 역사도 본격적인 연구가 필요한 분야이다. 백제와 신라가 지금의 몽고 지역 주변에 있었다는 여러 가지 증거들이 발견된고 있는 상황에서, 삼국이 만주와 한반도에 있었다는 역사를 전적으로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륙에 나타나는 삼국의 흔적들을 설명할 길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삼국의 초기와 후기의 역사적 상황 차이가 삼국의 판도에 변화를 가져온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무슨말이냐 하면, 한반도는 원래 삼국의 왕조가 있던 지역이 아니라 대륙에 있던 동이의 중심신전인 삼한조선이 옮겨온 지역일 수 있다는 뜻이다. 삼한조선이 대륙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었던 데에는 다른 어떤 이유보다도 삼한조선의 직할영지였던 고구려 왕조의 반란이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삼국시대 초기까지만 해도 한겨레는 풍류로 다스려지던 동이족 천신들의 나라였을 것이다. 이때까지는 고구려와 백제 및 신라의 삼국은 통일국가와 다름없는 관계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마한인 고구려가 실권을 장악하고 있기는 했지만, 명목상으로는 신라가 진한의 지위에 있었고 백제가 변한의 역할을 했다는 뜻이다.


그러던 것이 고구려가 전제 세습왕권을 확립하면서 풍류의 혈통을 통한 지배가 불가능해졌고, 왕실의 지도이념으로 불교까지 받아들이자 종교적인 권위까지도 상실하므로써 삼한조선의 신전은 설자리를 잃어버린 것이다. 대륙의 번한들에서 일어났던 제후들의 반란이 결국 삼한조선의 직할영지에서까지 일어났다고 하겠다.


고구려는 일찍이 고조선의 유민들이 난을 피해 이주해 정착해 있던 대륙의 끝모퉁이 한반도에 삼한조선의 신관인 동이인들의 터전을 마련해 주므로써, 한반도의 삼국시대를 열었다고 볼 수 있다. 삼국 초기에는 삼국이 모두 고구려의 수도가 있던 중앙아시아에 있었으나, 이 때에 신라와 백제가 한반도로 들어왔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러다가 신라와 백제의 동이인들이 그들 특유의 뛰어난 능력을 바탕으로 강력한 고대국가로 성장하자 비로소 삼국이 정립하였고, 백제는 옛 변한땅인 중국대륙에 식민지까지 경영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신라는 한반도에서도 구석진 영남지방에 유폐되다시피 나라를 세웠고, 고구려와 백제의 성세(盛勢)에 밀려 대륙진출이 막혀 있었다. 그러나 지역적인 고립은 내부결속을 강화시켰고, 결집된 국력은 삼국통일의 원동력이 되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므로써 비록 일부이기는 하지만 고구려와 백제의 영토를 차지할 수 있었고, 그 결과 고구려의 옛땅인 대황(고비사막)까지 신라의 영토로 편입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다음으로 살펴볼 대상이 몽고이다. 몽고는 지금은 한겨레와 아무 관계가 없는 나라처럼 되어버렸으나, 고구려 시대까지는 고구려의 속국이었거나 고구려 자체였을 것이다. 이는 그 이름이 신전을 나타내는 한자로 되어있는 점만 보더라도 알수 있다.


[몽고(蒙古)]의 [古]가 태양신의 신전임은 이미 밝힌 바이고, [蒙]은 두그루 나무(艸)를 심어 위를 덮은 신전(몽)을 나타낸다. <주역>에서는 [몽괘(蒙卦)]가 '간상(艮上)감하(坎下)'로 나타나는데, 이는 산 아래에 물이 있는 모습으로서, 배산임수로 지은 동이신전의 입지조건이나 산모양 아래에 우물이 있던 피라밋의 구조 모두에 적용된다. 특히 [蒙]의 뜻인 [어둡다]는 지하신전에서 햇빛을 보지않고 수도하던 풍습을 나타내는 것이다. 따라서 [몽고]는 의심의 여지없이 동이신전인 것이다.


그러나 고구려가 멸망한 후, 신라가 발해와도 교류를 끊고 당나라 일변도의 외교를 펼치면서 고구려의 유민들은 한겨레와의 동질성을 상실하게 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고려는 신라의 정통을 이어받기에 급급하였고, 당의 뒤를 이은 송(宋)과의 우호만을 강조하다가 동족인 요(遼)와 원(元)의 혹독한 보복을 받았었다.


우리 역사서는 몽고와 거란, 여진 등에게 침략을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오랑캐로 매도하고 있으나, 이는 통일신라 이후로 자기 뿌리를 팔아서 권세를 누린 지배계층의 논리일 뿐이요, 그 모두가 한겨레의 지류이다. [여진(女眞)]이 진한(辰韓)의 별칭이었다는 사실은 박병식 선생이 주장하는 바와 같고, [거란(契丹)]은 [글안]으로서, [글]은 [크다]는 뜻이며 [안(丹)]은 [태양]이란 뜻이니, [큰 태양]을 나타내는 [대한(大桓)]의 다른 이름이 [거란]인 것이다.


그런데 고구려가 멸망하기 직전에 고구려의 신전과 승려들이 왕사인 보덕화상을 따라 완산주 고대산, 지금의 전주 모악산으로 모두 옮겨와 버린데다가, 발해가 멸망한 후 발해의 유민들이 고려로 귀화하여, 고조선의 옛땅에 남은 조선족들은 풍류의 진리를 배우지 못하고 침체를 거듭하였다.


그러다가 만주지역에 청(淸)나라가 서서 중국을 통일하였는데, 만주족은 자신들이 지배한 한족의 문화에 동화되므로서 고구려의 옛땅까지 한족의 영토로 넘겨주는 결과를 낳았다. 이렇게 생각하면 지금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몽고족과의 일체감을 시급히 회복하는 것은, 정부와 민간차원에서 공동으로 추진해야할 민족적 숙제라고 할 것이다.

 

9. 밀교와 무당

풍류맥을 인종에서 찾으면 몽고족에게서 찾아지고, 국가에서 찾으면 한국 . 몽고 . 일본 . 티벳이 그 인종들로 이루어진 나라들이다.
그런데 풍류맥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이 두 요소 이외에도 반드시 한 요소를 필요로 하는데, 그것이 바로 종교적 요소이다. 종교(宗敎)라는 이름 자체가 풍류의 정식명칭이니, 이 요소를 빼고서 풍류맥을 거론할 수 없음은 당연한 일이다.


종교에 전해지는 풍류맥은 무속(巫俗)과 밀교(密敎)이다. 먼저 [무속(巫俗)]은 정식 명칭이 [종교]이지만, 이 이름을 되찾기 전에는 [무속]이라는 학술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혼란을 일으키지 않으므로 이렇게 쓰는 것이다. 아무튼 이 무속에 대해서는 이미 풍류와의 연관성을 충분히 해석하였으므로, 무속이 풍류의 정통맥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기에는 무리가 없을 것이다.


다음으로 [밀교(密敎)]는 [密]이 [나무가 무성한 산 속에 모셔진 신전]의 뜻으로서, 동이족의 신전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이 신전은 단순한 예배당이 아니라, 제정일치사회의 신전이자 왕궁인 사원(寺院)임을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티벳 밀교의 사원들을 통해 알수 있다. 더구나 밀교의 발원지는 이책에서 풍류의 발원지로 추정한 파미르 고원 주변의 티벳고원이다. 티벳고원은 그 발음을 볼 때, 태백산일 가능성이 크다.
여기서 말하는 태백산은 말할것도 없이 환웅이 신시를 열었던 태백산 신단수이다. <삼성기>에는 "환웅이 자정녀정(子井女井)을 천평(天坪)에 팠다"고 하는 기록이 있는데, 이 [천평]은 [하늘위의 벌판]이라는 뜻도 되므로 고원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특히 티벳고원의 지도를 보면 크고작은 호수가 수없이 널려있어 [자정여정]의 부락을 설치하기에 안성맞춤이다. 같은 기록에 흑수백산(黑水白山)이 나오는데, 이는 에베레스트 산과 투루판 분지로 비정할 수 있다.


투루판 분지는 해발 마이너스 154미터의 특수한 지형으로서, 주변이 산맥으로 둘러싸인 지형을 생각할 때 여기에 호수가 생기지 않고 분지로 되어있는 것이 이해되지 않는 곳이기도 하다. 글쓴이의 생각으로는 이곳이 동이족이 신성시한 우물신전의 원형이 아닌가 한다.
밀교를 불교의 일파로 보는 것이 오늘날 종교학계의 일반적인 경향이지만, 이는 주객이 전도된 견해로 보아야 할 것이다. 안창범 선생은 불교의 창시자인 석가모니가 동이족이었을 뿐만아니라, 석가가 수행한 설산(雪山)이 백두산이며, 석가가 초전법륜(初轉法輪)한 녹야원(鹿野園)이 제주도라는 사실을 불경의 기록을 분석하므로써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대승불교의 창시자로 알려진 용수(龍樹)보살이 바다 속의 궁전에 들어가 대승경전을 얻어 남천축에 돌아가서 불교를 크게 유포시켰다고 하는 <불교대장경 . 용수보살전>의 기록을 근거로, 대승경전이라는 것이 신선도(풍류)의 경전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불교가 풍류의 한 갈래라는 주장은 사실로 보여지며, 설혹 원시불교가 인도의 자생적 종교라고 하더라도 대승불교와 밀교가 풍류의 일파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특히 밀교는 여러 가지 점에서 풍류의 여러 요소를 골고루 구비하고 있다.


첫째 밀교의 최고부처인 법신불인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이 바로 대일여래(大日如來)로서, 태양신을 뜻한다. 대일(大日)은 [큰 해]로서 [대환(大桓)]과 같다.


[여래(如來)]는 부처의 별호 중 하나인데, [옴과 같다]는 뜻이 된다. 이를 중국어로 읽고 해석하면 아무 뜻이 없으나, 우리말로 읽고 새기면 인도어의 뜻이 그대로 살아난다. [來]는 [오다]인데, [오다]의 명사형인 [옴]은 불교 최고의 주문(呪文)인 육자진언(六字眞言), 즉 [옴마니반메훔]의 첫머리에 나오는 [옴]과 일치한다. [옴]은 창조의 소리를 본뜬 것이라고 하니, [여래]는 [창조의 소리와 같다]는 뜻이되어 곧 [창조주]의 다른 칭호가 된다. 결국 [대일여래]는 [창조주인 큰 햇님]으로 풀린다.


더욱이 [오다]의 형용사형인 [올]은 고대에는 [알]과 서로 통하는 소리였다. [알]은 우리말에서 [알다(知)], [알맹이(核)], [알(卵)] 등에 두루 쓰인다. [앎]은 불교교리의 핵심이다. 또 [알(卵)]은 태양신의 상징인 동시에 동자들이 타고다니던 가마이기도 하였다. 또 [오다]의 과거형인 [온]은 우리말에서 전체를 뜻하기도 하고, 신기하게도 영어의 [올(all)]과도 연결된다.


[來]의 자원(字源)은 [보리(麥)]의 모양을 나타낸 글자라고 한다. 옛날 사람들은 보리가 하늘로부터 왔다고 믿었기 때문에 [來]를 [온다]는 뜻으로 쓰고, 보리는 [麥(맥)]자를 따로 만들어 표시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보리]는 불교의 최고진리인 [삼바디(sambodi)]의 음역이다. [삼바디]와 함께 최고의 수행단계를 나타내는 말로 [삼마디(samadi)]가 있는데, 신기하게도 이 두 말은 우리말의 [삼 맞이]와 [삼 받이]의 구개음화되지 않은 형태와 일치한다.


물론 이때의 [삼]은 [삼신]이나 [삶]으로 받아들여도 아무런 의미상의 차이가 일어나지 않는다. 뿐만아니라 [보리]는 그 색깔이 황금색으로서 중(中)의 색깔이요, 형태도 음양이 맞붙은 태극형상이면서, 여성의 성기인 [보지]와 형태와 소리가 유사하다. 내친김에 한걸음 더 나가면, [來]의 글자형태가 태양신의 상징부호인 열 십(十)에 세사람이 매달린 모습인 것도 [삼황]과 그대로 연결된다. 결국 [여래]는 부처가 이 모든 것들과 같다는 뜻으로서 풍류의 분파임을 스스로 내세운 것이된다.


둘째 밀교에서 가장 중시하는 수행법은 탄트라(Tantra)이다. [탄트라]는 씨줄, 강요(綱要), 주법적(呪法的)인 신비한 경전을 뜻하는 말이라고 한다. 그 수행법은 성력(性力; sakti), 특히 여성의 성에너지 숭배가 중심을 이루고, 남녀의 교합이 교리와 실천의 중요한 부분을 이룬다고 한다.


이런 사실들은 지황의 신전인 우물(용궁)에서 행해졌던 씨받이와 쉽게 연관되는 사상들이고, 우상(남녀화합상)의 숭배가 밀교의 뿌리임을 알려준다. 이렇게 보면 [탄트라]는 [탄(檀) 틀]이요 [땅 틀]의 뜻으로 이해되니, 결국 [탄트라]는 [씨받이의 규범]을 뜻하게 된다.
원(元) 황실이 밀교(라마교)를 국교로 받아들였던 이유도 여기서 이해되는 것이니, 중국에서 변형된 유교와 불교에 물들지 않은 몽고족은 그들의 뿌리인 풍류의 전통을 잊지 않았다는 뜻이 된다.


셋째 밀교의 [밀(密)]은 길게 발음하면 [미르]가 된다. [미르]는 [용(龍)]의 고대어임을 이미 밝혔고, [미륵(彌勒)]의 중국식 발음과도 같음을 이미 밝혔다. 또 [진국(辰國)]이 [미르나라]가 되어 고조선과 연결되면서, 단군이 바로 미륵이 된다는 사실도 설명한 내용이다. 따라서 [밀교]는 분명히 풍류의 다른 이름이다.


넷째 티벳지역에 밀교가 전파되기 이전에 있었던 토착종교는 [본(BON)교]라고 한다. 여기에 불교가 들어가서 본교와 투쟁하는 과정을 통해 서로 혼융되어 탄트라적인 밀교가 정착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티벳 고유의 종교인 이 [본교]는 샤만교의 한 형태라고 한다. 여기서 우리는 [본교]가 바로 풍류였음을 간단히 유추 해낼수 있다.


[본]은 [본(本)]과 같은 소리로서 [뿌리]의 뜻으로 이해된다. 또 우리말의 [본]은 [모범 . 틀]의 뜻이며, [보다(see)]의 과거형(seen)이며 여기서 소개된 영어는 우리말 [씨]와 한자 [示 . 視]와 음이 같다. 또 [본]은 영어의 [born(낳다)], [bon(뼈)]와도 소리가 같다. 그리고 이 뜻들이 풍류를 매개로하여 묶어질 수 있는 말들임은 충분히 알수 있을 것이니 더 설명하지 않는다.


결국 [밀교]는 풍류의 원줄기로 생각되며, 여기에 그 지류인 불교가 수입되었다하여 그 원형이 변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그 증거가 밀교에서 [탄트라]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나 우리나라의 부녀자들이 절에 가서 아들낳기를 축원하는 관습에서도 발견되는 것이다.

 

10. 미륵신앙

동이족의 세계정부가 무너져 그 흔적조차 찾기 힘든 지금, 동이의 전통은 종교에서 찾아지는 것이 옳다. 특히 동이의 세계지배 자체가 종교에서 유래하여 종교를 중심으로 행해졌던만큼, 그 전통의 핵심은 뭐니뭐니 해도 종교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동이의 종교인 풍류대도의 흔적을 가장 많이 간직한 것은 아무래도 미륵신앙이라고 보아야 할 것 같다. 흔히 미륵신앙을 불교의 한 형태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 뿌리를 추적해 보면 풍류와 더 밀접한 관련이 있고, 신앙의 내용도 불교와는 많은 차이가 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미륵신앙은 불교신앙이 아니다. 미륵사상이 불교의 당래불(當來佛) 사상에 의하여 생겨난 불교사상의 한 갈래라는 생각은 뿌리부터가 잘못된 것이다.


미륵이라는 명칭의 어원은 산스크리트어의 마이트레야(Maitreya)인데, 한자로 [彌勒(미륵)]이라고 음역하였고, 그 뜻은 [자비한 어머니]라고 한다. 그러나 다음의 인용문은 이런 해석에 문제가 있음을 보여준다.

 

먼저 풀이한 바와 같이 미륵은 자씨, 곧 자비스러운 어머니라는 뜻이다. 미륵은 특히 자비공덕을 원만히 성취하므로 미륵이라고 이름지었던 것이다. <일체지광명 선인자심인연 불식육경(一切智光明 仙人慈心因緣 不食肉經>의 이야기이다. "바바리 바라문의 아들 미륵이라는 분은 몸이 금빛이요, 32 대인상(三十二 大人相)과 80종(八十種)의 좋은 모습을 갖추어 거룩한 거동이 부처님과 비슷하였다. 바라문의 장자 등은 이것을 보고 부처님께 여쭈었다. '미륵은 어떤 인연으로 부처님과 비슷한 대인상을 갖추게 되었습니까?' ......"

 

<미륵상생경>이나 <미륵하생경>, <미륵성불경> 등의 어디에도 [미륵보살]과 여성, 즉 [어머니]를 연결시킬 근거는 발견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에 대한 해명도 글쓴이는 찾아내지 못한 실정이다. 결국 미륵은 불교 고유의 관념이 아니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미륵신앙의 뿌리는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그 해답이 바로 풍류이다.


미륵의 어원인 [마이트레야]는 기원전 1,380년 경에 터키의 앙카라에서 동쪽으로 100마일 되는[보가즈 교이]라는 곳에서 발견된 문서에 [미도라(Mithra)]라는 이름이 이미 있는 것만 보더라도, 불교 이전부터 있었던 신앙대상으로 보아야 한다.

 

수소의 제의(祭儀)와 관련하여 가장 널리 알려진 [미도라스]는 그 이름 자체가 [수소를 지키는 위대한 신], [힘센 수소], [그대는 우주의 지배자 . 강력한 수소 . 하늘과 땅을 다스리는 미도라 = 봐루나]라고 이해되었다. ...... 페르샤의 성전(聖典) <아베스타>나 인도의 <베다>경의 찬가에는 미도라스가 황금의 전차를 타는 천공신(天空神)의 심볼이며, 비를 내리는 풍요의 신(Mithra)이다. 또 [Mithra]는 어원적으로 [친구]나 [계약]을 뜻하는 말이고, 친구와의 계약이 고대의 종교적 결사(結社)를 의미한다는 사실에 유의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미도라스]는 수소를 지키는 신앙의 특수집단을 가리킨다고 말할수 있다.


메소포타미아 인들은 [미도라스]를 [샤마슈(samas)]로 번역하였으며, 그 뜻은 바빌로니아 인들과 마찬가지로 태양신으로 인식되었다. [미도라]가 우리의 고대 말 [미리(龍)]와 닮았고, [샤마슈]가 [사문(沙門)], [샤먼], [삼한(三韓)]과 닮았다는 점에도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미도라]나 [샤마슈]가 모두 [삼(三)]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이미 앞에서 본대로 소(牛)는 삼각형(천부인)이며, 환웅은 태양신이다. 또 태양신인 그가 거느린 풍사(風師), 우사(雨師), 운사(雲師)가 삼신(三神)이므로, 환웅과 천공신 [미도라스]가 같은 의미가 된다.

 

이 인용문은 <천부경>에서 도출되는 삼각형과 환웅이 가지고 온 천부인을, 숫소의 머리모양이 만드는 삼각형과 관련시키므로써 고대종교의 핵심을 파헤친 논저(論著)의 일부이다. 우리는 여기서 같은 사실을 대상으로 하되, 관점을 바꾸어 [미도라와 미륵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보자.


이렇게 주제를 설정했을 때, 우선 [미도라]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샤마슈]로 번역된 태양신이었다는 사실을 중시하게 되고, 다시 천공신과 관련되므로써 환웅(한울님)과 연결됨을 긍정할 수 있다.


즉 [미도라]는 [태양과 하늘을 동시에 의미하는] 환웅과 뜻이 같다. 다음으로 [미도라스], 즉 [미도라]를 신앙하는 종교적 결사가 소를 지키는 종교결사였다는 사실을 통해, [소(牛) 터]로도 해석되는 [솟터]와 결부시킬 수 있다. 셋째로는 [미도라]가 풍요와 비(雨)를 관장하는 신이었다는 사실에서 우물(井), 곧 여신전의 주인인 용왕(무당)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이런 사실들에 [미륵]의 어원이 [마이트레야]라는 사실과, [미륵]의 중국식 발음이 [미르]라는 사실을 추가하면 [미륵불]의 정체는 저절로 드러난다. 즉 [미륵불]은 한겨레의 신앙대상인 [삼황]이요, 그 중에서도 지황에 해당하는 [환웅]을 의미하는 이름인 것이다.
이는 [미륵]이 [자비한 어머니]로 불리는 것이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되, 그것이 불교적 관념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는 증거들이다. 그리고 이 [자비한 어머니]라는 이름이 소울음 소리인 [엄매] 또는 [움머]가 [엄마]와 비슷한 소리라는 점에서도 [솟터]와 관계된다.


따라서 미륵신앙은 풍류의 전통신앙으로서 불교와는 비할 수 없이 오랜 전통을 지닌 종교이며, 불교에서 말세론(末世論)을 이용하여 분화한 신앙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신라나 백제의 불교가 미륵불 신앙에 보다 큰 비중을 두었던 이유도 저절로 밝혀진다.
그리고 미륵신앙의 승려가 신채호 선생이 <조선상고사>에서 밝혀낸 [승군(僧軍)]임을 알수 있으며, 우리나라의 불교가 전통적으로 [호국불교(護國佛敎)]로 일컬어지는 이유도 알수 있게 된다. 선생의 승군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일찌기 고려 최영(崔英)전에 의거하건대, 최영이 말하기를 '당나라가 30만 군사로 고구려를 침범하여, 고구려는 승군(僧軍) 3만을 내어 이를 대파하였다'고 했으나, <삼국사기> 50권 중에 이 사실이 보이지 아니한다. 그러면 승군이란 무엇인가 하면, 서긍(徐兢)의 <고려도경(高麗圖經)>에 '재가(在家)한 화상(和尙; 중)은 가사도 입지 아니하고 계율도 행하지 않으며, 조백( 帛)으로 허리를 동이고 맨발로 걷고, 아내를 가지고 자식을 기르며, 물건의 운반 . 도로의 소제 . 도랑의 개척 . 성실(城室)의 수축등 공사(公事)에 복역하며, 국경에 적이 침입하면 스스로 단결하여 싸움에 나서는데, 중간에 글안(契丹)도 이들에게 패하니, 그 실은 죄를 지어 복역한 사람들로서, 수염과 머리를 깎았으므로 이인(夷人)이 그들을 화상이라 한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에서 승군의 면목을 대강 알 것이다.


그러나 그 내력이 어디서 비롯하였느냐 하는 의문이 없지 않다. <통전(通典)> . <신당서(新唐書)> 등 이름있는 책에 의하면, 조의선인( 衣先人) 혹은 백의선인(帛衣先人)이라는 관명(官名)이 있었고, 고구려사에는 명림답부(明臨答夫; 고구려 재상)를 연나조의( 那 衣)라 하였고, 후주서(後周書)에서는 조의선인( 衣仙人)을 예속선인( 屬仙人)이라고 하였으니, 선인(先人) 또는 선인(仙人)은 다 국어 [선인]을 한자로 음역한 것이고, 조의( 衣) 혹 백의(帛衣)란 <고려도경>에 이른바 '조백( 帛)으로 허리를 동이므로 이름함이다. 선인(仙人)은 신라 고사(故事)의 국선(國仙)과 같은 종교적 무사단(武士團)의 단장이요, 승군(僧軍)은 국선 아래 딸ㄹ린 단병(團兵)이요, 승군이 재가한 화상이라 함은 후세 사람이 붙인 별명이다. (이하생략)

 

이 미륵신앙은 고구려가 멸망하기 직전에 보덕화상(普德和尙)이 신통력으로 방장(方丈)을 날려 남쪽 완산주(지금의 전주) 고대산(孤大山; 지금의 모악산)으로 옮긴 후 그 본산을 모악산으로 흥성하였다고 보여진다.


따라서 <삼국유사>에 기록된 진표율사(眞表律師)의 금산사 미륵전(金山寺 彌勒殿) 건립은 이 미륵신앙, 다시말해 풍류의 부흥을 도모한 것이었다. 그 증거가 되는 것이 [점찰법회(占察法會)]이니, 점찰법회가 <천부경>의 진리를 익히는 것이라는 사실은 앞에서 소개한 바와 같다.
또한 <삼국유사>의 [진표전간(眞表傳簡) 조]에서 "그(진표)의 뜻이 자씨(慈氏)에 있었으므로 감히 중지하지 못하고 이어 영산사(靈山寺 - 일명 변산 또는 능가산이라 한다)로 옮겨가서 여전히 정진하였다. 과연 미륵보살이 나타나 점찰경 두 권(주해 생략)을 주고 ......" 라는 기록이 의미하는 바도 알수 있게 된다.


이 미륵신앙은 민중의 신앙으로 명맥을 이어오다가, 풍류에 대한 기록을 남긴 최치원 선생의 후손 최제우 선생이 창도한 동학에서 [삼교합일(三敎合一)]의 사상으로 부활하고, 스스로 금산사 미륵불임을 자처한 증산 강일순 선생에 의해 새시대를 이끌어나갈 지도이념으로 제시된다.
그렇지만 동학과 증산교의 사상내용은 아직까지는 특정 종교의 교리 수준에 머물러 있고, 한민족의 미래를 이끌어나갈 종합사상으로 발전되었다고 보기는 힘든 것 같다. 그러므로 이 부분은 글쓴이 개인적으로도 보다 깊이 연구해야 할 분야이고, 민족적 차원에서도 연구가 활성화되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7. 부여와 부계왕권

변한은 중국대륙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변한의 딴이름인 [불한] 또는 [발한]의 변형은 세계 여러 곳에서 발견되며, 그 대표적인 곳이 발칸반도와 발해만이다.


발해만의 대문구 문명과 발칸반도의 그리이스 문명은 환국(고조선)이 대륙의 동쪽 끝과 서쪽 끝에 건설한 최초의 변한이었던 셈이다. 따라서 대문구 문명에서는 극동문화권의 변한들이 퍼져나갔고, 그리이스 문명에서는 지중해 문명권의 변한들이 퍼져나갔다고 볼수 있을 것이다.
이 둘은 중앙아시아를 기준으로 볼 때 동쪽 끝과 서쪽 끝에 해당하고, 이는 복희팔괘에서 태양을 상징하는 이괘(離卦)와 달을 상징하는 감괘(坎卦)에 해당한다. 그리고 이 두 문명을 잇는 선이 일월의 운행로에 해당하는 것이기도 하다.


아무튼 이 두 변한에서 퍼져나간 봉건제후들이 강성해지면서, 그 모체인 진한과 마한의 종주권에 반발하여 대항한 사건이 바로 춘추전국시대에 동서양을 뒤흔든 부계왕권의 반란이다. 동변한(중국)에서는 춘추전국시대(B.C. 770 - 221)의 기간동안 하극상이 유행병처럼 번졌고, 서변한(그리이스)에서는 로마의 건국(B.C 753)에서부터 로마제정이 성립되기까지(B.C 21)의 기간이 부계왕권의 반란기간이다.


이 두 사건은 그때까지의 사회를 유지해 주던 신전과 그 신전을 관리하면서 신탁을 전하던 신녀들의 권위가 부정되고, 군사력을 장악한 군왕의 신격화와 절대적 통치권 부여의 첫걸음으로 보는 것이 올바른 평가일 것이다.


이는 또한 삼신 할머니란 말에서 보이는 삼신산, 특히 지황(마한)의 절대적 영토권에 대한 변한의 남성제후들의 반란이었고, 결국 동이족의 축출을 위해 변한의 제후들이 벌린 결사항전이었다.


이 시기에 조선은 동서양을 연결하던 고리에 해당하는 지역에 세웠던 단황(檀煌), 즉 지금의 돈황(敦煌)의 신전을 상실하였다. 돈황이 동이의 신전이라는 사실은 그 신전양식이 석굴형식인데서도 알수 있다.


박용숙 선생에 의하면 샤마니즘은 동굴을 지성소(至聖所)로 여기지만, 불교는 창사봉법지사(創寺奉法之事), 즉 지상에다 건물(절)을 지어 그것을 성소로 받드는 것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정확한 지적으로서 오늘날의 고등종교는 모두 지상의 성전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돈황의 석굴사원은 동이의 신전에 불상을 모셔놓은 것이며, 결국 대웅전에 석가상을 모신 한국의 절들과 꼭 같은 운명을 겪은 신전인 것이다.
이 지역의 상실은 지금의 지리학적 사고방식으로는 이해할수 없는 중요성을 가진다. 고대에 동서변한을 관장하던 서역의 마한이 동변한을 관리하고 보호할 능력을 상실한 이유가 바로 이 돈황의 상실때문이었기 때문이다.


동변한의 군사력을 동원할 수 없게된 마한이 서변한을 제대로 관리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고, 결국 로마제국에 의해 지중해 문명권이 기독교의 세력아래 들어가는 과정을 강건너 불구경하듯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로마제국을 멸망시킨 흉노의 서방정벌은 서변한을 되찾으려는 동이족의 주권행사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흉노가 서방을 정벌한 시기는 동변한에서 동이의 종주권을 인정하므로써 세속적 지배권을 획득한 위(魏)가 삼국을 통일하고, 흉노족의 중국진출이 활발해진 5호 16국 시대와 일치하는데 이는 이런 추측을 뒷받침하는 것이기도 하다.


또 이 지역을 상실한 시기가 고조선의 멸망시기로 알려진 전한(前漢)의 시기와 일치한다는 사실도 이 지역이 동이족의 중심신전이 있던 곳이라는 유력한 증거가 된다. 한무제의 서역정벌도 실제로는 동이의 신전에 대한 정벌이었던 것이다.


아무튼 이 시기에 서변한이 폐지되면서 그리이스의 신들은 서역으로 철수하여 동변한의 반란진압에 주력하게되고, 동변한은 주(周)나라의 수도였던 낙양의 신전을 포기하고 발해만 일대까지 후퇴하므로서 황하유역에 대한 직접적인 지배권을 상실하였던 것이다.
동이족에게 있어서 이 시기는 고조선의 멸망과 함께 부여를 비롯한 부계왕조의 성립이라는 대변혁을 초래한 시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는 실질적으로는 거인족의 세계지배가 끝나고, 풍류가 동이족의 민족종교로 변모하게되는 질적변화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렇다고하여 이 시기에 진한과 마한의 강역인 만몽지역과 서역의 영토에 큰 변화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 지역은 서변한의 로마인들에게는 정벌이 불가능한 지역이었고, 동변한의 중국인들에게는 농경에 부적합한 황무지로서 관심밖의 지역이었던 것이다. 이는 조선초에 세종대왕이 만주지역에 4군6진을 개척하고도 수지가 맞지 않는다하여 되돌려준 것이나 비슷한 상황이다.


따라서 이 반란의 결과, 동이족은 중국대륙에 대한 상징적인 지배권을 보유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한편 중국의 왕실은 동이족의 정벌과 내정개입을 두려워하여 만리장성을 쌓아 자주독립을 보장받으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동이족은 5호 16국의 대혼란기가 보여 주듯이 중국의 왕실이 동이의 종주권을 인정하지 않을 때마다 가차없는 정벌을 행하였고, 당나라에 의한 고구려의 멸망까지 이 투쟁은 계속되었다. 결국 동이족의 세계지배가 완전히 끝난 시기는 고구려가 멸망한 시기와 일치하는 것이다.


아무튼 이는 훨씬 뒤의 일이고, 이 시기에는 조선의 해체와 함께 부여(夫餘)가 건국되는데, <단군세기>는 이 과정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계해(B. C 238년) 단제께서는 어질고 순하기만 하고 결단력이 없었으니, 명령을 내려도 시행되지 않는 일이 많았고, 여러 장수들은 용맹만을 믿고 쉽사리 난리를 피웠기 때문에 나라의 살림은 시행되지 않고 백성의 사기는 날로 떨어졌다. 3월, 하늘에 제사하던 날 저녁에 마침내 오가(五加)들과 의논하여 가로대 "옛 우리 선조 열성(列聖)들께서 나라를 여시고 대통을 이어가실 때에는 그 덕이 넓고 멀리까지 미쳤으며, 오랜 세월동안 잘 다스려졌거늘 이제 왕도는 쇠미하고 여러 왕들이 힘을 다투고 있도다. 짐은 덕없고 겁많아 능히 다스리지 못하니, 어진이를 불러 무마시킬 방책도 없고 백성들도 흩어지니, 생각건대 그대들 오가는 어질고 좋은 사람을 찾아 추대하도록 하라"고 하시고, 크게 옥문을 열어 사형수 이하의 모든 죄수들을 돌려보내도록 하였다. 이튿날 마침내 왕위를 버리고 입산수도하시어 신선이 되시니, 이에 오가가 나라일을 함께 다스리기를 6년이나 계속하였다.

 

이보다 앞서 종실(宗室)의 대해모수(大解慕漱)는 몰래 수유(須臾)와 약속하고, 옛 서울 백악산을 습격하여 점령하고는 천왕랑(天王郞)이라 칭했다. 수유후(須臾候) 기비를 권하여 번조선 왕으로 삼고, 나아가 상하의 운장을 지키게 하였다. 대저 북부여의 일어남이 이에서 시작되니, 고구려는 곧 해모수의 태어난 고향이기 때문에 역시 고구려라 칭하는 바이다.

 

여기서 우리는 부여가 조선의 옛 서울을 차지하고 정통을 이어받았다고 기록하고 있음을 볼수 있다. 그런데 이 [옛 서울]이 진시황의 지배하에 들어간 진한의 서울이 아니라, 색불루 이전의 단군이 다스리던 시대의 서울임을 알수 있다. 아무튼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이 다음에 이어지는 <북부여기>의 내용이다.

 

기사 8년(B. C 232년) 단제께서 무리를 이끌고 가서 옛 도읍의 오가들을 회유하시니, 마침내 공화의 정치를 철폐하게 되었다. 이에 만백성들이 추대하여 단군이 되었다. 겨울 10월, 공양태모(公養胎母)의 법을 세워 사람을 가르침에는 반드시 태교부터 실시하도록 하였다.

 

이 기록은 진시황에 의해 진한이 무너지기(B. C 221) 이전에 이미 신전이 옮겨갔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박용숙 선생이 <후한서 . 동이전>의 "진시황이 방사 서복을 보내어 동남동녀 수천인을 시켜 바다로 들어가 봉래신선을 구하게 했으나 얻지 못하므로, 서복이 두려워하여 돌아오지 못하였다"는 기록을 "가람의 샤만신(天君)이 진시황의 중국지배권을 인준하지 않았다는 것을 뜻한다"고 풀이한 것은 올바른 해석인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의 공양태모의 법이 바로 풍류의 씨뿌리기를 뜻하는 것도 명백하다. 따라서 한고조가 기원전 200년경에 흉노를 토벌하려 하다가 오히려 백등산(白登山; 밝달산?)에서 포위되기를 7일이 되어, 결국 자신의 딸을 흉노의 선우에게 시집보내는 조건으로 화해를 청했다는 것이, 실제로는 한고조 자신이 흉노(부여)의 부마국이 되어 공양태모의 제도를 받아들이기로 약속하였던 것을 거꾸로 썼다는 사실도 알수 있다.
나아가 <후한서 . 동이전>에 "한나라 조정이 동이(부여)의 임금이 죽으면 미리 옥갑(玉匣)을 만들어 두었다가 보내준다"고 한 기록이나 <삼국지 . 동이전>에 "한나라 때에 조복(朝服)과 두건(頭巾)을 동이(고구려)에 바쳤다"는 기록 등이 모두 올바른 기록임도 증명되는 것이다.


그러나 동이의 지배권은 흔들리지 않았을지라도, 이 시기에 동이족의 체계가 부계왕권으로 돌아선 것은 거의 확실하다고 생각된다. 조선(朝鮮)이 달(月)과 물고기(魚)로 상징되는 바와 같이 신녀들이 주도권을 잡고 있었기에 [삼신할머니]란 이름이 지금까지 전해온다고 생각하면, 부여(夫餘)의 국호가 [지아비(夫)]로 상징되는 것은 이런 사정을 나타낸다고 보여진다. 따라서 박병식 선생이 한국상고사에서 주장한 다음 내용은 다른 관점에서 해석해야 할 것이다.

 

고대의 부여에 대해서 진(秦)나라의 복생(伏生)은 <상서대전(尙書大傳) 속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해동제이 부여지속(海東諸夷 夫餘之屬)". 海東諸夷란 고대 한민족을 일컫는 것이기 때문에 그는 "한민족에게는 여러 족명(族名)이 있는데, 이것들은 원류를 찾자면 모두가 부여에 속하는 것이다"라는 것이다. ...... <상서대전>에 "해동제이 부여지속"이라고 나와있는 것은 조선(朝鮮)이라는 국호가 부여(夫餘)보다 늦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것은 <환단고기>에 나타나는 최초의 국호 환국(桓國)이 바로 부여라는 것이 된다. 즉 환(桓)라(國) ⇒ 하라 = 夫餘라는 것이 명백해진다.

 

이는 그가 같은 책의 64쪽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朝鮮, 高句麗, 百濟등 우리 고대사의 거의 모든 국호를 [하라]로 보았던 것과 일관성이 없는 주장이다. 朝鮮이 [아사하라]라면 夫餘의 [하라]보다 앞서는 것이 오히려 정상이다. [아사]라는 말이 [아침 . 먼저]의 뜻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 인용문의 "해동제이 부여지속"은 [동이의 여러 종족들이 부여에 귀속되었다"로 풀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일단 부계왕권이 성립된 후에는 동이족 자체 내에서도 치열한 투쟁이 있었을 것이며, 부여로부터 고구려에 이르는 기간동안 동부여가 서고, 주몽이 부여에서 탈출하고, 온조가 백제를 세우는 등 많은 사건이 일어났던 것이 그런 사정을 암시한다.


그 권력다툼은 삼국의 정립으로 모종의 체계를 갖추므로써 종식된다. 따라서 우리는 삼국의 정립을 투쟁의 결과 얻어진 세력균형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삼한의 체계가 부활한 것으로 이해해야 옳다는 새로운 관점을 얻게된다.


한편 이 기간동안에 중국의 변한들은 동이의 처절한 보복을 받게 되는데, 진시황이 동이의 신전을 파괴하고 뒤를이어 일어난 한(漢)의 무제가 서역을 침범한 대가로, 중국 전역이 5호 16국의 대전란을 겪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동이족의 내부에서 일어난 혼란이 변한으로 파급된 것으로 보아야 할것이니, 세력다툼에서 밀려난 지부신전 소속의 군사(선비)들이 중국에 들어가서 여러 왕조를 건설하여 주도권 쟁탈을 벌인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 혼란은 동이의 체계가 완전히 붕괴되는 고구려의 멸망과, 당에 의한 중국의 통일을 고비로하여 진정되었고, 이때부터 동이족의 풍류는 세계를 지도하는 종교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8. 삼국과 몽고

삼국의 정립과정은 본래의 삼한체계가 완전히 붕괴하고, 새로운 삼한체계가 형성된 과정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새로 형성된 삼한체계는 동서의 변한을 모두 상실한 축소 재형성이라는 점에서, 그 이후 계속된 한겨레의 쇠퇴과정의 시발점이기도 하다.


마한, 즉 서융의 주력으로 볼수 있는 고구려는 뛰어난 군사력으로 부여를 정복하므로써, 옛 진한과 마한 강역의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이는 당시 혼란한 중국을 제외한 아시아 전역을 지배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따라서 부여나 고구려를 동호나 흉노와 분리시켜 만주벌판 일대에 표시한 고대지도는 모두 왜곡된 것이다. 이런 사정은 흉노나 동호가 부여나 고구려와 투쟁한 기록이 중국이나 우리의 고대사에 한 번도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증명하는 바이기도 하다.


이 추정을 지원하는 또하나의 근거가 되는 것이 앞 단락에서 인용된 <단군세기>의 "대저 북부여의 일어남이 이에서 시작되니, 고구려는 곧 해모수의 태어난 고향이기 때문에 역시 고구려라 칭하는 바이다."라는 기록이다. [고구려(高句麗)]는 [고구이(古九夷)], [고가리(高 族)]의 변형으로 생각할 수 있는 이름이다.


해모수가 태어난 곳은 신전(古 . 高)이며, 이는 고대의 모든 왕들의 탄생처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인용문은 [고구려]라는 이름이 [신전]에서 유래하였다는 뜻으로 해석되는 것이다. 이 사실을 알면 고구려가 수(隋)나 당(唐)과 싸우던 지명에 대해서도 재고해야 할 여지가 많다는 점도 알수 있다.


한편 진한의 주민들은 진시황에게 쫒겨나 동쪽 바다 끝에 새로운 진한을 건설하였으나, 그들의 권위가 마한(고구려)에 의해 받아들여지지는 않은 것 같다. 대신 그들은 동이족이 제후를 임명할 때 쓰던 금관을 비롯한 각종 유물을 옮겨와 경주 부근의 여러 고분에 숨겨두었다고 보여진다.


그들이 당나라의 힘을 빌어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켰으나, 결국 그 땅들을 모두 당나라에 빼앗기고 두 번 다시 그 유물들을 사용할 기회를 얻지는 못했을 것이다.


변한의 이신(異神)들은 동쪽으로 계속 밀려나, 산동반도와 한반도 서해안 일대의 해안선을 따라 지중해에서의 도시국가와 같은 해상세력을 재건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그것이 백제였던 것으로 보인다. 백제의 해상세력은 일본에 속국을 건설하여 문화를 전파한 행적과, 장보고가 백제의 옛땅에 아시아의 제해권을 장악한 대 해상왕국을 세울수 있었던 사실을 통해 그 수준을 짐작할 수 있다.


고대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백제를 마한의 후신으로 보는 경향이 지배적인데, 이는 마한이 한반도의 서쪽에 있었다는 오해에서 도출해낸 결론일 뿐이고, 삼한의 제도하에서 영토권을 행사하던 마한은 고구려였다고 보아야 한다.


삼국시대 이전의 한반도는 고고학적인 발굴성과가 말해주듯이, 진한의 변방으로서 정치적으로는 거의 관심을 끌지못하던 곳이었을 것이며, 소규모 가람들이 띄엄띄엄 발전하고 있는 수준이었을 것이다. 여기에 춘추전국시대에 밀려난 변한의 백제인들이 서해안에 정착하여 후일 백제의 원주민이 되고, 진한의 유민들은 그때까지 방치되어 있던 동해안에 정착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백제를 마한의 후신으로 보는 입장이 전혀 틀린 것이라고는 할수 없으니, 백제가 국가형태를 갖출 때 그 주도세력이 고구려(마한)에서 갈라져나온 온조왕의 세력이었기 때문이다. 온조왕이 동이족의 전통을 따라 봉토입국의 절차를 거쳤다고 보더라도, 그 출신지가 고구려라면 당시의 영토권은 고구려가 행사하였다고 보아야 한다.


이래저래 백제는 마한의 정통을 이었다고는보기 어렵다. 어쩌면 지금까지의 모든 학설을 부정하는 추측이지만, 백제가 바로 서변한이 멸망할 때 해상으로 탈출하여 신농씨의 옛 고향을 찾아온 사람들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추측은 보다 많은 자료가 있어야 논의할 수 있는 일이고, 지금단계에서 속단할 수는 없는 사항이다.


삼국이 정립된 이후의 역사도 본격적인 연구가 필요한 분야이다. 백제와 신라가 지금의 몽고 지역 주변에 있었다는 여러 가지 증거들이 발견된고 있는 상황에서, 삼국이 만주와 한반도에 있었다는 역사를 전적으로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륙에 나타나는 삼국의 흔적들을 설명할 길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삼국의 초기와 후기의 역사적 상황 차이가 삼국의 판도에 변화를 가져온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무슨말이냐 하면, 한반도는 원래 삼국의 왕조가 있던 지역이 아니라 대륙에 있던 동이의 중심신전인 삼한조선이 옮겨온 지역일 수 있다는 뜻이다. 삼한조선이 대륙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었던 데에는 다른 어떤 이유보다도 삼한조선의 직할영지였던 고구려 왕조의 반란이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삼국시대 초기까지만 해도 한겨레는 풍류로 다스려지던 동이족 천신들의 나라였을 것이다. 이때까지는 고구려와 백제 및 신라의 삼국은 통일국가와 다름없는 관계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마한인 고구려가 실권을 장악하고 있기는 했지만, 명목상으로는 신라가 진한의 지위에 있었고 백제가 변한의 역할을 했다는 뜻이다.


그러던 것이 고구려가 전제 세습왕권을 확립하면서 풍류의 혈통을 통한 지배가 불가능해졌고, 왕실의 지도이념으로 불교까지 받아들이자 종교적인 권위까지도 상실하므로써 삼한조선의 신전은 설자리를 잃어버린 것이다. 대륙의 번한들에서 일어났던 제후들의 반란이 결국 삼한조선의 직할영지에서까지 일어났다고 하겠다.


고구려는 일찍이 고조선의 유민들이 난을 피해 이주해 정착해 있던 대륙의 끝모퉁이 한반도에 삼한조선의 신관인 동이인들의 터전을 마련해 주므로써, 한반도의 삼국시대를 열었다고 볼 수 있다. 삼국 초기에는 삼국이 모두 고구려의 수도가 있던 중앙아시아에 있었으나, 이 때에 신라와 백제가 한반도로 들어왔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러다가 신라와 백제의 동이인들이 그들 특유의 뛰어난 능력을 바탕으로 강력한 고대국가로 성장하자 비로소 삼국이 정립하였고, 백제는 옛 변한땅인 중국대륙에 식민지까지 경영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신라는 한반도에서도 구석진 영남지방에 유폐되다시피 나라를 세웠고, 고구려와 백제의 성세(盛勢)에 밀려 대륙진출이 막혀 있었다. 그러나 지역적인 고립은 내부결속을 강화시켰고, 결집된 국력은 삼국통일의 원동력이 되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므로써 비록 일부이기는 하지만 고구려와 백제의 영토를 차지할 수 있었고, 그 결과 고구려의 옛땅인 대황(고비사막)까지 신라의 영토로 편입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다음으로 살펴볼 대상이 몽고이다. 몽고는 지금은 한겨레와 아무 관계가 없는 나라처럼 되어버렸으나, 고구려 시대까지는 고구려의 속국이었거나 고구려 자체였을 것이다. 이는 그 이름이 신전을 나타내는 한자로 되어있는 점만 보더라도 알수 있다.


[몽고(蒙古)]의 [古]가 태양신의 신전임은 이미 밝힌 바이고, [蒙]은 두그루 나무(艸)를 심어 위를 덮은 신전(몽)을 나타낸다. <주역>에서는 [몽괘(蒙卦)]가 '간상(艮上)감하(坎下)'로 나타나는데, 이는 산 아래에 물이 있는 모습으로서, 배산임수로 지은 동이신전의 입지조건이나 산모양 아래에 우물이 있던 피라밋의 구조 모두에 적용된다. 특히 [蒙]의 뜻인 [어둡다]는 지하신전에서 햇빛을 보지않고 수도하던 풍습을 나타내는 것이다. 따라서 [몽고]는 의심의 여지없이 동이신전인 것이다.


그러나 고구려가 멸망한 후, 신라가 발해와도 교류를 끊고 당나라 일변도의 외교를 펼치면서 고구려의 유민들은 한겨레와의 동질성을 상실하게 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고려는 신라의 정통을 이어받기에 급급하였고, 당의 뒤를 이은 송(宋)과의 우호만을 강조하다가 동족인 요(遼)와 원(元)의 혹독한 보복을 받았었다.


우리 역사서는 몽고와 거란, 여진 등에게 침략을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오랑캐로 매도하고 있으나, 이는 통일신라 이후로 자기 뿌리를 팔아서 권세를 누린 지배계층의 논리일 뿐이요, 그 모두가 한겨레의 지류이다. [여진(女眞)]이 진한(辰韓)의 별칭이었다는 사실은 박병식 선생이 주장하는 바와 같고, [거란(契丹)]은 [글안]으로서, [글]은 [크다]는 뜻이며 [안(丹)]은 [태양]이란 뜻이니, [큰 태양]을 나타내는 [대한(大桓)]의 다른 이름이 [거란]인 것이다.


그런데 고구려가 멸망하기 직전에 고구려의 신전과 승려들이 왕사인 보덕화상을 따라 완산주 고대산, 지금의 전주 모악산으로 모두 옮겨와 버린데다가, 발해가 멸망한 후 발해의 유민들이 고려로 귀화하여, 고조선의 옛땅에 남은 조선족들은 풍류의 진리를 배우지 못하고 침체를 거듭하였다.
그러다가 만주지역에 청(淸)나라가 서서 중국을 통일하였는데, 만주족은 자신들이 지배한 한족의 문화에 동화되므로서 고구려의 옛땅까지 한족의 영토로 넘겨주는 결과를 낳았다. 이렇게 생각하면 지금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몽고족과의 일체감을 시급히 회복하는 것은, 정부와 민간차원에서 공동으로 추진해야할 민족적 숙제라고 할 것이다.

 

9. 밀교와 무당

풍류맥을 인종에서 찾으면 몽고족에게서 찾아지고, 국가에서 찾으면 한국 . 몽고 . 일본 . 티벳이 그 인종들로 이루어진 나라들이다.
그런데 풍류맥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이 두 요소 이외에도 반드시 한 요소를 필요로 하는데, 그것이 바로 종교적 요소이다. 종교(宗敎)라는 이름 자체가 풍류의 정식명칭이니, 이 요소를 빼고서 풍류맥을 거론할 수 없음은 당연한 일이다.


종교에 전해지는 풍류맥은 무속(巫俗)과 밀교(密敎)이다. 먼저 [무속(巫俗)]은 정식 명칭이 [종교]이지만, 이 이름을 되찾기 전에는 [무속]이라는 학술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혼란을 일으키지 않으므로 이렇게 쓰는 것이다. 아무튼 이 무속에 대해서는 이미 풍류와의 연관성을 충분히 해석하였으므로, 무속이 풍류의 정통맥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기에는 무리가 없을 것이다.


다음으로 [밀교(密敎)]는 [密]이 [나무가 무성한 산 속에 모셔진 신전]의 뜻으로서, 동이족의 신전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이 신전은 단순한 예배당이 아니라, 제정일치사회의 신전이자 왕궁인 사원(寺院)임을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티벳 밀교의 사원들을 통해 알수 있다. 더구나 밀교의 발원지는 이책에서 풍류의 발원지로 추정한 파미르 고원 주변의 티벳고원이다. 티벳고원은 그 발음을 볼 때, 태백산일 가능성이 크다.
여기서 말하는 태백산은 말할것도 없이 환웅이 신시를 열었던 태백산 신단수이다. <삼성기>에는 "환웅이 자정녀정(子井女井)을 천평(天坪)에 팠다"고 하는 기록이 있는데, 이 [천평]은 [하늘위의 벌판]이라는 뜻도 되므로 고원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특히 티벳고원의 지도를 보면 크고작은 호수가 수없이 널려있어 [자정여정]의 부락을 설치하기에 안성맞춤이다. 같은 기록에 흑수백산(黑水白山)이 나오는데, 이는 에베레스트 산과 투루판 분지로 비정할 수 있다.


투루판 분지는 해발 마이너스 154미터의 특수한 지형으로서, 주변이 산맥으로 둘러싸인 지형을 생각할 때 여기에 호수가 생기지 않고 분지로 되어있는 것이 이해되지 않는 곳이기도 하다. 글쓴이의 생각으로는 이곳이 동이족이 신성시한 우물신전의 원형이 아닌가 한다.


밀교를 불교의 일파로 보는 것이 오늘날 종교학계의 일반적인 경향이지만, 이는 주객이 전도된 견해로 보아야 할 것이다. 안창범 선생은 불교의 창시자인 석가모니가 동이족이었을 뿐만아니라, 석가가 수행한 설산(雪山)이 백두산이며, 석가가 초전법륜(初轉法輪)한 녹야원(鹿野園)이 제주도라는 사실을 불경의 기록을 분석하므로써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대승불교의 창시자로 알려진 용수(龍樹)보살이 바다 속의 궁전에 들어가 대승경전을 얻어 남천축에 돌아가서 불교를 크게 유포시켰다고 하는 <불교대장경 . 용수보살전>의 기록을 근거로, 대승경전이라는 것이 신선도(풍류)의 경전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불교가 풍류의 한 갈래라는 주장은 사실로 보여지며, 설혹 원시불교가 인도의 자생적 종교라고 하더라도 대승불교와 밀교가 풍류의 일파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특히 밀교는 여러 가지 점에서 풍류의 여러 요소를 골고루 구비하고 있다.


첫째 밀교의 최고부처인 법신불인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이 바로 대일여래(大日如來)로서, 태양신을 뜻한다. 대일(大日)은 [큰 해]로서 [대환(大桓)]과 같다.


[여래(如來)]는 부처의 별호 중 하나인데, [옴과 같다]는 뜻이 된다. 이를 중국어로 읽고 해석하면 아무 뜻이 없으나, 우리말로 읽고 새기면 인도어의 뜻이 그대로 살아난다. [來]는 [오다]인데, [오다]의 명사형인 [옴]은 불교 최고의 주문(呪文)인 육자진언(六字眞言), 즉 [옴마니반메훔]의 첫머리에 나오는 [옴]과 일치한다. [옴]은 창조의 소리를 본뜬 것이라고 하니, [여래]는 [창조의 소리와 같다]는 뜻이되어 곧 [창조주]의 다른 칭호가 된다. 결국 [대일여래]는 [창조주인 큰 햇님]으로 풀린다.


더욱이 [오다]의 형용사형인 [올]은 고대에는 [알]과 서로 통하는 소리였다. [알]은 우리말에서 [알다(知)], [알맹이(核)], [알(卵)] 등에 두루 쓰인다. [앎]은 불교교리의 핵심이다. 또 [알(卵)]은 태양신의 상징인 동시에 동자들이 타고다니던 가마이기도 하였다. 또 [오다]의 과거형인 [온]은 우리말에서 전체를 뜻하기도 하고, 신기하게도 영어의 [올(all)]과도 연결된다.


[來]의 자원(字源)은 [보리(麥)]의 모양을 나타낸 글자라고 한다. 옛날 사람들은 보리가 하늘로부터 왔다고 믿었기 때문에 [來]를 [온다]는 뜻으로 쓰고, 보리는 [麥(맥)]자를 따로 만들어 표시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보리]는 불교의 최고진리인 [삼바디(sambodi)]의 음역이다. [삼바디]와 함께 최고의 수행단계를 나타내는 말로 [삼마디(samadi)]가 있는데, 신기하게도 이 두 말은 우리말의 [삼 맞이]와 [삼 받이]의 구개음화되지 않은 형태와 일치한다.


물론 이때의 [삼]은 [삼신]이나 [삶]으로 받아들여도 아무런 의미상의 차이가 일어나지 않는다. 뿐만아니라 [보리]는 그 색깔이 황금색으로서 중(中)의 색깔이요, 형태도 음양이 맞붙은 태극형상이면서, 여성의 성기인 [보지]와 형태와 소리가 유사하다. 내친김에 한걸음 더 나가면, [來]의 글자형태가 태양신의 상징부호인 열 십(十)에 세사람이 매달린 모습인 것도 [삼황]과 그대로 연결된다. 결국 [여래]는 부처가 이 모든 것들과 같다는 뜻으로서 풍류의 분파임을 스스로 내세운 것이된다.


둘째 밀교에서 가장 중시하는 수행법은 탄트라(Tantra)이다. [탄트라]는 씨줄, 강요(綱要), 주법적(呪法的)인 신비한 경전을 뜻하는 말이라고 한다. 그 수행법은 성력(性力; sakti), 특히 여성의 성에너지 숭배가 중심을 이루고, 남녀의 교합이 교리와 실천의 중요한 부분을 이룬다고 한다.


이런 사실들은 지황의 신전인 우물(용궁)에서 행해졌던 씨받이와 쉽게 연관되는 사상들이고, 우상(남녀화합상)의 숭배가 밀교의 뿌리임을 알려준다. 이렇게 보면 [탄트라]는 [탄(檀) 틀]이요 [땅 틀]의 뜻으로 이해되니, 결국 [탄트라]는 [씨받이의 규범]을 뜻하게 된다.
원(元) 황실이 밀교(라마교)를 국교로 받아들였던 이유도 여기서 이해되는 것이니, 중국에서 변형된 유교와 불교에 물들지 않은 몽고족은 그들의 뿌리인 풍류의 전통을 잊지 않았다는 뜻이 된다.


셋째 밀교의 [밀(密)]은 길게 발음하면 [미르]가 된다. [미르]는 [용(龍)]의 고대어임을 이미 밝혔고, [미륵(彌勒)]의 중국식 발음과도 같음을 이미 밝혔다. 또 [진국(辰國)]이 [미르나라]가 되어 고조선과 연결되면서, 단군이 바로 미륵이 된다는 사실도 설명한 내용이다. 따라서 [밀교]는 분명히 풍류의 다른 이름이다.


넷째 티벳지역에 밀교가 전파되기 이전에 있었던 토착종교는 [본(BON)교]라고 한다. 여기에 불교가 들어가서 본교와 투쟁하는 과정을 통해 서로 혼융되어 탄트라적인 밀교가 정착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티벳 고유의 종교인 이 [본교]는 샤만교의 한 형태라고 한다. 여기서 우리는 [본교]가 바로 풍류였음을 간단히 유추 해낼수 있다.


[본]은 [본(本)]과 같은 소리로서 [뿌리]의 뜻으로 이해된다. 또 우리말의 [본]은 [모범 . 틀]의 뜻이며, [보다(see)]의 과거형(seen)이며 여기서 소개된 영어는 우리말 [씨]와 한자 [示 . 視]와 음이 같다. 또 [본]은 영어의 [born(낳다)], [bon(뼈)]와도 소리가 같다. 그리고 이 뜻들이 풍류를 매개로하여 묶어질 수 있는 말들임은 충분히 알수 있을 것이니 더 설명하지 않는다.


결국 [밀교]는 풍류의 원줄기로 생각되며, 여기에 그 지류인 불교가 수입되었다하여 그 원형이 변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그 증거가 밀교에서 [탄트라]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나 우리나라의 부녀자들이 절에 가서 아들낳기를 축원하는 관습에서도 발견되는 것이다.

 

10. 미륵신앙

동이족의 세계정부가 무너져 그 흔적조차 찾기 힘든 지금, 동이의 전통은 종교에서 찾아지는 것이 옳다. 특히 동이의 세계지배 자체가 종교에서 유래하여 종교를 중심으로 행해졌던만큼, 그 전통의 핵심은 뭐니뭐니 해도 종교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동이의 종교인 풍류대도의 흔적을 가장 많이 간직한 것은 아무래도 미륵신앙이라고 보아야 할 것 같다. 흔히 미륵신앙을 불교의 한 형태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 뿌리를 추적해 보면 풍류와 더 밀접한 관련이 있고, 신앙의 내용도 불교와는 많은 차이가 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미륵신앙은 불교신앙이 아니다. 미륵사상이 불교의 당래불(當來佛) 사상에 의하여 생겨난 불교사상의 한 갈래라는 생각은 뿌리부터가 잘못된 것이다.


미륵이라는 명칭의 어원은 산스크리트어의 마이트레야(Maitreya)인데, 한자로 [彌勒(미륵)]이라고 음역하였고, 그 뜻은 [자비한 어머니]라고 한다. 그러나 다음의 인용문은 이런 해석에 문제가 있음을 보여준다.

 

먼저 풀이한 바와 같이 미륵은 자씨, 곧 자비스러운 어머니라는 뜻이다. 미륵은 특히 자비공덕을 원만히 성취하므로 미륵이라고 이름지었던 것이다. <일체지광명 선인자심인연 불식육경(一切智光明 仙人慈心因緣 不食肉經>의 이야기이다. "바바리 바라문의 아들 미륵이라는 분은 몸이 금빛이요, 32 대인상(三十二 大人相)과 80종(八十種)의 좋은 모습을 갖추어 거룩한 거동이 부처님과 비슷하였다. 바라문의 장자 등은 이것을 보고 부처님께 여쭈었다. '미륵은 어떤 인연으로 부처님과 비슷한 대인상을 갖추게 되었습니까?' ......"

 

<미륵상생경>이나 <미륵하생경>, <미륵성불경> 등의 어디에도 [미륵보살]과 여성, 즉 [어머니]를 연결시킬 근거는 발견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에 대한 해명도 글쓴이는 찾아내지 못한 실정이다. 결국 미륵은 불교 고유의 관념이 아니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미륵신앙의 뿌리는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그 해답이 바로 풍류이다.


미륵의 어원인 [마이트레야]는 기원전 1,380년 경에 터키의 앙카라에서 동쪽으로 100마일 되는[보가즈 교이]라는 곳에서 발견된 문서에 [미도라(Mithra)]라는 이름이 이미 있는 것만 보더라도, 불교 이전부터 있었던 신앙대상으로 보아야 한다.

 

수소의 제의(祭儀)와 관련하여 가장 널리 알려진 [미도라스]는 그 이름 자체가 [수소를 지키는 위대한 신], [힘센 수소], [그대는 우주의 지배자 . 강력한 수소 . 하늘과 땅을 다스리는 미도라 = 봐루나]라고 이해되었다. ...... 페르샤의 성전(聖典) <아베스타>나 인도의 <베다>경의 찬가에는 미도라스가 황금의 전차를 타는 천공신(天空神)의 심볼이며, 비를 내리는 풍요의 신(Mithra)이다. 또 [Mithra]는 어원적으로 [친구]나 [계약]을 뜻하는 말이고, 친구와의 계약이 고대의 종교적 결사(結社)를 의미한다는 사실에 유의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미도라스]는 수소를 지키는 신앙의 특수집단을 가리킨다고 말할수 있다.


메소포타미아 인들은 [미도라스]를 [샤마슈(samas)]로 번역하였으며, 그 뜻은 바빌로니아 인들과 마찬가지로 태양신으로 인식되었다. [미도라]가 우리의 고대 말 [미리(龍)]와 닮았고, [샤마슈]가 [사문(沙門)], [샤먼], [삼한(三韓)]과 닮았다는 점에도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미도라]나 [샤마슈]가 모두 [삼(三)]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이미 앞에서 본대로 소(牛)는 삼각형(천부인)이며, 환웅은 태양신이다. 또 태양신인 그가 거느린 풍사(風師), 우사(雨師), 운사(雲師)가 삼신(三神)이므로, 환웅과 천공신 [미도라스]가 같은 의미가 된다.

이 인용문은 <천부경>에서 도출되는 삼각형과 환웅이 가지고 온 천부인을, 숫소의 머리모양이 만드는 삼각형과 관련시키므로써 고대종교의 핵심을 파헤친 논저(論著)의 일부이다. 우리는 여기서 같은 사실을 대상으로 하되, 관점을 바꾸어 [미도라와 미륵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보자.


이렇게 주제를 설정했을 때, 우선 [미도라]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샤마슈]로 번역된 태양신이었다는 사실을 중시하게 되고, 다시 천공신과 관련되므로써 환웅(한울님)과 연결됨을 긍정할 수 있다.


즉 [미도라]는 [태양과 하늘을 동시에 의미하는] 환웅과 뜻이 같다. 다음으로 [미도라스], 즉 [미도라]를 신앙하는 종교적 결사가 소를 지키는 종교결사였다는 사실을 통해, [소(牛) 터]로도 해석되는 [솟터]와 결부시킬 수 있다. 셋째로는 [미도라]가 풍요와 비(雨)를 관장하는 신이었다는 사실에서 우물(井), 곧 여신전의 주인인 용왕(무당)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이런 사실들에 [미륵]의 어원이 [마이트레야]라는 사실과, [미륵]의 중국식 발음이 [미르]라는 사실을 추가하면 [미륵불]의 정체는 저절로 드러난다. 즉 [미륵불]은 한겨레의 신앙대상인 [삼황]이요, 그 중에서도 지황에 해당하는 [환웅]을 의미하는 이름인 것이다.


이는 [미륵]이 [자비한 어머니]로 불리는 것이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되, 그것이 불교적 관념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는 증거들이다. 그리고 이 [자비한 어머니]라는 이름이 소울음 소리인 [엄매] 또는 [움머]가 [엄마]와 비슷한 소리라는 점에서도 [솟터]와 관계된다.


따라서 미륵신앙은 풍류의 전통신앙으로서 불교와는 비할 수 없이 오랜 전통을 지닌 종교이며, 불교에서 말세론(末世論)을 이용하여 분화한 신앙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신라나 백제의 불교가 미륵불 신앙에 보다 큰 비중을 두었던 이유도 저절로 밝혀진다.
그리고 미륵신앙의 승려가 신채호 선생이 <조선상고사>에서 밝혀낸 [승군(僧軍)]임을 알수 있으며, 우리나라의 불교가 전통적으로 [호국불교(護國佛敎)]로 일컬어지는 이유도 알수 있게 된다. 선생의 승군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일찌기 고려 최영(崔英)전에 의거하건대, 최영이 말하기를 '당나라가 30만 군사로 고구려를 침범하여, 고구려는 승군(僧軍) 3만을 내어 이를 대파하였다'고 했으나, <삼국사기> 50권 중에 이 사실이 보이지 아니한다. 그러면 승군이란 무엇인가 하면, 서긍(徐兢)의 <고려도경(高麗圖經)>에 '재가(在家)한 화상(和尙; 중)은 가사도 입지 아니하고 계율도 행하지 않으며, 조백( 帛)으로 허리를 동이고 맨발로 걷고, 아내를 가지고 자식을 기르며, 물건의 운반 . 도로의 소제 . 도랑의 개척 . 성실(城室)의 수축등 공사(公事)에 복역하며, 국경에 적이 침입하면 스스로 단결하여 싸움에 나서는데, 중간에 글안(契丹)도 이들에게 패하니, 그 실은 죄를 지어 복역한 사람들로서, 수염과 머리를 깎았으므로 이인(夷人)이 그들을 화상이라 한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에서 승군의 면목을 대강 알 것이다.


그러나 그 내력이 어디서 비롯하였느냐 하는 의문이 없지 않다. <통전(通典)> . <신당서(新唐書)> 등 이름있는 책에 의하면, 조의선인( 衣先人) 혹은 백의선인(帛衣先人)이라는 관명(官名)이 있었고, 고구려사에는 명림답부(明臨答夫; 고구려 재상)를 연나조의( 那 衣)라 하였고, 후주서(後周書)에서는 조의선인( 衣仙人)을 예속선인( 屬仙人)이라고 하였으니, 선인(先人) 또는 선인(仙人)은 다 국어 [선인]을 한자로 음역한 것이고, 조의( 衣) 혹 백의(帛衣)란 <고려도경>에 이른바 '조백( 帛)으로 허리를 동이므로 이름함이다. 선인(仙人)은 신라 고사(故事)의 국선(國仙)과 같은 종교적 무사단(武士團)의 단장이요, 승군(僧軍)은 국선 아래 딸ㄹ린 단병(團兵)이요, 승군이 재가한 화상이라 함은 후세 사람이 붙인 별명이다. (이하생략)

 

이 미륵신앙은 고구려가 멸망하기 직전에 보덕화상(普德和尙)이 신통력으로 방장(方丈)을 날려 남쪽 완산주(지금의 전주) 고대산(孤大山; 지금의 모악산)으로 옮긴 후 그 본산을 모악산으로 흥성하였다고 보여진다.


따라서 <삼국유사>에 기록된 진표율사(眞表律師)의 금산사 미륵전(金山寺 彌勒殿) 건립은 이 미륵신앙, 다시말해 풍류의 부흥을 도모한 것이었다. 그 증거가 되는 것이 [점찰법회(占察法會)]이니, 점찰법회가 <천부경>의 진리를 익히는 것이라는 사실은 앞에서 소개한 바와 같다.
또한 <삼국유사>의 [진표전간(眞表傳簡) 조]에서 "그(진표)의 뜻이 자씨(慈氏)에 있었으므로 감히 중지하지 못하고 이어 영산사(靈山寺 - 일명 변산 또는 능가산이라 한다)로 옮겨가서 여전히 정진하였다. 과연 미륵보살이 나타나 점찰경 두 권(주해 생략)을 주고 ......" 라는 기록이 의미하는 바도 알수 있게 된다.


이 미륵신앙은 민중의 신앙으로 명맥을 이어오다가, 풍류에 대한 기록을 남긴 최치원 선생의 후손 최제우 선생이 창도한 동학에서 [삼교합일(三敎合一)]의 사상으로 부활하고, 스스로 금산사 미륵불임을 자처한 증산 강일순 선생에 의해 새시대를 이끌어나갈 지도이념으로 제시된다.
그렇지만 동학과 증산교의 사상내용은 아직까지는 특정 종교의 교리 수준에 머물러 있고, 한민족의 미래를 이끌어나갈 종합사상으로 발전되었다고 보기는 힘든 것 같다. 그러므로 이 부분은 글쓴이 개인적으로도 보다 깊이 연구해야 할 분야이고, 민족적 차원에서도 연구가 활성화되어야 한다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