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Study on Influence and Contribution of the Chan in Chinese Poetry
- 唐代詩歌(당대시가)를 중심으로 -송행근-
불교는 동진 이래 중국에 수입된 후로 중국의 학술 및 사상, 예술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 중에서도 육조말 달마대사에 의해 전래된 선종은 성당과 중당 이후 크게 융성하였으며, 만당과 오대를 거쳐 송·명·청대에 이르러서는 불교의 여러 종파 가운데 독보적인 지위를 차지하였다.
당대는 청대의 강희년간에 칙명에 의해 편찬된 {全唐詩(전당시)} 전 900권에 수록된 시인이 모두 2,200여 명이고 그 작품이 48,000수에 달하는 것으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시가가 중국 문학 사상 최고의 수준에 도달하였다. 당시가 이처럼 흥성했던 이유는 정치·경제·문화 등 전반적인 사회 발달에 힘입은 바 크지만, 무엇보다도 시인들의 문학적 상상력을 크게 고무시켰던 불교의 영향을 배제할 수 없다.
불교는 시인들로 하여금 인간의 깊고 치밀한 정신 세계와 현실의 질곡 저편에 있는 無限大思惟(무한대사유)의 세계에 눈뜨게 하였다. 특히 중세 동양의 봉건적 사회 구조 속에서 개인의 존재, 개인의 자유를 중시한 선종의 정신은 한 시대의 진보적인 이념을 전망하는 문학적 상상력의 원천이 되었다.
성당 이후 융성하기 시작한 선종은 시인들과 선사들이 빈번하게 교류할 수 있는 사상의 장을 마련했으며, 시와 선이 융합된 禪詩가 출현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시인들은 '以詩寓禪(이시우선)'을 하였던 선승과 달리 '以禪入詩(이선입시)'의 선시를 창작하였다. 특히 寒山子(한산자)는 중국 시가사상 처음으로 '以禪入詩'를 도입하여 선시를 지었고, 王維(왕유)는 시에 선적 意境(의경)과 흥취를 살려 선시를 완성시켰다.
왕유 이후 선시는 孟浩然(맹호연)과 杜甫(두보)를 비롯하여 中唐(중당)에는 白居易(백거이)와 韓愈한유) 등으로 이어지면서 그 발전을 거듭하였다. 한편 시와 선의 결합은 시론에까지 확대되었다. 다시 말해 시를 논한다는 것은 곧 선을 하는 것과 같다는 詩禪一律論(시선일율론)을 주장하는 '以禪論詩(이선논시)'가 일어났는데, 晩唐 司空圖(만당·사공도)의 二十四品(이십사품)이 대표적이다.
더욱이 '이선입시'는 송대에 이르러 蘇軾(소식)과 黃庭堅(황정견)을 비롯한 많은 시인들이 창작하여 선시가 일반화되었으며, '이선론시'의 전통도 嚴羽(엄우)의 {滄浪詩話(창랑시화)}가 나오면서 더욱 발달하였다.
지금까지 국내의 중국시가 연구 경향은 중국의 학술과 사상 전반에 걸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선종과의 연계 작업이 그리 많지 않았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앞으로 선종과 중국시가 간의 연계 작업이 필요하다는 인식 아래, 중국시가에 대한 선종의 영향과 그 공헌을 개괄적으로 살펴보는 데서 연구 의의를 찾고자 한다.
다만 선종의 중국시가에 대한 영향과 그 공헌이 당·송대에 집중적으로 나타나는데, 이를 한꺼번에 조명하는 것은 그 연구 범위가 너무 광범위하다고 생각된다. 이에 본고에서는 당대에 대표적인 선시를 창작한 영향력 있는 시인들, 한산자·왕유·두보·한유 등을 중심으로 선종이 과연 그들의 시세계에 어떤 영향을 끼쳤고 또 공헌했는가를 고찰하고자 한다.
2. 선시의 형성
禪(선)은 범어 드야나(dhy na)의 음역으로 '깊은 사색' 혹은 '명상'을 뜻한다. 고대의 중국인들은 이를 '思惟修(사유수)' 혹은 '靜慮(정려)'라고 번역하였다.
선, 즉 禪宗(선종)은 본래 중국에서 발생된 것이 아니다. 선종은 양 무제 普通元年(보통원년;520) 달마라는 인도 수행자가 바다를 건너 중국 광주에 들어오면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달마로 시작된 선은 제2조 慧可(혜가)→제3조 僧璨(승찬)→제4조 道信(도신)을 거쳐 제5조 弘忍(홍인)에 이르러 어느 정도 제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이때가 바로 당의 건국 초기였다.
당시에 선종은 중국에 완전히 정착하지 못했으며, 그 세력 또한 성행하던 敎宗(교종)에 비하여 미약하였다. 그러나 성당 때 홍인의 두 명의 뛰어난 제자, 즉 혜능과 신수가 출현하면서부터 선종은 북종선과 남종선으로 각각 나뉘어 급속도로 발전하였다.
중국에서 선종이 활발하게 전개되면서 문화의 전반적인 부분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중국시가도 예외는 아니었다. 중국시가에 대한 선종의 영향으로 발생된 대표적인 현상은 바로 선시의 출현이다. 하지만 선시는 중국에 수입되자마자 출현하지는 못했고, 당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가능했다.
왜냐하면 '선'과 '시'는 본질적으로 '종교'와 '문학'이라는 이질적인 분야인만큼 근본적인 취지와 추구하는 바가 서로 달랐기 때문에 '선시'라는 새로운 양식으로 통합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선과 시는 어떤 차이를 지니고 있는 것일까? 杜松柏(두송백)의 견해를 살펴보자.
시와 선의 차이는 당연히 존재한다.
대개 범위로 말한다면, 선은 종교에 속하고 시는 문학에 속한다. 내용으로 말한다면, 선이 탐구하는 바는 眞如法性(진여법성)을 悟證(오증)하고 사리를 闡發(천발)하는 것이며, 시가 펼치고자 하는 바는 사람의 성정과 사물의 興會이다. 작용으로 말한다면, 선은 成佛作祖하여 自他(자타)를 제도하고자 함이며, 시는 성정을 기쁘고 즐겁게 하여 인심과 세도를 보충하고자 함이다.
感受(감수)로 말하자면, 선은 다만 스스로 알 따름이며 다른 이에게 보일 수 없는 것이니, 소위 '소년의 하룻밤 風流事(풍류사)는 단지 佳人(가인)만이 알 따름이네'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비단 스스로 즐길 뿐 아니라 이로써 다른 이들에게 보여 감동시키는 것이니, 그 차이가 이와 같다.
두송백은 선과 시가란 본질적으로 크게 네 가지―범위·내용·작용·감수 측면에서 차이가 나므로 선과 시가 하나로 융합되려면 어려움이 따른다고 밝혔다. 이처럼 선과 시는 각자 본질적인 특성이 있어 분명한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양자는 서로 활발히 교류하고 융합되면서 선시라는 새로운 형태의 시세계를 개척하였다. 이처럼 선과 시가 하나로 융합할 수 있었던 것은 종교와 문학이라는 이질적인 특성에도 불구하고 서로간에 공통적인 요소 내지는 상호보완적인 요소가 내재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선과 시의 공통적 요소 내지 상호보완적 요소는 무엇일까?
선문학이 시 일변도인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둘째, 선가에서는 拈花示衆·以心傳心(염화시중·이심전심)이니 하여 언어로는 도저히 전달할 수 없는 그 무엇인가를 강조하는데, 이는 시에서 言外之意(언외지의)를 소중히 여기는 것과 통하는 것과 유사하다.
선과 시가 하나로 융합된 선시가 출현한 것은 盛唐(성당)으로, 당나라 시대에 그것은 세 단계를 거치면서 발전하였다. 먼저 선시의 첫 단계는 선승으로부터 나왔다. 선은 언어를 부정하는 불립문자로부터 출발했기 때문에 언어 사용을 극도로 절제하였다.
그러나 어떤 식으로든 선을 설명해야 하므로 당시의 선승들은 언어 표현의 수단으로 시를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선승들이 시를 빌려 자신의 심정을 읊은 '以詩寓禪(이시우선)'이 출현하였다. 여기에는 언어의 설명적인 요소를 최대한 절제한 절실함이 자리잡고 있었다.
선시의 두 번째 단계는 시인들이 시의 분위기를 심화시키기 위해 선에 접근하는 풍조, 즉 '이선입시'가 일기 시작하면서 비롯되었다. 선승들이 시를 빌려 자신의 심정을 읊은 '이시우선'과 마찬가지로, 시인들 사이에서도 시의 정취를 심화시키고자 선에 접근하는 풍조가 일기 시작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첫 번째 선시는 깨달음의 희열을 읊은 開悟詩(개오시)와 산 생활의 서정을 노래한 山居詩(산거시)가 그 주류를 이루는 선승들의 작품이 대부분이다.
그 대표적인 작가를 거론하면, 신수와 혜능을 비롯하여 마조도일·백장회해·동산양개·조주·임제·관휴 등을 들 수 있다. 이에 반하여 두 번째 선시는 주로 한산자와 왕유를 비롯한 당송 시인들의 작품으로, 禪的(선적)인 분위기가 풍기는 禪趣詩(선취시)와 산사의 풍경을 읊은 禪迹詩(선적시)가 주류를 이룬다. 대표적인 작가로는 한산자와 왕유 외에도 맹호연·유종원·백거이 등을 들 수 있다.
선과 시의 세 번째 결합은 '以禪論詩(이선론시)', 즉 선으로써 시를 논하는 것으로 詩論으로까지 발전되었다. 晩唐(만당)의 사공도로부터 출발한 '이선론시'는 송대 嚴羽(엄우)의 {滄浪詩話(창랑시화)}에 이르러 확대 발전되었고, 급기야 명대의 王士禎(왕사정)의 {漁洋詩話(어양시화)}에 이르러서는 神韻說(신운설)로까지 확장되었다.
결국 송대 元好問(원호문)이 [答俊書記學詩七(답준서기학시칠)]에서 "시는 선가에 있어서 비단 위의 꽃이요, 선은 시가에 있어 옥을 다듬는 칼이다"(詩爲禪家添花錦;시위선가첨화금, 禪爲詩家切玉刀;선위시가절옥도)라고 밝힌 것은, 선과 시의 교류와 융합을 아주 정확하게 지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선시는 성당에 들어와서 한산자와 왕유를 비롯한 선시 작가들이 하나 둘씩 출현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런데 이때 이르러 선시다운 선시를 창작한 데에는 당시의 시대적 흐름과 매우 연관이 깊다.
두 번째, 불가에는 범어로 'g tha'로 불리는 韻文體(운문체)가 있는데 이를 한자로 음역하면 迦陀(가타) 혹은 偈陀(게타)라 하며, 일반적으로 偈(게) 혹은 偈頌(게송)이라 한다. 본래 이 게는 불타의 공덕을 찬미하거나 산문의 끝에 놓여 산문을 마무리짓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불경의 번역에 따라 정제된 시구 형식으로 중국에 전해져 3언·4언을 불문하고 四句(4구)를 원칙으로 하였다.
그러나 당대에 시가 크게 성행하자 불가의 게송들도 이러한 시의 활성에 힘입어 압운한 산문의 특성을 벗어나 점차 시에 접근하게 되었다. 특히 禪家(선가)에서는 이런 경향이 더욱 심했다. 두송백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선가의 조사들은 달마에 이르러 법을 전수할 때는 곧 詩偈(시게)를 사용하였다. 그 초기에는 압운한 산문에 그쳤지만 신수와 혜능 두 대사 이후에 이르러서는 문채가 드러났으며, 비흥의 風旨(풍지)를 얻고 근체시의 격조에 화합하여 시와 선을 융합시켰다.
실제 당대 시인들 가운데 이 게송을 자신의 시 창작 방법으로 수용하여 자신만의 시세계를 개척한 사람으로서 백거이와 한유를 들 수 있는데, 특히 백거이는 게송 번역문체의 영향을 받아 '長恨歌(장한가)'를 창작하였다.
세 번째, 당대를 인식하는 데 가장 중요한 사건은 바로 安史(안사)의 亂(난)이다. 안사의 난 이전에는 현종이 즉위하면서(712) 정치·경제·문화 등 다방면에 걸쳐 전례 없는 발전을 거듭하면서 중국 역사상 가장 번성한 시기가 되었다. 이에 때맞춰 시단은 중국시가사상 가장 위대한 시인으로 일컬어지는 詩仙(시선) 이백과 詩聖(시성) 두보가 함께 출현하면서 시가의 황금기를 맞고 있었다.
그런데 안사의 난을 분기점으로 唐(당)은 성당에서 중당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이르러 급격히 쇠락하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이 난을 계기로 지식인들의 세계관 및 인생관에도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특히 왕유는 안사의 난 때 적군에게 구금된 것을 계기로 세상에 대한 환멸감과 허무감을 느꼈고, 그것은 선종에 완전히 귀의하도록 만들었다.
한편 선시는 창작자에 따라 크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먼저 선승이 시로써 선의 경지를 읊은 '以詩寓禪(이시우선)'으로 말한다면, 示法詩(시법시)·開悟詩(개오시)·頌古詩(송고시)·禪機詩(선기시) 등으로 나눌 수 있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첫째, 선사가 선의 法理(법리)를 전수할 때, 대중들에게 설법할 때, 그리고 입적할 때에 지은 게송을 시법시라 한다. 둘째, 선승이 참선을 오랫동안 강구하여 인연이 화합하여 마침내 明心見性(명심견성)하여 豁然開悟(활연개오)했을 때 깨달은 바를 노래한 게송을 개오시라 한다.
셋째, 선승이 선가의 어록 및 공안 등을 취하여 새로이 그 뜻을 밝혀 읊은 시를 송고시라 한다. 넷째, 선적 생활 속에 느끼는 흥취를 노래한 시들이 있는데, 이 시들은 직접 禪理(선리)를 밝히지는 않지만 암암리에 禪機(선기)를 바탕으로 하고 있어 이것을 선기시라 한다.
두 번째는 시인들이 선을 도입한 '이선입시'의 분류로, 크게 禪理詩(선리시)·禪典詩(선전시)·禪迹詩(선적시)·禪機詩(선기시)로 나뉜다. 이에 대한 두송백의 견해를 살펴보자.
무릇 선가의 설을 좋아하여 그 오묘한 이치를 자세히 기록한 것이 선리시이고, 선가의 고사를 밝혀 시에 활용한 것이 선전시이다. 禪院(선원)에 다니고 선사와 교우를 맺어 贈酬和答(증수화답)한 것이 선적시이고, 사물을 그리고 이치를 밝히며 사물에 기탁하여 감흥을 일으키고, 유한으로써 무한을 보며 황홀한 선기로 하여금 눈에 보이듯 그 자취를 드러내게 한 것이 선기시이다. 이 네 가지에 의거하여 당송제가에 시집에서 그것을 구하면 손으로 다 꼽을 수 없을 정도이다.
3. 선시의 발달
성당에서 출현한 선시는 이전의 중국시가에서 전혀 찾아볼 수 없었던 새로운 시를 개척하면서 선시의 융성을 가져옴과 동시에 시의 경계를 확대하였다. 그래서 청대의 王士禎(왕사정)은, 당대 시인의 오언절구는 종종 禪(선)에 들어가 뜻을 얻고 말을 잊은 묘함이 있으니, 淨明(정명;유마거사)이 묵묵부답하였던 것이나 달마가 진수를 얻은 것과 동일한 것이다.
라고 했다. 본고에서는 한산자와 왕유를 비롯, 두보 및 한유를 중심으로 그들과 선종 간의 관계에 대해 살펴본 다음 그들의 시세계에 선종의 사상이 어떻게 융합되면서 영향을 주었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3.1. 寒山子(한산자)
寒山(한산)은 寒山子(한산자)라고 불리는데, 이는 시인이 은거하였던 天台山(천태산) 寒岩(한암)에서 유래한 것이다. 한산자가 자신이 은거했던 한암을 자신을 나타내는 별명으로 삼은 것을 보면, 그곳은 매우 깊고 험한 곳인 듯하다. 실로 {태평광기} 권55 한산자조를 보면 그러한 사실을 알 수 있다.
한산자라는 사람은 그 이름과 성을 알 수 없다. 大曆中(대력중)에 天台 翠屛山(천태·취병산)에 은거하였는데, 그 산은 깊고 그윽하여 여름에도 눈이 있어 한암이라고도 부른다. 이로 인해 스스로 한산자라 칭하였다.
(寒山子者, 不知其名氏. 大曆中, 隱居天台翠屛山, 其山深邃, 當暑有雪, 亦名寒岩. 因自號寒山子.)
(한산자자, 불지기명씨. 대력중, 은거천태취병산, 기산심수, 당서유설, 역명한암. 인자호한산자.)
한산자의 생애와 생존 시기는 貞觀說(정관설)에서부터 貞元末年說(정원말년설)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여 정확하지 않다. 다만 그의 삶과 행적에 관해서는 한산시집에 실려 있는 台州刺史 閭丘胤(태주자사 여구윤)의 序(서)만으로 파악할 수 있을 정도이다. 여구윤의 서를 살펴보자.
무릇 한산자라는 자는 어떤 사람인지 알 수가 없다.
옛 노인들이 그를 보고는 모두들 가난한 미치광이 선비라고 말하였다. 천태 당흥현 서쪽으로 70리에 寒岩(한암)이라 불리는 곳에서 은거하였는데, 매번 여기에서 때때로 國淸寺(국청사)에 내려오곤 하였다. 국청사에는 습득이 있어 주방 일을 맡고 있었는데, 늘 대바구니에 남은 음식 찌꺼기를 넣어 두었다가 한산이 오면 곧바로 음식 바구니를 들고 갔다.
간혹 긴 행랑을 천천히 거닐며 즐겁게 부르기도 하고 홀로 웃고 홀로 중얼거리곤 하였다. (중략) 윤이 일전에 단구에 낮은 벼슬을 받았는데 떠나는 날을 앞두고 두통을 앓게 되었다. 곧 점쟁이를 불러 치료하게 하였으나 도리어 심해졌다. 이에 우연히 풍간이라는 한 선사를 만났는데, 천태산 국청사에서 특별히 찾아왔노라고 말하였다.
곧 명하여 병을 고쳐 달라 하니 선사는 얼굴을 펴고 웃으면서 말하기를 "몸은 사대에 살고 병은 실체가 없는 데서 생깁니다. 만약 나으려면 반드시 깨끗한 물이 필요합니다"라고 하였다. 곧 깨끗한 물을 가져와 선사에게 바치니, 선사가 윤에게 곧 물을 뿜었는데 병이 금세 사라졌다. 이내 선사는 윤에게 "태주는 섬이니 풍기가 심합니다.
도착하면 필히 몸을 보호하십시오"라고 하였다. 윤이 묻기를 "아직 그곳을 잘 모르는데 거기에는 스승으로 받들 만한 현인이 계십니까?"라고 하니, 선사가 "보아도 알지 못하고 알아도 보지 못하니, 만약 보고 싶거든 상을 취하지 않아야 비로소 볼 수 있습니다. 한산은 문수보살로서 국청사에 숨어 있고, 습득은 보현보살로서 가난하고 또 미치광이 같습니다.
때때로 오가며 국청사의 창고에서 심부름을 맡고 부엌에서 불을 지핍니다"라고 대답하고는 하직하고 떠났다. 윤은 곧 길을 떠나 台州에 도착하였다. 그 일을 잊지 않고 있다가 도착 3일 후에 국청사에 가사 몸소 선객에게 물었더니 과연 선사가 했던 말과 일치하였다.
(詳夫寒山子, 不知何許人也. 自古老見之, 皆謂貧人風狂之士. 隱居天台當興縣西七十里號爲寒岩. 每於玆地, 時來國淸寺. 寺有拾得, 知食堂, 尋常收貯餘殘菜滓於竹筒內, 寒山若來, 卽負而去. 或長廊徐行, 叫喚快活, 獨言獨笑. (中略) 胤頃受丹丘薄宦, 臨途之日, 乃영頭痛. 遂召日者醫治, 轉中. 乃遇一禪師名豊干, 言從天台國淸寺來, 特此相訪. 乃命救疾, 師乃舒容而笑曰, 身居四大, 病從幻生, 若欲除之, 應須淨水, 時乃淨水上師, 師乃손之, 須臾거疾. 乃謂胤曰, 台州海島嵐毒, 到日必須保護. 胤乃問曰, 未審彼地, 當有何賢, 堪爲師仰. 師曰 見之不識, 識之不見, 若欲見之, 不得取相, 乃可見之, 寒山文殊, 遯迹國淸, 拾得普賢, 狀如貧子, 又似風狂, 或去或來, 在國淸寺庫院走使, 廚中著火. 言訖辭去, 胤乃進途, 至任台州. 不忘其事, 到任三日後, 親王寺院, 躬問禪宿, 果合師言.)
(상부한산자, 부지하허인야. 자고로견지, 개위빈인풍광지사. 은거천태당흥현서칠십리호위한암. 매어자지, 시래국청사. 사유습득, 지식당, 심상수저여잔채재어죽통내, 한산약래, 즉부이거. 혹장랑서행, 규환쾌활, 독언독소.<중략>윤경수단구박환, 임도지일, 내영두통. 수소일자의치, 전중. 내우일선사명풍간, 언종천태국청사래, 특차상방. 내명구질, 사내서용이소왈, 신거사대, 병종환생, 약욕제지, 응수정수, 시내정수상사, 사내손지, 수유거질. 내위윤왈, 태주해도람독, 도일필수보호. 윤내문왈, 미심피지, 당유하현, 감위사앙. 사왈 견지불식, 식지불견, 약욕견지, 불득취상, 내가견지, 한산문수, 둔적국청, 습득보현, 상여빈자, 우사풍광, 혹거혹래, 재국청사고원주사, 주중저화. 언흘사거, 윤내진도, 지임태주. 불망기사, 도임삼일후, 친왕사원, 궁문선숙, 과합사언)
이 글의 핵심은, 한산자가 겉보기에는 미치광이 선비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국청사에 기거하는 문수보살의 化身(화신)이라는 것이다. 즉 한산자는 유학에 심취한 사대부가 아닌 불교에 귀의한 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한산자는 시가 300여 편에 이를 정도로 많은 작품을 창작했으나, 그의 시는 당대는 물론 청대 이전까지 철저하게 묻혀 있었다. 그러다가 청대 1707년에 편찬된 {全唐詩(전당시)}와 1782년에 편찬된 {四庫全書(사고전서)}에 한산자의 시가 수록됨으로써 공식적으로 처음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또 한산자가 한 시인으로서 가치가 부여된 것은 근대에 이르러 호적이 한산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면서부터이다.
호적은 한산자의 연대를 고증함과 동시에 그의 {白話文學史(백화문학사)}에 한산자·王梵志(왕범지)·王積(왕적) 등 세 사람을 당 초기의 白話詩人(백화시인)으로 나란히 놓고 그 중요성을 부각시켰다. 그러기 이전에 당말 선종대사 貫休(관휴;832∼912)가 비록 "그대는 한산자를 사랑하여 부르는 것이라곤 낙도가뿐"(子愛寒山子;자애한산자, 歌唯樂道歌;가유락도가)이라고 하여 그의 시에 대해 언급한 적은 있었지만, 한산자는 줄곧 정통문학의 밖에 있는 시인으로 간주되어 그 위상을 제대로 확보받지 못했다.
한산자는 칠십여 세를 살았는데 세월이 흐를수록 그의 사상적 경향도 달라졌다. 처음에는 유가에 그 다음에는 도가에 그리고 마지막에는 선종으로 귀착하고 있다. 한산자는 청소년기에 수렵하면서 경전을 읽으며 무예에 힘쓰는 매우 호방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리하여 2, 30대가 되자 당대의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시재를 바탕으로 과거에 급제하여 정치적 포부를 마음껏 펼쳐 보이고자 힘썼다.
이런 태도로 그는 삼십여 세 동안 남에게 뒤지지 않겠다는 강한 포부를 가지고 書判(서판)으로 과거에 네댓 번 응시했으나 그 결과는 연거푸 낙제를 당하는 것으로 끝났다. 이와 같은 처참한 현실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한산자는 "항상 남들의 꾸중을 들었고, 아내의 버림도 받았네라"(緣遭他輩責;연조타배책, 剩被自妻疎;잉피자처소)고 스스로 말할 정도로, 가족과 주위 사람들에게까지 구박을 받았다. 과거의 실패는 한산자에게 정신적 실의는 물론 경제적 곤궁을 뼈저리게 느끼게 하는 가슴 아픈 체험이 되었다.
箇是何措大개시하조대 어떤 선비이길래
時來省南院시래성남원 때때로 남원을 보고 오는가?
年可三十餘연가삼십여 삼십여 세에
曾經四五選증경사오선 일찍이 네다섯 번 과거 치렀네
囊裏無靑부낭리무청부 주머니 속에 돈은 없고
협中有黃絹협중유황견 상자 속에 묘한 시만 있구나
行到食店前행도식점전 유랑하다 음식점 앞을 지나도
不敢暫廻面불감잠회면 감히 잠시도 얼굴 돌리지 못하는구나
이 시에는 여러 차례 과거에 도전했지만 끝내는 그 꿈을 이루지 못한 불우한 지식인의 절실한 심정이 잘 나타나 있다. 시의 내용을 보면, 유가의 經史諸子(경사제자)를 섭렵하면서 젊은 시절을 보냈지만 과거에 실패한 한산자 자신의 체험이 그 밑바탕에 깔려 있다. 과거 낙방은 시인 자신의 자존심에 상처를 남겼음은 물론 정신적인 패배감과 경제적 궁핍으로까지 이어지는 악순환을 초래한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과거에 대한 미련과 낙제에 따른 고통을 한꺼번에 떨쳐 버리고 나아가 자신의 좌절을 딛고 일어서기 위해 한산자는 새로운 돌파구를 찾게 된다. 하지만 그는 매력을 느낀 신선술에서 정신적인 탈출구를 찾지 못하고 다시 한 번 깊은 실의에 빠진다. 이것을 계기로 한산자는 인간이 절대로 신선이 될 수 없음을 무척 괴로워하였다.
人生在塵蒙인생재진몽 티끌 속의 인생
恰似盆中蟲흡사분중충 그릇 속의 벌레 같구나
終日行요요종일행요요 하루종일 돌아다니지만
不離其盆中불리기분중 그릇을 떠날 수 없구나
神仙不可得신선불가득 신선은 될 수 없고
煩惱計無窮번뇌계무궁 번뇌만 가득 차네
歲月如流水세월여류수 세월은 흐르는 물과 같아
須臾作老翁수유작로옹 어느덧 늙은이 되었구나
이 시를 살펴보면, 한산자는 현실의 번뇌를 탈피하기 위해 장생불사할 수 있다는 신선술에 매력을 느꼈다는 것을 화자에 빗대어 고백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는 지극히 평범한 진리를 자각하게 되면서 자신이 신선술을 추구한 일이 '마치 벌레가 그릇 속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방황하는' 듯한 고통의 연속이었음을 화자를 통해 우회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결국 한산자는 과거 낙방에 따른 고통과 신선술에 대한 회의를 일시에 타파하고 인간존재의 근원적 허무를 통해 세속적 욕망의 부질없음을 노래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정신적인 안식을 찾기 위해, 70세쯤 寒岩(한암)으로 가 본격적인 '以禪入詩(이선입시)'의 시를 쓴다.
寄語諸仁者기어제인자 어진 이들에게 말하느니
復以何爲懷복이하위회 그대들 또 무엇을 품는가?
達道見自性달도견자성 달도하여 자성을 보면
自性卽如來자성즉여래 자성이 곧 부처이니라
天眞元具足천진원구족 천진은 본래 갖추어져 있으니
修證轉差廻수증전차회 닦아서 얻는 바 있으면 더욱 멀어지느니라
棄本却遂末기본각수말 근본을 버리고 끝을 추구하는 것은
只守一場애지수일장애 단지 한바탕 어리석음을 지키는 것뿐이니라!
이 시는 示法詩(시법시)로, 시인은 먼저 天眞(천진) 그것이 바로 부처이니 밖으로 향해 도를 닦는 것은 더욱 어리석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나서 자성이 여래, 즉 부처이고 이 자성은 본래 갖추어져 있기에 닦아서 얻는 바가 있으면 道(도)와는 멀어짐을 강조하고 있다. 이 시를 보면 시인이 선종 가운데 漸修(점수)를 주장한 북종선을 배격하고 頓悟(돈오)를 주장하는 남종선을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실제 慧能(혜능)의 돈오설의 핵심과 그의 주장을 살펴보자.
선지식이여! 깨닫지 못한 즉 부처가 중생이요, 한 생각에 깨치면 중생이 곧 부처이니라. 그런 까닭으로 모든 법이 自心(자심)에 있다는 것을 알아라. 어찌 자심에서 곧바로 眞如本性(진여본성)을 보지 못하는가?
般若(반야)의 지혜 역시 크고 작음이 없지만, 그렇게 나타나는 것은 일체 중생이 그 마음에 어리석음과 깨달음이 같지 않기 때문이다. 마음이 어리석어서 밖으로만 보고 닦으며 부처를 찾을 뿐, 자성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 바로 小根(소근)이며, 만약 頓敎(돈교)를 깨달아 밖으로 닦는 것을 고집하지 않고 다만 자신의 마음에 항상 正見(정견)을 일으켜 번뇌 망상이 물들지 못하게 하면 이것이 곧 見性이니라.
위의 글에서도 잘 나타나듯이, 혜능은 자성이 본래 갖추어져 있으니 밖에서 따로 구하지 말고 다만 자기의 본래 심성에서 구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는 항상 萬法(만법)이 모두 自心(자심)에 있으니 이 自心(자심) 중에서 곧바로 眞如本性(진여본성)을 보라고 가르쳤다.
한산자가 이처럼 남종선의 창시자인 혜능의 가르침을 직접 옮긴 示法詩(시법시)는 다른 시에서도 나타나 있다.
廻心卽是佛, 莫向外頭看(說食終不飽) ;회심즉시불, 막향외두간(설식종불포)
마음 한 번 돌리면 곧 부처이니, 아예 멀리 밖으로 구하지 말라.
不知淸浮心, 便是法王印(自古多少聖) ;불지청부심, 편시법왕인(자고다소성)
어이 모르는가 맑고 깨끗한 마음, 그것이 곧 法王의 印인 줄을.
一佛一切佛, 心是如來地(常聞釋迦佛) ;일불일체불, 심시여래지(상문석가불)
한 부처는 곧 모든 부처라, 마음이 이 여래의 땅이니라.
위 시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한산자는 禪語(선어)와 禪典(선전)을 사용하여 자신의 禪的(선적)인 감정을 표현하였다. 이처럼 그가 선어와 선전을 사용한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한산자와 동시대의 시인이었던 魏慶之(위경지)는 이에 대해 {詩人玉屑(시인옥설)} 권6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옛 시인들은 시를 지을 때 방언을 많이 사용하였다. 오늘날 시를 지을 때 다시 선어를 사용하는 것은, 대저 구습에 빠지는 것을 가장 싫어하고 新好(신호)를 찾고 싶어서이다.
(古人作詩, 多用方言, 今人作詩, 復用禪語, 蓋最厭塵舊而欲新好也.)
(고인작시, 다용방언, 금인작시, 복용선어, 개최염진구이욕신호야.)
이처럼 한산자는 구습에 빠지는 것을 싫어하여 新好(신호)를 찾으려는 그의 시적 목표를 이루기 위해 선어를 사용하였고, 이를 토대로 '이선입시'를 한층 강조하였다.
人問寒山道인문한산도 한산으로 가는 길 묻지만
寒山路不通한산로불통 한산의 길 통하지 않네
夏天氷未釋하천빙미석 한여름에도 얼음 녹지 않고
日出霧朦朧일출무몽롱 해 떠올라도 안개 몽롱하네
似我何由屆사아하유계 나 같으면 어떻게든 갈 수 있겠지만
與君心不同여군심불동 그대의 마음과는 같지 않네
君心若似我군심약사아 그대 마음 내 마음과 같다면
還得到其中환득도기중 어느덧 그곳에 이르리라!
한산자가 굳이 한암에 은거하면서 깨달음을 얻고자 한 것은 그곳이 깊고 험하고 인적이 드물어 자신만의 공간을 확보할 수 있는 장점을 지녔기 때문이다. 한산자는 한암에서 入佛(입불)하여 30년 간을 지내면서 때로는 한암으로 칩거하기 이전의 세월에 대해 미련을 떨쳐 버리지 못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서서히 지난날에 대한 미련과 욕망 및 회한을 떨쳐 버리고 천태산 한암의 변화에 그대로 자신을 맡기면서 청정한 마음으로 자연과 합일하기에 이른다.
이 시는 한산자의 선기시 가운데서 드물게 보이는 서술적인 표현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시인은 이 시에서 '한산'이란 지명을 그의 선적 세계와 物我合一(물아합일)을 상징하는 뜻으로 쓰고 있다. 한산은 한여름에도 녹지 않는 얼음으로 되어 있고 해가 떠올라도 몽롱한 안개에 쌓여 있어 외부 세계, 즉 속세와 완전히 단절되어 있다.
그래서 1·2구의 한산은 실제의 산이지만, 5구의 '何由屆(하유계)'에서 표명하는 한산은 깨달은 후의 심경을 내포하고 있다. 결국 한산은 시인 자신은 이미 깨쳤으나 일반 사람들은 깨치지 못하여 도저히 이를 수 없는 선적 경지를 뜻한다. 다시 말해 '한산도'는 공간적인 길이 아니라 마음으로 통하는 길이며, 나아가 한산자가 최종적으로 깨치고자 하는 구원과 해탈의 길이다.
특히 이 시에서 시인은 孤高(고고)한 차원에 오르는 것은 다름 아닌 '마음의 자세' 여하에 따른 문제라고 설파한다. 이는 한산자가 북종선의 입장에서 바라본 것으로 卽心卽佛(즉심즉불), 즉 '이 마음이 곧 부처이니, 진리는 밖으로 구할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 그대로가 진리임을 깨닫기만 하면 된다'는 주장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한산자는 당시에 유행했던 남종선과 북종선을 함께 수용한 듯하다.
登陟寒山道등척한산도 한산의 길 오르니
寒山路不窮한산로불궁 한산의 길 끝이 없네
谿長石磊磊계장석뢰뢰 긴 계곡엔 돌무더기 쌓여 있고
澗闊草몽몽간활초몽몽 넓은 시냇가엔 풀이 무성하구나
苔滑非關雨태골비관우 비 오지 않았는데도 이끼 미끄럽고
松鳴不假風송명불가풍 바람 없어도 소나무 절로 우는구나
誰能超世累수능초세루 누가 속세의 티끌 벗어나
共坐白雲中공좌백운중 흰구름 가운데 같이 앉아 보리요?
이 시는 寒山(한산)의 아래에서 계곡을 따라 수풀을 지나 흰구름 가운데 이르는 공간적인 진행과정을 묘사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白雲中(백운중)'은 속세를 초월하는 탈속적인 선취를 마음껏 느끼게 한다.
이 시의 정수는 제3연에서 아주 잘 나타난다. 한산도는 비가 내리지 않아도 이끼 미끄럽고 바람이 불지 않아도 소나무 절로 소리내어 운다고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세계는 바로 靜的(정적) 속에서도 動(동;움직임)이 있는 이른바 '靜中動(정중동)'의 세계라 할 수 있다.
특히 이 시에서는 선적 의경을 나타내기 위해 疊字(첩자) 및 시어의 사용에 무척 고심하였다. 먼저 첩자의 사용은 중국시에 있어서 매우 흔한 수사기교 가운데 하나로, 예로부터 많은 시인들이 애용했다. 특히 한산자의 첩자 사용은 선기시에 집중적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첩자의 성격이 원래 대부분 의성어나 의태어로서 설리적이거나 서술적인 표현보다는 경물이나 심정을 묘사하는 데 어울리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산자는 첩자를 통해 정태미를 이룸과 동시에 시인의 幽寂(유적)한 산중생활의 흥취를 잘 나타냈다.
또 한산자는 시어의 사용에 대해 많은 의미를 두었다. 그는 탈속적인 선취를 '白雲(백운)'으로 함축시켜 나타냈다. 이 시에서 "누가 속세의 티끌 벗어나, 흰구름 가운데 같이 앉아 보리요?"〔誰能超世累(수능초세루), 共坐白雲中(공좌백운중)〕의 두 구는 속세에서 벗어나 새로운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시인의 선종적 인생관을 대변하고 있다. 실제 한산자는 그의 시 총 21곳에서 '白雲(백운)'을 통해 도의 세계를 합일시키면서 선취의 극치라 할 수 있는 入禪忘我(입선망아)의 禪境(선경)을 잘 표출하였다.
한산자는 한산에서 30년 동안이나 참선을 하며 마침내 깨달음을 얻게 되었고, 그 깨침 즉 開悟(개오)를 시에 함축하기에 이른다.
吾心似秋月오심사추월 내 마음 가을 달 같고
碧潭淸皎潔벽담청교결 푸른 물처럼 맑고도 깨끗하네
無物堪比論무물감비론 어떠한 것과도 비교할 수 없으니
敎我如何說교아여하설 내 어떻게 말하리요?
이 시는 오언사구로 이루어진 짧은 시로, 禪的(선적) 悟境(오경)을 아주 잘 나타낸 開悟詩(개오시)이다. 시의 내용을 살펴보면, 1·2구에서는 자신의 심경을 맑고도 깨끗한 가을 달에 비유하고 있다. 그리고 3·4구에서는 자신의 悟境(오경)은 어떠한 언어와 형상의 세계로도 표현할 수 없음을 읊고 있다.
이 시를 보면 푸른 시내, 맑은 샘, 한산에 떠오른 밝은 달 모든 것이 한산자의 벗이다.
그러나 한산자는 이런 것들을 감상하면서도 그것들에 집착하지 않고 '달'과 '물'이라는 대자연을 통해 일체의 대상 세계를 空(공)으로 보고 靜寂(정적)의 세계로 들어가고 있다. 특히 주목할 점은 한산자가 말하는, '마음'을 비유하는 달과 물은 실제의 자연물이 아니다.
그것은 언어로 쉽게 표현할 수 없는 自性(자성)이며, 궁극적으로는 경험적이건 선험적이건 일체 주객 대립에서 일어나는 表象(표상), 개념, 판단 등 어지러운 생각을 제거해 버린 뒤에 나타나는 靜寂(정적)의 세계이다. 그러기에 가을 달과 푸른 물은 시인의 선적 오경을 단적으로 말해 주는 것에 불과하다.
지금까지 한산의 시를 내용적인 측면에서 살펴보았다. 이번에는 형식적 측면을 살펴보고자 한다. 선종의 영향으로 나타난 한산시의 형식적 특징은 크게 두 가지로 살펴볼 수 있다. 하나는 시형이고 또 하나는 시어이다. 먼저 한산자 선시를 형태상으로 고찰해 보면 오언시 284수, 칠언시 20수, 장단구 1수, 삼언시 6수 등으로 되어 있다.
寒山道한산도 한산의 길
無人道무인도 가는 이 없으니
若能行약능행 갈 수 있다면
稱十號칭십호 부처라 부르리
有蟬鳴유선명 매미 소리 있어도
無鴉塞무아색 까마귀 짖음 없고
黃葉落황엽락 누런 잎 지니
白雲掃백운소 흰구름이 쓴다
石磊磊석뢰뢰 돌은 우툴두툴
山오오산오오 산은 오뚝오뚝
我獨居아독거 나 홀로 거하니
名善導명선도 선도라 일컫나니
子細看자세간 그대 잘 보오
何相好하상호 어떻게 좋은지를
寒山道한산도 한산의 길
無人道무인도 가는 이 없으니
若能行약능행 갈 수 있다면
稱十號칭십호 부처라 부르리
有蟬鳴유선명 매미 소리 있어도
無鴉塞무아색 까마귀 짖음 없고
黃葉落황엽락 누런 잎 지니
白雲掃백운소 흰구름이 쓴다
石磊磊석뢰뢰 돌은 우툴두툴
山오오산오오 산은 오뚝오뚝
我獨居아독거 나 홀로 거하니
名善導명선도 선도라 일컫나니
子細看자세간 그대 잘 보오
何相好하상호 어떻게 좋은지를
이 시는 三言古詩(삼언고시)로, 시인은 한산도를 가는 사람이 없지만, 만약 그곳에 이르면 이보다 더 좋은 것은 없음을 나타내고 있다. 실로 한산자가 이르고자 한 한산도는 선적 悟境(오경)이었을 것이다. 이 시에서 '한산도'란 佛道(불도)로서 매미 소리는 있으나 까마귀 지저귐은 없으며 낙엽이 지면 흰구름이 쓸고, 괴석과 기이한 봉우리가 있는 중에 나 홀로 있어 부처가 되는 길을 인도해 주는 것을 뜻한다.
이 시는 앞에서 살펴보았던 시들과 달리 삼언시로 구성되어 있다. 한산시에는 삼언시가 모두 6수 있는데, 14구가 1수, 8구가 3수, 4구가 2수 있다. 자수가 지나치게 제한되어 있어 시인의 사상이나 정감을 마음껏 펼치기에는 부적절할 수 있는 삼언시를 창작한 데에는 선종의 특색과 그 맥을 같이한다.
즉 선가에서는 본래 불립문자를 주장하였고, 어쩔 수 없이 언어문자를 사용해야 할 경우에도 상징적인 표현이나 압축적인 표현을 통해 言外之意(언외지의)를 강조하였다. 그런데 한산자가 언어나 문자로써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오묘한 선의 세계를 삼언시라는 지극히 제한된 형식 속에서 고도의 압축미를 통하여 드러내고자 했던 것은, 삼언시가 모두 개오시나 선기시라는 것만 보아도 이를 알 수 있다.
3.2. 王維(왕유)
詩佛(시불) 王維(왕유;700∼761)는 성당 때 시인으로 자가 摩詰(마힐)이다. 그는 시뿐만 아니라 그림과 글씨 및 음악 등 다방면에 걸쳐 매우 뛰어나, 살아 생전에 남종화의 원조와 당대의 명필 및 비파의 명연주자 등 다채로운 명성을 날렸다.
그러나 왕유는 62세로 죽을 때까지 武后(무후)·中宗(중종)·睿宗(예종)·玄宗(현종)·肅宗(숙종) 등 무려 다섯 왕을 섬기며 살았을 만큼 곡절 많은 삶을 영위하였다.
왕유가 활동했던 성당에는 도교가 크게 흥성하긴 했지만, 유불도 삼교가 서로 상호작용을 하면서 활발히 성행하였다. 왕유의 사상적 변화를 살펴보면 당시의 이 같은 분위기가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다시 말해 소년기에는 유가적 삶을 목표로 과거에 급제하려 노력하였고, 청장년에 이르러서는 도가에 심취한다. 그러나 만년의 왕유는 선종에 완전히 귀의하는 모습을 보인다. 특히 안록산의 난을 겪으면서 불교에 귀의함은 물론 현실에 나타나는 현상들을 佛理(불리)로써 이해하고 해석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비록 왕유가 만년에 선종에 귀의하기는 했지만, 그에게 있어 선종은 모태신앙과 같은 것이었으며 생활의 일부였다. 이처럼 왕유가 선종을 생활화하면서 몸소 그것을 실천하는 데에는 크게 세 가지 요인이 그 배경을 이루고 있다.
신의 亡母(망모), 고 博陵縣君(박릉현군) 최씨는 일찍이 대조선사의 문하에서 삼십여 년 사사하셨습니다. 신의 어미는 거친 옷과 채식, 계율을 지키며 참선하셨습니다. 산림에 즐거이 머물며 寂靜(적정)을 구하는 일에 뜻을 두셨습니다.
(臣亡母故博陵縣君崔氏, 師事大照禪師三十餘歲, 褐衣蔬食, 持戒安禪, 樂住山林志求寂靜.)
(신망모고박릉현군최씨, 사사대조선사삼십여세, 갈의소식, 지계안선, 낙주산림지구적정.)
왕유의 어머니 최씨가 사사한 대조선사는 북종 神秀(신수)의 嗣法弟子(사법제자)인 普寂(보적;651∼739)의 시호로, 최씨는 북종선의 보적선사에게 선의 가르침을 받아 중국여인들이 바라마지 않는 비단옷조차 몸에 걸치지 않고 거친 옷과 채식 그리고 엄격한 계율을 지키며 한평생을 보냈다.
이러한 모친 최씨의 불교적 삶은 왕유에게 선종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선종의 분위기에 심취케 하는 환경을 조성하였다. 나아가 선종적 가정환경은 그가 {유마경}의 주인공 維摩詰(유마힐)을 염두에 두고 자신의 字(자)를 摩詰(마힐)이라 하며, 훗날 아무런 욕심을 갖지 않고 경전을 읽고 참선에만 몰두케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특히 755년 당 왕조의 부패에 분개한 안록산이 난을 일으키자 현종은 사천성으로 피난하고 수도 장안은 반란군의 수중에 떨어지고, 장안에 남아 있던 왕유는 반란군에 의해 菩提寺(보제사)에 구금된다.
왕유는 약물을 복용하고 이질병을 가장했으나 반란군측은 그를 낙양으로 이송하여 給事中(급사중) 벼슬을 강요하였다. 이때의 부역은 왕유에게 굴욕으로 환원되어 輞川莊(망천장)에 은거하며 시와 그림 및 선에 몰두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왕유는 당시 남북종 최고의 선사 가운데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교류하였다. 대표적으로 북종선의 선사로는 普寂(보적)과 義福(의복)을 비롯하여 淨覺·惠澄(정각·혜징) 등이며, 남종선의 선사로는 神會(신회)와 瑗公(원공)을 비롯하여 璿禪師·元崇(선선사·원숭) 등이다.
실제 이 시기에 왕유는 비록 조정 관직을 수행하기는 했으나, 장안에서 날마다 십여 명의 승려들에게 식사를 제공하며 그들과 심오한 철리의 토론을 즐겼다. 또 그의 서재에는 아무것도 없고 오직 茶具·藥 ·經案·繩床(다구·약 ·경안·승상)뿐이었고, 퇴궐 후에는 향을 피우고 앉아 선경을 誦讀(송독)할 정도로 선종적인 삶을 실천하였다.
왕유는 선의 체험을 그대로 詩化했던 시인으로서, 중국시가사상 선시를 문학적으로 가장 잘 체현한 대표적인 시인이다. 그래서 왕유와 동시대의 시인이었던 苑咸(원함)은 '酬王維(수왕유)'에서 "왕형은 당대의 詩匠(시장), 또 선리에 정통하였다"(當代詩匠;당대시장, 又精禪理;우정선리)고 하였다. 그의 시 가운데 선사상이 농후한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鹿柴(녹시)'·'木蘭柴(목란시)'·'鳥鳴澗(조명간)'·'竹里館(죽리관)'·'辛夷塢(신이오)'·'過香積寺(과향적사)' 등을 들 수 있다. 먼저 '鹿柴(녹시)'를 살펴보자.
鹿柴녹시
空山不見人공산불견인 빈 산에 사람 보이지 않고
但聞人語響단문인어향 말소리만 들리네
返景入深林반경입심림 반사되는 그림자 깊은 숲에 들어와
復照靑苔上복조청태상 다시 푸른 이끼 위에 비치고 있네
시인은 순간적인 직관으로 빈 산의 석양 무렵 깊은 숲 속에 비쳐 드는 한 줄기 저녁 햇살에 반사되는 이끼의 푸른빛과 들릴 듯 말 듯한 사람의 음성을 담담한 심정으로 묘사하였다.
이 시에서 삼라만상은 저물어 가는 저녁 햇살 아래서 비로소 그 숨겨진 모습을 드러낸다. 실로 한낮의 작열하던 태양이 그 열기를 거두어 갈 때의 고요함(寂;적) 속에서 비춤(照;조)은 사물의 모습을 더욱 선명하게 보여주고, 이때 자연을 바라보는 시인의 눈은 더욱 밝아진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수동적으로만 바라보던 자연을 자신의 눈으로 직접 바라보는 것이다. 하지만 이윽고 저녁 어스름이 숲 속에 깔리면, 시인은 숲 속에 조용히 앉아 순간순간 변하는 자연현상들이 모두 허망한 환각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이 시의 특징은 단지 20자의 글자로서 눈에 보이지 않는 '幽人(유인)'의 음성과 깊은 숲 속에 스며드는 한 줄기의 저녁 햇살을 연결시킴으로써 텅 빈 산 속에 단지 사람 소리의 메아리만 들려 와 더욱 쓸쓸함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왕유가 추구하고자 했던, 세속의 먼지와 시끄러움을 멀리하는 空(공)이며 또한 寂(적)의 경지이다.
또한 이 시에서는 있는 듯 없는 듯 숨겨져 있어 잘 파악되지 않는 경치를 그리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이런 현상에 대해 청대의 趙殿最(조전최)는 그의 동생 趙殿成(조전성)이 쓴 {王右丞集注(왕우승집주)}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우승은 선리에 정통하여 그의 시를 아무리 뒤집어 보아도 그 진실을 보기 어렵다. 그는 中道(중도)의 진리를 깊이 체득하였으니 '空外(공외)의 소리'요 '수중의 그림자'라. 그 향기는 과일의 즙과 같고 그 열매는 참외와 같이 달며 잘 익은 술과 같다. 使人(사인)이 찾아도 그 틈을 찾을 수 없으며 좇아가고자 해도 갈 수 없으니 그의 자취가 空(공)할 뿐이다. 오직 홀로 그 종에 도달했도다.
'鹿柴(녹시)'에서 잘 나타나듯이 왕유의 인식, 즉 자연이란 한 순간에 변하는 환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선종의 유심주의적 이해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선종의 색공 관념은 세계가 궁극적으로 객관존재의 과정이라는 것을 부정하고 일체 사물의 현상은 '寂滅(적멸)'에 귀결된다고 설명한다. 왕유의 유심주의적 인식이 잘 드러나 있는 '木蘭柴(목란시)'를 보자.
木蘭柴목란시
秋山斂餘照추산렴여조 가을 산 남은 빛을 거둬들이고
飛鳥逐前侶비조축전려 날던 새들도 짝을 지어 돌아가네
彩翠時分明채취시분명 푸른 햇살에 빛나던 산 빛마저도
夕嵐無處所석람무처소 가을 저녁 어스름에 사라지는구나
이 시에서 시인은 예리한 관찰을 통해, 석양의 남은 빛이 가을 산에서 사라지고 하늘을 날던 새들도 모두 둥지로 돌아간 뒤 한때 푸른 햇살에 빛나던 산 빛이 사라지는 가을의 고요한 저녁풍경을 묘사하였다.
시인은 여기에서 '鹿柴(녹시)'와 마찬가지로 모든 자연계의 生滅變化(생멸변화)를 자신의 직관 속에 응집시키고 있다. 또 시인은 모든 아름다운 현상을 무상한 것으로 보고 있으며, 夢幻(몽환)과 같은 美(미)의 허망부실로 여기고 있다. 그런데 이처럼 미(아름다움) 현상에 대한 허망부실의 인식 밑바탕에는 선의 色空(색공)사상이 농후하게 깔려 있다.
이는 {열반경}에서 "마치 허공을 나는 새처럼, 그 자취를 찾을 수 없다"(如鳥飛空;여조비공, 迹不可尋;적불가심)는 것이나, {화엄경}에서 "제법적멸을 깨달은 자, 마치 허공을 나는 새처럼, 그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了知諸法寂滅(요지제법적멸), 如鳥飛空(여조비공), 無有迹(무유적)」라는 구절들이 말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청대의 徐增(서증)은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마힐은 불교의 가르침에 정통했으며, 그가 쓴 모든 문장은 붓다의 가르침에 부합된다.
(摩詰精大雄氏之學, 篇章詞句, 皆合聖敎.)
(마힐정대웅씨지학, 편장사구, 개합성교.)
이것은 왕유 시의 핵심을 명쾌하게 지시하고 있다.
辛夷塢신이오
木末芙蓉花목말부용화 나무 끝에 연꽃
山中發紅악산중발홍악 산 속에 붉게 피었네
澗戶寂無人간호적무인 개울 옆 인적 없는 집에
紛紛開且落분분개차락 어지러이 피었다 지네
이 시는 언뜻 보면 목련 핀 산 속의 움직임(動)을 묘사하고 있는 듯하다. 시인은 이 시에서처럼 대지에 내리는 가랑비의 모습, 들녘에 쌓이는 낙화, 깊은 계곡에서 우는 새, 희미한 등불 주변에 모여드는 곤충들, 미풍에 흔들리는 실버들 등을 즐겨 묘사했는데, 이것들은 한결같이 '動中靜(동중정)' 혹은 '靜中動(정중동)'의 관점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주목할 점은, 시인이 표출한 '움직임'은 자연계의 운동변화와 생기발랄한 움직임이 아니다. 그것은 시인이 말하는 공허한 聚散生滅(취산생멸)일 뿐이며 감각적으로도 고립된 단편적 영상으로, 시인은 단지 자신의 虛融淡泊(허융담박)한 정서를 자연의 고요한 動景(동경)에 일치시키고 있을 뿐이다. 실제 시인이 묘사하고자 하였던 '動景(동경)'의 목적은 취산생멸하는 현상에 있지 않다.
그것은 동과 정이 서로 교차되어 나타나면서 사람들의 시각에 보여지는 모든 변화 현상이 환상에 지나지 않으며, 동시에 들려지는 모든 변화 현상도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에 있다. 특히 모든 변화 현상도 환상에 불과하다는 허망부실과 무상변화는 최종적으로 '시 속에 그림이 있다'(詩中有畵;시중유화)는 왕유의 시만이 자아낼 수 있는 독특한 경지를 창출하였다.
鳥鳴澗조명간
人閒桂花落인한계화락 사람 한적한데 계화 떨어지고
夜靜春山空야정춘산공 밤은 고요하고 봄 산은 텅 비어 있네
月出驚山鳥월출경산조 달 떠오르니 산새 놀라
時鳴春澗中시명춘간중 봄 시내에서 간간이 지저귀는구나
이 시는 봄날 한적한 산 속에서의 정취를 잘 그려내고 있다. 시의 구성을 살펴보면, 1·2구에는 깊은 밤 고요한 산중의 정경 속에서 계수나무 꽃이 조용히 떨어지고 있을 뿐 어떠한 새 소리도 들려 오지 않는 고요함(靜;정)의 극치를 나타내고 있다. 3구에서는 고요하던 봄 밤의 산중에 갑자기 달이 떠오르자 산새가 놀라서 우는 모습이, 4구에서는 놀란 산새의 울음소리가 광대한 밤하늘의 적막을 흔들고 있다.
이 시의 표현수법은 '辛夷塢(신이오)'와 같다. 시인은 매우 空寂(공적)한 의경을 그린 다음 산중의 개울에서 들려 오는 새 우는 소리로써 '움직임'(動;동)을 묘사하였다. 그러나 여기에서 시인이 묘사하는 새 우는 소리는 시인이 승인하고 있는 객관 사물의 운동 변화의 결과는 아니다. 즉 시인에게는 새 우는 소리가 실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산골의 개울에서 우는 새 소리를 형상화하여 내재된 이념을 표현하는 것에 그 목적이 있다. 그러므로 이 시에는 선가에서 흔히 말하는 '정중동'의 妙理(묘리)가 시적인 흥취로 승화되어 있으며, 작품 전체가 閒靜(한정)하면서도 言外之意(언외지의)의 그윽한 맛이 풍긴다.
특히 이 시는 남조 梁代(양대)의 시인 王籍(왕적)의 "매미 우는 소리에 숲은 더욱 고요하고, 새 우는 소리에 산은 더욱 그윽하다"「蟬塞林逾靜(선색림유정), 鳥鳴山更幽(조명산경유)」를 연상케 한다. 단지 왕유는 왕적과 달리 매미 소리가 아닌 새 소리를 통해 역설적으로 深山密林(심산밀림)의 조용하고 그윽한 분위기를 묘사하고 있다.
그래서 명대 胡應麟(호응린)은 그의 {詩 (시 )}에서, '鳥鳴澗(조명간)'을 '辛夷塢(신이오)'와 더불어 '入禪(입선)'의 작품이라고 하면서, "읽으면 자신과 세계를 모두 잊어버리고, 만가지 생각이 모두 고요해진다"「讀之身世兩忘(독지신세양망), 萬念皆寂(만념개적)」고 하였다.
竹里館죽리관
獨坐幽篁裏독좌유황리 대숲에 홀로 앉아
彈琴復長嘯탄금복장소 거문고 뜯고 길게 소리내어 읊네
深林人不知심림인부지 깊은 숲 사람들 알지 못하니
明月來相照명월래상조 밝은 달이 와 서로 비추고 있네
이 시는 세간과는 멀리 떨어진 깊숙한 대숲에서 느낀 천연의 즐거움을 묘사하였다. 시인은 홀로 마음껏 거문고를 타다 이따금씩 길게 휘파람을 불어 보는데, 그윽하고 고요한 대숲이라 그의 존재를 알아주는 이는 아무도 없고, 단지 저 하늘의 명월만이 댓잎 사이로 그 은은한 빛을 비춰 내려와 동무가 되어 준다. 이처럼 시인은 대숲 속의 그윽함을 감상하는 한편 내심의 고독을 체득하는 가운데 고요함과 적막함의 즐거움 속에 빠져 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淸幽寂靜(청유적정)의 극치요, 하나의 완전한 공적의 경지임에 틀림없다. 이 시에서 避世脫俗的(피세탈속적)이고 物外超然(물외초연)의 사상을 마음껏 느낄 수 있다.
'竹里館(죽리관)'을 보면 대숲 속에서 홀로 거문고를 타고 휘파람을 부는데, 오직 명월만이 '知音(지음)'하여 깊은 숲 속으로 스며들어와 자신을 비추니, 시인은 마치 온갖 심사를 단지 저 명월에게만 털어놓을 수 있는 듯하다. 그래서 청대 唐汝詢(당여순)은 {唐詩解(당시해)}에서 이 시에 대해 "임간의 정취를 뭇 사람들은 잘 알지 못하는데, 명월만이 밝게 비추어 주니 흡사 그 뜻을 아는 듯하다"「林間之趣(임간지취), 人不易知(인불이지). 明月相照(명월상조), 似若會意(사약회의)」라고 평했다.
過香積寺과향적사
不知香積寺부지향적사 알지도 못하고 향적사 찾아가다
數里入雲峯수리입운봉 구름 깊은 곳에 들었네
古木無人逕고목무인경 고목 속으로 길은 사라졌는데
深山何處鐘심산하처종 어디선가 종소리 들려 오네
泉聲煙危石천성연위석 개울물은 괴이한 돌부리에 울리고
日色冷靑松일색랭청송 햇빛은 소나무에 차갑게 빛나고 있네
薄暮空潭曲박모공담곡 해질녘 고요한 연못가에 앉아
安禪制毒龍안선제독룡 禪定에 들어 번뇌를 잠재우리
이 시는 장안 부근 終南山(종남산)에 있는 香積寺(향적사)의 경치를 그리고 있는데, 천연의 妙境(묘경)이 실로 탈속적 정취에 깊이 젖어들게 한다. 이 시는 첫 구에 '알지도 못하고'(不知;불지)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는데, 이것은 시인의 자연스럽고도 허심한 마음을 단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나아가 이것은 '어디선가'(何處;하처)와 '사람 없는데'(無人;무인)와 서로 호응하면서 하늘을 가릴 정도의 고목으로 가득 찬 산림 속에 사람의 발자취 하나 없고 홀연히 절의 종소리가 들려 오는 향적사의 그윽한 적막감을 창출하고 있다. 게다가 기암괴석 사이로 '흐느끼는' 산 개울 소리, 푸른 솔 숲 사이로 비쳐드는 '차가운' 햇빛 등은 울창함 속에 정적이 감도는 산색을 이루면서 더욱 향적사의 깊고 그윽하며 적막한 경지를 형상화하는 것이다.
특히 이 시의 마지막 2구에서 시인은 돌연 禪語(선어)를 혼용하여 세속초탈적 寓意(우의)를 한층 드러내고 있다. 다시 말해 毒龍(독룡)은 여기에서 온갖 '헛된 생각'이나 '번뇌망상'을 가리키는 것으로, 시인은 '靜慮(정려)'의 최적 조건인 그윽하고 고요 적막한 산사에서 마음을 조용히 가라앉히고 무념무상의 참선 삼매경에 빠져들어 현실의 일체를 잊고 세속적 망념을 제압하기를 동경하고 있다.
淸溪청계
淸冬見遠山청동견원산 맑은 겨울날 먼 산 바라보니
積雪凝蒼翠적설응창취 쌓인 눈에 푸른빛이 어렸어라
皓然出東琳호연출동림 나 호연히 동림을 나왔으니
發我遺世意발아유세의 세속에 뜻을 두지 않네
이 시에서 왕유는 자신이 좋아하는 자연에 주관적 감정을 불어넣어 맑게 흐르는 시냇물에 자신의 '한담'한 사상감정을 반영시키고 있다. 특히 시인은 겨울날 먼 산을 바라보며 쌓인 눈에 푸른빛이 감도는 것을 보고 갑자기 세속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는 시적 자아를 발견한다. 이처럼 깨달음을 통한 정신적 해방은 세상을 초월하고자 하는 염원에서 비롯된 것이다.
실로 선종은 현세에서의 내심의 자아해탈을 중시하였으며, 특히 일상생활의 자잘한 일들 가운데서 계시를 얻고, 대자연의 감상과 도야 속에서 초월적 깨달음을 획득하는 데 주의를 기울였다. 그래서 송대 葛立方(갈입방)은 왕유의 산수시에 대해 "마음은 物外(물외)와 융합되어 있으며 도는 현미와 계합되어 있다"「心融物外(심융물외), 道契玄微(도계현미)」고 평하였다.
지금까지 '鹿柴(녹시)'·'木蘭柴(목란시)'·'鳥鳴澗(조명간)'·'竹里館(죽리관)'·'辛夷塢(신이오)'·'過香積寺(과향적사)' ·'淸溪(청계)' 등을 살펴보았다. 왕유 시의 가장 큰 장점은 자연의 이미지를 섬세하게 포착, 응결하여 動靜一如(동정일여)의 시계로 환원시키는 한편, 단순한 자연 묘사가 아닌 인생의 원숙한 통찰을 담고 있는 데 있다. 그리고 이 같은 원숙한 통찰력은 선종의 접촉을 통해서 체득한 內心自證(내심자증)의 心法(심법)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선종의 유심주의적 관념이 그 바탕을 굳건히 이룬다.
劉大杰(유대걸)이 왕유 시를 평하기를 "畵筆(화필)과 禪理(선리) 그리고 詩情(시정)이 삼위일체를 이루고 있다"고 지적했는데, 왕유 시에 대한 선종의 영향을 한마디로 명쾌하게 함축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3.3. 杜甫(두보)
杜甫(두보;712∼770)는 字(자)가 子美(자미)로 하남성 鞏縣(공현)에서 태어났다. 두보의 집안은 매우 훌륭한 문장가를 배출한 명망 있는 가문으로, 그의 할아버지 杜審言(두심언)은 초당의 유명한 시인이었으며, 그의 아버지 杜閑(두한)은 州刺史( 주자사)를 지냈다. 두보는 가문의 영향에 힘입어 시적 분위기가 농후한 환경에서 성장하였으며, 이런 사실을 훗날 '贈蜀僧閭邱(증촉승여구)'에서 "우리 조상은 시로써 옛날에 으뜸이셨다"(吾祖詩冠古;오조시관고)고 하였으며, '宗武生日(종무생일)'에서도 "시는 우리 가문의 일"(詩是吾家事;시시오가사)이라고 술회한 바 있다.
두보는 본래 철저한 유가 신봉자로서 충군, 애국, 애민의 태도를 견지하면서 현실을 날카롭게 비판하였다. 더불어 지배층에 대한 혐오감을 반영한, 억압받는 민중을 인간적으로 옹호하는 휴머니즘적인 시를 썼다. 특히 안사의 난이 일어나기 10년 전에 장안에서 어렵게 생활하면서 백성의 어려움과 애환을 직시한 그는, 그 속에서 조정의 부패와 모순을 절실하게 체험한다. 그리고 안사의 난을 겪으면서 민중에 대한 이러한 깊은 관심과 동정을 시로써 표출하고, 자신의 시에 시대의 역사와 사회상을 광범위하고도 깊이 있게 반영하여 훗날 '詩史(시사)'라 불리게 되었다.
두보는 유년 시절부터 철저한 유가적 환경에서 성장하였고, 그 역시 당시의 지식인들처럼 과거에 급제하여 자신의 정치적 포부를 마음껏 펼치고자 마음먹고 있었다. 하지만 두보의 사상을 살펴보면 철저한 유가사상 외에도 불교, 즉 선종의 사상이 나타나는데, 이 점은 그의 시를 연구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두보는 철저한 유가적 시인으로 인식되었으므로, 그가 선종의 영향 아래 있었다는 것은 당시 사회와 지식인 계층에 선종이 일반화되었음을 가늠할 수 있는 잣대가 되기 때문이다.
두보가 선사상의 陶冶(도야)를 받은 것은 젊은 시절로, 그가 선종의 영향을 받은 데에는 크게 두 가지 요인이 있다.
따라서 선종을 통해 삶의 부조리와 두보 자신의 현실적 고통을 떨쳐 버리고자 한 것이다.
실제 두보는 승려들과 교유를 하며 바둑을 두고 뱃놀이를 하였다. 또한 그는 투합한 선사들과 헤어진 뒤로도 오랫동안 친구를 통해 편지를 주고받을 정도로 후의가 있었다.
그 같은 정황을 뒷받침해 주는 '因許八寄江寧旻上人(인허팔기강녕민상인)'을 보자.
旻公(민공)을 보지 못한 것이 30년, 편지를 부치려 하니 눈물이 흥건하네. 옛날의 즐거웠던 일 지금 할 수 있을까? 늙어 가는데 새로운 시는 뉘게 주어 전할까? 그윽한 시내 대나무 아래로 바둑판 들고 따라갔고, 가사 입고 호수에 배를 띄웠던 일 생각나네. 그대가 내가 관직에 있음을 말했다는 말을 들었네만, 머리 하얗고 어질어질하여 단지 취하여 잠잘 뿐이라네.
(不見旻公三十年, 封書寄與淚潺湲. 舊來好事今能否, 老去新詩誰與傳. 棋局動隨幽澗竹, 袈裟憶上泛湖船. 聞君話爲官在, 頭白昏昏只醉眠.)
(불견민공삼십년, 봉서기여루잔원. 구래호사금능부, 노거신시수여전. 기국동수유간죽, 가사억상범호선. 문군화위관재, 두백혼혼지취면.)
두보의 시는 1,400여 수에 이를 정도로 대단히 많은데, 이 가운데 선종의 분위기가 배어 있는 시는 대략 37편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大雲經寺(대운경사) 주지였던 贊公(찬공)과 같은 大德(대덕)은 차치하고라도, 大覺高僧(대각고승)·太易沙門(태이사문)·旻上人(민상인)·文上人(문상인)·巳上人(사상인) 등에 관한 吟詠(음영)이 16편이다.
하지만 이 가운데 '遊龍門奉先寺(유용문봉선사)'를 비롯해 '巴上人茅齋(파상인모재)'·'遊修覺寺(유수각사)'·'後游(후유)'·'江亭(강정)'·'上牛頭寺(상우두사)' 등 寺觀(사관)을 읊은 19편은 모두 그 심중의 사단을 나타낸 佳篇(가편)들로 선사상의 영향을 선명하게 반영하고 있다. 먼저 '巳上人茅齋(사상인모재)'를 살펴보자.
巳上人茅齋(사상인모재)
巳公茅屋下(사공모옥하) 사공의 초가 밑
可以賦新詩(가이부신시) 청신한 시를 지을 법하다
枕점入臨僻(침점입림벽) 목침이며 대자리 들고 숲 깊은 곳으로 들어가
茶瓜留客遲(다과류객지) 차랑 외랑 내놓아 객을 늦도록 머물게 한다
江蓮搖白羽(강연요백우) 강 속의 연꽃 하얀 깃 부채 흔들고
天棘蔓靑絲(천극만청사) 천문동은 푸른 실을 뻗치고 있다
空첨許詢輩(공첨허순배) 공연히 허순의 무리를 욕되게 할 뿐
難酬支遁詞(난수지둔사) 지둔의 말씀 대답하기 어렵기만 하다
이 시는 개원 29년 사상인이라는 승려를 방문하여 여름날 하루를 보내며 느낀 한적한 정취를 읊은 작품이다. 다만 당시에는 승려를 '上人(상인)'으로 표기했는데, 巳上人(사상인)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이 시는 선종의 영향이나 선적 悟境(오경)이 나타나기보다는 두보가 선사와 교류하고 있음을 밝히는 것으로 그 의의를 갖는다. 다만 여기에서 시인은 지둔과 허순을 빌려 자신의 재주 없음을 고백하고 있다. 지둔은 진나라 고승으로 자는 도림이며 일찍 지형산에 은거하여 수도한 사람이다. 허순은 진나라 사람으로 자는 원도이며 산수유람을 좋아하였다.
그런데 {고승전}에 따르면, 지둔이 {유마경}을 강의하는데 그가 한 가지 경의를 통해하면 허순이 문제를 제기하지 못했으며, 허순이 문제를 제기하면 지둔 역시 다시 통해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이처럼 시인은 지둔과 허순을 빗대 자신의 재주 없음을 간접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大雲寺贊公房四首·其二(대운사찬공방사수·기이)
世軟靑絲履(세연청사리) 가늘고 연한 옥색 노끈 미투리
光名白첩巾(광명백첩건) 빛이 나는 하얀 명주 수건이라
深藏供老宿(심장공노숙) 이는 깊이 간직된 노스님 차지인데
取用及吾身(취용급오신) 선뜻 내주어 내 몸에 지니게 됐네
自顧轉無趣(자고전무취) 돌아보면 별다른 운치도 없는 나인데도
交情何尙新(교정하상신) 대하는 정분이 어째서 갈수록 새로운고
道林才不世(도림재불세) 도림과 같은 재주 세상에 드물고
惠遠德過人(혜원덕과인) 혜원 같은 덕 보통을 훨씬 뛰어넘네
雨瀉暮첨竹(우사모첨죽) 추녀와 대숲에 저녁 비가 내리는데
風吹春井芹(풍취춘정근) 우물가의 미나리에 봄바람 부네
天陰對圖畵(천음대도화) 하늘마저 어둑한 오늘 벽화를 대하니
最覺潤龍鱗(최각윤용린) 새삼 용의 비늘이 젖어 있음을 깨닫네
이 시는 대운사의 주지인 贊公(찬공)을 찾고서 느낀 시인의 심정을 읊은 연작시 4편 가운데 두 번째 작품이다. 대운사는 장안 주작가에 있는 당의 총본산으로 대운경사라고도 한다. 시의 내용을 살펴보면, 1·2구에서는 두보가 안록산 적군의 연금에서 탈출할 무렵의 숨가쁜 일들이 묘사되었다. 40대 전반까지 두보의 삶은 한마디로 발버둥의 연속이었다.
벼슬하기 위해 그랬고 살기 위해 갖은 고난을 겪었으며, 한동안 자학도 했고 특별 채용을 위해 진정하는 글 '예부'도 올렸다. 그런가 하면 빈곤에 견디다 못해 처자를 처가로 소개시키는 궁상도 떨었다. 그러나 두보의 불운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두보는 왕유와 마찬가지로 안록산의 반란군을 만나 연금이 되는 액운까지 겪었다.
제7·8구의 '도림'은 진대 고승인 支遁(지둔)의 자요, '혜원' 역시 진대의 고승으로, 둘 다 훌륭한 스님들이다. 두보는 이 두 고승을 통해 찬공의 재주와 덕을 찬송하였다. 제11·12구는 대운사 동쪽 벽에 隋(수)의 參軍(참군)으로 그림을 잘 그렸던 양글안(楊契丹;양계단)의 벽화를 보고서 느낀 정회를 노래하였다.
이 시를 보면 두보와 찬공 스님 간에 이미 안면이 있는 것으로 보아, 두보가 선사와 교류하였음을 증명하고 있다. 두보는 찬공에 대한 인간적인 애정에 감복했으며, 그에 대한 평가도 덧붙이고 있다. 찬공은 도림처럼 세상에서 드물고, 혜원처럼 비범한 스님이다.
두보는 적군의 연금에 갇혔다가 겨우 탈출하여 육체적·정신적으로 몹시 지쳐 있을 때 찬공의 도움을 받아 대운사에서 은신하였다. 두보는 자신에게 정신적 위안을 주는 찬공에게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그래서 두보는 별다른 운치도 없는 무뚝뚝한 자신에게 그토록 따스함을 베푼 찬공에게 더욱 감화되었으며, 그 감화는 선종에 대한 이해로 심화된다.
宿贊公房(숙찬공방)
杖錫何來此(장석하래차) 석장을 짚고서 언제 여길 오셨소
秋風已颯然(추풍이삽연) 가을 바람은 벌써 을씨년스러운데
雨荒深院菊(우황심원국) 그윽한 절의 국화는 비에 꺼칠하고
霜倒半池蓮(상도반지련) 연못의 반쯤인 연은 서리에 꺾어졌네
放逐寧違性(방축영위성) 내쫓겨 와 있다고 불성이야 어기겠소
虛空不離禪(허공불리선) 가만한 마음은 참선에서 뜨지를 않아
相逢成夜宿(상봉성야숙) 반갑게 만나서 잠을 자다 보니
롱月向人圓(롱월향인원) 농월이 인간을 향해 둥그럽니다
이 작품은 대운사 지주였다가 秦州(진주)로 쫓겨 나와 있는 고승 찬공의 방에 자면서 지은 시이다. 찬공은 두보에게 특별한 스님이다. 찬공은 비록 스님이었지만 갖은 풍상을 겪은 두보에게 은신처를 제공한 참으로 고마운 선사이다. 그런데 찬공이 장안에서 멀리 진주로 쫓겨난 신세가 되었다.
이전부터 두보는 찬공을 당시 어느 선사보다도 훌륭한 스님이라고 여겼기에, 그러한 사실이 너무나 가슴이 아팠다. 찬공을 내쫓은 사람들이 원망스러웠고, 따라서 두보는 예나 지금이나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불성을 닦으며 참선에 정진하는 찬공을 보고 한편으로는 새삼 감복한 것이다.
특히 이 시는 찬공과 두보의 쓸쓸한 신세와 착잡한 심정을 국화와 연을 통해 절실히 반영하고 있다. 다시 말해 서리에도 꿋꿋한 국화가 비를 맞아 헝클어졌고, 진흙 속에서도 곱게 피는 연은 서리를 맞아 꺾어져 몰골이 말이 아니다.
이는 비록 한 사람은 스님이고 한 사람은 시인으로 신분은 다르지만, 둘 다 세상에서 버림받아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처지에 있는 심정을 대변하고 있다. 더구나 아무렇지도 않은 듯 參禪(참선)하고 가부좌한 찬공의 後光을 국화와 연과 대조적으로 의미화하면서 마치 한 편의 영화처럼 뛰어난 영상미를 표출하고 있다.
遊龍門奉先寺(유용문봉선사)
已從招提遊(이종초제유) 이미 절을 따라 노닐었는데
更宿招提境(경숙초제경) 다시 절의 경내에서 잠을 청한다
陰壑生虛렴(음학생허렴) 그늘진 골짜기엔 바람이 일고
月林散淸影(월림산청영) 달빛 비치는 숲엔 맑은 그림자 흩어진다
天關象緯逼(천관상위핍) 천관에는 星象이 다가들고
雲臥衣裳冷(운와의상랭) 구름 속에 누우니 옷이 차갑다
欲覺聞晨鐘(욕각문신종) 막 잠에서 깨려 할 때, 새벽 종소리 들려 와
令人發深省(영인발심성) 사람으로 하여금 깊은 성찰을 하게 한다
이 시는 開元(개원) 24년(736) 무렵, 두보가 낙양에서 거행된 과거시험에서 낙방한 직후에 낙양에서 노닐며 지은 작품이다. 본래 낙양은 일찍부터 불교의 성지로, 龍門(용문)은 당시 하남의 伊闕(이궐)에 있는 산 이름인데 낙양의 서남쪽에 있었다. 특히 그곳은 북위와 당대의 두 차례 불상 조각 작업의 열기를 거쳐서 150년 동안 십만 개의 불상이 조각될 정도로 불교의 성지였다.
두보는 낙방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해 예전부터 왕래하던 용문 봉선사에서 하룻밤을 청하면서, 그곳에서 승려와 함께 노닐며 과거의 실패에서 오는 좌절감을 이겨내려고 노력하였다.
이 시는 고체시의 장법이 근체시에 적용된 작품으로, 시의 구성을 살펴보면 첫 두 구는 두보가 봉선사에서 노닐다 잠을 청하는 장면을 노래하고 있다.
두보는 여기에서 봉선사를 '招提(초제)'(범어 catur-de a의 음역으로 '깨끗한 도량'이란 뜻)로 비유하고 있는데, 이는 그만큼 두보가 선종에 대한 이해가 깊음을 나타내고 있다. 3구에서부터 6구까지는 모두 봉선사의 야경을 그리고 있다. 특히 마지막 2구에서 시인이 막 잠에서 깨어나 새벽 종소리를 듣고 성찰하는 모습은 더욱 선적인 분위기를 농후하게 만든다.
그래서 王嗣奭(왕사석)은 이 시에 대해 그의 {杜鏡(두경)}에서 "이 시는 景色(경색)이 맑고 시원하며, 선어를 사용하지 않고도 선리를 얻고 있으니, 묘하다고 하겠다"「此詩景趣冷然(차시경취랭연), 不用禪語而得禪理(불용선어이득선리), 故妙(고묘)」고 하였다.
한편 두보는 천보 14년(755), 장안과 奉天(봉천) 사이를 왕래하며 안록산과 사상명의 난이 일어난 1년을 어수선하게 보내면서 '夜聽許十一誦時而有作(야청허십일송시이유작)'을 짓는다.
夜聽許十一誦時而有作(야청허십일송시이유작)
許生五臺賓(허생오대빈) 허씨는 오대산에서 불교를 배운 이로
業白出石壁(업백출석벽) 그의 고결한 수행은 분주의 석벽곡으로부터 나온 것이라네
余亦師粲可(여역사찬가) 나 역시 승찬과 혜가의 선을 배운 적이 있지만
身猶縛禪寂(신유박선적) 이 몸은 여전히 선적의 집착에 얽매여 있을 뿐이라네
何階子方便(하계자방편) 어찌하면 그대의 방편을 밟아
謬引爲匹敵(유인위필적) 외람되이 이끌려 필적하는 상대가 될 수 있을까요?
離索蔓相逢(이색만상봉) 사람들 곁을 떠나 쓸쓸히 살다 늦게서야 그대를 만나
包蒙欣有擊(포몽흔유격) 몽매함을 안아 주어 즐겁게 깨우침 받았습니다
(下略) - 하략
이 시는 두보가 천보 14년 장안에 있을 때 허씨가 시를 암송하는 것을 듣고서 즐거운 마음과 더불어 느낀 감회가 깊어 지은 것이다. 이 시를 보면, 두보는 자신이 선종에 입문하여 선종의 제2조인 혜가와 제3조인 승찬의 도를 배워 몸소 선사상을 실천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두보가 선을 배우고자 한 것은, 어쩌면 현실의 괴로움을 견딜 수 없어 선적으로 도피하려고 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두보는 허씨와 달리 아직도 선적에 얽매여 있었고, 그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더욱이 두보는 자신의 몽매함을 즐겁게 깨우쳐 주는 허씨가 고마울 뿐이다. 이 시는 앞에서 살펴본 다른 시와 달리 두보의 시를 연구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시사점을 보여준다. 그것은 바로 두보 자신이 선종을 정통으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밝힌 점이다. 두보는 이 시 외에도 '秋日夔府 懷奉寄鄭監李賓客一百韻(추일기부 회봉기정감이빈객일백운)'에서 자신과 선종과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秋日夔府 懷奉寄鄭監李賓客一百韻(추일기부 회봉기정감이빈객일백운)
行路難何有(행로난하유) 갈 길 어렵다는 말 세상에 어디에 있는가?
招尋興已專(초심흥이전) 정공과 이공 두 분을 찾고자 하니 마음 이미 한결같아라
由來具飛楫(유래구비즙) 여태껏 쾌속선 준비하였으니
暫擬控鳴弦(잠의공명현) 잠시 거문고 줄 눌러 연주코자 하노라
身許雙峰寺(신허쌍봉사) 몸을 쌍봉사에 두고
門求七祖禪(문구칠조선) 칠조의 선문을 두드렸네
落帆追宿昔(낙범추숙석) 돛을 내리고 옛 생각 더듬으며
衣褐向眞詮(의갈향진전) 거친 베옷 입고 선의 세계 구하네
安石名高晉(안석명고진) 정공은 동진 명류이신 謝安 같은 풍류 지니셨고
昭王客赴燕(소왕객부연) 이공은 연으로 현사들이 오게 한 소왕의 장점 지니셨네
途中非阮籍(도중비완적) 반길 주인 있으니 길 막혀 울었던 완적 신세 면할 테고
査上似張騫(사상사장건) 배 타고 내려가니 뗏목 타고 황하 근원 찾았던 장건 모습이라
披闊雲寧在(피활운녕재) 거침없이 헤쳐 가니 구름인들 어찌 있을 것이며
淹留景不延(엄류경불연) 한 곳에 오래 머물면서 경물 때문에 시간 지체하지 않으리
風期終破浪(풍기종파랑) 바람은 끝까지 파도를 잠재우길 바라고
水怪莫飛涎(수괴막비연) 수룡은 풍랑을 일으키지 말지어다
他日辭神女(타일사신녀) 얼마 뒤면 무산의 신녀와 헤어질 텐데
傷春怯杜鵑(상춘겁두견) 봄을 타는 마음에 두견새 울음소리 두려워라
澹交隨聚散(담교수취산) 기주의 친구들과 헤어져
澤國遙회旋(택국요회선) 두 분 계신 강릉으로 아득히 돌아가리
本自依迦葉(본자의가섭) 본래 나 스스로 가섭의 불문에 귀의코자 했으니
何曾藉악佺(하증자악전) 어찌 일찍이 악전같이 신선술을 빌린 적이 있었겠는가?
爐峰生轉盼(노봉생전반) 눈동자 잠깐 돌려 바라보니 향로봉이 생겨나고
橘井尙高건(귤정상고건) 蘇耽의 귤나무는 아직도 馬嶺山 높이 자라네
東走窮歸鶴(동주궁귀학) 동쪽으로 가더라도 학이 되어 고향 찾을 것이며
南征盡접鳶(남정진접연) 남쪽으로 떠나면 솔개도 떨어뜨린다는 장기를 다 이겨내리
晩聞多妙敎(만문다묘교) 만년에 불교의 오묘한 가르침을 많이 들어
卒踐塞前愆(졸천새전건) 마침내 실천으로 이전의 허물을 다 막으리
顧愷丹靑列(고개단청열) 동진의 고개지는 瓦棺寺에 단청으로 유마힐상을 그렸고
頭陀琬琰鐫(두타완염전) 齊(제)의 王簡棲(왕간서)는 頭陀寺(두타사)에 미옥 같은 문장으로 비문을 지었네
衆香深암암(중향심암암) 뭇 향이 짙게 천지를 덮으니
幾地肅천천(기지숙천천) 곳곳이 碧色(벽색)으로 엄숙하구나
勇猛爲心極(용맹위심극) 용맹하게 떠나겠다는 마음을 극대로 키우며
淸영任體孱(청영임체잔) 파리하여 약해진 몸 방임해 버리네
金비空刮眼(금비공괄안) 금비로 눈병을 치료한들 부질없으니
鏡象未離銓(경상미리전) 거울 속 물상을 저울대로 헤아리는 것에서 벗어나지 못하리
이 시는 두보 시 가운데 가장 긴 오언율시로, 두보가 대력 2년 강릉에 있던 鄭審(정심)과 伊陵(이릉)에 있던 李之芳(이지방)이 여러 차례에 걸쳐 그에게 시로써 안부를 묻는 데 대하여 酬贈(수증)하며 지은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주목할 점은 "칠조의 선문을 두드렸네"와 "거친 베옷 입고 선의 세계 구하네"라고 말했듯이, 두보가 예전에 스스로 선종을 배우고 실천하려 했음을 밝히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고백은 앞서 살펴보았던 두보와 선사들과의 교류 차원을 넘어서 직접 선종을 탐색하려 했음을 증명해 준다.
그리고 선종에 대한 탐색과 그 실천은 이 시의 후반부에서도 잘 나타나듯이, 여생을 불교성지를 두루 순방하고 고요한 참선과 불교의 이치를 깨닫기를 소원하여, "만년에 불교의 오묘한 가르침을 많이 들어, 마침내 실천으로 이전의 허물을 다 막으리"라고 다짐할 정도로 강력해진다.
특히 이 시에는 불교 용어와 불교 전고가 대량으로 사용되고 있다. 즉 衆香深 (중향심 ) 은 {유마힐경}의 "有國名衆香(유국명중향), 佛號香積(불호향적)"을, 勇猛爲心極(용맹위심극)은 {능엄경}의 "發大勇猛(발대용맹), 行一切難行法事(행일절난행법사)"를, 鏡象未離銓(경상미리전)은 {원각경}의 "諸如來心(제여래심), 於中顯現(어중현현), 如鏡中像(여경중상)"에서 각각 인용한 것이다.
결국 이 시에는 두보가 만년에 선종의 妙理(묘리)와 진실한 깨달음에 의지해 해탈을 구하고자 한 심정이 가장 잘 표현되어 있다.
3.4. 韓愈(한유)
韓愈(한유;768∼842)는 字(자)가 退之(퇴지)로 중당을 대표하는 문학가이다. 그는 유종원과 함께 고문운동을 제창하여 '복고'를 기치로 삼아, 先秦(선진)과 兩漢(양한)의 산문전통을 계승할 것을 주장하고 文以載道(문이재도)를 강조하였다.
한유는 고문가답게 자신의 시풍을 尙怪(상괴)와 산문화의 방향으로 발전시킴으로써 당시의 새로운 일가를 이루었다. 그래서 송대의 진사도는 그의 {後山居士詩話(후산거사시화)}에서 "퇴지는 문으로써 시를 쓰고, 자첨은 시로써 사를 썼다" 退之以文爲詩(퇴지이문위시), 子瞻以詩爲詞(자첨이시위사)라고 하였다.
한유는 중당의 대표적인 排佛論者(배불론자)이다. 그렇지만 그의 排佛(배불)은 개인적인 입장에서 출발했다기보다는 그가 활동했던 중당의 불교환경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사실 남북조 이후로 寺院經濟(사원경제)가 나날이 발전하면서, 불교는 사회생활에 영향을 주는 중요한 역량이 되었다. 더욱이 당의 통치자는 유불도 3교 병행 방침을 세워 불교세력에 대해서 의거하고 연합하며 이용하는 정책을 취했다. 그러나 일부 불교도들은 가사를 벗어 던지고 고급 관료가 되고자 했으며, 명리를 추구하고 사치하고 부패했기 때문에 점차 종교적 기능을 상실하고 사회적 모순을 초래하였다.
이런 모순이 발생하자 당 무종은 불교를 없애고자 26만의 승니를 환속시키고 15만 개의 사원노비에게 자유를 주었으며, 良田(양전) 수십만 경을 몰수하고 사원 수천 개소를 철폐하여 불교에 막대한 타격을 주었다. 그러나 당조의 불교와 도교의 숭상으로 승려계급에게는 면세와 면역의 특권을 부여했고, 이런 까닭으로 평민에게 이것이 과중하게 짐지워지자 병역과 부세를 피해 사원의 소작인이 되거나 승려가 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고, 급기야 이러한 양상은 世族(세속)지주와 僧侶(승려)지주를 탄생시키기도 하였다.
더욱이 안사의 난 이후 승려들은 경제적 세력을 확장하면서 정치적으로 조정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덕종은 정원 6년 岐州(기주)에 풍년과 民安(민안)을 위한 목적으로 무하왕사에서 불공을 궁 안으로 들여와 공양했는데, 그것이 풍습으로 굳어졌다.
또 봉상 법문사의 탑 속에는 석가모니의 佛骨(불골;손가락 뼈)이 있었는데, 헌종은 원화 14년 한유가 刑部侍郞(형부시랑)으로 있을 때, 30년마다 열리는 法文(법문)이 있는 해에는 풍년이 들고 나라가 평안해진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 불골을 궁내에 3일 동안 안치하고 예배하면서 공경대신들도 이 예식에 참여하게 하였다. 그래서 이에 격분한 한유는 '論佛骨表(논불골표)'를 짓는다.
한유는 '논불골표'에서 배불하는 이유를 세 가지로 들고 있다. 첫째, 불교를 신봉한다고 하여 반드시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몸을 해치고 경제적 악영향을 끼친다. 둘째, 석가모니는 오랑캐이므로 중국의 고유 사상과는 부합되지 않는다. 셋째, 불교에 대응하여 도통을 내세워 유가의 체계를 마련하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한유는 헌종의 노여움을 사 결국 潮州(조주)로 좌천되는 곤경을 치른다.
한유는 당시 그 누구보다도 불교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논불골표' 때문에 좌천될 정도로 불교에 대하여 매우 반대 입장을 지녔던 그가 승려들과 교류하거나 산사에 놀러 간 일을 시로써 읊은 것이다. 이는 '山石(산석)'·'送惠師(송혜사)'·'送靈師(송영사)' 같은 작품에 나타나고 있다. 이 가운데 먼저 한유 시의 대표적 작품인 '山石(산석)'을 살펴보자.
山石 (산석)
山石락학行徑微(산석락학행경미) 산 돌은 울묵줄묵 앞길은 좁은데
黃昏到寺편복飛(황혼도사편복비) 황혼에 절에 이르니 박쥐들 나네
升堂坐階新雨足(승당좌계신우족) 본당에 올라 섬돌에 앉으니 새 비 족히 내리고
芭蕉葉大梔子肥(파초엽대치자비) 파초 잎 넓고 치자 열매 탐스럽네
僧言古壁佛畵好(승언고벽불화호) 스님은 낡은 벽 부처 그림 좋다면서
以火照來所見稀(이화조래소견희) 불을 가져와 비치는데 보는 그림 희한하네
포床拂席置羹飯(포상불석치갱반) 자리 펴고 상 놓고 국과 밥 놓았는데
疏려亦足飽我饑(소려역족포아기) 궂은 밥 또한 나의 시장기 채우기 족하네
夜深靜臥百蟲絶(야심정와백충절) 밤 깊어 조용히 누우니 온갖 벌레 잠잠한데
淸月出嶺光入扉(청월출령광입비) 맑은 달 산을 넘어 사립으로 들어오네
天明獨去無道路(천명독거무도로) 날이 밝아 홀로 가니 길이 없어
出入高下窮烟비(출입고하궁연비) 들락날락 오르락내리락 안개구름 헤쳐 가네
出紅澗碧紛爛漫(출홍간벽분난만) 붉은 산 짙은 개울물 난만하게 엉키었는데
時見松력皆十圍(시견송력개십위) 이따금씩 보이는 소나무 참나무 모두 열 아름 넘네
當流赤足踏澗石(당류적족답간석) 물길 만나 발 벗고 개울 돌에 앉으니
水聲激激風吹衣(수성격격풍취의) 물소리 콸콸 소리내어 흐르고 바람은 웃옷을 스치네
人生如此自可樂(인생여차자가락) 인생은 이같이 스스로 즐길 만한데
豈必局促爲人기(기필국촉위인기) 어찌 구차하게 굴레에 매일까?
嗟哉吾黨二三子(차재오당이삼자) 아아! 우리 친구 두서넛
安得至老不更歸(안득지로불경귀) 편안히, 늙을 때까지 돌아가지 않으리
시인은 德宗(덕종) 정원 17년(801) 7월 22일 李景興(이경흥)·侯喜(후희)·尉遲汾(위지분) 등과 함께 낙양 북쪽에 있는 惠林寺(혜림사)를 유람하였다. 그래서 이 시는 '山石(산석)'으로 題名(제명)되어 있으나, 실제는 혜림사의 정경을 통해 관직에서 쫓겨나 유람하면서 느낀 자신의 심정을 游記文(유기문)의 방식으로 읊고 있다.
이 시에서 나타나는 시간은 황혼부터 다음날 이른 아침까지로 대략 12시간인데,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시인은 맑은 달빛이 사립문으로 들어올 정도로 좋은 날씨에 황혼 무렵 절에 도착한다. 그리고 깊은 밤 조용히 누워 풀벌레 소리를 듣고 사립문으로 들어오는 맑은 달빛을 감상하면서 잠에 빠져든다.
다음날 날이 밝자 다른 곳으로 홀로 가려 하지만 행선지가 정해지지 않아 산 속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결국엔 시인과 동행한 친구들이 머물고 있는 절로 돌아오고, 다시는 굴레에 얽매여 있는 바깥 세상으로 가지 않을 것을 다짐하고 있다.
시인은 이 시에서 기괴하고 난삽한 시어와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예를 들어 첫 구의 '? '은 산에 돌이 어지러이 있는 모양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통 시인들이 많이 쓰지 않는 시어이다. 또 2구에서 시인 일행이 혜림사에 도착하니 박쥐만 날고 있다는 표현은 이 시만이 지닌 특징이다. 이 시를 보면 시인이 어느 정도 불교를 이해하고 있음을 불화를 통해 알 수 있다.
스님은 벽에 그려진 옛 불화가 참으로 좋다고 하면서 불빛을 비추어 불화를 보여주고, 시인은 그 불화를 보고서 '희한하다'(稀;희)고 평가한다. 사전에 불화에 대한 나름대로의 식견이 없으면 좀처럼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전제한다면, 시인이 불화에 대하여 '희한하다'고 한 말에는 이미 다른 불화에 대한 사전 지식이 있음을 반증한 셈이다.
더군다나 이 시의 마지막 두 구에서 흐르고 있는 '산사의 기쁨'은 유교를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불교를 극단적으로 배척하다가 상소를 올리고 좌천을 당했던 그의 입장에서 볼 때, 불교에 대한 입장이 이전과 달라져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마지막 4구에서 나타나는 시인의 인생관에는 세간초월적 사상까지 노출된다.
즉 시인은 인생이란 즐길 만한 것이므로 굴레에 구차하게 얽매일 필요가 없음을 강조하고 있고, 나아가 자신은 물론이고 친구들 역시 늙을 때까지 좀처럼 산사에서 나가지 않을 것임을 천명하고 있다.
한편 한유 시에 대한 선종의 영향은 시의 창작방법에서도 현저하게 드러난다. 한유는 시의 창작방법에 있어 불경게송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 불경게송을 통한 시창작은 한유 이전에 선종의 영향을 받았던 한산자나 왕유 그리고 두보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창적인 것이다.
불경의 문체는 偈頌(게송)과 長行(장행)으로 나뉜다. 게송이란 장행과 상대적인 문체로서, 장행이 산문형식에 가까운 반면에 게송은 시에 접근해 있다. 게송은 일반적으로 사언과 육언이 번갈아 사용되기도 하지만 오언과 칠언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가운데 오언의 句式(구식)이 가장 많이 사용된다.
게송의 공통적인 특징은 그 구식이 매우 정교하여 일정 수준 이상의 음절의 미를 체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 게송은 비록 압운과 평측에 時調(시조)를 和諧(화해)하고 있지 않지만 사람에게 감동을 준다. 그리고 이 점은 중국시가가 바로 요구하는 기준과 크게 부합되어 譯文體制(역문체제)의 출현으로 일종의 산문적 성격을 가진 '비시의 시'(非詩之詩;비시지시)를 산출했으며, 실제적으로 '문으로써 시를 쓰는'(以文爲詩;이문위시) 기풍이 형성되었다.
한유 시의 작시방법이 실제적으로 불경게송에 의해 어떻게 개발되었는지, 그의 '南山詩(남산시)'를 통해 살펴보자.
南山詩(남산시)
(前略) -(전략)
或連若相從(혹연약상종) 혹 이어지기는 서로 좇아 노는 듯하고
或蹙若相鬪(혹축약상투) 혹 쭈그리기는 서로 싸우는 듯하네
或妥若미伏(혹타약미복) 혹 멈추기는 낮게 엎드리는 듯하고
或송若驚구(혹송약경구) 혹 두렵기는 놀란 꿩이 우는 듯하네
或山若瓦解(혹산약와해) 혹 흩어지기는 기와가 깨지는 듯하고
或赴若輻輳(혹부약폭주) 혹 한 곳으로 나아가기는 바퀴 살이 살통에 모이는 듯하네
(後略) -
이 시는 한유가 39세(807) 때 지은 작품으로, 장안 남쪽에 있는 종남산을 묘사한 204구로 이루어진 장편시이다. 이 시에는 불경게송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 많이 나타나는데, '或(혹)'字가 117구에서부터 176구까지 무려 59회나 될 정도로 대량으로 쓰이고 있다는 점에서 그 흔적을 단적으로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한유가 이 시에서 시의 첫머리에 '或(혹)'자를 사용하는 방법은 曇無讖(담무참) 역 {佛所行讚(불소행찬)}의 번역문체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불소행찬}은 馬鳴(마명)의 저작으로서 붓다의 전기와 생애를 묘사한 장편 서사시인데, 그 문장이 매우 화려하여 범어 불교문학 가운데 으뜸가는 작품이다.
더욱이 北凉(북량)의 담무참 한역본은 전편의 체제가 오언게송이고 한유의 '남산시'도 오언고체의 장편시여서 형식상 일치하고 있다. 또 담무참 역 {불소행찬} [파마품]에 실린 길고 짧은 게송에서는 수십 번이나 '或(혹)'자를 사용했을 뿐만 아니라 '남산시'와 같이 각종 방식으로 詭異險怪(궤이험괴)한 사물의 형상을 묘사한 공통점을 보이고 있다.
한유의 시에 나타나는 선종의 또 하나의 영향은 시어에서도 나타난다. 먼저 한유는 그의 시에 '何(하)'字를 반복제문의 구식으로 연속 사용하는 구법을 즐겨 사용하여 詩歌(시가) 언어의 산문화를 추구하였다. 그의 '贈別元十八協律(증별원십팔협율)'을 보자.
贈別元十八協律(증별원십팔협율)
子兮何爲者(자혜하위자) 그대여 무엇이 되려 하는가?
官패立憲憲(관패입헌헌) 갓에 옥고리 장식을 가득 달도록 하게
何氏之從學(하씨지종학) 누구를 따라 배우려는가?
蘭蕙已滿원(난혜이만원) 난초의 그윽한 향 가득 채우게
於何玩其光(어하완기광) 그 빛을 어떻게 즐기려는가?
以至歲向晩(이지세향만) 세월이 흘러 그대 늙더라도
子兮착如何(자혜착여하) 그대여 홀로 어찌하려는가?
能自媚婉娩(능자미완만) 능히 스스로 온순함을 아름답게 하고
金石出聲音(금석출성음) 금석과 같은 음성으로
宮室發關楗(궁실발관건) 궁전의 빗장을 열어도
何人識章甫(하인식장보) 누가 章甫의 관을 알아서
而知駿蹄원(이지준제원) 준마의 발걸음을 빠르게 하겠는가?
이 시는 '남산시'처럼 장편은 아니지만 한 수의 시에 '何'자가 5번이나 반복되어 나타나고 있다. 이와 같은 시구의 결구 방식은 이 시 외에도 그의 여러 시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나는데, 그의 '孟東野失子(맹동야실자)'를 보자.
孟東野失子(맹동야실자)
失子將何尤(실자장하우) 자식을 잃었으니 장차 무엇을 탓하리요?
吾將上尤天(오장상우천) 나는 하늘을 우러러 탓할 뿐이니
女實主下人(여실주하인) 女實主(여실주)는 사람을 내려보냈으나
興奪一何篇(흥탈일하편) 목숨을 주고 뺏는 것이 어찌 이다지도 고르지 못한가?
彼於女何有(피어여하유) 女主(여주)가 어딘가에 있다면
乃令蕃且延(내령번차연) 목숨의 번성과 오래 살기를 청하겠건만
此獨何罪辜(차독하죄고) 지금 그대 홀로 무슨 죄인가?
生死旬日間(생사순일간) 생사는 旬日間(순일간)이건만
(後略) -(후략)
이 시 역시 격 구절마다 '何(하)'字를 네 번이나 사용하고 있다. 결국 '贈別元十八協律(증별원십팔협율)'·'孟東野失子(맹동야실자)' 두 시 모두 시의가 발전하는 단계에 산문방식을 주입하여 일종의 사고의 미를 체현하는 창작방법이다.
이와 같은 창작방법은 한유 이전의 당대 시가에서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 그만의 독특한 시창작 방법이다. 그리고 중요한 점은 이 같은 방법이 한유의 시가 언어 산문화에의 노력이라 볼 수도 있지만, 결국 선종의 영향으로 생긴 결과임을 부인할 수 없다.
또한 한유 시에 나타나는 선종의 영향은 시어에서도 잘 나타난다. 한유는 그의 시에 '悉(실)'과 '恒(항)'이라는 槪括語(개괄어)와 轉義語(전의어)를 잘 사용하여 공간과 시간의 연장을 나타냈다.
憶昨行和張十一(억작행화장십일)
近者三姦悉破碎(근자삼간실파쇄) 최근 삼간을 모두 파쇄하였으니
羽窟無底幽黃能(우굴무저유황능) 우굴은 그윽하게 빛나도다
鄭群贈점(정군증점)
倒身甘寢百疾愈(도신감침백질유) 몸을 자리에 누이고 달게 잠드니 백 가지 병이 없어지지만
欲願天日恒炎曦(욕원천일항염희) 도리어 천일이 아름답게 빛나기를 바라나니
이 시들에서 보여지는 '悉(실)'자는 공간을 개괄하며 '恒(항)'字(자)는 시간상의 연장을 표시한다. 이 두 구의 시를 살펴보면, 다섯 번째 글자인 '悉'과 '恒'字를 사용하여 작품의 표현력을 강화시키고 있다. 이것은 모두 불경게송과 일정한 관계가 있다.
왜냐하면 불교경전은 그 교의를 논술하는 데 시공관념의 분석에 주의를 기울이고, 사물의 발전 형태와 과정에 대한 판단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불경의 번역문에서 '실'자와 '항'자를 많이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한유의 시를 실차난타 역 80권본 {화엄경}에 실린 게송과 비교해 보면 더욱 뚜렷해진다. {화엄경}은 대부분이 칠언이며 형식상 매우 성숙되어 있으며, 다섯 번째 글자에 '悉(실)'字와 '恒(항)'字를 사용한 빈도가 매우 높아서 다 셀 수 없을 정도이다.
{화엄경} 권11 [비로자나품]
光名所照咸喜歡(광명소조함희환) 광명이 비추는 곳마다 기쁨이 있나니
衆生有苦悉除滅(중생유고실제멸) 중생의 고통을 모두 제멸한다
{화엄경} 권13 [광명각품]
至仁勇猛悉斷除(지인용맹실단제) 지극한 자비는 용맹하여 모든 고통을 단제하나니
誓亦富然是其行(서역부연시기행) 마땅히 세운 바 서원을 행하기 때문
{화엄경} 권80 [입법계품]
宮殿山河悉動搖(궁전산하실동요) 궁전 신하가 모두 동요하더라도
不使衆生有凉怖(불사중생유량포) 중생으로 하여금 두렵지 않게 하나니
{화엄경} 권80 [화장세계품]
無量光明恒熾然(무량광명항치연) 영원한 광명은 항상 밝게 빛나서
種種莊嚴淸淨海(종종장엄청정해) 여러 청정해를 장엄하나니
{화엄경} 권36 [십지품]
三毒猛火恒熾然(삼독맹화항치연) 삼독의 맹렬한 불꽃이 항상 치연하여
無始時來不休息(무시시래불휴식) 무시 이래로 꺼지지 않는다
{화엄경} 권50 [여래출현품]
眞如離妄恒寂靜(진여리망항적정) 망념을 여읜 진여는 항상 걱정하여
無生無滅普周遍(무생무멸보주편) 무생무멸이건만 온누리 가득 퍼진다
한편 한유 시에 대한 선종의 또 하나의 영향은, 그의 시에 여러 가지 괴기한 사물 가운데 동물의 명칭, 예를 들어 "방합·고둥·물고기·자라·벌레"(蚌螺魚鼈蟲;방라어별충) 등을 빌려 자신의 의중을 빗대고 있다는 데 있다. 그의 시 '陸渾山火(육혼산화)'를 살펴보자.
陸渾山火(육혼산화)
(前略) -(전략)
虎熊미猪逮후猿(호웅미저체후원) 호랑이, 곰, 순록, 산돼지, 원숭이,
水龍鼈龜魚與원(수룡별구어여원) 수룡, 자라, 거북, 물고기, 큰 자라,
鴉치雕鷹雉鵠곤(아치조응치곡곤) 까마귀, 올빼미, 수리, 매, 어린 고니, 곤계는
심포오외熟飛奔(심포오외숙비분) 통째로 구워질 듯한 불을 피해서 날고 달리네
(後略) -(후략)
이 시에는 여러 가지 동물들이 화염을 피해 달리는 광경이 묘사되어 있는데, 온갖 짐승들이 지축을 울리며 달리는 모습은 일대 장관을 일으킨다. 그런데 이 같은 시적 표현은 불경게송의 구법과 의상을 빌려 온 것이다. 불경게송에서는 神魔(신마)가 化現(화현)한 각종 괴이한 짐승을 조복하는 불보살의 위신력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그러므로 행문에서는 항상 동물의 명칭을 열거하여 幽玄(유현)한 종교적인 정신세계를 묘사한다.
修行本起經(수행본기경)
圍繞菩薩 三十六由旬 (위요보살 삼십육유순)
삼 십육 유순의 거리에 걸쳐 보살을 위요하였으니
皆使變成獅子熊비兇虎(개사변성사자웅비흉호)
모두 사자, 곰, 큰곰, 사나운 호랑이,
象龍牛馬犬豚후猿之形(상룡우마견돈후원지형)
코끼리, 용, 소, 말, 개, 돼지, 원숭이의 모습으로 변성하였다.
{佛說섬子經(불설섬자경)}
獅子熊비虎豹毒蛇 (사자웅비호표독사)
사자, 곰, 큰곰, 호랑이, 표범, 독사가
慈心相向無傷毒 (자심상향무상독)
자심으로 서로 어울려 서로 해치지 않나니
{大寶積經(대보적경)}
獅子虎狼 (사자호랑) 사자, 호랑이,
熊비후猿궤 (웅비후원궤) 곰, 큰곰, 원숭이, 노루,
鹿라驢猪鬼 (녹라려저귀) 노새, 나귀, 들여우, 돼지, 토끼,
象馬拘犬 (상마구견) 코끼리, 말, 개,
牛羊猪類 (우양저류) 소, 양 등은
聞其聲音 (문기성음) 모두 그 음성을 듣고
可以喜悅 (가이희열) 기뻐하였다
위에 열거된 게송들의 시형은 4언에서부터 10언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지만, 모두 동물들의 명칭을 계속 열거한 것이 특징이다. 더욱이 7언 게송은 한유의 시 '陸渾山火(육혼산화)'의 묘사와 유사하여, 한유의 시가 불경게송의 방법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는 것을 뒷받침해 준다.
더욱이 '陸渾山火(육혼산화)'는 불경게송 외에도 불교회화의 영향도 깊이 받고 있다. 앞서 '山石(산석)'에서 살펴본 것처럼, 한유는 불교의 벽화에 대한 지식이 축적되어 있다. 그래서 錢仲聯(전중련)은 그의 [佛學與中國古典文學的關係(불학여중국고전문학적관계)]에서 한유의 시와 불교회화의 관계를 언급하면서, '陸渾山火(육혼산화)'에 묘사된 火神(화신)의 宴客(연객) 장면에서는 繁火(번화), 音樂(음악), 旗幡(기번), 賓從(빈종), 儀仗(의장), 酒肉(주육), 飮啖(음담) 등을 묘사하여 한 폭의 만다라를 보는 느낌을 준다고 하였다.
4. 끝내는 말
선과 시가 하나로 융합된 선시는 성당에 들어와 중국시가사상 처음으로 출현하였다. 그리고 선시는 '以詩寓禪(이시우선)'과 '以禪入詩(이선입시)'라는 두 가지 형태로 나뉘어 발전하였으며, 이 가운데 시인들이 자신들의 시에 선을 도입한 '이선입시'는 한산자와 왕유 등과 같은 전문적인 선시 작가를 배출시켰다.
한산자는 처음으로 시에 선을 불어넣어 선시를 창작하였으며, 왕유는 남북종을 모두 섭렵한 선시의 거장으로서 맹호연·장계 등과 더불어 선시의 성행을 일으켰다. 그리고 두보는 많은 선사들과 교류하면서 선을 배워 적지 않은 선시를 남겼으며, 한유는 중당의 대표적인 배불론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불교게송의 창작방법을 폭넓게 수용하여 독특한 시세계를 열었다.
특히 선시는 송대에 이르러서는 선을 말하고 시를 짓는 것은 차이가 없다는 의식으로 확산될 정도로 크게 발전하였다. 그리고 이 같은 인식은 시는 물론이고 그림과 글씨 등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확산되어, 시는 禪思(선사) 즉 선적인 사고가 있는 것을 귀하게 여기며 그림은 선취를 귀하게 여기는 풍조가 일어 詩禪(시선)이니 畵禪(화선)이니 하는 용어들이 나타나 큰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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