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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조선[默照禪]

醉月 2010. 9. 16. 09:00

묵조선 [默照禪]  불교에서 묵묵히 좌선(坐禪)하여 영묘(靈妙)한 마음의 작용을 일으킨다는 선풍(禪風).
간화선(看話禪)과 대비되는 표현법으로, 조동종(曹洞宗)의 선법이다. 이 명칭은 남송(南宋) 임제종파(臨濟宗派)의 종고(宗杲)가 조동종(曹洞宗) 정각(正覺)이 《묵조명(默照銘)》을 펴낸 뒤, 수행자들이 면벽좌선(面壁坐禪)함을 야유조로 이같이 불렀던 데서 유래한다. 이는 본래 자성청정(自性淸淨)을 기본으로 한 수행법으로, 갑자기 대오(大悟)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속에 내재하는 본래의 청정한 자성에 절대로 의뢰하는 선이다. 이에 반해 간화선은 큰 의문을 일으키는 곳에 큰 깨달음이 있다고 하여, 공안(公案)을 수단으로 자기를 규명하려 하는 선법이다. 대혜(大慧)종교는 묵조선을 사선(邪禪)이라 공격하였지만, 결국 양자의 차이는 본래의 면목(面目)을 추구하는 방법의 차이이다. 굉지(宏智)정각은 《묵조명》을 통하여 묵조선이 불조 정전(佛祖正傳)의 참된 선이라고 주장하였다.

 

묵조선굉지정각 묵조명 지관타좌 현성공안 신

 

종교가 철학과 구별되는 특징 가운데 하나는 실천이 수반된다는 점이다. 실천이 없는 종교는 종교가 아니다. 이런 점에서 선은 가장 종교적인 특징을 구비하고 있다. 그런데 선수행은 좌선수행이다. 좌선을 떠나서는 선도 없고 선수행도 없다. 그만큼 선을 선이게끔 특징짓는 것이 좌선수행이다. 좌선을 무시하고는 어떤 선도 존립할 수가 없다. 간화선도 위빠사나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을 얼만큼 강조하느냐에 차이가 있을지언정 좌선을 강조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이 가운데서도 좌선을 종지로 삼고 좌선을 수행의 행위로 삼으로 좌선을 깨침으로 간주하는 수행이 묵조선 수행이다. 그만큼 묵조선은 좌선속에서 가능하고 좌선으로 일관하는 수행이다.

 

묵조의 의미는 본래 깨어 있는 좌선을 의미한다. 묵이 좌선하고 있는 몸의 모습이라면 조는 성성하게 깨어 있는 마음의 모습을 가리킨다. 그래서 묵조는 묵의 조라는 수식 내지 한정의 관계가 아니라 묵과 조라는 대등한 관계이다. 선에서 늘 그렇듯이 몸과 마음은 경중의 차이가 없다. 이것이 신심일여(身心一如)의 도리이다. 육체의 측면만 강조하다보면 그 수행은 육체운동으로 흘러버리기 쉽상이다. 마음의 측면만 강조하다보면 명상이요 철학으로 흘러버리기 쉽상이다. 선이 단순한 육체운동만도 아닌 것은 안심입명(安心立命)과 깨침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단순한 마음훈련만도 아닌 것은 종교로서 자기구제는 물론이고 타인의 구제를 목표로 삼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선의 성격이 자각(自覺)과 각타(覺他)라는 대승정신의 발로이다.

 

그러나 어느 한 측면만을 강조하고 다른 한 측면을 무시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 모습이 가장 전형적으로 잘 구현된 것이 곧 좌선이다. 좌선이야말로 가장 여법한 육체의 자세이면서 가장 여법한 마음의 조화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올바른 좌선은 올바른 육체의 자세에서 나오고 올바른 육체의 자세에서 올바른 좌선이 이루어진다. 또한 올바른 좌선은 올바른 마음을 지니게 하고 올바른 마음은 올바른 좌선으로 드러난다. 이런 점에서 좌선은 육체이고 마음이다. 이것을 지관타좌(只管打坐)라 한다.

 

지관타좌는 바로 이와 같은 좌선으로 시작하여 이와 같은 좌선으로 지속되며 이와 같은 좌선으로 승화되는 행위이다. 따라서 지관타좌는 육체의 수행이면서 마음의 깨침이다. 소위 좌선이 곧 수행이고 깨침이다. 이처럼 육체와 마음이 순일화된 좌선을 바탕으로 하여 바른 육체와 바른 마음으로 작용하는 행위가 묵조선의 수행이다. 그래서 묵조선이 수행은 소위 좌선지상주의의 수행이기도 하다. 좌선이 없는 수행은 수행도 아니고 묵조도 아니다. 이른바 묵조좌선이라는 말이 바로 이것이다.

 

때문에 올바른 좌선은 올바른 묵조수행으로 이어지고 올바른 묵조수행은 올바른 좌선으로 나타난다. 이것이 곧 신심탈락(身心脫落)의 현성이다. 신심탈락이란 신심을 초월하는 경지이다. 더 이상 신심에 구애됨이 없이 신심을 가지고 자유와 해탈과 열반을 터득하는 행위이다. 때문에 신심탈락에는 반드시 마음의 탈락으로서 본래깨침의 도리를 터득하고 자각하는 본증자각(本證自覺)과 그 진리가 육체상에 드러나 있는 현성공안(現成公案)이 수반된다. 아울러 신심탈락의 이면에는 지속적인 행위로서 지관좌선(只管坐禪)이 있을 뿐이다.

 

{묵조명}과 묵조선

 

 묵조명』의 내용

 

{묵조명}의 제목에 있는 묵(默)이라는 글자는 침묵으로서 조용하게 좌선하는 모습이고, 조(照)라는 글자는 일(日)과 소(召)와 화(火)를 모아 놓은 형태로서 마음이 어둠에서 벗어나 밝은 광명으로 나아간다는 뜻이다. 법(法)으로 말하자면 좌선하는 사람이 삼매에 들어가서 불경계에 안주하는 것이다. 그 모습은 마치 혓바닥으로 입 천정을 떠받치고 있어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는 언어도단의 상태를 묵(默)이라 한 것이다. 이것이 몸에 배어 좌선 속에서 산란과 혼침이 없이 요요상지(了了常知)하여 자기의 본래광명으로 가득차 있는 것을 조(照)라 한다. 이와 같은 묵과 조를 감각과 몸과 마음으로까지 체험하는 것을 감각탈락(感覺脫落)이요 신심탈락(身心脫落)이라 한다.

이와 같은 묵조의 경지는 {대반열반경}의 [제불 세존은 정(定)과 혜(慧)를 골고루 익혀서 밝게 불성을 보아 분명하게 걸림이 없다.]라는 설명이 여기서의 묵[定]과 조[慧]이다. 범어 사마타(奢摩他)는 정(定)의 의미로서 산란(散亂)에 빠지지 않는 것이다. 곧 일체 번뇌를 멸하는 것이고, 제근(諸根)의 악(惡)과 불선(不善)을 조복(調伏)하는 것이며, 삼업이 적정한 것이고, 오욕을 여의는 것이며 삼독을 청정케 하는 것을 말한다. 또한 범어 비발사나(毘鉢舍那)는 혜(慧)의 의미로서 혼침(昏沈)에 빠지지 않는 것이다. 곧 생사의 악한 과보를 관하는 것이고, 모든 선근을 증장하는 것이며, 일체의 번뇌를 파괴하는 것이다. {금강경}에서 말한 세존의 여시지(如是知)라는 것은 정(定)의 의미이며, 여시견(如是見)이라는 것은 혜(慧)의 의미이다. 동산양개는 이것을 정(正)과 편(偏)이라 불렀으며, 조산(曹山)이 말한 '정위공계(正位空界) 본래무물(本來無物)'은 묵(默)의 경계로서 한 티끌도 일어나지 않는[一塵不立] 것이며, '편위색계(偏位色界) 유만물형(有萬物形)'은 조(照)의 경계로서 한 티끌도 숨어있는 것이 없이 다 드러나 있는 상태를 말한다.

 

묵과 조는 도리를 설할 때에는 두 모습이지만 이에 안주할 때에는 분별이 없어 마치 '종이에 글자가 인쇄되는 것은 동시이지만 그것을 읽는 데에는 전후가 있다(印紙同時 讀時前後)'는 것과 같다. 이렇게 부합되어 있는 것을 삼매(三昧) 또는 삼마지(三摩地)라고 한다. 이것을 조동의 교의 가운데 오위(五位)의 위차(位次)로 말하자면 제5위에 해당하는 겸중도(兼中到)의 지위이다.

또한 필경에는 불불조조(佛佛祖祖)가 적적상승(嫡嫡相承)한 대법(大法)으로서 반야회상(般若會上)에서의 여래의 삼매왕삼매(三昧王三昧)에 들어 초조(初祖)로부터 28전(傳)한 보리달마(菩提達摩)의 응주벽관(凝住壁觀) 범성등일(凡聖等一)의 결가부좌이다. 이것을 명(銘)으로 서술한 것이 {묵조명}이다.

 

명(銘)은 경계(警戒)의 뜻이다. 후인을 훈계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이 {묵조명}도 정전(正傳)의 삼매에 안주한 자에게는 마찬가지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마명(馬鳴) 조사가 {대승기신론}에서 '마음의 본성이 일어나지 않으면 이것이 곧 대지혜광명(大智慧光明)의 뜻이다. 만약 마음이 견(見)을 일으키면 그것은 곧 불견(不見)의 상(相)이 된다.'고 말한 것에서 '본성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묵(默)의 뜻이고, 그 다음 '대지혜광명'은 조(照)의 뜻이다. '만약 마음이 견(見)을 일으킨다'는 것은 묵조에 어두운 것을 지적한 것이다.

또한 마명(馬鳴)이 말한 '마음의 본성이 견(見)을 여의면 이것이 곧 법계를 두루 비춘다는 뜻이다. 만약 마음이 움직인다면 그것은 참된 식지(識知)가 아니다.'는 것에서 '마음이 견(見)을 여읜다'는 것은 묵(默)의 뜻이고, '법계를 두루 비춘다'는 것은 조(照)의 뜻이다. '만약 마음이 움직인다면 그것은 참된 식지(識知)가 아니다'는 것은 묵조에 어두운 것을 지적한 것이다.

따라서 굉지는 {좌선잠}에서 말하기를 '부처님의 요기(要機)와 조사의 기요(機要)는 닿지도 않고 알고 상대하지도 않고 비춘다' 고 했는데, 위의 '부처님의 요기(要機)와 조사의 기요(機要)' 라는 것은 불조를 들어 묵조의 증거로 삼은 것이며, '닿지도 않고 알고' 라는 것은 묵(默)이고 '상대하지도 않고 비춘다'라는 것은 조(照)이다.

{묵조명}의 본문은 다음과 같다.

 

01. 묵묵망언(默默忘言) 몸으로 묵묵하게 좌선하면서 침묵하는 그 곳에

02. 소소현전(昭昭現前) 진리는 분명하게 현전한다.

03. 감시확이(鑒時廓爾) 비추어 보면 분명하나

04. 체처영연(體處靈然) 체험하는 본래자리는 언제나 그윽하다.

05. 영연독조(靈然獨照) 그윽하여 홀로 비추는데

06. 조중환묘(照中還妙) 그 비춤 가운데 오묘한 작용이 나타나 있다.

07. 노월성하(露月星河) 마치 말은 밤하늘의 달과 은하수와 같고

08. 설송운교(雪松雲嶠) 눈에 덮인 솔과 구름 낀 봉우리 같다.

09. 회이미명(晦而彌明) 그래서 어두울수록 더욱 밝고

10. 은이유현(隱而愈顯) 감출수록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11. 학몽연한(鶴夢煙寒) 학이 잠자는 것은 학이 아니면 추운 지 알 수가 없고

12. 수함추원(水含秋遠) 가을이 되어야 물이 마르는지 않는지 알 수 있다.

13. 호겁공공(浩劫空空) 좌선하는 사람은 영겁토록 공하고

14. 상여뇌동(相與雷同) 더불어 만물도 모두 공이 된다.

15. 묘존묵처(妙存默處) 묘는 묵속에서 드러나 있고

16. 공망조중(功忘照中) 공은 조 가운데 있으면서도 티를 내지 않는다.

17. 묘존하존(妙存何存) 그렇다면 묘한 존이란 어떤 존인가?

18. 성성파혼(惺惺破昏) 그것은 성성적적하여 어둠을 벗어난 경지이다.

19. 묵조지도(默照之道) 묵조의 도는

20. 이미지근(離微之根) 이미의 근본이다.

21. 철견이미(徹見離微) 그러므로 이미의 도리를 철견하면

22. 금사옥기(金梭玉機) 금북과 옥베틀처럼

23. 정편완전(正偏宛轉) 정과 편은 완전하고

24. 명암인의(明暗因依) 명과 암은 서로 의지한다.

25. 의무능소(依無能所) 의지하면서도 서로 능소가 없는데

26. 저시회호(底時回互) 그러한 때가 곧 열린 관계이다.

27. 음선견약(飮善見藥) 그러한 도리는 마치 선견약을 마시고

28. 과도독고( 塗毒鼓) 도독고를 두드리는 것과 같다.

29. 회호저시(回互底時) 그리고 열린 관계일 때는

30. 살활재아(殺活在我 살활의 작용이 자신의 손안에 있다.

31. 문리출신(門裡出身) 문리에서 몸을 벗어나면

32. 지두결과(枝頭結果) 가지마다 열매를 맺는다.

33. 묵유지언(默唯至言) 묵은 지극한 언어이고

34. 조유보응(照唯普應) 조는 널리 응하는 작용이다.

35. 응불타공(應不墮功) 그래서 조는 만물에 응해도 공에 떨어지지 않고

36. 언불섭청(言不涉聽) 묵은 언설을 마주해도 듣는데 방해되지 않는다.

37. 만상삼라(萬象森羅) 삼라만상이 모두

38. 방광설법(放光說法) 빛을 내어 설법하는데

39. 피피증명(彼彼證明) 서로가 증명하고

40. 각각문답(各各問答) 각각이 문답한다.

41. 문답증명(問答證明) 서로 문답하고 증명하는 것이

42. 흡흡상응(恰恰相應) 딱 맞게 상응한다.

43. 조중실묵(照中失默) 그래서 조에 묵이 없으면

44. 편견침릉(便見侵凌) 곧 온갖 번뇌의 침범을 받는다.

45. 증명문답(證明問答) 서로 증명하고 문답하는 것이

46. 상응흡흡(相應恰恰) 딱 맞게 상응한다.

47. 묵중실조(默中失照) 그래서 묵에 조가 없으면

48. 혼성잉법(渾成剩法) 어지럽게 쓸데없는 것이 되고 만다.

49. 묵조이원(默照理圓) 묵조의 도리가 원만하기로는

50. 연개몽교(蓮開夢覺) 마치 연꽃이 피고 꿈을 깨는 것과 같다.

51. 백천부해(百川赴海) 마치 온갖 강물이 바다로 모여들고

52. 천봉향악(千峰向岳) 작은 봉우리가 큰 산을 향하는 것과 같다.

53. 여아택유(如鵝擇乳) 또한 아왕이 우유만 가려 마시고

54. 여봉채화(如蜂採花) 벌이 꽃에서 꿀을 따는 것과 같다.

55. 묵조지득(默照至得) 그래서 묵조의 극치를 터득하면

56. 수아종가(輸我宗家) 우리의 본래고향에 도달한다.

57. 종가묵조(宗家默照) 그 종가에 다다른 묵조는

58. 투정투저(透頂透底) 정상부터 바닥까지 다다른다.

59. 순야다신(舜若多身) 그 경지는 마치 허공신과 같고

60. 모다라비(母陀羅臂) 관세음의 팔과 같다.

61. 시종일규(始終一揆) 처음과 끝이 일여하지만

62. 변태만차(變態萬差) 그 변화의 모습은 천태만상이다.

63. 화씨헌박(和氏獻璞) 묵 가운데 조는 화씨가 구슬을 바치는 것과 같고

64. 상여지하(相如指瑕) 조 가운데 묵은 인상여가 흠집을 지적하는 것과 같다.

65. 당기유준(當機有準) 근기에 따라 기준을 달리 두고 있지만

66. 대용불근(大用不勤) 대용은 움직임이 없다.

67. 환중천자( 中天子) 그 근엄함은 하늘아래 천자와 같고

68. 새외장군(塞外將軍) 그 늠름함은 변방의 장군과 같다.

69. 오가저사(吾家底事) 그러므로 우리의 묵조가풍은

70. 중규중구(中規中矩) 중도의 규와 구에 들어맞는다.

71. 전거제방(傳去諸方) 제방에 전해져서도

72. 불요잠거(不要 擧) 남을 속이는 일이 없다.

 

01. 묵묵망언(默默忘言) 몸으로 묵묵하게 좌선하면서 침묵하는 그 곳에

02. 소소현전(昭昭現前) 진리는 분명하게 현전한다.

 

제1·2구는 {묵조명}의 총서(總序)로서 묵조의 내용을 종합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것을 {굉지록}에서는 [묵묵하여 정신이 맑고 기운이 청아하다]고 말한다. 이것은 순수아인 불성이 사려가 끊긴 곳에서 고요하게 된 상태로서 정신이 말고 깨끗한 경지이다. 그래서 오직 그것을 체험적으로 맛볼 뿐이지 그것을 언설로 설할 수가 없다. 실로 달마선의 골수 그대로이다.

묵묵망언(默默忘言)은 만법과 아가 일여가 되면 삼세제불의 설법도 억지가 되기 때문에 굳이 말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소소현전(昭昭現前)은 제법의 실상이 진진찰찰에 털끝만큼도 숨음이 없이 나타나 있는 것이다. 이것이 곧 굉지에게 있어 묵조의 현성 그것이다. 이것은 삼매속에서 맛보는 밝디밝은 경험이다.

 

03. 감시확이(鑒時廓爾) 비추어 보면 분명하나

04. 체처영연(體處靈然) 체험하는 본래자리는 언제나 그윽하다.

 

앞의 제1·2구가 총서로써 묵조의 의의를 말했다면 제3·4구는 총서에 대한 구체적인 주석이다.

감(鑑)은 경(鏡)으로서 사물을 비추어보는 작용이다. 확이(廓爾)는 명랑하게 맑게 개인 새벽녘의 하늘과 같은 상태이다. 따라서 감시확이는 소소현전한 대주관이 객관의 사물에 상대하여 명랑하게 나타나는 모습이다. 이것은 주(主)로서의 심(心)의 묘용을 설한 것이다. 여기에서 체는 주관 그 자체로서 심이 그 자체의 생생하고 불가사의한 상태이다.

감시확이의 감시는 회광반조하는 때이다. 여기서의 때[時]라는 것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초월한 때이다. 이른바 경전에서 말하는 [한 찰나의 마음이 반야에 상응하여 삼세의 법을 깨치고 나면 곧 그것이 다름아닌 대갑(大甲)의 현전이다]와 같은 경우이다.

체처영연의 체는 신(身)으로서 사대육근과 팔만모공의 모두를 가리킨다. 체처는 체가 존재하는 진시방세계 모두를 가리킨다. 그 체처가 신령스럽다는 것은 체처가 불가사의하고 불가칭량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확연하게 묵조로써 비추어 볼 때에는 티끌하나 없이 묵이 이루어내는 조의 경지가 그대로 나타나 있다.

확이는 용(用)으로서 삼천대천세계를 가루로 부셔버리는 것이고, 영연은 체로서 십세고금(十世古今)에 걸쳐 몰파비(沒把鼻)한 것이다.

 

05. 영연독조(靈然獨照) 그윽하여 홀로 비추는데

06. 조중환묘(照中還妙) 그 비춤 가운데 오묘한 작용이 나타나 있다.

 

제5구는 영연(靈然)한 세계를 설명한 것이다. 그리하여 독조(獨照)는 단지 유일무이한 하나의 광명이라는 뜻이다.

제6구는 그 광명세계가 나타내는 불가사의한 모습을 서술한 것이다. 그러나 영연한 심의 광명세계는 [일심이 일어나면 만법에 허물이 생긴다]는 말처럼 상대관념에 계박되지 않은 순수한 心의 광명은 만법을 남김없이 모두 비추기 때문에 피차의 대림이 없어 우주는 유일한 광명만의 세계일 뿐이다. 그러나 그 광명의 세계에 존재하는 사물은 상호감에 표리를 이루어 융통무애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

영연독조는 묵조가 비사량으로서 조(照)할 때에는 아래로는 지옥으로부터, 그리고 위로는 아가니타의 정상에 이르기까지 진시방세계에 아무것도 볼 수 없고 다만 한 줄기 광명뿐이므로 독(獨)이라 하는 것이다. 그 한줄기 광명속에 도리어 불가사의한 경계가 있다. 그 불가사의의 경계는 감시확이하는 작용 속에서만 훤칠하게 드러나 있다.

조중환묘는 영연독조와 같은 상황속에서 다시 묘(妙)의 진시방세계가 정안(正按)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묘라 한 것이다. 이러한 모습이 이하에서는 비유로써 설명되고 있다.

 

07. 노월성하(露月星河) 그 모습은 마치 맑은 밤하늘에 떠 있는 달과 은하수와 같고

08. 설송운교(雪松雲嶠) 눈에 덮인 솔과 구름 낀 봉우리 같다.

 

제7구는 풀잎에 하늘의 달이 잠들어 있듯이 어려비치고 무수한 별이 나열하여 은하에 목욕하는 광경이다.

제8구는 하얗게 뒤덮인 눈 위에 푸른 소나무가 우뚝하게 서 있고 안개 자욱한 곳에 높은 산봉우리가 홀로 솟아 있는 광경이다. 제7구는 밤이고 제8구는 낮이다. 따라서 노월성하는 조중환묘의 모습이 마치 풀 끝의 이슬이 달을 머금고 별들이 은하에서 목욕하는 것처럼 아름다움을 비유한 것이다.

설송운교는 또한 솔가지에 쌓인 눈과 산을 덮은 하얀 구름처럼 깨끗함을 비유한 것이다. 이것이 곧 묵조의 소소현전의 모습이다. 어느 것 하나 감춤이 없이 가식도 없이 그냥 나타나 있는 모습은 묵조의 좌선 속에서만 가능하다.

위의 7. 노월성하와 8. 설송운교는 묵조의 방참(傍參)을 형용한 말이다.

 

09. 회이미명(晦而彌明) 그래서 어두울수록 더욱 밝고

10. 은이유현(隱而愈顯) 감출수록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제9구는 제7구 노월성하의 속성을 설명한 것이고, 제10구는 제8구 설송운교의 속성을 설명한 것이다. {참동계}의 [어둠 속에 밝음이 있고]와 [밝음 속에 어둠이 있다]는 것이고, {보경삼매}의 [밤이 대낮처럼 밝고]와 [새벽이 어둡다]는 것과 동일한 설명방식이다.

회이미명은 영연독조하는 공능이 열린 관계[回互]와 닫힌 관계[不回互]의 경계를 자유로이 현전시키는 공능을 지니고 있음을 말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 모습은 어두워도 더욱 밝아 명과 암의 열린 관계[回互]로 나타난다.

은이유현은 숨어도 훤히 드러나는 경지로서 위의 회이미명과 더불어 열린 관계[回互]의 소식을 말해준다. 그래서 끝내는 열린 관계[回互]와 닫힌 관계[不回互]의 완전(宛轉)으로 나타나 있다.

이것은 명암이 합일되고 정편이 불이한 것이다. 그러니 스스로 파악할 것이지 곁엣 사람조차도 헤아릴 수가 없는 것을 말한다. 마치 벙어리가 꿈을 꾸는 것과 같고 봉사가 꿈속에서 눈을 뜬것과 같다.

이것은 묵조의 탈체현성(脫體現成)한 속성을 말한 것으로서 오위의 위로 비교하자면 겸대의 밀용이다. 만약 그것을 {보경삼매}의 오미자로 비유하면 쓴맛 속에 단맛이 있고 단맛 속에 쓴맛이 있다는 의미이다. 이 회명과 은현을 다음에서는 비유로 설명하고 있다.

 

11. 학몽연한(鶴夢煙寒) 학이 잠자는 것은 학이 아니면 추운 지 알 수가 없고

12. 수함추원(水含秋遠) 가을이 되어야 물이 마르는지 않는지 알 수 있다.

 

제11구 안개 속에서 잠들어 춥다는 것은 차갑고 따뜻한 것과 어둡고 밝은 것이 남아 있다는 뜻이고, 제12구 가을이라서 투명하게 깊이 비춘다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의 뜻이다.

그러나 세존의 삼매를 가섭이 알지 못하고, 가섭의 삼매를 아난이 알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학이 안개속에 잠들어 있는 것에 대하여 제삼자가 그 춥고 따뜻함을 알지 못하고, 물이 가을이라서 투명하게 물속 깊이까지 비추는 것에 대해서는 오직 가을이 되어 봐야 알 수 있는 법이다. 학의 춥고 따뜻함은 학 이외에는 알지 못한다[晦]. 그러나 그것은 명백한 사실[明]로 확인되지 않으면 안된다. 이와 같이 회(晦)와 명(明)이 상즉하여 불리(不離)의 관계에 있음을 말한다. 이러한 경지에 이르러서는 정(情)과 비정(非情)을 초월하고 작(作)과 무작(無作)을 투과하는 것이다.

학몽연한은 회이미명과 은이유현의 경지를 비유한 것으로서 그 모습은 마치 학이 꿈속에서 안개 때문에 추워하는 모습이다. 곧 직접 학의 입장이 되어보지 않으면 학을 이해하지 못한다.

수함추원은 또한 시냇물은 가을날처럼 가뭄이 되어봐야 그 물이 마르지 않는 샘 깊은 물인지 알 수가 있다. 이에서 학과 물의 비유는 굉지에게 있어서 묵이상조(默而常照)하는 묵조의 방참(傍參)을 말한 것으로서 곧 굉지 자신의 모습을 형용한 용어로 자주 등장하고 있다.

이상은 묵과 조의 관계에 대하여 종횡으로 상관관계에 있음을 말한 것이다. 다음부터는 묵조의 공능[功德]에 대한 설명이다.

 

13. 호겁공공(浩劫空空) 좌선하는 사람은 영겁토록 공하고

14. 상여뇌동(相與雷同) 더불어 만물도 모두 공이 된다.

 

제13구의 호겁은 한량없는 시간을 가리킨다. 곧 까마득한 대겁을 말하는 것으로서 경전에서 말하는 [아미타불의 광명은 그 밝기가 끝이 없다. 그래서 겁후무수겁(劫後無數劫) 그리고 무수겁중복무수겁(無數劫重複無數劫) 그리고 무수겁무앙수(無數劫無央數)토록 끝끝내 어둠이 없다] 는 무수겁과 같다.

공공은 그것이 가이없다는 의미로서 과거 현재 미래에 걸친 무제한의 시간이다. 곧 공공이란 {대품반야경}의 20공 가운데 하나로서 일체법공으로서 그 공도 또한 공한 것을 말한다.

상여뇌동은 뇌성이 원근에 울려퍼져 사람들의 꿈을 깨운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위의 영연독조와 조중환묘는 시간적으로는 호겁에 통하고 공간적으로는 공공에까지 통하는 밀용(密用)과 방참(傍參)을 겸대한 속성을 지니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뇌동의 두 글자는 마치 우뢰가 치면서 소리를 내면 만물이 동시에 그것에 응한다는 의미로서 위의 호겁공공과 함께 묵조의 속성을 말한 것이다. 도가(道家)의 {도인경(度人經)}에서 말한 애시당초의 호겁이란 바로 이것을 가리킨 것인데, 그것은 뜻은 한량없는 겁이라는 뜻이다.

뇌동이라는 말은 유교경전에서 나온 말로서 우레치는 소리가 십 리 밖에까지 들리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위의 호겁공공과 상여뇌동은 법의 대의이다. 이러한 삼매에 안주하게 되면 거기에서 나오는 공덕은 끝없는 과거로부터 끝없는 미래에 이르기까지 일체군생의 미몽을 각성시키는 것이 마치 뇌성과 같아서 각각의 안목을 일깨우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따라서 제13·14구는 무한한 시간과 무한한 공간에 묵조삼매의 공능이 보급되어 사람들의 미몽을 일소하고 신심(身心)을 명정하게 하여 해탈시킨다는 뜻이다.

 

15. 묘존묵처(妙存默處) 묘는 묵속에서 드러나 있고

16. 공망조중(功忘照中) 공은 조 가운데 있으면서도 티를 내지 않는다.

 

그러나 그 공능은 무아로 행해진다. 여기에서 말하는 묘는 공능의 주체이다. 주체로서의 묘는 확이한 공[默] 속에 있으므로 존(存)이라 해도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곧 유(有)이면서 무(無)한 존재이다.

그래서 그 공용도 또한 오직 일광명으로만 비추기 때문에 어떤 조작도 어떤 과장이나 자랑도 없다. 그 경지가 불가사의하기 때문에 굳이 묘라 이름하는 것이다. 또한 부처는 설법에 있어 단멸상(斷滅相)을 설하지 않았는데 그것을 굳이 존(存)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공(功)은 조작에 속한다. 그러나 허명(虛明)하고 자조(自照)하여 심력(心力)을 들이지 않기 때문이 망(忘)이라 한다.

묘존묵처는 앞의 조중환묘에서와 같이 묘는 말이아 생각으로 도달하지 못하는 묵처에서 나타나는 묘이므로 조금도 공(功)에 걸리지 않는다. 말하자면 묵이묘(默而妙)이다.

그리고 공망조중은 조(照)로 나타나는 공(功)이건만 그 조는 공을 잊은 조이므로 어떠한 조작으로도 엿볼 수가 없는 곳이다. 곧 묵 가운데에 나타나는 조의 묘는 조 그 자체로 완전한 것이라서 일체의 공능에 의지하지 않는 독조(獨照)이다.

 

17. 묘존하존(妙存何存) 그렇다면 묘한 존이란 어떤 존인가.

18. 성성파혼(惺惺破昏) 그것은 성성적적하여 어둠을 벗어난 경지이다.

 

묘의 존재상태는 어떤가. 그것은 성성한 마음에 광명이 드러나 혼미한 어둠이 사라진 존(存)이다. 그래서 묘존하존은 위의 묘존묵처에서 묵처에 존(存)하는 묘는 어떠한 격별도 없는 존재이다. 곧 묘용으로 나타내어 있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구체적인 모습으로 형용되는 성성파혼은 단지 성성하게 마음에 광명이 생기면 그대로 혼침의 어둠이 사라지는 것일 뿐이지 어둠과 광명의 상대적인 성성일 수 없는 것이다. 묵의 묘존이기 때문에 그것은 바로 조의 공능을 통하기 때문이다.

 

19. 묵조지도(默照之道) 묵조의 도는

20. 이미지근(離微之根) 이미의 근본이다.

 

이미 성성하여 번뇌를 끊은 자기라면 그 출식(出息 [微])과 그 입식(入息 [離])에 눈꼽만치도 오염되지 않는다. 이것이 곧 출식이 중연(衆緣)에 끄달리지 않고 입식이 온계(蘊界)에 머물지 않는 소식이다.

따라서 묵조지도는 이 묵과 조는 그대로 보리이므로 묵조의 도는 바로 정과 혜를 균등히 하여 불성을 밝게 보는 것을 의미한다. 경전에서는 이 근거로서 지와 관을 함께 수행하라고 말한다. 그 치우침이 없는 지관수행은 바로 좌선의 밀용(密用)으로서 묵조의 근본이 이미(離微)에 있음을 말한 것이다.

이미지근의 이(離)와 미(微)는 승조가 {보장론}에서 자세한 설명을 하고 있다. 그 요체는 곧 [입리(入離)와 출미(出微)는 입리를 알면 밖의 대상에 의지할 바가 없고, 출미를 알면 안으로 마음에 행할 바가 없다. 안으로 행할 바가 없으니 모든 견해에 영향을 받지 않고, 밖으로 의지할 바가 없으니 만유에 부림을 당하지 않는다. 따라서 생각이 고요하여 모든 견해에 영향을 받지 않으니 적멸하여 부사의하다. 그러므로 본래의 청정한 체성은 이미로부터 나온다. 입(入)에 의거하기 때문에 리(離)이고, 용(用)에 의거하기 때문에 미(微)이다]의 뜻이다.

이것은 본래 천태의 {육묘문} 가운데 수식(隨息)에 관계되는 말로서, 입식 때에 [지금 숨을 들이마신다] 라고 알면 외부의 육진이 마음에 의지할 틈이 없고, 출식 때에 [지금 숨을 내쉰다] 라고 알면 내부의 사온(四蘊)이 움직일 틈이 없어진다. 이 곳이 바로 지극묘세한 장소로서 색·수·상·행·식의 오온으로 나뉘어지기 이전이다. 그렇기 때문에 입리와 출미를 안다면 외부의 육진과 내부의 사온(四蘊)이 아(我)로부터 곧 벗어나게 된다.

반야다라의 설법 가운데 [숨을 들이쉴 때에도 모든 반연에 따르지 않고, 숨을 내쉴 때에도 온계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래서 항상 이와 같이 백천 만억 권의 경전을 굴리지만 실은 한 권도 굴리지 않습니다]에서 [숨을 들이쉴 때에도 모든 반연에 따르지 않고] 는 출미이고, [숨을 내쉴 때에도 온계에 머물지 않습니다] 라는 것은 입리로서 출도 입도 모두 왕삼매의 유희이다.

그리고 보리달마가 혜가를 위하여 설법한 [밖으로는 모든 반연을 끊고 안으로는 마음에 헐떡거림이 없어 마음을 방벽과 같이 해야만 도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한 것도 [밖으로는 모든 반연을 끊고] 라는 것은 출미(出微)이고 [안으로는 마음에 헐떡거림이 없다] 라는 것은 입리(入離)이다.

따라서 이 이미(離微)는 묵조의 방참(傍參)으로 나타난 묘용이다.

 

21. 철견이미(徹見離微) 그러므로 이미의 도리를 철견하면

22. 금사옥기(金梭玉機) 금북과 옥베틀처럼

 

밖으로는 만유의 유혹에 미혹되지 않고 안으로는 망상의 미몽이 끊어진 이상 금사(金梭)와 옥기(玉機)의 작용에 의하여 직물이 짜여지듯 엮어져 있는 우리네 인생이라는 한 필의 비단은 어떤가.

조동의 금수(錦繡)와 묵조의 문채(文彩)는 설령 천 명의 부처님이 출세한다 해도 그 가치를 알 수가 없다. 앉아서 육묘문을 잊는 그 자리에서 하는 생각은 무엇인가. 부처도 접근하지 못하고 조사도 접근하지 못한다. 이러한 경지가 곧 철견(徹見)의 시절이다. 미(微)가 움직이기로는 북[梭]과 같고, 이(離)가 고요하기로는 베틀[機]과 같다. 이 베틀과 북으로 말미암아 조동(曹洞)이라는 비단은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 비단의 문채는 염오에 속하지 않는 것으로서 오색(五色)·오위(五位)·오불(五佛)·오지륜(五智輪)이다. 어떤 때는 미륵의 손아귀에서 솟아나기도 하고, 어떤 때는 문수의 머리 위에 기어오르기도 한다. 그래서 승조는 [미(微)를 철견하는 것이 불이고, 이(離)를 아는 것이 법이다]고 말했다.

철견이미는 법으로서 아래의 금사옥기는 비유이다. 입리를 철견한다면 외부의 육진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어 순역의 이연(二緣)이 녹아 없어지고 애증의 분별이 사라져 출미가 그대로 입리가 되고 입리가 그대로 출미가 된다. 이(離)와 미(微)의 방참(傍參)을 이해하는 것은 마치 아래의 비유와 같이 같은 듯 다른 듯 방제(傍提)의 관계로 나타난다.

금사옥기는 베틀의 날줄과 북의 씨줄에 비유한 것이다. 이(離)는 베틀의 날줄처럼 고요하고 미(微)는 북의 씨줄처럼 움직인다. 이것이 동상종(洞上宗)의 비유로서 이의 정과 미의 편이 서로 완전(宛轉)하여 머물러 있지 않으므로 한 필의 비단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옥과 금이라는 말을 쓴 것은 세속의 베틀과 북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완전(宛轉) 속에서의 베틀이고 북이기 때문이다.

 

23. 정편완전(正偏宛轉) 정과 편은 완전하고

24. 명암인의(明暗因依) 명과 암은 서로 의지한다.

 

이미 조동의 금수능라(錦繡綾羅)인 이상 그것은 실로 중국 조동선의 개조인 동산의 정편의 기사(機梭)로써 짜여진 포(布)가 아니면 안된다. 정은 본체이고 편은 현상이다. 정은 공하여 유(有)로 발전되어 나아가야 할 본질적인 존재이므로 초인식의 세계로서 어둠에 속하고, 편은 유(有)로서 공을 기본으로 하는 형이하(形而下)의 만유이므로 인식의 대상으로서 明에 해당된다.

정위(正位)는 공계로서 본래무물이고, 편위는 색계로서 삼라만상의 형태이다. 그리고 정중지래(正中之來)와 편중지지(偏中之至)는 각각 자기의 위치를 고집하지 않고 완전(宛轉)하여 결절(結節)되어 있는 것과 같다. 이 속의 상황은 오안(五眼)으로도 변별하기가 어려우니 정(正)·중(中)·편(偏)의 삼목(三目)으로 어찌 판별할 수 있겠는가.

{화엄경}에서 말하는 항포법문과 원융사상도 바로 여기에서 나온 것이고, {금강경}에서 말하는 제상비상(諸相非相)의 도리도 이에 의하여 출현한 것이다.

기(機)의 정과 사(梭)의 편이 서로 어그러지지 않게 작용하여 한 곳에 머물러 있지 않는 것을 완전(宛轉)이라고 한다. 완(宛)은 완곡(宛曲)이고 전(轉)은 순환(循環)이다. 곧 열린 관계[回互]이면서 닫힌 관계[不回互]를 자재하게 원융하는 현상을 나타내는 조동선지의 한 기관(機關)이다.

그것이 명의 편과 암의 정으로서 서로 인의(因依)하여 치우치지 않는 것을 겸도의 본위라고 한다. 곧 정편완전·명암인의가 겸대로서 현성한 것이다. 이 정편이란 씨줄과 날줄에 의하여 우주라는 한 필의 포(布)가 짜여진 이상 정편은 서로 완전(宛轉)하고 명암은 서로 원인으로 의지하는 것이다.

 

25. 의무능소(依無能所) 의지하면서도 서로 능소가 없는데

26. 저시회호(底時回互) 그러한 때가 곧 열린 관계이다.

 

정과 편이 서로 의지한다고 말하지만 정과 편은 결국 하나로서 정 외에 편이 없고 편 외에 정이 없다. 만약 정 외에 편이 있다면 그것은 초월적인 일원론이고 초월적인 일신론이다. 불교는 그와 같은 일원론은 아니다.

의무능소는 명이 암에 인하고 암이 명에 의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능(能)에 의존하는 것과 소(所)에 의존되는 것의 이원적이 아니다. 더 이상의 능소의 관계가 아니라 완전(宛轉)한 방제(傍提)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저시회호하는 그러한 때에는 어떤 것이 선(先)이고 어떤 것이 후(後)라는 개념이 없이 이것과 저것이 열린 관계[回互]이다. 가령 물의 소용돌이처럼 앞뒤가 없다. 다만 물의 소용돌이가 있을 뿐이다. 무엇이 물인지 그리고 그 회전은 좌회전인지 우회전인지가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고 만다.

능소가 완전(宛轉)의 상태가 되어 원융한 모습이다. 그러면 의지하지 않을 때는 어떤가. 능은 소에 의지하여 성립되고 소는 능에 의지하여 형성된다. 그리하여 그 근원을 따져가다 보면 본래 동일한 공이다. 동일한 공은 양(兩)과 같은 것이라서 모두 만상을 머금고 있다. 이런 까닭에 펼치면 법계를 두루 뒤덮고 거두면 터럭과 실 끝보다도 작다.

이 점은 {신심명}에서 자세하게 설하고 있다. [객관은 주관을 말미암아 객관이고, 주관은 객관을 말미암아 주관이다. 그러므로 이 둘을 알고자 하면 원래 그것은 일공(一空)이다. 일공(一空)은 양쪽에 똑같고 나란하여 만상을 포함한다]

요컨대 이 의미는 주관과 객관, 본체와 현상, 정과 편은 동일물의 양면관이기 때문에 양자는 곧 분리되는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이 상즉된 상태를 일공이라 하면 어떨까. 그 일공에 정편이 있고 색공이 있다. 그 일공을 현실의 세계로 보면 바로 거기에 본체의 이상이 있는가 하면 현상의 실의(實義)도 있다. 이것이 반야의 공즉시색 색즉시공의 도리이다. 이것이 곧 제26구의 저시회호이다.

 

27. 음선견약(飮善見藥) 그러한 도리는 마치 선견약을 마시고

28. 과도독고( 塗毒鼓) 도독고를 두드리는 것과 같다.

 

정편이 열린 관계[回互]에 있고 명암이 서로 의지하는[因依] 조동의 가풍은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는 살활에 자재하다.

선견약은 죽은 것을 살려내는 공능이 있다. 곧 선견약은 이 약을 복용하면 죽어가는 사람도 곧 살아난다는 약으로 사(死)가 홀연히 활(活)이 되는 신비한 힘을 지니고 있다. 선견약이란 경전에 나오는 말이다. 즉 [나무왕이 있는데 이름이 선견이다. 그 선견나무왕은 뿌리·큰 줄기·잎·가는 가지, 그리고 모든 꽃과 과일·색·향기·맛·촉감 등이 다 병을 치료하는데 사용된다]는 영약이다.

도독고는 일체를 죽이는 힘이 있다. 곧 도독고는 이 북소리를 듣기만 해도 곧 목숨을 잃게 되는 위험한 북으로서 앞의 선견약에 상대되는 것으로서 활(活)이 홀연히 사(死)가 되는 소식을 말한다. 곧 경전에서는 [비유하자면 어떤 사람이 여러 가지 독약을 사용하여 큰 북에 바른다. 그리고서 대중 가운데서 그 북을 쳐서 소리를 낸다. 그러면 아무런 생각없이 그 소리를 듣고자 하여 소리를 듣게 되면 북소리를 듣는 사람은 다만 한 사람만을 제외하고는 모두 죽게 된다. 그 한 사람은 곧 대승경전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다. 대반열반경도 또한 이와 같아서 어느 곳에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그런 속에서도 이 경전의 이름만 들어도 자신이 지니고 있는 탐욕·성냄·어리석음 등이 다 사라져 없어지고 만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앞의 제26구의 열린 관계[回互]의 관념을 연상하여 설명한 것이다. 그래서 음선견약과 과도독고는 묵조좌선의 방제(傍提)를 나타낸 표현이다.

 

29. 회호저시(回互底時) 그리고 열린 관계일 때는

30. 살활재아(殺活在我 살활의 작용이 자신의 손안에 있다.

 

제29구는 앞의 저시회호와 같은 의미로서 묵조삼매이고, 제30구는 선견약과 도독고를 가지고 살[默]과 활[照]을 자유자재하게 구사하는 능력을 말한다. 묵과 조가 묵이 묵에만 떨어지지 않고 조가 조에만 떨어지지 않는 도리를 회호저시의 정안(正按)과 마찬가지로 작용하는 가운데 은밀하게 진리를 현성시켜 나아가고 있다. 이것은 모두 살활자재가 묵조삼매에 든 내 손안에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은 신통의 예는 다반사이다. 긍가신녀는 만리에 떨어져 있어도 땅강아지와 개미가 싸우는 소리를 분명하게 들었고, 아나율다는 천산이 막혀 있어도 또한 나방유충과 파리가 춤추는 것을 보았다.

 

31. 문리출신(門裡出身) 문리에서 몸을 벗어나면

32. 지두결과(枝頭結果) 가지마다 열매를 맺는다.

 

이것은 용이하게 살활자재함을 결론적으로 말한 것이다. 제31구는 옛말에 [문리(門裡)에서 몸을 벗어나기는 쉬워도 신리(身裡)에서 문을 벗어나기는 어렵다]는 의미를 응용하여 용이하다는 것을 교묘하게 드러낸 용어이다.

문리란 일체제법이고 출신이란 그 제법에 오염되지 않는 것으로서 향상의 극지이다. 이미 불도수행에 의한 향상의 극위에 도달하면 주관에 객관에 끄달리는 분별취사에 빠지지 않고 일체를 여실하게 인식하는 곳에 제법의 실상이 나타나 일법 일법이 모두 중대한 의의와 가치를 지니게 된다.

문리출신은 운거도응의 [득자(得者)는 사소한 것[微]도 가벼이 여기지 않고, 명자(明者)는 용(用)도 천하게 여기지 않는다. 식자(識者)는 묻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해자(解者)는 염오가 없다. 하늘로부터 내려오면 빈한하고, 땅으로부터 솟아오르면 부귀하게 된다. 문(門) 속에서 신(身)을 벗어나는 것은 쉬우나 신(身) 속에서 문(門)을 벗어나는 것은 어렵다. 동(動)하면 천 길 땅 속에 몸이 묻히고, 부동(不動)하면 그 자리에서 곧 싹이 튼다. 일언(一言)을 형탈하면 초연히 즉금의 시(時)를 떠나게 된다. 말은 굳이 많을 필요가 없다. 말이 많으면 쓸모가 없는 것이다] 라는 시중에 잘 나타나 있다.

하늘에서 내려오면 빈한하다는 것은 귀함을 얻지 못하기 때문이고, 땅으로부터 솟아오르면 부귀하게 된다는 것은 무(無) 가운데에서 홀연히 유(有)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것은 좌선에 있어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묵조의 묘용을 말한 것이다.

그래서 이 [문(門) 속에서 신(身)을 벗어나는 것은 쉽다]라는 뜻을 취하여 살활이 내 손아귀에서 자유자재하다는 것에 결부시켜 이것을 아래의 [가지 끝마다 열매가 달렸다[枝頭結果]] 는 것으로 연결하고 있다.

곧 묵조의 공능이 두두물물에 현성해 있음을 말한다. 그것을 비유로써 가지마다 아름답고 충실한 과실이 주렁주렁 열려있는 것과 같음을 말하고 있다. 그 과실 하나하나가 모두 대표적인 가치적 존재로 인정받는 것이다.

그래서 지두결과는 안·이·비·설·신·의의 육근문으로부터 벗어나 색·성·향·미·촉·법의 육진에 대하게 될 때 비사량에 안주하게 되면 전신(全身)의 출입이 근(根)에도 진(塵에)도 떨어지지 않아 진진법법에 모두 전체현성을 말한다. 곧 가지 끝마다 과일이 익어가는 것과 같다. 원래 나무 한 그루는 이 열매 하나가 전체현성한 것으로서 근경지엽(根莖枝葉)으로 드러난 것이다. 곧 묵조의 방참(傍參)을 말하고 있다.

 

33. 묵유지언(默唯至言) 묵은 지극한 언어이고

34. 조유보응(照唯普應) 조는 널리 응하는 작용이다.

 

이미 그렇다면 묵조선의 묵은 소극적 표현이 아니라 묵이 도리어 뇌성과 같이 지극히 적극적인 내용을 불러일으키는 지언이다. 비로자나금강여래의 설법 속에는 온갖 삼매 속에 묵묵하게 응주해 있는 모습을 다양하게 설명하고 있는데 바로 그 묵연이기도 하다.

따라서 불어(佛語)를 근본으로 삼고 있는 것으로서 금강여래의 말은 이른바 언성이 없음을 말한다. 다만 마음으로 묵연할 뿐이다. 바로 이 보리심은 본래 색상이 따로 없는 법을 가리킨다. 이것이 아래의 [조(照)는 오직 널리 응하여 비추는 것을 말할 뿐이다] 에 이어지고 있다. 따라서 그 묵으로부터 드러난 조는 지극히 보편적인 응현성(應現性)임을 말해주고 있다.

그 조유보응은 위의 묵유지언과 짝을 이루어 묵은 언의 묵이고 조는 응연의 조임을 말한 것이다. 곧 앞의 {대승기신론}에서 법계를 두루두루 비춘다는 뜻을 근본으로 삼는 것을 말한다. [근본 이래로부터 성(性)은 스스로 일체의 공덕을 만족하고 있다. 이른바 성(性) 그 자체에 대지혜의 광명의 뜻과 법계를 두루 비추는 뜻과 진실하게 아는 뜻과 자성이 청정하다는 뜻과 상·낙·아·정의 뜻이 있다]

곧 묵조의 추기(樞機)가 완전(宛轉 )속에서 밀용(密用)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 {기신론}의 이언진여(離言眞如)와 불변진여(不變眞如)를 제33구에, 그리고 의언진여(依言眞如)와 수연진여(隨緣眞如)는 제34구에 속하는 것으로 보는 것도 가능하다.

 

35. 응불타공(應不墮功) 그래서 조는 만물에 응해도 공에 떨어지지 않고

36. 언불섭청(言不涉聽) 묵은 언설을 마주해도 듣는데 방해되지 않는다.

 

제35구 응불타공은 조(照)할 때는 진시방법계에 두루 응하면서도 조금도 공(功)에 떨어지지 않는 무작의 묘용으로서 아래의 언불섭청과 호응관계를 이룬다. 곧 공용(功用)이 자연스러우면 그 공은 곧 무공용(無功用)의 대공용(大功用)이다.

제36구 언불섭청은 우레와 같은 말이더라도 육이(肉耳)가 아닌 심이(心耳)로 들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묵할 때는 대천세계에 두루 울려 퍼지는 큰 우레의 설법이면서도 귀에는 들리지 않는 것으로, 소위 동산양개의 오도송에서 말하는 [눈으로 소리를 듣는 마음] 바로 그것과 같다.

이 도리는 판치생모(版齒生毛)라야 비로소 알 수 있다. 춘하추동이 허공을 무너뜨리고, 궁상각치우가 풍수를 노래한다. 그러므로 [물새가 나무에서 염불하고 염법한다]고 말했다.

 

37. 만상삼라(萬象森羅) 삼라만상이 모두

38. 방광설법(放光說法) 빛을 내어 설법하는데

 

만약 심이(心耳)와 심안(心眼)으로 듣고 본다면 유정과 무정이 모두 도를 설하고 풀 한 포기와 나무 한 그루도 모두 불광명을 내는 줄을 알 것이다. 이 만상삼라는 체이며, 아래의 방광설법은 그 용으로서 위에서 언불섭청이라고 말한 이유는 삼매에 들 때에는 삼라만상이 쉼없이 그 본체로서의 위(位)를 호융(互融)하면서 방광설법을 한다.

그리고 방광설법은 위의 만상삼라가 주야로 대광명을 내어 팔만사천 다라니문을 설하는데 그 광명은 눈으로는 볼 수 없고 그 설법도 귀로는 들을 수 없음을 비유로 말한 것이다. 이것은 깨침의 분상에서 일어나는 묵과 조의 정안(正按)이기 때문이다.

 

39. 피피증명(彼彼證明) 서로가 증명하고

40. 각각문답(各各問答) 각각이 문답한다.

 

우주는 하나의 법계이다. 일법 일법이 모두 등질(等質)·등가치(等價値)한 존재이다. 마치 무수한 보배가 연결되어 있어 서로가 빛을 비추듯이 사사무애한 묘미를 비유로 나타낸 것이다.

만상이 설법하면 삼라가 듣고 삼라가 설법하면 만상이 들으며, 산의 설법을 바다가 듣고 바다의 설법을 산이 들으며, 모기의 설법을 개미가 듣고 개미의 설법을 모기가 듣는 것을 말한다. 일진(一塵)도 설하지 않음이 없고 일진(一塵)도 듣지 않음이 없다. 곧 흡흡상응하는 묵과 조의 방제(傍提)를 말한다.

따라서 산이 물으면 바다가 답하고 바다가 물으면 산이 답한다. 이런 것은 진진법법과 두두물물이 모두 같다. 이것은 곧 [부처가 설법하며 보살이 설법하고 국토가 설법하고 중생이 설법하며 십방삼세 일체가 설법을 한다]는 것이 바로 이러한 의미이다. 동산양개의 {보경삼매}에서 말하는 고창쌍거(鼓唱雙擧)의 뜻도 이러한 의미이다. 위의 피피증명과 함께 현성공안을 방제(傍提)와 함께 방참(傍參)을 말한다.

 

41. 문답증명(問答證明) 서로 문답하고 증명하는 것이

42. 흡흡상응(恰恰相應) 딱 맞게 상응한다.

 

흡흡은 마음을 활용하는 모습을 말한 것으로 사물에 대하여 적절하게 잘못이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일사(一事)와 일물(一物) 사이에도 하등의 우열이 없고, 낱낱 우주법계의 구성요소로서 완전하게 상응하는 것을 말한다.

위의 피피증명과 각각문답을 이어받아 이 문답증명은 그 문과 답이 조금도 차별이 없어 마치 함개(函蓋)처럼 딱 들어맞는 것을 표현한 것으로서 묵조에서의 묵과 조가 서로 완전(宛轉)한 열린 관계[回互]로 구성되어 있음을 말한 것이다.

그리고 흡흡상응은 앞의 문답증명이 묵과 조의 완전(宛轉)한 열린 관계[回互]임을 현성의 입장에서 표현한 것으로서 흡흡상응은 곧 묵조의 방제(傍提)이다.

그리고 이 흡흡상응은 묵조에서의 용심의 모습에 주목하여 마음과 마음이 조금도 어그러짐이 없음을 말하는데 그런 까닭에 상응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함(函)과 개(蓋)가 일합(一合)하고 전(箭)과 봉(鋒)이 상주(相 )하는 도리를 사사무애법계라 이름한다. 서천의 28대 조사가 모두 제강(提綱)한 것으로서 언(言)과 묵(默)으로 복장하지 않은 바가 없다.

 

43. 조중실묵(照中失默) 그래서 조에 묵이 없으면

44. 편견침릉(便見侵凌) 곧 온갖 번뇌의 침범을 받는다.

 

이상은 묵과 조가 열린 관계[回互]로서 그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없으면 장애가 발생하는 것을 말한다. 지혜만 있고 자비가 없으면 영악하게 잘못 흐르는 것과 같다. 묵의 존재가치를 말한다.

이 조중실묵과 아래의 편견침릉은 흠이나 허물[瑕]을 경계시키는 구절이다. 즉 묵조의 좌선에서 조가 묵을 상실한 조라면 그 조는 허상으로서 사마(邪魔)와 같이 나타난다.

그리하여 위의 조중실묵은 동산양개가 말하는 [이빨 빠진 호랑이와 같고 절름발이 말] 과 같다. 여기에서 침능은 사마(邪魔)가 얼굴만 온화한 모습으로 등장하는 것을 말한다.

 

45. 증명문답(證明問答) 서로 증명하고 문답하는 것이

46. 상응흡흡(相應恰恰) 딱 맞게 상응한다.

 

이 증명문답과 상응흡흡은 위의 문답증명과 흡흡상응을 뒤집어 보인 것으로서 서로 그 의미가 같다. 곧 묵조에서의 묵과 조의 완전(宛轉)한 열린 관계[回互]를 말하는데 아래의 묵중실조를 이끌어내기 위한 암시를 주고 있다.

 

47. 묵중실조(默中失照) 그래서 묵에 조가 없으면

48. 혼성잉법(渾成剩法) 어지럽게 쓸데없는 것이 되고 만다.

 

묵과 조가 회호하는 것으로서 조 없는 묵은 마치 지혜가 없는 묵과 같아서 헛된 노력이 되어 결과가 없는 것을 말한다. 조의 존재가치를 말한다. 47. 48.은 43. 44.와 함께 묵조의 호융을 말한 것이다.

묵중실조와 혼성잉법은 앞의 조중실묵하면 편견침릉한다는 것과 구조의 관계는 같지만 그 내용은 반대이다. 곧 묵조 가운데에서 조를 상실한 묵이라면 그것은 바로 대혜종고가 비판한 묵조사선(默照邪禪)이 되고 마는 것이다.

따라서 묵과 조의 좌선에서 묵과 조의 어느 것 하나라도 상실한 불완전한 묵조라면 아래에서 말하는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그래서 조중실묵과 묵중실조는 좌선에 있어서 서로 완전(宛轉)한 방제(傍提)의 관계로 작용하고 있다.

 

49. 묵조이원(默照理圓) 묵조의 도리가 원만하기로는

50. 연개몽교(蓮開夢覺) 마치 연꽃이 피고 꿈을 깨는 것과 같다.

 

이것은 묵과 조의 합일상태를 말한다. 49.는 묵조의 도리를 설명한 법(法)이고, 50.은 묵조의 비유를 설명한 유(喩)이다.

{불지경론}에 [일체종지를 갖추고 있을 때에는 마치 잠과 꿈에서 깨어난 듯하고, 연꽃이 벙그는 것과 같다]고 한 말을 연상시킨다. 좌선에 있어서 묵과 조가 일합하게 되면 그 경지는 원만보신노사나불의 경지가 되어 아래에서 말하는 비유와 같이 현성한다.

묵조좌선을 하는 당사자의 경지는 곧 연이라면 연화를 피우고 꿈이라면 꿈을 깨는 경지처럼 위없는 경계가 된다. 그리하여 그 경지는 [불지의 경계는 일체지와 일체종지를 갖추어 번뇌장과 소지장을 여읜다. 그리하여 일체법(一切法)과 일체종상(一切種相)에서 능히 스스로 깨침을 열며, 또한 능히 일체유정까지도 깨치게 한다. 그 모습은 마치 잠에서 꿈을 깨듯하고 연이 그 꽃을 피우듯 한다. 그러므로 불지라 한다]와 같게 된다.

그리하여 정전(正傳)의 삼매에 안주하여 곧 위없는 깨침에 이르는 것을 말하고 있다. 영가현각이 말하는 [곧 바로 여래의 지위에 오른다] 는 것과 같은 소식이다.

 

51. 백천부해(百川赴海) 마치 온갖 강물이 바다로 모여들고

52. 천봉향악(千峰向岳) 작은 봉우리가 큰 산을 향하는 것과 같다.

 

묵조의 숭고함과 원만함을 비유한 것이다. 불경계는 육도만행이 다 묵조삼매로 조종(朝宗)을 삼고, 모든 수행계위도 묵조삼매에 바탕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러한 묵조의 일합상의 경계가 향상함을 비유로써 예찬한다면 마치 온갖 강물이 바다로 모여드는 것과 같다.

곧 입불지(入佛地)의 경계는 육도만행의 백천(百川)이 모두 이 삼매의 향수해 속에 흘러들지 않음이 없으며, 온갖 봉우리가 수미봉을 향하고 있는 바와 같다. {증도가}의 [곧 바로 여래의 지위에 오른다]와 {신심명}의 [눈이 만약 잠들지 않으면 온갖 꿈은 저절로 사라진다]와도 같다. 곧 묵조의 원만함을 표현한 것이다.

온갖 천봉(千峰) 곧 대승의 수행계위 52위가 이 왕삼매인 수미산 봉우리에 고개숙이지 않음이 없다. 위 백천부해의 부(赴)와 천봉향악의 향(向)은 공손함을 표시하면서 다가선다는 의미로서 묵조가 이루어내는 세계에 백천 가지의 삼매가 현성함을 말한다. 곧 묵조의 속성을 방참(傍參)으로 나타낸 것이다. {신심명}의 [시방의 지혜로운 자가 모두 이 종지에 들어어간다]는 것과 같다.

 

53. 여아택유(如鵝擇乳) 또한 아왕이 우유만 가려 마시고

54. 여봉채화(如蜂採花) 벌이 꽃에서 꿀을 따는 것과 같다.

 

여아택유는 아왕(鵝王)이 우유만을 골라 마시듯 하는 이 구절은 묵조의 공능을 방제(傍提)의 입장에서 비유하여 나타낸 것으로서 경전에서 [비유하자면 물과 우유가 같은 그릇에 섞여 있을 때 아왕(鵝王)은 그것을 마심에 있어 우유만 골라 마시고 물은 마시지 않고 남겨 놓는 것과 같다] 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경지이다.

여봉채화는 벌이 꽃에서 꿀을 모으듯이 하는 이 구절도 위의 여아택유와 마찬가지로 경전의 비유를 인용한 것이다. 위의 여아택유와 여봉채화는 삼매의 혼산을 제거한 것이다. 곧 묵조의 광명은 한 모금의 우유맛을 보는데 있어서도 함부로 선택하지 않고 신중을 기하는 것이다 비유하면 벌이 꽃을 취하는 데에 있어서도 그 색과 향은 조금도 다치지 않듯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경전에서는 [이와 같이 재물을 더욱 풍요롭게 하는데 마치 벌이 여러 가지의 맛을 끌어 모으듯 하고, 밤낮으로 재물을 늘리기를 마치 개미가 먹이를 쌓듯이 한다] 라고 말한다. 묵조의 좌선에 있어서의 주도면밀함을 말한 것이다.

53.과 54.는 이처럼 묵조를 좌선에 집착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것을 일소시켜 버리는 말이다. 왜냐하면 묵조좌선은 순수아를 자각하는 불행(佛行)의 좌(坐)이고, 불성의 광명속에 안좌(安坐)하는 명랑투철한 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귀신굴과 같은 암흑일랑은 눈꼽만치도 없고 깨침에조차 집착하지 않고 깨침을 자각하는 묵과 조의 세계이므로 좌(坐)에 집착한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경지이다. 좌(坐)하지만 좌(坐)를 잊고 불성을 자각하는 것이다.

마치 벌이 꽃에서 꿀을 따지만 꽃을 손상시키지 않는 것처럼 용의주도하고, 꿀만을 따면서 꽃의 향과 색깔에 사로잡히지 않는 주도면밀함을 말한다. 이것을 굉지는 [좌라는 형상에 갇혀 멈추어 있는 것이 아니다]고 말했다.

 

55. 묵조지득(默照至得) 그래서 묵조의 극치를 터득하면

56. 수아종가(輸我宗家) 우리의 본래고향에 도달한다.

 

묵조의 공부가 원숙하여 그 궁극처에 이르게 되면 실로 불조정전의 왕삼매에 주하는 주인공이 된다. 곧 묵조의 공부는 지극의 곳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맛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위의 묵조지득의 경지를 터득하여 우리 종가에서 말하는 불조정전의 왕삼매요, 정종가(正宗家)의 주인이 되게끔 한다.

이것을 굉지의 말을 빌리자면 구원겁이 무너지고 금시(今時)의 찰나가 부서져야 비로소 삼세제불이 허공에다 철선(鐵船)을 띄우는 꼴이다. 이러한 경지가 되어야 묵이 이르고 조에 이르고, 묵을 초월하고 조를 초월한다. 이것을 곧 부처님의 요기와 조사의 기요[佛佛要機 祖祖機要]라 하였다.

 

57. 종가묵조(宗家默照) 그 종가에 다다른 묵조는

58. 투정투저(透頂透底) 정상부터 바닥까지 다다른다.

 

종가의 묵조라는 말은 굉지가 득의만면(得意滿面)하게 천하를 삼켜버린 기개를 나타낸 말이다. 투정투저는 묵조삼매에 들어 있는 자기의 광명이 천지에 충만하다는 뜻이다.

이것은 종가의 가풍인 묵조의 속성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서 이 종가묵조와 아래의 투정투저는 우리 묵조의 광명이 위로는 유정천(有頂天)으로부터 아래로는 나락가(那落伽)에 이르기까지 꿰뚫는 묵조의 밀용(密用)이 현성한 것을 표현하고 있다.

그 모습은 저 유정천의 가장 높은 꼭대기로부터 나락가의 가장 깊은 심연에 이르기까지 일체처에 두루하지 않음이 없는 묵조의 공능을 비유를 들어 표현한 모습이다.

{법화경}에서 [여래께서 이 경을 설해 마치고 결가부좌하여 무량의처삼매에 드셔 몸과 마음이 움직임이 없었다. … 그 때 부처님께서 미간백호상광을 내어 동방 만 팔천 세계를 비추어 주변에 두루하지 않음이 없었다. 아래로는 아비지옥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위로는 아가니타천에 이르기까지 이 세계에서 다 그 국토의 육취중생을 보았다]고 말한 경지를 말한다.

그리하여 이러한 묵조의 속성을 터득한 주인공의 경계는 아래의 비유에 나타난 것처럼 순약다신 곧 허공신과 같이 온 법계에 전체의 작용으로 두루하여 응용한다. 마치 세존의 미간에서 나온 백호광명이 팔만사천의 온갖 불국토를 비추는 무량의처삼매(無量義處三昧)의 광경과 같다.

 

59. 순야다신(舜若多身) 그 경지는 마치 허공신과 같고

60. 모다라비(母陀羅臂) 관세음의 팔과 같다.

 

순야다와 모다라는 모두 자유자재한 활동을 말한다. 여기에서 순야다의 몸과 아래의 모타라의 팔은 앞의 종가묵조와 투정투저의 비유를 말한 것이다. 곧 그 우리 종가의 묵조의 가풍의 경지는 순야다신[虛空身]과 같아서 법계에 두루하고, 모다라신의 팔과 같아서 온 몸이 그대로 손과 눈이요, 온 법계의 몸이 손과 눈으로 작용한다.

범어 순야다는 허공신이다. 허공으로 체를 삼고 몸이 없이 촉감으로 각(覺)하여 불광의 빛을 얻어 바야흐로 그 몸을 나툰다. 범어 모다라는 인(印)으로서 광명진언의 마하모다라는 대인(大印)으로 경전에서는 관세음에게 팔만 사천의 모다라의 팔과 눈 등이 있음을 비유로 말하고 있다.

이 원조삼매(圓照三昧)의 공덕이 법계에 두루 응현할 때의 경계를 말한다. 즉 머리[首]의 수는 하나인데 그 하나의 머리에서 팔만 사천의 머리가, 하나의 손[手]에서 팔만 사천 개의 손이, 두 어깨[臂]에서 팔만 사천의 모다라신의 팔이, 하나의 눈에서 팔만 사천의 청정보안이 각각 나타나서 자(慈)·비(悲)·정(定)·혜(慧) 등이 있어서 중생을 구제하는 데 자재하게 됨을 말하고 있다.

이 왕삼매에 안주하는 공덕이 두루 중생의 근기에 감(感)하여 응현하고 이익을 주는 것이 순야다와 모다라의 비유이다. 묵조좌선에 현성하는 모습은 추기(樞機)와 밀용(密用)의 온갖 작용으로 나타나는 것을 말하고 있다.

묵조삼매의 공덕이 중생의 근기에 따라 나타내면서 광대한 이익을 주는 공은(功恩)이 마치 허공과 같이 몸이 처처에 두루하는 순야다신과과 몸이 다 손으로 이루어져 있는 모다라신의 자유자재함과 같음을 말한다.

 

61. 시종일규(始終一揆) 처음과 끝이 일여하지만

62. 변태만차(變態萬差) 그 변화의 모습은 천태만상이다.

 

이것은 초발심부터 성정각에 이르기까지 다만 좌도량에 이르기까지 시(始)와 종(終)이 일규(一揆)하여 수증(修證)의 변제가 없는 묵조삼매의 한 길을 말한다. 그러나 그것이 천변만화의 진퇴를 하게 되면 곧 불작불행(佛作佛行)으로서의 의의를 지닌 활동이 된다. 이것을 [처음 마음을 낸 때가 곧 정각을 이루는 때이다] 라고 설하고, [일체중생은 다 염심(念心)·혜심(慧心)·발심(發心)·근정진심(勤精進心)·신심(信心)·정심(定心)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법은 비록 염념생멸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상속하여 끊어짐이 없다. 그러므로 수도라 한다] 라고 하여 시(始)와 종(終)이 필경에는 다르지 않다고 설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일규(一揆)의 마음이다. 규(揆)는 용(用)으로서 일규(一揆)란 두 번 다시는 없는 것을 말한다. 묵조의 추기(樞機)가 정안(正按)함을 말한 것이다.

위의 시종일규와 같은 수증은 성숙한가 미성숙한가에 따라서 점점 내부와 외부의 변하는 모습에 차별이 생겨나기도 하는 것이다. 곧 한 알의 콩을 땅에 심어 싹이 움트면 어제의 모습과 오늘의 모습에는 조금씩의 차이가 보인다. 그러나 콩의 성품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나 근소한 하루하루의 차이가 곧 만차로 드러난다. 이것은 수와 증이 일여하지만 그 본증(本證)의 자각(自覺)에 따라 천차만별하는 것을 말한다.

비록 초발심시변성정각(初發心時便成正覺)이라고 말들을 하지만 그것 또한 주(住)·행(行)·향(向)·지(地)를 부정하지 않는다. 이것은 소위 일념이 곧 만년이고 시방이 목전에 펼쳐져 있다는 것을 말한다. 경전에서는 [사유와 상하의 허공은 헤아릴 수 있지만 불공덕은 다 설할 수 없다]고 말했다.

 

63. 화씨헌박(和氏獻璞) 묵 가운데 조는 화씨가 구슬을 바치는 것과 같고

64. 상여지하(相如指瑕) 조 가운데 묵은 인상여가 흠집을 지적하는 것과 같다.

 

오직 자신만이 분명히 알고 있을 뿐 다른 사람은 엿볼 수가 없다. 묵 가운데 조가 감추어져 있어서 자기만 알 뿐 타인은 모른다. 조 가운데 묵을 머금고 있어서 타인만 일 뿐 자기는 모른다. 그리하여 은(隱)과 현(顯)이 일여하고, 명과 암이 자재하다. 이것이 곧 중연(衆緣)에 명응(冥應)하여 제유(諸有)에 떨어지지 않는 것이다. 바로 그 뜻이 난해하기 때문에 이 비유를 든 것이다.

{한비자}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변화(卞和)라는 사람이 형산의 곤강의 계곡에서 옥돌을 하나 주웠다. 그것을 초나라 여왕에게 바쳤다. 그러나 왕은 그것을 돌이라 하여 벌로 변화의 한쪽 다리를 잘랐다. 다음에 무왕이 즉위하자 변화는 그 구슬을 무왕에게 바쳤다. 그러나 무왕도 그것을 돌이라 하여 변화의 다른 한쪽 다리마저 잘랐다. 후에 문왕이 즉위하자 변화는 그 옥돌을 품에 안고 형산의 아래에서 슬피 울었다. 문왕이 그 연유를 묻자 변화가 말했다. "내 다리가 잘린 것은 원망하지 않으나 진짜 옥을 평범한 구슬로 알고, 저의 충심을 몰라주는 것이 서글픕니다" 이에 문왕이 옥돌을 다듬자 참으로 훌륭한 진짜 옥이 나타났다. 그러자 문왕이 탄식하여 말했다. "슬프도다. 두 선왕께서는 사람의 다리는 쉽게 잘랐지만 옥돌을 다듬어 그것이 진짜 옥인 줄은 몰랐구나" 그리고 문왕은 그 옥을 국보로 삼았다.

화씨헌박이라는 말은 이 고사를 말한 것이다. 이것은 곧 화씨의 구슬이 제 가치를 인정받은 것으로서 묵[구슬]가운데의 조[가치]를 비유로 나타낸 것이다.

그리고 상여지하라는 말은 {사기} [열전]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조(趙)나라 왕이 변화의 구슬을 얻자 진(秦)나라 王이 그 사실을 듣고 글을 보내서 15개의 성과 그 구슬을 바꾸자고 하였다. 조왕이 신하들과 함께 모여 그 문제를 협의하였다. 협의한 끝에 '구슬을 보내더라도 진왕이 성을 내주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속임수이다. 그러나 구슬을 보내지 않으면 그것을 빌미로 군대를 보내 조나라에 쳐들어올 것이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는 궁리 끝에 인상여라는 사람에게 구슬을 주어 사신으로 파견하였다.

진왕이 좌대에서 인상여가 가지고 온 구슬을 보고 크게 기뻐하였다. 그리고 여러 사람들에게 보이니 모두가 진왕을 위해 만세를 불렀다. 인상여는 진왕이 성을 내줄 것 같지 않는 것을 눈치채고는 속임수로 말했다. "구슬에 흠집이 있으니 청컨대 지적하게 해 주십시오" 이에 진왕이 인상에게 구슬을 건넸다. 인상여는 구슬을 꼭 껴안고 뒤로 물러나 기둥에 착 달라붙어 크게 분노하면서 진왕에게 말했다. "대왕께서는 저로 하여금 죽음을 재촉케 하십니다. 이제 저는 이 구슬과 함께 벽에 부딪쳐 가루가 함께 되겠습니다" 그러자 진왕이 구슬을 그대로 되돌려 주자 인상여는 구슬을 안고 조나라로 돌아왔다.

상여지하는 바로 이 고사에서 나온 이야기이다. 이것은 조 가운데의 묵을 비유한 것이다. 곧 위의 화씨헌박과 상여지하는 좌선에 있어서 묵조일여(默照一如)의 완전(宛轉)을 나타낸 말이다.

이 화씨헌박은 묵 가운데의 조이고, 아래의 상여지하는 조 가운데의 묵을 표현한 것이다. 박(璞)은 아직 다듬지 않은 옥돌이다. 표면상으로는 돌멩이와 다름이 없지만 안으로는 빛을 머금고 있다. 하(瑕)는 인상여가 구슬에 흠집이 있다고 지적했는데 그것은 진왕을 속이기 위한 술책이었다.

63.은 묵 가운데의 조를 비유한 것이고, 64.는 조 가운데의 묵을 비유한 것이다. 곧 묵조선의 왕삼매에 천변만화하는 묘용이 있는 것은 곧 묵 가운데 조가 있고, 조 가운데 묵이 있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묵 가운데의 조는 변화가 바친 구슬[璞]과 같고 조 가운데의 묵은 인상여가 지적한 흠집[瑕]과 같다. 곧 이것은 정과 편이 서로 교참하고 묵과 조가 서로 열린 관계[回互]로서 대법(大法)의 강요(綱要)이고 대낮에 해를 보는 것과 같다.

 

65. 당기유준(當機有準) 근기에 따라 기준을 달리 두고 있지만

66. 대용불근(大用不勤) 대용은 움직임이 없다.

 

따라서 묵조수행자의 행주좌와에는 일정한 기준이 있어서 막행막식하는 법이 없어 결코 탈선이란 있을 수 없다. 그리고 묵조수행자의 일진일퇴는 마치 요순의 통치와 같이 일부러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다스려지는 모습이다. 마땅히 수행의 기관(機關0에는 추기(樞機)가 있어야 한다.

묵조수행의 사위의(四威儀)에 있어서 조금도 잘못되거나 편벽되지 않아야 함을 말한 것이다. 준(準)은 평(平)이고 균(均)의 의미다. 즉 눈꼽 만큼의 틀림도 없는 마음을 가리킨다.

대용은 인위적인 조작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대용은 천하를 다스리는 사람이 인정(仁政)을 베풀고 만인을 안락하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대용을 행하는 데 있어서 굳이 근(勤[작용])하지 않아도 척척 잘 진행되어가는 모습이다. 묵조좌선의 본증성을 말한 것이다.

아래의 환중천자와 새외장군은 이것을 비유로 나타낸 것이다. 이처럼 묵조수행에는 조작적이거나 계획적인 노력이 없고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자연스럽게 법이연(法爾然)하다.

 

67. 환중천자( 中天子) 그 근엄함은 하늘아래 천자와 같고

68. 새외장군(塞外將軍) 그 늠름함은 변방의 장군과 같다.

 

그리하여 묵과 조는 비유하자면 환중에 있으면서 명령을 내리는 천자와 같이 위엄이 있고, 변방에 있으면서 병사를 호령하는 기품이 넘치는 장군과 같다. 그래서 환중과 새외처럼 다스리는 구역이 다른 것은 마치 육근의 마군을 막고 분별망상의 도적을 심중에 들어오지 못하게 퇴치하는 것과 같다.

그리하여 자기라는 천자를 태평무사하게 한다. 위의 대용불근의 모습은 마치 천자와 같이 위엄이 있다. 천하를 아홉으로 나누어 그것을 구주라고 하는데 그 한가운데가 천자의 영소(領所)로서 이것을 환중( 中)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대용불근의 모습은 또한 변방을 지키는 장수처럼 위풍당당하다. 환중은 천자의 정화(政化)이고 그 밖의 여덟 지역을 새외(塞外)라 하여 장군이 천자의 명령을 받아 다스리면서 무위(武威)를 펴는 것이다.

묵이 육진의 산란에 침해받지 않는 것은 마치 장군의 위엄처럼 든든하고, 조가 육식에 떨어지지 않는 비사량은 마치 천자의 정화(政化)처럼 고요하다. 환중( 中)은 환내( 內)로서 천자의 기내(畿內)를 의미하고, 새외(塞外)는 격(隔)으로서 다른 나라와 격색(隔塞)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한서}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문제(文帝)가 주아부(周亞父)를 장군으로 임명하였다. 장군은 가는 버들가지로 군영을 만들어 오랑캐의 침입을 대비하였다. 문제가 가는 버들가지의 군영에 이르러 보니 군사들이 가는 버들가지에 갑(甲)을 씌우고 그 속에 활과 창을 가득 채워 넣었다. 천자의 선봉대가 먼저 그 앞에 이르렀으나 그곳에는 들여보내지 않았다. 선봉대가 말했다. '천자께서 오셨느니라.' 그러자 군문도위(軍門都尉)가 말했다. '여기에서 장군의 영을 따랐을 뿐입니다. 따로 천자의 조칙은 들은 적이 없습니다. 상부에 보고하겠습니다.' 그런 후에도 들여보내지 않았다. 이에 천자가 사자를 시켜 조칙으로 장군을 찾아 전해 말했다. '짐이 장군을 번거롭게 했구료.' 주아부 장군이 그 말을 전해듣고 군영의 문을 열자 비로소 천자가 군영에 들어가 말했다. '주아부 장군이야말로 진정한 장군이로다.'

 

바로 이 이야기를 가지고 묵과 조가 융통하여 바야흐로 일대사인연에 걸맞는 도리를 말한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군신의 합도이고 정편의 열린 관계[回互]이다. 여기에서 묵은 천자와 같고 조는 장군과 같아서 천자가 대법(大法)을 시설하니 장군이 일체를 눈껍만치의 차질도 없이 이루어내는 것을 말한다.

 

69. 오가저사(吾家底事) 그러므로 우리의 묵조가풍은

70. 중규중구(中規中矩) 중도의 규와 구에 들어맞는다.

 

이로부터 이하는 {묵조명}의 결어이다. 묵조의 종가는 위에서 말한 종가묵조의 종가와 같은 의미이다.

저사는 목전의 당사(當事)를 가리킨다. 그래서 묵조의 가풍이 주도면밀함은 곧 아래의 중규중구이다. 규(規)는 원융문(圓融門)이고 구(矩)는 항포문(行布門)이다. 묵조의 가풍은 묵으로서는 구(矩)에 치우치지 아니하고 조로서는 규(規)에 어긋나지 않는 것을 중(中)이라 한다.

규(規)와 구(矩는) 묵과 조이고, 정과 편이며, 공과 덕이요, 진여와 수연이다. 이것이야말로 묵조의 좌선이 바로 중도에 입각한 구원의 본증임을 설파한 말이다. 일체의 양단을 떠나 있어서 묵의 추기(樞機)에만 떨어지지 않고, 조의 방참(傍參)으로만 현성하지도 않는 완전(宛轉)을 종통(宗通)과 설통(說通)의 겸대이다. 따라서 {묵조명} 전체에 대한 총결이다.

이미 이상에서 누누이 서술한 바와 같이 우리 묵조가풍의 일상은 이미 일거일동이 모두 규와 구에 적중하고 불심에 일여하며 보리에 합치해 있다. 이것은 모든 부처님들의 가르침과 모든 조사들의 아름다운 모범이 면면밀밀하여 불안으로도 엿보기 어려운 것을 말한 것이다.

 

71. 전거제방(傳去諸方) 제방에 전해져서도

72. 불요잠거(不要 擧) 남을 속이는 일이 없다.

 

이 구절이야말로 대혜의 묵조선의 의의를 제대로 표현한 것이다. 우리 종가의 가풍이 천하에 널리 제대로 전해져서 묵조가 잘못 이해됨이 없게 하라는 부촉의 말이다.

전거제방과 불요잠거의 두 구는 묵조의 가풍이 묵조를 비판하는 어리석은 선자들에게까지 제대로 이해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따라서 묵조선은 직접 자신이 몸을 통해서 앉아보아야 할 것을 격려하고 있다. 그래서 그 내용을 알지도 못하여 묵조의 가치를 모르는 야호선자(野狐禪者)는 후에 대혜측에서 주장한 것처럼 묵조선을 사선(邪禪)이라 비판할 염려가 있다. 가풍이 곧 제방으로 전해져서 납자들을 속이지 않도록 경계한 말이다.

묵조의 이러한 의미를 임제의 법손인 대혜종고가 묵조의 입장에서 파악하고 있었더라면 굉지정각과 동시대에 살면서 묵조사선(默照邪禪)이라는 비난의 말은 보다 구체적인 대상과 내용을 설정했을 것이다. 우리 묵조선의 가풍은 상술한 바와 같이 불법극묘의 법문으로서 결코 천하의 사람들을 속이면서 악선전하는 것이 아니다.

한 마리의 개가 허공을 향해 짖어대면 온갖 개들이 진실도 모르고 부화뇌동하여 허공을 향해 짖어댄다. 곧 천하에 이보다 위험천만한 것은 없다고 개탄하는 내용이다. 굉지정각은 묵조사선이라는 일부 사람들의 비난에 구애되지 아니하고 오로지 화목한 얼굴로 법을 설했다. 그리하여 타산지석의 교훈으로 오히려 묵조의 선양에 이바지한 것이다.

 

 {묵조명}의 의의

 

{묵조명}의 이와 같은 내용은 묵조선의 근본교의를 구성하고 있다. 앞서 {묵조명}의 구조를 살펴보는데 있어서 대략적으로 묵조의 고유한 묘용을 작용으로, 묵조의 본증성을 정체(正體)로, 묵조의 진리가 드러나 있는 것을 현성(現成)으로 하여 세 가지로 구분하였다. 이 가운데 작용은 묵조선의 지관타좌(只管打坐)이고, 정체는 묵조선의 본증자각(本證自覺)이며, 현성은 현성공안(現成公案)을 가리킨다. 이와 같이 묵조선의 의의는 이미 {묵조명} 가운데 그 의미가 함유되어 있다.

지관타좌는 묵조선의 좌선지상주의를 가장 잘 나타낸 말이다. 묵조의 작용이 지관타좌로 드러나 있는 것은 몸의 앉음새만이 아니라 마음의 작용에 이른다. 때문에 {묵조명}에서 [좌선하는 사람은 영겁에 空하고 만물도 서로 和하여 모두 空이 된다]고 말했다.

그래서 지관타좌의 좌선이 깨침의 형태라면 깨침은 좌선의 내용이다. 더 이상 좌선과 깨침이 다른 것이 아니다. 지관타좌는 '오직 앉아 있을 뿐'이라는 정도의 뜻으로 좌선지상주의이기도 하다. 앉아 있는 것이 깨침 그 자체이기 때문에 앉아 있다는 사실이 다름아닌 온전히 깨침의 입장으로서의 좌선이다. 그냥 몸으로만 앉아 있는 것이 아니다. 깨침의 내용이 몸의 좌선으로 드러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좌선은 수행이면서 동시에 깨침이다. 바로 이 좌선의 형식이 가부좌라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리하여 가부좌의 첫째 의의는 앉음새의 형식에 있다. 형식을 떠나서는 좌선이란 있을 수 없다. 형식을 떠난 좌선이란 단순한 형이상학의 철리에 불과하다. 앉아 있는 모습 그대로가 좌선이고 좌선 그대로가 깨침의 현성으로 간주된다. 좌선의 형식에 대해서 여러 가지 좌선의(坐禪儀)에서 누누이 강조하고 있는 것은 비단 초심자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숙련된 자의 경우야말로 그 숙련의 경지가 올곧하게 좌선이라는 형식으로 통해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법은 다름아닌 우리가 행하는 행동거지 그대로의 모습으로서 불법즉위의(佛法卽威儀)를 말한다. 이 좌선의 가부좌라는 형식은 좌선의 실천을 상징하면서 동시에 실천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몸으로 직접 앉지 않고 깨침을 얻는다든가 좌선을 한다고 말하는 것은 설령 삼세제불이 와서 설법한다 해도 혀끝의 희롱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실천을 무시하고는 어떤 선종도 존재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특히 묵조의 좌선은 묵과 좌·조와 선이 동일시되는 입장이라서 좌선이라는 앉음새 자체가 묵조이다.

다음 가부좌의 둘째 의의는 관조(觀照)하는 것이다. 단순히 앉아서 묵묵히 있는 것이 아니다. 묵묵히 앉아 있되 이 묵좌(默坐)는 삼천대천세계에 두루 미치는 묵좌이다. 곧 조가 수반되는 묵이다. 그래서 {묵조명}에서는 묵과 조의 관계를 제대로 살펴야 한다고 말한다.

곧 묵조의 좌선에서 조가 묵을 상실한 조라면 그 조는 허상으로서 사마(邪魔)와 같이 나타난다. 조에서 묵이 결여되는 것은 마치 이빨 빠진 호랑이와 같고 절름발이 말과 같다고 하였다. 그래서 묵좌는 묵조의 좌이지 단순한 침묵만의 좌가 아니다. 이것은 몸의 좌이면서 동시에 마음의 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부좌의 첫째 형식은 여기에서 바로 내용의 관조로 이어진다. 관조가 없는 형식의 坐는 한낱 껍데기일 뿐이다.

따라서 묵과 조의 좌선에서 묵과 조의 어느 것 하나라도 상실한 불완전한 묵조에 떨어져서는 안된다. 이처럼 묵 가운데 조가 없어서는 안되고 아울러 조 가운데 묵이 없어서는 안된다는 관계를 완전(宛轉)이라는 용어로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둘이 뒤섞여 있으되 제각각 자신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

이처럼 묵과 조가 일합하면 그 경지는 마치 원만보신노사나불과 같은 경지가 되어 수와 증의 합일이 나타난다. 이것을 연꽃이 벙글고 꿈에서 깨어나는 도리[蓮開夢覺]라는 말로 표현하였다. 이것은 묵조좌선을 하는 수행인의 경지는 곧 사바세계에서 꿋꿋이 연꽃이 피어나듯이, 미몽의 중생을 벗어나고 꿈을 탈각하듯이 위없는 경계가 된다는 말이다. 이것은 가부좌의 형식이 그 내용으로서의 관조에까지 다다른 것을 나타낸 것으로서 정전(正傳)의 삼매에 안주하여 위없는 깨침에 이르는 것을 말하고 있다.

가부좌의 셋째 의의는 묵조가 완전(宛轉)의 작용으로 현성된 모습이다. 완전은 저것[彼]과 이것[此]이 화합하여 열린 관계[回互]로 작용하기도 하고 제각각 닫힌 관계[不回互] 작용하기도 하는 자유자재의 경지로서 저것[彼]은 이것[彼]이면서 동시에 이것[此]이고, 이것[此]은 이것[此]이면서 동시에 저것[彼]이 되는 도리를 말한다.

여기에서 묵과 조의 완전이란 가부좌의 형식적인 의의와 내용적인 관조의 의의가 완전함을 나타낸다. 이것은 묵과 조가 상대적인 입장에 처해 있으면서도 상대성을 뛰어넘은 입장으로 바뀌며, 제각각[分立]의 입장에서 전체[全一]의 입장으로의 사고전환이다.

전일적인 입장이기 때문에 아직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크나큰 삶의 경계가 현성한다. 그렇지만 그것은 법의 자기에 투철한 것이기 때문에 실제로는 본래면목의 자각이며 본지풍광의 체험으로서 어떤 새로운 것의 경험이 아니다. 본래부터 있었던 것의 자각으로서 본가에로의 귀향이다.

따라서 가부좌는 특별한 무엇으로 규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형식과 내용의 구분이 엄밀하게 존재한다고 규정해 버리면 깨침은 필연성이 아니라 목적성이 되어 버린다. 가부좌는 본래의 자기가 현성하는 것일 뿐이다. 일상의 모든 사사물물이 다 가부좌의 구조 속에서 본래의 자기체험으로 다가온다.

그리하여 주변의 어느 것 하나 가부좌의 현성 아님이 없다. 그래서 가부좌는 부단한 깨침의 체험으로 연속되어 간다. 과거의 깨침의 체험과 미래의 깨침의 체험이 따로 없다. 지금 그 자리에서의 깨침이다. 깨침에 전후가 없다. 전일적인 입장이기 때문에 미혹한 중생의 입장에서의 고매한 깨침과 진리를 통한 각자(覺者)의 입장에서의 일상적인 깨침 사이에 구분이 없다. 여기에서는 벌써 돈오점수가 문제되지 않는다.

일체처와 일체시가 깨침의 현현으로서 미오(迷悟)가 없고 범성(凡聖)이 없으므로 깨침의 횟수가 없다. 묵조의 완전이 가부좌로 나타나 있을 뿐이다. 그래서 가부좌는 깨침의 다른 이름이다. 깨침은 일회성의 특수경험과 동시에 그 이후의 생활경험 속에서 연속되기 때문에 동시와 연속이라는 관계속에서 더욱더 묘용을 발휘해 나아간다.

이것이 바로 가부좌의 완전한 작용이고 가부좌의 일상성이다. 이 도리를 말로 표현하자면 달빛이 황금의 대지 위에 펼쳐진 모습으로 본체[正]가 우뚝 드러나 막힘이 없어 현상[偏]과 함께 작용하는 모습이다. 그래서 펼친 즉 삼세에 두루하여 부족함이 없다.

그러므로 진시방세계가 그대로 하나의 눈이요, 진시방세계가 그대로 자기이며, 진시방세계가 그대로 광명이고, 진시방세계가 바로 해탈문이다. 따라서 어느 곳이나 성불처(成佛處)이고, 어느 때나 설법시(說法時)가 된다.

다음 가부좌의 넷째 의의는 수행과 더불어 깨침의 의의를 함께 나타내준다. 가부좌의 의의는 묵조의 속성으로 나타난다. 곧 묵조의 가풍은 목전의 당사를 중시하기 때문에 주도면밀을 그 특징으로 삼는다. 일상 행위 하나 하나가 소홀함이 없다. 일거수 일투족이 대단히 용의주도하게 이루어지기 때문에 규구(規矩)를 벗어나지 않는다[中規中矩]. 이 중규중구에서 묵으로서는 구(矩)에 치우치지 아니하고 조로서는 규(規)에 어긋나지 않는 것을 중(中)이라 한다. 규와 구는 각각 묵과 조이고, 정과 편이며, 공과 덕이요, 진여와 수연이다.

다음의 묵조의 정체는 곧 본증자각을 의미하는 내용으로 전개되어 있다. 이것이야말로 앞서 언급한 가부좌를 통한 묵조의 좌선이 바로 중도에 입각한 구원의 본증임을 설파하고 있다.

일체의 양단을 떠나 있어서 묵의 근본에만 떨어지지도 않고, 조의 작용으로만 현성하지도 않는 종통(宗通)과 설통(舌通)의 완전이다. 이것은 가부좌가 지니고 있는 깨침의 속성이 일상성과 함께 지속성임을 말한다.

그래서 {묵조명}에서는 [좌선이야말로 언어표현의 극치이며, 깨침이 비추어낸 세계야말로 널리 통한다]고 말하고 있다. 가부좌 자체는 곧 깨침의 현성이기 때문에 묵조선을 깨침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수행이라는 뜻으로 증상의 수행이라 말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또한 가부좌의 모습은 깨침의 연속성이기 때문에 그 속에서 행하는 좌선수행이 비로소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따라서 가부좌는 그대로 깨침의 현현으로서 나타난 몸의 구조이고 마음의 구조이다. 이러한 가부좌야말로 묵조가 나타내는 일상성이고 본증성이다.

그래서 묵조의 정체는 작용을 통하여 여기에서 비로소 현성되는 것이다. 굳이 깨침을 얻으려고 목적하지 않아도 저절로 수행의 필연성이 구현되어 온다. 그래서 올바른 수행은 올바른 가부좌이고, 올바른 가부좌는 올바른 수행이며, 올바른 좌선은 올바른 깨침이다.

곧 {묵조명}에서는 [묵조일여의 세계에 이르러야만 비로소 우리 종가에 도착하는 것이다.

우리 종가의 묵조일여의 세계야말로 위로는 유정천으로부터 아래로는 아비지옥에 이르기까지 통한다. 그 모습은 어디에나 자유로이 다다를 수 있는 허공신의 몸과 같고 모든 것을 거머쥐는 모다라의 손과 같다]고 말한다.

좌선 그대로가 깨침의 작용이므로 일시좌선(一時坐禪)은 일시불(一時佛)로 사는 것이고 일일좌선(一日坐禪)은 일일불(一日佛)로 사는 것이다. 곧 좌선이 곧 불[坐禪卽佛]이요 불이 곧 좌선[佛卽坐禪]이다. 이것이 묵조의 작용과 정체와 현성이 지니고 있는 본래 의의이다. 이처럼 {묵조명}은 굉지의 묵조선의 기본적인 틀을 제공해주고 있다.

 

1. 조동종의 성립

 

선종은 좌선의 수행방식을 바탕으로 하여 형성된 종파이다. 따라서 선종의 성립은 중국불교에서나 가능하였다. 왜냐하면 인도불교의 경우 좌선은 불교의 모든 학파나 지역에서 예외없이 기본적으로 수행되며 실천되고 있었기 때문에 굳이 좌선만을 종지로 내세울 필요가 없었다. 때문에 좌선만 종지로 내세우고 있는 종파를 인도불교의 교단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이와는 달리 중국불교에서는 수·당 시대에 이르면서 어느 특정한 경전을 선택하여 자파의 중심이념으로 삼는 소의경전(所依經典)을 내세워 그에 근거한 교의와 사상과 의례와 신행 등을 강조하는 종파를 형성하였다. 그러나 선종의 경우는 특정한 경전을 내세우기보다는 석존이 깨침의 방법으로 의용했던 좌선을 중심으로 마음의 깨침과 그 실천을 주장하였다.

좌선을 통하여 깨침에 이르는 것을 가장 중요시하는 선종의 역사는 좌선관의 변천과 그 궤를 같이 해 왔다. 그것은 또한 항상 개별적인 것으로부터 집단적으로, 기성 사원으로부터 선종사원으로 옮겨가는 수도형태상의 변화와도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었다. 이것은 선자의 선풍형성의 기본이 그 자신의 실천생활로부터 생겨났으며, 또한 수도 그 자체는 각각의 선풍에 의해 내면적인 것의 표출로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선종의 내부에도 다양한 수행방식이 표출되었다.

그 시작은 6세기 초반에 인도로부터 중국에 도래한 보리달마(菩提達磨)로부터 연원한다. 그러나 정작 보리달마 당시에는 종파라든가 교단이라는 개념이 매우 희박하였다. 명실공히 선종이라는 교단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한 것은 그보다 70-80년 이후에 해당하는 수나라 시대였다. 특히 오늘날 중국선종의 제4조로 열거되고 있는 대의도신(大醫道信)은 일정한 지역을 정하여 500여 명이 모여서 집단생활을 하였는데 이로부터 선종이 그 면모를 드러내게 되었다. 도신을 중심으로 하는 교단은 이후 제5조 대만홍인(大滿弘忍)의 선풍과 더불어 당나라 시대에는 소위 동산법문(東山法門)으로 널리 주도 장안과 낙양에까지 알려지면서 본격적인 세력을 과시하였다.

이후 홍인에게서는 700명 이상의 제자들이 배출되었는데 소위 홍인의 10대 제자들을 중심으로 선종의 세력이 중국의 천하에 퍼져나갔다. 그 가운데 대감혜능(大鑑慧能)과 대통신수(大通神秀)를 중심으로 하는 남종(南宗)과 북종(北宗)의 세력이 유명하였다. 이 가운데 혜능의 계통인 남종이 그 주도권을 확립함으로써 중국 선종은 남종일색으로 전승되었다. 혜능의 정통선법을 계승한 사람은 43명이라 하는데 청원행사(靑原行思)와 남악회양(南嶽懷讓)의 두 계통에서 많은 제자들이 배출되었다. 그 가운데법 청원행사 - 석두희천 - 약산유엄 - 운암담성 - 동산양개 - 조산본적과 운암담성 시대에 이르러 조동종(曹洞宗)이라는 선풍이 등장하였다. 조동종은 동산양개와 조산본적의 선풍을 일컫는 말이다. 당대 말기에 형성된 선종오가(禪宗五家)는 청원행사의 계통에서 조동종·운문종·법안종이 출현하였고, 남악회양 계통에서 임제종·위앙종이 출현하였다.

조동종은 소위 당대 말기에 형성된 선종오가(禪宗五家) 가운데 가장 먼저 성립되었다. 조동이라는 명칭은 강서성 서주의 동산에 주석했던 양개(807-869)와 무주의 조산에 주석했던 본적(840-901)에 의하여 조동종의 근본교의가 된 동산오위(洞山五位)를 총림의 표준으로 삼아 활동했던 것에서 기인한다. 그후 조동종의 계통은 조산과 법형제인 운거도응(?-902)에 의하여 계승되어 갔다. 동산양개는 위산영우( 山靈祐)의 지시에 의하여 약산의 법을 이은 운암에 주석하고 있던 담성(780?-841)에게 참하여 무정설법(無情說法)의 이야기를 통하여 마음에 크게 느끼는 바가 있었다. 이후 운암의 거처를 떠나 밀사백(密師伯)과 함께 위산으로 가는 길에 개울을 건너다가 대오하고 게송을 남겼다. 깨침의 세계를 게송으로 나타낸 선자는 동산이 최초이다.

동산의 괄골선(刮骨禪)은 운거가 계승하였다. 괄골선은 뼈를 깎는다는 의미로서 언어에 대한 집착을 철저하게 배제하고 자기자신에 의한 철두철미한 자각을 강조하는 선을 말한다. 신체에 들어간 독은 뼈를 쪼개 도려내지 않으면 안된다. 독이란 분별을 의미하는데 언어로 표현된 관념을 특별하게 중시하는 것을 말한다. 당시의 선지식들은 대부분 사람들을 놀래킬 만한 언어나 방(棒)과 할(喝)과 같은 수단을 사용하여 제자들이 허위허세를 부리는 경향으로 기울어가는 태도를 꾸짖었다.

그러나 그러한 것과는 다른 선이라 주장한 것이 곧 동산의 괄골선이었다. 그리고 공훈(功勳)에 떨어지는 것, 곧 깨침의 세계에 안주하는 것을 강하게 경계하였다. 깨침에 안주하는 것마저 경계한 것이다. 이것은 대상을 공하게 하여[玄路] 흔적을 남기지 않는[鳥道] 자기완성과 동시에 타인 및 사회에 대한 사랑[展手]의 실천에 다다른다. 이 조도(鳥道)·현로(玄路)·전수(展手)를 동산의 삼로(三路)라 한다. 이와 같이 약산유엄으로부터 동산양개로 이어진 선풍의 법맥은 대오철저(大悟徹底)한 사람의 자유무애한 행위인 몰종적(沒 跡)의 종풍을 자기안에서 깨치고 친밀하게 수용해 나아가는 주도면밀(周到綿密)한 조동종풍으로 확립되었다.

 

묵조선의 특징_수증일여(修證一如)

1. 수행이 곧 깨침[修證不二]

 

1) 수행의 필요성

 

우리는 일년 삼백 예순 다섯 날 맨날 자고 일어나며 울고 웃으며 이익을 보고 손해를 보며 미끄러지고 구르면서 살고 있는데 도대체 무엇을 위하여 그러는 것일까. 아니면 누가 나에게 그런 일을 하도록 시키는 것일까. 그것은 생각할 여지도 없이 매일의 일과에 쫓겨 곧장 무덤으로 직행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또한 그러한 의문이 퍼뜩 머리에 떠오르면 자기의 일과에 손도 대지 못하는 사람도 많을 것임에 틀림없다. 혹은 그러한 것을 생각하는 것은 한가로운 관념의 유희에 불과하다고 치부해 버릴지도 모르지만 그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에 인간이 동물과 다른 이유이기도 하다.

서양의 중세기처럼 인간이 신의 종이나 노예처럼 간주되고 있을 때에는 인생의 일체 현상은 모두 신의 뜻이라고 간단하게 결론지어 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근대인에게는 그렇지 않다. 지금 우리가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며 이익을 보기도 하고 손해를 보기도 하는 것이 모두 하늘에 계시는 신의 뜻이라고 한다면 아마 초등학생도 코웃음을 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물론 우리 자신의 활동이라고 결론을 지어 버린다. 하물며 머리가 다 자란 어른들에게 있어서는 우리 자신이야말로 창조의 주체이며 신도 부처도 우리 두뇌의 산물이라고 생각하는 쪽이 훨씬 많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우리자신이라는 [자기]란 도대체 무엇인가 하고 질문해 보아도 전혀 정체(正體)를 알 수가 없다. 우선 쉽게 말하여 시간적으로 자기 나이의 생명 공간적으로 몇 척 안되는 육체 이것이 [자기]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일생동안 아무런 의문도 없이 태평무사하게 지낼 수 있다면 또한 그것으로 좋은 것이겠지만 인간세상은 좀체로 그렇지만은 않다. 옛날부터 그 형태와 교의는 여러 가지로 변화했지만 종교라는 것이 지상에서 완전하게 모습을 감추지 못하는 것은 이것만으로도 무엇보다 틀림없는 증거라 단언할 수 있다.

흔히 비유되는 것이지만 우리가 건강할 때에는 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지내지만 일단 위에 병이 생기면 그 부분이 아프기도 하고 괴롭기도 하여 항상 그 부분에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다. 보통 때에는 신경쓰지 않고 잊어버리고 지내던 것을 병에 걸려서야 비로소 그것을 의식할 수 있게 된다.

그와 마찬가지로 평온무사할 때에는 자기마저도 의식하지 못하고, 또한 의식할 필요도 없이 살고 있지만, 인생의 긴 도중에는 자칫 희비애락(喜悲哀樂)의 갖가지의 기복(起伏)이 있게 마련이다. 때로는 삶의 고통에 몸부림치며 인생의 무상에 번민하기도 할 것이다. 사람의 능력의 한계를 알고 비관하기도 할 것이다. 그러한 때에 우리는 무엇이 인생의 진실한 것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도대체 자기라는 것은 무엇인가 라고 되돌아보게 된다. 그리고 자기 나이의 생명과 몇 척 안되는 몸뚱아리의 한정된 자기의 존재에 불안을 알고 절망을 느끼기에 이른다. 거기에서 건강회복의 처방전으로서 종교가 등장하는 것이다.

 

2) 수행의 형태

 

예로부터 많은 학자가 종교라는 것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논의해 왔는데 그 표현에는 다소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대체적으로 [유한 속에 있으면서 무한한 것과 합일하여 모든 순간에 영원한 것]이 종교의 본질이라는 점에 있어서는 거의 일치하고 있는 듯하다. 조그마한 자기라는 것에 절망하고 그 존재에 불안을 느낄 때 우리는 그 불안과 절망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무한]한 것과 합일하여 [절대]의 존재에 귀의하고 싶다는 참기 어려운 정념(情念)에 내몰리는 것이다.

그런데 그와 같은 종교의 목적으로 달성하기 위하여 취하는 방법을 대별해 보면 선정형(禪定型)과 기도형(祈禱型)의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가 있다. 기도형이라는 것은 개(個 :修行者) 외부에 전(全 : 神)이 존재한다는 것이며, 선정형이라는 것은 그와 같은 개(個)가 곧 전(全)이라는 개즉전(個卽全)의 입장을 취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분류방식은 대단히 이해하기 쉽다. 신(神)이 개(個)의 외에 존재한다는 입장을 취하는 기도의 종교로는 당연히 신(神)의 존재에 대한 논증이라든가, 신(神)의 성질 내지 신(神)과 개(個)의 관계 등의 신학이라든가, 종교철학이라든가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되기 때문에 자연히 그 방면의 연구가 요구된다. 그러나 선정의 종교에서는 선정삼매의 실수에 의해서 수행자[個] 자신이 본래불(本來佛: 神)임을 체험하여 실증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와 같은 연구가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 그 대신에 선정의 실수에 관한 지도·그 심경 일반에 관한 해설·일상의 실제생활의 규범을 지시하는 것 등이 필요하다. 체험자의 어록과 법어 등이 소중히 취급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따라서 선정형의 경우 본래불임을 수행을 통해서 터득해 나아가는 행위 곧 자각이 중시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서 터득해 나아간다는 것은 무엇인가. 없던 것을 새로이 창조해 간다는 의미인가, 아니면 모르고 있었던 것을 깨쳐 나아간다는 의미인가. 이 문제는 선수행에서 행위의 방식이라기보다 차라리 목적의 방식이라고 할 수가 있다. 왜냐하면 전자의 경우 곧 없던 것을 새로이 창조해 간다는 것은 기도형에 가깝고, 모르던 것을 깨쳐 나아간다는 것은 선정형에 가깝기 때문이다. 불교 일반의 경우로 보자면 아무래도 본래부터 갖추고 있던 것을 깨우쳐 터득한다는 성격에 부합되기 때문에 후자에 가깝다. 곧 일체중생은 부처의 성품인 불성이 구비되어 있다든가 여래의 속성인 여래장(如來藏)을 지니고 있다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3) 수행과 깨침

 

그런데 이 선정형의 경우에도 그 행위방식이 같지가 않다. 이것은 선수행의 근본적인 입장을 어디에 두고 시작하느냐 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첫째는 본래부터 깨침의 존재라는 본각(本覺)이기 때문에 행주좌와의 모든 행위가 다 깨침의 현현이라는 입장이다. 둘째는 이치로서는 본각이지만 현실은 미혹한 상태이기 때문에 수행을 통해서 깨치지 않으면 안된다는 입장이다. 여기에서 나누어 본 입장은 본각(本覺)과 시각(始覺) 곧 증상(證上)과 수행(修行)을 통하여 분류한 것이다. 첫째의 경우는 깨침이 본래부터 완전하게 현성되어 있다는 행불성(行佛性)의 입장이고, 둘째는 깨침이 본래부터 구비되어 있기는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번뇌망상에 휩싸여 드러나 있지 못하고 있다는 이불성(理佛性)의 입장이다.

그러나 이것을 불성의 측면에서 설명한다면 첫째는 행불성을 통해서 이불성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이불성 그대로가 행불성의 현현이다. 곧 이불성이라는 본각이 좌선수행이라는 행위를 통해 행불성이라는 시각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이불성과 행불성은 이와 사의 관계처럼 이를 통한 사가 아니다. 곧 이가 그대로 사의 입장으로서 굳이 분리할 필요성이 없다. 이것이 소위 묵조선(默照禪)의 수증관(修證觀)이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둘째의 경우처럼 본래부터 깨침이 구비되어 있기는 하지만 아직 현실적으로는 깨치지 못하고 있는 중생이기 때문에 수행을 통해서 깨침을 획득해야 한다는 것이 간화선(看話禪)의 수증관(修證觀)이다. 이러한 차이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들 스스로가 본래부터 불성 내지 깨침을 구비하고 있다는 것은 경전을 통해서 익히 알고 있기 때문에 그다지 낯설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한 걸음 나아가서 본래부터 깨침의 입장이기 때문에 현재의 모든 행위가 깨침의 행위라는 것에는 다소 생경할지도 모른다. 여기에서 묵조선의 수증관은 수와 증이 일치하는 경우이고, 간화선의 수증관은 수와 증이 반드시 일치하지만은 않다. 왜냐하면 간화선의 경우 화두수행이라는 행위를 통해서 확철대오(廓徹大悟)하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이제 이와 같은 수증관에 대하여 하나의 입장을 말해보고자 한다. 마조도일(709-788)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마조가 매일 열심히 좌선을 하고 있으려니까 남악회양(南嶽懷讓 : 677-744)이 물었다.

[그대는 좌선을 해서 뭣하려는가.]

그러자 마조가 답했다.

[부처가 되려고 좌선합니다.]

그러자 남악회양은 무엇을 생각했는지 마조가 좌선하고 있는 면전에서 쓱쓱 기와를 갈기 시작했다. 마조가 그것을 괴이하게 여겨 물었다.

[무엇을 하는 것입니까.]

[거울을 만들려고 하네.]

[기와를 갈면 거울이 됩니까.]

이때 남악회양은 갑자기 눈을 부릅뜨고 물었다.

[그럼 좌선을 한들 어떻게 부처가 되겠는가.]

이에 마조는 비로소 '이 사람은 도를 통달한 사람인가보다' 생각하고서 [그러면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라고 하면서 가르침을 청했다. 그러자 회양이 말했다.

[그대는 수레를 타고 길을 갈 때 만약 도중에 차가 움직이지 않는다면 타고 가는 수레를 때리겠는가. 그렇다고 수레를 끌고 가는 소의 엉덩이를 때리겠는가.]

마조는 이에 대하여 답할 바를 몰랐다.

 

이 장면의 대화는 마조가 이미 깨침을 얻은 이후인가 아니면 아직 깨침을 얻기 이전인가의 차이에 따라 그 해석에 큰 차이가 있다. 여기에서 남악은 [그대는 좌선을 배우는가, 좌불을 배우는가. 만약 좌선을 배운다면 선은 좌·와(坐·臥)의 형식에 있는 것이 아니고, 만약 좌불을 배운다면 불은 고정적으로 정해져 있는 형상이 아니므로 무주(無住)에 있으면서 마땅히 취사하는 바가 있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그대가 만약 좌불한다면 곧 그것은 불을 죽이는 것이고, 만약 좌상(坐相)에 집착한다면 그 이치에 도달할 수가 없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남악의 가르침은 무엇인가. 그대는 진실로 좌선을 배우고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부처가 되려고 하는 것인가. 만약 좌선을 배운다면 선은 행·주·좌·와(行·住·坐·臥) 그 이상의 것이므로 [좌(坐)]라는 형상에 사로잡힌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또한 부처가 되려고 한다면 부처는 절대의 존재이므로 좌(坐)라는 일정한 형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이 법이나 진리라는 것은 고정적인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것은 좋다 저것은 나쁘다고 형식적으로 취사분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대가 부처가 되려고 의식한다면 그것은 도리어 부처로부터 멀어지는 것이다. 곧 대상적인 부처를 죽이지 않으면 부처가 될 수가 없다. 또한 좌(坐)라는 형상에 집착하는 것은 언제까지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진실한 자기를 깨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유상(有相)의 부처를 구한다든가 혹은 진실한 자기를 고정적인 실체적 존재로 간주하여 기와를 갈아서 거울을 만들려는 생각으로 좌선을 하면 삼매력이 생기면 생길수록 냄새가 나서 코를 쳐들 수 없는 선취(禪臭)가 진동할 염려가 있다. 좌선이 아(我)위에 눌러붙어 그것을 증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조가 빠져 있는 개념은 무념무상(無念無想)이라는 일종의 심리상태에 들어가는 것을 좌선이라고 오해하는 점이다.

 

4) 수행은 깨침이다[修證不二]

 

여기에서 마조는 수와 증이 별개라는 것에 대하여 남악은 그와 같은 분류가 잘못된 것임을 깨우쳐 주고 있다. 석존의 경우에도 35세에 깨침을 얻은 이후에도 열반에 이를 때까지 수행을 계속하였다. 이것은 석존의 깨침이 불완전했기 때문에 수행이 필요했던 것인가. 달마대사는 인도에서 깨침을 완성하여 정전(正傳)의 조사로서 중국에 건너왔다. 그후 소림사에서 면벽구년(面壁九年)하였다고 한다. 달마의 경우도 깨침이 부족하여 그것을 완성하기 위하여 면벽구년했던 것인가.

석존의 경우와 달마의 경우에 깨침을 얻은 이후의 수행은 깨침을 얻기 위한 수행이 아니었다. 그 경우의 석존의 수행과 달마의 수행은 깨침의 또 다른 행위일 뿐이다. 곧 깨침의 유지라고나 할까. 석존과 달마의 경우 수행과 깨침은 수행의 상태에서의 깨침이고 깨침의 상태에서의 수행으로서 수증일치(修證一致) 내지는 본증묘수(本證妙修)이다. 곧 중생의 입장에서 수행을 통하여 깨침을 얻는다는 경우의 수행과 깨침을 얻은 상태에서 깨침의 유지라는 수행의 의미로 분류하자면 전자의 수행은 훈수(熏修)이고 후자의 수행은 본수(本修) 내지 묘수(妙修)이다. 마조가 생각한 수행이 훈수였다면 석존과 달마가 깨침을 얻은 이후의 수행은 후자의 본수 내지 묘수의 입장이다. 본수와 묘수에서는 반드시 수증일치가 현성한다.

비유하자면 거울 자체는 본래 청정한데 먼지가 끼여 더러워진 것을 닦아내는 행위가 훈수의 수행이라면 본래부터 청정한 거울에 먼지가 끼지 않도록 유지하는 행위는 본수 내지 묘수의 수행이다. 그래서 본수 내지 묘수에서는 수행이 곧 깨침이고 깨침이 곧 수행일 수밖에 없다. 달리 마조의 경우처럼 수행을 통한 깨침이 아니고 깨침을 얻기 위한 수행이 아니다. 그래서 이미 수행의 상태에서의 깨침이므로 그 깨침에 끝이 없고 깨침의 상태에서의 수행이므로 그 수행에 시작이 없다.

본래불(本來佛)인 중생이 수행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깨침의 본래사(本來事)이기 때문에 이제 깨쳤다는 말을 할 필요가 없고, 또한 언제부터 수행한다라는 말도 필요가 없다. 진실로 각각(刻刻)의 수(修)가 각각(刻刻)의 증(證)으로서 수증은 동시로서 일반적으로 말하는 목적[證]과 수단[修]이 일여(一如)한 입장이다.

석존은 여러 생의 오랜 세월 동안 고심하여 수행한 결과 명성(明星)을 일견(一見)하고 대오철저(大悟徹底)하여 [관견법계(觀見法界) 실개성불(悉皆成佛)]이라 단정하였다. 거기에서 불법이 시작되었으므로 지금에 와서 우리가 새삼스레 발심수행하여 석존이 견철(見徹)한 내용을 재검토할 필요는 없다. 단지 그와 같은 본증(本證)을 자각(自覺)하는 것이 필요할 뿐이다. 우리는 다만 자기를 잊고 아집을 버려 여법하게 좌선함으로써 오로지 석존의 가르침을 신수봉행(信受奉行)하기만 하면 그것으로 좋다. 그 대신(大信)이 현성(現成)한 당처에 있어서만이 수증불이(修證不二)의 진실이 체험된다.

 

2. 지속적인 깨침[本證妙修]

 

선은 깨침을 체험하는 가르침이면서 동시에 그 실천을 이루어가는 행위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자면 끝없는 자기개발이다. 선은 깨침의 전기(轉機)를 얻고도 결코 거기에 머무르지 않는다. 계속 전진한다. 불교의 각 종파도 어느 정도는 이러한 특징을 모두 지니고 있다. 오히려 이러한 특징이야말로 깨침 본래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선이 이와 같이 깨침을 지향하고 그것을 현성시켜 나아가는 중요한 방식일지라도 그 활용에 있어서는 선의 종류에 따라 반드시 같은 것만은 아니다. 해탈의 경험이라든가 안심입명(安心立命)을 자신(自信)하는 점에서는 동일할지라도 그것을 구체적으로 생활에 체현(體現)해 나아가는 입장에 있어서는 어떤 교리에 의거하느냐에 따라 차이가 생겨난다. 선종 가운데서도 혹은 은둔을 지향하기도 하고, 혹은 고답염담(高踏恬淡)을 중시하기도 하며, 혹은 실제로 사회에 참여하기도 하는 등 갖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이것을 깨침의 전개라는 입장에서 말하자면 오로지 향내적(向內的)인 입장에 머무는 것을 주로 하는 것과 그것을 되살려 향외적(向外的) 방면으로 지향하는 것으로 나눌 수가 있다.

선에서 향내적(向內的)인 끝없는 자기개발은 깨침 본래의 특징이다. 그러나 그 사상적인 계보로서는 예를 들면 원시불교의 깨침과 대승반야의 실천을 들 수가 있을 것이다. 원시불교에서는 예를 들면 {사문과경(沙門果經)』속에서 불교의 가르침과 그 이외의 외도(外道)의 가르침이 대비되어 있다. 이것을 보면 불교의 가르침의 특징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가르침의 내용으로 말하자면 불교와 외도 사이에는 동일한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단멸론(斷滅論을 주장하는 외도였던 아지타 케사캄발라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의 주장에 자기는 부모로부터 태어나 지(地)·수(水)·화(火)·풍(風)의 사대(四大)로 이루어져 있어 결국 파괴되고 소멸된다고 말한다. 불교도 또한 똑같은 것을 주장한다. 이 점에서 양자는 차이점이 없다. 그러나 외도는 그 점에 근거하여 결국 자아는 단멸된다고 결론짓고 있다. 그러나 불교는 그러한 결론에 이르지 않고 그 다음의 주장으로 전진해 나아간다.

또 상주론(常住論)을 주장하는 외도는 선정에 들어서 무한한 과거의 생존을 상기하고 생을 바꾸고 죽음을 바꾸어 현재의 생존에 이르는 과정을 직관하고 있다. 이 점에 한해서는 불교와 외도의 구별은 없다. 그런데 외도는 이 직관에 근거하여 그것으로 자아와 세계는 상주한다고 결론짓는다. 이에 대하여 불교는 그 직관은 단지 선정의 결과로서만 간주하고 더 나아가 천안통(天眼通)으로 나아간다.

이처럼 외도는 불교와 같은 가르침의 내용을 주장하면서 거기에서 인생관 내지 세계관의 결정적인 결론을 이끌어 낸다. 반대로 불교는 외도와 같은 내용을 설하면서도 그것은 세계관의 하나의 결과로서만 인정할 뿐이고 다음의 내용으로 전진해 간다. 이리하여 불교는 어떠한 내용에서도 세계관의 결정론을 이끌어 내지 않고 끝없이 개발시켜 나아간다. 그것은 깨침의 전기(轉機)에 이르러서도 마찬가지이다. 이것을 해탈 속에서 해탈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하자면 해탈속에서만 해탈이 추구되는 것이지 해탈 밖에서 달리 해탈을 구하려 한다면 영원히 해탈을 맛보지 못한다. 다만 해탈인 줄을 알고 느끼며 맛보는 것이다. 그래서 원시불교의 가르침에서는 허물어진 탑에는 흙을 바를 수 없다고 하였다. 처음부터 진리에 이르는 올바른 길을 선택해야 그 올바른 결과에 다다른 다는 것이다. 호남선을 타고 부산에 가려고 한다면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기 때문이다.

불교와 외도의 차이는 종이 한 장의 차이이다. 그러나 이 종이 한 장은 결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세계관의 내용에 관계하는 것만이 아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궁극적인 결론에 이른다든가 끝없는 개발로 나아간다든가 하는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이것은 나아가서 불교와 외도만의 문제가 아니라 현재의 선을 수행하는 사람에게도 무한한 충고를 주고 있다.

이와 같은 원시불교에서의 깨침의 특징은 대승경전인 {반야경}에서 여실하게 부활했다. 반야는 인생의 근본지혜이며 깨침 그 자체이다. 깨침 그 자체는 실은 무한히 깨쳐 나아가는 것, 다시 말해 끝없이 헛되지 않게 나아가는 것이다. {반야경}에는 여러 가지 자리행과 이타행, 또한 단계적인 수행 과정과 그 경지, 나아가서 각종 세계관이 설해져 있다. 보살은 그러한 교리와 실천을 배우면서도 어떠한 실천행·교리·경지·세계관에도 머무르지 않고 전진해 나아간다. 그것이 반야바라밀이다. 반야바라밀은 이를테면 전인생(全人生)의 축과 같은 것이다. 반야에서 나와 결국 반야로 되돌아가 나아가서 다시 반야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리하여 {금강경}에서는 본 {금강경}을 가리켜 제불이 발생하는 바탕이고 제불의 깨침이 발생하는 출신처라고 말한다. 이와 같이 원시불교에서의 해탈과 대승불교에서의 반야의 계보를 이어받아 선은 끝없는 개발로 나아가는 근본 특징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선은 지속성을 특징으로 한다. 그래서 깨침에 대해서도 단 일회성의 깨침으로부터 다회성의 깨침으로 나아가고, 다회성의 깨침에서 영원한 깨침으로 나아가며, 궁극에는 애당초 깨침이 완성되어 있다는 견해로 전개되어 왔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그 지속은 다름아닌 전체로서의 지속이지 부분으로서의 지속이 아니다. 따라서 깨침의 지속은 끊어졌다가 다시 계속되는 지속이 아니라 중간에 눈꼽만치도 단절이 없이 계속되는 지속이다. 이런 까닭에 깨침의 지속은 원만하다. 원만한 깨침은 수평이라든가 일직선적인 사고방식이 아니다. 순환적(循環的)인 사고방식이다. 이 순환(循環)은 순환(順環)과 역환(逆還)이 완전(宛轉)하게 이루어지는 행위방식이다. 따라서 깨침은 과거만의 흔적[宿悟]도 아니고 현재만의 체험[現悟]도 아니며 미래만의 바램[待悟]도 아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보편타당하게 현성되어 있는 순환작용(循環作用)의 방식이다.

이런 까닭에 선은 개인의 전유물이 아니다. 또한 한 순간만의 작용도 아니다. 누구에게나 열려 있고 누구에게나 드러나 있으며, 이미 본래부터 작용하고 있었고 어디에서나 작용하고 있다. 처처불성(處處佛性) 사사불공(事事佛供)이라는 말이 있다. 일거수일투족이 선의 행위 아님이 없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영가현각(永嘉玄覺)은 걷는 것도 선이고[行亦禪] 앉아 있는 것도 선이며[坐亦禪] 말하고 침묵하며 움직이고 고요함에[語默動靜]도 언제나 근본은 고요하다[體安然]고 말하였다. 여기에서 말하는 선은 깨침의 현성을 말한다. 행(行)도 선이고 좌(坐)도 선이며 어묵동정(語默動靜)의 일체가 모두 선 아님이 없기 때문에 항상 어디서든지 편안하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 선은 단순한 선이 아니다. 자각의 작용이 행(行)과 좌(坐)와 어묵동정(語默動靜)의 일체행위에 있어서 간단(間斷)이 없이 지속되는 몸과 마음의 행위이다. 여기에서 비로소 선은 깨침으로 다가온다. 일체가 완전한 행위로 작용하기 때문에 일체의 행위는 선이고 선이 지속되기 때문에 깨침이며 깨침이 보편적이기 때문에 원만하고 원만하기 때문에 일체로 존재한다. 이것은 저 유명한 설산동자의 구법행각을 보여주고 있는 무상게송(無常偈頌)에도 잘 나타나 있다.

일체의 존재는 무상하다 諸行無常

이것은 생멸의 법칙이다 是生滅法

그래서 생멸을 초월하면 生滅滅已

그게 적멸의 즐거움이다 寂滅爲樂

 

곧 모든 유위행은 무상하다. 무상하지 않은 유위행은 없다. 때문에 제행이 무상하다는 것은 생멸법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생멸법은 모두 무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생멸법이라는 것은 무상하기 때문에 반드시 멸하게끔 되어 있다. 어느 것 하나 영원지속적인 것이 없다. 따라서 생멸 자체도 또한 영원하지 않아서 멸해 없어지고 만다. 왜냐하면 생멸법도 예외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멸이 멸해 없어지기 때문에 그 생멸은 필연적으로 적멸일 수밖에 없다. 이처럼 이미 적멸이 되고나면 필경 그것은 상락(常樂)이지 않을 수 없다. 이런 까닭에 생멸은 곧 적멸이다.

곧 모든 유위행은 무상하다. 때문에 생멸법이다. 그런데 생멸법은 언젠가 어떤 형태로든가 멸해간다. 생멸이 멸해가면 그것은 이미 더 이상 생멸이 아니라 적멸이 되고 만다. 그 적멸은 곧 열반의 즐거움이다. 따라서 모든 것이 생멸조차도 애당초 적멸의 즐거움으로 현성해 있다. 이것이 곧 열반의 눈이다. 중생의 입장으로 보면 제행무상(諸行無常)이고 일체개고(一切皆苦)이며 제법무아(諸法無我)이고 사바예토(娑婆穢土)이다. 그러나 중생의 경우와는 반대로 열반의 눈으로 보면 제행유상(諸行有常)이고 일체위락(一切爲樂)하며 제법유아(諸法有我)이고 상적정토(常寂淨土)이다. 본래부터 선이 행위로서 작용하여 깨침으로 현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곧 일체행위의 지속성이다. 그런데 그 지속성은 선의 행위로서 지속한다. 그 선의 지속적인 행위가 깨침으로 드러나 있는 까닭에 일체의 행위는 곧 깨침의 지속으로 현성되어 있다.

바로 이와 같은 선의 지속은 깨침의 지속적인 현성이면서 수행의 지속이다. 수행도 다름아닌 깨친 후의 수행이기 때문이다. 이 수행은 무엇을 얻는다든가 깨치려는 수행이 아니라 본래부터 깨침이 완성되어 있는 분상에서의 수행이다. 곧 본수(本修)이고 묘수(妙修)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체의 행위는 본수행이고 묘수행으로서의 행위이다. 본수행(本修行)이고 묘수행(妙修行)으로서의 행위는 이미 완성되어 있는 깨침의 작용이다. 굳이 새롭게 깨침을 향하는 향외적(向外的)인 행위가 아니다. 본래부터 향내적(向內的)인 행위일 뿐이다. 왜냐하면 일체행위로서의 작용인 선이 간단없이 지속적으로 현성되어 있는 까닭에 향외(向外)일 필요가 없다. 굳이 향외(向外)가 되어야 한다면 그것은 보살행으로서의 방편일 뿐이다. 보살행은 어디까지나 방편이다. 그 본질은 깨침에 있다. 왜냐하면 수행의 본질적인 시작 내지 종교의 본질적인 시작은 깨침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 깨침이 보편성을 획득하여 널리 영원히 유지되기 위해서는 부득불 보살행이라는 방편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방편마저도 실은 일체행위의 지속적인 작용일 뿐이다. 그 지속적인 작용이 올바르게 이루어져 있을 때 그것은 선이 된다. 그리고 올바른 선은 다름아닌 올바른 깨침이다. 올바른 깨침은 올바른 행위 이외에 그 어떤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3. 깨침의 보편성[現成公案]

 

선종은 여러 가지 수행방법, 즉 간경(看經)·염불(念佛)·주력(呪力)·참선(參禪)·불사(佛事)·참회(懺悔) 등등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가운데 참선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다. 그 참선 중에서도 좌선(坐禪)을 으뜸으로 삼는다. 이 가운데 일종의 공안(公案), 곧 화두(話頭)를 참구하는 것이 소위 간화선(看話禪)이라면 좌선 그 자체를 가장 중요한 수행방법 내지 수행의 결과인 깨침으로 간주한 것이 묵조선(默照禪)이었다.

여기에서 간화(看話)란 말 그대로 '화두를 본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 화두를 들어 통째로 간파하여 추호의 의심도 없이 그 전체를 체험하여 자신이 화두 자체가 되는 과정이다. 이러한 화두는 달리 공안(公案)이라고도 하는데 공안이라는 말이 그 의미를 잘 표현해 주고 있다. 공안이란 공부(公府)의 안독(案牘)이란 뜻으로 공공문서가 지니고 있는 그 권위에 비유한 것이다. 그래서 함부로 사사로이 처리할 수 없듯이 스승의 엄격한 검증의 과정을 거친 연후에야 비로소 그 수행의 경지를 인가받게 되는 사자상승(師資相承)의 원리이다.

그러나 묵조(默照)라는 것은 몸으로서는 조용하게 좌선을 하는 묵(默)이고 마음으로는 항상 성성적적(醒醒寂寂)하게 깨어 있는 조(照)를 의미한다. 따라서 묵조에서는 세상의 어느 것 하나라도 완전하게 깨침으로 존재하지 않은 것이 없다는 현성공안(現成公案)을 주장한다. 여기 현성공안에서 말하는 공안(公案)이란 간화선에서 말하는 화두의 공안이 아니라 진리 그 자체를 의미한다. 그래서 현성공안이란 말 그대로 일체의 진리가 숨어 있지 않고 그대로 드러나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기에 간화선이 화두참구를 중요시하는 것처럼 묵조선에서는 좌선 그 자체를 중요시한다. 왜냐하면 간화선에서는 굳이 좌선의 상태가 아니더라도 화두에 몰입해 있는 화두일념(話頭一念)의 상태가 우선 요구되지만, 묵조선에서는 있는 그대로가 깨침의 현성이기 때문에 좌선의 행위를 통하지 않은 것은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좌선은 곧 깨침의 현성이며 깨침은 곧 좌선의 내용이다. 그러면 묵조선에서 말하는 깨침 곧 현성공안이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어떤 모습으로 다가오고 우리가 거기에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가.

오늘날 선종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하나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 그것은 곧 다름아닌 선종이란 참선을 주요한 수행방법으로 삼아 깨침에 이르는 것을 목표로 삼는 불교의 종파라는 점이다. 여기에서 그 깨침이란 각자의 분야에서 최고의 경지에 이르는 것을 의미한다. 수행을 하는 입장에서는 당사자가 택한 방법을 통해서 우주와 인생의 본 모습을 터득하게 되는 것이고, 공예품을 만드는 사람은 그 분야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기술을 발휘하여 완전한 공예품을 만들어 내는 것이며, 거문고를 연주하는 사람은 거문고를 가지고 가장 완벽한 음악을 연주해 내는 것이고, 참외를 심는 사람은 가장 맛있는 참외를 재배해 내는 것이다. 그래서 이 깨침의 맛이란 그 일에 직접 관여하여 경험하는 것을 중요시한다. 그렇기 때문에 깨침에는 따로 종자가 없다. 각자가 일하는 곳에서 가장 완벽하게 가장 멋있는 일을 성취하는 것이 세제(世諦)의 깨침으로 통하기 때문이다.

깨침이란 이처럼 각자의 분야에서 드러나는 것이기에 가부좌를 하고 앉아 있는 사람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따라서 깨침이란 일정하게 정해진 곳이 따로 없다. 깨침은 저 굴뚝을 청소하는 사람의 마음에도 있고, 구두를 닦는 손끝에도 있으며, 법당을 청소할 경우 걸레잡은 손에도 있고, 목탁을 치며 예불하는 소리 속에도 깨침은 깃들어 있다. 어느 일이나 어느 사물이나 어느 사람에게나 본래 구비되어 있는[本有] 것이기에 주처가 정해질 수가 없다. 감나무는 감이 열리게 되어 있고, 밤나무는 밤이 열리게 되어 있다. 그렇게 각각 감과 밤이 애당초 열리게 되어 있는 이유만으로 감나무이고 밤나무인 것이 아니라 감나무가 감을 만들어 내고 밤나무가 밤을 만들어 내는 현성의 행위 때문에 감나무이고 밤나무인 것이다. 여기에서 감나무의 깨침이란 감나무가 해낼 수 있는 최고선(最高善)으로서 감을 만들어 내는 일 밖에 그 무엇이 있겠는가. 밤나무는 밤을 만들어 내는 일 이외에 또 다른 무엇이 있겠는가. 세상천지 모든 것이 각각 가장 충실하게 자기의 모습을 드러내고 그 가치를 한껏 발휘해 나아가는 것이 깨침이기 때문이다.

어느 수행자가 깨침을 얻었다고 해서 갑자기 얼굴에 제3의 눈이 하나 더 생기는 것이 아니다. 보통 사람과 같이 눈은 두 개를 가지고 있지만 보통 사람이 보지 못하는 진리의 문이 터득되는 것이다. 그 눈은 다른 사람이 아무나 볼 수 있는 문이 아니다. 적어도 그 사람의 마음을 알기 전에는 똑같은 사람에 불과하다. 보통 사람이 싫다고 보는 것도 그 본질을 보아 싫어하는 것이 없는 줄을 안다. 귀와 입과 혀와 몸도 마찬가지이다. 가지고 있는 몸 그대로가 깨침의 몸이다. 다만 그 같은 몸을 가지고 하는 행위에 성(聖)과 범(凡)이 있을 뿐이다. 성인은 성인으로 행동하고 범부는 범부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육조혜능(六祖慧能)은 [자성(自性)에 미혹하면 부처도 중생이고 자성을 깨치면 범부도 부처이다]고 하였다. 본래부터 중생이다 부처다 하는 종자가 따로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깨침에는 그 경지와 표현이 일괄적인 것이 아니다. 불교의 수행방법이 인도로부터 중국에 유입되면서 선은 깨치는 내용뿐만 아니라 깨치는 방법에 있어서도 석존이 새벽에 별을 보고 깨쳤다[見明星悟道]는 것처럼 눈으로 보는 것으로부터 귀로 소리를 듣고 깨치는 기연을 만나 깨치는 것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다양하게 전개되어 왔다. 일례로 청원유신(靑原惟信) 선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내가 30년 전 아직 참선을 하지 않았을 때는 산을 보니 산이요 물을 보니 물이었다. 나중에 선지식을 친견하여 무언가 알고 보니 산을 봐도 산이 아니요 물을 봐도 물이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깨치고 보니 산은 의연히 산이요 물은 의연히 물이더라. 대중들이여, 이 세 가지 견해가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가.

 

여기에는 깨침의 실상(實相)이 여실하게 나타나 있다. 실로 깨침이라는 것은 조그마한 차이 곧 인식에 있다. 이처럼 수행에서 어떤 기연(機緣)은 깨침에 필요충분조건이 되기도 하지만 하찮은 티끌에 불과할 수도 있다. 깨치기 이전의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라는 것이 미혹한 중생에게 필요하다면 후자의 깨치고 난 이후의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라는 것은 미혹을 소롯이 떨구어 내고 참 나를 찾은 경우일 것이다. 다만 이와 같은 기연의 가치는 깨침이라는 것과 결부될 경우에 더욱 빛이 나고, 기연 자체가 더 이상 하나의 기연에 머물지 않고 깨침이 되었을 경우에 더욱 크다.

이러한 선수행의 방식에 대한 다양한 발전은 필연적으로 깨침에 대해서도 그 의미가 보편화되어 갔다. 인도에서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은 의미가 더욱 확대되었다. 아주 까마득한 세월동안 구원겁(久遠劫)의 숱한 수행을 통하여 마침내 깨침에 도달한다는 인도적인 깨침이 중국에 와서는 일체중생의 불성은 언제라도 현성될 수 있고, 심지어 이미 완성되어 있다고까지 하였다. 1700공안의 하나하나가 모두 깨침 내지 깨침의 행태와 관련된 것들이라는 것을 보면 더욱 그렇다. 깨침을 표현하는 용어에 있어서도 인도에서의 각(覺)이나 증(證 :  )으로부터 오(悟)·회(會)·성(省)·계(契)·도(道)·휴(休)·휴헐(休歇) 등 다양하게 나타나고 그 상황에 따라서는 깨침에 대한 상징적인 용어 내지 수식어 등이 다투어 등장하였다.

이와 같은 깨침에 대한 보편성은 선이 하나의 종파로서 등장하여 각각의 종풍을 특색있게 거양(擧揚)한 이유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깨침에 대한 일반인 내지 선자들의 다양한 요청이었다고 할 수 있다. 나아가서 일회성(一回性)의 깨침이 깨침의 반복이라는 다회성(多回性)의 과정으로 전개되어 왔다. 주지하다시피 혜능도 처음에 [집착함이 없이 청정한 마음을 발생시킨다.[應無所住而生其心]]이라는 말을 듣고 발심을 하였다. 이후에 다시 홍인(弘忍)에게서 {금강경}에 대하여 처음부터 가르침을 듣다가 다시 이 [집착함이 없이 청정한 마음을 발생시킨다.[應無所住而生其心]]는 부분에 이르렀을 때 마침내 혜능은 일체만법이 자성을 여의지 않는다는 도리를 깨쳤다. 그런가 하면 고려의 보조지눌(普照知訥)도 3회에 걸쳐 누차 깨침을 얻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그 깨침은 어떤 차제적(次第的)인 것이 용납되지 않는다. 완전한 깨침이면서 각각 깨침의 경우마다 새롭게 그 의미를 다져가는 것이었다.

그 다회성(多回性)의 유형에도 각각 천차만별이다. 아난존자(阿難尊者)는 마하가섭(摩訶迦葉)의 찰간대를 꺽어버리라.[문자와 개념에 장애되지 말라]는 소리를 듣고 용맹정진하여 스스로 깨침을 얻었다. 영운지근(靈祐志勤)은 복사꽃이 피어 있는 것을 보고 깨침을 얻었다. 소동파(蘇東坡)는 계곡의 물이 흘러가는 소리를 듣고 깨침을 얻었고, 향엄지한(香嚴智閑)은 대나무에 돌멩이가 부딪치는 소리를 듣고 깨침을 얻었다. 보수화상(寶壽和尙)은 두 사람이 싸우다 화해하면서 [면목이 없네그려.]라는 소리를 듣고 [분별심이 생겨나기 이전의 순수청정한 본래의 자기[父母未生前本來面目]]의 의미를 깨쳤다. 뿐만 아니라 인연은 전혀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터지기도 한다. 현칙(玄則)은 [자신이 자신을 찾는다.[丙丁童子來求火]]는 질문을 청봉(靑峰)과 법안(法眼)으로부터 받았으나 '누구로부터' 그리고 '어느 때'와 같이 그 상황에 따라서 깨치지 못하기도 하고 깨침을 얻기도 하는 일이 있다. 임제(臨濟)는 목주(睦州)의 지시를 받고 황벽(黃檗)에게 참문했으나 얻어맞기만 하였다. 그래서 다시 목주의 지시를 따라 대우(大愚)를 찾아갔다가 거기에서 황벽(黃檗)의 깊은 뜻을 깨쳤다.

이처럼 경전과 조사어록을 읽다가 혹은 일상의 잡무속에서 등등 온갖 것들이 깨침의 기연으로 나타나 있다. 이것은 깨침의 보편성만큼이나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는데 그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귀결이다. 각각의 근기에 맞는 수행 내지 방편이 깨침의 경우만큼이나 다양하게 요구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순한 하나의 기연이 깨침을 결정하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그 간의 인과관계 내지는 그 순간의 심경의 상태가 각각의 기연을 만나 표출되었을 뿐이다. 곧 줄탁동시( 啄同時)의 기연을 만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과연 이렇게 외적인 기연이 있어야만 깨침이 가능한 것일까. 또한 일체중생은 다 불성을 소유자라고 하는데 아직 깨치지 못하고 있는 자가 있다. 그런가 하면 그 깨치는 과정에 있어서도 우리의 감각적인 인식기능을 지니지 못하고 있는 경우, 가령 태어나면서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生盲] 경우라면 내적인 깨침의 기연이 무르익었다 하더라도 외적인 기연이 닿을 수 없기 때문에 깨침을 얻을 기약이 없을 것이다.

이제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깨침에 이르는 방법 내지 깨침의 형식을 다른 측면에서 찾아보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깨침은 어느 특수한 자에게만 한정되어 있는 특권이 아니기 때문이다. 적어도 대승적인 하화중생(下化衆生)의 입장에서 본다면 극락을 거쳐서 깨침에 이르건 단박에 깨치건 간에 궁극적으로는 깨쳐야 하고 또한 반드시 깨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의 해결에 대하여 우선 깨침에 대한 정의를 새롭게 시작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깨침의 기준에 대한 출발과 함께 깨침의 현성에 대한 이해가 먼저 이루어져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선 깨침에 대한 정의를 가설할 필요가 있다. 보통 깨침이란 수행을 통한 결과로서 얻는 자신의 내적 외적인 변화라는 의미로 이해하고 있다. 이 말은 깨침을 가장 함축적으로 나타낸 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깨침을 수행을 통한 결과로 이해한다면 수행에 대한 정의가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 그 수행이란 깨침을 얻기 위한 제반 신체적 정신적 행위라 말한다. 그러면 수행은 궁극적으로 깨침의 전단계적(前段階的)인 방편에 불과할 것이다. 이것은 수행에 대한 어설픈 이해에서 비롯된 결과이다.

기본적으로 깨침에 대한 정의를 명확하게 하려면 수행에 대한 명확한 이해에 바탕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여기에서는 기존의 입장인 수행을 통한 깨침이라는 말을 일단 부정하고 싶다. 왜냐하면 이러한 수행을 통한 깨침으로 이해하면 수행은 어디까지나 수행이고 깨침은 어디까지나 깨침일 뿐이지 수행이 깨침으로 나아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수행을 버리고 깨침에 다가간다거나 깨침은 수행을 딛고 이루어진다거나 하는 구조는 근본적인 붓다의 교설에 어긋나고 만다. 붓다는 일체중생에게 불성이 갖추어져 있다고 본 데서부터 그의 가르침을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석가모니는 깨침을 얻고 보리수 아래에서 관찰해보니 일체중생이 본래 깨침의 지혜(智慧)와 덕상(德相)을 구비하고 있건만 단지 번뇌망상에 뒤덮혀 있어 깨치지 못하고 있음을 먼저 간파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본래 깨침의 지혜와 덕상을 갖추고 있음을 인정하는 본각사상(本覺思想) 위에서 출발하고 있는 불교의 성격에 부합되는 말이다. 그런데도 수행을 통해서 깨침이라는 것이 얻어지는 것처럼 수행과 깨침을 따로 보는 것은 바른 견해라 할 수 없다. 따라서 수행을 통한 깨침이라는 정의는 일단 부정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면 이제 수행과 깨침의 관계를 규정지을 수 있을 것이다. 그 구조는 수행이 곧 깨침의 행위이고 깨침은 수행의 현성으로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깨침과 수행이 과정과 결과의 관계가 아니라 모든 과정 모든 결과에서 동시에 나타나 있는 것이다. 곧 수증일치(修證一致) 내지 증상(證上)의 수(修)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모든 수행은 모든 깨침이고 모든 깨침은 모든 수행이다. 이것은 통상적으로 보는 수(修)에 대한 명확한 이해를 바탕으로 함으로써만 가능하다.

그래서 여기에서는 수(修)에 대한 정의를 내리지 않으면 안된다. 곧 수행을 통해서 깨침을 얻는다는 경우의 수(修)는 작수(作修)여서 아직 명확한 견해를 갖기 이전의 모색기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중생의 무명행(無明行)이라 할 수 있다. 한편 깨침이 곧 수행이요 수행이 곧 깨침이라는 수(修)는 본수(本修) 내지 묘수(妙修)로서 깨침의 현성 내지 깨침의 작용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수(修)에 대한 가설을 세움으로써 깨침과 수행은 결국 동전의 양면으로서 본각의 체와 용의 관계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정의함으로써 일체중생이 성불할 수 있다는 붓다의 가르침에 부합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태어나면서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경우에 해당되는 깨침을 못했다거나 깨침을 얻을 수 없다는 문제는 그 극복의 길을 열어갈 수가 있을 것이다. 곧 인도에서의 깨침이 아주 까마득한 오랜 옛날의 구원겁(久遠劫) 이전부터 준비해 온 지고지순한 수행의 결과로서 등장한 것이라면, 이쪽 극동의 한자문화권에 와서는 깨침이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깨침의 보편화를 이루었다는 점도 선종의 한 특징이다.

 

4. 좌선의 미학[只管打坐]

 

선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바로 이것이다 라고 명확하게 답하는 것은 사뭇 어렵다. 왜냐하면 그것은 내면적인 심(心)에 깊이 결부되어 있어서 종교적인 체험에 속하는 사실을 불완전한 언어를 통해서는 제대로 표현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때문에 송대부터 선의 종지에 대하여 불립문자(不立文字)·교외별전(敎外別傳)·직지인심(直指人心)·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는 전형적인 말로 대변되어 왔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어떤 것에 대하여 정의내리기를 좋아하고 또한 거기에 길들여져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어떤 사실을 정의한다는 것은 그것을 한정된 상황속에 가두어버리는 것이다. 가령 살아 있는 언어를 죽은 언어로 대체시켜서 고정적인 불변의 사실로 붙잡아두고서 그 하나의 측면만 보는 것이다. 그래서 정의를 통해서는 체험의 사실을 전체적으로 볼 수가 없다.

그러면서도 굳이 언어를 통해서 선의 면모를 부정할 필요는 없다. 언어로 선을 표현한다고 해서 선이 언어속에 갇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하나의 정의 통해서 우리는 정의 이상의 것을 유추하고 개인의 경험과 상상력을 동원하여 정의를 통해서 드러나지 않는 부분까지도 말끔하게 알아차릴 수가 있다. 그것은 전적으로 개인의 경험의 폭과 사고의 깊이 내지 습관적인 판단에 달려 있는 문제이다. 따라서 하나의 정의를 통해서 받아들이는 내용은 각기 다를 수밖에 없다.

이렇게 보면 어디에나 선은 존재하고 어느 것이나 선이다. 동시에 어느 곳에도 선은 존재하지 않으며 아무것도 선이 아니다. 선을 아는 사람에게는 우주 전체가 선이지만 선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그저 정의가 하나의 언설에 불과하다. 곧 우주와 일체가 되는 것이 선이기 때문이다. 달리 표현하면 내가 선이고 선이 우주이며 우주가 나이기 때문이다. 곧 승조(僧肇)의 말마따나 천지동근(天地同根)이요 만물아일체(萬物我一體)이다.

여기에서 선이란 무엇이다 라고 굳이 한정한다든가 내지 정의할 필요성이 사라진다. 그러나 이와 같이 정의할 수 없는 것을 굳이 정의하기 때문에 그것은 가설적인 정의일 수 밖에 없다. 곧 선이란 [좌선을 통하여 진실한 자기에 사무치는 것이다. 그리고 사무친 그 자기를 일상생활에서 되살려 나아가는 종교적 실천이다] 라고 말할 수 있다. 여기에는 세 가지가 구비되어 있다. 하나는 좌선의 실천이다. 둘은 진실한 자기에 사무치는 것이다. 셋은 자기를 일상생활 속에서 구현하는 것이다.

선은 단순한 이론이 아니다. 몸을 가지고 하는 실천이다. 종교가 철학과 뚜렷하게 구별되는 한 가지는 바로 실천이 수반되느냐 아니냐 하는 것이다. 선은 어디까지나 종교이다. 그러나 종교에 국한되지 않는다. 철저하게 자신에 사무치고 나면 온갖 이론과 잡다한 장식으로는 더 이상 자신을 얽어맬 수가 없기 때문이다. 곧 그것은 초월된 자기이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자기초월이다. 자기로 존재하면서 동시에 그 자기를 벗어나는 자기이다. 어디까지나 본래성의 자기를 벗어나지 않는다. 오히려 본래성의 자기를 분명하게 일깨우는 작업이 선의 실천이다. 그 자기의 실천이 다름아닌 자기의 초월이다. 초월되는 자기와 실천되는 자기가 따로 없다. 그 실천행위가 좌선이다.

좌선은 몸으로 앉는다. 몸이 좌선을 하면서 동시에 거기에는 마음이 좌선을 한다. 마음과 몸은 일체불이(一體不二)이다. 몸을 떠난 마음은 없다. 마음을 부정하는 몸은 몸이 아니다. 따라서 몸으로 하는 가부좌의 행위는 마음으로 하는 깨침의 표현이다. 깨침은 몸으로의 깨침이다. 몸이 알아차리면 마음도 알아차리고 마음이 알아차리면 몸도 알아차린다. 달리 느낀다는 언어가 적절하다. 느끼면서 동시에 느껴진다. 느끼는 자기는 일상의 본래성이면서 느껴지는 자기는 초월된 자기이다.

초월된 자기는 본래성이 없으면 의미가 없다. 본래성이라는 바탕에서 출발한 초월이라야 비로소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단순한 도피에 불과하다. 도피는 되돌아오지 않는다. 한번 흘러가 버린 물처럼 세월처럼 돌아올 수가 없다. 그러나 자기에 사무친 자기는 벌써 자기에게 사무쳐 있기 때문에 그 본래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인정하는 것은 느끼는 것이고 인정받는 것은 느껴지는 것이다.

선은 어디서 돈처럼 빌려오는 것이 아니다. 빌릴 수도 없다. 본래부터 선은 거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의 효용에 대해서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 그래도 효용이라 말한다면 그것은 자기변혁이다. 그 어떤 새로운 자기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본래의 자기를 뒤집어보는 것이다. 땅을 보던 눈이 하늘을 보고 하늘을 이고 있던 머리가 땅에 닿는 것이다. 자기에게는 그러한 경험이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사건으로 다가온다. 그것을 깨침이라 한다. 하나의 틀을 깨는 것이다. 고정관념을 깨부수고 타성화된 자기를 부정하며 일상의 세계를 자기속에 들여놓는 것이다.

그래서 선은 다른 대상을 보는 것이 아니다. 같은 대상을 보되 각도를 달리해서 본다. 나아가서 같은 각도에서 보더라도 깊이 높게 사무치게 들여다본다. 그러면 그때까지 뵈지 않던 것이 보인다. 내가 보는 것이 아니다. 그냥 보이는 것이다. 저절로 느껴진다. 억지춘향이 통하지 않는다. 무사한도인(無事閑道人)의 경계요 임운무작(任運無作)이다. 그래서 선은 한정시키거나 정의내릴 수가 없다. 어디까지나 가설적인 정의일 뿐이다. 이것이 선의 풍모이고 가치이다. 그래서 고인은 [풍류가 없는 거기에 곧 풍류가 있다.[不風流處也風流]]고 노래하였다. 재미없는 그곳에 재미가 있다. 재미없는 그 맛이 진정한 재미의 맛이다. 맹물 맛이 최고의 물맛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의 경우 선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어떤 일이든지 하지 않고는 못배긴다. 그런 사람들은 가만히 조용히 그저 그렇게 한가하게 일없이 살아가는 사람의 참 맛을 알기 어렵다. 혹자는 그것을 게으른 자의 자기변호라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자기가 그것을 느끼고 있는 한 결코 게으른 것이 아니다. 선의 참 맛을 아는 사람에게 게으르다는 것은 번뇌에 게으르고 걱정에 게으르며 욕심에 게으르다는 말이 보다 적절하다.

꿈 가운데서는 제아무리 현실로 인정하려 해도 모두가 꿈이다. 생시에는 제아무리 꿈이기를 바란다 해도 모두가 냉엄한 현실일 뿐이다. 그래서 꿈속에서는 진실도 꿈이고 거짓도 꿈이다. 마찬가지로 생시에는 진실도 현실이고 거짓도 현실이다. 꿈과 생시를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꿈과 현실을 바탕으로 하고 있어서 도인(道人)은 꿈속에서나 현실에서나 언제든지 도인(道人)이고 범인(凡人)은 언제든지 범인(凡人)이다. 근본이 꿈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한 그 지말은 꿈을 벗어나지 못한다. 현실을 안고 사는 생시에는 꿈도 현실의 반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도인(道人)의 말과 행위는 참으로 보이든 거짓으로 보이든 언제나 참이다. 범인(凡人)의 말과 행위는 참으로 보이든 거짓으로 보이든 언제나 거짓이다. 부처의 행위는 무엇을 해도 불행(佛行)이다. 범부의 행위는 무엇을 해도 무명행(無明行)이다. 그렇지 않고 부처의 행위가 무명행(無明行)이 된다든가 범부의 행위가 불행(佛行)이 된다면 부처는 더 이상 부처가 아니고 범부는 더 이상 범부가 아니다. 그런 경우는 결코 불가능한 상황으로 백년하청(百年河淸)일 뿐이다. 개구리 턱에 수염이 나기 전에는, 그리고 물고기 발바닥에 무좀이 생기기 이전에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사람에 따라 참과 거짓이 가려진다. 도인은 자재하고 해탈한 한인(閑人)이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같은 물을 먹어도 소가 먹으면 우유가 되고 뱀이 먹으면 독이 된다는 이치이다. 진리가 사람을 멀리하지 않는다. 다만 사람이 진리를 모르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도인과 범인의 경우는 그것이 같지가 않다. 도인은 거짓까지도 참으로 바라보고 바꾸어 놓는 힘이 있다. 그러나 범부는 참까지도 그 가치를 모르고 미혹하여 거짓으로 바라보기 십상이다.

이처럼 선은 무감각한 망상의 소산이 아니다. 선자에게는 생명력이 왕성하고, 기력이 치성하며, 의지력이 강하고, 예지력이 뛰어나며, 마음이 안정되어 확고부동하다. 선은 심(心)과 신(身)의 단련이다. 심신(心身)의 단련에 수반되어 자율신경이 조절되고 행동에 자신감이 붙는다. 약동하는 힘을 얻는다. 그래서 어디 가든지 언제라도 자기를 충분히 활용할 수가 있다. 온전한 자기의 표현이다. 온전한 우주의 느낌이다. 곧 일체가 눈앞에서 그대로 진리가 드러나 있다. 이것을 알고 느낀다. 말하자면 현성공안(現成公案)이다. 과정과 목적이 따로 없다. 과정은 그대로 목적이고 목적은 곧 과정처럼 진행형이다. 따라서 삶이 수행이고 수행은 깨침이며 깨침은 온전한 자기표현이다. 그 온전한 자기표현의 몸짓이 좌선의 행위이다. 곧 지관타좌(只管打坐 : 祇管打坐)이다. 그래서 지관타좌는 몸의 자세이면서 동시에 마음의 구조이다. 몸이 바른 곳에서 마음이 바로 선다. 마음이 바로 선 곳에서 몸이 제대로 제기능을 발휘한다. 이처럼 몸이 제대로 작용하고 마음이 바르게 자리잡는 행위가 심신일체(心身一體)이다. 나아가서 심신일체의 상태가 되면 더 이상 몸과 마음에 대한 집착과 의문과 궁금증과 두려움이 없어진다. 죽음이 극복된다. 이것이 심신탈락(心身脫落)이고 영원한 현재(지금)이다.

선은 항상성이므로 현재를 중시한다. 과거의 마음도 없고[過去心不可得]이고 현재의 마음도 없으며[現在心不可得]이며 미래의 마음도 없다[未來心不可得]. 선의 시간은 단절이 아닌 지속이다. 단절의 시간은 평행선적인 시간이다. 선의 시간은 순환적이다. 그래서 시간이 공간이 된다. 몸이 공간이라면 마음은 시간이다. 그러나 몸과 마음이 일체(一體)이듯이 공간과 시간은 일체(一切)이다. 일체(一體)와 일체(一切)는 다른 것이 아니다. 한 몸이라야 비로소 일체 곧 전체가 될 수가 있다. 따라서 선은 영원한 지금이면서 여기이다. 영원(永遠)의 영(永)은 시간적으로 단절이 없는 지속이고, 원(遠)은 공간적으로 간격이 없는 충만이다. 선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동서남북상하에도 두루 가득해 있다. 항상성의 현전이다. 따라서 선은 이것(THIS) 지금(NOW) 여기(HERE)에 충실하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시간과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의 시간이 항상 여기에 이곳에 지금 함께 한다. 바로 이와 같은 선의 항상성에 대한 자각이 본증자각(本證自覺)이다. 본래부터 구비되어 있는 것의 알아차림이다. 무엇에 의하여 조작되고 변형되어 새롭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애초부터 완전한 모습으로 여기에 늘상 있었다. 그러나 그것의 자각을 통해서야 비로소 늘상 있었던 자기를 벗어난 본래성의 자기를 자각하는 것이다. 소위 초월된 자기가 되는 것이다. 자기초월이다. 그래서 선은 내면속의 자성신(自性身)을 보고 자성불(自性佛)을 느끼는 바로 그 생생한 행위이다. 선은 활작용(活作用)이다. 더 이상 무기력한 공망무기(空妄無記)가 아니다.

선은 분별하는 머리(head)로 하는 것이 아니다. 있는 그대로를 마음(heart)으로 인정하고 모든 것을 몸(body)으로 수순한다. 그래서 좌선이 중시된다. 머리는 이것저것 따지는데 익숙하다. 구분짓고 분류하며 숫자를 헤아리고 정의내리는 것에 익숙해 있다. 그러나 마음은 한번 익숙해지면 쉽사리 그것을 다르게 판단하려 하지 않는다. 습관이라든가 버릇을 버리기가 용이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익숙하여 편한 것을 찾는다. 한번 좌선의 맛을 들여 그대로 밀고 나아가야 한다. 몸도 행동에 익숙해지면 다른 것을 아예 거부한다. 어렸을 때 한번 맛들인 것은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한다. 몸은 관성을 지닌다. 가부좌를 한 상태로 엉덩이로 그리고 아랫배로 참선한다는 말이 이것이다. 한번 자리에 앉아 진득하게 버텨내는 힘이 요구된다. 따라서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몸으로 좌선을 한다. 이것을 가리켜 사량을 하되 사량이 아닌 사량 곧 비사량(非思量)이라 한다. 비사량은 단순히 사량을 하지 않는 상태의 부사량(不思量)이 아니다. 또한 아예 사량이 없는 무사량(無思量)도 아니다. 또한 이미 사량한 것을 부정하는 절사량(絶思量)도 아니다. 비사량은 사량이 아닌 사량이요, 비(非)의 사량 내지 비(非)에 대한 사량이다. 비(非)는 분별심이 없는 오롯한 것을 말한다. 심일경성(心一境性)의 전주(專注)이고, 성성력력(醒醒曆曆)한 공적영지(空寂靈知)이다.

선은 이와 같이 마음과 몸의 오롯한 자세를 중시한다. 예로부터 이것을 깨침이란 현재 드러나 있는 그대로의 모습[佛法卽威儀]이라 하였다. 불법이 좌선의 모습에 나타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앉아 있는 시간만큼 부처가 되어 있다는 일시좌선 일시불(一時坐禪 一時佛)이고 일일좌선 일일불(一日坐禪 一日佛)이라 하였다. 제대로 올바르게 드러나 있는 모습[威儀寂靜]이란 좌선의 참다운 맛을 표현한 말이다. 형식이 내용을 창조한다는 말이다. 이것은 바꾸어 말하면 본래부터 내용이 충실하게 들어차 있지 않으면 자세가 형성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고인은 지도무난(至道無難)이라 말하였다. 이것은 지도(至道)이기 때문에 오히려 무난(無難)하다는 말이다. 실로 지도(至道) 아닌 것은 어려울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지도(至道)가 아닌 것은 원칙이 없고 정도가 없으며 절제가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무리 해도 어찌할 수가 없다. 이것인가 싶으면 저것이 되고 저것인가 싶으면 이것이 되어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다. 마찬가지이다. 몸의 가부좌 좌선을 통하지 않고는 도무지 좌선의 마음은 의미가 없고 행위가 없으며 산만할 뿐이다. 가부좌라는 좌선의 푯대가 중심을 떠나서는 설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