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풍기의 삼처럼 소백의 삶처럼

醉月 2010. 4. 23. 14:02

풍기의 삼처럼 소백의 삶처럼

마의태자와 김삿갓을 휘감는 안개는 국망과 유랑의 역사를 증언하는 듯
경북 영주의 북편에 붙어 있는 풍기는 한때 조선의 중심을 자처했던 고장이다. 영남 사림파의 원조 격이라 할 수 있는 소수서원이 이곳에 있기 때문이다. 풍기군수 주세붕이 고려 말의 유학자 안향을 제향하고 유생을 가르치기 위해 세운 백운동서원이 바로 소수서원의 시초였다. 소수서원은 명종이 직접 현판을 내리고 노비와 전답을 지원한 최초의 서원이었으며, 1871년 대원군이 전국의 서원을 철폐하는 과정에서도 살아남은 27개 사액서원 가운데 하나였다.

» 황금빛으로 물든 풍기 들녘. 풍년을 맞았지만 쌀값 폭락으로 풍년가 대신 농부의 한숨이 들판을 채우고 있다. 왼쪽 위로 풍기가 자랑하는 풍기인삼 밭이 보인다. NIKON D90, NIKKOR17-55 ,F/9.5, 1/125

풍기군수 주세붕이 풍기에 남긴 또 하나의 유산이 바로 인삼이다. 삼이라면 산삼만 떠올리던 그 시절 주세붕은 전국의 토양을 조사한 뒤 풍기가 삼을 키우기에 알맞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것이 풍기인삼의 시작이었다. 풍기인삼의 맥을 이어온 사람들은 인삼의 명성만큼 농가의 살림살이가 나아진 것은 아니라고 전한다. 지난 10년 사이 인삼은 들판을 넘어 백두대간 자락으로 급속히 번지고 있다. 그럼에도 인삼의 공급은 여전히 수요를 따라잡지 못한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딴 놈이 챙기는 까닭이다.

2009년 가을 농촌의 민심은 흉흉하다. 지난해보다 가마당 1만원 이상 폭락한 쌀값은 농민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혔다. 수입쌀은 계속 늘고 북녘에 지원하던 물량까지 끊었으니 가격이 떨어지는 건 당연한 이치다. 신종플루 후유증으로 줄줄이 취소된 특산물 축제의 여파도 피부로 느껴진다. 언제나 그랬듯이 관은 원인보다 결과에 집착하며 사람 모이는 일이라면 말리기에 급급하다. 순박한 농민들은 물건 팔 기회를 놓친 걸 아쉬워하기보다 ‘불치병’을 피하기라도 한 것처럼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표지판만 살아남은 희방사

그러나 풍기는 예외다. 신종플루가 유행하는 이 가을에도 축제를 벌인다. 인삼이 바이러스를 너끈히 막아줄 것으로 믿는 그들이다. 풍기역 앞에 늘어선 현수막의 문구에서 풍기 사람들의 간절한 바람을 읽을 수 있다. ‘면역력짱 풍기인삼 신종플루 얼씬도마’ ‘물렀거라 신종플루 풍기인삼 나가신다’…. 재래시장에서 대를 이어 인삼을 파는 상인에게 “이러다 신종플루 환자라도 생기면 어쩔 거냐?”고 물었다. 그의 답은 “인삼 먹고 고치면 되죠”였다.


» 구름이 내려앉은 소백산이 그려낸 수묵화. 숲은 이렇듯 작은 변화에도 다양한 모습을 보인다.

충북 단양과 경북 풍기를 연결하는 죽령으로 붙었다. 죽령은 신라 아달라왕 5년(158년) 신라 사람 죽죽(竹竹)이 길을 열었다 해서 붙은 이름이다. 백두대간의 여느 고개들처럼 죽령도 요즘은 차량 통행이 뜸하다. 소백산 아래로 중앙고속도로가 뚫렸기 때문이다. 풍기에서 죽령고개로 오르다 보면 희방사 표지판이 보이는데 이 절은 신라 선덕여왕 때 두운조사가 창건했다. 희방사는 조선시대 훈민정음 원판과 월인석보를 보관하면서 유명해졌는데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모두 불에 타버렸다.

죽령에서 소백산 천문대까지는 시멘트 포장길이다. 지도상으로 보면 백두대간 마루금이 시멘트길과 산길을 넘나들며 이어진다. 7km에 이르는 길이 다소 지루할 수도 있지만 고도가 높아지면서 서서히 달라지는 식생대를 관찰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안개가 자욱하거나 달빛이 밝은 날 걷는다면 한껏 멋에 취할 수 있다.

 

소백산의 날씨는 변화무쌍하다. 일기예보만 믿고 산을 탔다가는 낭패를 보기 일쑤다. 골이 깊고 숲이 울창해 구름이 차고 나는 데 그만큼 시간이 걸리는 탓이다. 제2연화봉까지 멀쩡했던 하늘이 고개를 내려서기 무섭게 어두워졌다. 구름이 시야를 가리고 바람이 구름을 대간 양편으로 흩어놓았다. 곧이어 마치 바닷길이 열리듯 구름 사이로 소백산의 명물 천문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2009년은 유엔이 정한 세계 천문의 해다. 갈릴레이가 목성의 위성을 발견한 지 400년이 된 해를 기념하는 것이다. 천문은 인간이 자연과 만나는 통로이자 문명을 이끄는 첨병이었다. 우리 민족도 예외가 아니었다. 신라와 고구려에 이미 첨성대가 있었고 일본에서 7세기까지 활약한 천문가의 상당수는 백제인이었다. 이런 전통은 고려의 서운관과 조선의 관상감으로 면면히 이어져왔다. 오늘날 1만원권 지폐에 새겨진 혼천의와 천체망원경은 천문인들의 자부심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 할 것이다.

그러나 21세기 한국의 천문학은 과거의 영화를 떠올리기 민망할 만큼 뒤처져 있다. 소백산 천문대는 한국 천문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유물이기도 하다. 1978년 준공된 이 천문대엔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국내 최대였던 주경 61㎝ 크기의 천체망원경이 설치돼 있다. 미국·이탈리아·스페인·남아프리카공화국의 망원경이 10m를 넘어선 지금까지도 한국 천문인들은 이 골동품으로 밤하늘의 별을 찾고 있다.

» 소백산 천문대. 30년이 넘도록 한국 하늘의 별을 지켜온 한국천문학계의 증인이다.

소백산 천문대 지키는 연구원들

소백산 천문대를 지키는 두 명의 연구원과 함께 30년 세월을 지켜온 망원경을 찾았다. 산자락이 온통 구름바다인지라 건물의 지붕을 열지는 못했다. 망원경이 좌우로 움직일 때 나오는 육중한 쇳소리를 들으며 문득 영화 <워낭소리>의 늙은 소를 떠올렸다. 늙어서도 일만 하는 소가 할아버지에게 든든한 친구였듯이, 낡아서도 별만 찾는 망원경은 연구원들에게 소중한 보물이다. 연구원들은 이 보물로 세계 최초의 소행성 발견까지 해냈다며 자랑스러워했다.

필자는 망원경의 경쟁력을 걱정했으나 연구원들은 환경의 변화를 더 우려했다. 이제 한국은 아무리 좋은 망원경을 제작하더라도 제대로 별을 보기 힘들다는 얘기다. 아열대 기후로 변하면서 겨울이 짧아진데다 도시의 불빛이 빠르게 산자락으로 침투하는 탓이다. 소백산 천문대의 경우 인근 단양댐에서 올라오는 수증기의 영향으로 맑은 날에도 하늘 문이 닫히곤 한다. 온전히 별을 바라볼 수 있는 날이 많게 잡아도 연중 50일 정도라고 하니 한마디로 “별 볼 일 없는 날”이 태반인 셈이다.

 

한 가지 다행스러운 건 한국천문연구원이 세계 최대 규모의 거대 망원경 개발사업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른바 GMT(Giant Magellan Telescope)로 불리는 이 사업이 2019년 완공되면 한국도 지름 25.4m 망원경으로 하늘을 바라볼 수 있다. 비록 이 망원경이 미국·오스트레일리아 등과 공동으로 제작하는 것이고 한국이 아닌 칠레에 놓인다 해도, 한국이 비로소 세계 수준의 천문관측에 접근하게 됐다는 점에서 천문인들은 벌써부터 설레는 모습이다.

천문대에서 제1연화봉을 거쳐 비로봉으로 가는 길은 유럽의 평원을 연상시킨다. 우리나라에서는 드물게 아고산대 식물들이 펼쳐져 있고 좌우로 단양과 풍기 땅을 시원하게 굽어볼 수 있다. 흔히 소백산을 가리켜 남성성이 강한 산으로 평하는데, 이 능선에 서면 그 이유를 체감할 수 있다. 비로봉 정상에 새겨진 서거정의 시구도 그런 분위기를 풍긴다. “뚜렷이 동남의 경계를 그어, 하늘과 땅이 만든 형국 억척일세.”

» 고치령. 작은 고개지만 전설이 된 단종과 금성대군의 통한이 새겨져 있고 방랑 시인 김삿갓의 유랑의 길이 시작된 곳이기도 하다.

비로봉에서 풍기 땅으로 내려서면 충절의 고장으로 알려진 순흥면이다. 안향 선생의 후손으로 알려진 순흥 안씨 문중은 1454년 단종의 복위를 모의하다 수양대군과 한명회에게 몰살당하는 운명을 맞았다. 당시 단종은 인근 영월에, 세종의 여섯째 아들 금성대군은 이곳 순흥에 유배돼 있었는데, 순흥 안씨의 사대부들은 둘 사이를 오가며 거사를 준비했던 것이다.

소백산에서 흐르기 시작한 물줄기가 개울을 이루는 순흥 청다리 밑에서 하루 수십 명씩 사대부들의 목이 잘려나갔다. 피비린내 속에서 극적으로 탈출한 사람들도 오랜 세월 안씨 성을 버리고 숨어 살아야 했다. 핏물은 죽계천 물을 따라 흘러 20리 밖에서야 멈췄으니 그 마을 이름이 ‘피끝’이다. 피끝마을 사람들은 논바닥에 우뚝 선 소나무 밑에 형 수양에게 죽임을 당한 동생 금성의 주검이 묻혀 있었다고 전한다. 지금도 순흥 안씨 문중은 음력 10월 초하루면 그때 그 자리에 모여 제를 올린다.

비로봉 넘어 국망봉에 쉬어간들

비로봉 넘어 국망봉도 쉬어가며 역사의 무상함을 돌아볼 만한 봉우리다.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이 나라를 고려에 바치자 그의 아들 마의태자는 이곳에 올라 옛 도읍지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는 고사가 전해진다. 또한 조선시대에는 ‘백순’이라는 대장장이가 이곳에서 선조 임금과 퇴계 이황 선생을 위해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소백산 자락의 동편 능선으로 내려서면 본래 벌목용 산판도로로 뚫린 고치령에 닿는다. 고갯마루엔 단종과 금성대군을 기리는 산신각이 서 있고, 소로를 따라 영월 방면으로 향하면 방랑 시인 김삿갓의 묘가 나온다. 흔히 김삿갓의 유랑을 낭만으로 여기기 쉽지만 실제 그의 삶은 처절했다. 김삿갓의 할아버지는 홍경래의 난 때 반군에 투항한 죄로 멸문의 화를 입었는데, 청년 시절의 김삿갓은 이런 내력을 모른 채 조부의 죽음을 조롱한 시를 지어 과거시험에 합격했다고 한다. 결국 자책감이 그를 떠돌게 했고 연고도 없는 소백산 자락에서 객사하게 만든 연유였다.

영주=글·사진 육성철 <그곳에는 새로운 인생이 있다> 저자

» 신백두대간 기행 15. 죽령∼고치령 (※ 이미지를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