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화(說話)에 옷을 입힌 중국판 데카메론 198개의 이야기, 삼언이박(三言二拍)
- 문학 애호가치고 이탈리아의 작가 보카치오가 14세기 중반에 쓴 ‘데카메론’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데카메론은 페스트가 창궐하던 시기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병을 피해 교외로 간 사람 10명이 10일 동안 각자 10건씩 이야기 한 것을 모아놓은 책이다. 중국에도 이와 유사한 작품이 있다. ‘삼언(三言)’과 ‘이박(二拍)’이라는 두 작품을 한데 일컫는 ‘삼언이박(三言二拍)’이 그것이다.
‘삼언’과 ‘이박’은 명대 중후반기 의화본(擬話本)의 전성기에 나온 작품이다. 의화본은 송대의 화본(話本·이야기 책)이 명대에 발전한 것으로, 송대의 화본은 설화(說話) 예술인들이 지니고 있던 간략한 대본이었다. 화본들이 출판되면서부터 많은 인기를 얻었고, 시간이 흐를수록 화본을 모방한 단편소설들이 나왔다. 화본을 모방하여 지어진 작품을 사람들은 ‘의(擬)화본’이라고 불렀다. 이렇게 만들어진 의화본은 ‘구연되는 것(說話)’이 아니라 오로지 책상 위의 읽을거리로 제공되었기 때문에 이야기 전개와 인물 묘사에 있어서 큰 발전을 보였다. 몇몇 작가와 편집자들이 여러 권의 의화본 소설집을 펴내기도 하였다. 그중에서도 ‘삼언’과 ‘이박’이 가장 뛰어나다.
- ‘삼언’이란 3권의 단편소설집을 총칭하는 말이다. 그 이름은 각각 ‘유세명언(喩世明言)’ ‘경세통언(警世通言)’ ‘성세항언(醒世恒言)’이다. 그중에서 ‘유세명언’은 다른 이름으로 ‘고금소설(古今小說)’이라고도 한다. 각각의 이름을 살펴보면 매우 재미있다. 즉 세상을 ‘빗대고(喩·유)’ ‘놀래며(驚·경)’ ‘일깨우는(醒·성)’ ‘밝고(明·명)’ ‘널리(通·통)’ ‘언제나(恒·항)’ 읽히는 ‘이야기(言)’라는 뜻을 담았다. 한동안 유행했던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류의 책이자 중국판 ‘데카메론’이라 할 수 있다.
‘삼언’은 작품집마다 40편의 소설을 실어 총 120편이 수록되어 있다. 그 가운데 송대와 원대의 화본이 대략 3분의 1을 차지하고 나머지 70~80편은 모두 명대 의화본이다. ‘삼언’에 실린 작품은 대부분 명대 말기의 문장가 풍몽룡(馮夢龍·1574~1646)의 손을 거쳐 윤색(潤色)되었기 때문에 풍몽룡의 창작이라고 할 수 있다. 의화본 작품들 내용은 다음의 몇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는 남녀 간의 사랑 이야기이다. 여기에서는 당시의 부녀자들이 겪는 불행과 그들이 추구하는 행복을 부각시켰다. 둘째는 당시 사회의 하층민이던 수공업자와 소규모 상인들을 전문적으로 다룬 작품이다. 사회적 신분은 낮았으나 의리를 중시하고 재물에 연연해하지 않는 등 많은 장점과 미덕을 지니고 있었다. 셋째는 왕후장상(王侯將相)의 이야기로 관리들의 추악한 모습과 통치자들의 이전투구 양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봉건도덕을 찬양하고 운명론을 받아들이며, 노골적으로 성을 다룬 작품도 있다.
노골적 성 다룬 사랑 이야기
- 먼저 사랑 이야기를 살펴보자. ‘두십낭노침백보상(杜十娘怒沈百寶箱)’이란 작품인데 이야기를 들어보면 제목을 이해할 수 있다. 이갑(李甲)이란 선비가 북경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기루에서 아름다운 기녀 두십낭을 알게 되었다. 두 사람은 첫눈에 반해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었다. 처음에 이갑이 아낌없이 돈을 쓰자 기루의 왕엄마 두씨는 언제나 그를 반갑게 맞이하였다. 그러나 후에 돈이 떨어지자 두씨의 태도는 싸늘하게 변해갔다. 이갑을 사랑한 두십낭은 그간 자신이 벌어놓은 돈으로 몸값을 치르고 기루를 빠져 나왔다. 그리고는 아름다운 꿈을 간직한 채 이갑과 함께 북경을 떠나 이갑의 고향으로 가는 배에 올랐다. 과주(瓜洲)를 지나면서 두십낭은 이갑과 함께 선창에서 술을 마시며 노래를 불렀다. 그런데 이 노래가 옆 배에 있던 부자상인 손부(孫富)의 주목을 끌었다. 바람둥이 손부는 구실을 만들어 이갑을 초대해 술과 음식을 대접하면서 자연스럽게 두십낭에 대해 물었다.
한편 이갑은 고향에 돌아가기에 앞서 걱정이 태산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고지식한 관리여서 아들이 기녀를 얻어 돌아온 걸 알게 되면 난리가 날 형편이었다. 이갑은 부모님께 뭐라고 얘기해야 할지 막막하였다. 흑심을 품고 있던 손부는 짐짓 이갑을 위로하는 척하며 두십낭을 자신에게 넘기면 천금을 주겠노라며 유혹한다. 이갑은 결국 양심을 저버리고 손부의 말을 따랐다. 이 소식을 알게 된 두십낭은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녀는 많은 사람 앞에서 공개적으로 이갑의 나약함과 손부의 무례함을 가차 없이 비난한 뒤에 손부가 건넨 보물상자를 품에 안고 파도가 출렁이는 강물에 몸을 던졌다. 이 광경을 보고 들은 주위 사람들은 이갑과 손부에게 몰매를 퍼부었다. 둘은 겨우 빠져나오기는 했지만, 결국 병이 들어 평생을 쓸쓸히 보내거나 일찍 죽고 말았다. 따라서 제목은 ‘두십낭이 분노하여 보물상자를 들고 강물로 뛰어들다’로 풀이하면 된다.
- 또 다른 사랑 이야기로 ‘기름장수가 화괴를 독차지하다(賣油郞獨占花魁)’가 있다. 여주인공인 왕미낭(王美娘)은 임안(臨安·지금의 항주)에서 제일 아름다운 기녀로서 사람들은 그녀를 화괴낭자(花魁娘子)라고 불렀다. 그녀와 왕래하는 이들은 모두가 왕손이나 귀공자들이었다. 남자 주인공인 진중(秦重)은 임안에서 혼자 기름을 파는 상인이었다. 우연한 기회에 미낭을 보게 된 진중은 1년여 동안 열심히 일하고 근검절약하여 마침내 10여냥의 은전을 모아 용기를 내어 미낭을 찾아갔다. 진중은 계속되는 술시중으로 힘들어하는 미낭을 정성 들여 돌보았고, 미낭은 그런 진중의 진심에 이끌려 신분이 낮은 기름장수 진중에게 시집을 갔다. 그후 미낭은 오랫동안 헤어져 있던 부모를 찾게 되고, 진중 역시 우연한 기회에 8년 전에 헤어졌던 아버지를 만나게 되었다. 진중 부부는 두 아들을 낳고 행복하게 잘 살았다.
그전까지 사랑 이야기의 주인공은 십중팔구 재자가인(才子佳人)이었다. 한마디로 선비와 기녀의 사랑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런데 ‘장사꾼’이 당당하게 주인공으로 등장하였다는 것은 놀라운 변화였다. 아울러 이 작품은 아무리 많은 돈으로도, 또 아무리 높은 지위로도 진정한 행복을 살 수는 없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진실한 감정만이 사랑과 결혼의 든든한 밑바탕이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진실한 감정’은 말처럼 쉽지 않다. 이를 가로막는 사회 현실이 그렇고 서로의 자존심도 빠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사랑’이라는 주제가 역사 이래 ‘가장 진부한 이야기’이면서도 또 ‘가장 새로운 이야기’일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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