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판 걸리버 여행기 경화연
청(淸)나라 시대 장편소설로 영화·드라마로 제작, 광동(廣東)성 하원(河源)시는 관광지 조성
- 중국판 걸리버 여행기 ‘경화연(鏡花緣)’은 신화적 색채가 농후한 중국 청(淸)대의 장편소설이다. ‘서유기’ ‘요재지이’ ‘봉신연의’ 등과 같은 반열에 올라있다. 교보생명 대산문화재단은 지난해 12월 경화연을 외국문학 번역지원 대상으로 선정하기도 했다. 조선 말 홍희복(洪羲福·1794~1859)이 ‘제일기언(第一奇諺)’이란 제목으로 번역본을 낸 적이 있지만 현대어로 번역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경화연’이란 이름은 ‘경화수월(鏡花水月·거울 속의 꽃, 물 속의 달)’이란 말에서 따온 것으로 작가 이여진이 꿈꾸는 세계가 공허하여 실현될 수 없음을 비유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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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 광동성 하원시의 경화연 공연
- 이야기는 과거에 낙방한 주인공 당오(唐敖)가 친구인 다구공(多九公), 처남인 임지양(林之洋)과 함께 배를 타고 길을 떠나는 것으로 시작한다. 가족과 헤어져 길을 떠난 당오 일행은 배를 타고 30여개 나라를 돌아다닌다. 그 와중에 다양한 풍속을 접하고 기이한 사람들을 만나며 괴이한 사건에 휘말려든다. 주인공 걸리버가 소인국, 대인국 등을 유람하며 기이한 사람들을 만난다는 내용의 영국의 걸리버 여행기(조너선 스위프트 작)와 거의 흡사한구조다.
작가는 풍자도 염두에 둔 듯하다. 풍자의 대상은 괴상한 나라가 아니라 작가가 생활하고 있는 현실세계였다. 사람들이 서로 속고 속이는 사회, 남존여비의 사회, 부패한 지식인의 사회, 재산 축적을 위해 온갖 흉악한 일을 서슴지 않는 사회, 이 모두가 작가의 비판 대상이었다.
예컨대 백민국(白民國)에서는 신랄하면서도 해학적인 필치로 위선적인 지식인들을 풍자한다. 허장성세에 능한 백민국 선비들은 돈 한 푼을 목숨처럼 여겨 작은 이익 앞에서도 득달같이 달려드는 위선자들이다.
또 숙사국(淑士國) 사람들은 말 한마디 글자 하나에도 격식을 갖추어 고상하게 사용한다. 술집 심부름꾼조차 손님이 오면 예의를 갖추어 이렇게 말한다. “선생님께서 이렇게 왕림하여 주심은 술을 드시기 위함이지요? 그렇다면 안주는 무엇으로 대령해야 옳을지요? 제게 가르침을 부탁드립니다! (중략) 술은 한 병을 드릴까요, 아니면 두 병을 드릴까요? 안주는 한 접시로 할까요, 두 접시로 할까요? 소견을 말씀해주십시오!” 하지만 숙사국 사람들은 실은 남은 반찬과 이쑤시개 하나도 모조리 챙기는 구두쇠다. 이 숙사국에서는 식초값이 술값보다 비쌌는데, 그래서 그런지 사람들의 말에서 지독한 식초 냄새가 풀풀 풍기는 것 같다. 이처럼 작가는 대조법을 통해 표리부동한 유림의 추태를 폭로한다.
반면 ‘군자국(君子國)’은 작가가 꿈꾸는 사회적 이상향이다. 군자국 사람들은 모두 안팎으로 겸손하고 예의범절이 몸에 배어 있다. 군주가 재물을 멀리하였기에 진귀한 보물을 상납하는 사람은 오히려 처벌을 받았다. 관리들도 백성을 가까이 하고 가족을 대하듯 친절했다. 상인들은 좋은 물건을 값싸게 팔았으며, 구매자들은 가격을 후하게 쳐주며 조금 못한 물건부터 먼저 사갔다. 물론 군자국은 작자가 꿈꾼 이상국가의 모습이다. 작가의 외침은 탐관오리가 넘쳐나는 이기적인 현실의 방증이었다.
또한 작가는 경화연을 통해 생명을 찬양하면서 장생불로와 불사회생의 사상도 피력한다. 무계국(無繼國) 사람들은 자라지는 않으나 죽은 뒤에도 시체가 부패하지 않고 120년 뒤에는 예전처럼 다시 살아난다. 현원국(玄遠國)에서는 국왕이 1000년 동안 권좌에 앉아 있기도 한다. 장생불사와 윤회사상은 불사국(不死國)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불사국에는 원구산(員丘山)이 있고 산에는 불사의 나무(不死樹)가 있어 그 열매를 따서 먹으면 장생할 수 있다. 또 붉은 연못(赤泉)이 있어 그 물을 마시면 늙지 않았다.
‘여자는 무능하다’는 기존의 남존여비 관념도 과감히 비판한다. 반면 여성의 재능을 찬미하면서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긍정하는 태도를 보인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측천무후(무측천)는 과거시험을 통해 100명의 재녀(才女)를 선발하고 문학, 예술, 체육, 기예에 관한 여성들의 재주를 마음껏 펼치도록 한다. 측천무후는 중국 역사상 유일무이하게 황제에 오른 여걸이다. 물론 당시 사회 전반적으로 전통 관념이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지만 작가의 태도는 보다 과감하고 혁신적이다.
모든 일을 여성이 주관하는 ‘여아국(女兒國)’에서는 작가의 이 같은 과감한 태도가 잘 드러난다. 여아국은 국왕과 신하들이 모두 가죽신을 신고 갓을 쓴 여성이다. 오히려 남자들은 치마를 둘렀으며 전족(纏足)을 한 채 버선을 신어야만 했다. 또 여자가 바깥일을 하고 남자가 집안일을 보았다. 남자들은 집 밖을 함부로 나다닐 수 없었으며, 걸핏하면 여성들의 구박을 받는 신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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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동성 하원시의 경화연 관광지 / 광동성 하원시의 백화선자상(像)
- 경화연에는 이 밖에도 다양한 상상의 나라가 등장하여 작가의 기발한 상상력을 보여준다. 양면국(兩面國) 사람들은 모두 상반된 성격을 가진 두 얼굴을 지니고 있었다. 평소에는 더할 나위 없이 온유하고 예의 바르지만 두건을 벗으면 성격이 돌변해 흉악한 본 모습을 보인다. 무장국(無腸國)에선 사람들이 밥을 먹어도 소화를 시키지 못해 그대로 배설을 하였다. 그래서 부자들은 자신이 배설한 것을 노비들에게 먹이고, 또 그들이 먹고 배설한 것은 다른 사람에게 먹이는 식으로 하여 물자를 절약하였다. 천흉국(穿胸國) 사람들은 모두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있어서 부자들은 외출할 때 가마를 타고 가는 것이 아니라 대나무 막대를 가슴에 꿴 후 거기에 매달려 다녔다. 익민국(翼民國) 사람들은 머리가 엄청 크고 아부에 능하였다. 결흉국(結胸國) 사람들은 가슴과 배가 튀어나와 먹기만 좋아하고 게을렀다. 견봉국(犬封國) 사람들은 생김새가 개를 닮아 있었고, 시훼국(豕喙國) 사람들은 돼지를 닮았는데, 입만 열면 거짓말이라 진실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기종국( 踵國) 사람들은 로봇처럼 판에 박힌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작가는 ‘경화연’ 후반부로 갈수록 자신의 재주를 과신한 듯하다. 가공해낸 인물들은 전형화되지 못했고, 소설 속에 등장하는 재녀(才女)들의 개성도 선명치 않다. 결국 소설 후반부로 갈수록 말장난으로 흘러버려 전반부에서 봤던 생동감도 조금 떨어지는 측면이 있다. 중국의 대문호 노신(魯迅)은 “소설에 있어서도 또한 학문과 예술을 다루고 경전을 장황하게 언급하여 스스로 끝을 맺지 못할 정도였으니 이는 박학다통의 해독(害毒)”이라고 탄식했다. 그래도 기발한 상상력으로 작품을 일관되게 이끈 작가의 창작력은 참으로 놀랍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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