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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편과 저편을 이어주는 고개 역사와 전통을 끊어내는 운하

醉月 2010. 4. 9. 08:46

이편과 저편을 이어주는 고개 역사와 전통을 끊어내는 운하

조령산의 세 관문 하늘재·문경새재·이화령을 보며 사람의 길을 생각하고,
정상의 소박한 비목에서 숙연함을 느끼다
확장된 3호선 국도와 고속도로 덕에 한갓진 고갯길로 변해버린 이화령에서 산에 들어섰다. 된비얄을 타고 오르는 산길은 온통 꽃밭이었다. 물봉선, 동자꽃, 나리꽃, 망초, 모시대, 싸리나무꽃… 그리고 이름을 알지 못하는 더 많은 꽃들. 간밤에 내린 비로 목욕을 마친 꽃들은 맑았고, 벌들은 공친 하루를 벌충이라도 하듯 바삐 날았다. 살아 숨쉬는 존재로 태어난 탓에 스스로 먹을거리를 구하는 수고를 감당해야 하는 숙명 앞에서 거미들도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거미줄에 매달린 물방울을 털어내는 거미의 작업은 섬세했다.

» 조령산 정상 백두대간과 주흘산이 조망되는 자리에 세워진 고 지현옥 비목. 지씨는 1993년 한국 여성 최초로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한 산악인이지만 비목에는 한 줄의 설명도 없어 오히려 숙연해지게 한다. NIKON D90, NIKKOR18-200,F/2.8, ISO 200, 1/250s

삶과 죽음, 보존과 개발, 기억과 망각…. 이화령에서 조령산으로 오르는 아름다운 숲길에서도 상념은 가시지 않았다. 이화령으로 오르기 전 발목을 잡힌 ‘연풍성지의 잔상’ 탓인 줄로만 알았다. 신앙을 가진 이유만으로 죽임을 당해야만 했던 사람들과 죽여야만 했던 사람들은 작은 바위를 사이에 두고 생과 사의 역할을 나눠야만 했다. 복판에 구멍이 뚫린 형구돌의 이편은 목에 밧줄을 드리운 신자들의 자리고, 저편은 그 줄을 당겨야만 했던 형리의 자리였다. 그 작은 구멍을 사이에 두고 같은 장소, 같은 시간에 삶과 죽음을 나눠야 하는 존재가 사람이다. 형리는 악역을 자처했을까? 저벅저벅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도 천주님 앞에 두 손을 모았을 신자는 죽음 다음의 세상을 보았을까? 만약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그 신앙을 지켰을까? 살아야만 하는 이유로 또 다른 삶을 끝내야 하는 밧줄을 당길 수 있었을까? 신앙은 죽음 다음의 문제일까? 살아야 하는 현세의 삶을 위한 좌표일까?

 

아름다운 숲길에서도 가시지 않는 상념

산을 오르는 즐거움 가운데 하나가 망각이다. 오르고 또 올라야 하는 길에서 걸음을 떼기조차 힘에 겨워지면 머릿속은 하얀 도화지가 된다. 그 도화지에 그려지는 것은 오직 발걸음뿐이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머리는 숫자만 기억할 뿐이고 발걸음은 오직 숫자에 의지해 옮겨질 뿐이다. 생각이 지워지면 한도 원망도 지워지는 법. 미워할 것도 사랑할 것도 기억되지 않는 시간을 위해 산을 오른다.

이화령에서 시작된 대간 길이 흙길을 끝내는 조령산에서 배낭을 벗었다. 이제부터 가야 할 길은 걷는 길이 아니라 기고 매달려야 하는 암릉 길이다. 바라보이는 신선암봉, 마패봉(마역봉), 부봉 등은 마치 짐승의 이빨처럼 뾰족한 암봉으로 어깨를 결어 아름다우면서도 위엄을 잃지 않는다. 사람의 발길을 허용할 것 같지 않은 저 능선 길에서 백두대간을 가려낸 선조의 지리 인식은 차라리 신기롭기만 하다.


» 조령산을 지나 3관문에 이르기까지 대간 길은 한 가닥 로프에 목숨을 맡겨야 하는 암릉의 연속이다. 뒤로 뾰족하게 솟은 봉우리가 조령산이다.

전통 지리관에서 산의 정상은 신의 영역이고 봉우리와 봉우리를 잇는 능선은 신들이 오가는 하늘길이다. 신의 자리인 산의 정상에는 어떠한 인공시설물도 세우지 않았다. 산을 신으로 섬기는 태백산의 천제단도, 이제는 사라진 지리산 천왕봉 천왕사도 정상의 복판에 세우지 않았다. 백두대간보전법이 만들어지고 고갯마루와 산의 정상에 들어서기 시작한 거대한 표석은 그래서 오만하고, 조령산 정상 무릎 높이에도 이르지 않는 작은 표석은 그래서 정겹다.

 

생사 갈리는 절벽길에서 들은 서거 소식

조령산 표석을 마주하고 낯설지 않은 이름을 추억하는 비목이 서 있다. ‘고 지현옥 산악인을 추모하며’라는 글귀 이외에 아무런 기록도 없어 오히려 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비목의 주인인 고 지현옥은 한국 여성 가운데 최초로 1993년 에베레스트를 올랐고 1999년 안나푸르나의 품에 안겼다. 하고많은 유명한 산 중에서 왜 이곳 조령산에 그를 추모하는 비목을 세웠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백두대간과 문경의 진산인 주흘산과 문경새재, 문경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오는 비목의 자리에서 비목을 세운 후배들의 생각을 읽을 수 있을 뿐이다. 그의 길지 않은 생애에서 찾아낸 기록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방법을 일러준다.

“인생은 아무렇게나 살아도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고뇌라면 최소한 인생은 괴로워하면서 선택해야 하는 문제를 가지고 고민해야 하는 것이다. 선악을 가리는 최소한의 선택으로부터 옳은 길을 가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결과가 선하지 못했거나 옳지 못한 것에 큰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선하고 옳은 쪽으로 가려고 몸부림쳐야 하며, 무엇이 선하고 옳은 것인지 알려고 하는 것이 인생일 것이다.” 누군가 찾아내 인터넷에 올려놓은, 길지 않은 생애를 산에 바친 고 지현옥의 일기장에 적혀 있는 삶의 길이다.

조령산을 벗어나자마자 길은 급한 내리막이다. 줄에 의지해 내려와 걷다 보면 다시 급한 오르막, 그것도 양옆으로는 천길 절벽이다. 삶과 죽음이 찰나에 결정될 수 있는 길을 걷다가 또 한 사람의 죽음에 대한 소식을 들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을 지낸 사람이니 사람들은 그를 추억할 것이다. 그를 기리는 수많은 수식어도 빤하게 읽힌다. 다만, 그 수식어들을 만들어낸 시대가 내 안의 비겁함이 키운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주기를 바랄 뿐이다. 신선암봉으로 오르는 길. 턱걸이를 하듯 겨우 올라섰는데 정상까지 양옆은 아래가 보이지 않는 직벽이다. 다리가 떨린다.

신선암봉에서 주저앉아 걸어온 길과 가야 할 길 그리고 사방을 본다. 이화령에서 문경새재를 지나 하늘재로 이르는 대간 길은 천혜의 요새라는 말이 빈말이 아님을 증명이라도 하듯 거의 내내 이편과 저편이 굳이 성벽을 쌓지 않아도 근접하기 어려울 정도로 수직에 가까운 절벽 위로 나 있다. 그 능선 사이로 내준 공간을 찾아 사람들은 이편과 저편을 잇는 고개를 열었다. 북으로 하늘재는 신라의 아달라왕이 서기 156년에 열었다고 한다. 가운데 문경새재는 조선조에 열렸다. 그리고 남으로 마지막 고개 이화령은 일제가 열었다.

» 하늘재 충주 쪽 들머리의 미륵리사지. 석굴암을 닮은 절은 신라 마의태자가 국권 회복을 다짐하며 세웠다고도 하고, 고려 왕건이 북벌의 의지를 위해 세웠다고도 한다.

흙길엔 사람 몰리건만 포장길은 휑한 모습

길은 목적을 갖는다. 그래서 시대와 환경에 따라 생로병사한다. 하늘재는 신라의 영토확장 야심이, 문경새재는 조선 태종이 안동권의 양반 권력에 대한 견제와 소통을 위해, 이화령은 일제가 문경 지역의 석탄과 석회석을 침탈하기 위해 길을 열었다. 하늘재와 문경새재는 이제 생활의 길로서 역할을 잃었다. 이화령은 3호선 국도와 중부내륙고속도로가 열리면서 터널이 두 개나 뚫렸지만 여전히 한산하다. 그럼에도 물길을 잇는다고 한다. 강을 이용한 수운이 주요한 교통수단이었던 과거로 돌아가자는 게 아니라면 무언가 흉흉한 목적이 숨어 있을 것이다.

바윗길과 작별을 고하고 내려선 문경새재 3관문에서, 그리고 부봉과 탄항산을 돌아 닿은 하늘재의 이편과 저편의 풍경은 과연 잘살기 위해 해야 할 선택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문경새재의 문경 쪽 땅은 자동차가 다닐 수 없는 흙길이다. 관광객이 몰린다. 괴산 쪽은 친환경 포장이라고 주장은 하지만 걷는 재미를 앗아가는 포장길이다. 고갯마루 3관문 정상에 가깝도록 음식점들도 들어차 있지만 한산하기만 하다. 하늘재는 문경 쪽이 아스팔트 포장길이고 충주 쪽은 걷기 좋은 아름다운 길이다. 대간 산행을 마쳐 아픈 다리와 지친 몸을 이끌고도 사람들은 빨려들듯 하늘재 길을 따라 걷는다.

길을 곧게 펴고 포장하는 것은 세월의 지층들이 간직한 이야기를 지우는 일이다. 빨라지는 만큼, 편해지는 만큼 이야기들은 사라진다. 문경새재 괴산 쪽 길에선 문경 쪽에서 들을 수 있는 이야기들을 듣기 어렵다. 아스팔트 포장을 마친 문경 쪽 하늘재에서는 사람의 얼굴을 만나는 일조차 어렵다. 자동차로 오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충주 쪽 길에서 사람들은 마주칠 때마다 어색하나마 인사를 건네고 길의 안부를 묻는다. 이야기 속에서 천년도 더 된 미륵리사지의 미륵부처는 마의태자가 되고 왕건이 되고 부처가 된다.

운하를 파는 길은 역사를 지우고 전설을 지우는 길이다. 이화령에서 문경새재를 지나 하늘재로 이르는 길. 도저히 살아날 수 없을 것만 같은 바위 위에서도 소나무는 끈질긴 생명력을 이어간다. 뿌리가 있기 때문이다. 역사와 전설은 한 민족의 뿌리다. 백두대간을 넘어 한강과 낙동강을 잇는 세 개의 고갯길이 보여주는 이편과 저편이 서로 다른 현실은 어떠한 선택이 옳은 길인지 말해준다. “낙동강 700리에 무새공굴(철근콘크리트)을 놓고 하이까라(화이트칼라) 잡놈만 왕래하누나.” 과거 이화령을 놓을 당시 인근 지역에서 불렸던 노래 가사의 경고는 여전히 유효하다.

문경=글·사진 윤승일 기획위원 nagne@hani.co.kr

» 신백두대간 기행 ⑫ 이화령~하늘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