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송철규 교수의 중국 고전문학_01

醉月 2010. 4. 6. 08:36
'양산백과 축영대, 중국판 로미오와 줄리엣
동진(東晋)시대 전설, 1600년 세월 넘어 소설·영화·드라마·애니로 이어져
우리는 이야기의 세상에서 살고 있다. 특히 고전은 문화 콘텐츠의 무궁무진한 보고(寶庫)이다. 최근에 개봉된 영화 ‘퍼시 잭슨과 번개 도둑’과 곧 개봉될 ‘타이탄’을 보더라도 그리스로마신화는 서양 문화권에서 끊임없이 재창조되고 있다. 동아시아의 문화 콘텐츠 강국은 중국이다. 중국은 오랜 역사를 거치면서 축적된 문화 콘텐츠를 바탕으로 현재 문화강국으로 빠르게 발돋움하고 있다. 

한국도 ‘대장금’과 ‘전우치전’ 등 고전을 현대화하는 작업과 ‘태왕사신기’ ‘추노’ 등 전통시대를 재조명하는 작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 부족한 부분이 많은 만큼 이웃나라 중국의 문화 콘텐츠를 살펴보고 형성과 변화 발전 과정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 미국 할리우드가 그리스로마신화와 이솝우화 등을 자기화하여 많은 부를 창출하듯이 한국도 이웃 중국의 방대한 문화 콘텐츠를 이해하고 향후의 작업에 차용함으로써 문화강국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취지에서 필자는 중국에서 눈여겨봐야 할 고전 콘텐츠를 선별하여 독자에게 읽는 재미를 선사하고 한국 문화 콘텐츠 발전에 기여하고자 한다. 한중대 교수인 필자는 한국에 많이 알려지지 않은 작품 위주로 소개할 예정이다.

▲ 일러스트 한규하
‘양산백과 축영대’(줄여서 ‘양축’으로 일컬음)는 ‘중국판 로미오와 줄리엣’이다. 슬프고도 아름다우며 감동적인 사랑이야기로 소설 이름은 남녀 주인공의 이름이기도 하다.

전설의 줄거리를 살펴보자. 동진(東晋·317~419년)시대 절강(浙江)의 상우(上虞)현 축가장(祝家庄)에 축원외(祝員外)의 딸 영대(英臺)가 살고 있었다. 그녀는 아름답고 총명하였으며 어릴 때부터 문학적 재능이 뛰어났다. 좋은 스승을 찾지 못해 고민하던 축영대(이하 영대)는 큰 도시 항주(杭州)로 나가 공부하기를 원했다. 아버지가 반대하자 영대는 점쟁이로 가장하고 점괘를 운운하며 아버지에게 딸을 유학보내라고 권하였다. 축원외는 딸의 위장을 눈치챘으나 딸의 간절함을 깨달아 모르는 체하고 유학을 허락하였다.

영대는 남장을 하고 항주로 유학길에 올랐다. 항주 가는 길에 같은 생각으로 항주로 향하는 회계(會稽·지금의 소흥紹興) 출신 학생 양산백(梁山伯·이하 산백)을 만난다.

영대는 첫눈에 산백에게 반했고 초교정(草橋亭) 위에서 의형제를 맺는다. 둘은 항주에 도착해 만송서원(萬松書院)에서 공부를 한다. 이때부터 3년 동안 둘은 항상 붙어다니면서 깊은 우정을 쌓는다.

영대는 산백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지만 영대가 여자인 줄 모르는 산백은 그녀를 친구로만 대할 뿐이었다. 그러던 중 딸을 보고 싶어하는 아버지의 재촉으로 영대는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다. 두 사람은 헤어지기가 아쉬워 18리를 함께 걸어간다. 영대는 자신의 사랑을 암시하지만 산백은 순수한 우정으로 받아들일 뿐 영대의 속내를 알지 못한다.

영대는 할 수 없이 집안에 아름답고 정숙한 여동생(九妹)이 있으니 자신이 나서 중매를 하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산백은 집이 가난하여 정한 기한에 축영대의 집에 가지 못한다. 뒤늦게 영대의 집을 찾아온 산백은 그때서야 영대가 여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아버지의 주선으로 무현(?縣·지금의 은현  ?縣) 태수의 아들 마문재(馬文才)와 정혼한 상태였다. 누각에서 만난 두 사람은 맺어질 수 없는 인연에 눈물을 흘리다가 애처롭게 헤어진다. 둘은 현생에서 맺지 못한 인연을 이승에서는 꼭 이루자고 다짐한다.

산백은 은현(지금의 영파(寧波)시 은주(?州)구) 현령으로 부임을 받았지만 우울증으로 오래지 않아 죽게 되고 그의 뜻에 따라 무현 구룡(九龍) 언덕에 묻힌다. 산백의 사망 소식을 들은 영대는 자신도 죽기로 결심한다. 영대는 결혼식 날 가마를 타고 가다가 길을 우회하여 산백의 묘에 들른다. 영대의 통곡 소리에 하늘이 감동해 비바람과 천둥번개가 몰아치고 묘가 갈라졌다. 이어 영대가 그 속으로 뛰어들자 묘가 다시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고 비바람이 멈췄으며 그 위에 무지개가 높이 걸렸다. 곧 두 사람은 한 쌍의 나비로 변하여 세상을 자유롭게 날아다녔다.

▲ 좌)서극 감독 영화 ‘양축’의 포스터 (우)양축 문화 공원
송·원·명·청 거치며 스토리 완성
양축의 전설은 진(晋)나라 때 생겨났다. 현존하는 기록으로는 초당(初唐) 양재언(梁載言)의 ‘십도사번지(十道四蕃誌)’가 가장 이르다. 만당(晩唐) 시기 장독(張讀)의 ‘선실지(宣室誌)’에 이르면 양축에는 문학성이 더해져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다. ‘영대는상우 축씨의 딸로 남장을 하고 유학을 가 회계 출신 양산백과 함께 동문수학하였다.

산백의 자는 처인(處仁)이었다. 영대가 먼저 돌아가고 2년 뒤 영대를 찾아간 산백은 그제야 영대가 여자임을 알고 크게 놀랐다. 부모께 결혼 승낙을 청하였으나 축씨는 이미 마씨의 아들에게 딸을 정혼시킨 뒤였다. 후에 산백은 은현의 현령이 되었지만 병으로 죽어 무성 서쪽에 장사지냈다. 영대가 마씨에게 시집가던 날, 배가 묘소 인근을 지날 때 바람과 파도로 앞으로 나가지 못하였다. 산백의 묘 때문임을 알게 된 영대는 뭍에 올라 통곡하였다. 그때 갑자기 땅이 갈라졌고 영대도 갈라진 땅으로 들어가 묻혔다. 진 승상 사안(謝安)이 건의하여 그 묘를 의부총(義婦塚)이라 이름하였다.’

현존하는 기록 중에 비교적 이르고 완전한 형태의 기록은 송 명주(明州·지금의 영파) 지부(知府) 이무성(李茂誠)이 지은 ‘의충왕묘기(義忠王廟記)’이다. 이 기록에 따르면 양산백은 352년 음력 3월 1일에 태어나 373년 음력 8월 16일에 21살의 나이로 죽었다. 축영대는 374년 봄에 시집을 갔고 양산백의 묘(의충왕묘)는 397년에 건립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추측컨대 양축 전설은 374년에서 397년에 이르는 20여년 사이에 생겨나 송·원·명·청을 거치면서 완성되었다. 이 전설을 기초로 생겨난 주요 문학 작품으로는 명대 풍몽룡(馮夢龍)의 ‘이수경의결황정녀(李秀卿義結黃貞女)’와 청대 소금표(邵金彪)의 ‘축영대소전(祝英臺小傳)’이 있다. ‘축영대소전’에서는 처음으로 나비로 변하는 결말이 생겨났다.

1950년대 중국의 유명 작가 장한수(張恨水)는 장편소설 ‘양산백과 축영대’를 쓰면서 민간 전설에 근거하여 양축 전설의 기원지에 대해 10곳을 제시하였다. 그곳은 각각 절강(浙江) 영파, 강소(江蘇) 의흥(宜興), 산동 곡부(曲阜), 감숙(甘肅) 청수(淸水), 안휘(安徽) 서성(舒城), 하북(河北) 하간(河間), 산동 가상(嘉祥), 강소 강도(江都), 산서 포주(浦州), 강소 소주(蘇州)였다.

이 중에서도 1997년 7월에 발견된 진(晋)대 묘소의 발굴 결과, 묘의 위치와 규격 및 부장품과 양산백에 관한 기록 등이 대부분 일치하여 절강 영파시가 가장 유력한 기원지로 짐작된다. 다음으로 강소 의흥시 역시 주변에 양축 전설과 관련된 많은 지명을 갖고 있다. 특히 나비로 변하는 줄거리는 의흥에서 이루어졌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이처럼 양축의 전설에 나오는 지명을 토대로 중국의 여러 지역에서 서로 앞다투어 양축 전설과의 연관성을 내세우고 있다. 이에 따라 각 지역별로 전설의 내용을 달리하여 여러 판본이 생겨났다.

▲ 양축 경극
1945년 전통극으로 부활
양축 전설은 먼저 전통 희곡을 통해 크게 성행하였다. 월극(越劇) ‘양산백과 축영대’는 영화로 만들어지면서 가장 많은 주목을 받은 유명 희극이다. 1945년에 원설분(袁雪芬)과 범서연(范瑞娟)이 ‘양축애사(哀史)’를 초연하였고, 1951년에 화동월극실험극단이 ‘화접(化蝶)’ 부분을 더해 공연하였다.

이 전통극이 1953년에 상하이영화제작창에서 중국 최초로 컬러판으로 제작되었다. 1954년 경극의 대가인 정연추(程硯秋)는 관련 희곡들을 참고하여 유명한 ‘영대항혼(英臺抗婚)’을 만들어 공연했다. 이 작품은 정연추가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 처음이자 생애 마지막으로 연출한 작품이다. 이밖에도 각종 민간예술 형식에 양축 전설을 소재로 한 작품들이 부지기수이다.   

1958년 가을 상하이음악학원은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1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특별한 이벤트를 개최하기로 결정하고 이런 취지를 학생들에게 알렸다. 당시 학교에는 하점호(何占豪), 유려나(兪麗拿), 정지낙(丁芷諾) 등이 바이올린 민족화 실험팀을 결성하고 활동 중이었다. 1958년 겨울, 곡보가 완성된 뒤 연습을 거쳐 1959년 5월 27일 오후 바이올린 협주곡 ‘양축’의 첫 공연을 가졌다.

공연에서는 유려나가 바이올린 독주를 맡았다. 연주 시간은 26분 정도 소요되었는데 처음 5분 동안은 양축의 사랑을 묘사한 뒤 즐거운 학교생활과 18리에 걸친 이별이 그려졌다. 10분부터는 2단계로 접어들어 영대가 강제 결혼에 반대하고 누대에서 양산백과 재회한 뒤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 묘사되었다. 2단계의 길이도 1단계와 비슷하여 약 11분 정도 소요되었다. 마지막 단계에서 ‘나비로의 변화’에 관한 이야기가 펼쳐지면서 끝을 맺었다. 결론적으로 바이올린 협주곡 ‘양축’은 교향악과 중국 민간희곡음악의 표현기법을 이용하여 남녀 주인공의 비극적인 사랑을 동정하면서 아름다운 사랑에 대한 모든 이의 바람을 승화시켰다. 
 
대만서 드라마·애니로도 제작

1994년 8월에는 홍콩의 서극(徐克) 영화감독이 ‘양축(Butterfly Lovers)’이란 제목으로 영화화하였다. 양채니(楊采     )와 오기륭(吳寄隆)이 주연을 맡은 이 영화를 통해 서극은 주제를 부각시키기 위해 기존의 줄거리에 살을 더하였다. 즉 축영대의 아버지가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하기 위해 권세가인 마씨 집안에 딸을 보내려 한다는 설정을 덧붙였고, 축영대가 남장을 하고 숭기(崇綺)서원에서 공부한 이유는 모친이 젊었을 적에 이루지 못한 꿈을 대신하기 위함이었다는 설정을 덧붙였다. 그리고 두 사람이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난다는 식으로 결말을 내었다. 서극 감독은 상하이음악학원 학생들이 만든 바이올린 협주곡을 편곡하여 배경 음악으로 삼아 감동을 더했다.

2000년에는 타이완(臺灣)에서 ‘소년 양축’이라는 이름으로 총 42편의 TV 연속극이 제작되었으며 2004년에는 역시 대만에서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기도 하였다. 놀라운 것은 양축 전설이 조선시대에도 전해졌다는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양축이 부활하여 세상에 머물다(梁祝復活留人間)’라는 제목의 소설이 있었다고 한다. 중국 정부는 2006년 5월 20일 양축 전설을 제1차 국가급 무형문화유산 목록에 올렸다.

중국 고전문학에는 남녀 간의 사랑을 다룬 다른 작품으로는 초중경(焦仲卿)과 유란지(劉蘭芝)가 주인공인 장편시 ‘공작동남비(孔雀東南飛)’, 당 현종과 양귀비가 주인공인 ‘장한가’와 ‘장생전’, 장군서(張君瑞)와 최앵앵(崔鶯鶯)이 주인공인 전기소설 ‘앵앵전’, 후방역(侯方域)과 이향군(李香君)이 주인공인 희곡 ‘도화선(桃花扇)’, 유몽매(柳夢梅)와 두여낭(杜麗娘)이 주인공인 희곡 ‘모란정(牧丹亭)’ 등을 비롯하여 수없이 많다.


 / 송철규
| 1965년 강원도 춘천 태생. 한국외국어대 중국어과 학사ㆍ석사ㆍ박사. 한중대 중국어중국학과 교수. 저서 및 논문 ‘송선생의 중국문학교실’(전3권) 등 다수. 역서 ‘제갈공명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라’ 등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