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사람 욕심에 산이고 다람쥐고 온전치를 못하네

醉月 2010. 4. 2. 08:51

사람 욕심에 산이고 다람쥐고 온전치를 못하네

산은 정상 절반이 할퀴어나갔고 큰재 폐교엔 관광버스 가득…
갑오농민전쟁 유적지에는 개집과 우사가 즐비
대간 길이 경상도 김천에 이르면 꼭 찾고 싶은 곳이 있었다. 16년 전 농촌 봉사활동을 했던 마을이다. 당산나무 아래에서 더위를 쫓고 있는 할아버지들의 기억을 더듬어 추억이 깃든 동네에 들어섰다. 경운기가 곡예 운전을 하던 흙길이 사라지고 시내버스가 다닐 수 있는 널찍한 시멘트 도로가 생겼다. 농부들은 군데군데 흙이 달라붙은 오토바이를 몰고 그 길을 달렸다.

» 톱으로 잘라낸 듯 절반이 잘려나간 금산. 잘려나간 산은 철도용 자갈로 팔려나갔다. NIKON D90, NIKKOR18-200,F/2.8, ISO 200, 1/250s

시골 촌부도 “똑바로 살기 어려운 세상”

그 시절 그 마을엔 별난 아저씨가 있었다. 세상 사람들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제 방식대로 사는 분이었다. 단어를 거꾸로 말하기 좋아했고, 때로 알 수 없는 혼잣말로 웃음을 선사했다. 뭇사람들이 “우리가 남이가”를 외치던 그 무렵 경상도 산골에서 두 번이나 전라도 출신 대통령 후보의 선거운동을 도왔던 그는 이웃에게 배신자로 찍힌 고독한 비주류였다. 그해 여름 도시에서 몰려온 대학생들은 그의 우직함과 솔직함에 반했다.

술을 밥보다 좋아하던 아저씨가 술을 끊었다고 했다. 콩팥을 떼어내는 수술을 받고 심상치 않은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젠 몸을 구부리기조차 어려워 생업이던 참외 농사도 그만두었다. 가장 젊은 농부의 나이가 마흔다섯인 그 마을에서 예순여덟 살 아저씨는 이미 손님을 맞기도 어려울 만큼 지쳐 있었다. 그 아저씨의 입에서 “똑바로 살기 어려운 세상”이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어지럽고 울컥했다.

해질 녘 백두대간이 지나가는 황악산 기슭에선 작은 명상음악회가 열렸다. 통나무와 황토로 지은 아담한 찻집에 스님들과 불자들이 옹기종기 모여앉았다. 수행자 복장으로 간이무대에 오른 두 청년은 오카리나, 인디언 플루트, 기타 반주에 맞춰 가곡과 명상가요를 불렀다. 노래와 연주가 이어지는 사이 관객들은 즉석에서 사랑에 관한 시를 낭송했다. 첫 곡은 드라마 <명성황후>의 주제가 <나 가거든>이었고, 마지막 시구는 ‘나 이제 산에 깃드네’였다.


어둠이 내려앉은 천년 고찰 직지사 경내에서 스님께 차를 청했다. 주말 저녁 특별한 감동을 선물한 예술가도 함께했다. 그에게 <나 가거든>으로 공연을 시작한 이유를 물었다. 비운의 삶을 마감한 전직 대통령의 49재를 앞두고 준비한 곡이라 했다. 가슴이 뭉클했다. 49재가 있기까지 고인의 명복을 비는 덕수궁 시민 분향소는 두 번이나 쓰러지고 뭉개졌다. 한 번은 경찰이 ‘실수’로, 또 한 번은 총을 든 퇴역 군인들이 힘으로 밀어붙였다. 지난 한 달 서울광장이 모욕당하는 풍경을 목도하면서도 별일 없이 사는 듯한 내 모습이 밉고 서러웠다.

새벽 3시 직지사 범종이 울리고 예불이 시작됐다. 대웅전 귀퉁이에서 삼배를 올린 뒤 내내 부처의 미간을 바라보았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게 사람의 삶이라지만 고인의 잔영은 짙고도 강렬했다. 비주류로 살면서 감내한 고통의 크기만큼 세상을 떠나서 전하는 메시지의 울림도 깊었다. 산중에 안거하던 1400여 명의 스님들이 이례적으로 시국선언에 참여한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경북 김천과 충북 영동이 갈라지는 추풍령에서 백두대간과 다시 만났다. 동편 하늘에 여명이 비치기에 앞서 경부선 열차가 새벽의 정적을 깨트렸다. 바로 그때 대간에서 가장 혹독하게 상처 입은 금산이 절룩거리는 모습으로 마중을 나왔다. 몸체의 앞면이 수직으로 잘려나간 금산 꼭대기는 출입이 금지된 위험 지역이다. 조심스레 밧줄을 넘어 두 발쯤 다가서면 이내 낭떠러지다. 안개가 자욱해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그곳에서 대간은 숨쉴 기운조차 얻지 못한다.

» 이름만큼이나 예쁜 윤지미산 표석. 소머리산으로 불렸으나 언제부턴가 ‘세상을 포용하고, 두루 알아맞히고, 인생 전반을 안다’라는 뜻의 윤지미산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몸체 앞면이 수직으로 잘려나간 금산

난치병 환자를 홀로 남겨두고 병실을 나오는 기분으로 금산을 떠났다. 풀잎에 올올이 맺힌 아침이슬이 발목을 축축이 적셨다. 풀숲을 더듬고 잡목을 열어젖히는 동안 아침이슬은 온몸에 스며들어 생기를 불어넣었다. 걸음이 빨라지고 허기가 느껴지는가 싶더니 어딘가에서 밥 짓는 냄새가 났다. 침을 꼴깍 삼키고 다가서자 야영 중인 나그네가 누룽지를 먹는 모습이 보였다. 곁눈질로 살피니 숟갈은 벌써 바닥을 긁고 있었다. 주고 싶어도 주지 못하는 이가 미안함을 느끼지 않도록 수인사만 건네고 잰걸음으로 지나쳤다.

야트막한 오르막을 넘어 찐 달걀로 아침상을 차렸다. 두 개쯤 까먹고 나니 풀 속에서 꿩이 날고 바위틈에서 다람쥐가 튀었다. 비 내린 뒤끝이라 짐승의 먹이도 시원치 않을 터였다. 빵과 달걀을 곱게 으깨 낙엽 위에 펼쳐놓고 산짐승들의 보금자리에서 물러섰다. 사람들이 도토리를 쓸어가는 숲에서 다람쥐는 생존의 위기에 직면했다. 이제부터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은 도토리 욕심을 줄이든가 아니면 새로운 먹잇감을 주든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작점고개에서 용문산까지는 긴 오르막이다. 백두대간 구간종주를 하는 사람들이 긴 줄을 이루고 있어 속도를 줄이고 천천히 뒤를 따랐다. 같은 산을 타면서도 사람들의 모양새는 제각각이다. 쉴 새 없이 이야기하고 웃으면서 걷는 사람, 접사렌즈를 꽂고 마주치는 꽃마다 셔터를 누르는 사람, 서너 걸음 옮길 때마다 눈을 감고 지그시 생각에 잠기는 사람, 그들에게 대간 길은 야유회고 생태기행이고 명상수련이다.

용문산에서 국수봉으로 가는 동안 대간은 다시 한번 솟구친다. 때마침 안개가 걷히면서 뜨거운 열기가 산자락을 감쌌다. 간간이 산들바람이 불어왔으나 수돗물처럼 흐르는 땀을 식히진 못했다. 이 능선의 오른편 산자락에 용문산 기도원이 있다. 그곳은 1950년 나운몽 목사가 건립한 한국 최초의 기도원이다.

국수봉 정상에 올라서자 김천과 상주를 잇는 백두대간 마루금이 눈에 들어왔다. 험하지 않으면서도 산 아래 들판을 넉넉히 감싸주는 울타리로 보였다. 국수라는 지명처럼 이곳에서 낙동강과 금강이 갈라지고 상주의 젖줄인 남천의 물줄기가 시작된다. 표지석 옆에서 주변을 조망하다 산 위를 날아다니는 수백 마리의 잠자리 떼를 발견하고는 카메라 렌즈에서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국수봉에서 큰재까지는 줄곧 내리막이다. 겨울엔 위험한 길이지만 여름엔 편안한 산책로다. 곳곳에 잘 익은 산딸기가 펼쳐져 있어 입맛까지 돋우며 내달렸다. 큰재 입구는 경북 상주시 공성면 신곡리 마을로, 예전부터 허름한 민가 한 채가 있었다. 목마른 산꾼이 목을 축이던 그 집엔 귀가 어두운 할머니가 살았는데, 다시 찾아보니 폐가로 변해 있었다. 이제 산꾼들은 길 건너편 폐교 앞 급수대에서 물을 마신다. 졸업생 597명을 배출하고 12년 전 사라진 산골 분교 운동장엔 대간 종주자를 실어나르는 관광버스 두 대와 수십 년 전 신작로를 누볐을 듯한 2t 트럭이 주차해 있었다.

» 낙동강과 금강을 가르는 분수령인 큰재. 상주 방향에서 보면 고개가 크게 보여, 낮은 고개임에도 큰재라는 이름을 얻었다.

의병장 김준신의 야사 서린 신의터재

큰재에서 야트막한 산을 따라 들과 숲을 번갈아 지나치다 보면 회룡재, 개터재, 지기재, 신의터재를 차례로 만난다. 개터재 너머 능선 아래쪽 윗왕실 마을에 들르면 최만재라는 조선시대 젊은이의 지극한 효행에 관한 전설을 들을 수 있다. 한겨울에 어머니가 참외를 먹고 싶어해 정성껏 기도하니 꿈에 노인이 나타나 참외가 있는 곳을 알려주었다고 한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시묘살이를 할 때는 호랑이가 나타나 3년간 곁에서 지켜주었다고 한다.

신의터재의 본래 지명은 신은현이었으나 임진왜란 때 김준신이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운 뒤부터 신의터재로 불렸다. 일제의 민족정기 말살 정책 때문에 어산재로 바뀌었던 신의터재가 제 이름을 되찾은 건 1996년의 일이다. 신의터재 인근 화동면 판곡리에 낙화담이라는 연못이 있는데, 이곳엔 김준신의 가족들이 왜병의 손에 죽을 수 없다며 몸을 던졌다는 야사가 전해진다.

신의터재에서 무지개산까지는 완만한 능선이다. 능선 양옆에서 쉴 새 없이 울어대는 매미 떼의 리듬에 맞춰 늘어진 팔다리를 수습했다. 무지개산의 어깨를 살짝 밟고 돌아나간 대간은 윤지미산을 향해 급하게 차오른다. 숨을 고르는 횟수가 잦아질 무렵 북에서 남으로 내려오는 대간꾼을 만났다. 그가 산을 타는 방식이 흥미로웠다. 자기 몸에 맞게 구간을 잘게 쪼갠 뒤 오전엔 북진, 오후엔 남진으로 왕복한다고 했다. 혹자는 똑같은 산을 왜 두 번 타느냐고 물을 수도 있겠으나 그건 산을 모르고 하는 얘기다. 오는 길과 가는 길의 느낌과 냄새가 다르고, 오전과 오후의 날씨와 풍광 또한 다르기 마련이다.

 

오는 길과 가는 길의 냄새가 다르니

윤지미산에서 화령재로 가려면 밧줄 신세를 져야 한다. 워낙 경사가 급해 서두르다간 몸을 상할 수 있다. 10분 정도 줄타기를 하고 나면 평탄한 산길이다. 10년 전만 해도 이곳은 걸음하기가 쉽지 않은 오지였으나 중부내륙고속도로가 뚫리면서 서울에서 반나절이면 손쉽게 닿을 수 있는 땅으로 바뀌었다. 흥하는 길이 생기면 쇠하는 길도 있는 법이다. 한국전쟁 당시 치열한 전투를 거쳐 낙동강 방어선을 지켜낸 천혜의 요새 화령재도 이젠 고만고만한 산골 마을의 고갯마루로 변모했다.

화령재에서 서쪽으로 내달리면 속리산 자락의 출발점이자 한 세기 전 갑오농민전쟁의 불씨가 타올랐던 충북 보은군 외속리면 장내리에 이른다. 1893년 3월11일부터 4월2일까지 동학교도 수만 명이 이곳에 모여 보국안민과 척왜양의를 외치며 집회를 열었는데, 이를 계기로 동학의 교조신원운동이 사회개혁과 반외세 투쟁으로 발전했다. 삼남지방의 민초들이 궐기해 역사의 개벽을 꿈꾸었던 역사의 현장엔 장승 두 개가 나란히 서 있다. 몇 년 사이 달라진 건 장승 옆에 개집이, 개집 뒤에 대규모 우사가 들어섰다는 점이다. 지금 개와 소가 갑오농민전쟁 유적지를 지키고 있다.

김천·상주=글·사진 육성철 <그곳에는 새로운 인생이 있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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