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맞닿은 삼도봉에서 ‘민주’를 맞잡다

醉月 2010. 3. 26. 08:56
대간에 피 뿌린 ‘신원’은 아직도 서럽고, 일제가 뚫었다는 나제통문은 지금도 애닯아
 
현충일 아침 고속도로는 숨이 막혔다. 더위에 지친 산꾼은 덕유산 주능선을 에둘러 거창으로 향했다. 영문도 모른 채 제 나라 군인이 쏜 총에 맞아 죽어간 719명의 영혼을 추모하기 위해서였다. 1951년 2월 경남 거창군 신원면 덕산리 청연골에서 84명, 대현리 탄량골에서 102명, 과정리 박산골에서 533명이 희생됐다. 유족들이 유골을 수습하기까지 3년여, ‘빨갱이’라는 딱지를 떼기까지 반세기가 흘렀다. 전쟁은 대간에 피를 뿌리고 이념의 상처를 남겼다.

» 삼도봉에서 바라본 백두대간. 구름 위로 솟은 봉우리가 금강과 낙동강을 가르는 대덕산이다. NIKON D90, NIKKOR18-200,F/2.8,1/250s

그해 겨울 국군의 작전명은 ‘견벽청야’(堅壁淸野)였다. 이는 <후한서>에 등장하는 병법으로, 벽을 쌓아 고립시킨 뒤 적을 초토화하는 전술이다. 놀랍게도 그때 국군의 적은 양민이었고 그중 14살 이하 어린이가 359명, 60살 이상 노인이 66명이었다. 군인들은 신원중학교 교실에 주민 800여 명을 감금했고, 면장과 지서 주임이 입구에 서서 군경 가족만 따로 추려냈다. 그날 살 자와 죽을 자를 가려냈던 면장도 아홉 해 뒤 주민들의 손에 처참하게 살해됐다.

희생자가 가장 많았던 박산골은 한동안 귀신들만 사는 골짜기였다. 지명 그대로 신원(神院)이었다. 이곳에서 흘러내린 피가 신원천을 붉게 물들여 그해 여름 신원면 지역의 가재들은 유난히도 불룩하고 붉었다. 유족들은 부패한 주검더미에서 큰 뼈, 중간 뼈, 작은 뼈를 나누어 묻고 남자합동지묘, 여자합동지묘, 소아합동지묘라 적은 비석을 세웠다. 그중 어린이의 뼈가 묻힌 소아합동지묘가 제일 먼저 훼손됐다. 비문마저 흐릿해진 소아합동지묘에 소주를 붓고 한동안 발을 떼지 못했다. 거창 사건 희생자에 대한 국가 배상은 아직도 요원하다.

배추 모종하는 흙투성이 아주머니

거창 들녘엔 모내기가 한창이다. 신원면을 빠져나오는 길목에서 한 노인이 손을 들고 차를 세웠다. 4마지기 농사를 위해 감악산을 넘어 다니는 여든세 살 할아버지였다. 그는 해마다 쌀 스무 가마를 거둬들여 칠남매에게 고루 배분한다. 다른 사람에게 맡기면 마지기당 쌀이 한 가마씩 빠지기 때문에 손수 모를 내고 피를 뽑는다. 어지간한 짠돌이처럼 보였던 그가 읍내까지 태워다준 요금이라며 꼬깃꼬깃한 1천원짜리 지폐 두 장을 꺼냈다. 실랑이 끝에 그 돈을 돌려드리고 나서, 깍듯이 고개를 숙이는 늙은 농부를 보았다.


» 거창 사건으로 희생당한 이들의 위패, 희생자 719명에 대한 보상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오후 2시가 넘어 전북 무주와 경남 거창이 만나는 백두대간 마루금 빼재에 붙었다. 해가 갈수록 넓어지는 빼재 도로 위에서 덕유산 종주를 마친 등산객들이 숨을 고르고 있었다. 가볍게 인사하고 수정봉으로 오르니 선선한 바람이 불어온다. 덕유 삼봉산까지의 긴 경사로는 내내 나무로 막혀 있지만, 봉우리 앞뒤에 멈춰서면 거창 땅을 시원하게 내려볼 수 있다.

덕유 삼봉산에서 소사고개까지는 줄곧 내리막이다. 없던 채소밭이 산 중턱까지 치고 올라왔다. 고랭지 채소가 날로 인기를 끌면서 대간 산자락마다 개간이 한창이다. 배추 농사는 4년에 한 번만 운대가 맞아도 이문이 남는다고 한다. 배추가 금추가 되면 배추밭에 장사꾼들이 들끓지만, 배추값이 폭락하면 배추들은 대간 자락에서 그대로 썩는다. 배추가 받아먹은 비료와 농약도 배추와 함께 산자락에 묻힌다.

머릿수건을 두르고 가을배추 모종을 내는 아주머니들 곁에 앉았다. 아침 7시부터 11시간 동안 일하고 3만5천원을 받는 그들이다. 배추농사에 대해 이것저것 아는 체를 했더니 서울 사람이 어떻게 그런 걸 아느냐며 반가움을 표한다. 온종일 쭈그리고 앉아 일하다 보니 온몸이 흙투성이다. 힘들지 않느냐고 물으니 가끔 일어나 허리 한 번 펴고 나면 피로가 풀린단다. 문득 지난주 텃밭에 고구마 몇 고랑 심고 드러누웠던 기억이 떠올랐다. 다른 건 몰라도 밭작물을 살 때는 비싸다고 투덜대거나 깎으려 들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원의 땅 대덕산 자락의 역사

소사고개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거창 삼도봉을 올랐다. 자유무역협정(FTA)이 체결되기 전 넓은 과수원이던 땅도 모두 채소밭으로 바뀌었다. <워낭소리>의 할아버지는 소 먹이를 잃지 않으려고 농약 없이 농사를 지었다. 밭고랑마다 비료가 수북하고 밭두렁을 벗어나면 말라죽은 풀들이 지천이다. 풀을 약으로 몰아낸 땅에서 배추는 화초처럼 자랄 수 있겠으나 짐승은 공존하지 못한다.

삼도봉을 지나면 대덕산이다. 대덕산 자락은 역사적으로 은신처이자 구원의 땅이었다. 조선 명종 때의 예언가 남사고는 대덕산 아래 무풍 땅을 이르기를 “국난이 닥칠 경우 이주하는 땅”이라고 했다. 실제로 조선 말 위기에 내몰린 명성황후를 모시기 위한 행궁이 들어서기도 했다. 민병석이라는 이가 지은 99칸에 이르던 행궁, 명례궁은 일제강압기를 지내면서도 무사했지만 해방 뒤 이리저리 팔려나갔다 한다.

» 소사 고개를 타고 백두대간의 턱밑까지 치고 올라온 고랭지 배추밭. 온종일 흙과 함께 살아가는 농부들이야말로 이 땅의 주인이다.

대덕산은 남으로 덕유산 주능선을 선명하게 바라볼 수 있는 북한계선이다. 북으로 삼도봉, 동으로 수도산, 서로 덕유산, 남으로 삼봉산이 이어진 산속의 산으로 백두대간에서는 등 끝에 해당한다. 이곳에서도 동서의 물은 정확하게 갈라져 대간의 경계를 이룬다. 서쪽 물은 금강의 최상류이고, 동쪽 물은 방아골을 거쳐 낙동강으로 나아간다.

대덕산 아래 덕산재를 기점으로 전북 무주와 경북 김천이 갈리는데, 무주 쪽으로 내려서는 무풍 지역은 호남 속의 영남으로 불려왔다. 생활권이 김천이다 보니 말씨도 경상도에 가깝고 생활풍습도 무주 토박이와는 차이가 난다. 무풍을 지나 설천에 이르면 비로소 전라북도 산골 분위기가 제대로 나타나는데, 두 고을 사이에 무주구천동 33경 가운데 제1경 나제통문이 있다. 신라와 백제가 오가던 굴로 알려져 있는 나제통문은 1910년께 일제가 인근 금광의 금과 임산물 등을 가져가려고 인공적으로 뚫은 굴이다. 당시만 해도 ‘기넘이굴’로 불리던 굴은 1963년 무주구천동을 관광지화하면서 명승지 33곳을 지정할 때 나제통문의 이름을 얻고 제1경 자리에 올랐다. 나제통문이 있는 산의 이름은 석모산이고 그 산을 넘나드는 고개의 이름은 기넘이고개였다. 백제와 신라의 깃발이 넘나들던 고개라는 것이 이름의 내력이다.

대덕산에서 덕산재로 떨어지는 길은 필자에게 오랫동안 두려움의 공간이었다. 6년 전 폭설이 내린 겨울밤 이곳에서 길을 잃고 4시간 남짓 사투를 벌인 일이 있기 때문이다.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섰던 그날 밤 필자는 덕산재에서 2km 남짓 떨어진 어느 노인의 집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불쑥 찾아든 자식뻘 되는 산꾼에게 아랫목을 내주고 술상까지 차렸던 그 노인의 배려를 잊을 수 없다.

기억을 더듬어 그 집을 찾아나섰다. 문을 열고 어르신을 부르자 백발의 할아버지가 나오셨다. 큰절을 올리고 지나온 얘기를 풀어내니 어렴풋이 기억하는 듯했다. 칠순을 넘겨서도 사과농사를 마다하지 않았던 할아버지가 얼마 전 과수원을 팔았다고 했다. 술을 벗 삼아 살던 할아버지는 식도암 판정을 받고 술을 끊었다고 했다. 할아버지가 담배만은 어쩌지 못하겠다며 불을 붙였다. 필자가 걱정스럽게 묻자 한마디 한다. “다 제 복 타고나는 거지. 얼마나 산다고 하고 싶은 걸 못하고 사나.”

 

6년 전 생명의 은인 다시 만나

» 무주 무풍과 설천의 경계가 되는 나제통문. 일제강압기 수탈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다.

할아버지는 길손을 그냥 보낼 수 없다며 캔맥주를 내왔다. 외항선을 타는 딸이 싱가포르에서 사왔다는 맥주였다. 당신은 마시지 못해도 찾아온 손님은 그냥 보낼 수 없다고 했다. 그 술을 마시고 작별 인사를 했다. 산길 조심하라며, 지나가다 또 들르라며, 할아버지는 다시 볼지 알 수 없는 사람과의 이별을 아쉬워했다.

음력 유월 보름 새벽 덕산재에서 삼도봉을 향해 출발했다. 안개 자욱한 산길의 유일한 길동무는 쉴 새 없이 지저귀는 산새들이었다. 잡목만이 우거진 숲을 오르내리다 보니 금세 힘이 빠졌다. 길섶에 주저앉아 간밤에 만난 택시기사가 싸준 도시락을 풀었다. 묵은 김치가 반찬의 전부였지만 새벽잠을 미루고 준비했을 사람의 정성을 생각해 한 톨, 한 방울 남기지 않고 깨끗이 비웠다.

삼도봉 아래 1170m 봉에서 처음으로 사람을 만났다. 그도 동행자를 발견한 것이 기뻤던지 큰 소리로 인사했다. “야, 사람이다. 반가워요, 사람 아저씨!” 사람이 사람을 보고 이처럼 즐거워할 수 있다는 사실, 바로 사람 없는 외진 산길에서 맛볼 수 있는 재미다. 사람들은 산을 내려가서도 그렇게 살고 싶어하지만 어느새 사람이 싫어 다시 산을 찾는다. 묘한 조화가 아닐 수 없다.

삼도봉이다. 경상도 김천, 충청도 영동, 전라도 무주가 맞닿은 정점이다. 백두대간에서는 삼도봉이라는 이름이 세 번 등장한다. 하지만 삼도의 의미가 하삼도를 의미한다면 이곳이 대표 격이다. 대간은 삼도봉을 타고 북으로 달리지만 어지간한 산꾼이라면 삼도봉 서편 능선의 민주지산에 눈길을 주기 마련이다. 민주지산은 본래 산이 민두름하다는 데서 유래했는데, 언젠가부터 ‘민주’라는 이름 때문에 더 유명세를 타고 있다.

삼도봉 아래 삼마재에서 김천시 부항면 해인리 쪽으로 내려섰다. 더 달리고 싶었으나 20년 넘게 해인리에서 산장을 운영하는 산악인 김용원씨를 만나려고 코스를 바꿨다. 못 보던 사이 김씨의 산장엔 나무들이 훌쩍 자라 있었다. 오자마자 떠날 길을 재촉하는 산꾼에게 김씨는 막걸리와 흑돼지 바비큐 시식을 권했다. 그는 “잊지 않고 찾아줘 고맙다”는 말을 몇 번이고 되풀이했다. 그도 나도 사람을 그리워하며 산다.

거창·무주=글·사진 육성철 <그곳에는 새로운 인생이 있다> 저자

» 신백두대간기행 ⑦ 빼재~삼도봉 (※ 이미지를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