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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사는 세상’을 꿈꾸다

醉月 2010. 3. 21. 15:33

‘사람 사는 세상’을 꿈꾸다

가지지 않은 자들의 덕유산, 등산 내내 “삶과 죽음은 자연의 한 조각”이라는 말이 따르네
그를 만나러 가는 길에서 또 다른 그의 소식을 들었다. 10년 전에 덕유산에서 만났던 향적봉 대피소지기 허의준 할아버지는 행복의 기준이 무엇인지를 일러주었다. 설화가 피기 시작하는 겨울의 초입에 비좁은 향적봉 대피소에서 긴 밤을 지새우며 할아버지는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깜빡 잠에서 깨어 해돋이를 보겠다고 오른 향적봉에서 해는 보지 못했다. 13년의 산장지기 생활을 청산하고 산 아래 사람 사는 세상으로 내려가야만 하는 처지에서도 할아버지는 서운함보다는 지나온 세월의 행복함을 말했다. 할아버지가 일러준 행복은 스스로를 만족하는 자족이었다. 할아버지가 일러준 덕유산의 내력들은 사람 사는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담고 있었다.

» 중봉에서 내려다본 덕유고원. 철쭉이 여전한 고원 뒤로 백두대간이 이어진다. NIKON D90, NIKKOR17-55,F/6.3,1/125

산의 정기, 사람들이 만들어낸 허상

10년 만에 다시 산길을 오르기 위해 달리는 고속도로에서 또 다른 그의 소식을 들었다. 숱한 고난을 이겨온 그가 남긴 마지막 말에서 유독 “삶과 죽음은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라는 말이 귓전에서 떠나지 않는다. 전라북도 장수를 거쳐 육십령에 도착하고도 오래도록 망설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간간이 비를 뿌리는 날씨보다는 그가 남긴 말 때문이었다.

덕유산으로 오르는 남쪽 들머리 육십령은 한적했다. 오가는 차가 없어 고갯마루 주차장은 텅텅 비었다. 주차장 한켠 시멘트 정자에서 내려다보이는 사람 사는 세상에서 간밤 내린 비가 수증기가 되어 하늘로 오른다.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겠다던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일까?

모든 죽음은 슬픈 법이라지만 생각하지 못했던 죽음은 슬픔을 부르기 전에 혼란을 가져왔다. 숲으로 들어 산으로 오르는 길, 두 발은 자꾸 허방다리를 딛는다. 휘청거리는 몸을 의지하려고 나뭇가지를 잡을 때면 나무는 어김없이 품었던 빗발을 털어낸다. 차갑다. 몸은 흠뻑 젖어도 땀은 솟는다. 겨우겨우 할미봉을 오른다. 잘생긴 바위봉우리로 이어진 능선을 두고 사람들은 외적으로부터 장수군 장계를 지키기 위해 어느 할머니가 쌓은 성이라는 이야기를 남겼다. 육십령에서 1시간 남짓이면 닿는 할미봉 바위 길은 한 가닥 동아줄에 의지해야 한다. 삶과 죽음의 기로가 여기에 있다. 줄을 놓거나 놓치면 그대로 죽음이다. 죽지 않으려고 두 손에 힘을 준다. 줄은 미끄럼을 막으려고 매듭을 지어놓았다. 알지 못하는 누군가를 위한 배려가 고맙다.


그가 산으로 오르던 시간, 수많은 사람들도 산을 올랐을 것이다. 누구는 건강한 삶을 위해 오르는 산을 그는 죽기 위해 올랐다. 떨어지지 않으려 할미봉 절벽 동아줄에 매달리면서 스스로 몸을 던졌을 그를 생각한다. 햇빛이 없는데도 뜨겁고 물을 마시는데도 갈증은 사라지지 않는다.

바람 부는 봉우리에 주저앉았다. ‘5월 덕유’라 말할 정도로 아름다운 신록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왜 이럴까 미안하다. 다만 미안할 뿐이다. 산을 본다. 아니 산이 보인다. 내려앉은 구름으로 조망이 좋지 않다.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행히 기억은 남아 산을 추억한다. 남으로 구름 속에 모습을 감춘 능선은 지리산까지 이어진다. 북으로 서봉이라 부르는 장수 덕유산과 동봉이라 부르는 남부 덕유산의 장엄한 산세는 구름 속에서도 뚜렷하다. 바람을 타는 구름 속에서 시시각각 모습을 바꾸는 능선이 아름답다.

» 향적봉 코앞까지 사람을 실어나르는 스키리프트. 무주구천동 상인들은 다른 산에 곤돌라나 케이블카를 놓는 것을 걱정한다. 관광객이 쉽게 산을 찾고 빠르게 떠나기 때문에 관광산업에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이 그들의 경험이다.

풍수를 말하는 사람들은 이어지는 능선을 용(龍)이라 부른다. 면장이라도 하려면 논두렁 정기라도 받고 태어나야 한다는 것이 풍수를 말하는 이들의 믿음이다. 그러나 그 믿음은 결과적으로 모순이다. 산의 정기는 다만 다른 생각을 갖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허상일 뿐일 것이다. 이 땅의 산들은 모두 하나의 줄기로 이어진다는 것이 백두대간의 개념이고 실제로도 그렇다. 면장을 만드는 논두렁도, 대통령을 만든 봉화산도 선으로 이으면 결국 백두산에서 만난다. 죽음을 선택한 그가 꿈꾸던 ‘사람 사는 세상’은 선으로 이어져 백두산에서 하나가 되는 그런 세상이었을 것이다.

 

선현을 만나지 못한 덕을 누리다

그가 노래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사람 사는 세상이 돌아와 너와 내가 부둥켜안을 때, 모순 덩어리 억압과 착취 저 붉은 태양에 녹아버리네. 사람 사는 세상이 돌아와….” 80년대 아스팔트에서 어깨 겯고 함께 부르던 그 노래를 대통령 후보였던 그가 불렀다. 목소리는 꾸며지지 않았고 표정은 단호했던 것으로 기억되는 그 모습이 불현듯 떠오른 것은 덕유산에도 ‘사람 사는 세상’을 꿈꾸던 이들의 추억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빨치산으로 불리는 그들을 대표하는 남부군이 창설된 곳이 덕유산이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남쪽에 흩어져 있던 6개 도당 위원장이 모여 남부군을 창설하고 이현상을 사령관으로 선출했다. 1963년 정순덕씨가 지리산에서 붙잡힐 때까지 지난하게 이어졌던 빨치산이 시작된 곳이 덕유산이다.

덕유산의 이름은 ‘덕이 넘친다’는 뜻을 담고 있다. 능선이 유려한 산세 탓도 있거니와 1400~1600m를 오르내리는 봉우리들이 만들어낸 깊은 골과 들녘이 주는 풍요로움 때문이기도 하다. 덕유산 자락인 경남 거창군 북상면 사람 갈천 임훈 선생이 1552년 향적봉에 오른 뒤 남긴 ‘등덕유산향적봉기’(登德裕山香積峰記)에는 ‘이곳은 이른바 구천둔곡이라고 한다. 옛날 이 골짜기에 성불을 이룬 이가 구천 명이 있었던 까닭에 이름하였는데, 예로부터 전해오는 말로는 산이 신비해서 그 터는 보이지 않는다고 전한다’고 적혀 있다고 한다. 숫자 ‘구’는 많음을 뜻하고 ‘둔’은 경작할 만한 산속의 평지를 이르는 말이다. 덕유산이 예로부터 양반의 수탈을 피해 살기에 적합한 땅이었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유난히 많은 산적 이야기와 함께 이성계가 새로운 왕조를 열기 위해 이 땅의 높은 산을 찾아다니며 산신제를 올릴 때 소지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이야기와 임진왜란 당시에는 안개를 피워 왜적으로부터 민중을 보호했다는 전설은 덕유산이 가진 자들의 산이 아니라 가지지 못하거나 가지지 않은 사람들의 산이었다는 것을 말한다.

갈천 선생은 지리산과 가야산에 비해 덕유산이 알려지지 않은 것을 선현을 만나지 못한 때문이라고 애석해했지만 알려지지 않은 탓에 가지지 못한 사람들의 산으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은 오히려 다행스러운 일이다.

육십령에서 향적봉까지 덕유산 주능선에는 키 큰 나무가 없어 시야가 막히지 않아 전망이 좋다. 육십령에서 덕유 주능선과 함께한 백두대간은 향적봉이 보이는 백암봉(송계삼거리)에서 덕유산 주능선과 헤어져 북상한다. 그러나 대간 종주자들 대부분은 향적봉을 지나치지 않는다. 덕유산의 정상이라는 의미가 있지만 그보다는 동엽령과 백암봉 중봉을 잇는 주능선에 자리잡은 덕유고원의 풍광이 발길을 잡기 때문이다. 봄의 철쭉과 진달래, 여름의 신록, 가을의 단풍, 그리고 바람 거센 겨울에도 눈꽃과 상고대는 덕유산의 사철 아름다움을 대표한다. 사실 철쭉은 소백산에, 신록은 지리산에, 단풍은 설악산에 비할 것이 아니지만 부각으로 표현되는 8~10도 경사각을 가진 덕유산의 조망은 다른 산보다 사람을 편안하게 한다. 중봉에서 바람이 거세도 사람들이 발길을 쉬 옮기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 자동차 통행이 뜸한 빼재는 백두대간을 절단내는 길을 넓히는 공사가 한창이다.

국립공원으로 지정되고서도 한동안 덕유산은 무주구천동으로만 알려졌다. 1988년 향적봉 자락에 스키리조트 건설이 시작되면서 덕유산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주목과 구상나무 등이 즐비하던 능선은 파헤쳐졌고 향적봉 턱밑까지 리프트와 곤돌라가 놓였다. 곤돌라를 타고 산을 올라 10분만 오르면 정상에 이르게 되면서 산은 알려졌고 몸살을 앓게 됐다.

 

미륵불 일으킬 향나무는 뿌리 못 내리고

10년 전 향적봉 대피소에서 13년 동안 향적봉을 지켜온 허의준 할아버지는 향적봉에 살던 천왕이 시끄러워서 조용한 지리산 천왕봉으로 이사를 갔다며 씁쓸하게 웃었다. 북덕유산으로 불리던 향적봉의 제 이름을 찾아 사비를 들여 산 이름을 새긴 표석을 세운 이였다. 산의 정상은 신의 거처이기 때문에 정상에 비켜 세운 표석은 여전하지만 허 할아버지가 세운 통일을 기원하는 돌탑의 모습은 많이 망가졌다. 곤돌라로 산을 오르는 이들의 손을 타는 탓이다. 정상은 아예 돌이 보도블록처럼 깔려 있다. 사람들의 발길을 감당하자면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누운 향나무가 많아 향적봉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향적봉에는 언젠가 향나무가 일어서면 미륵부처가 세상을 구원한다는 전설이 전해져온다. 돌이 깔린 산에 향나무는 뿌리를 내리지 못할 것이다.

어떤 이들은 향적봉의 이름 내력을 주목에서 찾는다. 향적봉에서 중봉으로 이어지는 주목과 구상나무 군락지에서는 주목에 이름표까지 달아 보호한다고 하지만 사람들의 발길과 손길을 견뎌내기 어려워 보인다. 깊은 산에 우뚝 솟아 거창의 진산으로 존중받던 향적봉은 이제 짧은 치마와 하이힐로도 쉽게 오르는 산이 되었다.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도 어렵지 않게 향적봉을 올라 빼어난 덕유 주능선의 산세와 철쭉의 여린 잎에 감탄한다. 곤돌라 덕분이다. 산에 케이블카를 놓아야 한다는 이들의 이유이기도 하지만 산은 아파 보인다.

덕유산 곤돌라를 이용하는 이들은 겨울철 스키 시즌이 아니면 평일 하루 200~300명을 넘지 않는다고 한다. 그 200~300명을 위해 치러야 하는 대가는 너무 크다. 지리산에서 만난 한 공무원은 말했다. “천왕봉까지 케이블카가 놓이면 산 아래 중산리 민박집들은 모두 문을 닫게 될 것이다.” 숙박 손님이 사라지고 식당 영업도 안 될 것이 뻔하다는 거였다.

‘사람 사는 세상’을 꿈꾸던 그가 떠난 날 덕유산의 민심도 흉흉했다. 덕유산이 대덕산으로 백두대간의 길을 넘기는 빼재는 길을 넓히는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깎아세운 절벽처럼 산을 파내고 길을 낼 때 새로운 추풍령이 되어 마을을 번성시키자고 새로 붙인 이름이 신풍령이다. 한때 거창에서 무주로 잇는 빼재 길은 번성하는 듯했다. 그러나 번듯하게 들어섰던 카페는 점집으로 바뀌었고 여관과 식당, 휴게소는 문을 닫았다. 불과 10년 만의 일이다. 그럼에도 길을 넓힌다.

» 신백두대간기행 ⑥ 육십령~빼재 (※ 이미지를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가질 수 있는 것까지 가지지 않은 그들

속도는 더 이상 발전을 상징하지 않는다. <잘살아보세> 노래가 유행가보다 더 많이 불리던 시절이 남긴 것은 무엇일까? ‘사람 사는 세상’을 꿈꾸던 그가 벌써 그립다. 자족의 삶을 보여주었던 허의준 할아버지가 그립다. 허 할아버지는 산을 정복한다는 표현조차도 쓰면 안 된다고 했다. 사람 사는 세상을 꿈꾸던 그는 가질 수 있는 것까지 가지지 않았다. 가진 것이 너무 많아 배낭은 무겁고 배낭이 무거워 몸이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