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스님의 삶과 수행① | 고불총림 백양사 방장 수산지종 스님]
“생활 속의 참선? 마음 놓고 쉬는 겁니다”
신심과 공심, 화합, 정진 강조 … 소욕지족 당부하며 후학 양성에 매진
유철주 jayu@buddhism.or.kr
전국에 ‘눈폭탄’이 쏟아져도 하늘은 간간이 차갑지 않은 햇볕을 내려 사람들의 마음을 누그러뜨린다. 큰스님들의 법문도 이와 다르지 않다. 팍팍하기만 한 세상살이지만 그래도 불자들이 힘을 내 정진할 수 있는 것은 선지식(善知識)들의감로수 같은 말씀과 가르침 덕분일 것이다.
수산지종(壽山知宗) 대종사. 한국 현대 불교의 대선사 서옹 스님의 뒤를 이어 2004년부터 고불총림(古佛叢林) 방장(方丈)으로 불갑사(佛甲寺)에서 후학들을 제접(提接·일깨우고 가르침)하고 있다. 스님은 1922년생으로 올해 89세다.
어떤 계기로 출가를 결심하셨습니까?
“4남매였는데 어려서 큰형님이 갑자기 돌아가셨고, 아버지도 형의 죽음으로 화병을 얻어 제가 14세 때 돌아가셨습니다. 3년상을 모셨습니다. 그런데 탈상하자마자 어머니마저 돌아가셔서 다시 3년상을 치렀습니다. 인생무상(人生無常)이더군요. 자식이 먼저 죽자 비탄에 빠져 돌아가신 부모님을 보면서 세상에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출가를 결심하고 집에서 가까운 백양사로 갔습니다.”
이때가 1940년, 스님의 나이 19세였다.
법안 스님의 위패상좌가 되셨는데요.
“저를 상좌로 받아줄 마땅한 스승이 없자 만암 스님께서 일찍 입적해버린 당신의 상좌 법안 스님의 위패상좌로 은맥(恩脈)을 정해주셨습니다. 스승이 없다 보니 저는 명부전, 극락전, 대웅전 지전(持殿·불전이나 법당에서 예불을 맡은 사람) 소임을 보면서 보시로 나오는 돈 2원과 곡식을 받아 사중에 양식을 내고 학비를 삼아 어렵게 공부했습니다. 지전도 온갖 잡일을 해야 해서 공부할 틈을 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법안 스님에 대해 말씀해주시지요.
“법안 스님은 20년간 목사로 사신 분인데 불교를 박살내러 왔다가 만암 스님께 감화를 받아 출가했다고 합니다. 인연이지요. 당시로는 드물게 미국에서 신학대학을 졸업한 분으로 출가 후 강원에서 스님들에게 영어와 신학문을 가르쳤습니다.”
요절한 제자에 대한 애틋함 때문이었겠지만, 그나마 상좌의 상좌를 뒀으니 만암 스님은 든든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수산 스님은 만암 스님의 상좌나 다름없었다.
만암 스님을 오랜 기간 모셨습니다.
“만암 스님은 11세 때 백양사로 출가했습니다. 당시 백양사에는 극락전과 요사채뿐이었다고 합니다. 17세에 ‘초발심자경문’을 읽으면서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하셨습니다. 스님은 공부가 뛰어나 당대의 대강백인 환응 탄영 스님, 석전 정호 스님, 경운 원기 스님 등으로부터 경전을 배우고 25세인 1900년에 백양사 운문암에서 환응 스님으로부터 전강을 받았습니다. 행정에도 탁월해 300석에 불과하던 백양사의 재산을 700석까지 불렸습니다.”
수산 스님의 스승 만암 스님은 계정혜 삼학(三學)을 갖춘 분으로 평가받는다. 당시 불교계에서 “만암 스님 모시고 백양사 강원에서 공부했다고 하면 다른 본사에서는 국수 삶아주고 떡 해줬을 정도”였다고.
만암 스님이 평소 강조한 것이 있습니까?
“중노릇 잘하려면 공부 열심히 해야 한다, 신심(信心)과 공심(公心)으로 살아라, 탐진치(탐욕·화·어리석음)의 삼독심(三毒心)을 경계하라, 삼보정재를 함부로 쓰지 말라는 말씀을 늘 하셨지요. 무엇보다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하는 것이라고 당부하셨습니다.”
덧붙여 스승의 일화를 하나 소개했다. 하루는 만암 스님이 수산 스님을 불러 “중 승(僧)자를 쓸 줄 아느냐?”고 물었다. 수산 스님은 “사람 인(人)변에 일찍 증(曾) 아닙니까?”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만암 스님은 “나이도 어린놈이 세속의 습(習)이 아직 남아 있구나! 어찌 사람도 안 된 것이 중이 될 수 있겠느냐?”라고 호통쳤다. 사람이 먼저 돼야 한다는 말씀이었다. 만암 스님은 “모든 사람을 이롭게 하는 것이 부처님 법이다. 사람이 되고, 또 스스로의 주인이 돼야 한다. 사람도 못된 것들이 중을 해 세상이 시끄럽다”고 질책했다고 한다.
만암 스님이 내리신 화두가 궁금합니다.
“제가 강원을 마치자 만암 스님이 백양사 산내 암자인 청량원(淸凉院)에 머물게 하고 ‘다 필요 없다. 죽었다 생각하고 이뭣고(是甚?) 화두를 참구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뭣고’는 말 그대로 이놈이 어떤 놈이냐, 송장을 끌고 다니는 이놈이 어떤 놈이냐, 모든 것의 주체인 이놈이 어떤 놈이냐를 참구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어떤 물건인지에 대한 의심을 가득 품지 않으면 화두가 잘 안 들릴 수 있습니다. 제게는 ‘이뭣고’가 딱 걸렸습니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정진을 계속하셨지요?
“화두를 받아 1945년 백양사 운문암선원에서 인곡 스님을 조실로, 고암 스님을 선원장으로 모시고 비룡 스님 등과 함께 동안거를 했고, 1946년 하안거는 정혜사 만공 스님 회상에서 보냈습니다. 그해 동안거부터 1948년 동안거까지는 인곡 스님을 조실로 모시고 다보사에서 수행했습니다. 이때 상기(上氣)가 올라와 머리가 익어버릴 지경이 되자 인곡 스님이 ‘화두를 내려놓아라’고 하셨으나, 놓아지지 않아 그대로 화두일념에 맡겨두고 지내던 중에 도리가 밝아져 ‘수중일월(袖中日月), 장악건곤(掌握乾坤) 즉 옷소매 속에 해와 달을 거두고, 손아귀에 하늘과 땅을 모아 쥐었네’라고 했습니다. 그 후 목포 정혜원에서 만암 스님을 조실로, 서옹 스님을 선원장으로 모시고 주지 소임을 보면서 안거를 했고, 1953년 가을에 만암 스님에게 입실(入室)해 전법게를 받았습니다.”
이때 만암 스님으로부터 수산(壽山)이라는 법호를 받았다. 만암 스님이 수산 스님에게 준 전법게는 ‘고혜무견정(高侯無見頂) 사해부증간(四海不曾間) 염진언궁처(念盡言窮處) 외연일수산(巍然一壽山) 즉 얼마나 높은지 정상이 안 보이고, 사해가 일찍이 그 틈이 없네. 생각이 다하고 말이 끊어진 곳에, 외람되이 한 수산만 우뚝 나타났네’다. 수산 스님이 경지에 이르렀다고 보는 만암 스님의 인가(印可)였다. 전법게는 스승이 제자에게 법을 전하는 것을 가리킨다.
수산 스님은 이후에도 수행과 포교를 소홀히 하지 말라는 만암 스님의 말씀에 따라 1949년부터 목포 정혜원, 완도 신흥사, 부안 개암사, 태백 흥복사 등의 주지 소임을 맡아 가람수호에 진력했다. 1966~67년, 1969~71년, 1973~75년 세 번에 걸쳐 백양사 주지 소임을 맡아보았다. 또 소임이 끝나면 미련 없이 걸망을 지고 운수행각(탁발승으로 수행)을 떠나기도 했다.
스승에 대한 수산 스님의 존경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20여 년 스님을 모시고 있는 불갑사 주지 만당 스님이 이런 일화를 하나 들려줬다. 하루는 만당 스님이 “도대체 어떤 분이기에 그렇게 만암 스님 말씀만 하십니까?”라고 물었다. 수산 스님이 답해주겠다고 가까이 오라고 했다. 그러고는 말씀 대신 뺨을 철퍼덕 후려쳤다. 만당 스님이 “이것이 전부입니까?” 하고 다시 여쭙자, 스님은 다시 뺨을 후려쳤다. 그런데 만당 스님은 아픔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그 대신 스승의 스승에 대해 다시 알게 됐다.
서옹 스님과도 함께 수행을 하셨습니다. 어떤 분이었나요?
“만암 스님은 수제자인 서옹 스님을 당신의 보물이라고 생각해서 행여 어디 아프지 않을까 걱정하곤 했습니다. 서옹 스님은 1939년에 일본 교토에 있는 임제대학에 입학했습니다. 1940년 최범술 스님이 여러 한국 스님을 이끌고 도쿄를 거쳐 교토에 갔을 때 일본 스님들이 서옹 스님을 가리키며 ‘조선에는 저렇게 공부 열심히 하는 스님만 있느냐?’고 물어볼 정도로 공부를 잘했다고 해요. 스님은 한국에 와서 저와 같이 만암 스님을 모시고 공부했고 나중에 종정도 하시고, 또 고불총림을 복원해 참사람운동을 벌이며 전통 간화선의 세계화를 이끌었습니다.”
서옹 스님과 수산 스님은 만암 스님의 애제자였다. 서옹 스님은 공부를 계속해 현대 한국불교사에 한 획을 그었고, 수산 스님 역시 스러져가던 호남불교를 중흥시키기 위해 수많은 가람을 일신시켰다. 백양사를 잘 아는 사람들은 서옹 스님과 수산 스님을 ‘큰아들과 작은아들’에 비유한다. 공부 잘하는 첫째는 계속 공부를 시키고, 착하고 성실한 둘째는 집안을 보살피게 하는 것에서 그렇다.
만암 스님, 서옹 스님 등을 거쳐 이어져온 고불총림의 가풍은 무엇인가요?
“오직 모든 스님이 공부 열심히 해서 견성성불(見性成佛)하게 하는 것이 근본이고 가풍입니다. 마음자리를 찾는 것이 부처 되는 길입니다. 석가여래의 법을 마하가섭을 비롯한 33명의 조사스님이 계승했듯 우리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올곧게 잇고 실천해야 합니다. 그것이 총림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임무일 것입니다.”
고불총림은 돈오돈수(頓悟頓修)를 중심으로 수행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돈오돈수와 돈오점수(頓悟漸修)를 어떻게 보시는지요?
“돈오(頓悟) 후에는 점수할 것이 없습니다. 지극한 수행 끝에 문득 깨닫는 것이 돈오이고 더 닦을 것이 없는 것입니다. 확철대오(廓撤大悟) 이후에는 돈수이지요. 돈오돈수는 의식과 무의식을 투과해 깨달은 것입니다. 본래 망상이 없는 자리를 찾은 것이지요. 역대 조사스님들은 돈수의 경지에서 한 것입니다. 점수는 조사선과는 다른 부분이 있습니다.”
공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화두를 들고 공부하는 간화선(看話禪)은 생사를 해탈하기 위해 하는 공부입니다. 사람은 태어나서 ‘참자기’를 알고 죽어야 합니다. ‘자신’도 모르고 죽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습니다. 모든 것을 걸고 공부해야 합니다. 먹고 노는 일은 모두 잊어버리고 화두에만 매달려야 합니다. 화두 속에서 살다가 화두 속에서 죽어야지요.”
1월22일은 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룬 성도재일(成道齋日)입니다. 부처님은 무엇을 깨달으셨습니까?
“그 자리를 깨쳤습니다.”
잠시 이해가 안 돼 “네?”라고 다시 여쭙자 수산 스님은 말씀을 이었다. “그대가 묻고 내가 답하는 그 자리를 깨쳤습니다.” 한마디 화두를 던진 스님은 차를 한 잔 마신다. 오묘한 말씀을 알아듣기에는 너무나 부족한 중생도 어쩔 수 없이 차를 한 잔 따라 마셨다.
수행에 목말라하는 재가자가 많이 늘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수행을 잘할 수 있을까요?
“안심입명(安心立命)을 위해 요즘 사람은 수행을 많이 하려 합니다. 좋은 현상입니다. 세상 문명의 혼란으로 제정신으로 살기가 어렵습니다. 경계에 휘둘리다 죽습니다. 사람이 다 사람은 아닙니다. 사람다워야 사람입니다. 자기 입만 채우려 하지 말고 어떤 것이 인간의 도리인지 잘 살펴야 합니다. 불법(佛法)을 만났거든 모든 것을 만족할 줄 알고 살아야 합니다. 만족하지 못하면 늘 불안합니다. 참선이든, 염불이든 힘이 되는 만큼 열심히 해야 합니다. 욕심을 가지고 해서는 안 됩니다. 마음 놓고 쉬는 것이 참선입니다. 번뇌망상을 쉬고 화두를 들면 됩니다.”
출가와 수행, 후학 지도 등을 주제로 말씀을 듣다 보니 벌써 몇 시간이 흘렀다. 열기를 식히려 문을 열고 염화실 마당을 보니 눈이 내리고 있었다. “눈도 오는데, 차나 한 잔 더 하고 가라”며 스님은 시자스님에게 차를 더 내리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스님은 ‘차(茶)의 대가’이기도 하다. 생각난 김에 스님께 차와 수행에 대해 한 말씀 더 여쭈었다.
“다선일여(茶禪一如)라고 했습니다. 차는 예전부터 공부하는 스님들에게 필수품이었어요. 작설(雀舌)은 피를 깨끗이 해서 정신도 맑게 합니다. 참선 공부는 정신이 혼탁하면 안 되기 때문에 수좌스님들은 늘 차를 가까이 뒀습니다. 또 차에는 잡념이나 그 어떤 것도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해서 독신남녀가 차를 만들었습니다. 혹여나 순수하지 못한 생각이 차에 들어갈 것을 우려해서입니다. 그렇게 여러 과정을 거쳐 절에서 차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만들 때는 물론 마시는 순간에도 깨끗한 마음으로 차를 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스님은 여러 차례 강조했다. 스님은 마치 화두를 들 듯, 차 한 잔을 마실 때도 모든 정성을 다했다.
뜨거운 차를 몇 잔 마시고 나니 눈도 그치고 이내 해도 모습을 드러냈다. 구름에 가려 있던 해가 다시 나와 눈을 녹이고 세상에 온기를 불어넣듯 무명(無明)을 걷어내지 못한 중생에게 선지식의 할(喝)과 방(棒)은 영원한 자유를 위해 정진하고 또 정진하라고 채찍질을 하고 있었다.
유철주 씨는 ‘현대불교신문’ 기자를 거쳐 현재 조계종 홍보팀에 근무하고 있으며 마음공부를 위해 전국의 선지식을 찾아다니고 있다.
384년 창건 … 1975년부터 불사, 25동 전각 갖춰
고려시대 각진국사가 주석하던 14세기 전후에는 상주 대중만 1000여 명, 40여 동의 전각에 500여 칸의 대가람을 이뤘다고 전해진다. 불교가 가장 어려웠던 시기인 조선시대에도 적게는 200여 명, 많게는 300여 스님이 정진했다.
6·25전쟁을 전후로 쇄락했던 불갑사가 오늘날의 위상을 다시 갖추기 시작한 것은 1975년 수산 스님이 오면서부터다. 수산 스님은 옛 자료를 하나하나 모아 허물어져가던 전각의 보수 불사를 시작했고, 20여 년 전 고시공부를 위해 이곳에 왔던 만당 스님이 수산 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후, 본격적으로 중창 불사를 진행해 오늘에 이르렀다.
만당 스님은 불갑사 사적기(史蹟記)를 바탕으로 16동의 전각을 복원하고, 9동의 전각을 보수해 현재 불갑사에는 25동의 전각이 있다. 수산 스님은 “만당 스님이 참 일을 잘한다”며 “만암 스님 뜻에 따라 젊었을 때는 폐허에 가까웠던 절들을 다니며 다시 세우곤 했는데, 말년에 만당 스님을 만나 이렇게 편안하게 산다”며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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