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예의 장

택견

醉月 2014. 4. 15. 01:30

▲ 세계택견본부(총사 이용복)
무예신문이 무예계의 정론지로 자리를 굳히고 있는 사실에 대해 존심을 표한다. 더구나 꽤 시간 동안 만난을 헤치고 끈질기게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려고 노력해온 무예신문의 의연한 몸맨두리야말로 자기망실, 자기비하를 자초하고 있는 무예계에 소리 없는 함성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무예신문에 ‘택견’을 소개하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한다. 연전에 택견 기사가 연재된 사실이 있지만 또 다른 각도에서 택견을 조명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으리라 믿고, 지면을 할애해준 무예신문에 감사드린다. 또한 지면을 통해 강호의 독자 여러분과 만나는 것은 필자에게 도락(道樂)의 기쁨이다.

택견에는 현재 정통파가 몇 갈래 있고 비 정통, 또는 완전 가짜 택견도 있음이 엄연한 사실이다. 송덕기(1893~1987), 신한승(1928~1987)을 직통으로 승계한 택견을 정통파라고 칭하고, 그 외에 택견은 모두 사이비거나 가짜로 보면 거의 틀림이 없다. 그런데 이른바 정통파 중에서도 공개된 이론이 뚜렷하고 택견의 현대화를 주도하여 택견 전체 규모의 7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단체를 필자가 이끌고 있다.

이런 필자가 얼마전까지만 해도 사이비니 비 정통이니 하는 무고한 비난을 받아왔다. 1987년 송덕기, 신한승 두 분 스승의 타계 이후 격발된 택견의 정통성 논쟁은 사실 상 앞서 나가는 사람의 발목을 뒤쳐진 사람이 잡아당기는 반칙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이 같은 비겁한 행위로 생산된 음해성 말 들을 일반 사람들은 몰라서 믿는 수가 있고, 또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파오는 사람들의 공연한 시기심에 의해 확대 재생산되기도 했다. 이와 같은 음해성 루머도 2007년 2월 택견이 체육회가맹에 성공하자 저절로 사그러졌다. 그럼에도 글을 연재하기 전에 미리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직은 필자의 정론(正論)이 이미 오류로 밝혀져 있는 기존 주장을 대치하지 못하고 있고, 또한 우리사회에 번식되어 있는 왜식, 중국식 무술상식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으로 이 글을 신뢰 없이 읽는다면 제대로 택견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는 우려 때문에 약간의 광고를 해두려는 것이다.

현재 택견에는 대한체육회 정 가맹 경기단체인 (사)대한택견연맹과 국민생활체육협의회 정 가맹단체인 국민생활체육전국택견연합회, 그리고 (재) 세계택견본부가 있다. 전국은 물론 해외 20여 개국의 택견전수를 이 세 단체가 총괄하는 법적지위를 가지고 있다. 이 세 단체를 통털어 ‘대한택견’이라고 부른다. 이 세 단체는 지난 1983년 이래 25년 동안 필자가 만들고, 운영해 왔고, 혼자 수장을 독식(^^)하고 있다.

충주에 본부를 두고 있는 (사)한국전통택견협회는 문화재 택견을 관장하고 있다. 회장이 공석인 이 단체는 이시종의원이 후견인이며 실무 책임자인 박만엽 총관장이 이끌고 있다. 작고하신 신한승 선생이 만든 단체인데 10여 년 전에 여기서 갈려나간 단체가 (사)택견원형보존협회이다. 총재가 정우택 충북도지사이다. 그런데 이 두 단체와 별개로 현 택견보유자인 정경화씨가 ‘독립기관’을 자처하고 있어서 다소 복잡한 내부사정을 가지고 있다. 이 두 단체와 독립기관(?)을 묶어서 이른바 ‘충주택견’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또 하나, 송덕기 선생에게 배운 사람들로 구성된 (사)결련택견협회가 있다. 회장이 도기현씨이고 이사장이 박진 국회의원이다. 최근 장안의 화제가 되고 있는 인사동의 택견배틀전을 주최하고 있다. 이른바 ‘서울택견’이다.

여기서 논할 가치도 없는 기타 유사택견을 빼면 현대택견은 필자와 (정경화/박만엽), 그리고 도기현 등 세 파로 분류할 수가 있다. 그런데 문제는 세 파가 모두 송덕기를 계승하였음에도 택견에 대한 해석이 3파 3색으로 제각각 다르다는 것이다. 도기현씨는 송덕기의 직전제자라는 점을 들어 오리지널 택견은 자기가 하는 형태라고 자부하고 있다. 도기현씨는 충주택견이 비록 문화재로 지정되긴 했지만 1980년대에 재구성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필자도 이에 동조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충주택견에서는 문화재 당국이 법으로 지정한 것이 원형이니 그런 말은 쓸데없는 소리라고 일축하는 입장이다.

특히 현 보유자인 정경화씨는 자신이 표현 기능이 오리지널이라고 강변하며 인간문화재의 권위로 대응하고 있다. 필자는 송덕기. 신한승 두 분으로부터 직접 전수를 받은 사람이다. 이렇게 말하면 며칠을 했니 몇 달을 했니 하는 고정 음해 레퍼토리가 있지만, 사실 두 분 기예를 체득하였기에 상대적으로 택견을 가장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것은 틀림없다. 필자는 어차피 택견의 모든 것을 다 수용하고 있다고 할 수 없는 송덕기. 신한승 두 분의 기예를 맹목적으로 따라 하기보다는 본질적인 원리를 이해하여 논리적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

이렇게 택견계의 저간의 사정과, 그리고 오류투성이인 한국무예계의 배경을 먼저 이해하지 않고서는 앞으로 이 지면에 전개 될 내용은 기존의 상식과 충돌하여 파열음이 나올 수도 있다고 생각된다.

 

나는 6남 4녀 중 일곱 번째로 태어났는데 유도, 프로레슬링, 권투, 합기도 등 격투기를 즐겨하는 다섯 형들을 따라다닌 덕택에 일찍부터 무술을 배울 수 있었다. 나는 형들끼리, 또는 형 친구들이 각자 자기가 하는 무술이나 운동이 제일 세다고 서로 핏대를 세우며 다투는 것을 많이 보고 들었다.

이웃에 사는 셋째 형의 친구가 당시 당수 초단이었는데 유도유단자인 셋째형과 서로 제가 하는 무술이 최고라고 우겼다. 내 형은 유도는 일단 상대를 잡았다하면 업어치기로 띄워서 태질을 쳐서 죽인다고 자랑을 하였고, 형 친구는 당수는 유도가 잡아서 공중에 띄우면 날아가는 순간 옆차기 한방으로 골로 보낼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떨어지면서 공중재비로 살짝 내려앉으면 된다고 큰 소리를 쳤다. 어린 마음에 그런 기술이 맘에 들었다.

나는 최강의 당수를 배우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 후 당수가 권법으로, 태수도로 변하더니 1965년 여름에 태권도가 되었다. 나는 이 무술을 하면서 형들의 이야기가 뻥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기까지 20년을 소모하였다. 나는 이종무술 유단자들과 대련(對鍊)하는 모임을 만들어서 어느 무술이 한방에 상대를 골로 보내는데 더 나은가를 연구했다. 또 스트리트 파이터로서 실습도 꽤나 했다.

나는 그 한방 때문에 특히 격파연습을 많이 했다. 그러나 나는 체격조건이 불리하지 않았지만 체력이 절정기였던 30대 초반까지 빨간 벽돌 2장, 기와 20장 이상을 깨어보지 못하였다. 나는 사람 손으로 잡고 있는 벽돌을 깨뜨리는, 소위 벽돌 공중격파를 즐겨했다. 이것은 스피드와 힘, 그리고 끊어 치는 기술이 조화를 이루어야 가능한 좀 고급기술이다. 컨디션이 나쁘거나 벽돌이 너무 단단하면 벽돌 대신 주먹이 깨지고 자존심도 망가진다. 그래서 언제나 벽돌 한 장 쯤은 공중에서 박살내는 진정한 위력을 갖고 싶었다. 그 마음만큼 맹렬하게 몸닦달을 했다. 그런데 우연히 건축공사장에서 벽돌공이 작은 망치로 가볍게 톡톡 쳐서 그 단단한 벽돌을 절반, 또는 3분의 1씩 쉽게, 너무나 쉽게 깨뜨리는 것을 보았다.

한참을 구경한 나는 작은 망치하나에 미치지 못하는 내 주먹의 실체를 깨달았다. 그리고 20여년을 쌔(혀)빠지게 주먹단련을 한 것이 너무나 허망하여 눈물이 다 나왔다. 또 사범이라는 자부심도 망치에 깨지는 벽돌처럼 여지없이 동강이 났으니 울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이후 나는 인간의 유한한 육체를 초월하는 무술을 찾아 다녔다.

공중에 떠다니는 이인이 있다고 해서 불원천리하고 찾아갔더니 공중부양은 그 사람 마음속의 헛것이었다. 어느 암자의 스님이 바위에 손자국을 찍어 두었다고 해서 찾아 갔더니 이것은 정으로 쫒은 가짜였다. 장풍으로 사람을 날려버린다는 도사를 만났더니 내 툭 불거진 주먹을 보고는 제가 먼저 날아가 버렸다.

그러다가 택견을 만났다. 송덕기라는 90대 노인이 보여주는 동작이었음에도 택견의 운동 원리는 참으로 절묘했다. 죽으라고 무술을 연마한 내 눈에 대뜸 그렇게 보였다. 그러나 택견을 배우면서 굼실대고, 능청대고, 우쭐대며, 으스대는 택견의 동작으로는 사람을 단방에 골로 보내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았다. 이른바 일격필살(一擊必殺)기가 아니었다. 실망스러웠다. 아니 절망을 느꼈다

그러나 한 가지, 내 마음을 꽉 붙든 것은 누천년 동안 우리 조상이 이를 숭상하고 보전 발전시켜 왔을 때는 반드시 어떤 이로움이 있었을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이었다. 꽤 긴 시간을 고심하였고, 절망하지 않기 위해 고통과 아픔을 겪어야 했다.

어느 날. 열 살짜리 꼬마 제자가 물었다. 그 물음은 “이 세계에서 제일 강한 무술이 무엇인가요?”였다.
내가 이 꼬마 제자 나이 때부터 수십 년 동안 해답을 찾아다녔던 그 물음이었다.
그 꼬마가 기대한 정답은 당연히 ‘택견’이었을 것이 분명했다. 나도 그렇게 대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무술은 택견이다.” 이렇게.
그러나 나는 20년 이상 피나는 연마를 한 태권도 사범의 주먹이 벽돌공의 작은 망치에 비해 그 위력이 형편없다는 것을 아는 스승으로서, 정직해야 했다. 그래서 말했다.
“맨주먹보다 망치가 강하다.” 그랬더니 녀석은 “망치보다는 긴 칼이 더 쎄요.” 라고 했다.

그렇다. 닛뽄도를 든 검도 유단자라고 해도 M-16자동소총 앞에서 꼬리를 안 내리고 어쩌랴. 그런 자동화기도 8mm전차포 한방이면 끝이다. 그런데 우리가 사이버게임처럼 TV를 통해 보았던 이라크전쟁의 미군 미사일의 위력은? 그 미사일에 중성자탄 하나를 장착한다면, 어떤 무술이 세계 최강일까?

모르기는 하되 꼬마 제자는 맨몸으로 치고받는 무술과 연장을 들고 하는 무술을 두고 어떤 게 더 ‘쎈가’ 비교하는 것이 어리석다는 것을 간단히 이해한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나는 내 몸을 살인병기로 만들려고 했다. 적어도 수족을 창과 칼과 도끼, 망치처럼 만들려고 했고, 무술이 그것을 가능하게 해줄 줄 알았다.

인류(人類)는 도구를 사용할 줄 아는 유인원의 한 종속이 수백만 년 동안 진화를 거듭한 끝에 새로 만들어 진 종(種)이다. 따라서 인류로 분류되기 이전부터 상당히 발달한 도구사용법, 즉 무술을 숙달하고 있었다. 인류는 먹잇감인 동물을 사냥하고, 사냥할 때는 맹수와 경합을 해야 했다.

또 보다 살기 좋은 터를 빼앗고, 또, 지키기 위해 인류들끼리 싸웠다. 상대를 죽여야 하는 사냥과 전투에서 무기는 절대적인 것이다. 무기의 효용성을 체험으로 알고 있는 인류는 보다 더 강력한 무기를 발명하고 그 사용법을 발달시켰다.

그 결과 인류의 개체 수는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서식역(棲息域)은 광범위해졌다. 사회적 동물인 인류는 분쟁의 해결방식으로서, 또, 집단내의 서열을 정하는 경쟁방법으로서 맨몸으로 싸우는 방식을 개발했다. 집단의 구성원 끼리 경쟁하면서 무기를 사용한다면 서로 다치거나 죽는다. 그러면 그 집단은 노동력과 전투력이 소실되어 자멸한다. 그래서 무기를 놓고 싸우게 되었다. 무기를 놓았다 하더라도 급소를 치고, 관절을 꺾고, 내장을 파열시키게 되면 결과는 역시 망하는 것이다.

무기를 사용 않는 것부터 이런저런 것을 자꾸 금지하였다. 규칙이 생기게 된 것이다. 규칙을 아래 싸우는 것을 경기라는 현대적 개념으로 이해해도 별문제 없을 터이다. 인류가 맨몸으로 싸우는 기술을 만들고 발달시킨 것은 살상이 목적이 아니었던 것이다. 가해성의 최소화를 담보한 가장 격렬한 경쟁방식, 즉 격투경기는 경기자를 자극하고 충동하여 자기향상의 에너지를 분발시킨다. 그것은 종을 보전하고 번성시키려는 본능이자 모든 생명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지혜이다. 우리조상도 예외 없이 혈통적 소질과 정서, 그리고 삶의 환경과 조건에 따라 다양한 경쟁방식을 발달시켜 왔다.

그것을 놀이라 하든, 경기라고 하든, 무술, 무예, 무도라고 하든, 아무래도 상관이 없다. 까마득한 옛날부터 택견은 그렇게 시작되었던 것이다.
아프리카의 사바나에는 귀가 박쥐처럼 크고 둥글며, 노란색, 검은색, 흰색, 갈색이 뒤섞여 있는 털과 털 빠진 사이로 까만 피부가 드러나서 더러워 보이고 못생긴 늑대가 있다.

“얼룩늑대(painted wolf)”라는 뜻을 가진 리카온(Lycos pickups)이다. 놈들은 작게는 5~7마리에서 심지어 6~70마리가 떼를 지어서 산다. 이놈들은 대개 새끼를 키울 때를 제외하고는 영양. 임할라, 톰슨가젤, 누, 토피영양, 곱 따위를 사냥하며 사하라사막 이남의 이곳저곳을 휘젓고 다닌다. 리카온은 사냥을 할 때 가장 힘 센 대장이 선두에 서고 부채꼴로 진형을 짠 수컷들이 몸을 낮추고 목표물에 조용히 접근을 한다. 암컷과 새끼들은 몸을 숨기며 뒤에 따라 온다. 일정한 거리에 이르면 대장을 필두로 일제히 달려든다. 시속 60km의 속도로 달리는 리카온이지만 영양이나 가젤은 그보다 빨라서 단박에 잡기가 어렵다. 그러나 리카온은 10km를 계속 질주할 수 있다. 사냥감은 리카온 무리의 끊질 긴 추적에 결국 지쳐서 잡히고 만다. 그래서 못생긴 리카온 녀석들은 아프리카 최고의 사냥꾼으로 군림하고 있다.

리카온 무리는 사냥을 하기 전에 "모임(meet)"이라고 하는 독특한 의식을 한다. 이 모임에서 리카온들은 무리를 지어 원을 그리며 빙빙 돌다가 사냥을 할 수 없는 약한 놈에게 몇 놈이 달려들어 물어 죽이거나 무리에서 쫓아낸다. 집단적이고 조직적인 사냥을 하는 리카온에게는 무리 중 어느 하나가 사냥에서 요구되는 민첩성과 지구력이 부족하여 포위망이 뚫리게 되면 사냥감을 놓치게 되니 이를 미연에 방지하자는 것일 터이다.

그리고 이 모임에서 무리를 이끌 대장을 선출하기도 한다. 무리에서 힘깨나 쓴다는 놈끼리 하는 싸움에서는 서로 물어뜯는 피 튀기는 격전을 하되 물어죽이거나 치명적인 상해를 가하지 않을뿐더러 패한 놈을 무리에서 쫒아내지도 않는다. 힘센 수컷들끼리 끼리 싸워서 서로 죽이거나 상해를 입히거나 축출을 하면 사냥과 전투능력을 약화시키는 것이니 이를 피하는 것이다. 그리고 후미에서 어미의 보호를 받는 새끼들이 위험한 장거리 사냥에 참가하는 것도 태어날 때부터 무리에 대한 역할 훈련을 받는 것이다. 무식하게 생겨 먹은 리카온이지만 협동생활체제가 인류 다음 순위를 차지할 만큼 매우 발달되어 있다.

사회적 동물로 단연 으뜸 자리에 있는 인류는 사냥이나 전투를 할 때는 무기를 사용하지만 집단 내의 서열경쟁을 할 때는 무기를 내려놓고 맨몸으로 격투를 한다. 집단의 노동력과 전투력 약화를 방지하자는 것이니 리카온이나 유사한 행위이다. 그리고 아이들이 맨몸으로 싸우는 장난을 하게 하는 것이나, 또 부모가 자식들에게 이런 능력을 학습시키는 것도 리카온의 새끼 훈련시키기와 본질적으로 같은 행위이다.

사회적 동물들의 이러한 경쟁행위는 평화의 상징처럼 보이는 사슴도 마찬가지이다. 풀만 뜯어 먹고살면 됨으로 다른 동물과 싸울 일도 없는 이 동물들도 교미기가 되면 수컷들끼리 격렬한 싸움을 한다. 이놈들의 싸움이란 큰 뿔로 서로 치고 받는 방식이다. 이 싸움은 한 놈이 일방적으로 밀려나거나, 싸움을 포기하면 끝난다. 승부가 결정되면 더 이상 싸우지 않고, 다음 교미기 까지 평화를 유지한다. 대개 1년 정도의 휴전기간 동안 이긴 놈이나 진 놈, 또 도전의사가 있는 수컷들은 다음 대전을 위해 먹이를 많이 먹고 열심히 뛰어다니면서 힘을 기른다. 이런 싸움에서는 뿔이 큰 놈이 이기는 것은 당연하다. 뿔이 커지면 몸집도 커지고 힘도 세지기 마련이다. 수사슴은 단 하나 이 행위를 위해 뿔을 달고 있고 계속 뿔을 키우는데 진력한다. 그 결과 멋지고 우아한 수사슴의 뿔이 된 것이다. 비록 맹수에 쫒기다가 그 뿔이 나뭇가지에 걸려 목숨을 잃는다 해도 그 뿔은 자랑스러운 것이다. 그것은 수사슴끼리의 경쟁에서 승리한 가장 강한 한 놈만이 열대여섯 마리의 암컷과 교미를 할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우성의 유전인자로 후손을 만들어 종(種)을 번영시키고자 하는 본능적 지혜인 것이다.

원시인 사회에서도 맨몸 격투기로 경쟁하여 이긴 사람에게는 리카온이나 수사슴과 유사한 특권이 주어졌다. 따지고 보면 다양한 경쟁과 그에 따르는 대가가 주어지는 현대 사회도 별반 다를 것이 없다. 그러고 보면 원시시대나 지금이나 생명의 본질적 활동양상은 동일한 지향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옛 사람은 사람끼리 맨몸으로 격투(格鬪)하는 행위를 일컬어 “각력(角力=뿔 힘을 쓰다.)”이라고 하였으니 수천 년 전에는 맨몸 격투에 대한 인식이 분명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인지가 발달했다고 하는 현대 사람들은 오히려 맨몸으로 싸우는 무술과 무기를 사용하는 무술의 구별을 제대로 못하고 있는 것이다.

맨몸무예는 살상이 목적이 아니다. 일정한 제약 아래 싸우는 것이다. 그 행위를 통하여 싸우는 상호간에 자극과 충동을 주고받아 각자가 자기향상을 위해 노력하도록 하는 것이다. 맨몸무예는 내부경쟁을 통해 집단과 사회를 발전시키고 인류를 번영하게 하려는 기반문화 인 것이다. 이러한 문화유형으로 우리 조상들이 발달시켜온 택견은 “구성원 개개인의 발전을 총합하여 집단과 사회의 융성을 도모하는 보편성의 원리”를 지니고 전승되어 온 것이다.

“피를 갈망하는 신은 우리 편에 있다.” 아즈텍 용사들은 더 많은 적을 죽이고 산 제물을 올릴 것을 신에게 약속하며 신에게 피가 줄줄 흐르는 살아 있는 인간 제물을 바친다.

얼마 전 미국 CNN 방송이 보도한 멕시코의 아즈텍과 마야의 고대의식을 소개한 내용이다.

무기를 발달시켜 가장 강력한 공격력을 가지게 된 인류에게 지구상에서 더 이상 경쟁할 상대가 없어졌다. 하지만 인류는 우연히 발생하는 부상과 죽음 따위의 어떤 보이지 않는 힘에 대한 공포를 피할 수 없었다. 불측으로 찾아오는 불행과 자연환경의 변화는 인간의 능력으로써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인류는 이러한 불운을 극복하고, 보다 나은 행운을 얻기 위한 노력으로 보이지 않는 힘을 신(神)으로 섬기게 되었다. 그리고 신에 대한 기원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의식(儀式)을 행하였다. 그 의식이란 사냥의 노획물인 동물이나 전쟁포로를 제물로 바치고, 성공적인 사냥과 전투에서 승리를 하였던 활기차고 용감한 무술 퍼포먼스였을 것이다.

한편으로 또 하나 중요한 신전 의식은 무리를 이끌어 갈 지도자를 선출하는 것이었다. 고대인들은 무리를 안전하고 풍요로운 생활로 이끌어 줄 지도자는 개인의 능력이 탁월해야 할 뿐 만 아니라 신의 뜻이 미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지도자를 선출하는 경쟁의 결과는 우연으로 나타나는 변수, 즉 신의 선택이라고 믿었다. 신이 결정한 지도자라야 사냥이나 전투에서 신의 영력(靈力)을 얻을 수 있다는 계산이다. 인간들은 제우스가 그 아버지 크로노스와 맨몸격투에서 승리함으로서 신들의 지도자가 된 것을 본받았다.

기원 전 2,000년경에 올림피아에서 시작된 고대올림픽 경기는 제우스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의식이었다. 신전에 사람을 죽여 바치는 의식을 가진 후 달리기 경주를 하였다. 그 후 전투에 필요한 고대 5종 경기(멀리뛰기, 창던지기, 달리기, 원반던지기, 레슬링)를 추가 하였고, 기원전 688년에는 가죽을 손에 감고 마구 때리는 복싱이 추가되었다. 기원 전648년에는 그리스어로 맨손격투를 뜻하는 판크라티온이 종목으로 채택되어 가장 많은 인기를 끌었다. 판크라티온은 이미 기원전 4,000년 이집트의 무덤에서 그 형태가 발견된다. 그리고 메소포타미아 수메르 왕조에서도 이런 경기 gms적이 보이며, 그리스, 마케도니아, 로마 시대까지 쭉 이어진다. 판크라티온 경기에서는 조르기, 관절꺾기 등은 물론 주먹이나 발, 팔꿈치나 무릎 등 모든 기술을 사용할 수 있어서 매우 격렬했고 위험하였다. 그래도 눈, 코, 입을 찌르는 것, 물어뜯기, 급소 치기 등은 금지되었다. 그러나 후에 이 경기는 날카로운 쇠 조각을 박은 가죽 끈을 손에 칭칭 감고 두 선수가 평평한 돌 위에 묶인 상태에서 어느 한 쪽이 죽을 때까지 때리며 싸우는 경기를 하였다. 기원전 5세기께 ‘데아게네스’는 이 경기에서 2,102명과 싸워 모두 KO로 이겼는데 그 중 1,425명을 죽였다고 한다.

맨몸무예는 리카온의 서열 경쟁과 수사슴의 짝짓기 경쟁과 동일한 출발을 하였다. 하지만 인류의 맨몸무예는 자연적 상태에서 한 걸음 나아가 진화하였다. 고대인들은 신전에서 맨몸무예를 경기하면서 신을 기쁘게 한다는 믿음으로 스스로의 행복과 안정을 찾았다.

또한 경기대회를 통하여 종족의 결속력을 굳게 하고 이웃 종족과 선린을 두텁게 했다. 또한 젊은이들을 체계적으로 경쟁시켜 인간을 강인하게 단련시켜 미래를 준비하였다.

그러나 인간들은 때때로 맨몸격투기를 왜곡했다. 무기를 내려놓은 그 의미를 망각한 채 연약한 인간의 몸을 마치 무기처럼 사용하여 잔인하게 상대를 해치는 수단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이러한 오류에는 반드시 반성과 수정이 뒤따랐다. 우상숭배라는 이유로 393년 막을 내린 올림픽은 1896년 재건되었지만 로마의 판크라티온은 부활되지 못하였고, 일반인도 이를 외면하였다. 심지어 법으로 금지를 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신이 가르쳐 준 맨몸무예는 인간과 자연, 그리고 인간과 인간을 절제된 경쟁을 통해 상생(相生)하게 하는 위대한 지혜의 산물이다. 그런데 현대 사람들 중에서도 여전히 꽤 많은 수가 인체를 원시적 무기로 만들려는 망상을 쫓고 있거나, 로마시대의 타락했던 판크라티온처럼 잔인한 격투경기를 재현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더구나 일반 대중은 맨몸무예의 본래 모습은 알려고도 않고 이런 허구를 쫒고, 비이성적 행위에 환호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원시시대부터 우리 선조들이 이 땅에서 키워온 택견은 인류사상 최대의 변혁기에 마침 일제의 탄압을 받아 7~80년 동안 땅 속에 묻혀 버렸다. 결과적으로 이것이 전화위복이 되었다. 택견은 맨몸격투기를 변질시키는 오류와 왜곡으로부터 오염되는 폐해를 피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럼으로 택견에는 맨몸무예의 본질인 비가해성 기술과 절제된 경쟁원리로 구조화된 경기방식이 원형대로 남아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 연재에서는 택견의 역사를 편년으로 나열하기보다는 문화사적 의미로 접경을 확대해서 살펴보려는 것이다. 그래야 택견을 통하여 맨몸무예가 가지고 있는 커다란 가치를 제대로 발견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당시에 시날 왕 아므라벨과 엘라살 왕 아리옥과 엘람 왕 그돌라오멜과 고임 왕 디달이 소돔 왕 베라와 고모라 왕 비르사와 아드마 왕 시납과 스보임 왕 세메벨과 벨라 곧 소알 왕과 싸우니라.”

성서 창세기 4장에 기록된 인류 최초의 전쟁이다. 인류의 집단 투쟁은 인류로 진화하는 시기부터 있었을 것으로 보지만 그것을 전쟁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전쟁은 둘 이상의 국가 또는 이에 준하는 집단 간에 군사력을 비롯한 각종 수단을 사용해서 싸우는 것을 말한다.

그런 점에서 너 댓개씩 부족국가들이 서로 패를 지어서 싸웠으니 전쟁이라 할만하다.
BC 8세기 중엽 호메로스의 영웅서사시 일이아드와 오딧세이에 기록되어 있는 ‘트로이 전쟁’도 고대 전쟁이다. 브레드 피트가 아킬레우스로 열연하는 영화 ‘트로이’가 유명하다.

기록상으로 가장 오래된 전쟁은 중국의 은나라가 하(夏:BC 2205경~1766경)를 멸망시킨 전쟁이다. 앗시리아와 바빌로니아, 그리고 히타히트와 이집트와의 전쟁, 스키타이와 흉노사이의 전쟁도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오래된 전쟁으로 꼽힌다.

우리가 국사시간에 배우는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전쟁은 연(燕)나라에서 망명한 위만이 그 무리 천여 명을 이끌고 진번조선(眞番朝鮮)의 수도인 왕검성에 쳐들어옴으로서 발생했다.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 민족과 관계가 있는 가장 오래 된 전쟁은 중국의 정사(正史)인 『25史』의 『사기(史記)』에 나온다. B.C2600년경 황제헌원(黃帝軒轅)과 치우(蚩尤)가 탁록의 들에서 치열한 싸움을 하였다고 하였다.

이른바 탁록대전이다. 동북아의 북쪽에 근거한 동이족(東夷族)과 남쪽에 근원을 둔 하화족(夏華族)은 문명이 발달하고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제한된 땅을 두고 대결을 하게 된다. 청동기와 철기와 기병으로 무장한 동이족과 석기와 청동기에 의존하고 있는 농경문화의 하화족(漢族) 간의 대결은 일방적 게임이었다.

무려 70여 차례 연승을 하던 동이족은 황제 헌원에 의해 반격을 받게 된다. 헌원은 동이족으로부터 빼낸 철기 기술로 무기와 갑옷을 만들었고, 또 동이족에 복속되었던 한족들과 내통을 하여 결국 탁록대전을 승리로 이끈다. 이것을 중국역사의 시작으로 기록한 것이다.

황제와 중원의 패권을 다투다 패한 치우였으나 동북아시아 각 민족은 그를 전신(戰神), 또는 무신(武神)으로 추앙하였다. 한고조 유방이 전장에 나가기 전에 치우사당에 제사를 드렸다는 기록도 있다.

위서 논란이 있는 문헌이기는 하지만 환단고기(桓檀古記)의 삼성기(三聖記) 신시역대기에는 치우가 B.C 2707년에 배달국의 14대 환웅으로 즉위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시의 개국은 B.C 3898년이니 중국보다 훨씬 역사가 앞선다.

또한 치우가 '銅頭鐵額'(동두철액: 동으로 된 머리와 쇠로 된 이마)이라고 한 기록은 청동기와 철기문명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당시 동이족의 문명이 세계에서 가장 앞서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특히 치우는 맨몸격투기와 깊은 연관이 있음이 기록으로 나타난다.
“지금 기주악(冀州樂)에는 치우전(蚩尤戰) 풍속이 있으니 그 곳 사람들은 둘씩 셋씩 소뿔을 쓰고 서로 맞닥뜨린다.----- 한(漢)나라 때에 만들어진 각저전(角抵戰)은 그 치우전 풍속이 남아서 만들어진 것이다.” (述異記)

“탁록대전의 무대가 되었던 기주(冀州)에는 쇠머리를 쓰고 씨름을 하는데 이를 치우희(蚩尤戱)라 한다. 각저희(角低戱)의 다른 말이다.”(中國舞踊史)

치우희, 각저희는 현재의 택견과는 다른 것이다. 그러나 가끔 문헌에는 치우희니 각저희가 맨몸격투기의 일반명사로 사용되기도 함으로서 택견과 전혀 무관한 것은 아니다.

1985년 부산역 앞에 처음으로 한국전통택견연구회 전수관을 개설하고 택견의 대중화를 통한 택견중흥의 깃발을 내걸었다. 그리고 깃발의 상징을 신라시대의 귀면와(鬼面瓦)를 모델로 했다. 귀면와의 부릅뜬 눈 위로 들려진 진 코, 미간의 주름, 귀까지 찢어 진 입, 양 쪽에 돌출된 날카로운 어금니, 이마에 돋아 있는 2개의 뿔, 날카롭게 선 수염을 보면 용이나 맹수로 오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기록에 있는 치우의 형상그대로이다. 옛날 사람들은 나쁜 귀신을 쫓으려고 더 무서운 치우를 지붕에 내 달았던 것이다. 이른바 재앙을 막는 벽사행위였다.

아래대 택견터인 뚝섬은 태종이 사냥을 할 때 치우 형상의 문양으로 만든 둑(纛:독)기를 꽂아 두었다는 데서 유래한다. 전장에서는 뚝기를 세워 놓고 제사를 지내기도 하는데 이순신 장군이 물가에서 둑제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지난2002년 월드컵에서 한국은 4위를 했고 그뒤에는 붉은 악마의 치우기가 물결쳤다. 또 금년 8월 베이징올림픽에서 우리나라가 7위라는 위업을 달성했다. 특히 활쏘기, 사격은 물론 투기종목에서 두각을 나타내었다. 이런 대단한 것이 모두 우리가 무신의 후예여서가 아닐까.
우리나라 전통무예를 자처하는 대부분의 무예들은 그 역사를 기술하는 데 있어서 일정한 패턴이 있다. 시대는 고구려를 들먹이고, 역사적 사실은 주로 화랑에 연줄을 댄다. 그리고 실증적 자료라면서 고구려고분벽화와 석굴암의 금강역사상(인왕)을 동원한다. 특히 맨손으로 하는 무예는 인왕상의 자세를 당시 화랑들의 무예동작이라고 하는데 망설임이 없다. 태권도는 인왕상의 자세가 얼굴막기와 아래막기라고 한다. 사실 잔뜩 기를 끌어올려 치켜든 주먹으로 곧바로 내려칠 것 같은 금강역사상의 모습을 보면 이것이 깊은 경지에 이른 무예인의 동작을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을 증거로 삼아 우리고유의 무예를 입증하려 한다면 이는 자승자박의 난처한 결과만 가져오게 될 것이다.

중국 허난성(河南省) 룽먼(龍門)석굴은 북위(北魏: 386~536)시대에서 당대(唐代)까지 이루어진 것이다. 675년 측천무후가 건립했다는 펑셴쓰(奉善寺)석굴의 인왕상이 있고, 일본에도 607년에 지은 호류사(法隆寺)와 752년에 건립된 도다이사(東大寺)에 인왕상이 있다. 이것은 634년에 건립한 분황사 석탑이나 774년에 축조된 석굴사의 인왕상과 그 형상이 거의 같고 조성연대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것이다.

인왕상은 기원정사(祇圓精舍)를 세울 때 석가가 '문의 양쪽에 집장(執杖)의 야차(夜叉)를 만들라'고 한 것이 유래이다. 따라서 인왕이란 석가 시대부터 탑 또는 사찰의 문을 지키는 수문신장(守門神將)으로 조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야차는 원래 금강저라는 고대 인도의 무기를 들고 있었으나 그것이 불교의 전래 루트를 타고 중국을 거처 우리나라, 일본으로 전해지면서 중국의 권법동작이 가미된 것으로 보인다. 펑셴스의 인왕상과 호류사 인왕상, 그리고 분황사, 석굴암의 인왕상은 모두 맨손무예 동작을 취하고 있다. 따라서 인왕상의 형상은 불상조성의 일정한 양식에 따른 것이니 그것을 두고 우리고유의 무예동작이라고 하는 것은 넌 센스인 것이다. 그러나 중국, 일본의 인왕상과 우리 인왕상을 자세히 비교해보면 뜻밖에 매우 중요한 사실을 알 수가 있다.

인왕상(仁王像), 야차(夜叉), 이왕(二王), 이천왕(二天王) 등으로도 불리는 금강역사상은 주로 반라의 모습으로 문의 좌우에서 짝을 이루어 서있다. 왼쪽에 서서 입을 벌리고 있는 인왕을 '아' 역사상이라고 하고, 오른쪽에서 입을 굳게 다물고 있는 인왕을 '훔(음)'역사상이라고 한다. 고대 인도어인 산스크리트(Sanskrit/梵語)의 첫 글자가‘아’이고 끝 글자가 훔’이다. 밀교(秘密佛敎)에서는 '아'와 '훔'이란 시작과 끝을 의미하고, 음과 양을 의미하여 이른바 우주의 근원으로 인식된다. 인왕상은 고대인이 표현한 키네시올로지 (kinesiology/인체운동학)이다. 이 한 쌍의 형상은 우주의 본체를 상징하고 부처님의 무한한 능력을 뜻하기도 한다.

한국, 중국, 일본의 사찰은 대개 호국사찰이다. 이 사찰에는 인왕을 비롯한 범천, 제석천, 사천왕, 팔부중, 비천 등 밀교의 여러 수호 불상이 줄줄이 봉안되어 있다. 삼국은 모두 불교를 호국의 목적에 이용하였다. 대부분의 사찰이 국태민안을 기원하는 법회를 열었고‘인왕반야경’강설 같은 밀교의례가 국가 차원에서 행해졌다. 원래 불법과 부처를 수호하는 인왕상이 동양 삼국에서는 국가의 수호신 역할까지 하게 되었다. 따라서 자연히 이 역사상의 형상을 결코 깨뜨릴 수 없는 강인한 힘을 현현(顯現)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일본의 인왕상은 걸작이다. 목각의 인왕상은 섬세하고 사실적으로 표현했다. 형상은 대단히 역동적이고 날카로운 것이 매우 위협적이다. 중국 것은 우선 크기가 압도적이지만 역동성이 부족한 감이 있다. 이에 비해 석굴암의 인왕은 소박하다. 위엄이 있고 역동적이지만 사납게 보이지 않는다. 근육의 형태도 삼국이 각기 다른 특징을 보인다. 또 하나 석굴암의 인왕은 중국, 일본과 달리 머리 뒤에 신성과 지혜의 상징인 후광을 가지고 있다. 일본과 중국의 인왕이 단순, 강력한 무력을 나타낸다면 한국의 인왕은 무력과 덕성과 지혜를 함께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택견의 동작은 일본무술에 비해 날카롭지도, 사납지도 않다. 중국무술처럼 허장성세가 없다. 질박하면서도 멋과 흥이 있고 실용적이다. 살생유택의 인(仁)이 있어 상대를 제압하되 피해를 최소화한다. 공생의 화(和)가 있어 적을 무력으로 억압하지 않고 감화시켜 복속케 한다. 상대에게 재도전의 기회를 부여하는 의(義)로써 상대와 자신에게 자기향상의 동기를 부여한다. 이러한 내적(內的)인 직접요인(直接要因)에 의해 택견의 동선은 부드러운 곡선으로 만들어졌고, 주먹머리와 발모서리 같은 강한 신체 부분이 아닌 손 장심, 발 장심 같은 연한 부분으로 상대방 신체 중에서 비교적 안전한 부분을 골라서 공격을 하게끔 구성되었다. 택견에서 발견되는 이러한 상생의 지혜와 공영의 덕성은 바로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사상인 것이다. 우리 민족의 후덕한 기질은 야차의 흉포한 형상마저 동해의 떠오르는 햇살을 받아 아름답게 빛나는 석굴암의 예술작품으로 승화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1988년. 당시 우리에게는 금단의 땅이었던 “죽(竹)의 장막”중국대륙을 방문할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필자는 25일 동안 상하이, 엔타이, 웨이하이, 지난, 베이징, 시안, 구이린, 광조우 등을 돌아보았다. 무협소설과 삼국지 등을 통해 익숙해 있는 중국대륙이지만 50여 년 동안 외부와 단절된 지역이었다. 따라서 이 여행에서 혹시 오래된 무술의 자료라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은근한 기대도 있었다.

홍콩에서 상하이로 갔다. 공항직원들이 노란별이 새겨진 붉은 견장을 단 배추 색 제복을 입고 있어서 긴장감을 더해 주었다. 새벽에 일어나 호텔 37층에서 바깥을 내려다보니 안개가 자욱한 6차선 대로에는 수없이 많은 자전거들이 개미떼마냥 움직이고 있었고, 그 너머 상하이 체육관 앞 광장에는 수천 명의 사람들이 타이치권(太極拳)을 하고 있었다. 슬로비디오를 보는듯한 이 광경은 아직도 잊지 못할 장관이었다.

산동성 수도인 지난(濟南)의 박물관에서 한(漢:BC 206~AD 220)시대의 각화(刻畵)를 보는 순간 심장이 쿵쿵거렸다. 검은 대리석에는 수십 인의 다양한 활동모습이 새겨져 있었는데 그중에 고구려고분벽화의 수박도(手搏圖)와 흡사한 동작을 취하고 있는 그림이 발견된 것이다. 그러나 그림의 설명문에는 백희(百戱), 즉 여러 가지 놀이 그림이라고 되어 있었다.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니 공중에 접시를 던졌다 받는 묘기동작이었다. 시안(西安)에서는 진시황 무덤에서 출토된 토용(土俑:흙으로 만든 인형)을 보고 또 한 번 심장이 고동쳤다. 실물크기의 병사토용은 두 손을 펴고 아래쪽 대각선으로 나란히 뻗은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태권도나 가라테의 “수도(손날)하단 대비 막기” 동작과 꼭 같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날 태권도나 가라테의 유래가 진시황 시대와 연결 될 수도 있다. 그런데 출토품의 설명서에는 토용의 자세에다 활을 쥐고 있는 그림이 덧씌워져 있었다. 토용은 궁수(弓手)였던 것이다.

근대 동양무예는 전통성에 대해 유난히 민감하다. 중국은 달마대사, 송태조, 장삼봉에 가탁(假託)하기를 좋아하고, 일본은 다케다 신켄을 위시하여 전국시대 영웅에다 연줄을 댄다. 한국무예계에서도 유사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따라서 무예에 관련되는 고문헌을 하나라도 찾는다면 이는 로또에 당첨된 것이나 다름없을 터였다. 긴 중국여행을 하는 동안 가슴을 쓸어내리는 체험에서 얻은 것은 문헌자료의 허구성과 전통성 증빙자료 찾기에 목을 매달고 있는 나 스스로에 대한 씁쓸한 자조(自嘲)였다.

우리는 고유무예를 설명할 때 빠짐없이 고구려고분의 벽화를 들먹인다. 전기(4C말∼5C)의 고분벽화는 중국의 양식과 그림의 소재가 거의 같다. 그러나 중기에 속하는 5~6세기에는 고구려인의 강건하고 남성적인 기질의 생활상이 나타나고 있다. 특히 말을 달리며 활시위를 힘껏 당기고 있는 수렵도, 건장한 장사들이 근육을 드러내고 택견, 씨름으로 박투(搏鬪)하는 격렬한 장면이 묘사되어 고구려적인 성격이 분명해졌다.

“오늘날 『택견』으로 불리는 무예의 겨루기 자세를 취하고 있다.” “우리 고유의 『씨름』모습을 보여주는 가장 오랜 회화적 표현”(전호태/고구려벽화로 본 고구려이야기)이라는 이른바 무용총과 각저총의 벽화에는 북상투를 쫒은 고구려인을 상대하는 인물이 매부리코를 가진 서역사람이다. 서역(西域)은 파미르 고원 동쪽 지역만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넓게는 아시아 중·서부와 인도 반도, 유럽 동부와 아프리카 북부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까지 포괄한다. 한의 무제(武帝)가 처음으로 서역을 개척했지만 한과 패권을 다투던 고구려 역시 서역과 교류가 빈번했을 것이다. 따라서 당시 벽화에 나타나는 맨몸무예는 광범위한 지역에서 서로 다른 민족 간에 경기를 할 수 있을 정도로 보편적인 문화였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씨름과 택견 같은 맨몸무예는 현실세계의 무예이기도 하지만 죽은 자를 타계로 보내기 위한 통과의례이기도 했다. 이런 장례풍속은 한반도와 일본, 중국, 서역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뿐만 아니라 고구려 고분의 축조양식이 또한 서역에서부터 중국을 거쳐 유입되었고, 택견동작과 유사한 동작을 표현한 벽화는 시기적으로 1세기 이상 앞선 중국고분에도 비슷한 것이 있다. 그럼으로 문화사적 측면에서 볼 때 벽화의 그림을 두고 고구려 무예의 원형이라고 단정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더구나 벽화의 겨루는 자세는 무예로서는 매우 허술하다.

따라서 오늘날 같은 정보·지식 사회에서 석연치 않는 자료나 희박한 근거를 대며 무예의 고유성과 원류를 주장하려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다른 무예도 마찬가지지만 택견의 전통이 오래되었거나 고유한 것이어서 특별히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다. 무형문화의 참된 가치는 시대의 요구에 부합하는 끊임없는 변화에 있다. 택견이 새로운 가치창출을 위한 변화에 성공하지 못했다면 오늘날 택견은 이름조차 없이 무덤 속 벽화로 그렇게 남아 있었을 것이다.
천추태후는 고려의 잔다르크인가? 팜므파탈인가?

KBS의 대하드라마『천추태후』에서 칼을 휘두르고 활시위를 당기는 채시라의 열연이 안방을 후끈 달아오르게 하고 있다. 사실 고려사(高麗史)에는 천추태후가 불륜을 저지르고, 과도한 권력욕에 사로잡힌 희대의 팜므파탈(요녀)로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투구와 갑주로 무장을 하고 왕 앞에 나선 왕후 채시라가 태조왕건의 유지를 받든다는 명분을 내세워 거란과의 전쟁을 주장하는 모습은 정사(正史)와는 거리가 있다. 하지만 고려의 상무적 기풍을 미모의 여자 탤런트를 통하여 묘사했다는 점이 이 드라마의 매력이며, 또한 무언가 특별한 상징성이 있어 보인다.

“지금, 아홉 명의 고려무사가 중국대륙을 횡단한다!”

이 카피라이트로 관객을 이끌었던 영화『무사』는 "우왕 즉위년 고려는 여러 차례 사신을 남경에 보냈으나 투옥되거나 도착 후 소식이 끊어졌다." 라는 고려사의 기록을 모티브로 만들어졌다. 고려무사들의 장쾌한 무예 신이 중국대륙을 무대로 펼쳐진다.

“쌍화점에 쌍화(雙花) 사라 가고신, 회회(回回)아비 내 손모글 주여이다. ……”

고려 충렬왕 때의 가요『쌍화점』에서 착안한 동명영화에서는 왕과 왕을 호위하는 소년무사간의 끈적끈적한 동성연애 장면이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그러나 무예를 하는 필자에게는 소년무사들의 화려한 무예솜씨가 매우 인상적이었다.

5년 전에 종영된 KBS1-TV대하드라마『무인시대』에서는 이덕화가 수박(手搏=택견)의 명인 이의민(李義旼) 역을 연기하여 인기를 끌었다.

이의민의 6대조는 고려에 귀화한 베트남의 왕자였다고 한다. 형들과 함께 소금장수를 하며 주먹질, 발길질을 일삼는 무뢰배였으나 수박(手搏)을 잘해 왕(의종)의 눈에 들어 별장(別將)이 되었다. 정중부의 난에 적극 가담, 큰 공을 세워 장군이 된다. 그 후 이의민은 14년간 고려의 실권을 장악했다. 그가 경주로 피신한 폐왕(의종)을 맨손으로 때려죽이는 장면을 고려사에는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의민이 의종에게 술을 몇 잔 올리고, 왕의 등마루에 손을 대자 뼈가 꺾이는 소리가 났다. 그러자 이의민은 껄껄대며 웃었다.”

당시 정권을 주무르던 장군들은 국정을 논하다가도 걸핏하면 주먹질을 했던 것 같다. 이의민이 두경승(杜景升)과 중서성에서 논의를 하다 의견이 충돌하였다.

“어떤 사람이 힘자랑을 하기에 내가 이렇게 때려 눕혔다”

이의민이 이렇게 말하면서 주먹으로 기둥을 치니 서까래가 흔들렸다. 그러자 두경승이,

“어느 때 일인데, 내가 맨주먹으로 후려쳤더니 뭇사람이 겁을 먹고 모두 도망치더라.”

라고 응수하면서 벽을 쥐어지르니 주먹이 벽에 묻혔다. 비단 이의민과 두경승 뿐 만 아니라 다른 장군들도 대개 이런 식이었다. 요새 우리 국회가 고려 국무회의의 전통을 이어받았는지 모를 일이다. 그래도 해머와 소화기를 동원하거나 멱살잡이, 난투극을 연출하는 우리 의원들보다는 멋과 품위가 좀 더 있어 보인다. 어떤 문사가 이를 조롱하는 시를 남겼으니 군사독재 당시인데도 권력의 꼴불견을 표현하는 자유가 지금보다 외려 더 나았던 모양이다.

吾畏李與杜 우리는 이의민과 두경승이 두렵더라.
屹然眞宰輔 위엄스레 우뚝 솟은 게 진실로 재상일세.
黃閣三四年 황각(국가최고회의기관)에 있은 지 3∼4년에
拳風一萬古 주먹의 위력만이 온 세상에 떨쳤더라.

조선 초기 김종서·정인지 등이 세종의 교지를 받아 만든 고려사는 이전부터 있던 사료를 선정 채록하여 재구성하였으므로 역사성이 엄격하게 지켜지고 객관성과 주체성을 유지하는 한편, 편찬자인 유학자의 사대적인 명분론이 반영되어 있다고 평가된다. 이러한 역사관에 의해 고려사는 무인(武人)을 천하게 보는 관념을 만들어내었고, 권력을 장악한 무신정권의 부정적인 면을 부각시키고 비아냥거리는 기록을 담게 된 것으로 보인다.

역사란 현재의 눈으로 현재의 문제에 비추어 과거를 보는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조선시대기록에서 비하된 고려무예가 오늘 날 영화와 드라마 속에서 민족의 강인한 기상으로 표현되는 것은 역사인식의 메카니즘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현대의 관점에서 작품이 그려지고 있다고 해도 고려의 맨손무예가 태권도 동작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은 작품의 완성도를 현저하게 떨어뜨리는 것이다. 왜 그런 것일까?

무예의 구조 속에는 그 민족적 특성이 함장 되어 있고 그것은 동작으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려의 맨손무예가 택견이라고 하는 직접적인 근거가 없다고 하더라도 택견의 동선과 율동, 호흡, 기성(氣聲),동태(動態)만으로도 고려무예에 가장 근접한 것이라고 추정하는데 무리가 없는 것이다.

지난 3월 24일과 3월 29일은 온 국민의 귀와 눈이 온통 TV에 쏠려 있었다. WBC 결승전 과 세계피겨선수권 대회 중계방송 때문이었다. 이 날 SBS, MBC, KBS 등 방송 3사는 전체 뉴스 시간의 절반 이상을 야구와 김연아 소식으로 채운 이른바 ‘올인’ 보도를 했다. 이 시기에는 YTN 노조위원장 구속,〈PD수첩〉PD 체포, 청와대 행정관 성매매 파문, 등 사회적으로 매우 민감한 여러 현안들이 있었지만 모두 뒷전으로 밀려났다. 이를 두고 세간에서는 TV메인뉴스가 ‘물 타기’를 했다고도 하고, 이게 이명박 정부의 2009년 판 ‘3S정책'이라고 비판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3S’란 Sports, Screen, Sex를 말한다. ‘3S정책’은 3S를 유포하여 대중의 감정과 본능을 자극, 국민으로 하여금 정치적 자기소외, 정치적 무관심을 갖도록 유인함으로써 권력이 마음대로 대중을 조작할 수 있게 하는 독재 권력의 순치(馴致)정책의 한 전형이다. “이성은 필요 없다. 감정과 본능에 호소하라.”고 외친 나치제국의 선전상 괴벨스(Goebbels)가 베를린올림픽을 유치하고 TV를 이용, 이를 세계로 중계한 것이 대표적 사례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 정권의 언론, 공보분야 실세였던 허문도가 괴벨스의 흉내를 냈다. 컬러TV 방영과 VTR가 보급되고, 애마부인시리즈, 변강쇠 등 에로영화들이 이 시기에 전성기를 누렸다. 뿐만 아니라 포르노 테이프, 터키탕, 퇴폐이발소 등 섹스산업도 성행했다. 프로권투 세계 챔피언 전을 국내에 유치하여 챔프를 양산해 냈고, 프로야구도 프로축구, 민속씨름, 실업배구, 실업농구 등 각종 프로리그들이 이때 만들어졌다. 그리고 서울 아시안 게임, 서울 올림픽을 유치하여 5공화국의 3S정책은 절정을 이루었다.

스포츠를 우민화정책에 이용한 것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콜로세움이 무너지면 로마도 무너진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로마시대에는 검투경기가 정치적 목적으로 행해졌다. 우리 상고시대에도 신수두 대제, 고구려의 동맹, 부여의 영고, 예의 무천과 같은 축제가 있었고 신라의 가배, 고려의 팔관회 등이 있었다. 물론 우민화 정책과는 성격이 다르지만 고대의 축제 역시 정치적 동기가 있고, 백기(百技)와 가무(歌舞)가 주제였다는 점에서 3S정책과 상통하는 일면이 있다. 신채호는 백기는 곧 무기를 가지지 아니하고 맨손, 맨몸으로 서로 박격하는 것이며, 어느 명절이든지 매양 조중(朝中)의 문무를 양편으로 갈라서 수박(手搏)을 행하고 임금이 구경한다고 하고, 매년 3월과 10월 신수두 대제(大祭)에 모든 군중(群衆)을 모아 칼로 춤추며, 활을 쏘며, 앙감질도 하며, 택견도 하며, 강의 얼음을 깨고 물속에 들어가 물싸움도 하고, 노래하고 춤을 추어 그 잘하고 못함을 보며, 사냥을 하여 그 잡은 짐승의 많고 적음도 보아서 여러 가지 내기에 승리한 사람을 ‘선배’라 일컫는다고도 했다.

고려사에 “의종이 무신에게 명하여 ‘오병수박희(五兵手搏戱)’를 하게 했다.”, “변안열은 대신들이 교외에서 연회를 할 때 박희(拍戱)를 잘하여 종2품의 판밀직사사가 되었다.”, “최충헌이 중방의 힘센 자들로 하여금 수박을 시켜 이긴 자에게는 즉시 교위나 대정의 벼슬을 상으로 주었다.”고 하였으니 무예경기가 공·사의 크고 작은 행사에서도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가 원의 지배를 받던 90여 년 동안에는 원이 고려왕실에 대해 우민화정책을 썼다.

고려24대 원종부터 시작하여 충렬, 충선, 충숙, 충혜, 충목, 충정 등의 충자 돌림의 시호를 가진 왕들은 한 결 같이 황음무도하고 향락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이것은 원이 고려왕의 임면권을 쥐고, 사사건건 정사에 간섭을 하면서 실권이 없는 왕을 본능적 쾌락에 빠져들게 한 정략적 결과로 볼 수 있다. 기록상으로도 왕비가 매사냥이나 무예경기와 연회를 부추긴 사실이 드러난다. 충혜왕이 상춘정(賞春亭)에 납시어 ‘수박희’를 구경하시었다. 왕이 동쪽 교외에서 매를 풀어 사냥을 하고 화비궁(和妃宮)에 돌아와 ‘수박희’를 관람하셨다. 공주가 연경궁으로 옮겼다. 왕이 일한 이들에게 술을 주어 위로하고 밤에 각저희를 보았다. 6월에 마암에 행차하시어 수박희를 관람하였다. 이런 기록으로 보면 원 지배시기의 고려무예는 철저하게 오락화 된 것으로 보인다. 충목왕은 무예를 남용하는 자들을 단속하여 수박경기로 재물을 내기하는 자에게 곤장을 치고, 무예에 능한 귀족 자제들에게 내렸던 고신(告身:임명장)을 거두어들이기도 하였다.

원의 지배아래 있던 고려는 국가의 기강이 극도로 문란하였다. 이렇게 역사의 타율(他律)이나 민족적 모순(矛盾)으로 주체가 위기에 처하면서 무예가 정치책략에 의해 오용된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고려시대에는 왕으로부터 대소신료(大小臣僚), 하층민들에 이르기까지 맨손무예경기가 널리 성행하였으며, 그만큼 택견은 오래 전부터 경기로서 체계를 잘 갖추어져 서 전래되었다는 것을 분명하게 해주는 것이다.
《고려사》에는 무예라는 단어가 13개 나온다. 또 수박은 6개, 수박희 1개, 오병수박희 1개 등이 기록되어 있다.

고려 이전의 기록에는 697년에 제작된 연개소문의 장남 연남생 묘지문의 탁본에 “(남생이)큰 재능이 무예에서 펼쳤더니”라는 기록이 있다.

《화랑세기》에는 “예원공이 선도는 보종을 따르고, 무도는 유신을 따랐다”고 하여 무도라는 말이 처음으로 등장한다. 이 책에는 劍道 3회, 擊劍 6회, 武事 4회, 仙道 4회 등이 보인다.

《화랑세기》는 신라 성덕왕의 제위기간에 김대문에 의해 쓰여 졌다. 이 문헌은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서술할 때까지 남아 있었으나 이후 소실된 것으로 생각되어왔다. 그러다가 1989년 필사본과 모본이 김해에서 발견되었다.

이렇게 재발견되었다고 주장되고 있는 《화랑세기》는 화랑제도와 신라사회에 대한 새로운 기록이라는 데서 중요한 위치를 가진다. 하지만, 현재까지 필사 원본이 발견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기존의 학계 연구결과에 배치되는 점이 많아 위작 시비가 끊이지 않고 있다. 다른 사료에서는 전혀 나타나지 않으며 후대 일본에서 사용되는 ‘무도’, ‘검도’라는 용어가 있다는 것도 의심을 살 수 있는 사실이다.

최근 김제에서 경주김씨 집안에 400여년 전해온 ‘가전무예’가 발견되었다고 해서 화제가 되었는데 《화랑세기》의 위서논란과 매우 유사하게 보인다.

이처럼 우리나라 기록중 《고려사》이전의 자료에는 무예관련 기록이 희소하고 특히 맨손 무예와 관련된 기록이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 초기 까지는 상당한 기록이 있다. 태조~세조실록을 보면 무예라는 단어가 27회 나오고, 무예관련 기록이 수없이 보인다.

그 중에서 手搏戱 6회, 手拍戱 1회, 手搏 9회 등 맨손무예에 관한 비교적 많은 기록이 있다. 그러나 그 이후 기록에서는 맨손무예가 자취를 감춘다. 선조실록에 도수박전이라는 단어 하나가 보이고 그 후 실록에서는 더 이상 수박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 시기에 법전, 의례지리총서 등의 문헌에는 수박 대신 권법이 각 각 8개가 보이는데 이는 무예제보, 무예도보통지 등의 무예서 출간과 관계가 있다.

맨손무예가 사라지는 문헌기록의 경향을 보면 그 시대에 맨손무예가 제도권에서 이탈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왕조가 창건되면서 이성계 주위의 정도전을 위시한 새 실세들은 정책기조를 주자학에 두었다. 이성계 자신은 출중한 무예를 지닌 무인이었으나 권력의 확보를 위해 고려의 귀족계급을 이루고 있던 무가세력을 약화시킬 필요가 있었다. 이런 정치상황은 사병혁파조치로 나타났다.

고려조부터 있어왔던 사병은 왕족이나 귀족의 신변보호나 변란에 대비하기 위하여 육성되어 왔다. 그러나 왕위계승권을 두고 발생된 두 차례 왕자의 난이 발생한 것이 빌미가 되어 정종 2년 4월에 사병제도는 없어지고 말았다.

사병제도 폐지는 무예고수들을 차츰 시대의 뒤 안으로 사라지게 하였다. 한편 관제개혁으로 문무양반제도를 두고 의정부와 삼군부가 서로 견제하게 하였는데 실제로는 문반이 무반을 지휘하는 형국이 되었다. 실제로 조선 초기에 1품에서 9품까지의 문무관원의 인원수는 문반 800여 명, 무반 4천여 명이었으나 조선 500년 동안 무반으로서 정승이 된 자는 고작 6명에 불과했다. 이런 사회적 환경이 무예가 천대받게 되는 원인으로 작용하게 된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과거시험의 준비기관이라 할 수 있는 사숙(私塾)과 성균관을 비롯한 학당, 향교가 있었으나 그 어느 교육기관에서도 무예를 과목으로 채택하지 않았다.

이전의 왕조에서 태학, 경당 등의 공·사 교육기관에서 무예를 커리큘럼으로 정했던 것과는 달랐다. 무관을 임용하는 시험과목은 궁술, 창술, 격구, 수박 등의 무예와 경서, 병서가 부과되었다.

그러나 양반계급에만 응시자격을 주는 문과에 비하여 무과는 향리나 양인도 응시할 수 있었기 때문에 문과에 비하여 무과의 격이 낮게 인식되고 진급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더구나 임진란 이후에는 무과응시에 신분제약이 풀어져 천민, 상민은 물론 노비신분까지도 무과에 응시하게 되자 무관의 위신이 크게 실추되어 무관직으로 나가려는 양반은 세상 사람들의 멸시를 받기까지 하였다. 그러므로 벼슬길에 나가려는 사람은 오직 문관을 희망하였기 때문에 자연히 무예수련에 힘쓰는 자가 적어지게 되었다.

한 가지 주목할 것은 궁술, 창술, 격구 등, 서민들이 평소 훈련하기 어려운 무예는 쇠퇴할 수밖에 없지만 장비나 특별한 시설 없이 하시하처에서 놀이삼아 할 수 있는 맨손무예는 달랐다는 것. 민초들에게 택견은 평소에는 오락이었고 필요에 따라 신분상승의 수단이 되기도 하였다. 택견은 지배계층으로부터 소외되고 제도적으로 장려되지 못한 대신 민중 속에서 민속무예로 활성화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일단, 태권도나 택견을 배우시는 분들께서는 글의 내용이 충격적일수도 있으므로, 미리 침착하게 읽어주실 것을 당부 드립니다.” 이런 으스스한 사전공지까지 붙인 인터넷에 떠도는 기사의 내용인즉슨 어느 중국무예를 배운 출판인이 쓴 책에서 발췌한 내용이었다. 그리고 “일제시대 ‘제국신문’주재를 지냈던 최영년이 지은 <해동죽지>(1925) 놀이 편에 소개된 '탁견희'는 정확히 말해 무예가 아니다.”라고 큰 발견을 한 것인 양 호들갑을 떨었다.

해동죽지에 있는 것은 ‘탁견희(托肩戱)’칠언절구의 한시(漢詩)이다.
百技神通飛脚術 백가지 신통한 기술, 날아오르는 각술 이라.
輕輕掠過簪高 가볍게 상투를 스쳐 높이 있는 비녀를 빼앗는다.
鬪花自是風流性 꽃을 두고 다투는 것도 과연 풍류이거늘
一奪貂蟬意氣豪 단번에 미인(초선)을 빼앗으니 호걸의 의기로다.

한시에는 문외한인 필자가 번역한 것이지만 아마도 그 의미만큼은 정확할 것이다. 여기서 초선(貂蟬)은 삼국지에서 동탁과 여포 사이를 이간질하는 미인계의 원조 격인 여인의 이름이다. 이 시는 기방에서 좌장을 뽑는 한량들의 기방풍속을 묘사한 것이다. 문인들끼리는 주로 시를 지어 겨룬다. 요즘 룸 사롱에서 보이는 야한 장면과는 동떨어진 멋과 해학과 아량이 있는 풍류인 것이다. 전부 한문으로 된 이 시의 주석(註釋)도 있는데 맨 마지막의 ‘탁견’만 한글이다.

“옛 풍속에 각술이라는 것이 있는데, 서로 마주 보고 서서 차서 넘어뜨리는 것이다. 세 가지 법이 있는데 최하는 다리를 차고, 잘하는 자는 어깨를 차고, 비각술이 있는 자는 상투에 떨어뜨렸다. 이것으로 혹은 원수도 갚고, 혹은 사랑스러운 여자를 내기로 빼앗는다. 관(官)에서 법으로 금하여 지금은 이것이 없어졌다. 이 놀이를 탁견이라 한다.(戱名之曰 탁견)”
이 기록과 함께 나란히 실린 것이 ‘각저희(角抵戱)’와 ‘수벽타(手癖打)’가 있다. 각저희는 씨름이고, 수벽타는 손뼉 치기 놀이이다. 이 책의 저자는 얼씨구나하고 한술 더 떠 송덕기 선생의 말까지 동원했다.

“‘나는 12세부터 필운동에 살던 임호라는 택견의 명인을 만나서 택견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 당시 택견이라고 해서 특별한 무술이라고는 생각지 못하고, 운동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여가를 이용해서 운동하기 좋은 장소에 모여서 실시하던 일종의 민속놀이였다.’ 그러니까 당사자조차도 민속놀이였음을 인정한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택견이 민속놀이였으니 무예가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무엇인가 반대급부를 겨냥한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저자는 賭奪愛姬(사랑스런 여인을 내기로 빼앗다)라는 말이 기방풍류인 줄 모르고 택견이 도덕적으로 타락한 것으로 매도했다. 더욱이 이능화의 조선기생사인 <조선해어화사>에 있는 '미동(美童)'에 대한 주석까지 갖다 대며 택견 비하에 안달복달이다. “<조선해어화사>에서 ‘미동(美童)은 세속에서는 비역 이라 칭하는데 남색(男色)을 이른다. 우리나라 풍속에서는 만약 미동이 하나 있으면, 여러 사람들이 질투하여 서로 차지하려고 장소를 정해서 각법(脚法), 속칭 택기연(擇基緣)으로 싸워 자웅을 결정지어 이긴 자가 미동을 차지한다. 세속에서는 이것을 급기롱이라 한다.

조선조 철종 말년부터 고종초기까지 이 풍속이 대단히 성하였으나 오늘날에는 볼 수 없다.’ 바로 그 시기를 살았던 당대 최고 민속학자의 설명이니 이보다 더한 근거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는 당대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을 만큼 수많은 고전 문헌들을 두루 섭렵한 대학자였다.”

이능화가 대학자이고 최영년이 당대 최고의 지식인일 수는 있어도 무예에 있어서는 무지할 수가 있다. 최영년이 托肩戱라고 표기한 것이나 이능화가 擇基緣이라고 표기한 것은 모두 한자의 독음을 빌려 쓴 것에 불과하다. 택견은 한글로만 표기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택견으로 미동을 내기해서 서로 차지하는 것도 역시 기방풍속이거나 남사당패 같은 특정한 유랑예인 집단의 풍속 일뿐이다. 영화 <왕의 남자>를 참고해보면 이해가 될 일이다.

그리고 아무리 많은 고전을 섭렵했다고 해도 택견에 대한 기록이 고색문헌에 있지 않았으니 학식이 소용에 닿는 것도 아닐 터이다. 더구나 최영년은 자기 아들을 단발령에 따라 제1호로 단발을 하게 한 철저한 부왜(附倭) 언론인이었고, 이능화는 민족사를 왜곡한 식민사학의 주동자였으니 둘 다 민족반역자들이다. 그런 자들이 기록한 택견과는 정반대로 신채호, 안확 등의 애족애국지사들은 <조선상고사>,<조선무사영웅전>에서 택견을 우리 선조의 웅지를 담은 무예(武藝)로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택견이 놀이라고 해서 가치를 폄하는 태도는 무술이란 살상이 목적이고 심오한 정신수련이며, 호국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고식적인 인식에 기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종목을 막론하고 근대 동양무술은 이미 오래 전에 놀이인 맨몸무예의 개념에 흡수되어 있는 것이 사실임을 어찌하랴.

 

무술은 대개 무기를 가지고 사람끼리 싸우는 기술, 먹이로서 동물을 사냥하는 기술이라는 것이 원래의미이다. 무기가 사람의 근력에 의거하는 비중이 높았던 과거에는 맨손으로 싸우는 기술도 무술의 후미에 포함되어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임진왜란 직후 간행된 무예제보(武藝諸譜)에는 무예 6기 중에 맨손무술은 없다. 그러나 그로부터 200여 년 후 사도세자가 만든 무예신보의 18반 무예와 1790년에 간행된 무예도보통지의 24반 무예 중에는 권법이 하나 끼어 있다. 어찌되었건 국가 차원에서 발간한 무예서적에 포함되었으니 맨손무예라는 용어가 합당하다.

뿐만 아니라 중국무술에서는 맨손무술이나 병기술을 모두 무술이라고 통칭하고 있고, 일본의 경우도 맨손무술이나 무기술 모두 무도(武道)로 부르고 있다. 오히려 근대에 와서는 무술이라고 하면 으레 맨손으로 하는 것으로 이해 해버리는 경향마저 있다. 병장기는 사냥과 전투에서 살상을 목적으로 개발되었고, 병장기를 사용하는 기술이 무술이다.

그러나 인류문명은 사냥대신 축산을 발달시켰고, 전투는 과학병기 중심이고 국제정치라는 전략개념으로 변했다. 따라서 개인의 근력에 의한 전래무술은 원래의 목적을 상실했다. 현대사회에서는 도검을 소지하는 것도 엄격한 법적 통제를 받는다. 혹 미국처럼 총기를 소지할 수 있는 사회에서는 위력과 기능이 총기에 비해 현저히 떨어지는 동양무술은 용도폐기 될 수밖에 없다. 무술은 검, 창 등을 이용해 자신의 몸을 지키고 다른 사람을 죽이는 ‘위험하고 무서운 것’ 이라고 하지만 그런 말은 요즘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다. 따라서 현대에는 “사람들이 무예 수련을 하는 목적은 건강, 호신술, 수양, 전통계승으로 요약 할 수 있다.”(최복규,1995)라는 것으로 변했다.

택견을 놀이라며 비하했던 중국무술계통의 지도자 역시 “우리나라 전래 무예인 병장무술(兵仗武術)이 실제 전쟁에 활용된 것이라면, 도가무술(道家武術)은 심법(心法)에 의한 권장술(拳掌術)을 위주로 하며 심신의 수련에 그 주안점을 두었다.”고 하여 무술의 기능이 달라진 것을 고백하고 있다.

김용옥은 “무술은 개인과 개인의 몸을 전제로 한 것이다. 무술은 인격의 원리에 의하여 지배된다,”고 말하고 “술(術)에서 도(道)로의 전환은 곧 무술이 근대성을 획득한 것이며 그 원리는 평화의 원리와 건강의 원리이다.”라고 하였다.

평화의 원리는 무술의 폭력성을 역용(逆用)하여 폭력을 부정하는 순수한 방어의 논리와 자신이 가진 힘(폭력)의 행사를 절제하는 논리인 수신(修身)의 유형이라고 해석하였다. 또 건강의 원리는 무술이 개개인의 몸과 몸의 집합인 인간 사회의 건강을 실현해야 하고 무술 학습이 몸의 불 건강을 초래한다면 무술의 가치가 상실된다고 하였다.

국내 굴지의 검도고수는 “고대와 현대의 무술의 의미를 비교하면, 원래 무기술이 원조였던 무술이 현대에는 맨손무예 개념으로 변화하였고, 전쟁과 사냥의 방법이던 것이 건강과 스포츠로 변하여 생사를 초월하던 절대적 의식이 스포츠 형식의 승패의식으로 바뀌었다.”고 지적하였다.

그럼에도 김대식, Allan Back은 “무도는 정신적 혹은 종교적 예의, 의식이행이 중심과제이며, 무도는 스포츠가 아니기 때문에 형, 대련, 정신수련의 목적이 본질”이라고 하여 현대무술이 스포츠와 접근하거나 혼합적 개념으로 변모하고 있는데 대한 강한 저항감을 나타내고 있다.

이처럼 무술에 대한 상반된 견해가 아직도 서로 충돌하고 있지만 무술이란 인간의 생명을 직접적 대상(對象)으로 한다고 하는 종래의 개념은 사실상 설득력을 상실하고 있다.

동양무도의 스포츠화는 1964년 동경 올림픽에 유도가 정식종목으로 채택되는 것이 시작이었다. 유도는 1882년 가노 지고오로가 일본 전래의 유술을 근대화한 것이다. 즉 “술(術)에서 도(道)로 전환”한 것이다. 이것은 곧 “일본전통무술의 서양식 스포츠화” 이다. 유도의 뒤를 이어 태권도가 올림픽 종목이 되었고, 우슈, 가라데 등이 아시안게임종목이 되었다. 그리고 많은 종류의 아시아 무술들이 경쟁적으로 스포츠로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이에 따라 최근에 “무도스포츠”, “무술경기”라는 동·서양의 이질적 개념을 접목한 통합용어가 생겨났다.

그런데 무술의 스포츠화가 해당종목의 발생지인 동양에서, 그리고 저변이 구축되어있는 주류종목에 의해 선도되고 있는 반면에 무술과 스포츠를 엄격히 분리하려는 쪽은 상대적으로 저변이 취약한 종목이거나 동양문화를 동경하는 서구사람들이라는 점이다. 1983년 택견이 유일하게 무예분문 문화재가 되었던 것도 취약종목의 신비주의 경향과 동양문화에 호기심을 가진 서구인을 의식한 우리사회의 공시성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과거 전장에서 피 묻은 병장기를 휘둘렀음을 자랑하는 어떠한 무술도 호이징가의「호모 루덴스」의 논리 앞에서는 역시 놀이에 불과하다. 실제로도 현대의 동양무술은 스포츠화를 지향함으로서 스포츠의 어원인 기분전환, 장난, 위로, 유희의 성격으로 변모했다. 경기, 경연, 연시(演試)를 하는 병장무술도 이제 경기가 본질인 맨손무술의 개념에 전면 포섭되었다. 이렇게 무예는 통시성과 함께 상황에 적응한 공시적 보편성을 가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報仇, 賭奪愛姬하는 택견은 무예인가, 스포츠인가?
장부(丈夫)의 하올 일은 말 타기와 검술이라.
이 평생 먹은 뜻이 서생(書生)으로 그릇했다.
어긔야 분한 세상 어이 까 하노라.

1937년 6월 7일 자 조선일보에 『한거감회(閒居感懷)』라는 제하로 실린 안확(安廓)선생의 시조이다. 무예를 천시한 결과 국력이 쇠약해져서 나라를 잃은 회한(悔恨)이 사무쳐 있는 이 시조는 문사들이 읊었던 여느 시조와는 관점이 사뭇 다르다.

택견에 관한 근대자료를 찾다보면 신채호, 안확, 이능화, 최영년 등의 인물을 접하게 된다. 그 중에서 최영년과 이능화는 부왜(附倭)지식인이었다는 점에서 찜찜한 구석이 있다. 더구나 이능화는 택견을 동성애와 연계시킨 기록을 남겼다.

그러나 <조선상고사>를 쓴 신채호와 <조선무사영웅전.1919>을 저술한 안확은 택견을 자랑스러운 민족의 상고무예(上古武藝)로 기록함으로서 우리들에게 긍지를 심어주고 있다. 필자는 지금까지도 조선무사영웅전에 필적할만한 무예에 관한 연구 성과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확에 대해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은 것은 애석한 일이다.

안확은 1886년(고종 23년) 서울 우대 누상동(樓上洞)에서 태어났다. 우대는 당시 택견이 가장 성행하던 고장이었다. 안확은 ‘두발당성’, ‘딴죽’ 같은 택견 용어를 기록했다는 점에서 택견을 잘 안다고 할 수가 있다. 조선시대 마지막 택견꾼 송덕기 선생도 우대(사직동)사람이다. 두 분이 일곱 살 차이이니 택견판에서 어울렸을 수도 있을 것이다.

안확은 아홉 살에 지금의 청계천 근처의 관립수하동소학교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배웠다. 따라서 독립협회운동의 역사적 현장에서 소학교시절을 보낸 셈이다. 그리고 이승훈, 안창호와 교분을 맺으면서 교육구국운동에 참여하였다. 그의 호(號) 자산(自山)은 자유. 자주. 자치의 사상을 의미한다. 그는 1910년 한일합방의 충격으로 그 이듬해 서울을 떠나 마산에 있는 사립 창신학교의 교원이 된다. 당시 학생이던 노산 이은상이 그로부터 큰 감화를 받은 회고록을 남기고 있다.

“시간 시간이 교단에 올라서면 글을 가르치기 전에 ‘너희들은 대한제국의 국민이다.’하고 우리들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이미 대한제국은 무너졌었다. 그러나 마산 창신학교 교단 아래 앉았던 우리들의 가슴 속에는 대한제국이 살아있었다. 다른데서는 꺼져버린 찬 재였지만 우리들에게 있어서만은 언제나 되살아나는 죽지 않는 불씨였으니, 그것이 바로 안확선생의 가르침이었다.”

안확은 교실수업에서 뿐 아니라 시국강연회를 통해 나라 잃은 통한과 울분을 목이 터져라 외쳤고 눈물을 흘리면서 학생들에 대한 교육의 중요성을 시민들에게 호소하였다. 특히 그는 “문(文)도 해야겠지만 무(武)도 닦아야 하겠다.”하며 축구와 야구부를 만들어 학생들이 민족체육을 진작 시키도록 했다. 그리고 그는 홀연 일본으로 유학의 길을 떠나 니혼대학 정치학과에 입학했다. 1916년 말에 유학을 마치고 다시 마산 창신학교로 돌아와 교사생활을 계속하면서 독립운동 조직에 참여한다. 1915년에 결성된 비밀결사 조직인 조선국권회복단의 마산지부장을 맡았다. 1918년 이회영(李會榮)이 주도한 고종 해외망명유도계획에도 참여한다. 민족해방운동과의 깊은 연관 아래 그의 국학연구는 더욱 진행되어 많은 저작을 했다.

<조선문법,1917>, <조선무사영웅전1919>, <개조론.1920>과 <자각론.1920> <조선문학사.1922>와 <조선문명사.1923>와 같은 주옥같은 명저를 연이어 내었다.

안확은 대내적으로는 유교중심의 조선시대를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설정하는 한편 대외적으로는 서구나 일본과 구분되는 조선의 특성을 발굴해 ‘조선이란 과연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고민한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가 가진 이런 사상적 기조는 그로 하여금 문존무비의 사조를 타파하는 무예중흥을 주창하게 하였다.

“정치생활은 말할 것도 없고, 상업을 경영 하던지 사사건건에 이 인내, 근면, 단결, 용감, 예의 등의 무사적 덕성이 없고서는 반드시 실패를 하고 말 것이니, 오늘날 우리가 어찌 이 무사정신을 강구하고 또 상득(相得)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안확이 조선무사영웅전 서문에 기록한 이 문구는 오늘날 체육도장의 회원모집 카피라이트로 사용할 수 있을 만치 현실적이다. 그는 조선무사영웅전의 무예고(武藝考)에서“근래에 씨름보다 소이(小異)한 박희(搏戱)를 행함이 있던 바, 소위 ‘택견’이라 하는 것이 그 종류다. 이것이 근일에 와서 퇴보한 형지(形止)에 이르렀으나 고려 때에는 크게 발달하여 매년 5월에는 연중행사로서 대 시합을 하였던 것이다.”라고 기록하였다.

고난에 찬 민족근대사의 한가운데서 국학의 웅대한 저수지를 일군 안확의 일생과 학문적 업적은 너무나 값진 것이다. 굴곡 없는 애국자요 선각자인 안확선생은 무예의 중흥을 통해 민족을 재건하고자 했고, 민족무예의 본류로서 택견을 거명하였다. 이렇게 훌륭한 선배가 있다는 사실은 오늘 날 택견을 하는 우리들에게 대단한 자긍심과 용기가 되고 있다.

 

필자는 부산에서 서울로, 충주로 오르내리며 송덕기, 신한승 두 분으로부터 택견을 배웠다. 작은 것 하나라도 배우는 족족 태권도 사범이었던 제자들에게 일일이 전수해줬다. 그 즈음, 부산항과 구덕운동장이 좌우로 내려다보이는 구봉산 산등성이 풀밭에서 30여명이 택견 연습을 하고 있었다.

지나가던 몇몇 등산객들은 발길을 멈추고 신기한 듯 구경하기 일쑤였다. 당시만 해도 고의적삼을 차려입은 뒤 “이크, 에이크”하는 기성(氣聲)과 함께 몸을 우쭐거리고 발을 높이 지르는 택견의 모습은 쉽게 접할 수 없는 ‘희한한’ 광경이었다.

“이보오 저거이 날파름이지비?”
“정말 거란 같시오. 날파름을 오가서 보다니 거참 신기하우다.”
바로 등 뒤에서 이북 사투리가 들렸다. 택견에 관한 정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던 필자가 아니던가. 귀가 번뜩 튀인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뒤를 돌아보니 70대 중반으로 보이는 점잖은 어르신 두 분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어르신, 혹시 이런 무예를 보신 적이 있습니까?”
“보다마다. 어릴 적에 피양 저자거리에 나가면 얼마든지 볼 수 있었지비.”
“그런데 이것을 날파람이 아니고 날파름이라고 합니까?”
“글쎄, 우린 기냥 날파름이라고 했꼬마.”

이야기를 들어보니, 두 노인은 평양이 고향이었다. 어릴 때 저자거리에서 택견판이 벌어지는 것을 자주 목격했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배우지 못했는데, 집안 어른들이 ‘저런 것은 겅두이(건달)들이나 하는 짓’이라며 구경하는 것조차 말렸다고 한다. 택견은 아직까지도 서울 이외의 지방에서는 용어 자체가 채집된 예가 없다.

그러나 전국에 걸쳐 이와 유사한 형태의 체기(體技)가 널리 분포됐던 흔적은 지방 곳곳에서 발견된다. 당장 필자가 초등학생 때만 해도 발로 차고 때리고 붙잡고 넘어뜨리는 과정이 전부인 ‘깔래기’라는 놀이를 하며 놀았다. 반 아이들끼리 편을 가르거나 옆반 이이들과 붙거나 이웃 마을 아이들이 패를 갈랐다. 누구에게 배우지도 않았고 규칙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주야장천 그런 놀이를 해왔다.

평양 근저에서는 그런 놀이를 날카로운 기세를 의미하는 ‘날파름’이라고도 불렀다. 함경도, 평안도에서는 ‘난다리’라고 하는데 ‘나르다’가 어원인 것으로 유추된다. 전북에서는 '챕이‘, 동부 경남은 ‘잽이’라고 명명했는데 이는 ‘잡이’의 방언이다. 이밖에도 ‘까기’ 혹은 ‘칠래기’라 하여 손바닥으로 치고 발로 차는 아이들의 놀이는 한반도 전역에 퍼져있다. 그러나 이런 토박이 싸움기술은 체계가 있거나 정형화된 학습방식이 있는 것도 아니다. 딱히 승부를 가르는 규칙도 불분명했다. 그저 민중들의 삶속에서 자생해오면서 세상인심과 생활습속이 녹아들어 일정한 특성이 만들어졌다고 짐작된다.


그런 중에서 서울을 중심으로 수도권 일대에서는 지난 1910년대까지 민속경기로 형태로 택견이 전래됐다. 그나마 어느 정도의 틀을 갖추고 전래된 유일한 맨몸격투기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택견 역시 승부방식은 단순간결하며 기법도 담백하다. 택견경기는 일단 상대방을 넘어뜨리면 이긴다. 그런데 넘어뜨리는데 있어서 상대방 몸이나 옷을 움켜잡는 것은 금한다.

그리고 발로 얼굴을 차면 승리하며 발로 온 몸을 공격할 수는 있지만 어느 경우도 타격을 가해서는 안 된다. 단, 상대가 찬 발은 잡아서 넘어뜨릴 수 있다. 그러나 고의로 남에게 상해를 입히거나 고통을 주는 짓을 하면 패악(悖惡)으로 쳐서 택견판에 발을 붙이지 못하게 했다. 택견은 지금의 태권도나 가라테, 무에타이와 같은 격술과는 분명 다른 것이었다.

태권도가 택견을 처음 만난 것은 1971년이다. 당시 대한태권도협회 김운용회장은 태권도의 세계화를 위해 해외홍보용 태권도동영상 제작을 계획했다.

그리고 태권도의 역사성을 고증하려고 택견꾼인 송덕기를 과거와 연결고리로 삼으려고 했다.

송덕기는 1956년 이승만대통령탄신기념 경찰무도대회에서 친구인 김성환과 함께 시범을 보인 일이 있다. 당시 대회장인 독립문에 있던 유도중앙도장에 참가한 검도, 유도, 당수 등 무예하는 사람들과 이런저런 일로 참석한 사람들은 택견을 구경했고, 오래도록 기억했다.

김운용은 태권도협회 사무과장이었던 임창수(1937~2007) 사범에게 지시해 두어 달 가량 송 선생으로부터 택견을 배우게 했다. 필자는 당시 창무관부산본관 사무국장이었고, 임 사범은 창무관중앙본관 사무총장이었다. 말하자면 같은 관 사무국의 직속 라인 선후배 사이였다.

71년 늦은 봄으로 기억되는 어느 날 창무관 전국사무국장회의가 신촌에 있던 창무관중앙본관에서 있었다. 언제나 남보다 빨리 회의에 참석하는 필자가 중앙본관에 들어서니 거울 앞에서 고의적삼을 입은 임 사범이 요상한(?) 동작을 하고 있었다.

인사를 하고서 한참 구경을 했다. 운동을 마친 임 사범은 이게 태권도의 할아버지뻘 되는 택견이라고 말해주었다. 필자가 최초로 택견을 접한 순간이다. 그 다음날 경회루에서 택견 촬영이 있다고 했다.

당시 경복궁은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돼 있었다. 필자를 비롯한 시골사범 서너 명은 경복궁 구경을 할 수 있다는 말에 촬영장에 함께 갔다. 같이 간 우리 일행은 택견은 일별(一瞥)뿐이었고 모두들 경회루 구경하는 데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송 선생과 임 사범의 택견동작은 당시 우리가 신봉하던 ‘한방에 골로 보내는’ 일격필살과는 거리가 있어 보여서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거저 연세가 많은 분이라 느려터지고 어둔한 동작을 하는 것이려니 생각했다.

참으로 무지몽매했다. 얼마 시일이 흐른 후 경회루를 배경으로 송 선생과 임 사범이 택견하는 모습의 사진이 표지로 장식된 「태권도」 1971년 가을호(통권3호)를 받아 보았다.

고의적삼에 짚신을 신은 두 분이 멋진 품을 보이고 있었다. 임사범의 어복(魚腹)을 송 선생님이 발등으로 걸어 올리는 딴죽 수를 쓰고 있는 모습이다. 이 책에는 택견에 대한 기사도 실렸다.

나는 직접 현장에서 목격했던 일이 기사로 실린 그 책을 잘 보관해두었다. 이 장면은 그 뒤 ‘태권도교본 품새 편’에 임 사범을 노인모습으로 손질을 해서 실었다.

이 사진은 태권도의 역사를 택견과 연결시키는 증거자료로서 아직까지 전 세계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태권도가 택견을 만난 것이 이때가 처음이라고 하면 의아해 할 수 있겠지만 1955년에 최홍의에 의해 만들어진 태권도라는 명칭이 공식적으로 사용된 것은 1965년이기 때문에 그 말은 온당하다.
택견이 경찰무도대회에서 공개되기 이전인 해방 직후에도 태권도와 택견이 조우한 중요한 사건이 몇 차례 있었다.

해방되기 전 해인 1944년 서대문 옥천동 영신학교 강당에서 청도관이 생겼다. 여기서 이원국으로부터 당수를 배운 손덕성은 송 선생과 이웃해 살았던 사람이다.

그 인연으로 손덕성은 자신이 배우고 있는 당수(가라테)와 택견을 접목하려는 시도를 했다. 여러 차례 송 선생을 찾아와 의논을 하던 중 이원국이 일본으로 밀항해 도피하는 바람에 손덕성이 청도관 2대 관장을 맡게 되자 논의가 일시 중단되었다.

때마침 일어난 한국전쟁은 당수와 택견이 접목해 새로운 한국무예의 시작이 될 기회를 무산시켰다. 전쟁 이후에는 박철희(1958년), 김병수(1964년)등 창무관 사범들이 송 선생께 잠간씩 택견을 배웠다. 당시 경무대 무도사범이었던 박철희 사범은 송 선생과 함께 택견동작 촬영을 하였다.

이 사진은 대형으로 만들어져 1960년 로마올림픽 현지의 한국문화 전시장에 전시하였다. 박철희 사범은 『사단법인 대한택견무도연구원』을 설립하려고 했지만 4·19혁명, 5·16쿠데타 등의 역사적 소용돌이 속에서 수포가 되었다.

두 번의 결정적인 기회가 역사의 거친 파도 속에서 실종되고 말았다. 오늘날까지 세계의 역사과정에서 우연적인 요인이 작용하여 커다란 변화를 가져온 사건들은 숱하게 많다. 그러나 우연인 것만 같은 사건들이 실은 역사적 파고 속에서 필연적 결과를 만들어 냈을 수도 있다. 해방을 전후해 주변국에서 유입된 무예를 당수, 공수, 가라테, 권법, 화수 등으로 불렀다. 이 무예들이 태권도라는 새로운 명칭으로 통합됐다. 1973년에는 태권도 내부의 주도권 다툼이 아예 태권도를 택견이라고 못 박을 작정으로 무형문화재 지정을 신청하게 된다.


이런 일련의 과정 속에서 태권도는 스스로 택견과 불가분의 관계를 단단하게 맺여줬다. 하지만 택견의 역사를 가져가고 발질위주의 택견이 가진 특성을 좇고, 택견과 음을 연결지으려고 跆拳을 ‘태꿩’이라는 고의적인 엉터리 발음을 하고 있는 태권도였지만 결국은 택견의 알갱이를 놓치고 말았다.

그 작은 한 톨의 알갱이가 종자로 양산되고 품질개량을 거쳐 대대적으로 파종돼 이제 영농(營農)을 하는 수준으로 커버렸다.

후일 무예사가들은 이를 우연이라고 할지 필연적 결과라고 할지 자못 흥미롭다.
지난 호에 “1973년에 태권도가 무형문화재 지정을 신청하게 된다”는 부분에 오류가 있었다. 태권도가 문화재 신청을 한 것은 1968년이고 지정할 수 없다는 문화재 위원의 결과보고가 1973년에 있었다. 물론 앞서 말한 대로 이 사건은 국제태권도연맹을 창설한 최홍희와 대한태권도협회 인사들 간의 주도권 다툼에서 파생됐다.

1954년 12월 최홍희는 명칭제정위원회를 만들어 ‘태권도’라는 명칭을 제안하고, 이듬해 4월 11일 대외적으로 공포했다. 이 과정에서 최홍희는 고래(古來)로 발을 주로 쓰던 ‘택견’과 손을 주로 쓰는 가라테를 절충해 만든 것이라는 의미로 태권(跆拳)을 생각했다고 했다. 일부에서 최홍희가 사단장이던 보병29사단의 가라테 시범을 관람한 이승만 대통령이 “택견이구만”하는 말을 한 데서 힌트를 얻었다고도 하지만 어찌됐던 태권도라는 말은 이때 최홍희에 의해 작명된 것이다.

최홍희는 1959년 국군 태권도 시범단을 인솔해 동남아 각국을 순회하고 이 여세를 몰아 대한태권도협회를 결성했다. 당연히 최홍희에 반대하는 사람들과 대립이 생겼고, 반대파의 중심인물은 무덕관의 황기였다 협상 끝에 황기가 이사장을 맡고 최홍희가 회장을 하기로 했다. 그러나 황기는 암암리에 추진한 대한수박도협회가 1960년 문교부로 부터 사단법인 허가가 나자 대한태권도협회와 결별했다.

그런 와중에 5·16이 터졌다. 명분 상 혁명군 사령관이던 장도영중장과 호형호제하던 사이였던 최홍희(논산훈련소장)는 혁명군 부대를 이끌고 대전까지 진격했다. 혁명이 성공했지만 박정희에 의해 장도영이 반혁명분자로 몰려 제거되자 최홍희는 예정된 중장진급도 취소된 채 예편해 초대 주 말레이시아 대사로 유리안치가 된다.

이 시기를 전후해 군사정부에 의해 유사단체통합령이 내려지고 대한태권도협회는 대한태수도협회로 개칭돼 체육회 가맹이 됐다. 태권도가 태수도가 된 것은 당수, 공수라는 명칭에 익숙해져있던 사람들에게는 ‘태수’가 그나마 났다고 생각됐던 것이다. 여기서 태권을 주장한 최홍희와 여타 다른 사람들 간에 불화는 더욱 깊어졌다.

1965년 최홍희는 대한태수도협회장이 된다. 당시 군사정권의 실세들 중에는 최홍희를 존경하는 후배들이 많았다. 정권의 2인자 김종필이 국제태권도연맹 명예총재를 맡은 것도 그런 맥락이다. 그리고 그해 8월 태수도협회는 임시 대의원총회를 열어 단체 명칭을 대한태권도협회로 변경한다. 唐手, 空手, 跆手 등 ‘手”자 돌림을 선호하던 태권도 인사들은 이에 반발했다.

결국 최홍희는 1년 만에 회장직에서 퇴임하고 만다. 이런 주도권 다툼에서 최홍희는 문화재 지정으로 돌파구를 찾으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는 택견이 문화재가 되는 단초가 되고, 그 당시 이 일과 관련해 필자가 겪은 일이 생생하니 어찌 세사가 교묘하지 아니한가.
1967년 국제태권도연맹에서 실시한 『제2기 국제사범교육』이 개최됐다. 참가자격은 4단 이상, 15명으로 제한돼 있었다. 당시 3단이던 나는 교육을 받고자 꾀를 냈다. 사범교육 훈련장이던 오도관 영등포도장의 교범이 돼 자연스레 교육에 참가했다.

그 이듬해쯤인데 최홍희가 동남아 일주를 마치고 귀국하는 시기에 맞추어 재경태권도 사범단의 이름으로 최홍희를 비난하는 광고기사가 신문에 실렸다. 분개한 국제사범들은 영접을 나간 김포공항 귀빈실에서 최홍희에게 강력대응을 건의했다. 이 자리에서 최홍희는 대응방안의 하나로 태권도를 문화재로 지정받는다는 계획을 말했다.

그때는 가을이었는데 봄에 신청한 문화재지정이 예기치 못한 반대에 부닥쳐 지연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사범 몇몇이 반대자에 대해 테러도 불사해야 한다며 과격한 발언을 하자 최홍희가 이를 만류했다.

당시 문화재 관리국장은 준장으로 예편한 사람이었는데 과거 최홍희 밑에서 부관을 하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태권도와 택견의 전통 계승을 사적고증을 한 사람은 박정희의 신임이 두터웠던 영남대 총장 이선근이었다. 그가 육군정훈참모(대령) 때 젊은이들의 국방의식을 높이는 방안을 강구하라는 이승만의 지시에 따라 삼국유사에 나오는 세속오계를 화랑오계로 바꿔치기한 인물이다. 이선근은 6·25 당시 최홍희가 사단장으로 있던 부대에서 정훈참모를 지냈다. 그리고 조사를 맡은 문화재 위원은 최홍희 부대에서 종군기자로 근무했던 한국일보 문화부장 예용해였다.

이런 인적구성으로 볼 때 태권도가 문화재로 지정되는 것은 따 논 당상이었다. 그런데 바로 예용해라는 사람이 태권도가 가진 성예(聲譽)와 과학적 구성에도 불구하고 문화재는 과거 형태가 온전히 보존돼 있어야 함으로 태권도를 문화재로 지정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고집을 부린다는 것이었다. 최홍희가 쇼토칸 가라테를 배운 사람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그는 문화재 국장과 이선근의 설득에도 움쩍도 않았다.

이런 사람을 두고 당시 최홍희를 추종하던 필자를 포함한 사범들은 매국노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최홍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해 여러 방법으로 위협을 가했다. 필자는 이 일을 까맣게 잊고 있다가 1983년 택견을 조사하면서 그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가 생각이 났다.

그때 일을 물어보니 예 선생은 최홍희를 비롯한 주위로부터 많은 회유를 받았고, 사범들로부터 전화폭언, 미행 등의 갖은 협박을 당했다고 했다. 그래도 언론인으로서, 문화재 위원으로서 양심을 끝까지 지킬 수 있었던 것을 다행이라고 말했다. 최홍희가 망명을 가고 난 후에야 제출 된 그의 보고서에는 택견을 문화재로 지정해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

오늘날 택견이 부활을 할 수 가 있었던 것은 그의 양심 때문이다. 그는 10여 년 전에 작고했지만 지식인이 가지는 역사적 소명을 깨우쳐주었다.
필자는 지난 1967년 9월, 오륙도가 멀리 보이고 부산항이 발 아래에 펼쳐져있는 구봉산 중턱 한데에 도장을 개설했다. 그 도장은 맨흙바닥이었지만 소나무 가지에 군용 다불 백을 달아두었고, 마당가에 두꺼운 각목으로 만든 단련봉을 몇 개 세워뒀다.

매일 새벽 6시가 되면 어김없이 이곳에 나와 주로 단련봉 치기를 했다. 단련봉 위쪽에 세 갈레 땋기를 한 새끼줄이 칭칭 감겨 있는데 그기를 정권지르기, 수도치기, 역수도치기, 팔꿈치치기로 때렸다. 오른쪽 100번, 왼쪽 150번씩 정해 두고 단련을 했으나 정권과 수도 단련은 2회 씩 반복했다.

초겨울이 되면서부터 짚으로 꼰 새끼가 꽁꽁 얼어서 얼음덩어리가 돼버린다. 단련봉에 새끼를 감는 이유가 탄성을 유지하자는 것인데 전혀 효과를 볼 수 없는 것이다. 이런 단련봉에다 정권지르기를 하면 주먹머리의 피부가 벗겨져 나가기 일쑤였다. 그래서 단련봉의 새끼는 항상 피로 물들어 시커먼 색깔로 변해 있었다. 지금 돌이켜봐도 참으로 고통스러운 수련이었다. 이렇게 단련을 한 덕분에 주먹머리가 밤톨같이 툭 튀어나오고, 손모서리는 찐빵처럼 부풀어졌다.
보통 사람들은 이 손만 보고도 기가 죽었다. 그 주먹은 과시용이 되기에 충분했다. 동양무예는 대개 이런 식으로 손을 단련한다. 특히 중국무술에는 철사장 등의 비전된 연마법이 있다고 선전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단련을 아무리 해봤자 사람의 손을 망치나 칼 대신 사용할 수는 없는 일이다.

뿐만 아니라 주먹머리가 많이 튀어나왔다고 해서 실제로 대련을 하거나 길거리 싸움을 잘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고통 때문에 근육이 너무 경직돼서 유연성과 스피드가 떨어져 역효과가 나타난다.

그래도 수족단련의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고통을 참으면서 단련하는 과정에서 인성이 강화될 수 있다.

택견에는 이런 수족의 단련법이 특별히 전래돼 있지 않다. 송덕기 선생의 말씀에 따르면 까치발 돋움, 난간다리 짚기, 손으로 호두알 굴리기, 발 장심으로 나무치기, 바위 구르기 등이 있었다고 하나 그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보편적인 것이다.

최근에 일부에서 택견을 홍보하려는 마음이 급해서인지 택견의 옛법이 필살기라고 선전하거나 옛법만의 독특한 수족단련법과 사용방법이 있으며 이것이 비전돼왔다는 인상을 주는 것은 택견의 한 차원 높은 가치를 폄훼하는 우려스러운 일이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공격성을 가지고 있다 이를 ‘근원적 경향성(Original tendency)’이라고 말한다. 이 근원적 경향성은 상대의 안정을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해야하는 맨몸격투에서도 잔존해 있다. 어떻게든 경쟁에서 이기려는 욕구는 보다 강한 기술과 이를 실행할 수 있는 신체를 가지기를 원했다.

그러나 격투의 룰은 이러한 인간의 본성을 제어하기 위해 한층 강화된다. 그러자 본성은 우회적인 방법을 찾아냈다. 상대방과 신체접촉을 하지 않고 혼자 하는 방법이다.
투로, 형, 품세경연, 격파, 묘기시범 등이 그것이다. 사람대신 벽돌, 기왓장, 돌 같은 단단한 물체에 대한 파괴력을 측정하는 것으로 우열을 판단해보는 것이다. 묘기를 잘 부리고 파괴력이 강하다고해서 실제 싸움에서 유리한 것은 아니지만 가장된 가치에서 대리만족을 얻는 것이다.
최근 택견의 ‘옛법’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흔히 택견의 옛법을 살수(殺手)라고 한다. 옛법이라는 명칭이 옛날에는 사용했지만 지금은 위험하니 경기에서 사용을 금지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그러나 송덕기 선생으로부터 전수된 ‘밟기, 곧은 발질, 찍기, 깎음다리, 무르팍치기, 안경 씌우기, 장 못 치기, 코침 주기, 고막치기, 낙함, 턱걸이, 도끼질, 항정치기’ 등은 그 가지 수도 많지 않지만 기술구조를 살펴보면 위력과 용도가 현재 각종 무예에 비해 특별하지 않다. 그럼에도 최근 일부 택견인은 옛법이라는 이름으로 격파를 해보이며 위력을 자랑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필자가 1985년에 처음 택견의 대중화를 목적으로 각 급 학교, 군중집회 등에서 택견공연을 하던 그 당시만 해도 택견에서 마땅하게 보여줄 만한 게 없어서 격파와 묘기 발차기를 보여주었다. 공연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런 시범에 능숙한 태권도 사범출신이었다.
한번은 사립초등학교 전교생을 모아놓고 택견강습을 하면서 먼저 예의 격파를 포함한 시범을 보여 주었다. 그러자 꼬마 하나가 손을 번쩍 들더니 “태권도와 똑같아요. 택견과 태권도가 같은 거예요?”했다. 필자는 이 말을 듣는 순간 태권도와 차별되는 택견다운 택견만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다.

지금까지도 이 생각이 올바른 판단이었음을 확신하고 있다. 각 민족의 전통적인 신체활동은 그 고유의 생활습속과 깊이 연결돼 있다. 택견에는 100년 이전의 이 땅에 살던 사람들의 삶의 모습과 가치관이 담겨있고 당시 선인들의 생생한 숨결과 지혜가 배어있다.

그것을 현재의 가치관이나 기준으로 평가하면 오류가 생기게 된다. 그런 점에서 최근 택견의 옛법을 마치 유사한 다른 무예처럼 보이게 하는 행위는 심사숙고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최근 TV에서 ‘신이라 불리 운 사나이’라는 드라마가 인기를 끌고 있다. 100여 년 전 서울 한복판에서도 신이라 불리 운 사나이가 있었다. 그는 1876년 경기도 고양군 대화리 뱀개(사포-蛇浦)에서 태어난 김경운이라는 택견꾼이다. 1993년 필자는 김경운의 행적을 조사하기 위해 고양시 대화동 뱀개마을을 찾아 갔다.

일산 신도시 한쪽에 있는 뱀개는 그때만 해도 돌담을 둘러친 슬레이트 지붕의 작은 집들이 웅기중기 모여 있고, 동구 밖에 당산나무가 서 있는 전형적인 갯마을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뱀개 사람들은 나룻배에 채소나 땔나무를 싣고 삼개(마포-麻浦)로 가서 경상(京商)에 팔거나, 혹은 소등에 땔감을 지워서 장안에 내다 팔았다.

키가 훤칠하고 성격에 넘늘이가 있던 경운도 이런 장꾼들의 주릅이었다. 그는 고양과 장안을 왕래하면서 당시 우대 택견꾼으로 명자가 높았던 임호, 장칼, 송덕순, 덕원 형제 등과 교유했고, 구리팔개로 알려진 박무경 같은 아래대의 명인들과도 친했다.

덕순, 덕원은 송덕기의 형이다. 그런 인연으로 송덕기는 어린 시절 경운의 발질을 익히 보아왔다. 사람들은 경운의 발재간을 보고 신기(神技)라고 했고 그게 어느새 그의 별호가 되었다. 사람들은 그를 신기선생이라고 불렀다.

요즘처럼 이른 봄날의 어느 날, 경운은 피마 골에서 늦은 중화를 들고 청계다리 쪽으로 걷고 있었다. 이때 여러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는 광경을 목도했다.

그곳에는 한 장사치 사내가 하까마와 나가기 차림의 일본인 세 사람에게 얻어맞고 있었다. 사내는 무엇을 잘못했는지 연신 발길에 채이고 주먹으로 얻어맞으면서도 그저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아 비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누구하나 말릴 생각도 하지 않았다.

“쪽바리 왜놈들이 남의 나라에 와서 백주에 조선인을 매질하다니!”
사단이야 어찌됐건 경운은 피가 거꾸로 솟는 것을 느끼며 몸을 날렸다. 순식간에 왜놈 세 명이 경운의 발질을 맞고 바닥에 나뒹굴었다. 두목 격으로 보이는 놈이 몸을 일으키더니 허리에 찬 장검을 뽑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경운은 그 자의 목울대를 발끝으로 냅다 질렀다. 왜놈은 외마디 비명조차 내뱉지도 못하고 꺼꾸러졌다.

그 후로 경운은 왜놈들이 조선인들을 멸시하며 하대하는 것을 볼 때마다 달려들어 흠신 두들겨 패주었다. 일본경찰은 경운을 체포하려고 눈이 시뻘게져 있었다. 그러나 경운이 워낙 날래서 경찰은 번번이 눈앞에서 놓쳤다. 이후 경운은 집을 급습한 왜놈순사들을 때려눕힌 뒤 경찰의 포위망을 뚫고 달아난다.

여기까지가 실제 사건이다. 이후 경운의 행적은 알려진 것이 없다. 그러나 경운은 1995년 ‘풍운영웅’으로 스포츠조선의 극화를 통해 다시 나타난다. 경운이 의병과 독립군으로서 일본군대를 상대로 싸우며 민족의 복수를 위해 신이라 불리 우는 사나이로 활약하는 것이다. 안중근의사 순국 100주년을 맞아 다시 생각나는 이 이야기는 다음 호에 계속하기로 한다.
1993년 3월. 흥사단 본부 강당에서 ‘제1회 택견학술발표회’를 열어 오늘 날 택견의 이론적 토대가 된 『택견의 구성 원리』를 발표했다. 이 자리에 당시 민속학회 회장인 중앙대 김선풍 교수가 참석했다. 김 교수는 내 발표를 들은 뒤 5월 중앙대에서 주최하는 아시아 민속학회에 발표자로 참가해달라는 요청을 했다.

지금도 그러하지만, 택견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염치불구, 체면불구하고 덤벼들던 나였으니 당연히 승낙했다. 여기서 『1910년대 서울의 결련택견』이라는 제목으로 논문을 발표했다.

여기서 상당히 좋은 반응이 있었고 이것을 계기로 민속학회 정회원이 됐다. 그리고 그 해 8월에 중국연변대에서 개최하는 ‘제1회 국제 조선민속학술대회’에 한국 측 발표자의 한 사람으로 참석했다.
이 학회에는 한국, 중국, 일본, 러시아, 미국, 유럽, 몽골, 카자흐스탄 등의 학자들이 대거 참가할 뿐 아니라 특히 북한 민속학자 9명이 참석하기로 돼 있었다.

당시 남북교류를 적극적으로 추진하던 YS의 문민정부는 이 행사에 관심을 가지고 지원을 해주었다. 남북이 갈라진지 반세기가 지남에 따라 남북의 문화적 이질성이 점차 고착돼 갔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남북 양측의 문화적 공통분모가 되는 민속학은 남북교류의 물꼬를 트는데 매우 적당한 소재였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이 학회에서 북한에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택견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으로 생각해 기대를 많이 했다.

그러나 이 학회에서 북한 민속학자들과의 만남은 그들이 사전 양해도 없이 불참해버림으로서 무산됐다. 꿩 대신 닭이라고, 필자는 여기서 북한에서 파견된 태권도사범 둘을 만나게 됐고 이들에게 태권도를 배우고 있던 유림이라는 태권도 2단 짜리 조선족 청년을 만났다.

유림은 스무 살의 연변대학생이었다. 키가 후리후리하고 발차기를 잘했다. 고등학생 때는 중국 국가대표 급 복싱선수였다고 한다.

나는 이렇게 발차기에 천부적 소질을 가지고 있는 청년이 혹시 과거 만주로 피신한 택견꾼의 자손이 아닌 가 상상을 했다. 그 청년의 모습에서 송덕기 선생으로부터 들었던 김경운이 연상됐기 때문이다. 이것이『소설 택견』의 모티브가 됐다.

그래서 그로부터 수년간 필자는 팔자에도 없는 소설을 쓴다고 머리를 싸매게 된 것이다. 택견을 소재로 소설이 나오면 세간의 관심을 끌 것이고 그것은 곧 택견의 홍보가 되는 일이었다.

내가 『소설 택견』의 초고를 들고 다니던 중에 해동검도 나한일 회장과 만나게 됐다.
나 회장은 당시 경죽영화사를 창립해 광복 50주년 기념 블록버스트 영화제작을 추진하고 있었는데 마침 『소설택견』이 그 컨셉트와 딱 맞았다.

나 총재와 수개월 동안 영화제작 준비로 사방팔방으로 쫓아다녔지만 영화를 만들지는 못했다.

경죽영화사가 김수용 감독의 말미잘 단 한편을 제작하고 문을 닫은 것이다. 그 후 만화출판사 간부의 소개로 인기극화 『거지왕 김춘삼』의 작가 장태산 화백이 이 미발표 소설을 원작으로 『풍운영웅 택견꾼 김경운』을 스포츠조선에 연재했다. 첫머리에 필자가 화자(話者)로 등장하는 이 극화는 6개월 간 연재됐고 묻혀 있던 조선말엽 격동기를 살았던 택견꾼 김경운이 재조명되는 계기가 됐다.

김경운은 경강일대를 무대로 하는 주릅(거간꾼-중개인)이었음으로 전국 각처의 물정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서울을 내왕하던 시기는 일본이 조선을 먹으려고 온갖 간악한 계략을 부리고 있던 때였다. 을미년, 왕후의 시해음모는 조선에 살고 있던 일본인들 입에서 먼저 유포되고 있었다.

친러정책으로 일본을 배척하고 있는 민 왕후를 죽여야 자기들이 살수 있다는 소리가 일본 장사치, 낭인들 사이에 공공연히 떠돌았다. 이런 소문은 일본인들과 상거래를 하는 장사꾼들의 귀에 먼저 들어왔다.

그런데 왜놈들의 입에서 나온 소문대로 일본 낭인들에 의해 궁궐이 유린되고 왕후가 시해됐다. 그리고 국모시해를 복수하고 궁궐에 유폐된 임금을 구출하고자 조선군(시위대)이 춘생문으로 쳐들어갔으나 실패했다.

일본은 이 사건을 빌미로 왕후 시해 주동자로 재판을 받던 48명의 일본인을 모조리 무죄로 석방했다. 조선 사람들은 치를 떨며 일본인을 철천지원수로 여겼다.
그로부터 14년 후(1909년) 국모시해의 주모자 이토후루부미가 안중근 장군의 총탄세례를 받는다.

안중근은 이토를 처단한 이유의 첫 번째가 바로 국모시해의 원수를 갚는 것이라고 했다. 을미년 국모가 시해된 그해는 조선천지 방방곡곡에서 항일의병이 봉기했다.

이런 시대였으니 그 당시 의협남아 택견꾼들이 가만있지 않았을 것은 불문가지이다. 항일의병과 독립군으로 대륙을 무대로 활약하는 풍운의 택견꾼 김경운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지난 5월 10일 한국의 대표 지식인 109명은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1910년 한일 병합이 원천무효』라는 내용을 골자로 한 성명을 발표했다.

일본 지식인 105명도 이날 도쿄 일본교육회관에서 같은 내용을 발표했다. 이 보도를 보면서 다시 한 번 고달픈 택견의 과거를 반추해보게 된다.

한일병합의 전초인 을사보호조약(1905)이 이토 히로부미가 고종을 협박하여 강제 체결되었다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자 온 국민이 분노하였다. 때마침 황성신문에 실린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제하의 논설은 국민의 의분을 격동시킨다.

곳곳에서 을사오적에 대한 암살, 방화, 테러가 발생하고, 지방에서는 의병이 벌떼같이 일어났다. 역사상 민족의 자주의식이 어느 때보다 드높았던 이 시기에 일본경찰의 추격을 피하여 고향을 떠난 경운의 행적은 의병으로 옮겨진다. 1906년 3월, 경운은 이름 없는 의병으로 의병장 민종식의 지휘에 따라 홍주성으로 쳐들어갔다. 일거에 홍주성을 점령했으나 이내 일본군 중화기를 앞세운 관군에 패하고 만다.

경운은 다시 최익현 의진에 편성된다. 최익현이 피체되는 순창관아 현장에서 유명한 택견꾼이자 관군 장교인 구리팔개 박무경의 도움으로 탈출한다.

그리고 예산의 이남규 저택으로 피신하여 민종식의 재 거병에 참가하는 한편 고종황제의 밀칙을 받은 시종무관의 부탁으로 택견교본을 만들게 된다.

그러나 일진회의 밀고로 거병은 실패하고 이남규와 그의 가솔들이 도륙을 당한다. 경운은 여기서 일본군을 살상하고 피신, 발질의 명수로 용명한 영해의병장 신돌석을 찾아 간다.

신돌석과 함께 안동 감옥을 부수고 돌석의 부인을 구출하지만, 신돌석 역시 일본이 내건 현상금에 눈이 먼 친척 동생들에 의해 처참하게 피살되고 만다.

경운은 동족과 친척의 배신에 의해 영웅들이 참살되는 참혹한 현실에 낙심하여 만주 산림지대에서 벌목꾼으로 은둔한다. 그러나 마적에 좇기고 있는 독립군 밀사를 구해주는 것이 계기가 되어 북로군정서 김좌진 막하로 들어가 유명한 청산리 전투에 참전하여 큰 공을 세우기도 한다.

하지만 일본군의 대대적인 토벌작전이 시작되자 독립군은 죽음의 행군 끝에 소련 자유시(스바보드니市)로 이동한다. 이곳에서 경운은 거구의 러시아 삼보선수와 대결하여 승리한다.

경운의 무예를 흠모하는 적군 간부가 경운을 공산주의자로 끌어들이려하고, 이 과정에서 경운은 흑하사변(黑河事變)으로 기록되는 독립군참변에서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구한다. 그리고 김좌진과 함께 만주 영고탑에 독립군 마을을 건설한다. 그리고 김좌진의 밀사로 상해 임정을 내왕하며 일본 밀정을 발질로 차 죽인 백범 김구를 만나면서 차츰 독립운동의 참된 의미를 깨닫는다.

한편 청산리 시절부터 경운에게 택견을 배운 젊은이가 김좌진의 밀령을 받고 서울에 잠입, 김좌진과 호형호제하는 청년 송덕기를 만난다.

송덕기는 임호 등 당시 서울에 잔존해 있던 택견꾼들과 힘을 모아 단오절『결련태』를 열고, 김좌진의 밀사는 석전의 혼란한 틈을 이용, 일본경찰의 감시를 따돌리고 군자금을 수령해간다. 1930년, 독립군내부에 침투한 공산주의자에 의해 김좌진이 암살되자 경운은 슬픔과 분노, 절망감에 사로잡혀 복수를 결심하고 범인을 좇는다.

하지만 인간의 내면을 통찰하게 된 육순의 노 협객 경운은 백두산으로 들어가 잠적한다.

역사가 헤로도투스는 역사란 사건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사건에 의미성을 부여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 점에서 앞서 3회에 걸쳐 소개한 소설 속의 김경운 일대기는 일제 강점기 당시 택견의 상황을 공감해본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구전하는 김경운에 대한 정보는 그가 고양 뱀개 사람이며 택견을 잘했고, 못된 짓을 하는 일본인들을 징치했으며 일본 경찰의 추적을 피해 어디론가 달아났다는 것이 전부이다.

그러나 송덕기와 교분이 있었던 독립군 사령관으로서 저 유명한 청산리대첩의 영웅 백야 김좌진이 발질의 명수였다는 기록도 있고, 백범일지에는 김구가 발질로 일본 밀정을 차서 쓰러뜨리는 사건이 자세하게 묘사돼 있다.

의병장 신돌석도 각력이 뛰어나 발질로 일본군인 대여섯을 때려 눕혔다고 하니 바로 이들 민족영웅들의 활약상이 김경운에게 투영되어 나타난 것이다.

흔히 택견꾼들이 일제의 압박에 의해 산간으로 숨어들었다고 하였고 어떤 네티즌은 송덕기 선생이 숲속으로 피신해 다녔다고 했지만 이것은 참말이 아니다. 실제로 해방된 이후에 산속에서 시중으로 돌아온 택견꾼이 존재하지 않았으며, 송덕기 선생은 쭉 서울에서 생활해왔으니까.

더구나 일본 식민지 정책에 의해 택견이 전적으로 무기력했다거나, 철저히 망해버렸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소설 속의 김경운이 말해주는 것이다.

택견은 편린적인 문헌 기록 외에는 뚜렷하게 내세울만한 자료가 없는 상태에서 겨우 1910년대까지 택견선수로 뛰었던 송덕기라는 단 한 명의 택견꾼에 의해 과거로부터 오늘 날로 이어졌다.

택견은 무예도보통지 같은 문헌이 없고, 연로한 특정인 한 사람의 기술만 전승됐다.

그러니 택견의 전부가 아닐 수 있고, 그럼으로 현재의 택견은 전통성을 수긍하기 어렵다고 말하는 사이비 전통무예인들도 있다.

그러나 최근에 동일한 텍스트(무예도보통지)로 무예를 복원했지만 연구자에 따라서 상당히 다른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 사실로 미루어 보면 무예를 도보(圖譜)와 문자(文字)에 의존하여 해석한다는 것이 전통성 유지에 많은 문제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비하여 비록 충분한 기술구사가 힘들 만큼 연로하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오랜 활동경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직접 가르치는 것은 전통계승의 가장 확실한 방법일 수 있다.

한 사람의 특정한 기술이 그 사람의 독창적인 기술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선대로 부터의 전승과 문화적 배경 등이 작용한 결과이며, 기초적인 동작 하나에서 많은 기술을 추출해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무형의 문화는 문자와 그림 등의 기록만으로 완전한 전승이 불가능함으로 무형문화재지정제도에서 철저히 인적계보전승을 기준으로 하는 것을 참고할 수 있다.

1990년대에 와서 택견은 계보의 전통성 논쟁이 뜨거웠다.

특히 태권도인들은 필자가 “태권도는 가라테의 한국적 변형 태(變形態)”라는 주장에 민감하게 반응하여 송덕기, 신한승 두 분 택견보유자를 사사한 필자의 택견경력을 부정하거나 무시하려고 하였다.

철학박사인 어느 태권도인은 “택견 인간문화재의 견해와 차이가 있는 택견자료들은 독자들에게 권하고 싶지 않다.”고 하여 세계택견본부나 대한택견연맹 등 공식기관을 통해 제공되는 정보의 공신력을 떨어뜨리려는 저의를 숨기지 않았다.

무예신문의 연재를 통해 택견의 역사가 대중들에게 분명하게 널리 전달되는 것도 그런 사람들에게는 꽤 신경 쓰이는 일일 것이다.

택견사가 알려지는 그 만큼 태권도 전통성의 근거가 허물어지는 것은 그들로서는 일변 두려운 일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늘을 가리려고 제 눈앞에 손바닥을 펴면 제 눈에만 하늘이 보이지 않을 뿐 수많은 다른 사람들의 눈마저 가릴 수는 없는 법이다.

이제 태권도가 택견과의 관계에 대하여 사실을 왜곡하거나 억변으로 거짓을 감추려고 하지 말고 진실에 근거하여 새로운 사실(史實)정리를 하는데 관심을 가져야 할 때가 됐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두세 번에 걸쳐 택견의 역사와 관련하여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두 가지 주제를 다루는 것으로 이 연재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주제중 하나는 태권도와 택견의 관계이며 또 하나는 택견의 원형에 관한 문제이다. 초·중·고 체육교과서에는 태권도가 교과로 수록되어 있다.
아마 1975년부터 교과서에 실린 것으로 기억되는데 초기에는 택견을 계승하여 현대 스포츠로 발전시킨 것이라고 하더니, 10여 년 전부터는 택견, 수박 등으로 불리던 것을 태권도로 명칭을 조정하였다고 설명했었다.

최근에는 이런 말이 사라지고 삼국시대 이전부터 있었던 전통무예라고 모호하게 소개하고 있다. 추측컨대 택견이 사단법인으로, 국민생활체육회, 대한체육회 가맹 등으로 지위가 강화된 것에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태권도는 태생적으로 택견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1955년 최홍희에 의해 “태권(跆拳)”이라는 말이 만들어졌을 때 택견의 전통을 계승하겠다는 의도가 분명했다. 그래서 최홍희는 “태권”의 발음을 “탯꿩”으로 해서 택견과 어음을 연결시키려고 했다. 때문에 아나운서들까지도 아무 생각 없이 태권을 탯꿩으로 발음하고 있다.

가끔 필자가 이점을 지적하면 그때서야 “아! 정말 발음이 문법에 맞지 않네요.” 한다. 태권도라는 명칭이 제정된 과정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1961년 5·16혁명(쿠데타)정부가 ‘유사단체통합령’을 발포함에 따라 당수, 공수, 수박, 권법, 화수 등 여러 명칭으로 분파되어 하나의 경기단체를 구성하여 대한체육회에 가맹하게 될 당시는 “태수도”였다.

다시 육군 소장으로 쿠데타군의 일원이었던 최홍희가 태권도로 명칭을 정하자고 주장했지만 당수, 공수 등 “수(手)”자에 익숙해있던 대다수 유사무술지도자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닥쳤다.

결국 양 측(최홍희와 사회 무술인)의 주장을 반반씩 수용하여 태수도라는 명칭이 생긴 것이다. 그리고 1965년 최홍희가 태수도협회장이 된 후 명칭 개정을 하여 태권도가 되었으니 공식적으로 태권도라는 명칭은 45살짜리에 불과하다.

최홍희는 자신이 어릴 때 고향에서 발을 주로 사용하는 택견을 배웠고, 일본 유학 시절에 손을 주로 쓰는 가라테를 배웠다고 했다. 그리고 보병 29사단장으로 재직하는 시기에 택견과 가라테를 절충하여 태권도를 창안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발질의 의미를 가진 태(跆)와 주먹이라는 뜻의 권(拳)을 합쳐서 태권이라고 하였다고 하였다. 기술체계와 명칭은 누가 뭐래도 잘 어울린다. 그리고 식민지통치를 막 벗어난 우리사회의 극일, 배일 등의 분위기와 국민정서가 허구로 만든 태권도 역사를 적당히 수용해주었고, 전통무예로 자처하는 것도 눈감아 주었다.

필자는 60년대에 최홍희로 부터 직접 창헌류를 지도 받았다. 또한 그의 수족처럼 움직였던 ITF 사범들로부터 많은 기술을 배웠다. 따라서 필자는 최홍희와 그의 태권도를 비교적 잘 알고 있다. 태권도 사에서 최홍희는 공과를 초월하여 영원한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가장 존경받을 수 있는 무예인으로 꼽고 있다. 그러나 필자가 심취해서 수련했던 창헌류 태권도에는 창안자가 주장한 것과는 달리 택견의 흔적도 발견되지 않는다.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구하기 위해 필자는 1998년 캐나다 토론토에 있는 최홍희 총재의 자택을 방문하여 2시간 넘게 면담을 하였다.

방문하기 한 달 여 전에 편지로 질문요지를 보냈다. 그리고 양해를 얻어 녹화를 하였다. 결과를 먼저 말하면 필자가 알고 있던 대로 태권도와 택견은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무예의 경우 그 승계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제일 우선 되는 게 인적계보이다. 누가 누구에게 배웠다는 사실이 필수적이다. 그리고 기술과 학습체계를 파악하면 된다.

6·25전쟁 이전, 오늘 날의 태권도 형성에 간여한 사람들 중에서 택견을 실제로 경험했다고 진술한 사람은 최홍희 뿐이다. 따라서 그의 증언과 그가 만든 창헌류 태권도의 기술체계에서 택견과 관련된 부분이 있는지를 찾아서 택견과 비교분석을 하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었다.
그리스에서 가장 빨리 달리는 아킬레스와 느릿느릿 기어가는 거북이가 경주를 한다면 승부는 보나 마나일 것이다. 그런데 거북이에게 핸디캡을 주어서 50m쯤 앞에서 출발하게 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래도 아킬레스가 금방 따라잡고 앞서지 않겠는가. 이렇게 뻔한 이야기를 그리스 철학자 제논(BC 335~BC 263)은 아킬레스는 결코 거북이를 앞지를 수 없다고 주장했다.

아킬레스가 거북이를 앞지르기 위해서는 거북이가 출발한 지점까지 와야 되고, 그 지점에 도착하면 거북이는 조금이라도 앞서게 될 것이고, 이런 상황에 계속되기 때문에 아킬레스는 영원히 거북이를 앞설 수 없다는 것이다. 여러분은 제논의 이런 주장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한 때, 인터넷상으로 유포된 바 있는 태권도와 택견이 동일하다는 주장도 이와 유사하다. “....... 택견과 태권도의 특징이 외래무술과 차별성(독특성)이 있는 반면, 택견과 현재 태권도가 동일한 특성(동일성)이 있으며, 이러한 특성이 민속의 형태로 전승되었다(지속성).

그 와중에 가라테의 영향을 받긴 했지만, 일본 무술의 근대적 교육의 틀, 단급제도 같은 외형적인 것에 주로 한정되고....... (가라테 형과 유사한) 품새는 태권도의 핵심이 아니며, 핵심은 겨루기와 그 겨루기 기술에 있고, 그 기술들은 화려한 발차기 중심인 택견과 같고, 이러한 겨루기 기술과 품새 기술이 이질적이니까 가라테와는 다른 것이다.”

태권도가 해방이후 가라테를 한국화한 것이라는 견해가 점차 일반화 되어가는 추세에 대한 맹박(猛駁)이지만 아리송한 논리이다. 필자는 이런 주장을 한 주인공과 태권도 역사와 철학에 관해 꽤 많은 의견을 나눈 적이 있다.

서울대 철학과 학생이던 그는 부산까지 내려와 일주일가량 택견을 배우기도 했는데 그 당시에는 태권도가 가라테의 변형이라는 데 동의하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학생이 군 입대를 하면서 소식이 끊긴 후 만나지 못한 채 20여년이 지났는데 그 새 그의 생각이 바뀐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대한택견협회를 부각시키기 위해 태권도의 정통성에 흠집을 내려고 한다며, 마치 필자가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진실을 오도해가면서까지 태권도를 폄하하는 것처럼 묘사했다.

그뿐 아니라 택견이 체육회 가맹종목이 되는 것을 훼방하기 위한 특정인의 모순된 말을 그대로 인용하여 ‘무형문화재로 인정받는 정경화는 태권도가 택견의 맥을 잇는 전통무술임을 인정하고 있다.’고 하고, 한술 더 떠 ‘인간문화재 정경화와 견해차이가 있는 택견에 대한 자료는 다른 사람에게 권하고 싶지 않다.’고도 했으니 실소를 할 따름이다.

이 기회에 말해두고 싶은 것은 필자는 처음부터 택견을 잘되게 하려고 태권도에 해코지를 할 생각을 해본 일이 없다. 다만 남보다 조금 일찍 택견이 태권도의 아웃라이어(outlier)임을 발견하였고, 태권도가 가진 심각한 오류에 택견의 가치가 오염되어서는 아니 된다는 판단으로 대한택견협회를 창설하고 대한체육회 가맹종목을 지향하게 되었다. 그것은 택견의 정체성을 지키려는 전략적 선택이었다.

그럼으로 필자는 태권도가 태생적으로 택견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점을 부인해본 일이 없다. 다만 독선적인 어설픈 논리, 또는 학문을 빙자하여 거짓을 거짓으로 은폐하고, 허구로 사실을 위장하려고 말장난 같은 교열(狡劣)한 방법으로 태권도와 택견을 동일하다고 하는 데 동의할 수 없다는 것이다.

먼저 ‘독특성’을 살펴보자. 타격위주의 태권도 발차기와 넘어뜨리는 택견 발차기는 목적하는 바가 다름에 따라 필연적 상이성을 지닌다. 반면에 타격지향의 외래무술과는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그럼으로 택견과 태권도의 ‘동일성’ 논변도 성립되기 어렵다. 또한 태권도와 택견이 각각 보편적인 것의 특수화된 것, 자기만의 적극적인 의미를 갖는 상이한 개체라는 점을 무시한 채 태권도를 최 광의의 개념으로 설정한 비약도 인정할 수 없지만, 무엇보다 태권도가 민속으로서 ‘지속성’을 입증할 실체적 증거를 하나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만큼 이 논변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제논이 말도 안 되는 논리를 전개하여 사람들의 판단을 헷갈리게 한 것은 역설적으로 우리 이성의 한계를 지적한 것이다. 사람의 이성이 참된 지식을 얻는 일에 결함이 있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며, 논리를 위한 논리의 공허함을 일깨우는 것이다.
15년 전부터 택견을 해외에 보급하기 위한 목적으로 여러 나라를 순회하면서 세미나 개최, 공연 등을 하였다. 최근 그 때 택견을 배운 바 있는 미국의 태권도 관장이 지도자 자격을 따서 택견을 미국에 보급하겠다는 계획과 함께 질문을 해왔다.

“태권도와 택견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해야 합니까. 택견을 태권도 교본에 나온 대로 태권도의 원형(original form)이라고 하면 됩니까?”

이 질문에 대해 나는 “원형이라고 하기보다 본질(intrinsic)이라고 설명하라”고 답을 주었다. 오리지널(original)은 복제, 각색, 모조품 따위에 대하여, 그것들을 낳게 한 최초의 작품. ‘독창적’, ‘본’, ‘원본’, ‘원형’, ‘원물’, ‘진짜’, ‘진품’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면 택견은 진짜이고, 태권도는 상대적으로 가짜거나 모조품이 되는 것이니 자랑스러운 태권도가 망가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미국사람은 아리송한 모양이었다. 다시 질문을 해왔다.

“그럼 택견이 태권도의 본질이라는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합니까?” 택견만 설명하면 간단한 일이었으나 태권도를 함께 설명하려니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그래도 즉각 답을 보내주었다. 물론 번역은 다른 사람에게 시켜서.

“택견이 보편화된 사회 환경 속에서 대대손손 살아온 한국 사람이 일제 강점기에 일본 문화의 영향 아래서 일본의 가라데를 배웠고, 일본의 식민지에서 해방이 되자 일본을 배척하는 사회적 환경 속에서, 가라데를 배운 한국 사람은 가라데를 한국의 무예로 재편성하려는 노력을 하게 됐다.

이때 한국인이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택견적 성향에 의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건 택견을 모델로 인식하여 발질을 많이 하는 태권도를 만들었다.

그럼으로 태권도를 만든 사람들은 택견을 실재로 습득한 경험이 없다. 따라서 현재 태권도는 택견과 상이하다. 그러나 태권도가 맨몸으로 하는 격투기술이라는 점에서, 그렇게 된 동기가 발기술을 주로 하는 택견을 지향(志向;aim)하였기 때문에 택견이 태권도의 본질이 되는 것이다.”

일단 이 정도 설명을 하고, 혹시 따지고, 파고드는 질문에 미국관장이 제대로 답을 할 수 있게 하려면 본질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과 태권도와 택견의 관계에 연관된 개념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본질에 대한 국어사전의 해석은 ‘1.본디부터 갖고 있는 사물 스스로의 성질이나 모습. 2.사물이나 현상을 성립시키는 근본적인 성질’ 등이다.

문제와 연결되는 본질에 대한 논리는 독일의 철학자 후설(Husserl, E. 1859~1938)의 현상학에서 빌렸다. 인간이 지각할 수 있는, 사물의 모양과 상태, 또는 본질이나 객체의 외면에 나타나는 상을 현상이라고 하는데 후설은 이 현상은 지향된 것이라는 것이다.

지향이란 그쪽으로 쏠리는 의지이거나 의지에 의해 목표로 정해진 방향이다. 후설에 의하면 이 세계의 구성과 이념적인 존재의 구조는 인간의 순수한 의식체험과 그 의식체험 속에서 지향된 현상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현상도 자존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지향된, 혹은 의식된, 혹은 현현하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후설의 이론에 태권도를 대입시키면 초기 태권도 지도자, 엄격히 말하면 태권도 이전의 가라데를 배운 한국 사람들은 본질직관(本質直觀)에 의해 택견을 지향하여 태권도를 만들었다고 설명할 수 있다.

즉 택견과 가라데를 비교ㆍ상기(想起)하여 인식한 게 아니고, 가라데를 체험한 직관으로 택견을 분별하고 판단해서 태권도를 만들었다. 이렇게 정리를 해놓았으나 난해하기는 하다.
사실 현상학이니 인식론이니 하는 말을 파고들면 한도 끝도 없다. 그래서 간단하게 개념을 정리해서 태권도와 택견을 국제 스포츠무대에서는 “동일한 본질의 다른 종목”으로 설명하면 적당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택견과 태권도의 상이한 모습은 실존적 현상이다. 같은 발차기라도 태권도는 강력한 타격력을 가지고 있다. “깡생깡사”의 사회상이 반영된 결과이다.

택견의 발차기는 타격력을 배제한다. 격투하는 피아의 상해를 최소화하려는 데서부터 출발한 맨몸 무예의 본질적 형태이다. 두 종목이 가진 상이성은 동전의 양면이다.

동전이 한 면만 있으면 불량주화가 된다. 태권도의 타격기술과 택견의 비 타격기술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어야 맨몸무예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이 완성된 무예로 접근하는 길이다.
“태권도는 한국고유의 투기형태로 발달하였다. 택견, 수박으로 불리던 태권도는 무예훈련의 기초로 당시에 널리 행해졌으며, 고구려의 선배, 신라의 화랑이라는 청소년집단교육제도를 창안하여 산천을 주유하며 무예수련을 했다.” 이 기사는 대한태권도협회 홈페이지에 소개된 글이다.

네이버 국어사전에서 태권도를 검색해보니『태권-도, 跆拳道. [명사]<운동>우리나라 고유의 전통무예를 바탕으로 한 운동. 또는 그 경기. 손과 발, 또는 몸의 각 부분을 사용하여 차기, 지르기, 막기 따위의 기술을 구사하면서 공격과 방어를 한다. 단체전과 개인전이 있으며 개인전은 체급별로 이루어진다. 비슷한 말: 태권』이라고 나와 있다.

전통무예를 바탕으로 한 것이라는 말과 택견, 수박으로 불리던 태권도라는 말은 큰 차이가 있다.

1974년에 출판된 국어사전을 보면 “태권: 우리나라 고유의 호신무술의 하나<손으로 치고 발로 차고 함>”이라고 했다. 인터넷 사전의 해석이 예전의 사전과 상당부분 달라진 것을 알 수 있다.

이번에는 ‘택견’을 검색해보았다. 그랬더니『명치기: 택견에서, 발 장심으로 상대의 명치를 차는 기술의 한 가지.』라고 나온다. 또『탁견』을 찾아보니, ‘태껸’의 옛말이라고 하고, “속곰질 뛰움질과 씨름 탁견 遊山하기(출처 :교본 역대 시조 전서 1648.)라고 예문이 실려 있다.

‘아차’하고 이번에는 ‘태껸’을 검색해보니『태껸. [명사]<운동>우리나라 고유의 전통 무예 가운데 하나. 유연한 동작을 취하며 움직이다가 순간적으로 손질, 발질을 하여 그 탄력으로 상대편을 제압하고 자기 몸을 방어한다.

중요 무형 문화재 제76호. 비슷한 말: 각희(脚戱)ㆍ수박희.』라고 되어 있다.
‘수박희’를 한 번 더 찾아보니『수박-희, 手搏戱. 발음은 수바키. [명사]<운동>같은 말 : 태껸.』으로 풀이해 있다. 한편 같은 민중서관의 사전에는 “태껸: 한 발로 서로 상대방 다리를 차서 넘어뜨리는 경기”라고 되어 있어서 역시 택견에 대한 설명도 과거와 최근의 개념이 상당히 달라진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태권도와 택견에 대한 사전의 해석이 보다 구체적이고 현대화 된 것으로 보인다. 언어는 끊임없이 유동하고 변천하고, 시대성을 반영하여 그 개념이 시시때때로 변화한다. 사전에 실린 용어에 대한 해석은 그 대상에 대한 동시대의 일반화된 지식으로 볼 수 있다.

태권도와 택견에 대한 사전의 해석이 변화했다는 것은 곧 그 정체에 대한 인식이 변화했다는 것을 말한다. 정체(正體, identity)란 변하기 전의 본래의 참된 형체(形體)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태권도와 택견의 본래의 모습(正體)은 어떤 것인가? 다시 말해 태권도와 택견은 “너의 정체가 무엇이냐”하는 질문에 어떤 답을 할 것인가를 고민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심리학자 에릭슨(Erikson, 1902 ~ 1994)은 정체감이란 고정적, 불변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 현실 속에서 끊임없이 개정되는 자신에 대한 현실감이라고 갈파했다.

따라서 정체감이 변해도 변하지 않는 태권도, 택견이 어떠한 것이지를 태권도인, 택견인이 스스로 깨달아야 하고, 그렇게 깨달아진 변하지 않고 독립적인 것, 즉 정체성(正體性)을 일반화 시킬 필요가 있다.

그동안 이 지면을 통해 수차례 태권도와 택견의 상관관계를 설명한바와 같이 태권도의 과거 명칭이 택견, 수박이라는 주장은 사실상 허구이다. 그러나 시나리오에 의해 세트를 꾸미고 연출을 잘하면 허구가 사실보다 더 사실처럼 인식될 수도 있다.

영화 “라이언 일병구하기”는 1944년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라이언 형제의 실화를 배경으로 만들어졌는데 장면 장면이 실제 전투보다 더 사실적이라는 찬사를 얻었다.

이것은 스필버그의 천재적인 연출 때문이겠지만 또 하나 ‘실화’라는 한 단어가 영화 전체에 사실감을 배가시킨 덕분이었다.

이와 같이 어떤 사실에서 유추된 허구가 사실보다 더 사실적이 되는 경우가 더러 있는데 태권도가 그 한 예이다. 태권도가 택견의 사실에 가탁하여 스필버그의 영화처럼 대 성공을 했다.

그러나 아무리 사실보다 더 사실적이라도 해도 허구는 허구일 뿐이다. 변하지 않는 속성이 ‘정체’이다. 그리고 이것을 깨닫는 것이 ‘정체성’을 가지는 것이다. 이제 태권도가 정체불명이 되지 않으려면 다음 질문에 분명하게 대답을 해야 한다.

택견을 거론할 때면 다른 무예에서는 없는 두 가지 문제와 부닥치게 된다. 하나는 역사서술이 태권도와 동일하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원형에 관한 논쟁이다. 택견의 역사가 태권도역사와 겹쳐지게 된 것은 최홍희(1918-2002)에 의해서였다.

최홍희는 그의 저서 태권도지침(1966.서울. 정연사)에서 신라 화랑의 무술이 고려, 조선으로 이어져오던 중 발기술 위주의 택견이 되었는데, 일제강점기에 중국 권법, 일본 공수의 수기가 가미되어 “空手”불리던 것을 ‘태권’으로 명명했다고 하였다.
그는 “동양 각국의 원시무술을 중국에서는 ‘군따오’, ‘천파’, 일본에서는 ‘가라테’, ‘겜뽀’, 말레시아에서는 ‘실나’ 한국에서 ‘태권’이라고 하는데, 태권은 중국권법과는 기술적으로 전혀 다르고, 1921년에 시작된 일본 공수도와는 연대적으로 틀린다.”고 주장했다.

여기서부터 태권도는 택견의 역사를 사용하기 시작하여 1970년대 들어 해방 이전의 태권도사는 택견사로 꾸며졌다. 덕분에 택견사를 정리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태권도가 역사의 바다에서 택견을 건저 올려 세상에 드러나게 한 것’(2010, 송형석)때문이다. 택견은 1960년 박철희선생에 의해 로마올림픽에 소개됐다.

그리고 대한태권도협회에서 발행하는 계간 태권도에 송덕기 선생과 택견이 두 차례 실렸으며, 태권도 문화영화에도 송덕기 선생의 택견시범이 소개되었다.

따라서 태권도가 택견이 회생하는데 지대한 역할을 하였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태권도가 택견을 위해서 한 일이 아니라 태권도가 자신의 정체성을 택견에 가탁하고자 한 것이다.
1968년 국제태권도연맹(총재 최홍희)이 태권도가 택견을 계승했다고 주장하며 태권도를 문화재로 지정하려고 했다. 태권도에 대한 문화재 지정신청에 의해 문화재위원이 예용해 선생이 조사를 맡았다.
그가 1973년에 당국에 제출한 조사보고서에서 “태권도가 신라시대부터 전승된 것이라는 주장은 전적과 물징이 영성하고, 口碑에서도 확인할 수 없어 수긍하기 어렵다.

전통적인 택견기능을 보유한 송덕기의 택견과 태권도 사이에는 ‘발전’으로 인한 현격한 차이와 변형이 있고, 태권도 명칭이 택견을 계승한 것이라고 해도 신라시대 택견을 되찾았다는 주장을 입증하지 못하며, 명칭제정이 방편으로서는 타당할지 모르나 역사학적 결론이 될 수 없음이 명백하다.

전래의 택견을 원형의 변용 없이 계승하였다고 생각되는 송덕기는 지금 세간에 성한 당수, 공수, 취권, 수박, 태수에서는 곧은 발길질을 하지만 택견은 발을 꼬아서 발 장심으로 치는 늦은 발길질이니 같은 발질을 해도 다르다고 증언했다.

태권도는 국내외적인 성예나 공헌에 상관없이 문화재 지정에 난점이 있고, 대신 송덕기를 무형문화재로 지정함이 타당하다.” 고 단호하게 결론을 내렸다. 최근 태권도사 논쟁에서 당국에 정식 보고된 민속학적 결론이 배제되고 있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택견의 원형에 대한 문제도 역사문제와 상관이 있다. 택견의 문화재지정 조사보고서(1982, 임동권)가 1973년 예용해의 태권도조사보고서와 상당한 차이가 있는데 그 차이가 곧 원형시비의 단초가 된다.

다시 말해 현재 문화재로 지정된 택견의 기술과 체계는 송덕기의 택견과 차이가 있다. 물론 무예란 정형화될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시간과 공간, 행위자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택견꾼들의 개별적 경험은 되풀이되는 빈도가 높은 것이 보편화되어 택견이라는 특성을 띠게 된다.

심리학자 융의 이론에 따르면 사람들의 다양한 경험은 어떤 식으로든 유전 암호가 되어 다음 세대로 전달된다고 한다.

원형이란 논리 이전의 사고에 기원을 둔 원초적이고 근본적인 상징·성격·유형이다. 따라서 원형이란 어느 특정인의 개인적 동작 자체가 아니라 그 동작에 내재한 보편성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특정인의 기술, 동작을 그대로 모방하고 답습하는 것만이 원형을 제대로 계승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택견의 원형은 택견의 역사와 함수관계를 가지고 있다. 역사에서 원형을 추출하고 그 원형에서 역사성을 분석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이제까지 이 지면에서 30여회의 연재를 해오면서 역사와 원형과의 관계 설명을 통하여 택견에 대한 이해를 도우려고 나름으로 애를 썼다. 설명이 부족했다면 순전히 필력이 부족한 탓이다.

마지막으로 귀한 지면을 할애해준 무예신문과 그동안 졸고를 애독해주시고 질정해주신 독자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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