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예의 장

태극권

醉月 2008. 10. 18. 08:58

태극권은 과연 ‘무당산 신선’이 창시했을까?

▲ 진왕정과 장발. 뒤에 큰칼을 들고 서있는 것이 장발이라고 한다. (진소왕태극권 발췌)

 

“이제는 되었느냐?” 장삼봉 진인이 장무기에게 묻는다. “아직 칠할이 기억납니다”
 잠시 후 “이제는 어떠하냐?” 장진인이 묻자 장무기가 답한다. “이제 절반을 잊었습니다” 또 잠시가 지난 후에 장삼봉이 또 묻자 장무기는 “아직 삼할이 남았습니다”

 

 이런 모습을 지켜보면서 청익복왕 위일소 등은 근심이 태산이다. 강적이 눈앞에 있는데 장삼봉 진인은 중상을 입었고 교주 장무기는 금방 적이 뻔히 바라보는 앞에서 배운 태극권과 태극검을 배운 것도 모자라 이제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잊어먹고 있다고 하니 원의 군주 조민과 그 수하의 절대고수 현명이로를 필두로 하는 일류고수 수십인에 이르는 강적을 어찌 대적할지 아득하기만 하다.

 

 이런 모습을 지켜보는 조민 등은 가소롭기만 하다. 그런데 이어지는 장삼봉과 장무기의 대화는 한 술 더 뜬다. 장무기가 돌연 외친다. “이제는 완전히 잊었습니다!” 장삼봉이 화답한다. “좋다! 아주 좋아! 이제는 무당의 태극권으로 적을 물리치거라!”

 

 김용의 무협소설 '의천도룡기'에 나오는 한 장면이다. 김용의 '의천도룡기'에 의하면 태극권은 무당파의 장삼봉 진인이 만년에 창시한 것으로 되어 있다. 우리나라의 많은 무협 독자들도 이 영향을 받아 태극권은 무당파의 장삼봉 진인이 창시한 것으로 아는 분들이 적지 않다.

 

 태극권은 과연 누가 만들었을까? 김용의 소설대로 정말 장삼봉 진인이 태극권을 창시한 것이 맞을까? 장삼봉 진인이 태극권을 창시하였다는 '설'은 언제 어떻게 출현하였을까? 무당산 도인 장삼봉은 과연 실존 인물일까 가공의 인물일까?

 

 장삼봉 도인이 실존 인물인 점은 맞는 걸로 보인다. 명사 방기전에 “당시의 황제인 영락제가 장삼봉 진인을 현자의 예우로 불렀으나 응하지 않고 숨었다.”고 되어 있다. 당시 연령이 120살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정사(正史)에 나오는 유일한 기록이다. 장삼봉이 무술을 하였는지 아닌지에 관해서는 무당산지등을 통틀어 보아도 알 수가 없다고 한다.

 

 장삼봉을 무술과 최초로 연결시킨 사람은 명말청초의 대학자인 황종희가 처음인 것으로 보인다. 그는 자신의 아들 황백가의 무술 스승인 왕정남을 위해 쓴 묘지명에서 몇 가지 관점을 제시하였다. 즉 소림과 무당을 대비하여 외래의 불교 사상에 기반한 수입무술과 국산인 전통 도가사상에 기반한 전통무술로 구분하여 각각 외가권과 내가권으로 구분하였다.

 

 대학자의 붓은 역시 무게감이 다른가보다. 별로 길지도 않은 몇 줄의 글로 소림파와 무당파, 외가권과 내가권을 적시하여 후세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니 말이다. 아들인 황백가는 또 《왕정남선생전》을 저술하여 명말청초에 현재의 절강성 지역에서 성행하던 내가권의 원리 구결과 사승계보 등을 밝히었다. 이들 부자가 말하는 내가권의 창시자인 무당산 도인 장삼봉은 명사에 나오는 장삼봉과 공통점이 있으니 황제가 특별히 불렀는데 응하지 않고 숨었다는 것이다. 

 내가권을 창시하였다는 장삼봉은 북송의 휘종(徽宗 : 재위기간 1110∼1125) 황제가 불렀으며 태극권을 창시하였다는 설이 있는 장삼봉은 명의 성조 영락제(永樂帝 : 재위기간 1402∼1424)가 불렀다고 한다.

 

 북송 장삼봉의 권술은 백년 후에 섬서성 사람 왕종이 가장 뛰어났고 온주 사람 진주동이 왕종에게 배웠다고 한다. 진주동은 명(明) 홍치(弘治 : 1488~1505) 연간의 사람으로 《왕종선생전》을 지었다고도 하는데 동문으로 장발이 있었다고 적고 있다. 또 명 가정(嘉靖: 1522∼1566) 연간에는 장송계가 가장 뛰어났다고 한다.

 여기부터 내가권의 계보를 단선으로만 살펴보면 장송계 -- 엽계미 -- 단사남-- 왕정남(王征南) -- 황백가로 이어진다. 황종희가 왕정남묘지명을 쓴 연대가 청의 강희(康熙 : 1662∼1722) 연간 초반부라고 한다. 이 시기는 태극권의 창시자로 알려진 진가구의 구세조 진왕정이 활동하던 시기이기도 하다.

 

 무술과 장삼봉을 처음 연결한 사람이 황종희라면 태극권과 장삼봉을 처음 연결한 사람은 무우양의 큰 제자이며 처조카인 이역여이다. 이역여는 내가권의 왕종과 《태극권론》의 저자로 알려진 왕종악을 동일 인물로 보고 자신이 쓴 '태극권소서'에서 태극권을 장삼봉이 창시하였다고 주장하였다가 당시에 건재해 있던 양로선과 무우양의 질의를 받고 자신이 생각해도 근거가 없다고 여겨서인지 '태극권소서' 최종 원고에서는 “태극권은 누구로부터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다.”고 말을 바꾸었다. 태극권의 장삼봉 창시설을 가장 먼저 주장하였다가 스스로 철회한 셈이다.

 

 또 한 사람, 태극권을 진가구에 전해 주었다고 하는 왕종의 제자인 장발이 문제이다. 이 설을 주장하는 사람에 따라서 장발이 진왕정에게 전해주었다는 설과 14대인 진장흥에게 전해주었다는 설이 있는데 시대적으로 약 200년에서 300년 정도의 시간차가 나는 문제가 있다.

 

 진가구에서 탐문한 바에 의하면 진왕정과 동 시대 사람으로 인근 마을 사람인 장파십이 있는데 이 사람이 바로 장발이라는 설도 있으나 알 수 없다. 다만 장파십은 무예의 공부가 무척 출중하여 말을 전하는 사람에 따라서는 진왕정보다 상수라고 하기도 한다.

 

 장삼봉이 태극권을 창시하였다고 하는 설에서 명나라의 왕종(王宗) 즉 내가권의 왕종과 태극권론의 저자로 알려진 왕종악을 동일인물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왕종은 명 홍치(弘治 : 1488~1505) 연간보다 이전의 사람이고 왕종악은 청 건륭(乾隆 : 1736~1795) 연간 후반의 사람이니 역시 시대적으로 맞지 않는다. 장발이 왕종악의 제자라는 것 역시 시대의 선후가 뒤바뀌었다. 

 

▲ 양씨태극권 창시자 양로선.

 

 온현 조보진에서 주장하는 사승계보는 다음과 같다. 장삼봉의 공부를 이은 왕종악이 장발에게 전수하여 조보태극권의 제1대가 되고 이하 순서대로 2대 형희회, 3대 장초신, 4대 진경백과 왕백청, 5대 장종우, 6대 장언, 7대 진청평으로 전승되어 다시 화조원이 8대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조보태극권 쪽에서는 태극권의 창작권을 호북성 무당산에 넘기려 한 괘씸죄가 적용되어 하남성 온현 정부에 철저하게 응징을 당하여 거의 활동을 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고 겨우 화식태극권이란 명칭으로 명맥만 근근히 잇고 있는 중이다. 독자 여러분이 하남성의 성장 혹은 온현의 현장이라도 태극권의 창작권을 다른 성에 넘겨준다는 것을 용인할 수 있겠는가?

 

 현재 중국 정부의 입장을 대변할 수 있는 국가체육위원회 산하의 중국무술협회는 하남성 온현 진가구를 태극권의 발상지로 공식 인정하고 있는 상황이다.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산에는 신선 도사가 있어서 도술을 부리고 무술이 대단하다는 말을 듣고 자라왔다. 중국 사람도 아마 이런 것을 좋아한 것 같으며 태극권 같은 무술을 이런 신선 도인이 창시하였을 거라는 막연한 희망 혹은 꿈을 꾼 것이 아닐까?

 

 여러분이라면 철저한 고증을 통해 과학적 학문적으로 입증된 설만 믿겠는가? 아니면 신선 도사의 낭만에 젖겠는가? 선택은 자유이다. 다만 이 선택은 진정한 태극권을 할 것인가 혹은 대충 건강태극권을 할 것인가라는 문제와는 별개라고 하겠다.

‘섬전등나’ 中본토 진식 태극권은 이런것!


 "쿵! 쉭!" 진각과 발경으로 인해 나오는 소리가 장난이 아니다. 지난 21일. 국내 한 태극권 도장과의 친선교류를 위해 한국을 찾은 진식태극권 곽굉왕 노사을 만났다. 28세의 젊은 나이와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에서 “과연 이 사람이 정말 태극권의 고수일까”라는 의구심이 들었다.

 

 태극권의 고수라고 하면 연세 지긋한 노인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진식태극권 시연을 보고나서 기자가 태극권에 대해 얼마나 짧은 식견을 가지고 있는지 새삼 느낄 수 있었다.

 

 곽굉왕 노사는 7살 때부터 관진평 대사(78)에게 가전기공와 솔각(중국식 씨름)등의 무술을 배웠다. 태극권은 왕우정 대사에게 양식태극권 108식을 먼저 배웠다. 이후 왕우정 대사의 권고에 따라 13살 때 진발과 대사 문하로 정식입문해 진식태극권을 배운다.

 

 당시 진발과 대사의 작은 아들인 진조규 노사와 함께 수련을 했다. 곽굉왕 노사는 진식태극권 계보상으로 한국에서 유명한 진정뢰, 진소왕 노사와는 사형제 관계가 된다. 직접적으로 만난 적은 없다고 한다.

 

▲관진평의 유일한 제자 곽굉왕 노사

 

 수줍게 이야기를 나누던 곽 노사는 태극권에 대한 개인 생각을 묻자 날카로운 눈빛을 보이며 목소리를 높인다. 그는 “현대에 와서 시범을 위해 보여주는 태극권도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전통 태극권을 자기 멋대로 뜯어 고치는 경우가 많아 안타깝다”며 “전통 태극권의 내면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아주 극소수다. 그렇기 때문에 전통 태극권을 계승할 수 있는 사람이 매우 적다”고 설명했다.

 

 중국 내 태극권 지도자들 중에도 전통 태극권을 제대로 이해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태극권이 양생을 위한 무술임에는 분명하지만, 무술로써의 가치로 볼 때 살생능력이 높은 위험한 무술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곽 노사는 “태극권을 배울 때 힘을 쓰지 말라”는 말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곽 노사는 “천근의 힘을 얻지 않고 어찌 네 냥의 힘을 낼 수 있겠느냐”는 중국 격언을 들려주며 태극권 수련에 힘이 필요한 이유를 설명했다.

 

 곽굉왕 노사는 태극권에서는 ‘섬전등나(閃展騰揶)’가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섬전등나는 상대와 얽히는 찰라의 순간에 상대를 잠시 제어하여 상대를 확실하게 맞추어 데미지를 전달한다는 뜻이다. 또 방위(方位)를 정확하게 인식해야 태극권을 올바르게 수행 할 수 있다.

 

 중국뿐 아니라 국내에서도 자신을 태극권 고수라고 내세우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이에 대해 곽 노사는 “자화자찬하는 사람치고 무술의 깊이가 보잘 것 없는 경우가 많다”며 “내 경우 어린 시절에 보았던 사부(관진평 대사)의 발경과 진각의 폭발력을 따라 가려면 아직 멀었다. 앞으로 사부에게 배운 것을 최선을 다해 계승 발전시키겠다”고 말했다.

 

 곽굉왕 노사는 현재 북경에서 태극권을 지도하고 있다. 중국에서 젊은 곽 노사에게 대결을 신청해 오는 사람이 적지 않다고 통역이 살짝 귀뜸해 주었다. 만약 대결에서 지게 되면 태극권 지도자로서 위치가 위험해 진다. 하지만 곽 노사는 현재 왕성하게 태극권을 지도하고 있다. 배우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언제든지 열려 있다고 말하는 곽굉왕 노사. 국내에서도 그가 태극권을 지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