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근대무술의 발전과 학교교육 | |
◇ 전통무예연구가, 박청정 |
올바른 것은 옳다고 말하고 잘못된 것은 잘못되었다고 말하며, 사회의 기강을 바로 세우려는 사람들은 점차 사라지고, 온통 시세(時勢)에 기생(寄生)하고 세월에 아부하는 비겁하고 야비한 인간들이 죽 끓듯이 일어나, 황금을 숭배하면서 건전한 사회도덕을 무너뜨리고 있다.
이러한 사회 풍조는 인간이 타고난 위대한 가치와 능력을 상실하게 하며, 심신을 나약하게 만들고, 선량한 사람들에게 패배의식을 주면서 병들게까지 한다.
대다수 국민들의 의지를 외면하고 말을 가볍게 한 대통령이나 목사나 승려라는 성직의 탈을 쓴 군상들로부터 국가의 미래를 맡고 있는 교육자에 이르기까지, 소위 사회지도자라 자처하는 인간 군상들은 오직 시세에 영합하여 자신의 권력과 안위만을 도모하고, 게다가 모범이 되어야 할 직임에서 오히려 범죄를 일삼으니, 풀잎처럼 바람이 부는 대로 눕는다는 이 나라 민초들은 무엇을 보고 들어 심기(心氣)를 바로 할 것인가!
이것이 지금 20세기 초반에 국가의 정치제도와 경제구조의 해체, 서구문물의 유입으로 전통의 문화적 가치가 추락하는 총체적인 위기에 맞서 전국에 산재해 있는 무인(武人)들에게 시대적인 소명을 일깨운 “정무체육회(精武體育會)”를 되돌아보는 이유이다.
정무체육회는 중국이 국제적으로 열병기로 무장한 서구의 열강들에게 통치력이 제한되는 국가적인 수모와 국내적으로 국론이 분열되어 백성들의 삶은 곤궁하여지고 열등감에 휩싸여 있던 시절에 상해에서 민간으로부터 일어난 무예 진흥운동의 선봉이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보고 듣고 생각하게 되는 천연(天然)의 문(文)과 발로 걷고 손짓하며 신체를 움직이는 천연의 무(武)를 이미 지니고 태어나는데, 이러한 천연의 문무를 아름답고 풍부하고 그리고 강건하게 만들어 가는 것을 교육(敎育) 또는 학습(學習)이라고 한다.
옛 성인이 “사람이 태어나 배움이 없으면 금수(禽獸)에 가까워진다”고 하였으니, 이 배움이 바로 천연의 문무를 갈고 다듬는 교육과 학습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 교육의 기초적인 교양이 은혜 속에서 삶을 영위하게 되는 생명의 이치를 배우는 것이다.
개인에게 있어서나 사회나 국가라는 공동체도 이러한 인간으로서 필수적인 문무(文武)의 교육과정이 결여되면 반드시 병(病)을 야기하게 되고, 허약한 정신과 몸이 되어 병균에 쉽게 감염되기도 하고, 외부의 세력으로부터 모멸을 당하는 것이 동물의 본능이 작용하고 있는 인간들의 사회이다. 우리나라의 전통무예의 총서인 《무예도보통지》〈병기총서〉에서도 본 서적을 편찬하는 목적을 “적에 대한 의분으로 외적의 모멸을 막기[敵愾禦侮]”위한 것이라고 하였다.
상해에서 정무체육회가 조직된 1909년은 우리나라 조선조 망국의 시기와 거의 비슷한 상황이 전개되었다. 19세기 말부터 서구 열강과 메이지유신(明治維新: 18세기 중반)으로 서구의 문물을 온몸으로 받아들여 일찍이 근대국가로 탈바꿈한 일본에 짓눌리면서 청(淸) 왕조가 통치력을 잃어버리고, 사회가 혼란하며 국민들은 열등감에 빠져 중국이 길을 잃어버렸을 때였다.
1900년에 중국의 개화를 거부하는 의화단(義和團)사건이 일어나 청(淸)의 통치력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의화단에서 의화권(義和拳)이란 무술을 단련하였기 때문에 무술의 단련을 금지하는 금무령(禁武令)이 내려지고 있었다. 또한 무술은 열병기의 발달로 군사무술로서의 효용이 감퇴되어, 청(淸)의 정부에서는 1901년에 이미 냉병기로 군사인재를 선발하는 무거제(武擧制)를 폐지하고 있었다.
우리나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왕조정부는 개화기에 대처할 능력이 없었다. 세계 조류의 변화에 적극 대처하여야 한다는 개화파와 기존의 권력에만 안주하려는 세력 사이에서 국론은 분열되고, 정부는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무능으로 일관하여 결국 1911년에 손문(孫文)이 일으킨 신해혁명(辛亥革命)으로 청(淸)나라는 완전히 멸망하고, 공화정부로서 ‘중화민국’이 탄생하였지만 군벌(軍閥)이 득세하여 백성들의 삶은 더욱더 피폐하여지고 외세에 의한 굴욕감이 가중되고 있었다.
이러한 시대적인 상황아래에서 문무를 겸전한 진정한 무인(武人)들이 방향을 잃은 백성을 보호하고 기강을 잃은 사회에 구심적 역할로 나서게 되었으니, 그 시발점이 바로 “정무체육회(精武體育會)”였던 것이다. 당대의 무인(武人)들은 무술의 본질적인 가치에 유의하게 되었고, 부(富)를 지닌 지사(志士)들과 애국인사들이 자금을 내어 상해에 민간 무술 조직으로서 “정무체조학교(精武體操學校)”학교를 설립하고 북방의 저명한 무술가인 곽원갑(霍元甲)을 초빙하여 무술교습을 주재하게 하였다.
곽원갑 권사가 해(害)를 당한 이후인 1915년에 그의 후인들이 “정무체육회(精武體育會)”로 개명하고, 여러 무술의 명사들을 초청하여 학과를 증설하여 교습하게 하고, 서양의 체육을 수용하여 서구를 배우며, 무술 교제를 편찬하는 등 본격적인 무술 진흥의 활동을 벌이게 되었다.
국가 사회의 총체적인 난국을 당하여 “정무체조학교”란 이름으로 무술 단체가 창설되어 무술 운동이 일어나자 전국각지는 물론 해외에까지 영향을 미쳐서 중원의 한구(漢口), 광주(廣州), 불산(佛山), 산두(汕頭), 하문(厦門) 등의 각 지역과 성(省)에 분회(分會)가 설립되고, 1918년 홍콩에 분회가 설립되는 기점으로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태국, 싱가폴 등 동남아 일대에 계속 분회가 성립되어 40여 도시에 정무체육회가 설립되어 무술로서 국민 계몽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이 뿐만이 아니라 정무체육회를 선두로 하여 천진(天津)의 중화무사회(中華武士會), 북경(北京)의 체육연구사(體育硏究社), 성도(成都)와 사천(四川)의 무사회(武士會) 등의 무술 교육의 단체가 애국지사들에 의하여 계속 창설되었다.
오늘날 정무체육회를 돌아 보건데, 무술의 교육적 가치와 함께 몇 가지 중요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기까지는 중원이 서구 열강과 부딪치면서 근대국가로 개조하여야 하는 과업을 안고 있었다. 이러한 과업은 중원 대륙을 이끌어 갈 새로운 지도사상을 도출하는 것이며, 내부의 부패와 외세를 몰아내어야 하는 것이며, 새로운 국가가 지향해야 할 국가 목표를 설정하고, 새로운 제도를 확립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시기에 “정무체육회”란 무술조직이 창설되었다는 것은 가장 중요한 의미가 있다. 첫째로 봉건사회이든, 근대사회이든, 오늘날과 같은 전자가 지배하는 정보화 사회이든,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무술 또는 무예는 한 국가 사회를 유지하는 구심점이 된다는 것이다. 정무체육회는 외세로부터 국가의 기능이 상실되었을 때, 국가의 정치 기능을 대신하여 국민의 심신을 단련시키고, 전근대적인 사고를 가진 사회인을 계몽 순화시켰으며,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는데 선봉이 되어, 각 지에 있는 무인들의 시대적인 소명을 일깨웠던 것이다.
외세로부터 ‘아시아의 병든 환자[東亞病夫]’라는 모욕을 무술을 통하여 극복하고, 외세의 모멸과 핍박을 쓸어내는데 책임을 다하여 당대 무인의 시대적인 사명을 다한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중원에서 근대무술의 출발을 논할 때는 ‘정무체육회’를 제외하고는 아무 것도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지위와 영향력을 지니는 것이다.
두 번째는 중요한 의미는, 무술 기능의 전환을 무술인 스스로 하였다는 것이다. 1901년 청조(淸朝)의 무과제도 폐지는 국가가 주도하는 국가방위의 군사무술의 소임은 다 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시의 무인들은 이를 간파하고 우선 그 단체의 이름에서 ‘체조(體操)’ 와 ‘체육(體育)’ ‘학교(學校)’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무술의 기능을 시대에 맞추어 전환한 것이다.
이는 국민의 건강을 위주로 하는 체육의 기능으로 의도적으로 전환시킨 것이며, 민간의 무인이 주도하여 무술의 전수 맥락을 이어가려는 의지와 무술인의 소임을 다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무인의 의도는 오늘날 무술이 양생과 건강을 도모하는 근대무술로 자리 잡아 그 맥락을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
세 번째, 근대무술의 실기가 전근대적인 교습 형태를 벗어나 대중화로 전수되었다는 것이다. 정무체육회에서 전수된 실기는 곽원갑의 미종권(迷踪拳)에서부터 조연화(趙連和), 나광옥(羅光玉), 진자정(陳子正), 오감천(吳鑑泉) 등 각지의 수많은 무술 명인들이 초청되어 담퇴(潭腿)를 초급과정으로 하여, 소림의 오전권(五戰拳)과 나한권, 당랑권, 태극권, 사권(査拳), 응조권(鷹爪拳), 공력권(功力拳), 대성권(大成拳) 등 중원무술의 전반에 해당하는 권법이 전수되었고, 팔괘도, 오호군양도(五虎群羊刀), 오호창(五虎槍) 등 각종의 병기술을 전수하여 무술인재를 육성하여 무술을 대중화시킨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은 정무체육회에서 실시한 현대적인 무술교육의 방식이다. 정무체육회의 무술교육에서는 무술의 지도자를 노사(老師 :스승)라고 호칭하지 않고 ‘선생(先生)’이라 호칭하면서, 지도자나 학습자나 피차(彼此)가 동지(同志)라는 의식을 가지고, 서로가 함께 연구한다는 기본적인 마음자세와 함께 문파(門派)의 견해를 배제하였기 때문에, 사도(師徒)의 관념에 구애를 받지 않았다. 이러한 교육자세의 모습은 지금의 무술단체에서도 좀처럼 보기 힘든 것으로 신선하고 가슴이 열린 민주적이고 현대적인 교육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전근대적인 무술의 교육방법을 배제하고 다양한 무술 명인들이 모여서 각 문파 무술의 장단점을 논하며 서로가 단점은 보완하고 장점은 더욱 살리는 무술의 교류가 이루어져 실용무술을 추구하는 무술계의 새로운 변화를 일으켰는데, 이러한 무술교육의 방식은 지금도 본받아야 할 중요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오늘날 중원의 각종 무술의 협회 단체가 설립되고 정비된 것은 중화민국 이후의 일이며, 민국 초기에 가장 권위와 명망을 가졌던 무술 단체는 정무체육회(精武體育會)였던 것이다.
정무체육회의 전신인 정무체조학교를 처음 주재하였던 곽원갑의 무술사상은 “나라가 부강하려면 반드시 먼저 국민이 강건하여야 하고, 국민이 강건하려면 반드시 먼저 국민들의 몸이 강건하여야 한다[强國必先强種, 强種必先强身]”는 것이다.
국민정부시대에 국부(國父)로 추앙받았던 손문(孫文)은 정무체육회 창립 1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하여 “무술로써 나라를 보위하고 국민을 강건하게[以武保國强種]”하려는 무인 곽원갑의 정신과 “국가를 강하게 하고자 하면, 사람마다 무술을 익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그의 신념을 기리고, 정무체육회에서 발간하는 정무회간(精武會刊)의 서문을 직접 써주었으며, 친필로 ‘尙武精神’이란 네 글자의 휘호를 써 주어서 지금까지도 정무체육회에서 보존하고 있다.
이러한 정신을 가진 무인 곽원갑과 정무체육회에 대한 일화가 영화의 소재가 되어 일반사람들에게도 많이 알려지게 되었는데, 바로 이소룡이 1972년에 주연한 ‘정무문(精武門)’과 이연걸이 1994년에 리메이크한 ‘정무영웅(精武英雄)’ 그리고 2006년에 주연한 ‘무인 곽원갑’ 등인데 물론 픽션으로 구상한 것이지만, 무인의 정서세계를 알리는데 부족함이 없는 영화들이었다.
특히 ‘무인 곽원갑’의 영화에서 ‘무(武)는 싸움을 멈추고 평화와 사랑을 지향한다’ 는 교훈은 무예의 본질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의 검도나 무도의 기본정신이 생사를 결정하는 승부의 본질을 기본정신으로 한다고 하나, 무의 본질이 평화와 사랑이라는 것은 무의 그러한 속성을 포용하고서 더 근원에서 나온 사상인 것이다. 영화의 주요내용인 ‘무인 곽원갑이 무공(武功)과 의롭고 인자한 성품을 지닌 무인이었다는 것과 정무체육회가 무술로서 강인한 국민을 육성하여 강한 국가를 지향하였다는 것, 그리고 외세의 모멸을 받던 중국인들의 자긍심을 지켜주었다는 것’은 모두 사실에 근거한 것이었다.
“정무체육회”가 주는 또 하나의 중요한 시사점은 정무체육회에서 실시한 무술의 교습은 학교체육으로서 기본적인 모범을 제시하였다는 것이다. 매주마다 교사회를 소집하여 교육의 전반을 토론하면서, 투로(套路)를 정비하여 규정화하였고, 10여종의 통일된 교제를 만들어 무술전문서적을 발간하여 각 분회에 보내어 조직을 일체화 시켰던 것이다. 정무체육회에서 강조한 무술의 정신은 무술의 속성을 표현만 다르게 한 것이지만, 중국의 무술이 근대의 학교체육의 무술로 발전하는데 사상적 모범을 제시하였고, 그 교육의 방식은 제도적으로 기본적인 모범을 제시하였던 것이다.
“정무체육회”의 이러한 무술교육의 기준에 영향을 받아 1919년 ‘북경체육연구사’에서 정리하여 교육부에 제출한 ‘정교육부청정무술교재문(呈敎育部請定武術敎材文)’ 이란 문서는 군사무술이 학교체육으로 완전히 전환되었음을 의미하고 있다. 그 문서에서는 “권술은 가장 좋은 운동법이다”라고 하고 학교체육을 강조하면서 “반드시 인격의 수양과 성정을 도야하는 것이라야 적당하다. 그러므로 학교단련과 군대단련은 섞어서 보아서는 아니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문서는 또한 권술의 우수한 점을 8개 항목으로 열거하고 있는데 “ 1)사람의 신체를 전체와 내외로 균등하게 발육 한다. 2)정신의 수양을 얻는다. 3)지혜를 증진한다. 4)성정을 도야한다. 5)단련에 편하다. 6)응용이 풍부하다. 7) 교육의 재료가 풍부하다. 8)어른이나 아동이나 모두 적당하다”로 되어 있다. 여기에는 기격이 중심이 되는 자위응적(自衛應敵)이란 설명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내용들은 더 좋은 방안이 없을 때는 선구(先驅)를 따라가야 것이 현명한 방안이라는 입장에 따라, 우리의 《무예도보통지》를 학교의 공교육에 사용하기 위하여 교재를 재편성하는 과정에서나, 전통무예로서 십팔기(十八技)를 활용하는 방법으로 차용될 수 있겠다.
그러나 국민당의 중화민국 정부는 공산군과의 국공내전에서 패배하여 1949년 민국정부가 중원대륙을 상실하고 대만으로 후퇴하면서, 근대의 민주적인 무술교육의 기초를 닦은 정무체육회도 그 본부를 홍콩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정무(精武)의 정신과 교육은 건재하여 있고, 현재까지도 각지의 분회는 후진 양성을 위하여 활동하고 있다.
공산화가 된 중원의 대륙은 문화혁명으로 무술진흥에 서리를 맞게 되었다가, 1980년대부터 중공이 점차 개방정책을 펴면서 우슈(Wushu)라는 명칭으로 재흥의 시기를 맞이하게 되었으며, 지금은 중공의 중요정책과 중요교육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이는 중국 공산정권에서도 무술의 교육적인 가치와 국가융성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임을 알아 차렸다는 의미인 것이다.
오늘날 중공이 과감하고 유연한 정치로 경제, 사회, 문화 등 사회전반이 급성장하고 있는 것은 중공의 우슈정책에 절대 무관한 것이 아니라는 관점은 지난번의 필자의 글에서 강조한 바 있다. 우리나라에서 십팔기(十八技) 무예가 규장각의 서고에서 잠자던 시절인 1970년대에 박정희 대통령이 태권도를 국기화(國技化)하여 전군에 보급하고, 해외로 벋어나가는 시절이 바로 우리나라가 보리 고개를 넘어 경제적으로 급성장하던 시기와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다. 이는 바로 무예 무술이 본질적으로 지니고 있는 역동성(力動性)이 개인에서 사회로 그대로 체현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한 나라의 무예진흥정책은 바로 국가 융성으로 가는 지름길인 것이다.
대한민국의 짧은 역사를 돌아보면, 문(文)에 편중된 사람이 집권한 시기에는 사회는 침체되었고, 무능과 부패가 만연하여 온 고을에서 정부를 비판하는 소리가 높았다. 무(武: 軍도 결국 무다)에 편중된 사람들이 집권한 시기에는 과격한 정치로 사회는 공포에 떨며 온 고을이 경직되었음을 경험하였다. 바로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오늘의 역사 속에서 문(文)과 무(武)의 속성을 적나라하게 볼 수 있으니, 문무(文武)의 균형을 갖춘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교육계에서는 학교에서 무예교육이 왜 중요한 것이며, 또 무예교육을 실시한다면 어떻게 하는가? 에 대하여 사실 몰라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들의 성장과정에서 그러한 교육체계가 전무하였기 때문이다. 책을 많이 읽고 어느 한 분야에 전문지식을 얻으면 지식인이라고 하겠지만, 천천만만이다. 지식도 뿌리와 지엽이 있고, 그 뿌리는 신체의 체현에서 생겨나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문무(文武)의 교육은 어느 것 하나에도 치우칠 수 없는 것이다. 학교체육으로서 현대적인 무예교육은 정무체육회의 교육내용과 교육방법이 좋은 모범과 기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중국 역시 현대 무술의 교육은 이미 정무체육회에서 제시되었던 것이었다.
결론하여, 지금 우리나라의 학교교육에 무예과목이 편성되어 문무교육의 균형을 갖추어 인격적, 정서적으로 온전한 차세대를 육성하여야 한다는 입장을 강조하는 바이다. 여기에 교육계가 먼저 인간의 교육에 무예가 어떻게? 왜? 중요한 것인지 진지하게 생각하여 보아야 하고, 무예는 곧 생명교육임을 인식하여야 될 것이다. 무예계는 식민무도와 사대무술의 해독을 인식하여 무예의 진정한 정신이 재고되어야 하고, 적극적이고 본질적인 무예의 연구와 교류를 통하여, 기술적인 향상을 도모하여 무예의 진정한 발전을 생각하여야 할 것이다.
무예의 교육적인 효과는 어느 시대나 인간과 국가가 길을 잃어버렸을 때, 이정표를 제시하여 준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황금을 숭배하면서 비겁한 무리들만이 양산되어 인간의 길을 벗어나 버린 지 이미 오래되었다. 이러한 시기에 우리는 지금 무예계나 교육계나 시대에 적절한 무예교육으로 길을 잃어버린 국가 사회에 이바지한 “정무체육회”의 무인정신을 되돌아보아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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