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것’을 더 자세히 봐야 하는 곳, 덧없이 스러져 버리고 만 것들이 마음을 붙잡는 곳, 옛 백제의 땅으로 갑니다. 충남 공주와 부여, 그리고 전북의 익산…. 한강 유역에서 밀려난 백제가 융성을 꿈꿨던 곳입니다. 고대국가 백제의 자취 여덟 곳이 지난 4일 유네스코(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습니다. 여행자의 입장에서는 사실 거대한 고분이나 웅장한 성터보다 백제 사람들이 남긴 사소한 흔적이 더 감동적이었습니다. 이를테면 이런 것들입니다. 썩지 않고 남은 백제 왕비의 이 하나, 왕비가 늘 따스하게 쥐었을 작은 유리동자상, 진흙에 찍힌 백제인의 발자국, 유물에 남겨진 선명한 끌자국…. 이런 자취 앞에서 1500여 년 전 이 땅에 살았던 옛사람들의 체온과 숨소리가 더 가깝습니다. 역사책의 갈피나 연대식 기록으로는 도무지 느낄 수 없는 것들, 사소하지만 ‘거기에 가야만’ 만날 수 있어 더 감동적인 것들을 옛 백제 땅에서 하나하나 찾아가 봤습니다.
백제의 유적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 무덤군과 몇 기의 탑, 그리고 성곽 정도가 고작이다. 패망한 백제의 역사는 모두 땅속에 묻혔다. 백제의 옛 땅인 공주에서, 부여에서, 또 익산에서 박물관부터 찾아가야 하는 이유는 시간의 퇴적층에서 채굴해낸 가장 찬란했던 백제 문화의 흔적이 거기 다 모여 있기 때문이다. 백제 유물은 화려하고 아름답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다. 백제 유물이 매혹적인 진짜 이유는 하나하나가 어둡고 깊은 우물 속에 갇혀 있는 고대사의 비밀을 해독하는 귀한 열쇠이기 때문이다. 백제의 옛 땅을 찾아가겠다면 시간의 순서를 따라 남하하는 게 순서다. 강성한 고구려에 밀려 한강 유역을 잃은 백제가 새로 터를 잡은 충남 공주 땅부터 여정을 시작하자. 먼저 국립공주박물관 얘기부터. 박물관 1층의 무령왕릉 전시실. 그곳에 왕비의 치아가 있다. 지난 1971년 무령왕릉에서는 자그마치 4600여 점에 달하는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그중 17점이 국보다. 무령왕릉 전시실의 가운데 자리는 번쩍이는 금관 장식을 비롯한 온갖 화려한 유물들이 차지했다. 화려한 유물 뒤편의 전시실 한쪽 어둑한 조명 아래 왕비의 치아가 있었다. 사랑니라고 했다. 도굴되지 않은 채 발굴된 무령왕릉에서 확인된 유일한 유골, 왕비의 치아 앞에 섰다. 왕비가 죽어 남겨두고 간 것이 1500여 년이 지난 지금, 여기 눈앞에 있다. 어두운 시간의 깊이와 남겨진 것의 사소함이 만나서 만들어 내는 건 1500년 전 왕비의 실존감이다. 제례를 위한 화려한 금관 장식이나 세밀한 세공의 은잔보다 왕비의 사랑니 하나에서 살아 있는 고대왕국을 본다. 그 왕국의 왕비가 이 땅에서 살았음을 본다. # 묘지석 하나가 백제의 무령왕을 호명해내다 왕비의 치아 앞에서 드는 의문. 왜 도굴 흔적 없이 출토된 무령왕릉에서 왕과 왕비의 뼈는 발굴되지 않았을까. 왕릉 안에서 제사 때 바쳐졌을 것으로 보이는 은어를 비롯한 생선의 뼈가 200여 점이나 나왔는데도 말이다. 수수께끼는 1971년 무령왕릉 발굴 이후 40여 년이 지나서야 풀렸다. 발굴 당시 바닥의 잔존물을 쓸어 포대 자루에 담아 두었는데 지난 2009년 이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유골 흔적이 나왔다. 방사선 탄소연대 측정과 DNA 검사를 하면 흐릿한 안개 너머의 무령왕과 왕비가 살아 나올 것이다. 그러나 결론은 ‘측정 불가’. 연대 측정을 위해 검출한 시료에서 탄소가 검출되지 않았다. DNA 조사에 마지막 기대를 했지만 유골 흔적을 파괴해야 하는 DNA 조사는 더 나은 기술이 나올 때까지 유보됐다. 금방이라도 깨어날 것 같은 무령왕과 왕비는 다시 역사의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고대사의 해독’이라는 시선으로 보면 공주박물관에서 가장 묵직한 유적은 무령왕릉에서 발굴된 가로 35㎝, 세로 42㎝의 돌에 새긴 이른바 ‘매지권’이다. 매지권이란 묘지를 매입했다는 일종의 매매계약서. 거기에는 ‘백제사마왕(무령왕)이 돈 1만 매로 토지신과 2000명의 신하들에게 물어 (왕릉) 땅을 샀고 이 문서로 증명을 삼는다’는 글이 새겨져 있다. 이 묘지석이야말로 백제사 발굴 과정에서 나온 가장 중요한 열쇠 가운데 하나다. 왕릉 안에서 이 묘지석이 나옴으로써 무덤의 주인이 무령왕이며 그가 언제 사망했는지를 알게 됐다. 돌에 새겨진 몇 줄의 글귀가 고대사의 어둠 속에서 무령왕을 처음 호명해낸 것이다.
# 공산성…어둠 속에서 떠오르는 고대국가의 모습 공주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은 무령왕릉과 공산성 두 곳이다. 공주시는 세계문화유산 지정을 기념해 두 곳 다 이달 말까지 무료로 개방한다. 한데 무령왕릉은 하필이면 지금 탐방로 보수공사 중이다. 미리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해두었으면 좋았으련만…. 왕릉으로 이어지는 길을 막아 배수로를 파고 길을 뒤집어 놓은 채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금강의 물길을 끼고 있는 공산성의 공북루 쪽도 공사 중이다. 길을 막지는 않았지만 공북루 뒤편에 쌓아 놓은 흙더미 위에는 포클레인 한 대가 떡하니 올라서 있다. 무령왕릉이야 지금 가면 헛걸음이고, 성곽을 따라 산성을 한 바퀴 도는 2.6㎞ 남짓의 공산성 탐방코스도 요즘 같은 염천의 땡볕 아래서는 고생스럽다. 사실 한여름의 공산성은 야경이 으뜸이다. 어둠이 주위의 번잡한 풍경을 푸르게 지워갈 무렵이면 고대국가의 성벽이 조명을 받아 은은하게 떠오른다. 어둠이 현재를 지우고, 빛이 과거를 불러내는 것이다. 어둠이 짙어질수록 금강을 낀 능선을 타고 넘는 산성의 윤곽이 더 뚜렷해진다. 산성에 세워진 누각인 공북루와 만하루도 조명을 받아 화려한 보석처럼 빛난다. 성곽과 누각을 따라 켜진 불빛이 금강의 수면 위에 일렁이는 모습을 보노라면 마치 고대국가의 시간 속으로 들어온 듯하다. 이런 광경은 강 건너편 금강 둔치에서 시원한 강바람을 맞으며 바라봐도 좋고, 왕복 2차로 중 하나의 차로를 인심 좋게 보행자에게 내주고 일방통행으로만 차를 보내는 금강교 철교 위를 거닐며 봐도 좋겠다.
백제 역사의 순서에 따라 공주에서 부여로 건너간다. 돌이켜보건대 공주에서 백제는 여전히 흉흉했다. 공주에서 백제를 이끌었던 세 명의 왕이 잇달아 피살됐거나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권력은 위태로웠고, 민심은 흉흉했다. 늦서리로 보리가 다 얼어 죽는가 하면 어느 해는 5월부터 가을까지 비가 한 방울도 내리지 않았다. 산중에서 두 마리 호랑이가 싸운 일도 있었고, 저잣거리에는 도성 안에서 노파가 여우로 변해 사라졌다는 소문도 떠돌았다. 성왕이 공주를 떠나 부여로 나라를 옮긴 건 새 수도에서 나라의 기틀을 바로잡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때 새로운 꿈을 찾아가던 백제 사람들의 행렬도 이 길을 따랐을까. 공주에서 금강 물길을 따라 개망초꽃이 흐드러진 40번 국도를 따라가면 이내 부여의 부소산성이다. 부여에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은 부소산성과 능산리고분, 관북리유적지, 나성 등 4곳. 부소산성이야 낙화암으로 대표되는 곳이라 관광객들의 발길이 잦지만 다른 세 곳은 낯설다. 능산리고분은 백제 왕족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7기의 고분이 모여 있는 곳. 이미 도굴꾼의 손을 타 이렇다 할 유물이 나오지 않은 고분보다는 주차장 터를 닦다가 백제 예술의 극치를 보여주는 금동대향로를 발굴한 고분 옆의 옛 절터가 발길을 더 오래 붙든다. 절집의 거대한 강당이 섰던 옆 공방 자리에서 1993년 걸작 중의 걸작으로 꼽히는 금동대향로가 발견됐다. 삼라만상을 담아 놓은 듯한 향로의 섬세한 세공의 감동을 기억한다면 그걸 꺼낸 자리에 선 마음도 다르리라. 절터에서 고개를 들면 뒤쪽의 능선을 넘어가는 봉긋한 토성이 눈에 띄는데 그게 바로 부여 외곽을 방어하던 나성이다. 장마철 훼손에 대비해 성 전체를 온통 파란색 천막으로 덮어 놓아서일까. 별다른 감흥이 없다. 관북리유적은 부소산성 아래의 왕궁 자리로 추정되는 유적. 여기서도 웬만한 상상력으로는 좀처럼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듯하다. # 금동대향로, 그리고 왕흥사지 사리병의 부재 금동대향로 하나만으로도 국립부여박물관은 꽉 찬다. 향로 하나에 74개의 봉우리와 39마리의 동물, 16명의 사람, 6그루의 나무와 12개의 바위와 시냇물을 담아 놓은 솜씨 앞에서 어떻게 탄성을 지르지 않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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