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해운대 미포~청사포 폐선철길

醉月 2015. 7. 2. 09:28

부산 해운대의 미포에서 옛 송정역까지 4.8㎞ 동해남부선 폐선 구간을 찾은 관광객들이 철길을 따라 걷고 있다. 뒤편으로 해운대해수욕장과 신시가지의 빌딩숲이 보인다. 김동훈 기자 dhk@munhwa.com


기찻길은 과거로 가는 통로다. 미처 발아하지 못한 꿈이 묻혀 있는 곳이다. 까마득히 멀어져가다 끝내 스스로를 지우는 철길에 서면, 꿈을 꾸던 아이 하나를 만날 수 있다. 아이는 늘 어디론가 떠나고 싶었다. 소실점을 지나면 무지개가 태어나는 마을이 있을 것 같았다. 언젠가 끝까지 가보리라 결심하고는 했다. 세월은 무심하게 흐르고 꿈은 꿈으로 끝났지만 철길에 서면 여전히 가슴이 두근거린다. 국토를 종횡으로 달리는 기찻길 중 하나인 동해남부선. 그중 부산 해운대의 미포∼옛 송정역 4.8㎞ 구간에는 기차가 더 이상 오가지 않는다. 새로운 철로가 생기면서 폐선됐기 때문이다. 이제는 기차가 달리는 대신 사람들이 걷는다. 누구는 아득한 추억을 찾아 걷고 누구는 아름다운 풍경을 찾아 걷는다. 묻어둔 추억이 없는 아이들은 철길을 달리며 또 하나의 풍경이 된다.

가까운 곳에도 없지 않은 철길을 찾아 굳이 해운대까지 가는 이유는, 걷기 좋은 길로 변신했다는 ‘가장 아름다운 철길’을 걸어보기 위해서다.

▲ 폐선 구간의 녹슨 철로 곁에 자라고 있는 야생풀.

#미포∼청사포 = 철길이 시작되는 미포(尾浦)는 소가 누워있는 형상의 와우산(臥牛山) 꼬리 부분에 위치해 있다. 이름도 그런 뜻으로 지어졌다. 해운대해수욕장과 달맞이 언덕을 연결시켜 주는 지점이기도 하다. 하지만 미포는 아름다운 포구라는 뜻의 미포(美浦)이기도 하다. 저만치 오륙도가 점점이 누워있고 오른쪽으로 동백섬과 해운대해수욕장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철길 입구의 안내판에서 대략적인 길을 익힌 뒤 힘차게 출발한다. 사실 철길만 따라 걸으면 되기 때문에 길을 잃을 염려는 없다. 철길은 달맞이언덕을 가로지르는 달맞이길과 바다 사이로 끝없이 앞질러간다.

 

날이 흐린 탓에 손에 잡힐 듯 가까워 보이는 오륙도가 오늘은 저만치 물러나 있다. 하늘과 바다 사이의 경계도 흐릿하게 지워졌다. 평일인데도 걷는 사람들이 꽤 많다. 기적소리 대신 여자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까르르 철길 위를 달린다. 웃음을 따라 세상이 환하게 피어난다. 철길가에는 작은 텃밭들이 가꿔져 있다. 벌써 옥수수가 까치발로 바다를 넘겨다보고 고추·파·상추가 가뭄 속에서도 꿋꿋하게 생을 움켜쥐고 있다.


부산 남구 용호동 오륙도 해맞이공원을 찾은 시민들이 망원경으로 오륙도를 보고 있다. 김동훈 기자 dhk@munhwa.com



시끄러워서 어떻게 견뎠을까? 철길 바로 옆에 키 낮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집안에는 인기척이 없다. 다만 활짝 핀 접시꽃이 주인의 부재를 애써 부인한다. 건물은 사라지고 돌담만 남아 있는 집도 있다. 무너져가는 돌담 위에 번지수가 선명하다. 이곳에 가난한 이들이 깃들어 아이들을 낳고 꿈을 꾸며 살았을 것이다.

 

부산에서 경주를 오가는 동해남부선 철도가 개통된 것은 1934년, 일제강점기였다. 당시에는 우리나라 유일한 임해철도선이었다. 특히 좌동∼송정역을 지나는 구간은 해안풍경이 아름다워, 일부러 기차를 타는 사람들도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곳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특별할 것도 없는 풍경이었을 것이다. 삶이 고단한 이들에게는 연명이 풍경보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법이니까.

▲ 해운대에서 송정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청사포 해변의 등대.

▲ 이기대 해안 산책로를 찾은 관광객들이 광안대교와 해운대 신시가지를 바라보고 있다.

▲ 해운대해수욕장에서 셀프타이머로 기념사진을 찍고 있는 관광객들.

키 낮은 집들 뒤에는 번듯번듯한 건물들이 하늘을 찌를 듯 서 있다. 마치 영화 속으로 들어선 것 같다. 1960년대와 2015년을 짜깁기해 놓은 것 같은 극단적인 부조화. 공존이라는 말이 어색해 보이는 저 두 곳에도 같은 시간이 흐르는 것일까? 풍경에서 눈길을 거두고 다시 철길을 걷는다. 어릴 적에는 폴짝폴짝 두어 걸음은 떼어야 닿던 침목과 침목 사이를 한걸음에 건너간다. 키가 커지고 나이가 는 만큼 꿈은 줄어들었겠지.

 

젊은 연인들이 많이 오간다. 터질 것 같은 사랑을 미처 갈무리하지 못한 저 풋풋한 얼굴들. 그들이 서로를 바라보며 피워내는 미소가 내겐 응원이 되어 걸음을 가볍게 한다. 자그락자그락 발에 밟히는 자갈들이 장단을 맞춘다. 낮은 담을 따라 핀 수국·덩굴장미·칸나…. 아! 아주까리도 벌써 저렇게 키를 키웠구나. 하나씩 눈을 맞추며 걸어간다.

 

건물 몇 개를 지나자 철망 사이로 짙푸른 바다가 안길 듯 달려온다. 아! 이런 풍경 때문에 이 구간을 가장 아름다운 철길이라고 했구나. 철길 가까이는 절벽이다. 저만치서 달려온 파도가 몸을 부딪친 뒤 흰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린다. 그 소리가 언덕을 오르고 철망을 지나 귓전에 닿는다. 끊임없는 반복이 조금도 지루하지 않다. 철썩! 철썩! 파도에 박자를 맞추듯 걷는다.

 

젊은 여자 하나가 바다를 보며 서 있다. 눈길이 멀고도 하염없다. 무슨 추억이 저 여인을 이곳까지 불러냈을까. 아니, 단순히 사색을 하는 건지도 모른다. 바다를 보고 걷는 이 길이야말로 사색을 즐기기에 더없이 좋다. 조용조용 곁을 지나간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기차를 타고 이 길을 지났을까. 추억은 또 얼마나 많이 쌓였을까. 어찌 아름다운 꿈만 묻혀 있으랴. 내 머릿속의 기억 역시 모두 아름답지만은 않다. 술에 취해 누웠다가 세상을 달리한 아저씨도 있고, 스스로 달리는 기차에 뛰어든 청년도 있었다. 걸음 하나하나 지나간 날들을 내려놓는다. 걸으면 걸을수록 심신이 조금씩 가벼워진다.

 

소나무 군락이 나타난다. 연륜을 이고 지고 있는 소나무들은 여전히 새순을 내어 허공에 집을 짓는다. 이어서 나타나는 작은 터널. 벽에는 낙서가 그득하다. 누가 누구를 사랑한다는… 누구와 누가 함께 다녀간다는…. 가장 아름다운 날들이 빽빽하게 적혀있다. 입가에 미소 한 가닥이 저절로 걸린다. 터널을 지나 길가의 벤치에 앉아 파도소리를 듣는다. 세상의 어떤 음악보다 아름다운 소리. 인간의 표절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자연을 완벽하게 받아 적는 데는 실패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내겐 지금이 가장 행복한 순간이다. 눈이 즐겁고 귀가 즐거운데 더 이상 무엇을 바라랴.

 

교통수단으로서의 기능은 잃었지만 철길이 갖는 아름다움은 조금도 줄지 않았다. 가만히 지나온 길을 돌아본다. 생각보다 많이 구부러져 있다. 반듯하게 걸어온 것 같은데 멀리서 보면 늘 그렇다. 우리네 인생길도 크게 다르지 않다. 제대로 걷는다고 걸어도 어딘가는 구부러지거나 조금씩 비틀거린 흔적이 남는다. 걷다가 자주 돌아봐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바람 한 줄기가 위로라도 하듯 귓전을 간질이며 지난다.

 

철길 아래는 경계용 철망과 초소 같은 군사지역의 잔재들이 그대로 남아있다. 그 자체는 흉물스럽지만, 따지고 보면 군사지역이라 자연이 잘 보존됐다는 역설도 가능할 것 같다. 쾌속선 한 척이 하얀 포말을 그리며 바다를 가른다.

 

바람개비로 만든 태극기의 벽을 지나고 장승과 솟대들이 서 있는 곳도 지난다. ‘해운대옛철길 시민공원선언광장’에는 누군가 “철길이라고 쓰고 시민의 것이라 읽는다”고 써놓았다. 폐선 철도 부지의 활용을 놓고 계속되고 있는 갈등을 단적으로 상징하는 말이다.

 

안내판 하나가 눈길을 잡는다. 조금 더 가면 나오는 새터마을에 2만 년의 역사를 가진 부산 최초의 구석기 유적지가 있단다. 그렇다면 빼놓고 갈 수는 없지. 걸음에 더욱 힘이 붙는다. 저만치 등대 두 개가 나타난다. 청사포항이다. 철길을 가운데 두고 위쪽이 새터마을이고 아래쪽이 청사포마을이다. 우선 구석기 유적지를 찾기 위해 새터마을을 두리번거린다. 하지만 허름한 집 몇 채와 밭작물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물어볼 사람도 없다. 끝내 확인하지 못하고 돌아선다.

 

한낮의 청사포마을은 철길과 함께 늙어가고 있다. 노인 몇 분만 느린 걸음으로 오갈 뿐이다. 하지만 저녁에는 회나 장어구이를 먹으러 오는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룬다고 한다. 지금까지 걸어온 것만큼 더 가면 구덕포를 거쳐 폐선 철길의 종점인 송정마을에 닿는다. 총 4.8㎞.

걸음을 멈추고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돌아본다. 발아하지 못하고 묻혀버린 꿈을 찾듯 촘촘한 걸음으로 지나온 길이었다. 오늘 새로 만든 추억을 또 철길 사이에 묻는다. 바람 거세고 삶이 마구 흔들리는 날 다시 찾아와야지. 여기 길이 있어 걷는다. 잃어버린 나를 찾으려고 걷는다.

 

#그밖에 가볼 만한 곳 = 차를 갖고 갔다면 달맞이길 드라이브를 권한다. 중간에 만나는 해월정은 일출과 월출의 장관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부산을 제대로 조망하고 싶다면 남구 용호동의 이기대(二妓臺)를 찾아가면 된다. 임진왜란 때 수영 권번에 있던 두 명의 기생이 왜장에게 술을 먹여 취하게 한 뒤 함께 바다로 뛰어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곳이다. 군사보호구역이었으나 1993년에 개방되었다. 경관이 뛰어나서 해운대, 영도, 오륙도가 손에 잡힐 듯 들어오는 것은 물론 맑은 날이면 대마도를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다. 35m 높이의 유리전망대가 설치돼 있다. 시간이 충분하면 동생말∼어울마당∼농바위∼오륙도선착장으로 이어지는 4.7㎞의 해안산책로를 걸어보는 것도 좋다.



동해남부선의 일부구간을 이전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사유지 권한 행사를 요구하는 주민들의 민원이었다. 결국 지난 2013년 12월 우동∼기장 구간의 복선화가 완료되면서 해안 철길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철도노선을 옮긴 뒤에도 갈등은 여전히 가시지 않고 있다. 폐선 구간을 상업개발해서 이윤을 남겨야 한다는 인근 주민들의 목소리와 시민의 품으로 돌려주자는 목소리가 팽팽히 맞서고 있기 때문이다.

 

폐선 부지를 시민에게 돌려주자는 목소리는 ‘해운대기찻길친구들’ 등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그들은 “민간 업자에게 개발 이익을 안겨주는 상업개발은 곤란하다”면서 “모든 시민에게 온전히 돌려줄 방법을 함께 고민하며 느리게 접근해야 도시를 살리고 미래를 설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대안으로 시가 철도시설공단으로부터 부지를 매입하는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매입비용 마련이 쉽지 않겠지만 의지만 있다면 예산을 단계적으로 편성하거나 시민들과 함께 ‘1인 1평 사기 운동’ 같은 것을 추진할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해운대·송정 지역 주민들은 폐선 부지를 개발해야 한다고 강경하게 주장하고 있다. 그들은 집회 등을 통해 “지역 경제와 관광 활성화를 위해서 서둘러 개발해야 한다”고 촉구하고 있다. 폐선부지 개발이 늦어지면 이 지역이 슬럼화되고 지역경제가 죽게 된다는 논리다.

부산시는 부지 소유자인 철도시설공단과 민간개발 방식을 협의해 개발한다는 방침을 내세우고 있다. 현재로는 상업개발 쪽에 무게가 실린 것으로 보인다. 시는 해운대·송정지역 주민과 전문가, 시민·환경단체 관계자 등 대표 38명으로 구성된 시민계획단 라운드 테이블 회의를 통해 동해남부선 폐선부지 활용방안을 마련하고 있다. 미포에서 송정까지 해안구간 4.8㎞는 철도시설공단과의 협약대로 일부 상업개발을 가미한 산책로로 조성하는 게 불가피하다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



해운대 가는 길 = 자가용의 경우 경부고속도로→대구부산고속도로를 타고 해운대해수욕장까지 간다. KTX를 탈 경우 부산역에서 1003번 버스로 해운대해수욕장까지 가거나, 지하철을 타고 서면역에서 갈아탄 뒤 해운대역까지 가는 방법이 있다. 버스는 서울 고속버스터미널에서 부산 서부버스터미널까지 간 뒤 사상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동백역에서 내린다.

 

묵을 곳·먹을 것 = 해운대에는 손꼽기 어려울 만큼 숙소가 많다. 요즘은 가격이 비교적 싼 비즈니스호텔이 인기를 끌고 있다. 이비스 버젯 앰배서더 해운대(051-901-1111)선셋비즈니스호텔(051-730-9990)인더스트리호텔(051-742-9309)

등이 있다. 경북횟집(051-743-5917)은 김치에 싸먹는 회 맛이 일품이다.

회를 즐기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은 일품한우(051-747-9900)

최고급 품질의 한우 생갈비로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