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계절에는 세상의 모든 길이 암청(暗淸)의 터널을 통과한다. 가로수들은 땅속 깊이 뿌리를 내려 생명수를 길어 올린다. 소나기조차 인색한 하늘에 무릎 꿇지 않으려는 의지가 꿋꿋하다. 복주머니 수술처럼 생긴 자귀나무 꽃이 바람에 흔들린다. 과수원의 사과들은 벌써 아기 주먹만 하게 자랐다. 사과나무들은 어떻게 형상을 기억했다가 작년과 꼭 닮은 열매를 키우는 것일까. 약동하는 생명에게서 희망을 조금씩 나눠 받는다.
충남 예산으로 간다. 옛사람들의 자취를 만나러 가는 길이다. 이 길의 끝, 옛집에는 추사 김정희가 있다. 수덕사에는 조선말기 불교의 중흥조 경허와 만공이 있다. 또 한국미술사에 새 지평을 열었다는 이응노도 만날 수 있다. 더위를 피해 강으로 바다로 떠날 때, 먼저 걸어간 이들을 따라 걸으며 그들이 얻은 지혜를 경청하는 것도 여름을 알차게 나는 지혜다.
#추사고택 = 아침햇살과 참새들이 마당을 차지하고 놀다가, 낯선 발소리에 화들짝 놀라 달아난다. 김정희가 나고 자란 집은 안온한 터에 자리 잡고 있다. 부드럽게 품을 펼친 낮은 산을 뒤로하고 예당평야 너른 들판을 앞에 두었다. 담장은 높지 않아 경계보다는 안팎의 구분이 목적인 듯하다.
눈에 먼저 들어오는 건 ‘ㄱ’자의 사랑채. 마당 한쪽에 피었던 모란은 한참 전에 지고 솜털이 무성한 열매를 매달았다. 사랑채 너른 마루에 앉아 마당에 눈을 둔다. 무언가 지는 것을 보고서야 비로소 시간이 오고 갔음을 깨닫는다. 추사도 어느 날은 이 자리에 앉아 있었을까? 정갈하게 비질된 마당 위에 오래전 머물다간 천재 예술가의 생을 그려본다.
사랑채의 구조는 비교적 단순하다. ‘ㄱ’자로 꺾이는 곳에 대청을 두고 온돌방이 남쪽에 한 칸, 동쪽에 두 칸 있다. 큰방이 추사가 머물던 곳이다. 방안에는 추사의 글씨로 만든 큰 병풍과 보료, 서탁이 놓여 있다. 그곳에 앉아있었던 이를 그려보는 건 어렵지 않다. 추사의 궤적을 찬찬히 따라 걷는다. 훗날 ‘19세기 최고의 인물’이라는 평을 들을 정도로 빛나는 삶이었으면서도, 유배지에서 눈물을 삼켜야 하는 불우 또한 그를 비껴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불후의 작품들을 남겼다. 작품만으로 천 년을 두고 빛나는 삶 이상의 삶이 있을까.
집을 돌아보며 벽에 걸린 글씨들을 하나씩 눈에 담는다. 글씨마다 추사의 성품과 노력과 고난이 배어있다. 기둥에 걸린 주련에서도 그의 자취를 읽는다. 특히 ‘서세여고송일지(書勢如孤松一枝)’라는 문장 앞에서 오래 머문다. ‘글씨 쓰는 법은 외로운 소나무 한가지와 같다’는 뜻이다. 그도 그런 마음이었구나.
안채는 사랑채에 살짝 비켜서 있다. 사랑채가 동향인데 비해 안채는 남향으로 자리한 ‘ㅁ’자 집이다. 6칸 대청에 안방, 건넌방, 부엌, 광 등을 갖추고 있다. 집이 크지는 않지만 정갈하고 당당해 보인다. 그러고 보니 영조의 딸인 화순옹주가 머물던 집이기도 하다. 화순옹주는 김정희의 증조모다.
고요한 뒤뜰에는 나무에 앉았던 새소리만 우수수 떨어져 앉는다. 조금 올라가면 추사영실(秋史影室)이 있다. 거기서 추사의 초상과 마주한다. 그가 세상을 뜬 다음 해(1857년) 제자인 이한철이 그렸다고 한다. 얼굴 전체는 후덕해 보이고 표정은 온화하다. 특히 감춘 듯 은은한 미소는 보는 이의 마음을 평온하게 해준다.
천천히 뜰을 거닌다. 앵두나무도 매실나무도 살구나무도 텅 비었다. 노랗고 붉던 열매들은 계절을 따라가 버렸다. 대신 모과가 한참 몸피를 키우고 있다. 세상에는 무엇이든지 늘 가고 온다.
고택을 나서서 왼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소나무 숲을 지나고 추사의 증조부인 월성위 김한신 묘도 지나고 화순옹주 홍문을 거쳐 백송을 보러 간다. 이 백송은 추사가 25세 때 청나라 연경을 다녀오면서 가져온 씨앗을 고조부 김흥경의 묘소 앞에 심은 것이라고 한다. 밑에서부터 세 가지로 자란 아름다운 모양이었지만 두 가지는 말라 죽고 한 가지만 남았다. 그나마도 늙고 쇠잔해서 연명하는 것으로 위안을 삼는 모습이다.
길을 되짚어 나와 추사의 묘소에 들른다. 묘소는 봉분도 높지 않고 석물들도 고만고만하다. 하지만 기품이 있어 보인다. 소나무 한 그루가 청청한 기상으로 추사를 설명한다. 잠시 나무 그늘에 앉아 세상을 바라본다. 텅 비어 가득한 들판이 눈앞에 펼쳐져 있다. 사는 일도 다르지 않다. 비우고 또 비워서 가득 채울 일이다. #수덕사 = ‘동방제일선원(東方第一禪院)’ 현판이 붙은 일주문을 지나자마자 수덕사 선(禪)미술관부터 들른다. 고암 이응노 화백을 먼저 만나보고 싶어서다. 선미술관과 그가 머물렀다는 수덕여관은 아래위로 나란히 서 있다. 미술관 안에는 서명조차 없는 그의 습작들이 여러 점 전시돼있다.
그림을 담아오기라도 할 듯 하나하나 찬찬히 들여다본다. 덕숭총림 3대 방장을 지낸 원담 스님의 선필까지 돌아본 뒤 수덕여관으로 간다. 이응노 화백이 1944년에 구입해서 1959년 프랑스로 가기 전까지 거처한 곳이다. 그는 이곳에서 수덕사 일대의 풍경을 그렸다. 또 1969년 동백림 사건 당시 귀국해서 머물면서 바위에 추상화를 새기기도 했다. 그 바위가 지금도 그대로 있다. 이응노 역시 예술로 찬사를 받았지만 간첩으로 몰려 옥고를 치렀다. 사람살이의 덧없음을 확인한다.
수덕사로 올라가는 길은 깊고 서늘하다. 아름드리 소나무의 둔중한 표정에서 시간을 몸에 새겨 넣는 법을 배운다. 덕숭산 수덕사는 백제 말에 창건된 절로 알려져 있다. 그러니 최소 1300년이 넘은 고찰이다. 금강문을 지나고 사천왕문을 지난다. 계단을 오르기 전 황하정루가 기세등등하게 서 있다. 중창불사의 거센 바람을 타고 근래에 세운 이 거대한 건물은 답답한 느낌을 준다.
먼저 근역성보관(성보박물관)을 들른다. 이곳에는 수덕사 본·말사의 문화재 4000여 점을 소장, 전시하고 있다. 전시물은 조각, 불화, 공예, 복장물, 고승 유물 등 다양하다. 그중에서도 특히 눈에 띄는 것은 경허와 만공의 유품들이다. 만공스님이 해방을 맞아 무궁화 꽃잎에 먹을 묻혀 썼다는 ‘세계일화(世界一花)’ 등의 글씨와 고종의 다섯째 아들인 의친왕 이강으로부터 하사받았다고 전해지는 거문고도 직접 확인할 수 있다.
박물관에서 나와 가파른 계단을 오른다. 한순간 앞이 확 트이면서 절집들이 우르르 시야로 들어온다. 꾸밈없는 외양의 대웅전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마음이 턱 놓인다. 수덕사에서 대웅전을 빼면 아무리 많은 건물을 지어도 더 이상 수덕사가 아니다. 절마당의 늙은 느티나무와 소나무와도 반갑게 인사한다.
걸음을 멈추고 시선을 돌려 저만치 펼쳐져 있는 들판부터 바라본다. 내포 들판의 한 자락이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속세야말로 불국토(佛國土)다. 그리고 수덕사 풍경의 백미다. 바람은 또 얼마나 시원한지. 마음에 담아 온 응어리들이 슬그머니 녹아내린다. 참 긴 시간을 거슬러 올라 여기까지 왔다. 관음전에서 달려온 목탁소리가 귀를 열더니 끝내 마음까지 열어젖힌다. 푸른 숲 속으로 작은 새 한 마리 풍덩! 몸을 던진다.
대웅전 앞 3층 석탑 앞에 멈춘다. 절집들에 비해 초라해 보일 정도로 소박한 탑이다. 하지만 통일신라 탑 특유의 균형 있는 비례를 갖췄다. 한쪽 귀가 깨어진 게, 이리저리 넘어지며 살아온 민초들을 연상시킨다. 단청 없는 대웅전과 3층 석탑, 그리고 경허와 만공. 수덕사의 상징과 가치를 생각한다. 화려한 치장만 빛나는 것은 아니다. 단청을 하지 않은 대웅전이 그렇다. 국보 49호인 이 건물은 1308년에 세워진 고려 건축물의 대표 작품이다. 눈여겨 봐야 할 부분은 맞배지붕의 멋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측면과 팽팽한 긴장감을 주는 배흘림기둥, 그리고 장식 없는 문살이다. 특히 옆에서 본 대웅전은 군더더기를 배제한 단순미의 정수를 보여준다. 배흘림기둥을 천천히 쓰다듬으며 옛사람들의 지혜를 들으려 애써보지만 바람이 오가는 소리나 들을 뿐이다.
뒤쪽 담을 따라가다 경내를 벗어난다. 여기서부터 덕숭산 정상으로 가는 등산코스다. 중간중간 암자들이 여럿 있다. 비구니의 수행도량인 견성암을 비롯해서 선수암, 소림초당, 향월각, 금선대, 전월사…. 그리고 능인선원이 있는 정혜사. 그중 금선대에는 경허와 만공스님의 영정이 있다. 산을 오르다 말고 너럭바위 위에 철퍼덕 주저앉는다. 여기는 풀과 나무와 새의 영역이다. 솔 향을 싣고 온 바람소리가 귀에 달다. 이대로 잠들어도 좋을 것 같다. 아니지. 아무리 좋은 곳이라도 영원히 머무를 수는 없는 법. 내포 들판을 달려온 바람이 저자의 시간을 알려주지 않았으면, 저물 때까지 앉아있을 뻔했다. 가벼워진 몸과 마음을 일으켜 천천히 산을 내려간다.
추사 김정희는 고증학의 문호를 개설한 학자며, 문장가다. 글씨는 물론이고 그림에도 뛰어나 예술가로서 최고의 경지에 이르렀다. 금석학 연구에서도 큰 업적을 남겼으며 천문학·지리학·문자학·음운학에 정통했다. 하지만 그에게도 질곡은 있었다. 1819년 문과에 급제해 규장각 대제, 호서안찰사를 거쳐 병조판서에 이르는 등 승승장구하던 중 예기치 못한 시련이 닥쳤다. 55세 때 윤상도 옥사에 연루돼 9년에 걸친 제주도 유배생활을 했다. 65세 때는 진종조예론(眞宗弔禮論)의 배후 조종자로 지목돼 다시 2년간 함경도 북청에 유배됐다. 하지만 추사는 가장 절망적인 상황을 예술로 승화시켜 추사체라는 독특한 경지의 글씨를 만들었다. 이에 대해 박규수는 “제주도 유배시절에 완성되었다”고 평한 바 있다.
계율에 얽매이지 않고 호방한 선풍을 지녔던 두 스님은 숱한 일화를 남겼다. 지금까지 회자되는 이야기도 여럿이다. 어느 날 스님이 제자와 함께 고갯길을 넘는데, 제자가 다리가 아파서 더는 못가겠다고 꾀를 부렸다. 그때 마침 밭에서 남편과 함께 일하던 아낙이 있었는데, 스님이 달려들어 와락 껴안고 입을 맞췄다고 한다. 놀란 남편이 죽이겠다고 쫓아오는 바람에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고개를 훌쩍 넘었다. 제자가 스님에게 왜 그런 짓을 했느냐고 따지듯 묻자 “네가 다리 아파 못가겠다고 하지 않았느냐. 덕분에 여기까지 쉽게 오지 않았느냐”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이 일화는 두 스님의 법도를 넘어선 호기를 상징하는 일화라고 할 수 있다. 추사고택 가는 길 = 서해안고속도로 당진나들목에서 빠져 예산·합덕 방면으로 우측 길을 택한 뒤, 예산·삽교호 방향으로 좌회전→예산·합덕 방향으로 우회전→신탁교차로에서 옥금리·신택리 방면으로 좌회전→신택1리 방면으로 좌회전 후 추사고택로로 진입하면 된다. 묵을 곳·먹을 것 = 추사고택에는 마땅한 숙소가 없다. 수덕사 인근의 덕산온천에 원탕을 자랑하는 덕산온천관광호텔(041-338-5000과 뉴가야관광호텔 (041-337-0101등이 있다. 온천테마파크인 리솜스파캐슬(041-330-8000도 이용해볼 만하다. 수덕사 사하촌에는산채정식을 주메뉴로 하는 음식점들이 밀집돼 있다. 산나물과 더덕구이 등 수십 가지의 반찬이 나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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