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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지도에서 표현한 산의 모습을 보면 참 재미있는 것들이 많다. <1872년 지방지도>에서 그린 진보(현 경북 청송군 진보면)의 비봉산 그림도 그중의 하나다(지도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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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1872년 지방지도>의 진보 비봉산. 새가 날아드는 모습의 이미지로 표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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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봉산의 모습이 누가 봐도 영락없이 새가 날아드는 모습이다. 왜 이렇게 산을 새의 모습으로 그렸을까? 그리는 이(畫工)의 비봉산에 대한 사회문화적, 풍수지리적인 의식이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비봉산을 이렇게 하늘을 나는 새의 모습으로 그릴 수 있었다는 사실은 당시 비봉산의 이미지를 그렇게 인식했다는 증거가 된다. 그 코드를 푸는 열쇠는 몇 가지로 이해될 수 있다.
우선 산이 봉황이라는 신조(神鳥)의 유기체적인 대상으로 인지되었다는 사실이다. 산을 기가 흐르고 살아있는 대상으로 생각하는 것은 풍수적 전통이 반영된 것이다. 그 산에는 어김없이 풍수적인 비봉귀소형(하늘을 나는 봉황이 둥지에 깃든 형국) 등의 봉황 명당이 있다.
봉황은 용과 함께 각각 날짐승과 길짐승을 대표하는 신성한 상징물이다. 임금이 나라를 잘 다스리면 봉황이 날아온다는 태평성대의 상징이기도 했다. 지방 고을의 대표적 진산 이름으로서 비봉산을 선호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 봉황에 대한 문화적 인식이 심리적으로 고을의 산에 투사되어 동일시되는 과정을 거쳤다.
봉황과 관련된 이름도 많이 사용
비봉산(飛鳳山)은 전국적으로 분포하는 흔한 산이름이다. 주로 지방도시의 진산(鎭山)이 많았다. 진산은 조선시대에 각 지방도시(군현)마다 대체로 하나씩 지정되었던 랜드 마크였다. 조선시대 250여 개의 지방 진산 중에서 가장 많은 산 이름이 비봉산이다. 충청도 제천, 경상도 선산·진주·봉화·의성, 강원도 양구·정선, 경기도 안성·화성·안양, 전라도 완주·고흥·화순에도 있다. 봉황이 나타나면 태평성대를 이루고, 비봉산 아래에는 인물이 난다는 믿음 때문에 생긴 현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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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 <해동지도>의 진주 비봉산. 산세가 고을을 둥글게 에워싸고 있다 . 3 <해동지도>에 표기된 예천의 봉란. 봉황이 고을에 늘 머물도록 인위적으로 만든 장치다. 지명으로 기재된 것으로 보아 고을의 주요한 경관요소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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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봉산은 한국의 산이름으로 볼 때 봉황산 계열의 산이다. 봉황산은 용산과 함께 대표적인 산이름 유형이다. 일반명칭으로 봉산 혹은 봉황산이고, 특정 신체 부위를 따서 봉두산(鳳頭山), 봉미산(鳳尾山)이라고도 했다. 자태를 보아, 난다 비봉산(飛鳳山), 춤춘다 무봉산(舞鳳山), 운다 봉명산(鳳鳴山), 머문다 유봉산(留鳳山), 의젓하다 봉의산(鳳儀山), 위엄 있다 위봉산(威鳳山)이라고도 했다. 비봉산의 모양은 새가 날개를 펼친 듯 가로로 길쭉하거나, 날개를 접고 둥지에 깃드는 듯 세로로 우뚝하다.
<해동지도>에 표현된 진주의 비봉산을 보자(지도2). 봉황이 날개를 크게 펼쳐 고을을 에워싸고 있는 모양을 하고 있다. 실제의 비봉산은 도심의 북쪽에 시내를 가로로 펼쳐져 등지고 있는 162m의 나지막한 산이다. 지도상에는 실제의 모습과는 조금 달리 이미지가 덧붙여 표현된 것이다.
조선시대 진주에서는 비봉산의 상징을 문화적으로 재해석하게 되면서 고을의 지명과 건축경관 등에 다양한 변화가 일어났다. 비봉산을 마주하고 있는 산이름을 그물 망자를 써서, 망진산(網鎭山)이라 새로 이름 지었다. 봉황이 그물을 보면 날아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들 이름도 까치 작자를 써서, 작평(鵲坪)이라 했다. 봉황은 까치를 보면 날지 못하기 때문이다. 객사 앞의 누각은 봉명루(鳳鳴樓)라고 이름 짓고, 마을 이름은 죽동(竹洞)이라 했다. 벌로수와 옥현에 대나무를 심었다. 봉황은 죽실(竹實)을 먹기 때문이다. 진주의 옛 지리지인 <진양지>(1633)에 나오는 비봉산 스토리텔링이다.
다른 지방에서도 비봉산으로 인해 파생된 산이름이 줄줄이 생겼다. 봉황은 대나무를 좋아한다고 해서 죽방산(竹防山)이라 했다. 까지가 울면 봉황새가 다른 곳으로 날아가지 못한다고 하여 까치산(鵲山)을 두었다. 조선 중기의 관찬지리지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오는 이야기다.
허술한 지세 보완하려 봉황 알을 만들기도
<해동지도>의 예천 지도에는 봉황알(鳳卵)이라는 흥미로운 장소명이 나타난다(지도3). 고을의 동쪽에 만든 봉황알이다. 왜 봉란이라고 했을까? 예천 고을의 진산이 비봉산인데, 봉황이 오래도록 머물게 하기 위해 알봉을 인위적으로 만든 것이다. 일종의 상징 경관이다. 여기만 있는 것이 아니다. 경기도 안성의 비봉산 아래에도 봉황알이 현재까지 남아 있다. 경북 순흥의 알봉은 봉황이 날아가는 것을 막고, 고을 터의 허술한 지세까지 보완하는 풍수적 역할을 한다. 경북 선산에는 무려 다섯 개의 봉황알(五卵山)을 만들었다. 명칭도 그래서 오란산이다. 봉황이 날아와 알을 하나씩 낳을 때마다 인물이 한 명씩 난다고 믿었다. 이런 봉황알은 지역에 따라 난산(卵山), 난함산(卵含山)이라고도 불렀다.
우리에게 산은 그저 높이 솟아 있는 땅만이 아니다. 생태와 산림자원의 보고만도 아니다. 수많은 문화역사적 정보와 사상적 코드가 켜켜이 저장되어 있는 메모리와 같다. 옛 지도에 그려진 비봉산도 그러한 현상적인 단면의 하나다. 산으로 옛 지도를 보고 읽는 또 하나의 즐거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