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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지도를 보면 현대지도나 위성도보다 훨씬 실감 있게 산을 이해할 수 있다. 선인들의 산에 대한 느낌이나 산을 보는 시선이 고스란히 지도 속에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옛 그림으로서 가장 상세한 계룡산 지도라고 할 만한 것이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계룡산전도>(지도1)라는 조선 후기에 그려진 채색 지도다.
이 지도는 풍수적 시선으로 계룡산의 산세와 금강의 물줄기가 회화적으로 잘 묘사되었다. 산과 물은 둥글게 신도안을 에워싸서 명당 형국의 분지 지형을 이루고 있음이 역력하다. 뭇 봉우리들이 신선처럼 기립하고 있는 모습은 신령스럽기조차 하며, 그 속으로 동학사, 갑사, 신원사 등의 사찰과 대비암, 북사자암 등의 암자들이 보인다. 신도안에 있는 중봉(中峯)도, 백암동(白巖洞), 풍년동(豊年洞) 등의 주요 골짜기도 표시돼 있다. 암용추(雌龍湫)와 숫용추(雄龍湫)는 푸른 물줄기가 떨어지는 모습으로 정감 있게 그려졌다. 계룡산 주능선의 봉우리 이름도 눈에 띄는데, 자세히 보면 지금 이름과는 다르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최고봉인 상봉(上峯)을 비롯해 주능선 우로는 응봉(鷹峯), 좌로는 안봉(鞍峯), 증봉(甑峯) 등이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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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 후기 제작된 계룡산 전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현 계룡산 최고봉인 천황봉이라는 이름은 일제강점기에 개명되었다고 알려진다. 신성하고 높은 산봉우리와 천황을 등치시킴으로써 자연스럽게
천황이 우러러보이고 경외감이 들도록 꾀하는 것으로, 지명의 상징 조작을 통한 식민지배 정치 전략의 일종이다. 비슷한 사례는 계룡산 외에도 여럿
있다. 속리산의 정상도 원래는 천왕봉이었지만 일제강점기에 천황봉으로 둔갑해 버렸다. 대구의 비슬산도 그랬는데, 2014년 8월에야 원래 이름을
되찾아 천왕봉으로 고시됐다. 계룡산 천황봉도 아무런 역사적 근거가 없는 이름 대신에 원래의 ‘상봉’이라는 이름을 되찾아야 할 것이다. 조선시대의
고지도에서 ‘천황봉(天皇峯)’이라는 이름은 전북 장수의 주산, 전남 월출산의 주봉과 광양의 천황봉 이렇게 단 세 곳만
나타난다.
하륜이 <지리신법>으로 신도안 풍수적 결점 지적
우리 기억 속에 계룡산은 정치적 공간이자 신앙적 공간이 겹쳐진 장소 이미지로 떠오른다. 예부터 계룡산은 지정학으로 중요하게 지정된 국가적인 명산이었다. 일찍이 신라에서 토함산(동악), 지리산(남악), 태백산(북악), 팔공산(중악)과 함께 오악의 하나인 서악으로 지정하고, 중사(中祀)의 제의를 했다. 조선 왕조가 새로 나라를 세운 후 이성계는 계룡산이 품고 있는 신도안으로 도읍을 옮기려 했다는 것은 너무도 잘 아는 사실이다.
조선 초기에 계룡산은 풍수로 떴다가 풍수로 추락하는 운명을 겪게 된다. 1393년 1월 2일, 권중화가 바친 계룡산 도읍 지도를 보고 반한 태조는 도읍지 건설을 명하고 공사를 시작했다. 열 달이 넘게 기초를 닦던 중인 1393년 12월 11일, 태조는 계룡산 도읍지 공사를 갑자기 중지시켰다. 하륜이 <지리신법>이라는 당시로서는 최신의 중국풍수 텍스트를 근거로 신도안의 풍수적 결점을 들고 나온 이유 때문이었다.
결국 한양에 정도하고 나서도 태조는 계룡산에 대해 못내 아쉬웠는지 이듬해에 전국의 주요 명산에 대해 작호(爵號)를 내릴 때, 계룡산신은 호국백(護國伯)으로 봉했다. 왕실의 계룡산 사랑은 조선 후기에도 각별했다. 계룡산 자락에 중악단을 설치해 산신제를 모셨고, 지금도 신원사에 그 유적이 남아 있다. 이러한 축적된 역사적 경험은 사람들로 하여금 계룡산을 정치적, 신앙적 중심지로 각인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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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세기 제작된 <여지도>에 있는 동국팔도대총도.
- 계룡산에 대한 조선 후기 지식인들의 시선과 평가는 어땠을까? 이중환은 <동국명산록>에서 계룡산을 오관산(개성),
삼각산(한양), 구월산(문화)과 함께 나라 4대 명산의 하나로 꼽았다. 그 산수미학적 근거는 이랬다. “산 모양은 수려한 돌로 된 봉우리라야
산이 수려하고 물도 맑으며, 강이나 바다가 서로 모이는 곳에 터를 잡아야 큰 힘이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조선시대 계룡산의 지정학적, 신앙적,
산수미학적인 명산 이력으로 인해, 주요 고지도에는 뚜렷이 그려졌다. 예컨대 <동국팔도대총도>에는 충청도의 대표적인 명산으로 계룡산을
표현했다(지도2).
계룡이라는 산이름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산이름에 닭(鷄)과 용(龍)이 들어 있는 사연이 궁금하다. 삼국시대에 계룡산의 옛 이름은 계람산(鷄藍山)이었다. 중국 당대(唐代)의 <한원(翰苑)>이라는 책에 ‘나라(백제)의 동쪽에 계람산이 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계람산이나 계룡산의 ‘계’는 닭(鷄)이라기보다는, 높은 산이나 언덕을 지칭하던 고어인 ‘달()’이 한역된 말일 가능성이 있다. 후대로 오면서 산이름은 새롭게 진화했다. 신라시대에 들어와서 계람산에서 계룡산으로 바뀌었다. <삼국사기>에서 오악의 하나로 계룡산이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용 사상이 산이름에 새롭게 투영된 것이다. 그렇다면 계룡산 이름은 객관적 지형(-계-산)과 주관적 이미지(용)가 결합된 의미체로 이해된다.
고려시대 이후 풍수사상이 국토의 산의 인식에 전반적인 영향을 주면서부터 산줄기의 모양새와 자태를 용처럼 보는 풍수적 시선이 유행했다. 흔히 계룡산의 형세를 일컬어 회룡고조(回龍顧祖: 용이 휘돌다가 머리를 돌려 처음을 돌아보는 형국)라는 것도 이런 안목이다. 계룡산을 그린 고지도를 봐도 그렇다. 1872년에 그린 연산현 지도에 계룡산은 어찌 보면 산의 모습이면서도 어찌 보면 용의 모습으로, 이중적 이미지가 겹쳐 표현됐다. 옛 사람들의 눈에 비친 계룡산은 그렇게 그려졌다. 꿈틀거리면서 고을을 에워싸며, 머리를 돌려 고을을 지켜보고 있는 용의 역동적인 모습과 함께 두 눈도 뚜렷하다.<지도3>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서거정(1420~1488)도 용이 서려 있는 기이한 산으로 계룡산의 자태를 이렇게 읊었다.
층층이 푸르게 우뚝 솟은 계룡산
鷄嶽嶢揷層碧
맑은 기운 구불구불 백두산에서 비롯하네
淑氣蜿自長白
산에는 못이 있어 용이 서리고
山有湫兮龍則蟠
산에는 구름 있어 만물이 윤택하네
山有雲兮物可澤
내가 예전에 그 속에 노닐어 보니
我昔試遊於其中
신령하고 기이함이 다른 산과 같지 않네
靈異不如他山同
비를 만들어 천하를 윤택하게 할 수 있는 건
會作霖雨澤天下
용이 구름을 부리고 구름은 용을 따른 것이네
龍使雲兮雲從龍
계룡산이 뿜어내는 신령스런 모습과 그 속에 서린 기운은 왕조는 물론이고 민중들의 마음을 끌기에 충분했다. 계룡산을 조선 초에 왕실에서 새 왕조의 도읍지로, 조선 중후기에 민중들이 새 시대가 열리는 장소로 지목된 이유도, 푸른 생명의 기운을 오롯이 담고 있는 계룡산의 모습에 있었다. 조선의 왕조와 민중은 계룡산의 남다른 자태와 생동하는 분위기에서 새 시대의 희망을 보았던 것이다. 신채호 선생이 혁명적 사상가로 평가했던 정여립(1543~1589)의 눈에 비친 계룡산의 모습은 이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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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용의 모습으로 고지도에 표현된 계룡산. 그림 왼편이 계룡산이다. (1872년 지방지도, 연산현)
- 나그네로 남녘을 두루 다니다
客行南國遍
계룡산에서 비로소 눈이 번쩍하네
鷄嶽眼初明
뛰는 말이 채찍에 놀란 형세요
躍馬驚鞭勢
고개 돌린 용이 할아비산을 굽어보는 형국이라
回龍顧祖形
푸르스름 좋은 기운 모였네
蔥蔥佳氣合
무·기년에 형통할 운이 열릴 것이니
戊己開享運
태평세월 이르기에 무엇이 어려우랴
河難致太平
조선 후기에 계룡산은 <정감록>을 통해 새로운 시대를 여는 민중들의 해방구로 지목된다. 왕조의 산에서 민중의 산으로 지정학적인 장소의 패러다임이 변한 것이다. 계룡산에서 정도령이라는 메시아가 나와 새 나라를 건설한다는 메시지가 민간에 퍼지면서, 신도안을 중심으로 각종 도참비결파, 종교집단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이윽고 광복 후에 와서 계룡산 신도안은 한국 토속신앙과 민족종교의 메카가 됐다. 1975년 조사에 의하면 불교, 유교, 무속, 동학, 기독교, 단군, 도교 등 무려 104개의 다양한 종단이 신도안에 분포했다고 한다. 계룡산에 모여들어 꽃피운 세계 종교의 정원이요 박람회장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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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내언이 1929년 그린 신도안 지도.(계룡시청)
- 산과 사람의 정신생태적 소통과 진화 진행되던 곳
신도안의 철거되기 전 모습은 1929년에 이내언이 그린 <신도안 지도>(지도4)에 의해 개략적으로 알 수 있다. 이 지도는 계룡산의 꼭대기인 상봉을 머리로 산줄기와 하천뿐만 아니라 도로, 마을의 위치 및 규모, 당시까지 있었던 주요 교당(敎堂)도 표현됐다. 그중 상제교(上帝敎)는 2층 건물의 모습으로 가장 크게 그려졌다. 김연국이 1924년에 신도안에서 시천교(侍天敎) 혹은 동학천진교(東學天眞敎)를 개명한 동학계 종교이다. 한때 교세가 컸을 때는 교인이 50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당시 신도안에는 갖가지 민간 종교와 민족 신앙들이 흥성했다.
1984년에 신도안이 정부에 의해 강제적으로 철거되지 않았더라면, 온갖 민간신앙의 살아 있는 박물관으로서 그 문화경관적 가치만으로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고 남았을 것이다. 문화적 유산 가치에 대한 무지와 몰이해가 너무도 아쉽다. 2009년에 세계문화유산이 된 중국 산서성의 오대산은 ‘산이 종교적인 수도처로 진화된 살아 있는 문화전통’으로 세계적 유산가치를 인정받았다. 계룡산이 통째로 그런 곳이었다. 산과 사람의 정신생태적인 소통과 진화가 용틀임처럼 진행되던 세계문화사의 한 현장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신도안에는 삭막한 군사시설만 덩그러니 놓여, 신령스런 계룡의 푸른 정기는 온데간데없고 휑한 바람만 스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