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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격전장을 가다

醉月 2016. 5. 6. 09:55

日 우익 ‘네마와시’(물밑작업) 무르익는 新정한론(征韓論)

  • 전계완 | 시사평론가, ‘일본, 다시 침략을 준비한다’ 저자 jkw68@daum.net
    ● 광복 70년 드라마 KBS-이순신, NHK-요시다 쇼인
    ● ‘대동아전쟁’ 전시장엔 반성 대신 “천황 만세!”만
    ● 국지전 개입해 군사력 과시하고 ‘평화 위한 조치 선전?
日 우익 ‘네마와시’(물밑작업) 무르익는 新정한론(征韓論)

재일 특권을 인정하지 않는 시민모임(재특회) 회원들이 혐한(嫌韓) 시위를 벌이고 있다. 동아일보


2015년 12월 현재 한국과 일본은 새로운 협력 공동체를 만들 가능성이 매우 낮다. 11월에 박근혜 대통령과 아베 신조 총리가 만났지만 난마처럼 엮인 실타래를 풀지 못했다. 핵심 의제는 손도 대지 못했다. 만남 자체가 미국의 압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뤄졌다는 해석에 힘이 실렸다. 정상회담 이후 상황은 더 꼬이고 있다.


 아베 총리는 위안부 문제의 연내 타결 노력에 합의했지만, 귀국하자마자 “과거에 이미 끝난 일”이라고 말을 바꿨다. ‘협상용’과 ‘국내 정치용’ 코멘트가 따로 노는 형국이다. 오히려 우경화 행보에 가속 페달을 밟고 있다.


안보법 통과로 ‘전쟁 가능한 나라’가 된 일본은 아베 총리 취임 후 최대 규모인 12만 명의 반대 시위에도 눈도 깜박하지 않았다. 오히려 미일 군사동맹 체제를 강화해 유사시 한반도 작전계획을 세우며 자위대의 대규모 군사훈련을 준비하고 있다. 아베의 질주에 공포심을 느낀 일본인은 적극적 저항은 포기하고 소극적 관망 상태로 돌아선 듯하다. 일본 우익의 활개가 이처럼 거칠게 드러난 적은 일찍이 없었다.


서울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일본의 식민 지배를 사죄한 하토야마 유키오 전 총리에게 지난 10월 일본 우익이 차량 위협 시위를 벌인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자국의 전직 총리를 ‘매국노’라 부르며 6차선 도로를 가로막고 10분간 도로를 점거한다는 것은 일본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11월 23일에는 야스쿠니 신사 화장실에서 사제 폭발물이 터졌는데, 일본 경찰은 폐쇄회로 TV 분석을 통해 27세의 한국인 전모 씨를 용의자로 지목했다고 일본 언론이 보도했다. 공식 발표가 없는데도 ‘아사히신문’ ‘산케이신문’ 등은 연일 이 사람을 ‘폭탄테러 용의자’로 특정해 보도했고, 전씨는 일본에 재입국하자마자 체포됐다. 우리 외교부는 전씨의 얼굴이 일본 언론을 통해 공개된 것과 관련해 엄중항의했지만, 전씨의 개인정보와 수사 상황은 연일 언론에 보도되면서 일본 경찰이 사실상 피의 사실 공표를 하고 있는 것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됐다.


日 우익 ‘네마와시’(물밑작업) 무르익는 新정한론(征韓論)

일본 야스쿠니 신사 입구에 설치된 ‘종전 70주년 특별전’ 알림판. 사진제공·전계완


21세기형 임진왜란

日 우익 ‘네마와시’(물밑작업) 무르익는 新정한론(征韓論)

‘일본 전범은 무죄’라고 주장한 인도 출신 라다비노드 팔 판사와 어록. 사진제공·전계완


이런 상황에서 우리의 대응은 한가롭고 위태로워 보인다. 자위대의 한반도 진출을 놓고 ‘된다’ ‘안 된다’는 식으로 싸우는 걸 보면 정말 큰일이 벌어지겠다는 위기감이 든다. “우리 정부가 뾰족하게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한 정치인의 말에 더욱 놀란다.


물론 똑같은 역사는 없다. 420년 전 임진왜란이나 120년 전 일본에 의한 조선 몰락이 똑같이 반복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역사는 되풀이된다. 비슷한 상황은 일어날 수 있다.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21세기형’ 임진왜란이나 한일 강제병합이 순식간에 일어날 수 있다. 이미 일본에는 한반도를 향한 침략 DNA가 꿈틀거리고 있다. 무력을 이용한다면 그 실행 형태가 완전히 달라질 것이고, 무력이 아니라면 새로운 방식으로 한반도를 넘볼 것이다.


지난 11월 스산한 바람이 불던 어느 날 필자는 도쿄 시내 지요다(千代田)구에 있는 야스쿠니 신사를 찾았다. 강렬한 느낌의 포스터 한 장이 눈에 띄었다. ‘대동아전쟁 종전 70주년 특별전’이었다.


오랜만에 접하는 ‘대동아(大東亞)전쟁’이라는 용어가 생소했다. 우리는 1941년 일본의 미국 진주만 공격으로 시작된 전쟁을 ‘태평양전쟁’이라 일컫는다. 일본은 국제사회가 뭐라고 하든 대동아전쟁이라고 한다. 아시아 전체가 연합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였다는 일본식 주장이다. 식민지 침략과 제국주의 확장을 합리화하겠다는 의도가 숨어 있다.


그러니 대동아전쟁 종전 70주년 특별전시장에선 사죄나 반성의 기미를 찾아볼 수 없었다. 가미카제(神風) 특공대원으로 출정 전에 남긴 유서, 대일본제국과 천황을 위해 목숨을 바친 뒤 야스쿠니에서 다시 만나자는 결의문, 천황의 뜻에 따라 온 국민이 하나로 뭉쳐 헌신했다는 사진과 그림이 붙어 있다. 젊은이들의 영정사진은 숫자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몇 년 전 일본에서는 가미카제 특공대원을 다룬 하쿠타 나오키의 소설 ‘영원의 제로’가 출간됐다. 전쟁 미화 논란에도 베스트셀러가 됐고 드라마도 만들어졌다. 일본의 한 40대 주부는 “논란은 있었지만 어쩔 수 없이 전쟁에 뛰어들어 갈등하고 고뇌하는 인간의 관점에서 볼 때는 흥미로운 소설이었다”고 말했다. 


전시장을 둘러보고 나오면 바깥에 부조상이 하나 있다.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12명의 판사 중 유일하게 일본 전범들이 무죄라고 주장한 인도 출신 라다비노드 팔(1868~1967)의 얼굴과 어록이다. 일본 우익은 팔 판사를 기리고 그의 ‘용기와 정열’을 후세에 전한다는 명목으로 현창비(顯彰碑)를 세웠다. 그의 어록은 일본 우경화 행보의 버팀목이 되고 있다.

‘평화로운 나라’

日 우익 ‘네마와시’(물밑작업) 무르익는 新정한론(征韓論)

1만 엔 지폐에 그려진 후쿠자와 유키치. 사진제공·전계완


‘시간이 열광과 편견을 누그러뜨릴 때, 이성이 허위진술로부터 가면을 벗을 때, 법의 정의는 평형을 유지하기 위해 과거의 상과 벌의 위치를 바꿀 것이다.’
‘야스쿠니(靖國)’는 ‘평화로운 나라’라는 뜻이다. 야스쿠니 신사엔 1858년 도쿠가와 막부를 무너뜨린 보신(戊辰)전쟁 때부터 전란으로 목숨을 잃은 246만여 명의 영령을 안치했다. 일본에서 가장 큰 신사다. 이곳이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은 것은 일본 우익이 정부의 묵인 아래 태평양전쟁 전범들을 합사했기 때문이다. 전쟁을 지휘한 당시 총리 도조 히데키를 비롯한 A급 전범 14명이 1978년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됐다. 군국주의 부활의 상징으로 재탄생하는 순간이었다. 2차 세계대전의 주범인 히틀러와 그의 부하들이 독일 건설을 위해 순국한 사람들과 함께 국립묘지에 묻혀 있는 꼴이다.


그런 야스쿠니 신사가 이제는 정치인을 포함한 우익세력이 때를 가리지 않고 참배하는 곳이 됐다. 아베 총리의 참배와 공물 헌납이 한국과 중국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상대국을 자극하지 말라는 미국 오바마 대통령의 자제 요청은 2015년부터 사라졌다. 오히려 미국은 일본의 우경화에 눈감고, 미일 군사동맹을 강화하고, 자위대 역할을 확대하고 있다. 중국 견제를 위해 일본을 내세우겠다는 복안이다. 
야스쿠니 신사는 아베 총리의 의도대로 전쟁범죄자를 영웅으로 만들고 있었다. 평화로운 나라라는 야스쿠니는 전쟁할 수 있는 군국주의 일본을 부활시키는 지렛대로 바뀌고 있었다.   

‘계몽’의 두 얼굴

씁쓸한 마음을 뒤로하고 도쿄 미나토구에 있는 게이오기주쿠(慶應義塾)대학을 찾았다. 계몽주의 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1835~1901)가 세운 명문 사립학교다. 흔히 게이오대학이라고 부른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지난 1000년 동안 일본을 빛낸 인물 ‘톱 10’에 드는 사람이다. “일본이 서양의 식민지가 되지 않으려면 근대화만이 살길”이라고 주창한 개화론자다. 미국과 유럽을 견학하며 서양 문물 도입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느낀 그는 산케이신문의 전신인 지지신보(時事新報)도 설립했다. 일본 근대화의 선구자로 추앙받으며 1만 엔 지폐에 등장한다.


그러나 조선에는 원흉과 같은 인물이다. 그는 조선 침략과 제국주의 사상을 전파한 장본인이다. “조선 인민은 소나 말, 돼지와 다를 것 없다”며 조선인을 비하했다. 1884년 갑신정변 실패 후 조선 침략의 정당성을 일본 사회에 널리 퍼뜨렸다. “같은 한자문화권인 조선과 중국은 일본의 불행이며, 이들과 가깝게 있다는 것만으로 일본에 화가 닥칠 수 있다. 나쁜 친구를 버리고 서양과 함께 가자”며 ‘탈아입구론(脫亞入歐論)’을 설파했다.


흥미로운 점은 그동안 후쿠자와를 존경하던 일본인들 사이에서 그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나고야대 출신의 원로학자 야스카와 주노스케는 ‘마루야마 마사오가 만들어낸 후쿠자와 유키치라는 신화’라는 제목으로 책을 냈다. 전후 진보 지식인으로 평가받는 마루야마 마사오가 전체주의적 보수주의자인 후쿠자와를 마치 시민적 자유주의자인 것처럼 왜곡했다는 내용을 담았다.
후쿠자와가 마루야마에 의해 ‘제국주의 신민 형성의 선구자’에서 ‘천부인권론자’로 변신했다는 야스카와 교수의 지적은 일본 사회에 울림이 컸다. 그는 “일본 국민의 유순함은 집에서 기르는 비쩍 마른 개와 같다. 이런 노예적 습관이 추후 자본주의 발전에 기여할 것”이라고 한 후쿠자와를 결코 자유주의자라고 부를 수 없다고 주장했다.
또한 “후쿠자와 찬양세력은 아베 총리를 비롯한 우익세력”이라며 “이들은 후쿠자와를 민주주의 신봉자로 내세워 전쟁국가 회귀를 노린다”고 따끔하게 지적했다.

요시다 쇼인의 그림자

日 우익 ‘네마와시’(물밑작업) 무르익는 新정한론(征韓論)

아베 총리가 존경하는 인물로 알려진 요시다 쇼인은 조선과 중국 정벌을 교시한 인물이다. 동아일보


사후 110년을 넘겨 다시 역사적 평가를 받게 된 후쿠자와 유키치. 게이오대 교사(校舍)에 세워진 그의 흉상 앞에 서니 ‘역사, 왜곡할 수는 있어도 숨길 수는 없다’는 진실의 목소리가 어디에선가 들려오는 듯했다.
 일본에 내재된 ‘침략 DNA’를 확인하면서 착잡한 심정이 들었다. 호텔로 돌아와 TV를 켜니 잔잔한 드라마가 방영되고 있었다. 일본에서 대하드라마는 커다란 인기를 끌고 있다.


2015년은 우리나라엔 광복 70주년, 일본엔 종전(終戰) 70주년인 해다. 1945년 8월 15일을 바라보는 두 나라의 시각은 정반대다. 2015년 양국 TV에 방영된 대하드라마만 봐도 그렇다. KBS는 임진왜란을 다룬 ‘징비록’(2월 14일~8월 2일)을, NHK는 메이지유신을 소재로 한 ‘하나모유’(1월 4일~ )를 선보였다.


‘꽃 타오르다’는 뜻의 ‘하나모유(花燃ゆ)’는 1868년 메이지유신 시대가 배경으로 요시다 쇼인(吉田松陰·1830~1859)의 여동생 스기 후미가 주인공이다. 도쿠가와 봉건 막부체제를 무너뜨린 혁명의 정신적 지도자 요시다 쇼인과 스기 후미의 인생 역정이 담겼다. 요시다 쇼인은 메이지유신의 사상적 기초를 닦고 조선과 중국 정벌을 교시한 인물. 아베 총리는 2013년 8월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요시다 쇼인 묘소를 참배하고 “결심을 다지겠다”고 했다. 넉 달 뒤인 12월, 주변국 반발에 아랑곳하지 않고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감행했다.   


日 우익 ‘네마와시’(물밑작업) 무르익는 新정한론(征韓論)

메이지유신을 소재로 한 NHK의 ‘하나모유’.


그 무렵 NHK는 ‘하나모유’ 제작을 결정했다. 일본 언론은 아베 총리가 요시다 쇼인과 관련된 대하드라마 제작을 압박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일본 드라마는 통상 방영 2년 전쯤 제작 여부를 발표하는데, ‘하나모유’는 1년을 앞두고 제작을 결정했기 때문이다. 사료가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스기 후미를 내세우려고 NHK 제작진이 수개월 동안 자료 찾기에 공을 들였다는 얘기도 나왔다. 정한론(征韓論)의 창안자인 요시다 쇼인을 전면에 세우는 데 부담을 느낀 아베 정권과 NHK가 여동생 후미를 대신 내세웠다는 해석이다. 아베 총리에게 요시다 쇼인의 부각이 그만큼 중요했다는 방증이다. 


그러나 드라마는 성공하지 못했다. 초반 시청률이 16%를 넘었다고 발표했지만, 이는 지난 15년 이래 최악의 대하드라마 시청률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시청률은 더 떨어져 2015년 11월 말엔 10% 전후를 기록했다.


도쿄의 한 주부는 “메이지유신을 다루는 드라마에 무명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탓에 큰 관심을 끌 수 없었다”고 지적했다. 온라인에는 ‘역사를 경시한다. 시청자를 얕잡아보지 말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정치가 방송에 개입해 드라마를 드라마답지 않게 만든 당연한 결과였다. 이처럼 아베 정권의 우경화 행보는 비단 정치 영역뿐 아니라 드라마 제작 개입설에서 보듯 문화 영역에서도 감지됐다.


아베 정권의 ‘하나모유’ 개입 논란은 단순한 해프닝이 아니라 분명한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비친다. 그것은 2018년 메이지유신 150주년을 향한 진군(進軍)이다. 1868년 봉건 막부를 무너뜨린 메이지유신 세력은 제국주의 사상 계승을 거듭하며 아베 정권을 만들어낸 일본 우익의 깊은 뿌리다. 아베 총리 등에게 2018년은 ‘강한 일본’이 완성되는 역사적 전환기다. 한국이 광복 70년을 맞아 ‘새로운 30년’을 내세울 때 일본은 메이지유신 150년을 향해 치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메이지유신 150년 향한 進軍

일본에 ‘네마와시(根回し)’라는 말이 있다. 나무를 옮겨 심기 전에 수월하게 일하기 위해 잔뿌리를 제거하고 뿌리 전체를 밧줄로 감싸는 작업을 말한다. 일본인은 어떤 일을 결정할 때 사전에 네마와시를 하고 목표한 일에 차질이 없도록 물밑작업을 한다. 예측 가능한 상황을 미리 설정해놓고 정해진 수순에 따라 만장일치로 일을 끝내려고 한다. 일본인을 자주 만나다보면 결론을 이미 내놓고 형식적인 미팅을 한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한국인은 일단 만나서 실무적으로 논의하지만, 일본인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중요한 작업을 먼저 끝낸다. 


이는 사전에 특정 사안을 둘러싼 대립과 마찰을 정리하고, 전체 회의를 통해 집단행동을 결의하는 일본 문화를 반영한다. 어떤 일을 대할 때 일본인은 네마와시를 거쳤다고 미루어 짐작하기 때문에 최종 결정 사항에 대해 거칠게 항의하는 예가 드물다. 잔뿌리와 같은 개인보다 큰 줄기를 중시하는 일본의 집단문화가 네마와시에 담겨 있다.


표면에 떠오른 정치 현안도 비슷하다. 일본 주류 정치인의 발표는 어디선가 네마와시를 마친 결론이라고 봐야 한다. 한국처럼 여론용으로 정책을 발표했다가 반발이 있으면 덮어버리는 식의 정치는 일본 주류 정치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목표와 계획 수립, 진행절차, 최종 실천 등의 과정이 시나리오처럼 나와 있다.


아베 정권 출범 이후 군사대국을 향한 일관된 흐름도 일본의 네마와시 문화로 설명할 수 있다. 상시적인 독도 도발, 위안부 문제 회피, 역사교과서 왜곡, 집단자위권 강화, 헌법 재해석 등은 결코 일시적, 감정적, 즉흥적인 행동이 아니다.


日 우익 ‘네마와시’(물밑작업) 무르익는 新정한론(征韓論)

‘대동아전쟁 종전 70주년 특별전’에 마련된 젊은이들의 영정사진. 사진제공·전계완


激戰을 꿰뚫는 지혜

아베는 지난 10월 안보법 통과 이후 일본과 국제사회에 격정적인 목소리로 ‘평화’를 외치지만, 이를 그대로 믿을 수는 없다. 아베의 ‘평화’ 속에는 반성하지 않는, 결코 반성하지 않을 침략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겼다. 일본 역사에서 평화라는 말은 동전의 양면처럼 늘 전쟁이라는 말과 함께 사용돼왔다. 자살비행단인 가미카제 특공대를 ‘세계평화를 위한 거룩한 죽음’이라고 선전하며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에 나서는 나라가 일본이다.


세계 평화와 강한 일본을 추구하는 우익세력의 네마와시는 무엇인가. 단언컨대 한반도 주변의 무력활동 강화와 국지도발 개입으로 압도적 우위의 군사력을 세계에 과시하는 일이다. 그러면서 평화를 지키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라고 설명할 것이다. 1945년 태평양전쟁 전범재판에서 일본의 A급 전범들이 식민지 침략과 전쟁이 동아시아 평화를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며 미군 중심의 재판을 부정하던 장면과 비슷할 것이다. 역사에서 부끄러움이라는 단어를 지우고 군국주의로 회귀하려는 일본은 점점 괴물로 바뀌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태무심하다. 우리 정치권 일부에서 일본 안보법을 ‘북핵 억지력 강화와 동북아 평화 기여’ 등의 기회로 삼자는 것을 보면 허탈해진다. 지금이라도 치밀하게 대응전략을 세워야 한다. 정치권은 일본 문제에 대해 정치적 유·불리를 떠나야 한다. 일본을 비난하면서 애국자 행세를 할 것이 아니라, 우익이 주도하는 ‘괴물’ 일본에 어떤 지혜로 맞설 것인지 초당적으로 연구해야 한다.
일본 우익은 앞으로 어떻게 움직일 것인가. 과연 그 종착지는 어디인가.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지 말고 우선 그들의 네마와시를 읽어내야 한다. 그리고 다시 한국을 읽어야 한다. 그 속에서 격전(激戰)을 꿰뚫는 지혜로운 길을 찾을 수 있다. 시간이 많지 않다.


▼몰락한 日 한인타운▼
 

“도쿄에서 한국이 사라졌다”

2010년 전후 도쿄 중심가에 한류(韓流)가 넘치는 거리가 있었다. 신오쿠보(新大久保)다. 도쿄의 명물로 ‘한인타운’으로 불렸다. 일본 젊은이와 한국 문화가 어우러지는 공존의 현장이자 말 그대로 불야성을 이루던 곳이다.


2015년의 신오쿠보는 맥이 빠졌다. 인근 신주쿠(新宿)와 비교하는 것은 물론이고 도쿄 중심부라고 느낄 수 없을 정도로 한산한 분위기다. 주말 저녁인데도 한류 용품 판매장에는 지나가던 사람이 가끔 내부를 들여다볼 뿐 고객 발길이 뚝 끊겼다. 도쿄에서 유독 한인타운만 불황에 허덕이는 느낌이었다.


신오쿠보 바로 옆에 있는 신주쿠의 유흥가 가부키초(歌舞伎町)는 경기침체를 실감하지 못할 만큼 사람들로 붐볐다. 하지만 이곳저곳에서 들려오는 왁자지껄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대부분 중국 관광객이었다. 한국 관광객이 많이 줄었다는 것도 한 눈에 알 수 있다. 도쿄 지하철이나 기차에서 단체관광객이 있는 곳을 가보면 열에 아홉은 중국인이다.


신오쿠보에서 한국식 엿강정을 팔고 있던 상인은 “예전에 비해 손님이 30%밖에 되지 않는다. 더 큰 문제는 이런 분위기가 반전되거나 상권이 회복될 가능성이 없다는 점이다. 어떻게 손을 써야 할지 대안도 마땅치 않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현상은 2011년 동일본대지진 이후 반한시위, 혐한운동이 본격화하면서 나타났다. 일부 지역에서 일어나던 시위는 2013년을 넘어서면서 도쿄 번화가인 신오쿠보에 집중됐다. 시위에 등장한 구호는 ‘한국과 단교하라’ ‘조선인 물러가라’였다. 협박에 가까웠다. 반복적으로 집요하게 이뤄졌다. 먼저 한류 문화를 공유하려던 일본인이 발길을 끊었다. 뒤이어 일본 언론이 한국과 한류를 외면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시민단체의 극단적 행동에 일본 우익 정치세력이 동참하면서 일본 전체가 혐한·반한 분위기에 휩싸였다.


한 상인은 “일본 여성과 젊은이에게 선망의 대상이던 한국이 이제 불편하고 껄끄러운 상대로 변했다. 한국에 관심있다는 사람도 크게 줄었다”며 답답해했다. 한일관계의 파국 속에서도 민간교류만큼은 끝까지 지켜야 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자국 국민감정을 자극하며 ‘내수용 정치’에 몰두하는 두 나라 지도자는 ‘신오쿠보의 어둠’에 큰 책임이 있다.


日 우익 ‘네마와시’(물밑작업) 무르익는 新정한론(征韓論)

혐한시위로 손님들의 발길이 끊긴 신오쿠보의 한인타운. 사진제공·전계완


사무라이 핏줄 잇는 침략의 역사 ‘복잡계’(複雜系)



● 사이고 등 제국주의자 胎室…고이즈미-아베로 바통

● 가미카제 특공대 세계유산 등재 추진

● 반성 없는 메이지유신 150년, 일본 극우의 본성




사무라이 핏줄 잇는 침략의 역사 ‘복잡계’(複雜系)

일본 미나미규슈 시 특공평화회관에 전시된 가미카제 자살특공대 출격기. 동아일보


“가고시마(鹿兒島) 하면 무엇이 가장 먼저 떠오릅니까?”
도쿄 사람에게 물으면 10명 중 8명은 “흑돼지”라고 답한다. 가고시마 흑돼지는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지역 특산물이다. 한국 여행객에게 같은 질문을 하면 온천, 골프, 화산 폭발을 꼽는다.  


도쿄의 시각에서 보면 가고시마현은 ‘깡촌’이다. 이곳은 일본 최남단 규슈(九州) 지방 끝자락에 있다. 도쿄 하네다 공항에서 비행시간 1시간 30분, 직선거리로 1000km에 이른다. 현청 소재지 가고시마의 인구는 충남 천안과 비슷한 60만 명, 19개 시(市)를 포함한 현 전체 인구는 충청북도보다 10만 명 정도 많은 167만여 명이다.


지난 연말 가고시마를 방문했을 때 “무슨 역이 이렇게 크지?”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규슈 신칸센(新幹線)의 종착역인 가고시마 중앙역에는 아뮤플라자라는 대형 쇼핑센터가 있다. 서울의 신세계백화점 명동점과 규모가 비슷해 보인다. 역 맞은편에는 우리나라 대형 할인점 3~4개를 합쳐놓은 듯한 이온몰(Aeon mall)이 있다. 덴몬칸(天文館)이라는 중심가에 가면 200년이 넘었다는 야마가타야(山形屋) 백화점이 있다. 그 밖에도 10여 개의 판매시설이 도심 곳곳에 흩어져 있다. 인구 규모를 감안할 때 이렇게 많은 대규모 쇼핑 공간이 어떻게 운영되는지 의문스럽지만 우리로선 이해하기 어려운 경제력이 있다고 한다. 

거대한 흐름


지난 한 해 동안 필자는 가고시마를 다섯 차례 드나들었지만, 방문할 때마다 늘 다른 느낌이었다. 가고시마에 남겨진 파편적 역사는 각기 동떨어져 있지만, 어느 순간 하나로 연결돼 거대한 흐름을 만들어낸다.


열도 끝자락에 있는 이 작은 도시는 지난 500년 동안 일본 역사의 굵직굵직한 사건마다 빠짐없이 등장했다. 표류한 포르투갈 상인에게서 조총 제조 기술을 전수받았고, 서양 선교사가 처음 들어와 교회를 세운 곳도 가고시마다. 류큐(琉球) 왕국(현재의 오키나와)을 관할에 두고 식민지배 경험을 쌓았고, 국법을 어기면서까지 영국으로 젊은이들을 유학시켜 산업혁명을 일으킨 곳도, 무력으로 체제 전복에 나선 곳도 가고시마다.  
한반도와의 관계도 흥미롭다. 짧게는 2004년에 한일 정상회담이 열렸고, 길게는 1500년 전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백제에서 건너온 도래인(渡來人)이 일본 문화를 만들었고, 임진왜란기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침략의 전초기지로 삼아 전쟁을 벌였고, 조선에서 끌려온 도공들은 이곳에서 세계적 명성의 일본 자기를 생산했다. 막부체제를 무너뜨린 뒤 사무라이들이 조선 정벌을 결행하자고 주장한 곳, 조선인을 포함한 가미카제(神風) 자살특공대가 운영된 곳도 가고시마다.  


한일 관계에서 보면 나쁜 기억이 많지만 오늘 이 순간에도 가고시마는 우리와 숙명처럼 만난다. 가고시마 출신인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의 역사왜곡 바통을 아베 신조 현 총리가 이어받아 과거사 부정, 전쟁 가능 국가, 군사대국화 등의 우경화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지난 150여 년을 되돌아보면 두 나라 역사를 결정적으로 바꾼 시점은 1860년대다. 당시 조선의 한양(서울)과 일본의 에도(도쿄)는 지배자의 무능과 권력집단의 부패가 만연했다. 서양 세력이 밀려올 때 쇄국을 고집하며 천주교를 탄압했고 이대로 가면 나라가 망한다는 상소(上訴)가 빗발쳤지만, 이미 기울어진 조선 왕조와 일본 막부체제는 귀를 닫고 눈을 가렸다. 외척(外戚)이 나라를 좌지우지하던 세도정치도 꼭 닮았다.


그러던 중 일본에는 지배자인 막부를 무력으로 무너뜨리자는 혁명세력이, 조선에는 왕을 앞세워 뒤틀린 나라를 바로잡으려는 개화세력이 등장했다. 결과는 달랐다. 일본은 혁명에 성공했고, 조선은 개화에 실패했다. 결국 제국주의의 길로 들어선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로 삼켰다. 1860년대 일본 혁명의 진원지도 바로 가고시마다. 일본 근대화가 곧 조선의 몰락으로 연결된 것을 보면 가고시마는 정말 역사적으로 우리와 떼려야 뗄 수가 없는 곳이다.

젊은 사쓰마의 群像

사무라이 핏줄 잇는 침략의 역사 ‘복잡계’(複雜系)

가고시마 중앙역 광장에 있는 ‘젊은 사쓰마의 군상’. 사진제공·전계완


가고시마 돌핀포트에서 4km 떨어진 곳에 사쿠라지마(櫻島)라는 화산섬이 있다. 1863년 8월 이 섬 주변에서 사쓰마번(薩麻藩, 현 가고시마현)과 영국 함대 간 전투가 벌어졌다. 사무라이의 영국인 살해사건 때문에 중앙의 에도 막부가 거액을 배상했지만, 정작 사건 당사자인 사쓰마번이 들고 일어나면서 전투가 시작됐다. 영국은 막강한 군함으로 일개 지방의 반항을 잠재우려 했지만 사쓰마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이것이 사쓰에이(薩英) 전쟁이다. 전쟁은 일진일퇴를 벌이다가 양쪽 모두 큰 피해를 본 끝에 3일 만에 막을 내렸다.


당시 일본에는 서양을 배척해야 한다는 양이(攘夷)운동이 대세였지만, 사쓰마번은 영국과 맞서보고서 ‘서양의 실체’를 인정했다. 영국도 사쓰마번의 해군력에 놀라 중앙권력인 에도 막부를 멀리하고 사쓰마번과 ‘직거래’에 나섰다. 1865년 사쓰마번은 영국의 지원을 받아 19명의 엘리트 청년을 비밀리에 서양으로 보냈다. 해외유학이 국법으로 금지된 시기였다. 일찍이 개화의 필요성을 절감한 지방 영주의 물적 지원, 진취적 기상으로 지역을 일으킨다는 고쥬(鄕中)정신에 투철한 젊은이들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17~34세의 젊은이들은 산업혁명으로 꽃을 피우던 영국의 과학기술문명과 각종 제도를 체험한 뒤 일본으로 귀국했다. 가고시마 중앙역 광장에 있는 ‘젊은 사쓰마의 군상(群像)’은 혁명과 근대화의 출발점에 이 지역 젊은이가 있었다는 사실을 널리 알리고 있다. 가고시마 사람들이 메이지유신에 남다른 자부심을 갖는 것도 이 때문이다.


봉건 질서가 사회를 압도하고 쇄국만이 나라를 지킨다는 생각이 절대적이던 시절에 무력을 앞세운 서양 세력에 젊은이들을 맡긴다는 것은 ‘역사적 결단’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다. 결국 쇄국정책→전쟁 발발→실체 인정→서양 유학→문물 도입 등이 연속적으로 일어나면서 일본은 최종적으로 근대화를 향해 나아갈 수 있었다.


최근 김병준 국민대 교수는 ‘혁명의 꿈’이라는 글에서 신미양요(1871년) 당시 광성보 전투에 대해 자세히 소개했다. 매클레인 틸턴(McClane Tilton)이라는 미국 해병대 대위가 당시 전투 상황을 기술한 내용이다. 미국의 최신식 무기 앞에 조선은 조준이 제대로 안 되는 대포, 재장전에 시간이 걸리는 화승총으로 맞섰다. 군인이 모자라 호랑이 잡는 포수까지 징발했다. 미군이 성벽 가까이 진격하자 조선군은 성벽 난간에서 돌을 던지고 흙을 뿌렸다. 총알을 막겠다고 솜옷을 8겹, 9겹 껴입었다고 한다. 매클레인 대위는 당시 미군 3명이 죽었고, 조선군 250명이 ‘돼지처럼 피를 흘린 채’ 전사했다고 전했다. 흰 옷 위에 무방비 상태로 총을 맞은 조선인들의 모습을 돼지에 비유한 것이다.


조선군은 병자호란(1636년) 이후 전쟁이 무엇인지, 전투를 어떻게 치르는 것인지 200여 년 전의 기억을 더듬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런 이들을 전장으로 내몰고 구식 무기와 맨몸으로 서양 오랑캐를 물리치라고 한 조선 정부의 무지와 무능에 기가 막힐 노릇이다.

사쓰에이 전쟁과 신미양요

사무라이 핏줄 잇는 침략의 역사 ‘복잡계’(複雜系)

메이지유신 홍보 포스터. 사진제공·전계완


고종실록은 어재연 장군이 전사한 광성보 전투에서 조선 전사자를 50여 명이라고 기록했고, 어 장군이 군사를 지휘해 최전방에서 적을 무수히 죽였다고 썼다. 조선은 물러나는 미국 함대를 보고 전투에서 승리했다며 자축했다. 신미양요 직후 흥선대원군은 “서양 오랑캐와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자는 것이니 이는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라며 전국에 척화비를 세우고 “만대자손에게 이를 경계하라”고 했다.
신미양요는 사쓰에이 전쟁과 마찬가지로 3일간 벌어졌지만, 전쟁 후 조선과 일본 두 나라의 대응은 정반대였다. 일본은 근대화의 길로, 조선은 패망의 길로 들어선 것도 그렇다.


지난해 7월 이후 가고시마는 축제 분위기가 이어지고 있다. 쇼코 슈세이칸(尙古集成館)이라는 문화재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기 때문이다. 도심 곳곳에 이를 기념하는 각종 행사가 계속되고 있다.


1851년 사쓰마번 영주에 오른 시마즈 나리아키라는 쇄국으로 일관하던 에도 막부와 달리 서양 과학기술을 받아들여 사쓰마의 부국강병을 꾀했다. 사쓰마번이 17세기 이후 류큐 왕국과 조공 관계를 유지하며 국제 정세를 읽고 상업과 무역을 중시한 것은 그의 세계관에 커다란 영향을 줬다. 서양 문물을 접한 그는 조선소와 용광로가 있는 공장지대 슈세이칸(集成館)을 만들고 조선, 군수, 유리공예, 인쇄, 의복 등 신산업을 키웠다. 1854년 서양식 군함 쇼헤이마루(昇平丸)를 건조해 에도 막부에 진상하면서 일장기를 처음으로 선보이기도 했다.  


그는 천대받던 하급 사무라이를 능력에 따라 등용하고, 젊은이에게 배움의 길을 열어줬다. 메이지유신 3대 영웅 중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도시미치 등 2명이 사쓰마번 출신이고, 이들 셋은 모두 시마즈 나리아키라가 키운 인물이다. “사쓰마에 인재(人材)로 성(城)을 쌓겠다”고 한 그는 오늘의 가고시마를 있게 한 원동력이다. 시마즈 나리아키라는 ‘젊은 사쓰마의 군상(群像)’이 비밀리에 영국 유학을 가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시마즈 가문의 장학생인 하급 무사 사이고 다카모리는 번 전체를 호령하는 군벌로 성장해 훗날 혁명의 주역으로 메이지유신을 이끌고 정한론(征韓論)을 폈다. 시마즈 가문은 임진왜란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받들어 대륙 침략기지를 만들고, 이후 상업의 번성과 산업의 발전을 주도하며 메이지유신의 선봉장 노릇을 했다. 조선 침략을 주도한 제국주의 인물의 태실(胎室)로도 기억되고 있다. 시마즈는 ‘황제’라는 칭호를 쓰는 일본 국서를 조선이 받지 않자 “내가 조선에 가서 조선 왕을 모욕하면 나의 목을 칠 것이니, 이를 빌미로 조선을 정벌하라”고 할 만큼 호전적인 인물이었다.



근대화 태동지? 팽창주의 발원지!

日 이중성의 뿌리 야마구치

● 요시다 쇼인 ‘정한론’ 본산,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 총리 8명 배출…아베로 계승

● 위안부 합의 말 바꾸기…‘신념’으로 한일관계 접근

● ‘日 역사는 불가피한 상황’ 자위…객관적 평가 실종


근대화 태동지?  팽창주의 발원지!

▲일본 야마구치현 하기시 쇼카손주쿠 입구에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축하하는 현수막이 걸렸다. 사진제공·전계완

근대화 태동지?  팽창주의 발원지!

야마구치현 일대에는 메이지유신을 기념하는 각종 행사 포스터가 곳곳에 붙었다.


야마구치(山口)현은 일본에서 가장 큰 섬인 혼슈(本州) 지방 서남쪽 끝에 있다. 지리적으로는 변방이지만 강대국 일본의 출발지다. 인구 140만 명으로 일본 전체 인구(1억2800만여 명)의 1%를 조금 넘는 이곳에서 역대 총리 57명 중 8명이 배출됐다. 그중에서도 인구 5만 명의 하기(萩)시는 지난 150년간 일본 근현대사를 장식한 역사의 발원지다. 이토 히로부미가 태어난 곳이자, 아베 신조 총리 집안도 이곳을 기반으로 성장했다. 아베 총리의 중의원선거 지역구도 야마구치다.


어떻게 이런 시골에서 그렇게 유명한 사람들이 배출됐을까. 당연하면서도 흥미로운 질문이 튀어나온다. 2월 초 필자는 대학교수, 언론인 등과 함께 하기를 찾았다. 도시 곳곳에 내걸린 크고 작은 현수막들은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축하하고 있었다. 메이지유신을 배경으로 한 NHK 대하드라마 ‘하나모유(花燃ゆ, 꽃 타오르다)’의 세트장도 있어 전국에서 관광객이 몰려든다.

쇼카손주쿠(松下村塾) 정신하기의 자랑인 사설 서당 쇼카손주쿠(松下村塾)는 지난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유네스코는 식민지 침탈 논란에도 일본 메이지유신(1868) 시기의 제철, 철강, 조선, 석탄산업을 문화유산으로 등재했다. 산업시설이 아닌데도 쇼카손주쿠를 문화유산으로 등재할 수 있느냐는 지적이 나왔다. 한국 역사 단체들은 “조선 침략을 정당화한 정한론(征韓論) 사상의 뿌리인 만큼 문화유산 등재는 불가하다”고 주장하며 반대운동을 벌였다. 유네스코 정신이 ‘평화주의’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은 기본이다. 그런데도 일본은 자기 뜻대로 밀어붙였고, 결국 쇼카손주쿠는 아베 총리의 의지대로 ‘당당하게’ 유네스코 유산이 됐다.


아무리 둘러봐도 이곳이 ‘산업’이라는 이름의 유산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아베 정부가 ‘끼워 넣기를 해서라도’ 세계유산으로 만들어야 하는 의도는 읽을 수 있었다. 아베의 정신 세계에 쇼카손주쿠가 깊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쇼카손주쿠는 우리말로 ‘소나무 아래 공부방’이다. 1858년 몰락해가던 봉건 막부시대의 열도 끝자락 시골에서 체제 전복을 꿈꾸는 혁명가가 나왔다.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그는 이론가이면서 동시에 실천가였다. 엄격한 신분 사회였지만 그는 출신 성분을 따지지 않고 제자를 모아 혁명정신을 불어넣었다. 천황을 앞세우고 서양을 배척하면서 막부 체제를 무너뜨리자는 게 핵심이었다. 우리나라로 치면 조선시대에 지방의 서원에서 혁명사상을 키우고 왕조를 무너뜨리려 역모를 꾀한 것과 같다.  


요시다 쇼인은 무능한 집권세력(막부정권)이 1853년 미국 페리 함대에 굴복해 강제 개항을 당하는 광경을 봤다. 동시에 그는 서양의 힘을 객관적으로 읽었다. 이듬해 서양을 배우려고 해외 밀항을 시도하다 잡혀 감옥에 갇혔을 때 ‘유수록(幽囚錄)’을 썼고, 몇 년 뒤 자유의 몸이 되자 1857년 쇼카손주쿠를 열어 제자들을 불러모았다. 10대와 20대 청년이 대부분이었다.


그는 체제 전복은 물론 서양으로부터 받은 피해를 이웃 나라에서 되찾아와야 한다고 가르쳤다. 홋카이도(北海島) 개척, 류큐(琉球, 오키나와)와 조선 정벌, 만주와 필리핀 노획 등을 지침으로 내렸다. 제국주의 침략을 정당화하는 정한론과 대동아공영론(大東亞共榮論)을 설파했다. 요시다 쇼인은 자신의 체제 전복(막부 타도) 계획이 발각돼 1859년 30세 젊은 나이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지만, 그의 사후 9년 만에 일본 하급 무사들은 그의 뜻을 이어받아 메이지혁명을 성공시켰다.


근대화 태동지?  팽창주의 발원지!

요시다 쇼인 생가에서 바라본 하기. 바다 멀리 저편에 한반도가 있다. 사진제공·전계완


요시다 쇼인의 제자들쇼인은 쇼카손주쿠에서 2~3년 동안 제자들에게 자신의 사상을 깊숙하고도 철저하게 각인시켰다. 지금도 원형이 보존돼 있는 쇼카손주쿠 30㎡ 다다미방에서 일본 초대 총리와 조선 초대 총독을 지낸 이토 히로부미, 매국노 이완용과 함께 한일병합에 도장을 찍은 데라우치 마사타케, 미국과 함께 필리핀과 조선을 각각 나눠 먹은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당사자 가쓰라 고로, 청일전쟁 당시 조선 제1사령관을 지내고 아시아 팽창주의를 주도한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이 공부했다. 작은 어촌 마을 ‘소나무 공부방’에서 일본을 뒤집고 아시아를 제국주의 침략전쟁의 공포로 몰아넣은 ‘괴물’들이 탄생한 것이다.


그래서 쇼카손주쿠는 일본 제국주의 사상의 본산으로 불린다. 학당 앞 대형 비석에는 아베의 작은외할아버지 사토 에이사쿠 전 총리가 직접 쓴 ‘메이지유신 태동지지(明治維新胎動之地)’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역사는 해석’이라고 했던가. 우리 일행에게는 혁명의 태동지가 아니라 아시아 팽창주의의 발원지로 읽혔다.


근대화 태동지?  팽창주의 발원지!

태평양전쟁 전범이자 아베 총리의 외할아버지인 기시 노부스케의 친동생 사토 에이사쿠가 직접 쓴 글. 두 사람 다 총리를 지냈다. 사진제공·전계완


아베 총리는 2013년 8월 쇼카손주쿠 뒷산에 있는 요시다 쇼인의 묘소를 찾았다. 집단자위권 문제로 주변국과의 관계가 최악으로 치달을 때였다. 미국의 경고에도 일본은 ‘강한 일본’을 외치며 ‘전쟁할 수 있는 국가’를 향해 진격하고 있었다.


아베 총리는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요시다 쇼인이라고 했고, 무덤 앞에 무릎 꿇고 “결심을 다지겠다”고 다짐했다. 그 결심이 무엇인지는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았다. 이를 본 이들은 아베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고 판단했다. 그해 12월 아베 총리는 야스쿠니 신사를 전격 참배했다. 가고시마에 뿌리를 둔 고이즈미 준이치로에 이어 역대 일본 총리로는 두 번째 참배였다. 한국과 중국이 크게 반발했지만 이미 상황이 끝난 뒤였다. 아베의 참배 이후 일본 극우 정치인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는 일상이 됐고, 최근에는 참배 자체가 뉴스가 되지 않을 정도다. 태평양전쟁 A급 전범 위패가 있는 곳이 국가 공인 참배지로 바뀐 셈이다.


‘재해석’한 피의 역사

요시다 쇼인의 묘소 뒤쪽에는 하급무사로서 기마병 부대를 만들어 전설적으로 전쟁을 수행한 제자 다카스키 신사쿠의 무덤이 있다. 아베 총리의 집안이 아베 신조(安倍晉三)의 ‘신(晉)’ 자를 다카스키 신사쿠(高衫晉作)의 ‘신(晉)’ 자를 따서 지었을 정도라니 그 존경심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  
지난 1월 말 필자 일행이 요시다 쇼인 묘소를 찾았을  때, 묘지를 뚫어지게 바라보던 한 젊은이의 모습에서 각오를 다지는 듯한 비장함이 느껴졌다. 가족 단위로 묘소를 찾은 사람도 있고, 동호회 모임에서 찾아온 사람들도 있었다. 모두 관광객이었다. 보통의 일본 사람은 요시다 쇼인을 근대사상가, 일본을 일으킨 혁명가로 기억한다. 제국주의 사상과 침략 역사를 설파한 인물이라고 생각하는 이는 드물다. 그들은 쇼인에 대해 일본을 근대화한 인물로만 교육받고 있었다.


그러나 아베 총리를 비롯한 일본 극우파의 ‘요시다 쇼인 독법(讀法)’은 다르다. 요시다 쇼인이 기초한 제국주의 사상을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한 군국주의자들이 이어받고, 군국주의자들에게 교육을 받은 기시 노부스케, 사토 에이사쿠 전 총리로 연결된다. 기시 노부스케는 전범으로 감옥에 있었지만 무죄로 풀려나 총리를 지냈고, 그의 동생도 총리를 지내며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기시 노부스케의 외손자인 아베 총리는 헌법 제9조(평화헌법)의 영구적인 전쟁 포기 문구를 ‘재해석’하며 일본을 전쟁 가능 국가로 만들어버렸다. 아베 정권은 근대화-제국주의-군국주의-식민지 침략-태평양전쟁으로 이어진 피의 역사를 ‘해석’이라는 이름으로 재구성하고 나섰다.
‘아픔은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럼에도 지금 일본은 강한 국가로 거듭나야 한다. 그것이 세계 평화를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다.’
이것이 아베 총리가 요시다 쇼인 묘소 앞에서 다진 결심일지도 모른다.


근대화 태동지?  팽창주의 발원지!

요시다 쇼인의 묘소는 보통의 가족묘와 같은 모습이다. 뒤쪽에는 제자 다카스키 신사쿠의 묘가 있다. 사진제공·전계완



군국주의는 休火山

메이지유신 이후 제국주의 역사에 대한 왜곡은 오늘날 한일관계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지난해 미국은 한일 양국이 위안부 문제로 한발도 나아가지 못하자 관계 개선을 요구했다. 중국이 급속도로 팽창하는 가운데 그런 한일관계를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결국 한일 양국은 미국이 뒤에서 지켜보는 가운데 위안부 문제 합의서를 발표했다. 그런데 합의서마저 한 달이 채 되지 않아 파열음을 일으켰다.


“일본 내각총리대신으로서 다시 한 번 마음으로부터 사죄와 반성의 마음을 표시한다.”(2015년 12월, 한일외교장관 공동기자회견문)
“군 및 관헌에 의한 강제연행은 확인되지 않았다.”(2016년 1월, 일본 외무상의 유엔 답변)
일본 정부의 말이 바뀌자 양국 관계는 이전보다 더 꼬여버렸다. 그래놓고 일본은 위안부 문제에 대한 양국 합의를 ‘영원히 건드릴 수 없는(불가역적)’ 합의라고 주장했다.


아베 총리는 과거사 문제를 미래 지향적으로 풀어갈 의사가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특히 한국과 관련한 문제에는 더욱 단호한 태도를 취한다. 그는 폭력에 의해 좌우된 지난 ‘흑역사’를 그대로 계승하고 발전시키겠다는 신념을 지녔다. 그것이 ‘쇼인 정신’이고, 자신의 외조부 정신이며, 강한 일본을 만들려는 아베의 시대정신이다.


필자는 일본을 오갈 때마다 아베 집권기 동안 한일관계 개선은 불가능하다고 느꼈다. 우리와 달리 아베는 한일관계를 ‘국익’의 관점이 아니라 ‘신념’을 기준으로 다루기 때문이다. 그의 정신세계에는 자신과 일본 역사의 ‘불가피한 상황’만 존재할 뿐 ‘객관적인 평가’는 없다. 보수 자민당이 50년 이상 대부분의 독점적 지위를 누려온 정치 현실과도 무관하지 않다. 심판받지 않는 정치를 해왔기 때문에 자기신념을 더욱 잘 지키는 측면도 있다. 그래서 그는 과거사에 대한 사죄나 반성 없이 유체이탈 수준의 화법을 구사했다.


“부전(不戰)의 맹세를 하기 위해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했다.”(2013년 12월 26일)
“21세기에도 분쟁지역에서 여성의 성적 유린이 자행되는 것에 분노를 금할 수 없다.”(2013년 9월 27일)
태평양전쟁 전범 합사 문제나 위안부 문제를 알면서도 이런 발언을 했다는 것은 아베 총리의 ‘계산’이 아니다. 아베 총리를 들여다볼수록 이런 발언이 ‘진심’이라는 사실에 필자는 크게 놀랐다. 일본 군국주의는 언제라도 다시 태어날 수 있다.


근대화 태동지?  팽창주의 발원지!

2005년 봄의 붉은 벚꽃과 야스쿠니 신사. 사진제공·전계완

근대화 태동지?  팽창주의 발원지!

‘사제 폭탄 사건’ 이후에도 야스쿠니 신사에선 평소와 다름없이 사람들이 본전 앞에 서서 참배한다.


전쟁의 꽃, 평화의 꽃

하기를 둘러본 일행은 발길을 도쿄로 돌려 야스쿠니 신사를 찾았다. 지난해 11월 23일 한국인이 야스쿠니 신사 남쪽 화장실에 사제 폭탄을 터뜨린 이후 상황이 어떻게 변했는지 궁금했다. 당시 필자는 일본 경찰이 야스쿠니 신사 주변 한국인 사무실을 예외 없이 수색했다는 재일 민단 관계자의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신사 주변 경비가 삼엄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1월 말 다시 찾은 신사는 예상외로 조용했다.


신사 정문에서 본전으로 이어지는 50m 폭의 벚꽃(사쿠라)길은 을씨년스러웠지만, 봄에 꽃이 피면 장관을 이룬다. 필자는 이 벚꽃을 볼 때마다 꽃말을 생각했다. 일본에서 벚꽃은 평화를 상징한다. 일본 패망을 앞둔 1945년 자살폭탄을 싣고 미국 항공모함으로 날아간 가미카제(神風) 특공대의 환송식에도 어김없이 ‘사쿠라’가 등장했다. 어린 초등학생들이 활주로에 길게 늘어서 사쿠라를 흔드는 장면엔 죽음으로 향하는 마지막 비행의 슬픔이 담겨 있었다.


야스쿠니 신사를 둘러보고 신사 오른쪽에 있는 전시관을 찾았다. 일본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게 마련한 전시관에는 태평양전쟁(대동아전쟁) 전시실도 마련해놓았다. 일본어와 영어로 설명하는 전시관을 둘러보고 필자를 제외한 일행은 모두 놀란 표정을 지었다.
“태평양전쟁이 미국의 일본 석유금수조치로 인한 결과라는 일방적인 설명을 보며 말문이 막혔다. 일본은 잘못이 없고, 현재의 일본이 존재하는 것도 오직 전쟁 덕택이라는 믿음을 심어주고 있다. 마치 또 다른 전쟁을 준비해야 한다는 인식을 준다. 일본은 무서운 나라다.”(이정태 경북대 교수)


“전시관을 보면 제국주의 침략 당사자가 일본이라고 생각하는 일본인은 없을 것 같다. 그러니 신사 참배를 반대하는 한국과 중국을 이상한 나라로 볼 수밖에. 앞으로 과거사를 둘러싼 인식차가 더 벌어질 것 같아 걱정스럽다.”(박영식 연합뉴스TV 앵커)
도쿄에서 보면 서남쪽 끝 작은 마을인 야마구치에서 제국주의 사상이 싹을 틔웠다. 요시다 쇼인은 사형장에서 “일본의 혼(大和魂, 야마토 다마시)은 영원하다”며 죽어갔다. 이 말을 들은 제자들이 혁명을 성공시키고 도쿄를 장악했다. 그러면서 야마구치 출신은 역대 최다 총리 자리를 차지하면서 아직도 일본을 좌지우지하고 있다.


의문이 든다. 요시다 쇼인의 ‘대화혼’은 진실로 150년 동안 일본을 지탱해준 정신일까. 그럴 수 없다. 공존과 번영을 버리고 남을 밟고 나를 키우는 정신은 결코 한 나라의 혼(魂)이 될 수 없다. ‘정상 국가’라면 더욱 그렇다. 그런데도 제국주의 부활을 노리는 일본 우익은 아직도 이를 유효하다고 믿는다. 그 중심에 아베 신조 총리가 있다. 답답하지만 엄연한 현실이다. 그렇다면 이들과 공존해야 하는 우리는 어떤 정신으로 나라를 지켜갈 것인가.
사쿠라는 평화의 꽃이기도, 전쟁의 꽃이기도 하다. 사쿠라는 생명의 꽃이기도, 피의 꽃이기도 하다.동아시아 격전장을 가다


두 마리 토끼 쫓는 아베 브레이크가 없다

美와 동맹 강화, 군국주의 회귀

●헌법 개정해 ‘전쟁 가능국’…야당 무능도 한몫

●북한 선제공격론, 제로센 전투기 시험 비행

●아베 “일본이 패망한 게 아니라 미국과 終戰한 것”


두 마리 토끼 쫓는 아베  브레이크가 없다


“북한 미사일이 일본 영토, 영공 또는 영해에 들어오면 즉각 요격하라!”

2월 3일 나카타니 겐 일본 방위상은 이렇게 명령했다고 기자들에게 밝혔다. 일본은 이 같은 미사일 파괴 명령 이후 요격 장치를 갖춘 이지스함을 동중국해에 배치했지만, 2월 7일 북한이 장거리 미사일을 발사한 뒤 실제 요격에는 나서지 않았다. 위험성을 널리 알리면서 정치적, 외교적 효과를 극대화하는 전략이었다.

북한의 도발 직후 일본은 북한의 위협을 국내외 정치에 적극 활용했다. 아베 신조 정권은 7월로 예정된 참의원 선거에서 북한 이슈가 선거에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도록 여론을 움직이고 있다. 집단자위권을 통한 안보정책에 한계가 있어 평화헌법 개정을 통한 ‘전쟁 가능국가’ 전환이 불가피하다는 얘기를 흘린다. 헌법을 개정하려면 의원 3분의 2 찬성이 있어야 하기에 이번 선거에서 자민당을 적극 지지해달라는 것이다.

‘美 2중대’ 벗어나 존재감 과시민주당을 비롯한 야당들이 바짝 긴장하고 있지만, 이미 군사력 강화라는 고삐가 풀린 상태에서 ‘개헌 절대불가’ 여론을 지켜낼 수 있을지 의문이다. 3년 만에 찾아오는 이번 참의원 선거(임기 6년으로 3년마다 절반 교체)에선 아베 정권의 경제 실정이 묻히고 북한 도발이 주요 변수로 등장할 가능성이 높다. 

외교적으로도 일본은 유엔의 대북제재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 북한으로 출국한 사람의 재입국 금지, 자산동결 대상 확대, 북한 선박 전면 입항 금지 등의 독자 제재에 나섰을 뿐 아니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비상임이사국으로서 미국보다 먼저 이사국 설득에 팔을 걷어붙이며 마치 안보리 대변인처럼 북한 제재에 앞장섰다. ‘미국의 2중대’ 이미지를 벗어나 일본의 존재감을 확실하게 드러냈다.

북한의 도발이 한반도 긴장을 고조시킬 뿐 아니라 아베 정권의 국내외 영향력 확대에 크게 기여한다는 것은 한마디로 난센스다. ‘동아일보’ 권순활 논설위원은 1월 13일 칼럼에서 “민족을 내세우는 북한의 전체주의 정권이 국수주의자들을 포함한 일본 보수세력의 재무장 숙원을 해결하는 데 결정적인 ‘도우미’로 전락한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반민족적 행위”라며 탄식했다.

북한 도발을 계기로 일본 정부는 국내적으로 ‘국민 결속’이라는 정치적 효과를 얻었고, 대외적으로는 국제적 위상을 높이는 결실을 봤다. 무엇보다 일본 보수세력의 야망인 군사대국화 빗장을 풀어버렸다. 이제는 노골적으로 군사력 강화를 드러내며 이를 외부에 적극 알리는 상황마저 빚어졌다.
두 마리 토끼 쫓는 아베  브레이크가 없다

북한의 미사일 도발이 아베 정권의 군사대국화에 길을 열어주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 사진은 일본 주요 TV에서 연일 방송되는 북한 도발 상황 보도.사진제공·전계완


다시 떠오른 가미카제機

71년 만에 다시 날아오른 가미카제 전투기. 뉴시스


지난 1월 말 가고시마(鹿兒島)현 가노야(鹿屋) 항공기지에서는 태평양전쟁 때 가미카제(神風) 자살공격기로 사용한 제로센(零戰) 전투기가 시험 비행에 성공했다. 도쿄에 본사를 둔 제로엔터프라이즈 재팬이라는 회사가 기획한 행사지만 정부 허가를 받고 공군기지에서 이뤄진 것이라 주변 국가들의 반발을 샀다.

이 비행기는 1970년대 파푸아뉴기니 정글에서 발견된 것으로, 2년 전 미국에서 일본으로 갖고 온 것이다. 주최 측은 “제로센 전투기가 71년 만에 다시 하늘을 날았다”며 “다시 있어서는 안 되는 슬픈 역사를 짊어졌지만 훌륭한 일본 제조업의 모태”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중국은 즉각 관영 CCTV를 통해 “제로센 전투기는 살인마로 악명이 높던 일본군의 상징이었다. 일본이 군국주의 부활에 대한 야망을 드러냈다”고 맹비난했다.

일본 정부는 가미카제 특공대원들의 유서와 유품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하려다 실패한 바 있다. 지금도 가고시마현 미나미규슈(南九州) 시에 특공평화회관을 두고 가미카제가 세계 평화를 지키기 위한 성스러운 부대였다고 대내외에 알리고 있다.


3월 초에는 일본 정부가 이례적으로 미야자키(宮崎)현 뉴타바루(新田原) 항공자위대를 언론에 공개했다. 이곳은 가고시마현 가노야 항공기지에서 100km 떨어진 곳으로, 두 곳은 동중국해와 태평양을 관할하는 일본 공군의 전략적 요충지다. 뉴타바루 기지는 F4 전투기가 상시 대기 중이며, 댜오위다오(釣魚島, 일본명 센카쿠) 분쟁 이후 준전시상태로 운영되고 있다. 가노야 기지엔 ‘잠수함 킬러’로 불리는 해상초계기 P-3C가 배치돼 있는데, 이곳도 언론에 공개됐다. 가노야 기지는 가고시마 오스미 반도에 있는 인구 10만 명의 도시로 1941년 일본군이 진주만 공습을 최종 결정한 가노야 회의가 열린 곳이다.“안보법은 전쟁법”


올 들어 일본이 군사시설을 공개하고 패전의 유산인 제로센 전투기를 되살린 것은 우연의 일치일까. 2013년 아베 총리가 ‘731’이라는 숫자가 새겨진 전투기에서 손가락을 치켜세워 생체실험 부대로 악명 높던 731 부대를 연상시킨 것과 다를 게 없다. 2월 유엔 인권위원회 조사에서 “위안부 강제연행은 없었다”는 일본 정부의 공식 입장 표명은 또 뭔가. 일련의 행태에선 이미 주변국 눈치를 볼 단계는 지났다는 아베 정권의 자만심이 짙게 배어 나온다.

일본은 2002~2012년 연평균 150억 달러를 무기 수입에 사용했다. 세계 1위 무기 수입국이었다. 같은 기간 2위 영국과 3위 한국이 각각 연평균 100억 달러, 61억 달러를 지출한 데 비해 압도적으로 많은 액수다. 그러나 일본은 헌법 제9조(평화헌법)에 의해 군대를 보유할 수도, 전쟁을 수행할 수도 없다. 지난해 아베 정권은 ‘헌법 재해석’이라는 이름으로 안보법을 만들었다. 집단자위권 제한을 철폐하고 자위대 활동 범위를 전 세계로 확대한 것이다. 이같은 조치에 대해 위헌 시비가 끊이지 않자 아베 정권은 아예 헌법을 바꾸려는 시도에 나섰다.

일본 헌법 제9조는 ‘전쟁을 영구히 포기하고, 군대를 보유하지 않으며, 교전에 의한 국제분쟁의 해결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돼 있다. 민주당, 유신당, 공산당 등 일본 야당은 헌법 9조를 내세우며 지난해 아베 정권이 강행처리한 안보법이 ‘전쟁법’이라며 폐지를 추진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아베 정권은 논란을 원천적으로 없애기 위해 헌법 개정 의지를 공공연하게 드러냈다. 한국, 중국 등 침략 전쟁에 희생된 국가를 의식하거나 미국 눈치를 보며 방어적 의미로 군사력을 키우던 과거와 확연히 달라졌다.

아베 총리가 먼저 포문을 열었다. 그는 지난 2월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헌법에 (자위대의) 실력 조직에 대한 서술이 없는 것이 이상하다. 자위대 조직을 (헌법에) 명시해야 한다”고 밝혔다. 기다렸다는 듯이 1주일 뒤 나카타니 겐 방위상은 “자위대의 존재도 합헌인지 위헌인지 의견이 엇갈린다. 국가 안전 보장과 기본 대목은 국민이 알기 쉽게 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카타니 방위상은 자민당 출신의 대표적인 극우 인사로, 아베 정권에서도 헌법 개정, 군사대국화에 가장 적극적인 인물 중 하나다. 그는 지난해 10월 한일 국방장관 회담에서 북한에 대한 선제공격을 주장했다. 또한 대한민국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이기 때문에 일본 자위대의 북한 진입 시 한국 동의를 반드시 받아야 한다는 한민구 국방장관의 발언에 대해 “한국은 휴전선 이남을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다”고 말해 큰 논란을 일으켰다.
두 마리 토끼 쫓는 아베  브레이크가 없다

전쟁법안 폐지만이 일본을 지킬 수 있다며 지지를 호소하는 일본 공산당 선거 포스터. 사진제공·전계완

확고한 개헌 의지여러 움직임을 종합해볼 때 아베 정권은 오는 7월 참의원 선거를 계기로 평화헌법 개정에 적극 나설 것으로 보인다. 헌법 개정을 위해서는 중의원, 참의원 3분의 2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 중의원은 자민당, 공명당 등 연립여당이 장악하고 있어 현재 과반인 참의원만 3분의 2 정족수를 확보하면 된다는 계산이다.

이를 위해 중의원을 해산하고 7월에 참의원·중의원 선거를 동시에 치르고 개헌 이슈를 내걸 수 있다. 현행 일본 의회제도는 참의원의 경우 임기 6년을 보장해야 하고 중의원은 임기 4년이지만, 의회가 해산되면 다시 선거를 치른다.

아베 총리는 최근 들어 자신의 재임 중에 개헌을 하겠다고 공공연히 밝히고 있다. 그는 “국민 생명을 수호하기 위해 국제법상 권리를 행사해야 한다. 자민당의 개정 헌법 초안에는 국방군 보유를 명시하고 있다”며 발언 수위를 높인다. 야당인 민주당과 유신당은 선거를 앞두고 합당을 통해 자민당 독주를 막기로 결정했지만 합당의 파괴력이 어느 정도일지는 아직 가늠하기 어렵다. 

아베 정권의 무한질주는 자민당 내에 경쟁자가 없기 때문에 가능한 측면도 있다. 일본의 전통적 파벌정치는 실력자 또는 후계자 양성 측면에서 긍정적인 기능을 했지만, 1990년대 이후 정치자금 문제가 불거지면서 그 의미가 크게 축소됐다. 실력 있는 정치 신인 공급이 부족하다 보니 일본 보수세력의 우경화 움직임이 더욱 가속화하는 형국이다.

현행 임기가 그대로 보장된다면 아베 총리는 2018년 9월까지 무려 6년 9개월을 총리로 재임할 수 있다. 전후 세 번째 ‘장수 총리’가 되는 것이다. 그의 계획대로 7월 참의원·중의원 동시 선거가 진행되면 역대 최장수 총리가 될지도 모른다.

집권 자민당 안에서는 총재의 3연임 금지 규정을 개정해 아베 총재의 장기 집권을 허용하려는 움직임도 나온다. 문제는 이를 저지할 수 있는 내부 정치세력과 외부의 힘이 없다는 사실이다. 일본 야당의 무능력은 정치 불신을 가중시켜 일본 국민의 탈정치화에 불을 붙이고 있다. 자민당 내부의 경쟁구도 파괴도 아베 총리의 독주에 브레이크 장치를 풀어버렸다.

그나마 미국이 나서 일본의 비정상적 질주와 재무장화를 억제해야 하는데 상황은 반대로 가고 있다. 중국의 팽창을 견제해야 하는 미국은 오히려 일본의 군사력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이 틈을 탄 아베 정권은 대외적으로 미국과의 동맹 강화, 내부적으로 군국주의 회귀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쫓고 있는 것이다.
두 마리 토끼 쫓는 아베  브레이크가 없다

도쿄 일본 총리공관 앞엔 정적이 감돈다. 사진제공·전계완

힘이 약해서 졌으니…전 세계가 태평양전쟁을 일본 패망이라고 표현했을 때 아베 총리는 “우리는 (대동아전쟁에서) 패망한 것이 아니라 미국과의 전쟁에서 종전(終戰)을 한 것”이라고 말했다. 종전의 원인은 힘이 약했기 때문이고, 힘을 키우면 언제라도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그의 신념을 표현한 것이다. 전쟁할 수 있는 ‘보통국가’로 변신하고 군사대국화를 이루는 것이 아베의 최우선 목표다. 그다음 순서는 일본의 경제적 이득(국익)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우리는 일본을 읽어낼 수 있다.


“美·日과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지정학적 요충지’ 오키나와의 분노

  • ● 1945년 오키나와 전쟁으로 원주민 3분의 1 사망
  • ● 류큐 왕국 강제 합병…일본군, 집단자결 강요● 日, 전쟁국가 변신 위해 새 미군기지 건설 강행
  • ● 지사, 주민은 ‘기지 완전 철수’ 내걸고 정부와 ‘전쟁’“美·日과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옛 일본 해군사령부 입구에 미군기지 건설 반대 포스터가 붙어 있다. [사진제공·전계완]

“오나가 지사와 함께 신기지 건설을 막아내자!”

4월 초, 일본 오키나와(沖繩)현에는 기지 건설 반대 가두연설회를 알리는 포스터가 곳곳에 나붙었다. 주민 직선으로 뽑힌 오나가 다케시(翁長雄志) 지사는 지난해 12월부터 아베 정부를 상대로 소송전을 벌이고 있다. 10년간 계속된 주민들의 반대에도 정부가 헌법에 보장된 자치권을 침해하고 북부 나고시 헤노코만(灣)에 미군기지 건설을 강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송으로 공사는 잠정 중단됐다.

섬 20%가 미군기지“美·日과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오키나와 나하시 국제거리의 화려함 뒤엔 비극의 역사가 숨어 있다. [사진제공·전계완]



새 미군기지 건설 문제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1996년 미국과 일본은 섬 중앙에 위치해 소음, 성범죄, 주민 재산권 침해 등 온갖 민원이 끊이지 않던 오키나와 기노완시의 후텐마(普天間) 공군기지 이전을 발표했다. 발단은 1995년 9월 4일 미 해병대원 3명이 12세 여자 초등생을 집단 성폭행한 사건이었다. 주민들은 미 해병대원들을 처벌하라며 연일 항의시위를 벌였고, 이 때문에 빌 클린턴 당시 미국 대통령이 공식 사과하기도 했다.

주민들은 오키나와 미군기지의 완전 철수를 요구했지만, 양국은 북부 헤노코만 매립지에 새로운 기지 건설 계획을 밝혔다. 이에 기지 건설 반대 운동이 시작됐고, 급기야 오키나와현 지사가 매립 승인을 취소하며 소송을 벌이는 상황에까지 이른 것이다.

이 문제는 지난 3월 31일 미일 정상회담에서도 주요 의제로 다루어졌다. 아베 총리와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워싱턴 정상회담 직후 “기지 완공 시기를 당초 계획보다 2년(2025년) 늦추지만, 일본 정부가 전력을 다해 이전을 완료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헤노코 신기지 건설은 단순한 기지 이전 문제가 아니다. 동아시아 전체를 방어하는 미국의 공군기지 운용에 중국 변수가 급부상하면서 그 필요성이 더해졌다. 미국에는 중국의 공격적인 해양 진출을 견제할 최신의 전초기지가 필요했다. 미국의 시각에선 오키나와 섬이 거대한 항공모함이다. 한반도를 비롯해 동북아 주요 지역에서 군사적 상황이 벌어졌을 때 2시간 내 군사력 투입이 가능하다. 미국 정부가 주민들의 반대에도 오키나와 섬에 군사기지를 계속 유지하려는 이유다. 일본 정부도 평화헌법 개정을 목표로 ‘전쟁가능 국가’로 변신하며 미일동맹 위에 군사대국화를 이루겠다는 의지가 강력하다.

현재 오키나와에는 3만여 명의 미군이 주둔해 있다. 공격 임무를 맡은 해병대가 다수를 차지한다. 제주도의 1.5배 크기인 오키나와는 섬 전체 면적의 20%를 미군기지로 내줬다. 후텐마 기지 인근의 가데나 공군기지는 미국의 해외 공군기지 중 규모가 가장 크다. 더 놀라운 것은 어마어마한 주둔 비용의 75%를 일본 정부가 부담한다는 사실이다.

오키나와에서 확인되는 미국과 일본의 군사동맹 수준은 상상을 뛰어넘는다. 국가 간 외교가 오직 국익에 따라 좌우된다면, 한국과 일본 두 나라가 극단적인 파국을 맞았을 때 미국은 과연 누구 편을 들까. 우문(愚問)일 뿐이다. 

3개월간 주민 12만 사망“美·日과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미군용 물품 가게 앞에서 쇼핑하는 관광객. [사진제공·전계완]


주말 저녁, 오키나와 현청이 있는 나하(那覇)시의 국제거리엔 활기가 넘쳤다. 4월 초인데도 낮 기온이 25℃를 웃돌며 초여름 분위기를 연출했다. 이곳은 아열대 지역이라 매년 1월에 벚꽃 축제가 열린다. 1.6km의 직선 도로 양쪽으로 식당과 쇼핑시설이 빼곡하다. 일본인과 미군, 중국인 관광객이 섞여 관광 명소다운 면모를 보여준다.

국제거리의 별칭은 ‘기적의 1마일’이다. 태평양전쟁 막바지에 미국과 일본이 벌인 최악의 오키나와 전쟁(1945년 4월 1일~6월 23일) 때 잿더미가 된 곳을 최단 기간에 재건했다고 붙인 이름이다. 전쟁 후 미국 통치를 받던 ‘기적의 1마일’에는 미국식 문화가 급속도로 확산됐다. 1953년부터 영업 중인 잭스 스테이크 하우스(Jack's steak house)와 아메리칸 스타일의 ‘스테이크하우스88’(스테키하우스 하치하치)은 오키나와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명소다. 토속음식점도 즐비하다. 미국 정통 문화와 오키나와 향토색이 국제거리를 화려하게 수놓는다.

그런데 껍질을 한 겹 벗겨 속을 들여다보면 이내 비극적인 단면이 드러난다. 오키나와에선 1945년 전쟁 때 불과 3개월 만에 군인과 주민 등 20만 명 이상이 숨졌다. 오키나와 주민 3명 중 1명(12만여 명)이 전쟁으로 목숨을 잃었다. 세계 전쟁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경우다.

역사의 시곗바늘을 오키나와 전쟁 발발 70년 전으로 돌려보면 이곳은 일본이 아니다. 청나라와 일본 사이에서 등거리 생존을 하던 류큐(琉球) 왕국이었다. 메이지유신(1868) 이후 서양의 과학기술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이던 일본은 대만 침공(1874)으로 청나라를 제압한 뒤 류큐 왕국을 자국 영토로 만들고(1879) 오키나와현으로 이름을 바꿨다.

1945년 오키나와 전쟁은 엄격하게 말해 일본군과 미군이 류큐 왕국이던 오키나와 땅에서 벌인 최악의 지상전이었다. 미군이 쏜 포탄만 270만 발. 당시 주민 1명에게 472발의 포탄을 날린 셈이다. 오키나와 원주민의 눈으로 보면, 패권을 다투던 두 강대국이 남의 땅에서 전쟁을 치르고 자신들에게 지옥 같은 고통을 떠넘긴 것이었다. 일본을 점령한 미국은 1952년 샌프란시스코 조약을 체결하며 일본에 본토를 돌려줬지만 오키나와의 통치권은 계속 유지했다. 오키나와가 다시 일본으로 넘어간 것은 1972년이다. 그런 두 나라가 오키나와 전쟁 70년을 넘긴 지금 적국으로 싸우던 땅에서 ‘세계 제일의 동맹’을 과시하며 ‘사상 최강의 군사기지’를 함께 만들고 있다.     

죽음으로 평화 기원 “美·日과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생존자의 기록을 남긴 ‘증언의 방’. [사진제공·전계완]

“美·日과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미국 어린이 관람객이 전쟁 때 숨진 오키나와 어린이 사진을 바라본다.[사진제공·전계완]

나하에서 버스를 타고 남쪽으로 1시간쯤 내려가면 미일의 최후 격전지 이토만(絲滿)시가 나온다. 이곳에 ‘평화기념공원’이 있다. 섬의 모양이 바뀔 만큼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곳이다. 이곳 자료관에는 이런 글이 있다.

‘전쟁이 인간을 이토록 잔인하게 만든다는 생생한 체험 앞에서, 어느 누구도 전쟁을 긍정하고 미화할 수 없다. 우리는 모든 전쟁을 원망하며 오키나와를 반드시 평화로운 섬으로 만들어야 한다. 너무나도 큰 대가를 치르고 이런 확고한 신념을 얻었다.’

자료관에는 ‘증언의 방’이 있다. 통계만으로는 실상을 제대로 알릴 수 없어 전쟁 체험 주민의 육성을 그대로 적고 영상으로 남겼다. 원통하게 죽은 이들을 대변하는 증거다.

증언에 따르면, 군과 민을 구분하지 않은 미군의 무차별 폭격으로 수만 명의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다. 민간인으로 전투에 동원돼 죽은 사람도 부지기수다. 일본군에게 학살되고 집단 자결을 강요받은 증언록도 있는데, 그 내용이 너무도 끔찍하다.

오키나와 사람들도 일본인이었지만, 본토 일본군들은 오키나와 주민들을 전쟁에 필요한 도구로 인식했다. 일본군은 피란 간 주민에게 “미군에게 잡혀죽지 말고 천황을 위해 영광스럽게 죽으라”고 했다. 집단 자결을 강요한 것이다. 자식이 어머니를 돌로 때려죽이고, 형제자매를 찔러 죽이게 했다. 후퇴하던 일본군은 민간인이 숨어 있던 동굴로 들어갔는데, 미군에게 들킬 것을 우려해 세 살 이하 어린이를 모두 죽였다. 젖먹이의 목을 조르거나 주사를 놔 죽였다.

오키나와 말을 하는 사람은 ‘미군 첩자’라며 닥치는 대로 살해했다. 집단 학살에 가담한 일본군은 죽에 청산가리를 타서 주민들을 죽였고, 동굴로 몸을 피한 주민들은 동굴 속 일본군에게 학살당하거나 바깥에서 쏘아대는 미군의 박격포에 무방비로 죽어갔다. 상상을 초월하는 극한상황에서 전쟁의 부조리와 잔혹함을 여과 없이 보여준 이곳을 오키나와 사람들은 ‘지옥의 전쟁터’라 부른다.  

강제 징용된 조선인들도 집단 학살을 피하지 못했다. 군대 징집, 비행장 건설, 탄약 운반 등으로 1만 명 이상의 조선인이 동원됐다. 위안부로 끌려온 1000여 명의 조선 여성 중 살아서 돌아갔다는 기록은 4명에 불과하다. 전쟁 막바지에 조선인이 일본군에게 간첩으로 몰려 학살당했다는 증언은 셀 수 없을 정도다. 오키나와에서 죽은 조선인만 1만 명이 넘는다.

일본군은 오키나와 전쟁에서 일본군을 제외한 모든 이를 적으로 간주하고 살해했다. 오직 미군의 본토 상륙을 지연시키기 위해 천황을 내세우며 모두를 총알받이로 내몬 것이다. 조선인 희생자를 기리는 위령비에는 우리나라 전역에서 갖고 온 돌을 원형탑으로 쌓았고, 제단 앞에는 한국으로 향하는 화살표의 표석이 억울한 넋들을 기린다. 구천 떠도는 1만 조선인
“美·日과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오키나와 전쟁에 강제 징용된 조선인들. 살아 돌아간 사람은 거의 없다.[사진제공·전계완]

“美·日과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평화공원의 조선인 희생자 위령비 앞에서 묵념하는 한국 관람객.[사진제공·전계완]

“美·日과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학대를 피해 탈주한 조선 출신 일본군의 기록을 최초 보도한 지난 4월 1일 류큐신보.[사진제공·전계완]

‘조선 출신 일본병사가 부대 내 학대를 피해 탈주’.

4월 1일 오키나와의 유력지 ‘류큐신보(琉球新報)’는 1면 머리기사로 오키나와 전쟁 당시의 미군 심문 기록을 공개했다. 전쟁 직후 일본 군인을 포로로 잡았는데, 그는 조선인 출신 병사였다. 도쿄제국대 학생이던 가네마야 요시오(한국명 ‘김영오’로 추정)는 전쟁 발발 엿새 전 부대 내 학대를 피해 탈주했고, 미군에게 생포됐다.

이 신문은 당시 일본군의 이민족(조선인, 오키나와인) 차별이 군 내부에 만연했고, 지금까지 구두 증언으로만 전해지던 것이 기록으로 처음 확인됐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이는 당시 일본이 ‘황국신민(皇國臣民)으로서 내선일체(內鮮一體)’라고 외친 것이 허구라는 증거이기도 하다. 오키나와 주민들은 이 기사에서 보듯, 미군은 물론 일본군도 전쟁 가해자였음을 명확히 하고 있다.

공원 중앙광장에는 ‘평화의 초석(平和の礎)’이 있다. 종전 50주년이던 1995년, 오키나와 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의 이름을 국적과 무관하게 새겨 넣었다. 23만8000명이 이름을 올렸는데, 누구도 이것이 전쟁 희생자 모두라고 믿지 않는다. 조선인 희생자 1만 명 중 여기에 이름을 올린 사람은 500명이 채 안 된다.

필자가 이곳을 방문한 날, 200여 명의 일본 해상자위대 신입대원이 단체로 현장을 찾았다. 히로시마 출신의 한 여성 교관은 “평화를 지키기 위해 일본의 해상자위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이곳에서 교육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들의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의문이 들었지만, 이는 해상자위대원으로 갓 입대한 젊은이에게 던질 질문이 아니었다.

전쟁이 끝나자마자 오키나와는 미국 식민지가 됐다. 모든 것이 파괴됐고 57만 주민 중 3분의 1이 죽었다. 남은 것은 굶주림과 질병뿐이었다. 토지 강제수용, 저항 주민 수용소 감금, 사유재산 몰수 등의 조치가 이어졌다. 식민의 고통에 난민이 겪는 상실감이 더해졌다. 미국은 대규모 군사시설을 만들었고 사용료도 지불하지 않았다. 오키나와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그런 미군에 의존해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전쟁의 비극에 이은 굴욕의 역사가 시작됐다.  

슬픈 유리공예

“美·日과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평화의 초석 주변에서 안내원의 설명을 듣는 해상자위대 신입 대원들.[사진제공·전계완]

유리공예가 대표적이다. 별다른 지하자원이 없는 이 땅에서 주민들은 미군이 버린 콜라병, 맥주병을 모으고 이를 녹여 컵이나 그릇을 만들었다. 이를 미군과 관광객들에게 팔았다. 전통주 아와모리(泡盛)의 화려한 술잔도 여기에서 출발했다.

‘류큐 왕국의 후예들에게 오키나와를 돌려달라’는 운동이 벌어졌지만, 미국이 이를 받아들일 리 없었다. 1972년 미국은 미군기지의 반영구적 사용을 조건으로 오키나와를 일본에 넘겼다. 이후 오키나와는 40여 년을 다시 ‘일본국 일원’으로 존속하고 있다.

오키나와에는 본토와 달리 천황의 흔적이 없다. 혼슈(本州)나 규슈(九州)에서 천황 또는 황족이 옷깃만 스쳐가도 온갖 표석을 세우고 이를 자랑하는 것과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다. 천황에 대한 반감이 뿌리깊기 때문이다. 아키히토 일왕은 1975년 황태자 시절에 이곳에서 화염병 테러를 당했고, 오키나와 출신 가수는 1990년 천황 초청행사에서 ‘천황의 통치는 천년만년 이어진다’는 내용의 국가(國歌) ‘기미가요’를 부르지 않았다.  

지금도 오키나와는 일본 정부를 향해 목청을 높이고 있다. 물론 달걀로 바위 치는  격이지만, 미군 신기지 건설과 오키나와 역사 왜곡에 단호히 맞서는 것은 민족의 자존심을 지키겠다는 몸부림이다. 일본 정부 눈에 안 보이는 차별과 냉대는 ‘한 나라, 다른 민족’의 공존이 빚어낸 비극이다. 아베 총리를 비롯한 우익 정권이 집권을 이어가는 한 오키나와의 본질적 문제는 미래 지향적 해결이 불가능해 보인다.  

류큐 왕국은 1429년 통일국가를 이룬 뒤 명나라, 일본, 조선 등과 중계무역을 하면서 번성했다. 450년 동안 왕조가 유지됐지만, 1879년 일본 귀속 이후 한 번도 자립과 자강의 기회를 만들지 못하고 패배와 절망의 역사를 썼다.

지정학적 요충지의 운명

“美·日과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류큐 왕국의 번영을 상징하는 슈리죠(首里城)의 정전. 왕의 집무실이었다. [사진제공·전계완]

오키나와 사람들에게 평화는 국리민복(國利民福)의 평화가 아니다. 인간이 인간에게 자행하는 극악무도한 행위인 전쟁을 겪지 않는 것이 이들에겐 진정한 평화다. 침탈의 역사, 식민의 역사, 죽음의 역사에서 이들에게 꼭 필요한 평화는 살육만은 피하는 최소의 평화다. 오키나와의 이런 목소리는 거대한 힘이 작용하는 국제사회에서는 한낱 메아리일 뿐이다. 동북아시아엔 강대국 간 충돌의 경고음이 울려 퍼지고, 국가 간 군비 경쟁은 한계선을 넘어섰다.

오키나와를 통해 우리는 ‘지정학적 요충지’의 비극을 되새겨야 한다. 열강의 충돌 중간 지점에 끼어 있기만 하면 그저 중간에 위치할 뿐 균형자로서의 힘을 갖지 못한다. 우리는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의 각축 속에 원심력과 구심력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는 국가적 에너지를 키워나가야 한다. 오키나와 평화기념 공원에 이런 문구가 있다.

‘일찍이 류큐의 조상은 평화를 각별히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아시아 여러 나라와 교역 관계를 맺었다. 바다는 생명의 근원이며 평화와 우호의 가교이다. 평화는 지금도 여전히 마음속에서 숨을 쉬고 있다.’

평화를 사랑하던 류큐 왕국은 후대에 씻을 수 없는 비극을 남기고 완전히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