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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혼일강리역대국도 지도(1402)의 한라산 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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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산의 이름이 등장하는 지도로 가장 오래된 것은 1402년에 제작된 세계지도인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다(지도1). 현재 한라산은 너무나 유명하지만 조선 중기까지도 한라산은 그리 주목되지 않았다. <동국여지승람> ‘팔도총도’에서는 팔도의 주요 명산이 수록되고 있지만, 한라산은 빠져 있다. 당시까지만 해도 한라산은 제주라는 일개 군·현 위계의 명산에 한정되었던 것이다. <고려사> 지리지에서도 한라산은 탐라현의 명산으로만 기록되어 있을 뿐, <세종실록> 지리지의 전라도 명산 반열에는 빠져 있다. 나라에서 지내는 산천제에 비추어 보아서도 마찬가지였다. 정조 때(1793) 무렵까지도 한라산은 지방 고을의 명산의례에 준한 산신제를 지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와서는 사정이 바뀌었다. 18세기의 <여지도> ‘팔도총도’, <지도> ‘조선총도’ 등의 전국지도에는 한라산의 이름과 함께 산이 그려지고 있다(지도2). 한라산이 조선 후기에 나라의 명산으로 격상된 배경은 무엇일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국가·사회적으로 영토·영역 의식이 고양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앙권력의 제주지역에 대한 통치지배력 강화라는 정치적 배경도 뒷받침되었다. 아울러 지식인들 사이에 한라산이 삼신산의 하나로 여겨지면서 명산으로서의 위상이 변화된 계기 등이 주요하게 작용했다.
<세종실록>에도 영주산은 전북 변산으로 기록
일찍이 한라산은 제주 고을의 진산(鎭山)으로서 확고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진산은 공식적으로 지방을 대표하는 것으로 지정된 산이다. 한라산이 탐라현(제주목)의 진산이라는 사실이 이미 <고려사> 지리지에 표기되었고, 시기를 지나면서 주변 고을의 진산으로까지 확대되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한라산이 제주목의 진산’이라는 사실과, 한라산의 다른 이름과 유래, 산신제 의례, 형세와 경관도 부연 서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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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조선총도 (19세기)의 한라산 그림과 표기. 2 18세기 팔도총도(여지도)의 한라산. 영주라고 병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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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에 와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한라산이 제주목과 대정현의 진산으로 표기되었다. 그리고 조선 후기의 <제주읍지>에서는 ‘본 고을(대정)의 산천은 모두 한라산에서 맥을 일으킨다’고 하여 한라산이 고을 산줄기의 발원지로 인식되었다. 이러한 의식을 반영해 <1872년 지방지도>(제주·정의·대정)를 보면 고을의 진산으로서 주위 산천에 대한 한라산의 이미지와 위상이 뚜렷하게 표현되었다(지도4·5·6).
조선시대 지식인들 사이에 한라산은 삼신산의 하나인 영주산으로 널리 알려졌다. 한라산을 삼신산의 하나로 인식하는 초기 문헌은 서거정(1420~488)의 시문에 나온다. 한라산을 두고 ‘구름이 봉도(蓬島)에 열리니…’라고 읊었다. 봉도(蓬島)라는 표현은 삼신산 중 봉래산을 암시하는 것으로, 당시 무렵만 하더라도 한라산을 영주산이라고 하지 않은 듯하다. <세종실록> 지리지에서도, 영주산은 전북 부안의 변산으로 기록되고 있다. 조선 초기에 한라산은 영주산으로서 확고하게 인정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한라산이 영주산으로서 조선조 지식인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인식된 것은 17세기 초반 무렵이었다고 추정된다.
김치의 <유한라산기(遊漢拏山記)>(1609)에, ‘세상에서 말하는 영주산이 곧 이 산이다’라고 언급한 데서 잘 드러난다. 한라산을 영주산이라고 한 기록은 이후의 여러 시문에서는 물론이고, 이중환의 <택리지>(1751), 이규경(1788~1863)의 <오주연문장전산고> 등에서도 반복된다. 한라산이 영주산임이 사회적으로 확정되는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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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1872년 제주 지방지도의 한라산. 2 1872년 대정군 지방지도의 한라산. 3 1872년 정의군 지방지도의 한라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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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여러 고지도 <여지도> ‘팔도총도’, <지도서> ‘동국대총’, <지도> ‘동국팔도대총도’에서도 한라산이라는 이름 옆에 ‘영주(瀛州)’라고 표기되어 있는 사실이 확인된다(지도3). 특히 18세기에 제작된 ‘영주산대총도(瀛州山大總圖)’는 제주도 자체를 영주산(한라산)으로 표기하여 지도명으로 삼고 있어 주목된다. 제주사람들은 “한라산이 제주도이고, 제주도가 한라산”이라는 말을 곧잘 쓰는데, 이렇게 한라산 자체를 제주도와 동일시했던 것은 오래전의 사실이었던 것이다.
이 지도에서는 한라산을 거대한 산체로 회화적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그 산줄기는 주변의 주요 오름까지 한꺼번에 포함해 동서의 넓은 공간적 범위에 걸쳐 해안까지 이르고 있다(지도7). 이렇듯 조선 후기에 지식인들 사이에서 삼신산(영주산)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면서 한라산은 동국 명산으로서의 위상이 크게 높아졌다. 조선 왕실에서 비로소 한라산을 나라의 명산으로서 제사한 것도 18세기 초반 무렵으로 같은 시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조선 중기까지 제주도에 풍수 영향 적어
한라산에 풍수사상은 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조선 중기까지도 제주도에서 풍수의 영향력은 적었다. <동국여지승람>에서, ‘(묘지) 풍속이 풍수(地理)와 점(卜筮)을 쓰지 않는다’고 그 사실을 적고 있다. 육지에서 유교의 효사상과 결합되어 운용됐던 풍수라는 사회적 이데올로기가 제주도에는 상대적으로 미약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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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주산대총도 에서 회화식으로 묘사된 한라산의 모습. 동서로 뻗친 거대한 단일 산줄기가 제주도 전체로 이어진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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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조선 후기에 와서는 전국적인 풍수의 유행에 따라 한라산권역에서도 풍수는 광범위하게 적용되고 해석됐다. 고을, 마을, 주택, 묘지 등에 풍수는 영향을 주었고, 비보풍수 경관으로서 해안가 마을에는 돌탑인 거욱대(防邪塔) 등이 조성되기에 이르렀다. 제주 각지에서 발견되는 명당 설화와 풍수 답산기(과영주산세지(過瀛州山勢誌) 등)와 명당도(탁옥정도식·琢玉亭圖式 등)도 조선 후기부터 본격적으로 생겨났다(지도8).
한라산은 고립된 섬의 지리적인 특성으로 인해 내륙 산줄기와 연계성이 없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백두의 맥이 육지에서 바다를 건너 한라산까지 이어졌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다. 이러한 한라산의 백두산 내맥설(來脈說)은 조선 후기적 명산문화의 한 특징으로 꼽을 수 있다.
조선 중·후기에 와서 국토에 대한 자주의식이 강조됐고, 18세기 초반에 백두산을 경계로 한 청과의 국경 문제로 정치적·영토적 중요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풍수의 사회적 성행에 부수되어 국토의 산줄기에 대한 지식이 널리 확산되면서, 모든 명산은 백두산의 맥에서 산줄기가 이어졌다는 담론이 퍼졌다. 한라산은 백두산의 자손으로서 백두의 맥에서 기원하였다는 의식이 생겨난 것이었다. 이수광(1563~1628)은 <지봉유설>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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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동여지도에서 암시적으로 표현되고 있는 육지와 제주도(한라산)의 연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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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뭇 산은 모두 백두산에서 발원한 것으로 마천 철령 남쪽에서부터 금강산, 오대산, 태백산이 되고 지리산이 되어 다한다. 남사고는 백두산의 맥이 여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바다 속으로 숨어 들어가 일본의 여러 섬이 된다고 하니 이치가 있는 설명이라고 하겠다. 제주의 한라산 역시 그 하나이다.’ — <지봉유설>
한라산의 맥, 호남정맥의 마이산에 연원
제주 목사를 지냈던 이형상(1653~1733)도 <남환박물>에서, ‘한라산의 근원이 원래 뭍에서 들어온 것이라 바람이 치고 파도가 삼켜 지금은 바닷물이 들고 나는 사이라 하더라도 기맥이 연락되고 있다’고 한라산의 육지 내맥설을 긍정했다.
한편, 이중환은 <택리지>(1751)에서, 당시 이미 전국적으로 파악된 산줄기 계보에 근거해 한라산의 맥을 구체적으로 연결시키고 있다. 그는 한라산의 맥을 호남정맥의 마이산에 연원을 두면서, 무등산에서 뻗어 내린 월출산에서 바다로 이어져 한라산에 닿는다고 서술한 것이다. 게다가 한라산의 맥이 유구(琉球: 현 오키나와)까지 건너간다는 당시의 인식도 흥미롭다.
‘마이산에서 긴 맥이 동쪽으로 가서 담양 추월산과 광주 무등산이 되었고, 추월산과 무등산 맥이 다시 서쪽으로 뻗어서 영암의 월출산이 되었다. …월출산의 한 맥이 남쪽으로 뻗어가서 해남현 관두리를 지난 다음 남해 복판의 여러 섬이 되었고, 바닷길 천리를 건너서 제주 한라산이 되었다. 한라산 맥이 또 바다를 건너서 유구국이 되었다고 한다.’ — <택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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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탁옥정도식’의 정의읍 풍수형국도. 산도의 전형적인 모습. 2 조선산도는 백두산과 한라산을 연결해 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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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주삼현도는 한라산을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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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육지와 제주 지맥의 연결 관계는 김정호(?~1866)의 <대동여지도>(1861)에 와서도 암시적으로 반영되어 과장되게 표현되고 있다(지도9). 근대에 와서 최익현(1833~1906)이 <유한라산기>에서,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남으로 달려 4천리에 영암의 월출산이 되고, 또 남으로 달려 해남의 달마산이 되고, 달마산이 바다 건너 500리를 건너뛰어 추자도가 되고, 또 500리를 건너뛰어 한라산이 되었다’고 서술한 것도, 동시대 한라산 산줄기의 백두산 내맥설 담론이 더욱 구체화된 인식의 반영이라고 하겠다.
백두산-한라산의 산줄기 연속성과 계통적 체계는 ‘조선산도(朝鮮山圖)’라는 가시적인 지도로 그려졌다. 이 지도는 1903년에 필사본으로 제작된 것이다. 산도라는 특이한 유형을 한 이 지도에서, 한라산 맥이 무등산에서 발원하고, 무등산은 다시 마이산을 거쳐 백두대간으로 이어지는 산줄기 계통이 여실히 표현되고 있다.
이 지도를 살펴보면, 백두산을 머리로 하여 백두대간의 등줄기가 표현되고 지리산이 종점으로서 강조되었다. 아울러, 삼신산으로서 금강산·지리산·한라산이 강조되어 백두산과 함께 크게 그려진 점도 눈에 띈다. 한라산은 무등산의 지맥이 남으로 뻗어내려 바다 속으로 맥락이 이르는 것으로 표현되었다(지도10).
한라산지 지형이 육지의 산과 다른 유별난 점은 무엇보다도 오름이라고 할 수 있다. 한라산을 중심으로 주위 둘레에 360여 개의 소화산체(오름)들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한라산 산계의 이러한 군집적인 특징은 화산지형에서나 가능한 것으로 한반도의 산체에서는 매우 특이한 지형경관 모습이다. 오름들의 모습도 고지도에 잘 그려졌다. 조선 후기의 <해동지도> ‘제주삼현도’에서 한라산과 둘레의 소화산들 모습이 가시적으로 잘 나타나 있다(지도11). 더구나 <대동여지도>에서는, 한라산과 주위 오름을 연결해 연속된 산줄기로 제주의 지형경관을 재현하고 있어서 흥미롭다(지도9). 이러한 인식은 조선 후기 육지의 산줄기에 대한 계통적 인식이 제주도 한라산지의 지형환경에 투영된 결과라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