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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희식_삼국지의 여인들_06

醉月 2015. 6. 1. 13:03

미부인은 공자 아두를 땅바닥에 내려놓고 갑자기 근처의 우물 속으로 뛰어들어 목숨을 끊었다.  

 

조조(曹操)는 건안(建安) 초(196년) 정부인(丁夫人)을 폐하고 첩이었던 변(卞)씨를 정처(正妻)로 삼는다. 정부인이 키우던 조조의 맏아들 조앙(曹昻)이 장수(張繡)와의 전투에서 조조를 보필하다 죽자 조조를 원망하여 둘 사이의 관계가 소원해진 것이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정처가 된 변씨는 조조의 두 아들을 키우며 그녀 자신 또한 조비(曹丕), 조창(曹彰), 조식(曹植), 조웅(曹熊) 네 아들을 낳는다.
 
  그녀는 기녀(妓女) 출신으로, 조조가 25세에 한창 관운이 트일 때 첩으로 삼은 여자였다. 그녀는, 조조가 도주 중 동탁(董卓)의 부하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을 원술(袁術)로부터 듣고 조조의 측근과 장수들이 흩어지려 하자 소문에 불과하다며 이를 말린 적이 있었다. 후에 조조는 자신의 부하들이 건재한 걸 보고 변씨가 보통 여인이 아님을 알게 된다.
 
  변 황후(卞皇后)는 기녀 출신이지만 화려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수를 놓은 의상을 입지 않고 보석을 몸에 달지 않았다. 식기도 검은 칠 바른 질박한 것을 사용하였다. 조조가 멋진 보석, 목걸이, 귀걸이를 갖고 와 맘에 드는 것을 택하라고 하자 손을 대려 하지 않았고, 거듭 청하면 마지못해 기껏 중품 이하의 물건만을 받았다. 조조가 이상하게 여겨 그 이유를 묻자 그녀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상품의 물건을 고르는 것은 욕심이 많은 사람이 하는 짓이고 너무 하품의 물건을 고르면 천하게 보이지요. 그래서 항상 중 정도의 물건을 고릅니다.”
 
  또 그녀는 친척이 찾아오면 반기지 않고 “윗사람의 은혜를 입으려고 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타일렀다. 그녀의 이러한 태도가 조조의 마음에 들었으며 그의 사상에도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조조는 언제나 변 황후를 높이 평가하였다. 기녀 출신이라고 업신여기는 사람도 많았으나 그녀의 과거를 전혀 문제 삼지 않았다. 조조가, 부하의 출신 성분보다는 유능한 면을 중요시하는 태도는 바로 그녀에게서 배운 것이다. 현처(賢妻)형의 영민한 여인, 조조의 부인이라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었다. 그녀가 낳은 조비가 정식으로 조조의 후계자로 정해지자 궁녀들이 몰려와 축하하였다.
 
  “이번에 아드님께서 태자(太子)가 되시니 천하 만인이 기뻐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변 황후는 “아, 여러분. 내 아들은 나이가 되어 후계자가 된 것뿐입니다. 나의 교육이 뛰어나서 그런 것이 아니고 오직 나이 때문에 후계자가 된 것이죠.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당연한 것입니다. 나는 기쁘다기보다 그저 마음이 편할 뿐입니다”하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조조는 크게 만족했다.
 
  궁녀들의 입을 통해 부인의 이러한 언행을 여러 차례 전해들은 조조는 ‘화가 날 때 노기를 곁에 드러내지 않고 기쁠 때에도 자기의 위치를 잃지 않는 그 태도야말로 나의 스승이다. 나도 그 태도를 본떠 언행을 한다면 큰 실수가 없을 것이다’하고 생각하였다.
 
  궁녀나 재상들이 제아무리 축하를 해도 그저 미소를 지을 뿐 평정심을 조금도 잃지 않는 그녀. 이처럼 어느 때나 부인이 평정심을 잃지 않고 자기를 대해준 것, 이것이 조조로 하여금 여러 면에서 인생의 성공을 가능케 하였다. 부인의 이러한 태도를 바탕으로 모든 일이 원만하게 이루어짐에 따라, 그의 전술적인 능력과 시적(詩的)인 능력이 크게 자라나고 인간다운 멋진 풍모를 지니게 된 것이다.
 
  조조는 《삼국지》 안에서도 인물 중의 인물일 뿐 아니라 그의 일곱 자식도 변 황후의 개성을 본받아 조조와 더불어 뛰어난 시인이 되었다. 조조의 시적 천재성에 대해서 잠시 보기로 하자.
 
  오늘날 전해지고 있는 조조의 시 30여 편은 그 특징상 세 종류로 나누어진다.
 
  첫째는 정치가로서의 이상을 순수하게 토로한 것이다.
 
  단가행(短歌行)
 
  對酒當歌
  人生幾何
  譬如朝露
  去日苦多
 
  술 마시며 노래하자
  인생은 무엇인가
  비유컨대 아침 이슬과 같도다
  지나간 나날은 고통도 많구나
 
  (중략)
 
  山不厭高
  海不厭深
  周公吐哺
  天下歸心
 
  산은 흙을 쌓아 높아지고
  바다는 물을 받아 깊어진다
  옛날의 주공처럼 인재를 맞이한다면
  천하의 민심이 돌아오리라
 
  이 단가행(短歌行)은 조조의 시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이다. 조조는 자기를 배반한 자나 큰 죄를 지은 자라도 유능하기만 하면 맞아들여 환대하였다. 그는 잠자리를 찾아 헤매는 새처럼 인재를 구하였다.
 
  둘째로 신선(神仙)에 대한 동경을 그린 시가 있다.
 
  정렬(精列)
 
  厥初生
  造化之陶物
  莫不有終期
 
  생명은 원래
  조물주가 빚어낸 것으로
  종말의 시기가 있다
 
  (중략)
 
  君子以弗憂
  年之暮奈何
  時過時來微
 
  군자는 근심 않으리
  세월이 다함을 어찌하랴
  쉬지 않고 시간은 가 남은 날 많지 않으리
 
  중국에는 전국시대 장강 하류에서 태어난 가요를 중심으로 한 초사(楚辭) 이래 신선 세계에의 동경을 시로 노래하는 전통이 있다. 그 공통된 내용은 현세의 고뇌와 인생의 허무를 탄식하는 데서 시작하여 선인(仙人)을 만나 불로장생의 약을 얻고 선인이 되는 것이 줄거리다. 선인이 되는 자도 있고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실망하는 자도 있다. 조조는 현실적 정치가였지만 신선술에 대한 관심 또한 컸다. 고뇌의 현실은 선계에의 동경으로 나아갔다가 다시 현실에의 회귀로 이어진다.
 
  셋째로 인간에 대한 이해와 동정심에 관한 시다.
 
  조조의 시들은 서민적 발상, 보편적 표현으로 인간의 비애를 마음속 깊이 호소한다. 조조가 원소(袁紹)의 잔당을 토벌하기 위해 태행산(太行山)을 넘을 때, 추위와 싸우며 행군한 체험시(혹자는 조비가 쓴 것이라고도 하지만)를 보기로 하자.
 
  고한행(苦寒行)
 
  北上太行山
  艱哉何巍巍
  羊腸阪詰屈
  車輪爲之摧
  樹木何蕭瑟
  北風聲正悲
 
  북쪽 태행산에 오르면
  몹시도 험한 절벽
  언덕길 워낙 꾸불꾸불해
  차바퀴 부러져 깨진다
  길가의 나무 소슬하고
  북풍 소리 서글프다
 
  (중략)
 
  行行日已遠
  人馬同時飢
  擔囊行取薪
  斧冰持作糜
  悲彼東山詩
  悠悠令我哀
 
  행군길 멀기만 한데
  사람도 말도 함께 굶주려
  짐을 메고 땔감을 찾아
  얼음을 깨고 죽을 끓인다
  슬프도다. 동산의 시
  그 절실함 어찌 다 말하랴
 
  조조는 이 동산(東山)의 시를 빌려서 부하 장병의 고충을 위로하고 있다. 고향을 떠나 험한 산길을 헤매는 병사의 고통,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는 이들을 생각하며 가슴 아파한다. 조조를 냉혹한 권력자, 무자비한 지배자로 보는 사람이 많지만 실은 자신의 삶에 고통을 느끼고 주변의 불행한 자를 그는 동정하였다. 조조는 타산가라기보다 남의 고뇌의 이해자라고 할 만하다.
 
  조비는 그의 문선(文選)에서 ‘문장경국지대업(文章經國之大業), 문장은 나라를 바로잡는 대의(大義)이며 불후(不朽)의 사업이다’라고 하였다. 인간의 수명은 한계가 있으며 영화환락(榮華歡樂)은 일대(一代)뿐이다. 언제고 사라지게 될 운명이니 문장이 지니고 있는 영원무궁의 생명에는 미치지 못한다.
 
  문학의 독립성과 영원성을 밝힌 이 말은 예술지상주의가 성한 육조문학(六朝文學)의 개막을 알리는 말이다. 많은 사람이 조조와 왕비의 막하에 초대되어 문장을 쓰고 학문과 문학을 즐겼으니 조조 중심의 문학살롱이 형성되었다. 조조, 조비, 조식이 미친 문학상의 영향은 매우 크다. 제위에 오른 조비가 동생 조식을 시기한 나머지, 내 눈 앞에서 일곱 걸음 걷는 사이에 시를 지으라고 명하고 못 지으면 책임을 묻겠다고 위협한 비극적 이야기는 특히 유명하다.
 
  조비의 시는 남아 있지 않고 조식의 시는 《조자건집(曹子建集)》에 100여 편이 남아 있다.
 
 
  엇갈린 운명, 麋夫人과 甘夫人
 
  안희현위(安喜縣尉)의 직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온 현덕(玄德) 유비(劉備)는 조조의 호소로 결성된 반동탁연합군에, 옛 친구 공손찬(公孫瓚) 소속의 한 부대로 참가한다. 이후 관우(關羽), 장비(張飛)와 더불어 여포(呂布)를 물리치고 천하에 자리를 잡는다. 북해태수 공융(孔融)이 황건적 잔당에게 포위되어 원조를 구하자, 유비가 관우, 장비와 함께 군사를 몰고 가 황건적을 물리친다. 이후 공융의 소개로 유비는 서주(徐州)의 태수 도겸(陶謙)에게로 간다.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다며 공격해 온 조조군을 방어하고 큰 신임을 얻는다.
 
  도겸의 사후 상당한 재력가인 신하 미축(麋竺, 미부인의 큰오빠) 등과 백성이 원하여 유비는 서주태수가 된다. 그런 중 조조와의 싸움에서 진 여포를 보호하고 그에게 소패(小沛)의 성을 지키게 하였다. 그러나 원소 토벌을 위한 전쟁 중에 여포에게 서주를 빼앗긴다. 여포와 일단 화해하였으나 계속 대립되어 이번에는 조조와 연합하여 여포에 대항하였다. 유비는 조조의 추천으로 예주(豫州)의 목(牧)으로 봉해진다. 그 후 조조와 반목하며 큰 난을 겪기도 했으나 세월이 흘러 후한 건안 19년(214년) 유비는 마침내 익주(益州)를 평정하였다. 공명(孔明)이 말한 천하삼분(天下三分)의 토대가 이루어진 것이다.
 
  부유한 땅을 갖게 된 유비의 주변으로 인재가 모였다. 옛 주인 유장(劉璋)의 곁을 떠난 촉한(蜀漢)의 구신과 신하들에게 역직을 주어 뜻있는 많은 인물이 활약하게 되었다. 오(吳)의 손권(孫權)은 유비가 익주를 손에 넣은 것을 알고 사자를 보내 형주(荊州)의 반환을 요구하였다.
 
  당시 조조는 한중의 장로(張魯)를 제압한 상태였다. 유비는 형주를 오와 분할해서 보유하는 협정을 맺고 조조에 대한 공수동맹을 맺었다.
 
  건안 21년(216년) 조조는 마침내 위왕(魏王)이 되어 유비와 대립을 계속했다. 유비도 건안 24년(219년)에 한중왕(漢中王)의 자리에 앉았다. 한중을 조조에게서 되찾고 중원 침공을 계획하는 단계에서 뜻하지 않은 비극이 유비를 엄습하였다. 형주에 머물러 위의 조인(曹仁)을 공격하던 관우가 갑자기 습격해 온 오의 손권군에 의해 살해된 것이다. 그뿐 아니라 건안 25년 정월 조조가 죽자 아들 조비가 황제 헌제(獻帝)를 폐하고 연호를 황초(黃初)라 하여 낙양에 도읍을 정하고 위(魏)를 건국하였다.
 
  한나라의 정당한 후계자였던 유비는 한 왕조의 혈통을 이은 촉한을 세우고 초대 황제가 되었다. 유비는 중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관우의 복수를 위해 오를 토벌하려 했지만 설상가상으로 장비가 부하에게 암살당하게 된다. 슬픔과 분노에 찬 유비는 강동을 공격해 몇 번의 승리를 거두었으나 오의 장군 육손(陸遜)의 계략으로 패하여 백제성(白帝城)에 머물게 된다. 그것이 그의 최후였다. 유비는 공명을 불러 아들 유선(劉禪)을 돌봐달라 부탁하고 유선이 능력이 없을 때는 스스로 황제가 되라고 권하였다.
 
 
  적진을 뚫고 阿斗를 구하는 趙子龍
 
  조조의 군사는 물밀듯 쳐들어오고 있었다. 신야(新野)에서 번성(樊城)으로 유비를 따라온 백성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다시 피란길에 나섰다. 사나이들은 노인들을 부축하고 아이들을 업고 여인들을 보살피며 강을 건넜다. 배 위에 올라 이 모습을 본 유현덕은 목을 놓아 울었다.
 
  “나 때문에 백성들이 이리 심한 고생을 하니 내가 무슨 낯으로 살겠는가?”
 
  배가 강 언덕에 이르러 건너편을 바라보니 강을 건너지 못한 백성들이 발을 구르며 통곡하고 있었다. 양양성(襄陽城)의 백성들까지 유비의 뒤를 따르니 유비를 따라 강릉으로 가는 군사들과 백성은 10여 만이 되었고 수레도 수천 대에 이르렀다. 여기에 뒤따르는 자도 헤아릴 수 없었다. 이미 조조의 대군은 번성을 점령하고 배와 뗏목으로 강을 건너고 있었다.
 
  추격해 온 조조의 군사들이 눈앞까지 다가왔다. 강릉은 형주와 양주에 걸쳐 있는 주요 요지로 곡물과 산물이 풍부한 곳이다. 유비는 그곳으로 가 뿌리를 내려야 했다. 그러나 그곳은 아직 멀고 이미 조조의 군사가 물밀듯 밀어닥치니 그저 죽을 힘을 다해 싸울 뿐이었다. 그때 화살에 맞아 얼굴이 피투성이가 된 미방(麋芳)이 비틀거리며 달려와 유비에게 아뢰었다.
 
  “조자룡(趙子龍)이 우리를 배반하고 조조에게로 갔습니다.”
 
  이 말을 듣자 유비는 오히려 그를 꾸짖었다.
 
  “조자룡은 나의 오랜 친구이거늘 왜 함부로 모함하오.”
 
  “서북쪽으로 조조를 찾아가는 것을 제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자룡이 조조에게 갔다 하면 반드시 어떤 사연이 있을 것이오. 그는 절대로 나를 배반하지 않을 것이오.”
 
  조자룡은, 몰려오는 조조군의 군사를 맞아 싸우다 보니 벌써 날이 밝아왔다. 유비와 그 가족 생각이 들어 사방을 찾아다녔으나 보이지 않았다. 주공이 잘 보살피라고 특별히 부탁한 감부인(甘夫人)과 미부인(麋夫人)뿐 아니라 어린 아들 아두(阿斗)까지 잃어버렸으니 이런 낭패가 없었다. 그들을 빨리 찾아야 한다는 생각 외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어느 순간 그는 수풀 속에 쓰러져 있는 간옹(簡雍)을 발견하였다.
 
  “혹시 두 분 마님을 보지 못했소?”
 
  “장군, 두 마님께서는 수레를 버리고 공자 아드님을 품에 안고 달아나셨습니다.”
 
  간옹이 신음하며 대답했다. 조자룡은 부하 둘에게 간옹을 부축해 가도록 명하고 그가 말한 방향으로 달려갔다. 마침내 두 마님의 수레를 호위하고 가다 화살에 맞아 쓰러진 병사를 발견하였다. 병사는 감부인이 머리를 산발한 채 신도 신지 않고, 피란 가는 백성들 틈에 끼어 남쪽으로 갔다 말했다. 그는 난민들을 만날 때마다 감부인에 대해서 물었다. 다행히 피란민 사이에서 간신히 그녀를 찾아내었다.
 
  “마님 제가 잘 모시지 못해 이런 고생을 시킵니다. 미부인과 공자님은 어디 계신가요.”
 
  “적군의 습격을 받아 뿔뿔이 흩어지는 바람에 미부인과 공자가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합니다. 나 혼자만 가까스로 이 피란민 대열에 끼었습니다.”
 
  조자룡은 감부인을 말에 태우고 적과 싸우며 적진을 돌파하였다. 그러다가 마침내 미부인의 큰오빠인 미축과 만나게 되었다.
 
  “미공은 감부인을 모시고 먼저 돌아가시오. 나는 미부인과 공자를 찾아 모시고 오겠소.”
 
 
  劉備와 麋夫人의 이별
 
  조자룡은 부하 몇을 이끌고 오던 길을 되돌아갔다. 그는 난민을 만날 때마다 미부인의 소식을 물었다. 한 난민이 무너진 담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마님께서는 부상을 당하셨습니다. 왼쪽 넓적다리가 창에 찔려 더 이상 걷지 못하고 공자님을 품에 안은 채 저 담장 안에 누워 계십니다.”
 
  때는 건안 13년(208년). 형주 양양에서 강릉으로 가는 중엽에 있는 오두막에 한 귀부인이 건초를 덮고 숨어 있었다. 그녀는 가슴에 두 살 먹은 아이를 안고 있었다. 일어나려고 해도 왼쪽 다리를 다쳐 움직일 수가 없었다.
 
  ‘밖에는 적군이 우글거린다…. 이제 내 운명이 다했나 보다.’
 
  그녀의 이름은 미부인. 서주, 예주를 다스리고 최근까지 형주자사 유표(劉表)의 식객으로 지낸 유비의 두 번째 부인이다. 미부인이 안고 있는 아이는 유비의 첫째 아들인 아두로 훗날 촉의 황제가 되는 바로 그 유선이었다. 아두는 그녀의 아들이 아니었다. 감부인의 아들이었다.
 
  그녀의 남편 유비는, 천하통일의 기치를 들고 남침해 온 조조 100만 대군의 추격을 피해 신야성(新野城)을 버리고 물자가 풍부한 강릉을 향하고 있었다. 퇴각하는 유비군을 따라 주민 십수만 명이 따라나섰지만 추격해 온 조조군이 턱밑까지 닥쳐온 상황이었다. 상황이 이러하자 ‘백성들은 개의치 말고 주공께선 속히 강릉으로 가시라’는 진언이 빗발쳤지만 유비는 “나를 따르는 백성을 어찌 버리겠소”하고 움직이려 들지 않았다. 평소 대의와 신의(信義)를 좇아 행동하는 유비는 유표가 “형주자사를 양도하겠다”고 한 것을 거절하여 호기를 놓친 적이 있었다. 이번에도, 유비가 그 무엇보다 중히 여기는 ‘신의’가 행군의 장해가 되고 있었다.
 
  신야성을 버리고 떠난 지 며칠이 지난 날 마침내 조조군이 들이닥쳤다. 축시(丑時)에, 야영하던 유비군의 진중에서 비명이 쏟아졌다.
 
  “유비의 목을 따라!”
 
  “평민은 다 죽여도 좋다. 여자와 애들도 사정없이 죽여라!”
 
  적군의 고함소리가 진중을 뒤흔들었다. 이 와중에 유비는 겨우 도망쳤다. 감부인, 미부인과 아들 아두는 뒤처졌고, 미부인은 감부인과도 헤어지고 아두를 안은 채 오두막에 숨어 있었던 것이다.
 
  ‘이 아이라도 감부인에게 전할 수만 있다면….’
 
  아두는 편안히 잠들어 있다. 아이가 자는 모습을 보고 그녀는 모자(母子)에 대해 이상한 질투심이 솟아올랐다. 이 와중에도 이처럼 잘생긴 아이를 가진 감부인이 부럽기 그지없었다.
 
  미부인은, 유비의 후계자를 낳아 모두에게 존경을 받는 감부인에게 동경심과 함께 질투심을 느끼고 있었다. 감부인은 원래 서주성에서 자라난 시녀였다. 그녀의 헌신적인 모습에 호의를 가진 유비가 그녀를 첩으로 삼았다. 유비에겐 원래 정부인이 있었으나 병으로 죽어, 감부인이 실질적인 정부인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감부인은 뛰어난 미인은 아니었으나 편안한 느낌을 주는 여성이었다. 그러나 전쟁 때마다 홀로 떨어지기 일쑤였으니 여포가 유비를 쳤을 때도 유비는 그녀를 두고 도망쳤었다. 그 후 감부인이 돌아오자 유비는 미부인의 가신(家臣)들 앞에서 부인에게 사과하였다. 감부인은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이렇게 말했다.
 
  “마음에 두지 마세요. 이렇게 만났으니 되었습니다.”
 
  정말 사려 깊고 마음이 넓은 부인이었다. 미부인은 그런 감부인에게 착잡한 애정을 느꼈다. 나이는 미부인이 많지만 부잣집에서 곱게 자란 미부인은 인간미에 있어서는 감부인을 따를 수 없었다. 감부인도 그녀를 아꼈다. 중류가정에서 자란 감부인에게 미부인의 우아한 미모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런 감부인도 피부만은 백옥 같아 피부로만 따지면 당대에 비교 대상이 없다 할 정도였다.
 
  감부인이 돌아온 후 유비는 그녀와 더 가까이 지냈다. 황실의 피를 받았지만 가난하게 자란 유비는 부유하게 자란 미부인과는 성격이 맞지 않는 점도 있었다. 그 점에 있어서 감부인과 유비는 더 마음이 맞았다. 외로운 미부인은 고독한 삶 가운데서도 유비와 감부인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 아두의 교육에 힘써왔다.
 
 
  劉備를 찾아 천 리 길에 나섰던 關羽와 두 부인
 
  뒤돌아보면 조조와 유비가 힘을 합하여 여포를 친 후 서주에는 잠시 평화가 왔었다. 그러나 유비와 조조가 적대시하게 되자 그 평화로운 날들은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건안 4년(199년) 조조는 유비를 치기 위해 수십만의 군세를 몰고 형주로 쳐들어왔다. 유비는 거의 싸움도 못해 보고 도주하였다. 유비는 원소에게 가고, 관우는 조조가 두 부인을 잘 대해주고 유비의 행방을 알면 즉시 떠난다는 조건으로 조조에게 투항하였다. 끌려가는 도중 미부인은 눈물에 젖은 채 삶을 단념하는 듯했으나 감부인은 비교적 태연하였다.
 
  “당당한 모습으로 견뎌 나가요.”
 
  감부인은 따뜻한 마음으로 미부인을 격려하였다. 관우의 무용을 높이 평가한 조조는 그를 편장군(偏將軍)으로 임명하고 후대하였다. 하지만 유비가 살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관우는 두 부인을 데리고 하북의 유비에게로 다시 돌아갔다.
 
  관우의 하북으로의 도정은 1000리가 넘어 여인들에게는 험한 여정이었다. 미부인이 낳은 아이는 병으로 쇠약해지더니 일찍 죽고 말았다. 미부인은 자기도 죽으려고 마음먹었으나 감부인의 위로로 겨우 견디었다. 관우 일행이 유비와 재회한 후에도 수난은 계속되었다. 유비를 돌보던 원소는 관도전투(官渡戰鬪)에서 대패하고 유비는 다시금 관우, 장비, 조자룡을 데리고 여남에서 조조군과 항전을 하였으나 패하고 형주의 유표 곁으로 도망쳤다. 거기서 신야성을 얻고 그곳에 머물렀다.
 
 
  阿斗의 탄생
 
  건안 12년(207년) 유비가 형주에 온 지 7년이 되었다. 형주에 온 후 미부인은 유비와 잠자리도 같이 하지 못했고 그 때문에 더욱 외로웠다. 반면 유비의 총애를 한 몸에 받은 감부인은 갈수록 아름다워져 그 고운 피부에 더욱 생기가 돌았다.
 
  미부인은 극도로 외로웠으나 그나마 감부인이 자주 찾아와 얘기 동무를 해주었다. 미부인이 걸핏하면 신경질을 내니 시녀들도 그녀의 곁을 피하였다. 어느 날 감부인은 꿈을 꾸었다. 길을 거닐고 있는데 갑자기 북두칠성이 떨어져 몸을 피하자 북두칠성이 그녀의 입 안으로 들어왔다. 그 후 감부인은 진통을 하였다. 유비와 결혼한 지 10여 년 만에 아이를 갖게 된 것이다. 여자로서, 특히 주군(主君)의 아내로서 이는 큰 행운이었다.
 
  출산을 하는 동안 미부인은 질투심 속에서도 감부인 곁에서 그녀 손을 잡고 격려하였다. 그 덕인지 감부인은 무사히 사내아이를 분만하였다. 경사스러운 일이었다. 47세에 아들을 얻은 유비는 출산 전 그녀의 꿈을 상기하고 아두(阿斗·어린 북두칠성)라고 이름을 지었다.
 
  ‘내 아이가 태어났을 때는 유비가 이처럼 좋아하지 않았는데….’
 
  심한 피해망상증에 걸린 미부인은 너무나 기뻐하는 유비의 모습을 보고 우울증에 사로잡혔다. 아두는 주위에서 따뜻하게 지켜준 덕에 건강하게 잘 자랐다. 아두는 재능도 있어 신동이라 불릴 정도였다. 그러나 너무나 곱게 자란 어린이는 신통치 않은 법이었다. 아무튼 미부인은 아두를 자기 아이처럼 귀여워했다.
 
  “아두는 내 눈을 닮았어”하고 장비는 말하곤 했다. 농담이라도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자는 장비밖에 없었다.
 
  “자네 닮았으면 술을 좋아할 테니 걱정이군”하고 관우가 비꼬았다. 공명도 아두를 높이 평가했으나 너무 곱게 기르는 것에 대해서는 염려를 하였다.
 
  ‘어려서 고생하지 않으면 큰 그릇이 되기 어려운데….’
 
  그때 중국 전체의 통일을 노리는 조조가 대규모 군을 이끌고 신야성에 쳐들어왔다. 만 명도 못 되는 군세를 가진 유비는 주민들을 이끌고 남으로 도주하였다.
 
  “주민들은 놔두고 가시죠. 어찌 그들을 데리고 갈 수 있겠습니까.”
 
  미부인은 유비에게 이처럼 권했다. 그러나 감부인은 “유비 나리는 백성을 저버리지 못합니다. 백성들이 그를 따르고 있지 않습니까”하고 이에 반대하였다. 피란 중 감부인은 마차에서 내려 대신 어린애를 태우고 자신은 백성과 함께 걸었다. 백성들은 자기들과 함께 걷고 있는 감부인의 모습에 눈물을 흘렸다. 이때 미부인은 감부인에 대해 말할 수 없는 패배감을 느꼈다.
 
 
  麋夫人, 우물에 몸을 던지다
 
  결국 유비의 군대는 조조군의 습격을 받아 백성과 함께 흩어지고 미부인은 겨우 아두를 안고 오두막에 몸을 감추었던 것이다.
 
  ‘나는 버림받았지만 감부인은 누가 살리겠지.’
 
  오랜 고독에 이어 활로가 보이지 않는 이 상황이 미부인을 절망에 빠뜨렸다. 아두의 천진한 모습을 보고 그녀는 화가 났다.
 
  ‘이 아이는 아무 사정도 모르고 잠만 자는구나. 아이를 감부인에게 넘겨주면 나는 무용한 인간이 되니 우물에 빠져 죽어야겠다. 그전에 아이를 어떻게 유비한테 전해야 하나. 이 아이는 죽으면 안 되는데.’
 
  그때 갑자기 아두가 깨어나 울기 시작하였다. 미부인은 그녀의 죽음 후 혼자 남을 아두가 걱정되었다.
 
  ‘나리도 장군들도 이 애를 너무나 귀여워하지…. 이 애는 큰 인물이 되기는 어렵지만….’
 
  그녀가 이러한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조자룡이 나타났다.
 
  혼자서 적진을 뚫고 온 것이다. 피에 젖은 조자룡이 부인 앞에 서 있었다.
 
  조자룡이 보니 불타 버린 집의 흙담 안 샘가에서 공자를 품에 안은 미부인이 울고 있었다. 조자룡은 급히 말에서 내려 땅에 엎드린 채 제대로 돌봐드리지 못한 것을 사과하였다. 미부인은 너무나 반가워 어쩔 줄을 몰랐다.
 
  “조운(趙雲) 나리, 감사합니다. 감부인은 무사하신가요?”
 
  “네. 그분은 안전하게 나리 곁에 계십니다.”
 
  “장군을 다시 뵙게 된 것은 감부인의 아드님 아두 공자의 덕입니다. 바라옵건대 장군께서는 공자를 무사히 주공께 데려다 주시어 후에 왕위에 오르게 해주십시오. 그럼 죽어도 원이 없겠습니다. 이 아이는 주공께서 싸움터를 전전하면서 얻으신 유일한 혈육 아닙니까.”
 
  “마님께서 이렇게 된 것은 모두 제 잘못입니다. 자 빨리 말에 오르십시오. 이 말은 스스로 알아서 유비님 곁으로 달려갈 수 있습니다. 저는 걸어서 적의 포위망을 뚫을 것입니다.”
 
  “아닙니다. 안 될 말입니다. 장군이 말도 없이 어떻게 적진을 뚫을 수 있겠습니까. 공자만이라도 잘 보호해 주세요. 저는 중상을 입었으니 공자만 살아서 돌아가신다면 여한이 없겠습니다. 저에 대해서는 아무 염려 마시고 빨리 공자를 데리고 가십시오. 저는 다만 누가 될 뿐입니다.”
 
  “그러지 말고 어서 말 위에 오르십시오.”
 
  “저는 심하게 다쳐 움직일 수조차 없습니다. 이러다가는 우리 모두 죽게 됩니다.”
 
  미부인은 공자를 받으라고 하며 마지막 말을 남겼다.
 
  “공자의 운명은 오직 장군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이때 사방에서 조조군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미부인은 공자 아두를 땅바닥에 내려놓고는 갑자기 근처의 우물 속으로 뛰어들어 목숨을 끊었다. 자기가 낳은 아들도 아닌 공자와 조운 장수를 살리기 위한, 누구도 흉내 내기 힘든 행위였다. 조자룡은 미부인의 시신이 적의 손에 들어가지 않게, 눈물을 머금고 무너진 돌과 흙으로 우물을 메웠다. 그러고 나서 공자를 품에 안고 조조군과 싸우면서 천신만고 끝에 유비의 진영으로 돌아갔다.
 
  戰將全憑馬力多
  步行怎把幼君扶
  拚將一死存劉嗣
  勇決還虧女丈夫
 
  조자룡은 말을 타고 전공을 세웠거늘
  보행으로 어찌 어린 군주 부축할거나
  장수의 목숨 걸고 유황실 후사 이어야 하는데
  오히려 여장부가 용단을 내려줬네
 
 
  촉의 제2대 황제가 된 阿斗, 위에 항복하다
 
  조자룡이 아두를 안고 돌아오자 유비는 아들을 땅바닥에 내던지고 이렇게 말했다.
 
  “애는 또 낳을 수 있소. 부인도 다시 결혼하면 되오. 하지만 충성스러운 신하는 구하기 어려운 법. 처자 때문에 그대를 잃을 뻔했구려. 미안하오. 날 용서해 주오.”
 
  조자룡은 눈물을 흘리며 땅바닥에 내팽개쳐진 아이를 다시 안아 들었다.
 
  감부인은 그동안 심한 고생에 시달린 데다 미부인이 아두를 살리기 위해 대신 죽은 것이 크게 상심이 되어 병을 얻으니 이듬해 세상을 떠났다. 1년 만에 두 부인을 잃다니…. 유비는 자기의 부덕 탓이라고 생각하고 밤새도록 통곡하였다. 그 후 아두는 유비의 정실이 된, 손권의 여동생 손인(孫仁)에 의해 양육되었다. 그러나 몇 년 후 손권의 계략으로 손인이 오나라로 돌아가자 그 후는 시녀와 환관의 손에 의해 키워졌다.
 
  그러나 아두를 엄격하게 기르던 손인과는 달리 그들은 아두를 너무 곱게 길러 보통 아이만도 못하게 되었다. 그가 성인이 되자 유선이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유선에게는 유영(劉永), 유리(劉理)라는 자질이 뛰어난 이복동생들이 있었다. 그러나 유비는 그가 사랑한 감부인의 아들 유선을 후계자로 삼았다. 유선은 촉의 제2대 황제가 되었다. 처음부터 공명의 도움으로 나라가 안정되니 위도 더 이상 공격하지 않게 되었다. 공명이 죽고 장완(蔣琬)과 비위(費褘) 같은 명재상들도 곁에 없게 되자 환관들이 득세하며 국력이 쇠퇴해져 갔다. 염흥(炎興) 원년(263년) 위의 대장 등애(鄧艾)가 별동대를 이끌고 쳐들어오자 유선은 바로 항복해 버렸다.
 
  촉이 멸하자 유선은 낙양에 가 여생을 편안히 지냈다. 유선은 촉의 황제로 있을 때도 미인을 좋아해 시중 동윤(董允)으로부터 12명 이상의 비빈(妃嬪)을 두면 아니 된다는 충고를 듣고 입맛을 다시며 민간에서의 미인 선발을 겨우 포기했던 위인이었다. 그런 그인지라 나라가 망한 뒤에도 미인과 연회를 좋아하는 건 여전했다.
 
  어느 날 연회석에서 촉나라 음악이 연주되자 옛 신하들은 눈물을 흘렸으나 유선은 혼자 웃고 좋아하였다.
 
  그 모습을 본 위의 사마소(司馬昭)가 “촉나라가 그립지 않습니까?”하고 묻자 유선은 “이 생활이 참으로 즐겁소. 그것으로 족한 것 아니오? 무엇 때문에 촉나라를 생각하겠소?”하고 대답했다. 적인 사마소도 이 말에 어이가 없었다. 그는 촉의 구신 극정(郤正)을 불러 “왜 유비는 저런 자를 후계자로 했나요”하고 물었다.
 
  “아니죠. 원래는 유능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환경이 그를 이렇게 만든 것 같습니다….”
 
  극정은 더 이상 주군을 욕할 수가 없어 입을 다물었다. 하나 부끄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후일 유선에게 물었다.
 
  “폐하…. 폐하께서는 왜 싸우지 않고 항복하셨습니까. 싸워서 진 다음에도 항복할 수 있는데…. 정말 후회됩니다.”
 
  “그런 소리 말게. 싸워도 이기지 못할 것 뻔한데 백성만 더 죽어나갈 뿐이지….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나.”
 
  그 속마음을 결코 알 수 없으나 감부인의 고운 마음씨는 유선에게는 왜곡된 형태로 계승된 것으로 보인다.
 
  追歡作樂笑顔開
  不念危亡半點衰
  快樂異鄕忘故國
  方知後主是庸才
 
  기뻐하는 얼굴에 웃음 피니
  망국의 슬픔은 보이지 않고
  이국에서 쾌락 누리니 고국은 잊었나
  이제 알겠구나 후주의 평범함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