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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백두산] 16세기 와서 국토 종산宗山으로 인식
- 백두대간도 뚜렷해져… 세계관·시대적 배경 그대로 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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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산은 수많은 고지도로 그려져 있다.
고지도에 표현된 산은 실제의 산이기도 하지만 역사 이야기가 담긴 산이고 선조들의 심상에 투영된 산이다. 산을 보는 다양한 시선과 의미가 담겨서 그림으로 재현된 지도인 것이다. 조선시대 지식인들은 명산기를 읽는 것으로 산행을 대신하기도 했고, 명산도를 걸어놓고 산행을 꿈꾸기도 했다. 고지도를 통해 산의 역사를 살펴보는 일은 선조들의 산에 대한 인식과 이해, 그리고 변천의 궤적을 더듬는 또 하나의 흥미로운 산행이 될 것이다. 연재하는 동안 독자들의 많은 관심과 질책을 기대해 본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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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도의 ‘함경도’
- 고지도는 옛 사람들이 공간을 축소해 문자와 부호, 색채로 평면도 상에 재현한 그림이다. 여기에는 당시의 공간적 지리정보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지리 인식과 세계관, 당시의 사회경제적 배경 등도 반영되어 있다.
국토의 형상을 인체에 비유하는 것도 그러한 예다. ‘서북피아양계만리일람지도’(18세기) 하단에는 백두산이 인체의 머리요, 백두대간이 척추요, 호남의 제주도와 영남의 대마도를 두 다리에 비유한 글이 있다. 이러한 인식은 조선시대에 국토를 이해하는 한 방식이었으며, 조선시대의 실학자들은 한반도를 사람에 비유해 설명하곤 했다.
일반적으로 우리 옛 지도는 세계지도, 전국지도, 도별지도, 군현지도, 관방도, 특수지도 등으로 나눌 수 있다. 표현 형식으로 필사본과 목판본으로 나뉘며, 필사본은 다시 회화식과 방안식으로 구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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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왼쪽) 중국도인<광여도>. 한반도 조선국의 가장 대표적인 산으로서 백두산이 강조되어 그려져 있다. / 18세기에 제작된 <여지도>는 백두산을 천산(天山)으로 인식하는 사고가 그대로 반영돼 있다. 서울대규장각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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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지도에서 산에 대한 그림은 매우 다채롭다. 산줄기 전체를 그린 지도가 있는가 하면, 방안의 스케일을 넣고 사실적으로 표현한 지도도 있고, 회화식으로 묘사해 한 폭의 산수화 같은 지도도 있다. 풍수 산도(山圖)와 같이 산줄기와 산의 형세를 그린 모습도 특징적이다.
우리 옛 지도 속에 표현된 산의 모습을 독해하는 일은 당시의 산 위치, 지형지세 등과 같은 객관적인 자연 형태뿐만 아니라 산에 표현된 지명, 관방시설 등의 역사적 지리정보도 파악할 수 있는 흥미로운 일이 된다. 더욱 중요한 것은 해당 시기의 산악 경관에 대한 생각과 시선을 알 수 있는 가시적인 자료라는 점이다.
산을 재현한 옛 지도에는 당시의 지정학적인 중요성과 사회경제적인 비중이 시대적으로 달리 반영되어 있다. 조선 초기에는 산이나 산줄기의 지도표현은 소략하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로 가면서 산과 산지가 지니는 지리적인 중요성과 경제적인 비중이 커지면서, 산과 산줄기에 대한 표현은 정밀해지고 정확해지는 변화가 일어난다. 이러한 현상은 산지의 국토공간적 중요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달라진 데 연유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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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 <해동팔도봉화산악지도>/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는 국토의 조종산으로서의 이미지가 뚜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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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2년 지도엔 백두산 표시 없어
옛 지도에서 백두산은 어떻게 표현했는지 살펴보자. 명칭을 보면, 백두, 백산, 태백산, 백두산, 장백산 등으로 다양하게 나타난다. 그중에서 백두산이라는 이름이 가장 많다. 태백산이란 이름은 지도 중 중국도에 나온다. 단군이 내려온 산으로 인식된 것이 배경이 되었다. 지도의 함경도 도엽에는 신단수로 이해되는 ‘천년단목(千年檀木)’이 그려지고 있어 주목된다(지도1). 장백산이라는 이름은 중국 지도에서 나타나는 명칭이다. 광여도, 중국도에는 장백산과 함께 한반도를 대표하는 백두산이 함께 표기됐다(지도2).
백두산 천지도 대택(大澤), 대지(大池), 지(池), 천상근(天上近)으로 다양하게 표기되어 있다. 지(池)라는 명칭은 이른 시기의 지도에 나타난다. 재미있는 것은 ‘천상근(天上近)’이라는 표현이다. 하늘 가까이 있다는 뜻으로, <관북지도> ‘갑산부’와 <전세보> ‘조선만주지도’에 표기되어 있다. <여지도>에서는 ‘대택’이라고 표기했고, 백두산이 마치 천상에 떠 있는 산처럼 묘사되고 있어, 천산(天山)으로 백두산을 생각하는 당시의 인식을 짐작할 수 있다(지도3).
백두산은 다양한 기법으로 표현되었다. 지도에 따라 여러 색깔의 백두산이 있지만 가장 많은 것은 역시 흰색이다. 흰머리산의 이미지가 표현된 것이다. 해동팔도봉화산악지도에는 우뚝 솟은 백두산의 흰색 모습이 신성하게 느껴진다(지도4). 형태를 봐도 지도작성자의 시선을 읽을 수 있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는 국토 조종산(祖宗山)으로서 상징이미지가 뚜렷하다. 대지(大池: 천지)와 함께 나라 산줄기의 으뜸 되는 위상이 중첩·집약되는 산줄기 형태로 강조되어 잘 표현되었다(지도5).
조선 후기에 와서야 백두산은 국토의 종산(宗山)이자 국가의 최고 명산으로서 확고한 지위를 얻는다. 이때부터 백두산은 사실적이고 구체적으로 표현된다. 1402년의 지도인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에는 백두산이 표현되지 않았다. 16세 중엽의 것으로 추정되는 혼일역대국도강리지도에 와서야 백두산을 국토의 조종산으로 표시하고 백두대간이 뚜렷해지기 시작한다.
백두산이 명실상부한 국토의 머리로 역할하게 된 것은 15세기에 영토로 확보되면서부터였다. 특히 1712년에 청나라가 백두산 남쪽에 정계비를 세우면서 백두산이 갖는 영토적 의의가 중요하게 인식되었고, 실학자들의 자주적 국토인식은 영토의 종주로서 백두산의 의미가 더욱 강조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래서 신경준은 백두산을 12명산의 하나로 지정했고, 정약용은 백두산을 동북아시아 여러 산들의 조종이라는 의미와 가치를 부여했다. 이러한 정치적, 사회적 배경 상황은 조선 후기의 고지도상에 고스란히 반영되어 나타났다.
필자 최원석 교수 1963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지리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 석사와 고려대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경상대 인문한국 교수로 지리산권문화연구를 하고 있다. 저서로 <사람의 산 우리 산의 인문학>(2014), <한국의 풍수와 비보>(2004) 등이 있다. 우리 산의 인문학적 전통을 계승하여 현대적으로 개척하는 일에 주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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