霞山斷想(하산단상) 안방문화
공중화장실에 들어가면 소변을 보는 한국 남자의 10중 8~9명은 ‘카-악’하며 가래를 올린다. 순간 옆의 사람은 구토증을 느낀다.
가래를 ‘카-악’하고 올리는 사람은 옆에 서있는 ‘남’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 것 같다.
<임바레싱. 메이와꾸 라는 말이 한국어에는 없는가?>
비좁은 전차나 버스의 좌석에서 다리를 꼬는 것은 남녀노소 불문이다. 꼬는데 그치지 않고 구두바닥이 옆 사람의 무릎에 닿을락 말락 한다. 심지어는 아예 신발을 벗고 냄새나는 발을 옆 사람 쪽으로 내밀며 꼬고 앉아 제 손으로 발을 비비고 어루만진다. 상을 찡그리지 않을 수 없다.
모두들 자기 집 안방으로 착각하는가 보다. 엘리베이터나 공중화장실에서는 목구멍이 좀 불편해도 제집 안방이 아닌이상 참아야 한다.
아무데서나 ‘카-악’ 소릴 내면 자신은 시원할지 모르나 옆 사람은 불쾌하고 구토증이 난다.
영어에는 embarrass 또는 embarrassing이라는 낱말이 있다.
남을 난처하게 만든다든가 남이 싫어하는 것을 억지로 강요할 때 남이 느끼는 상태를 뜻하는 것이다.
술 마시기 싫다는데 억지로 먹이려는 것은 embarrassing한 짓이다. 한국인은 곧잘 그렇게 남을 잘 괴롭힌다.
괴롭히는 사람은 즐거워 할지(실제로 남이 괴로워하는 것을 즐거워하는 한국인이 많다) 모르지만 괴롭힘을 당하는 사람은 죽을 지경이다.
일본말에는 메이와꾸(迷惑)라는 말이 있다. 역시 남에게 괴로움을 준다는 뜻이다. 남이 싫다는 행동을 굳이 하는 것은 메이와꾸다.
싫다는 술을 强勸(강권)하거나, 대다수 국민이 마다하는 촛불데모를 강행 하는 것,
노조원들이 싫증내는 파업을 굳이 하겠다는 강성 노조간부들의 행위 등은 모두다 메이와꾸다.
<안방의 法度는 있으나 대문 밖의 규범이 없다>
한국말엔 이에 딱 부러지게 맞는 낱말이 없다. 괴롭힌다든가 (남에게) 폐를 끼친다,
폐가 된다는 말은 있지만 임바레씽이나 메이와꾸 만큼 공중도덕성 메시지가 강하지 않다.
그만큼 한국인은 남에게 폐가 되는걸 별로 의식하고 조심하지 않는 성향이 있는 것은 아닐까.
음주문화, 교통문화, 예절문화가 다 그렇다.
내가 즐겁고 내가 편한 것만 생각하고 남이 즐거운지 남이 불편한지를 별로 생각하지 않는게 아닌가?
한국인의 인간관계를 律(율)하는 것은 아직도 三綱五倫(삼강오륜)이다.
君爲臣綱(군위신강) 즉 君臣(군신)관계,
父爲子綱(부위자강) 즉 父子(부자)관계,
夫爲婦綱(부위부강) 즉 夫婦(부부)관계 등 삼강과
父子有親(부자유친), 君臣有義(군신유의), 夫婦有別(부부유별), 長幼有序(장유유서), 朋友有信(붕우유신) 등 오륜이 그것이다.
삼강오륜은 이미 낡은 法度(법도)요 가정에서 별로 가르치지는 않아도 수백 년간의 한국인의 오랜 생활습속 속에 스며든 풍습이요 문화다.
따라서 아직도 대통령과 장관 사이는 옛 군위신강, 군신유의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부위자강이나 부자유친의 법도는 모든 가정에서 아직도 절대로 유효하다.
부부유별, 장유유서도 현재의 부부관계나 학교 또는 직장의 선. 후배관계로 다소 변형은 됐을지언정 의연 한국사회의 규범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그와 같은 관계에서 한발 벗어나면 지켜져 내려온 準則(준칙)이나 규범이 없다.
대통령과 각료 사이의 忠臣(충신)관계는 돈독해도 그 밖의 관계는 모래처럼 서걱서걱하고 드라이하며 無機的(무기적)인 관계가 돼버린다.
가정 내의 부자관계나 부부관계는 어느 집이나 대체로 지켜 내려오는 규범이나 준칙이 있다.
하지만 한발 대문 밖을 나서면서부터는 서로 지키고 준수하는 법도가 아무것도 없다.
대문 밖을 나서면 모두들, 서로가 적대관계처럼 서먹서먹하다. 서로 눈이 마주쳐도 미소 짓거나 目禮(목례)하는 버릇도 없다.
엘리베이터 안에서는 서로 어색하고 서먹서먹하기 짝이 없으며,
버스. 지하철을 탈 때나 운전대를 잡을 때 ‘나’ 아닌 ‘남’은 모두 ‘적’이 돼버린다.
영어로 굿모오닝, 일본어로 오하요오고자이마스와 같은 입에 붙은 인사말이 없다.
굿모오닝이나 오하요오고자이마스─하면 자연히 미소가 묻어 나온다.
미소를 머금을 수 있는 인사말이 없다 보니까 이웃끼리 눈이 마주쳐도 표정은 굳어질 수밖에 없으며,
때로는 사나워질 때도 없지 않다. 타인은 모두다 적인 것이다.
한국인은 각자가 각자에 대해 主敵(주적)개념을 갖고 있는 것 같다.
이웃집 아이가 우리 아이보다 성적이 훨씬 좋아도 敵對視(적대시)해야 되고, 외제차나 내차보다 좋은 차를 갖고 있어도
‘저놈은 누구에게 과시하나’하며 적대감을 갖게 마련이다.
<제 멋대로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안방문화>
한국인은 남에게 폐가 되는 건 상관치 않아도 남이 나보다 잘났거나 돈이 더 많거나 좋은 옷을 입었거나 더 좋은 차를 갖고 있거나...하는데 대해서는 지나치게 관심이 크다.
의 아들이 하버드에서 박사학위를 받아왔으면 축하하고 존경해야 하며, 미모가 나보다 나으면 칭찬해주고,
남의 자식이 공부를 잘하면 덕담을 해주며, 좋은 차를 가졌으면 치하해줄줄 알아야 한다.
탈때타 내릴때 먼저 타세요, 먼저 내리세요, 좁은 길에서 마주치면 (사람끼리 또는 차끼리) 비켜서주고,
먼저 인사하고(적당한 말이 없으면 미소라도), 집안의 어른이 아니라도, 남의 어른이라도 자리를 양보해주면...
한국인은 선진국 국민이며 OECD회원국으로 자부심을 가질만 하다.
그런데 한국인은 아직도 남과 남이 어울려 사는 공동체의식이 심히 박약하다.
한마디로 안방문화에 머믈러 있는 것이다. 보도위로 오토바이가 횡행하질 않나, 당당하게(?) 아무데나 주.정차를 하지 않나.
심지어는 버스 정류장 앞에 버젓이 차를 세워놓고 볼일을 보러가는 회사원, 가정주부, 젊은 여성들,
텅텅 빈 주차장이 가까이 있음에도 굳이 길가에 차를 세우는 얌채 족 등등...
한국인의 교통문화는 제멋대로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는 안방문화다.
<청소년이 보고 배울 데가 없다>
안방과 집안에서만 통하는 삼강오륜에 대체될 규범을 가르치는 데가 없다. 가르칠만한 사람도 없다.
KBS가 자화자찬하는 ‘국민의 방송’ TV에서는 허구한날 허리와 궁뎅이를 뒤흔드는 춤이나 추고, 드라마는 불륜 아니면 가정불화가 주제다.
영화란 영화는 맨 날 상스러운 욕지거리와 두들겨 부수는 폭력 아니면 적나라한 섹스장면 아니면 반체제적인 영상물 천지다.
청소년들이 무얼 보고 배우겠나?
비교적 점잖다는 신문에서도 어느 날 1면 머리기사에 여고생이 엄마더러 “엄마도 아빠한테 페라치오 해?
”하는 저속한 포르노 적 성 묘사를 한 적이 있다.
학교에서는 박정희시대에 만들었다고 하여 훌륭한 교육헌장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대신 친북좌익 전교조가
소속국가를 부정하는 교육을 하고 있으니 한국 애들은 국적 없는 정신적 迷兒(미아)가 될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해결책은 없는가? 있다.
정부가 철저한 法治(법치)를 勵行(여행)하면 되는 것이다. 도로교통법을 예로 보자.
도로교통법 제28.29조는 停車(정차) 및 주차의 금지와 주차금지 장소를 규정하고 있다.
예컨대 교차로. 횡단보도 또는 건널목에 차를 주.정차 못하도록(1항)되어 있다.
도시 도로교통의 이 기본질서가 ‘국제도시’ 서울에서 잘 지켜지지 않고 있다.
말로만 ‘기초질서를 지키자’고 할 것이 아니라 경찰등 공권력은 그 위반자를 가차 없이 잡아 처벌해야 하는 것이다.
이 가차 없는 법적용이 한국에서는 느슨하기 짝이 없게 지켜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집시법)도 마찬가지다.
집시법 제14조(주최자의 준수사항) 4항 ①에서는 총포. 폭발물. 刀劍(도검). 철봉. 곤봉. 石塊(석괴=돌덩어리) 기타 타인의 생명. 신체에 危害(위해)를 가할 수 있는 기구를 휴대 또는 사용하거나 휴대 또는 사용하게 하는 행위는 이를 금지하고 있다.
또 4항 ②에서는 폭행 협박. 손괴 방화 등으로 질서를 문란케 하는 행위도 하면 안 되게 되어 있다.
<멀리 갈 것 없다 집시법. 교통법부터 엄정히 지키라>
그런데 지난 6월 10일 피크를 이룬 서울 광화문 일대에서의 시위는 집시법 14조 전 항목을 명백히 위반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와대당국은 이 폭력시위의 주최자인 ‘...국민회의’와 대화를 시도한다고 해서 국민을 분노케 했다.
이명박 정부는 뻔히 보이는 ‘해결책’은 저 멀리 밀어버리고 스스로 법질서를 위반하는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강도들에게 집을 털린 집주인이 강도들을 의법 처단 하지 않고 그들과 협상하자고 하는 거나 다를 바가 없다.
그래가지고는 令(영)이 설수 없는 것이다.
집안에서는 아직도 삼강오륜적인 질서(아마도 폭력 데모자들도 집에서는 이 질서를 지킬것)속에 살면서,
한발 집밖으로 나서는 순간부터 非禮(비례), 비도덕적 행위를 서슴지 않는 한국인의 안방문화는 속히 개혁되어야 한다.
어떤 이는 의식개혁을 주창할 것이고 어떤 이는 제도의 개혁을 선행해야 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한국인의 비합리적 행동 비논리적 사고를 바로잡는 捷徑(첩경)은 뭐니 뭐니 해도 법질서의 확립이다.
한국인의 안방문화는 農耕(농경)사회에서는 통했다.
하지만 시대는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 산업사회에서 정보화 사회로 빠르고 숨 가쁘게 변하고 있다.
안방에서만 통하던 삼강오륜 적 규범과 준칙으로는 인구 5천만의 거대한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의 법질서를 지킬 수 없다.
이명박 정부는 법질서 확립의 방법을 멀리서 찾지 말라.
진리는 가까운데 있다는 듯이 법질서 확립의 첫걸음은 도로교통 질서 확립부터 시작하라. 그리고 폭력시위를 근절시키라.
그러면 외국인 관광객도 안심하고 거리를 활보할 수 있어 대폭 증가할 것이다.
동시에 금년 들어 20조원 이상이나 빠져 나갔다는 외국인의 주식 賣渡(매도)도 그 이상의 買入(매입)으로 돌아설 것이다.
<광화문은 폭력 시위자들의 안방 아니다>
‘생산에 타격을 주겠다.’는 민노총의 반국가적 파업행위도 법으로 단속하라.
민노총의 일련의 정치파업은 노동조합법 제12조와 12조2에 위반되며 위반자는 처벌받게 되어있다.
이명박 정부는 무엇이 두려워 엄연히 있는 법적용조차 못하는지 알수가 없다.
一言以蔽之(일언이폐지)하고 이명박 정부는 국민으로부터,
최소한 그의 지지기반인 보수. 반공세력으로부터 信義(신의)와 권위를 회복해야 한다.
그러자면 우선 도로교통법, 집시법, 노동조합 법 만이라도 100% 철저히 지켜보라.
그러면 한국사회는 명랑을 되찾고 기업의 생산 활동은 활발해질 것이며 고성장. 지속적 번영은 기약될 것이다.
광화문은 폭력시위자들의 안방이 아님을 깨닫게 해주는 일부터 시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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