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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대발해」작가의 東北工程 관찰기

醉月 2008. 10. 5. 00:28
 소설「대발해」작가의 東北工程 관찰기 
 일본의 獨島침탈 기도에는 나라가 들썩… 중국의 역사 도둑질에 왜 이리 관대할까?
 
중국, 10여 년 전 발해 도읍지 東牟山
황실묘역·上京龍泉府 유적 봉쇄


金洪信 소설가
1947년 충남 공주 출생. 건국大 국문과 졸업. 同 대학원 박사. 1975년 소설 「물살」로 등단. 월간 「새빛」편집장, 도서출판 평민사 주간, 건국大 강사, 경실련 상임집행위원, 제15·16대 국회의원, 민주당 대변인, 한나라당 홍보위원장 역임. 작품 「인간시장」, 「청춘공화국」, 「평역 삼국지」, 「대발해」 등.
著者無 저자없음
한 조선족 在野사학자의 경고
<발해의 첫 도읍이었던 동모산 인근 경박호(홀한해)에서.>

「竹(죽)의 장막」이라는 중국을 처음 방문한 것은 1986년 초가을이었다. 소설가의 첫 방문이기에 안기부의 허가과정이 복잡했고, 「중국 방문을 발설하지 않겠다」는 서약서까지 썼다.
 
  중국에서 우연찮게 한국말을 유창하게 하는 조선족 在野(재야) 사학자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머잖아 중국이 고구려와 발해 역사를 중국 역사로 규정하고 북한을 屬邦(속방)으로 삼기 위해 학자들을 동원하여 역사 왜곡을 강행할 것』이라고 했다.
 
  나는 터무니없는 얘기라고 생각했다. 믿을 수도 없었다. 중국에 살면서 나래를 펴보지 못하는 在野 사학자의 뼈에 사무친 國粹主義的(국수주의적) 발상이거나 지나친 민족주의쯤으로 치부했다.
 
  그러나 그의 달변이 자꾸 내 가슴을 휘젓기 시작했다. 헛소리가 아니면 어쩌지 하는 근심이 내 가슴속에 기묘한 씨앗 한 알을 떨어뜨렸다.
 
 
  중국의 東北工程 강행
 

상경성 궁궐터의 주춧돌을 살펴보는 작가. 기둥의 크기가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다.

  韓·中 국교수립 이후인 1991년 여름에 고구려 역사기행을 하면서 장엄한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를 중국이 의도적으로 훼손하는 걸 알게 되었다. 고구려 도읍지였던 국내성의 성곽이 아파트의 경계석으로 변하고 성벽의 돌이 주택의 울타리가 되거나 빨래판이 되는 걸 보면서 견디기 어려운 분노를 느꼈다.
 
  장군총 한쪽 벽이 무너지는 걸 방치했고 광개토대왕비를 「호태왕비」라 부르는 것도 견디기 어려웠다. 백암성 성벽이 무너져 흉물이 되고, 고구려 성의 특징인 해자, 옹성, 치, 망대가 무너진 졸본성을 보면서 가슴이 시렸다.
 
  결국 중국은 東北工程(동북공정)을 강행했다. 「현재의 중국 영토 안에 있는 과거 역사는 모두 중국 역사」라는 억지 주장을 펼치며 고구려와 발해 역사를 중국 역사로 규정했다. 중국은 예부터 「모든 역사의 중심은 중국」이라는 中華思想(중화사상)과 「중국은 위대하고 다른 민족은 오랑캐」라는 華夷史觀(화이사관)으로 남의 역사를 재단하는 못된 습벽을 가지고 있었다.
 
  이때 法輪(법륜) 스님이 당시 국회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던 내게 이렇게 조언했다
 
  『우리가 버린 발해 역사를 우리 민족사에 남기는 게 국회의원 열 번하는 것보다 낫다. 그래서 10년, 30년 뒤의 대한민국을 예견하는 지혜를 얻으라』
 
  나는 거기서 자극을 받고 발해의 흔적을 찾아 나섰다.
 
  발해 역사를 추적하면서 나는 우리 스스로 발해를 버렸다는 걸 알게 되었다. 발해 자체 기록은 제3대 文皇帝 大欽茂(문황제 대흠무)의 둘째 공주 貞惠(정혜), 넷째 공주 貞孝(정효)의 碑文(비문) 1500여 자밖에 남은 게 없었다. 그것도 이름, 나이, 묻힌 곳 정도만 다르고 두 비문의 글자가 똑같다.
 
  비문에서 역사적 고증이 될 만한 것이라곤 황제국가였고, 불교를 숭상했으며, 여자 스승이 있고, 황실묘역의 지명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중국을 오가며 「만약 북한이 갑자기 붕괴된다면 북한이 중국 영토가 될지 모른다. 무서운 속도로 경제발전을 거듭하는 중국의 거대한 블랙홀에 한국·일본·싱가포르·대만 등 아시아 일대가 빨려 들어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당시 정계 지도자들에게 「對중국 대책기구를 만들어 중국을 견제하고 중국 블랙홀에 대한 종합대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요청했다. 그는 검토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얼마 뒤에 중국 방문을 하고 돌아와 나를 불렀다.
 
  『金의원이 중국에 대해 너무 예민한 것 같소. 내가 이번에 중국을 둘러보니 별거 아닙디다. 걱정하지 마시오』
 
  나는 크게 실망하여 현사로 이름 높은 선배 국회의원을 찾아가 그 지도자의 국가관과 중국을 가볍게 여기는 태도에 대해 울분을 터뜨렸다.
 
  『지도자의 소견이 저 정도면 나라의 앞날이 걱정입니다. 나는 비판자로 정치생명을 버리겠습니다』
 
  나는 이때부터 중국의 야욕을 파헤치고 널리 알려 잃어버린 우리 민족사를 되찾자는 결심을 했다.
 
  그 무렵 「고구려 역사를 중국의 변방사로 규정하기 위해서는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 역사를 중국 역사로 편입하는 게 유리하다」고 판단한 중국은 발해를 말갈의 후예로 조작하기 시작했다. 훗날 말갈이 중국에 귀속했으니 말갈의 후예인 발해는 중국의 역사라고 우겼던 것이다.
 
 
  중국의 발해 유적지 봉쇄
 
  발해의 개국황제 大祚榮(대조영)이 稱帝建元(칭제건원)하고 도읍한 東牟山(동모산)은 10여 년 전부터 봉쇄됐다. 황실묘역으로 추정되는 福洞(복동·옛 染谷)과 六頂山(육정산·옛 牛頂山)도 봉쇄했다. 최근에는 발해의 본거지라 할 수 있는 上京龍泉府(상경용천부)도 남쪽 성곽 이외의 유적을 봉쇄해 버렸다.
 
  또한 발해 교통로나 주요 접근로를 연구하기 위해 꼭 살펴야 할 驛站(역참)들은 쓰레기더미로 변했거나 밭으로 변해서 도저히 발해의 중요한 역사 현장이라고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중국이 은밀히 발굴하고 있는 발해의 유물과 사료를 공개하지 않는 것은 역사왜곡의 치부가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일 것이다. 떳떳이 공개하여 역사논쟁을 통해 진실을 밝혀야 한다. 나는 언제든지 기꺼이 청정한 학자들과 함께 역사논쟁에 뛰어들고 싶다.
 
  동모산 밀입 작전은 은밀하게 진행되었다. 휴대하기 간편한 디지털카메라를 바지 주머니에 감춘 채 발해의 흔적을 좇기 시작했다. 구속을 각오하고 역사의 궤적을 추적하기로 했다.
 
  중국인처럼 보이기 위해 허름한 차림에 중국 빵을 베어 먹으며 감시초소를 지났다. 대절한 택시를 멀찍이 숨겨둔 채 知人(지인)의 도움을 받아 동모산을 샅샅이 뒤졌다.
 
  동문을 거쳐 샘터, 교련장터, 군막터를 두루 살피고 서문에 올라 옹성의 생김새를 살폈다. 고구려 성곽의 특징이 고스란히 스며 있었다. 중국 당국이 발굴하고 아무렇게나 팽개친 유적을 보면서 울분이 솟구쳤다. 발해 역사를 중국 역사라고 억지소리를 하면서 어째서 팽개쳐 두는 것일까?
 
  무연한 벌에 北으로 목단강이 흐르고 사방에 평야를 거느린 동모산은 敵(적)을 감시하기에 좋고, 곡식을 키울 물이 풍족하며 험산이 아니어서 웅거하기 좋은 터전이었다. 7부 능선을 따라 토성을 쌓고 정상에 망루를 지어 사방을 호령할 수 있는 지세였다.
 
  나는 누차에 걸쳐 발해 유적지를 찾아다니며 발해의 흔적을 수첩과 사진과 혼 속에 담았다.
 
 
  발해 유물들을 얻다
 
블라디보스토크 박물관의 발해 유물들.

  1300여 년 전의 발해 흔적인 삼베자국이 선명한 기와와 질그릇 파편을 여행가방에 챙겼다. 주변에서 극구 말렸다. 공항에서 발각되는 순간 구속될 거라며 사진과 마음속에 담아 가면 안 되겠느냐고 했다.
 
  『하늘과 조상들께서 도와주실 겁니다』
 
  지금 내 책상 앞에 있는 발해의 유물들은 그렇게 해서 소장하게 되었다.
 
  중국 史料(사료)인 「新唐書(신당서)」에 따르면, 발해의 강역은 사방 5000리(당시에는 10리가 5.6km였음)라고 기록되어 있다. 중국의 東北3省은 물론이고 러시아의 연해주 일대가 발해 땅이었다.
 
  그래서 知人들의 도움을 받아 러시아 지역의 발해 유적을 뒤지기 시작했다. 방치되어 있기는 중국과 다를 게 없었다. 그곳에서도 유물 일부를 챙겨 가지고 왔다. 특히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소재 극동대학교 한국학대학의 웰홀략 교수는 스스로 발해 유적지를 안내해 주었다. 그는 자기 대학 박물관에 소장한 발해 유물의 가치를 크게 인정해 주었다. 나는 웰홀략 교수에게 진지하게 부탁했다.
 
  『러시아에 소장된 발해 유물의 주인은 본래 한국이다. 극동대학에 소장된 유물 가운데 발해의 흔적이 또렷한 것을 기증해 주기 바란다. 내가 발해 역사소설을 집필 중인데 항상 책상머리에 두고 우리 선조들의 웅혼한 기개를 기억하고 싶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개인 소장품이 아니고 대학 박물관 소유이지만 작가의 열정이 고마워 대학 측과 상의하겠다』고 약속했다.
 
  발해 시절 블라디보스토크 근처에서 일본과 신라로 가는 교역선과 사신이 왕래했기에 나는 웰홀략 교수에게 부탁하여 배 한 척을 빌려 사신선이 오갔을 만한 바다를 나갔다. 선장에게 직접 배를 조정하게 해달라고 요청해서 스스로 배를 몰며 옛 우리 선조들의 활발한 해상교류를 추적해 보았다.
 
  1년 만에 러시아 극동대학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던 발해 유물 20점을 기증받았다. 나 대신 유물을 받아 가지고 오던 知人(지인)은 블라디보스토크 공항 검색대에서 가방을 샅샅이 수색당하는 어려움을 겪었다.
 
  한두 점도 아닌 20점이나 되는데다가 박물관의 고유번호가 찍혀 있는 각양각색의 질그릇과 기와 파편을 예사롭지 않게 검색했던 것이다. 러시아의 보물을 밀반출하는 것으로 오해한 공항 검색은 에어캡으로 꼼꼼하게 싼 유물들을 모두 풀어 확인한 뒤에야 탑승시켰다.
 
 
  미미한 발해의 흔적
 
  발해는 15대 황제, 229년의 역사와 당시 최강국이었던 唐(당)나라를 침공할 정도로 강성한 나라였는데 그 흔적이 너무 적어서 많은 학자들이 발해의 존재를 의심하기까지 했다.
 
  일본의 어떤 학자는 발해의 흔적이 너무 적은 것은 백두산의 화산 폭발로 멸망했기 때문이라는 가설을 제시하기도 했다. 나도 취재를 하면서 발해 멸망의 수수께끼를 찾지 못해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해답은 러시아 취재과정에서 얻을 수 있었다. 옛날에 우리 조상들이 살았던 지역을 취재하며 그 지역에서 오래 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옛날 얘기를 현지 학자에게서 들었다.
 
  『예부터 전해 내려오는 얘기인데,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킨 뒤에 남자는 다 죽이고 여자는 다 나누어 주었으며, 발해 유적과 國書庫(국서고)는 모두 태워 없앴다고 합니다.
 
  고구려가 멸망하고 30년 뒤에 발해가 창업되어 강성한 나라를 만들었듯 발해인들이 굴종하지 않을 것을 미리 내다본 것입니다』
 
  그랬다. 당시 고구려를 침공한 唐나라는 고구려의 강인한 정신을 두려워한 나머지 무려 3만8300호(약 20만 명)를 唐나라로 압송했다. 당시 고구려 인구를 대략 350만 명으로 추산했는데, 20만 명을 끌고 갔다면 唐나라가 얼마나 고구려의 기상을 두려워했는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지금 대한민국 인구 가운데 20만 명을 압송한다고 가정해 보아도 얼마나 잔혹한 것인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발해는 稱帝建元한 독립제국
 
발해 장수 장문휴가 점령했던 산둥반도의 등주성.

  중국은 唐나라의 고구려 침공을 통일전쟁이라고 우긴다. 또한 발해를 唐나라의 변방이라고 억지를 부린다. 얼마나 허구인지를 그들 스스로 기록한 史書에서 밝혀 놓았다. 발해는 唐나라의 속국이 아니라 당당한 제국이었다.
 
  첫째, 서기 732년에 제2대 황제 대무예가 직접 군사를 이끌고 馬都山(마도산: 지금의 만리장성 근처)까지 침공하고 張文休(장문휴) 장군이 登州(등주: 지금의 산둥반도)를 공격하여 자사 韋俊(위준)을 죽였다.
 
  그때 唐 玄宗(현종) 李隆基(이융기)는 신라 성덕왕 金興光(김흥광)에게 원군을 요청했다. 이에 신라에서 김유신의 손자 金允中(김윤중)·金允文(김윤문)이 군사를 이끌고 발해를 공격했지만 패퇴했다. 3년 뒤인 735년에 唐 현종은 신라의 공을 기려 浿水(패수·대동강) 이남 땅을 신라에 주었다.
 
  만약 발해와 신라가 唐나라의 속방이었다면 어찌 땅을 떼어 줄 수 있었겠는가.
 
  둘째, 발해에는 황제국가에서만 존재하는 三師三公(3사3공) 제도가 있어 太師(태사), 太傅(태부), 太保(태보), 太尉(태위), 司徒(사도), 司公(사공)의 別官(별관)을 두었다.
 
  셋째, 唐나라는 외국의 人材(인재)를 초빙하기 위해 외국인에게만 시행하던 賓貢科(빈공과)라는 과거제도를 두었는데, 신라의 최치원을 비롯하여 발해의 烏炤度(오소도), 烏光贊(오광찬), 高元固(고원고) 등이 과거에 급제한 내역이 중국사서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넷째, 3대 황제 대흠무의 둘째 공주 정혜, 넷째 공주 정효의 비문에 따르면 발해는 皇上(황상)을 칭했다. 唐나라 기록에도 「발해는 사사로이 황제를 칭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다섯째, 발해는 제국에서 사용했던 독자적인 年號(연호)와 詔書(조서)를 사용했으니 중국의 변방이 아니라 당당히 칭제건원한 독립국가였다.
 
唐태종의 침략시 격전장이었던 백암성.

 
  중국의 역사 왜곡
 
  중국에서는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발해의 강역도를 드넓게 그렸지만, 근자에는 발해의 지도를 아주 작게 그려 관광지에 내걸었고 책자에도 협소하게 그려 넣었다. 唐나라의 지방정권이라고 주장하면서 얼마나 염치가 없었으면 지도까지 조작하는지 그 부끄러운 역사왜곡의 물증을 보는 듯했다.
 
  한국인이 많이 찾는 지안(集安) 박물관의 머리말(前言)을 살펴보면 중국의 역사 왜곡의 본질을 알 수 있다.
 
  『고구려는 동북아 지구 고대문명 발전에 대해 중대한 영향을 남긴 중국 동북 소수민족 및 지방정권의 하나이다.
 
  기원전 37년 고구려는 정권을 건립했다. 기원 3년에는 국내성으로 천도했다. 기원 427년에 평양으로 천도했다. 기원 668년 唐나라에 의해 멸망되었다. 고구려는 존속한 기간 내에 독특하고도 특이하여 매력 있는 고구려 문화를 창조하였다. 이는 동북아 문명사상에 있어서 휘황한 偏長(편장)이다.
 
  중국 集安지구에 남겨 놓은 고구려 유적은 그 무엇도 대체할 수 없는 見證(견증)이다. 고구려는 세상에 둘도 없는 역사문화 가치를 지니고 있다』
 
  고구려가 唐나라의 지방정권이 아니라는 사실은 천하가 다 아는데 이런 역사 도둑질을 서슴없이 자행하고 있다. 하물며 역사적 물증이 턱없이 모자란 발해 역사를 왜곡하는 것은 저들의 계산된 간계가 분명하다.
 
  만약 지금 북한이 붕괴한다면 북한 땅은 과연 어느 나라 땅이 될까? 東北工程을 강행하는 중국의 야욕은 바로 북한을 속방으로 삼으려는 데 있음을 알 수 있다.
 
  2008년 北京올림픽이 성공한 뒤에 중국의 東北工程은 본격적으로 진행될 것이다. 연변 조선족 자치주를 해체할 것이고, 고구려와 발해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편입하며 고구려와 발해 유적지를 중국의 문화유산으로 등재할 것이다. 그리고 백제와 신라도 중국의 소수민족과 지방정권으로 왜곡할 것이다.
 
  대조영의 아우 大野勃(대야발)이 727년에 편찬한 「檀奇古史(단기고사)」 서문에 『唐나라 장군 蘇定方(소정방)과 薛仁貴(설인귀)를 몹시 원망하는 까닭은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킬 때에 國書庫를 부수고 「단기고사」를 비롯한 고구려·백제사를 전부 불태워 버렸기 때문이다』라고 밝혔다.
 
동경성 유적의 비석 받침돌을 살펴보는 작가.

 
  國東大穴에서 祭를 올리다
 
동모산 인근 발해 황족들의 무덤(삼릉).

  작년 여름에는 아흐레 동안 4300km를 강행하는 역사기행을 했다. 새벽 3시 30분에 일어나 밤 12시가 넘어서야 잠자리에 드는 강행군이었다. 나는 너무 오랫동안 책상 앞에 앉아 햇빛을 보지 않고 운동을 하지 않은 탓에 요로결석을 앓아 병원에서 수술을 하고 퇴원한 지 엿새 만에 역사기행을 하게 되었다.
 
  첫날 백암산성을 거쳐 졸본성과 환도산성을 견학할 때까지만 해도 겨우 견디었지만 끝내 고구려 임금들이 하늘과 선조에게 祭(제)를 올렸던 國東大穴(국동대혈) 通天洞(통천동)에서 제주가 되어 환인·환웅·단군께 제사를 올리고, 발해의 시조 대조영에게 「김홍신의 대발해」 집필을 고한 뒤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동행했던 知人들이 병원에 입원수속을 했고, 일행들이 역사기행 중단을 권유할 정도였다. 나는 한여름인데도 겨울옷과 담요를 뒤집어쓴 채 몸을 떨며 무너지는 장군총과 폐허가 되어 가는 국내성, 관마산성을 돌아보았다.
 
  이튿날 새벽에 백두산을 향하는 버스 속에서 오늘까지만 버티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백두산 정상에서 감자와 옥수수로 요기를 하고 천신만고 끝에 천지에 올랐다. 천지에 발을 담그고 내려오면서, 나는 신기한 경험을 했다. 몸이 아주 가벼워진 것이다. 일행들이 걱정할 정도로 몸을 가누지 못하던 내가 가볍게 걷고 일행과 어울릴 정도로 몸이 좋아진 것이다.
 
  주변에서는 통천동에서 제사 올리고 백두산 상봉과 천지에 올라 선조들의 발자취를 더듬은 뜻을 하늘과 선조들께서 갸륵하게 여겨 응답한 것으로 「대발해」가 출간되면 스테디셀러가 될 조짐이라고 격려해 주었다.
 
  이때부터 하루에 두세 시간씩 자면서 청산리 전투터, 중경현덕부, 용정, 일송정, 고구려의 책성, 도문, 발해진, 상경용천부, 경박호, 24개석, 동모산 등을 탈 없이 답사했다.
 
 
  중국의 역사 도적질에는 왜 관대한가?
 
  나는 소설 「대발해」를 쓰면서 여러 해 동안 500여 권의 자료를 모았다. 꼼꼼하게 읽고 정리하면서 발해의 역사가 처참하게 지워졌다는 것을 실감했다. 대부분 중국 측 사료와 자료인데, 중국은 발해 역사를 처음부터 끝까지 왜곡했거나 편파적으로 기술했다.
 
  예를 들면 중국이 외국에 보낸 것은 모두 「膳物(선물)」이라 기록하고, 받은 것은 모두 「朝貢(조공)」이라고 기록했다.
 
  「오랑캐 이(夷)」 자는 본래 「君子(군자), 뿌리, 겨레」를 뜻했으나 중국이 「오랑캐」로 바꾸어 불렀다는 걸 알게 되었다. 더욱 분노가 들끓는 것은 그런 중국의 역사기술을 비판 없이 正史로 받아들인 우리의 역사기술이었다.
 
  우리 학자들이 나라와 나라 사이에 주고받는 國書의 「할 위(爲)」 자를 우리가 보낸 것은 「하옵소서」로, 우리가 받은 것을 「하라」로 변역했으니 어찌 통탄하지 않을 수 있으랴. 또한 무역로인 唐道(당도)를 「朝貢道(조공도)」라고 표기하는 비굴한 사대주의를 어찌 비판하지 않겠는가.
 
  일본이 독도를 일본 영토라고 왜곡할 때는 나라가 흔들릴 만큼 강하게 비판하면서 중국의 역사 도적질에는 왜 이처럼 관대할까?
 
  일본은 독도를 넘보지만, 중국은 북한은 물론 한반도 전체를 넘보고 있다. 그런데도 중국의 야욕에 침묵하는 것은 비겁한 사대주의요, 부끄러운 역사인식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