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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멋대로 만든「親日인명사전」

醉月 2008. 10. 5. 00:02
  [時論] 제멋대로 만든「親日인명사전」 親日派는「삶의 무게중심을 親日행위에 둔 사람」으로 한정해야
親日인명사전 등재예정자 4776명
<포승에 묶여 특별재판소 법정으로 들어서는 친일파들.>

민족문제연구소와 親日(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이하 편찬委)가 지난 4월 29일 공개한 「親日인명사전」 등재 예정자 4776명은 그 인원수나 면면이 매우 놀랍다. 國歌(국가)인 「愛國歌(애국가)」의 작곡가, 制憲(제헌)헌법의 기초자, 경제개발에 시동을 건 대통령 등 대한민국의 상징 인물들이 여럿 들어 있다.
 
  필자는 사전 편찬자들(이하 편찬委)이 日帝下(일제하) 한국인의 親日행위를 조사한 것에 대해서 시비할 생각은 없다. 그간 기울인 노고에 경의를 표하며, 이번에 쌓은 방대한 자료를 토대로 앞으로 많은 연구 결과를 내기 기대한다. 하지만 편찬委가 세상에 곧 내놓을 결과가 너무나 놀라운 것이기에, 이 親日청산작업의 실상이 무엇인지 논하려 한다.
 
  건국 직후의 反(반)민족행위자 처벌은 龍頭蛇尾(용두사미)가 되었다. 1948년 9월 제헌국회가 反민족행위처벌법(이하 반민법)을 제정하고 10월 反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이하 반민특위)가 구성되어 反민족행위자 처벌 작업을 시작했다. 취급된 反민족행위자 688명 중 293명이 기소되고 79명이 판결을 받았다. 10명만 實刑(실형)을 선고받았고, 그나마 곧 풀려났다. 이는 李承晩(이승만) 정권의 개입 때문이라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이 문제로 오늘까지 논란이 거듭됐다. 예전의 처벌 대상자들은 모두 사망했고, 시간이 흘렀기에, 역사 연구자들이 관련 자료를 수집해 親日행위의 실상을 밝히는 게 할 수 있는 전부다. 편찬委의 작업은 이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편찬委는 「한일합방 조약 체결 등 賣國(매국) 행위에 가담하거나 독립운동을 직접 탄압한 것과 같은 反민족행위와, 식민통치기구의 일원으로서 식민지배의 하수인이 되거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을 美化(미화)·선전한 附日(부일)협력 행위」를 「親日행위」로 정의한다. 이 정의는 반민법이 겨냥했던 反민족행위보다 훨씬 더 포괄적이다.
 
 
  군수 이상이면 무조건 친일파?
 
  편찬委는 이 親日행위를 자발적이고 적극적으로 수차례 반복한 자를 「親日인물」로 선정했다. 편찬委는 『사전에는 인물의 功過(공과)를 고루 소개한다』고 했지만, 한 인물이 이 사전에 오르면 곧 친일파로 인지되므로, 이는 친일파 낙인이라 할 수 있다. 이 낙인은 치명적이다. 우리 사회에서 친일파는 一身一族(일신일족)의 부귀영화를 위해 민족을 배반해 큰 해악을 끼친 「公共(공공)의 敵(적)」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선정된 親日인물 수는 반민특위에서 취급한 反민족행위자 수의 7배에 달한다. 반민법이 「악질적 反민족행위자」로 처벌 대상을 국한한 반면, 편찬委는 親日행위를 훨씬 더 폭넓게 정하고 그것이 어느 정도 이상 있으면 친일파로 판정했기 때문이다.
 
  일례로, 반민법은 高等官(고등관) 중 상급관리, 즉 勅任官(칙임관) 이상을 처벌 대상으로 한 반면, 편찬委는 고등관 전부를 친일파로 선정했다.
 
  당시 한국인은 고등문관시험을 거쳐 郡守(군수)가 되는 게 전형적인 출세 코스였다. 편찬委는 이 시험 합격자를 모두 친일파에 넣었다. 군수직 이상은 한국인이 가면 안 된다고 본 것이다.
 
  당시 한국인들은 한국인을 관리로 더 많이 채용하고 고위직에 임명하길 원했다. 그게 민족차별을 다소나마 줄이는 길이니까. 하지만 편찬委는 한국인이 일본인 군수의 통치를 받았어야 한다고 보는 것 같다.
 
 
  근대문명의 해체로 귀결
 

1998년 10월 민족문제연구소 회원들이 이화女大 앞에서 이화女大의「김활란賞」제정에 반대하는 집회를 갖고 있다. 김활란이 친일파란 이유 때문이다.

  일단, 금번 친일파 선정이 적절하다고 하자. 명부에 오른 사람들이 反민족행위나 附日협력행위로 우리 민족에게 큰 피해를 끼쳤고, 그래서 친일파라 부르는 게 옳다고 하자. 이는 엄청난 파장을 불러온다.
 
  친일파의 업적을 칭송해서는 안 될 것이니 그중 敍勳者(서훈자)가 있다면 서훈을 박탈하고, 애국가도 바꾸며, 학교 교과서에는 그들의 글을 싣지 않도록 하고, 기념 동상도 철거하고, 그들을 기리는 각종 문화행사도 폐지해야 한다. 역사서는 그들의 죄악을 엄정히 문책해야 한다. 국민들은 가장 오래 대통령 노릇을 한 인물이 친일파라는 사실과 이처럼 친일파가 득세한 나라에 태어난 것을 부끄러워해야 한다. 그 파장은 끝이 없다.
 
  崔南善(최남선)·李光洙(이광수)·金東仁(김동인)·徐廷柱(서정주) 등을 빼면 근대문학에 무엇이 남는가. 근대경제사에서 경성방직, 평양 메리야스공업을 빼면, 근대교육에서 白樂濬(백낙준)·金活蘭(김활란)·金性洙(김성수) 등을 빼면 무엇이 남는가.
 
  결국 남는 것은 훌륭한 몇 분의 독립운동가와 못 배우고 가난해서 親日의 기회조차 없던 노동자, 농민뿐이다. 이는 한국 근대문명의 해체, 그를 토대로 한 대한민국의 해체가 된다.
 
  친일파 선정은 타당하지 않다. 기준이 恣意的(자의적)이기 때문이다. 편찬委는 관료·군인과 같은 「附日협력자」 중 하급자는 제외하고 상급자로 한정했다. 또 지식인·문화예술인에게는 엄하게 책임을 추궁했다. 그 결과, 친일파라 해야 할 인물이 명단에 없고, 또 친일파라 하기 어려운 인물이 다수 들었다.
 
  우선, 친일파라 하기 어려운 인물이 포함된 점부터 보자. 친일파란 「삶의 무게중심을 親日행위에 둔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명부에는 친일파라 보기 어려운 인물들이 많다. 필자가 경제사를 전공한 관계상 기업가를 예로 들겠다.
 
 
  日帝下 기업가들의 경우
 
삼공양말 창업주 손창윤.

  명부 경제편의 孫昌潤(손창윤)이란 인물이다. 평양은 메리야스(양말)공업의 중심지였는데, 그는 최대 업체인 삼공양말의 공장주였다. 1891년 평안남도 용강군 빈농에서 태어난 그는 14세부터 4년간 점원생활을 하다가 독립해 2년간 잡화상을 했다. 20세에 양말기 1대를 집안에 들여놓고 양말직조를 시작했다.
 
  그후 30년 가까이 공장을 키워 1930년대 말에는 두 개의 공장에 종업원 400여 명을 고용한 전국 제1의 양말공업자가 되었다. 온가족이 밤낮 가리지 않고 일하고, 자신은 몇 차례나 일본 공장에 직공으로 들어가 제조법과 염색법을 배우는 등 여러모로 애쓴 결과였다.
 
  그는 1940년대 초 공장을 출연해 기본금 210만 엔의 재단법인을 조직하고 平安工業學校(평안공업학교)를 세웠다. 이는 최초의 사립 중등공업학교로서 기계과·응용화학과의 두 과에서 매년 90명의 한국인 학생을 모집했다. 1943년에 경상비 10만 엔과 학교 시설 건립비로 임시비 83만 엔이 들었는데, 임시비는 당연히 그가 부담했다. 또 집 없는 직공을 위한 주택단지로 60호 규모의 三共村(삼공촌)을 세웠다.
 
  그는 무일푼으로 출발해 굴지의 양말공장을 세웠다. 그 돈을 사회에 환원해 한국인 공업기술자를 양성했다. 물론 과오도 있었다. 당시 널리 행해진 비행기 헌납이나 국방헌금 납부처럼 그도 1939년 8월 기관총 50정을 헌납했다.
 
  그를 친일파로 親日인명사전에 올려야 할까. 그렇지 않다고 본다. 그의 일생에서 親日은 중심이 아니다.
 
  安昌浩(안창호) 계열로서 동우회사건 후 轉向(전향)해 평양상공회의소 會頭(회두)를 지냈던 金東元(김동원), 金鑛(금광) 개발로 번 돈을 희사해 소작농을 자작농으로 만드는 大同農村社(대동농촌사)와 최초의 사립 공업고등교육기관인 大同공업전문학교를 세운 李鍾萬(이종만)도 명부에 올랐다.
 
  이들도 전쟁 협력을 했다. 김동원은 皇道學會(황도학회)와 조선임전보국단에 참여하는 등 협력 활동을 했으며, 이종만은 각종 어용집회에 연사로 다녔다.
 
  하지만 그들 역시 일생의 중심이 親日은 아니다. 김동원은 1948년 간행된 「친일파群像(군상)」이란 책자에 『근본정신은 친일파가 아닌 것도 사실』이라 명시돼 있다. 그는 제헌국회의 부의장까지 했다. 그가 친일파라면 제헌국회는 친일파의 소굴이라 해야 할까.
 
  光復(광복) 후 越北(월북)한 이종만은 死後(사후) 평양의 애국열사릉에 묻혔으며, 대동공전은 북한의 김책공업대학으로 이어졌다.
 
  예나 지금이나 기업가는 체제內 존재다. 불과 얼마 전까지도 기업을 경영하려면 권력의 비위를 맞추어야 했다. 기업 문을 닫기로 작정했으면 모를까 협력하지 않을 재간이 없다. 이들을 친일파로 선정해 後代(후대)에 길이길이 교훈을 삼겠다는 것은 식민지下에서는 기업 활동을 하지 말았어야 한다는 논리다.
 
 
  민족근본주의
 
일제말 일본어 교육을 받고 있는 초등학생들.

  편찬委는 한 인물이 몇 차례 협력행위를 했으면 친일파로 분류했다. 이는 종교 교리를 곧이곧대로 지키고 그에 어긋나는 것은 모두 단죄하는 根本主義(근본주의)와 다름없다. 親日행위를 했으면 친일파라는 이 입장을 「민족근본주의」라 부르겠다.
 
  당연히 이는 반민법의 처벌 정신과 다르다. 親日의 실상을 너나없이 소상히 알고 있던 60년 전의 국민적 합의가 반민법이다.
 
  同法(동법)은 제4조 6항에서 「軍, 경찰의 관리로서 악질적인 행위로 민족에게 해를 가한 자」, 7항에서 「비행기, 병기, 탄약 등 군수공업을 책임 경영한 자」, 11항에서는 「종교, 사회, 문화, 경제 기타 각 부문에 있어서…(중략) 일본침략주의와 그 시책을 수행하는 데 협력하기 위해 악질적인 反민족적 언론, 著作(저작)과 기타 방법으로써 지도한 자」를 처벌대상으로 명시했다.
 
  반민법은 고위급과 거물급으로 책임이 중하거나 악질적인 反민족행위자를 처벌하려 한 것이다. 단지 일본군 장교였거나 무기를 몇 차례 헌납했거나, 大東亞共榮圈(대동아공영권)을 찬양하는 詩(시)를 몇 편 쓴 정도는 처벌대상이 아니었다. 日帝末에 20代였던 朴正熙와 徐廷柱가 그러한 경우라 하겠다.
 
  편찬委는 이들을 대거 청산대상에 넣었다. 친일파들로부터 직접 피해를 입었던 당시 사람들이 용인했던 인물들을 60년 뒤의 편찬委가 친일파로 심판하겠다고 한다. 이는 60년 전의 국민적 합의를 부정하는 것이다.
 
  또 하나의 문제점은 이 민족근본주의가 자의적으로 적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 근본주의는 附日협력자 중 총독부 고위직이나 문화예술인·기업인·교육자 등에만 적용된다. 즉, 한국인 상층·지도층에만 말이다. 총독부의 말단 관리들도 일제에 협력했는데, 편찬委는 그들은 논외로 한다. 그래서 당연히 친일파라 해야 할 인물이 명부에는 빠졌다.
 
 
  군수와 面서기
 
일제말 강제 공출된 놋그릇들.

  日帝下 食糧供出(식량공출) 과정을 보자. 총독부가 쌀 수급계획에 따라 공출총량을 결정하면 이를 순차로 道(도)-郡(군)-面(면)에 할당한다. 군수는 그 중간 관리자이고, 面서기 등 하급관리가 마을의 각 농가에서 공출미를 수납한다.
 
  농민은 되도록 공출을 줄이려 쌀을 숨기고, 하급관리들은 헛간이나 다락방 등을 뒤져 쌀을 찾아 냈다. 죽창을 들고 집안의 물건 쌓인 곳을 마구 찔러보는 식이다. 농민의 입장에서야 관리가 대충 찾는 시늉만 하면 좋으련만, 숨긴 곡식을 악착같이 찾아낸 일화는 수없이 많다. 기차에서 쌀을 찾는답시고 여객의 짐을 샅샅이 뒤지는 일도 흔했다.
 
  이런 자들은 정말 충실한 협력자 아닌가. 군수는 공출을 창안하거나, 공출량을 정하지 않았다. 그 역시 상부의 명령을 이행할 뿐이다. 협력자로서 군수와 面서기는 무엇이 다른가.
 
  또 하나의 예를 들면, 日帝末의 학교는 皇民化(황민화)와 근로동원이 가장 철저히 행해진 곳이었다. 학생들은 학교에서 매일 「皇國臣民(황국신민)의 誓詞(서사)」를 큰 소리로 외치고 宮城腰拜(궁성요배)를 해야 했으며, 오직 일본어만 써야 했다. 그리고 장차 병사가 되기 위해 힘든 체조 등 신체단련을 하고, 방공호 파기, 松根(송근·솔뿌리) 채취 등 그 나이에는 감당할 수 없는 노동을 해야 했다. 중학교 상급생들은 지원병에 응모해야 했다.
 
  이를 지휘 통제한 것은 대개 한국인 교사였다. 물론 총독부 학무국의 지시, 교장의 지시에 따른 것이지만, 학생들을 극악하게 괴롭힌 교사들이 많았다. 교내에서 우리말을 썼다고, 「일본어」 공부를 제대로 안 했다고 사정없이 학생들을 때리고, 일본군에 지원하라고 학생들을 다그치던 한국인 교사들의 이야기는 흔하다. 이 한국인 교사는 附日협력자가 아닌가. 원로 극작가 신봉승씨는 이렇게 썼다.
 
  <1945년, 나는 열네 살 소년으로 매일 아침 日王(일왕)이 있다는 동쪽을 향해 90도로 허리를 굽혔고, 학교에서는 죽어도 일본말을 써야 했으며, 일본 皇國(황국)의 臣民(신민)임을 목이 터지도록 외쳤다. 나를 그렇게 행동하도록 매질한 분은 조선인 선생님이었다. 그런데 그 親日 명단에 나도, 그 선생님도 없는 것은 어찌된 일인가> (2008년 5월2일자 문화일보 칼럼)
 
  심지어는 반민특위의 反민족행위 피의자도 이번 명부에 빠졌다. 경찰 경력이 있는 피의자 218명 중 205명에 대해 이번 명단 등재 여부를 확인해 보니, 77명을 제외한 128명이 명단에 없다. 거의 3분의 2가 누락된 것이다. 편찬委야 그렇게 한 이유가 있겠지만, 60년 전 親日행위의 기억이 생생할 때 악질적 反민족행위자로 취급된 자의 多數(다수)가 누락된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편찬委의 「자의적 근본주의」
 
일제말 신사참배를 하는 학생들.

  편찬委는 하급직 인물들이 권력과 富(부), 명예를 좇는 「출세형」 협력자와는 다른 「생계형」 협력자라는 이유로 명부에 안 넣었다.
 
  참으로 실소를 금할 수 없다. 세상 어느 법이 「생계형」 도둑질은 봐주고 「축재형」 도둑질만 처벌하는가. 생계형이나 축재형이나 도둑질은 다 범죄다.
 
  쌀 공출이든, 황민화든, 근로동원이든 협력한 것은 모두 親日행위다. 중간직의 협력은 親日이고, 말단직의 그것은 親日이 아니라는 궤변은 어디서 왔는가.
 
  거기서 엄청난 증오와 대립의 싹이 텄다. 6·25전쟁에 관한 수정주의적 주장으로 유명한 브루스 커밍스는 『식량공출, 징용 등 강제동원의 현장에서 마주친 가해자(순사, 面서기 등 하급관리, 村의 구장)와 피해자(농민, 피징용자) 간의 증오가 이후 좌우익 간의 투쟁으로 확대되어 결국 전쟁의 기원이 되었다』고 설명한다. 촌락에서 벌어진 6·25전쟁을 다룬 최근의 微視史(미시사) 연구들도 같은 설명을 내놓는다. 이런데도 하급자의 협력은 생계형이니 無罪(무죄)인가.
 
  필자는 면서기와 교사, 그 밖의 인물들까지 포함해서 친일파를 수만 명, 수십만 명으로 확대하자고 주장하는 게 아니다. 편찬委의 선정기준이 얼마나 자의적인지 지적할 뿐이다. 「자의적 근본주의」, 이 형용 모순의 단어가 이번 인명사전의 핵심 문제를 단적으로 말해 준다.
 
  그렇다면 친일파를 제대로 선정하면 될까. 편찬委 측이 발표한 명단에 잘못 들어간 사람이 있고 빠진 사람이 있으니, 그를 바로잡으면 될까.
 
  그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바로 친일파를 골라내는 방식의 청산작업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이 방식은 「선정된 친일파」들만 문제 삼게 만든다. 「친일파」가 선정되면, 나머지 다른 「非친일파」는 일종의 免罪符(면죄부)를 받는다. 친일파만 마치 中世(중세)에 마녀로 몰린 사람들처럼 집중 공격받는다.
 
 
  親日의 群像
 
징병되어 나가는 아들을 전송하는 어머니.

  4776명, 바로 이 극소수 친일파들이 잘못한 것이니, 그들의 과오만 비판하면 역사가 바로 세워질까. 이는 마치 『을사5賊(적) 등 몇몇 賣國奴(매국노) 때문에 나라가 망했다』고 보는 것처럼, 역사적 사건의 진정한 원인에 눈을 감게 만든다.
 
  이 극소수 친일파는 나머지 사람들, 99.98%의 한국인과 무엇이 다를까. 이 극소수 친일파와 나머지 사람들을 구분하기는 어렵다.
 
  『당시 親日 안 한 사람이 어디 있나, 그러니 친일파를 斷罪(단죄)할 수 없다』고 물 타기 하려는 게 아니다. 더 근본적인 문제, 日帝末 한국인의 體制內化(체제내화) 경향을 지적하려는 것이다.
 
  1930년대 후반에는 日帝의 지배체제가 상당히 안정되었다. 만주국을 세운 일본제국의 성공적 팽창, 그와 동반한 식민지 경제개발이 이를 뒷받침했다. 일본이 1937년 8월 中日(중일)전쟁을 일으킨 이후 1941년 12월 미국 진주만을 기습하고 1942년 3월 자바섬을 점령할 때까지 승승장구하자, 독립의 꿈은 갈수록 아득해졌다.
 
  국내 한국인들은 일본이 장담한 大東亞共榮圈의 성립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徐廷柱의 말마따나 천년만년 일본의 지배 아래서 살아야 할 것 같았다.
 
  이런 일본이 한국인에게 轉向(전향)을 강요했다. 또 內鮮一體(내선일체)를 내세우며 이제부터 한국인을 동등하게 대해 주겠다고 유인했다. 그것이 실제로는 한국인을 전쟁에 동원하기 위한 사탕발림에 불과한데 많은 한국인들이 이 약속을 믿고 싶어 했다.
 
  게다가 戰時(전시)체제에서 많은 한국인들에게 취직 자리와 진급 기회, 사업기회 등 상승 기회가 생겼다. 일찍이 1932년에 출범한 滿洲國(만주국)은 많은 한국인을 끌어들였다. 朴正熙도 그중 하나였다.
 
  中日전쟁 이후 많은 한국인이 관리로 채용되었다. 1937∼1942년 사이에 한국인 관리 수는 97%나 늘어서 7만4000명에 이르렀다.
 
  이 자리에 가기 위해서는 학교 교육을 받아야 했다. 가히 폭발적으로 학교 취학이 늘었다. 초등학교 취학률은 1938년 33%를 거쳐 1942년에는 48%에 달했다. 그리고 중등학교의 입학생 수는 1943년에는 2만4000명에 이르렀다. 1940년대 초 일본 유학생 수는 3만 명에 가까웠다.
 
  당시의 내로라하는 지식인 대다수는 이렇게 변절했다. 교육·종교·문화·예술·기업·사회운동 등 거의 모든 영역에서 지도급 한국인 인사들은 대부분 日帝의 협력자가 되었다. 그들만이 아니다. 중하급의 한국인 관리들은 皇民化 교육·식량공출 등 총동원에 열심이었다. 집안의 놋그릇까지 샅샅이 찾아내 공출한 것도 한국인 하급관리였다.
 
  한국인 대중도 어느 정도는 마찬가지였다. 일제가 1938년 조선육군특별지원병제도를 실시하자 많은 한국인 청년들이 군대에 지원했다. 1938년 3000명이었던 지원자 수는 1943년에는 30만 명으로 급증했다.
 
  기독교系 학교에 신사참배 문제가 등장했을 때, 재단 관계자나 교계 인사·교사·학부모 등 거의 모든 한국인 관계자들은 『신사참배를 하면 되지, 굳이 학교 문을 닫을 이유가 있느냐』면서 오히려 歐美(구미) 선교회를 비판했다. 또 日帝가 「忠良(충량)한 皇國臣民」을 양성하던 학교에 수많은 한국인 학생들이 다투어 진학했다. 이처럼 附日협력의 리스트는 끝이 없다.
 
 
  親日청산은 단죄가 아닌 성찰이어야
 
  日帝末의 附日협력은 몇몇 개인들만의 변절, 일탈이 아니라, 당시 한국 사회의 체제적 경향, 한국인의 일반적 경향이었다. 한국인 중 0.02%라는 극소수 친일파는 이 體制內化한 한국인 집단의 선두에 섰을 뿐이다.
 
  日帝末 附日협력의 진상이 이렇다면, 附日협력 여부로 친일파를 판정하는 親日청산은 불가능하다. 친일파가 수십만일지, 수백만일지 모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을 세운 우리 조상들이 악질적 反민족행위자만 처벌하기로 합의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것이 반민법이었다. 인민공화국의 건국자들이야 동포들이 지킬 수 없었던 엄격한 기준을 내세워 같은 동포를 처단했지만, 우리 조상들은 악질적인 反민족행위자가 아니라면 서로 포용하기로 했다. 이는 附日협력행위가 사소해서가 아니라, 모두 改過遷善(개과천선)해서 대한민국의 건국과 富國(부국)에 동참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 만큼 대한민국은 열린 체제로 출발했다.
 
  따라서 친일청산은 편찬委처럼 「민족의 죄인」을 선정해 매도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다. 우리들의 평범한 張三李四(장삼이사) 조상도 親日 문제에 연루되었기 때문이다.
 
  진정한 親日청산은 남을 단죄하는 게 아니라 자신을 省察(성찰)하는 것이다. 협력행위가 왜 광범위했는지, 소위 지도층과 하위직은 각기 어떤 역할을 했는지, 협력과 동원을 통해 한국사회는 어떻게 변했는지, 한국인 간에는 어떤 갈등, 대립의 싹이 텄고, 한국사회는 어떤 상처를 입었는지를 고민해야 한다. 이는 하나같이 깊은 성찰을 요구한다. 친일파 명단을 작성하고 그 죄상을 폭로하는 것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필자는 親日의 진상을 밝히자는 데 전혀 이의가 없다. 親日행위자를 봐주자고 변호할 생각도 없다.
 
  다만 현재의 접근법에 담긴 심각한 문제점을 지적할 뿐이다. 사전은 사실상 편집을 마쳤다 하니 그대로 출판되겠지만, 향후라도 이성적인 논의가 이어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