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 둘레 16봉 세 강이 만든 백두산의 위용
류연산 연변대 교수 minjog21@minjog21.com |
▲ 장백산문화박람성에 세워진 장백명주 탑. |
그로부터 8년이 지난 2003년부터 명장도로가 시작되는 곳에 ‘장백산문화박람성(이하 박람성)’ 공정이 시작되었고 지금까지 계속 보수, 확건되고 있다.
백두산이 한여름 중국의 관광명소로 떠오르면서 해마다 관광객 수가 기하급수로 불어나고 있지만 박람성은 지나치기가 일쑤이다. 필자도 얼마 전 지나가는 걸음에 다리쉼이나 하려고 들렀다. 그때의 무심한 발걸음이 유심한 눈길로 바뀌었고 끝내는 창작 충동을 만들었다.
박람성에서 비림(碑林)은 정수이다. 모두 8개의 비석이 두 줄로 나란히 세워서있는데 원래의 모양과 크기를 일정한 비례로 축소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이 글에서 필자는 비림을 통해 박람성의 의미를 짚어보려고 한다.
▲ 장백산 비림의 정계비. ⓒ류연산 |
첫 번째 비석, 정계비
유난히 시선을 끄는 것은 1712년 청나라 우라총관 목극동이 이조의 군관 이의복(李義復) 일행과 함께 백두산 동쪽 10리 되는 곳에 세웠다는 정계비(定界碑)이다. 문헌 기록에 남아 있는 크기(너비 한 자 여덟 치, 높이 두 자 세 치)와 모양을 신통하게 복원했다.
백두산 정계비는 청나라와 조선국 간에 있어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청나라는 압록강, 두만강이 양국의 국경임을 재차 확인했고 조선은 백두산 천지 이남지역이 조선의 영토임을 청으로부터 인정받아 북쪽 변방의 개발을 더 한층 강화할 수 있었다. 그런데 정계비는 압록강, 두만강이 국경임을 인정하는 것을 전제로 하면서 두 강의 발원지와 두 강 사이의 지역을 확정하는 것이 목적이었으나 목극동과 박권, 이승부의 무책임한 처사로 양국 국경분쟁의 불씨를 심어주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고 학계에서는 입을 모으고 있다.
모순의 초점은 백두산의 소속과 두만강 수원(水源)이다. 조선은 박권의 불찰로, 청은 목극동의 불찰로 정계비의 위치가 잘못 정해짐으로써 원래 자국의 소속이었던 백두산이 양분되었다고 한다.
백두산에 대한 중국의 입장은 박람성 내의 청동으로 만들어진 복도길에 새겨진 〈장백산대사기〉(長白山大事記)가 대변하고 있다. 대사기는 32억 년 전 지각변동으로 의해 백두산이 만들어진 때로부터 2003년 3월 백두산이 중국의 10대 명산으로 되기까지를 개괄하고 있다. 그리고 문화양각돌담 중 〈장백산문화고적편〉에 정계비와 나란히 2만 6000년 전에 오늘의 안도 일대에서 살았던 안도인 이빨화석이며 발해의 보마성이며 영광탑 등이 새겨져 그림으로 대사기를 안받침하고 있다.
정계비에 대한 학계 쟁론의 초점은 수원을 찾을 때 하류에서 상류로 추적하여야 하는데 번거롭고 어렵다는 이유로 백두산 산정으로부터 하류로 추적하였기에 정원(正源)을 밝히지 못한 오류를 범했다는 것이다. 조선은 토문강과 두만강을 별도의 강으로 표기하여 현재의 이도백하를 토문강이라고 하고 중국은 두만강을 토문강이라고 한다.
두 번째 비석, 천녀욕궁처
▲ 천녀욕궁처비. ⓒ류연산
두 번째 비석은 류건봉이 청나라 선통원년(宣統元年)에 원지(園池) 못가에 세웠다고 하는 천녀욕궁처(天女浴躬處)이다. 지금은 암몰되고 없지만 문헌에 남아 있는 사진의 모습을 되살려서 만들어진 돌비석은 만족이 백두산을 발상지로 하여 봉금(封禁: 일정한 지역에 못 들어가게 함)을 하게 된 전설이 담겨져 있다.
옛날 백두산 천지에서 세 천녀가 목욕을 하다가 막내 동생 푸쿠룬(布庫倫)이 못가의 붉은 열매(들쭉)를 먹고 임신을 하고 푸쿠리옹순(布庫里雍順)을 낳았는데 그가 만족의 국주이며 그가 세운 나라가 만주(滿洲)라는 것이다.
문화양각돌담 중 〈장백산전설편〉이 따로 만들어져서 만족 시조에 대한 전설이 돌담 중앙에 그림으로 재현되면서 양옆으로 여와가 구멍이 난 하늘을 깁다가 남은 오색이 찬연한 돌 하나를 백두산 천지 가에 놓았다는 전설을 곁들임으로써 백두산은 자고로 중국의 소속이고 만족 역시 중국 영토 안에 살아온 소수민족이라는 추리를 하게 만들었다.
강희년간(康熙年間)에 청조는 만주땅을 ‘룡흥지지’로 간주하고 흥경 이북, 이통주 이남, 두만강 이북의 광활한 지역을 봉금하고 만족 이외의 다른 민족은 땅을 개간하고 삼림을 채벌하고 광물을 캐는 것을 엄금했으며 또 마음대로 인삼을 캐거나 동주(東珠)를 채집하거나 사냥을 하지 못하게 했다.
문화양각돌담 중 〈장백산망제편〉에 청나라 강희(康熙), 옹정(雍正), 건륭(乾隆) 황제가 길림에 이르러 백두산에 제를 지낸 기록을 화폭으로 재현했다.
봉금을 실시한 후 봉금지 내에는 인삼산(人參山), 위렵산(圍獵山), 포주하(捕珠河)가 설정되었으며 청조 조정 내무부 혹은 여러 왕부(王府)의 장정들이 인삼을 캐고 동주를 채집하고 사냥을 하여 조정 혹은 왕부에 바쳤다.
두만강 연안 연변지대에도 인삼산, 위렵산, 포주하가 있었다. 위렵산으로는 후훈(지금의 부르하통하와 가야하 분수령인 할바령의 한 개 지맥)이고 인삼산은 우얼훙아푸다리(지금의 훈춘시 춘화향 부근), 호남곡(湖南谷), 호남령(湖南嶺) 등이며 포주하로는 가하리하(지금의 가야하), 부르하투하(지금의 부르하통하), 해란하 등이다. 지금의 룡정시 조양천(朝陽川)은 당시 진주영(珍珠營)이라 불렸는데 동주를 채집하는 주요한 곳이었다.
봉금령은 200여 년 세월 룡흥지지(흥경 이동, 이통주 이남, 두만강 이북)를 인가가 희소한 신비한 원시지대로 보존하였다. 백두산 밀림 속에는 산삼, 영지, 불로초 등이 많이 있고 모든 짐승이 떼를 지어 다니어서 유명한 수렵지대로 만들어졌다.
문화양각돌담 중 〈장백산자원편〉에 현재 백두산에 있는 2300여 종의 경제식물자원과 산삼 등 한약재 식물 800여 종, 1200여 종의 야생동물 중 대표성을 띠는 산삼이며 사슴, 곰과 호랑이 등 진귀한 동식물 그림이 그려져 있듯이 동북지방을 옥토뿐만 아니라 또한 희유금속의 산지로 살아 있게 했다.
‘나중에 삼수, 갑산을 갈지언정’이라는 말이 있다. 정녕 참기 어려운 처지에 놓일 때면 속담처럼 입에 오르는 이 말은 당시 두만강역에 사는 조선 변방의 험악한 형편을 여실히 보여준다. 1876년 안무사 김유연이 북관 6진 사람들의 생활형편을 이야기할 때 “관리들이 탐욕스럽고도 잔혹하기 짝이 없으며” “가혹한 정치는 맹호보다 더하다”고 하면서 백성들이 “친척과 리별하고 조상들의 산소를 버리고 월북하려고 하니 사람으로서 사경에 이르지 않고야 어찌 그럴수 있겠는가”고 상소하였다. 사실 월경 이주는 당시 북도 주민들의 유일한 삶의 출로였다. 국법을 지켜 굶어죽을 바엔 월강하여 한 끼라도 배불리 먹다가 죽는 것이 복하리라. 먹다 죽은 귀신은 한이 없다는데.
조선의 시인 조기천은 〈두만강〉에서 이렇게 읊었다.
찌프린 낯 투럼이 옷
재산이란 가슴속 옹이진 노예의 설음
의탁이란 장알 진 손지팽이뿐
놈들에게 빼앗기고 짓쫓기는 그 신세
두만강이여 이것이
그대 그려둔 조선의 사나이 아닌가
째진 가난 속에 부대껴도
말 한마디 틀리랴 겁내며
눈물에 치마고름 썩어도
앞날을 바라고 한숨을 죽이는
두만강이여 이것이
그대 그려둔 조선의 여인이 아닌가
19세기 중엽부터 조선의 가난한 농민들은 두만강, 압록강을 건너 중국 땅에 와서 밭을 일구었다. 그때로부터 광복이 되기까지 이민의 발걸음은 끊이지를 않았고 오늘 조선족 군체가 형성되었다.
세 번째 비석은 토자패(土字牌)이다. 현재 훈춘시 경신진 방천 중·조·러(中朝俄) 국경접경지에 있는 국경비로 1886년 청나라 북양대신 오대징(吳大徵)이 러시아 연해주 성장 빠라노브와 협상하여 세웠다고 한다.
현재 토자패가 세워진 장고봉 산발의 코숭이에는 중국의 제일 동쪽의 중·러·조 변경의 마지막 역으로 일컫는 ‘동방전초’(東方前哨)가 있다. 군 초소의 망원루에 서서 군용 망원경으로 바라보면 발아래 핫산촌에 사는 러시아인의 유난히 큰 코까지도 가려 보이고 지척으로 두만강 물위에 가로놓인 조러 국경철교의 남쪽켠 산비탈에 길게 늘어선 조선의 두만강 마을 실골목까지도 보인다. 그리고 더욱 가슴 설레게 하는 것은 15㎞ 밖에서 푸른 물결 굼실대는 동해에 떠있는 어선이 시야에 잡힌다. 그러나 아쉽게도 바로 앞 철교에 반도 이르기 전에 두만강은 중국의 것이 아니다.
▲ 연변 훈춘의 북·중·러 삼국국경지대. 두만강 위를 가로 건넌 철교가 북러국경철교다. ⓒ류연산 |
▲ 용정사와 안도현 접경지 길목에 세워진 탑에 '안도장백산제일현'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류연산 |
토자패는 망루에서 약 500m 동쪽에 있었다. 토자패가 세워지기 불과 20여 년 전인 1850년대까지만 해도 저 광활한 바다에 잇닿은 연해주 땅은 중국의 영토였다. 자고로 국경이란 국가 사이에 물리적 충돌로 인해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1858년 애훈조약(愛琿條約)에 의해 청나라는 하바로프스크와 블라디코스토크에 이르는 60만㎢에 달하는 광활한 땅을 러시아에 빼앗겼다.
1861년 중러 쌍방이 체결한 ‘우쑤리강으로부터 바다까지의 변계기문’의 규정에 의하면 토자패는 ‘두만강 어구에서 20리 떨어진 곳’에 세워져야 했다. 그리고 중국의 배가 자유롭게 두만강을 나가 바다에 이르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짜르러시아 측에서는 팻말을 두만강 어구에서 러시아 이수로 22리(23㎞) 떨어진 곳에 세웠고 바다로 나가는 중국의 통로를 막아버렸다.
세 번째 비석, 오대징의 토자패와 용호석각
▲ 토자패. ⓒ류연산
두만강 하구에는 유람선이 있다. 러시아와 조선의 공동의 국경선이 시작되는 철교를 지척에 두고 머리를 돌려야 한다. 중국인한테는 여전히 바다 길은 막혀 있었다.
오대징이 일필휘지로 썼다는 용호(龍虎) 석각(石刻)은 도문시 양수진에서 동쪽으로 3.5㎞ 되는 곳에 세워졌는데 1940년 길닦이를 하면서 길옆으로 밀렸다가 1986년에 훈춘시 차대구 북쪽 언덕에 한동안 세워 있었던 것을 훈춘시 공원으로 옮겨다 놓았다. 용호란 뜻은 용과 호랑이가 나란히 용맹을 떨쳐 변강을 지킨다는 말이 된다.
문화양각돌담 중 〈항연사시편〉(抗聯史詩篇, 항일연군사시편)에서 나라를 되찾으려고 일제와 싸우는 용사의 모습이 용호의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다.
1983년 8월 13일 덩샤오핑이 백두산을 다녀간 후로 장쩌민(1995년), 후진타오(2001년) 등 국가 수뇌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박람성 문화양각돌담은 덩샤오핑이 쓴 장백산 제사부터 시작되어 있다. 백두산 천지를 바라보면서 그는 “장백산에 오르지 못하면 평생 한이 된다”라고 감탄을 했다고 한다.
연길에서 하루 코스로 백두산을 다녀오려면 관광버스는 새벽 5시 경에 연길을 떠나 안도 박람성에 도착하면 6시 반이 된다. 아침식사 시간이다. 부근 호텔에서 15원을 내면 뷔페식이 가능하다. 그 시간대에 맞추어서 박람성은 한번 들러 볼만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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