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철따라 길따라 쌓은 추억… 돌아봐도, 다시봐도, 또 보고 싶구나

醉月 2023. 12. 28. 10:48

오지의 전설로 불리는 ‘마장터’로 가는 길. 마을이 지워진 자리에 심어진 낙엽송만 하늘을 찌를 듯 자라고 있다.



■ 박경일기자의 여행 - 올해의 여행 BEST 5
한 해를 또 보내는 세밑입니다. 지난 1년 동안 CULTURE&LIFE는 여러 곳을 다녀왔습니다. 올해 다녀온 여행지 중에서 다섯 곳을 가려 뽑았습니다. 영웅담에 가려져 있던 장쾌한 전망의 명소도, 1700년 전 소망을 불상으로 깎아놓은 곳도, 한때 전설이었던 첩첩산중의 오지마을의 자취도 있습니다. 길게 이어진 열도(列島)에 놓인 다리를 딛고 섬을 건너다니기도 했고, 35년의 시간을 뒤로하고 문을 닫는 온천 콘도미니엄에도 갔습니다. 돌이켜보면 크고 이름난 곳보다, 작거나 숨겨진 곳을 주로 찾아다닌 여정이었습니다. 한 해의 끝에서 그동안 다녀온 곳들을 되돌아봤습니다. 그사이에 어떤 곳에는 새로 길이 났고, 어떤 곳은 명소가 됐으며, 또 어떤 곳은 사라졌습니다. 어떤 것도 제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여행은 그 시간의 단면을 붙잡아 추억으로 만드는 일이 아닐까요. 독자분들도 한 해 마무리를 앞두고 지난 1년간 다녀온 여행 중‘베스트5’를 꺼내보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1. 마장터 가는 길

쭉쭉 뻗은 낙엽송의 숨결
오지서 찾은 ‘초록의 미로’


신록이 녹음으로 바뀌어 가는 6월, ‘마장터’를 다녀왔다. 마장터는 진부령과 미시령 사이 대간령(大間嶺) 고개 너머에 있다. 마장(馬場)이란 ‘말을 사고팔던 장’을 말하니, 마장터란 그런 장터가 있었던 터를 뜻한다. 산간 오지에 푹 파묻힌 마을이라 장터가 있었다는 사실조차 믿기지 않는 곳이다. 마장터는 한 세대 전쯤 오지를 찾아다니던 이들 사이에서 ‘전설’로 남아 있는 곳이다.

예나 지금이나 마장터는 오지다. 수도권에서 미시령 들머리인 강원 인제의 ‘박달나무 쉼터’까지는 차로 두세 시간 남짓. 거기서 바삐 걸으면 1시간 만에 마장터에 닿는다. 과거 한나절 넘게 걸리던 시간이 ‘편도 3시간 거리’로 가까워졌지만, 마장터는 여전히 오지다. 오로지 거기를 목적지로 삼아야 갈 수 있는 곳이어서 그렇다. 물리적 거리가 멀어서가 아니라, 거기 가겠다고 온전히 마음을 내어야만 갈 수 있어서 아직도 오지다.

마장터의 6월은 온통 초록이었다. 마을이 있던 자리에는 키 큰 낙엽송들이 무성하게 자라 마치 미로를 만들어놓은 듯했고, 숲 속의 투막집 옆으로 흘러내리는 맑은 계곡물은 바닥이 환하게 비쳤다. 아쉬웠던 건 마장터의 집들이 사라져 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사람 손이 닿지 않은 집들은 쓰러져 가고 있었고, 그나마 온전한 세 채의 집은 집주인이 일찌감치 산 아래로 내려가서 주말에나 별장처럼 쓰고 있었다.

마장터의 전설 중의 전설은 마장터에서만 44년을 살았던 약초꾼 정준기(81) 씨였다. 그가 살던 투막집은 비어 있었다. 마장터를 떠난 그를 수소문 끝에 찾았다. 2년여 전쯤 ‘몸이 따라주지 않아서’ 산에서 내려와 속초에 정착했다고 했다. 초여름 밤에 속초의 한 서민아파트 마당에서 우두커니 나와 앉아 있던 그와 얘기를 나누며 추억을 뒤적였다. 한 해의 끝에 속초에서 겨울을 나고 있는 정 씨에게 안부를 묻자 ‘아직은 건강하다’며 웃었다.

정 씨가 살던 투막집 흙 담벼락에는 달력을 잘라 노트처럼 만든 메모지와 줄에 매단 볼펜이 있었다. 정 씨가 외출한 사이에 집에 다녀가는 이들이 여기에 용건을 남겼다. 그가 마장터를 떠난 뒤에도 메모지에는 추억을 떠올린 이들의 안부가 쌓이고 있었다. 최근 마산봉에서 새이령을 넘고 마장터를 건너는 비박 산행을 다녀온 이가 말했다. “마장터는 지금 설국(雪國)이에요.”

월출산 마애불좌상. 지난 9월 여기까지 바로 오를 수 있는 탐방코스가 새로 놓였다.



2. 영암 월출산

액자 같은 바위에 ‘마애불좌상’
월대서 굽어보는 입체적 풍경


월출산이 숨겨놓은 두 곳을 찾았다. 그중 한 곳이 월출산 주지봉 아래 ‘월대(月臺)’다. 월대는 월출산의 발등쯤에 앉아 너른 들을 바라보는 자리인데, 영암에 갈 때마다 숨어 있는 공간을 하나씩 꺼내 보여주곤 했던 마을활동가 김창오 씨가 ‘꼭 가봐야 하는 곳’이라고 소매를 끌어 다녀왔다.

구림마을의 옛서당을 복원한 문산재 뒤에 대암이라는 큰 바위가 있는데 그 위에 공깃돌처럼 올려진 바위가 월대다. 그리 높지 않지만 월대 위에 오르면 영암 들녘의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월대의 경관적 미덕은 ‘풍경과 멀지 않다’는 것. 월출산의 더 높은 암봉에는 더 넓은 시야의 풍경이 있지만, 경관이 주는 감동은 월대만 못하다. 비유하자면 월대가 보여주는 풍경은 ‘질감이 살아있는 저공비행’의 느낌이다. 산정에서의 시선이 납작한 2차원의 느낌이라면, 월대에서 내려다보는 영암의 들녘과 그 너머의 영산강 풍경은 3차원의 입체감을 가졌다. 산 아래 구림리 죽정마을에서 오르면 걸어서 20분쯤, 뒷짐 지고 유유자적한다 해도 30분이 채 안 걸린다는 점도 매력적이다.

월출산 구정봉 아래 비밀스러운 공간에 월출산마애불좌상이 있다. 월출산이 숨겨놓은 두 번째 공간이다. 월출산마애불좌상은 액자처럼 걸쳐진 바위에 새겨 마치 허공에 떠서 가부좌를 틀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마애불을 아는 이들이 적은 건, 구정봉을 찍고 내려갔다가 고스란히 되돌아 올라와야 하는 내리막길 끝에 있어서다. 월출산에 올랐어도 마애불좌상을 보고 온 사람은 드문 이유다.

기사가 나가고 6개월쯤 뒤인 지난 9월에 월출산 국립공원사무소와 영암군은 구정봉을 거치지 않고 대동저수지에서 곧바로 마애불상으로 오르는 탐방코스를 개통했다. 탐방코스에 붙여진 이름이 ‘하늘 아래 첫 부처길’이다. 물소리를 들으며 동백숲 사이로 난 산길을 쉬엄쉬엄 오르면 편도 2시간쯤 걸리는 길이다.

영암에 갈 때마다 느끼는 게 일본으로 건너가 한자와 유교를 전했다는 왕인박사를 기린다며 고증 없이 마구 가져다 붙인 이야기의 폐해다. 왕인을 앞세우느라 확인된 역사적 사실과 그 자리에 있던 인물들까지 죄다 가리고 지워버렸다. 도선국사 탄생지가 왕인박사 탄생지로 둔갑했고, 마을의 서당이었던 문산재는 ‘왕인박사가 공부하던 곳’으로 바뀌었다.

완도 수효사에 있는 침향 보러 가는 길에 오른 봉황산. 물고기 지느러미 같은 암릉과 바위에 뚫린 구멍이 인상적인 곳이다.



3. 완도 침향

수효사 삼존불의 은은한 향기
미륵 도래 간절한 소망 묻어나


전남 완도에 딸린 작은 섬, 고금도 가는 길 내내 가슴이 두근거렸다. 고금도에는 작은 절집 수효사가 있다. 그 절에 ‘침향(沈香)’으로 깎은 불상이 있다고 했다. 침향은 통일신라 말부터 고려 말까지 백성들이 갯벌에다 묻었던 향나무를 말한다. 왜구의 노략질과 탐관오리의 학정에 시달리던 백성들은 미륵의 도래를 기다리며 간절한 소망으로 향나무를 묻었다. 도탄에 빠진 백성들은 갯벌에 묻은 나무가 1000년이 지나 떠오르면, 미륵이 나타나 구원해줄 것이라 믿었다. 간절한 소망으로 묻었다가 1000년 뒤에 떠오른 향나무는 강철같이 단단해지고 은은한 향이 어린다는데, 그게 바로 침향이다.

침향은 지금껏 한 번도 발견된 적이 없었다. 향나무를 묻은 사실과 향나무를 묻는 의식에 참여한 이들의 이름을 적은 비석인 매향비(埋香碑)는 전국에서 열다섯 개쯤 발견됐는데, 침향이 실물로 확인된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침향으로 깎은 불상이 있다는 믿기지 않는 얘기를 들었다. 수효사 가는 길이 기대로 한껏 부풀었던 이유다.

수효사 극락보전에는 1700년 전 갯벌에 묻은 녹나무를 건져내 깎았다는 삼존불이 모셔져 있었다. 그게 침향인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가능성은 크다. 주불인 미륵불과 양옆에 아미타불, 약사불은 갯벌에서 꺼낸 녹나무로 만든 것이다. 가장 궁금했던 건 침향에서 난다는 은은한 향기였다. 서늘한 법당 마루에 미륵불이 푸른 눈썹으로 앉아 있었다. 처음 그 앞에 앉았을 때는 화창한 봄날이었다. 기대했던 것보다 향이 옅었다. 수효사 주지성일 스님은 “맑은 날보다 흐리거나 비 오는 날에 향이 더 짙다”고 했다. 가을에 수효사를 다시 찾았을 때는 흐린 날이었고, 과연 스님 말대로 불상이 뿜어내는 향이 훨씬 더 짙었다. 그 향기만으로 수효사를 찾은 보람이 느껴졌을 정도였다.

기사가 나간 직후 완도군은 수효사 침향불상을 완도군 향토문화유산 유형 문화재로 지정, 고시했다. 침향으로 조성한 불상이 매향 의식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며 지역의 역사문화관광 자원으로도 높은 가치가 있다고 평가했다. 불상이 된 나무가 과연 침향이 맞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침향이 아니라 해도 수효사 법당의 삼존불은 나무가 지나온 오래된 시간에 새겨놓은 소망과 기원임이 분명하다.

고군산열도의 명도에서 초록의 구릉을 넘어가는 모습.



4. 고군산열도 트레킹

징검다리처럼 섬 딛고 걷는 길
지금보다 미래 더 기대되는 곳


눈썹 모양으로 길게 동서로 늘어선 고군산군도의 바깥 섬을 고군산열도라 부른다. 고군산열도의 다섯 개 섬, 그러니까 방축도, 광대도, 명도, 보농도, 말도에 섬과 섬을 잇는 보행교를 놓아 한 두름에 꿰는 길을 만들고 있다. 총연장 14㎞에 달하는 이른바 ‘명품 트레킹 코스’다. 지난 2015년 공사가 시작돼 2021년 개통을 목표로 삼았으나 이제야 방축도와 광대도, 그리고 명도, 보농도, 말도에 보행교 3개를 완성했다. 설계변경과 공사비 증액 요구 등이 맞물리면서 공사가 늦어진 탓이다. 아직 연결되지 않은 광대도와 명도 사이 477m 구간의 다리는 내년에나 놓일 예정이다.

완성된 보행교에도 문제가 있다. 명도∼보농도 보행교는 2001년에 놓았는데, 2년째 정식 개통이 미뤄지고 있다. 보행교 4개를 다 놓은 뒤에 트레킹 코스를 개통하기 위해 정식 개통을 늦추는가 했는데, 뒤늦게 안전문제 때문이란 게 드러났다. 기왕에 완공한 보행교의 접속도로 공사가 미뤄지고 주변을 트레킹 코스로 다듬지 않았던 것도 다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수백억 원을 써서 다리를 만들어놓고도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명도∼보농도 보행교는 길이 410m에 달하는 다리 상판을 34개의 강철 케이블이 붙들고 있는데, 바람 불 때 케이블이 강하게 진동하는 이른바 ‘공진’ 현상이 나타났다는 것. 케이블을 밧줄로 묶는 임시보강공사를 했는데도 밧줄이 해지거나 끊어지는 바람에 안전에 의문이 제기됐다. 다리 자체는 초당 57m의 풍속에도 견딜 수 있도록 설계됐지만, 공진현상 등에 대한 대비나 검사는 없었다. 이에 따라 군산시는 추경예산을 확보해 안전연구용역을 실시하고 있다.

늦어지는 공사에다 완공된 다리의 안전문제까지 겹치면서 ‘명품’이란 수식어가 무색해졌지만 그럼에도 섬을 징검다리처럼 딛고 걷는 길은 충분히 근사하다. 개통이 미뤄진 보농도∼명도 구간을 빼고도, 방축도∼광대도, 보농도∼말도 보행교 구간은 지금도 이용할 수 있다. 정부가 보행교로 연결되는 다섯 개 섬을 울릉도, 거문도, 백령도, 흑산도와 함께 ‘가고 싶은 K-관광섬’으로 키워보겠다고 나선만큼, 자연경관뿐만 아니라 체험 등 다채로운 콘텐츠가 더해질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앞으로 몇 번이고 더 갈 기회가 있으리라. 고군산열도야말로 과거보다 지금이, 지금보다 미래가 더 기대되는 곳이다.

백암산 자락에 들어선 백암온천 전경.



5. 백암온천

쇠락해가고 있는 백암온천
고객들과의 추억 이어가길


연말에 35년 만에 문을 닫는 한화콘도 백암온천을 찾아갔다. 한화콘도에서 시작한 취재가 백암온천으로 자연스럽게 옮아갔는데, 백암온천의 근대 이후 자료가 없었다. 한때 ‘대한민국 최고의 온천’으로 꼽힌 곳인데도 기본적인 현황조차 정리해둔 게 없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관리와 기록의 부실은 도대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주민들의 기억을 더듬고, 가는 곳마다 묻고 또 물어서 이야기 조각을 주워 모았다.

그러다 정돌만(72) 후포역사연구회장을 만났다. 그에게서 2004년 일본에서 출간된 ‘한국 온천 이야기(韓國溫泉物語)’란 책을 건네받았다. 일본의 입시학원 교사 출신인 일본인 다케쿠니 소모야스(竹國友康)가 한국을 여행하며 온천의 역사를 기록한 책이다. 책에는 직접 취재한 우리나라 온천 얘기가 정리돼 있는데, 백암온천의 근대부터 현대까지의 변화도 간략하게 소개돼 있었다.

해방 이후 백암온천은 황씨 성을 가진 한 집안의 가업처럼 이어졌다. 일제강점기 백암온천은 조선인이 운영하던 온천과 일본인이 운영하는 온천, 두 개가 있었다. 한국인 박재환이 운영하는 온천은 초가지붕에 부지는 9평쯤 됐고, 남녀 각 1평 반쯤 크기의 온천탕이 있었다. 일본인 야자쿠 요코사쿠가 운영하는 온천은 함석지붕에 부지는 30평쯤 됐고, 3평 크기의 온천탕이 있었다.

조선인과 일본인이 운영하던 온천은 지금의 백암스프링스호텔 자리에 있었다. 백암스프링스호텔은 1930년 백암여관으로 문을 열었다가 1982년 백천 호텔로 이름을 바꿨고, 1998년 온천호텔을 새로 건축해 지금의 백암스프링스호텔이 됐다. 백암스프링스호텔의 황학성(64) 대표는 해방 직후 백암온천을 불하받은 황씨 집안의 6남매 중 막내다. 젊어서 홀리데이인, 베스트웨스턴 등 유명 해외체인 호텔의 한국법인 대표를 맡기도 했던 호텔 전문가인 그는 쇠락해가고 있는 백암온천으로 돌아와 호텔을 짓고 가업을 잇듯 백암온천을 지키고 있다.

한화콘도 백암이 연말에 문을 닫고, 몇 개 남지 않은 백암온천의 호텔도 코앞으로 다가온 임대계약 만료 이후 계속 운영할 수 있을지 불투명한 상황이지만 황 대표는 “호텔을 끝까지 지키겠다”고 했다. 백암스프링스호텔 곳곳에서 그런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 善해지는 길

아름다운 풍경을 발견하거나 흥미진진한 이야기와 마주칠 때면 들려줄 무용담에 대한 기대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곳의 이야기를 어떻게 들려줄까. 가장 매끄러운 동선은 또 어떻게 짜야 할까. 매번 풍경 앞에서 오래 걸었다. 카메라를 내려놓지 못하고, 문장을 떠올리고 지도를 뒤적였다. 돌이켜보면 위로를 위한 일이었다. 풍경과 이야기에서 우리는 위로받는다. 위로는 사람을 선하게 만든다. 여행이란 종래에 사람을 선하게 만들어주는 일이라고, 나는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