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경일기자의 여행
올해 마지막날 한화콘도 폐쇄… 그래도 ‘백암온천’은 계속 흐른다
신혼·효도·가족여행의 끝판왕
명동땅 1평 1억4000만원일때
온천 주변땅 1평 1억1908만원
한창땐 연150만명 관광객 북적
최근엔 10분의 1로 줄어 ‘쇠락’
나이트클럽만 5곳 성업하기도
고요하지만 여전히 푸근한 온천
과거 평민들도 목욕 허용됐던 곳
수많은 선비들이 격찬 시문 남겨
온천품은 백암산 뒤편 신선계곡
흰 바위와 금강송 즐비해 절경
후포항 위판장선 대게경매 구경
경북 울진의 백암산 아래 백암온천 전경. 숲속에 앉아 있는 오른쪽 흰 건물이 1988년 문을 열었다가
35년 만인 오는 연말에 영업을 중단하는 한화리조트 백암이다. 한화리조트 백암이 문을 닫으면
백암온천에는 온천탕이 딸린 호텔이 딱 4개만 남는다.
울진=글·사진 박경일 전임기자 parking@munhwa.com
# 문 닫는 한화리조트 백암을 가다
한화콘도 백암온천이 오는 연말 문을 닫는다. 명성콘도로 개발을 시작해 1988년 ‘플라자 콘도’로 문을 연 지 35년 만의 퇴장이다. 백암온천은 ‘물 좋은 온천’의 대명사였다. 접근성 면에서는 최악이었는데도, 일찌감치 호텔과 콘도미니엄이 들어섰던 이유다.
백암온천은 그야말로 ‘최고의 온천’이었다. 유황 냄새는 짙었고, 물의 감촉은 매끈매끈했다. 목욕하고 나오면 누구나 ‘좋은 물’에 감탄했다. 서울에서 가자면 7시간이 넘게 걸렸는데도, 한창때는 연간 150만 명이 넘는 관광객이 몰려들었다.
금권선거가 판을 치던 시절, 크고 작은 선거 때만 되면 백암온천은 유권자를 태운 관광버스로 가득 찼다. 백암온천 여행을 ‘최고의 대접’으로 여겼던 시절 얘기다. 나중에는 백암온천이 너무 유명해져서 남의 눈에 잘 띄는 곳이라 입후보자들이 유권자들을 이곳으로 보내지 않았을 정도였다. 한 세대쯤 전의 백암온천은, 요즘 말로 하자면 ‘온천 여행의 끝판왕’이었다는 얘기다.
이즈음의 백암온천은 쇠락했다. 한창때에 비하면 방문객 수는 10분의 1토막이 났다. 이게 그나마 많이 회복한 숫자다. 코로나19 때의 처참한 방문객 통계는 어쩔 수 없었던 일이니 빼더라도, 2016년 방문객 숫자가 5만 명 밑으로 떨어지기도 했다. 추락도 이런 추락이 없다. 1997년 ‘관광특구’로 지정된 백암온천이, 관광특구 지정 요건인 ‘10만 명 이상 관광객 유치’ 기준의 절반도 못 채웠던 것이다.
한화리조트가 백암콘도의 문을 닫겠다고 하는 건 십분 이해가 가고도 남는다. 관광객의 발길이 뚝 끊기면서 문을 열면 열수록 적자가 쌓이니 왜 닫고 싶은 마음이 없었을까.
한화콘도 백암의 운영 중단 결정은, 이번이 세 번째다. 본래 작년 말까지만 운영하기로 했다가 지역 여론에 밀려 영업 중단 시기를 지난 6월 말까지로 늦췄고, 또다시 연말까지로 미뤘다. 그렇게 두 번의 연장 끝에 이제 폐장이 코앞으로 다가온 것이다. 그사이에 한화리조트는 적자 사업장 조정을 이유로 한화리조트 지리산, 수안보, 양평의 영업을 줄줄이 중단했다.
하필 문 닫기 일보 직전의 한화콘도 백암을 소개하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한화리조트 백암에 깃든 추억을 되돌아보는 마지막 기회여서다. 한화리조트는 오는 연말 문을 닫는다고 했지만, 실은 12월 31일 입실해서 내년 1월 1일 퇴실하는 고객이 마지막 손님이다.
리조트 문을 닫기까지 이제 보름여가 남았다. 한때 신혼여행의 명소이기도 했고, 큰맘 먹고 떠나는 효도 여행이나 가족 여행의 로망이었던 곳. 남은 보름이 추억을 되새겨 볼 마지막 기회다.
한화콘도 이야기를 꺼낸 두 번째 이유는 ‘콘도가 문 닫은 뒤의 백암온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다. 콘도가 문을 닫건 말건, 백암온천은 변함없이 물 좋은 온천이다. 쇠락하긴 했지만, 그래서 어쩐지 더 푸근한 곳도 있고, 어찌 보면 북적이는 관광지와 대조되는 적막한 분위기가 매력적이기도 하다. 몰라서 그렇지 다들 쇠락해가고 있는 사이에도 매일 쓸고 닦는 곳도 있다. 한화리조트가 문을 닫아도 백암온천은 여전히 매력적이다. 진짜 하고 싶었던 건 이 얘기다.
울진의 후포 부근 해안도로의 모습.
# 관광개발 이후의 백암온천의 역사
한화리조트 백암의 객실을 온라인 예약 사이트에서 5만9000원에 예약했다. 방 두 개에 거실 겸 주방 하나. 다섯 명 정원의 방이다. 전에는 그저 낡았다고만 생각했는데, 자세히 보니 흠잡을 곳 없이 관리되는 것 같다. 평가가 이렇게 후해진 건, 곧 문을 닫는다는 아쉬움 때문이었으리라.
아무리 평일 숙박이라지만 방값이 너무 싸다. 프런트 직원에게 물었다. "콘도 회원에게는 얼마를 받나요?" 난처해하던 직원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7만9000원…." 적잖은 돈을 주고 산 콘도 회원권을 가진 회원의 정상가 투숙 요금보다 온라인 여행사로 예약하는 숙박비가 훨씬 더 싸다. 회원 정상가보다 더 낮은 가격에 일반 투숙객을 받는다는 건, 그만큼 장사가 안된다는 얘기다.
사실 백암온천이 내로라하는 관광지가 된 결정적 계기는, 나중에 한화리조트로 이름을 바꾼 ‘플라자콘도 백암’의 개관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콘도미니엄 사업을 시작한 명성그룹이 1981년 콘도 개발의 깃발을 처음 꽂은 곳이 설악산과 백암온천이었다. 설악산이야 그럴 법했지만, 오지 중의 오지였던 백암온천은 뜻밖이었다. 명성그룹이 백암온천에 콘도를 거의 다 지어놓고서 사채 횡령 사건으로 공중분해되자, 한화리조트가 플라자콘도를 전격 인수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35년 동안 영업해 왔으니, 한화리조트의 역사가 곧 관광개발 이후 백암온천의 역사라 할 수 있다.
백암온천은 멀다. 지금도 수도권에서 백암온천까지 가려면 4시간 30분 정도 걸리지만, 20여 년 전까지만 해도 7시간이 훨씬 넘게 걸렸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더 멀었다. 서울에서 고속버스로 강릉까지 가고, 포항행 시외버스로 갈아타 평해까지 가서 털털거리는 시골버스로 백암온천에 닿으면 하루가 다 갔을 정도였다. 그나마 대구나 부산에서는 갈 만했는데, 그 시절 백암온천이 대구 사람들에게 단골 신혼여행지로 꼽혔던 이유다.
# 고요한 온천에서 떠올리는 추억
백암온천은 고요했다. 온천 한복판의 온정종합터미널 앞 너른 주차장은 비었고 관광안내소는 문을 닫았다. 행인도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이제 몇 곳 안 남은 식당에서도 손님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관광지 특유의 활기를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 쓸쓸하다.
부산숯불갈비가든을 운영하는 전선수(80) 씨의 설명. “한창때는 하루에 쌀 한 가마니로도 모자랐어요. 예약 손님이 많아서 그냥 온 손님에게는 밥도 줄 수 없었지요.” 그 시절 식당 직원만 15명이 넘었다는데 지금은 불 꺼진 넓은 식당을 전 씨 내외만 지킨다. 주변의 식당도 다 비슷한 처지. 가게 주인은 모두 마을 주민이다. 객지 상인들은 진작 떠났는데, 안되는 장사에도 ‘놀면 뭐하냐’는 주민들만 남았다.
온천 거리 양편에는 한화리조트 운영 중단 철회를 요청하거나 비난하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현수막은 후포까지 이어지는 도로변에도, 대게잡이가 한창인 후포항에도 걸려 있었다. 울진에 있는 단체란 단체는 모두 한 장씩 써 붙인 것 같았다. 그런데 현수막에 적은 발언 수위가 높지 않다. ‘물러가라’거나 ‘규탄한다’는 식의 살벌한 문장이 없다. 그중 강경하다 싶은 문장이 ‘취소하라’거나 ‘반대한다’는 정도였다. 안쓰러웠던 건 현수막에서 싸우겠다거나 막겠다는 의지보다, 실망과 낭패감이 먼저 느껴진다는 점이었다.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백암온천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물 좋다는 소문을 듣고 전국에서 온 관광객들로 호텔은 늘 만원이었다. 휴가철은 물론이고, 겨울철이면 평일에도 방 잡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다. 그 시절 백암온천에는 성류나이트를 비롯해 나이트클럽이 다섯 곳이나 있었고, 백암카바레도 있었다.
명물이었던 게 성류파크호텔 마당에 서던 장(場)이었다. 마당 가득 마을 주민들이 팔기 위해 가지고 나온 토산품이며 약초 좌판이 펼쳐졌다. 주민들은 산더덕이며 산미나리, 곶감은 물론이고 겨울철 특미로 꼽혔던 배추 뿌리며 고욤까지 좌판에 올려놓고 팔았다. 주민들이 이것저것 담아간 광주리는 오후 나절이면 동났다. 그래 봐야 푼돈이었겠지만, 고즈넉한 산간마을 주민들에게는 상전벽해나 다름없는 경험이었다.
그 시절 백암온천의 위세를 증명해주는 몇 가지 이야기. 한국토지개발공사가 발표한 1993년 공시지가 땅값 순위에서 백암온천이 열 손가락 안에 들었다. 당시 서울 명동의 상업은행 부지 평당 가격이 1억4000여만 원이었는데, 백암온천의 온천공 주변 땅 한 평이 이에 버금가는 1억1908만 원이었다.
또 하나의 얘기는 1991년 1월 18일 전두환 전 대통령이 백암온천에서 회갑을 보낸 것이다. 2년여의 백담사 은둔 생활을 마감하고 서울로 귀환한 지 한 달여 만의 일이었다. 전 전 대통령은 당초 고향인 합천 해인사에서 회갑을 보내려 했으나 ‘해인사 도량 더럽히지 말라’는 승가대생들의 구호에 쫓겨 급거 방향을 돌린 곳이 백암온천호텔이었다.
후포항에서 첫 조업에 나서는 대게잡이 어선들이 그물을 싣는 모습.
# 추억에 대한 예의를 생각하다
백암온천의 역사를 취재하다가 놀랐던 건, 근대 이후 백암온천에 대한 역사자료가 거의 없다는 것이었다. 도대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누구도 백암온천의 역사를 정리해놓지 않았다. 울진군청은 달랑 한 장짜리 ‘백암온천 현황자료’만 보내면서 ‘그게 다’라고 했고, 울진 문화원도 딱 잘라서 ‘백암온천 자료는 없다’고 말했다.
수소문 끝에 겨우 찾아낸 건 2004년 일본에서 출간된 ‘한국 온천 이야기(韓國溫泉物語)’란 책이다. 입시학원 교사 출신인 일본인 다케쿠니 소모야스(竹國友康)가 한국을 여행하며 온천의 역사를 담은 책을 냈는데, 그 안에 직접 취재한 백암온천 얘기가 짧게 거론돼 있다. 일제강점기도 아니고, 우리 온천의 내력과 역사를 일본인 저자의 책에서 찾아야 한다니…. 책을 읽는 내내 자괴감이 들었다. 이런 건 지방자치단체가 했어야 할 일이 아닌가.
한화콘도 영업 중단이 목전으로 다가오자 손병복 울진군수는 최근 서울 한화호텔앤드리조트 본사를 방문해 재고를 요청했다. 이 자리에서 손 군수는 지역 상권 붕괴와 경기 침체 등에 대한 우려를 전달했다. 그런데 지자체는 지금까지 백암온천을 위해 무얼 했을까. 온천의 역사나 내력조차 정리해놓지 않은 지자체가, 민간기업에 ‘백암온천에 대한 애정’을 요구할 자격이 있을까.
실망스럽기는 한화리조트도 마찬가지다. 장사가 안돼서 문을 닫는 거야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쳐도, 수많은 고객의 추억과 사연이 담긴 공간을 무신경하게 그냥 닫아도 되는 것일까. 영업 중단 공고도 하고, 그동안 찾아와준 고객들에게 감사 인사라도 해야 하는 게 아니었을까. 과거의 고객을 초청하고 사진전을 열거나 추억이 있는 이들에게 그 기억을 되새겨볼 시간을 줄 수는 없었을까.
리조트 운영은 그냥 공산품 판매와는 달리, 당대의 기억과 감성에 관계한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는 ‘공적 영역’에 속하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이렇게 문을 닫는 건, 고객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지역 주민이 말하는 울진군, 운영의 어려움을 말하는 한화리조트…. 이들의 다툼만 있을 뿐, 그곳에 추억을 새긴 고객은 아무도 챙기지 않는다.
울진 후포항 뒤쪽의 등기산 스카이워크. 강화유리 바닥 구간에서는 발밑으로 푸른 바다를 내려다볼 수 있다.
# 이자 놀이로 병자를 돌보다
백암온천의 역사는 삼국시대까지 올라간다. 온천의 발견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사냥하다 사슴이 활을 맞고 사냥꾼은 다쳤는데, 둘 다 계곡에서 솟은 뜨거운 온천수의 효험으로 회복했다는 얘기다. 이야기 얼개는 비슷한데, 설(說)마다 사냥꾼 신분이 다르고 활이냐 창이냐가 다른 정도다.
백암온천에는 향기 나는 이야기 한 줄이 끼워져 있다. 고려 때 승려 신미선사(信尾禪師)에 얽힌 이야기다.
백암산 아래 절집 백암사를 창건한 신미선사는 절집 안에서 온천이 솟자 ‘장사’를 시작했다. 목욕하는 비용으로 나락 두 말을 받았다. 이렇게 받아 모은 쌀을 빌려주고 이자로 쌀 두 홉을 더 받았다. 이자 놀이까지 한 셈이었다. 그러나 신미선사는 아픈 사람에게는 입장료를 받지 않았다. 아픈 사람이 온천 치유를 마치고 돌아갈 때는 여비에 그동안 모은 쌀까지 줘서 보냈다. 건강한 사람에게 돈을 거둬서 가난하고 아픈 사람들을 돌봤던 셈이다. 그 이야기가 500년 전의 책 ‘용재총화’에 나온다.
사실 신미선사가 백암사에 주석하고 있던 시절, 온천은 전적으로 기득권 세력의 차지였다. 평민들은 감히 온천에서 목욕할 수 없었다. 일반 사람이 온천욕을 할 수 있었던 건 조선 성종 대 이후의 일이다. 하지만 평민들의 온천욕이 허락되지 않았던 시절에도, 백암온천만큼은 누구나 목욕할 수 있었다. 경북 내륙으로 한참 들어간 산간 오지의 백암온천이 변방 중의 변방이라 가능한 일이었다.
수많은 선비가 백암온천을 찾았는데, 온천욕을 하고는 시문을 남겼다. 조선 전기의 명신이자 학자인 서거정을 비롯해 성현, 이산해 등이 백암온천을 격찬하는 시를 남겼다. 그중 압권은 조선 중기 문신 이산해가 유배 중 온천욕을 한 뒤에 남긴 시 ‘온탕정(溫湯井)’이다. “백암산 아래 온천이 있어/한 표주박 물로도 온갖 병이 낫는다네/이제부터 자주 가서 몸을 씻어/이 늙은이 묵은 시벽(詩癖)을 치료해 봐야지.”
지금부터는 일본 저자의 책 ‘한국 온천 이야기’로 본 근대의 백암온천 이야기. 백암온천의 대중 온천탕 개발은 일제강점기에 이뤄졌다. 1918년 백암온천에는 두 개의 온천탕이 있었다. 하나는 조선인 박재환이 운영하는 온천탕이고, 다른 하나는 평해에서 목재상과 막걸리 공장, 여관 등을 운영하던 일본인 야자키 오토사쿠(矢崎音作)가 관리하는 온천이었다. 일본인이 운영하는 온천탕이 시설이 좋고 규모도 더 컸다. 조선인의 온천은 초가지붕에 부지는 9평이었고 욕탕은 남녀 각 1평 반쯤이었는데, 일본인 온천의 부지는 30평쯤 됐고 탕은 3평쯤 됐다.
두 개의 온천이 있었던 곳이 지금 백암스프링스호텔이 들어선 자리다. 백암온천 전체를 통틀어 크리스마스트리 장식이 있는 곳은 백암스프링스호텔이 유일했다. 온천이 쇠락한 지금까지도 이 호텔만큼은 쓸고 닦아 흠잡을 곳이 없을 정도로 관리가 잘되고 있다.
백암산 신선계곡의 용소. 계곡을 통틀어 최고의 경치를 보여주는 명소다.
# 여기도 가보자… 신선계곡, 후포항
지금 백암온천에 간다면, 빼놓을 수 없는 곳이 신선계곡이다. 신선계곡은 백암산 뒤편의 계곡이다. 수직의 벼랑을 이룬 계곡의 바위 색이 유난히 희다. 산 이름이 ‘백암(白巖)’이 된 이유다. 수묵화에나 나올 법한 기이한 수형의 금강송이 즐비한 계곡을 따라 소(沼)와 탕(湯)을 건너고 바위를 넘는 트레킹은 다른 계절도 물론 좋지만, 겨울철 눈 내린 직후의 설경이 단연 으뜸이다.
신선계곡은 길이 흐린 데다 계곡 폭이 좁고 워낙 험해 오랫동안 접근이 쉽지 않았는데, 10여 년 전쯤 계곡 입구 쪽의 아연광산의 흔적을 메우고, 탐방로에 나무 덱을 설치한 뒤에 해마다 길을 다듬어 이제는 겨울철에도 쉽게 산책하듯 오를 수 있다. 그동안에는 감히 들여다볼 수 없던 설경을 마음껏 즐길 수 있게 됐다는 얘기다.
계곡을 따라 오르다 보면 1960년대에 살았던 화전민들이 골골마다 붙여놓은 지명이 있다. ‘닭벼슬바위’는 기이한 바위 형상에서 딴 이름이고, ‘숫돌바위’는 바위틈에 낫이며 도끼 따위를 넣어 갈았다고 해서 붙여진 것이다. 슬며시 웃음이 나는 지명도 있다. ‘참새 눈물 나기’와 ‘다람쥐 한숨 제기’다. 지세가 너무 험해 참새도 눈물을 흘리며 지나갔다거나, 다람쥐도 한 번에 뛰어오르지 못해 한숨을 쉬었다는 곳이다.
신선계곡을 따라 백암산 정상까지 오를 수 있지만, 요즘 같은 겨울철이라면 용소까지 다녀오는 걸 추천한다. 물살에 깎여 아이스크림 스쿱으로 떠낸 듯한 형상이 된 바위를 따라 계곡 물이 흘러내리는 곳인데, 신선계곡에서 최고의 절경을 꼽는다면 바로 이곳이다. 옛날 가뭄이 심할 때는 용소에서 기우제를 올렸다. 마을 주민들은 용소에서 제를 지내고 주변에 돼지 피를 뿌리면 어김없이 비가 왔다고 했다. 영험한 신령과 기도를 떠올린 곳이니 그곳의 지형이 얼마나 기이한지는 짐작되고도 남지 않는가. 계곡 입구에서 용소까지 편도 거리는 2㎞쯤. 여기까지 다녀온다면 왕복 1시간 30분쯤 소요된다.
울진까지 갔다면 빠뜨릴 수 없는 곳이 후포다. 이즈음 후포는 12월부터 시작한 대게잡이가 한창이다. 이즈음의 대게는 살이 단단하게 차지 않았고, 특유의 달큼한 맛도 덜하다. 가격도 비싸다. 굳이 맛본다면 지금은 대게보다 홍게다.
후포항에서는 대게를 맛보는 것보다 위판장에서의 경매 구경을 추천한다. 후포항에는 이른 새벽 경매도 있지만, 상대적으로 늦은 시간에 위판도 한다. 오전 8시에는 대게 경매가, 오전 9시 30분에는 붉은 대게와 활어 경매가 있다. 이른 새벽에 서두르지 않아도 위판장 바닥에 가득 부려놓은 대게와 홍게를 볼 기회다.
다시 백암온천 얘기로 되돌아가서 요즘 같은 겨울의 초입에 썼음 직한 김석규 시인의 시(詩) 한 편을 소개한다. 겨울 백암온천 여행의 초대장 같은 시다. “첫눈에도 백암산은 아름답다. 나무들은 은빛 눈을 덮어쓰고 높새는 늘 동해에서 온다고 한다. 또 한차례 눈보라를 몰아 우체국으로 해서 면사무소로 들어가면 더욱/따뜻하게 드러나는 마을의 굴뚝 관절마다 찬바람. 나는 세상이 갑자기 싫어 책상 위 그대로 두고 서랍도 하나 잠그지 않고 몰래 와 뜨거운 물 뒤집어쓴다…(중략)…손발이 시리고 마음이 추운 사람들아 지리하지만 터덜거리는 버스를 타고 백암온천으로 오라…(후략).”(김석규 시인의 ‘백암온천에서’ 중에서)
■ 별빛 올려다 보는 자리
한화리조트 백암을 저렴하게 예약했다면 십중팔구 ‘뒷방’을 배정받게 된다. 백암산 아래 앉아 있는 한화콘도는 앞은 전망이 탁 트였지만, 뒤는 산자락의 숲에 바짝 붙어 있다. 전망이 닫힌 뒤쪽 객실에 묵게 되더라도 실망할 건 없다. 아니 오히려 기대해야 하는 건지도 모른다. 겨울밤에 테라스에서 하늘에 가득한 별을 볼 수 있으니 말이다. 숲에 가까운 뒤쪽 객실의 테라스에서는 잡광이 적어 하늘에 총총하게 뜬 별을 선명하게 올려다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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