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차향만리_06

醉月 2013. 3. 13. 01:30

종가의 감기몸살 가정상비약 전차(錢茶)

김대성 한국차인연합회 고문·차 칼럼니스트   

 

전남 장흥군 관산읍 천관산 자락에는 장흥 위(魏)씨가 모여 사는 집성촌 ‘방촌마을’이 있다. 이 마을에 위씨가 터를 잡은 세월은 자그만치 1370여 년이나 된다. 같은 성씨들이 한 지역에서 천년 넘게 산다는 것은 대단히 놀라운 일이다.

 

이 고을은 산이 높고 물이 맑아 차나무가 자라기에 좋은 환경인데, 실제로 떡차(團茶) 종류인 전차(錢茶·돈차) 고향이기도 하다. 엽전 크기만하다고 해서 전차라고 부르는 이 차는 찻잎이 자연 숙성돼 오래 두고 마실수록 맛과 성분이 좋아진다. 동백나무, 대나무 숲 속의 반음(半陰) 반양(半陽) 자리에서 자라는 야생 차나무가 지천에 깔렸고, 차밭골이라는 지명도 있다. 방촌마을 사람의 생활 음료는 그 옛적부터 차였다.

 

1910년 한일병합조약 이후 일본인들은 차가 자랄 수 있는 곳을 찾아 우리나라 전역을 조사했다. 조사 대상 마을 가운데 하나가 방촌마을로, 찻잎을 채취해 시루에 찌고 절구에 찧어 엽전 모양으로 만들어 말린 후 꾸러미에 끼워 보관했다가 필요할 때마다 하나씩 꺼내 썼다고 기록에 나와 있다. 이렇게 만든 차를 끓는 물에 넣어 우려 마시는 것을 전차라고 했다. 당시 방촌마을의 차 만드는 풍경을 조사해 남긴 책이 바로 ‘조선의 차와 선’으로 1940년 발간됐다.

 

마을 구심점인 위정명(魏廷鳴·1589~1642) 종가의 고택을 찾아 종손 위성탁(魏聖卓·86) 옹을 만났다. 노(老) 종손은 따뜻한 사랑채 온돌방에서 놋화로 숯불 위에 무쇠 주전자를 올려놓고 끓는 물에 단차 2개를 넣어 우린 후 찻잔에 따라 줬다. 한 모금 마셨더니 일반 녹차에서 느껴지는 떫은맛과 쓴맛은 전혀 없고 부드럽고 달큰했다. 이내 화한 뒷맛이 목에서 되돌아오면서 오랫동안 입안에 차향이 맴돌았다. 100여 년 전 ‘조선의 차와 선’에서 설명한 그 전차, 그 맛이 재현되는 순간이었다.

이 돈차는 종손이 텃밭 차나무에서 어린 찻잎을 직접 딴 뒤 전통 돈차 제조법으로 1년간 자연 숙성시킨 단차라고 했다. 물 1ℓ에 단차 2개를 불에 살짝 구워 넣고 5분쯤 뒀다가 마시면 된다.

 

종가에서 수백 년 대물림되던 돈차는 감기몸살이나 배 아플 때 쓰는 가정상비약이자, 손님 접대용이었다. 조부 때까지 만들었던 돈차는 해방을 맞이하고 6·25전쟁 등 어지러운 시대를 거치면서 손이 많이 가는 전통 제조법 대신 잎차를 말려 마시는 식으로 변했다고 한다. 그러다 종손이 교직에서 퇴직한 후 중국에서 수입한 보이차를 맛보면서 잊힌 옛 기억을 되살려 전차를 만들기 시작했다. 여러 번 실패한 끝에 지금은 마실 만한 차로 성공했다고 한다. 이 차는 시판을 하지 않고, 종가 내림 음료로 가족이 마실 양만큼만 만들고 있다.

 

“할아버지 차 심부름이 제 소임이었습니다. 사랑채 화롯불에 불길이 잦아들면 부엌 아궁이에서 숯불을 담아와 채워야 하는 일이 무척 힘들었죠. 차 철에는 찻잎을 따고, 살짝 찐 찻잎을 절구질하는 일도 어려웠습니다. 찻잎을 손바닥에 놓고 새알만한 크기로 비벼 손바닥으로 납작하게 누른 다음 가운데 구멍을 뚫어 방바닥에다 꾸덕꾸덕해질 때까지 놓아둡니다. 그렇게 해서 새끼줄에 100개씩 끼워 처마 밑에 매달아두면 서서히 숙성, 건조되죠.”

신라와 고려를 거쳐 조선 후기까지 만들던 돈차는 요즘 차산지 경남 하동과 장흥 보림사 등에서 다시 만들어 시판하고 있다. 녹차 마실 때 필요한 다구(茶具) 같은 것이 없어도 쉽게 마실 수 있다는 장점과 숙성 과정에서 카페인, 타닌 등이 감소돼 위가 편하다는 점 등으로 인기를 얻고 있다.

 

부부가 한 잔씩 ‘합환주’로 딱 좋아 차술

 

몸에 좋고 향이 코끝을 간질이는 차술은 술과 찻잎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 쉽게 만들 수 있다. 좋은 차와 알코올이 어우러진 차술은 세계적인 명주가 부럽지 않다.

차꾼이 차에 익숙해지면 자연스레 평소 즐기는 차 농도가 진해진다. 이를 두고 차를 “짜게 마신다”고 표현한다. 아마 술꾼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일 텐데, 차술은 차꾼과 술꾼의 ‘만남의 광장’일 것이다.

 

지금은 차술이라고 해서 따로 녹차소주를 내놓아 주당들에게 인기를 끌지만, 녹차소주를 마실 때마다 늘 좀 짰으면 하는 욕심이 든다. 차향 반, 소주향 반이어야 할 것이 차향이 따르지 못하는 것 같아 아쉽다.

좀 짜게 마시고 싶다면 복잡할 게 하나도 없다. 두 홉들이 소주의 경우, 마시기 10~20여 분 전 소주병을 따고 녹차를 2티스푼가량 넣은 뒤 뚜껑을 막아뒀다가 차가 우려졌다 싶을 때 마시면 된다. 녹차가 없다면 녹차 티백 한두 개를 통째로 병 속에 넣으면 된다. 아무래도 녹차 생잎이 더 좋겠지만.

 

맑은 소주에 우러나온 차색은 누르스름하기도 하고 파르스름하기도 해 보는 것만으로도 입맛을 돋운다. 한 잔을 마시기 전 향기에 먼저 취한다. 차가 지닌 수십 가지 향, 그 형용할 수 없는 진향(眞香)에 알코올 향이 어우러져 코끝을 간질이는 매력이 있다.

 

차술은 뒤탈이 없다. 주독(酒毒)을 차가 해독해주기 때문에 깨고 나서도 머리가 맑고 간장에도 부담이 없다는 것이 주당들의 찬사다. ‘술을 깨고 잠을 적게 한다(醒酒少眠)’라는 문구를 여러 차 책에서 쉽게 볼 수 있다.

그러나 과하면 쇠한다고 했다. 차술은 어지간히 마셔도 얼큰한 취기가 계속돼 오래 흥취를 즐길 수 있다. 그 대신 만취가 돼야 술을 마신 것 같다고 여기는 주당은 차술을 피하는 것이 좋다. 차술로 만취 상태까지 가려면 평소 주량보다 2~3배는 더 마셔야 한다. 그럼 취한 상태가 오래가서 잘 깨지도 않고 숙취도 더하다. 적당히 마시면서 차술 자체를 즐겨야지, 차술로 만취를 바란다면 득보다 실이 많을 것이다. 이게 차술이 가진 흠이라면 흠이다.

 

마찬가지로 온더록(on the rock)이라는 것이 있다. 40° 넘는 독한 양주를 얼음으로 만들어 먹거나 양주에 얼음을 넣어 마시기도 한다. 독한 술을 희석한다는 원리겠지만, 차술로 얼음을 만들거나 차술에 얼음을 넣어 마셨다가는 역시 화를 당한다. 웬만큼 마셔도 취기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차술은 차와 알코올이 어우러져 뿜어내는 독특한 향이 좋아 어쩌다 한 번 마시는 것이 좋다.

 

차 산지에서는 생엽을 바로 소주에 넣고 차색이 우러나면 마신다. 이슬 맛처럼 신선하고 청량하다. 붉은색의 술을 즐기려면 발효차나 홍차를 넣으면 된다. 찻잎이 작기로 유명한 중국산 군산은침이나 벽라춘 같은 것을 술에 넣으면 잎에 달린 하얀 털이 술잔 속에서 오르락내리락해 마치 인어가 헤엄치는 듯하다. 백조의 호수인 듯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우리 선조는 회춘제로 차술을 담가 마셨다. 물론 약으로 마셨으니 폭음이 있을 리 없다. 잠자리에 들기 전 부부가 한 잔씩 했다. 한 되짜리 소주에 녹찻잎 30g, 설탕 30g을 넣고 서늘하고 어두운 곳에 보관한다. 일주일쯤 지나면 술이 차색을 띠고 차향이 난다. 찻잎은 건져내고 맑은 술만 마신다. 오래 두면 차향이 없어지기 때문에 한 번에 많이 만들지 않는 것이 좋다. 차에서 비타민 E, C 등이 우러나 기력을 돕는다고 한다. 굳이 이 술에 이름을 붙이라면 합환주(合歡酒)가 제격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