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처럼 술독에서 건져내는 명약 알코올 해독
오랜만에 만난 반가운 지인들과 저녁내 술잔을 기울이다 보면 어느새 취기가 오르고 다음 날 아침이면 속 쓰림에 힘들어 하는 게 술꾼 일상이 아닐까. 이럴 때 녹차나 홍차, 보이차 등 차를 우려 마시면 속이 한결 편해진다. 이렇게 마시는 것이 여의찮으면 편의점에서 파는 봉지 녹차 2개를 뜨거운 물에 넣어 진하게 우려 마셔도 효과를 볼 수 있다. 예로부터 차는 알코올을 해독하는 명약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초의선사(1786~1866)는 우리 차의 고전 ‘동다송’에서 “술을 깨우고 잠을 적게 하는 것은 주나라 때 주공이 이를 증명한다(醒酒少眠證周聖)”고 기록했다. 지금으로부터 3300년 전 옛 시대에 차가 이미 숙취에 효험이 있다고 말한 것이다.
과음 뒤 찾아오는 숙취는 체내 알코올이 완전히 분해되지 않아 대뇌가 마비되는 현상이라는 것을,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상식으로 알고 있다. 인체가 감내할 수 있는 소량의 알코올은 간이 쉽게 분해하지만, 간이 소화해낼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양을 섭취하면 유해물질인 아세트알데히드 양이 증가한다. 혈액 중에 포도당이나 비타민C가 충분하면 아세트알데히드 분해 능력이 높아지는데, 바로 찻잎에 들어 있는 카페인과 비타민C가 포도당을 증가시키는 작용을 해 차를 마시면 숙취가 없어지는 것이다. 이는 이미 여러 나라에서 실험을 통해 입증한 내용이다. 여기다 이뇨작용이 뛰어난 차가 체내에 퍼진 알코올을 빨리 씻어내는 구실도 한다.
취음선생(醉吟先生)이란 별명을 가진 당나라 시인 백거이(772~846)도, 고려 말 주당인 이규보(1168~1241)도 취하고 싶으면 술 마시고, 깨고 싶으면 차를 마셨다는 술과 차의 달인이었다.
“하늘과 땅을 베고 덮고, 강하를 술독 삼아 천일 동안 마시어 취해서 태평시대 보리라”는 이규보의 시처럼 필자 역시 평생 술독을 안고 살면서도 아직 건강을 유지하는 이유는 차 때문이라는 게 주위 사람들의 해석이다.
차 산지에 사는 술꾼은 차로 속풀이를 하는 비책을 알고 있다. 과음한 다음 날 집 주위 차밭에서 생찻잎을 한 주먹 따와 주전자에 물과 함께 넣은 뒤 팔팔 끓여 찻물이 진한 쑥색으로 우러나면 그 물에 달걀노른자와 꿀을 타서 한 사발 마신다. 그러면 숙취는 물론 피로까지 말끔히 가신다고 한다.
생찻잎을 구할 수 없는 곳에서는 아침에 일어나 잎차를 티스푼으로 수북이 담아 주전자에 넣은 뒤(3스푼 분량) 물 300cc를 붓고 한번 끓인 다음, 찻잔에 따라 뜨거울 때 꿀을 타서 마시면 확실하게 속풀이가 된다. 거북했던 속을 거짓말처럼 잠재울 수 있다. 찻주전자에 찻잎 6g을 넣고 뜨거운 물 200cc를 부은 뒤 1분 정도 우려 따라 마셔도 해독에 도움이 된다.
그러나 차가 해독작용을 한다고 과음을 일삼으면 ‘술에는 장사 없다’는 속담처럼 몸이 상하고 만다. 술이든 차든 적당히 마셔야 차 정신인 중정(中正)의 도리를 지킬 수 있을 것이다.
차주돈(茶酒豚)이란 말이 있다. 차와 술, 삼겹살구이라고 일단 설명해두자. 주당들은 ‘삼겹살에 소주’라는 말만 들어도 입맛을 다신다. 그런데 여기에 웬 차? 소주에 찻잎이라도 타서 마시라는 말인가, 아니면 삼겹살에 찻잎을 뿌려서 구워 먹으란 말인가.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상상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삼겹살에 찻잎을 뿌려서 구워 먹어보면 “아, 이 맛이야!” 하며 무릎을 칠 것이다. 여기다 소주까지? 환상이다. 중국이 자랑하는 시성(詩聖) 소동파(蘇東坡, 1036~1101)는 고기를 먹을 때 항상 찻잎을 뿌려 먹었다고 하는데, 중국에서는 이 ‘동파육’이란 요리가 지금도 유명하다. 우리나라에서는 1980년 초 녹차가 인기를 끌면서 주당 사이에서 슬그머니 ‘차주돈’이라는, 한국 요리사에는 없는 이름이 만들어졌다. 차주돈은 소주안주로 삼겹살을 먹을 때 삼겹살 위에 찻잎을 양념처럼 뿌려 구워 먹으면서 생긴 이름이다.
찻잎이 많이 나는 남쪽 차밭에 갔다가 술꾼들이 상추쌈을 먹듯 생찻잎에 돼지고기나 쇠고기를 싸 먹는 것을 보고 적잖이 놀랐다. 옆에서 한 입 얻어먹었더니, 쌉싸래한 생찻잎이 고기 누린내를 조율해줘 별미 중 별미였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삼겹살을 사서 생찻잎 대신 마른 찻잎을 가루로 만들어 고기 위에 술술 뿌린 후 구워 맛을 봤다. 놀라울 정도로 육질이 연했다. 무엇보다 “이게 돼지고기란 말인가” 싶을 정도로 누린내가 사라졌다. 이렇게 고기맛에 취하고 소주맛에 취할 듯하지만 정신은 오히려 말짱하다. 그냥 고기를 구워 먹었을 때보다 취기가 늦게 오른다. 어찌 보면 술을 과하게 마실 수 있는 것이 큰 단점이라 할 수 있다. 혹시라도 차주돈을 즐길 때는 과(過)하면 쇠(衰)한다는 법칙을 명심해야 한다.
맛있게 먹는 요령 하나. 삼겹살에 찻잎을 뿌려 구울 때는 낮은 불에서 서서히 구워야 한다. 찻잎이 고기 기름을 분해할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삼겹살에서 나오는 기름이 찻잎과 함께 지글지글 타면서 풍기는 고기 냄새는 술꾼들의 군침을 돌게 한다.
어른 주먹 두 개만한 크기의 돼지고기를 삶을 때는 무거리(하품 차)를 5티스푼가량 넣으면 돼지고기 냄새가 신기할 정도로 나지 않을 뿐 아니라, 살이 연해지고 담백한 맛도 즐길 수 있다. 불고기에도 해당한다. 차를 우린 물에 불고기 양념을 넣어 고기를 재우면 고기 특유의 냄새가 없어지고 육질도 부드러워 나이 드신 어른들이 좋아한다.
또 하나, 찻잎을 넣어 삶은 덩어리 삼겹살을 납작납작하게 썰어 팬에 올린 뒤 은근한 불에 데워 먹을 때 고기 위에 우려낸 찻잎을 조금씩 올리면 상추나 다른 채소가 필요 없다. 주당들은 소주와 삼겹살을 즐기면서도 은근히 콜레스테롤을 걱정하는데, 차와 함께하면 그런 걱정은 접어둬도 된다. 성인병의 원흉이라 할 수 있는 콜레스테롤도 차 앞에선 맥을 못 춘다. 차의 카테킨 성분이 지방 속 미세한 콜레스테롤을 분해해 몸 밖으로 배출하는 구실을 하기 때문이다.
과학이 발달하기 전에는 차 품질을 가늠할 때 고기를 이용하기도 했다. 차를 넣어 삶은 고기가 흐물흐물해지면 그 차를 상품으로 치고, 약간 부드러워지면 차등(次等)품으로 여기던 품다법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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