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새해입니다. 신년의 새날이 밝았다 해도 다들 ‘사는 형편’이야 무어 그리 달라지겠습니까만, 시간의 우물에 새로 차가운 새 물이 솟듯이 그래도 한 해를 시작하는 ‘첫 마음’은 늘 희망으로 출렁거립니다. LIFE & Style이 신년의 첫 여행지로 한강의 물길을 시원(始原)까지 따라가는 여정을 신년의 첫 여행으로 제안하는 것은 그래서입니다. 여정은 남한강 상류, 강원 정선 땅의 동강의 고성리산성 아래 제장마을 쯤에서 시작합니다. 아우라지의 합수머리를 거슬러 올라가고 정선의 조양강을 거쳐 골지천, 그리고 그 끝의 한강발원지 태백의 검룡소까지 올라가는 여정입니다. 이즈음 같은 엄동설한에도 훈김을 내뿜으며 검룡소에서 솟아나는 하루 2000t의 물줄기를 거꾸로 짚어가는 길. 한쪽으로는 눈 쌓인 협곡을, 그 맞은편으로는 아직 얼지 않은 진초록의 물길을 따라갑니다. 세밑에 몰아닥친 매서운 한파에도 동강은 얼지 않았습니다. 꽝꽝 얼어붙었던 남한강이 위쪽의 동강에 이르러서는 시치미를 뚝 뗀 채 찬 물소리와 함께 쉼없이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겨울의 날 선 추위는 마치 필터와도 같았습니다. 겨울이 소리를 걸러내면서 눈 쌓인 겨울강은 마치 진공처럼 침묵으로 가득했습니다. 푸른 빛이 감도는 겨울강의 물빛도 겨울이 걸러낸 듯 티끌 하나 없이 ‘거의 완벽하게’ 투명했습니다. 마치 새로 시작하는 첫 마음처럼, 혹은 말갛고 투명한 정신처럼…. 적막강산의 고요. 그 길에는 사람도, 차도 드물었습니다. 그 길에서 자주 차를 멈추고 겨울 강의 물빛에 취했지만, 간혹 작고 빨간 오토바이를 탄 우편배달부만 지나갈 뿐 마주쳐 비켜달라는 차 한 대 없었습니다. 이런 적막한 산하에 눈발은 분분하게 흩날렸고, 눈을 이고 있는 강변 마을의 집들에서는 장작을 때는지 굴뚝의 흰 연기과 함께 나무 타는 내음이 옅게 번져나갔습니다. 그 길을 푸른 어둠이 내릴 때까지 저물도록 달려보았습니다. 여정의 종점은 검룡소였습니다. 거기서 한강의 물길은 시작됩니다. 눈 쌓인 숲길을 따라 두 뼘 정도 폭으로 성글게 다져진 눈길을 밟아가며 그 끝에서 겨우내 얼지 않는 맑은 물을 만났습니다. 쉼없이 솟는 검룡소의 물처럼, 이제 길고 긴 물길을 따라 한강에 도달할 희망으로 달려가는 새 물처럼, 바야흐로 이제 새로운 시작입니다.
# 겨울강, 소리와 티끌을 모두 빨아들이다. 모든 소리를 다 빨아들인 적요한 겨울 강의 정취를 아시는지. 티끌 하나 없이 푸르게 맑은 겨울강의 빛깔을 아시는지. 동해의 푸른 바다 앞에 서거나, 눈꽃 화려한 태백산의 산정에 올라 불끈 돋는 새로운 해를 기다리는 일출여행. 새해의 ‘첫 마음’을 다지는 여행지로 그만한 곳이 없다지만, 경험으로 미뤄보자면 이런 여행은 대개 해돋이의 극적인 감격보다는 오히려 날 선 추위와 거기까지 가는 수고, 그리고 몰려든 인파의 소란스러움 따위로 기억되곤 한다. 꼭 그래서는 아니다. 기실 시간이란 게 칼로 두부모 자르듯 어제와 오늘이 가려지는 것은 아닌 법. 저문 한 해를 뒤로 하고, 새로 해가 뜬다 해도 그게 어제의 해와 무어 그리 다를까. 어쩌면 시간이란 물처럼 흘러가는 것. 새로 솟는 물이 긴 강을 흘러가듯 그렇게 시간은 구분되지 않고 지나간다. 한 해의 첫머리에 일출 대신 눈발 분분한 날, 거울처럼 맑고 차가운 겨울강을 찾아 첫 물이 솟는 곳까지 거슬러 올라간 것은 그래서였다. 엄동설한에도 쉼 없이 솟아 얼지 않은 채 흘러가는 강물 앞에서, 보내고 또 새로 맞는 시간에 대한 생각은 오히려 더 뚜렷했다. 이따금 생각난 듯 눈발이 지나가고, 강물이 흘러가는 자리에는 다시 끊임없이 솟아나는 새물이 다시 흘러들었다. 어제와 오늘의 구분없이 유장하게 흘러가는 겨울 강 앞에서 첫 마음을 기억하는 일이 어쩌면 더 오래 마음에 새겨질 수 있겠다 싶었다. 먼저 한강에 대한 건조한 설명. 간선(幹線) 유로연장 481.7㎞. 법정하천연장 405.5㎞. 유역면적 2만 6018㎢. 한강이라면 춘천 쪽으로 이어지는 북한강을 떠올릴 수도 있지만, 한강의 본류는 남한강이다. 남한강 위로는 동강이, 그 위로는 또 조양강이 있다. 조양강을 더 거스르자면 골지천의 물길로 이어지고 종래에는 태백의 검룡소에 닿게 된다. 500㎞에 육박하는 한강의 물길을 다 짚을 수는 없는 일. 겨울 한강의 물길 중에서 가장 빼어나면서도 겨울철에도 접근이 쉬운 구간인 동강 상류 끝자락부터 한강이 발원하는 검룡소까지로 길을 잡는다.
# 산성에 올라 강 따라가는 길을 가늠하다. 다른 여행명소들에 밀려나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지만 정선에는 빼어난 전망을 가진 고성리산성이 있다. 한강유역 일대는 삼국시대 쟁패의 요지였다. 고성리산성은 여기까지 밀고 내려와 한강유역을 차지했던 고구려가 신라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지은 것이다. 그러나 그뿐, 언제 누가 쌓은 것인지 더 이상의 이야기는 없다. 그리 높지 않은 산자락이지만 급하게 돌아가는 동강의 물길을 끼고 있는 자리니 성을 짓기로는 더없는 적지였을테지만, 성곽에 서보면 주변 풍광의 아름다움 때문에 이 산성이 전쟁보다는 ‘전망대’의 역할을 했던 건 아닐까 하는 터무니없는 생각마저 들 정도다. 한강의 물줄기를 따라가는 신년 여정의 출발지점으로 여기 고성리산성을 꼽은 것도 단연 빼어난 풍경 때문이다. 고성리산성을 찾아가려면 38번 국도를 따라가다 신동읍사무소 못미처 빠져나가 예미리 쪽으로 제법 가파른 고개를 넘어 고성리까지 가야 한다. 구절양장의 고갯길은 그다지 길지는 않지만 눈이 내린 뒤라면 아예 발을 들이지 않는 게 좋다. 차량통행이 그리 많지 않은 곳이라 제설이 늦어 가뜩이나 가파른 도로가 빙판을 이루는 때가 많다. 자칫 낭패를 당할 수도 있으니 체인 등의 장비가 없다면 아예 정선 쪽으로 물길을 따라 거꾸로 들어오는 편이 더 낫겠다. 산성의 입구는 예미초등학교 고성분교 바로 옆에 조성한 작은 공원을 끼고 있다. 산성까지는 시멘트포장도로에 이은 산길을 걸어 20분 남짓이면 넉넉하다. 성은 해발 425m의 산정상에 있지만 이미 출발지점의 고도가 높아서 그렇다. 고요한 겨울 숲길 주위에는 웬일인지 딱따구리가 많다. 여기저기서 새들이 부리로 나무 둥치를 쪼아대는 소리가 제법 운치 있다. 산성은 성벽이 이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제 1산성에서 제 4산성까지 띄엄띄엄 둥글게 놓여 있다. 번호가 매겨진 성의 성곽의 길이는 100m 안쪽으로 그리 길지 않다. 그 중 눈길을 끄는 것이 제 2산성. 원형이 가장 잘 보전돼 있기도 하거니와 동강의 물길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어서 그렇다. 단정하게 정비해놓은 산성 위에 올라서면 건너편에 우뚝 선 백운산의 아래자락을 급하게 휘감으며 사행(蛇行)하는 동강의 전경을 바라볼 수 있다. 발 아래의 물길 건너 제장마을도 손에 잡힐 듯하다. 산성 중에서 가장 높은 전망대 역할을 하는 3산성에서는 백운산의 치솟은 위용과 검붉은 석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여기에서 강물을 따라 올라 한강이 시작되는 시원(始源)으로 가는 여정을 가늠해 보자.
# 얼지 않은 강가에서 맑은 강바닥을 보다 동강은 아직 얼지 않는다. 남한강물은 영월 아래로는 꽝꽝 흰빛으로 얼어붙었지만, 동강으로 접어들면 거짓말처럼 새파란 강물이다. 주민들은 석회암 지역에서 솟는 따스한 지하수 용출수 때문이라고도 하고, 한겨울에도 제법 힘있게 쏟아지는 강물의 유속 때문이라고도 했다. 마을사람들은 “사나흘은 영하 20도 아래로 내려가고 바람도 죽은 듯 고요한 날이 연속돼 사흘을 넘겨야 비로소 언다”고 했다. 맹위를 떨치는 겨울추위가 막바지에 달하는 2월초쯤 돼서야 언다는 얘기였다. 고성리산성 아래부터 운치리를 지나 동강을 끼고 이어지는 길이야말로 백미 중의 백미다. 동강의 물길 중에서는 물론이거니와 한강을 끼고 있는 모든 길 가운데서도 단연 빼어나다. 특히 겨울강의 정취로 보자면 여기에 견줄만한 곳이 또 있을까 싶다. 강을 따라 이어지는 길에는 눈이 다져진 길도 있고 간혹 빙판도 나타나지만 경사도가 없으니 속도만 늦춘다면 그다지 마음을 졸일 일이 없다. 하기야 이렇게 눈부신 겨울 강의 정취를 보면서 누군들 거기서 속도를 낼 사람이 있을까. 도로는 한적하기 짝이 없다. 눈 속에 파묻힌 강변의 마을에는 나무를 때는 연기만 피어날 뿐 인적은 뜸하다. 이따금 적막강산의 강변에서 빨간 오토바이를 탄 우편배달부를 만나는 것이 고작이다. 눈 쌓인 강변을 따라 운치리, 쉰당골, 약물내기골을 지나면 아름드리 느티나무 뒤로 정선초등학교 가수분교가 있는 가수리 마을에 닿는다. ‘더할 가(加)’에 ‘물 수(水)자’를 쓰는 마을이름처럼 조양강과 동남천의 물줄기가 합쳐지는 곳이다. 여기를 기점으로 하류를 ‘동강’이라 부르고, 정선읍을 휘감고 흐르는 상류를 조양강이라 부른다. 가수리 강변의 수면 위에는 건너편의 눈을 이고 있는 산자락의 그림자가 찍혀 있다. 느타나무 앞을 흘러가는 강물은 말 그대로 ‘청류(靑流)’다. 차를 대고 강변에 쪼그려 앉아보면, 푸른색과 초록의 기운이 뒤섞인 강물 바닥의 돌들이 환히 비친다. 가수리를 지나 귤암리 쪽으로 이어지는 강변길에서는 수묵화 같은 강변 풍경이 이어진다. 쌓인 눈의 흰색과 강변 바위의 검은 색은 다른 색은 다 지워버리고 흑백의 그림을 보여주는데, 마치 흰 종이에 굵은 붓으로 먹물을 찍어 힘차게 그은 듯한 모습이다. 그 수묵화의 너른 자갈 둔덕과 급하게 솟은 직벽 사이를 파고들어 고요하게 흐르고 있었다. 조양강의 물길을 따라 귤암리를 지나서 정선읍에 이른다면 병방치는 꼭 들러보자. 지나온 귤암리의 U자로 크게 굽어 흘러가는 조양강의 풍경을 장쾌하게 내려다볼 수 있는 곳이다. 정선군이 병방치를 관광지로 개발해 절벽 끝에 바닥을 투명유리로 댄 ‘스카이 워크’를 놓았다. 고작 몇 m짜리 스카이워크를 들어가는 데 입장료를 5000원이나 받아 챙기고 있다는 게 마땅스럽지 않지만, 굳이 돈을 내지 않고서도 투명유리 너머로 경관을 충분히 즐길 수 있다. # 가장 적막한 강변의 집들을 지나쳐 가는 길 정선읍에서는 42번 국도에 올라섰다가 읍내를 지나자마자 정선수도사업소 쯤에서 우회전해 석교교 쪽으로 접어들면 다시 고즈넉한 강변길을 만나게 된다. 송오다래길을 따라 덕송리와 문교리를 지나는 이 길은 조양강변 길 중에서 가장 적막하고 깊은 강변마을을 지난다. 물길을 건너는 다리 3개를 건너가면서 강물을 왼쪽으로, 또 오른쪽으로 두고 달리는 이 길에서는 바늘 하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듯하다. 아마도 이쪽에서는 마주 오는 차를 한 대도 만나지 못할 게 틀림없다. 아늑한 강변마을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나무 때는 연기가 더없이 따스하게 느껴지는 것도 주변이 마치 정지상태의 장면처럼 고요하기 때문인 듯했다. 강물을 더 거슬러가다 나전부터는 한동안 번듯한 42번 국도를 따라가야 한다. 그러다 길은 곧 골지천과 송천의 물이 만나 몸을 섞는 아우라지에 닿는데, 여량면소재지 부근부터는 국도를 버리고 골지천 쪽으로 방향을 잡아야 한다. 제1여량교에서 봉정리 방면으로 우회도로를 접어들면 정선소수력발전소를 지나서 반천리 쪽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물줄기의 크기가 줄어들면서 여기서부터 간간이 나타나는 작은 보의 물은 얼음으로 뒤덮여 있지만, 보를 넘어가는 물줄기는 아직 제법 힘찬 물소리를 내고 있다. 반천리의 골지천 변에서는 ‘남한강 수계를 통틀어 가장 아름답다’고 이야기하는 정자 구미정(九美亭)을 놓치지 말자. 구미정은 조선 숙종 때 공조참의를 역임했던 이자(李慈)가 당쟁에 관직을 버리고 내려와 칩거하며 지은 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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