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 기운 ‘5행’이 그 한 잔에 차의 五味
우리 민족은 맛에 대한 감각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사람 성격까지도 맛으로 구분한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사람을 ‘싱겁다’고 표현한다. ‘싱겁게 키가 크다’고도 했다. 하나하나 꼼꼼하고 집요하게 일을 처리하는 사람을 ‘맵다’고 하고, 손해는커녕 빈틈없이 이익을 따지는 사람을 ‘짜다’고 얘기한다. 이렇게 우리는 이런 맛, 저런 맛으로 사람과 세상을 보고 또 살아간다.
차를 마실 때도 5가지 맛, 즉 오미(五味)를 따진다. 맵고(辛) 시고(酸) 떫고(澁) 쓰고(苦) 단(甘)맛을 고루 갖춘 차를 일품으로 친다. 자연의 기운인 오행(五行)을 두루 갖췄으니 완전무결하다는 뜻이다.
여기다 우리 몸인 오장(五臟)에도 이 맛을 맞춰놓았다. 간에 해당하는 동쪽은 신맛, 심장에 해당하는 남쪽은 쓴맛, 신장에 해당하는 북쪽은 짠맛, 서쪽의 폐는 매운맛, 중앙의 비장은 단맛으로 구분 지었다. 실제로 간에는 신 것이, 심장에는 쓴 것이, 비장에는 단 것이 좋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설마 했는데 현대에 와서 과학적으로도 뒷받침됐으니 옛사람의 혜안이 그저 놀랍다.
차의 쓴맛은 카페인, 떫은맛은 타닌, 단맛은 아미노산에서 비롯한다. 차에서 매운맛이나 짠맛, 신맛을 느끼기란 쉽지 않다. 포도주나 향수의 품질을 가리는 전문가가 있듯, 차 등급을 정하는 품차사(品茶師)가 있다. 그들은 차 한 잔을 맛보고 차를 만든 시기와 날씨를 찾아낸다. 언제 찻잎을 땄으며, 솥에서 찻잎을 덖을 때 어떤 나무로 불을 지폈는지도 알아낸다. 어떤 물을 쓰고 어느 정도 끓였는지까지 족집게로 집어내듯 정확히 맞춘다.
차 고수들은 이 오미를 신통하게 가리면서 차 맛을 통해 삶의 맛을 배운다고 말한다. 일본에서는 고졸하면서도 여운이 긴 차 맛과 차 생활을 ‘시부이’라고 한다. 차 맛과 삶의 맛을 한데 묶어 표현한 말이다. 이 말이 ‘쌉쌀하다’의 ‘쌉’에서 나왔다는 말이 있듯 우리의 차 맛과 삶의 맛은 아주 가까이 있었다.
차 생활을 하면서 가장 먼저 익힐 수 있는 삶의 철리(哲理)는 쓴맛이 다하면 단맛이 돈다는 고진감래(苦盡甘來)다. 진하게 우려낸 차를 마시고 조금 있으면 목구멍에서 단맛이 올라옴을 느낀다. 또 조금 사이를 두고 엷게 우려낸 차를 마시면 신기하게도 입안에 단맛이 돈다. 차 맛을 잘 느끼지 못하는 초보자도 한 번쯤 시도해볼 만하다. 차 맛을 쉽게 익히는 방법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가 차를 마시면서 추구하는 최고의 맛은 역시 시원하고 개운한 맛일 것이다. 좋은 차는 마시고 나면 위장에서 하단전인 항문 쪽으로 내려가면서 엉덩이 꼬리뼈로부터 등뼈, 목뼈를 타고 머리 위까지 알지 못할 뜨뜻하고 시원한 기운이 솟구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당나라 시인인 노동(盧仝·795~835?)은 “첫째 잔은 입술과 목구멍을 적시고, 둘째 잔은 외로운 번민을, 셋째 잔은 메마른 창자를 찾나니 생각나는 글자가 5000권이나 되고, 넷째 잔은 가벼운 땀 솟아 평생의 불평 모두 털구멍으로 흩어지네, 다섯 잔째는 기골이 맑아지고, 여섯 잔만에 선령과 통하였다네, 일곱째 잔은 채 마시지도 않았건만 느끼노니 겨드랑이에 맑은 바람이 솔솔 일어나네” 하고 썼을 정도로 차를 마시면 비 개인 하늘처럼 마음이 맑아지고 상쾌한 기분이 든다. 이렇듯 시원하고 개운한 삶, 그 속에 차의 참맛과 차 생활의 참다움이 담겨 있다.
우리의 큰 명절 추석은 잘 쇠셨는지? 추석은 알다시피 가족·친지가 한자리에 모여 햅쌀로 빚은 송편과 햇과일로 상을 차리고 수확의 기쁨을 조상께 알리는 차례를 모시는 날이다. 그런데 정작 추석에 ‘차례(茶禮) 모신다’ 하면서도 실제는 주례(酒禮)상이 된 것이 현실이다.
2006년 한국차인연합회 회보 ‘차인’에 박권흠 회장이 “나는 올 추석부터 명절 차례를 술 아닌 차로 모시기로 결심하고 이를 실천할 것을 선언한다. 그뿐 아니라 내가 주재하는 모든 기제사에도 술 아닌 차로 모실 것”임을 밝혀 전국 500만 차인으로부터 뜨거운 호응을 받았다.
추석 차례상에 차가 오른 역사는 유구하다. ‘삼국유사’ 가락국기편을 보면, 삼국을 통일한 신라 문무왕이 재위에 오른 661년 “가야는 망했지만 수로왕은 나의 외가 쪽 선조이니 제례를 잇도록 하라. 세시(정월 3일과 7일, 5월 5일, 8월 8일과 15일)마다 술, 식혜, 떡, 밥, 차, 과일을 올려라”고 말했다고 한다.
제수품은 모두 여섯 가지다. 놀라운 것은 위 제수품 가운데 차만 빠지고 과일, 떡, 밥, 술, 식혜는 1500여 년이 흐른 지금도 어김없이 올린다는 사실이다. 한 나라의 역사도 천년을 유지하기 어려운 법인데, 이쯤 되면 우리가 문화민족임을 세계에 내놓고 자랑해도 모자라지 않을 것이다.
육당 최남선은 “다식은 차례의 제수요, 차례는 지금처럼 곡물가루로 만든 다식을 올리는 것이 아니라 본래는 점다(點茶)로써 행하였던 것이다. 찻가루를 찻잔에 넣고 차선으로 휘젓는 풍습이 차차 변하여 다른 곡물 등을 반죽하여 다식으로 만들어 제수로 쓰고 그 명칭만은 원래의 뜻을 전하는 것이다”라며, 차례에는 술을 올리는 게 아니라 원래는 차가 제사의 의례물이었음을 환기하고 있다.
전남 광양시 칠성읍 칠성리 나주 나씨 송도공파 종가에서는 오래전부터 추석 차례상에 올리는 제수품으로 차 한 잔, 차송편, 4가지 과일이 전부다. 차례상에 차를 올리려고 종손 나상면(58·보광한의원 원장) 씨와 종부 김영순(56) 씨는 주말이면 종가에서 1시간 거리에 있는 산속 야생 차밭으로 달려가 차나무를 손질한다. 종손은 차밭에서 풀을 뽑고, 종부는 찻잎을 따서 정성껏 만든 차를 추석 차례상에 올리는 것은 물론, 종가에서 모시는 모든 제례에서도 술 대신 쓴다.
종손은 “술을 올리면 부침개나 적을 준비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따르지만 차는 안주가 필요 없어 추석 차례상 차림 걱정을 덜 수 있어 좋다”고 말했다. 맑은 차 한 잔과 햅쌀로 빚은 송편, 그리고 햇밤과 햇대추, 감과 다식 한 그릇으로 조상을 맞이하는 추석은 격이 있어 보이지 않는가. 무엇보다 차례상에 차 한 잔을 올리면 어린아이까지 온 가족이 조상이 마시던 차를 음복할 수 있어 가족 공동체의 따뜻한 정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차례상 음식 만들기에 부담이 없다면 우리의 미풍양속인 설과 추석도 세세연연 이어갈 수 있을 것이다. 제례는 후손의 우의를 다지는 매개체로, 조상을 기리면서도 자기를 돌아보는, 그래서 형제와 후손이 화합하는 데 뜻을 둘 뿐 형식적인 제수품에 뜻이 있지 않음을 옛사람은 누누이 강조했다. 명절을 보낸 뒤 차 한 잔을 마시면서 떠올린 단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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