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철원 "한탄강을 걷다"

醉月 2013. 1. 13. 10:36

철원쪽 한탄강 협곡 중에서 가장 웅장한 풍경이 펼쳐지는 송대소 부근의 모습. 혹한의 추위로 두껍게 얼어붙은 한탄강은 수만 년 전 뜨거운 불과 함께 시뻘겋게 끓어오르던 용암이 흘렀던 자취이기도 하다. 얼어붙은 강 위를 걸으면서 이런 까마득한 협곡을 올려다보는 얼음 트레킹은 철원의 매서운 추위가 선사하는 선물이다.


그 며칠 동안 강원 철원은 말 그대로 ‘혹한의 동토(凍土)’였습니다.

철원 땅의 공식 기온을 재는 지역대표 관측소가 있는 갈말읍이 영하 26.8도. 김화읍의 수은주는 영하 30도까지 떨어진 날이었습니다. 차체 아래쪽에 고드름을 주렁주렁 매단 차들은 여간해선 시동이 걸리지 않았고, 겨우 시동은 건 차들도 짐승처럼 흰 김을 뿜으며 조심조심 얼어붙은 도로를 오갔습니다.

전날 밤까지도 불을 켰던 포장마차는 바퀴가 얼어붙어 꼼짝도 하지 못했고, 추녀에 고드름이 커튼처럼 매달린 가게의 소주병은 얼어 터졌습니다. 큰(漢) 여울(灘)이란 이름의 한탄강이 소리를 다 버리고 적막하게 꽝꽝 얼어붙은 날. 그 단단한 얼음장 위에 올라서 강 위를 걸어봤습니다.



# 가장 뜨거웠던 물길이 차게 얼어붙다

지금은 꽝꽝 얼어붙은 물길이지만, 한탄강은 한때 시뻘건 불길과 함께 끓어 넘치는 용암이 흘렀던 자리였다. 그게 27만 년 전의 일이었다. 서울에서 원산을 잇는 경원선 철로가 북한 땅으로 접어들어서 다섯 번째 역이 견불량역. 여기서 북동쪽 4㎞쯤에서 처음 화산이 폭발했다. 뒤이어 북한 땅인 평강 서남쪽 3㎞ 지점의 오리산에서도 화산이 불을 뿜었다. 백두산과 한라산, 울릉도 성인봉이 일제히 폭발했던 이른바 한반도의 제4계 화산활동의 시기였다.

견불량역 쪽에서 폭발한 화산의 용암은 금세 식어서 굳어버렸지만, 오리산이 뿜어낸 시뻘건 용암이 불바다와 함께 끓어 넘치면서 추가령 계곡을 넘고, 한탄강의 물길 자리를 타고 흘러 임진강 하류까지 무려 90㎞를 달렸다. 화산이 분출한 용암의 양은 어마어마했다. 이때 솟은 용암은 서울의 면적보다 더 넓은 650㎢(1억9600여만 평)의 땅을 뒤덮었다. 용암이 식으면서 한탄강은 막혔지만, 강물은 화산석의 틈새를 가르고 침식하면서 새로운 길을 찾기 시작했다. 기기묘묘한 지금의 한탄강 협곡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한탄강의 풍경은 생겨난 이력만큼이나 첫눈에도 독특하다. 한탄강은 철원 평야의 너른 들판 아래 깎아지른 벼랑을 이루며 푹 꺼진 자리에 있다. 그러니 한탄강을 보려면 협곡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 평야의 땅 아래 갈라진 계곡 사이로 강물이 흐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협곡을 이룬 강 아래로 내려설 수 있는 길이 많지 않고, 거친 협곡에다 곳곳에 바위가 있어 배를 띄우기도 쉽지 않으니 한탄강은 주로 ‘내려다보는’ 풍경으로만 익숙하다.

그러나 요즘 같은 혹한에는 사정이 다르다. 얼어붙은 강의 수면 위로 내려설 수 있고, 언 강물 위에 쌓인 눈 위에 발자국을 찍으며 걸을 수 있으니 말이다. 한탄강이 겨울 혹한기에만 잠깐 허락하는 여정. 언 강의 수면 위로 치솟은 주상절리 협곡의 직벽 아래를 걷는 길. 이름 하여 한탄강의 물길을 따라가는 ‘얼음 트레킹’이다.


# 얼음폭포의 근육과 석벽의 뼈대

한탄강 얼음 트레킹 코스는 보통 직탕폭포 아래에서 시작해 송대소를 지나 승일교까지다. 다 걷자면 두어 시간 남짓이 걸리는 짧지 않은 길. 더러는 겨우내 혹한이 몰아쳐도 얼지 않는 승일교 아래쯤에서 발길을 멈추고 다시 고석정에서 시작해 순담계곡까지 발을 딛는 이들도 있지만, 웬만하면 거기까지 가지 않는 게 좋겠다.

한탄강 수계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화강석 기암으로 이뤄진 순담계곡의 절경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급류를 이루는 이쪽은 수면 위에 얼음이 얇아진 곳들이 지뢰처럼 깔려 있다. 그러니 사정에 밝은 현지 주민과 동행하지 않는다면 승일교쯤에서 더 욕심을 부리지 않는 게 낫다.

트레킹 코스의 출발지점인 직탕폭포는 곳곳에 거대한 고드름 기둥을 세우고도 그 틈으로 찬물이 우레와 같은 소리를 내며 쏟아져 내린다. 다른 계절에 직탕폭포 앞에 서본 이들이라면 고작 5m 남짓에 불과한 폭포의 높이에 실망하기 십상이지만, 겨울철의 풍경은 사뭇 다르다. 힘찬 물살이 쏟아지면서 얼어붙은 형상이 마치 울끈불끈 근육질의 모양을 닮은 데다, 푸른빛이 감도는 얼음 사이로 쉼 없이 쏟아지는 진청색 물색을 바라보노라면 비장감마저 느껴진다.

직탕폭포 아래서 강에 발을 들여놓았다. 세밑과 신년에 걸쳐 언 강 위에 쏟아진 눈은 아무도 밟지 않은 채 순백으로 빛났다. 인근 주민들은 “강을 덮은 얼음장의 두께가 족히 80㎝는 넘을 것”이라며 “걱정일랑 붙들어 매시라”고 했지만, 막상 한 발 두 발 깊은 강으로 걸음을 들여놓자 가슴이 두방망이질했다. 얼음장 저 아래쯤에서 ‘우지직’ 소리가 들리는 듯했고, 내딛는 발이 급작스레 푹 꺼질 것도 같았다. 가장 공포스러웠던 것은 얼음판 한가운데 채 얼지 않은 몇 개의 ‘숨구멍’에서는 쿨럭쿨럭 푸른 물이 솟아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쌓인 눈 아래 푸르게 빛나는 얼음판을 가로질러서 딱 한 번 강을 건너가 보니 두려움은 금세 달아났다. 아무도 딛지 않은 눈 위에 홀로 발자국을 내면서 얼음장 위에서 미끄럼을 타기도 했고, 강 건너 직벽으로 다가서서 폭포처럼 쏟아지는 형상의 육각형 바위 주상절리를 만져보기도 했다. 거기서 가장 놀라웠던 것은 강의 한복판에 들어섰을 때, 강 밖에서와는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는 것이었다.

# 현무암 기암절벽 아래 강 위를 걷다

얼음 트레킹 코스의 출발지점은 직탕폭포지만, 폭포 아래 얼음을 딛기가 좀 조심스럽다면 아예 송대소 구간부터 시작하는 것도 좋다. 송대소부터 얼음 트레킹의 종점인 승일교까지는 최근 철원군이 얼음판 위에 철심을 박아 트레킹 코스를 안내해두었다. 알음알음 얼음 트레킹을 찾아오는 이들의 안전을 위해 올해 처음 설치해놓은 것인데, 덕분에 송대소부터 승일교까지는 개별적으로 찾아가더라도 안심하고 얼음 위를 걸을 수 있다.

한탄강 얼음 트레킹에서 최고의 경관이 펼쳐지는 곳은 깎아지른 석벽을 끼고 있는 송대소 구간이다. 송대소란 개성 송도사람 삼형제가 와서 둘이 이무기에 물려 죽고 나머지 한 사람이 이무기를 잡았다는 전설이 깃든 한탄강의 깊은 소(沼). 높이 30m가 넘는 거대한 현무암 기암절벽에는 결대로 떨어져나간 주상절리들이 촘촘하다. 겨울철에 보여주는 직벽의 뼈대는 가히 장관이다. 반대편 직벽에는 바위틈으로 흘러내린 물이 샹들리에처럼 얼어붙어 또 다른 정취를 자아낸다. 깊은 곳의 수심이 무려 20m는 넘는다지만, 단단하게 얼어붙은 송대소 협곡을 걷노라면 안온한 느낌마저 든다.

단단하게 얼어붙은 송대소를 지나면 군데군데 급류로 얼지 않은 소들이 드러나 있는데, 위험구간에서는 줄을 매어두고 강변으로 우회할 수 있도록 해두었다. 얼음판 위에 찍혀 있는 발자국을 길잡이 삼아 따라가도 안전에 문제가 없긴 하지만, 위험구간을 막은 끈과 얼음판 위에 박아둔 철심 몇 개로 적잖이 안심이 된다.

# 다리 아래 물길 따라 흐르는 뜨거운 숨결

송대소를 지나면서부터 승일교까지는 강폭이 제법 넓어진다. 송대소 부근에서는 협곡에 눈길을 빼앗겼다면 이제부터는 느긋하게 눈 쌓인 강변과 얼지 않은 작은 소의 물빛을 즐기는 시간이다. 간혹 미끄러운 얼음판에 엉덩방아를 찧기도 하겠지만, 굳이 얼음판 위에서 아이젠을 챙겨 신을 필요는 없다. 빙판에 올라서보면 알겠지만 아이젠보다는 균형을 잡거나 디딜 얼음판을 두드려보는 데는 등산용 스틱이 훨씬 더 유용하다.

얼지 않은 물길과 소를 피해 강변으로 내려섰다가 다시 언 강 위로 올라서길 대여섯 번쯤 하다보면 곧 한탄강을 가로지르는 다리인 승일교 아래에 당도한다. 얼음 트레킹이 아니라고 해도 철원을 찾았다면 승일교는 따로 들러볼 만하다. 경관이 그다지 빼어나진 않지만 다리 하나에 새겨져 있는 의미 때문이다.

승일교는 6·25를 전후해 남북이 밀고 밀리면서 남측이 착공하고, 북측이 공사를 이어받았으며 미군 공병대가 완공하면서 아이러니한 ‘남북 합작’의 역사가 깃들어 있는 곳. 그래서 승일교란 이름도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승(承)자와 김일성의 일(日)자를 따서 붙여졌다.

그러나 우리 군의 입장에서는 다리 이름에 김일성의 이름 한 글자가 붙여진 채 불리는 게 적이 당혹스러웠을 터. 그래서 1985년 군부에서는 6·25 때 한탄강을 건너 북진하던 중 서른한 살의 나이로 전사한 고 박승일 대령을 기린다며 ‘승일’이란 이름은 그대로 둔 채 한자를 본래의 ‘承日’에서 ‘昇一’로 바꿨다. 그러나 땅 이름이나 다리 이름이 이런 의지만으로 바뀔까. 그 뒤로도 여전히 다리는 ‘承日’이란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승일교에 갔거들랑 교각 위에서 신경림 시인의 ‘승일교 찬시’ 한 구절 읽어볼 일이다. “이 다리 반쪽은 네가 놓고 / 나머지 반쪽은 내가 만들고 / 짐승들 짝지어 진종일 넘고// 강물 위에서는 네 목욕하고 / 그 아래서는 내 고기 잡고 / 물길 따라 네 뜨거운 숨결 흐르고/…”.

# 뜨거운 용암이 흐르던 평강고원 앞에 서다

트레킹 종점인 승일교 하류 쪽에도 고석정과 순담계곡으로 이어지는 빼어난 풍광을 펼쳐진다. 순담계곡 쪽은 얼음이 두껍지 않아서 발 딛기가 조심스럽지만, 고석정 앞의 강물은 지금 꽝광 얼어 있어 내달리면서 얼음을 지칠 수 있다.

트레킹의 출발지점인 직탕폭포 위에도 명승이 없을 리 없다. 하지만 한탄강 상류는 민간인통제선(민통선)과 군사분계선에 막혀 더 이상 오를 수 없다. 민통선 내의 한탄강에는 적벽과 월탄, 백운봉, 풍혈 등의 빼어난 풍경이 있었고, 이런 풍경을 내려다보는 자리에는 육모정과 창랑정, 무릉정 같은 기막힌 정자가 서 있었다고 전한다. 거기서 한탄강을 더 거슬러 올라간 북한 땅에는 명주실 한 꾸러미가 들어가고도 남았다는 깊은 소인 ‘마룡소’ 그리고 폭포 아래로 맑은 물이 고여 있는 ‘자연담’의 빼어난 경관이 전설처럼 전해진다.

아쉬움을 달랠 겸 찾아가볼 만한 곳이 철원 평화전망대다. 지난 2007년 완공한 전망대는 민통선 내 군사분계선에 있어 고석정 입구의 철의삼각전적지관광사업소에서 출입신청을 한 뒤 드나들 수 있는데, 전망대 2층에서는 옛 궁예의 도성이 있었다던 드넓은 평강고원을 내려다볼 수 있다.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면 멀리 고원 너머로 김일성고지와 피의 능선이 펼쳐지고, 오른쪽으로는 6·25전쟁 당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는 낙타고지가 손에 잡힐 듯하다.

전망대에 서면 군사분계선의 삼엄한 철조망과 낙타봉 옆 고지 위에 세워진 북한군 초소가 남북 분단의 현실을 시리게 일깨우지만, 이런 전쟁과 분단의 풍경 말고도 뜨거운 불바다와 함께 시뻘건 용암이 흘러넘치던 수십만 년 전의 시간을 상상해볼 수 있다.

낙타 혹처럼 생긴 봉우리인 낙타고지 너머에 한탄강의 물길을 용암으로 가득 메웠던 화산이 분출했던 오리산이 있기 때문이다. 수십만 년 전의 불과 함께 시뻘건 용암을 강으로 흘려보냈던, 지금의 한탄강 협곡의 지형을 만들어낸 모산(母山)이 거기 있다. 두루미가 날아들고, 고라니며 멧돼지가 눈밭 위에 어지럽게 발자국을 찍어놓은 비무장지대(DMZ) 동토의 평야 너머에….


가는 길= 외곽순환도로 퇴계원나들목에서 일동 방면으로 43번 국도를 따라 운천을 지나고 신철원(갈말읍)을 지난다. 문혜교차로에서 고석정 방면으로 좌회전해 463번 지방도로를 따라 고석정 앞을 지나서 마당바위펜션 이정표를 보고 우회전해 들어가면 한탄강의 물길을 만나게 된다. 트레킹은 직탕폭포 아래서부터 시작하기도 하지만, 보다 안전한 트레킹을 위해서는 송대소를 출발지점으로 삼는 것이 좋다. 송대소 쪽으로 내려서려면 강변의 펜션 ‘모닝캄빌리지’ 안으로 들어가 나무계단을 타고 강가로 접근하면 된다. 민간인통제선 안에 있는 철원평화전망대는 전적지관광사업소에 신청해서 오전 9시 30분, 10시 30분, 오후 1시, 2시 등 하루 4회 출입할 수 있다. 신분증 지참은 필수다. 전적지관광사업소 033-450-5558


묵을 곳 & 먹을 것= 위치로 보나 시설로 보나 고석정 부근의 한탄리버스파호텔(033-455-8275)이 가장 추천할 만한 숙소다. 호텔 내에는 온천도 갖추고 있다. 한탄강 협곡 위쪽에는 강을 내려다볼 수 있는 펜션들이 많다. 가장 대표적인 곳이 송대소를 끼고 있는 모닝캄빌리지(033-455-2011). 상자 형태의 세련된 건물로 시설은 물론이고 전망도 빼어나다. 인근에 아르고(010-9342-4367) 흙내음(010-5047-4864) 금비 물보라(010-6489-5090) 마당바위(010-4369-5324) 산들강(033-455-1070) 은빛여울(033-455-3630) 리버(033-455-7838) 푸른숲(033-455-9684) 노스탤지아(033-455-1497) 등이 있다. 모텔로는 신철원 초입의 박스도로시(033-455-1234)가 깨끗한 편이다.

철원에는 이렇다할 맛집이 눈에 띄지 않는다. 겨울 추위가 혹독해서인지 만둣국을 내는 식당들이 많다. 신철원 터미널 부근의 ‘곱창마을’(033-452-7077)은 정작 주메뉴인 곱창전골보다 만둣국을 찾는 단골 손님이 훨씬 많다. 소를 꽉 차게 넣어 손수 빚어낸 김치만두를 넣고 끓인 만둣국이 추위를 저만치 물러나게 한다. 인근의 철원막국수(033-452-2589)는 강원도식 막국수와 돼지고기편육, 녹두빈대떡 등을 내는데, 겨울에는 꿩만둣국을 끓여낸다. 고석정 인근의 삼정콩마을두부집(033-455-9284)과 메기매운탕을 내는 직탕폭포 옆의 폭포가든(033-455-3546)도 괜찮은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