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차길진_못다한 영혼이야기_10

醉月 2011. 1. 19. 08:51

어머니의 자식사랑

대기업 중견간부 O씨. 20여 년 간 한 직장서 젊음을 바친 그에게도 구조조정이라는 위기가 다가왔다. 구제 금융 시대는 성실과 아무 관계가 없는 듯했다.
그러나 O씨는 자신의 문제보다 더 큰 걱정거리가 있었다. 이제 고3, 얼마뒤면 대학입시를 치러야 할 아들이 학교를 그만두겠다는 것이었다. 실력이 없어 시험을 안 보겠다는 것이 아니라 학교 자체를 중퇴하겠다는 것이니 부모로서 얼마나 답답한 일이겠는가.
대리고 설득하고 빌어도 아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하고픈 일을 하겠다며 아직 말할 때가 아니니 자기를 믿고 몇 년만 기다려 달라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막연히 몇 년이라니, O씨 부부는 더욱 답답했다. 한참 이야기를 들어보니 뭔가 짚이는 게 있었다. 그래서 구명시식을 권했다.
며칠 후 구명시식 현장에서 O씨 집안의 가슴 아픈 사연이 드러났다. 전라도 중소도시의 공무원이던 아버지는 매우 메마른 분이었다. 정이 없는 남편 때문에 가슴앓이를 하던 어머니는 가뜩이나 쪼들리는 살림에 아이들 교육에 더욱 마음고생을 했다. 자식을 공부시키려는 어머니는 자꾸 빚을 얻어 쓰게 됐다. 너무 큰 덩이로 변한 빚. 설상가상으로 남편이 알게 됐다. 남편은 공무원으로서 자기 체면만 생각하고 왜 빚을 지게 됐는지 알려고도 하지 않고 어머니를 구박하기 시작했다. 급기야 어머니는 자살하고 말았다.
큰아들인 O씨도 이러한 자세한 내막은 모른 채 막연히 어머니가 빚을 잔뜩 지고 자살했다는 부정적인 기억만 있었다. 그 후 아버지는 재혼했고 현재의 동생들은 새어머니의 자녀들이었다.
한 맺힌 어머니 영가는 실로 오랜만에 올리는 자식의 제사를 받고 매우 감격하는 듯했다.
몇십 년간 맺힌 원혼이 봄눈 녹듯 사라지는 것 같았다. 이윽고 자신의 아들에게 ‘내가 모든 것을 돌봐줄테니 걱정말라’고 하는 것이었다. 아울러 ‘아들(고3 손자) 문제도 아들의 뜻을 믿고 따르라’고 했다.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인가. 생전에 어떻게 키운 아들인데, 그 아들의 소망을 어머니는 죽어서까지 이뤄주려 애쓰는 현장이었다. 어머니의 위대함을 다시 한 번 절감했다. 그 후 O씨의 아들은 예능분야로 진로를 결정했고 O씨는 감원의 한파와 무관한 채 되레 승진, 부러움의 대상이 됐다. 더욱더 열심히 일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이유있는 반항

미국 뉴저지에 있을 때의 일이다. 어느날 법당 안으로 들어서는 이가 있었다. 아들 문제로 속썩고 있다는 L여사. 서둘러 인사를 마치고 자리에 앉자마자 그녀는 거의 한시간을 혼자서 얘기했다. 아들문제뿐 아니라 가정과 남편 문제 그리고 시댁문제까지 끊임없이 털어놓았다.
필자는 그저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그 동안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대상이 얼마나 없었으면 이럴까. 속마음을 얘기할 수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기쁜 듯 했다. 그리고 다시 그녀의 화제는 아들로 돌아왔다.
아들의 문제는 어머니인 L씨에게 있었다.
20여년 전, 미국으로 이민한 L씨 부부는 갖은 고생 끝에 현재의 발판을 마련했다. 정신없이 일하느라 자녀들 돌보는 일에 소홀할 수 밖에 없었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는 아들은 자꾸 부모의 기대에 어긋나는 길로 나갔다. 자신들보다는 자녀에게 더 좋은 미래를 안겨주려고 더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고자 고국을 떠나 고생하는데, 아들은 기대에 훨씬 못 미치고 있으니…. 게다가 이제 좀 살 만하니까 터져나오는 온갖 문제들까지.
필자는 단호하게 일러줬다.
모든 문제를 타인 탓으로만 돌리지 말고 내게 문제가 있지 않나 살펴보라고.
모든 문제의 한가운데에는 L씨가 있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땅에서 생존하기 위해 그녀는 하고 싶은 일과 꿈을 모두 접어둬야 했다. 처음에는 그 꿈들이 금방 이뤄질 줄 알았다. 그러나 온실의 화초처럼 자라 온 그녀에게 이국땅은 커다란 산이었다.
넘지 않으면 생존하지 못하는 가파른 산. 일단 접어둔 그 꿈들을 자식을 통해 이루고 싶었다. 아들은 무한한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 그러나 어느덧 그녀의 기대치와 너무 멀리 가있는 아들을 보게 됐다. 내 잃어버린 젊은 날의 꿈은 어떡하나.
더욱 안타까운 마음에 아들을 다그치게 됐고, 그럴수록 아들은 더 멀리 달아나면서 과잉보호하지 말라고 했다. 결국 모든 문제는 그녀에게 있었다. 자신의 고생을 보상받으려는 심리.
그래도 자기 얘기를 털어놓을 수 있다는 것은 50%쯤 문제를 해결한 셈이다. 나머지는 지금까지의 고정관념을 스스로 박차고 자신의 문제를 직시하는 것이리라.

임종 못 봐, 죄송합니다

추석을 앞두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3년 전 미국 뉴저지 후암정사에 머물 때였다. 현지서 사업을 크게 하는 B씨가 반드시 추석 당일에 구명시식을 올려달라고 부탁했다. 그에게는 추석 명절에 얽힌 가슴 아픈 사연이 있었다.
미국 이민 20년이 넘는 B씨는 고국의 어머니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해 늘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 동안 어머니에게 너무 불효한 것 같아 구명시식을 통해 속죄하고픈 생각도 있었다.
충청도 산골이 고향인 B씨는 매일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추석에도 차례상에 올릴 것이 없어 늘 처량하게 보내곤 했다. 어머니는 어쩔 수 없이 절에서 3년간 공양주 보살 노릇을 해야했다. 새경도 한푼 받지 않은채. 그러면서도 장남인 B를 위해 하루도 빼놓지 않고 지극정성으로 ‘우리 아들 잘되게 해달라’는 기도를 드렸다. 그러나 B는 “받을 것 받아가며 일해야지, 왜 바보같이 돈 한푼 받지 않고 일하느냐”며, 집을 뛰쳐나와 버렸다.
그 후 그는 우여곡절 끝에 미국에 가서 부자가 됐다. 조국에 계신 어머니가 작고한 것도 나중에야 알았다. 미리 알았어도 한창 고생 중이던 그는 가보지 못했을 것이다.
B씨는 화를 내며 집을 나왔던 일이 항상 마음에 걸렸다. 그 탓에 어머니 가슴에 큰 멍이 들었을 것이고, 이후로 장남의 소식을 듣지 못해 안타까워하다 숨을 거뒀을 어머니를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차릴 것이 없어 슬프고 우울하게 보내야 했던 추석 때의 어머니 생각이 났다. 그래서 굳이 추석날 구명시식을 해달라고 간청한 것이었다.
구명시식에 나타난 어머니 영혼은 B씨에게 ‘어려운 다른 형제들을 도와주라’고 했다. 장자로서 B씨는 그 동안 사는데 급급해 자신의 형제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전혀 돌보지 않았었다.
구명시식 직후 그는 형제들을 찾았다. 장남이 미국으로 가버린 집안의 가족들은 몹시 어렵게 지내고 있었다. 미국에서 크게 성공한 큰형이 나타나자 동생들은 그가 잘 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뻐 어쩔 줄을 몰랐다. B씨가 경제적으로 도움을 주려 하자 모두들 거절했다. 그러나 구명시식에서의 어머니 뜻이라 하니 동생들은 마지못해 B씨의 정성을 받아들였다.
현재 그는 3년전보다도 더 큰 부호가 됐다. 3년전 형제들에게 준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가 받은 셈이다. 어머니 영가의 ‘베풀라’는 가르침대로 했을 뿐이지만, 모든 것은 고스란히 그에게로 다시 온 것이다.
선한 마음으로 주는 것은 곧 받는 것이라는 진리가 새삼스러운 구명시식이었다.

시험끝날 때까지 살아있으마

작가 M씨는 필자가 매우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 또한 필자를 좋아한다. 구명시식을 집전하는 모습을 경외감 어린 눈으로 바라보곤 한다. 그러나 그에게 구명시식을 권한 적이 없다. 너무 친한 사이라 그런 듯싶다. 친한 친구 사이에서는 각자 하고 있는 일보다 ‘친구’라는 사실이 더 와 닿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십여 년 간 말없이 구명시식을 곁에서 지켜볼 다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구명시식을 요청했다. 어머니가 신부전증으로 종합병원 중환자실에 갑자기 실려가게 됐다며 어머니를 위해 구명시식을 꼭 올려야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와 얘기하면서 그의 어머니 형상을 그려보니 어머니는 소생할 분이 아니었다. 영이 뜬 상태, 즉 돌아가실 분이었다.
“당신 어머니는 돌아가실 수밖에 없으니 구명시식도 소용없다”면서 정중히 거절했다. 그러자 그는 “내 돈은 돈이 아닌가. 제발 나도 구명시식 좀 하게 해달라”며 화를 버럭 냈다.
그러더니 결국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내 소원일세, 돌아가실 때 돌아가시더라도 편히 가실 수 있도록 구명시식을 올렸으면 하네. 더도 덜도 말고 내 아들이 수능시험 보기전에는 돌아가시지 않게 해주게. 제발 부탁이야.”
간절한 소망이 담긴 친구의 처연한 눈빛을 보니 더 이상 거절할 수 없었다. 마음을 다해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정심(正心)을 다해 그의 어머니 생명을 연장해 주십사, 염력을 동원해 기도했다.
몇 달 후 수능시험이 끝났다. 필자의 딸도 그때 수능을 치렀으므로 우리 부부는 오랜 짐을 벗은 듯 편안한 마음으로 저녁을 먹고 있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M이었다.
“자네 덕분에 편하게 가셨네. 어쩌면 그토록 손자 녀석이 시험 보는데 지장 없도록 하시려 했는지….”
자손들을 편하게 배려해 준 그의 어머니 마음 씀씀이에 또 한번 탄복했다. 부디부디 잘 가시도록 정성을 다해 기도했다. 참으로 가슴 아팠다.
알고 있는 사실을 이야기함으로써 남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것, 정말로 힘든 일이다.
그래서 필자는 사람을 많이 사귀지 않았으면 한다. 그들과 친해지면서 그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이 생길 것 같은 탓이다.

아버지들에게 용기를

IMF 구제금융 시대에 많은 아버지들이 희생을 당했다.
H도 하마터면 허무하고 쓸쓸한 한해를 맞을 뻔한 이였다. 그러나 그는 밝은 모습으로 한해를 보냈다.
퇴직한 H는 사업을 했다. 조금씩 일을 확장하면서 그 분야에서만큼은 어느 정도 실력을 인정받는 회사로 키워나갔다. 하지만 작년 IMF 위기를 비켜 가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회사는 조금씩 기울어갔다.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나 할까, 절친한 친구의 은행보증을 섰는데 친구는 만기일이 다 돼도 은행빚을 갚지 못했고 급기야 H에게로 은행 독촉이 넘어왔다.
이어 부모가 물려준 집마저 경매에 넘어가 차압이 붙는 등 연쇄 위기에 몰리고 만 것이다. 결국 그는 초죽음 상태가 돼 필자를 찾았다. “죽음을 각오하니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이왕 죽는 것, 구명시식을 받고 싶어요.” 그래서 H는 마지막 남은 비상금을 털었다고 했다. 그러나 피와 물은 구별해야 하는 법, 어찌 피 같고 목숨 같은 돈을 받을 수 있겠는가. 그의 돈을 돌려 줬다.
정성껏 구명시식을 모셨다. 제단 앞에 술잔을 올리니 생각지도 못한 영혼이 나타났다. 얼마 전 사고로 죽은 회사 후배의 영혼이었다.
후배 M은 작업도중 사망했다. 그리고 H는 법적 보상금 7,000만원보다 많은 1억원을 보상해줬다. M영가는 그 일을 말하며 매우 고마워했다. 그리고는 H에게 간곡히 청했다.
“선배님, 자살하지 마세요. 제가 선배님을 돌봐드릴게요.” 놀라움 반, 반가움 반이 뒤범벅 된 H는 감개무량했다. 눈물을 쏟으며 “열심히 살아가겠다”고 후배 영가에게 말했다.
이승과 저승을 잇는 선후배의 감격스런 만남이었다.
3일 후, H는 필자를 다시 찾아와 대뜸 큰절부터 올렸다. 어느 대기업에서 오라고 했다는 것이다. 회사는 망했지만 H는 스카우트 돼 좋은 조건으로 취업했으니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더욱이 집과 승용차까지 제공받는 안정된 직장이라 했다. H는 자신에 찬 목소리로 얘기했다. “이제 인생을 다시 시작했습니다. 고맙습니다.”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그러면서 자신은 사업가 타입이 아닌 것 같다며 “역시 월급쟁이가 제격”이라는 우스갯소리까지 했다.
‘귀신은 공짜밥을 먹지 않는다’는 진리를 새삼 확인한 순간이었다. 아울러 영혼의 존재를 더욱 확실히 증명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아버지의 만두타령

오래 전 부산 다대포 앞바다에서 대형 참사가 있었다. 남영호라는 큰 배가 침몰, 수백 명이 물에 빠져 죽은 사고였다. 당시 사상자 명단은 아직까지도 완전히 파악되지 않았을뿐더러 상당수 시신들도 인양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있다.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유명 전자회사 대표인 Y씨의 아버지도 당시 사망자 중 한 명이었다. 그런데 구명시식에 나타난 아버지 영혼은 여느 혼령과 달리 비교적 안정된 상태였다. 대부분의 익사자 영혼은 배고픔과 추위를 호소한다. 그러나 아버지의 영혼은 뜻밖에도 달관한 듯 의연한 모습이었다.
영혼은 특히 아들 Y씨가 열심히 공부하고 일해 전자업체 사장으로 입신하기가지 겪은 온갖 어려움을 기특히 여기는 자상한 부정을 보였다.
“네가 훌륭하게 돼 고맙구나.”
그토록 온화한 영혼이었지만, 아니나 다를까 ‘만두를 빚어 제사 지내달라’는 부탁을 빼놓지 않았다. 배고프고 춥고 깜깜한 곳에서 무섭기만 하다는 식으로 자신의 처지를 호소하지는 않았다. 물론 괴로운 상황에 처했다는 것을 알 수는 있었다. 영혼은 죽을 당시 모습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생전의 업이나 인격에 따라 영혼의 수준이 다르기는 하다. 그러나
익사한 영혼들은 예외 없이 제사를 지내주길 바라며 아울러 제사 음식으로 꼭 만두를 요구한다. 왜 하필이면 만두인가.
<삼국지>에도 만두 얘기가 나온다. 촉나라 유비의 군사(軍師)인 제갈 공명의 관련 기록이다. 제갈 공명은 삼국이 정립하던 시기에 남쪽, 서쪽으로 영토를 넓히고자 현 베트남 베나 쪽까지 군대를 보냈다. 그러나 노강(베나 북부에 있는 강)이라는 사나운 강에 이르러서는 번번이 시련을 맞을 수밖에 없었다.
물살이 너무 세고 험한데다 수심까지 깊은 탓이었다. 숱한 병사들이 강을 건너다 희생당했다. 인명 피해가 계속되자 제갈 공명은 물귀신들 소행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래서 노강 속 귀신들을 달래는 제사 막바지에 사람 얼굴 모습과 비슷한 음식인 만두를 빚어 물에 뿌렸다. 만두를 동원한 진혼의식을 거친 후에야 유비의 군대는 비로소 노강을 건널 수 있었다.
제갈공명이 왜 만두를 뿌렸는지에 관한 해석은 분분하다. 물귀신들이 사람의 생명을 제물로 삼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과,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표피가 터져 물고기가 만두를 먹을 수 있기 때문이라는 설 등등.
어쨌든 구명시식을 통해 분명히 파악한 사실은 ‘익사자의 영혼은 추위와 배고픔을 이기기 위해 만두로 제사를 올려주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1등 복권 찍어준 선친

10여 년 구명시식 현장에서 숱한 사연들을 보아 왔다. 대부분 가슴 아픈 이야기들이지만, 얼마전 S씨 구명시식은 재미있고도 신기한 기억으로 남는다. 20여년 전 운명한 아버지를 위한 구명시식을 요청한 S씨는 효심이 극진했다.
그 동안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아버지는 아들인 S씨의 꿈에 나타나 길을 일러주곤 했다고 한다. 20여 년 전 S씨가 사업에 실패했을 때였다. 실의에 빠진 그에게는 또 다른 문제가 있었다.
나이 꽉 찬 여동생을 시집 보내는 일. 마침 맘에 드는 참한 젊은이도 있었다. 하나뿐인 여동생, 면사포만 씌워 결혼식만 치러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고민하던 S씨가 어느 날 새벽 깜빡 잠이 들었다. 그런데 꿈에 얼마 전 별세한 아버지가 나타났다. 가장 무거운 짐을 진 맏아들의 등을 토닥이던 아버지는 갑자기 ‘얘야, 아침에 깨거든 얼른 나가 복권 5장만 사거라.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다’고 일러줬다.
잠에서 깨보니 새벽 5시. S씨가 서둘러 옷을 챙겨 입고 역 부근에 가보니 복권파는 이는 아직 나와 있지 않았다. 그는 무려 4시간을 기다려 복권 5매를 샀다. 1주일이 그토록 긴 시간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당첨 발표일이 다가오면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발표날, 그는 기절하는 줄 알았다. 1등 번호와 자신의 번호가 똑같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연이어 산 복권 5장이 1등은 물론 아차상 등에 계속 당첨돼 무려 1,000만원이 넘는 돈을 타게 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는 아버지에게 감사했다.
20년 전, 1,000만원은 요즘 1억 원보다 더 큰돈이었다. S씨는 그 돈으로 여동생을 시집 보냈음은 물론, 집도 사고 사업을 재개할 수 있는 기반을 다져 오늘날에 이르렀다. 그러는 동안 줄곧 꿈에 나타나던 아버지가 근래 들어서는 감감무소식이었다. 그래서 구명시식을 통해 아버지의 안부를 알고자 했던 것이다. 며칠 후 S씨의 구명시식 현장. 아버지 영가는 더욱 신기한 말을 했다.
“얘야, 나는 네 아들로 환생했다. 그 아들은 큰 보배가 될 것이다.”
S씨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다. 스무살 된 셋째 아들은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했다.
자신이 효자가 아니면서 어찌 효자 보기를 원하겠는가. 은행에 저금도 않으면서 어찌 돈을 찾으려 하며, 땅에 농사도 짓지 않으면서 어찌 수확하려 드는가.
자녀에게 문제가 있는 사람은 곧 부모에게 잘못하는 사람이다. 본인은 아니면서 자식들에게만 잘하라고 하는 부모라면 부모의 자격이 없다. 그러나 S씨는 반대였다. 평소 그의 지극한 효성은 자녀들에게 이심전심으로 이어졌다. 얼굴도 보지 못한 할아버지에게 드리는 아버지의 효심을 아들은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었다.
S씨는 구명시식을 통해 자기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필자는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구명시식은 산자와 죽은 자를, 참으로 아름다운 매듭으로 이어준다는 사실을….

할아버지 덕에 IMF도 모릅니다

구조조정이다 뭐다 해서 나라 전체가 위기감에 휩싸여 있다. 그러나 필자가 평소 가까이 지내는 모그룹 P씨는 이런 시대상황과는 무관하게 자기의 갈 길을 가고 있을 뿐이다.
P씨는 50년 이상 한 길을 달려온 기업가다. 소문나지 않은 알부자고 준재벌급에 속하는 기업체를 운영중인데, 필자에게 말없이 많은 교훈을 주는 분이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꼭 알아야 하고 경계해야 할 일이 있다.

▲부자로 살면서 사치에 빠지지 말아야 하며

▲권력이 있을 때 교만에 빠지지 말 것이며

▲돈이 없을 때 비굴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부자인 P씨는 검소하다. 아주 평범한 소시민처럼 보이는 그는 털털한 모양새다. 그는 1년에 한 번씩 꼭꼭 구명시식을 올린다. 그래서인지 그의 기업체는 구조조정의 회오리 속에서도 굳건히 견디고 있다. ‘구르는 돌에는 이끼가 끼지 않는다’는 말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2년 전 IMF가 터지기 직전이었다. P씨는 그날도 1년에 한 번씩 조상께 올리는 구명시식을 거행했다. 자신의 기업이나 가정, 그 어느 곳 하나도 모자람 없이 잘 구려 나가는 P씨는 구태여 구명시식을 올리지 않아도 되는 케이스였다.
하지만 구명시식 날, P씨와 현장을 지켜본 모든 이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구명시식에 나타난 그의 할아버지 영가의 다음과 같은 한 마디 때문이었다.
“제 2금융권에서 꾼 돈 3,000억 원을 당장 갚아라.”
P씨에게 할아버지 영혼의 말을 전하니 그는 깜짝 놀랐다.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조상 영가의 갑작스런 이르심에 혼비백산한 P씨는 구명시식 직후 제2 금융권서 쓰고 있던 돈을 재빨리 정리하기 시작했다. 다른 은행돈으로 대체해 가는 과정서 많은 불이익을 감수하면서도 그는 정리를 거듭했다.
그로부터 한 달 후, IMF라는 단군 이래 최대 경제위기가 도래했다. 온 나라가 큰 혼란에 빠졌지만 P시의 기업체는 끄떡없었다. 만약 제2 금융권의 돈을 쓰고 있었다면 그는 엄청난 타격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할아버지 영가의 가르침대로 빨리 부채를 정리한 결과, 그는 흔들림이 없었던 것이다.
자신이 원하는 바를 얻고자 필자를 순수하게 믿고 따라주는 P씨의 회사가 늘 탄탄하게 성장하길 바란다. IMF 시대에 이런 회사가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큰 위안이 된다.

떠나야 할 때 갈 수 있도록

얼마 전 남편을 잃었다는 N 여인의 핼쑥한 얼굴은 슬픔으로 가득했다. 굳이 3년상을 치르겠다 했다. 눈을 내리깐 채 얘기하는 부인을 마주하니 ‘생전에 남편 사랑을 얼마나 많이 받고 또 얼마나 남편을 사랑했으면 그럴까’하는 마음에 가슴이 저며왔다.
정성껏 구명시식을 올려줬다. 하지만 남편 영혼은 그게 아니었다. ‘제발 나를 풀어 주시오. 이제는 이승을 떠나고 싶소.’ 이게 웬일인가. 남편은 법 없이도 살 수 있을 만큼 착한 사람이었다. 가정에 충실하고 사회생활도 잘하는 이였다. 그런데 호사다마랄까, 그 착한 남편이 그만 바람이 나버린 것이다. 부인의 마음은 말 그대로 찢어지는 듯했다.
얼마 후 정신을 차린 남편이 가정으로 돌아오긴 했지만 남편에 대한 배신감으로 부인은 견딜 수 없었다. 그 때부터 부인은 남편을 정신적으로 학대하기 시작했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게 가정을 유지했지만 부인의 복수심은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남편 구박으로 이어졌다. 그러다 남편이 갑자기 교통사고로 죽은 것이다.
부인은 너무도 후회스러웠다. 그렇게 일찍 세상을 뜰 남편인 줄도 모르고 용서는커녕 오히려 학대했다니…. 그래서 일종의 보상심리에서 3년상을 결심한 것이었다.
조상들은 어버이 무덤 옆에서 3년간 시묘했다. 왜 하필 3년일까. 사람은 만 3세가 돼야 조그맣지만 제대로 된 ‘인간’이 된다. 따라서 돌아가신 부모 옆에서 3년간 예를 갖추는 것은 제대로 된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한 준비를 하는 것이 된다. 하지만 영혼들을 천도하면서 보면 이러한 행위는 살아있는 자의 집착에 불과함을 절감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나쁜 범죄를 말할 때 흔히 살인이나 강도 강간 등을 꼽는다. 그러나
더욱 나쁜 짓은 남의 갈 길을 가로막는 것이다. 부인이 남편 영혼을 위해 3년상을 치르겠다는 것을 남편 영혼의 처지에서 보면 영혼의 천도를 그 세월만큼 가로막은 행위라 할 수 있다. 더욱이 남편 생전에 구박했다는 보상심리에서 ‘의무적으로’ 3년상을 하겠다는 부인의 마음은 집착이다. 자신의 욕심으로 영혼 천도를 막은 ‘무척’이나 제 욕심만 챙기는 행위인 것이다. 무척(無斥)이란 ‘척을 짓지 않는다’, 즉 풀어준다는 의미다. 불교의 방생도 사람에게 잡힌 생명체를 놓아 살려주는 행위다. 결국 부인은 남편 영혼을 향한 집착을 끊고 구명시식을 통해 영혼을 천도해 줬다. 남편이 영혼이 가벼운 마음으로 극락으로 떠났음은 물론이다.

영원한 사랑

사랑은 영원한 것. 죽음조차도 사랑하는 이들을 갈라놓을 수 없다. 구명시식을 통해 다시 한번 이 진리를 깨달았다.
여든 두 살의 M 할머니.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할머니는 여의사 출신이다. 몇 해전 작고한 부군과 함께 부부의사로 명망 높은 분이었다. 남편 J 박사는 1년 반 가량 병상서 고생하다 눈을 감았다. 여사는 하고픈 말도 제대로 못한 채 돌아간 남편의 영혼이나마 만나 보고픈 마음에 필자를 찾아온 것이었다. 내심 반신반의하면서 마흔이 넘도록 출가하지 않은 셋째 딸을 따라온 할머니의 모습은 곱고 깨끗했다.
고향이 개성인 파순 할머니의 사랑맞이가 시작됐다. 딸의 결혼을 기원하면서 동시에 ‘영감의 그림자’라도 확인하고픈 심정으로 할머니는 숨소리조차 죽이며 구명시식 제단앞에 다소곳이 앉았다. 마침내 시간의 벽을 허물고 J박사가 나타났다. 그런데 그는 느닷없이 필자를 힐난했다.
“왜 딸애 이름으로 나를 불렀소? 큰아이도 있고 집사람도 있는데 말이오!”
필자는 모녀가 원하는 대로 딸의 이름으로 박사의 영혼을 청했다. 명문가 자손으로 유교 가풍속에 살았던 J 박사. 고려말 충신의 직계후손임을 자부하며 평생을 보낸 이다웠다.
끝내 부인 이름으로 바꾸고 나서 다시 박사와 대면했다. 그래도 박사는 심기가 편치 않은 듯했다.
“왜 내 수의에 끈을 매지 않았소?”
아내에게 던진 첫마디였다. 뒤에 안 사연이지만 박사가 운영하던 병원에서 염을 한 다음 관 뚜껑을 덮고 마무리하고 보니 수의 끈이 덩그러니 남아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아무려면 수의에 끈을 매지 않았으랴 싶었고 또 관을 다시 열 상황도 아니어서 그냥 내버려뒀다는 것이다. 깐깐한 박사는 바로 그 점을 질책한 것이다. 하지만 M 할머니는
“그분은 그런 분”이라며 오히려 죽어서도 호령하는 남편의 모습에 흐뭇한 표정이었다.
이어 박사는 큰아들이 외국에 나가 살며 며느리가 개신교 교인이라 시아버지 제사를 제대로 모시지 않는 것을 못마땅해 했다. 그러나 사위에게는 고맙다는 뜻을 전했다. 큰아들 대신 자신의 산소를 정성껏 보살피는 사위가 기특한 모양이었다. 박사는 생전에도 주변에 많은 벗들이 따랐다. 그래서 구명시식 현장으로도 친구 영가를 30여 명씩이나 몰고 나타났다.
의식이 마무리될 즈음, 노부인은 손수 쓴 편지를 남편의 영전에 올렸다. 딸이 편지를 읽어 내렸다. 구구절절 남편을 향한 애틋한 연모의 정이 배어있는 글이었다. 그토록 꼿꼿하던 J 박사는 가족에게 무궁한 애정을 보이며 필자에게도 고맙다고 한 뒤 마지막 예의를 깍듯이 차리고 작별을 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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